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복
하인리히 만 지음, 남기철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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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인리히 만은 1871년에 독일 북부 뤼베크 자유시의 곡물상인이자 시의원 토마스 요한 하인리히 만과 브라질에서 온 마리아 루이사 다 실바 사이의 다섯 아이 가운데 맏이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독일 혈통이 반, 포르투갈과 원주민 혈통이 각각 반의 반이었다. 맏이 하인리히는 엄마 쪽을 탁해 활달하고 감정적이었던 반면에 동생 토마스는 오리지널 독일 성향으로 무뚝뚝하고, 재미없고, 엄격하던 모양이다. 나중에 미국으로 건너가 다시 형제 상봉한 뒤로 토마스의 아들 클라우스 만을 비롯한 토마스의 자식들마저 아버지보다 다감하고 다정한 하인리히를 더 따랐다고 한다. 작품 성향도 완전히 다르다. 1929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토마스 만이야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읽기 위해서 조금의 인내가 필요한 상징과 아이러니, 심리묘사, 서사, 성서를 기본으로 한 작품을 주로 쓴 반면에, 내가 읽은 하인리히는 (<충복>을 포함해 <운라트 선생 또는 어느 폭군의 종말>과 <앙리 4세> 이렇게 세 작품밖에 안 되지만) 기성의 권력에 대한 비판을 해학 섞인 풍자로 엮어낸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이 형제들이 다 늦게 화해할 때까지 우애도 좋지 않았다고 한다.

  만 형제들의 사이를 멀어지게 한 첫 발자국을 이 소설 <충복 Der Untertan>이 찍는다. 1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에 쓴 <충복>은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 치하의 좌익 진영으로부터 열렬한 지지와 환호를 받는다. 작품 속에서 하인리히 만은 빌헬름 2세 치세의 민족주의와 황제정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동시에 말로는 자유주의를 주장하면서 고용주 (쁘티)부르주아로 살고 있는 변질된 자유주의한테도 서슴없이 손가락질을 날린다. 따라서 책 좀 읽겠다 마음먹은 독자들에게 큰 장벽으로 등장하는 <마의 산>에서 완쾌되지 않은 7년의 요양소 생활을 뿌리치고 1차 세계대전의 전장으로 달려가는 ‘우리의 주인공’ 한스 카스토르프에서 보듯, 초기에는 다분히 민족주의적 입장에 섰던 토마스와 뜻을 같이 할 수 없었을 터이다. 훗날 토마스는 자기 친형이 쓴 <충복>을 “국가적 중상모략”이니 “무자비하고 무자비한 유미주의” 작품이니 하고 내놓고 반대의견의 개진하기도 했다. 그러니 사이가 좋지 않을 수밖에. 형제간 싸움박질 하는 소리가 담장을 넘어가지 않게 해야지 이게 무슨 집안 망신이냐는 말이지. 그러나 걱정하지 마시라. 이들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에서 상봉했을 때, 둘 다 반전주의자요, 반 나치, 즉 반 민족주의적 성향으로 굳어졌고, 그래서 화해할 수 있었으니.


하인리히(왼쪽)과 토마스 만


  충복忠僕. 주인을 진심으로 섬기는 사내 종. 사전적 의미는 이렇지만 풍자적으로 쓰면 충복보다 충견忠犬, 주인을 진심으로 따르는 개와 비슷하다. 이 책의 주인공이자 하인리히 만이 제시한 충복의 전형은 네드치히 시의 제지공장 사장 헤슬링 씨의 맏이이자 외아들인 디데리히. 아버지 헤슬링 씨는 오래된 제지공장에서 수공예지를 만드는 공원 생활을 오래 하다가, 마지막 전쟁으로 불리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몸에 포탄 파편이 박힌 상태에서 돌아와, 이제는 늙어 공장 운영을 지속하기 힘든 사장으로부터 제지 기계를 구입해 창업을 했다. 아무리 19세기였다 해도 적수공권에서 시작해 가업을 이루어 유지하기 위해서 치밀한 사업가로 변모해야 했고, 만사가 불여튼튼, 매사 엄격하고 신중한 몸가짐을 일상화해야 했는데 이는 아내와 아들과 두 딸로 이루어진 가정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에 특히 아들을 훈육하기 위한 최선, 최고의 방법은 회초리였다. 헤슬링 사장 역시 사소한 잘못이라도 외아들 디데리히의 엉덩이에 가차없이 회초리를 날려 가뜩이나 몸이 약한 아이한테 제일 무서운 존재로 등극해버렸다. 그래서 그랬는지 아이는 공상을 좋아하고, 겁이 많고, 귓병을 자주 앓았다.

  엄마 헤슬링 부인은? 남편이자 아이의 아버지가 자주 회초리를 휘두르는 것을 보고, 음, 아빠가 저리 아이를 훈육하는데 엄마가 가만히 있으면 남들이 나더러 물러 빠진 엄마라고 할 지도 모르지, 분명이 이렇게 생각해, 타당한 일 없이 고의적으로 디데리히를 매질하기에 이르렀다. 디데리히 입장에서 아빠는 자기가 잘못한 것이 있어서 때리는데 엄마는 심심풀이 하기 위해 때리는 것 같아, 엄마에 대한 존경심을 도무지 느낄 수 없었다. 별로 생각이 없는 엄마. 심지어 나중에 디데리히가 베를린에서 대학을 다닐 때, 아버지가 늙어 숟가락 놓아 장례를 치르러 아들이 오자, 엄마는 아버지가 외아들한테 이런 걸 희망했다고 없는 일을 지어낼 정도다.

  “나는 아들 디데리히를 통해서 영생할 것이고, 디데리히는 아버지(사실 주장하는 바는 어머니)를 보살피기 위해 절대 결혼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다.”

  아들이 척 들어보니 거짓말이다. 아버지는 엄마처럼 병적으로 감상적인 사람이 아니었거든. 어떤 집안인지 감이 딱 잡힌다. 이런 부모에게 배운 것이 있어서 디데리히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어린 여동생들에게 권력을 과시하기 시작한다. 받아쓰기를 시키고, 일부러 어려운 문제만 내서 동생들을 매우 잔인하게 처벌해놓고, 시간이 가면 눈물을 짜던 동생들한테 마음이 좋지 않아 용서를 빌고는 했다. 몸도 그렇지만 마음도 약하다니까. 근데 마음도 상대를 봐 가며 약해지는 모양이다.

