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슨 크루소 펭귄클래식 36
다니엘 디포 지음, 남명성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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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시절에 축역본으로 읽었던 옛날 이야기, 다시 읽어보는 프로젝트(햐, 외래어 사용할 때의 이 기묘한 울림. 이래서 외래어 쓰는 거다) 일환으로 과감하게 중고책 사서 읽었다. 책 나온 시점이 1719년. 글쎄, 300년 전으로 돌아가 이 책을 읽는다면 정말 기막힌 독서를 경험할 수 있겠지만 이제는 뭐 그냥.

 책 표지, 기둥에 붙어있는 현판을 보시면 이렇게 써있다.

 "I came on these shores on the 8th day of June, in the year 1659"

 이 장면이 두가지 측면에서 구라다. 첫째, 크루소가 무인도에 떨어진 날짜는 6월 8일이 아니라 1659년 9월 30일, 둘째로 이 푯말을 설치해둔 장소가 그림과 같은 저택이 아니고 해변가다. 이건 작가와 삽화가 혹은 표지 제작자 간의 일이니 그럴 수 있다고 쳐도, 나중에 크루소가 프라이데이와 함께 섬을 떠나면서 날짜를 계산할 때 1년 며칠의 차이가 나는 건 어쩔겨? 300년간 세계명작으로 알려져 있던 작품이며 후배 작가들이 숱하게 인용한 위대한 유산에서도 이런 에러가 발생한다. 이건, 그냥 웃고 넘어가도 될 듯. 누가 혹시 알아? 300년 전엔 작가들이 재미있으라고 소설 속에 고의로 트랩을 설치해놓았을지. 그냥 그렇게 넘어가자.

 내용? 다들 아시잖여?

 정말?

 난 아니던데?

 이거, 흠. 디포가 자기 방에 단풍나무로 만든 책상에 앉아 오직 머리 속에서 기어나오는 상상력에 의해 쓴 책. 어려서 축약본 읽었을 땐 전혀 몰랐다. 만일 무인도에서 정말 크루소처럼 살 수 있었다면, 크루소는 분명 반신반인 또는 삼배체 염색체 인간이었을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형제란 얘기. 물론 크루소 문명의 이기, 특히 총과 화약, 총알을 비롯한 문명의 잔재와 과학적 사고방식이란 최고의 도구를 갖고 무인도에 떨어졌으나 무려 삼십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혼자 살면서도 모국어인 영어를 비롯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라틴어의 약간을 몽땅 다 기억하고 있는 것은 물론, 점차 섬에서 그야말로 신의 지위에 앉게 된다.

 근데 이건 그냥 로빈슨 크루소의 행적에 관한 거고, 내가 이 책을 지독하게 재미없게 읽었던 이유는, 놀라셨지, 재미없다고 그것도 지독하게 재미없다고 얘기하는 거. 근데 그게 사실인 것이 책의 거의 절반 이상이 기독교의 신에 대한 고마움, 은혜가 넘실넘실 흐르는 증거 대기에 할애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잘 쓰는 말이, 꽃노래도 삼세번. 하이고, 차라리 광신적 개신교 교회에 들러 바로 옆자리에서 아저씨 아줌마들이 넋 놓고 하는 방언을 듣지 말야. 초간이 1719년이었던 걸 충분히 감안을 했어야 하는데 준비 없이 재미있겠거니 그냥 책을 읽기 시작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 이딴 거 읽느라 이틀 반이나 썼다. 물론 만날 쇠주 마시느라 밤엔 책을 읽지 않기는 했다.

 기독교인이 아니면 그리 크게 재미있을 거 같지 않지만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선택은 전적으로 당신 마음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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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셀레스티나 을유세계문학전집 31
페르난도 데 로하스 지음, 안영옥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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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거 예전부터 읽어볼까 망설였던 건데, 책 표지 그림이 하도 엽기라 도무지 손이 가지 않았었다. 16, 17세기 스페인 마녀, 책에 나온대로 말하자면 턱수염까지 거무스름하게 돋았으니 <맥베스>에서 '장차 나린 왕위에 오르실 거예욥', 마녀하고 거의 비슷하게 생겼다. 그리하여 보자마자 화형식 장면이 떠오르는 바람에 차일피일.

