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짧고 욕망은 끝이 없다 민음사 모던 클래식 55
파트리크 라페르 지음, 이현희 옮김 / 민음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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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형적인 프랑스 소설. 무슨 뜻인지는 직접 읽어보시고 알아채시라.
 루이 블레리오. 이 자가 최초로 영불해협을 비행해 건넌 사람이라고 한다. 프랑스에 블레리오랭게라는 집안이 있었는데 집안을 이끄는 블레리오랭게 선생으로 말할 것 같으면, 엔지니어로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 등등을 누비며 선진 프랑스의 공학을 널리 전파한 인물로 일찍이 교사 출신 아내를 얻어 외아들 하나를 낳고 이름을 뭐로 할까 고민하다가 프랑스에선 전설적인 비행사, 루이 블레리오라고 널리 불리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이름을 루이라고 지었단다. 그래서 이 양반 뜻대로 이후엔 세상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루이 블레리오, 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까진 좋았지만, 교사출신 아내가 유전적 요인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신경질환, 지독한 우울증 증세를 가지고 있어 평생을 아내의 기분에 맞춰 사느라 자기 자신을 잊은 수준까지 이르렀던 거다. 이제 나이 일흔이 넘으니 그동안 뭐 하러 자신의 인생을 한 여자의 비위를 맞추는데 다 낭비를 했는지 스스로의 영혼이 고갈되는 느낌이 자꾸 드는 모양으로, 급기야 블레리오랭게 씨가 중증 우울증에 입문해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전형적인 이십세기 초반 태생의 부부. 이런 집안에서 낳고 자란 루이 블레리오. 성격상 조금의 문제가 있는지, 아니면 자연선택에 의하여 그렇게 됐는지, 이혼 경력이 있는 연상의 여자를 골라 혼인하고,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남자 애인, 여자 애인을 둔다. 여기서 잠깐. 루이가 양성애라서 자연선택이니 성격상 문제니 하는 거 아니라는 걸 밝혀두자. 온 라인에서 이런 거 미리 안 밝히고 그냥 넘어가면 나중에 뭔 소리를 들을 줄 모른다. 양성애라서가 아니라, 혼인 상태에서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관계를 두고 하는 말이다. 에이, 굳이 이렇게 설명을 해야 하니 자판 두드리는 맥이 딱 끊겨버리잖아. 이깟 독후감 하나 쓰기도 드럽게 어려운 드러운 세상.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모르겠다 걍 패스.
 루이의 남자애인은 간단하게 관계가 끊어지는데 ‘노라’라고 하는 영국 아가씨는 하이고, 정말로 사랑을 해버리는 단계까지 치솟는다. 노라. 노라? <인형의 집> 생각나시지? 노라한텐 또 애인이 한 명 더 있다. 잘 양육되고 잘 배운 미국인으로 영국에 와서 금융인으로 활약하고 있는 엘리트. 거구에 얼굴엔 천연두의 흔적이 약간 패 있는 건장한 남자. 그러니까 노라는 영국에 있을 땐 미국인 ‘머피’하고 사랑을 다져나가고 때에 따라 그에게 2~3천 달러 정도를 얻어 쓰며, 연극을 더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에 오면 유부남인줄 번히 알면서 루이와 진한 사랑을 만들어가며 역시 5천 달러 정도는 그냥 말없이 집어가기도 한다.
 자, 얘기를 루이에게 집중하자면, 루이는 돈 잘 벌어 자신을 사실상 사육하는 아내도 죽자고 사랑하고, 노라 역시 없으면 죽을 거 같이, 세상 살면서 자신보다 남을 더 사랑할 수 있다는 걸 알게 해줄 정도로 몸 바쳐 사랑하는데, 둘 가운데 한 명과의 사랑이 깨지면 다른 하나와도 관계가 망가질 거 같은 암시를 자꾸 받는다. 근데, 루이의 아내 입장에선? 이런 거 다 개소리, 멍멍. 그렇지? 그렇다.
