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의 딸 조지 오웰 소설 전집 (무선)
조지 오웰 지음, 이영아 옮김 / 현암사 / 202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1871년 준남작 헤어의 작은 아들의 작은 아들로 태어난 찰스 헤어. 영국의 귀족 집안은 장자가 작위를 계승하고, 둘째 아들은 적과 흑, 군문이나 성직의 길을 택하는 것이 일종의 불문율이었다. 저低국교회 소속의 신부가 된 찰스 헤어를 한 마디로 말하자면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난 인간이었다.

  지금부터 찰스 헤어 신부의 캘릭터를 설명해야 마땅하지만 이전에 먼저 할 말이 있다. 반anti 볼셰비키 공산주의자인 조지 또는 우물, 즉 “Goerge Or-well”이 “신부”의 딸이라는 소설을 쓰기로 작정을 했으면, 이미 지난 세기에 망치를 든 철학자가 명백하게 아편임을 밝힌 종교 종사자를 그리 바람직하게 봤을 턱이 없다는 건 충분히 짐작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 그래서 작품에서 나오는 국교회와 가톨릭 신부들 가운데 제대로 된 인간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점을 감안하여 “또는 우물” 씨가 설정한 신부의 면모를 살펴보자.


  만일 찰스 헤어 신부가 2백년 전에 태어났더라면 자신은 시를 쓰거나 화석을 수집하며 2백년 전의 화폐가치로 연수입 40파운드로 교구를 운영하는 겸임 성직자로 완벽하게 편안한 인생을 누렸을 것이다. 하지만 19세기, 부르주아 계급의 전성기를 맞아 소수의 부르주아를 위하여 낮은 임금을 불사했던 노동자 계급은 당장 자기 먹고 살기도 죽을 맛이라 조금씩 종교 알기를 개떡처럼 여겼으며, 성직자 알기도 이젠 지까짓 것 까지는 아닐지언정 예전처럼 신주단지 모시듯 할 것을 바라지도, 요구하지도 못했다. 이 정도면 20세기 신부들은 자기들이 알아서 적응해야 마땅하거늘, 애초 준남작의 손자이며 귀족에다가 성직자 신분의 위용으로 살아생전 한 번도 “하층계급” 민중을 인간으로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찰스 헤어는, 꼭 봐야 아나, 스스로 만든 끔찍한 결혼생활을 하면서 고객의 대부분인 하층계급 신도 알기를 개밥그릇의 보리알 수준으로 여겨 1908년 37세에 나이프힐의 성 애설스탠 교회에 부임할 때 벌써 묘하게 무뚝뚝하며 얼굴에 경멸에 가까운 초연함을 깃든 겁나게 까탈스런 성격을 굳히고 있었다.

  그의 말 한 마디, 손짓 하나하나에 나이프힐 시민들에게 “나는 당신들의 사제이지 친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마, 인간으로서 나는 당신들을 혐오하고 경멸하니까 말이지.”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원래 이런 건 메시지를 주는 인간 보다 받는 분이 더 정확하고 빠르게 눈치채는 것이거든. 그리하여 당연하게도 하층계급 주민들에게 신부는 그저 증오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러면 지역의 유지나 하급 귀족 집안하고라도 잘 지내야 할 텐데 명문가와는 차례로 다투었고, 하급귀족 가문한테는 자신이 준남작의 손자라는 자만심을 도무지 접어주지 않아, 결투에 이은 사망까지 이르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을 정도였다. 부르주아 명문가와 향사들은, 잉글랜드에 교회가 성 애설스탠 교회 하나밖에 없니? 하면서 오랜 세월 겉으로만 미소를 교환할 뿐 속으로는 서로 반목하기를 마다하지 않던 부르주아와 향사 계급까지 찰스 헤어 신부 덕에 극적으로 화해를 해 사이좋게 손에 손잡고 이웃 마을에 있는 고교회파 국교회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다니 말 다 했지 뭐. 난 집 나간 검은 양이라 이런 방면에 아무것도 모르는데, 신부들은 자신의 교구에서도 활동을 하는 모양이다. 근데 헤어 신부는 자신이 몸소 하찮은 하층계급의 집을 일일이 방문해 그들과 말을 트는 것을 혐오하여 교구의 궂은 일은 죄다 아내에게 맡겨버렸고, 1921년에 아내가 천국의 편안함을 누리기 위하여 굴뚝 꼭대기로 빠져나간 후에는 외동딸 도러시한테 일임했다. 이 도러시가 <신부의 딸>, 주인공.

  동부 잉글랜드의 서퍽주 나이프힐로 말하자면 야트막한 언덕 꼭대기에 국교회 성당이 있고 바로 밑에 마을이 있다. 남쪽으로 고상한 분위기의 농경지역이 펼쳐져 있으며, 북쪽으로는 블라필고든 사탕무 정제소가 자리를 잡았다. 사탕무 정제소 사장 블라필고든 씨 역시 헤어 신부와 거의 완벽하게 척이 지는 바람에 시골 기준으로 다른 고상한 집안 사람들처럼 이웃 교회를 다니면서 헤어 신부는 물론이고 신부의 딸 도러시를 보면서도 노골적으로 얼굴을 찌푸리거나 길거리에 가래침이나 뱉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다만 몇 년에 한 번 있는 하원의원 선거철에만 환하게 웃는 얼굴로 도러시에게 모자에 손을 대는 시늉을 했을 뿐. 시민 2천명 가운데 절반이 바로 블라필고든 사탕무 정제소의 직원으로 근무하는 외지인이었고 이들은 거의 대부분, 그러니까 딱 한 가구를 빼놓고 신앙이 없었다. 나머지 절반, 그러니까 1천명에 달하는 농업, 축산업 종사자의 거의 전원이 국교회 신지였건만 찰스 헤어 신부가 1908년에 기어 들어온 이후 23년 동안 6백명이 넘는 신도가 2백명 이하로 급격하게 곤두박질친 데는 다 이런 배경이 있었다. 반 볼셰비키 공산주의자 오웰이 만들 수 있는 최선의 성직자의 모습이었다.


