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시로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7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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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쿠 “久方の雲井の空の子規”를 “멀리 구름 걸린 하늘의 두견새”라고 번역하다니! 책의 표지에 굵지 않은 나무 두 그루 서있고, 가지에 두견이 앉았는데, 바로 그 옆, “久方の雲井の空の子規”가 종從으로 쓰여 있다. 한자 사이의 일본어가 전부 조사 “の”라 그냥 한시 읽듯 그림이 그려지지만 정작 그걸 한글로 바꿔보라면 어찌 역자 송태욱처럼 “멀리 구름 걸린 하늘의 두견새”라 했을 수 있을까. 이쯤 돼야 외국 시를 번역하는 거다. 그래도 (독자가) 가능하면 원문을 그대로 감상하는 편이 더 바람직하겠지만. 일본이 외국문학을 수입하면서 벌써 100년 전에 얼마나 진지하게 고민하며 번역에 공을 들였는지 이 책에서 조금 나온다. 대학생, 졸업생, 대단한 실력의 영어교사 등이 모여 한 문장, “Pity's akin to love.”를 어떤 일본어로 바꿔야할 것인가를 두고 난상토론이 벌어지는 장면(127쪽). 주인공과 가장 친한 친구 요지로란 인물 왈, “가엾다는 것은 반했다는 것이니라.” 하지만 곧바로 다음과 같은 지청구를 듣는다. “안 돼, 안 돼, 졸렬하기 짝이 없군.” 109년 전의 일본 문과대학에서는 이런 사소한 문장 하나를 두고 올바른 번역을 위해 토론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태까지 쓴 건 이 책의 옆가지.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잠깐 소개한 맛보기다.

