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또는 유년의 기억 펭귄클래식 110
조르주 페렉 지음, 이재룡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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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 사용법>, <사물들>에 이어 세번째 읽은 조르주 페렉. 이 사람이 어떻게 생겼다 한 번 보자.

나름대로 잘 생긴 유대인 청년이었다. 근데 나중에 이렇게 변한다.

 

 

 뭐 남자의 변신은 무죄니까. 나도 은퇴하면 턱수염 기르고 나비 넥타이 매고 다닐 거다.

 

 저 사진의 남자가 쓴 <인생 사용법>을 읽고 깜짝 놀랐었다. 햐 거참 재미난 작가네 싶어서. 그 책 때문에 페렉이 눈에 띄는 족족 골라 읽으리라 마음 먹었었다. 굳이 찾아서 읽는 건 아니고, 그냥 눈에 띄면.

 <W 또는 유년의 기억>의 W 섬, 남위 몇도 서경 몇도(몇 도인지는 잊었음)에 위치한 작은 섬. 섬나라라고 해두자.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남극 쪽으로 주욱 내려와 있는 익명의 섬. 그러면 W에 대한 설명은 됐고, '유년의 기억'만 남았다. 누구나 다 유년의 기억은 있는 법. 당신이 소설가라면 당신도 역시 적어도 한 작품에선 자신의 유년, 멀고 먼 파편들을 모아 모자이크처럼 맞추고자 해볼 것이다. 페렉도 그랬다. 아버지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장렬한 최후는 아니고 거의 모든 죽음이 그렇듯 그냥 허무하게 죽어버렸고, 엄마는 아우슈비츠에 끌려가 한 조각의 비누로 변신했다. 이후 고모네 집에서 자란 거 까지가 페렉의 유년시절. 나머지는 픽션.

 그리 나이도 많지 않은 화자, 가스파르 뱅클레가 자신의 잃어버린 시간들, 편편이 끊어져 아무도 이어주지 않는 시간의 파편들을 조합하여 쓰는 자서전. 이런 회상의 장면들. 쓸쓸할 수밖에 없는 상실의 시간에 대한 기억. 나 이런 거 좋아한다. 그것도 페렉이 아주 매력적으로 써놓았음에야. 근데 가스파르 하는 짓 봐라. 점점 나이먹어 나이 먹은 값을 하느라고 군대엘 갔는데, 어쩌면 페렉의 분신이기도 한 가스파르는 (저 위 사진을 보시라. 저딴 사람이 군대 규율에 잘 적응하겠는가) 작전에 나가 그 길로 탈영을 해버리고 만다.

 여기까지 좋았다. 탈영을 해 국경 밖에서 나름대로 그럭저럭 살고 있다가, 난데없는 사실 하나를 알게 된다. (독자들은 예상도 못했던 바)……… 이후 주욱 써나갔다가, 내가 지금 뭐하는 거야, 자각을 하곤 몽땅 지웠다. 해설, 작가 연보까지 몽땅 다 합해야 200 쪽밖에 안 되는 짧디 짧은 소설의 스토리를 더 이상 얘기했다간 돌이킬 수 없는 스포일러일 수밖에 없기에. 사실 탈영과 해외망명도 얘기하지 않는 편이 더 좋았을 걸 싶었는데, 그랬다간 정말 독후감 쓸 일이 없을 거 같아서 그냥 내비뒀다.

 섬나라 W. 페렉 스스로가 손기정이 금메달과 그리스 투구를 받은 베를린 올림픽의 해에 태어나서 그랬는지, W는 점점 상업화, 세속화되고 있는 올림픽 정신에 실망한 도라이 한 명이 인간들을 이끌고 들어가 세운 나라로, 모든 인간이 태어나서 오직 독하게 스포츠에만 기여하다가 생을 마감해야 하는 곳이다. 별 희한한 방식의 스포츠 제일주의. 말도 안 되는 스포츠. 오직 근육과 골격만 인생의 목표로 정해놓고 개인별 특성에 따른 육성 따위는 개한테나 던져준 집단. 이걸 읽으면서 난 자연스레 페렉의 부모를 죽음으로 몰고간 집단광기의 나치 치하 독일로 상상했다. 엄마를 비누 한 쪽으로 변신시킨 수용소의 광기로 치환해도 무방할 것 같다.

