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랑비 속의 외침 - 2판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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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번째 읽은 위화.

 어째 그리 하나같이 궁상맞은지. 위화가 1960년생. 그의 기억 속에 있는 중국이 딱 그럴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의 중국하고 비교하면 뽕나무 밭이 넓은 바다로 서너번은 바뀌었지만. 격심한 현대사의 파도를 뚫고온 세대의 끝부분에 위화와 같은 1960년 생들이 있을 것이다. 이건 위화와 그의 동시대 사람들이 다음 세대와 비교해 놀라울 만큼 풍부한 추억자산을 소유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현대의 젊은 세대들도 위화의 작품들을 읽으며 자신들의 부모가 이런 시대를 살아내 지금에 이르렀을까, 조금쯤 의심을 하기도 하고 또 많이는 놀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대한민국도 그렇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10년 안쪽에 태어난 이들을 베이비 부머라고 일컫는데, 이들은 워낙 대가리 수가 많아 세상에 나오자마자 전쟁 후의 극심한 빈곤 속에서 또래끼리 끔찍한 수준의 경쟁을 겪으며 성장하면서, 궁상스런 극빈부터 천민자본주의와 재벌들에 의한 정경유착 같은, 유럽의 백인들은 한 세기 이상 걸려 경험할 것을 한방에 다 겪으며 살아온 것하고 비슷하다. (이야기가 또 경상남도 삼천포 시로 빠졌다.) 하여간 위화가 (내가 읽은 네 편의 장편소설로만 판단하면) 초지일관 굳은 마음가짐으로 자신의 소년시절에 겪은 듯한 중국의 일반 농민 계급, 그것도 아주 날것의 솔직하기 짝이 없는 하이퍼 레알리즘 식 묘사가 현대 중국인들에게 대단히 신선하지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을 것 같다.

 <가랑비 속의 외침>은 작가가 처음 발표한 작품이란다. 읽어보면 첫작품이란 수식이 어울리기도 하지만, 처음부터 유명작가의 운명을 띠고 등장했다, 라는 표현이 어울릴 수도 있다. 물론 최용만의 번역이 유독 위화와 궁합이 맞아 한글로 읽는 이이의 작품으로 그렇게 생각할 지 모르겠으나 (책의 마지막에 '역자 한 마디'에서 최용만은 위화와의 친밀한 관계를 은근히 과시하기도 한다), 아주 쉬운 문장과 '촌철살인'이란 낱말의 사전 그대로의 뜻을 분명하게 시연하는 난데 없는 대사의 상쾌함과, 도무지 예상하지 못할 등장인물들의 행동 또는 행위,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아주 평범한 일상에서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던 바늘 끝을 휙, 나꿔채 눈부신 문장으로 만들어내는데엔 이이와 어깨를 견줄 이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우석대학 문창과 교수이자 시인인 안도현이 위화의 소설을 (이 책의 뒤표지에 나와있다) 이렇게 묘사한다. "위화의 소설은 끈적끈적하고, 거무튀튀하고, 때로는 붉다." 소설을 어떻게 읽었는가에 관해서 시인의 의견은 그리 참고할 만하지 않다. 역시 제일 중요한 건 독자 개인의 느낌이니. 난 차라리 이이의 작품 <가랑비....>는 '반투명한 안개 속을 유영하는 맑은 눈eye'이라고 하고 싶으니, 안도현과 완전히 반대의 느낌이다.

 화자 쑨광린은 삼형제 가운데 둘째 아들. 책은 화자가 이야기하는 석공 출신 증조할아버지와 비참한 최후를 맞는 증조할머니, 할아버지 쑨유위안과 부잣집 출신의 전족을 한 할머니, 개잡종처럼 보이는 아버지 쑨광차이와 어머니, 그리고 삼형제 쑨광핑, 쑨광린, 쑨광밍의 삶 가운데 중요한 것들을 기억해낸다. 읽으면 독자가 혹시 이거 작가 자신의 이야기 아냐, 라고 오해하기 딱 맞을 정도의 능청은 (이 책이 데뷔작이란 걸 기억하시라!) 벌써부터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이야기는 아니고, 자기 기억 속의 1960년대, 그니까 한 1965년 전후의 중국 농촌에 한 가정을 상정하여 당시 중국의 가난하고 불행한 농촌의 삶을, 한 집안에 집중포화를 퍼부어 만들어낸 소설이다. 그리하여 처음부터 '나' 쑨광린은 시내에 돈 좀 있고 슬슬 바람도 피우는 건장한 체격의 남자의 손에 이끌려 양자로 팔려가고, 5년만에 말도 없이 파양당해 다시 고향, '남문'으로 돌아와 소년시절을 끝마치고 또다시 '남문'을 떠날 때까지,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세월이란 게 무서운 것이, 일을 당할 때는 참 무섭고, 아프고, 슬프고, 지랄맞고, 억울하고 그래도 나중에 그때를 돌아보면, 아 추억이란 이름의 진통제, 그냥 담담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모양이다.

