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어버린 집 문학과지성 시인선 396
문충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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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오랜만에 문충성의 시집을 샀다. 그리고 1년 하고도 열 달이 지나 첫 장을 열었다. 지독한 게으름이다. 문충성은 80년대 초반에 조금 읽고, 이후 드물게 우연히 읽게 되면 읽고, 아니면 말고, 그냥저냥 그랬다. 우리 나이로 마흔 살에 등단해 첫 시집 《제주 바다》를 당시 모교 아르센 루팡 대학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는지, 빈 주머니를 털어 두부김치에 막걸리 한 통을 마실까 주저하다 돈 주고 사서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하여간 읽었다. 별로 감흥이 없었나 보다.

  문충성이, 아이고, 그동안 “우리나라 나이”가 없어져 그냥 여든다섯. 하기는 내 턱을 따라 돋은 터럭에도 눈 내린 지 오래니까.  이 시집이 나온 해가 2011년. 일흔셋일 때 출간했다. 말이 일흔셋이지, 시인은 이제 서울 나들이를 하더라도 며느리의 삼촌이 대나무로 깎아준 지팡이를 짚고 길을 나선다. 시인은 병들고 시인의 아내는 아프다. 앞서거니뒤서거니 혹은 며느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병원행이 다반사다. 그래도 아직은 그림자가 둘이어서 조금 위안이 되는 모양이다. 노인들은 조금씩 쇠하는 게 아니라 큰 계단처럼 한 방에 훅 가고, 얼마 있다가 또 한 방에 훅 가고, 몇 번 훅, 훅 가다가 툭, 떨어진다. 그걸 시인이라고 모를 턱이 있나. 그리하여 시집의 마지막 노래는 이렇게 끝난다.



  꽃들 지고


  여름날

  왕잠자리 날 듯

  벙그는 연꽃들과 눈 맞춰뒀다

  고양시 호수공원

  연꽃 밭

  다리 아파

  갈 수 없다

  산책 갔다 온 막내딸애

  말한다

  연꽃들 졌더라고

  만딱!  (전문)



   마지막 행의 “만딱”에서 ‘만’은 “아래 아”를 쓰는데 지원이 되지 않아 그냥 ‘만’이라고 썼다.

  소감? 나도 딸 하나 있었으면. 아들 집에 가봐라, 서로 불편하다. 며느리는 호수공원을 바로 앞에 두고도 혼자 산책하러 나가기 눈치 뵈고, 갔더라도 연꽃이 졌다고 얘기하기도 눈치 보이고, 시부모도 마찬가지로 다리 아프다 한 마디 하기도 뻑뻑하다. 그냥 하는 얘기다. 딸이건 아들이건 다 크면 각자 사는 게 장땡이다.

  문충성이 정말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시를 읽으면 “연꽃들 졌더라”는 이야기에 방점이 찍히면서 ‘나’의 시간도 이젠 질 때가 됐다고 생각하는 시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렇지 않다면 아예 이런 시를 쓸 마음을 먹지도 않았을 터이니.

  민영, 고 오탁번, 정희성 등등 노년에 접어든 시인의 말년 시는 주변의 자잘한 사물, 일상 같은 것을 새롭게 보고 듣는 노래가 많다. 이이도 예외가 아니어서, 가령 이런 시.



  동동



  파란 달빛 소리

  파르르

  눈 떴다


  아무런 생각은

  잠자고


  방 하나 그득

  넘쳐난다 달빛이


  파랗게 떠간다 파랗게

  아무런 생각이

  동동  (전문)



  깊은 잠에 들지 못하는 노년의 시인이 자다 깼다. 방 안 가득 달빛이 들어오고 그저 아무것도 아닌 생각들이 동동 달빛에 희뿌윰한 어둠 속에 동동 떠있는 그림, 또는 노래. 어떠셔? 귀엽지? 또 이 시절의 시인한테는 과거를 회상하는 일종의 특권이 주어진다. 젊은 사람들이라고 추억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수십년 오래 묵어 고릿하게 묵은 내가 나는 추억, 연상 만하겠는가. 문충성은 자신의 20대를 추억한다.



  가짜 사기꾼



  이제야 알았다

  사기꾼들 세상

  언어의 감옥에서

  동대문시장에서

  그 근처

  버스 정류장에서

  길 위에서

  도주하라

  1960년대 가난한 그

  전당포에서

  명동에서

  전차에서

  아니면 충무로에서

  이고 다니던 하늘

  싸구려로 저당 잡혔다

  냄비 우동 한 그릇 값에

  그리고

  얼굴 붉히며

  사기꾼들 사이에 끼어 아직

  사기꾼이 되지 못한 가짜 사기꾼

  120 당구를 치고

  막걸리 대폿집 지나 ‘달 다방’으로

  점심 값 살리고

  어깨 구부리고

  걸어 들어갔다

  커피 한 잔 마시고

  브람스 들으러  (전문)



  여기서 “가짜 사기꾼”은? 시인 자신이다. 한 번 까볼까? 제주에서 살다가 서울 유학 온 “1960년대의 가난한 그”라고? 쇤네도 돈 아까워서 당구 한 판 안 쳐봤습니다. 당구 10분 칠 돈이면 막걸리가 한 되인데 어떻게 손 떨려서 큐를 잡을 수 있었겠느냐는 말이지. 브람스도 열라 들었습지비. 학교 음악감상실에 죽치면서 듣든지, 한 겨울 종로1가 르네쌍스에서 그애하고 덜덜 떨며 듣던지. 시퍼렇게 얼 정도로 벌벌 떨다가 냄비우동은 자주 사 먹었군. 사실 아무것도 아닌데 그걸 시인이나 소설가가 쓰면 그럴듯하고 나같이 무지렁이가 쓰면 꼴값을 하는 거다. 그러니 보통의 독자여, 어디 가서 함부로 궁상 떨지 맙시다. 괜히 가오만 떨어지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이런 거 하나 더 있지? 첫사랑 이야기. 그것도 길게 해봐야 꼴값이란 말 밖에 못 듣는다.