 유럽 각국의 진짜 오래된 고전들, 예컨데 프랑스에 <가르강튀아 / 팡타그뤼엘>, 영국의 <신사 트리스트럼 섄디의 인생과 생각 이야기>, 이탈리아의 <데카메론> 등은 작품 자체를 극동 아시아 사람이 감상을 해서 감명깊다, 이딴 말을 하기는 쉽지 않지만 유럽 문학을 읽으면서 숱하게 인용하는지라 후대의 작품들을 위한 기초체력을 기르는 셈치고 읽어두면 아주 좋다. 같은 의미로 <라 셀레스티나>도 언젠가 얽어야 할 목록에 포함시켰었는데 이제야 끝냈다(물론 로렌스 스턴의 작품은 지금 읽어도 시공간을 초월하여 충분히 멋있다).

 칼리스토, 라고 하는 22세던가 24세던가 하는 스페인 귀족 청년이 사냥길에 나섰다가 멜리베아라는 처녀를 보고 한눈에 홀딱 반해 겪는 우여곡절. 칼리스토도 부자에다가 귀족계급이긴 하지만 멜리베아는 칼리스토보다도 훨씬 더 부유하며 훨씬 더 높은 계급의 귀족 집안에 하나밖에 없는 따님이어서 도무지 언감생심, 이었다가 혼자서 끙끙 상사병 앓다가 죽느니 그나마 '짹' 소리라도 내보고 죽느라고 동네에서 가장 머리가 좋고 온갖 곡절을 다 겪으며 모진 세월을 살아온 가난한 늙은 여인 셀레스티나에게 중매를 부탁하며 드디어 사건은 벌어지는 거디다.

 원 작품이 15세기에 나온 거다. 당시 일반 백성, 그중에서도 여자 혼자 살면서 이웃을 비롯한 다른 인간들한테 만만하게 보이면 행여 잘, 평화롭게 먹고 살 수 있을 거 같은가? 시대는 페스트와 콜레라, 겨울엔 티푸스까지 온갖 죽을 전염병이 창궐하고, 전염병보단 인명을 덜 살상했지만 못지않게 백성들을 간난과 고통 속에 빠뜨린 쉼없는 전쟁의 와중이었음에야. 하긴 전염병과 전쟁이 없던 20세기 후반의 대한민국에서도 여자 혼자 살려면 별 거지같은 새끼들이 다 꼬여 어떻게 해서든지 가진 거 홀딱 다 뺐어먹고 튈 생각으로 눈알이 벌겋게 물든 인종들 숱하게 꼬이던 것도 숱하게 보긴 했다. 역사이래 홀어멈, 홀처녀 살기 끔찍하기가 그래도 좀 덜 하기까지 예수 죽은 후 2,000년이 필요했던 거다.

 내 보기에도 이 책의 진짜 주인공 셀레스티나라는 노파, 이웃들에게 간교하고, 독사같고, 저주를 퍼붓고, 밤마다 악마와 교접하고, 고양이 뿔과 암소의 고환을 끓여 사랑의 묘약을 만드는 마녀라고 지목을 당하지만, 사실은 당초(唐椒: 호고추. '호'는 중국을 대표하는 외국산을 얘기하는 것으로, 외국에서 건너온 존나 매운 고추. 울나라에서 청양고추를 먹기 전에 신도가 제일 셌던 고추를 일컫는다)보다 매운 시절을 홀어멈으로 악착같이 살아내느라 이웃들과 좀 불편한 관계를 맺어 어쩔 수 없는 평가를 받고 있던 거 같은데, 뭐 어떤 상황인지 이해 가시지? 근데 작가 페르난도 데 로하스, 얘도 당시에 글자를 자유자재로 읽고 쓴다는 거 하나만 가지고도 짐작할 수 있다시피 먹고 살 만한 인간이어서 그랬는지 하여간 무지무지한 악당으로 묘사해놨다. 이해해주자. 책은 15세기 내용을 16세기에 쓴 거니까. 그리하여 책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백성들, 칼리스토의 하인들까지 몽땅 포함해 일반 백성들은 교활하고, 언제나 상전 몰래 상전의 재물을 훔쳐낼 생각에만 골몰하는 추잡한 인간으로 묘사한다.

 아, 얘기가 또 경상남도 삼천포 시로 빠졌다.

