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를 내려놓으라! 뿌리와이파리 알알이 1
베르타 폰 주트너 지음, 정지인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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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어떤 조건도 없이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이며, 역사상 추악하지 않았던 전쟁이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인간이다. 이 주장은 내 생이 끝날 때까지 절대 굽히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 또는 인류 대부분의 집단이 만일 내게 비겁자라고 비난한다면 기꺼이 비겁자가 되겠다. 이러한 전쟁 반대의 신념은 결코 특정 종교집단의 의식에 의하여 굳어진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살면서 겪었던 경험을 통해 차곡차곡 만들어진 (만일 내게 그런 것이 있다면) 영혼의 명령이다. 결코 전쟁의 편에 서지 말라는.
 트럼프와 김정은은 연일 살육과 전쟁 가능성에 대하여 거의 끝까지 간 수준의 언어폭력을 구사하고, 몇 십 년에 걸친 북한의 전쟁 위협에 만성이 된 남쪽 시민들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마치 일상인 듯 차분한 생활을 이어간다. 전쟁은 누가 일으키는가. 왕과 귀족의 이익을 위하여 다수의 인민의 생명을 걸고, 간혹 국가나 민족 하여간 한 집단의 명예와 자존심을 위해. 전쟁을 위해 왕과 귀족 및 부르주아 최상 계급은 전쟁을 찬미하고 상대국에 대한 증오를 극대화하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집단 최면을 건다. 그리하여 국민의 거의 대다수가 전쟁에 동의하게 만들며 자신이 악의 무리를 징계하기 위해, 적어도 내 민족과 나라의 자존심을 위해 목숨을 칼끝에 걸고 진격해 나간다. 기억하시라. 전쟁을 발발한 왕과 귀족, 부르주아 누구도 자신의 생명을 내놓지 않는다. 그들은 저 멀리 언덕 위에서 눈부신 백마의 등 위에 앉아 벌판에서 벌어지는 잔인한 살육의 현장을 감상할 뿐이다. 왕을 비롯한 집단의 최고 우두머리 역시 전쟁을 원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원하지 않았다고 반드시 전쟁을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왕을 둘러싼 귀족집단과 군부가, 역사상 거의 언제나 그랬듯이, 왕으로 하여금 개전 명령서에 도장을 찍게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그리하여, 권력이 국민에서부터 나온다고 헌법에 명시한 대한민국은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확률이 대단히 낮다. 마찬가지로 거의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 역시 스스로 개전을 선언하기가 매우 힘들 것이다. 헌법을 통해 권력은 의회에서 나온다고 선언한 미합중국은 대한민국보다 전쟁을 벌이기가 상대적으로 편리하고, 헌법과 전혀 상관없이 권력이 주어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선 최고 권력자와 군부가 뜻을 합치기만 하면 그까짓 전쟁을 벌이는 것은 일도 아니다. 지금 전쟁을 시도하기가 상대적으로 편리한 두 나라가 대한민국의 영토 안에서 적어도 수백만 명의 대한민국 국민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려고 하고 있다는 걸 모두가 인식하고 있으면 좋겠다. 최하 수백만 명의 머리 위에 다모클레스의 칼이 대롱거리고 있다는 것을.
 박정희의 유지를 이어받은 1야당은 이에 맞서 핵개발 등 대등한 군비확대를 주장하고 있고, 대통령과 여당은 트럼프의 발언에 거의 무조건 적인 찬성의 의도를 보여주기만 한다. 직설적으로 얘기하자면 아무 대책 없이 바라만 보고 있(기만 한 거 같)다. 정부와 국회에서의 전쟁을 억제하기 위한 적극적 논의는 물 건너간 것처럼 보인다. 민간기구 역시 전쟁 반대의 목소리를 뚜렷하게 내기 힘겨워한다. 아니면 적어도 열린 매스컴을 통해서는 알 수가 없다. 우리 땅에서, 세계 전쟁사 상 가장 강력한 무기로, 천만 이상의 우리 국민에게 사형을 집행하려는, 집행 할 수도 있는 순간임을 모든 국민은 진정으로 알아야 한다. 왜 전쟁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그들이 진심으로 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당연히 정권 유지. 우리도 경험해보지 않았는가. 저 1970년대, 대한민국은 언제나 북의 남침 위협을 지극히 과장되게 강조하면서 권력을 공고히 해나갔다. 마찬가지로 2010년대 북한 역시 미국의 침략을 과장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하고 싶은 것인데, 아니면 과문한 내 눈엔 그렇게 보이는데, 권력 유지가 가능하다는 확증을 갖게 해주는 것이 그렇게 어려울까? 북한 인민들의 입장에서도 모든 인민의 불행을 확약하는 전쟁 대신 김씨 일가의 권력이 계속 유지되는 것이 생각할 필요도 없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독재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독재가 전쟁 그리고 집단 개죽음, 이어지는 회복 불가능의 퇴보보다 낫다는 말이다.
 다시 강조. 지금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 머리 위에, 어제 갓 태어나 아직 눈도 뜨지 못한 내일의 희망들 위에도, 다모클레스의 커다란 칼은 대롱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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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10-16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모두 전쟁반대는 영혼의 명령이자, 양심의 명령 일 겁니다. 전작권도 없는 우리나라.. 한반도에서 또다시 대리전쟁이 일어나서는 결코 안됩니다.

