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느질하는 여자
김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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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숨이 쓴 <바느질하는 여자>를 숨 가쁘게 읽었다. 오랜만에 읽은 아름다운 소설. 남자는 죽어도 쓰지 못하는 서늘하고 엄정한 미학. 영원히 끝나지 않는 담배씨만 한 한 땀 한 땀을 무한하게 계속해야 하는 천형의 바느질. 누비. 책을 넘겨 처음 부분을 읽으면서 마치 최명희의 <혼불> 1부 도입부를 보는 것 같은 낯섦과 흥미를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의식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서늘한 서술. 이것이 놀랍게도 첫 장부터 마지막 630쪽에까지 균일하게 깔려있다. 바늘 가운데서도 가장 작은 누비바늘에 자신의 생애와 삶을 거느라 충만과 행복과 사랑을 포기하는 세 모녀 이야기.
 1974년생 작가가 바느질과 수의를 포함한 한복과 옷감에 관하여 숱하게 많은 사람들과 책에 신세를 져 잘 빚은 자기 같은 작품.
 주인공이자 바느질하는 여자인 수덕. 이이는 경주 인근의 농촌 동네에서 오직 누비옷을 만들어 파는 것을 업으로 성姓이 다른 딸 둘을 키워낸다. 누비바느질이 수덕이고, 수덕이 누비바느질. 큰 딸 금택이 아홉 살, 작은 딸 화순이 일곱 살 때 삼륜차의 속명이었던 ‘딸딸이’를 타고(작가가 차종을 혼동한 것이 틀림없다. 아무리 없는 살림이라도 삼륜차를 몰고 하루 종일 운전해 이삿짐을 옮길 수는 없었으리라. 차 성능이 그렇게 안 됐다는 얘기다.) 농촌 마을의 빈집이자 앞으로 세 모녀의 온 생을 바칠 ‘우물집’으로 이사를 하는 것으로 긴 이야기는 시작한다. 내성적이고 어머니에게 복종하며 바늘에 관한 집착이 심하지만 바늘은 언제나 자기로부터 빠져나가는 금택. 반면에 선천적인 손재주가 번뜩이지만 바늘과 바느질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 화순. 이들을 언제나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만 보고 있는 어머니. 어느 날, 자매가 집 마당에서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을 때 어머니가 아이들을 불러 자신의 작업실이자 방 자체가 어머니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서쪽 방에 들여, 누비 바늘 하나씩을 건네준다.
 바늘. 바늘의 속성은 찌름이고, 찌름으로 인한 상처, 상처에서 딸려 나오는 양귀비 색 피, 이런 것들을 다 합해 싸늘한 잔인함 또는 긴장. 작은 딸 화순은 바늘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해 그냥 책상 위에다 휙 던져놓지만, 금택은 진심으로 갖고 싶었으나 함부로 손에 넣을 수 없다고 생각해왔던 귀한 것이라 가슴에 ‘바늘’을 안고 자다 자신의 왼쪽 젖꼭지를 찔러 가슴에 모란꽃 한 송이를 피워버린다.
 이후 팽팽하게 이어지는 성이 다른 자매 사이의 갈등과 그걸 번히 알면서도 바라보고 있기만 하는 어머니 사이의 트라이앵글. 원래부터 세 명이 만들어가는 화음은 서로가 서로에 대한 투쟁으로 이어질 때 가장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내는 것. 단언하니, 김숨의 <바느질하는 여자>에서 우리는, 아니, 나는 근래 가장 아름다운 트리오, 가장 절묘한 삼중주의 투쟁과 화해와 조합과 견제와 염탐과 배려와 조화와 침잠을 보았다.
 정말 아름다운 소설.
 그러나 안타깝게도 김숨의 주변엔 책으로 만들어 나오기 전에 꼼꼼하게 읽어줄 사람들이 없었나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건, 시간적 배열에 관해서 일목요연하게 줄을 세우는 데 작가는 재주가, 없어도 그냥 없는 게 아니라, 치명적일만큼 없기 때문이다. 스토리를 이어서 만드는데 정말 섬세하고, 아름다운 씨줄과 날줄을 엮을 줄만 알았지, 세부각론으로 들어가면 구조가 완전히 망가지고 마는 현상이 벌어진다. 이런 작가들에겐 작품을 발표하기 전에 미리 읽어보고 앞뒤 연결에 관해 지적해주는 사람의 존재 여부가 상당히 중요하다.
 뭘 가지고 그러냐고?
 책을 읽는 내내 노트북 켜놓고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을 메모해놨는데, 노트북을 켤 수 없었을 때를 빼고도 A4 용지로 두 장이 넘어간다. 예를 들어보자.


 제일 먼저 단박에 알 수 있는 것. 자매의 나이 차.

 “금택은 열 살, 화순은 여덟 살 되던 해 학교에 들어갔다. (147쪽) 한 살이 어렸지만 화순은 금택보다 키가 한 뼘 정도 더 컸다. (210쪽) 1961년 소띠생인 금택과 1962년 범띠생인 화순 자매까지 삼대에 걸친 여자들이 모여 살았다. (455쪽)
 
 “경주에는 예비고사장이 없었기 때문에 화순은 도청이 있는 대구까지 나가 예비고사를 치렀다.”(297쪽)
 → 1962년 2월생이 예비고사를 마지막으로 본 이들이다. 화순의 생일이 빨라서 예비고사를 봤다고 치면 소위 80학번. 그러나 대학 다니면서 박정희가 죽고 학살이 일어났으며 통금이 없어졌다. 즉, 아무리 늦어도 79학번은 돼야 한다. 물론 여덟살에 국민학교에 들어간 화순은 아무리 빨라야 81학번이라서, 예비고사도 못 치뤘겠지만.


 “그녀들 중에는 조선 말기 명성왕후가 시해되던 해에 태어난 이도 있었다. 복례한복에 옷을 맞추러 올 때마다 금택과 화순에게 갈색 일제 캐러멜을 쥐어주던 그녀는, 백 살이 코앞이라고 했다.” (81쪽)
 →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은 1895년. 그럼 이 이야기를 하는 시점은 적어도 1990년은 돼야 하는데 아쉽게도 1960년대 어느 날이다.


 "‘서울 사대문까지 소문난 한복집이라고 큰올케가 입이 닳도록 칭찬을 해서 5천 원이나 주고 맞추어 입지 않았나. 뭔 누비저고리가 북어포도 아니고 뻣뻣해서 입을 수가 있어야지.’(82쪽)
 → 시기가 60년대 말. 당시 5천 원이면 4급(요새 7급) 공무원 석 달 봉급보다 많다. 지금 돈으로 약 800만 원. 이게 손바느질도 아니고 재봉틀로 박은 누비저고리 값이라면, 오버다.