  그러나 이 시집 《허물어버린 집》에서 가장 중요한 건 현대사의 큰 비극 가운데 하나인 4.3 사건과 사라져가는 제주도 언어와 제주 사람들이다. 내가 4.3 사건과 제주에 관해 아는 것이 없어 함부로 입에 올리지 못해 말하지 않았다. 시인이 열 살 때 직접 눈으로 본 산간마을에서 있었던 참사를 내가 뭐라고 아는 척을 할 수 있겠는가. 관심있는 분은 읽어보시면 좋을 듯하다. 참수한 사람의 머리통을 죽 늘어놓은 광경. 그걸 본 열 살의 소년은 30년 후 시인이 되고, 다시 30년이 더 지나 본 것을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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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3-12-04 08: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딸 하나 있어봤자 되바라지게 아빠 드러워!! 꼰대애!!! 할 걸요 저기는 옛날 딸이라 연꽃 진 거도 알려주고 그러지 ㅋㅋㅋ 옛날 이야기 독후감에 잔뜩 팔아먹은 입장으로 꼴값처럼 보일 수도 있구나…안 본 눈 사드릴 수도 없고 어쩌지 계속 꼴값이나 떨어야지… 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3-12-04 10:19   좋아요 1 | URL
그 딸도 ‘옛날 딸‘이 될 즈음엔 늙은 아빠한테 연꽃이 졌다고 하지 않을까요? ㅎㅎㅎ
 
별의 시간 암실문고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지음, 민승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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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데뷔작 <야생의 심장 가까이>를 읽고 화들짝 놀란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백일도 더 지났다. 왜 놀랐느냐 하면, 리스펙토르가 겨우 스물두 살 때 쓴 작품이면서 포스트모던, 그리고 경쾌한 문장이 매혹적이었기 때문이다. <별의 시간>을 읽으면서도 당연히 이런 것들을 기대했다. 그런데 발칙한 빨간 색 표지의 <야생의 심장 가까이>와 달리 검정 표지를 한 <별의 시간>은 다분히 음울하다. 1977년 작품이니까 57세의 작가가 난소암으로 생을 마감한 해이지만 정작 리스펙토르의 육체적 고통은 암에 의한 것이 아니라 1966년에 당한 사고의 후유증이었다. 난소암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치료불가의 판정을 받아 손쓸 새도 없이 죽음에 이르렀다. 암이든 사고이든 간에 만년의 지독한 고통은 작가로 하여금 옛 시절을 생각하게 했고, 당연히 죽음과 살아온 흔적 같은 것을 연상하게 만들었을 터이니, 암울한 작품을 쓴 것도 충분히 납득이 갈 것.

  리스펙토르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을 한 편의 교향시, 아니면 적어도 음악 형식과 유사한 형태를 갖기 원한 것 같다. 그리하여 책의 제일 앞에 첨부한 “헌사” 가운데 이 작품을 헌정하고 싶은 작곡가만 나열해도 꽤 많다.

  지금은 슬프게도 유골로 남은 오래전의 슈만과 그의 사랑 클라라, 베토벤의 폭풍, 바흐의 중성색이 진동하는 순간, 나를 졸도시키는 쇼팽, 나를 겁먹게 했으며 나와 함께 불길 위에 솟구친 스트라빈스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죽음과 변용>, 드뷔시의 투명한 베일, 마를로스 노브레(브라질 작곡가), 프로코피예프, 카를 오르프, 쇤베르크와 12음 기법 작곡가들, 전자 음악 세대의 귀에 거슬리는 여러 외침들에게 <별의 시간>을 바친다고 썼다. 물론 이 외에 “혈기 왕성한 인간/남자인 나의 피처럼 짙고 검붉은 진홍색에 바치며 따라서 내 피에 바치는 것”이라고 분명히 하기도 했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는 1920년에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유대인 여성이다. 그런데 위 문단 안의 따옴표에 “인간/남자”라고 표기한 것은 포르투갈어 ‘homem’으로 ‘남자’ 또는 ‘인간’으로 번역할 수 있다고 영어전문 번역사 민승남이 각주를 달았다. 역자는 또한 이 헌사는 작품의 등장인물이며 화자인 호드리구 S.M.이 썼다고 볼 수도 있고, 작가인 클라리시 리스펙토르가 썼다고 볼 수도 있는 중의적 해석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런데 독자는 헌사의 마지막에 “클라리시 리스펙토르가 씀”이라고 박아 넣은 헌사를 누가 썼는지 굳이 구별할 필요는 없다. 작중 주인공인 브라질 동북부 알라고아스 출신 처녀, 처음엔 이름이 없다가 조금 후 고모한테 타이프를 배운 타이피스트였다가, 중간 이후부터 마카베아라고 불리는 어릴 적부터 고아였던 19세 여성의 보잘것없는 누추한 삶을 따라가고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을 마카베아 아가씨의 스토리에 집중할 필요가 있을까, 이건 독자에 따라 의견이 조금 갈릴 것 같다. 이런 책은 뒤에 흔한 “역자 해설”이 붙어 있으면 훨씬 좋을 텐데, 한 부류는 분리를 할 필요가 없거나 할 수 없는 작가 리스펙토르와 화자 호드리구의 독백, 치통 같은 날카로운 고통과 귀에 거슬리는 고음으로 넘실거리는 당김음 선율 속에서 그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발견하려 할 지 모르고, 다른 한 부류는 북동부 알라고아스 출신의 가난하고 굶주린 하층 고아 여성 타이피스트 마카베아가 상징하는 것을 찾을 지 모른다. 나도 둘 가운데 하나, 아니면 둘 다였다. 독후감을 쓰기 위해 검색을 하다가 눈에 번쩍 뜨이는 것은, 평소엔 작가 소개 언저리만 읽고 마는데 오늘은 리스펙토르의 난소암 상태가 어때서 마지막 작품이 이렇게 암울한지 알아보려고 말년까지 읽다가 발견한 바, 책을 다 읽고 지금까지도 남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오인 줄 알았다가, “마카베아”라는 여성형을 “마카베오”라는 남성형으로 바꾸면 “명백하게” 유대인 가족, 리스펙토르와 같은 정체성을 가진 인종이란다. 이걸 극동아시아 독자가 도무지 알 수가 있나? 게다가 마카베아 아가씨의 고향 알라고아스가 러시아 혁명 후 적백군 간의 내전을 피해 유대인 리스펙토르 가족이 배를 타고 길을 떠나 도착한 곳이라고 한다. 그러면 셈이 좀 복잡해진다.

  여기에 한 가지 의문이 더했으니, “마카베아”가 브라질 문학에서 상징적인 인물 가운데 한 명이라고 쓰여 있다. 마카베아가 <별의 시간>에 출연해서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는지, 원래 상징적인 인물/이름이 있었는데 그걸 리스펙토르가 차용해 쓴 것인지, 이런 거 알려주라고 “역자 해설”이 있는 거 아닌가?