  그럼 성직자의 딸 도러시의 일상을 보자.

  도러시의 일상은 아침 다섯시 반 자명종에 이은 주기도문 낭송으로 시작한다. 조금 마르긴 했어도 튼튼하고 균형잡힌 몸, 눈가에 잔주름이 있으며 가만히 있으면 피곤해 보이는 입을 가진 28세 이전의 처녀. 몇 년 있으면 확실히 노처녀로 보일 모습이었고, 사실 그게 운명이다. 얼른 시집가면 되지 않느냐고? 그럴 수 없을 걸? 결혼해 교회를 떠나면 누가 교구의 궂은 일을 대신하고, 목사관과 교회를 관리하며, 철없는 아빠 신부를 돌보겠는가 말이지. 도러시가 제일 질색하는 일이 찬물에 목욕하는 건데, 그래서, 이 부사副詞 “그래서”가 중요하다, 자기가 아주 싫어하는 일이기 때문에 4월부터 11월까지 5시 반에 일어나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다. 스스로에게 고통을 주는 일종의 의식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쉬운 얘기로 기독교 환자 정도 아닐까.

  이날 아침에 이를 닦다가 도러시는 갑자기 내장으로 무시무시한 통증이 지나가는 것을 느낀다. 통증을 느껴? 그렇다. 진짜 아픈 게 아니라 마음 속에서 그렇게 크게 걱정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카길스 정육점에 지난 7개월 동안 한 푼도 주지 않고 외상으로 가지고 온 19파운드에서 20파운드에 이르는 외상값 때문이다. 나중에 정확한 금액이 21파운드 9실링 9펜스라고 밝혀지며, 카길스 씨 말고 하여간 사제관에 외상을 준 메인 스트리트의 상점 주인들이 단체로 들고 일어나 몰려와서 아우성을 치는 바람에 일괄적으로 갚기는 하겠지만, 앞부분에서 도러시가 내장통을 겪을 정도로 끙끙거리고 있을 때만 해도 헤어 신부는 그깟 도살업에 종사하는 하층계급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다 큰 딸이 어이없을 만큼 세상물정을 모르는 철부지로 보였다. 그깟 하찮은 고깃값이라니. 신부 자신은 다 쓰러져가는 교회 오르간에서 바람 새는 소리가 나는 걸 참지 못해 거금을 들여 오르간을 설치하고 날아오는 청구서를 몇 년째 모르쇠로 일관하던 차였는 걸. 원래 귀족들은 그런 식으로 사는 거란다. 하층계급은 그들대로 높으신 분에게 받을 돈이 있다는 걸 위안으로 삼고, 자긍심으로 여겨야 하는 법이란다. 이 만성 분노 상태의 신부가 입은 또 청와대라서 대구, 정어리, 민어 같은 값싸고 널리 먹는 생선은 입에도 대지 않아 밥상머리에 꼭 한우나 홍어가 올라와야 숟가락을 들어 헤어 집안의 엥겔계수는 하늘이 높은 줄 몰랐다. 3분의 1 아래로 떨어진 신도수는 수입의 급격한 하락을 불러, 신부의 먹을 거리만 빼고, 입을 거리, 사제관의 상태 같은 건 끝이 없이 헐벗을 수밖에 없었다.

  교회 종루에 모두 여덟 개의 종이 있었지만 지금은 오직 하나의 종만 울리고 나머지 일곱 개는 철사에 온몸이 꽁꽁 묶인 채 그냥 매달려 있기만 했다. 근데 이게 큰 위험을 초래할 재앙의 씨앗이기도 하다. 종의 무게 때문에 종루 건물이 이제는 언제 무너져 내려도 이상할 것이 전혀 없는 상태가 되었으니. 그러나 독자여, 걱정마시라. 책을 덮을 때까지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터이다. 하지만 다 해진 수단과 거대한 인부용 장화를 신고 다니는 교회 관리인 프로겟 씨는, 하필이면 교회 입구에 위치한 종루가 무너져 언제 신도들이 떨어진 무쇠종에 깔려 토막이 날 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여 있어서 두 주일에 한 번은 꼭 신부의 딸이 도러시에게 보완공사를 호소해야 했다. 신부한테 얘기해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는 걸 아니 그 딸한테라도 해보는 거다.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소설은 결국 사람 이야기. 이 작품에 등장하는 문제적 인물 두 명을 소개한다. 돈 좀 있고 허리하학적으로 자유분방해 세 명의 사생아를 키우는 50대 대머리 남자 워버턴 씨. 토박이는 아니고 런던으로 보이는 대도시에 살다가 가정부라고 소개한 어여쁜 여인 하나 데리고 이사해 왔다. 그러다 가정부가 덜컥 사내 아이를 낳았고 얼마 후 도무지 정착생활을 견디지 못한 아내이자 가정부가 대책 없이 집을 나가는 바람에 아기를 다른 두 아들을 돌보고 있는 친척한테 보냈다. 1년 가운데 겨우 몇 달만 나이프힐에 머물고 나머지는 유럽 각지를 돌며 최대한 인생을 즐기는 인물이다. 가만 보면 살면서 여성을 사랑해본 적도 없고, 사랑할 마음도 없이 그저 함께 하는 세월과 관계없이 여성과 함께 즐길 수 있기만을 바라는 인간이다. 시절이 20세기 초반이라 마음에 드는 여성이 나타나면 스스럼없음을 강조하며 함부로 몸을 더듬는 습관이 있다. 마음만은 너그러워 자신이 누구에게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약간, 좀 지나치다고 보일 수 있을 정도의 친절은 기꺼이 베푼다. 그래도 썅노무새끼인 건 분명하지만.