 문제는 W 섬과 그 속에서 벌어지는 스포츠, 섬사람들의 사는 모습이 (나에겐 확실하게) 지루했다. 한 얘기 비슷하게 또 하고, 비슷하게 한 얘기 한 번 더하고. 페렉이 왜 이래, 했다니깐 글쎄.

 이 책을 당신한테 권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는데 앞 부분의 쓸쓸한 유년의 기억 때문이 아니라 W에다 대고 펼치는, 과하게 친절하고 상세하고 조밀한 묘사들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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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타우크 - 막스 프리쉬 소설 서양문학의 향기 8
막스 프리쉬 지음, 이정린 옮김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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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위스 태생의 독일어 작가 막스 프리쉬. 이름도 처음 들었지만 상당히 유명한 사람이란다. 특히 귄터 그라스, 하인리히 뵐, 잉에보르크 바흐만 등의 47그룹 멤버들과 특별한 교류를 가졌던 인물이라고. 정말로 책 속에 47그룹 멤버들의 실명이 쏟아져나온다. 프리쉬가 늙어서 그런지 한때 자신과 짙은 사랑을 만들어가던 고故 잉에보르크 바흐만과의 연애와 동거 같은 것들도, 그리고 결혼이란 계약관계에 있지 않으면 특히 더 심하게 과장되는 행복, 광포하게 폭발할 거 같은 질투, 상대를 향한 끈질긴 소유욕 이런 것들, 그냥 담담하게 막 (고인을 생각하면)조금 과하다 싶게 얘기한다.

 실제로 평생 자기 집을 가져보지 않은 막스 프리쉬. 말 그대로 방황하는 스위스 인. 이이가 이제 중늙은이가 되어 몬타우크, 뉴욕의 복동쪽 제일 끝 바닷가에 '린'이란 이름의 아가씨와 도착하며 소설은 시작한다. '린' 그러니까 트롯 잘 부르는 여자 가수 생각나는데(있잖아, 노래 잘하는 '이수'의 아내), 이 책에서의 린도 노래를 잘 하는지는 자세히 나와있지 않지만 프리쉬와 하루 밤을 보내며 서른 살이나 더 먹은 프리쉬로 하여금 예전의 구체적 사랑의 대상이었던 여인들에 관한 상념을 이끌어낸다. 첫번째 아내. 두번째 아내. 그리고 잉에보르크 바흐만. 그이의 책을 읽어내기만 하는대도 독자를 질리게 만드는 바흐만과의 연정까지 그의 기억은 확장하는데, 프리쉬를 읽어본 독자들은 분명히, 소설의 스토리보다는 그의 독특한 문장과, 본인이 관찰자가 되고, 동시에 피관찰자가 되기도 하는 방식의 표현방법, 뉴욕의 롱 아일랜드를 멀리서 조망하는 동시에 한 장면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기도 하는 독특한 문장들의 연결방법에 더욱 방점을 찍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마치 프랑스 소설, 특히 누보 로망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이 팍팍 나고, 아니, 더 잘난 척을 하자면 포스트 누보 로망 같다고 지레짐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책을 읽기가 곤혹스럽다든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 듣기 심히 난해하다든지 하는 느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몬타우크> 하나를 읽고 <몬타우크>를 포함해 이이가 쓴 작품에 대해 뭐라 말하기가 좀 캥긴다. 그리하여 얼른 그의 다른 작품, 무려 두 권짜리 책(뭐 문고판 비슷하지만) <나를 간텐바인이라고 하자>를 보관함에 집어 넣었다가, 내 보관함에 60권이 넘는 책들이 구매를 기다리고 있으나, 그거 다 뒤로 물리고 <나를 간텐바인이라고 하자>를 먼저 사버렸다. 올해 늦가을 쯤에 읽을 거 같고, 그때야 돼야 프리쉬와 그의 작품에 대하여 얘기할 거리가 조금이나마 생기지 않겠나 싶다.