 책은 20세기 초, 후쿠오카 촌 동네에서 도쿄로 유학을 떠나는 소천삼사랑, ‘오가와 산시로’를 태운 열차 안 풍경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열차 안에서 얼굴이 가무잡잡한 유부녀를 알게 되고, 여인의 부탁(당시가 20세기 초, 여자 혼자 여관을 잡는 건 좀 무모한 일이었던 모양이다)으로 중간 기점에서 여관을 잡아주다가 엉겁결에 목욕도 하고, 그러다가 거의 벗은 여인이 “때밀어줄까요?” 독특하고 바람직한 일본 특유의 목욕 문화적 친절에 기겁을 해서 (덜렁거리며)뛰어 나오고, 어쩔 수 없이 한 방에 묵을 수밖에 없게 되고, 밤새 툇마루에 앉아 있기엔 모기가 하도 극성이라 엉금엉금 그녀가 모로 누어있는 모기장 안으로 기어들어가서는 이불을 톡톡 두르려 도드라지게 하여 여자와 자기 사이에 마치 전쟁의 진지인 것처럼 금을 긋고는 여자의 몸엔 손끝 하나 대지 않고 잠만 쿨쿨 자버리는 남자. 이거 참 죽일 놈이다. 넌 그렇다 치고 옆에서 밤새 잠 한 숨 못자며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여인의 앙가슴을 도대체 어찌할 거나. 하여간 그리하여 다음 날, 다시 무대는 기차역. 두 남녀, 좀 서먹서먹했겠지? 여자가 남자의 도움을 받아 하룻밤을 잘 잤으니 먼저 인사하길, “여러가지로 귀찮게 해드려서… 그럼 안녕히 가세요.” 산시로의 습관적인 대꾸, “안녕히 가세요.” 근데 여자는 산시로의 얼굴을 계속 가만히 바라고보 있다가 차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얘기했다.
 “당신은 참 배짱이 없는 분이로군요.”
 책은 15쪽부터 시작해 335쪽까지 이어지는데 이 대사는 24쪽, 딱 열 번째 줄에서 등장한다. 이 한마디로 나쓰메 소세키는 산시로의 성격을 콱, 규정해버리고 만다. 여자가 말하는 ‘배짱’이란 것이 뭘까? 한 번 보면 인생에서 영원히 사라질 여인과 한 방, 같은 모기장 안에 자면서 손가락 한 번 까닥하지 않는 거? 일단 그렇다고 봐야한다. 여인의 남편은 오래 전에 고향을 떠나 히로시마에서 군함을 만들다가, 러일전쟁을 맞아 여순(뤼순)에서 돈을 벌었고 지금은 대련(따롄)에 있으니 그거 참, 여자가 애초에 산시로한테 있는 줄 뻔히 알고 좀 달라는 걸, 그걸 안 주었으니 배짱이 없단 비아냥은 정말로 받아 마땅한 거 아냐? 물론 농담이다.
 당시 나이 스물 서넛의 산시로. 배짱 없는 산시로가 후쿠오카를 떠나 당시 일본인 시각에선 험하기 짝이 없어 눈 감으면 코 베갈 도쿄에 도착/정착하여 숱한 배짱 있는, 그리고 배짱 없는 인간 속에서 보낸 대략 1년을 그리고 있다. 여전히 성실하기는 하지만 농촌 청년의 시각을 버리지 못하는 산시로 앞에, 도시적인 뻔뻔스러움과 특별한 친화력, 가벼운 지식으로 무장한 요지로가 등장하고, 물리학을 공부하는 동향 선배이며 국내외에 성가를 높이고 있는 노노미야 씨와 그의 여동생 요시코를 알게 되고, 요시코를 통해 또 대단한 매력을 지니고 있으며, 도쿄대의 연못 근처에서 한 번 본적이 있는 미네코와 친해진다. 여기에 일찍이 도쿄에 오는 3등 열차에서 만난 적이 있는 대단한 실력의 히로타 선생이 중요한 역할을 하며, 후반엔 산시로가 마음에 둔 여자 미네코를 모델로 초상화를 그린 하라구치 화백까지.
 소세키 작품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이 여기서도 어김없이 나오니, 바로 노동하지 않고 공부하거나 예술만 하는 돈 있는 집안의 젊은이들. 딱 둘만 꼽으면 산시로와 요지로. 요지로는 관계의 지속, 심화를 위하여 친한 친구 산시로에게 30엔을 빌려 절대로 갚을 마음이 없다. 왜냐하면 요지로 생각으로는 자기가 돈을 갚게 되면 오히려 둘 사이가 서먹서먹해질 것이란 우려가 있어서. 대책 없이 요지로에게 30엔을 꿔준 산시로는 하숙비를 내지 못하게 되는 곤란을 피하기 위해 미네코로부터 30엔을 빈다. 배짱 있는 요지로는 산시로에게 꾼 돈을 그냥 꿀꺽하고 마는데, 시골 출신의 배짱 없는 산시로는 홀어머니에게 부탁해 시골 수준으로 말하자면 근 1년 양식에 해당하는 30엔을 받아 기어이 미네코에게 돈을 갚으려고 한다.
