제1구역
콜슨 화이트헤드 지음, 김승욱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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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슨 화이트헤드의 2011년 작품. 내가 읽은 이이의 세 번째 책. <니클의 소년들>과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가 다른 소설이었듯이 <제1 구역>은 앞에 읽은 두 권과는 완전히 다른 작품이었다. 달라도 너무 달라서 과연 같은 작가가 쓴 작품이 맞는지 의아스러울 정도로. 이제 24년이 흐른 21세기에 퓰리처 상을 두 번 받은 유일한 소설가인 화이트헤드는 작품마다 다른 주제와 스타일을 시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는 것까지는 알고 있었지만 설마 “좀비” 소설을 쓸 줄은, 생각 못했다. 태생적으로 좀비 같은 비정상 괴물이 출몰하는 소설, 영화 기타 작품을 혐오하는 터, 동양의 강시는 귀엽기라도 했지만, 과연 내가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을까, 책의 초반을 읽는 내내 의심스러웠다. 실제로 앞부분에서는 책을 덮기 바로 전까지 여러 번 가기도 했다. 이 책은 좀비 무리와 대항하는 디스토피아적 미래 소설이다.

  그러나 결국 끝까지 다 읽었다. 얼굴을 찡그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하여간 한 글자도 빼지 않고 끝까지. 화이트헤드가 작품을 쓴 2011년에는 펜데믹 이전이다. 그라운드제로 이후 10년이고. 미국, 특히 뉴욕 맨해튼 토박이인 콜슨 화이트헤드의 경우 그라운드제로의 경험이 생생하게 박여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작가는 당시 미국의 정치, 경제, 사회 전반, 그리고 아무리 세계최대도시 뉴욕이라 할지라도 일방적으로 가하는 폭력 앞에서는 무방비로 당할 수밖에 없다는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터. 이런 상념은 인간에 한 종의 바이러스를 만들어 냈고, 인간을 숙주로 해서 최초의 한 명을 워킹데드, 좀비로 만들어버렸으며, 그렇게 만들어진 최초의 좀비는 눈에 띄는 사람의 목이나, 팔뚝이나, 다리, 옆구리에서 야구공 하나만큼의 살점을 뜯어내 먹는 것으로 바이러스를 전염시키게 했다. 하지만 2024년에 책을 읽는 독자는 몇 년 이어진 펜데믹을 거치는 바람에 ‘바이러스’라는 단어 하나만 들어도 양쪽 이마에서 알루미늄 빛을 발하는 촉각이 솟아나와 새삼스럽게 소름이 끼치게 만들거나, ‘또 바이러스 이야기야?’ 조금은 지겨운 생각이 들게 만든다. 어쨌거나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던 독자의 개인적 경험까지 보태져, 독자가 작가보다 더 다양하게 책을 읽을 수 있는 아이러니가 만들어진다는 이야기이니, 이런 면에서는 흥미롭기까지 하다.


  작품의 주인공은 삼인칭 대명사 ‘그’로 불리는 남자다. 어려서 로이드 삼촌을 좋아했다. 삼촌은 뉴욕 맨해튼 다운타운(남쪽) 라피엣 거리의 강화유리로 벽을 장식한 아파트 건물의 19층에 살았다. ‘그’는 삼촌을 좋아했다. 롤 모델일 정도로. 수시로 애인이 바뀌고, 애인들은 하나같이 자기가 ‘그’의 첫번째 숙모가 되기 희망했지만 절대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삼촌을 집을 최신식으로 꾸몄다. 벽 한 면을 다 가리는 초박형 TV가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고, 최신식 오디오/비디오 장치가 여덟 장소에 비밀리에 숨겨진 스피커를 통해 장르를 불문한 음악이 쏟아져 내려왔지만, ‘그’는 창문을 통해 내려다보이는 허드슨 강과 해변 그리고 다른 마천루를 바라보는 것이 그렇게 좋았다. 나도 이렇게 살고 말리라.

  ‘그’는 전형적인 B학점 삶을 살았다. 전혀 돋보이지 않지만 잘 하는 축에 들고, (살면서 계속 이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그냥 저냥 어떤 상태라도 적응해 중간 이상 정도로 생존하는 데 특화되었다고 스스로도 인정하는 터무니없는 자신감이 있는 청년. 나는 죽을 수도 없을 거야. 어떤 경우라도 살 방법이 눈에 뜨일 테니까 말이지. 정말 이런 유형의 인간이 있다. 특출나지 않기 때문에 미움도 받지 않고, 그렇다고 크게 칭찬받는 법도 없는데 끈질긴 사람. 화이트헤드가 좋아하는 인간형이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또 별다른 생각없이, 아버지의 권유도 있고 하니, 6년을 목표로 잡고 법학을 공부한다. 공부하면서 여기 저기 회사에 인턴으로 들어가 경험도 쌓고. 만일 바이러스가 아니었으면 준비중인 법률가 시험 역시 B 정도의 성적으로 무난히 통과해 변호사가 되어 넥타이를 맨 수트 차림으로 맨해튼의 사무 건물에서 B 학점 정도의 업무수행능력 평가를 받으며 지내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렇게 살 줄 알았다. 시작은 비록 부모님 집 지하실을 개축한 자기 숙소이지만 B학점 정도의 능력있는 변호사를 하며 자산을 모으면 언젠가는 로이드 삼촌처럼 다운타운의 고층 아파트에서 살 날도 오리라.