  사제관 근처에 워버턴 씨 집이 있고, 불과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 과부 셈프릴 부인이 산다. 셈프릴 부인은 대단한 나팔꾼이다. 문제는 없는 일을 마치 진짜로 자기 눈으로 봤고, 누가 들어도 그게 틀림없이 안 땐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는 아닐 것이라 믿게 만드는 힘이었다. 블라필고든 씨가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메인 스트리트에서 큰 규모로 유세를 벌일 때 워버턴 씨 눈에 도러시가 띄었고, 그래서 접근했으며, 8월이라 맨살이 드러난 팔뚝을 스스럼없이 슬슬 쓰다듬으며, 오늘 밤에 <양어장과 첩들>이란 작품을 출간한 로널드 뷸리 씨 부부가 자기네 집을 방문하는데 와서 문학적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자고 제안한다. 아버지 신부와 교구일에 치어 극도로 스트레스가 쌓인 도러시는 제의를 받아들여 밤 열시에 워버턴 씨 댁 현관을 노크했으며, 로널드 뷸리 씨 부부는 워버턴의 거짓말이었는데, 그래서 빈 집에서 둘만 대화를 하다가 또다시 더듬어대려고 하기도 해, 하던 일이 있기도 있었고, 아직 못한 일을 마저 해야 한다는 핑계로 집에서 나오긴 했지만, 워버턴 씨 댁 현관에서 다시 손목을 잡힌 도러시의 입술에 이 50대 부자 대머리가 키스를 해버리는 데 성공한다. 이때 바로 옆집 셈프릴 부인 댁의 창문에 휘리릭, 커튼이 쳐지는 것을 도러시가 본 듯했으니, 아이고 이걸 어쩌나. 이렇게 해서 20세기 식 주홍글자가 생기는 찰라?

  여기에 하나 더 있다. 조지 오웰이 썼으니 오웰 표가 하나 더 나오고 만다. 바로 지독한 가난의 모습. 어떻게 해서 도러시, 제목이 <신부의 딸>이니까 당연히 도러시가 가난의 제단에 오르게 되는 지는, 나는 미리 말할 수 없음. 독후감 길게 쓰긴 했지만 모두 5부 가운데 1부만 “간단하게” 소개했음을 양지하시기 바람. 2부, 명성에 걸맞지 않은 난데없는 장면전환에 당신 턱이 떨어질 지도 모르겠음.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4-05-27 17: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조지 오웰이 필명이라는건 알고 있었는데 ...Or-well이라는 의미가 있었나요?

Falstaff 2024-05-27 17:47   좋아요 1 | URL
저도 컨닝한 거랍니다. 마거릿 애트우드가 한 말이예요. ^^
 
숲속의 늙은 아이들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차은정 옮김 / 민음사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마거릿 애트우드가 83세이던 2022년에 출간한 단편집. 장편소설인줄 알았다. 그리고 제목이 Old Babes in the wood. 음. In the wood구나. At Wood가 아니라. 혹시 애트우드는 적어도 인생의 말미에 자신이 애트우드Atwood가 아니라 인우드Inwood였으면 하고, 심각하지는 않게, 바랐을 지도 모르겠다. 책에서는 “티그”라는 이름으로 출연하는 애트우드(작중 “넬”)의 마지막 반려와 함께 캐나다 산지, 광활한 숲 속을 활보하는 늙은 아이였으니 인우드였으면 했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말이지.

  마지막 반려? 그렇다. 물론 여든 넘어서 새로운 사랑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저 유명한 올리브 키터리지 여사도 70대엔 새로 혼인을 했어도 80대로 접어들면 아니었으니 뭐 그런가보다 하는 거다. 하여간 그리하여 책의 제목에 쓰인 “늙은 아이들”은 작품 중에 나이 든 커플 넬과 티그를 말한다. 근데 왜 “아이들”이냐고? 남은 생은 얼마 남지 않았지만 저 유년의 시절부터 다시 떠올리면 얼마든지 아이들일 수 있지 않을까? 까탈스럽게 생각하지 말자.


  단편소설 열다섯 편을 싣고 있는 작품집. 처음엔 연작소설 아닐까 싶었는데, 애트우드가 지난 몇 년 동안 잡지 같은 데 발표한 소설을 모아 책으로 엮은 거 같다. 2022년의 캐나다. 북미도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했고 애트우드의 동무들도 펜데믹에 휩쓸려 적지 않을 수가 갔을 터. 그리하여 작품 속에서 펜데믹 시기를 견디는 모습이 가끔 등장하기도 한다. 1부에서는 젊지 않았던 시절에 넬과 티그가 함께 받은 응급처치 강의를 받던 일,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 근처로 보이는 지역에서 머물던 때 동네의 두 늙은이에 대한 추억, 여행 중 집에서 기르던 고양이 스머지의 죽음 같은 것. 2부는 여덟 작품을 실었는데 옛 시절 마녀 비슷하게 스스로를 연출하여 외동딸을 보호하던 어머니를 그린 <나의 사악한 어머니>가 단연 제일 좋았다. 3부는 다시 제목을 “넬과 티그”로 해서 늙으면 쓸 수 있는 네 편의 단편들.


  나는 거장들의 마지막 혹은 마지막 가까운 시기에 쓴 작품을 신뢰하지 않는다. 일본 작가 가운데 제일 좋아하는 오에 겐자부로의 <만년양식집>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오에가 같은 책에서 “세계적으로 위대한 작가”라고 말했던 필립 로스의 <유령퇴장>에 실망했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거의 마지막 책 같은, 적어도 마지막 비슷한 책 《숲속의 늙은 아이들》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즐겁게 읽지 못했다. 뭐 다 좋을 수 없겠지만 애트우드는 여태 읽어본 작품 거의 다 즐겁게 읽은 것에 비한다면 조금은 그랬다. 마거릿 애트우드, 나이 들면 뭐 다 그런 거지. 독자이자 팬인 내 마음도 좋지 않다.