그즈음 티브이에서는 이산가족 찾기가 한창이었다. (476쪽)
 → 이산가족 찾기는 1983년. 시점은 한참 후.


 열아홉 살 되던 새 서울로 올라온 (중략) 국밥집으로 들어가 국밥을 시켰다. 10원짜리 동전 같은 기름이 떠다니는 국물을 허겁지겁 떠먹으면서, (후략) (588쪽)
→ 그녀 수덕은 1941년 생. 열아홉 살 때면 1959년. 당시 10원짜리는 동전이 아니라 지전이었다.


 부령할매 첫 아이 죽어서 묻은 아기묘에 관한 이야기. 거기 갔다 온지 70년 됐다는 얘기 (p.602~605)
 → 이야기하는 시점이 1963년. 맏아들 죽은 게 70년 전이면 1893년. 부령할매 참 참 참 오래 살았다. 이제 겨우 스무살 넘은 둘째 아들이 있으니.


 그러나 무참한 심정을 금할 수 없는 건 바로 이 대목이다.


 “1963년인 그해, 수덕은 스물세 살이었다. 43년 전인 그해는 파독 광부 128명이 첫 출국을 한 해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첫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기도 한 해로, 미국에서는 대통령 케네디가 암살을 당했다.”
 “‘미국 대통령이 암살당했대요.’ 그녀(수덕)는 나풀나풀 흔들리는 녹원삼 너머로 향하는 눈길을 바늘로 끌어당겼다.” (600쪽)


 이것이 남수덕, 두 자매의 엄마가 녹원삼 너머의 남자와 관계를 해서 임신을 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큰 딸이 1961년생이고 작은 딸이 1962년 생. 뭐 61년, 62년도 믿기 힘들긴 하지만 그렇다는 말이다.