 내게 또 한 번의 유별난 호기심을 준 막스 프리쉬란 작가를 읽게 해준 출판사에게, 이럴 때 고마움을 표시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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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발 페투슈키행 열차 을유세계문학전집 36
베네딕트 예로페예프 지음, 박종소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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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 처음부터 끝까지 술.

 혹시 기억하실지 모르겠다. 올해 목표로 (물론 맥주, 탁주, 청주, 위스키, 브랜디 기타 등등은 싹 빼고) 오직 소주 마신 것만 술이라고 쳐서 작년의 절반, 200병만 마시자고 결심했었던 거. 일주일에 소주 네 병씩으로 쳐서 208병으로 조금 목표를 수정했다. 결과, 4월 말까지 소주 딱 70병. 어제 5월 14일까지 78병 마셔 조졌다. 목표달성을 위해 일주일에 네 병 이하로만 마시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줄은 정말 몰랐었다. 아무래도 목표가 너무 도전적이었나보다. 한 300병으로 해놓을 것을. 하긴 마흔 다섯 까진 일년에 한 600~700병은 마셨을 테니 줄이긴 많이 줄였는데 솔직히 얘기하자면 체력이 떨어져 전처럼 못마신 결과 자연스레 거같다. 더 젊어서? 에이, 뭘 그런 걸 물어보고 그러셔. 삼국지 두 편은 썼을 겁니다.

 근데 이 책 읽어보시라. 내 술 경력은 책의 주인공한테 비하면 이도 나지 않았다. 한 술 한다고 자부하는 내가 읽어도 아주 징글징글하다.

 짧게 쓰자.

 술하고 별로 친하지 않은 당신. 이 책 읽을 필요 없다.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니까.

 술하고 친한 당신. 이 책 읽을 필요 없다. 다 아는 거니까.

 나? 돈 버렸다.

 

 

 

 을유문화사 세계문학 전집의 매력이 바로 이거다. 모 아니면 도. 그만큼 용감하다는 의미. 이래서 오늘도 난 이 시리즈의 다른 책을 보관함에 한 권 집어넣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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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5-15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 이 책 읽어볼까말까 했었는데..... 저는 술하고 친하니까..... ㅋㅋㅋ 패스

Falstaff 2017-05-15 10:31   좋아요 0 | URL
술 이야기는 맬컴 로우리가 쓴 <화산 아래서> 빼면 좋은 게 거의 없더라고요.
<목로주점>이나 <면도날>은 술 얘기라고 하기엔 술 자체가 너무 지엽적이라 술 책(주책?)에선 당연히 빼야 하고요. ㅋㅋㅋ

잠자냥 2017-05-16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폴스타프 님,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에서 존 치버 <팔코너> 다시 판매하기 시작했더군요.

Falstaff 2017-05-16 10:11   좋아요 0 | URL
옙! 고맙습니다.
<팔코너>, 오역 시비로 들끓었던 책으로 알고 있는데, 중쇄하면서 교정을 많이 했을지 궁금하네요.
(지금 책 보고 왔습니다)
아, 우라질. 왜 표지를 바꾸지 않았을까요? 진짜 드러운데 말이죠. ㅋㅋㅋ
 
은하가 은하를 관통하는 밤 민음의 시 162
강기원 지음 / 민음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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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하기 전에.

 원래대로 쓰자면 《은하가 은하를 관통하는 밤》이라고 쓰고 이 책에 나오는 시의 제목을 예를 들면 <개똥아 사랑해> 이렇게 써야 하는데, 그딴거 다 관두고 그냥 <은하가...> 및 <개똥아...>로 쓰겠다.  》기호 찾아 쓰기가 귀찮아서 그렇다. (물론 내 맘이다)

 

 

 강기원. 등단해서 시인이 된 시점이 1997년. 깜짝이야. 처음에 1977년 등단인줄 알았지만 결코 1977년이 아니었다. 마흔 살에 등단했단다. 닭띠 아줌마. 그래서 그런지 거침이 없다(절대 아줌마 비하 아니다. 나이 들면 남자나 여자나 성호르몬의 증가/감소에 따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거고 그래서 성별 차이가 거의 없어지니 사실 아줌마 비하는 아저씨 비하하고 같은 말이다. 그걸 알고 있는 아저씨가 아줌마를 비하할 수 있겠는가). 시는, 시야말로 해석은 읽는 사람 맘대로다. 언제나 주장하듯 <사미인곡> <관동별곡> 같은 걸 쓴 정철이 우리 국문학사상 최고의 연애시 전문가였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런 뜻에서 강기원의 시는 지금 시대의 뛰어난 에로티시즘 작품들이다.