  여사님, 조만간에 한 번 봅시다. 거기선 만날 수 있지 않겠어요?


.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alstaff 2024-05-24 0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조지 오웰, <신부의 딸>
수요일. 페르난다 멜초르, <태풍의 계절>
금요일. 테스 건티, <우주의 알>
 
링컨 하이웨이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에이모 토울스. 당연히 <모스크바의 신사>. 읽을 때는 정말 재미있게 읽었고, 읽은 다음에는 신세계 백화점 앞 보도에 서서 <모스크바의 신사> 읽어보세요, 대박입니다, 재미없으면 책값 물어드리겠습니다, 오두방정을 떨 만큼 열광했다가, 날이 가고, 주가 가고, 달이 가기가 무섭게 휘리릭, 감동이 사라져버렸던 책이다. 처음엔 깊게 생각했다. 조금 지나도 깊게 생각했다. 그래서 결론 내리기를, 미국인이 쓴 전형적인 미국식 이야기. 러시아가 후세에 남긴 불멸의 세가지 예술품. <호두까기 인형>, <전쟁과 평화> 그리고 캐비어. 이게 왜 러시아가 남긴 3대 불멸인지를 미국인 관광객에게 설명하는 메트로폴 호텔 레스토랑의 웨이터 로스토프 백작의 언변도 그렇거니와 할머니한테 물려받은 책상 다리 속에 숨긴 예카테리나 2세 시대의 금화 세트.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을 수도 있는 비밀경찰 우두머리한테 비아냥 섞인 농담을 흘리는 장면 등등이 시간이 가면서 느끼했던 거다. 끓는 버터를 잔뜩 퍼부은 미디엄 레어 스테이크를 포식한 직후 같은 느낌. 동치미 한 사발이나 잘 익힌 배추김치 한 쪽 씹었으면 하는 기분.

  오늘 오전에 <링컨 하이웨이> 다 읽었고, 지금 기분도 딱 그렇다. 집에 와서 배추김치 말고 총각김치 한 입 베어 물었다. <링컨 하이웨이>는 무대가 미국이고 등장인물 전원이 미국인이며, 주인공(또는 조연) 가운데 한 명이 WASP 귀족 중의 귀족이라 <모스크바의 신사>에 비할 수 없이 미국적이다. 저 멀리 독립전쟁, 남북전쟁, 게티스버그 연설 같은 애국주의, 미대륙을 횡단하는 화물열차 무단 승차, 악당과 정의파 흑인, 악당을 달리는 열차에서 밀어 떨어뜨리는 미국식 권선징악, 모험에 나선 형제 등등. 역시 이 작품에서도 열쇠를 푸는 가장 중요한 소도구는 돈. 최근에 읽은 소설책 중에서 폴 오스터의 <4 3 2 1>에서도 그랬고, 셀리 리드가 쓴 <흐르는 강물처럼>에서도 그랬는데 <링컨 하이웨이>에서는 무려 두 번이나 사람이 죽어 하늘에서 쾅, 쾅, 돈벼락이 떨어진다. 오스터의 말대로 누군가의 죽음이 누군가한테는 행운을 주기도 한단다. 좋겠다. 나는 주변에 아무리 많은 사람이 죽어도 라면 국물 한 방울 떨어지지 않더라. 그러니 내 친지들은 죽지 말았으면 좋겠다.


  작품은 1954년 6월 12일에서 시작해 열흘 동안 벌어진 사건의 기록이다. 윌리엄스 원장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집에 도착한 열여덟 살의 에밋 왓슨. 15개월 전 모건 시내의 풍물장터에서 자기보다 한 학년 위이자 소도시의 이름난 개고기 지미 스나이더가 에밋의 아버지를 모욕하는 몰상식한 발언을 하는 걸 한 번 참고, 두 번 참고, 세 번을 참을 수 없어 딱 한 방, 잽을 날렸는데 한 방으로 코뼈가 부러진 지미가 뒷걸음질 치다가 마침 늘어진 케이블에 발모가지가 걸리는 바람에 자빠지면서 벽돌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그날부터 62일 후에 기어이 숟가락 놓고 말았다. 에밋은 재판을 포기하고 자신의 실수와 상해치사를 인정해 설라이나 소년원에서 18개월 노동교화형을 받았다. 그러나 그동안 20년 간 한 번도 농사에 성공해본 적이 없는 아버지가 숨을 거두어 이제 혼자 남은 동생 빌리를 부양해야 하는 입장을 고려한 당국이 3개월을 감해 15개월 만에 집으로 돌아오면서 8백쪽이 넘는 거대 모험담을 시작한다. 에밋도 집에 오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아직 모건에는 지미 스나이더의 가족과 친척, 친구들이 워낙 많이 살고, 그 외에도 아직 분노를 거두지 않은 사업상 거래인, 교회 신자들이 널려 있어 아버지가 죽은 집에 눌러 살기 힘들다는 것을. 그리고 몰랐던 것도 있다. 윌리엄스 소년원 원장의 차 트렁크에는 유랑극단의 셰익스피어 전문배우라고 주장하는 아버지의 범죄를 뒤집어쓰고 소년원에 들어온 더치스와, WASP 중의 WASP이며 미국 최고의 귀족 집안의 자재로, 길가에 방치된 소방차를 돌려주려고 소방차를 운전해 소방서로 가는 도중에 진짜로 불이 나 소방차를 출동시키지 못하게 한 소년, 그래서 건물이 홀랑 타버린 바람에 소년원 행을 막지 못한 울리가 타고 있었다. 소방대원은 소방차를 세워두고 바로 앞에 있는 밥집에서 순대국을 먹고 있었다나.