  졸업이 가까워졌을 때 친구 카일과 함께 작은 도박을 하며 즐기기 위해 애틀랜틱시티에 가서 실컷 놀고 돌아오던 날의 교통체증. 이때가 바이러스의 시작쯤이었을 것이다. 트래픽 잼에 걸려 밤늦게 집에 도착한 ‘그’는 부모를 깨우지 않기 위하여 살금살금 걸어 자기의 ‘휴게실방’으로 들어갔다. 지금쯤이면 부모는 2층 디지털비디오 플레이어 앞에서 반쯤 졸고 있을 것이라고 추측해 잠시 시간을 더 보내다가 ‘그’는 결국 애틀랜틱시티에서 딴 돈을 자랑하고 싶어 계단을 올라간다. ‘그’는 여섯 살 때던가, 어려서 기척없이 부모의 방문을 연 적이 있었고, 그래서 부모의 침대 위 행위를 목격한 적이 있어서 이날도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방문을 조심스레 열자 예전에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그러했듯, 어머니가 누운 아버지 옆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으니, 아버지의 갈라진 복막 속에서 꺼낸 창자 한 조각을 홀린 듯이 열정적으로 갉아먹고 있었던 거였다. 아버지는 이미 죽었고, 어머니는 바이러스의 침공을 받아 속칭 ‘해골’ 또는 ‘망령’의 상태가 되어 있었던 것.

  ‘그’는 당장 집에서 도망나와 벌판, 시골지역으로 탈출해 목숨을 유지했다. 당연히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맞닥뜨렸지만 그때마다 B학점의 생존본능과 행운을 만나 환난을 피해갈 수 있었다. 이런 에피소드는 책에서 재미있게 묘사하지만 그걸 여기에 옮기면 나중에 읽을 독자의 재미를 떨어뜨릴 것 같다. 이 중에서도 마지막 거의 잡혀서 게걸스런 해골들의 저녁식사가 되든지 자신도 해골의 일원이 될 절체절명, 위기일발의 순간, 버펄로, 라고 부르는 임시군사정부의 군대에 의하여 구출되고, ‘그’는 생존자들이 만든 정착캠프 ‘행복한 땅’에 잠깐 머물다가 민간인 지원자들로 구성된 비전통적 부대인 수색대에 들어간다. 여기서 세 명으로 이루어진 오메가 팀에 합류했으니, 팀장 케이틀린, 팀원 게리와 ‘그’.

  이들이 초기에 맡았던 임무 가운데 꽉 막힌 I-95번 도로를 순찰하라는 것이 있었다. 차량들은 다 정차 상태이고, 차 안에 든 사람처럼 보이는 것들은 시체 아니면 차량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해골, 좀비들이었다. 임무는 좀비가 있으면 머리통을 쏘아 죽이고, 차량을 도로 옆으로 치워 이동로를 확보하는 것. 비교적 간단한 임무였다. 하지만 교량이 나왔다. 교량에 갓길이 없어 작업이 한층 어려워진다. 그곳에 세워져 있는 유개 탑차. ‘그’를 포함한 팀원들은 (당시엔 지금 팀원들이 아니었다) 똑 같은 매뉴얼에 따라 탑차를 개방했고, 바로 그 순간 탑차 안에서 탈출하지 못했던 수십 명의 좀비들이 한꺼번에 쏟아졌으며 대원들이 그것들을 향해 총을 쏘아댔지만 역부족이라 교량 아래 강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은 살 수 있다는 확실하게 무모한 생각에 사로잡혀 뛰어내리는 대신 승합차 꼭대기로 올라가 단신으로 좀비 수십 마리를 다 해치워버렸다.

  나중에 팀원이, 하마터면 죽을 뻔했는데 왜 뛰어내리지 않느냐 물었고, ‘그’는 수영을 할 줄 모른다고 고백했다. 여기저기서 폭소를 터뜨리며 이 순간부터 ‘그’를 마크 스피츠로 부르는 것으로 결정해버렸다. 그래서 이 다음부터 주인공의 이름이 마크 스피츠가 된다. 마크 스피츠는, 나는 아직 그의 콧수염  난 모습을 기억하는데, 검은 9월단의 테러로 크게 흠집이 난 뮌헨 올림픽에 출전한 미국의 수영선수로 최초의 7관왕, 금메달 일곱개를 딴 영웅이다. ‘그’가 수영을 못하니, 수영 챔피언, 영웅의 이름을 별명으로 붙여준 것.


  버펄로는 뉴욕 맨해튼에 콘크리트 벽을 설치하고 강철로 만든 조임쇠로 연결해 튼튼한 방벽을 마련했다. 이름하여 1구역. 버벌포의 해병대가 진입해 도심 광장에서 큰 소리로 해골들을 부르니, 해골 입장에서는 만찬 초대로 여겨 곳곳에 흩어져 있던 맨해튼의 거의 모든 해골이 광장에 집결했고, 군대는 수월하게 이들을 몰살해버렸다. 이제 도심에는 거의 해골이 없어진 상태. 이곳에 민간인 지원자들로 구성된 수색대가 들어와 열리지 않아 채 밖으로 나오지 못한 좀비들과 붙박이 망령들을 해치우는 임무를 맡는다. 좀비/해골은 익히 아실 것. 붙박이 망령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마네킹처럼 자신이 죽은 상태인지도 모르고 자신이 몰두하고 있던 작업을 여전히 계속하기 위하여 근처에 붙박이처럼 서성대고 있는 감염자들. 물론 이들도 이미 죽은 상태인 건 마찬가지다. 수색대는 좀비들을 해치우기도 하지만 주요 타격 대상이 이 붙박이 망령이다.