  김나지움 4학년 시절에 학급에 딱 한 명 있던 유대인 급우 앞에 십자가를 턱 내려놓고, 이 앞에 무릎을 꿇으라 요구했다. 유대인 아이가 십자가 앞에서 조아릴 수는 없는 법, 아이는 완강하게 거절했고, 그러자 자신을 둘러싸고 행악을 방관하는 급우들 다중의 힘을 믿어 유대 아이를 줘 패는 일이 있었다. 아이들은 디데리히한테 박수와 지지를 보냈다. 아직 1차 세계대전도 터지기 한참 전인데도 그랬다. 하여간 디데리히는 이 일을 네트치히 시의 기독교인 전체를 대표한 일이라 조잘댔고, 학급에서의 권력이 무한상승 했으며, 유대인 징벌의 책임과 죄의식을 집단이 공유하니 마음도 편해진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당연히 교사들도 이 일을 방관하기만 했다. 당시에 전 유럽이 비슷했다. 이후 디데리히는 새로 전임해 온 담임의 총애를 받아, 명예를 감안해 학급 반장과 비밀 감시자를 겸임했으니, 권력의 맛을 제대로 본 것. 그리고 교사와 교장이라는 학교 내 ‘권력’과 가까워야 한다는 진리를 배운 계기였다.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베를린대학에 입학한다. 당연히 연애사도 있지만 디데리히의 저급한 인간성이 두드러질 뿐 별것 없으니 연애사는 그냥 넘어가자. 그래도 19세기에 처녀 신세 조져놓고 가세가 기울자 트집을 잡아 아가씨의 아버지한테 모욕을 주어 관계를 끊어버리면 나쁜 인간 맞지? 같은 동네에서 약국 약사를 지망했던 1년 후배 호르눙이 입학하자 “노이토이토니아”라는 클럽에 들어간다. 당연히 처음부터 흔쾌히 들어간 건 아니다. 몇 달간 간을 보다가 앞뒤 사정 보고 들어간 건데, 남자다운 씩씩한 기상과 이상주의를 배우는 걸 목표로 하고, 정식 회원이 되려면 결투를 해야 했다. 진짜 펜싱 칼을 들고. 경기용은 날이 없고 뾰족한 첨단 끝을 동그랗게 만들어 다치지 않게 했지만, 진짜 칼엔 그런 안전장치가 없다. 이때 비벨이라는 이름의, 법학을 전공한다는 것만 가지고 디데리히한테 절대적 존경을 받는 좋은 옷을 입고 다니는 선배가 있어서 기꺼이 결투에 응해주는데, 이때 디데리히는 평생 영광스러운 훈장으로 써먹게 될 뺨에 길게 꿰맨 흉터를 갖게 된다. 이게 당대 독일 대학생한테 큰 유행이었다. 남자를 더 남자답게 만들어주는 일종의 성형술이라 보면 된다. 게다가 머리에도 상처를 하나 더 가지고 있었으니 운동을 하지 않아 퉁퉁한 비만 스타일의 디데리히한테는 얼마나 좋은 액세서리였는지!

  그러나 대학 졸업과 동시에 1년 동안 군대 복무를 해야 했다. 군의관이 디데리히를 척 보고 하시는 말씀이, “우리는 조만간 네 배 속에 가득 든 기름 덩어리를 제거할 것이다.” 하여간 입대를 해 신병 훈련소에 가서도 이리저리 뺀질거리다가 네트치히 살 때 어린 시절의 주치의 오이토이펠 원장한테 편지를 보내 자기한테 갑상선종과 구루병 증세가 있다고 증명서를 만들어 보내줄 수 있느냐고 편지를 보낸다. 의사 오이토이펠 선생은 우리 주인공에게 답장을 보내지 않으며, 훗날 디데리히가 고향으로 돌아간 이후에 자유주의자 당원이자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의 신분으로, 민족주의당 디데리히 헤슬링과는 철천지원수로 만나게 된다. 디데리히는 도저히 군대, 특히 훈련소의 격한 훈련을 견딜 수 없어 노이토이토니아 클럽 회원의 권력층 아버지한테 부탁해 거의 모든 훈련에서 열외 조치를 받고, 그것도 모자라 조기 제대를 한다. 그래도 권력이 좋기는 좋다. 나중에 네트치히 시의 재향군인회 간부까지 되는 걸 보면.


  이제 대학도 졸업하고, 아버지도 세상 뜨고, 병역도 마쳤으며, 학위도 따 화학 박사가 되어 금의환향, 네트치히 시로 돌아오면서 본격적인 민족주의자당의 실세로 등극한다. 당연히 시작은 미미했으나 끝은 창대하게. 처음엔 아버지가 남긴 작은 제지공장의 사장으로 시작한다. 황제를 위한 황제에 의한 황제의 나라를 꿈꾸며 전 세계를 지배할 독일 제국의 영광을 위해 봉사할 마음이지만, 처음부터 잘 나가는 건 아니다. 젊은 디데리히 헤슬링 사장은 작은 네트치히 시에서도 권력 있는 자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온갖 치사한 일을 하며, 상상을 초월하는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과시한다. 이런 것을 전부 다 하인리히 만 특유의 골계와 풍자 속에서 진행한다. 본문만 759페이지로 작은 분량이 아니다. 그걸 거의 다 이렇게 가공한 블랙 유머로 채우면 독자는? 그렇다. 멀미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마지막 결말이 재미있다. 당연히 어떤 장면인지 안 알려드린다. 세상의 찌질한 남자 디데리히 헤슬링의 출세길을 따라가 보시라. 32,800원. 책값이 비싸서 행여 취향에 맞지 않으면 낭패일 터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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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9-06 06: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줄리언 반스, <나를 만나기 전 그녀는>
화요일. 에르난 디아스, <트러스트>
수요일. 마리야 스테파노바, <기억의 기억들>
목요일. 아고타 크리스토프, 《잘못 걸려온 전화》
금요일. 제임스 볼드윈, <조반니의 방>
 
먼고 해밀턴
더글러스 스튜어트 지음, 구원 옮김 / 코호북스(cohobooks)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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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6년에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출생해 스물네 살 때 뉴욕으로 건너가 패션 디자인 분야에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단다. 캘빈 클라인, 랄프 로렌, 잭 스페이드 같은 곳에서 20년 넘게 일했다니 틀린 말은 아니다. 수석 디자이너면 뭐해, 열두 시간 교대근무 하는 데. 스튜어트가 대단한 게, 맞교대 하면서 무슨 시간이 났는지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소설을 썼으니 소설가로도 이름을 높이게 만든 <셔기 베인>이란다. 이게 영국과 미국의 여러 출판사에서 출판을 거절당했지만 (32곳의 미국 출판사, 영국 출판사 12군데) 하여튼 결국 미국의 독립 출판사가 책으로 만들어 시장에 나왔고, 2020년에 덜컥 부커상을 받는 바람에 이제 스타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부커상이 그렇다. 무명이었다가 한 방에 스타로 뛸 수 있게 만드는 권위.

  우리나라에서도 <셔기 베인>이 센세이셔널했지 아마? 그래서 한 김 빠지길 기다렸다가 읽겠다고 마음먹었었다가, 날이 가면서 그만 잊고 지냈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3년 가까이 지났다. 그러다가 인터넷 책방 알라딘의 AI가 나를 위해 이 <먼고 해밀턴>을 추천했다. 나는 무릎을 치며, 아, 이 작가가 <셔기 베인>을 쓴 이지? 기억이 나서 얼른 희망도서 신청을 하고, 한 달을 기다렸다가 읽었고, 모두 5백 페이지 분량인데, 270페이지까지 읽은 다음, 도무지 읽어주지 못해 그냥 덮어버렸다. 그러면서 만일 2001년 말에 <셔기 베인>을 읽었다면 분명히 내 돈 내 산이었을 텐데 그나마 다행이다, 이 책의 독자평이 그리 나쁘지 않으니 나 말고 감격에 겨워 읽는 독자가 있을 것일 터, 위안을 삼자, 뭐 이 정도 선에서 마감을 하고, 도서관 “내 서재”의 “관심도서” 목록에서 얼른 <셔기 베인>마저 지워버렸다.