 이거 말고도 무지하게 많은데(PC에 메모한 것의 반의반도 인용하지 않았다) 그걸 어떻게 다 여기에 옮길 수 있겠나. 하여간 참담한 수준이다. 이 정도면 작가는, 그의 섬세한 문장 엮기 실력은 논외로 하고, 애초부터 ‘수열’을 구성하는 뇌의 발달에 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근데, 재주 없으면 메모지에 써서 PC 옆에다 붙여놓고 소설을 쓰든지 하지 이게 뭐냔 말이다. 문학과지성사에서 봉급 받아먹고 교정, 교열하는 인간들도 도대체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고. 혹시 싼 맛에 서울 마포구의 중학교 다니는 외국인 학생한테 알바시킨 거 아냐?
 정말 섬세하게 힘들여 책 쓴 김숨.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게 불쌍한 만큼, 자신이 쓴 거 눈알이 빠지게 퇴고하지 않는 나쁘고 나쁘고 또 나쁜데다가 다시 한 번 더 강조해서, 나쁘기 그지없는 버릇은 반드시 고쳐야 할 것이다(서재 동무님들은 아시리라. 내가 지금 얼마나 말을 순하고 예쁘게 하고 있는지). 김숨. 당신도 알지?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를 50번 넘게 다시 고쳐 썼다는 거. 당신이 톨스토이보다 더 위대한 작가는 아니잖아.
 정말 아쉬운 책이다. 김숨의 환상적이고 절묘한 형용사, 형용구, 형용절(이런 것이 있다면) 등을 감상할 수 있는 작품. 저 까마득한 바늘 침 위 아득한 벼랑 위에 선 여인들의 비의를 이처럼 아름답게 묘사하다니. 그것만 따지면 나는 이 책을 올해 발견한 가장 훌륭한 한국문학으로 꼽을 수 있겠다. 그러나 소설은 정연해야 하는 산문. 위에 적어놓은 숱한 에러. 그것들을 무릅쓰고 이 책을 다른 이에게 추천할 수 있지는 아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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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남기철 옮김 / 이숲에올빼미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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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에 츠바이크가 쓴 <초조한 마음>을 읽어보고 글, 스토리를 재미나게 만드는 작가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주로 전기傳記작품을 많이 쓴 츠바이크이며, 내가 전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이이를 읽을 기회가 별로 없어서 그랬는지 유독 작품이 눈에 띄지 않기도 했다. 그래도 이름은 늘 기억해두고 있던 사람. 쇼핑 중에 이이의 이름이 딱 올라와, 그것도 전기가 아니라 소설작품이,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골라 사서 읽었다.
 세계사에서 음악, 미술, 문학 등의 예술분야에 탁월한 성과를 낸 민족, 유대인을 조상으로 둔 사람. 디아스포라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 유대인의 최고 업적 가운데 가장 눈부신 결과물이 혹독한 고리대금업이어서 그랬나, 이 머리 좋은 종족에 대하여 한 무리의 미친 독일인들이 앞에 나서 돌이킬 수 없는 학살을 꿈꾸던 것이었다. 학살 또는 학살의 예비단계가 곧 진행되리란 걸 눈치 챈 츠바이크는 아내를 데리고 런던을 거쳐 브라질에 정착했다가 자신이 태어나 자라고 교육받고 글도 쓰고 사랑도 하고 결혼까지 한 유럽을 향한 향수를 이기지 못해 아내와 함께 동반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독특한 캐릭터의 소유자다. 자신이 유대인이긴 하지만 건전한 오스트리아 국민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아 1차 세계대전에 (문서보관소에서 문서병文書兵으로)참전한 경력까지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국’ 오스트리아와 ‘고향’ 빈은 유대인 츠바이크를 받아주지 않았다. 아무렴. 하다못해 아인슈타인도 받아주지 않은걸 뭐. 하여간 스스로 유럽인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은 츠바이크, 그가 쓴 <크리스티네…> 역시 소설의 처음과 끝까지 유대인 또는 유대인의 정체성 같은 건 발견할 수 없다. 작가 스스로가 한 민족에 국한한 것이 아니라 코스모폴리탄이었다는 말이 적당하겠다.
 소설은 1926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8년이 지난 시점이다. 전쟁은 유럽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족, 일찍이 스페인, 신성로마제국과 오스트리아의 왕실을 700년간 이어오던 합스부르크 왕가에 조종을 울린다. 그걸로 끝? 천만에. 전쟁은 전쟁을 백번을 해도 귀족과 대 부르주아에겐 (아들 몇 명의 희생을 담보로 해서)오히려 권력 또는 부를 강화할 기회를 만들어주는 동시에 소부르주아 및 중산층은 아주 거덜을 내버리고, 그보다 아래인 인민들에겐 아주 적절하게 굶어죽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 책의 시공간인 1차 대전 종전 8년 후 오스트리아나 하인리히 뵐이 쓴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  2차 대전 종전 7년 후 독일이나 서민들의 생활은 아주 정확하게 같다. 소설의 주인공 크리스티네의 집안은 빈에서 가장 유명한 동물박제 장인인 호프레너 씨가 이끄는 유복한 가정이었으나 전쟁에서 크리스티네의 오빠가 전사하고, 전시에 박제를 구입할 인간은 애초부터 있을 수 없어 집안은 거덜이 나버렸다. 삶의 목표를 잃어버린 호프레너 씨가 죽은 다음엔 늙은 호프레너 여사가 하루 종일 서 있어야 하는 병원에서 근무를 하는 바람에 심각한 다리 부종에 걸리고 말아 어느덧 스물여덟 살이 된 크리스티네가 시골의 우체국에서 하루 종일 일해 번 돈으로 엄마를 부양해야 하는 강퍅한 삶을 살고 있는 상황. 여기서 소설은 시작한다. 성당의 전화 교환수로 일하며 자신은 도시의 빈민숙소에서 대충 잠을 자면서도 처자식 부양할 돈을 벌어야하는 뵐의 소설과 정말 비슷한 분위기.
 책의 원래 제목은 “Rausch der Verwandlung" 즉 <변신의 중독>. 그럼 이젠 ‘변신’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걸 이야기할 차례. 꽃다운 열여섯 살에 전쟁이 터져 스무 살에 끝났지만 인생의 가장 화려한 시기에 크리스티네에게 환하게 웃으며 다가온 것은 가난과 삶의 고통과, 하루 종일 일도 별로 없는 우체국에서 멍하게 앉아 있어야 하는 권태와 극도의 촌스러움 밖에 없었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하고 완전하게 똑같을 내일이 틀림없이 온다고 보장하는 나날들. 스물여덟 살, 어려서 소부르주아의 삶을 경험하여 빈곤하지 않은 생활이 어떻다는 정도는 태내에서부터 익숙한, 그러나 지금은 지독하게 가난하고 권태로운 크리스티네에게 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이모가 한 명 있었다. 엄마의 동생이 젊은 시절엔 몸매 좋고 얼굴도 예쁘장해서 백화점 여성복 코너에 옷 입어보는 모델 비슷한 직업의, 요즘 말로 일종의 연예인인데 당시만 해도 그게 손 타는 직업이었던 모양으로 무지하게 돈 많은 유부남과 아으 동동다리, 내연의 관계로 엮이고 말았단다. 클라라 이모가 또 속셈을 무지 밝아서 이 거물급 부르주아를 이혼시키고 자기가 본처 자리를 꿰찰 욕심을 품었고, 그걸 가슴 속에 품고만 있으면 어디서 티나는 것도 아니라 괜찮을 텐데 정말로 실행에 옮기는 바람에, 남편 바람피우는 걸 알지만 바늘로 애먼 자기 허벅지만 찔러가며 참고만 있던 본처께서 드디어 폭발하시어, 어느 날 호텔방에 들이닥쳐 벌거벗고 있는 두 연놈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아시지? 그리하여 소송까지 가게 될 찰나, 이 거물급 부르주아가 자기 위신 생각하느라 변호사를 통해 클라라 이모한테 거금을 건네면서 본부인께서 기소하기 전에 아메리카로 건너가라고, 그럼 한 달에 얼마씩 몇 년간 더 주겠다고, 해서 미국으로 이민을 갔었단다. 거기서 네덜란드 출신의 미국인 반 볼렌을 만나 자기가 받은 위자료(위자료 맞지 뭐)를 종잣돈으로 목화 중개상을 해서 무지하게 큰돈을 벌어 대 부르주아 부인으로 에스커레이팅한 인물이다. 원래 이름은 ‘클라라’이지만 혹시 유럽 출신 인간이 자기 젊었을 때 벌인 눈부신 치정행각을 알고 있을까 싶어 ‘클라라’를 ‘클레르’로 바꾸기도 했단다.
 하여간 팔자 고친 이모가 이제 나이 들어 사업은 두 아들에게 맡기고 부부동반으로 유럽여행을 즐기기 위해 스위스의 고급, 최고급, 최상의 고급 호텔에 머무르다 우연히 그동안 편지 한 번 안 했던 언니 안나 생각이 나서 스위스에 놀러 오라고 청했다. 하지만 다리 부종이 심각하고, 전쟁 후 먹을거리 변변치 않아 날로 쇠약해가는 안나는 2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도저히 가지 못하겠으니 젊은 시절 피워보지도 못하고 시들어가는 딸 크리스티네로 하여금 평생 처음으로 휴가를 즐기는 기회를 갖게 하고 싶다고 해서, 우리의 노처녀 크리스티네가 샛노란 외투를 입고 두텁고 튼튼하지만 무지막지하게 촌스러운 구두와 가난뱅이들이나 들고 다니는 모조 뿔 손잡이가 달린 우산, 고급호텔에선 차마 눈뜨고 바라볼 수도 없을 등나무로 만든 가방을 든 채 2박 3일간 악명 높은 오스트리아 3등 열차를 타고 스위스 최고급 호텔에 도착한다. 완전 촌닭 itself. 여기서 크리스티네의 변신은 시작한다. 돈 많은 이모가 마치 때맞춰 호박 마차를 타고 도착한 요술쟁이인 것처럼 그녀를 목욕시키고, 자기 옷을 빌려줘 입게 하고, 머리 손질을 하고, 화장을 하고, 걷고 앉는 자세를 고쳐주자마자 크리스티네는 알프스 최고급 휴양지 최고급 호텔의 신데렐라로 등극한다. 원래 좋은 몸매와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있었으나 전쟁의 손톱이 그동안 하도 험하게 할퀴어왔기 때문에 아무도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것이었다. 그런 크리스티네의 변신이 이루어지자 ‘크리스티네’라는 이름도 발음이 더욱 매끄러운 ‘크리스티아네’로 바뀌고 성姓마저 ‘호프레너’에서 이모부의 성 ‘반 볼렌’으로 바뀌더니 한술 더 떠 독일에서 온 거구의 미남 엔지니어를 거쳐 ‘폰 폴렌’, 귀족을 칭하는 전치사 ‘폰von'을 달게까지 되는 거였다. 다들 아시다시피 네덜란드 사람들 이름 앞에 붙는 ’반‘은 귀족이나 기사계급하고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반 고흐, 귀족 아니다. 옷이 날개고 메이크업이 광채다. 날개 달고 광채를 날리니 오스트리아 촌년이 졸지에 독일 귀족 폰 폴렌 영양이 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 이 놀라운 변신Verwandlung!
 근데, 슈테판 츠바이크는 결코 동화작가가 아니라서 이리 휘황한 신데렐라의 탄생을 당연히 고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지는 않다. 곧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우리의 신데렐라, 크리티네 양은 유리구두도 남기지 않고, 생쥐가 변한 백마가 끄는 호박으로 만든 마차도 아니고, 샛노란 외투와 가짜 뿔 손잡이가 달린 우산, 등나무 재질의 여행가방을 들고, 걸어서 철도 정거장에 도착해, 올 때와 마찬가지로 3등 열차를 타고 오스트리아로 돌아간다.
 웬일로 줄거리를 다 이야기 하냐고? 천만의 말씀. 신데렐라로 변신한 크리스티네가 호텔에서 어떤 영화를 누리고 어떤 사랑을 받았으며,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들과 육체적 진도가 어디까지 나갔는지 나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을뿐더러, 크리스티네에겐 어떤 방식으로 자정을 알리는 죽음의 조종이 울리는지 귀뜸도 하지 않았다. 맞지? 그거 알려드리면, 돈 주고 사서 읽은 나는 뭐야.
 더하기. 이게 끝이냐고? 하이고. 다시 화로의 재투성이 아가씨로 돌아간 우리의 신데렐라. 더할 수 없이 화려한 궁정 무도회를 경험했기 때문에 더욱 잔인하게 비참한 현실세계. 츠바이크는 냉혹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크리스티네가 직접 보고 경험한 바와 같이 극소수는 최상급의 휴양지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행위와 재화와 문화를 소유하고, 그들의 최고급 복지는 대다수를 차지하는 극빈자들의 무한노동과 내일을 알 수 없는 절망에서 나온다는 걸 자각하게 된다. 그러나 개 같은 현실은 언제나 요지부동. 전후 빈곤의 벽에 꽉 막혀 바로 앞도 보이지 않는 절망 속의 오스트리아 젊은이로서 크리스티네. 그가 절망의 마지막으로 선택한 건, 바로, 안 알려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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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11-03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좀 끝이 급작스럽다는 느낌은 받지 않으셨나요? ㅎㅎ 츠바이크 연구가들은 이 작품을 미완성작품으로 보기도 한다더군요.