 책을 열면 자서自序가 제일 먼저 나온다. 우리나라 시집에 자서, 스스로 쓰는 서문이란 걸 싣는 게 보통이 된 이후부터 자서는 시인이 어떻게 하면 최고로 잘난 척하느냐, 하는 경쟁이라도 하는 거 같고, 강기원도 예외가 아니라 도대체 뭘 주장하는지 알아먹지 못할 애매모호한 이상한 시 비슷한 게 나오고, 그걸 넘겨 드디어 본문에 등장하는 첫번째 시가 등장하는데, (좋은 뜻으로) 건방지기 짝이 없는 맹랑한 시인이 책의 첫 시로 올린 것의 제목이 <독자에게>다. 이렇게 써놓으니 후덜덜. 강기원 시인이 어느날 지금 내가 쓴 글을 읽고 야 새꺄 너 뭐야, 이렇게 따지면 어쩌나싶어 오금이 다 떨린다. 한 번 더 언급하노니 위에 건방지다, 맹랑하다는 건 전적으로 좋은 의미에서 쓴 거다. 원래 글이란 게 서로 바라보고 하는 얘기와 달라 지독한 오해를 왕왕 일으키기 때문에 확실히 밝혀두는 게 일신상 건강(혹은 보신, 또는 만수무강)에 좋다.

 얘기한 시집의 첫번째 시 <독자에게>는 한 번 읽어보시는 게 좋을 듯해서 전문을 올린다.

 

 

  독자에게

- 만나게 될 때까지

 

 

 결합의 순간에 디스데라 벨리아(Dysdera velia)는 수컷과 암컷이 동시에 상대방을 향해 줄 하나씩을 내쏜다. 30cm 가량의 길이에 수평으로 늘어진 이 졸은 일종의 다리가 되고 그 양 끝에서 두 곤충은 마주 보게 된다. 신호가 내려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들은 동시에 양 끝에서 출발하여 빠른 종종걸음으로 다리를 건너지만, 서로 스치지도 못하고 엇갈린 채 각작의 출발점으로 되돌아온다. 수컷과 암컷이 결국 만나게 될 때까지 이 장면은 되풀이된다.

- 이자벨 로시뇰, 『작은 죽음』 중에서

 

 

 이 시를 읽고 처음엔 다른 작가가 쓴 소설의 일부분을 그냥 발췌해놓은 것도 시가 된다는, 그것도 멋있는 시가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페이지를 넘기면서는, 시집의 첫 시로 이 작품을, 그것도 제목을 <독자에게>라고 해놓은 건 앞으로 <은하가 은하를 관통하는 밤>이란 시집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가 디스데라 벨리아 라는 곤충의 교미 과정처럼 남녀가 교통하여 섹스에 이르기도 하고 이르지 못하기도 하는 고통스러운 절차에 대하여, 그리고 섹스 자체에 관한 것이라고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발짝 더 나가면 제목, 은하가 은하를 관통하는 밤이란 것도 남자가 여자를 관통하는 밤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아주 오래전에 읽은 프로이트에서 그랬던가? 관통하고 관통당하는 것에 대한 의식이 인간의 본성에 잠복하고 있다고. 하긴 프로이트 본인이 좀 도착증 환자인 듯도 해서 전적으로 믿을 수 없지만. 어쨌거나 그런 의미에서 사용했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두번째로 실린 <흡혈>. 으시으시 하시지? 하필이면 어제 케이블 TV로 본 영화가(케이블 TV 영화를 보려면 진심 인격수양이 필요하다. 영화 도중에 광고가 무지막지하게 나오고, 심지어 중간에 한 20분 동안 광고만 나오기도 한다) <드라큘라 전설의 시작>. <드라큘라>로 극장에서 본 것은 크리스토퍼 리가 처음이었고, 역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이 만든 작품에서 타이틀 롤을 연기한 게리 올드만이 최고였다. 코폴라 감독의 <드라큘라> 즉 흡혈의 제왕은 매우매우 에로틱하기도 하다. 강기원의 흡혈은? 역시 에로티시즘.