 인생은 짧다. 평생 아내의 중증 우울증을 옆에서 보며 간혹 와장창 터지는 폭발을 완전히 감수하며 살아온 늙은 남편은 어느 날 인생이 너무 짧은데 이젠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는 걸 자각하지만, 어느새 남은 힘이 없다. 이루지 못하는 욕망을 좇다가 사랑은 내 인생과 그녀의 인생, 둘 다 사랑과 함께 사라지고, 아 도무지 더 이상 쓰면 분명 스포일러인 것을 알면서 계속 얘기할 수는 없고.
 대강 무슨 이야기인줄 아시겠지? 예, 맞았습니다. 당신 생각이 옳습니다. 근데 문장과 문체가 어디서 많이 본 듯. 어디긴 어디야, 20세기 프랑스 소설에서 좀 색다른 문장 나오면, 아는 척 하는 법, 지금 가르쳐드린다. 무조건,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게 틀림없다, 라고 얘기하시면 거의 맞으며, 폼 또한 무척 난다. 이딴 거, 내 독후감에서만 배울 수 있다. 진짜다. 흐흐흐. 잘난 척은 언제나 즐거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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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된 기다림 민음사 모던 클래식 63
나딤 아슬람 지음, 한정아 옮김 / 민음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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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어제 미친 짓 제대로 했다. 소주 각 3병 마시고 술김에, 이거 참 좋으니 한 번 읽어보라고 책을 동무에게 줘버렸다. 술 깨니깐 그게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다. 명절 전에 미리 부모님, 평안히 쉬시기를, 한테 다녀와도 아까운 건 마찬가지다. 왜 그리 미친 짓을 했을까. 안 하던 짓 하면 죽는다는데 혹시 잘 하면 이번에 지겨운 이승 떠날 수 있을까. 난 물고기자리라서 더 이상 윤회를 하지 않는다고 하니 이젠 드디어 이 지겨운 생로병사를 끝낼 수 있을 텐데.
 내 아무리 지겹고 고단한 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해도 어찌 20세기 후반부터 지금까지 모진 삶을 꾸리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사람들과 비교를 할 수 있나. 민족주의, 이거 무지하게 나쁜 건데 딱 하나의 경우에만 좋은 의미로도 쓰인다. 피식민지 등 수탈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민족들. 즉 힘없는 나라 혹은 민족의 경우에만 긍정적인 의미가 될 수 있고 이를 제외한 다른 거의 모든 경우엔 차별을 정당화시켜주는 방편으로 기능할 뿐이다. 대한민국의 경우 20세기 중후반 까지, 반半 식민적 예속 상태로부터의 탈출을 모색하기 위한 방편으로 민족주의를 사용할 수 있었으나, 지금 시점에서 대한민국의 민족주의는 소위 ‘다문화’에 대한 차별의 수단으로 기능하는 정도다. 따라서 아프가니스탄의 경우 소비에트 연방에 의한 침략 시점부터 무차별 테러가 빈발하는 요즘까지도 민족주의라는 단어가 여전히 순기능으로 작용할 수 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어떤 아프가니스탄 사람도 소비에트나 아메리카에게, 우리 땅에 와서 참견 좀 해달라고, 그러기 위해 무기를 가지고 와도 좋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없으면 없는 대로 서로 살펴가며 살고 있는 나라에 어느 날 문득 소비에트 연방의 군인들이 탱크를 몰고 쳐들어 왔고,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 미국과 영국 등에서부터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무기를 공급해주었으며, 그리하여 급기야 과격 이슬람 세력 탈레반에 의한 폭력정권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탈레반에 의한 문명파괴, 인권말살은, 참으로 엉뚱하게, 미국 땅에서 발생한 911 사태로 인해 큰 전기를 마련한다. 911이 탈레반 정권과 긴밀한 관계에 있던 오사마 빈 라덴을 우두머리로 하는 집단에 의한 범죄이며, 그가 아프가니스탄의 산악지대에 숨어있다는 정보를 얻은 미국은 20여 년 전 소비에트와 아주 비슷하게 최신식 무기를 운용하는 정예부대를 이끌고 다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고, 이때 오사마 빈 라덴만 거덜을 낸 게 아니라 이참에 반미세력으로 변신한 옛 반공 동료 탈레반 정권까지 무너뜨려버린다. 그러니 오랜 세월 탈레반에 의해 잔인하게 짓밟히던 아프가니스탄의 선한 백성들은 21세기가 열리자마자 세계인들을 경악시킨 911 테러가 얼마나 반가웠을까. 이리 오랜 전쟁과 내전, 문명파괴, 인권말살 같은 야만, 그리고 다시 한 번 전쟁의 폭력. 왜 아프가니스탄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는가 말이다. 눈 크고 어두운 피부색을 갖고 있는 그 사람들이 죽이 되던 밥이 되던 그들끼리 살도록 애초에 간섭하지 않았다면 아프가니스탄, 유목과 검소한 농경의 나라가 어찌 지금과 같은 비극 속에서 살았겠는가.