  먼고 해밀턴. 원래 책 제목은 <젊은 먼고> 또는 <어린 먼고>다. 열다섯 살이긴 하지만 애가 좀 늦게 되는 아이라 여전히 어린 아이 수준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중3. 당연히 알 거 다 알고, 어차피 이왕 해볼 거 할 준비가 완료된 ‘일상 거총’ 상태의 탱탱한 사춘기 소년 생각하지 마시라. 주워듣기로 <셔기 베인>에서도 주인공 셔기가 열다섯 살 난 늦된 아이로 알고 있으며, 그 작품처럼 <먼고 해밀턴> 속에도 자전적 이야기가 적지 않게 들어있다고 하니 스튜어트도 좀 그랬지 않나 싶다.

  거의 모든 포유류가 그렇지만 특히 어린 인간종에게는 끔찍할 만큼 슬픈 본능이 있다. 부모, 특히 어미가 아무리 새끼에게 모질어도 새끼는 어미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본성. 스스로 먹고 살 능력이 없는 새끼 시절에 생존을 위해 이런 본성이 특화해 진화했을 것이다. 이러다가 대가리가 커져 자기 혼자도 살 수 있을 거라고 오해하기 시작하면서 상대적으로 힘이 세지 않은 엄마한테 박박 기어오르기 시작한다. 기성세대는 이걸 ‘제2의 탄생’이라 주접 떨며 아무쪼록 여드름이 돋기 시작하는 자식 새끼가 큰 탈 없이 사춘기 시절을 지나기 바라는 거고. 근데 그것 마저 지나 이제 성인이 되면 전세 역전이다. 그러니 사춘기 자식을 둔 부모들이여, 미리미리 자식새끼한테 잘 하시라. 나중에 후회 말고.

  우리의 먼고는 그러나 이 시기가 도래했음에도 여전히 엄마 모모를 걱정하느라 여념이 없다. 엄마 이름이 모모다. 몸에 털이 많아 모모라는 별명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고, 그냥 모모다. 엄마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자기 아이들이 자신을 “엄마”라고 부르는 것. 그렇게 부르는 것을 다른 사람이 듣는 거다. 원래 이름은 모린. 지금은 대외적으로는 알코올 중독자들의 모임인 AA 클럽에 월요일과 목요일에 정기적으로 참석해서 “월목 모린”이라 불린다. 실제로는 책에서 그렇게 부르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열다섯 살 때 지금은 ‘빅 하하’라고 부르기로 한 해밀턴 군을 만나 사랑을 하고, 사랑을 나누고, 그래서 임신과 출산을 해서 맏이 하미시, 대외적인 호칭으로 ‘하하’를 낳았고, 이어서 줄줄이 둘째 조디와 막내 먼고를 출산했으니 이 때가 열여덟 살이었다. 동네 논두렁 건달 가운데 대빵이었던 빅 하하는 어울리지 않게 패싸움에 가담을 했다가 칼을 맞아 드런 세상 겨우 스무 해를 살고 숟가락 놨다. 이후 모모는 술에 빠지기 시작해 곧장 깊은 알코올 의존증으로 접어들었다. 술만 취했다 하면, 혹은 몸에서 혈중 알코올 농도가 기대치 이하로 떨어지기 시작하면, 많은 의존자들이 그러하듯이 전혀 다른 인격체로 돌변해 집구석에 뭐 제대로 남아남는 것이 없었다. 그럴 때면 어린 조디는 동생 먼고를 데리고 모모가 찾을 수 없는 어두운 공간으로 숨어, 지금 엄마의 몸을 지배하고 있는 건 엄마 모모가 아니고 그 속에 들어 있는 다른 인간 ‘태티 보글’이라고, 이렇게 달래면서 열여섯 살이 되었다. 이젠 모모도 함부로 자식들 앞에서 테티 보글로 변신할 수 없다. 힘이 달리니까. 완력도 달리니까. 까불면 오히려 제압당하니까. 그러게 내가 뭐랬어, 잘 하라고 했잖아.

  맏이 하미시는 벌써 열여덟 살. 아빠 빅 하하의 대를 이어 글래스고 빈민가이자 개신교 구역 논두렁 건달의 왕초 자리를 꿰찼다. 어려서부터 동생들을 완력으로 무지르고 그게 괴롭힘으로 나타나고, 특히 늦된 먼고를 남성성이 부족하다고 판단해 거칠게 “키우려고” 나름대로 열심이다. 열여덟짜리 형이 열다섯 살짜리 동생을 키운다고 고생이 자심하겠지? 읽어보시라. 그것도 고생일 듯하다.


  엄마 모모는 자식들한테 관심이 없다. 혹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은 아이 셋 달린 홀아비 조키와 열애중이다. 자기 생각엔 서로 죽기 살기로 사랑하는 사이지만 독자가 보기엔 조키 생각으로는 그저 섹스 파트너 아닐까 싶다. 집에 불러 며칠 살다가 싫증나면 쫓아버리고, 며칠 지나 또 아래가 궁금해지면 전화 찍 해서 불러올 수 있는 여자. 문제는 모모가 조키와 함께 있을 때 행복을 느끼는 것 같다는 거. 처음에 말했듯이 내가 책을 다 읽은 게 아니라 단정하지는 못하지 믿지도 마시라. 그리하여 모모는 조키의 집에서 살다가 쫓겨나야 집에 돌아오니 아이들이 제정신일 수 있겠어?

  아무리 그래도 엄마는 엄마. 모모 역시 맏아들 하미시처럼 먼고가 사내답지 못하다는 것이 고민이다. 그래서 같이 알코올 중독자 모임에 다니는 두 남자, 문신이 촘촘한 젊은 갤러게이트와 쉰 살 이상으로 보이는 세인트 크리스토퍼에게 먼고를 남자답게 대해달라고 함께 2박 3일의 낚시 여행을 떠나게 한다. 이래서 대한민국 천안시와 자매결연을 맺었고 북위 55도 51분에 위치한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도 북쪽으로 아무리 5월(6월인가?)이라도 반바지에 점퍼 하나 입혀서 캠핑을 떠난다.

  두 명은 같은 알코올 중독자 모임인 AA 클럽 회원이면서, 발리니 교도소 감방 동기이며, 여전히 하루 종일 맥주와 위스키, 기타 에틸 알코올을 흡수할 수 있는 모든 액체를 섭취하기에 조금의 게으름이 없다. 그리고 치명적으로 둘 다 양성애자이다.

  먼고는 엄마의 무관심과 엄마를 간절하게 원해서 곱절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조금의 불편한 상황에 처하기만 해도 얼굴에 경련이 일어나는 일종의 틱 증상을 보인다. 자신도 그것을 알아 얼굴을 긁어대 잘 생긴 모습이기는 하지만 흉터가 많다. 선한 누나 조디 역시 틱 증상이 있다. 심각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히히익, 하며 엽기적으로 웃어버리는 것. 이외에도 아빠 얼굴을 기억하지 못해서 그런지 유독 나이 많은 남자한테 끌려, 학교 선생과 밀회 끝에 임신하는 바람에, 선생은 교장한테 전화 한 통으로 사표를 가름한 채 도망쳐버리고, 아랫집 아주머니의 도움을 받아 중절수술을 받는다.