 하여간에 얼굴에 깊은 상처가 있는 늙은 셀레스티나가 칼리스토와 멜리베아 사이를 시계불알처럼 왔다리갔다리 하면서 칼리스토에 대한 막강한 저항 또는 분개해 있던 멜리베아의 마음을 녹여 사랑에 불을 붙이는 거까진 내가 얘기할 수 있어도, 이렇게 멋지게 사랑을 이어준 셀레스티나가 왜, 어찌하여 죽음에 이르는지, 칼리스토와 멜리베아가 노파의 죽음과 하인들의 불행한 운명에 조금도(물론 '조금'이야 신경 썼겠지만) 개의치 아니하고 사랑에 몰두하는지, 그래서 도대체 어떻게 됐는지는, 이 독후감을 읽으시는 분들이 아무리 궁금해도 가르쳐드릴 수 없다. 왜냐하면 진짜로 이 책을 읽어보실 1/100 명을 위하여.

 다만 한 가지. 나도 16세기에 나온 스페인 최고最古의 문학작품이 그렇게 끝을 맺을지는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했다는 거. 뻔한 결말이겠지, 쉽게 생각했다면 나처럼 한 방 얻어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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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7-06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궁금하네요. 제가 그 1/100 명이 되어 보겠습니다. ㅋㅋㅋ

Falstaff 2017-07-06 10:44   좋아요 0 | URL
아후.... 선택의 결과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습니닷!
이렇게 오래된 책의 경우엔 이 말을 뺄 수가 없어요. ㅠㅠ
오랜 옛 이야기 책인것을 감안해 독특한 결말이지 지금 시각으론 그렇지 않을 수 있음을 미리 말씀드려야 후환이 없지않나 싶네요. 긁적긁적
 
무한의 책
김희선 지음 / 현대문학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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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희선, 또 사고쳤다.

 전작 <라면의 황제>를 통해 엽기발랄한 아이디어를 전혀 숨기지 않고 대한민국 강원도 W시에 홀연히 등장한 우주선과 외계인을 선보이더니, 이젠 여기서 두어 계단 업그레이드 해 또다시 세계 전 지역에서 수없이 많은 우주선이 쏟아져내려와, 왜 그거 있잖아, 어떻게 보면 중절모 같고, 어떻게 보면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같이 생긴 오소독스한 모습의 우주선, 바로 그 모습의 무수하게 많은 우주선들이 전작과 같이 하늘에 동동 떠 있다가 거기서, 개봉박두, 숱한 외계인이 하늘에서 강림을 하시는데, 바로 2015년 12월 21일, 그날로부터 한 달 전 대한민국의 모처에서 칭기즈 아이트마토프의 <백년보다 긴 하루>를 읽고 내가 쓴 독후감에서 이렇게 의문을 제시했는데 "왜 외계생명체까지 전부 척추동물이어야 하는 것이지? 무척추동물로 하면 더 획기적이지 않을까? IQ 150의 두뇌를 보유한, 2미터 크기로 진화한 말벌을 생각해봐", 비록 말벌까지는 아니었지만 김희선은 전작에서의 로스웰 사건과 거의 비슷한 외계인의 모습 대신 거대 파충류, 즉 공룡의 외모를 한 외계인을 등장시켰으며,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세계적으로 숱한 개체들이 널려있는 공룡 모습의 외계인들은 서로 텔레파시를 통해 의견교환을 하는 단계를 넘어서서 수많은 공룡들이 사실은 한 개체의 수없이 많은 분산, 즉 외계인이라기보다 하늘에서 강림한 신, 그렇다, 모든 종교에서 말해왔던 바로 그 신, 한문으로 쓰면 神, 영어로 God, 독일어로 Gott, 프랑스어로 Dieu, 이태리어로 Dio 라고 주장해마지 않는다. 사실은 하나지만 눈에 보이는 건 세계 방방곡곡에 산재해 있어 분산된 각 개체의 신이 세상을 모눈종이처럼 쪼개서 한 모눈을 관리하고 있다는 취지, 그러나 그게 면적 단위인지 인구밀도 단위인지는 밝히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독자가 생각하기로 암만해도 인구밀도 기준으로 봐야 마땅하지 않겠느냐 하는 건데, 왜 그러냐하면, 책의 주인공 스티브, 미국에 있다고 김희선이 주장해마지 않는 트루데라는 도시에 살고 있는 스티브의 아파트 혹은 연립주택 아니면 다세대주택 창문을 은근슬쩍 넘어보는 티라노 닮은 신(의 분산된 개체)의 갯수가 두 마리, 아참 신한테 '마리'라고 쓰면 불경하겠구나, 그럼 두 분, 아무리 그래도 티라노 닮은 도마뱀 종류 파충류 강綱의 생명종에게 또 '분'이라 쓰기도 거시기해서 참 곤란하지만 하여간 신이 둘 등장하기 때문이다. 신이 둘 등장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보기에 둘이지 사실은 하나인 둘을 김희선은 각기 보리스와 아르까지로 칭하기로 결정해 나로하여금 완전 뒤집어지게 만들었다. 참 재미난 소설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년>을 함께 쓴 스트루가쯔키 형제 아닌가 말이지. 뭐 그건 그거고, 이제 외계인을 신의 자리까지 격상시켜놓은 김희선. 혹시 작가 자신이 외계인 아냐?