 당연히 성장소설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이런 류의 소설은 우리나라에서도 얼마든지 읽을 수 있는데, 그러나 <가랑비....> 만큼의 질량으로 사람을 웃기게하고, 울게도 하고, 간질이기도 하는, 간단하게 말해 딱 집어서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같은 문화권의 작품이라서 그럴까? 책의 스토리는 굳이 소개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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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의 대가 열린책들 세계문학 78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지음, 김수진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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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년 전 작가 아르투로 페레스 로베르테의 스릴러 소설 <플랑드르 거장의 그림>을 참 재미없게 읽었는 바, 장안의 숱한 독서가들의 평가와 내 생각이 많이 달라 언젠가 이이의 책을 딱 한 권만 더 읽고 다신 읽지 않던지 좀 더 읽던지 결정을 하겠다고, 즉 보류 작가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가 이번에 독파했다.

 글쎄, 이 정도면 로베르테를 스릴러 소설가라고, 장르문학의 범주에 가두어 두어도 괜찮을 거 같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주장하는데, 순문학하고 장르문학하고 굳이 분류하는 건 절대로 순문학이 우월해서가 아니라 특정 장르를 좋아하지 않는 독자들이 책을 선택할 때 미리 알아두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순문학이 우월해? 개똥 밟아 미끄러져 뇌진탕 걸릴 얘기.

 이 책, 재밌다. 비록 내가 스릴러 소설을 그리 즐기지 않지만 하여간 재미나게 읽었다. 19세기 중후반, 나를 포함한 거의 모든 세계인이 스페인 역사에 관심이 없던 시대. 뭔 말씀이냐 하면, 인류 역사상 드라마틱하게 사회, 군사, 사상, 문학 등이 변혁하고 있는 무대에 전시대적인 절대왕조가 아직도 숨통을 이어가 그 결과로 당대 유럽의 모든 방면에 너댓 발자국 뒤쳐졌던 시기. 당시 스페인은 무엇보다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기였던 모양이다. 이게 다 스페인의 부르봉 왕가가 가문의 번영에만 관심이 있고 세계의 흐름을 나 몰라라 하는 바람에 이미 전 유럽에선 지독하게 겪어서 이젠 슬슬 이력이 쌓이고 있는 중인 산업혁명의 부작용을 제대로 겪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으로 새롭게 대두된 건 부르주아 계급만이 아니라서 비록 스페인 부르봉 왕가를 21세기인 지금까지 무너뜨리진 못했지만 왕가와 귀족, 부르주아들에게 위협적으로 성장해버린 도시빈민 등의 프롤레타리아 계급. 그러나 다수가 항상 승리하는 건 아니다. 이들을 등에 업고 적어도 공화정이나 그것도 아니면 정권을 스스로 탈취할 수 있다고 믿는 장군들이 등장했으며, 왕가와 반역의 세력 사이에서 언제라도 승자의 편에 가담할 준비를 완전히 마친 그룹들은 왕가에도, 반역자에게도 금품을 비롯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물론 다 보험이지, 보험. 세상 다 그런 거다. 새삼스럽지도 않고 스페인스럽지도 않은 현상. 시저와 브루투스 사이에도 이런 작자들 없었을 거 같아? 장도영과 박정희 사이에, 장태완과 전두환 사이에서 간보기에 바빴던 장군들은 없었을 거 같아? 다 그런 거다.

 얘네들의 공통점은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는 거. 기꺼이 양편에서 얻은 정보를 또다른 편에게 전해주기도 하며 누가 더 센지 가늠하기에 눈알이 사팔뜨기가 될지언정 왕가와 반군의 공통적 지지자, 증거없는 지지자로 존재하기 바라지만, 간혹가다가 자신들의 이중첩자짓이 들통이 나거나, 누군가에게 발각됐지만 누군가가 입을 다물고 있거나, 입을 다무는 조건으로 상당한 보상을 요구할 수도 있겠다. 1860년대의 스페인. 아직도 가톨릭의 성전에서 자신의 죄의 보속과 영생과 천국의 유혹에 국민 절대다수가 함몰되어 있던 시기, 이사벨 여왕이던가, 하여간 철딱서니 없는 여왕 치세 때 공화정의 기치를 내건 장군이 등장해 결과적으론 여왕을 왕좌에서 내리는 데는 성공하지만 왕정을 종식시키진 못한다. 바로 이 앞 시기. 반역이 도처에서 왕권과의 전투에 승리하기 시작할 때가 책의 시대적 배경이다.