Falstaff 2017-11-03 10:52   좋아요 0 | URL
ㅎㅎ 전 과하게 친절한 에필로그를 좋아하지 않아서 제 때에 잘 끝맺었다고, ^^; 오히려 그래서 인상적이라고 생각했답니다.
 
자라 창비시선 253
문성해 지음 / 창비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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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제목이 <자라>다. 원래 제대로 쓰려면 《자라》, 이렇게 해야겠지만 특수문자 따오기 귀찮아 시집의 제목도 시의 제목처럼 그냥 <자라>라고 쓰겠다. 양해하시라. 근데 <자라>는 뭐야? 밤 열 한 시부터 방영하는 성인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애들은 자라”할 때 ‘자라’인지, 민물에서 서식하는 파충류 ‘자라’를 말하는지는 시집을 읽기 전엔 모른다. 나도 그게 뭔지는 밝히지 않겠다. 궁금하면 시인들이 하도 가난해서 밥은 말고 호텔 방만 좀 돈 안 내고 쓰자 했다가 쌍코피 나는 시절이니 웬만하면 직접 사 읽고 알아내시라.
 시집 <자라>로 말할 거 같으면,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인 2005년에 나온 책으로 아직도 초판. 근데 1쇄인지 중쇄인지는 써놓지 않았다. 초판 1쇄일 거 같음. 참 시집 안 읽는다. 하긴 요새 시 좀 읽어보니까 이거 완전히 상형문자 혹은 쐐기문자 또는 암호 해석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언제부터 이리 어렵게 쓰는 게 유행이 된 것인지, 한 20년가량 책하고 친하게 지내지 않은 난 모르겠다. 어느 시절이나 어려운 시는 있었겠지만 이거 뭐 (거의) 전부 다 은유라는 핑계로 말을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고, 온갖 감정의 분비물이 질척거리는데다 감상의 과잉이 철철 넘쳐 한껏 질린 상태에서 문성해의 시를 읽으니 삼겹살만 잔뜩 우물거리다가 청양고추가루 듬뿍 넣고 무채 잔뜩 들어가서 국물이 찰랑찰랑한 배추김치 죽 찢어 입에 넣은 느낌이다. 그래, 여전히 이렇게 시를 쓰는 시인이 있다. 비록 시집은 팔리지 않는 거 같지만.
 책을 펴면 맨 처음에 나오는 시가 이렇다.



 봄밤



 빈집 앞에서 쓴다
 젖빛 할로겐 등을 켜 단 목련에 대하여,
 창살 박힌 담장에 하얗게 질려 있다고,
 엉큼한 달빛이 꽃잎 벌리려 애쓴다고,
 나뭇가지를 친친 감은 가로등이 지글지글 꽂힌다고,
 봉오리들 아우성치며 위로 위로 도망친다고,
 추억의 등불 켜 다는 마음 약한 꽃들이
 나 같다고      (전문. 10쪽)


 으떠셔? 쉽지? 그렇다니까. 시인이 어느 봄밤 하필이면 빈집 앞을 지나다가 할로겐 (가로)등이 켜진 목련 나무를 본 거다. 그래 날은 봄밤이요, 빈집 앞에 가로등 불이 비친 광경. 한 눈에 딱 잡히시지? 이렇게 다 알 수 있게 쉽게 쓴 것도 아주 좋은 시인데 말씀이야, 그동안 너무 잘난 시들만 읽은 거다, 분명히.
 근데 문성해의 시 역시 <봄밤>처럼 다 아름다운 건 아니어서, 원래 시인들 거의 다가 그렇듯이, 삶의 비극적 모습을 그린 것도 많이 있다. 아무렴. 비극을 쓰지 못하는 시인은 시인이 아니듯이. 같은 봄을 노래하는데 이런 봄의 광경도 있다.