  이제 마크 스피츠가 된 ‘그’는 훗날, 어느 시점부터 자기가 살고 싶어했던 맨해튼의 인적 없는 거리를 소총을 맨 채 서성이며 지금 자기가 소멸시키고 있는 해골과 붙박이 망령의 정체에 대해 생각한다. 8학년 시절 과학 실험시간의 파트너, 간이 마트 계산원, 대학 3학년 봄학기 시절의 여자친구, 그리고 삼촌. 은행원, 지하철 철도원, 극장 매표소 직원, 배추가게 아저씨.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마크 스피츠 옆에서 자연스러운 생활을 영위하던 그냥 보통의 사람들과 또 부르주아들과 약간의 범죄자들과, 노숙인도 있을 수 있고, 하여간 같은 시대를 산 너와 나 같은 인간이었던 존재들. 나는 작가의 이런 사색이 독자로 하여금 작가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박제된 은유’로부터의 해방을 요구하는 걸 아닐까 싶었다. 갑자기, 한 순간에 인간의 (뇌를 포함한)몸에 침투하여 이상 생명체로 탈바꿈하게 만드는, 바이러스라고 해도 좋고, 911테러 같은 난데없는 폭력이라 해도 괜찮으며, 보통의 생활인은 걱정해보지도 않았던 유동성 위기로 인한 파산일 수도 있지 않을까?

  콜슨 화이트헤드. 같은 좀비 소설을 써도, 글 좋고 훌륭한 사변을 요리할 줄 아는 작가가 쓰면 역시 결과물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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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10-03 04:1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별점 4는 아깝다. 그렇다고 5를 찍자니 과하고. 4.5 읎나?

stella.K 2024-10-03 10:15   좋아요 4 | URL
가끔 그런 책이 있긴하죠? 3개는 적고 4개 주자니 많고. ㅋ
이책 좋으셨나 봅니다. 작가마다 패턴이 있기 마련인데 이 작가는 능력이 탁월한가 봅니다. 혹시 또 그런 작가 있나요?

Falstaff 2024-10-03 11:18   좋아요 4 | URL
자주 있어요! ㅎㅎㅎ 3반, 4반... 딱 3,4,5 이렇게 시스템을 유지하는 것도 이유가 있겠지요 뭐. 좋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이이처럼 다양한 방면으로 글 쓰는 작가는 누가있나... 모르겠군요. 또 누가 있을꼬??
 
사는 이유
에이미 헴플 지음, 권승혁 옮김 / 이불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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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1년에 시카고에서 태어나 16세에 캘리포니아로 갔다가 70년대 중반에 뉴욕으로 이사했단다. 이 책은 헴플이 1985년에 펴낸 첫 작품집이라고 하니, 많은 작품이 캘리포니아를 무대로 하는 게 이해된다. 수많은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가르쳤고, 지금, (이렇게 이야기하자)최근에는 오스틴의 텍사스 대학에서 MFA, 예술분야 실기 석사과정을 가르치고 있단다. 단편 전문 작가.


  단편 전문이라서 그런지 열다섯 작품을 2백쪽도 되지 않는 분량에 때려 넣었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사이즈의 책이지만 그래도 한 페이지에 스물두 줄이 들어가게 편집했다. 아쉽게도 나는 며칠 전에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작품집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를 읽었다. 그래서 아직도 머리속에는 캘리포니아와 근방의 이곳저곳이 바글바글하다. 물론 브라우티건의 캘리포니아는 전쟁 시절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라서 헴플의 캘리포니아와는 많이 다르지만 하여간 그렇다.

  이 책은 읽어보라고 권유를 받은 후 곧바로 도서관 책 검색을 해서 관심도서에 등록을 해 놓았다가, 내가 다니는 집에서 백 미터 떨어진 도서관에는 없어서 상호대차 신청을 해 읽었다. 권유를 받고 정말로 읽은 터울이 너무 길어 권해주신 분께 미안한 마음도 들지만, 세상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하여간 그래서, 좋은 책이라는 기대가 컸던 것이 문제였을까? 영어 원문은 어쩐지 모르겠다. 역자 권승혁이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우리말로’ 책으로 낸 《사는 이유》는, 읽을 때는 문장이 섬세하고, 자연스럽고, 품위가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머리속이나 마음 속에 남은 작품은, 아쉽게도 한 편도 없다. 아무래도 에이미 헴플은 서사를 읽을 생각을 하면 마땅하지 않은 작가인 것 같다. “것 같다”라고 하는 건, 아닐 수도 있다, 짐작이다, 라는 의미이다. 그러면 문장이라도 머리/마음에 남아야 할 것 같은데, 그것도 별로 그렇지 않다.

