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바디스 다이어리
조지 그로스미스.위든 그로스미스 지음, 최명희 옮김 / 동안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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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에 글 잘 쓰는 스뚜르가츠키 형제가 있어 숙고해볼 만한 소설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십억년>을 썼듯이 영국에서도 글 잘 쓰는 형제가 나타나 100대 영문학 소설 리스트에 이름을 당당히 올리는 <노바디스 다이어리: The Dairy of a Nobody>를 썼는데 제목을 우리말로 하자면 <무명씨의 일기> 정도? '무명씨의 일기'보단 '노바디스 다이어리'가 더 멋있나? 뭐 출판사 맘대로긴 하지만 글쎄.

 이거, 희극 소설. 1888년부터 89년까지 잡지 <펀치>에 연재해 공전의 안타를 쳤다는데, 이것도 영어로 해볼까? 센세이셔널한 히트를 쳐 런던의 종이값이 하늘 높은 줄 몰랐다는 뒷 얘기.  세계 75대 영문 소설의 반열에 오른 킹슬리 에이미스의 <럭키 짐> 독후감에서도 한 번 짚어봤듯이 특히 희극의 경우는 비극이나 일반 작품들과는 달리 지구 북반구의 정 반대편에 있는 극동 아시아 인종이 그리니치 표준시를 사용하는 인간들의 웃음 코드를 이해하는데 매우 애로가 있다. 더구나 <노바디스...>에선 영어 발음 상 동음이의어나 유사발음 단어를 가지고 나름대로 진지하고 희한하고 기발하고 요절복통인 유머를 줄창 쏟아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난 서양 사람들이 그깟 말장난 가지고 그토록 통절하게, 작은 창자가 끊어지게 웃어제낄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한민국에선 잘 해봤자 아재개그 이상이 아닐 텐데 말이지.

 물론 전혀 웃기지 않아서 재미 없었단 얘기는 아닌데, 역시 이 책도 희극인지 비극인지 이것도 저것도 아닌지 모르는 상태에서 영미의 유명 미디어에 의해 100대 세계명작, 100대 영어소설 이 비슷한 평가만 믿고 덜컥 샀다가 쉬운 얘기로 똥 밟았다. 이건 위에서 얘기한 거 다시 얘기하지만 전적으로 동서양의 문화차이고 19세기와 21세기의 세대차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 '차이'들을 더하여 말씀드리자면 지금의 동아시아 독자한텐 그냥 그런 작품.

 작은 판형의 260쪽. 삽화가 많아서 한 나절이면 후딱 읽어치울 수 있는 짧고 (에잇!)재미난 책이지만 다른 독자에겐 권하지 않겠다. 이거 말고도 읽을 책이 없냐, 돈이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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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일드 작품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2
오스카 와일드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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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 이어 두번째 읽은 와일드 책. 동화 <행복한 왕자>와 단편소설 네 편, 희곡 한 편을 담았다. 솔까? 21세기 독자들에게 <살로메> 말고는 그리 대단하지 않은 작품(아니면 와일드하고 내가 궁합이 영 맞지 않는 거다). 허, 내가 지금 너무 무모하게 얘기하는 거 아닌가 싶다. 와일드 팬이 워낙 많아 이러다 싸다구 한 방 얻어 걸리지? 참, '싸다구'란 말 나온 김에 이 생각이 난다. 우리동네 타이어 가게 간판이 '싸다구'다. 다른 타이어 가게보다 한 푼이라도 비싸면 싸다구 맞겠다는 의미로 '싸다구'란 옥호를 내걸었는데 이 양반 장사는 잘 안 되는 눈치다. 그래도 제목 잘 지었다. '비싸다구'보단 '싸다구'가 가게 이름으론 제격 아닌가.

 <도리언....> 부터 이 책에 수록한 <아서 세빌 경의 범죄> <캔터빌의 유령> <모범적인 백만장자>에 이르기까지 와일드의 전매특허, 유미주의 혹은 예술지상주의 혹은 예술을 위한 예술을 푹 감상할 수 있으나 짧거나 긴 소설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와일드의 유미주의 세계를 펼쳐내고 있는 것이 당연 <살로메>.