  화자 호드리구의 인생에 자신과 같은 고향을 가지고 있는 익명의 못생긴 타이피스트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문학적으로 이렇다 할 성공은 거두지 못했어도 그럭저럭 만족스럽게 사는 남자였다. 말이 많은 것도 아닌데 줄곧 죽는 소리만 하다가 “금전적으로 가난하지 않은 사람은 영혼이나 열망의 가난에 허덕이게 되는데, 이들은 황금보다 소중한 무엇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헛소리도 서슴지 않는다. 외교관과 결혼하여 16년 동안 유럽과 미국 생활을 하고 귀국한 후 이혼을 하는 바람에 경제적으로 쪼들린 경험이 있는 리스펙토르의 수준에서 가난과 부유에 관한 이야기일 터, 진실은 가난은 사람의 영혼이나 열망까지 잠식해버리고 만다는 걸 작가와 화자는 몰랐을 것이다. 당시가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호드리구가 말하는 시대엔 많은 여성들이 리우데자네이루 해변에서 선원들을 대상으로 매춘을 해 먹고 살았다는데, 그가 보기에 마카베아는 팔 수 있는 몸조차 갖지 못했고, 아무도 원하지 않아서 아직 처녀로 있어서 전적으로 무해하며 아무도 그리워하지 않을 거라고 단정한다. 게다가 가진 것도 없어서 빈민가의 공동주택이나 상점 계산대 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이 너무도 쉽게 대체될 수 있는 소모품적 존재이며, 차라리 지상에서 사라져 버리는 게 나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말한다.

  마카베아는 조실부모하고 학교 교육도 3년 밖에 받지 못해서 글도 쓰지 못했지만 고모가 속성으로 타이프치는 걸 가르쳐 고모가 죽은 다음에 리우에 와서 도르레 유통회사의 타이피스트로 취직을 했다. 하필 사장 하이문두 실베이라 사장이 현학적인 단어 쓰는 걸 좋아해, 단어의 뜻을 전혀 알지 못하는 마카베아는 연일 오타투성이의 서류를 만들어낸다. 대화도 길게 하는 게 버겁고, 상당히 좁은 생활 말고는 기본 의식주 관련한 것에 대한 이해도 (부족한이 아니라)없는 마카베아는 네 명의 마리아와 함께  한 방에서 살고 있으나 친하지는 않다. 몸을 잘 씻지 않아 심상치 않은 냄새를 풍기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가까이하지 않으려 하는 이유도 알지 못한다. 어려서부터 자주 씻지 않는 것으로 알았으니까. 고향에선 사람들이 다 그랬으니까.

  그래도 사랑은 피어난다. 고향에서 사람을 한 명 죽이고 리우데자네이루로 와서 공장일을 하는 올림피쿠와 연애를 시작하지만 도무지 대화가 잘 되지 않는다.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으며, 사고방식이 완전히 다르고, 남자에 비하여 과하게 단순하기 때문에. 그러다가 올림피쿠는 마카베아와 한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통통한 중산층 아가씨 글로리아와 데이트를 하고 싶어 마카베아를 걷어차 버린다. 그래도 글로리아와 우정을 유지하는 마카베아는 친구가 권하는 대로 전직 매춘부였다가 포주를 거친 마담 카를로타에게 가 앞날의 운세를 보는데, 이게 대박, 이 집을 나가자마자 한스라는 이름의 백인을 만나 결혼하고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라는 예언을 듣는다. 그거 아시지? 소설 작법 2장 3항. 노파의 예언은 언제나 들어맞는다는 거. 근데 작가가 브라질 포스트 모던의 선구인 클라리사 리스펙토르인데도 마찬가지로 들어 맞을까? 그건 직접 확인해보시라.


  원래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쓸 때, “이 작품은 스토리 위주로 읽는 책이 아니다.” 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위키피디아에 쓰인 것을 보니까 그만 야코가 팍 죽어서 내 생각을 더 고집하지는 못하겠다. 솔직한 내 의견은 <야생의 심장 가까이>보다 덜 좋았는데 아직도 책 읽는 내공이 부족한 게 드러난 거 같아서 거 참, 겸연쩍기도 하고 뭐 그렇다. 나 잘난 맛에 사는 거, 그게 인생이지 뭐 별거 있어? 그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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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12-01 06: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문충성, 《허물어버린 집》
화요일. 김지하, 《구리 이순신》
수요일. 야로슬라프 하셰크, <훌륭한 병사 슈베이크>
목요일. 줄리언 반스, <고슴도치>
금요일. D.H. 로렌스, <다윗>

유부만두 2023-12-01 10:12   좋아요 2 | URL
골든삽질 기대하겠습니다.
연말 특집 올해의 삽! 선별 리스트도 만들어 주세요. ^^

수이 2023-12-01 11:24   좋아요 1 | URL
줄리언 반스랑 로렌스 기다리고 있을게요 폴스타프님

Falstaff 2023-12-01 15:35   좋아요 1 | URL
삽질은 계속 이어집니다. ㅎㅎ
11일. 앤 타일러, <바너비 스토리>
12일. 아모스 오즈, <블랙박스>
13일. 윌리엄 트레버, <운명의 꼭두각시>
14일. 조광화, 《조광화 희곡집》
15일. 줄리언 반스, 《레몬 테이블》
18일. 타티야나 톨스타야, 《톨스타야 단편집》
19일. 조지 엘리엇, <사일러스 마너>
20일.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깨어진 항아리>
21일. 장 콕토, <무서운 아이들>
22일. 아우구스트 스트랜드베리이, <꿈 연극>
25일. 신현림, 《세기말 블루스》
26일. 줄리언 반스, <태양을 바라보며>
27일. 요나스 하센 케미리, <몬테코어>
28일. 압둘라자크 구르나, <배반>
29일. 산도르 마라이, <사랑>

그리고 내년의 첫 삽질은: 프란츠 카프카, <실종자>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23-12-01 08: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리스펙토르 배수아 번역만 두 권 보고 이제 그만 볼게…했는데 오늘 팔백작님 독후감이 좀 꼬십니다?? 훠이훠이 나 쉽고 안 맵고 정신 사납지 않을 거 볼 거야!!!