 

 나는 뺄셈이고

 너는 덧셈이다

 또한, 너는 뺄셈이고

 나는 덧셈이다

 내가 네게로 흘러간다

 네가 내게로 흘러든다

 (중략)

 날 받아들인 네 영혼에

 널 받아들인 내 영혼에

 알레르기 같은 열꽃이 돋는다

 ……(중략)………

 이 빈번한 삼투압

 (중략)

 진하고 단, 쓴 피

 피의 러브 샷

 

 너의 피를 내가 빨아먹는 것. 그거 자체가 성적 판타지를 제공하는 행위로 되어버렸다. 간혹 후천적 면역결핍증의 매개가 되는 '수혈'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흡혈. 생명의 전이 과정이며 그것을 위헤선 생식과 비슷한 절차가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작가의 의도? 그러거나 말거나 관계없이 내가 그렇게 해석했다면 그게 대빵이고 그게 결론이다. 안 그랴? 저거 봐. 빈번한 '삼투압'이라잖아.

 내 주장의 근거를 위하여, 강기원은 "나를 찌르던 바늘로 / 너를 찔러 / 네가 다시 내가 되었는데 말이다 / 내가 다시 네가 되었"(인형)고, "식구들이 모두 단잠에 빠져든 밤 / 아버진 휘늘어진 덩굴 밑동에 / 아무도 모르는 거름을 붓곤 했는데요 / 나홀로 깨어 아버지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았"으며(장미의 나날), "가진 거라곤 / 벌거벗은 가슴 / 뿐입니다 / 희지도 않습니다 / 부드럽지도 않습니다 / (중략) / 제 위에 / 당신의 비밀을 적으"라고(로제타석) 말한다, 라고 쓴다면 아이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재수없게 평론가 흉내를 내는 거 같지? 그래서 관두겠다.

 하여간 강기원의 성적 판타지가 어디까지 뻗느냐 하면 예를 들어 큰 집을 등에 지고 새벽마다 나팔꽃 이파리 위에 점액질을 묻히며 기어가는 불쌍한 미물을 보고도 이렇게 노래한다.

 

 

 

 달팽이

 

여자들처럼 남자들도 여자들이다

-그루초 마르크스

 

 

 그러나

 늘 홀로였어

 최초의 창조물이 그랬듯이

 

 그 안의 수컷은

 그 안의 암컷을 외면하고

 

 그 안의 암컷은

 그 안의 수컷을 증오하지

 

 심장도 하나 위장도 하나

 머리도 하나

 그러나 질료 다른 두 영혼이

 함께 살아가야 하는

 자웅동체

 

 두 개의 더듬이는

 합쳐지는 법이 없지

 있는 힘껏

 다른 곳을 향해 뻗는 촉수

 

 한 마리 달팽이

 속의 두 알몸

 자기가 자기에게 침을 뱉으며

 끈적한 길 그으며

 느릿느릿 기어간다   (전문)

 

 

 드디어 시인의 판타지는 아예 한 몸에 양성이 다 있는 곳까지 왔다. 이 시 바로 다음에 나오는 것이 인간으로 한 몸에 남성의 성기와 여성의 성기를 다 가지고 태어난 사람을 일컫는 <어지자지>. 일종의 자웅동체. 한 몸에 양성이 다 있다고 해도 번식을 위하여는 다른 개체와의 섹스를 해야만 하는 개체. 그래서 시인의 눈에는 같은 몸의 두 성은 서로를 외면하고 증오한다. 어떤 경우라도 다른 개체와의 소통, 공감의 의미로 섹스가 필요한 필멸의 존재들. 그 비극성. (아, 너무 나갔다!) 하여간 그렇다는 얘기.