 이쯤에서 또다른 극작가 호프만슈탈이 대본을 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살로메>, 마지막 부분을 한 번 보자. 영국 로열 오페라 하우스 공연 장면이다.


https://youtu.be/XwSoRQSr5dY

 

 


 이 오페라 연출의 아쉬운 점은 요카난의 잘린 대가리가 허벌 가볍다는 거. 해골과 그 안에 들은 뇌와 유독히 빽빽하게 채워진 혈관과 신경다발을 포함한 인간 대가리가 생각보다 무겁다는 걸 연출자들이 가끔 잊는 거 같다.

 며칠 전에 쓴 프리드리히 헤벨의 희곡 <헤롯과 마리암네>에서도 살로메가 등장하지만 와일드의 살로메가 워낙 강렬해서, 그리고 헤벨의 작품 속에선 살로메가 완전 조연, 없어도 무방한 역할에 그치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와일드의 살로메를 진짜 이야기인줄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런 사람들 전부가 희곡 <살로메>를 읽거나 R 슈트라우스의 오페라를 본 것이 아니라 아마 영화 <왕 중 왕> 예전에 연초 3일간 법정 공휴일이었을 때 TV를 통해서 수십번 방영했던 더빙영화에서 브리짓 바즐렌이 헤롯의 연회에서 춤을 추고는 세례 요한의 목을 달라고 청하는 장면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도 젊은 시절까지 정말 살로메가 은쟁반에 요한/요카난의 대가리를 담아 오라고 해서 그렇게 됐는 줄 알았으니까.

 살로메는 팜 파탈 정도가 아니라 끝간 데 없는 소유욕의 화신. 내가 아무리 썰을 풀어도 와일드의 죽여주는 미문을 제대로 표현할 도리가 없다. 재주가 없으면 다음 순서는 컨닝. 살로메의 대사를 옮긴다.


 (손에 쥔 은 방패 위에 요카난의 머리가 놓여있다. 살로메가 그것을 움켜쥔다)

 아! 당신은 당신에게 입 맞추지 못하게 했지, 요카난. 흠! 이제 나는 당신에게 입 맞출 거야. 잘 익은 과일을 깨물 듯이 내 이로 당신 입술을 깨물 거야. 그래, 당신에게 입을 맞출 거야, 요카난. 내가 그렇게 할 거라고 말했잖아.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그렇게 말했어. 아! 이제 당신에게 입을 맞출 거야……. 하지만 어째서 나를 보지 않는 거지, 요카난? 그렇게 무시무시하던 당신의 두 눈, 분노와 경멸이 가득하던 두 눈이 지금은 감겨 있네. 왜 두 눈이 감겨 있지? 눈을 떠! 눈꺼풀을 들어 올려, 요카난! …… (중략) …… 나는 당신의 아름다움에 목말라 있어. 나는 당신의 몸에 굶주려 있어.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요카난? 홍수도 큰물도 내 뜨거운 감정을 끌 수가 없는데. 나는 공주였어, 그런데 당신은 나를 경멸했지. 나는 처녀였어, 그런데 당신은 나한테서 순결을 빼앗았지. 나는 정숙했어, 그런데 당신은 내 핏속에 불을 채웠지……. 아! 아! 당신은 나를 보지 않았나? 나를 보았다면 당신은 나를 사랑했을 거야. 틀림없이 나를 사랑했을 거야. 사랑의 신비는 죽음의 신비보다 위대하지 ……(중략)……

 아! 나는 당신에게 입을 맞추었어, 요카난, 당신 입에 내 입을 맞추었어. 당신 입술에서는 쓴 맛이 나네. 피의 맛인가? …… 아니, 어쩌면 사랑의 맛일지도 몰라……, 사람들은 사랑에서 쓴 맛이 난다고 하지……,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무슨 상관인가? 나는 당신에게 입을 맞추었는데, 요카난, 당신의 입에 내 입을 맞추었는데.

 (달빛이 살로메에게 떨어지며 그녀를 환하게 비춘다.)