Falstaff 2017-10-16 11:12   좋아요 0 | URL
많고 많던 NGO들도 전쟁 반대를 이야기하는 건 내키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더 우려스러운 거고요.
 
레헨따 1 창비세계문학 56
레오뽈도 알라스 끌라린 지음, 권미선 옮김 / 창비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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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권 1,300쪽에 이르는 장편소설. 요새 창비 미운 짓 참 많이 하는데 책 읽으면서 얘들을 피해갈 수 없는 것이 딜레마. 어떤 미운 짓? 자기들만 잘난 줄 아는 거. 걔들 수준에 맞추느라 어려운 말로 하자면 천상천하 유아독존. 아, 이것도 한문으로 써줘야 알겠구나. 天上天下唯我獨尊. 할 말은 없다. 나도 청춘시절에 백낙청 존나 존경했으니 누굴 가지고 뭐라 하겠어.
 안 읽으면 되지 왜 피해갈 수 없느냐? 내가 거의 최상급으로 존경하는 소설 가운데, 최상급도 그냥 최상급이 아니라 최상급 중의 최상급으로 어떤 작품이 있느냐 하면, 미겔 데 세르반테스가 쓴 <돈키호테>. 이 영광에 빛나는 스페인 문학을 생각해보면, 문학도 역시 국력이 뒷받침해야 세상에 널리 알려지는 법이라, 1588년 무적함대가 영국해군에게 쌍코피 터진 다음 뒷방 늙은이 신세로 떨어지는가 싶다가 이게 18세기, 19세기로 접어들면 완전히 세계사 혹은 세계문학사의 페이지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프랑스, 영국, 독일의 19세기 문학은 꾸준히 읽을 수 있었던 반면 문학사의 뒤페이지에서 몇 줄 끼적인 스페인, 이탈리아, 그러니까 가톨릭이 백성을 지배하는 지역에서 나온 성과물에는 한국의 독자들이 접촉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근데 우리의 천상천하유아독존 창비가 19세기 스페인 소설 <레헨따>를 발간해준 거다. 이러니 책 좀 읽는다 싶은 한국인이 어떻게 창비를 피해갈 수 있느냐고. 작가 이름 쓴 거 좀 보시라. 레오뽈도 끌라린의 <레헨따>. 아주 잘난 척이 줄줄 흐른다, 흘러. 외국어 표기법은 개나 물어가라 이거다. 하지만 눈에 힘주고 좀 자세히 살펴보면 여기나 거기나 다 그게 그거다. ‘뿌에르또리꼬’에서 191X년에 발간된 신문이라는 각주가 나오기도 하는 걸 보면 창비도 좀 창피해하겠지? 책이 나온 시점이 1884년. 작가가 죽은 해가 1901년. 근데 191X년에 발간하기 시작한 ‘뿌에르또리꼬’ 신문을 등장인물이 읽을 수 있어? 어이, 창비. 너도 잘 좀 하세요.
 이 작품이 스페인 최초의 자연주의 소설이라 한다. 최초가 1884년. 좀 늦기는 하다. 프랑스에서 최고의 자연주의 소설인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이 나온 해가 1877년. 프랑스 최초의 자연주의 작품으로 뭘 꼽는지는 모르겠다. 작가 끌라린이 마음 단단히 먹고 1880년대 스페인의 정치, 종교, 사회, 사상 등을 제대로 비틀어 놓은 책. 스페인 북서쪽에 ‘베뚜스따’라고 하는 가상도시가 있어, 이제 다 늙어 큰 자리를 맡고 싶지 않은 신부(priest)에게 주교 자리를 줬더니 주교는 일상적 임무를 책임질 총대리신부를 임명하는 조건에서 수락, 그 자리에 페르민 신부를 앉혀 자신의 거의 모든 권한을 부여하고 자기는 뒷방으로 스스로 물러난다. 주교가 아무한테나 총대리 자리를 준 게 아니어서 당연히 총명한 페르민 신부는 베뚜스따의 정신적 어버이로 군림하는데, 성직자들도 인간인지라 주임신부 등을 비롯한 많은 사제들, 그들과 친한 베뚜스따 귀족과 유지들, 돈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 페르민 신부의 어머니에 의해 거렁뱅이 알콜 중독자가 된 상인, 심지어 무신론자 등이 똘똘 뭉쳐 페르민의 사제복을 벗기기 위해 호시탐탐 모의를 거듭한다.
 그래서 책을 넘기면 제일 먼저 등장하는 씬이, 총대리신부 페르민이 도시에서 제일 높은 첨탑에 올라 망원경을 눈에 대고 자기 영역을 둘러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눈에 보이는 모든 지역에서 사는 인간들이 몽땅, 이제 서른이 좀 넘은 자신의 아들딸들이라는 걸 확인하는 게 그렇게 좋을 수 없다. 뭐 대강 이해는 하겠다, 그 기분. 이런 광경 어디서 보셨지? 맞습니다, <라이언 킹>. 이 무파사의 아들 심바, 즉 페르민 신부, 소설을 자연주의로 만드는 결정적 역할을 하는 인물인데, 만장하신 여러분, 가톨릭 신부는 고자eunuch가 아니란 건 다 아시리라 믿습니다. 우리의 주인공이자 가톨릭 사제인 페르민 신부가 한 여인을 사랑하게 돼버리고 만다. 어떻게? 당연히 플라토닉 사랑. 정말? 글쎄. 그걸 내가 왜 가르쳐드려야 하지? 돈 들여 1,300쪽을 읽은 게 아깝잖아? 좋다, 이건 말씀드리지. 그 여인 도냐 아나로 말씀드리자면, 당시에 인간취급도 받지 못하던 자유주의자 귀족이 이탈리아 출신 하녀와 결혼해서 낳은 딸로, 낳자마자 엄마 죽고, 아버지는 사상 때문에 해외도피. 영국에서 교육받은 가정교사의 냉정하기 짝이 없고 매사가 무지막지하게 가혹한 훈육 속에서 살다가 정신적 외상이 대단한 청소년기에 이르렀다. 영국 유학을 했으나 천박한 성격의 미혼 가정교사 입장에서 이탈리아 하녀 출신(혹시 하녀 또는 무희舞姬였을지 어떻게 알아?)이 생산한 아나를 학대함으로서 가학성 쾌감으로 자지러졌는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죽자 다시 베뚜스따 대표 속물인 두 고모들과 같이 살다가 열일곱 살에 마흔이 넘은 판사한테 시집간 유부녀, 도나 아나. 남편인 판사는 사형선고 내리는데 정나미가 똑 떨어져 아무런 핑계를 대고 조기 은퇴하여 사냥, 발명, 시낭송, 연극 등을 즐기며 사는데 암만해도 아랫도리가 좀 부실한 듯, 도냐 아나의 은근한 손길을 역시 은근하게 피하는데 골몰, 전념한다. 어려서 얻은 정신의 외상으로 신경이 극도로 예민한 도냐 아나에게 접근하는 남자가 한 명 더 있다. 돈 알바로. 베뚜스따가 낳은 돈 후안 쯤으로 생각하면 된다. 한 번 찍어서 자빠뜨리지 못한 여인이 없는 인간. 키 크고, 잘 생기고, 거기다가 돈도 많은 우라질 놈.
 좋아, 좋아. 이왕 말한 거, 다 얘기한다. 도냐 아나를 둘러싼 두 미혼 남자. 돈 알바로와 페르민 신부 사이의 야릇한 삼각관계가 책의 굵직한 줄거리다. 거기에 자기 마빡에 뿔 돋는지도 모르는 전직 판사 빅토르.
 그래서 스토리는 치정극이 되느냐고? 아닐 걸? 아, 그래. 치정극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치정극에 가톨릭 사제를 끼워 넣은 것이 19세기에 얼마나 깡다구가 세야 할 수 있었는지는 책만 읽어봐도 알 정도. 세상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도 모르는 스페인의 한 주도州都 베뚜스따에서 벌어지는 성과 속의 난장판. 한 순간 팔팔 끓어올랐다가 금방 냉랭하게 식어버리는 시민들의 온갖 모습. 여기에 도냐 아나의 왔다 갔다 하는 정신상태, 즉, 변덕. 성이냐 속이냐의 갈림길에서 갈 길을 찾지 못하는 마마보이의 고뇌. 온갖 잡놈잡년의 굿판. 성도 개판이고 속도 개판이어서 베뚜스따, 아니 19세기 스페인 전체가 개판임을 노골적으로 비아냥댄 레오뽈도 알라스 끌라린. 이거 쓰고 으슥한 밤길 가다 뒤통수 한 방 안 얻어 터졌는지는 밝혀진 바 없다.
 뭐 그렇다고 읽어보시라는 뜻은 아니고. 재미없단 게 아니라 너무 길어 욕먹을까 겁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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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10-13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창비의 제멋대로 표기법은 정말 답이 없습니다.