 

 또 하나의 주제가 있으니 바로 둔황 지역을 둘러보고 쓴 기행시편들. 그건 책 사 읽으실 분을 위해 노코멘트. 

 시집의 제목으로 오른 타이틀 시 <은하와 은하를 관통하는 밤>, 이거 어떤 시인지 궁금하시지? 궁금하시면 요새 시인들 배고프다던데(언제는 뭐 안 그랬나?), 왠만하면 사 읽으시라고, 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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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왕을 모셨지
보흐밀 흐라발 지음, 김경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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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미난 책. 공산주의 치하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이렇게 통쾌한 풍자가 있었다니 역시 이야기를 쓰고자 하는 사람은 법으로도 막지 못하는 법이다. 체코 출신의 코스모폴리탄, 잘난 척의 최고 권위자 밀란 쿤데라처럼 조국에서 도망쳐 다른 나라 언어로 체코 체제의 부조리를 고발한 것이 아니라 프라하에 딱 개기고 서서 소설을 출간할 때마다 '출판금지' 조치에 얻어터져가며 꿋꿋하게 버티어낸 깡다구의 소설가. 우울이나 상실이나 소외나 실패, 하여간 체제로 하여금 도무지 기분좋게 만들어주지 못하는 것들을 해학과 유머 그것도 뼈있는 농담으로 얼버무리는 흐라발의 펜은 어디까지 갈 것인가. 아쉽게도 우리나라에서 그의 작품은 딱 두개, <영국...>과 며칠 있다가 읽을 단편소설 <너무 시끄러운 고독> 둘 말고 없다.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 하나 더 있으나 지금 품절이고 언제 다시 찍을 지는 알 도리가 없다.

 '디테'란 이름의 키가 매우 작은 보통의 남자가 하는 다섯 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이야기마다 "오늘 하는 이야기 잘 들어보세요"로 시작해 "오늘은 여기까지. 재미나게 읽으셨나요?", 정확한 인용은 아니지만 이런 방식으로 써 있다. 짧게 말해 한 인간의 인생 스토리인 셈. 가난한 시골 출신의 디테가 돈을 벌기 위해 프라하 호텔 견습 웨이터로 취직하면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웨이터란 직업은 본문의 첫 페이지에 나오듯이 "아무것도 보지 않았고 아무것도 듣지 않"았으면서도 "모든 것을 봐야 하면 모든 것을 들어야"하는 직종이란다. 당연하다. 서비스 직종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꼽으라면 바로 이것. 아무것도 안 봤고 안 들었으나 모든 것을 보며 모든 것을 듣는 능력. 지금 쓴 문장을 잘 보시라. 처음의 보고 듣는 것은 과거의 일이고, 그 다음에 나오는 보고 듣는 일은 현재의 것이다. 이거 잘해서 우리나라 서비스 업계의 최고 자리에 오른 사람이 누구? 그이의 이름은 잊었으나 기억하건데 전직 요정 삼청각 사장 언니. 많고 많은 요정집 가운데 독립 대한민국의 정부가 수립한 다음 유독 삼청각에 정치, 경제, 즉 권력자와 부르주아들이 모여든 건 우연이 아니었으니 그집에서 밥 먹고 사는 종업원 거의 다가 들어도 못 들은 척, 봐도 못 본 척의 달인들이었던 때문이다. 그렇게 교육을, 지독하게, 받아서.