  에밋의 아버지는 토담대, 토지담보대출을 받아 농기계를 구입하려 했지만 알고 보니 전에 진 빚을 갚기 위해 대출을 받은 것이고, 매년 점점 소출이 줄었다가 작년엔 아예 제로로 떨어져 이제 아버지의 재산, 토지와 주택, 기타 동산과 부동산 모두를 집행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다만 헛간에 놓인 담청색 4도어 하드톱, 1948년형 스튜드베이커 랜드크루저는 에밋이 직접 노동해 번 돈으로 산 것이기 때문에 집행대상에서 제외했고. 그리하여 에밋은 똑똑한, 똑똑하다는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어서, 영낙없이 작가 에이미 토울스가 메타모르포젠, 변신한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는 동생 빌리와 함께 48시간 이내에 엄마를 찾아 링컨 하이웨이를 타고 1,500km를 달려 샌프란시스코로 갈 예정이었다. 엄마는 8년 전에 아버지와 두 아들 곁을 떠나 서쪽으로 가면서 매일 한 통씩 엽서를 보냈다. 아버지가 이를 감추고 있다가 죽은 다음에 빌리가 발견한 것이, 링컨 하이웨이를 타고 네브래스카 오갈랄라, 와이오밍 샤이엔, 롤린스, 옥스프링, 유타의 솔트레이크시티, 네바다 일리, 리노와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를 거쳐 7월 4일 샌프란시스코 링컨 공원의 리전오브아너 미술관에 도착 일정. 엽서의 소인이 말해줬다.

  이 똑똑한 빌리는 나중에 형 에밋의 목숨을 두 번 정도 살려주는데, 얼마나 침착하고 똑똑하고, 기억력 좋은 지, 진짜로 무서워지기까지 한다니까. 울리의 증조부가 금고에 걸어놓은 네 자리의 비밀번호를 울리가 평소에 했던 이야기를 기억해 단 여섯 번만에 풀어버리는 신공이라니. 형 살리는 건 한 번만 이야기하겠다. 에밋이 소년원에 들어갈 때, 빌리는 형에게 말한 적이 있다. “형, 분노가 솟구칠 때 상대를 때리지 말고 숫자를 열까지 세겠다고 약속해.” 이 한마디로. 그 후 에밋의 분노 게이지가 9이상으로 오르는 기회가 있을 예정이면, 때마침 빌리가 눈앞에 나타나 당시 얼굴표정으로 약속을 떠올리게 만든다. 다른 한 번은 직접 확인하시고. 그래서 에밋, 빌리 형제는 중고차이긴 하지만 상태가 나쁘지 않은 스튜드베이커를 타고 7월 4일 밤에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 샌프란시스코 리전오브아너 미술관에 올 엄마를 만나러 캘리포니아로 향……하려다가 생각지도 못한 소년원 동기생 더치스와 울리 때문에 오히려 캘리포니아의 반대 방향, 업스테이트 뉴욕, 정식명칭 에드론댁 산맥의 할아버지 별장으로 떠나게 된다.

  하필이면 왜 에드론댁? 거대한 부를 누리던 울리의 할아버지는 자신이 죽을 때 울리를 위해 신탁자금 형태로 조금의 돈을 남겨두었는데 1954년 현재가치로 15만 달러에 달했다. 문맥상 지금 우리 돈으로 치면 20억원이 넘는 돈 가치가 있지 않을까 싶다. 근데 이건 울리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매형이 관리를 하고 있는데, 울리가 소년원에 가게 되자 도무지 정상적인 성인으로 성장할 싹수가 없다고 매우 올바른 판단을 한 매형은, 울리가 성인이 되도 이것을 빼서 쓰지 못하게 막아버렸다. 울리가 여러모로 궁리를 해보니 에드론댁 별장에 있는 할아버지 방의 비밀금고에 딱 15만 달러의 현금이 있는 게 생각이 나서, 울리, 더치스, 에밋이 함께 가 금고를 열어 셋이 사이좋게 5만 달러씩 갖자고 제의해버렸다. 에밋은 앞으로 착하게 살자고 굳게 마음먹어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지만, 착한 천성을 가지고 있으나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면 크게 사고를 칠 수도 있는 성격의 더치스가 울리만 태운 채 에밋의 스튜드베이커를 몰고 뉴욕으로 날아가버리는 바람에 에밋과 빌리도, 돈이 없어 화물열차를 훔쳐 타고 뉴욕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에밋은 더치스의 성격이 이렇다고 빌리에게 이야기한다.

  “더치스는 에너지와 열정뿐 아니라 선의로도 가득 차 있어. 그러나 때때로 그의 에너지와 열정이 그의 선의에 장애가 되고, 그럴 경우 그 결과는 종종 다른 사람에게 떨어진다는 점이야.”  (p.217)


  스튜드베이커의 트렁크에 든 스페어 타이어 아래 깊숙한 곳에는 아버지가 남긴 봉투가 있어서, 평생 운 없는 슐레밀로 살았으나 어긋난 행위를 한 적이 없는 아버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법을 어기고 에밋에게 남긴 20달러짜리 빳빳한 신권 150장, 합해서 3천 달러, 지금 우리 돈으로 5천만원을 넘어갈 것 같은 현금이 들어 있었다. 캘리포니아에 도착하면, 목수일을 배운 에밋이 허름한 집을 사서 수리해 비싸게 파는 사업을 할 종잣돈으로 쓸 것이라 결코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해서 에밋과 빌리의 20세기 미국판 오딧세이아는 시작한다. 결말이 어떠할지 상상이 가시지? 미국의 대중예술에서 모험에 나선 이들을 걱정할 필요가 조금도 없다는 건 맞는데, 나머지도 그럴까?


.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4-05-22 10: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모스크바의 신사> 저도 진짜 재미나게 읽고 와우! 했는데.... 폴스타프 님처럼 좀 지나니까 완전 휘발되더라고요? 재미도 감동도 다 휘발 ㅋㅋㅋㅋㅋ 그 후로 이 작가 책은 그냥 손이 안 가더라고요; 처음 만난 작품이 아주 좋았는데도 더는 안 읽고 싶어지는 참 신기한 작가.