성속을 아우르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쓰또리가
아주 땡기네요. 다만, 1,300쪽이나 된다고 하니
쫌 고민이네요.
나중에 헌책방에 등장하게 되면 땡길까요?

유럽 중앙무대에서 뒷방늙은이 신세가 된 시절
의 에스파냐 이야기와 어쩌면 그렇게 21세기
헬조선의 들끓는 모습과 그렇게 유사한지 모르겠습니다.

Falstaff 2017-10-13 12:39   좋아요 1 | URL
옙.
(창비 잘난 척하는 건 별개로 하고요, ^^)
스또리는 재미난데, 너무 세밀한 것까지 다 글로 설명하려니 (쓴 사람은 어떠했겠습니까만 그건 다 지 팔자고) 읽는 독자 아주 까무러칩니다. 헌책방에 나와도 심각하게 생각해보심이.... 진짜진짜 그렇게 되면 안 되겠지만, 인생 살면서 혹시 교도소 갈 일 있으면 거기서나 어떻게 한 번 ^^;

sprenown 2017-10-13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1,300페이지짜리 책을 읽습니까? 눈이 정상인지 궁금하네요..제 독서속도로는 한달이상 걸리는 책인데..ㅋㅋ.. 노안이 와서 2~3페이지만 봐도 눈이 침침하고, 가물가물.. 인공눈물 한방울 떨어 뜨려야 하는데.