 여기까지 얘기하고 마는 건, 더 이상 조잘대는 주둥이를 건사하지 않으면 책의 내용을 송두리째 일러드리게 되기 때문. 얼핏 보면 참으로 대책 없는 인생을 사는 요지로의 어디로 뛸지 모르는 개구리 식 뜀박질이 아슬아슬하고, 산시로의 사는 방법이 답답해 가슴이 컥 막히기도 하지만, 사이에 그 둘을 절충해줄 아무런 쿠션도 소설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참으로 소세키다운 작품. 디테일한 성격 묘사와 인물들 간 서로 부딪는 사소한 감정의 파동을 섬세하게 찾아낸다. 소소한 재미가 참 그럴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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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3 10: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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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3 1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날 말이 돌아오지 않는다 민음의 시 101
김경후 지음 / 민음사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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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딱 보고, 남잔 줄 알았다. 시집 읽는 내내 그랬다가 후반부 가서 혹시 여자 아냐? 싶어 책 맨 뒤에 작가 약력 보니까 이화여자대학 독문과 나왔다. 그 학교가 남자한텐 학생 자격을 주지 않고(여태!), 찌질하게 그걸 남녀불평등이라고 고소한 남자가 있었는데 법원은 학교의 판단이 적법하다고 인정했으니까 틀림없이 김경후는 여자일 것이라고 결론 냈다. 이 책, <그날 말이 돌아오지 않는다>가 김경후의 처녀시집. ‘처녀시집’이라고 해서 김경후 시집의 처녀막이 찢어졌다고 주장하는 시인 김영승의 발상은, 영어로 말해서 그로테스크하다. 하, 그로테스크, 이 단어가 책을 읽는 내내 입 안에서 뱅뱅 돌긴 하는데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 거다. Grotesque. 그러다가 시집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 이런 시가 실려 있어서 무릎을 탁, 칠 수밖에.



그로테스크한 동화


염산비 검게 내리는 하늘
관들이 떠다닌다
가끔 흔들리는 뚜껑 떨어지고
썩은 나무관은
오래된 시체를 놓쳐버린다
쏟아지는 살과 얼굴을
꼬챙이에 꽂는 아이들
숲에선 그 살로 밀주 담그고
술 마신 사람들의 휘파람 소리
뱀을 불러모은다
따뜻한 눈과 입 속을 파고드는 뱀
위와 대장을 꽉 물어
항문 밖으로 끌어낸다
구불대는 내장은 아직 취해 있다
껍질만 남은 사람 속으로
어느새 모여든 나방들
잔뜩 알 낳고 낄낄거린다
새로 태어나는 나방은
죽은 사람의 피부를 가지고 있다
오래지 않아
하얀 주름 구더기가
거죽과 내장 나방 뒤덮는다
이즈음 걸죽해지는 시체
강으로 흘러간다
어린 소녀들 강가에서
까마귀 알을 품거나 관을 짜고 있다  (전문. 90~91쪽)


 어떠셔? 읽을 만한가? 시집에 실려 있는 많은 시가 그로테스크하다. 그래서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적응하기 어렵다는 건 전적으로 내 취향이고 기호이고 하여간 그런데, 이 시집에 관해서 좀 더 힌트를 드리자면, 위 전문을 써놓은 <그로테스크한 동화>는 그나마 독자가 이해하기 쉬운 시라는 거. 시집에 나오는 모든 시가 그렇듯, 이 시도 내려쓰기 할 때 앞에 적어도 한 칸 띄어쓰는 일반적 관습을 무시하고 있다. 그게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지만, 독자의 권한으로 분명한 오독誤讀을 하자면, 한 줄 한 줄을 각기 새로 시작하지 않고 시인이 속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들과 연속한 걸, 다만 문자로 쓴 것이다, 라고 오해해주기 바라서 원고지의 첫 칸부터 채워나간 것은 아닌가싶다.
 김경후의 시가 전부 이리 그로테스크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며칠 전 기형도를 이야기하면서 ‘추상이나 힘겨운 감상感傷의 암호’가 싫다는 취지로 이야기한 적이 있다. 불행하게도 김경후의 처녀시집에서도 이런 경향은 나타난다.