 <살로메> 한 편을 위해서 이 책을 살 이유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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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대답 민음의 시 125
김언희 지음 / 민음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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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넘기면 스스로 쓴 서문이 나온다. 인용하겠다.



自序


이 시편들은 坐入用이

아닙니다.



 오른 쪽 맞춰쓰기로 한 자서에 나오는 한자말, 좌입용坐入用이 도대체 뭘 말하는 걸까. 앉을 좌, 들 입, 쓸 용. 앉아서 들어가는 용도의 시들이 아니란 얘기. 네이버 사전 찾아봤더니 이런 단어가 없단다. 중국어 사전에도, 한자사전에도 없단다. 그럼 시인이 만든 말이다. 좋다. 시인이 시 쓰면서 단어 만드는 거는 특권이니까. 근데 좌입용이 뭘까? 이 시를 읽은 것이 2017년 3월 10일. 불과 이틀 전인 3월 8일. 나는 이 동네 종합병원에서 종합건강검진을 받았고 검진 항목에 위 내시경, 대장 내시경이 있었다. 아, 수면 내시경을 선택했지만 내시경 받는 도중에 잠에서 깨는 불상사가 벌어졌는데 하필이면 대장에서 용종 하나를 떼내는 순간이었다. 집게 비슷한 게 내 큰창자 속에 들어가 뭔가를 집더니 탁, 자르는 광경. 이어지는 출혈. 입엔 위 내시경 용 튜브가 삽입되어 있어 말도 못하고 간호사한테 손짓으로 수면약 좀 더 넣어달라고 시늉했다. 인간이 가진 신체 장기 가운데 유일하게 우주와 통하는 소화기관의 처음과 끝이 다 훤하게 뚫려있던 기억. 그러니 불과 이틀 후 김언희 시인이 말하는 '좌입용坐入用'을 읽으면서 '인간의 신체 기관에 밀어 넣는 용도'라고 퍼뜩 생각이 들던 게 어쩌면 당연하지 않았겠는가. 자연스레 '좌약'을 사전에서 찾아봤다. "요도, 항문, 질 따위를 통하여 몸 안에 끼워 넣어 체온이나 분비물로 녹인 후에 약효가 나타나게 만든 약." 그럼 좌입용은 좌약과 비슷하게 "요도, 항문, 질 따위를 통하여 몸 안에 끼워 넣을 용도"라고 해석해도 무방할 것 같은데, 그 용도가 아니라고 했으니 적어도 시를 읽으면서 사람에게 약효나 즐거움이나 동감이나 시적 쾌감을 느끼게 해주지 않을 거라는 말인가 싶었다. 아, 미리 밝혀두지만 난 김언희 시인의 시를 생전 처음 읽는 거였다.

 '자서' 좌입용이 아니라는 말을 오래 궁리하다가 결국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드디어 책을 넘겨 첫번째 시를 읽었다.



 예를 들면



 예를 들면, 백 년 동안 장롱 아래 깔려 있듯이, 깔린 채 팔만 개의 막대 사탕을 빨듯이,


 예를 들면, 흡혈귀 이상으로 흡혈귀가 되어가듯이, 하루도 남의 피를 빨지 않고는 살 수 없듯이,


 예를 들면, 장님이 되어가는 사람의 하나 남은 눈동자를 후벼 먹듯이, 하나뿐인 출구가 매독 걸린 입이듯이,


 예를 들면, 그것의 피를 묻히지 않으려고 이것의 피를 묻히듯이, 뭔가를 안 하려고 뭔가를 하듯이,


 예를 들면, 주방 기구와 섹스하듯이, 너무나 모멸적인 섹스 파트너, 그것이 너를 삼키듯이 토해내듯이,


 예를 들면, 어제가 기억나지 않듯이, 어제 뭐 했지? 어제 뭐 했더라……? 1분도 기억나지 않듯이,


(전문. 13쪽)

(3연에 나오는 "장님이 되어가는 사람의 하나 남은 눈동자"는 마야코프스키의 <나 자신에 관하여> 중에서 나오는 시어라고 주註가 달려있다)