 봄날



 목련이 내려다본다
 탁탁 튀는 장작 불꽃과
 부르르 진저리치는 연기를,

 

 목련이 내려다본다
 뜨락에 흩어져 있는 신발들과
 목련 나무 아래 묶여 있는 개를,
 개의 목을 파랗게 조여오는 쇠줄을,

 

 이윽고 물이 끓으면
 까맣게 그을린 껍데기가 벗겨지고
 왁자지껄 국그릇이 돌아가고
 목련 나무 아래,

 

 하얗게 뼈다귀가 쌓여갈 때까지도
 목련은 내려다볼 것이다
 조용한 봄날을 꿈꾸며     (전문 13쪽)


 비위 상하는 분도 분명 계실 것. 근데 꼭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 우리나라 사람들 개 잡아먹는 거 뭐 이상해? 아무것도 아니다. 어느 봄날 한 식구가 친척들 좀 불러 모아 앞으로 닥칠 여름에 대비해 (요샌 영양과잉 시대라 사실 필요는 없지만 무엇보다 맛도 있고 늘 해오던 연중행사라서) 개 한 마리 해먹는 광경이라 생각하면 이상한 거 하나 없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나도 ‘산 개’는 질색을 하지만 ‘펄펄 끓는 개’는 아주 좋아하는 인종이라 이런 시 보면 얼른 달려가서 말석이나마 한 자리 끼고 싶으나, 경남대 국어교육과 교수이자 문학평론가인 김경복의 해설에 의하면 “욕망에 사로잡힌 현대인의 행태를 씨니컬하게 묘사”하며, “자신의 보신을 위해 타자의 생명을 아무 죄의식 없이 두드려잡는 욕망의 무자비함을 냉정한 시선으로 그려내고”있으며, “초점 화자를 ‘목련’이라는 사물로 내세워 비인간적 시점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의 타락한 행태를 차갑게 들추어내기 위한 방법적 대응”이란다. 아울러 “‘봄날’이라는 가장 안온하고 화평한 날이 실은 욕망의 잔인함이 극에 달한 추악한 날이라는 아이러니를 풍자로 보여주고 있다”는데, 하이고 어지러워, 이걸 종합하면 난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프라이(N. Frye란 작자)가 분류한 악마적 이미지가 왜 이 시대에 나타날 수밖에 없는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단다. (131~132쪽, 해설) 물론 일부 동감. 개를 안락사 시키지 않고 하필이면 목련 나무 가지에 교수형을 시켜 고통을 가했다는 점에서. 그거 한 가지만. 나머지는 동의하지 않음. 그래도 이 시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봄날 벌어지는 그로테스크한 식욕에 관한 장면이란 건 확실하다. 그걸 대학교수처럼 이야기할 재주도 없고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은 차이일 뿐. 문성해는  이어지는 시 <여기가 도솔천인가>에서도 칠성시장의 개고기 판매점을 묘사함으로 개 도살에 관한 비관적, 비판적 시각을 보여주고 있는데, 지루한 얘기지만, 우리의 이마트, 혹은 롯데마트의 정육코너에 전시되어 있는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에 관한 심사숙고는 왜 생략하는 거임? 나처럼 산 개 싫어하는 인간도 있으며, 담배 피우는 인종을 증오할 자유가 있듯이 산 개를 안 보고 살 자유를 달라고 외치는 사람은, 사람도 아냐?
 이거 말고도 쓸 말 많은데, 참 난처하다. 지금이 오후 7시 10분. 아직도 저녁을 먹지 않아 길게 쓰지 못하겠다는 말씀.
 단 한 가지 지금 배고파 짧게 한 마디만 덧붙이는 걸 봐주신다면, 난 이렇게 말하겠다.
 “좋은 시는 읽고 나서, 읽자마자, 시인이 뭘 주장하고 있는지 잽싸게 알아챌 수 있는 시”란 것. 물론 나름대로 이해 또는 오해하기 위해서 같은 시를 두서너 번 더 읽으면 좋다는 건 당연한 말씀이고. 오해하기 위해서? 아무렴. 오해야말로 시를 읽는 독자의 특권이니까. 난 ‘펄펄 끓는 개’만 좋아하는 게 아니라서 죽은 닭 한 마리 배달시켰다. 나를 위해 생명을 거둔 암탉 또는 거세 수탉에게 심심한 애도를 바치기 위해 닭 넓적다리살과 더불어 쐬주도 한 병 비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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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라 2017-11-02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배 피우는 인종TT 증오ㅠㅠ

Falstaff 2017-11-02 12:10   좋아요 1 | URL
30년이 넘게 하루 한 갑씩 담배 태면서 조국의 교육을 위해 열심히 세금을 내왔는데, 왜 그리 내 건강에 관심들이 많은지 국가는 물론이고 이웃, 지나가는 남자 1,2,3... 지나가는 여자 1,2,3.... 쌀집 남자, 국숫집 여자 기타등등 하나같이 지극히 제 허파와 분비샘과 하다못해 잠자리에서 발기부전 가능성까지 걱정해주는 게 하도, 정말 하도 드러워서, 담배 끊어버렸습죠. 참 드런 세상입니다. ㅠㅠ
 