Falstaff 2017-10-14 05:21   좋아요 0 | URL
ㅎㅎㅎ 눈은 편안하지 않습니다.
너무 늦게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죄를 받은 것이지요.
거의 국내 최초 원본 직역, 초역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11권 4,800 쪽에 육박합니다. 노안이 심각해지기 전에 한 번 도전해보세요. sprenown 님한테도 완역을 읽기 위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민음사 번역을 기다리기엔 시간이 모자를지도 모릅니다.
댓글 쓰고보니 잘난 척 한 거 같아서 면목이 없습니다. ^^;

sprenown 2017-10-13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포기하겠습니다. 그러다, 잃어버린 눈을 찾아야 할 지경이네요!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 시인선 80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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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독후감 쓰는 일은 이거, 보통이 아니다. '요절한 천재'라고까지 불리는 시인의 시집을 읽고 보통의 사람이 느끼는 감정을 적는 거, 이게 독후감이다. 미리 밝히거니와 전적으로 한 개인의 느낌이지 결코 '서평'이 아니라는 점. 나는 애당초 시를 평할 수 있는 안목하고 거리가 멀다. 기형도와 기형도의 팬에게 미리 사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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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형도. 이름은 무지 많이 들어봤지만 정작 읽어본 시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도 한 때) 가난한 학생시절엔 문학지 사서 볼 여유 같은 건 생각도 해보지 못했고, 기씨가 이미 죽은 다음 첫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이 나왔을 때는 문학, 문학? 시·소설을 칭하는 문학 따위 잡스런 글을 읽어볼 시간이라곤 없이 대한민국 경제발전에 이바지하느라 (만일 회사 상사, 동료, 후배들과 술 마시는 것도 업무의 일환이라고 가정한다면) 여념이 없을 때였으니. 근데 왜 갑자기 기형도? 지난여름에 읽은 몇 권의 여성주의 소설 작품에서 유난히 기형도를 언급하는 거였다. 도대체 기형도의 시가 어떻기에 기형도, 기형도 하는 것인지 궁금해마지 않을 수 없을 정도. 꼭 읽고 말 것이다, 라고 작정하던 차, 때마침 눈에 띄어 날름 사서 읽었다. 어제 아침에 읽고 있는데 연휴라 집에 놀러온 큰 아이가, “어, 아버님도 기형도 읽으십니까? 전 <기형도 전집>을 가지고 있습니다만.”이라고 사뢰는지라, “너는 어떤 전차로 이 책을 읽게 되었느냐?”라고 물으니 “불민한 제가 뭘 알겠습니까만 이미 갈라선 전 애인이 문예창작과 졸업생이지 않습니까. 그 여인이 좋아하기에 무턱대고 사 읽었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 이 기형도란 시인이 여성들이 좋아하는 시를 쓰는구나, 지레짐작을 하고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근데 첫 작품 <안개>는 곧잘 읽히더니, 페이지를 넘길수록 이거 봐라, 도저히 (물론 일종의 성 차별적 언급이라 분류할 수 있겠지만) 여성들이 좋아할 만한 시들이 아닌데, 싶은 거였다. 뭐랄까. 난 모르겠다. 원고지에 추상화를 그려놓은 듯한 시들. 이거 한 번 보시라.


 “친구여, 그해 가을 내내 나는 적막과 함께 살았다. 그때 내가 데리고 있던 헛된 믿음들과 그뒤에서 부르던 작은 충격들을 지금도 나는 기억하고 있네. 나는 그때 왜 그것을 몰랐을까. 희망도 아니었고 죽음도 아니었어야 할 그 어둡고 가벼웠던 종교들을 나는 왜 그토록 무서워했을까. 목마른 내 발자국마다 검은 포도알들은 목적도 없이 떨어지고 그때마다 고개를 들면 어느 틈엔가 낯선 풀잎의 자손들이 날아와 벌판 가득 흰 연기를 피워올리는 것을 나는 한참이나 바라보곤 했네.” <포도밭 묘지 1> 부분