Falstaff 2023-12-01 15:34   좋아요 1 | URL
리스펙토르, 읽을 때는 매력적인데 얼마 지나지 않으면 그냥 잊혀지더라고요. ㅜㅜ

수이 2023-12-01 1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기대대로 높은 안목을 지니신 분 후훗, 리뷰 잼났어요.

Falstaff 2023-12-01 15:34   좋아요 0 | URL
헉. 재미나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메데야와 그녀의 아이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5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지음, 최종술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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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1943년생 러시아 작가. 《우리 차르의 사람들》을 재미있게 읽었어도 날이 많이지나 기억나지 않지만 <커다란 초록 천막>도 그렇고 이 <메데아와 그녀의 아이들>도 그런데, 유대인들이 주목할 만한 배역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정작 울리츠카야는 <커다란 초록 천막>에서 시인이자 유대인인 미하 멜라미트를 등장시켜, 거의 모든 지식인이 소비에트 연방에서 탈출하려고 갖은 방법을 도모했던 1970년대에, 소련 당국이 미하더러 이스라엘로의 이민을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국어인 러시아어를 저버릴 수 없어서 끝내 소비에트에 남는 결정을 내리게 했다. 내가 아는 유대인 작가는 절대 이런 선택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울리츠카야가 1970년에 지하출판물(samizdat)를 소유, 배포한 혐의로 직장에서 해고되어 9년 동안 결혼하고 두 아들을 키우다가, (책의 앞날개에 쓰인 것처럼) 유대 드라마 극장에 들어간 것이 조금 의아스러웠다. 폐쇄적인 유대인 집단이 러시아 사람을 채용했을까? 울리츠카야가 유대인 맞다. 그러나 기독교를 받아들였으며 구소련이 만든 공동체 집단의 한 명으로, 인종적, 문화적 측면에서는 유대인이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밝혔다고 한다. 작품은 이탈리아에서 쓰는 경향이 있다는 울리츠카야는 그곳에 아파트까지 소유하고 있으며, 일년의 반은 모스크바에서, 나머지 반은 이스라엘에서 지낸다고 한다. 그러면 도대체 작품은 언제 쓰는 거지?

  류드밀라 울리츠카야는 빅토리아 토카레바와 류드밀라 페트루셉스카야와 더불어 내가 주목하고 있는 여성 작가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구 소련 시대에는 글을 쓰지 않았거나 검열을 당했거나, 써 놓고도 출간하지 않다가, 고르바초프가 제주도에 와서 노태우한테 30억 달러를 얻어가는 등 페레스트로이카가 진행되자 활발하게 출간을 해서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린 작가들이란 점이다. 그러나 울리츠카야의 장편소설 작법은 다른 작가들과 다르다. 그는 한 판에 많은 사람을 등장시키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옛일이거나 새로 하고 있는 일을 좌르륵 풀어내는 데 집중한다. 주인공 한 명이 있기는 하지만 다른 작가와 차별이 될 정도로 주인공이 거대 서사를 독차지하지 않는다. <메데야와 그녀의 아이들>에서 주인공은 당연히 메데야이지만, 메데야 시절에는 두 번의 전쟁과 스탈린에 의한 이주 정책으로 크름 반도 안에서 사라진 타타르인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독자는 작품의 가장 큰 이야기 줄기인가보다,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점점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해서 그들의 사는 이야기를 빼곡한데 어느새 앞부분에서 관심있게 읽었던 문제들은 사라져버린다. 이런 건 사실 내 스타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류드밀라 울리츠카야를 계속 읽고, 앞으로도 눈에 띄면 틀림없이 읽을 것이 분명한데, 그건 이이의 작품이 단단한 스토리라인을 구축하는 전형적인 장편소설이라서가 아니라 이야기를 조근조근 풀어내는 문장의 섬세한 날줄과 씨줄 때문일 것이리라. 세상에 글 좋은 작가들이 한두명이 아니지만 글 좋은 작가들이 만들고 그것을 우리말 솜씨가 좋은 역자들이 번역한 작품은 놓치고 싶지 않다. 스토리가 재미있어서 읽을 때가 있듯이 문장이 애간장을 녹이는 바람에 읽을 때도 있는 법이다.

  비록 이 책이 예전 비채 출판사에서 《소네치카》라는 책에 든 세 작품, <소네치카>, <메데야와 그녀의 아이들>, <스페이드의 여왕>을 역자 별로 잘라서 두 권을 만들어 불만이기는 한데, 이 책과 동시에 문학동네가 찍은 《소네치카∙스페이드의 여왕》도 놓치지 않을 예정.


  메데야 멘데스. 벌써 20년이 넘게 과부로 살고 있는 작은 병원의 간호사다. 간호사라도 같은 간호사가 아니다. 전쟁 때 동네의 유일한 의료업계 종사자로 모든 환자들에게 심각하지 않은 수술, 진단, 처방까지 두루 허가가 났던 지역 명사 정도 된다. 무시무시한 소련 정부에 의하여 지명수배된 사람이 메데야의 집에 숨어들어도 메데야가 호통 한 번 치면 아무리 경찰서에서 나온 형사라 하더라도 찍소리 못하고 날이 밝아 손님이 아침밥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려야 할 정도다. 이런 기운차고 압도적인 위세는 다분히 할아버지한테 물려 받은 것. 할아버지는 지금은 우크라이나 영토이지만 과거부터 따지면 고대 스키타이 인들의 땅이었다가 그리스와, 타타르, 오스만 제국을 거쳐 지금은 소비에트 연방의 국영농장 땅이 된 크름의 페오도시야에서 빈 손으로 출발해 페오도시야 항에 등록이 된 네 척의 상선을 소유한 부유한 무역상이었다. 그러니 살면서 얼마나 억척을 떨고, 가끔 독한 악행도 서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런 기질 때문에 그 세대에서는 다른 건 몰라도 꼭 있어야 좋은 자식복이 없어 유일한 혈육인 아들을 하나 두었을 뿐이다. 그러나 부자의 아들로 태어난 게오르기는 아버지처럼 악착을 떨 이유가 없어서 마틸다와 혼인을 하자마자 1890년부터 1816년까지 짝수 해 여름마다 줄줄이 자식을 생산해 무려 열네 명의 손주를 봤다.