해 들지 않는 놀이터


난 이곳에서 태어났다
모래알갱이를 씹어먹고 모래무덤을 덮고
살았다 녹슨 철봉 냄새가 나는 입
끊어진 그네줄 같은 팔다리
아무도 이곳에 놀러 오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겨울
사람들이 찾아와 봄을 보여주겠다며
앞에 빌딩을 짓기 시작했다
그들이 다녀간 겨울 내내
난 얼어붙은 모래밭을 걸어다녔지만
내 발자국은 없었다 
(후략)


 예로 든 <해 들지 않는 놀이터>가 가장 추상이나 힘겨운 감상의 암호가 많은 작품이라 고른 것이 아니라, 책을 읽기 시작한 다음에 처음으로 눈에 뜨인 그래도 평이한 시라서 옮긴 것일 뿐이다.
 여기에 보탤 것은, 언어의 불통 혹은 역류에 대한 것이다. 별 볼 일 없는 독후감이 길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예시는 하지 않겠지만 말이 특정한 행위나 생각이나 현상, 또는 감정에 관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이해할 수 없는, 이해할 수 있다면 지극한 개인적 입장에서만, 지구인 가운데 글을 쓴 오직 한 명 또는 극소수만 뜻을 알아챌 난수표. 이것이 바로 앞에서 이야기한 ‘추상이나 힘겨운 감상’이 더해진다는 것. 그래서 “구멍을 뚫고 네 잠 속에서 나와버렸다 이제 그곳에 담배꽁초가 던져지고 네 몽정의 전 과정은 생방송 뉴스로 진행된다” (<잠> 9쪽)고 노래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하여간 이해하기 어렵고 사람으로 하여금 (하도 그로테스크해서) 읽기 짜증나고 간혹 혐오감까지 나게 만드는데, 이왕 그러려면 내가 좋아하는 영화 <델리카트슨 사람들>같이 좀 경쾌하기라도 하지, 참 감상하기에 난감하게 만든다. 그간 시하고 너무 오래 떨어져 살아서 그런지 적응하기 쉽지 않다. 이건 전적으로 시인 김경후 탓이 아니라 내 탓이다. 김경후와 그의 애독자에게 미안하다. 난 이 시집을 누구에게도 권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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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도칸 - 몸프라쳄의 호랑이들 열린책들 세계문학 47
에밀리오 살가리 지음, 유향란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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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고르는 방법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가, 재미있게 읽은 책 속의 등장인물이 재미있게 읽은 책을 선택하는 거다. 이 책 역시 움베르토 에코의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에서 주인공 얌보가 열광을 했던 책이라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고른 것이다. 이 책 <산도칸 - 몸프라쳄의 호랑이 : 이하 “산도칸”>이 에코의 그 책을 읽고 선택한 마지막 작품이다. 속이 다 후련하다. 어찌됐건 이제 <로아나…>로부터 해방이니까.
 근데 이 책은 선택하는 데 좀 더 신중했어야 했다. 왜냐하면 <로아나…>에는 늙은 얌보가 등장해 젊은 얌보도 아닌 어린 얌보를 회상하는 장면이 아주 길게 나오고, 그때 어린 얌보가 열광했던 책이 바로 <산도칸>이었던 거다. 어린 얌보가 자기만의 공간인 다락방에서 말레이시아 해를 무대로 무도한 해적질을 일삼은 가공의 폭력범 산도칸의 모험과 싸움과 전쟁과 사랑을 흉내 냈던 것을, 거의 50년 이상이 흘러 늙은 얌보가 회상하는 장면이었다.
 열린책들 세계문학전집에 <산도칸>이 있다는 건 벌써부터 알았던 터이며, 여러 경로로 그건 인생살이 오래 산 인간들은 별로 읽을 만하지 않다는 얘기도 벌써부터 들어왔기에 일찍이 목록에서 제외시켜온 책이었던 걸, 잠깐 미쳤었나봐, 잊었던 거였지 뭔가. 살다보면, 책 좀 읽다보면 이런 일도 생긴다. 본문만 418 쪽. 굳은 마음으로 딱 절반 209쪽까지 읽고 도저히 더 이상 읽어줄 수 없어 그냥 때려치웠다. 뭐 이딴 책을 내고 그래, 라고 출판사 열린책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열린책들의 세계문학 시리즈는 장르를 불문하고 재미있을 거 같다하면, 말을 조금 바꿔 할 경우, 좀 팔릴 거 같다하면 별 생각 없이 시리즈에 포함시키는데 이게 가끔 대단한 매력이 되기도 하고 <산도칸>처럼 똥 밟기도 하고 그런 거니까. 다 그런 거지 뭐.
 책 속의 주인공 산도칸. 영국 군대에 의하여 부모 형제가 학살당해 가상의 나라를 뺐기고 피신한 그는 회교도의 미덕인 복수를 하기 위해 용감무쌍한 해적이 된 인물. 당연히 큰 키에 잘 생기고 피부색 조금 까무잡잡하고 용기 있고 힘 무지 세고, 돌격형 인물, 즉 앞 뒤 생각 안 하는 단순무식형 인간으로 더할 나위 없이 친한 친구, 포르투갈 사람 야네스의 현명하고, 유머있고, 재치까지 있으며 좌우 상황판단 빠른 조언이 아니었다면 죽어도 벌써 백여 번은 죽었어야 하는 주인공이다. 작가 에밀리오 살가리가 이탈리아 사람이어서 당연히 이탈리아 언어로 책을 썼기 때문에 규격적이고 엄격한 영국인 장군 삼촌 아래서 자란 ‘라부안의 진주’라고 불리는 여주인공 마리안나는 엄마가 이탈리아, 아버지가 영국인인데 조실부모하여 삼촌에 의탁, 말레이시아까지 흘러든다. 이야기책에 나오는 사랑은 흔히 초상화 한 번 보고 맛이 가게 반하는 거 등등 아주 우습게 사랑에 빠지는데 여기서도 진짜로 묘사를 했듯이 단도 하나 가지고 말레이 범을 때려잡는 우리의 영웅 산도칸은 라부안의 진주라 불리는 여성이 매우 아름답고 노랑대가리에 파란 눈알을 하고 있다는 말만 듣는 것으로 여자를 좋아할까 말까 심각하게 궁리하고 급기야 수십 명의 부하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모험을 하면서까지 기어이 여자를 만나, 마리아나 눈앞에서 <수호전>에 나오는 송나라 무송武松처럼 범을 때려죽임을 계기로 사랑을 얻고 만다. 아주 전형적인 소년 소설의 주인공들 아니냐.