로테, 바이마르에 오다 창비세계문학 55
토마스 만 지음, 임홍배 옮김 / 창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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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정고문관의 미망인 샤를로테 케스트너, 결혼 전의 성은 부프, 하노버 거주, 1753년 1월 11일 베츨라어에서 태어남, 63세.
 이 할머니가 누구냐 하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나오는 여주인공 샤를로트. 알베르트와 약혼 중, 그 새에 베르테르가 쳐들어오더니 할머니 처녀시절의 가슴에 살짝 불을 붙이고(키스 한 번 했나 안 했나) 남의 약혼녀를 사랑하는 처지를 비관해 성탄 전야에 머리통에다 권총을 발사한 얘기. 다들 아시잖아. 실제로 스물 세 살의 요한 볼프강 아마데우스 괴테가 잠깐 사랑했던 여인. 거기다가 유부녀를 흠모하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 자살한 자기 친구의 경우를 빌려 쓴 소설이 21세기 들어와서도 전 지구적으로 중학교 입학하자마자 어서어서 연애하다 죽어버리라고 장려하는 의미에서 소위 청소년 추천도서들 가운데 제일 앞줄에 세워놓는 불후의 명작이 되고 만 바로 그 작품의 실제 모델 ‘샤를로트 케스트너’란 말씀. 뭐라? 맨 윗줄엔 ‘샤를로테’라고 써 있다고? 아시잖아, 창비식 외국어 표기법이란 거.
 괴테가 <젊은…>은 발표하고 어느새 (빠르기도 하지) 44년이란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진짜로 63세의 샤를로테는 67세 괴테가 추밀고문관으로 재직하고 있는 바이마르를 방문해 그를 만난 일이 있고, 토마스 만은 그 사건을 콕 집어서 본문만 537쪽에 달하는 장편소설을 써내려갔던 것이다. 이름하여, Lotte in Weimar <바이마르의 로테>. 20세기 중반에 재일 한국인 청년이 괴테의 짧은 소설에 나오는 여주인공한테 홀랑 반해서, 베르테르처럼 자살을 기도하는 대신에 자신이 창업한 회사의 간판을 여주인공의 이름으로 짓고 아직도 일본과 한국에서 빵빵한 재벌기업으로 이름을 날리니 바로 “롯데”인 거, 다들 아시리라. 그는 샤를로트 대신 당대 한국최고 아름다운 아가씨와의 중혼重婚을 감행해버리고 만다. 괴테와 <젊은…>을 좋아하는 남자는, 특별히 그가 무지하게 돈이 많으면, 그럴 수 있다고? 난 이 방면엔 별로 흥미 없다. 당연 관심도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렇게 동서를 통틀어 유명짜한 인물이 바이마르, 당시 인구 6천 명밖에 안 되는 시골 촌 동네에 떴으니 그야말로 진짜 구경거리가 난 거다. 바이마르, 하면 생각나는 것이 바이마르 공화국, 바이마르 헌법 등등. 그러나 그건 작가 토마스 만은 경험해봤지만 작 중 괴테가 추밀고문관으로 재직하고 있던 시점으로부터 1세기가 더 흘러야 등장하는 사건. 이거 중요한 거다. 작가는 100년 후의 독일, 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3국동맹의 맹주로 유럽과 아프리카, 그리고 말레이반도까지의 아시아를 제패할 줄 알았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3국 연합 더하기 영국의 거의 모든 식민지 군대 더하기 치명적으로 미국 군대까지 몽땅 몰려드는 판에 쌍코피가 나고 만다. 그래 생긴 것이 바이마르 헌법과 바이마르 공화국. 독일로는 다행이다 싶은 것이 소비에트 공산주의의 서진西進을 막기 위해 유럽의 모든 나라와 미국까지 독일이 다시 무장을 하는 걸 내버려둔다는 거. 1차 대전 이후 (특히 국경을 맞댄 프랑스 군대로부터) 심한 모욕을 당해왔던 독일은 히틀러와 나치가 권력을 틀어쥐고 다시 한 번 어지러운 유럽에 ‘질서’와 ‘율법’을 확립하기 위해 지독한 독재 권력을 만든 다음 엉뚱하게도 유대인 박멸 작업에 들어가려는 것처럼 보이는 시점. 이거 중요한 일이다. 작가는 앞으로 어떤 정치 경제적 변화가 독일 땅을 지배할지 알고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노스트라다무스 찜 쪄 먹을 희대의 예언자 하나 정도 만드는 건 일도 아니라는 사실.
 이 시점에서 토마스 만이 100년 전 바이마르를 그린 소설. 독일 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만년과 최전성기를 보내고 있던 장소. 이미 추밀고문관 괴테의 위명은 전 독일, 독일을 넘어 유럽 전역에 성가를 떨치고 있어서 심지어 바이마르를 점령한 나폴레옹으로부터 레종 도뇌르 훈장까지 받기에 이르렀다. 월드컵 우승하면 참가한 선수들 다 받는 훈장이고, 더구나 전시 나폴레옹 시대엔 개나 소나 다 받긴 했지만 프랑스 최고 훈장을 서훈 받는다는 건 따지고 말고가 없는 영광스러운 일. 그런 환경에 겨우 6천 명밖에 안 되는 도시엔 괴테 한 권 없는 집이 없었고, <파우스트> 1부에 나오는 구절 하나쯤 외지 못하는 시민 또한 없었으리라. 이럴 때 젊은 괴테가 쓴 공전의 베스트셀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실제 주인공 또는 실제 모델인 샤를로트가 도착했으니 사건은 사건이었던 것. 샤를로트가 1816년 9월 22일 아침나절에 바이마르에 도착하여, 1699년에 개업해서 2017년 현재까지 영업을 하고 있는 “엘레판트 호텔”에 체크 인 하면서 일은 벌어진다. 숙박부에 이렇게 서명했던 것.
 “궁정고문관의 미망인 샤를로테 케스트너, 결혼 전의 성은 부프, 하노버 거주, 1753년 1월 11일 베츨라어에서 태어남,”
 어깨너머 숙박부를 넘겨보던 수석 웨이터 마거, 이 남자는 로테가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파우스트> 구절을 인용해가며 로테를 접대하던 인물로, ‘샤를로테 케스트너, 결혼 전 성은 부프’를 읽자마자 좌불안석, 와들와들 떨기도 하고, 안색이 창백해지다가 불그스름해지기도 하고, 눈알의 홍채가 반응을 했다가 안 했다가 하기도 하고, 네 번에 걸쳐 로테로 하여금 자신이 <젊은…>의 그 샤를로테임을 확인하고야 마는 거다. 적어도 시민들의 문화적 방면에서 바이마르는 괴테의 도시 혹은 괴테 자신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로테가 떴다는 말, 다시 한 번 강조. 아침에 도착했으니 늙은 몸이 얼마나 피곤했을까. 일단 침대에 누워 한두 시간 잠을 자려고 해도 갑자기 자리를 바꿔서 그런지 자는 둥 만 둥하다. 하여간 조금 있다가 침대에서 일어나 창밖을 보니, 9월 22일에 창밖을 보라, 창밖을 보라해서 아무리 창밖을 봐도 흰 눈이 내릴 일은 없고, 대신 호텔 앞에 사람들이 빽빽하게 서 있는 것. 바로 로테가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이라도 한 번 해보려고 시민들이 다 모인 거다. 당시는 19세기 초. TV도 없었고 인터넷은 물론 신문, 라디오도 없어 <젊은…>의 실제 주인공 또는 실제 모델을 한 번 보는 것이 세월이 지난 다음 얼마나 유세를 할 수 있는 일인지 지금 사람들은 상상도 못한다. 아무렴.
 침대에서 일어나 네 명을 ‘접견’. 맨 처음으로 영국인 아마추어 화가 아가씨가 초상화를 그리겠다고 우겨대는 걸 거절할 수 없어서. 두 번째로 괴테의 비서 리머 박사, 세 번째는 이름만 대도 다 아실 쇼펜하우어의 여동생 아델레 양, 네 번째로 괴테의 친아들 아우구스트. 바이마르에 도착해 네 명, 수석 웨이터 마거를 포함해 다섯 인물과 만남을 묘사하는데 토마스 만은 339쪽이 필요했다. 길어야 여섯 시간 정도를 묘사하기 위해. 진짜 이야기꾼. 바로 앞에 토마스 만의 친형 하인리히 만의 <앙리 4세>하고 극명하게 비교된다. 하인리히의 책은 부르봉 왕가를 여는 한 위대한 전사의 일생을 그리는 드라마틱한 주제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리도 재미없는지 참 따분했는데 토마스 만은 그의 주특기, 이것저것 마구 끌어와 얘기하고 설명하고 다시 확인하는 복잡한 구도에도 불구하고 쉽게쉽게 읽힌다.
 같은 날 오전에 샤를로테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괴테. 그가 자신의 작업과 지난 시절을 회상하며 로테로부터 도착했다는 쪽지를 받고 3일 후 점심식사에 초대하는 장면을 위해 토마스 만은 다시 100여 쪽이 필요했다. 이 장면에서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가 자주 인용된다. 작품의 일부를 프랑스 작곡가 토마가 <미뇽>이란 오페라로 만들었으니 한 번 듣고 가자.