  이 열네 명의 손주들과 그 아이들의 아이들마저 오리지널 그리스인인 시노플리 할아버지한테 강인한 기질과 재능을 물려 받았으니, 이 재능이 남자들한테는 탐욕과 큰 에너지와 건설에 대한 열망으로, 여자들한테는 절약과 물건에 대한 비상한 관심 그리고 재기 넘치는 실용적 기질로 나타났다, 라고 하는데 책을 끝까지 읽어보면 그렇지도 않다. 그냥 해본 이야기이거나 작가가 작품을 쓰다가 이 내용을 잊은 거 아닐까 싶다.

  메데야의 죽은 남편 사무일 야코블레비치 멘데스는 스페인에서 이주한 유대인 조상을 두었다. 1장에 소개하기를 쾌활한 유대인 치과의사라 했으나 책을 더 읽으면 드디어 남편의 정체가 밝혀지는데 유쾌하다기보다 좀 산만하고 체신머리 없는 떠벌이 치과 기공사였다가 사회가 어지러울 때 자기는 별로 원하지도 않았지만 어영부영 치과 의사 자격증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비밀스러운 바람둥이다. 그렇다. 바람을 피운 비밀 하나를 죽을 때까지 꽉 붙잡고 놓지 않은 인간.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마누라가 워낙 무서우면 지가 안 그러고 배겨? 죽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한테 우스워보일까봐 늘 전전긍긍하던 그가 미리 작성한 묘비명은 이랬다. “사무일 야코블레비치 멘데스. 특수부대 전사. 1914년부터 당원. 1890~1952” 묘비 꼭대기에 큼지막한 별 하나.

  메데야의 열네 형제 자매 가운데 마지막 열네 번째는 세례도, 이름도 갖지 못하고 엄마 배속에서 나오다가 엄마와 함께 죽어버리고, 아빠는 1916년 10월 7일, 세바스토폴 만 근처에서 함선 황후 마리야 호가 폭발할 때 선박 기관사로 일하다가 아내보다 9일 먼저 세상 떴다. 오빠 셋 가운데 하나는 적군에게 죽고, 하나는 백군한테 죽고 다른 하나는 메데야의 가장 친한 친구 옐레나가 난관에 빠지자 옐레나한테 장가들라고 강권해서 지금은 우즈베키스탄의 수도인 타슈켄트에서 과하게 잘 나간다. 남자 형제 하나는 독일군이 징병했고, 다른 하나는 소비에트가 징병해서 끌고 갔고 다른 하나는 루마니아인가로 가서 수도사가 됐다. 남은 형제 자매는 친척들한테 보내고, 아버지 형제가 워낙 없어서 이제 겨우 열여섯 살이 된 메데야가 알렉산드라와 두 살짜리 막내 디미트리를 업어 키웠다. 아이들이 거진 크고 보니 어느새 자신은 영낙없는 노처녀가 된 것. 그리하여 유대인 치과의사가 더 고맙고 그를 더 사랑했는지 모른다.

  남편이 죽은 이후에도 메데야는 한때 헬라스 땅이었던 페오도시야 옛집을 떠나지 않아 가문에 마지막 남은 그리스 순혈을 지키는 여인이 됐다. 그렇다고 오리지널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건 아니어서, 그리스어도 현지화 된 여러 그리스어가 있는데, 한때 그리스의 식민지 타브리다 그리스어, 정식으로 말하자면 폰토스 그리스어를 쓴다. 이제는 쓸 줄 ‘안다’. 그리스어보다 훨씬 자주 러시아어를 사용하니까. 혼자 산다고 외롭지는 않다. 매일 작은 병원 수납원으로 출근을 하고, 많고 많은 형제들이 낳은 자식과 손주들이 4월말부터 밀려들기 시작하는데, 워낙 활기차고 마음씀씀이가 큰 메데야는 언제나 기쁜 마음으로 그들을 맞아들여 마치 휴가 온 아이들의 집인 것처럼 스스로 요리하고, 잠자고, 빨래하고, 청소하며 살게 해준다. 가을바람 소슬할 때까지.

  그러니 형제, 자매, 조카들한테 얼마나 이야기가 많겠는가. 지지고 볶고, 그것도 모자라 무치고, 튀기고, 삶고, 조리고, 꾸덕꾸덕하게 말리는 일들이. 그걸 그렇게 조근조근, 나긋나긋하게 펼쳐내는 솜씨란. 다만 저 앞에서 이야기했듯,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이 내 스타일이 아니라서, 별은 네 개에서 멈추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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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3-11-30 07: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메데이야는 동생이나 자기 자식들을 죽이진 않나보네요. 간호사래서 은근 독살을 기대했는데요.

Falstaff 2023-11-30 07:32   좋아요 1 | URL
저도 그리스 신화 생각하고 피 좀 튀는 악녀가 나올 거라 예상했다가, 꽝이었습니다.
오히려 선하고 강한 여성이더라고요. ㅎㅎㅎ

stella.K 2023-11-30 1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거 완전 제 스탈인데요? 조근조근. 하지만 언제 읽게될런지 모르겠습니다.ㅠ 언제나 소설 읽기에 좋은 길잡이를 제시에 주셔서 감사하네요.^^

Falstaff 2023-11-30 16:26   좋아요 1 | URL
천천히 읽으셔요. 새털 같은 나날들입니다. ^^
 
밤, 네온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13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이수영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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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하다보니 또 오츠의 책을 읽었다. 가히 그로테스크의 여왕. 이 책도 엽기 여왕의 명성에 걸맞게 참 다양한 방면으로 피가 튀는 ‘엽기 넘실’이 만땅이다. 젊어서는 예뻤고 지금은 곱게 늙은 할머니가 어째 이리 입담이 험한 지 하여간 나는 조이스 캐럴 오츠의 책을 즐거운 마음으로 읽은 적이 없다.

  이 책은 아내한테 도서관 희망도서 신청을 좀 해달라고 졸라서 읽을 수 있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이면 캐럴 오츠의 책을 읽고 싶었을까? 첫 번째는 출판사 은행나무의 세계문학 에세 시리즈가 읽을 만한 책들을 잘 골라 출간하는 것 같은 믿음이 있어서 시리즈를 싹 읽어보자는 욕심이었으며, 두 번째로 다른 건 몰라도 조이스 캐럴 오츠가 이야기를 꾸밀 때 독자를 한 손아귀에 콱 움켜 쥐는 장악력이 대단하여 읽는 맛이 솔찮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엔 이이의 대표작으로 <좀비>를 치는 모양이지만 그건 모르겠고, 또다른 독자들은 <카시지>를 꼽기도 하는 것 같은데, 하여간 나는 이이의 작품을 그리 많이 읽어보지는 않았다는 전제로 말씀드리자면, <카시지> 이후에 오츠를 더 읽을 이유를 잊어버렸다. 오츠의 세계관이 나의 것하고 너무 차이가 나서. 그럼에도 이이의 작품이 시중에 나오면 한 구석이 자꾸 궁금해지는 거. 하긴, 이게 오츠, 대중문학 거장의 힘이리라. 이이가 장편소설 50편, 단편소설 천 편을 썼다는 거다. 그럼 밥은 언제 먹어? 잠은 언제 자고? 먹지도 못해, 자지도 못해서 빼빼 마른 거 아냐, 이거?