  둘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하나는 원서로 읽어야 제 맛이 나는 작가. 둘은 내가 제대로 알 수 있는 수준의 작가가 아닌 것. 어떤 경우라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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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도회 이렌 네미롭스키 선집 1
이렌 네미롭스키 지음, 이상해 옮김 / 레모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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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렌 네미롭스키는 1903년 당시 러시아, 지금은 우크라이나의 키이우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기원전부터 고리대금업에 관한 한 세계 어떤 인종보다 뛰어난 자질을 보였던 유대인의 전통에 따라 부유한 은행가였지만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벌어지는 걸 보고 즉시 러시아를 탈출, 핀란드를 거쳐 파리에 정착했다. 당시 러시아제국의 영토에 살다가 그곳을 탈출한 유대인 가운데 제일 안타까운 사람들이 유럽에 정착한 이들이다. 차라리 팔레스타인이나 미국, 아니면 라틴 아메리카를 선택하지 하필이면 서유럽에 정착해 그 고생을 하느냐는 말이지. 물론 당시에 알았나, 몰랐겠지.

  파리로 온 이렌 네미롭스키는 소르본 대학을 다니며 글을 쓰다가, 1926년 스물세 살 때 미셸 엡스타인과 결혼했다. 엡스타인. 유대인 성씨다. 이렌의 아버지처럼 은행가였단다. 1929년에 맏딸 데니스를 낳은 건 좋았는데, 1937년, 이미 전 유럽에서 반유대주의가 팽배할 시점에 얼른 남북 아메리카 아무 곳이나 팔레스타인으로 뜨지 않고 둘째 딸 엘리자베스를 낳은 건 뭐람. 이 시점이 사실상 거의 마지막으로 유럽을 탈출할 수 있었던 기회였을 텐데. 아마 그때도 프랑스 정부가 옙스타인 가족에게 프랑스 국적 부여요청을 거부하고 있었을 걸? (맞다! 1938년에 국적 요구가 정식으로 거부당했다.) 1년 후인 1938년 독일 전역에서는 독일인들에 의한 유대인 린치 사건인 “수정의 밤”이 벌어지고, 또다시 1년이 지나면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그리고 1940년 6월 23일, 군복을 입은 아돌프 히틀러는 에펠탑을 배경으로 근사한 사진 한 장을 박으며, 이렌과 미셸 엡스타인의 인생은 사실상 종말을 고한다.

  실제로 이렌 네미롭스키는 유대교를 버리고 천주교로 개종을 하며, 스스로 유대인과 거리를 둔 듯한 글을 기고하는 등의 행위를 했음에도 프랑스인이 되는 것에 실패하고, 1942년 프랑스 비시 정부의 경찰에 의하여 유대인이라는 죄목으로 체포당해 아우슈비츠에서, 가스실이 아니라 발진티푸스로 죽는다. 남편 미셸 엡스타인은 파리 함락과 동시에 은행에서 해고당하고 아내 이렌이 죽은 몇 달 후 아우슈비츠에서 가스를 마시고 죽는다. 두 딸이 살아남아 아직 발표하지 않은 엄마의 작품을 1990년대 후반에 소개하는데, 남긴 것이 엄마의 일기인 줄 알고 존중하는 의미에서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니, 참.


  이 책은 네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대표작은 당연히 1929년에 발표한 <무도회>. 조금 헛갈리는데, 1929년에 소설이 아니라 소설을 각색한 영화 대본으로 먼저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1930년에 영화 <데이비드 골더>라는 제목으로 나왔고, 연극으로도 만들어 히트를 친 모양이다. 29년에 출판사 사장이 도대체 이 작품을 누가 쓴 것인지 몰라 신문광고까지 했지만 정작 이렌 네미롭스키는 첫아이 데니스를 낳기 위해 산과에서 용을 쓰고 있었다고. 그라셋 출판사는 겨우 스물여섯 살의 여성이 이렇게 강력한 작품을 썼다는 사실에 놀랐었다고, 위키피디아에 나와 있다.

  <무도회>가 재미있는 작품이라는 데에는 이견의 없다. 파리의 은행 문 앞에 푸른 제복을 입고 서서 고객이 들어올 때마다 문을 열어주는 문지기였다가, 고용주의 눈에 띄어 직원이 되었던 알프레드 캉프 씨. 그는 상사의 타자수로 일하던 로진 양과 연애를 해, 둘 사이에 외동딸 앙투아네트가 태어나기 바로 전 북통같이 부른 배에 웨딩드레스를 입힌 채 결혼을 했다. 이들은 파리의 허름한 파바르 가의 작은 집에서 살았다. 그러나 캉프 씨가 다른 건 몰라도 돈복이 있는 건 확실해서, 2년 전인 1926년에 프랑화와 영국 파운드화가 널뛰기를 하는 걸 유심히 눈 여겨 보더니 자기 전 재산을 몰빵, 대박, 대박 중에서도 초대박을 쳤고, 원래 되는 인간은 하는 일 족족 되는 게 보통이어서, 이어지는 투기성 투자도 더블, 더블-더블의 연속상영, 남은 생애 동안 아내 손끝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비단신에 흙 한 번 밟지 않고 살 수 있는, 부르주아의 일원으로 우뚝 서게 됐다. 근데 결혼한 지 14년에 딸 앙투아네트 하나밖에 없는 걸 보니 우뚝 세운 건 돈 하나밖에 없었던 모양이지?