 위에서 얘기한 주인공 스티브. 얘가 2016년 현재 살고 있는 곳이 미국의 트루데. 트루데라는 지명을 작가는 이탈로 칼비노의 책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 초원을 유목민처럼 유동하며 세상은 끝도 없는 트루데란 보이지 않는 도시로 이루어져 있다는 의미로 사용한 걸 차용해왔다. 그러니 트루데란 미국의 도시도 그게 정말로 있는 건지 아닌지, 심각한 정신적 외상에 의하여 탄생시킨 거대한 지리적 서사에 불과한 것인지 끝내 일러주지 않는다. 책을 읽어보면 '트루데'란 미국의 도시, 돼지와 닭의 도살업으로 시민 전체가 먹고 산다고 해도 별로 과장이 아닌 삶으로서 피의 도시, 이게 거 참, 정말 미국 도시 맞아? 읽다보면 서울시 동대문구 마장동 도살장 부근이나 인천시 부평구 십정동 도살장 인근인 것 같은 기시감이 팍팍 든다. 지금은 모르겠고 20세기의 마장동이나 십정동에 가면 선입견인지 아니면 사실인지 하여간 피비린내 비슷한 자극이 후각 가득 차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당시 25도 짜리 진로소주 병을 비우고나면, "아줌마 두꺼비 알 밴 걸로 바꿔주세요" 하면서 "등골 한 접시 추가고요, 간하고 천엽은 서비스로 좀 더 주세요"하는 왁자한 소리의 주문이 언제나 귀에 익었다. 그땐 일년 내내 날고기 실컷 먹고 따뜻한 봄날이 오면 배 속에 뭔가가 있거나 없거나, 칼국수 마디 같이 생긴 뭔가가 바지를 타고 떨어지거나 아니거나 구충제 한 웅큼을 꿀꺽 삼키면 그걸로 끝이었다. 스티브의 아버지가 1980년대에 미국 트루데로 이민가서 곧바로 얻은 직업이 살아 있는 돼지의 경동맥을 따는 일이었고, 똑같은 시절의 마장동이나 십정동에선 돼지를 도살하기 위해 끄트머리가 뾰족한 도살용 도끼로 돼지의 정수리를 단 한 방에 쪼개버렸다. 기억하시나? 당시 재래시장 가면 돼지 대가리 삶은 것들을 죽 늘어놨었는데 하나같이 정수리에 구멍이 뽕, 나있던 거. 난 책을 읽으면서 미국 도시 트루데에 관한 일화에 상당히 관심을 쏟았는 바, 삶을 위한 피의 도시와 스티브가 경험한 불행한 개인사가 서로 긴밀하게 얽혀있기 때문이고, 이 소설이 독자에게 중의적 해석의 기회를 주기 위해선 작가는 트루데와 도시 속의 삶에 더 치밀한 묘사를 해야 하지 않았나 싶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지 않고 이 독후감을 읽는 분은 지금 내가 뭔 얘기를 하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이렇게만 말하자. 작가는, 그가 매체에 인터뷰한 내용을 빌리자면, 독자에게 다양한 해석, 다시 말해 결론에 관해 독자에게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는 열린 서사구조"를 주고 싶었다는 취지로 이야기했는데 그렇게 만들기 위해선 독자로 하여금 끝까지 미궁에 빠져있게 만들어야 했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서다. 내가 읽기로는 책의 후반부에 가서 오히려 그동안 헤맸던 미궁에서 빠져나오는 걸 감지할 수 있었다(작가가 만일 이 독후감을 읽는다면 미궁에 빠져 있던 독자가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던 것일까,를 숙고해봄직 하지 않겠나). 소설가는 거짓말장이다. 그건 당연한 거고,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란 새롭고 어려운 지평을 선사하기 위해선 또 대단한 사기꾼이 되어야 한다. 끝까지 독자를 속일 수 있기 위해선 어떤 방법이 있을까. 앞으로 김희선이 심사숙고 해봐야 할 동네 아닌가싶다.