  모두 아홉 편의 중단편을 실은 모음집. 몽땅 엽기다. 가히 그로테스크의 여왕의 손길.

  조이스 캐럴 오츠는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고 참으로 다양한 괴물을 등장시킨다. 남자 괴물이 대다수이긴 하지만 여자 괴물도 있기는 있다.

  다른 독자는 모르겠고, 내 경우에는, 오츠의 책은 읽을 때는 재미있어서 금방 스토리에 함몰해 빠져들지만 시간이 좀 지나면 이이가 쓴 이야기가 어떤 내용이었는지, 상당히 헷갈리다가,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읽기는 읽었는데 도무지 기억이 안 나는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이이의 작품이 후져서 그렇다는 게 아니라, 하필이면 나 같은 무지렁이 독자가 자기와 합이 맞지 않는다고 우두둑 우기는 것을 당신이 믿어준다면 그렇다는 뜻이다. 이이는 재미는 있지만 나하고 합이 맞지 않는다.


  뉴저지 주의 스톤리지 시 교외 시골에서 30년간 살아온 중년의 애비게일은 뭔가 불편한 게 있었다. 그리하여 수 개월 동안 치료를 받아온 병원에서 모종의 검사를 받고 나름대로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다가 3월 어느 날 드디어 “음성” 판정이 나와 남편을 위해 촛불과 와인을 곁들인 저녁 식사를 준비할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다. 매일 지나가는 노스리지 도로이건만 오늘은 집을 불과 1킬로미터 정도 남겨두고 “우회하시오!” 라고 쓰인 푯말이 세워져 있었다. 에비게일은 표지를 무시하고 그냥 직진해버릴까, 겨우 1킬로만 가면 되는데, 하고 잠깐 고민하다가 좁은 우회도로로 접어들었고, 3월이지만 미국 뉴저지 날씨로는 여전히 “맹렬한 겨울”이라서 운전해 가던 차의 앞바퀴가 배수로에 박혀버렸고, 앞창이 날아들어 이마를 친 듯 코피가 흘렀다. 차가 기울어 빠져나가기도 힘들었으며 뒷자리에 아무렇게 던져 놓은 핸드백도 바닥 구석으로 밀려 갔는지 찾을 수 없었다. 휴대폰 역시 핸드백에 들어 있었다. 억지로 기어나온 에비게일은 시골 좁은 길로 다니는 차량을 한 대도 발견할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전화 한 통만 빌리고자 한 5백 미터 앞에 보이는 가정집으로 한겨울에 신발 한 짝만 신은 채 걸어서 도착했다.

  벨을 눌러도 집안에서 아무 반응이 없어 부엌문 쪽으로 간 에비게일은 열쇠를 숨겨놓을 만한 곳을 찾아 그쪽으로 집안에 들어간다. 이 장면을 읽는 독자는 누구라도 에비게일한테, 들어가지 마, 들어가지 마, 이렇게 기원하게 되리라. 독자가 무엇을 원하든지 절대 그대로는 하지 않는 주인공답게 에비게일은 집안으로 들어가 세수를 하고, 샤워를 하고, 옷을 잠옷으로 갈아 입은 채 부부침실에 들어 침대 속에서 깊은 잠에 빠져버린다. 시간이 지나, 드디어 집의 주인인 것 같은 흰머리의 나이든 남자가 방에 들어와, 마치 남편처럼 오늘 그가 사업상 만난 사람과 일 이야기를 하면서 우울하지만 상냥하게 에비게일을 달래는 거였다. 당장 집안에서 빠져나가겠다는 강박 증세가 생긴 에비게일은 수심에 잠긴 정도를 넘어 절망에 가까운 지경까지 이른 듯이 보이는 남자, 감금자를, 어떻게 했을까? 단편소설은 스토리를 이야기하기가 이렇게 힘들다. 한 마디만 더 하면 내용을 싹 다 말해주는 꼴이라서.


  위의 이야기가 첫 번째로 실린 <우회하시오>라는 단편이다. 이것처럼 책 속의 작품들은 늘 해왔던 일상 속에 도사리고 있는 재앙을 오츠 특유의 방식으로 뽑아내는 데 초점을 둔다.

  제일 괜찮게 읽은 작품은 평범한 여성이 남자를 사랑하거나, 관계를 맺은 과정을 그린 듯하지만 사실 창이나 간판에 네온을 장식한 곳, 즉 술집을 드나드는 버릇이 있는 젊은 여성의 알코올 의존에 더 집중한 중편이자 표제 작품인 <밤, 네온>이었다. 조이스 캐럴 오츠는 내가 읽은 작가의 전작과 마찬가지로 작품을 조금 더 쉽게 쓰려고 그랬는지 하여튼 등장하는 거의 모든 남자를 괴물이거나, 색정광이거나, 변태, 폭력성향을 소지한 위험 인물로 만들었다. 그거야 뭐 작가 마음이니까 독자가 상관할 바는 아니다. 근데 너무 자주 써먹는 거 아냐? 꼭 괴물 같은 것(들)이 등장해야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거야?

  이젠 오츠는 그만 읽으려 하지만, 이런 다짐은 언제나 쉽게 깨진다. 경험상 그렇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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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11-28 06: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또 읽으신다에 1표. ㅋㅋㅋㅋ 저는 이건 넘기려고 했는데….. 으음.

Falstaff 2023-11-28 06:09   좋아요 0 | URL
저도 자신은 없어요. ㅎㅎㅎ

은하수 2023-11-28 07: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무서워서 못 읽어요
몇 작품 읽었다 트라우마가... 허거걱...
전 그래서 그런거 쏙뺀 <멀베이니 가족>이 좋더라구요. 오히려 이 작품이 오츠의 작품 아닌듯한..^^

Falstaff 2023-11-28 16:32   좋아요 0 | URL
저도 그거 때문에 이제 오츠 그만 읽으려는 겁니다. 흑흑흑....
 
