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녀 이야기 환상문학전집 4
마가렛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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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먼 암살자>를 재미나게 읽어 애트우드의 다른 책을 찾아 읽은 것이 바로 <시녀 이야기>. <눈먼…>에서 애트우드는 가족이란 테두리 안에서 힘과 재력을 포함한 가정 내 모든 권력을 쥔 남성에 의한 행해진 성폭력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이번에 읽은 <시녀 이야기>는 북아메리카 지역에서 발발한 길리아드 내전, 대통령 즉위식을 기해 군부에 의하여 벌어진 집권층 학살과 이어진 쿠데타 및 오랜 독재와 경찰국가 체제를 가정한 의사 역사소설이다.
 길리아드는 미합중국 해체 후 북아메리카 동쪽에 자리 잡은 나라. 이 국가에 성격을 부여하기 위해 에필로그를 대신하는 “시녀 이야기의 역사적 주해”란 글에서, “길리어드에는 진정으로 독창적이거나 토착적인 것은 없”고 “그들의 탁월함(주: 지금은 이 단어를 ‘탁월성’보다는 ‘특성’으로 이해해야 할 것)은 <합성>에서 발휘”된다고 작가 스스로 얘기했듯이(514쪽), 인류 역사상 안 좋은 쪽으로 모범이 된 몇 개의 정부를 샘플로 만들어냈을 것이다. 길리어드 수뇌부가 정권을 잡은 다음에 정통 프로테스탄이 아닌, 가톨릭과 침례교를 포함한 모든 이교도를 탄압하여 길리아드는 바야흐로 내전상태에 처해있고, 유대인들에겐 민영화한 운송회사를 이용하여 즉시 길리어드를 떠나게 함으로서 보트 피플로 밀려난 유대인을 과밀하게 싣고 가던 여객선 한 척은 대서양에서 침몰하는 상황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모든 윤리규범은 교조적 기독교 경전에 맞게 시행되어야하므로 국민들은 자신의 재산과 인격과 지위에 따라 적절한 계급으로 나누는 것이 당연하다. 남자들에겐 사령관, 수호자, 천사, 눈 등의 호칭이 붙어 지휘자, 군인, 스파이 등의 직업이 주어지고, 여자들은 아내, 아주머니, 하녀, 시녀 등의 계급으로 구별한다. 여자들은 모든 사회활동을 금하며 오직 후대를 생산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때맞춰 무능한 길리아드 정권은 환경파괴물질을 과감하게 투기하는 동시에, 방사능과 핵폐기물 등 인류에게 최악의 상태를 가져올 수 있는 모든 악을 모든 방법으로 완벽하게 배출하여 아메리카를 접한 대서양 인근에 서식하는 어종의 씨를 말리는 상태까지 도달했다.
 이제 ‘시녀’가 어떤 계급인지 설명을 해야겠다. 우리말로 ‘씨받이’. 최고위 계급인 ‘아내’는 당연히 남편의 지위에 의하여 자리를 점하게 되는데, 아내가 직접 출산을 할 수도 있고, 출산의 번거로움과 고통을 다른 여인에게 대신 맡기고 자신은 낳은 아이만 취함으로 자녀를 얻을 수 있는데, 이때 아이를 낳아주는 여자를 ‘시녀handmaid'라고 했다. 아이를 낳고, 한 한 달가량 모유를 먹인 다음에 아이의 양부모에게 꾸벅 절을 하면 곧바로 다음 가정으로 떠나야 한다. 거기서 또 임신, 출산, 수유. 즉, 아이 낳는 기계, 다리 달린 자궁 정도의 위치다. 이들은 국가권력과 현 체제에 안주하는 시민들, 예컨대 아내, 아주머니, 하녀 등에 의하여 철저하게 감시당하는 삶을 산다. 남이 알아들을 정도의 목소리로 대화도 할 수 없으며, 조금의 사생활도 보장받지 못하고, 언제든지 비관적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집단 구성원으로 늘 감시 받는 것은 물론이고, 어떠한 계급 이탈의 기도도 가혹하게 처벌 받는다. 그런데,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가 이 시녀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감시하는 계급으로 누굴 꼽았는가 하면, 시녀를 둘 수 있는 지배층에서 봉사하는 아주머니 계급. 즉 수석 하녀를 꼽았다. 탁월한 선택. 동서고금을 통해 알 수 있듯, 가장 가혹하게 탄압을 받는 계급을 가장 효과적으로 조종했던 건 동족 중 바로 위 계급이었다. 유대인 수용소에서 반장이 그랬고, 일본 식민지 조선에서 순사들이 그랬다.