 

 난 마릴린 혼이 타이틀 롤을 노래하는 음반을 가지고 있으나 유튜브 검색하니 20세기 최고의 메조 소프라노, 이탈리아의 쥴리에타 시미오나토가 노래하는 것이 있다. 참 대단한 메조.

 

 
 이 책은 토마스 만이 쓴 괴테나 샤를로테의 전기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소설. 따라서 로테와 괴테가 만나 서로 나눈 이야기,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밥 먹는 이야기, 이런 거 다 지어낸 거다. 전기는 모레 소개할 유대인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 같은 사람이 전공이다. 참, 츠바이크는 이 책의 뒤표지에 이렇게 평해놓았다.
 “수년 동안 기다려온 가장 완벽한 작품이다. 이 소설을 통해 문학적 전기(傳記)는 최초로 완벽한 예술형식에 도달했다. 여기서 그려진 괴테의 초상은 후대에 유일무이한 본보기가 될 것이다.”
 물론 추천사다운 과장이겠으나 거의 비슷한 시대를 살아온 츠바이크는 특히 반파시즘 입장을 끝까지 고수한, 그의 입장에서 보면 반反 반유대인 정책을 반대해 온 만Mann 형제에 각별한 고마움이 없지 않았을 터. 토마스 만은 이 책에서도, 앞으로 100년 후 바이마르를 포함한 독일 안에서 벌어지는 야만적인 정치, 군사적 형태를 알고 있기에 스스로 자기 자체가 독일이라는 약간의 오만도 가지고 있던 그는, 이 책에서 괴테 자신이 독일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앞으로 전개될 독일 민족의 야만성이 어디서 비롯하는지 곳곳에 비의를 숨겨놓기도 했다. 예를 들어보자.
 로테가 수석 웨이터를 제외하고 세 번째 만나는 아델레 쇼펜하우어 양은 이렇게 말한다.
 
 “제가 줄곧 받았던 인상은, 사람들이 무리를 지으면, 특히 우리 독일인들이 무리를 지으면 누군가에게 복종하려는 충동이 발동해서 그들의 주인이나 총애하는 사람들 자신을 망쳐놓아서 우월감을 남용하도록 부추긴다는 거였어요. (후략. 170쪽)
 
 독일 사람들은 앞에서 인민을 이끄는 영웅이 발견되면 그 사람에게 조건 없이 복종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 영웅이라 함은 1816년 바이마르엔 괴테일 수도 있고, 100년 후엔 말만 잘 하는 키 작은 외톨이 육군 상병 아돌프 히틀러일 수도 있다. 이미 1350년 독일 땅 에게르에서 있었던 유대인 학살 사건 당시도 괴테의 입을 통해 설명이 되는 바, 다음과 같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유대인인) “그는 모든 걸 잃고 맨몸이었지만 에게르의 시민이 되었고, 그래서 자부심을 가졌겠지요. 인간이란 존재를 다시 보게 되지 않습니까? 인간이란 그런 존재입니다. 아무리 잔호간 짓을 저질러도 흥분이 가라앉으면 속죄의 대범한 제스처를 즐기면서 대충 넘어가고 말지요. 그걸로 잔혹행위를 보상했다고 여기는 것인데,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감동적인 면도 있지요. 집단 속에 있을 때는 자발적 행동이 어렵고 되는대로 따라하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이런 돌발행동은 한 시대의 정신 상태에서 빚어지는 예측불허의 재난이라고나 해야 할 것입니다.”  (490쪽)

 이걸 읽으면서 독자는 괴테를 보면 안 된다. 비록 말을 하는 사람은 괴테지만 이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어서 괴테의 웅변을 빌려온 사람은 작가 토마스 만이니까. 그의 다른 작품 <파우스트 박사>에서는 노골적으로 전쟁 중 폭격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작가가 등장하여 독일 파시즘과 전쟁을 비판하기도 하는 등(비록 작가는 미국에서 폭격의 위험 없이 소설을 썼지만), 형 하인리히 만, 아들 클라우스 만과 더불어 개인의 안락을 포기하고 반파시즘의 앞에 서 온 것은 기념할 만하다. 독일인들이 영웅을 추앙하며 영웅의 언어 하나하나를 최고의 가치로 생각해 마치 집단 최면인 듯한 상태로 몰입하는 것을 토마스 만은 “비굴한 열광”이라 칭하며 그건 “노예근성”에서 비롯한다고 정의한다. (따옴표는 493쪽) 이런 바람직하지 않은 민족성을 100년 전 문학적 성인聖人이라 칭하는 괴테에게서도 발견해내는 감식안이란 참.
 물론 이 책은 1930년대 독일의 정치, 군사적 망령을 비난하고 환기를 요구하기 위해 쓴 책이라고는 볼 수 없다. 보다 중요한 주제는 괴테를 44년 만에 방문해 친견한 옛 친구 샤를로테, 그녀와 그를 통한 시간의 흐름과 나이 먹음, 기억 속의 그림과 현재의 모습. 사이의 간극. 시간의 윤회랄까 사이클이랄까 (윤회와 사이클은 당연히 다르다), 시각의 변화 등등에 대한 정의. 이런 것이다. <파우스트 박사>의 주제 역시 반파시즘이 아니었던 것처럼.
 만일 당신이 <파우스트 박사>를 재미있게 읽었다면 이 책 읽기는 아주 쉬울 것이다. 토마스 만을 권할 때, 나는 매우 조심스럽다. 이 작가를 읽으면서 ‘재미’를 찾는 경우보다는 ‘노잼’ 또는 ‘핵노잼’이라 선언하는 독자를 훨씬 많이 봤기 때문에. 그리고 얼핏 그들의 의견에도 동의한다.
 “지루함을 담보로 하는 재미.”
 위에 쓴 문장이 말이 된다면 이거야말로 토마스 만을 읽는 곤란함과 만족감을 한 방에 설명할 수 있는 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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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11-01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중고서점에 뜬 것을 보고는 사려고 했었는데
그 사이에 누군가 사가서 아쉬워 했던 기억이
나네요.