  이 정도면 내가 도무지 더 이상 읽어주지 못하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한 듯하다. 더글러스 스튜어트는 이 참담한 광경, 특히 먼고한테 벌어지는 참혹한 장면을 발갛게 묘사해버렸다. 그리하여 나는 불과 몇 달 만에 다시는 읽고 싶지 않았던 베스트 셀러 <리틀 라이프>를 다른 버전으로 읽는 일이 생겼던 거다. <셔기 베인>도, <먼고 해밀턴>도 그리고 <리틀 라이프>는 말할 것도 없이 독자 평이 좋다. 굳이 내 독후감을 믿을 필요 없다. 단지 나는 이런 스타일의 작품하고 도무지 맞지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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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고니시의 번영과 몰락
베어톨트 브레히트 지음, 김기선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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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곡가 쿠르트 바일은 20세기도 20여 년이 흘렀음에도 관중에게 가장 비싼 비용을 치르게 만드는 오페라 장르를 계속 “미식가적 취향”에 머물게 하는 것이 마땅한 지에 대해 고민한다. 이 책의 부록으로 첨부한 브레히트와 주어캄프의 주석에 그들(브레히트와 주어캄프)는 이렇게 선언한다.


  “우리의 오페라는 미식가적 오페라다. 오페라는 상품이기 훨씬 전부터 향락의 도구였다. 오페라가 교양을 요구하고 교양을 전달한다 해도 오페라는 쾌락에 기여한다. 왜냐하면 기호의 형성이나 전달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오페라는 어떠한 대상이든 즐기는 태도로 접근한다. 오페라는 하나의 ‘체험’이고 ‘체험’으로서 기여한다.”


  인용의 마지막 문장에서 오페라가 “체험으로서” 기여한다고 했다. “으로서”는 자격격 조사이다. 즉 문장을 잘못 쓴 것이 아니라면, “체험”의 과정을 통해서(기구격 조사 ‘으로써’)가 아니라 기호의 형성인 문장으로 이루어진 “문학의 극화 자체”로 관중에게 기여한다고 말한다.

  베르톨트는 이런 개념에 입각해 <마하고니 시의 번영과 몰락>을 애초부터 오페라 대본, 리브레토를 썼다. 그리하여 <마하고니…>는 애초부터 “향락적”이고 감상자의 쾌락에 기여할 목적이다. 여태까지 지속해왔던 “비이성적 성격”을 가지는데 그것은 “입체성과 현실성을 추구하지만 동시에 모든 사실성이 음악을 통해 제거”된다. 여기에 하나를 더 추가하자면, 거창한 무대와 오케스트라, 출연진과 합창단, 발레에 드는 비용으로 인민들의 하늘 위에 존재했던 오페라 무대를 이제 시장의 흙바닥에서도 공연하게 만들고 싶다. 이것이 작곡가 쿠르트 바일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의기투합할 수 있었던 포인트. <마하고니…>를 쓰기 몇 년 전에도 이들은 뜻을 합쳐 <서푼짜리 오페라>를 만들고 공연했다.

  나는 <마하고니…>가 처음부터 오페라를 위해 쓴 것인지 몰랐다. <마하고니…>라는 희곡작품이 있어서 그것을 쿠르트 바일이 하도 재미있게 읽고, 보아, 자기가 오페라로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서푼짜리 오페라>는 읽어봤으면서도 여태까지 원래 희곡인 줄 알았다. 요즘 출판사 지만지에서 나오는 책들에 슬슬 정나미가 떨어지는 판이었음에도 이 책을 읽으려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까지 한 이유는 오페라 <마하고니 시의 흥망성쇠>를 DVD로 가지고 있음에도 별로 재미를 느끼지 못해 (쿠르트 바일의 작품이 재미가 없다니 이게 웬 일이냐는 말이지!) 원작을 한 번 읽어볼 이유가 되었기 때문이다. 총 238쪽의 분량이긴 하지만 원 텍스트는 113쪽에서 끝나고 이어 부록, 삭제 장면, 해설, 작가 소개, 역자 소개가 본 텍스트 분량만큼 첨부되어 있다. 역시 지만지 드라마,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독자한테 별로 영양가 없는 정보를 제공하기에 여념이 없다. 혹시 당신이 브레히트를 전공하거나, 극작에 큰 관심이 있는 지망생이면 아주, 아주, 아쭈? 아주 좋은 정보일 수 있으니 읽어 보시든지.


1998년 찰스부르크 페스티벌 실황 DVD


  극작 특성상 진행이 무척 빠르다. 애초 협업하기로 뜻을 맞춘 쿠르트 바일은 리하르트 바그너와 달라서 구구절절 독자/관객에게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에, 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마하고니라는 도시가 생긴 내력을 성실하게 소개할 의지는 별로 없다.

  막이 오르면 무대에 고장나 멈춘 트럭과 세 명의 등장인물이 보인다. 삼위일체 모세와 지배인 빌리, 그리고 마더 구스 역할인 베크비크. 애초 이들은 사금을 채취하기 위해 이 황량한 벌판에 도착했다. 하지만 앞에는 사막, 뒤에는 이들을 쫓는 경찰, 금을 캘 수 있는 해안으로 가야 하건만 트럭이 퍼져버렸다.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처지에 어미 거위 베크비크가 선언한다.

  “좋아, 그럼 여기다 자리를 잡자.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거면 여기 아래에 자리 잡는 거야. 이봐, 금 찾는 일은 힘든 일이고 우린 그런 일을 할 수 없어. 그렇지만 난 사내들을 잘 알지. 틀림없이 사내들은 금을 내놓을 거란 말이야. 강에서 금을 찾는 것보다 그 사내들한테 뜯어내는 게 더 쉬울 거야.”

  이리하여 세 명의 (범죄자인 것처럼 보이는) 뜨내기가 도시를 만들어 “마하고니”라 이름 짓는데, 마하고니는 그물망이란 뜻이란다. 금을 캐는 남자들인 감칠맛 나는 새들을 잡을 수 있는 그물망.


  작은 주머니에 금 조각을 담아 가슴에 품고 마하고니 시로 들어온 사내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갈취하기 위한 방법은? 당연히 여자들이다. 이런 건 특별히 광고를 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들어오는 법. 마하고니 시에도 제니를 비롯해 여섯 여자들이 커다란 트렁크를 들고 등장해 <마하고니…>에서 가장 유명한 노트 “앨라배마 송 Alabama Song”을 노래한다. <마하고니…>는 1928~29년에 독일 베를린에서 썼다. 그런데 난데없는 앨라배마? 브레히트와 바일 두 명의 독일인은 나중에 미국으로 망명을 떠나지만 이 때까지 설마 자신들이 떠날 줄 알았겠어? 그럼에도 금과 꿀과 젖이 흐르는 신세계를 조금은 동경했을 지 모른다. 이것으로 마하고니 시가, 모르기는 하지만, 미국 땅에 있는 가상의 도시 아니겠느냐, 짐작을 할 수 있다. 이 노트의 가사는 브레히트가 독일어로 쓴 것을 <서푼짜리 오페라>의 공동 저자이기도 한 엘리자베트 하웁트만이 영어로 바꾸었다. 유명작 <직조공>을 쓴 게르하르트 하웁트만하고 인척관계인지는 모르겠다. 아닌 것 같다. 마침 유튜브에 올라 있으니 한 번 듣자.



  이후 몇 년 동안 도시는 세계 각처에서 불평 불만 가득한 남자들이 쇄도해 전성기를 만난다. 이제 도시에는 네 가지 미덕 또는 죽을 죄의 기치가 휘날리게 됐으니, 첫째는 폭식, “처먹는 것”이고, 둘째는 사랑의 행위 즉 섹스이며, 셋째는 브레히트 스스로가 매료된 스포츠인 권투시합, 넷째로는 바로 술이다. 주목. Pay your attention. 네 가지 미덕 또는 죽을 죄. 즉 이것은 도시 마하고니의 가장 전성기를 만들었으며, 전성기라고 함은 이제 남은 건 쇠퇴밖에 없다는 얘기로 이 네 가지 때문에 마하고니는 쫄딱 망하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로마제국 쇠망사>가 로마의 전성기인 오현제 시절부터 시작하는 것도 이런 이유인 것처럼.