 무수한 사상자를 낸 전투에서 오직 하나 살아남는 거, 산도칸을 포위한 수십 명의 영국 정규군을 유유히 따돌리고 탈출에 성공하는 건 말 그대로 껌이고, 무시무시한 태풍을 뚫고 항해하는 그런 이야기, 도저히 읽어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반 까지만 읽고 진도를 더 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기로 했고, 딱 반 지점에 와서 책 덮었다.
 당신의 정신이 초등학교 고학년 수준이면 정말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 신중하게 생각하여 선택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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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노 열린책들 세계문학 27
에드몽 로스탕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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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드라마는 읽지 않으려고 했다. 프랑코 알파노가 작곡한 오페라 <베르주라크의 시라노 Cyrano de Bergerac>가 충분히 재미있었고 그 정도의 대본이라면 더 이상 재미있는 극작이 거의 가능하지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근데 역시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을 읽으면서 마지막 1/4 부분은 온통 <시라노>에 대한 이야기로 도배를 해놓아 이건 분명히 내가 모르는 뭔가가 원작 안에 있다, 라고 판단했다. 그래 정말로 읽어보니 그랬다. 있었다.
 오페라 대본을 쓴 앙리 캐Henri Cain는 확실히 원작의 핵심 부분을 정확하게 포착, 축약하여 대본을 만들었으나, 무대에서 관현악 음악을 배경으로 노래해야 하는 전달 상 시간의 한계로 인해 디테일을 몽땅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뭐 <시라노>만 그런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오페라 대본이 마찬가지기는 하다. 근데, 오페라를 충분히 만족하며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본의 원본인 에드몽 로스탕의 희곡을 읽어보니, 아니다, 그건 아니었다. 이 작품은 반드시 원본도 읽어봐야 한다고 주장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고, 움베르토 에코가 자신의 작품 <로아나…>에서 쉴 새 없이 <시라노>를 언급할 만큼의 울림이 있었다.
 일단 스토리 먼저 소개.
 가스코뉴 지방 출신의 카데(귀족의 장자가 아닌 아들이 병졸부터 하급사관까지의 계급으로 복무하던 병사)들로 된 군대의 기사 시라노. 하늘은 시라노에게 튼튼한 육체와 민첩한 반사 신경, 둘을 합해서 선천적 결투와 싸움의 능력을 허여했다. 동시에 놀라운 시적 재주와 그 비슷한 예술적 정열까지 몽땅 주었으나, 공평하게도 어마어마한 코를 얼굴의 한 가운데다 배치함으로써 지독하게 못생겼다는 평판을 얻게 했다. 원래 저 희랍시대부터 신들이 하는 짓거리가 다 그랬듯이. 그래서 시라노 하는 일이란 무턱대고 정의파, 용맹과감, 우스운 시적 찬가 등인데 무대가 17세기 초반이라 이런 과한 낭만적 시도는 숱하게 적들을 만들어놓고 만다. 이 기운 센 천하장사, 부르고뉴 성곽에서 (과장이 있겠지만) 무려 백 명을 단기필마로 거꾸러뜨리고 마는 검술의 신공을 자랑할 정도라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수준.
 아무리 못생겨도 한 여인을 사랑하지 말라는 법은 없어서 동네 최고의 미녀이자 사촌동생인 록산을 사랑하는데, 하늘이 선물한 시적 능력을 총동원해 근사하고 근사한 연애편지를 써서 사랑을 고백할 찰나, 아, 록산이 먼저 자신의 짝사랑을 고백하며, 금발의 돌대가리 미남 크리스티앙이 시라노의 부대로 전입했으니 잘 봐달라고 하는 거다. 자신이 못생겼음을 잘 알고 있는 시라노는 표정 하나 드러내지 않고, 알았다고 잘 봐주겠다고 약속을 해버린다. 크리스티앙에게 연애편지를 써서 보내달라는 록산의 부탁을 전하자, 생기기만 잘 생겼지 싸움도 못하고 시적 재주도 없는 크리스티앙이 기겁을 하자 시라노는 기꺼이 자신이 쓴 연애편지를 건네주고, 앞으로 크리스티앙의 외모와 자신의 문학적 소양으로 록산을 대하기로 결정을 한다. 물론 록산은 전부 크리스티앙의 재능으로 오해하고.
 그리하여 어느 달 없이 깜깜한 밤, 록산의 발코니에 걸쳐놓은 사다리 아래서 크리스티앙의 목소리를 흉내 낸 시라노가 열정적인 사랑의 고백을 하고, 이에 감격한 록산이 껌벅 넘어갔으나, 정작 사다리를 타고 올라 키스로 불태우는 인간은 크리스티앙. 사다리 아래서 그 꼴을 봐야했을 시라노의 복장은 어땠을까. 쓰라린 심정이야 말로 해서 뭐할까.
 