 아, 자서의 좌입용이란 단어를 해석한 것이 많이 틀리진 않겠다 싶은 느낌이 팍 왔다. 근데 문제는 시인이 이렇게 격렬한 단어들을 모아모아 도무지 뭘 주장하고 있는지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는 것. '백년 동안 장롱 아래 깔려 있는 게 뭘까? 물론 백년은 오랜 세월을 의미하겠지. 그럼 거의 모든 집구석의 장롱을 내려다 보시라. 장롱의 짧은 다리 네 개 가운데 적어도 하나는 딱딱한 마분지나 포장지 접은 거, 아니면 나무 판자를 깔고 있을 거다. 그거 말하는 거야? 팔만 개의 막대 사탕은? 하나뿐인 출구라는 '매독 걸린 입'은 도대체 뭐야? 주방 기구하고 섹스를 해? 그게 너무 모멸적인 섹스 파트너야? 혹시 마스터베이션 하시는 건가요? 도대체 오리무중. 그냥 글 또는 시의 이미지만 느끼라는 이미지즘적 시는 아닌 게 분명하니 뭔가를 주장하고 있을 것인데 거 참.

 그럼 이거 한 번 읽어보실래?



 6

 아버지의 이름으로,

 촌충처럼 마디마디 끊어지는 이름으로


 미친 척 하면서 구매하고 미쳐가면서 지불하는

 빨간 고환, 파란 고환, 찢어진 고환,


의 이름으로


<후렴> 부분. 16쪽. "촌충처럼 마디마디 끊어지는 이름"은 이성복의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이란 시 중에서 나온다는 주가 달려있다)


 시집의 3부에 가면 시인이 집과 가정을 얼마나 황폐하고 불안정한 것으로 보는지 나오지만 그건 나중 일이고 1부의 이 시에서 과연 시인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짐작하기란 쉽지 않았다. 촌충처럼 끊어지는 이름이 바로 아버지의 이름인데 그게 돈지랄하는 색색의 고환들 심지어 찢어지기 까지 한 고환, 즉 아버지가 색동 칠을 했거나 다 헤져 찢어진 고환이란 말이다. 근데 아버지의 고환이란 자신의 생태적 출발지. 그리하여 자신의 비극을 이렇게 나타낸 거라면 그야말로 감정의 과잉일 것이겠지만 과연 그랬을까? (아, 순 우리말의 아름다움. '아버지의 색동 고환'보단 '아빠의 색동 불알'을 발음할 때의 숨 막히는 공명이여!)

 이 시인의 작품에서 수다하게 쏟아지는 것들을 크게 나누어 두 가지로 구분하겠다. 첫번째는 참 난감한 단어들의 무차별적 사용. 용서하시라 그대로 인용하겠다. 자지, 보지, 불알, 고환, 질, 음부, 분비물, 똥, 등등. 물론 난 이 단어들을 비난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전부 표준말이며, 비어도 속어도 아닌 지극히 정상적인 단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시라고 말한 건 그냥 습관상 될 수 있으면 피해가며 사용하는 단어들이기 때문이지 다른 건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이 단어들을 자연스럽게 만인 앞에 내놓으려 하지 않는다. 김언희는 다르다.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자연스레 쓴다. 두번째 내가 지적하고 싶은 건, 다른 사람이 쓴 시, 가요(팝송이 됐건 뽕짝이 됐건 간에)의 가사를 과하게 자주 인용한다. 출처를 밝히고 기억나지 않을 땐 '갑동이의 시 어느 곳에서' 따왔다고 숨김없이 이야기 하지만 시인에게는 결코 마땅하지 않은 것 같다. 예전에 어느 시인이 그러던데, 시를 쓰기 위해 다른 시를 과도하게 읽는 건 바람직 하지 않을 수 있다고. 이런 경우 때문에 그렇게 얘기했던가? 하긴 그 얘기 들은지 30년도 넘기는 했다.