 비록 말은 이렇게 했음에도, <무한의 책>은 올해와 내년 상반기에 있을 대한민국의 문학상을 기대해도 좋을 수작이다. 정말 상을 받을지 아닌지는 자신하지 못하겠다. 그건 우리나라의 문학상을 보면 말은 번지르르 잘 하지만 이 책처럼 파격, 혹은 변종 또는 엽기발랄한 작품은 그냥 칭찬만 할 뿐, 진짜 상을 주는 경우를 내 보질 못해서다. 등장과 더불어 문학인생의 전성기를 맞은 거처럼 보이는 김희선. 아직은 그의 전성기가 아님을, 아직은 더 보여줄 것이 많이 있다는 걸 증명해주기 바란다.

 





* 여기서 끝내려고 했으나 도무지 입이 근질거려서.

 왜 미국의 트루데, 그곳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이 대한민국의 어느 도시, 특정하지 않는 일반 도시를 보는 것 같을까. <무한의 책>은 오직 대한민국 국내 판매용으로 쓴 것인가? 책을 외국어로 번역한다면 트루데를 읽으면서 이해할 수 있는 아메리카, 유럽 사람들이 몇이나 있겠는지. 이런 것들을 염두에 두고 대한민국의 모든 소설가는 작업을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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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잡극선 을유세계문학전집 78
관한경 외 지음, 김우석.홍영림 옮김 / 을유문화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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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漢나라 문, 당唐의 시, 송宋의 사詞, 원元의 곡曲 가운데 (세월 빠르다, 벌써)20년 전에 당시唐詩는 이원섭의 번역으로 읽고 몇 수는 외웠는데, 다른 세 개는 머뭇거리기만 했다. 이번에 기회를 잡았다. 책의 제목 "원잡극선"을 우리식으로 알기 쉽게 쓰자면 '원 (한 칸 띄고) 잡극 (한 칸 띄고) 선' 즉 "원 잡극 선"이 좋다. 즉, 원나라 시대의 잡극 선집이란 말씀. 칭컨데 '원곡'이란 건 들어보기만 했지 '곡'의 형태가 무엇인지는 생각해보지않았다. 물론 곡哭 소리 나는 비탄의 싯구는 아니겠지만 별 관심이 없었다는 게 솔직한 고백이다. 근데 원곡元曲에 대해 조금이라도 궁금해 했다면, 아시다시피 내가 또 음악을 대단히 좋아하니, '곡曲'이 '소리와 가락'을 포함하는 예술행위라는 걸 금방 알았으리라.

 여기까지가 책을 읽기 전의 황량한 내 정신상태. 드디어 해설까지 포함해 830 쪽이 넘는 두꺼운 책을 넘긴다. 첫번째 이야기가 <선비 장우가 바다를 끓이다>. '이호고'의 작품이란다. 장우라는 이름의 선비가 있어 동해(우리나라 서해) 바닷가 근처 한 사찰에 들어 경치가 삼삼하니 풍취가 돋는다. 선비랄 작자는 길을 나설 때 반드시 가지고 다녀야 할 것이, 책, 검, 거문고(또는 가야금) 그리고 뭐가 하나 더 있는데 그건 벌써 잊었다. 알고 싶으시면 이 책 사 읽어보시라. 알더라도 다 말해버리면 재미 적으니 기억나지 않는게 오히려 기특하다. 하여간 네 가지 가운데 거문고를 가져오라 하여 득도의 솜씨로 연주를 하며 노래 한 곡조를 뽑는다.


 흐르는 물을 연주하든 높은 산을 연주하든

 종자기가 가버리면 내 연주 알아듣는 이 없으리

 오늘 밤 등불 아래 노래 세 곡 연주하리니

 헤엄치던 물고기 머리 내밀고 들어줄까?


 종자기鍾子期가 누군지 모르시지? 한 마디로 '귀명창'의 대명사. 전국시대 때 백아伯牙(한자 변환 하니까 1번으로 鍾子期, 伯牙가 뜰 정도로 유명짜한 인간들이었으니 좀 외워둬도 좋을 듯)라는 극강의 거문고 연주자가 있었는데 종자기가 백아의 연주를 듣고 한 방에 광팬이 됐단 거.