Falstaff 2024-05-23 05:35   좋아요 0 | URL
그죠, ㅎㅎㅎ 그게 다 ˝버터의 힘˝입니다.

케이 2024-05-23 13:17   좋아요 3 | URL
저도 <모스크바의 신사> 는 이상하게 다시 읽고 싶은 생각이 안드는데, 왜 그런지 생각해보니 주인공이 너무 나이스한 남자라서 그런 것같아요 ㅋㅋㅋ
너무 별로인 주인공도 읽기 괴롭지만, 또 어느 정도는 찌질하고 덜 떨어져야 정이가고 또 읽고 싶고 그렇더라고요. (예) 미성년의 아르까지 같은 ㅎㅎㅎ (저만 그런가요?)
오랜만에 와서 별 것아닌 글만 남기고 갑니다.
저는 요즘 책이고 글이고 아무 것도 못하고 애만 키워요.
그런데 팔스타프님이 예전에 하셨던 책은 언제든지 읽을 수 있다. 지금은 애를 키울 때니 애만 키우면 된다고 하셨던 말씀이 묘하게 위안이 된답니다.
저희 애들은 이제 40개월 되갑니다. 힘들지만 최고로 귀여운 시절이 가는 게 좀 아쉽기도 한 요즘입니다.
언제나 건강하세요!

Falstaff 2024-05-23 16:17   좋아요 1 | URL
케이 님,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
벌써 40개월이군요! 쌍둥이라고 기억하는데 제일 예쁠 때네요. 저도 그새 손자가 하나 생겨서 14개월이 넘었답니다. 눈에 넣고 다니느라 요즘 눈꺼풀이 무거워요. ㅋㅋㅋㅋ
책은 언제든지 읽을 수 있더라고요. 저도 먹고 사느라 몇 십 년 안 읽다가 다시 시작한 거거든요. 인생 뭐 있습니까? 지금 제일 중요한 거에 집중하면 그게 제일이지요. 이제 저는 몇 안 남은 취미만 열나게 즐기며 산답니다. 책 읽는 거, 음악 듣는 거. 인생에서 지금만큼 행복한 시절이 없었지 싶습니다.
내내 가족 모두 건강하세요!

stella.K 2024-05-24 1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비유가 참! 버터에 동치미나 총각김치. 사실은 환상의 조합아니겠습니까?
이 사람의 책은 모스크바 하나면 되겠군요. ㅋ

Falstaff 2024-05-25 13:16   좋아요 1 | URL
아이구 머리야..... 어제 오랜만에 꽐라 itself가 되는 바람에 얼굴이 땡땡 부었습니다. ㅋㅋㅋㅋ 이제야 답글을 다는군요.
옙. 토울스는 <모스크바의 신사> 한 편 정도면 뭐...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요, 도서관 서가에 있으면 저절로 손이 가기는 하더군요.
 
보스턴 사람들
헨리 제임스 지음, 김윤하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헨리 제임스가 19세기 미국 페미니즘 운동가 사회에 틈입했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올리브 챈설러라는 여성. 이이는 여성 자코뱅 당원, 즉 니힐리스트 과격파로 분류할 수 있다. “거센 파도에 시달리는 작은 배 같은 성격”이라고 제임스는 묘사하고 있는데, 이게 어떤 성격을 말하는지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성격이 올바르거나 삐딱하거나, 진실되거나 위선적이거나, 품위가 있거나 천박하거나를 막론하고 거센 파도에 시달리면 일단 살기위해 온갖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근데 이 문장 앞뒤로 무어라고 나오는가 하면, “낮고 기분 좋은, 교양있는 목소리는 불안해 하고 있고 그것을 숨기려 애쓰는 눈치”이며, “’수줍음 발작 증상’이 있어서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조차 바라보지 못한다”고 되어 있다. 작품의 결말 부분에 이르러 올리브 챈설리가 행한 행동이 올리브의 성격으로 얼마나 큰 용기를 필요로 했던 것인지 독자들은 즉각 알아차려야 하는데, 문제는 이걸 읽는 순간부터 결말까지 무려 7백 페이지 분량의 길고 장황한 세밀묘사의 파도가 넘실거리고 있다는 거다. 아마 백 명의 독자 가운데 아흔여덟 명은 챈설러의 성격을 새까맣게 잊고 있을 터. 장황하다고? 그렇다. 이이와 필적할 만한 작가는 프랑스 소설시대를 연 오노레 드 발자크, 그리고 21세기에 헨리 제임스를 공부해 박사학위를 딴 영국 작가 앨런 홀링허스트를 들 수 있지 않을까? 무슨 말씀인고 하면, 만일 헨리 제임스가 21세기의 우리나라에서 활동했다면 데뷔도 하지 못했을 거란 말씀. 아, 물론 과장 좀 해서 그렇다. 지금 시대에 어떤 독자가 이렇게 장황하고 세밀한 묘사를 찾아 읽느냐고. 조금 미쳤거나 나처럼 가진 거라고는 시간밖에 없는 백수/백조 아니면.