  그러면 이제 이야기는 다 끝났다. 어떤 과정을 거치는 지는 직접 확인하시라. 다만 이 작품, 오페라를 위한 대본에 관심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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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운명 1 창비세계문학 98
바실리 그로스만 지음, 최선 옮김 / 창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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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5년 12월 12일에 러시아 제국 영토이었던 우크라이나 베르디치프의 유대인 가정에서 이오시프 솔로모노비치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태어난 바실리 그로스만은 어린 시절 유모가 젖 아들인 그를 요샤Yossya(Vasily의 애칭)로 부르기 시작해 온 가족이 ‘바실리’라는 이름을 공유하게 된 재미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아버지 세묜 오시포비치 그로스만은 화학자였다고 하는데, 그러면 바실리의 부칭은 솔로모노비치가 아니라 셰묘노비치가 되어야 마땅할 터. 조금 의문이 들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아버지 역시 당대의 지식인이었으며 당연히 러시아 혁명에 가담을 했으나 불행하게도 멘셰비키에 가담을 한 바람에 훗날 아들한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어 교사였던 어머니 예카테리나 사벨리예브나는 남편과 별거해 아들 바실리와 함께 제네바에서 몇 년 동안 함께 살았던 적도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1941년에 독일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 베르디치프에서 탈출하지 못한 어머니는 그곳에서 같은 처지의 2~3만 명의 유대인들과 함께 처형을 당했다. 이 정경은 <삶과 운명>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이론 물리학자 빅또르 빠블로비치 시뜨룸의 어머니 안나 세묘노브나의 일화로 등장한다. 바실리 그로스만이 국립 모스크바 대학에서 화공학을 전공했으며 대단한 공부벌레였다고 한다. 딸을 하나 얻은 첫 번째 결혼에 실패하고, 절친한 친구 보리스 구버의 아내 올가와 정분이 나 그들이 이혼을 한 1936년에 재혼한다. 1937년에 스탈린에 의하여 대규모 숙청이 일어났을 때 보리스 구버가 체포되고, 올가도 인민의 적을 고발하지 않은 죄로 체포되자, 이혼과 재혼 시기였을 때라서 무죄일 수밖에 없다며, 당시엔 아주 이례적인 경우로 감히 상부조직에 의한 결정에 이의를 제기해 결국 석방을 시킨 대담한 성격을 지녔다. 하물며 감히 멘셰비키 족속의 아들이 말이지. 친구 아내와의 연정도 작품 속에 작가만큼 강력하지는 않지만 나온다. 하긴 작품 속에 자신의 경험을 전혀 포함시키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바실리 그로스만은 징집 면제 판정을 받았다. 그럼에도 지원을 해 입대하고자 해서 붉은 군대 신문인 “붉은 별” 종군기자로 1천 일을 넘게 복무한다. 이 동안 모스크바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 쿠르스크 전투와 베를린 전투의 참상을 목격하고 기록한다. 이 가운데 2차 세계대전의 커다란 분기점이 되는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삶과 운명>의 주요 장면이다. 독일의 파울루스 장군은 1942년 7월에 돈강의 지류인 치르강에 도착해 붉은 군대를 공격하고 급기야 돈강을 건넌다. 스탈린은 모스크바에서 한 걸음도 퇴각하지 말 것을 명령하지만 한 달이 채 못 되어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에 접근해 도시를 고립시킨다. 이 즈음 해서 <삶과 운명>은 시작한다. 영화 <스탈린그라드>를 보신 분은 이 작품의 비극적 전쟁 장면을 이해하실 수 있을 터. 도시는 거의 폐허가 된 와중에 붉은 군대와 제국군대가 약 3백 미터의 간격을 두고 대치하고 있는데, 한 시절 고급 저택이었던 ‘6동 1호’ 건물의 지하실에서는 실제로 총 24명의 붉은 군사들이 58일 동안 독일의 격렬한 공격을 버텨내고 있었다. 그로스만은 이 부대에 집중해 스탈린그라드 시가전을 그리고 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외곽에서 반격을 준비하고 있던 전차군단은 깔미끄 족 출신 대령 노비꼬푸가 군단장을 맡아 훗날 한국전쟁에서 북한군의 주력 무기가 될 T34 탱크로 무장한 채 만반의 준비를 기하고 있었다. 전시에 대령이 군단장을 한다고? 그렇다. 노비꼬프의 출중한 전쟁 수행능력을 눈여겨본 예료멘꼬 사령관은 정보부 출신 네우도브노프 장군조차 노비꼬프의 지휘를 받게 만들었다. 이렇게 전투는 스탈린그라드 시내에서는 (지휘관이라 불리기 원하지 않는)그레꼬프가 관리인을 지칭하는 6동 1호의 극렬한 전투장면과 노비꼬프를 필두로 하는 무적의 붉은 전차군에 의한 우크라이나 수복까지 그리고 있다. 이 전투에서 각각 끄리모프와 노비꼬프, 두 명의 장교가 특별한 역할을 하지만 승리가 확정된 순간 이들은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린다. 두 명의 주인공이 공유점은 대단한 미인인 예브게니아 니꼴라예브나 샤뽀시니꼬바의 전남편과 약혼자라는 것.

  <삶과 운명>이 전쟁 소설이라는 것은 의심할 필요가 없지만, 이것 외에도 몇 가지를 더 첨부해야 마땅하다. 하나는 나치에 의하여 저질러진 유대인 학살. 그로스만이 종군기자 생활을 하면서 폴란드 지역에 설치했던 절멸수용소 두 곳, 트레블린카와 마이다네크를 직접 목격했고, 트레블린카에서는 유대인 수감자로 구성되었으며 오직 조금 더 생존하기 위하여 같은 유대인의 희생자 처리 일을 했던 존더코만도스(Sonderkommandos)를 취재한 전력이 있다. 어머니가 절멸수용소에서 학살을 당하기도 했으니 20세기의 가장 불행한 역사를 건너 뛸 수는 없었을 터이다. 다만 작품의 첫 장면이 독일의 강제수용소인데 분명히 주인공 급으로 보이는 노 혁명가 미하일 시도로비치 모스똡스꼬이에 대하여 별 정보가 제공되지 않는다. 그저 간략하게 각주를 통해 “이 소설의 전편인 <정의로운 일을 위하여>에서 모스똡스꼬이는 레닌그라드가 독일군에 침공되자 그곳에서 빠져나왔다.”라고만 한다. 물론 작품을 읽어가다보면 레닌과 함께 혁명을 하고, 내전을 겪은 골수 볼셰비키이자 레닌주의자이다. 그가 왜 독일 수용소에 들어왔는지, 유대인이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공산주의자라서였는지 도통 독자는 알 길이 없다. 1,360 페이지가 넘는 작품을 다 읽은 다음에야 작품해설을 통해 역자는 이렇게 말한다.