 독후감 제일 앞에 얘기했듯이 내가 잠깐 미쳐서 책을 동무한테 줘버려 갈피를 좇아가며 쓸 수 없는 것이 참 아쉬운데, 이 소설은 호숫가에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시골 마을의 큰 집을 배경으로, 홀아비 집주인과 손님 세 명 사이에 벌어지는 기묘한 인연을 풀어내고untie 있다.
 홀아비는 영국인 의사 출신, 70세 이상의 고령 백인인데, 아프가니스탄 여성과 결혼하기 위해 이슬람교로 종교를 바꾼 사람이다. 아내 역시 의사.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이 차도르는커녕 히잡도 쓰지 않고 짧은 치마에 자동차를 운전하고 다니던 시절의 옛날 사람이라 남편과 함께 영국에서 의사 면허를 따고 다시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온 인물. 결혼 역시 예전 시절에 했기 때문에 주례를 여성에게 부탁했고, 세월이 더럽게 흘러 탈레반이 정권을 잡은 다음, 여자가 주례를 한 결혼이기 때문에 그건 결혼이 아니며 이방인에게 몸을 판 창녀에 불과하다는 판정을 받아 동족이 던진 돌팔매를 맞아 숨을 거둔다. 그러니 집주인 마커스 씨의 심정이 어떻겠는가. 근데 그의 모습도 좀 이상하다. 왼쪽 손이 없다. 탈레반에 의해 도둑질을 했다는 판결을 받아 손목이 잘린 것. 이들 사이에 딸이 하나 있었다. 점점 자라 이제 남녀 사이의 불장난을 알 시기가 되자 동네 미남 청년과 눈이 맞았다. 남자가 반소反蘇 운동을 했다는 죄명으로 남자는 총살에 처해졌고 딸은 소비에트 군대에 납치되어 강간당해 임신을 해서, 어찌어찌 파키스탄 국경을 넘어 피난민촌에 도착했으나 결국 지방군벌에 의해 사살 당한다.
 러시아에서 옛 소비에트 군인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서 행방불명된 동생의 행방을 수소문하려 입국해 이 집에 들를 라라, 라는 이름의 여성. 동생이 예전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되었을 때……, 아, 지금 내가 뭐하는 거임?
 보석원석 전문 딜러이자 CIA 출신의 중년 남자, 그리고 극단 이슬람 주의자답게 성전聖戰을 신봉하는 아프가니스탄 청년. 이들 사이에 얽히고설킨 수많은 매듭. 그걸 어떻게 풀까.