 여기에 멋있게 등장하는 검술의 대가 돈 하이메. 일찌기 프랑스 검술협회 정회원이자, 프랑스 내 가장 위대한 검사劍士를 사사한 검의 대가. 그러나 세월은 흘러흘러, 이젠 검술로 다져진 육체이지만 시간을 이기지 못해 은발을 휘날리는 신사. 낡은 프록코트와 넥타이를 깔끔하게 차려입은, 신사의 면모를 결코 잃지 않는 노 검객. 한때는 무수한 신공을 자랑했던 숱한 검사를 전부 무릎꿇렸든지 세상을 뜨게하고 중원을 평정했으나 이젠 생활의 방편으로 귀족이나 부르주아 자제들에게 검술을 가르치며 호구지책을 삼고 있다. 여기에 새로이 두 명의 젊은 제자를 받으면서 얽히고 설킨 스릴러 드라마는 시작한다. 무지막지한 재산을 물려받아 도박과 여자로 날새는지 모르지만 당대 그룹 가운데 최고의 검술을 자랑하는 백작 돈 루이스. 경천의 미모를 자랑하는데다가 입술 옆에 난 흉터가 마치 한때 열풍을 일으켰던 미인점처럼 결정적으로 미모의 액센트를 주는 돈나 아델라. 돈나 아델라 역시 기본이 아주 탄탄한 검술의 보유자이며 늙은 검사 돈 하이메로부터 필사의, 무적의 검법 하나를 배우기 위해 접근하는데, 이 문학작품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소설. 돈 하이메는 근 30년 이상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필연적으로 돈나 아델라를 사랑하게 되지만 세상에 그리 쉽게 사랑이 맺어지는 소설이란 없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돈나 아델라는 부자 백작 젊은이 돈 루이스와 진한 사랑을 나누는 사이로 발전해버리고 만다. 원래 그런 거다. 늙은이의 사랑은 슬픈 법.

 자, 여기까지.

 스릴러 소설의 줄거리를 몽땅 알려주는 건 무참하다. 시중에 이 재미난 소설의 결말까지 몽땅 다 소개한 글들이 있기 때문에 만일 이 책을 읽고자 마음 먹으신 분이 계시는데 지금 이 독후감을 먼저 읽었다면 내게 고마워하셔도 된다. 독자가 책을 읽어가면서 나름대로 추리해가며 그게 맞는지 아닌지를 따지는 재미, 그게 스릴러 소설을 읽는 진짜 재미니까.

 다시 한 번 강조. 이 책을 진짜 읽어보실 요량이라면 다른 독후감이나 서평같은 거 읽지 않으시기 바람. (잘난 척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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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펭귄클래식 59
윌리엄 S. 버로스 지음, 조동섭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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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버로스는 미국에서 케루악과 더불어 비트 세대의 대표선수로 인식되고 있는 작가라고 한다. 하는데, 하지만, 난 <길 위에서>는 정말 가슴에 팍 와 닿게 읽은 반면 버로스의 <정키>하고 <퀴어>엔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다. 지금 생각나서 <길 위에서>를 검색해보니까 종전 후에 잭 케루악이 앨런 긴즈버그, 윌리엄 버로스, 닐 케시디와 함께 미대륙을 횡단하고도 모자라 멕시코시티까지 휘저으며 온갖 골통짓을 한 걸 토대로 쓴 작품이라고 한다. 그 작품에선 젊은이들이 한바탕 난장판을 벌이는 것이 전후 세대의 절망과 무대책과 더 이상의 도덕률을 폐기해버리고자 하는 몸부림인 것처럼 받아들였는데 윌리엄 버로스는 그가 구사하는 언어와 주제가 케루악과 비교해 훨씬 과격해서 그런가 작품에 공감하기는커녕 좀 거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케루악은 알콜의존증과 무책임에 매우 근접한 프리섹스, 버로스는 마약과 동성애의 범벅. 둘 다 대책없는 청춘들이긴 하지만 버로스는 케루악보다 약간 더 나이든 미국인이 (버로스 스스로가 저지른 범죄, 실수로 권총을 발사해 아내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으로 여길 수 있는) 모종의 사건과 관계하여 귀국할 수 없는 처지에서, 어디에서 돈이 꾸준하게 생기는지는 몰라도 멕시코시티 내에서 특별한 돈벌이에 관한 언급 없이 끊임없이 마약성 약물과 동성애를 갈망한다. 분명 남의 이야기인데 왜 내가 불편할까?  더러운 마약을 이야기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남자가 남자에게 사랑이 아닌 욕정을 느껴 끊임없이 쫓아다니기 때문일까. 남자가 여자에게 욕정을 느껴 끊임없이 쫓아다니는 걸 읽으면서 난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가? 아니다 그것도 불편하다. 두 경우 다 매우 불편하다. 그럼 내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불편하다고 얘기하는 것에 관해 이의 없으리라. 글로 쓴 건 지워지지 않는다. 이 책을 읽는 일은 매우 불편했다. 당신이 이 책을 어떻게 평하는지에 관계없이 이 책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버로스를 읽지 않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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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8-22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마지막으로 버로스를 읽지 않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잭 캐루악이 버로스보다는 왜 좀더 비트제너레이션의 대표처럼 여겨지는 까닭도 알겠더군요;; ㅋㅋㅋㅋ