 두 번째 문장의 ‘그뒤에서’는 정말 그렇게 쓰여 있다. ‘그 뒤에서’라고 해야겠지만 혹시 시의 목적을 위한 표현일지 몰라 그대로 옮겼다. 그건 그거고, 이 시가 주장하는 것이 뭘까? 제목부터 좀 아리딸딸. 포도밭이면 포도밭이고 묘지면 묘지지 ‘포도밭 묘지’가 뭘까? 포도밭이 몽땅 죽어 또는 포도밭을 몽땅 갈아엎어 묘지로 만들었을까? 아니면 포도 농사가 폭삭 망해서, 또는 포도 수확을 다 해버려서 빈 밭이 마치 묘지 같았을까? 이 시가 2부에 실려 있다. 1부를 읽는 도중 내내 도대체 뭘 주장하는 거야,를 연발하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큰 아이 빈둥거리는 침대로 달려가 (아파트에서 달릴만한 공간이 없으니 사실 이건 구라다), “네 엑스 애인 가라사대 도대체 기형도의 시의 어디가 그리 좋다고 하더냐? 나는 기형도란 인물이 유명한 건 서른 전에 생을 마감한 시인이기 때문이란 것이 유일한 이유라고 생각한다.”라고 물어볼 수밖에 없었고, 아이는 “제가 뭘 알겠습니까. 저도 조금 읽다가 때려 치웠습니다.”는 답이 돌아왔다.
 난 이 시집을 읽으며 엉뚱하게도 박인환이 생각났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어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는 시 말이다. 그러나, 박인환의 시는 평이하게 외로움이나 그 비슷한 이미지를 노래하고 있어 독자로 하여금 주장하는 바를 이해하기 쉽게 하지만 기형도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자신만 알고 있고 품고 있는 모종의 이미지를 온갖 수사법을 동원해 나열해 놓고 있다. <비가 2 ― 붉은 달>에 자신 스스로 고백하길, “나의 추상이나 힘겨운 감상의 망토 속에서 / 폭풍주의보는 삐라처럼 날리고” 있는 거다. 폭풍주의보. 모든 수사법을 동원하여 끝없이 삐라처럼, 암호처럼 나열하고 있는 추상과 감상의 망토를. 그리고 불행하게 나는 암호 해독기를 장만하지 못했다.
 표제작 <입 속의 검은 잎>을 볼까?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2연을 통째로 옮겼는데, 그래야 표제작 <입 속의 검은 잎>조차 추상이나 힘겨운 감상의 망토 속에 은밀히 포장해 놓은 포도송이라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을 거 같아서다.
 그리하여 제발 부탁하노니, 누구 시 잘 아시는 분계시면, 기형도의 시는 어떠어떠해서 좋은 시란 걸, 좀 가르쳐주십사, 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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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10-12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가 어렵죠.. 은유도 많고, 시인의 당시 상황에 대한 이해도 필요할 것 같네요.. 시중에 유수의 문학평론가들이 ‘기형도론‘을 쓴 걸로 알고 있습니다. 참고해 보시는게 어떨지요? ‘그 일‘은 아마 80년 광주를 말하는 것 같고, 입속의 검은 잎은 그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혀를 의미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정확한 기억인지 모르겠습니다.

Falstaff 2017-10-12 11:27   좋아요 1 | URL
할 말은 많은데, 하기 싫네요.
광주와 방 안의 먼지와 검은 잎.
은유는 언제나 아름다운 게 아니고 가끔가다가는 끔찍하게 비겁하기도 하잖아요.
차라리,
혁명은 안 되고 방만 바꿔버리는 김수영이 더 솔직해 좋습니다.

2017-10-12 1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0-12 1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0-12 1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0-12 1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피에르, 혹은 모호함 1 세계문학의 숲 44
허먼 멜빌 지음, 이용학 옮김 / 시공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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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으면서 먼저 번역에 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먼 멜빌. 특유의 잘난 척하는 만연체로 악명이 높은 인물이라 이이를 번역할 때 감수할 수밖에 없는 고통을 영어를 공부한 사람들로부터 직간접적으로 무척 많이 들었다. 그럼 어떻게 멜빌의 글을 한국의 독자에게 한글로 들려줄 것인가. 한국인들이 알아듣기 쉽게 원문의 글을 조금 훼손시키는 위험을 감수할 것인가, 아니면 보다 원문 또는 원문의 뉘앙스에 충실하기 위해 직역 수준의 한국어로 바꿀 것인가. 바람직하지 않은 번역이라고 전에 침 튀었던 한 작품의 경우, 내가 입에 거품을 물고 개번역이라고 침을 튀니 독후감을 본 역자의 한 지인이 역자에게 연락하고, 역자가 읽어보니까 이거 뭐 개뿔도 모르는 것이 독후감이라고 공개된 장소에 글을 써놓아 선량한 독자들을 현혹하는지라, 답글을 달아 원래 해당 작가의 글이 현지인도 이해하기 힘든 기상천외한 은유를 많이 썼는데 (아주 정중한 글로 썼다. 내 표현이 워낙 날 것이라 분명히 번역한 사람은 독후감을 읽고 화가 많이 났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정중하게 답글을 달았다. 틀림없는 신사라고 생각한다) 그걸 한글로 옮기면서 방향을 원문을 그대로 전달하는데 역점을 두었기 때문이라고 설득하려 했다. 지금 검색해보니 그분의 답글은 그 사이에 삭제되고 말아 정확한 인용은 할 수 없었다.
 당시 문제의 작품을 썼던 작가보다 한 세기 앞서 활약한 허먼 멜빌. 그의 악명 높은 화려하고 긴 문장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난 번역에 관해서는 소비자다. 그리하여 역자의 판단에 따라, 한국의 독자가 쉽게 읽히게 할 것인지, 아니면 작가의 원래 뜻을 조금이라도 더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직역을 할 것인지는, 직업으로 번역을 선택한 번역가의 철학에 완전히 일임한다. 애초부터 정답이 없는 질문이기 때문에. 다만 부탁하건데, 전에 번역문에 관해 열을 냈던 작품에서 얘기한 것과 마찬가지로, 한글로 번역한 우리 문장을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내가 읽으면서 읽기를 마치는 순간 직빵으로 문장을 이해할 수 있게만 만들어달라는 거다. 이거 어려워? 하긴, 육군 대령 출신의 아버지가 아들 둘을 때려잡는데, 이렇게 얘기했다나? “내가 너희한테 뭘 많이 바라는 거 아냐. 딱 세 가지야, 세 가지. 근데 그걸 못해주는 거냐? 착하고, 건강하고, 공부 잘하고. 간단하잖아. 겨우 이거 들어주는 게 그렇게 힘드냐?” 엎어져서 빠따를 맞는 형제는 “아버지, 그중 하나라도 잘 하기가 얼마나 힘든 줄 아슈?” 속으로 이렇게 얘기했다나. 겨우 독자밖에 안되면서 너무 과한 걸 바라는지는 모르지만, ‘될 수 있는 대로 한글 문장을 좀 알기 쉽게 써달라는 부탁’이란 말로 요약하면 되겠다.
 이 책의 역자 이용학은 서울대와 단국대에서 멜빌을 공부해 박사를 했단다. 자기 전공을 번역하는 일. 그럼 처음부터 이 사람은 작가의 의도를 정확하게 전달하는데 초점을 맞추겠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었고, 아니나 달라, 딱 그랬다. 그리하여 19세기 초반 미국의 상류사회에서 쓰던 말버릇을 그대로 직역을 한다. 아이고, 돌아가신다. 문제는 긴 문장을 쓰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인 것과 마찬가지로, 긴 문장, 그것도 은유를 비롯한 무수한 수사를 포함한 문장을 이국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거 같다는 점. 나야 그런 일을 안 해봤으니 모르지만. 두 권 합해서 약 790쪽에 달하는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 직역에 따른 어색한 문장이 와장창, 눈 많이 내린 아침에 굵은 소나무 둥치를 발로 걷어찬 것처럼 우수수 쏟아져 처음 100 쪽 지나가기 전까지는 참 적응이 되지 않더라. 거기다가 아까 한 얘기, 한국말로 쓴 한국어 문장도 왜 그렇게 알아듣지 못하겠는지 한 번 예를 들어보자.