 이 장면, 유튜브에 있어서 따왔다. 비록 늙었지만 프라치도 도밍고. 발성에 대한 호오는 별개로 하고 하여간 노래 하나는 심금을 울린다. 즐감!

https://youtu.be/FayZ63koKJ8


 그러다 이들은 진짜 전쟁에 나가야 했는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하는 시라노에게 록산이 하는 말이라니.
 “오! 그를 당신에게 맡길게요! 그 무엇도 그의 목숨을 위험에 처하게 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 줘요!”, “애써 보겠소… 하지만 약속할 수는 없소.”, “그가 신중하게 행동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해 줘요!”, “그러도록 노력하겠소. 하지만…”, “약속해 줘요, 그 끔찍한 포위전에서도 그를 추위에 떨게 하지 않겠다고!”, “최선을 다하겠소. 하지만…”, “결코 날 배신하게 놔두지 않겠다고!”, “물론 그러겠소! 하지만…”, “나에게 자주 편지를 쓰게 하겠다고!”, “아, 그건 분명히 약속하겠소!”
 시라노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참호 안에서 열라 연애편지를 크리스티앙의 이름으로 써서 새벽마다 포위하고 있는 스페인 병사들을 뚫고 록산에게 보낸다. 굶주림에 처한 병사들 앞에, 스페인 장교의 기사도 정신을 이용하며 과감하게 식량을 가득 실은 마차를 타고 도착한 록산. 크리스티앙의 이름으로 시라노가 보낸 편지에 감동하여 여기까지 온 거다. 그리고 크리스티앙한테 당신이 보낸 편지가 자신의 심장을 녹여 이런 무모한 짓을 하게끔 만들었다고 고백한다. “록산, 사랑하는 록산느. 만일 내가 잘생기지 않았더라도 사랑했을 거요?”, “그럼 얘기하면 뭐해요. 당근이지요. 당신의 마음을 담는 그릇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모르시는 거예요?”, “다시 묻겠는데 내 외모가 노트르담의 콰지모도 같이 생겼어도 날 사랑했을 거냐고.”, “아 그렇다니까 남자가 왜 자꾸 물어보고 그래요, 내 사랑! 날 감동시킨 당신의 편지들이 내 몸과 마음을 다 녹여버렸다니까.” 크리스티앙의 옆구리로 슬쩍 다가온 시라노가 마지막 편지를 그의 호주머니에 질러 넣는 것을 록산은 보지 못했고, 그녀가 진심으로 사랑한 것은 자신의 외모가 아닌 시라노의 시적 재능이란 걸 확실하게 이해한 크리스티앙은 갑자기 핑, 돌아 때마침 시작한 적들의 공세에 무모하게 돌격 앞으로, 숨을 거두고 만다. 그의 주머니에서 나온 마지막 편지. 눈물과 크리스티앙의 피가 물든 편지. 그것이 하도 아름답고 심금을 울려 록산을 편지를 가슴에 넣은 채 수녀원에서 무려 15년 동안 크리스티앙만 생각하며 상을 치룬다.
 일주일에 한 번 씩 들러 친구로서 록산을 위로해온 시라노. 어느 날, 적들에게 통나무로 뒤통수를 얻어맞아 거의 죽게 된 상태로 수녀원을 방문해 록산과 이야기를 하던 중, 록산이 크리스티앙의 마지막 편지를 건네주고 읽어보라 하는데, 날은 어느새 어둑어둑하다가 드디어 글자 한 자 읽지 못할 상태. 그러나 시라노는 편지를 줄줄 읽어 내려가고, 드디어, 15년 만에 록산은 편지를 진짜로 쓴 사람이 크리스티앙이 아니라 시라노였음을 알아채지만 이미 그는 록산의 앞에서 죽어간다.
 재밌겠지. 그래서 영화 <시라노 연애 조작단>이 생기는 거다. 생기기만 멀쩡하지 재주라곤 하나도 없는 크리스티앙 같은 이들을 도와 연애를 하게끔 조작하는 직업이 바로 ‘시라노 연애 조작단’. 하여간 말들은 참 잘 만들어.
 오늘 스토리를 다 소개한다고? 암. 드라마는 스토리를 알고 작품을 읽어야 제 맛. <햄릿>과 <리어 왕> 스토리 다 알고 책 읽어야 더 재밌는 거. 맞지? 그래야 자신이 알고 있는 바로 그 순간을 어떤 대사로, 어떤 모습으로 표현을 했구나! 깜짝 놀라는 것이다. 이 책도 그렇다. 위에서 대충 이야기한 내용을 참 재미나게 생긴 극작가 에드몽 로스탕은 어떻게 표현했을까. 다른 건 모르겠고 하나만 말한다. 정말 죽여줘.