  전형적인 졸부. 이집 부모만큼 허세, 허영 덩어리로 과시하기 좋아하고, 크게 소리쳐 위압하기 좋아하는 인종을 우리도 많이 봤을 걸? 단시간에 급속도로 돈이 쏟아져 천민자본주의 시절을 충분히 경험했고, 어쩌면 아직도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지 모르니까 말이지. 알프레드 캉프는 금융업 권위자답게 부르주아 사회의 일원으로 도장이 박히기 원하고, 로진 캉프는 하층계급 출신이라 주로 공, 후, 백, 자, 남작과 그 부인들과의 교류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싶다. 그리하여 의기투합한 부부는 무지막지한 돈을 들여 크게 무도회를 열기로 하는데, 가장 큰 문제가 자기네 집 안에 있는 걸 몰랐다. 열네 살 먹어 사춘기를 맞은 딸 앙투아네트. 평소 부모한테 별 애정은커녕 제대로 된 관심도 못 받은 채 사춘기를 맞아 특유의 반항심과 적대감으로 똘똘 뭉친 웬수. 그리하여 2백명을 예상한 큰 규모의 무도회에 한 바탕 거친 바람이 몰아치니, 그건 알려드릴 수 없지.


  하지만 내가 제일 재미있게 읽은 작품은 마지막 네 번째 읽은 <그날 밤>이었다.

  여자와 남자는 스무 살에 만나서 이제 마흔다섯. 서로 사랑했지만 행복하게 살지는 못한 부부. 둘 다 격렬한 성격에 질투심으로 가득했고, 상대방에 대해 체념하거나 부드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니 이들이 어떻게 지냈겠어, 25년 간을. 치열하게 싸우고나서 열정적이고 감미로운 화해로 끝나곤 하는 폭풍우의 연속이었겠지. 세월이 흘러 한 시절 대단한 미인이었던 여자는 화장을 해도 깊은 주름이나 씁쓸한 표정을 가릴 수 없었다. 애지중지했지만 원하지는 않았던 딸을 느지막이 낳은 다음엔 몸도 무거워지고 틀어져버렸다. 그러나 남자는 여전히 젊어 보였다. 이들은 프랑스에 정착하지 못해 모로코로 떠났고, 건축가였던 남자는 나이가 든 후에야 행운이 따라 이제 거의 부자가 됐다. 그러나 이 순간, 남자는 젊은 애인과 함께 달아나버렸고, 모로코에서 혼자 살 수 없었던 여자는 딸과 함께 프랑스로 돌아와, 상트르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 선생으로 일하는 동생 곁에서 살기 위해 눈까지 내리는 작은 역에서 내렸다. 이렇게 작품은 시작하고, 아직 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딸이 화자인 ‘나’이다.

  여자의 동생, 그러니까 ‘나’의 이모 알베르트의 집에 도착하니 마을 우체국의 직원인 블랑슈 아주머니, 다른 곳에서 역시 학교 교사를 하고 있으며 알베르트 이모와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기 위해 와 있는 마르셀 아주머니가 맞아 주었다. 12월 23일이었다.

  알베르트 이모는 여태 독신이다. 홀로 고독하지만 행복하고, 부족한 것이 전혀 없어 보이는 충만한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세 여인 앞에서 자신의 고통, 사랑의 잘못된 결과와 ‘나’일 수밖에 없는 잘못된 과실에 대하여 호소하는 엄마.

  결론은? 절대 밝히지 않겠다. 읽어가면서 그렇게 끝나겠지, 기대한 대로 되지만, 정말 그런 결말을 맞을 때, 독자는 복잡한 심정이 될 수도 있다. 멋진 단편이다. 오래 기억에 남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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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파네스 희극전집 2
아리스토파네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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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전집 1》을 읽고 꽤 시간이… 지났나? 이제 보니 딱 2년 됐다. 기억을 더듬어보자. 아리스토파네스는 당대의 가장 적극적인 보수파 진영에서도 제일 앞에 섰던 인물이다. 보수? 보수적으로 생활하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한 번도 보수 쪽에 가깝다고 여겨본 적 없는 말로만 진보인 사람들은, 아리스토파네스가 보수파 대장이었다고 하니까 그냥 이 대목에서 젓가락 놓고/던지고 싶겠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조금만 더 들어 보시라. 아리스토파네스의 반대편에 섰던 인간들은 당시 스파르타와 대가리 터지게 싸우던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계속 하자, 아테네가 초토화되고 벌판이 황폐하여 살기가 아무리 퍽퍽해지더라도 아테네의 가오가 있지 어떻게 저 깡촌놈들 스파르타한테 아홉 마리의 황소 털 가운데 한 오라기라 하더라도 양보할 수 있겠느냐, 이렇게 침을 튀던 주전파인 클레온, 그리고 (아리스토파네스가 보기에) 아테네의 청년들을 모아 주둥이질만 열심이고, 늙은이 주제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진짜로 참전했다가 적들이 쳐들어오는 순간 사방에 먼지가 자욱한 틈을 타 과감하게 뒤로 돌아 돌격한 소크라테스다. 물론 이건 사실이 아니고 브레히트의 책에 그렇게 나와 있다는 건데 하여간 아리스토파네스는 소크라테스를 젊은이들을 교언영색한 궤변론자이자 호전적인 늙은이라고 생각해 무지하게 싫어했다. 그리고 한 명 더. 그리스 신화 혹은 전설이나 이야기에 나오는 장면을 자기 마음대로, 허무맹랑하게 자기 마음대로 바꾸어 영 앞뒤가 맞지 않는 말도 안 되는 엉터리 비극을 만든, 만들었다고 생각한 에우리피데스. 아리스토파네스는 이들을 극혐했다.