 “천사가 축원을 하며 내려다본다고 청년은 생각했다. ‘내 그대에게 그대의 그 무수한 아침 인사들을 돌려주겠어. 루시, 그대가 하룻밤을 무사히 넘길지도 생각 못했는데, 세상에 무한한 낮의 영역에 속하게 되었다니!’
 ‘저런, 이봐요, 피에르, 어째서 당신네 청년들은 사랑할 때는 늘 혼언장담을 하는 거예요?’” (1권 11쪽)


 먼저 “혼언장담”은 내 오타가 아니라 정말 책에 그렇게 써 있다는 점을 밝히고, 지금부터 질문. 청년 피에르가 도대체 무슨 뜻의 이야기를 했기에 루시가 당신네 청년들은 사랑할 때 호언장담을 한다고 했을까요? 답? 모르니까 묻지 설마 내가 아는데도 물어볼까.


 “그 미망인은 중용 문화의 섬세한 지성을 겸비하고, 어떠한 위로할 길 없는 슬픔으로도 속 썩지 않고 비참한 근심 걱정들로 심신이 결코 지치는 법이 없는 때에, 변동 없는 계급, 건강, 부유함이 갖는 늙지 않고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힘의 두드러진 본보기라 할 수 있는 여인이었다.” (1권 12쪽)


 뭐 내용은 알겠다. 한 과부가 있는데 지성도 있고, 심리적으로 건강하고 돈도 많고 지위도 높은데다가, 재수 없이, 거기다가 또 아름답기도 하다는 거 아냐. 이건 틀림없이 원문의 훼손을 극히 작게 하느라 그냥 직역을 감행한 한국어 문장일 것이다.


 “피에르는 이런 식으로 자주, 연인의 부드러운 인연을 맺게 되기 전에 누이를 갖게 해달라고 하늘에 축원하곤 했다. 하지만 남자가 간절히 빌며 반대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청년시절의 진심에서 우러나는 몇몇 기도들에 응답해주는 것임을 그때 피에르는 몰랐었다.” (1권 18쪽)


 스토리의 가장 중요한 요소를 미리 암시하는 복선이 되는 문장으로 대단히 중요한 대목인데, 첫 문장은 그런대로 이해가 간다 해도 두 번째 문장은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겠다. 볼까? ‘남자가 간절히 빌며 반대할 만한 것’이 도대체 뭐야? 그게 ‘누이를 갖게 해달라고 하늘에 축원’하는 일이라면 그래도 수긍할 수 있을 텐데 그것도 아닌 거 같고. 책을 다 읽고 나서 이 대목을 찾아보면 두 번째 문장에서 ‘남자’를 하느님 또는 신, 아니면 셔먼 등등 간절히 빌 대상이 되어 청년이 진심에서 우러나 기도하지 말라고 반대한다는 뜻이면 맞겠다, 그러니까, 이건 책의 내용과 완전히 반대되는 해석이라고 결론을 낼 수밖에 없는데, 이거 어떻게 할 거야?
 예를 더 들라고? 관두자. 요약하면, 요새 번호 먹이는 거에 맛들인 거 아시겠지, ① 번역한 ‘한국말’을 이해하는데 독자가 허벌나게 고생하며, ② 역자의 영역을 건드리는 거 같아 안됐지만 과한 직역에 의해 읽어내기가 난감한 경우,가 과하게 보인다는 걸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①번 사항은 100 쪽 넘어가면 이제 어느 정도 면역이 돼서 그냥 그런가보다 넘어가는 수준, 전적으로 독자가 짧은 시간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경우엔 이후 별 무리가 없긴 하다. 하지만 아주 오래 있다가 난데없이 이런 문장 등장하면 좀 곤란을 겪는다.