 위에서 말한 모든 것. 마거릿 애트우드는 이것들 가운데 특히 씨받이, 시녀들에 초점을 맞춰 글을 썼을 뿐이지 진짜로 얘기하고 싶었던 건 가혹한 권력이 어떻게까지 비인간화할 수 있을까, 하는데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재미있는 책을 읽고 있었다. 씨받이 이야기이니 당연히 유사이래가 아니라 직립보행하기 전부터 특히 덩치와 완력으로 우위에 있던 남성에 의한 여성에 대한 폭력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정도로 생각하면서. 남성인간에 의해 지속된 유구한 여성에 대한 폭력을, 20세기와 21세기 와서 겨우 몇 십 년 조금 반성하는 시늉하면서 이제 서로 동등하다거니, 그건 그거고 이제부터 서로 잘 살자느니 어떻거니 함부로 얘기하려는 생각 없다. 하여간 나는 이 소설을 처음부터 한 독재 또는 통제체제에 의한 인간의 말살로 읽어나가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230쪽에 이런 이야기가 등장한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당신이 혹시 남자라면, 그리고 여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읽어왔다면, 제발 명심해 달라. 당신은 여자로서, 남자를 용서해야만 한다는 유혹이나 기분에 절대 시달리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잊지 마라. 정말이지 그런 충동은 참으로 거역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용서 역시 일종의 권력이다. 용서를 구하는 일 역시 권력이며, 용서를 유보하거나 베푸는 일 또한 일종의 권력이다. 아마 그만큼 커다란 권력은 없을 것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자는 남자를 용서해야 한다는 생각을 절대 하지 않을 것이란 말. 뒤에 용서를 구하는 것도, 용서를 하는 것도 다 권력이란 얘기는 도무지 무슨 주장인지 잘 모르겠지만, 마거릿 애트우드가 처음부터 남성에 의한 여성에 대한 구속, 억압, 폭력을 주제로 이 소설을 쓰기로 이렇게 작정을 했었는지는, 아주 몰랐던 건 아니고, 설마 이런 거대 서사에 피해자로 인구의 절반만 해당하게 구상했겠나 싶었던 거다. 이제 실토하자. 독후감 제일 앞자리에 이이가 쓴 <눈먼 암살자>의 대강의 내용을 두었던 건 <시녀 이야기> 역시 근본적으로 <눈먼 암살자>와 같은 부류로 읽어야 함을 비치기 위해서였다.

 비록 작가가 설정한 정치적 음모. 대통령과 요인 암살, (1980년대 중반에 미국에서 벌어진)군부 쿠데타, 기독교 원리주의와 유대인 추방, 학살 수준의 형벌과 특히 여성에 대한 사회적 제약. 이런 것들이 지난 시절 히틀러 등의 파시스트와 라틴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의 독재정권,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행태를 종합한 것이고, 그도 모자라 온갖 형태의 자연파괴, 방사능 유출, 아메리카의 지역적 몰락 등, 작가 스스로 주장한 대로, 길리아드 국國을 만들기 위한 뛰어난 “합성”의 결과인데, 이 모든 합성은 결국 여성주의 소설을 위해서 사용한 것이다.
 길리아드에서 여성은 항상 남성으로부터 상상도 할 수 없는 탄압을 받아왔는데, 이 장면에서도 애트우드는 놀라운 인류학적 힌트를 던져 넣는다. 반정부 활동을 한 남자를 체포, 고문한 다음, 거의 말도 하지 못하는 상태로 만들어서, 이 남자를 여자들한테 던져준다. 쉬운 얘기로 공개처형에 처하는 것. 처형은 자리에 모인 여성들 마음대로 행한다. 난 이 장면이 대단히 흥미롭게, 500쪽이 넘는 잘 쓴 장편 소설을 읽으면서 한 번 정도 할 수 있는 행동, 이마를 탁, 치면서 읽었다. 이를 ‘참여처형’이라고 한다.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가 쓴 위대한 인류학 서적 <황금가지>를 떠오르게 하는 기막힌 번뜩임. 그러나 인류학적으론 자연스럽지만 인간적으로는 잔인하기 그지없는 행사이자 축제.