 디테가 진짜 생존했던 사람이라면 그이의 손금을 한 번 보고싶다. 손금이 어떻게 그어져 있기에 그리도 돈복이 터졌는지. 첫직장 프라하 호텔에선 기차 정거장으로 파견 나가서 프라하 호텔에서 만든 즉석 김밥, 떡볶이, 순대, 오뎅, 호떡, 이런 걸 파는 일을 맡았다. 처음엔 진짜 우연하게, 5만원 짜리를 낸 손님한테 줄 거스름돈을 막 세고 있었다. 근데 열차가 빽! 울더니 조금씩 덜컹거리면서 움직이기 시작하는 거다. 왼손에 떡볶이 한 봉지를 들고 있던 손님이 한 번은 열차를 쳐다보다 한 번은 디테를 내려다보다 막 신경질을 냈고, 열차와 디테를 바라보려 돌리는 고갯짓의 사이클타임이 점점 빨라졌는데도 디테가 아직 거스름돈을 다 세지 못하자 욕을 한 바탕 쏟아내더니 기어이 포기하고 열차에 오르는 거 아니겠는가. 이거다! 이후로 순대 한 접시 먹은 손님이 만일 5만원짜리를 내면 일부러 허둥지둥, 거스름돈을 찾는 시늉을 내며 "일단 먼저 타세요. 그럼 제가 가져다 드릴 테니 창문 밖으로 받으시면 되잖아요." 라고 하면 영낙없이 손님은 일단 열차에 오르는 거다. 디테는 그래도 천천히 거스름돈을 세다가 드디어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손님이 창 밖으로 고개를 한 없이 내밀었을 때, 돈을 오른 손에 들고 뛰기 시작한다. 손님의 손이 돈에 닿을락말락 닿을락말락 하다가 기어이 손은 멀어지고, 그럼 그게 다 디테의 주머니에 들어가게 되는 건 물론이었다.

 당연히 이런 사소한 것 때문은 아니었다. 디테, 열 다섯 아이가 돈이 생기면 그걸로 뭘 하려고. 천만에! 디테의 직장이 동네에서 돈 깨나 만지는 사람들만 모이는 곳이 아닌가. 그들이 사업계약을 성공적으로 체결하면 프라하 호텔에 와서 한 잔 거하게 들이켜고 꼭 가는 곳이 있다. 사청각. 한국에 삼청각이 있는데 체고에 사청각이 있으면 어디 덧나? 이름을 잊어서 그렇게 부르고자 하니 양해 바람. 디테가 곰곰 생각해보고 침대 밑에 꿍쳐놓은 지폐 꾸러미를 들고 어느날 하루 사청각에 들른다. 아, 돈의 힘이란! 자신이 프라하 호텔에서 손님에게 서빙하는 것과 같이 사청각의 주인이자 지배인, 그리고 종업원 아가씨는 디테를 천상의 하느님으로 여기면서 최고급 샴페인이라고 속인 탄산음료를 마시며 디테에게 청구서를 내민다. 어쨌거나 구름 속이 아니면 경험할 수 없는 환대 속에서 열 다섯살 총각 딱지를 뗀 디테. 이날 가슴 속에 굳은 결심을 하니, 바로 백만장자가 되자는 것.

 그리하여 드디어 프라하 최고의 호텔 '호텔 파리'에 입성한 디테. 여기서 홀 수석 웨이터의 밑으로 들어가는데, 수석 웨이터는 손님이 탁, 들어오면 척, 한 번 보는 걸로 손님의 고향, 직업, 호주머니 상태 등을 다 꿰뚫고 있는 거다. 하도 신기해서 수석님,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시는데요? 하고 물어본 디테. 수석 웨이터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내가 영국 왕을 모셨지."

 영국 왕을 모신 몸이란 것. 영국의 왕을 모셨기 때문에 그런 능력이 생긴 것이란 뜻인지, 왕을 모실만큼 능력이 있다는 것인지 아주 애매모호하지만 하여간 수석 웨이터에겐 특별한 이력이 있다. 영국 왕을 모셨다는 거.

 그게 뭘까. 다들 그런 거 하나 씩은 가지고 있을 거다. 내가 왕년엔 말야, 뭐 이딴 거. 나도 좀 있지만 이 책 읽은 담부터 다신 입끝에 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걸로 끝이냐고? 천만에. 이제 겨우 이 재미난 소설 <영국 왕을 모셨지>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 뿐이다. 진짜 재미는 위에서 얘기한 다음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니 그걸 즐기기 위해선 꼭 이 책을 끝까지 읽어보셔야 알 것이다. 다시 말하건대 난 이 책의 십분의 일도 얘기하지 않았다.

 재미? 재미가 있기 때문에 근엄한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이 이 책을 출판금지 시켰다고 생각하시나? 궁금하시지? 그게 뭔지, 안 알려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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