세레나데 대산세계문학총서 185
쥴퓌 리바넬리 지음, 오진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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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들어보는 작가인데 검색해보니 <세레나데>를 포함해 모두 네 권이 번역되어 시장에 나왔다. 이중에 <살모사의 눈부심>은 벌써 출간한지 20년이 넘어 절판됐다. 그러나 다니는 도서관의 보존실에 한 권 있다. 기분 좋다. 읽어야지. 나머지 세 권은 전부 2022년과 23년 출간. 그러니 리바넬리는 우리나라에서 사실 이제 시작이다. <세레나데>를 읽어본 소감은 대박. 앞으로 이이의 작품은 완독해볼까 싶은 마음이 든다.

  쥴퓌 리바넬리는 1946년 튀르키예의 콘야에서, 나중에 튀르키예 대법원장까지 오르는 검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따라 아나톨리아 반도 구석구석을 다니며 다양한 민속 문화를 섭취했는데, 이는 후에 리바넬리가 음악가로도 성공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앙카라에서 조부모와 함께 살며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이때부터 습작을 하다가 작품 속에서도 간략하게 소개하는 세계적인 1968년 운동에 충격을 받는다. 이때 그리 크지 않은 진보서적을 파는 책방을 경영하면서 어울리게 된 진보 성향의 지식인 그룹으로부터 깊게 영향을 받았다. 1971년에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자 리바넬리는 71년 한 해 동안 두 번 체포, 구금되었으나 아버지의 뒷배가 좋아서 그랬는지 풀려났고, 72년에 또다시 수배가 되자 여권을 위조해 독일로 도피했다. 74년에 사면 복권 조치로 76년에 귀국했지만 정국이 불안정해지자 이후 11년 동안 스톡홀름, 파리, 아테네, 뉴욕 등을 전전하며 엘리아 카잔, 아서 밀러, 제임스 볼드윈, 피터 유스티노프 등의 극문화 관련자, 현대음악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룬 그리스 작곡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 등과 교류하며, 본격적으로 OST를 포함한 다양한 분야의 음악을 만들고, 소설도 쓰기 시작했다. 다시 튀르키예로 돌아온 쥴퓌 리바넬리는 소설창작을 위해 음악을 중단하는 한편 정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국회의원에 당선하기에 이른다. 금세 환멸을 느껴 때려 치우기는 했지만. (위키피디아 참조했음)

  리바넬리의 이런 경력은 그의 작품에도 고스란히 나타나서 개인적, 철학적 주제로는 여성, 가족, 자유, 사랑, 자기중심적 사고, 과거에 대한 향수, 소통 부재, 분노라고 할 수 있으며, 사회적 측면에서 종교, 정치, 권력, 죽음, 관습, 전쟁, 학살, 퇴보 사회, 예술 등을 주제로 한다. (옮긴이 해설 참조했음) <세레나데>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인종, 종교, 피부색, 젠더, 핸디캡, 지위, 국가/국적, 생각에 따른 차별에 반대하는 것이다. 여기에 두드러진 것은 국가의식에 대한 반대. 튀르키예의 역사에 어둡지만 아는 대로 이야기해보면, 그들의 조상은 흑해 북쪽 타타르의 한 부족으로 페르시아가 쇠잔해지자 아나톨리아 반도에 정착해 위대한 오스만 제국을 건설하고 동로마제국을 무너뜨린다. 이후 오스만 제국은 인근의 여러 국가와 민족, 종교를 수입한 다문화 국가로 성장한다. 20세기 들어 유럽열강에 비해 열등한 위치에 머무르게 되자 튀르키예는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극단의 민족주의 국가로 변질되며, 20세기 후반에는 유연성 있던 종교마저 점점 극단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물론 이 배후에는 민주화되지 못한 정치 시스템과, 부정부패, 계속되는 쿠데타, 심각한 경제 불안 같은 요소가 있고, 이런 모든 것들이 복합적으로 경향을 더욱 부채질한 것은 물론이다. 쥴퓌 리바넬리는 책 속에서 끊임없이 피할 수 없는 권력의 폭력성, 결코 깨끗할 수 없는 권력의 속성을 거론하고 있다. 가능하다면 심지어 국가라는 단위마저 부정하고 싶어한다. 제임스 조이스가 쓴 위대한 소설작품 <율리시즈>에서 이런 문장이 나온다.

  “국가는 나를 위해 죽어달라.”

  이게 내가 <율리시즈>를 읽고 여태 기억하는 유일한 문장이다. 가장 싫어하는 건 바람둥이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한 연설, “국가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를 생각하지 말고 내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를 생각하라.” 이게 뭐가 달라. “나라의 발전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닫는 것하고.

  하여간 쥴피 리바넬리는 이런 정치적 측면에서 가장 왼쪽에 선 좌파 진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출신이 부르주아라서 그런지 경제적 좌파, 경제적 진보라고 하기는 쉽지 않지만.


  화자 마야 두란. 1964년 1월 21일생. 무직. 5월의 어느 아침에 이스탄불에서 프랑크푸르트로 가서 보스턴행 여객기로 환승해 비즈니스석의 안락한 좌석에 앉아 화이트포트와인 한 잔 곁들인 기내식 서비스 후에 노트북을 꺼내 글을 쓴다. 물론 전에 다 써 둔 원고라 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복사-붙이는 작업이 훨씬 많기는 하지만. 이스탄불 대학의 계약직 대외협력과 공무원이었다가 불미스러운 일로 해고 직전에 사직서를 냈다. 열네 살의 아들을 키우는 홀어미. 전남편 아흐메트는 큰 키에 적갈색 머리카락과 근육질 몸매를 지닌 매우 빼어난 미남으로 외모 하나 보고 결혼했다가 요지부동의 우유부단을 여성스런 섬세함을 지닌 건장한 남자라고 오해했다는 걸 크게 후회하며 8년 전 이혼서류에 인감도장 찍었다. 아흐메트는 법원 판결에도 불구하고 위자료는커녕 자기 성姓을 물려받은 아들 케렘의 양육비도 한 푼 보태주지 않아 엄마인 마야가 집세와 교육비를 위해 악착같이 업무에 매달렸지만 그만 잘리고 만 것.