 “어떤 정해진 형태의 숭고하고 순수한 전형적 신념을 받아들인 것에 대한 모든 본질적인, 하이에나 같은 반발력들 중에서, 사회 일반의 인습적인 허풍들에 넌더리나서, 그들의 자유롭지 못한 현세의 인간 속성으로 불완전하게 인식되었지만 신성한 어떤 이상들, 즉 그 자체가 불완전하게 인식되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이르는 길은, 어떤 두 사람의 마음도 완전히 그것에 합의하지 못할 만큼 따라갈 수 없는 이상들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본질적으로 가장 훌륭하고 고상한 염원들을 흔히 나타내는, 저 피할 수 없는 괴팍한 바보스러움만큼, 그 회의주의적 경향에 있어서 그렇게 강력한 것은 없다.” (2권 260쪽)


 주어가 뭐야? ‘강력한 것’. 술어는, ‘없다’. 좋아. 그럼 이 한 문장이 주장하는 바는? 이거 그대로 옮겨 쓰는 일도 쉽지 않았다. 문장의 뜻을 모르고 옮겨 적는 것이 쉬운 줄 아셔? 정말이다. 이쯤 되면 이거 비문 아냐? 멜빌을 연구해서 박사 받았고 더구나 이 책을 직접 번역한 이용학은 이 문장이 뭘 주장하는지 알고 있을까? 독후감의 앞에서 예를 든 전에 읽은, 비문이 수두룩한 소설을 번역한 점잖은 사람이 내게 그랬다. 내가 시비건 문장이 자기 원고에 없는데 이상하다고. 근데 그게 자랑은 아닐 거 같다. 자기 이름 달고 나오는 책, 원고 던져주면 그걸로 끝이야? 책임은 출판사에 있다고? 이용학은 뭐라고 얘기할까 궁금하다. 두 사람 모두 시공사 ‘세계문학의 숲’ 시리즈에서 나온 미국문학 분야인 것도. 한 번 수상하게 보니까 끝도 없다.


 이 책. 젊음의 대책 없는 실수. 인생을 걸고 한 한 번의 거짓말이 어떻게 인간을 돌이킬 수 없게 하는지를 쓴 19세기적 세밀화. 거기에 신화적 근친상간의 요소가 살짝 가미된 가공품. 굳이 읽을 필요 없음. 다른 세계문학 시리즈와 비교해 오탈자 겁나 많지만 그래도 집중하지 못하게 할 수준은 아님. 혹시 읽어보겠다고 주장하시면 역시 말릴 의사는 없음. 다 읽고 판결은 엄연히 당신의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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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10-11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아- 이 책 언젠가 읽어보려고 적어두었는데.... 말씀하신 문장들을 보니 도저히 읽을 수 없을 것 같다고 호언장담합니다. ㅋㅋㅋㅋ

Falstaff 2017-10-11 12:40   좋아요 1 | URL
저도 그렇게 생각하시리라 ˝혼언장담˝ 했었는데요. ㅋㅋㅋㅋ

qualia 2017-10-11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네요. 번역에 관해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줍니다.

Falstaff 2017-10-11 12:41   좋아요 0 | URL
재밌게 읽어주셔서 고마울 뿐입니다.
근데 저처럼 좀 까다로운 독자가 있어야 번역의 품질도 올라가지 않겠어요?
ㅎㅎㅎ 물론 자뻑입니다만.

sprenown 2017-10-11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 시원합니다. 우리 번역계의 수준이 좀 더 올라가야겠죠..사실 우리 독자가 주인입니다. 할말 잘 하신겁니다.

Falstaff 2017-10-11 15:55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근데 뒤가 좀 캥기기는 하는군요. 몇번 태클당한 경험이 있어서리... ㅎㅎ

sprenown 2017-10-11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판하고 논쟁하면서 발전하는것 아니겠습니까? 잘못에 대해 반성도 하고요..
 