 난 분명히 말했다. 얽히고설켰다고. 유목민과 농민들이 평화로운 삶을 누려왔던 지역. 곱슬머리 상투를 한 수많은 석가모니 석불이 있었고, 그 연후에 이슬람의 평화로운 말씀이 대지를 덮었던 산악과 황야의 나라. 이들 사이에 당시엔 얼마든지 가능했었거나 가능하지 않았지만 공감할 수 있는 인연 또는 우연.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 울어주고, 이미 죽은 사람들을 애도하며. 아니, 비록 늦게나마 그들이 어떤 시절을 살았는지, 인간이 인간에게 행한 악행이 어느 정도까지 가능했는지 그걸 이해하는, 이해해야 하는 일. 긍정적인 의미로 아프가니스탄 국민의 민족주의를 인정해주는 일. 그것으로 나는 이 책을 읽었으며, 바보같이 술김에 동무에게 줘버렸지만, 그래서 세계인 가운데 한 명이 더 이 이야기를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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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마라톤
이채원 지음 / 현대문학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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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뜀박질 이야기. 세상에서 가장 단순하지만 가장 원시적이고, 가장 원시적이라서 무엇보다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아니,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계 운동성의 기초. 문명을 이루어 살며 그러다보니 어떤 일에도 숨이 꼴깍 넘어가는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만족하는 속성을 지닌 인간들의 한 결실, 나도 읽어봤는데, 헤로도토스의 <역사>. 페르시아 전쟁에서 마라톤에 상륙한 페르시아 인들을 물리쳤다는 낭보를 전한 메신저가 먼지투성이가 되어 아테네에 입성하여, “만장하신 시민 여러분, 아테네 군대가 이겼구만이라!” 딱 한 마디하고 숨넘어가 죽어버린 걸 기념하여 백리 길 달리기 시합이 벌어졌다가, 20세기 들어 백리 길을 딱 42,195 미터로 정한 뜀박질 경기.
 이 달리기 시합, 백리 길을 쉬지 않고 달리는 자체가 워낙 힘들어 죽음과 거의 유사한 경험을 잠깐이라도 하지 않고는 마칠 수 없다고 하여, 너무나 자주 인생길, 재수 없게 세상에 나오게 되고, 그렇다고 죽지도 못해 모진 세상살이 꾸역꾸역 살아내는 인간의 일생과 유사하다고 숱한 인간들이 그렇게 얘기했는바, 하여간 가져다 붙이긴 잘도 붙인다. 내가 생각하는 마라톤의 미덕은, 단 한 발자국도 자신이 직접 찍지 않으면 결코 백리 길을 갈 수 없다는 아주 우스운 진리. 하여간 인생은 잘 살아야 한다. 여기서 ‘잘 산다’는 건 일차원적으로 생각해서 좀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지 지적 양식과 철학의 고양 따위를 말하는 게 아니다. 즉 삶이, 사회 전체가 먹고 살기 나아져야 한다는 의미. 그래야 마라톤처럼 죽을 고생을 해가며 운동하는 사람도 생기고 만날 야근하면서 번 돈 들여 비싼 피트니스 클럽 회원권 끊어 땀 뻘뻘 흘리며 근육 키우는 인간도 생기는 것이지, 지금부터 멀리도 아니고 60년 전만 생각해보라, 배고파 죽겠는데 무슨 뜀박질을 하고, 힘들여 죽어라 뛰면서 이게 인생살이니 뭐니 할 여유가 있었겠는지. 그리하여 솔직하게 말하자면, 마라톤, 진짜로 이렇게 뛰다가 세상 하직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의 고통을 수반하는 마라톤이란 뜀박질 운동을, 42,195 미터 다 완주하면 인생에 대한 철학 하나 건질 수 있지 않을까하고,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찍지는 않을 거 같다는 점. 마라톤을 하는 사람들 보면, 글쎄 모르긴 몰라도, 뛰는 운동, 극한 운동을 하는 도중에 인체 내부 어느 분비샘에서 자신을 만족시키는 물질이 퐁퐁 솟아나, 그게 마치 일종의 성적 오르가즘 비슷한 기능을 해서 자꾸 뛰게 되는 것이고, 그런 희열을 느낀 극소수의 사람이 마라톤에 관해, 완주한 다음의 오르가즘을 아름다운 수사로 만들어 널리 알리면, 결코 42,195 미터를 달리지 못하는 나 같은 보통 사람이 홀랑 속아 넘어가는 거 같다는 뜻이다.