  “포로수용소 생활을 하는 모스똡스꼬이가 아그리삐나와 운전사 세묘노프, 의사 레빈똔과 함꼐 8월 어느날 스딸린그라드 부근에서 독일군에게 체포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전편 소설을 읽은 독자에게 이 인물들은 모두 친숙하다. 전편 소설을 모르면 이 운전사가 모스똡스꼬이의 운전사라고 여길 수 있는데, 여기서 세묘노프는 모스똡스꼬이의 오랜 지기이자 혁명 동지인 끄리모프, 이 소설에서 중심적으로 다루어지는 샤뽀시니꼬프 가족의 막내딸 제냐의 전남편이자 당시 꼬미사르로 활동 중인 그의 운전병 세묘노프를 말한다.”

  1952년에 출간한 전편 소설 <정의로운 일을 위하여>는 시간적으로 1942년 4월 29일부터 노비꼬프가 우랄지역에서 전차군단을 정비하는 시점까지라고 하나, 아쉽게도 이 전편소설을 읽어보고 싶어도 번역 출간이 되지 않았다. 그러니 나를 비롯한 우리나라의 모든 독자는 <삶과 운명>을 읽는 내내 난데없이 등장하는 거물급 인물들의 정체에 전혀 친숙하지 않은 상태로 지나갈 수밖에 없다. 모스똡스꼬이가 제일 앞에 등장하는 문제의 인물이다. 독일 수용소 장면에서는 독자라면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여러 경우가 다 등장한다. 수용소 내 공산주의 파벌 갈등, 죽음을 기다리는 유대인과 좀머코만도스의 갈등, 소련 포로와 누구인지 모를 스파이 간의 갈등, 그리고 여태 한 번도 읽어 보지 못한 나치 추종자 지휘관과 볼셰비즘 찬양자 사이의 사상적 겨룸. 여기에 독일 수용소 장면에서 역시 처음 읽게 되는 탈출 모의까지. 윌리엄 홀든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제17 포로수용소>는 보셨으리라. 그들이 수용소에서 탈출해 과연 안전지대까지 갈 수 있었을까? <삶과 운명>에서는 수용소 위치가 이들에게 익숙한 폴란드, 우크라이나 지역이고 언어까지 탈출자들과 통해서 가능했을 수도 있을 터였다.


  <삶과 운명>은 여기에 국한하지 않는다.

  1954년에 스탈린이 죽고, 1956년에 흐루쇼프에 의하여 스탈린 우상화는 끝을 본다. 그리고 3년이 더 흐른 1959년에 바실리 그로스만은 <삶과 운명>을 출판한다. 하지만 KGB는 곧바로 그로스만의 집을 가택수색했고, 그의 사무실과 은행 금고까지 털었으며, 작가가 가지고 있는 모든 원고와 심지어 타이프라이터에 걸린 잉크 테이프까지 걷어갔다.

  아무리 스탈린이 죽었고, 그에 대한 우상화가 마감을 했다 해도, 소비에트 연방에 의하여 저질러진 집단 농장화와 1937년의 대대적 피의 숙청을 대놓고 질타하는 것은 견디기 힘들었을 터이다. 집단 농장을 만들며 숱한 소수민족을 한겨울의 황야에 내팽개쳐 정말인지 과장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으나 수천만 명이 아사, 동사하게 만들었고, ‘편지교류 없는 10년 유형’이라는 독특한 총살형 및 교수형 선고는 소비에트 전 지역을 대화 없는 동토로 만들어 버렸다. 우리도 “유신헌법을 부정, 반대, 비방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이를 어길 경우 1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는 유신시절 긴급조치 9호를 경험했던 바, 부모가 자식들 앞에서, 교사가 학생들 앞에서 끔찍한 수준으로 입조심을 하게 만들었다. 술김에, 농담으로 한 마디 했다가, 그 말이 비단 스탈린을 부정, 반대, 비방하는 의미가 아니었더라도, 들은 자가 스탈린과 볼셰비키 독재를 부정, 반대, 비방했다고 주장하며 당국에 고발하면 “의학이 허락하는 한” 모진 고문을 거쳐 결국 체제 전복을 꾀했다는 자필 서류에 서명을 한 다음 “편지교류 없는 10년 유형”을 선고 받아야 했던 시절을 강력하게, 아주 강력하게 비판한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1959년 이후 소비에트에서 다시는 읽을 수 없는 책이 되어 버렸고, 1980년에 이르러서야 그의 친지가 마이크로필름으로 촬영한 원고를 스위스에서 다시 타이핑해 출판할 수 있었다. 5년이 더 흐른 1985년에 영어번역본이 나왔으며, 이전에 84년엔 독일어로 부분 번역 되었다고 한다. 체제 경쟁이 한창일 1980년대 초였다면 서구 반공권 입장에서 이 작품의 번역에 게으를 필요가 없었을 듯한데, 소련 사람이 쓴 작품이라서 그랬나 좀 아쉽다. 내가 반공주의자라서 아쉽다고 한 게 아니다. 이 책은 전쟁과 독일 수용소와 소비에트의 일인 독재만 다루지 않는다. 저 멀리 러시아 시절부터 1940년대 초반까지 다양한 러시아를 소개하고 있음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세심한 심리묘사 역시 대단하다. 전쟁을 포함한 세계사의 진정한 주인공은, 역시 사람이다.


  즐거운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정말 오랜만에 읽는 진짜 리얼리즘 소설. 아는 것이 별로 없어 이 소설을 “진짜” 리얼리즘이라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오만일 수 있겠다. 스탈린이 죽었다고 해도 아직 공기 중에 소비에트 일당독재의 기압이 팽만해 있어 여전히 볼셰비키와 레닌주의를 지지할 수밖에 없었음에도, 작가의 눈에 뜨인 문제점을 과감하게 드러냈다는 것만 가지고도 이 작품을 높은 위치에 놓아야 할 것이다. 이 때 말하고자 하는 “문제점”이 비단 체제나 체제의 운영에 대한 문제점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 속에 쓸려가는 사람들의 심리까지 그로스만은 기가 막히게 포착한다.

  예를 들어, 전차군단장 노비꼬프는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끄렘린에서 직접 시달한 명령이 불합리하다고 여겨 군단에 총출동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 지금 위대한 무기 T38을 몰고 포화가 한창인 지역으로 돌진하면 말 그대로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격. 자폭일 뿐이다. 그리하여 그는 무려 8분 동안이나 스탈린의 명령을 뭉개버린다. 이윽고 포격을 멈추자 누구보다 서둘러 크고 큰 외침으로 돌격을 지시한다. 이를 옆에서 보고 있던 꼬미사르(정치위원) 게뜨마노프는 노비꼬프의 절묘하고 냉정한 결정에 감격해 키스를 날린다. 전차가 웅장한 굉음과 함께 진격을 하고, 게뜨마노프는 생각한다. “그래도 스딸린의 명령을 8분동안이나 지연시켰잖아. 그건 보고하지 않을 수 없지.”

  다 마찬가지다. 핵의 척력과 인력에 관한 혁명적인 연구를 발표한 유대인 과학자에 쏟아지는 질투와 마타도어. 인류와 소비에트에 크게 공헌할 지도 모르는 연구를 볼셰비즘과 소비에트의 개념과 상충하는 개인적 관심사라고 혹평하는 것도 모자라 최소한 해임, 적어도 체포, 심하면 영구 퇴출하게 만들고자 하는 어제까지의 찬양자들. 언제 그들이 바라는 대로 비밀경찰이 문을 두드릴까, 밤과 낮이 없이 아무 죄 없이 노심초사하는 빅또르 빠블로비치 시뜨룸 등등.