Falstaff 2017-08-22 10:29   좋아요 0 | URL
케루악도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
하여간 버로우스, 정말 맘에 들지 않아요. 책 서문에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면 멕시코시티에서 약과 남자들한테 빠져 있을 동안 돈은 미국에서 늙은 아버지가 정기적으로 부쳐주었다는군요. 에휴, 난 그런 아빠도 읎고 참 거시기.... ㅎㅎ

잠자냥 2017-08-22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는 케루악도 그닥; ㅋㅋ 근데 그래도 버로스 보다는 나은 듯;; ㅋㅋ 이 비트제너레이션을 다룬 영화 중에 <킬 유어 달링>이란 작품이 있는데요, 거기 보면 정말 버로스 뺀질이 부잣집 도련님... 으윽. 인간적으로도 아무런 정이 안가는 캐릭터입니다.

Falstaff 2017-08-22 11:11   좋아요 0 | URL
ㅎㅎㅎ 바로 오늘 아침에 어느분이 그 영화 소개해줬어요.
그거 보면 해리 포터로 유명한 다니엘 레드클리프한테 완전히 정 떨어질 수 있다고 하시던걸요. ㅋㅋㅋ 그래서 모르면 걍 지나겠지만 알게된 김에 한 번 볼까 궁리중입니다. ㅋㅋㅋㅋ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민음의 시 149
허연 지음 / 민음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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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표제는 나쁜 소년이 서 있다라고 표기하고, 각 시의 제목은 <간밤에 추하다는 말을 들었다> 이런 식으로 써야 마땅하나 그딴 거 구분하지 않고 다 <우짜구저짜구> 이렇게 쓰겠다. 특수문자 골라오기 귀찮아서.

 

  처음 들어보는 시인. 근데 많고 많은 이름 가운데 허연이 뭐야, 허연이. 그럼 미세스 허연의 이름은 하얀이야? 이건 뭐 그냥 지나가는 말. 하여간 책 뒤에 나오는 허연의 약력을 보니 1966년에 태어나서 1991년에 현대시세계신인상으로 등단했으며 이 시집은 2008년에 세상 밖으로 밀어냈다. 42세 때. 민음사 시집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 목차 바로 앞 페이지에 자서自序라고 스스로 시집을 시작하는 말씀이 적혀 있는 거. 허연은 자서를 어떻게 써놓았는가 하면,

 

 

 自序

 

 결국,

 범인(凡人)으로 늙어 간다.

 다행이다.

 

 200810

 허연

 

 