 정작 내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건 지금부터. 남들이 쓰지 않는 단어나 그것들의 하드코어적 조합이 일으키는 교감작용을 사용했음에도, 김언희의 시는 극적인 고통이나 절망, 분노 같은 것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아쉬움. 만일 있었다고 하더라도 너무 개인적인 문제에 국한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의심. 솔직히 난 많은 시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격렬한 단어가 마구 쏟아지기는 한데 그것들의 총합으로 만들어내는 '뜻' 혹은 '이미지' 그것도 아니면 시인이 지금 느끼는 '감정' 이런 것들 가운데 어느것도 제대로 감각할 수 없었다는 말씀. 그나마 3부에 가서 일관된 주제에 관한 시편들이 나열되었을 때는 좀 알아들을 수 있었으니 좀 낫기는 한데 그래도.

 하나만 더 말씀드리자면, 이 책이 세상에 나온 시점이 2005년 3월. 내가 책을 산 것이 2017년 1월. 그럼 두 달 모자른 12년이 흘렀는데 놀랍게도 초판 1쇄다. 12년 동안 2,000부 가량 팔렸다는 얘기. 도대체 시인들은 뭘 먹고 사는 거야? 이슬?  당신이 시인이 아닌 걸 참 감사하게 생각하며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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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년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87
빅토르 위고 지음, 이형식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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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3년은 당연히 1793년. 89년 바스티유 감옥이 깨지고 4년이 흘러 파리는 로베스피에르, 당통, 그리고 막강한 마라가 권력을 틀어쥐고 무시무시한 공포정치를 펼치고 있었다. 짜리몽땅 장 폴 마라는 한두 주 있다가 탕 속에 더운 물을 받아 느긋하게 전신목욕을 즐기다 젊은 여성 샤를로트 코르데가 찌른 단검이 심장에 박혀 죽을 처지였고(샤를로트 코르데는 소설에선 마라의 부하가 내리친 의자에 해골이 쪼개져 현장에서 즉사한다), 산악파 행동대장답게 쾌걸의 거한 조르주 자크 당통(책에선 '당똥')은 몇 달 지난 후 자신이 발의한 법령에 의거해 (그로부터 1년 후 로베스피에르가 똑같이 당했듯이) 재판 한 번 받지 못하고 단두대에서 목이 잘릴 예정이었다.

 한편 왕당파의 핵심멤버로 일찍이 런던으로 망명하여 왕권중심제의 부활을 위해 프랑스 브루타뉴 지역으로 잠입한 랑뜨낙 후작은 정작 자신은 종교에 별 관심도 없었으나 천주교와 왕정에 기반을 둔 이 지역의 농민군들을 규합해 세를 불린 다음 영국 정규군을 수입해와 혁명군들을 괴멸시키는 야멸찬 야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다만 그의 나이 이미 80이 넘은 노인이라는 점과 하필이면 해당 지역의 정부군 또는 청군 또는 혁명군의 사령관 고뱅이 자신의 종손(형 또는 남동생의 손자)으로 자식 없는 이 노인네 후작의 상속권자라는 점. 고뱅 장군을 어려서부터 훈육하고 자유사상에 물들게 한 고상하고 박애와 평등정신 넘쳤던 사제 씨무르댕(어감이 꼭 욕하는 거 같긴하다)이 등장해 이 양반이 혁명공회가 엄정한 반란군 토벌을 위해 임명한 전권대사로 종조부와 종손간의 싸움에 꼽사리를 끼는데 씨무르댕은 이미 예전 자상하고 사랑과 평화와 박애정신과 평등의식이 넘치는 사제가 아니라 오직 하나 혁명의 엄정한 완수를 위해 추상같은 법의 집행 하나에만 목숨을 거는 정치인으로 바뀌어 나타난 거다.

 그리하여 이 세 사람은 한 편은 한 명의 노인, 다른 한 편은 둘이서 힘을 합해 브루타뉴 방데의 한 고성, 랑뜨낙 후작이 일찌기 어린 종손 고뱅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얼러가며 키운 '라 뚜르그'에서 서로의 목숨을 걸고 운명의 한 판 싸움을 벌인다. 누가 이겼냐고? 혁명군(정부군) 병력 4천명, 후작의 농민 반란군 19명의 싸움. 4천의 정부군이 19명에 불과한, 그것도 농민군한테 깨지면 아무리 소설이라도 그게 말이 돼? 당연히 정부군이 이긴다. 근데 그게 끝이야? 에이, 아직 남았지. 그것도 중요한 게. 절대 안 알려줄 마지막 클라이막스가.