  서른일곱 살의 매력적인 여성. 당연히 애인도 있다. 타륵. 애인이라기보다 요새 말로 보이프렌드. 이혼을 경험한 마야는 자유로운 사람으로 구속이나 관계에 얽매어 상처받고 싶지 않아 절대 결혼할 마음도 없다. 이건 마야 말고 여러 여성과 애인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타륵도 마찬가지. 자산관리인이라는 명함을 가지고 다니는 타륵은 그리 잘 생기지 않았지만 구르는 재주가 있어서 극단의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는 21세기 초의 튀르키예에서 마야의 전 재산을 잘 굴려 재산을 수십배로 불리는 수단을 부려주는, 그야말로 천사 같은 존재로 변신한다. 어느 작품이든 선한 일을 하려면 자주 큰 돈이 들어야 하는 법, <세레나데>에서는 타륵이 재물을 가져다주는 램프의 지니 역할을 할 예정이다.

  작품 초입에 비행기 안에서 마야는 자신 속에 자기 말고 세 명의 여인 아이셰, 나디아, 마리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각기 이슬람, 유대교, 천주교를 믿는 여성들이다. 국적은 튀르키예, 독일, 아르메니아. 아이셰는 이슬람을 믿는 튀르키예 인이지만 조국이 사지로 몰고도 구해주기를 포기해 자신을 뺀 부모 형제 친척 모두 물에 빠져 자살을 하든가 총살을 당해 죽은 마야의 외할머니. 마리는 천주교를 믿는 아르메니아 인이었으나 터키의 강제이주 정책에 의하여 어른들은 모두 추방당하고 자신은 친절한 무슬림 가정의 보호를 받다가 고아원으로 들어간 뒤 개종 이슬람인으로 살아온 친할머니.

  그리고 나디아. 유대계 독일인으로 전쟁 전에 뮌헨 대학의 부교수였던 막시밀리안 바그너와 사랑을 맺어 혼인을 한다. 유대 여인을 아내로 둔 남편은 자신을 아는 사람이 없는 하이델베르그 대학으로 옮겨갔으나, 유대인 검거 선풍이 불자 망명을 시도하다가 독불 국경선에서 아내 나디아가 체포되어 수용소에 수감된다. 혼자 튀르키예의 이스탄불 대학으로 옮겨온 바그너 교수는 아내를 구출하기 위하여 튀르키예에서 온갖 방법을 다 써 기어이 다하우 수용소에서 나디아를 빼내는 데 성공한다. 나디아는 부모의 고향인 루미나이로 추방되어, 막시밀리안 바그너가 그곳으로 큰 돈을 보내 흑해를 관통해 튀르키예 이스탄불에 오는 팔레스타인 행 여객선에 탐승한다. 그러나 나디아의 여행은 비극으로 끝나고 만다. 이로부터 59년이 흘러 하버드 법과대학 정교수 막시밀리안 바그너는 이스탄불대학 대외협력과 마야 두란의 마중을 받고 튀르키예 땅을 다시 밟는다. 그의 손엔 비싼 독일제 골동품 바이올린 케이스가 들려 있었다.

  저 오랜 세월. 당시 젊은 막스는 자신의 모든 생을 바쳐 사랑할 여인 나디아가 슈베르트의 <세레나데>를 듣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을 보고 그를 위하여 소품을 한 곡 작곡하니 <나디아를 위한 세레나데>. 59년이 흐른 2001년 2월 24일. 그 겨울에 가장 혹독하게 추웠던 날. 흑해 쉴레 해변에 선 바그너 교수는 바이올린을 꺼내 <나디아를 위한 세레나데>를 연주하다가, 중간에 멈추고, 다시 처음부터 연주하다, 또 중간에 멈추기를 계속한다. 여든일곱 살의 키 크고 마르고 늙은 교수는 세레나데의 후반부를 기억하지 못하는 거였다. 그의 몸은 빠른 속도로 얼어버리고 기어이 얼굴과 입술이 보랏빛으로 새카맣게 타버린 저체온 증상으로 사경을 헤맨다.


  도대체 막시밀리안 바그너 교수와 나디아는 어떤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마야의 친할머니와 외할머니, 마리와 아이셰는? 큰 이야기라서 하잘것없는 독후감에 다 담을 수도 없을 뿐더러, 내 남루한 글자로 그토록 무거운 이야기를 옮기는 것 역시 외람된 일이라, 그건 독자께서 직접 읽어보시기 바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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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3-11-27 08: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꺅~~~630쪽!!!
끝까지 써주시지 읽다 만 느낌이네요. 신나게 읽고 있었는데 뚝... ㅠㅠ
새로운 작가를 자꾸 발굴,소개하는 대산세계문학총서 멋지네요.
저도 좋아하는 시리즈입니다^^

Falstaff 2023-11-27 16:29   좋아요 0 | URL
아휴, 제 짧은 문장으로 이야기를 더 늘일 수 없었습니다. ^^;;

yamoo 2023-11-27 10: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또 별5!!!
이것두 찜~~ 합니다!
아, 근데 630쪽이면 ㅎㄷㄷ 하네요..^^;;

Falstaff 2023-11-27 16:30   좋아요 0 | URL
페이지는 금방 넘어갑니다. 그만큼 재미나거든요. ㅎㅎㅎ
이 책은 강추, itself 입니다. ^^

coolcat329 2023-12-03 14: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 적립금이 7500원 쌓여서 뭘 살까 고민하다 폴스타프님이 강추하시는 630쪽 이 책을 사기로 결심했습니다. 사실 요즘 거의 책을 못 읽고 있지만 적립금은 또 아깝잖아요. ㅠㅠ
감사합니다.

Falstaff 2023-12-03 21:33   좋아요 1 | URL
에효, 조카 결혼식 갔다가 지금 와서 댓글이 늦었습니다.
잘 하셨습니다. 이 책, 재미납니다. 천천히 읽으셔요. 새털 같이 많은 나날들입니다. ^^

그레이스 2023-12-06 09: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발굴자!
폴스타프님의 값진 리뷰네요!
작가 저장하고 갑니다.

Falstaff 2023-12-06 16:25   좋아요 1 | URL
이 책 재미있습니다. 리바넬리의 다른 책 <어부와 아들> 읽었는데요, 내년 1월 감상문 등록할 겁니다, 이 책보다 한참 못하더라고요. 다른 작품도 더 읽어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