  기껏 마흔 두 해를 살아보니 젊어서 시인이라고 해봤자, 허연의 말대로 마흔 넘으니 결국 범인, 평범한 사람으로 나이 먹어간다는 고백. 근데 그게 다행이라는 천만다행의 자각. 주변에 시인으로 등단한 사람 몇 명 있다. 이들의 공통점? 가관. 시인이 가관이란 뜻이 아니라 시인의 주변에 있으면서 시인이 되고 싶어 하는 지망생들, 시인에 대한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환상을 갖고 시인을 바라보는 보통 인간들의 몰지각한 우상숭배가 꼴불견이란 말이다. 등단이란 것이 그렇게 무서운 법이다. 한 번은 내가 등단 시인을 우상숭배하는 시인 지망생에게, 너도 시인이다. 시를 쓰고 읽고 진짜로 좋아 몇 수를 외고 있으면 그이가 시인이지 꼭 등단을 해야 시인이냐, 했다가 만장하신 신사숙녀 앞에서 개망신 당한 적도 있다. 물론 그런 경험이 있었다고 뜻을 굽힐 내가 아니라서 아직도 난 그렇게 생각한다. 다만 등단하지 않아서(이것도 못해서가 아니다) 공인받지 못한 것일 뿐이라고. 근데 내가 개망신 당할 때, 문제의 그 시인새끼는, 숱한 인간들이 자신을 숭배하는데 그게 기분나쁠 이유가 없으니 그저 싱긋, 웃음 짓고만 있었다. 분명히 그랬다. ? 자신 스스로 조금은, 어느 정도는 그냥 보통 인간과 애초부터 다른 종자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리하여 젊은 시절을 보통 인간과 애초부터 다른 종자로 살기 위해 시를 쓰고 월月도 아니고 연年 5백만 원 안팎의 수입으로 늙으신 부모 등골을 휘게 하며 살다가 이제 나이 먹으면 대개 젊어서 숭배받으며 몸에 익었던 다른 종자 의식이 점점 희미해지다가 급기야 나도 그냥 보통인간임을 자각하는데, 그걸 다행으로 생각한다니 참으로 다행이다.

   허연의 두 번째 시집이라고 하는 이 책 <나쁜 소년이 서 있다>를 눈알이 뚫어지게 읽어보면 크게, 그동안 시인의 건강에 문제가 있었는데 혹시 귀를 비롯한 이비인후과 질환이 아니었는가 싶고, 분명 피라미드를 포함한 북아프리카 사막지대를 여행했으며, 그간 스스로의 상태를 빙하기로 표현하는 일종의 혹한기를 보냈다고 여기며, 시를 쓰는 것도 일종의 자연상태, 즉 생태의 시각으로 보기 시작한 거처럼, 네 가지 부류boundary로 나눌 수 있을 거 같은데 당연히 예외는 있는 법이라서 여기에 포함시키기 애매한 시도 물론 있다.

  ①는 전적으로 개인적인 일상이라 그걸 시로 써놓았을 경우에 독자가 시인과 더불어 같이 백년 된 병원에서 귀여운 환자가 되어 베토벤도 있는데 이 정도야, 할 수도 없고(<박수소리> 40), 같은 모래 언덕에 서서 저 멀리 지평선에서 푸른 하늘이 1차 하늘, 2차 하늘, 3차 하늘, n차 하늘이 다 모여 마치 바다 같아서 그 위를 지나는 위그르 족(위그르 족이라면 이거 고비사막일 텐데 끙) 처녀는 틀림없이 바다 위, 물 위를 걷는 것(<바다 위를 걷는 것들> 34)처럼 보이길 바라지는 않는다.

  내가 주목한 것은 슬픈 빙하기 시리즈다. 이제 시인이 자서에서 밝힌 것처럼 어느덧 범인, 평범한 보통사람이 됐다. 평범한 보통사람? 시인이 보는 보통의 인간은 이런 종류다.

 

 

 

  슬픈 빙하시대 2

 

 

  자리를 털고 일어나던 날 그 병과 헤어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한번 앓았던 병은 집요한 이념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병의 한가운데 있을 때 차라리 행복했다. 말 한마디가 힘겹고, 돌아놉는 것이 힘겨울 때 그때 난 파란색이었다.

 

  혼자 술을 먹는 사람들을 이해할 나이가 됐다. 그들의 식도를 타고 내려갈 비굴함과 설움이, 유행가 한 자락이 우주에서도 다 통할 것같이 보인다. 만인의 평등과 만인의 행복이 베란다 홈통에서 쏟아지는 물소리만큼이나 출처불명이라는 것까지 안다.

 

  내 나이에 이젠 모든 죄가 다 어울린다는 것도 안다. 업무상 배임, 공금횡령, 변호사법 위반. 뭘 갖다 붙여도 다 어울린다. 때 묻은 나이다. 죄와 어울리는 나이. 나와 내 친구들은 이제 죄와 잘 어울린다.

 

  안된 일이지만 청춘은 갔다.