 이렇게 방데 전투의 한 장면이 책의 주요 내용 가운데 하나.

 내가 읽기엔 하나가 더 있다. 그리고 비교적 일찍 2권의 중간쯤에 쫑이 나는 거다. 책에서 랑뜨낙 후작 역시 엄정하기 짝이 없는 냉혈한으로 나오는 바, 일찌기 아이 셋을 유괴하고 아이들의 엄마를 비롯한 동네의 모든 성인을 총살한 적이 있다. 근데 하늘이 그렇게 무심하지 않았는지 아이 엄마를 관통한 총알이 다행스럽게도 허파를 건드리지 않아 생명을 구하고, 당연히 아이들을 찾아 후작이 있는 곳, 그러니까 뜨거운 전쟁터 라 뚜르그를 향해 맨발로 걸어간다. 아이들은 성 안의 도서관에서 잘 먹고 잘 놀고 있지만 도서관에 뭐가 있냐하면 맨 종이와 양피지, 불에 잘 타인 인화물질. 여기다가 후작의 충견 이마누스는 성을 지키기 위해 화공을 위한 모든 준비를 해놓은 상태. 하지만 아이들은 그런 것들은 전혀 모른 채 두 사내 아이와 한 계집애는 정말 천진스러운 놀이에 빠져든다. 그러다가 돌봐주는 사람 하나 없는 아이들은 줄곧 그러듯이 탁자에 기어올라 책을 한 권 찢어발기기 시작한다. 그 책이 바르톨로메오의 순교에 관한 신학서적. 바르톨로메오가 누구냐 하면, 아르메니아에서 예수의 말씀을 전하다가 거기 종교 제사장들한테 찍혀 산채로 껍데기를 홀랑 벗긴 다음 십자가에 쿵쿵 못박고 그것도 모자라 대가리를 댕가당 잘라 죽임을 당한 성자다. 그 책을 어린 아이들이 발기발기 찢어 창문 밖으로 내던지는 광경은 뭘 은유하고 있을까? 거의 무신론자 비슷한 위고가 다가오는 세대와 종교와의 결별을 그렇게 써놓은 것일까, 아니면 프랑스 혁명과 혁명/반혁명 전투를 바르톨로메오의 순교와 비교해 놓은 것일까. 그건 이 책을 읽고 당신이 판단하시라.

 위고의 마지막 작품. 반은 역사적 진실이고 반쯤은 허구겠지. 격동의 한 시기, 서로의 정의를 위해 온 몸을 불사른 영혼, 하지만 바보같기 그지없는 순진한 낭만주의의 끝판. 기대하시라, 개봉 박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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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피타 히메네스 대산세계문학총서 60
후안 발레라 지음, 박종욱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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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자 '나'는 몇년 전 세상 하직한 대성당 주임신부가 쓴 종이뭉치를 발견한다. 뭉치의 첫장엔 제가題字임이 분명하게 라틴어로 "Nescit labi virtus" 우리 말로 "덕은 추락하지 않는다"라고 써 있는 건데 당시 스페인에서도 라틴어는 아무나 쓰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마음 속에 앗뜨거 하는 마음이 있었는지 개봉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의 손에 들어온 거다. 근데 막상 종이 뭉치를 열어보니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조카가 삼촌인 주임신부에게 쓴 편지, 주임신부가 이것저것을 알아보고 상황을 이야기한 것, 마지막으로 19세기 초반 소설의 에필로그 격인 이야기의 뒷담화.