  아무리 위대한 문명을 누렸다지만 당장 도시가 망해가고 있는 상황에서 자기들의 현 상태, 좀 잘난 척해서 말하자면 SWAT 분석도 하지 않고 그냥 나가 싸우자고 주장하는 이들이 당시엔 진보였으며, 아리스토파네스처럼 당장 도시가 처한 꼬라지를 제대로 이해해서 조금 양보하는 한이 있더라도 화평 조약을 맺자고 주장했던 진영이 보수였다. 만일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내가 오독한 게 아니라 정말 그랬다면, 불행하게 21세기가 아니라 기원전 5세기에 살고 있는 소위 지식인은 보수가 옳았을까, 진보가 옳았을까? 당연히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는 스파르타가 우여곡절 끝에 이기기는 한다. 결과 아테네는 거의 폐허만 남고, 스파르트 역시 얻을 게 없어 쪽박을 차게 되어 옆에서 구경만 하던 테베가 그리스 연방의 짱을 먹게 된다. 궁금하다. 당신은 보수를 택했을까, 진보를 택했을까?

  아리스토파네스는 깡다구도 보통이 아니었던 것 같다. 정치가 클레온, 2022년 말에 타계한 천병희 선생은 이자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도 등장한다고 하는데 한 챕터의 대상이 아니라 페리클레스 편의 조연급으로 나오는 것 같기는 하지만, 펠레폰네소스 전쟁에서 전사하지 않았다면 아리스토파네스의 명을 확실히 짧게 해주었을 거 같은 인물이다. 아리스토파네스가 궤변론자로 단정한 소크라테스는 이미 플라톤이라는 걸출한 제자를 배출한 그리스의 철학자들 가운데서도 으뜸인 자였으며, 에우리피데스 역시 그리스 비극의 마지막 영광스러운 꽃을 피운 작가였다. 그러면 뭐해. 아리스토파네스는 이들 모두 자기가 쓴 희극작품에 “실명”으로 등장시켜 만인의 비웃음을 사게 만들었다.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전집 1》에선 클레온과 소크라테스가 혼이 나더니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전집 2》에선 에우리피데스의 가오에 숱한 스크래치가 간다. 그러니 이이 강단이 보통이겠느냐고. 그렇다는 얘기다. 심지어 오늘 소개할 작품 속에 에우리피데스가 괜히 등장해 창피 당하는 작품을 고르지도 않았다. 그냥 그렇다는 거다.


  다섯 편 가운데 제일 앞에 실린 <뤼시스트라테>를 소개한다.

  이 희극의 배경은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즉 펠레폰네소스 전쟁 시기이다. 구체적인 전황 같은 건 소개하지 않겠다. 혹시 알고 싶으신 분은 투퀴디데스가 쓴 <펠레폰네소스 전쟁사> 말고 현대 미국인 사학자 도널드 케이건이 쓴 동명의 전쟁사를 읽어 보시는 편이 낫다. 그것도 훨씬 낫다. 그것보다는 이제 전쟁의 국면이 변해 스파르타가 난데없이 페르시아와 동맹을 맺어 아테네는 비록 오늘 내일로 도시가 망가지지는 않겠지만 상당히 불리한 처지에 빠지게 됐고, 이를 눈치 챈 동맹국들도 슬금슬금 아직껏 맺고 있던 인연의 줄을 놓으려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없는 클레온 일당들은 이래봬도 우리가 아네나이여, 왜들 이려, 하면서 아무리 큰 위험을 당하더라도 굴복할 수 없다,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기를 바란다, 주접을 떨고 있었다.

  아리스토파네스는 <뤼시스트라테>를 펠레폰네소스 전쟁이 막바지에 다른 기원전 411년에 썼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BC431년에 발발하여 10년 동안 대가리 터지게 싸우다가 BC421년부터 8년간 휴전한다. 그러니까 기원전 411년이면 두 도시가 쉬는 새 바나나 먹고, 탄수화물 먹고, 단백질 음료 마시고 원기회복해 다시 싸우기 시작해 3년이 지났을 때였다. 스파르타보다 육군은 좀 처지지만 해군이 더 막강하다고 오판해 시칠리아로 짓쳐들어갔다가 쌍코피를 흘릴 때였다. 그러니 육군은 원래 안 돼, 해군도 깨져, 이제 아리스토파네스를 비롯한 보수파들은 평화조약을 맺고 싶었을 터. 그는 이 판국에 절묘한 풍자를 해버리니, 그리스 남자들은 전부 전쟁에 환장을 한 미친 것들인 반면, 여성들이 정신을 차려 하루속히 평화조약을 체결해 일상을 회복해야 한다고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고 가정했다. 근데 특히 전쟁 중에 여성이 무슨 힘이 있어서 평화조약을 맺게 만드나 그래?