보이체크.당통의 죽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9
게오르그 뷔히너 지음, 홍성광 옮김 / 민음사 / 2013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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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이체크>와 <당통의 죽음> 이렇게 두 희곡을 담은 책.
 <보이체크>는 알반 베르크가 작곡한 오페라 <보쩨크>의 원작으로 언젠가는 읽어야할 목록에 벌써부터 들어 있었던 것인데 이제야 읽었으니 만시지탄. 이 책을 이번에는 꼭 읽어야겠다, 작정하게 만든 건 전에 <로베스피에르의 죽음>을 읽으면서 이왕이면 <당통의 죽음>을 먼저 읽을 것을 그랬다고 조금 후회 비슷하게 한 점이 첫째요, 두 번째는 빅또르 위고의 <93년> 속에 마라, 당통, 로베스피에르 세 거인의 풍모가 소개되는데 개인들에 관해선 깜깜 무지, 이왕이면 이들의 삶도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니 음악(보이체크)과 전에 읽은 독서(당통의 죽음)에 이은 연속 독서로 이어지는 선순환이 작용했다고 할 것인데, 내가 생각해도 거 참 기특하다.
 <보이체크>는 오페라 <보쩨크>와 거의 내용이 같은데, 당연히 원작을 조금 생략, 수정한 것이 후배 베르크가 작곡한 <보쩨크>. 따라서 오페라에서 나오지 않는 장면이 약간 등장하고 순서가 왔다 갔다 하지만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지금부터 하는 얘긴 완전 내 생각이다. 어디 가서 이 이야기 써먹고 옴팡 망신당하는 건 당신 자유니까 알아서 하시라. 내가 먼저 1925년에 알반 베르크가 작곡한 <보쩨크>를 VHS 필름과 DVD로 보고, CD들로 충분히 들은 다음, 1836년에 쓴 <보이체크>를 읽어서 그랬는지, <보쩨크>가 훨씬 나한테 맞았다. 무엇보다 먼저 말하고 싶은 건, 불과 스물 네 살의 삶을 살고 간 뷔히너가 ‘19세기 전반기’에 이런 희곡을 썼다는 것. 가히 경기를 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파격적인 극작을 시도했다는 점. 뷔히너야말로 천재가 가져야 하는 미덕인 대단한 작품의 생산과 일찍 맞이하는 죽음을 다 가진 작가인데, 이런 인물에게 흔히 사용하곤 하는 헌사를 바치자면, 조금만 더 길게 살았다면 얼마나 위대한 작품들을 만들었겠는가, 비슷한 말. 근데 뷔히너가 죽고 약 90년이 지난 독일 땅에 평생 골골하는 약골 중의 약골로 태어난 알반 베르크, 어느 날 <보이체크>를 보게 된다. 거기서 찌질이 보이체크 이등병이 군대에서 찐따 노릇을 하는 걸 보고 자신과 완전 동일시하는 건, 하도 몸이 좋지 않아 1차 세계대전이 벌어졌는데도 젊은 베르크는 참전하지도 못하고 후방에서 민방위대에 근무하며 온갖 비아냥을 다 들어서라고 한다. 물론 이건 들은 얘기. 여기서 베르크는 여태까지 현대 음악, 그 중에 오페라에선 사용하지 않았던 무조성 음악기법을 채택해 연극을 보고 집에 가서 곧바로 이 드라마를 원작으로 희대의 전환점을 만든 오페라 작곡에 들어가게 되는 거다. 그러니 19세기 초반의 획기적인 드라마를 20세기 초반 획기적인 조성의 오페라로 만든 두 천재의 작품을 듣는 21세기 인간. 그가 어떤 작품을 선호하게 될지는 전적으로 그의 마음 가는 대로겠지만 내 경우엔 원작이 담고 있는 하층민의 소외와 가난과 부조리, 또 실존방법의 모색 같은 첨단을 얘기하는 위에 획기적인 무조와 불협화음을 통째로 덧씌워 이를 극한으로 표현한 오페라가 더 좋더란 얘기에 불과하다.
 어떤 드라마고 어떤 오페라인지 궁금하시지? 대개 이쯤에서 유튜브 영상을 하나 덧붙이는 것이 일상이었으나, 생략하는 건, 5분도 안 되는 한 장면만 따와서는 두 천재에 의하여 만들어진 한 영상을 소개하는데 도무지 가능하지도 않고, 19세기에 완성한 공연물과 달리 유려한 화성의 아리아나 독백 장면 또는 웅장한 합창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아, <보쩨크>를 즐기기 위해서는 무식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한 작품을 통째로 보고 들을 수밖에 없지 않나, 싶어서다. 어째 얘기가 희곡 <보이체크>가 아니라 오페라 <보쩨크>로 쏠린다 싶겠으나, 위에서 말했다시피 원작의 손상도 별로 없고 틀어진 것도 거의 없어서 그거나 이거나 마찬가지란 점 양해하시기 바란다. 거기다가 찌질이 이등병 하나 등장하는 엽기, 잔혹, 치정극의 스토리 또는 힌트를 드릴 수 없는 바에 아예 방향을 이렇게 잡았다는 것도.
 그래도 오늘 내가 <당통의 죽음>에 관해선 한 마디도 안 했잖은가. 왜? 아, 뻔하지 뭘. 직접 읽어보시라고. 온건한 혁명으로 더 이상 죽음의 왕녀 기요틴의 무거운 칼날이 떨어지지 않는 방향을 지향한 육체적 거한이 맞는 죽음은 어떨까. 읽어보시라. 당통의 죽음으로 대혁명도 어느덧 석양을 맞고 말지 않는가. 원래 뭐든 그런 거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벌어가는 거. 왕서방. 누군지 아시지? 보나파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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