 하여간 장우의 노래 속에 마지막 줄, "헤엄치던 물로기 머리 내밀고 들어줄끄나" 하자마자 정말로 물고기 인간, 동해바다 용왕님의 세째 딸 '경련'이 연주를 듣고는 단박에 장우한테 반해버린다. 그리하여 용왕님 댁 세째 따님이 연주를 들으면서 노래하는 여러 마디 가운데 하나 만 소개하자면,


 [작답지鵲踏枝]

 패옥 잡아당겨 나는 딩동 소리도 아니고

 처마 밑 풍경의 찰가랑 소리도 아니고

 사찰 승방의 목경 두드리는 댕댕 소리도 아니고

 한 소리, 한 소리 마음 두려워지는데

 아, 바로 띵띠링 오동 나무에 비단줄 소리구나


 이 노래가 대단히 훌륭해서 따온 것이 아니라, 시 앞에 지시어 비슷하게 써놓은 세 글자로 된 걸 읽어보시라. 작답지. '까치가 나뭇가지를 밟듯' 노래하라는 거. 굳이 서양 말로 하자면 알레그로 스케르쪼?

 이걸 보고, 아, 원나라 시대의 잡극이란 것이 기악연주, 노래, 연극을 포함한 종합예술이로구나! 알아차렸다. 그러니까 원나라 시대의 잡극이란 건, 연극대본 즉 희곡이 아니라 오페라 대본에 더 가깝다. 이런 것도 있다.


 [육요서 六幺序]

 영락없이 한나라 때 사마상여가 임공臨卭에서 객이 되어

 탁문군 유혹하러 봉황노래 연주하던 그 자태인지라

 나도 모르게 흠모하는 정이 짙게 일어나네

 저 청풍명뭘 세 곡을 들어보라!

 안족은 들끓고

 돌괘는 영롱하도다.


 [요편幺篇]

 슬프기는 기러기 울음 같고

 처절하기는 가을철 귀뚜라미 같고

 교태롭기는 꽃의 자태요

 날래기는 우레의 울림이요.


 육요서. 여섯 개의 짧은 서술(표현) 속에 장우의 외모 또한 절세미녀를 유혹하는 봉황의 자태인데다가 연주마저 얼마나 오줌 지리게 하는지, 안족雁足(기러기발: 거문고 판과 줄 사이에 줄을 받치고 있는 장치)이 펄펄 끓는 거 같고 돌괘마저 영롱한 느낌이 든다니, 참 명기를 신기로 연주하는 절세 미남자아니냐.

 요편. 짧게 얘기해서(글쎄 이렇게 해석하는 게 가당키나 하다면 말이지만), 연주가 슬픔과 처절, 교태와 날램까지 두루 다 포함되어 있으니, 이 신기의 연주를 실제 무대, 대갓집 정원이나 시장바닥이겠지만, 하여간 실제 공연에선 어떻게 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그외의 지시어, 비슷한 것들로 재미난 것들이 많다. 하다못해 기생초妓生草도 있다. (<두아의 억울함이 천지를 움직이다>에 나온다) [기생초]는 어떻게 연주 또는 노래하라는 것일까? 암만 궁리해봤자 도무지 떠오르는 것이 없다.

 원곡元曲이 지금 어떻게 연주되는지 모르겠다. 이후 명과 청조를 지나면서 상당히 많은 부분이 바뀌었을 텐데 혹시 베이징 오페라라고 불리는 경극京劇이 이 원곡에서 시작한 거 아닌가?

 아, 지금 경극을 검색해보니 유명 레퍼토리 가운데 <조씨고아趙氏孤兒>라는 것도 있다. 이 책의 11번째 작품이 '기군상'이 쓴 <조씨고아의 위대한 복수>다.


 근데, 희곡과는 달리 오페라 대본을 보고 "진짜 재밌다"라고 하는 사람 못봤다. 음악과 춤과 연기에 대한 정보 없이 대사만 좍 나열되어 있는 대본. 그건 대사를 통한 메시지 전달에 의존하는 연극(희곡)하고는 달리 공연을 해야만 표현되는 풍부한 감정이 완전히 건조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판소리를 글로 읽으면? 무지 재밌다. 글로 전해지는 판소리 가운데엔 <변강쇠전>도 있다. 그건 하도 야해서 판소리로 구전되진 않았지만 한국고전문학전집 비슷한 이름을 단 책 속을 통해 읽어볼 수 있는데, 완전히 뒤집어진다. 심지어 희곡보다 더 재밌다.