 어떤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들의 본능 가운데 하나. 특히 드런 인생살이 중에 정말 드럽고 드런 인생의 교차로를 만나는 걸 계기로, 소설의 ‘나’처럼 마라톤을 시작하는 사람은 나름대로 마라톤, 뜀박질을 통해 자신의 스트레스를 다스리는 현명한 방법일 수 있을 터. 홧김에 서방질 하는 우리네 조상님들의 지극히 현명한 방법보다도 훨씬 바람직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앞 문장에서 ‘드럽다’는 맞춤법에 어긋난다고 하지 마시기 바람. 어감이 ‘더럽다’보다 좋아서 일부러 선택해 그렇게 썼음).
 그래. 결혼 십년 차 여자인 ‘나’. 난소 결함으로 인한 불임증 판정. 늙고 병들어 수발해야 하는 시어머니와 같은 아파트, 같은 동, 다른 통로에 살며, 남편이 먼저 마라톤을 시작. 남편새끼가 첫 번째 42,195 미터 뛴 날이 하필이면 내 생일이었는데, 그 새낀 그날 다른 여자하고 잤음. 근데 문제는 새끼가 칠칠맞아서 마라톤 완주를 통해 받은 힘을 그 여자 몸속에 홀랑 쏟았다는 걸 내가 알게 만들었음. 그리하여 그날부터 나는 존나 뛰게 됨. 그날 시작해서 나도 잘난 남편새끼처럼 마라톤 완주한 날까지의 기록. 이걸로 끝.
 내 말이 맞다. 아무리 화려한 수사로 소설을 썼다 해도, 조상님들의 빛나는 권장성 속담인 홧김에 서방질보다 훨씬 우아하고 돈 덜 들고, 건전한 방식의 스트레스 해소로써 마라톤이지, 그게 무슨 철학은 아니잖아? 마라톤을 완주 하고난 다음 세상을 향해 “나는 인생의 영웅을 보았다. 바로 나다”라고 뻥칠 일은 아니다. 그렇게 주장한다면, 예를 들어, 남원의 육모정을 출발해서 노고단까지 1박 2일 기어 올라가고, 거기서 또 열 개의 봉우리를 넘어 천왕봉에 오른 다음 대원사에 이르는 지리산 종주를 마친 이가 “난 또 한 번의 인생을 살았다.”며 구라를 푸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본인들한테는 전부 진실이겠지.
 위와 같이 좀 야박하게 썼다가 다시 한 번 생각해봤다. 개인의 감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그렇다.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주장한다면 그건 존중받아야 한다. 이채원, 당신 말이 맞다. 근데 마라톤 백 번 완주하면 드런 인생살이의 문제가 좀 풀리긴 할까? 날 버린 그 새낀 다시 돌아오고, 늘 수발해야 하는 시어민 얼른 꼴깍 죽어주고, 불임 대신 잘 생긴 아이 하나 입양해 천만다행으로 속 안 썩이는 건 물론, 얌전하고 건강하고 공부 잘 하는 모범 청소년으로 자라줄까? 암, 만일 그렇다면, 모든 일이 생각대로 된다면, 그게 아니라도, (당연히) 마음먹은 대로 되는 거 하나 없어서 생긴 속상한 마음, 말짱, 요새 말로 힐링 비슷하게라도 된다면 백 번 아니라 천 번은 못 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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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에블린 민음사 모던 클래식 57
잉고 슐체 지음, 노선정 옮김 / 민음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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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이 어떻게 빛나는지>를 쓴 작가인줄 알고 기쁜 마음으로 책을 선택해 읽다가, 문득 정신 차려 책장을 올려다보니 <그것이……>를 쓴 사람은 토마스 브루시히, 잉고 슐체가 썼고 내가 읽어본 장편은 <새로운 인생>. 즉, 완전 착각. <아담과 에블린>은 <새로운 인생>을 쓴 3년 후 발표한 작품으로 이 부분에서 “전작과 마찬가지로”라는 구절이 와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헷갈리게 했던 바와 같이, “<그것이……>와 아주 비슷하게” 동서 독일의 1989년 통일 시기에 동독 인민들의 선택을 둘러싼 갈등을 두 주인공, 아담과 에블린, 아담은 다들 아실 것이고 ‘에블린’은 ‘이브’를 연상시키는 독일 이름이라고 하니, 저 예전에 ‘말씀’이 있어서 지구상 제일 먼저 만들어진 남자와 여자를 은유하는 두 남녀 주인공을 등장시켜, 통독 과정 당시 일반 동쪽 독일 인민들의 난감한 의식을 재미나게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난감한 의식이라 함은 에블린으로 대표하는 많은 동독 시민들은 서구를 동경하다가 드디어 탈동脫東에 성공한 사람을 대표하고, 아담은 굳이 체제가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삶의 방식을 꼭 바꿔야할 이유를 알지 못하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해 그냥 동쪽에 머물고 싶으나 사랑하는 에블린이 꼭 동쪽에서 살아야하다니 차마 그녀와 떨어질 수 없어 어영부영 서쪽에 살게 된 인물을 대표한다. 그래서 어쨌거나 동쪽에서 낳고 자라고, 그 정도면 잘 체제에 적응하여 어렵지 않게 살았던 인간들이 처음으로 자본주의 가치관과 체제로 탈출하게 되어 아담과 이브, 즉 아담과 에블린으로 불리울 수 있게 되는 것.