  작품의 시대는 남북전쟁이 끝나고 몇 년 되지 않았을 때이니 1860년대 후반이나 70년대 초반. 남부군으로 참전했다가 패전의 쓴 맛을 보고 돌아온 미시시피 출신의 매력적인 변호사 베이질 랜섬이 보스턴에 사는 먼 친척 올리브 첸설러를 찾아온다. 멋진 용모와 아름다운 눈, 고상한 느낌의 두상에 곧고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이 전체적으로 다소 딱딱하고 답답한 느낌이 나는 남자. 가뜩이나 인구가 적은데 노예까지 전부 해방되어 거의 황폐해진 남부를 떠나 뉴욕에서 변호사로 새 삶을 찾고자 하는 인물이다. 베이질이 올리브에게 편지를 했고, 올리브가 이애 답장을 하자 뉴욕 가는 김에 보스턴 친척에게 들른 것. 여기까지 보면 베이질과 올리브 사이에 뭔가 일이 생기겠구나 싶지만 베이질이 좋아하는 여성상으로 말하자면 올리브하고는 아예 인연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너무 많이 생각하지 않고 정치문제에 어떤 책임도 느끼지 않는 여성”이며 “사사로이 살아가고 수동적이며 반대인 것에 무감해서 공공의 일은 더 강인한 성gender”인 남자한테 맡기면 장땡이라고 생각하는 부류다. 그러니 여성 자코뱅 당원하고 맞기를 바라면 완전히 오산일 수밖에. 엉뚱하게도 베이질 선생에게 눈독을 들이는 여성은 남편이 죽고 수년간 유럽에서 체류한 경험에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는 속물이자 아들 하나 딸린 과부이며 올리브의 언니인 아델라인 여사. 아델라인이 마침 뉴욕에 살며 인생을 새로 시작해야 하지만 어떻게 살 수 있을까 골몰하면서 한 달 전부터 방문차 와 있던 거다.

  설마 다른 사람도 아니고 헨리 제임스가 주인공 올리브 첸설러의 성격을 위에 쓴 것처럼 간단하게 몇 줄 끼적였을 따름이라 생각하시는 건 아니지? 올리브의 가장 중요한 점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지극한 소명은 자비를 베푸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였다. 부르주아, 미혼, 독신이며 사교에 능한 “진짜 노처녀”가 이 여자의 본질이고 운명 그 자체라고 작가는 웅변한다. 뼛속까지 독신주의자인 올리브는 헨리 제임스가 확 말해버리지 않아서 그렇지 상당한 정도로 레즈비언이 아닐까 의심이 들기도 한다. 크게 문제가 되는 건 아니지만 “진짜 노처녀”의 뜻이 늙은 처녀일까, 아니면 처녀가 아니라는(No) 말일까? 하여간 레즈비언 성향이라 했으니 상대가 있어야 할 터. 이제부터 소개해 올리겠다.


  부모와 딸 하나로 구성된 테런트 가족이 있다. 외동딸 버리나 테런트가 위에서 말한 올리브의 상대역. 19세기 소설의 여자 주인공답게 무척 젊고, 날씬하고 예쁘다. 십대 후반의 나이에 벌써 나라의 서쪽에서는 일류 연설가로 소문이 날 정도로 신선하고 시적인 연설을 자랑한다. 좀 웃기는 것이 “자신이 하는 연설이 아니라 ‘부름받아’ 하는 연설”이라고 주장한다는 거. 실제로 교양있고 고상한 청중 앞에서 더욱 수월하게 연설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는데, ‘부름받아’ 하는 연설이 말이 좋아 부름을 받는 것이지 혹시 누군가의 주장을 받아써서 기가 막히게 윤색을 한 다음에 타고난 말재주로 청중들에게 쏟아 붓는 거 아닌가 싶은 마음이 팍 든다. 버리나는… 자꾸 ‘버리나’ ‘버리나’ 하다가 진짜로 책 속에서 “버릴 것은 다 버린 버리나는” 이 비슷한 말이 나오자 나는 미칠 거 같았는데, 하여간 버리나는 모든 종류의 속박으로부터 여성의 해방에 공감하고 추종하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스스로 자신의 연설이 내부에서 시작하는 게 아니라 외부에서 영감이 찾아오는 것이라는 말을 들은 베이질 랜섬은 버리나의 여성 해방에 대한 공감, 추종, 관심 자체를 의심하기도 한다.

  버리나의 아버지 셀라 태런트 씨는 한 마디로 사기꾼이다. 젊은 시절에 방문 판매원으로 일하다가 어떻게 왕년에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던 배운 집안의 따님을 꼬드겨 결혼에 성공해 버리나를 낳고 키웠다. 그동안 자신은 최면술을 배워 최면을 걸어 질환을 치료하는 최면술 치료사로 활동하고 자기 이름 앞에 스스로 닥터를 붙여 “닥터 테런트”로 활약하고 있다. 잘 사는 건 아니지만 먹고 사는 데 큰 불편은 없을 정도이다. 그렇게 근근이라도 살아가면 문제가 없을 텐데 진짜 부르주아로 살고 싶은 허망한 희망사항이 스스로를 사기꾼으로 만들고 있다는 걸 아마 본인은 몰랐을 걸? 베이질 랜섬은 한눈에 닥터 테런트를 보고 떠돌아다니며 한탕 잡아보려는 역겨운 부류라고 단정한다. 거짓말쟁이에 교활하고 속물이며 비열한으로 가히 최하위의 인물이라 저런 딸이 있다는 것이 짜증나고 당황스러운 사실일 정도라니 뭐 말 다했지.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니까 딸한테마저 더없이 사랑스럽고 속세를 초월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사기꾼 무리 같은 인상을 받았다. 뭔가 전시품 같고 공연단에 속한 것 같고, 항상 가스등 불빛 속에 사는 사람 같은 분위기.

  베이질 랜섬이 미스 첸설러 집에서 특별하지 않은 저녁식사를 한 다음에 올리브, 아델라인과 함께 ‘새로운 사상’을 가진 몇몇 친구들이 금욕주의자 미스 버즈아이의 집 연설회에 동참하며 올리브-버리나-베이질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다. 미스 버즈아이는 노예제 폐지 운동에 앞장서고 가장 열정적으로 활동했던 사람 가운데 한 명으로 이제는 나이가 많아 현역에서는 거의 은퇴를 한 상태였다. 이날 공식적인 연설자는 여성해방운동의 위대한 주창자로 알려진 퍼린더 여사였다. 255쪽에 가면 퍼린더 여사의 여성해방에 관한 입장이 “역설적”으로 나오는 바, 소개하면:

  “그들이(올리브와 버린다) 여성의 역사적 불행에 역점을 두는 데 반해, 퍼린더 여사는 그런 일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역사에 관한 지식조차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여사는 모든 것이 바로 오늘 시작된 듯, 여성이 불행한가 아닌가와는 상관없이 여성의 권리를 요구했다.”