 

 

  시는 읽는 사람 마음대로 해석할 수 있으며 그런 자의적 해석은 언제나 정당하다는 인식 아래서 이 시에 관해 말하면, 이 시야말로 지랄 염병을 하는 시다. ‘한 번 앓았던 병은 집요한 이념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병의 한가운데 있을 때 차라리 행복했다는 진짜 시인이 병을 앓았던 시기와 경험을 뜻할 수도 있고 본격적으로 시를 썼던 한 시절을 은유할 수도 있으며, 이 두 경우를 적절하게 합해서 하나로 은유하고 있는 줄도 모른다. 나는 세 번째, 진짜 병을 은유하여 한 때 목숨걸고 시를 썼던 시절을 얘기하는 걸로 이해하겠다. 그러니 그때가 행복했겠지. 한데 그 시절이 정말 행복했었던 것도 세월이 지나 당시를 뒤돌아보니 그렇다는 말씀이다. 이제 시인은 혼자 술을 마시는 것을 자유스러움과 편함이 아니라 비굴과 설움으로 느끼며, ‘만인의 평등과 만인의 행복즉 술 마시는 일이, 홈통에서 쏟아지는 물소리, 즉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술 한 잔의 짜릿함 대신 출처불명의 난데없는 일이 돼버리고 만다. 여기까진 넓은 아량으로 봐줄 수 있는데(시인이 암만해도 열등감에 절어 있는 모양이다. 혼술의 아름다움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지경이니), 문제는 다음 연이다. 이제 40대가 되어 모든 죄가 다 어울리는 나이로 접어들었다고 선언하는 건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업무상 배임, 공금횡령, 변호사법 위반이 어울리는 나이란 세상에, 없다. 그럼 20대는 폭력과 살인, 강간이 어울리는 나이? 물론 시인은 나와 내 친구가 이런 모든 죄와 어울리는 나이라고 했으니, 시를 쓰지 않으면, 이라는 가정을 달아 그런 범죄가 어울린다고 어리광을 부리고 있는 줄도 모르겠으나(암만해도 어리광이 맞는 거 같음. 이런 오만이 어딨어!) 몇 번을 읽어보고 또 읽어봐도 기분 나쁘기 짝이 없다. 더구나 짧은 마지막 연, 청춘이 갔기 때문에 죄가 어울린다니. 이런 시를 읽으면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건, 창백한 시인의 허약한 고백. 청춘이 백번을 떠나가도 모든 죄가 어울리는 나이란 세상에 없다. 사랑하지 않는 죄 말고는. 시인들이 흔히 범하는 죄. 그냥 읽으면서는 참 맛있는 문장들을 나열하면서 속으론 나약하고 썩는 냄새가 나는 말을 교묘하게 숨기는 일. 그게 시적 범죄다.

  다른 시 하나 더 읽어볼까?

 

 

  살은 굳었고 나는 상스럽다

 

 

  굳은 채 남겨진 살이 있다. 상스러웠다는 흔적. 살기 위해 모양을 포기한 곳. 유독 몸의 몇 군데 지나치게 상스러운 부분이 있다. 먹고살려고 상스러워졌던 곳. 포기도 못했고 가꾸지도 못한 곳이 있다. 몸의 몇 군데

 

  흉터라면 차라리 지나간 일이지만. 끝나지도 않은 진행형의 상스러움이 있다. 치열했으나 보여 주기 싫은 곳. 밥벌이와 동선이 그대로 남은 곳. 절색의 여인도 상스러움 앞에선 운다. 사투리로 운다. 살은 굳었고 나는 상스럽다.

 

  사랑했었다. 상스럽게.

 

 

  살은 굳었다는 표현은 물론 굳은살을 의미하겠다. 발뒤꿈치! 또 직업에 따라 몇 군데가 있겠지. 주로 손바닥이거나 손가락 부분에 많이 있는 듯. 그건 좋은데, ‘상스럽다는 건 뭘 의미할까? ‘상스럽다의 사전적 뜻은, ‘말이나 행동이 보기에 천하고 교양이 없다. 먹고 살기 위해서 말이나 행동이 보기에 천하고 교양이 없었을까? 차라리 상처라면 지나간 일인데 굳은살은 아직도 진행중이니까 그야말로 상스럽지 않을 방법이 없게 상스러운가? 시인이 쓰는 말을 사전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나도 그건 안다. 시인에게 상스러운 일은? 시를 쓰는 일 자체. 혹은 시 작업의 결과물로서의 시. 그게 상스러웠을까? 물론 반어 혹은 은유로 상스럽다는 거겠지만. 시 작업을 염두에 두고 굳은살, 즉 시를 쓰기 위한 고뇌와 안간힘을 상스럽다고 했을 거라고 믿겠다. 절색의 여인마저 시인의 굳은살을 보고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을 테니.