팔스타프님의 리뷰로 대신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Falstaff 2017-11-01 15:34   좋아요 0 | URL
어....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진짜 책에서 토마스 만이 주장하는 것은 아예 써놓지도 않을 걸요. 스포일러를 좋아하지 않아서요.
좋은 책입니다. 나중에라도 ^^;
 
앙리 4세 1
하인리히 만 지음, 김경연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1999년 12월
평점 :
절판


 

 

 

 책의 앞날개에 있는 작가소개부터 열라 웃긴다. “독일이 낳은 뛰어난 작가이며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인 토마스 만의 형이다.” 나도 여태 하인리히는 토마스의 친형, 저작이 깨나 유명한 사람이지만 우리나라엔 번역물이 (거의)없는 독일 작가, 정도로 알고 있었다. 올해 5월까지. 그러다가 5월 초에 페터 바이스가 쓴 <저항의 미학>을 읽었고, 책 속에서 하인리히 만이 1920년대 반파시스트 운동을 하던 사회주의자란 걸 알았다. 아, 하인리히 만이 그랬어? 괜한 궁금증. 이런 거 이해하시리라 믿는다. 미국인으로 살다가 다시 분리된 조국의 동쪽에서 삶의 마지막을 보내려 준비하다가 결국 화장火葬한 유골의 형태로 (동)베를린에 묻혔다고 한다. 동생 토마스하고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성향 또는 취향이 맞지 않아 평생 싸웠다가 화해하고 또다시 싸운 다음에 또 화해하고, 그렇게 한 평생을 지냈단다. 동생하고 사이좋게 찍은 사진도 있다. 

 




 왼쪽이 더 늙어 보이지? 형 하인리히. 오른쪽이 당연히 토마스. 늙은 모습 보니까 미국인 거 같다. 평생 형제끼리 지지고 볶고, 싸웠다가 화해하고, 그래 그게 인생이지 뭐. 나나 이 잘난 사람들이나 거기가 거기다. 하여간 <앙리 4세>를 읽음으로 해서 하인리히, 토마스, 클라우스 만을 다 읽은, 아니, 경험한 셈이다.
 근데 하인리히의 경우엔, 인터넷 서점 검색해보면, 축약본인 거 같은 <운라트 선생 또는 어느 폭군의 종말> 말고 딱 한 종류, <앙리 4세>밖에 없는데, 그나마 절판이다. 내가 읽은 건 중고 책이다.

 

* <운라트 선생 또는 어느 폭군의 종말>을 펴낸 지만지(지식을 만드는 지식) 출판사는 참 여러 가지 좋은 책을 펴내는데 도무지 원작 전체를 번역한 것인지, 발췌 번역인지 분명하지 않다. ‘지만지 소설 선집’과 ‘천줄 읽기’라는 시리즈가 있고 ‘천줄 읽기’는 스스로 발췌라는 점을 밝혔지만 ‘지만지 소설 선집’을 선뜻 고르기가 어쩐지 영 캥겨서 아직 한 권도 읽어보지 않았다. 지만지 출판사의 책들을, 특히 ‘소설 선집’을 읽어보신 분 계시면 좀 알려주시면 좋겠다.

 

 어쨌든 <앙리 4세>, 전 3권을 읽었다. 권당 300쪽 가량이지만 판형도 크고 자간, 줄 간격이 좁은 20세기 말 유행했던 편집이라 꼬박 닷새 걸렸다. 물론 술이 떡이 돼 하루는 거의 읽지 못하긴 했지만. 읽어보니 첫 느낌이, 참으로 지적인 사람이 독일 내 파시스트에 의한 지랄발광을, 조선에선 임진왜란이 발발했던 16세기 말의 프랑스 가톨릭과 위그노교도들 간의 머리 터지는 싸움에 빗대 썼다는 건 잘 알겠다. 근데 번역한 김경연 씨가 문제인지, 작가 자체가 문제인지 책을 읽는데 일단 전혀 재미가 없다. 부르봉 왕가를 연 앙리 4세의 유년 시대부터 만 36세가 되기 바로 전에 벌어진 파리 포위 공격까지를 그린 책이라 당연히 성장, 연애, 결혼, 세계사의 한 페이지로 기념할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독살과 암살, 음모 등등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무지하게 많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책 읽는 속도가 높아지지 않는다. 하인리히의 원문이, 뛰어난 독일 저자답게 철학 또는 사유적이고, 은유와 반어를 비롯한 수사법을 많이 사용해, 가뜩이나 알콜의 영향으로 인해 잘 기능하지 않는 뇌를 혹사시키길 바라서, 일반 소설을 재미없게 쓰는 건 그래도 이해하더라도, 참 기가 막히게도, 역사 소설까지도 재미없게 쓰는 놀라운 신공을 갖추고 있는 거 같다. 여기다가 역자 역시 한국말로 문장을 다시 만드는 묘미를, 적어도, 찬란하게는 보여주지 못했던 것 같고. 원문을 읽는 독일 사람과 달리 유라시아 저 건너편 극동의 한 인간이 읽기엔, 저자와 역자 사이에 요구되는 싱코페이션이 기가 막힌 변주를 일으켜 책이 지루해지는 놀라운 성과를 만들어내는 거 아닌지. 써놓고 보니, 음악용어 싱코페이션, 이거 참, 아무데나 갖다 붙여도 이리저리 쫄깃한 맛이 나는 단어다.
 이 독후감은 지금 막 책을 다 읽고 곧바로 쓰고 있는 것인데도 유난히 힘이 든다. 그건 내가 20세기 전반기 독일에서 벌어진 정치적 난장판에 대하여 자세하게 모르는 것이 제일 큰 이유처럼 보인다. 1권의 역자 서문에서 보면, 책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누구는 히틀러, 누구는 뮐러를 비유하고 있다는 등의 말이 나오는데, 정작 책을 읽어보는 아시아인은 왜 이 인간을 히틀러와 또는 뮐러와 비교할 수 있는지 별로 감흥이 오지 않는다. 그저 내 눈엔 프랑스에서 벌어진 위그노 전쟁에서 앙리 4세의 철학적 지평을 넓혀준 보르도의 시장 몽테뉴와의 만남과 그로부터의 배움. 유방에게 장량과 한신이 있었고 이성계 옆엔 정도전이 있었듯 앙리 4세를 옹위하던 플레시스-모르네의 지혜로운 책략 같은 것만 눈에 팍팍 들어왔으니 분명 난 속물인 거 맞다.
 지금 품절도 아니고 절판인 책에 대해 길게 왈가왈부할 건 없고, 하여간 <앙리 4세>를 마침으로 해서 나도 이제 하인리히 만을 읽어본 인류 가운데 한 명이 됐다는 점, 어디 가서 어깨에 힘주고 하인리히 만이 말씀이야, 하고 잘난 척 할 것이 틀림없다는 점, 그러나 별로 재미없게 읽은 책을 구태여 헌책방에 가서 사 읽어보라 충동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선에서 독후감을 끝내려고 하는데, 아, 이 책 읽느라고 정말 고생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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