  작품 속에서 퍼린더 여사는 적극적으로 연설을 하지 않는다. 위대한 페미니즘 주창자의 연설을 헨리 제임스도 “창작”하기엔 버거웠던 것 같다. 내용이 어떠했는지는 몰라도 올리브와 버린다는 여사의 연설에 그리 큰 공감을 하지 않은 것 같다. 퍼린더 여사가 연설 비슷하게 하고, 이어서 버린다가 연단에 올라 열정적인 웅변을 한다. 당연히 청중들은 열광을 하며 올리브는 이 모습에 반해 그 자리에서 당장 올리브를 후원하기로 결심해버렸다. 그러나 베이질 랜섬은 연설 말고 연설의 내용을 꼼꼼하게 들었다. 이후 랜섬은 버린다의 연설에 관해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연설가로서의 자질을 확인했고, 토론 분야와 개혁의 대의에서 그녀의 존재가 갖는 중요성도 판별했다. 그녀의 연설은 그 자체로는 기껏해야 ‘학교’ 토론회에서 머리 좋은 소녀가 암기해서 낭송하는 재치 있는 에세이 정도의 가치밖에 없었다. 논지가 얄팍하고 횡설수설인 데다 일반론의 범벅에 불과한데, 단지 버레지 부인 집의 베일에 씌운 램프 불빛을 받아 그럴듯하게 빛을 발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p.418)

  그리하여 결국 버리나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유창하게 재치있는 말을 늘어놓는 삼류 장광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럴듯하게 꾸미는 협잡 같은 것에 대한) 수요는 요즘 날로 높아지고 있으며, 귀가 얇고 군중심리에 휩쓸리기 좋아하는 우둔한 대중, 그의 조국의 계몽된 민주주의는 그러한 헛소리를 얼마든지 삼켜줄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그녀가 앞으로도 몇 년 동안은 (중략) 일을 계속해 나갈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그러는 와중에 평생 풍족하게 살 만한 재산을 마련하게 될 터였다.” (p.500)

  이렇게 아버지 닥터 테러트의 꿈을 달성하게 해줄 착한 딸? 에이, 그거야 두고 봐야 알지.


  나는 이 책을 페미니스트가 읽어봤으면 좋겠다. 내가 읽기에 헨리 제임스가 여성해방을 주창하는 인물들을 등장시켜 활발하게 논의를 진전시켰지만 작품은 페미니즘 적이 아니다, 오히려 반 페미니즘 입장에 가깝다, 라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게 19세기 중후반 시절의 생각을 21세기 초반에 읽었기 때문에 그렇게 느낀 것인지, 즉 시대를 감안하면 페미니즘이 맞기는 하지만 지금 시각으로 보아서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인지, 아니면 헨리 제임스가 페미니즘을 정말로 은근히 혹은 노골적으로 비꼰 것인지 지금의 페미니스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 지 알고 싶다. 이건 정말 궁금해서 하는 말이다. 참고로 나는 내놓고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하는 남자들은 믿지 않는 족속이다.


.


댓글(5)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4-05-20 12: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앗 저 이 책 샀는데요, 폴스타프 님은 벌써 읽으셨군요!

저는 다른 분의 리뷰를 먼저 보고 이 책을 사긴 했는데 ‘헨리 제임스가 페미니스트를?‘ 의심이 들긴 했었습니다. 그런데 폴스타프 님의 이 리뷰를 읽으니 반페미니즘 소설일 거라는 쪽으로 확실히 기우네요. 제가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Falstaff 2024-05-20 14:32   좋아요 0 | URL
옙. 다락방 님의 리뷰, 열심히 기다리겠습니다! 저도 아닌 거 같아서... 전문가의 확인이 필요합니다! ㅎㅎㅎ

잠자냥 2024-05-22 10:52   좋아요 0 | URL
전문가 다락방 기다린다...ㅋㅋㅋㅋㅋ

건수하 2024-05-20 16: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버린다, 버레지 부인 ..은 의도하신 유머인가요? ㅎㅎ

‘보스턴 결혼‘ 이 이 책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하던데,
이 소설이 페미니즘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는 안 읽어봐서 모르겠지만,
헨리 제임스 소설 저는 폴스타프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장황한 묘사 때문에 못 읽겠더라고요. <나사의 회전> 겨우 읽고 그 뒤로는 안 읽습니다...


다락방님이 읽어보신다니 저도 그 글을 읽어보겠습니다 :)

Falstaff 2024-05-20 20:09   좋아요 1 | URL
ㅎㅎㅎ 정말 본문에 나옵니다. 읽을 때부터 버리나, 버리나 좀 우스웠는데 ˝버릴 것을 다 버린 버리나˝ 나오자마자 어떻게 웃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ㅋㅋㅋㅋ
헨리 제임스는 정말 묘사가 느므느므 디테일하고 장황해서 함부로 추천하기 쉽지 않은 작가인데 우짜 눈에 띄면 그냥 못 넘어가는 매력도 있어서 거 참, 애증의 작가입니다. ^^
 
루시 게이하트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2
윌라 캐더 지음, 임슬애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양하게 촌스러운, 윌라 캐더의 저 오랜 시절, 누추해서 아름다운 것들. 포스트 모던 시절이어서 더 영묘한 한 세기 전의 삶의 이야기. 트롯은 시간을 초월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목련 2024-05-20 16: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샀는데 벌써 다 읽으셨군요^^

Falstaff 2024-05-20 20:10   좋아요 0 | URL
이 책 읽는데 반나절이면 충분합니다. 읏쌰, 시작하셔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