 

 


 작가 에드몽 로스탕의 재미난 외모. 보여드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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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모른다
정이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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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은 아래와 같은 첫 문단으로 시작한다.


 “시체가 발견된 것은 5월의 마지막 일요일이었다. 비둘깃빛 가운을 부대자루처럼 뒤집어쓴 성가대원들이 직사광선 내리쬐는 교회 뒤뜰에 줄지어 앉아 2부 예배 때 부를 찬송을 연습하는 시간, 지난 밤 처음 만난 연인들이 숙취 때문에 지끈거리는 관자놀이의 통증을 애써 무시한 채 뜨겁고 어색한 두 번째 섹스를 나누는 시간, 조기축구회 유니폼을 입은 이기적인 가장들이 넓적다리와 정강이 근육을 조였다 풀었다 하면서 중학교 운동장을 달리는 시간이었다.”


 <오늘의 거짓말>, <달콤한 나의 도시>에 이어 세 번째로 읽은 정이현. 앞의 두 권을 읽으면 소설이 시체를 발견한 장면만 빼면, 위와 같이 시작하는 것이 낯설지 않다. 2부 예배를 앞둔 교회 성가대가 찬송가 연습을 하는 것이 일요일 몇 시나 되나? 아, 나의 이 지겨운 버릇. 이거 검색해봤더니 교회마다 다르다. 하느님 말씀이 사업 번창하는 교회의 주일 2부 예배는 대강 9시나 9시 30분이고, 상가 2층 빌려 개업한 개척교회 같은 데선 11시. 지난 밤 처음 만난 연인, 어제 밤에 처음 만났는데 벌써 연인? 아니겠지, 원 나잇 스탠딩 파트너라고 하는 편이 솔직하겠다. 어찌됐던 숙취에 시달리는 심신을 한 번 더 불사르기로 작정하는 시간이라니 9시 정도도 좀 늦겠는데 늦봄 5월의 햇살이 아침 아홉시에 벌써 직사광선으로 내리쬘까? 직사광선이라 할 정도로 내리쬐려면 11시는 돼야하는 거 아냐? 조기축구회 유니폼을 입은 “이기적인 가장(새끼)들”이 운동장 둘러서서 스트레칭을 하는 시간이면, 9시도 늦을 거 같고. 도대체 몇 시야, 그놈의 2부 예배 시간이. 외할머니 손잡고 마지막으로 감리교 교회 가본 것이 벌써 반세기가 넘어 도무지 모르겠다.
 독후감 초장부터 왜 이리 초를 치냐 하면, 첫 문장으로 보시라. “시체가 발견된 것은 5월의 마지막 일요일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소설은 서초동 서래마을 쯤으로 보이는 동네의 70평이 넘는 비까번쩍한 복층 빌라에서 바이올린 국가대표를 꿈꾸는 꿈나무의 실종사건을 다루고 있어, 내용과 관계없이 일단 추리소설의 외형을 쓰기로 작정을 한 작가는, 나처럼 발랑 까진 독자는 애초부터 사건을 추리할 수도 있는 상황이 나오면 전심을 다해 다음 사건과의 연계성을 궁리한다는 걸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특히 추리소설의 경우 주요 사항에 관해서는 안 썼으면 모를까 일단 말을 했으면, 적어도 시간 단위까지 정확하게 알려주고 독자와 대결duel해야 공평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힌트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책이 끝난 다음에 독자가 아하, 그렇구나, 그랬구나, 몰랐네! 무릎을 탁, 치면 훌륭한 추리소설의 관을 쓰게 되는 것 아니겠는가. 소설 안에선 추리소설의 단골 등장인물인 사설탐정 문영광 또는 제임스 문까지 등장시킴에도 불구하고, 가족 간의 소외와 고독을 다룬 심리소설이 분명하지만 이왕 추리소설의 외피를 입히려고 했으면 마땅하게 그랬어야지, 하는 것이 첫 번째 불만.
 두 번째 불만은 작가의 전작 <나의 아름다운 도시>에서도 말했다시피, 기성세대의 남성에 대한 깊고 깊은 미움이 이 책 시작하자마자 등장하는 것이 싫었다. 일요일 새벽같이 나가, 비둘깃빛의 부대자루를 입고 1차 예배에 이어 2차 예배의 찬송도 부르고, (요즘은 교회에서 밥도 준다며?) 하루 종일 하느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건 괜찮고, 일주일 내내 늦은 퇴근, 아니면 자영업 사장질 등 고단한 경제활동을 하다가 건강을 위해 (자기가 좋아하는 운동이 됐건, 영원무궁토록 처자식 먹여 살리기 위한 건강 유지의 방법이 됐건) 조기 축구회 나가 허벅지 근육 운동하는 것들은 졸지에 “이기적인 가장”으로 만드는 거다. 생각 좀 해보시라. 다 늙어 짜글짜글한 주름이 좍 깔리고 정수리 머리숱이 다 빠진 중늙은이들이 진짜 기쁨에 벅차, 아이 좋아, 아이 좋아 하면서 땀 뻘뻘 흐르는 대머리로 헤딩해가며 일요일마다 중학교 운동장을 기어 다니겠는지(다 늙어 이젠 젊은 시절에 비하면 뛰는 게 아니라 기어 다니는 수준). 정이현이 어떤 가정환경에서 성장했는지는 모르지만 진심으로 바라노니 스스로 소설에서 묘사하는 가정 비슷한 경험은 해본 적이 없기를 바란다. 물론 악역을 하나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 누구에게 역할을 시켜야 할까를 떠올리면 가족 구성원에서 돈 벌어오고, 나이도 제일 많아 일단 서열 상 제일 꼭대기에 있으며, 그만큼 (똥 같은) 권위도 있는 줄 착각하는 아버지가 제일 만만하겠지. 근데 그것도 한 두 번이지 매번 그러니까 꼭 아버지한테 큰 원한 있는 여자인 것처럼 보인다는 말씀. 그리고 좀 더 성장한 소설가가 되려면 어렵더라도 생각을 좀 바꿔야지 이게 뭡니까, 만날 똑같은 사람한테 똑같은 배역을 주고 말이야. 이 소설에서도 아버지 김상호는 성질 더럽고, 성격 급하고, 돈만 많이 벌어올 뿐 가족 성원에 관한 조금의 관심도 없고, 돈도 분명히 범죄 비슷한 부정한 방법으로 만들어 오는 것으로 상정해 놨다. 아버지가 없었으면 애초에 이 작품이 추리소설의 외형을 띨 수 없었을 것.