 나는, 내가 꼭 남자라서가 아니라 아담의 입장에서 책을 읽었는데(어쩌다 그렇게 됐다. 아마 나 말고도 많은 분들이 이 책은 저절로 아담의 시각에서 읽었을 거라고 믿는다), 동쪽 독일에서 아담의 직업은 여성의류 재봉사. 일단 외국어로 표기해야 더 좋게 들린다는 몽매한 21세기 대한민국 언어의 흐름을 좇아 얘기하자면 여성 의류 디자이너로, 자신이 (주로 중년의 돈 많은) 여인들의 세련된 옷을 디자인해서 지어준 다음에 자신의 ‘작품’을 입힌 채로 사진 한 방을 찍어 보관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으며, 뭐 상황이 피할 수 없게 진전될 경우엔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작품을 몸에 걸친 여인들로부터 직접 만든 작품을 홀딱 벗게 만드는 신공을 가지고 있는 30대 초반의 남자. 어느 날 릴리라는 이름의 나이 들고 포동포동한 중년 여인에게 자신이 지은 옷을 입히면서 옷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산지 이틀밖에 되지 않는 실크 브래지어를 벗어 맨몸에 작품을 걸치게 한 다음, 원래 계획은 비록 그렇지 않았지만 자기도 모르는 새 자신의 손가락들이 작품의 아래, 즉 곧바로 맞닿게 되어 있는 릴리의 피부 위를 적극적으로 탐사하기 시작했으며, 기대와는 달리 그리하여 벌어졌을 파노라마는 과감하게 생략한 채, 다음 장면으로 포동포동한 릴리는 욕실에서 비누거품 잔뜩 뒤집어 쓴 욕조 속에, 아담은 벌거벗은 채로 작업실에 서있는 순간, 동거인 에블린이 난데없이 그들의 동거가옥에 쳐들어오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에블린은 스물 한 살의 똑똑한 여성. 그러나 아쉽게도 동쪽 독일이 요구하는 체제와 법률에 대한 순종을 가지고 있지 않아 자기가 원하는 전공을 선택하지 못한 대학생이 되었다가, 엉뚱하고 흥미 없는 전공을 공부하느니 차라리 다니지 않음만 못하다는 현명한 결론을 내린 것까진 좋았지만 지능지수 높은 아가씨가 기껏해야 슈퍼마켓 계산원을 하고 있었으니 평소 자기가 사는 꼴에 지극히 만족하지 못했던 것은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인데, 어느 날 불쑥 자기 꼴이 너무 한심스러워 한 바탕 벌컥 성을 내며 그것도 직장이라고 아 썅, 낼부터 안 나올 테니까 그런 줄 알아라, 대성일갈한 다음 내연남의 위안이라도 받을까싶어 벌컥 현관문을 열어 젖혔더니, 욕실 문을 훤하게 열어놓은 피둥피둥한 아줌마가 비누거품을 뒤집어 쓴 채 욕조에 앉아 있고 내연남은 벌거벗은 채로 장롱 옆에 숨어 있더란 말이다. 아이고, 내 더 이상 이놈의 공산당 치하에선 살 수가 없다, 명확한 결론을 내리고 그길로 짐을 싸서 사촌이라 일컫는 나이많은 서독 남자 미하엘을 따라 헝가리 인민공화국의 수도 부다페스트를 거쳐 친구네 집으로 내빼버리고 만다.