  이 책을 읽으며, 여차하면 <삶과 운명>이 폴로네이즈를 생략한 <전쟁과 평화>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다양하고 재미있다. 책 세 권을 다 읽고 역자해설을 훑으면서 역자 최선 선생도 똘스또이를 거론하는 걸 보며 은근히 어깨가 으쓱거리니 아직 나는 한참 멀었다. 하긴 어디 가려고 책 읽는 거 아니니까 멀었으면 어떠랴, 그냥 안 가면 되는 것이지. 하여간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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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4-09-03 06: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종군기자로서 전쟁을 바로 앞에서 목격한 사람이 쓴 소설이니 정말 최고의 리얼리즘 소설이겠어요. 영화 <스탈린그라드>, <에너미 앳 더 게이트> 보고 정말 끔찍한 전쟁이다 생각했는데 이 책은 직접 전쟁을 겪은 사람이 썼으니 엄청날 거 같습니다.

Falstaff 2024-09-03 07:17   좋아요 1 | URL
저도 영화 <스탈린그라드> 막 생각하면서 읽었답니다. ㅎㅎㅎ
꽤 괜찮은 작품입니다. 실감도 나고, 무엇보다 1937, 38년 소비에트 내에서 있었던 대규모 숙청을 빙자한 학살도 그대로, 리얼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고문 당하고 살해 당하는 게 아니라, 그걸 상상하며 대기하고 있는 인간 상실의 순간 같은 것 말이죠.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런 건 내돈내산 해서 책꽂이에 꽂아두어야 하는데 그만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게 아쉽네요. ^^

페넬로페 2024-09-03 09: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처음에 도서관에서 빌렸다가 안되겠다 싶어 일단 1권은 구매했어요.
조금 읽다 다른 책에 자꾸 밀리네요.
1권에서부터 3권까지 주욱 읽을 수 있는 기회를 보고 있습니다.
폴스타프님은 내용이 리얼하고 방대해도 항상 리뷰를 잘 쓰시더라고요.
저는 이런 책에 대한 감상을 쓸 엄두가 잘 안나요 ㅎㅎ
그래서 <잃어버린 환상>도 100자평으로 퉁 치고 있습니다.
‘전쟁과 평화‘도 읽어야겠어요^^

Falstaff 2024-09-03 17:35   좋아요 1 | URL
에이그... 참 페넬로페 님 같이 고수 님이 이리 말씀하시면 우짭니까. ㅎㅎㅎ
그냥 팍 3박4일 책만 읽겠다 각오하고 시작하시면 아무것도 아닐 듯합니다. 즐기셨으면 좋겠습니다.

은하수 2024-09-03 14: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리뷰를 올리셨네요^^
읽은 사람의 입장에서 읽으니 또 새롭고 넘 재밌었습니다!
이 작품은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너무너무 많은데 다 쓰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어요.
그만큼 뛰어난 작품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가장 결정적인 장면은 ‘6동1호‘와 노비꼬프의 8분 대기 순간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럼에도 꼬미사르인 게뜨마노프는 명령불복종을 보고하게 되잖아요. 인간이 그저 커다란 체제의 부품으로만 작용하게 만드는 그런 체계가 정말 안타까울 수 밖에 없었죠. 1권의 시작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모스똡스꼬이와 끄리모프의 사연은 정말 가슴이 넘 아팠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론 이 작품 전체에서 가장 싫은 인간은 역시 게뜨마노프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이 작품 출간 전에 <정의로운 일을 위하여>도 함께 출간이 되었으면 좋았겠단 생각이 여러번 들었죠! 전 영화는 보지 못하고 책으로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읽었는데 끝까지 읽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쉽긴 하더라구요~~~

이 책은 정말 소장각인데...
저도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해서 읽었어요

Falstaff 2024-09-03 17:37   좋아요 1 | URL
넵. 예상 등록일에 딱 맞춘 것도 재미있습니다. ㅎㅎㅎ
아휴, 진짜 괜찮은 대하 리얼리즘 소설입니다. 전쟁 상황 뿐 아니라 사람들의 내적 갈등까지 홀홀 다 묘사하는 솜씨가 정말 죽여줬습니다.
 
라파니엘로의 날개
에리 데 루카 지음, 윤병언 옮김 / 문학수첩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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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키피디아에 1950년에 나폴리에서 태어난 이탈리아의 소설가, 역자, 시인이라고 나와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급진 좌익 조직에 가입해 활동하다가 조직이 해체된 다음엔 정치 쪽에도 기웃거렸다. 각종 블루컬러 노동을 하면서도 여러 언어에 관심을 두었고, 글도 썼다. 은둔형 외톨이 스타일로 여전히 로마 근교의 시골에 살며 열정적 등산가로 활약하고 있단다. 21세기에 리옹 토리노 간 고속열차 설치에 반대했다가 기소까지 됐으나 무죄 선고를 받기도 했으니 왼쪽인 건 맞을 듯.

  왜 이 책을 읽었느냐 하면, 프랑스에서 공쿠르 상과 쌍벽을 이루는 문학상이 페미나 상인데, 어떤 작품들이 수상을 했을까 궁금하기도 했던 차에, 이 책의 광고가 눈에 들어왔던 거다. 2002년 페미나 상 수상작이라고. 마침 도서관 서가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길래 얼른 빌려 읽었다. 간혹 읽은 기분을 설명하는 데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별 몇 개, 이렇게 얘기하는 게 편할 때가 있으니, <라파니엘로의 날개>로 말하자면 별 셋은 박하고 네 개는 후해서 셋 반이 적당한 수준.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소수점 없이 채점하면 네 개.

  페미나 상 수상작을 저 동아시아 촌놈이 별 셋 반을 준다고? 어때, 내 맘이지. 그런데 독후감 쓰려고 위키피디아 보니까 페미나 상은 페미나 상인데, 페미나-에드랑제 Femina Etranger란다. 이런 것도 있나? 페미나 상 외국어 소설 부문? 무슨 아카데미 시상식 하는 것 같기도 하다. 페미나 상은 불어로 쓴 작품한테만 상 주는 걸로 알고 있어서 불어 잘 하는 이탈리아 사람이 불어로 쓴 책인 줄 알았지 뭐야.


  데 루카가 역자로도 일하고 있다. 언어의 범위가 재미있다. 고대 히브리어, 스와힐리어, 러시아어, 이디시어 등등. 고대 히브리어로 쓴 구약, 오래된 계약을 “비신자”로써 번역했다고 한다. 이디시어까지 관심을 넓혔다면 유대인 아닐까 싶기도 하다. 비 신자라고 했으니 기독교건 유대교건 간에 종교를 믿지 않는 유대인. <라파니엘로의 날개>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돈 라파니엘로도 러시아 혹은 동/북유럽에서 이디시어를 사용하던 유대인으로 팔레스타인까지 가려고 배를 타기 위해 나폴리에 도착했지만 여기서 옴짝달싹 못하는 선한 유대인이다. 나폴리 말도 한 마디 못했다가 조금 배운 정도의. 하기는, 그깟 작가가 어디 사람인 걸 알면 뭐해. 그냥 읽기만 하면 되지.