  주인공 뤼시스트라테는 사고의 폭이 대단히 넓은 여인이다. 이이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대로 전쟁을 계속하면 그리스의 모든 남자들이 거덜이 날 것이며, 모든 여자들은 과부가 될 거 같다. 땅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을 찾아볼 수 없고, 가게에는 팔고 살 물건도 없으며 팔고 살 사람도 없을 거 같다. 그리하여 조속히 평화조약을 맺어 합당한 보상금을 서로 주고받아 전쟁을 끝내야 마땅한데, 남자들은 이미 맛이 가서 아무리 이야기해봐야 소용이 없으니 이걸 어쩐다?

  전쟁을 하는 데 가장 중요한 건 역시 돈이다. 돈이 있어야 무기를 사고, 갑옷을 사고, 방패도 만든다. 돈이 있어야 병사를 먹이고, 입히고, 재울 텐트를 산다. 그래서 전쟁을 반대하는 여성연대가 해야 할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아테네, 아테나이의 돈줄을 말리는 일. 이걸 위하여 파르테논 신전에 적립해둔 전쟁 기금을 못 쓰게 하는 것. 그리고 남자들의 참전을 막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남편, 남친과의 교접을 거부하는 섹스 스트라이크였다. 하나 더. 신전 속의 전쟁기금과 섹스 스트라이크는 아테나이 한 군데서만 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면 뤼시스트라테의 행위는 영락없이 매국적인 일이 될 터. 이를 제대로 아는 뤼시스트라테는 스파르타와 테베의 여성 대표를 초청하여 자신의 뜻을 설명하고, 몇 날 며칠 동시에 신전을 점령하고 남편/남친을 침대 위에 못 올라오게 한다고 합의한다. 그쪽 도시에서도 남자들은 여전히 전쟁을 하자고 난리중이니까.

  그래도 순서가 있어서, 뤼시스트라테는 먼저 아테나이의 여성들에게 맹세를 시킨다. 이들이 신 앞에서 포도주를 들고 행하는 맹세는 동양에서 흔히 하는 약속과 다르다. 맹세를 어기면 죽음이나 죽음보다 지독한 처벌을 받아 마땅한 결의다. 뤼시스트라테는 맹세를 강요하고 여인들은 기꺼이 이 말을 반복해 외침으로 맹세를 받아들인다. 이렇게:


  애인이든 남편이든 남자는 어느 누구도…

  꼿꼿이 세우고 내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집에서 나는 숫처녀처럼 지내겠습니다.

  샤프란 색 가운을 입고 화장을 한 채

  남편이 나를 몹시 열망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결코 자진해서 내 남편의 요구에 응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싫다는데도 그이가 완력으로 강요한다면…

  나는 재미없게 해주고 요분질도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천장을 향하여 다리도 들지 않겠습니다.

  나는 치즈 강판에 새겨진 암사자처럼 엉덩이를 들고 웅크리지도 않겠습니다.


  이후 등장하는 남자들은, 그리스 고전 희극에서는 대개 그렇다고 하는 바와 같이 커다란 음경이 덜렁거리는 옷을 입고 무대에 올라 음란한 말만 주고받는다.

  여태까지 읽은 그리스 작품들은 올림포스에서 신주 넥타르를 홀짝거리는 별의 별 신들과 그들과 인간 사이에 태어난 자손, 즉 영웅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신과 영웅과 왕들의 리그. 그게 그리스 비극이었던 반면, 위에서 뤼시스트라테의 맹세에서 보듯이 아리스토파네스는 무대를 올림포스 신전과 왕궁, 영웅들의 전쟁터에서 난잡하게 보이는 인간세상으로 끌어내렸다. 비록 등장인물은 여전히 신과 영웅들의 이야기를 차용해 자신이 하고 싶은 대사를 만들지만 보다 사실적인 목적과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하지 않았나 싶다. 물론 정말로 펠레폰네소스 전쟁 당시에 여성들에 의한 섹스 스트라이크가 있었겠느냐만, 이런 풍자와 냉소를 가득 담을 수 있었다는 것만 가지고도 아리스토파네스는 내게 특별한 작가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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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9-27 0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이렌 네미롭스키, 《무도회》
화요일. 에이미 헴플, 《사는 이유》
목요일. 콜슨 화이트헤드, <제1 구역>
금요일. 레이철 커크스, <브래드쇼 가족 변주곡>
 