 재미있는 순서로 치자면, 판소리 > 희곡 > 오페라 또는 원나라 잡극 대본.

 그러니까 무대 위에서 배우 혹은 소리꾼이 표현의 양식이 간단할수록 그걸 글로 쓴 것이 재밌다는 얘기. 그럼 잡극을 재미있게 읽는 방법은 없을까?

 천만의 말씀. 인간의 가장 큰 무기 가운데 하나가 상상력이다. 잡극을 보면서 독자는 자신만의 무대를 만들 수 있다. 내 마음대로 등장인물을 설정하고 연기와 노래와 연주를 연출해가며 읽는 거다. 그야말로 상상 속의 한 편 드라마, 오페라를 만들어내는 작업. 그게 이 책 <원잡극선>을 읽는 방법이다.

 내 경우에 한하지만, DVD를 비롯한 영상물은 한 번 보면 그걸로 끝인 경우가 많은 반면, 오직 시각에 호소하는 CD는 열번, 오십번도 즐겨 듣는 이유. 음악 또는 오페라 또는 판소리를 들으며 오직 나만의 무대, 나 하나를 위한 공연을 상상할 수 있기 때문.

 바라건데, 즐기시옵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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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말일 까지 142 권의 책을 읽었다.

 한 마디로 과했다. 취미로 책을 읽는다는 것이 이제 취미가 생활을 지배하는 수준이다. 완전 주객전도. 주위에 이런 사람 흔하다. 통장 잔고 쌓이는 재미에 밤낮을 가리지않는 워크홀릭 증후군 환자들. 그리하여 수십억의 돈을 벌긴 했지만 결국 돈의 노예가 되고마는 인간. 책도 마찬가지? 줄창 책상에 앉아 책 읽느라 피둥피둥 살찌고, 동무들 만나는 것도 귀찮아하고, 사람과의 대화도 없어지고, 아무래도 모든 증상이 책의 노예가 되고 만 거 같아 고민이다. 좋게 생각하자면 늦게라도 깨달아 다행이긴 하다.

 술도 마찬가지. 어떻게 1년에 400 병 마시던 사람이 올핸 절반으로 줄여 딱 200 병만 마시겠느냐고. 석달은 잘 나갔는데 6월엔 30일 동안 32 병 마셔조졌다.


 9월 말까지 60 권의 책을 골랐다. 책값도 솔찮아 중고책 많이 샀다. 인터넷 동무님 몇 분께서 내신 책을 주시어 그것도 네 권 포함했다. 그분들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어느 책인지는 밝히지 않겠다. 60 권을 9월 말까지 읽으려고 한다. 그 가운데 세 권을 지난 6월에 읽었다. 읽는 속도를 매우 늦추려고 노력해보겠다. 쉬엄쉬엄. 취미에 목 매달면 그게 취미냐. 고생 바가지지. 가능하면 10월 중순까지 늦추고 싶다. 가능하면.


 사진 찍었다. 스마트폰으로 찍었는데 이딴 거 하나도 제대로 찍을 줄 모른다. 보시라. 렌즈가 흔들린 듯.


 이번 독서의 특징은 한국 소설을 많이 포함시켰다는 거. 모두 15 권이 우리 작가가 쓴 것이고 13 권이 소설, 두 권이 기행문이다. 독서가 내 생활을 지배하기 전까진 여행도 무지 다녔는데, 참 격세지감이. 원본 출판 연도 순서대로 읽되 중간중간에 우리 작가의 열 다섯 권을 배치했다. 윗줄 오른편에서 왼쪽으로 읽어나갈 거다. 역시 그림보다는 표로 보는 것이 편하다.