  어째 요새 읽는 이탈리아 소설에서 유난히 무대를 나폴리로 한 것이 많다. 연초에 읽은 쿠르지오 말라파르테의 <망가진 세계> 마지막 장면(이 책에서도 이 장면 나온다. 반갑더구만.)부터 시작해 도메니코 스타르노네의 책 두 권 등등. 근데 나폴리 사람들 기질을 보면 소설 쓰기에 아주 딱 맞춤일 정도라서 그리 이상하게 보이지도 않는다. <라파니엘로의 날개>는 전형적인 나폴리의 저소득층 사람들의 주거지. 건물이 촘촘하게 붙어 서 있고, 사람들은 옥상 테라스에 올라가 옷을 빨고, 옥상이나 자기 집 테라스에 빨래줄을 걸고 별의 별 빨래를 다 내거는 좁은 골목길. 영화에서도 많이 나오는 장면이 이 소설의 무대이다. 하필이면 언덕 꼭대기에 있어서, 사람들은 이 동네를 ‘신의 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화자 ‘나’는 열세 살 소년. 루이스 어드리크가 쓴 <라운드 하우스>에서 말했듯이 사내새끼 열세 살이란 참 어려운 나이다. 게다가 장소가 나폴리. 이제 대가리 다 컸다고 어른들이 용인을 하는 시기란다. 뭘 용인하느냐고? 한 여자를 책임질 수 있다는 걸. 아, 이제 시작이니까 미리 넘겨짚지는 마시라. 항구에서 하역일을 하는 아버지는 자신이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것을 평생 한이 되어 ‘나’를 초등 5학년까지 보냈다. 의무교육이 초등 3학년까지라서 부모는 내게 가외로 2년을 더 공부시킨 셈이다. 아버지 생각에 이건 좀 더 나은 학력으로 ‘나’를 세상에 내보내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나’도 이런 처지를 충분히 이해하여 부모님의 하해와 같은 사랑에 늘 감화 감동하면서 살고 있다. 지금은 에리코 선생이 운영하는 목공소에서 목수 일을 배우고 있다. 목수일까지는 아니고, 이제 겨우 열세 살이니 아직 그냥 대패밥이나 톱밥을 청소하고 공방을 청결하게 유지하는 정도지만.

  그래도 이 동네에서 ‘나’는 좋은 환경에서 자란 소년이다. 독자가 읽기에 그렇다. 자기 입으로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지만. 아버지는 수십 년 동안 까막눈으로 살다가 이제 노동조합 주관으로 저녁 강의를 통해 읽기와 쓰기를 배우는 중이다. 큰 키에 건장하고 힘센 아버지와 역시 큰 키의 어머니는 서로 인애하는 부부다. 아버지는 내게 부메랑을 선물했다. 오세아니아 원주민이 쓰는 무기. 던지면 목표물을 맞추고 다시 내게 돌아온다고 하는 거. 그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정말로 그쪽 지역에서 만들었을까? 나폴리 제일의 목수인 에리코 선생도 이렇게 단단한 나무를 깎을 수 있는 장비도 드물 거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신의 산이 하도 좁은 골목으로 건물 밀집 지역이라서 마음대로 부메랑을 날릴 처지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선생의 공방이 끝나면 집에 와 밥 먹고, 청소하고, 옥상 테라스에 올라가, 밤이 되어 빨래하는 아줌마들이 다 내려가 빈 테라스에서 무거운 부메랑을 던지는 연습만 한다. 왼손으로 그리고 오른손으로. 이렇게 열심히 하다 보니 이제 역삼각형의 어깨가 딱 부러지고 근육도 붙어 완력 또한 만만하지 않게 됐다.

  오래 에리코 선생이 가게 한 쪽에 구두 수선공 돈 라파니엘로를 들여 좁은 공간을 맡겼다. 작은 작업대와 신발더미가 쌓인 공간 역시 ‘나’가 청소해야 한다. 돈 라파니엘로는 유럽의 땅끝 어딘가에서 나폴리로 온 빨간 머리와 녹색 눈을 한 작은 체구의 곱사등이다. 자기가 몇 살인지도 모르는 그가 처음 나폴리에 도착했을 때의 이름은 ‘라바넬로’였단다. 그러나 ‘딸기만한 크기의 순무’라는 별명으로 불리다가 ‘라파니엘로’가 됐다고. ‘나’가 보기에 라파니엘로는 좋은 사람이다. 가난한 사람한테는 신발을 수선해주고도 돈을 받지 않았다. 나폴리의 진짜 저소득층 사람들은 사철 맨발로 다녔는데, 엣다 모르겠다, 끝 장면까지 이야기하자면, 라파니엘로가 신의 산에서 구두수선공으로 있는 동안 모든 나폴리 주민들은 전부 신발을 신고 다니게 됐다. 그러니 천사 아냐? 천사 맞다. ‘나’는 샌들을 신고 다녔다. 한겨울에도 샌들만 신었다. 다른 신발과 다르게 샌들은 내 발보다 커도, 작아도 다른 샌들로 바꾸어 신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나’를 얼핏 본 라파니엘로는 ‘나’의 샌들도 발에 딱 맞게 수선해주어 기분 좋게 신고 다닐 수 있었다.

  나폴리 사람들이란. 아버지는 우리는 이탈리아에 살지만 이탈리아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나폴리 말을 하니까. 이탈리아 말을 해야 이탈리아 사람이니, 이탈리아 말을 하기 위해 공부를 해야 한다고, 안 그러면 미국에 사는 거하고 마찬가지라고 여러 번 이야기했다. 엄마가 보태기를, 고국이 별건가요, 먹을 걸 주어야 고국이지. 이 말을 들은 아버지, 그러면 아버지의 고국은 먹을 걸 주는 엄마라고. 이런 엄마가 깊은 병에 들고, 아버지는 심하게 충격을 받지만, 엄마의 병은 부부의 문제라서 아들한테는 조금도 영향을 끼치게 만들고 싶어하지 않는다.

  같은 건물에 사는 마리아. ‘나’하고 동갑내기. 생일은 ‘나’보다 조금 빠르다. 저 위에서 눈치 채셨지? ‘나’와 마리아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는데, 열세 살짜리니까 풋사랑이겠지, 지레짐작하지 마실 것. 하지만 이들 앞에 놓인 벽은 당연히 만만하지 않다.


  이제 본론.

  곱사등이 라파니엘로의 곱사등 안에는 뭐가 들었을까? 기형으로 변한 뼈? 그렇겠지. 그러나 책에 등장하는 돈 라파니엘로의 커다란 곱사등에는 언젠가는 펼쳐질 날개가 들어 있다. 그래서 책의 제목이 <Montedidio>가 “라파니엘로의 날개”로 변해버린 것. 날개가 돋는 날, 그는 어디로 날아갈까?

  날개가 달린 인격체를 우리는 천사라고 한다. 그런데, 라파니엘로의 말에 따르면 천사는 이동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유추하면, 이제 곱사등이 터져 날개가 돋힌 라파니엘로는 나폴리 신의 산에 거하는 천사가 된 거 아닐까? 정작 신의 산을 떠야 하는 인물은, 아직 한 번도 비행하지 못한 부메랑을 손에 든 화자 ‘나’이고.

  뭐 그렇다는 거다. 우화 또는 은유로 읽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페미나 상을 즐길 만하지 않은 거 같은데, 내가 유럽사람들 정서에 깡통이니 믿지 마시라.

  편집이 하도 널럴해서 3백 페이지라도 한나절이면 책 읽고 독후감도 푸지게 쓴다. 그래도 시간 남아 맥주 한 캔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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