  이 시와 앞의 <슬픈 빙하시대2>를 함께 보면, 시를 쓰느라 시인의 뇌 곳곳에 굳은살이 박일 고통의 시기가 그래도 행복했던 것이고, 시를 쓰지 못하는 단계, 그리하여 시인의 자서처럼 범인凡人으로만 늙어가 드디어 모든 죄가 어울리게 됐을 때 시를 썼던 청춘이 간 것이 불행했을 것이다. 다만 시를 쓰는 너만 독야청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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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위의 악마 창비세계문학 51
응구기 와 시옹오 지음, 정소영 옮김 / 창비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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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음사에서 발간한 <피의 꽃잎들>을 읽고 응구기 와 티옹오(민음사에선 '응구기 와 시옹오'라고 표기)의 다른 작품을 주저없이 골라 읽었다. 먼저 개인의 호오에 관해 언급하자면 <피의...>가 이 작품보다 더 좋았다는 걸 밝히는데, 그렇다고 이 책이 그냥 그런 범작이란 얘긴 결코 아니다.

 창비의 책소개를 보면 "아프리카 현대 문학의 거장이자, 치누아 아체베 등과 함께 탈식민주의 문학을 이끌어온...."이라고 해놓았다. 탈식민이란 의미에선 뭐 아체베와 동류로 묶는 건 동의하지만 두 거장의 문법은 확실하게 다르다는 말을 전에 <피의...> 독후감에 써놓은 거 같은데 한 번 더 말씀드리자면, 아체베와 페르디낭 오요노로 대표하는 이들의 탈식민문학은 식민주의 하에 피식민민중들이 경제적, 심리적, 문화적으로 수탈을 당하는 모습을 그린 반면, 응구기 와 티옹오나 에스키아 음파렐레 같은 이들은 일단 정치적으로는 식민주의가 종식되어 독립된 아프리카 국가들이 경제, 문화적으론 여전히 아메리카, 유럽, 일본에 의한 식민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끊임없이 수탈당하고 있다는 걸 주장하면서, 대한민국의 1970년대와 80년대에 숱하게 논의되었던 신식민주의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일종의 문학운동을 펼치고 있다고 보시면 되리라. 처음에 내가 <피의 꽃잎들>이 더 좋다고 했던 것은 '소설'이란 장르로 국한하여 평가한 결과다. <피의...>와 비교하면 <십자가 위의 악마>는 작가가 1977년 교도소 수감 중에 화장지에 몰래 쓰기 시작해서 그랬는지 (내가 생각하는)소설 장르로서는 과하게 웅변적이다.

 몇가지 담론이 나오는데, (정확한 인용은 아니다) 세명의 노예에게 각각 5달란트, 3달란트, 1달란트를 남기고 주인이 먼 길을 떠나 오랜시간이 흐른 후 돌아오니 그동안 5달란트는 10달란트로, 3달란트는 6달란트로 불렸는데 반하여 1달란트를 받은 노예는 돈을 땅에 묻고 주인이 돌아온 후에 파보니 그냥 1달란트더란 얘기. 다른 동포나 찢어지게 가난한 백성을 착취하지 않고는 돈을 불릴 수 없더란 건데, 주인은 어쨌거나 그간 돈을 불린 두 노예에게 상을 내리더란 거. 여기서 주인은 식민상태를 종식하고 자국으로 돌아간 식민모국과 서구 선진국의 종합상사, 은행, 거대기업 등을 일컫고, 돈을 불린 노예들은 독립한 신생국의 힘있는 도둑과 강도들, 즉 매판자본가들을 비유한다.

 다른 하나의 담론은 표제와 같은 십자가 위의 악마. 난 성경을 읽어보지 못한 무식꾼이라 모르지만, 가난한 백성들이 악마를 십자가 위에 못박아 죽였다고 생각했으나 악마가 그리 쉽게 죽으면 그게 악마야?,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지 사흘만에 양복입은 신사들이 우르르 몰려가서 악마를 십자가 위에서 끌어내렸더니 악마는 다시 찬연하게 빛을 발하며 세상의 창공을 날아다니면서 지악스런 마귀짓을 하더란 얘기. 그땐 양복장이 신사들이 사흘이 지난 다음에 몰래 악마를 십자가에서 끌어내렸으나 요샌 억눌린 백성들이 힘들게 힘들게 악마를 잡아 십자가에 매달면 양복장이들이 조금도 기다리지 않고, 조금도 눈치보지도 않고 그냥 십자가로 달려가 악마를 풀어준다나. 당연히 악마는 서구 자본주의의 대표선수들이고 양복장이들은 제삼세계의 매판자본가들.