도서명출판사저 역 자간행
1원잡극선을유문화사곽한경 외 지음, 김우석 홍영림 옮김1241
2무한의 책현대문학김희선2017
3라 셀레스티나을유문화사페르난도 데 로하스 | 안영옥1470
4로빈슨 크루소펭귄클래식다니엘 디포 | 남명성1719
5크랜포드현대문화센터엘리자베스 클레그헌 개스켈 | 심은경 1853
6나의 아름다운 정원한겨레출판심윤경2002
7데이지 밀러펭귄클래식헨리 제임스 | 최인자1878
8워싱턴 스퀘어을유문화사헨리 제임스 | 유명숙 1881
9소설, 여행이 되다 작품이 내게 찾아올 때글누림이시묵 외 9인2017
10소설, 여행이 되다 작가가 내게 찾아올 때글누림이시묵 외 9인2017
11크로이체르 소나타 (반양장)펭귄클래식레프 톨스토이 | 이기주 1889
12켈트의 여명펭귄클래식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 서혜숙 1893
13그 여름날의 치자와 오디실천문학사김연2006
14모피를 입은 비너스펭귄클래식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 | 김재혁1901
15행인문학과지성사나쓰메 소세키 지음, 유숙자 옮김1907
16목요일이었던 남자펭귄클래식길버트 키스 체스터턴 | 김성중1908
17신들은 목마르다뿌리와이파리아나톨 프랑스 지음, 김지혜 옮김1912
18아가씨와 철학자펭귄클래식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 박찬원1920
19만두 빚는 여자자음과 모음은미희2006
207인의 미치광이펭귄클래식로베르토 아를트 | 엄지영1929
21독을 품은 뱀펭귄클래식프랑수아 모리아크 | 최율리1932
22슬픈 카페의 노래열림원카슨 매컬러스 지음, 장영희 옮김1951
23메피스토펭귄클래식클라우스 만 | 오용록1956
24엘리베이터 타는 여자실천문학사김우남2006
25나를 간텐바인이라고 하자 1책세상막스 프리쉬 지음, 이문기 옮김1964
26나를 간텐바인이라고 하자 2책세상막스 프리쉬 지음, 이문기 옮김1964
27제5도살장 (반양장)문학동네커트 보니것 지음, 정영목 옮김1966
28행복한 그림자의 춤뿔(웅진)앨리스 먼로 | 곽명단1968
29오늘의 거짓말문학과지성사정이현2007
30팔코너 (반양장)문학동네존 치버 지음, 박영원 옮김1977
31쇼샤다른우리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 정영문 1978
32십자가 위의 악마창비응구기 와 티옹오 지음, 정소영 옮김1980
33어머니의 정원을 찾아서이프앨리스 워커 | 구은숙1983
34나쁜 소년이 서 있다민음사허연2008
35퀴어펭귄클래식윌리엄 S. 버로스 | 조동섭1985
36검의 대가열린책들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 김수진1988
37검은 책 1민음사오르한 파묵 | 이난아 1990
38검은 책 2민음사오르한 파묵 | 이난아 1990
39가랑비 속의 외침푸른숲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1993
40투쟁 영역의 확장열린책들미셸 우엘벡 | 용경식1994
41명왕성이 자일리톨에게문학과지성사조영아2009
42곤두박질열린책들마이클 프레인 | 최용준 1999
43민음사뮈리엘 바르베리 | 홍서연 2000
44기적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면민음사존 맥그리거 | 이수영 2002
45랩소디 인 베를린뿔(웅진)구효서2010
46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 -상열린책들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2004
47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 -하열린책들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2004
48불을 가지고 노는 소녀 1뿔(웅진)스티그 라르손 | 임호경2006
49불을 가지고 노는 소녀 2뿔(웅진)스티그 라르손 | 임호경2006
50제리민음사김혜나2010
51벌집을 발로 찬 소녀 1뿔(웅진)스티그 라르손 | 임호경2007
52벌집을 발로 찬 소녀 2뿔(웅진)스티그 라르손 | 임호경2007
53아담과 에블린민음사잉고 슐체 지음, 노선정 옮김2008
54나의 아름다운 마라톤현대문학이채원2012
55헛된 기다림민음사나딤 아슬람 | 한정아2008
56인생은 짧고 욕망은 끝이 없다민음사파트리크 라페르 | 이현희2010
57낙타의 뿔은행나무윤순례2013
58구원민음사자크 스트라우스 지음, 서창렬 옮김2011
59계단 위의 여자시공사베른하르트 슐링크 | 배수아2014
60건너간다창비이인휘 지음2017



 이번이야말로 읽다가 읽기 싫으면 팍, 책 덮고 좀 쉴 예정. 죽기살기로 하는 취미는 더이상 취미가 아니니까. 난 즐기고 싶다! 솔직히 특히 올해 들어선 즐기지 못한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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