 비록 육체가 원하고 본능이 원해 나이 많고 피둥피둥한 아줌마의 몸을 탐냈을지언정 죽으나 사나 에블린을 사랑해마지않는 아담은 그길로 만든지 28년이 넘은 똥차를 끌고 이들을 찾아 나서면서, 많은 사람들은 만나고 드디어 아담이 원하지 않았던 서독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망명해버리고 마는데, 하이고.
 문제는 동쪽이냐 서쪽이냐, 하는 선택과 그에 따른 실행 또는 모험담이 이 책의 모든 것이 아니라는 것. 비록 동쪽의 많은 인민들이 장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투쟁하고 구호를 외쳤지만 동쪽은 동쪽 나름대로의 미덕이 있었던 것이고, 그 안에서 안분하던 인물이 아무 대책 없이 서쪽으로 넘어와서 겪을 수밖에 없는 혼돈과 부적응, 뭐든지 과잉으로 공급되는 자본주의적 질서가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그건 날 때부터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살던 이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일 수도 있고 뭐 그런데, 예를 들면, 자본주의 세계로 이주하기로 결심하자마자 생긴 스물한 살 에블린의 태내에 막 생긴 생명이 과연 아담의 아이인지, 아니면 사촌이라고 주장하던 미하엘의 아이인지 도무지 알 수도 없으면서 그냥 아담과 계속 살기로 해버리고, 그리하여 지속시키기로 한 생활 역시 그리 행복해보이지 않는 건 물론이며, 동독에선 유명한 의상 디자이너일지라도 서쪽으로 넘어오니 시민 대다수가 간편한 기성복만 사 입기 때문에 주어진 일거리라고는 자신의 작품을 만들 수 없는 옷 수선, 그것도 파트타임 말고는 구할 수도 없는 비극.
 아, 오늘 내가 말이 너무 많다. 차라리 원문을 그대로 다 배껴 쓸 걸 그랬나? 반성한다.
 근데 이런 비극성을 잉고 슐체는, 그의 첫 작품 <새로운 인생>은 순전히 잉고 슐체란 이름이 근사해서 사 읽었는데, 이 책은 작가의 이름하고는 관계없이, 그는 이 작품을 산뜻한 희극으로 묘사하고 있는 점이 지극히 마음에 들었다. 비장하지 않은 비극. 숨어있는 웃음의 코드로 오히려 강화되는 비극성. 여기서 말하는 비극성은 뭐 킹 리어나 데스데모나 혹은 오필리어의 비극이 아니고 굳이 비교하자면 경쾌한 비극인데, 이걸 경쾌한 비극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게 하는 거 역시 작가 잉고 슐체의 독특하게 발랄한 시선이 굳건하게 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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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리 - 2010 제34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청춘 3부작
김혜나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2010년 민음사가 주관하는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오늘의 작가상’이 어떤 상인가. 한수산의 <부초>, 박영한의 <머나먼 쏭바강>,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최승호의 <대설주의보>, 조성기의 <라하트 하헤렙>, 강석경의 <숲속의 방> 등, 가히 당해 연도 빛나던 작품들을 골라 어제도 아니고 바로 오늘의 작가라고 계관을 씌워주던 상이다. 물론 나 소싯적에 그랬다는 말. 요새는 넘겨듣기론 민음사에서 낸 책만 아니라 모든 출판사에서 나온 모든 책을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다는데 그것도 민음사의 돌아간 사주 박맹호 선생 아니면 힘들었을 결정이었겠다.