슈니츨러 작품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28
아르투어 슈니츨러 지음, 신동화 옮김 / 민음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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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2년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레오폴트슈타츠에서 출생한 유대계 (단편)소설가 겸 극작가. 그리고 놀랍게도 의사다. 1885년 비엔나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종합병원에서 의사의 길을 갔으나, 글쓰기에 전념하기 위해 돈 잘 버는 의사의 길을 포기했다. 그러려면 미쳤다고 힘든 의학공부를 했는지 참. 하긴 자기가 싫으면 평양 감사도 안 한다니 다 지 팔자이긴 하다. 의사 집안에서 태어난 죄로 의학을 공부했지만 넘쳐흐르는 창작의 기질을 감추지 못해 나름대로 불행했던 작가. 그러나 유대인이 1931년에 죽었으면, 그것도 오스트리아에서 그랬다면, 아이고, 그것 하나 가지고도 복 받았던 거 아니야? 이이가 서쪽 스위스 건너의 프랑스에서 명성을 떨친 인상주의 음악가 클로드 드뷔시와 동갑인데, 그래서 그런지 작품의 내용도 슬쩍 드뷔시의 주제와 비슷하게 다분히 성적이다. 요즘 한자어로 性的이라 쓰면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며? 그래서 굳이 번역해드리자면, sexual 하다는 뜻. 정말? 그렇다. 내가 처음 읽은 슈니츨러가 《라이겐》이었는데, 줄줄이 짝을 바꾸면서 추는 무도곡을 일컫는 단어이지만 동시에 줄줄이 엮이는 열 쌍의 성적 대상에 관한 소설이었다. 워째? 좀 혹 하셔?


  이번에 민음사에서 낸 《슈니츨러 작품선》에는 세 편의 단편과 두 편의 노벨레 혹은 중편소설을 실었다. 두 중편은 내가 그동안 틈틈이 어떤 책을 읽을까 나름대로 뇌를 쓴 <엘제 양> 또는 <엘제 아씨>와 <꿈의 노벨레>라서 하마터면 두 권의 책을 살 뻔했는데, 물론 두서너 해 전에 그랬다는 말이고 은퇴 이후엔 책을 거의 사지 않아 고려 대상이 되지도 않았지만, 그게 한 권의 책에 모두 들어 있어서 비록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을 해 읽었더라도 그간 기다려온 것이 참 보람찼다. 살다 보니 별 게 다 보람차다. 인생이 다 그렇지 뭐.

  거의 모든 작품이 이성 사이의 야릇한 끌림과, 흠흠, 독자의 이해를 바라는 바, 꼴림을 숨기지 않는다. 이는 슈니츨러의 비엔나 의과대학 6년 선배이기도 하고 더구나 같은 유대인인 지기스문트슐로모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았거나, 아니면 우연히 그와 비슷한 성향을 갖게 되어 발현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하여간 프로이트도 슈니츨러의 작품을 읽고 깊이 공감하여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형제의 의를 갖자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나, 어쨌다나?

  읽어 보시라. 다섯 작품 모두 주제는 섹스와 죽음이다. 하긴 세상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제일 궁금하고, 무엇보다 유혹적인 주제가 섹스와 죽음이기는 하다. 이 둘에 비하면 어느 주제가 있어서 발꿈치에나 따라 오겠느냐고. 게다가 일찌감치 섹스와 죽음에 관한 한 흥미롭게 천착한 슈니츨러이니 말이지.

  다 재미있다. 그간 <엘제 양>과 <꿈의 노벨레>를 과하게 기대했는지는 모르기는 하다. 그래서 읽은 다음 팍, 느낀 건, 재미는 있으나 낡았다는 거. 당시에는 프로이트 박사가 의형제를 맺자고 할 정도로 (말이 그렇다는 거다, 설마 믿지는 않으실 테지?) 센세이셔널했겠지만, 그럴 수도 있었겠으나, 이야기를 억지로 끌고 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어, 진심인데, 나도 아쉬웠다.

  독후감을 더 써서 괜히 고 슈니츨러(편히 쉬기를…)의 영혼에 불편을 안겨주지 말고 이쯤에서 끝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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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9-26 10: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별로 혹 안하는데요?ㅎㅎ
역시 슈니츨러는 우리나라에선 벼로 대우를 못 받는가 봅니다. 저는 읽는다면 죽은 자는 말이없다 정도만 읽어야할 것 같네요. ㅋ

Falstaff 2024-09-26 16:43   좋아요 1 | URL
에휴... 독일(어권 소설)의 낭만주의 끝장을 보는 거 같아서 말입죠. ㅋㅋㅋ

coolcat329 2024-09-26 1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슈니츨러 딱 두 편 읽어봤는데 더는 읽고 싶지 않더라구요. 말씀하신 그 ‘야릇한‘ 느낌이 별로더라구요. 낡은 느낌! 도 동감입니다.

Falstaff 2024-09-26 17:41   좋아요 1 | URL
알라딘 접속에 문제가.... ㅎㅎㅎ
슈니츨러를 독일 소설의 모더니즘으로 보기엔 무리고, 그러면 천생 낭만주의? 자연주의? 하여간 무슨 주의일 텐데요, 우짯든지간에 동시대 다른 나라 작품하고 비하면 (이렇게 말하다가 돌 맞는 지 모르겠지만 말씀입죠) 좀, 아니, 많이 후져요.

moonnight 2024-09-26 2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라이겐을 분명 읽었으나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네요. 새삼스럽지도 않지만ㅎㅎㅠ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읽기는 하겠지만 이럴거면 뭐하러 읽나 회의감도 드는..ㅠㅠ;;

Falstaff 2024-09-27 05:38   좋아요 1 | URL
아휴, 뭐 그런 책이 어디 한두 권이겠습니까.
역경을 헤치고 끝까지 기억에 남는 책을 명작이라고 하는 거잖아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