 화자 말고 이 책을 읽기 시작한 독자 나도 책을 읽기 시작하면 목차를 빼고 본문에서 첫 문장으로 나오는 엄숙한 라틴어, "덕德은 추락墜落하지 않는다"를 보고 속으로 이거 또 기독교적으로 골아픈 얘기들 아닌가 싶어 좀 캥겼음을 굳이 숨기지 않겠는데 근데 조금 이상한 건, 기독교적으로 골아픈 얘기를 담은 책 껍데기의 제목을 그림에서 보듯이 저렇게 발랄하게, 십자고상의 피흘리는 기독과 비교하면 발칙하기까지한 글씨체로 했다면 정말 오랜만에 우리나라 메이저 레이블인 문학과지성사가 미친 척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에잇, 초장부터 결론을 내버리자. 문학과지성사에서 만드는 대산세계문학총서 가운데 제목을 저 글씨체로 뽑은 것들, 읽지마시라. 두 권 읽었으나 다 꽝이었으니 다른 것들도 비슷할 거 아닌가. 물론 이 발언에 나는 전적으로 책임지지 않겠지만 개인적인 경험을 공유하고자 하는 알량한 소신이 이러다 혹시 악플러로 고발당하는 거 아냐?

 이쯤에서 내 생활주변 실제 촌극 하나.

 난 유물론자.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다. 그래서 종교는 명백하게 아편이라고 단정하는 사람이다. 근데 내 친한 술친구 하나가 천주교 환자다. 천주교 환자들은 (내 생각으론 그냥 미사에 참석해서 참회하고 용서받고 착하게 살면 되는 거 같지만) 미사 참여 말고도 신자들끼리 레지오regio 그니까 군대 용어로 연대 혹은 대대라는 이름의 집단으로 모여 실생활에서 서로 무지하게 가깝게 지내는데 단위조직이 한 열 가구 정도 되는 걸로 봐서 북조선의 5호감시제가 이 레지오를 본받은 거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 바, 레지오 구성원들이야말로 영혼의 형제라고도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이 형제 가운데서도 좌장이며 돈도 많아 술도 자주 사주고 인심도 좋고 성격도 너그러워 존경받는 김모씨한테 결혼 적령기의 예쁘장한 딸이 하나 있었다. 딸도 당연히 모태신앙으로 낳자마자 세례를 받아 끊임없이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하는 은혜를 입은 바 적다고 할 수 없었으나 천주께선 김모양에게 순결의 미덕과 함께 젊음의 욕망을 함께 주셨으니 (원래 기독교 전 시대부터도 신들이란 것들은 꼭 그렇게 애매한 선물만 주는 걸 김모양은 몰랐던 거디다) 어느날 문득 김씨가 딸의 뒤태를 보니 몇 달 사이에 엉덩이가 펑퍼짐하고 옆구리가 두툼해져 여지없이 주리를 틀어버렸다. 누구야? 어떤 놈이야? 이름이 뭐야? 아, 이름이 뭐냐는 수 세기에 걸친 질투의 물음. Il nome! 글쎄 누구야? 김모씨는 실제로 김모양의 머리카락을 가위로 뭉텅 잘라버렸으나 결코 배부른 딸의 입에선 카시오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다. 몇 주일 후 작년까지 자기 본당의 담임신부였다가 옆동네 성당의 담임신부로 옮긴 사제가 느닷없이 파계를 하고 김모씨에게 찾아와 자기가 김모씨의 사위임을 고백했고 김씨 가족은 그로부터 한달 후에 시골구석으로 이사를 했으며 또다시 한달 후에 김양의 결혼식이 저 먼 시골동네 성당에서 있었는데 평생 갈 거 같았던 영혼의 형제들 가운데 아무도 그들의 결혼을 축복하지 않았고, 김씨와 굳이 연락하려 하지 않았으며, 과거 본당의 담임신부를 쳐다보려 하지도 않았다. 참 대한민국의 종교인들은 어느 종교를 불문하고 대단하다, 대단해.

 하지만 가톨릭의 본산이자 아직도 그 자리를 하다못해 로마에게도 양보하고 싶어하지 않는 스페인은 좀 다르다. 내 말 못 믿겠으면 이 책 읽어보시라. 특히 대한민국식 가톨릭에 몰두하는 분들에게는 권하고 싶다. 다른 분들껜 그냥 19세기 독자의 입장에서만 기막히다고 할 수 있을 뿐, 지금 독자들에겐 굳이 이걸 고전이라고 읽어야되나, 싶은 책을 굳이 권하고 싶지 않다. 책 내용은 내 생활 주변의 한 코메디를 소개한 걸로 너무나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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