 첫 문단을 읽고 나도 당연히 추리소설인줄 알았다. 솔직히 말해선 추리소설을 가장한 작가 특유의 발칙한 이야기를 기대했다. 그녀의 전작을 미리 읽어봤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이지 내가 잘났단 얘기 절대 아님. 그래서 촉각을 바짝 세우고 (추리소설일 수도 있으니)처음부터 2부 예배시간, 술 취한 연인(이라고 할 수도 없는 그냥 헤픈 남녀)이 아침에 잠에서 깨 모텔비 아까워 한 번 더 하는 시간, 조기축구회원들이 스트레칭 할 시간 등을 유심히 계산했던 터. (이렇게 소설책 읽는 내가 나도 싫다) 그러나 이 작품은 위에서 얘기했듯이 분명히 심리소설이다. 아버지 김상호, 큰딸 김은성, 아들 김혜성. 소설에 출현하지는 않지만 큰딸과 아들의 친엄마 강미숙, 새엄마 진옥영. 이복동생 김유지. 감잡히시지? 강미숙이 딸 김은성을 임신한 상태에서 애 아빠 김상호와 결혼한 다음 은성을 낳고 은성이 혼자 적적할까봐, 라는 유일한 이유로 아들 혜성을 또 낳은 후에 이혼했다. 아이들 대가리 다 큰 다음 아버지는 다시 이복누이동생 김유지를 임신한 진옥영과 재혼했다. 친엄마는 이혼 후 곧바로 재혼해버리는 바람에 애들은 외할머니와 이모할머니 아래서 크다가, (엄마는 또다시 이혼하고) 외할머니 돌아가신 다음에 은성은 친엄마하고 살고 혜성은 아버지와 새엄마하고 살기로 결정한다. 그러다 친엄마가 다시 삼혼을 해 이제 은성은 학교 앞에 원룸을 얻어 혼자 산다. 결혼 후 곧바로 새엄마가 낳은 유지가, 열 살이란 최연소로 바이올린 영재 프로그램에 합격한 상태에서 책은 시작한다.
 악역을 맡은 김상호는 당연히 가정 내에서 폭군으로 군림하지만 다행스럽게 폭력을 행사하는 우악스런 악당은 아니다. 대한민국 부촌 가운데 한 곳인 서래마을에 살면서 딸아이에게 대학교수, 대학원생으로부터 두 종류의 바이올린 레슨을 시키면서도 아내의 충동적인 구매욕까지 충족시키며 동시에 큰딸의 난데없는 액수의 용돈요구까지 몽땅 들어줄 수 있는 수입을 올리는 자랑스런 아버지. 그러나 거기서 끝. 넘쳐나는 돈이 어디서 나오는지 가족 구성원 가운데 아는 사람은 없다. 독자는? 당연히 알게 된다.
 진옥영은 차분하면서도 강인한 여성으로 화교출신 한국인. 김상호와 결혼을 통해 한국인이 됐다. 가끔 친정이 있는 대전에 다녀온다면서 엉뚱하게 타이베이로 날아가 대만국립대학에 다닐 때 사귄 첫사랑 왕밍과의 밀회를 하는 비밀을 품고 산다.
 큰딸 김은성. 대책 없는 여자. 술과 남자 없으면 세상사는 재미를 알지 못하는 족속. 술김에 친구들에게 돈 많은 집 막내딸, 자기 이복누이를 납치해 몸값으로 3억쯤 뜯어내자고 제의한 적이 있다는 걸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못하는 철딱서니 실종된 헤픈 아가씨.
 아들 김혜성. 유명대학의 의과대학에 합격하고 1학년 1학기 다니다가 학기말 시험 시작할 때부터 학교만 끊어버린 채(현대과학이 준 선물 포토샵으로 등록금 액수는 팍 부풀려 아버지한테 청구하는 건 잊지 않고) 만 스무 살에 이른 청춘. 의예과에서 미등록으로 제적당했을지도 모른다는 거, 거의 중독 수준으로 차량 연쇄방화를 즐기는 취미를 갖고 있다는 건 가족들은 물론 애인 다희도 모른다.
 막내딸 김유지. 열 살 먹은 꼬맹이가 바이올린도 기막히게 연주하고, 학교에서 비록 따를 당하지만 소위 왕따가 아니라 스스로 따를 자처하는 독립군. 비록 대단히 작은 울타리지만 자기 나름대로 세상과 소통하며 그들과 공통의 즐거움을 나눌 줄 안다는 거, 하다못해 엄마도 모른다.
 이렇게 가족 구성원은 아무도 자기의 비밀을 털어놓지 못하고 각자의 네모난 방, 주먹처럼 생긴 심장 속에서 살고, 생각하고, 확장하고, 비비적거린다. 깊고 깊은 속엔 서로가 서로를 아끼는 애정이 충만하지만 그딴 걸 내놓는 방법도 모르고 그렇게 하려고도 하지 않는, 마주하기만 하면 서걱거리는 모래알 상태. 난데없이 어느 날 발생한 비극적 사건을 통해 가족들은 비로소 봇물처럼 터진 가족애와 사랑을 확인하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을 수 없는 비극.
 에이, 뭘 이리 길게 말하나. 가족 간의 소외와 고독을 그리고 있다는 얘기다.
 근데 이런 얘기면 정이현이 즐겨 사용하는 전래의 방법을 썼어야지. 추리소설의 형식을 새로이 시도한 것은 좋았는데 딱 거기까지만 좋았다. 작가는 책의 마지막 ‘작가의 말’을 통해 “진심을 다해 썼고, 세상에 내놓는다. 그것이 전부다.” 라고 했다. 이거 역시 당연한 얘기. 진심을 다해 쓰지 않는 작가가 있어? 세 명만 꼽아보시라. 누가 있나. 다 진심을 다해 쓰는 거다. 그게 소설가의 숙명이니까. 문제는 쥐뿔도 모르는 독자가, 아 이 저자는 진심을 다해 글을 썼구나, 하고 알아줄지 아닐지에 달려있는 것이다.
 전적으로 내 생각을 얘기하자면, 맞지 않는 옷을 입었다. 책 뒤표지에, 누군지 짐작하시지? 한심한 표절녀의 추천사 비슷한 게 씌어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다른 방식, 정이현이 즐겨 사용하는 도시적 감상으로 작품을 썼다면 훨씬 더 좋았을 것을. 이젠 됐다. 정이현,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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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10-17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저도 언급하신 첫 문장 지금 이 포스팅을 통해 읽으면서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아침 예배 시간이랑... 모텔에서 연인(?은 개뿔.무슨 연인이러면서 생각)들이 두 번째 응응 할 때랑. 조기 축구 시간이랑 이상하다 안 맞는데??? ㅋㅋㅋ 일단 섹스는 아무때나 할 수 있다 칩시다. 그런데 성가대 노래 부를 때 시간이랑 조기 축구(진짜 아침 일찍 하던데요??) 시간은 영 안 맞아요. 안 맞아. 암튼 그렇고- 한심한 표절녀 ㅋㅋㅋㅋㅋ 문학동네에서 나온 책인가 하고 찾아보니 역시 그렇군요. ㅋㅋㅋㅋ

Falstaff 2017-10-17 10:46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아무래도 이상하죠? 뭐 어쩔 수 없습니다. 정이현은 이 책을 ˝진심을 다 해˝서 썼다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