 하여간 그런 상을 받았다고 하니 요샌 오늘의 작가상 수준이 얼마나 되나 싶기도 하고 (내가 이렇게 써놓고 다시 읽어봐도 참 건방지기 짝이 없는 말이긴 하지만 하여간) 오랜만에 듣는 상, 그동안 밥상, 술상, 찻상, 개근상밖에 받아본 적 없어 오늘의 작가상이란 이름도 새삼 멋있기도 해서 한 번 골라 읽어봤다. 물론 이왕 상 탄지 7년이나 된 책을, 우라질 도서정가제 때문에 비싼 책값 다 내고 읽기 뭐해서 중고책 골라 읽어봤다.
 220쪽 조금 넘는데, 분량이 짧기도 하지만 어쨌든 반나절이면 다 읽는다. 소감? 이거 읽은 독자들은 딱 두 패로 나뉘겠다. 찬반양론이 있을 수밖에 없는 문제작. 나? 당연히 찬성 쪽. 이 책 <제리>만 보고 말한다면 이런 작가의 등장을 두 손 들어 환영하는 입장. 왜? 어떤 소설보다 더 야한 베드 씬 장면이 등장해서. 이건 물론 농담이다. 소설을 읽을 때 느끼는 감정이 낯설고, (낯설어서)불편하고, (낯설고 불편해서)급기야 불쾌한 단계를 넘어, 양쪽 관자놀이 상단 10cm(‘십센찌’라고 굳이 발음할 필요는 없고) 부근에 악마의 뿔이 돋을 만할 때에 이르면, 스물아홉 살배기 작가 김혜나가 하고 싶었던 말은, 여태까지 모든 낯설고, 불편하고, 불쾌하기까지 하며 심지어 도발적인 모든 표현을 통해 인간, 그중에서도 인생의 황금기를 보내고 있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젊은이들의 고독과 소외와 그리움을 넘는 갈망이란 걸 깨닫게 된다. 너를 향한 갈망. 또는 우리를 향한, 너와 내가 우리가 되고 싶은 갈망. 어떻게 이걸 소설행위로 표현해야 할까. 김혜나는 섹스로 이 이야기를 풀어냈으며 그래서 지독한 수준의 성애묘사가 바로 그 자리에 필요했었으리라. 작중 주인공 ‘나’가 거의 언제나 그랬듯이 섹스가 나에게 준 건 까마득한 벼랑위에 선 듯한 오르가즘이 아니라 언제나 참고 견뎌야 하는 고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혹시 모를 관계의 유지 및 새로운 관계의 생성을 위해 섹스는 언제나 필요했던 것이었다.
 21세, 22세, 많아봤자 25세 가량의 젊은 여성들. 인천 소재 2년제 대학의 야간부에 다니는 아가씨들은 부모한테 용돈을 받고, 모자라면 아르바이트를 해서 벌충을 해가며 남자 도우미를 불러 노래바, 노래방의 ‘방’을 ‘바Bar’로 바꾼 결과 유흥음식점으로 바뀌어버린 노래바에서 질탕하게 때려 노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이런 철딱서니 없는 젊은 것들을 봤나, 하는 것이 처음에 든 솔직한 감정. 외롭다, 힘들다, 난 패배자다, 하는 그들의 정서를 정말로 한심하고, 우울하고, 세상모르고, 어이없게 받아드리는 기성세대, 즉 내 마음 속의 것들이 마지막 장을 넘길 때 진정으로 마음 짠하고, 속상하고, 공감해서 내게 기대 마음껏 눈물을 쏟을 수 있게 어깨를 빌려주고 싶게 되는 과정이 이 책을 읽는 일이다.
 워낙 짧은 소설이라 이 정도의 스토리 및 책 읽은 소감이면 충분하리라 믿는다. 더 이상은 아무리 궁리해도 나쁜 영향을 줄 수도 있겠다. 김혜나의 책들을 검색해보면 극과 극의 평이 달리는데, 하나 정도 더 읽어볼 예정. 일단 이 책은 내 마음에 딱 들었으며, 그리하여 아직 민음사에서 매년 주는 ‘오늘의 작가상’에 대한 신뢰도 연장되었음을 널리 고한다. (어쭈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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