 여기에 한술 더 떠 신생 독립국인 아프리카의 모처에선 도둑과 강도들의 대표선수 선발대회가 열리고 대회에 잠입한 노동자, 학생 등의 양심세력은 매판자본가들과 결탁한 경찰, 군인, 사법세력에 의해 거덜이 나는 광경이 장황하게 설파하여, 나로 하여금 이 소설을 '과하게 웅변적'이라고 평가하게 만들었다. 응구기가 김지하의 <오적>을 읽고 조금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게 바로 이 씬을 두고 하는 말이지 싶다.

 케냐에 자신타 와링가, 라고 하는 여여쁘고 (당연히) 새까만 아가씨, 아니, 미혼모가 있는데, 어렵게 취직한 무지하게 큰 건설회사에서 속기사 겸 타이피스트로 겨우 며칠을 근무하다가, 사주 영감이 입사 당일부터 은근히 추파를 던지더니 급기야 하루는 겁도없이 덥치고 말았지만, 건강한 아가씨가 늙은 영감 하나를 당해내지 못할손가, 딱부러지게 거절했더니 다음날 해고 당했다. 해고 당한 바로 그날, 그동안 죽네사네 사랑해 마지않던 남자친구 새끼한테 얘길 했더니, 넌 원래가 헤픈 년이구나, 곧바로 이별 통보를 받았고, 다 쓰러져가는 빈민촌의 집구석에 힘없이 도착, 이번엔 임대료 인상에 동의하지 않아서 졸지에 거리로 내쫓기고 만다. 와링가 아가씨가 고등학교 다닐 때, 이모부의 주선으로 돈 많은 늙은이 하나를 만나서 우여곡절 끝에 정부가 됐다가 덜컥 임신을 해버렸더니 이 늙은이가 하시는 말씀이, 열 일곱살 먹은 청소년에게 하시는 말씀이, 넌 약도 안 먹고, 루프도 안 하고 도대체 뭘 한 거야?  그 애가 내 아이인줄 어떻게 알아? 해서, 딸을 하나 둔 애엄마. 딸은 지금 외할머니 손에서 잘 자라고 있다.

 또 한 명의 주인공, 당연히 여주인공이자 진짜 주인공인 와링가 아가씨하고 사랑에 빠지게 되는 청년이 등장한다. 거부, 큰 부자의 외아들로 태어났지만 자신의 사업체를 물려받아 경영하기 바라는 아버지의 뜻과는 완전히 반대로 미국에 건너가 음악, 특히 작곡을 전공하고 돌아온 청년이다. 청년은 오선에 표시할 수도 없는 특유의 아프리카 악기와 아프리카 성악을 자신이 공부한 클래식과 융화시켜 거대한 오라토리오를 작곡하기 위해 끊임없이 궁리하고 노력하는 순진, 열혈파. 난 이 청년의 행적을 따라가면서 자연스럽게 클래식과 아프리카 음악을 훌륭하게 섞어 진짜로 오라토리오를 작곡한 한니발이란 아프리카 사람을 떠올렸다. 바렌보임이 시카고 교향악단을 지휘한 <아프리카의 초상: African Portrait>.

 

지금은 표지 바꾸고 다른 곡 삽입해서 발매하지만, 국내 시장에서 품절이다.

 

 이 음반은 백인들이 아프리카에 도착해서 원주민들을 무지막지하게 학살하고, 자원을 약탈해가고, 사람을 산 채로 잡아 유럽과 아메리카에 노예로 파는 세월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화해를 시도하는 거대한 오라토리오로, 재즈와 아프리카 토속음악이 클래식 오케스트라와 근사한 화음을 만들어내고 있다.

 근데, 아프리카, 그중에서도 응구기의 조국 케냐에선 매판자본을 백성들이 효과적으로 몰아내고, 우리의 용감하고 건강한 와링가 아가씨는 죽고 못사는 애인 청년과 근사한 연애의 결실을 맺을 수 있을까?

 딱 하나의 힌트를 드린다.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난 주먹을 쥐고 두번째 손가락과 세번째 손가락의 마디로 내 머리통을 한대 쥐어박았다. 아이고 짱구야, 아까 그거 복선이었어, 복선. 그것도 눈치 못챘냐! 하면서. 책을 다 읽고나서야 아까 그게 복선이었다는 걸 알아채게 만드는 소설은, 단언컨데, 잘 쓴 소설이다. 그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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