 참여처형은 이른바 ‘구제驅除’ 행사의 뒤풀이로 나온다. ‘구제’라는 거 자체가 공개처형이다. 책에선 세 명의 여자, 두 명의 시녀와 한 명의 아내의 얼굴에 흰 보자기를 씌우고 목에 밧줄을 맨 다음 딛고 선 나무 단을 걷어 차버리는 거. 이게 단줄 아시지? 서양의 교수형에선 한 공정이 더 있다. 페터 바이스의 명작 <저항의 미학>에서도 나온다. 목을 매단 사형수의 다리에 집행인이 매달리는 거. 그럼 목뼈부터 척추 등 관절이 우드득 소리를 내면서 탈골되어 보다 빨리 죽일 수 있단다(우드득, 탈골되는 소리가 이 책에 나오진 않는다). 이런 장면을 보며 흥분한 여성들, 그들이 상당한, 극도의 스트레스에 노출되었을 것은 분명하다. 자신들도 조그만 잘못만 해도 이렇게 목매달려 죽을 게 번하니까. 이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평소 자신들을 핍박해온 남성 하나를 맨손으로 때려죽이는 일, 그걸 집권자들이 생각해내고 시행하는 걸, 난 이걸 생각도 못했던 거였다. 애트우드는 이렇게 말한다.


 “희생양들은 역사상 어느 시기에나 유용했습니다. 평상시 극도로 엄격하게 통제받고 있는 이들 <시녀>에게도 가끔씩 맨손으로 남자를 찢어죽이는 일이 상당히 만족스러웠던 게 분명합니다. 이 행사가 어찌나 인기를 얻고 활용도가 컸는지 중반기에는 정규적으로 시행되어 1년에 네 번씩 동지, 하지, 춘분, 추분에 시행되었습니다. 고대 대지의 여신에게 바치는 다산제의 흔적을 여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515쪽)

 

 어떻든, 난 애트우드가 이 거대서사를 여성주의 문학을 위해 사용한 것에 조금도 반대하지 않고 반대할 수도 없으며 반대할 이유도 없다. 작가가 쓰고 싶은 대로 쓰면 되는 것이지 그게 옳고 그르고 따지는 건 독자가 할 일이 아니다.
 다만 이 소설에 대해 느끼는 것은, 이미 있어왔던 사실이나, 현재 상황으로 미루어 가능한 문학적 실제를 제시하고 그 안에서 여성주의 소설을 써도 괜찮을 텐데(마치 <눈먼 암살자>처럼. 얼마나 잘 쓴 여성주의 소설인가), 있지도 않은 디스토피아의 미래, 2045년 이전의 어느 시대 북아메리카에 가능하지 않은 길리아드 국가를 건설해 굳이 또다시 여성을 생식기계 상태로 만들어서, “당신은 여자로서, 남자를 용서해야만 한다는 유혹이나 기분에 절대 시달리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잊지 마라”고 주장해야 했는지는 생각을 좀 해봐야겠다. 가상 역사라면 원조 여성주의 문학이라고 일컫는 게르드 브란튼베르그의 <이갈리아의 딸들>이 훨씬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전에 여성주의 소설에 관해 비슷한 독후감 썼다가 코피난 적 있다. 자주 얘기했듯이 난 논쟁을 싫어한다. 혹시 생각이 다른 분 계시면 미리 말씀드린다.
 당신 의견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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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고의 숲 열린책들 세계문학 92
로버트 홀드스톡 지음, 김상훈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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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사고’의 뜻이 무엇인가를 얘기할 필요가 있다. 책의 87쪽에 “자아의 신화적인 이상理想”이란 말이 나온다. 작중 주인공 스티븐의 아버지는 밀교 또는 심령에 심취하여 끊임없이 연구에 몰두, 비밀스런 숲 근처 산장(요즘 표현으로 주거 형태 독립빌라로 보는 것이 좋을 듯)에서 이미 영국 땅에선 멸종해버린 멧돼지의 신화적 생존형태에 관심을 두다가 자신이 정말 신화에서나 나올듯한 직립보행 하는 거대한 멧돼지가 돼버리고 만다. 이것은 자아를 신화적인 이상으로 스스로를 만들어낸 경우. 물론 인간이었을 때의 감정과 지성 등등을 가지고는 있으나 숲에서 살기에, 또는 숲을 지배하기에 적절한 형태로 변화된 상태이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신화적 이상의 한 형태, 그게 사람이었건, 건축물이건, 아니면 작은 부족이건 간에, 특별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 늘 마음속에 존재했던 적이 있을 거란 믿은, 바람 같은 것이 어떤 형태로 실화實化되어 실제로 특정 인물, 건축물, 작은 부족이 신비한 태초의 능력을 가진 숲 속에 생겨난 경우, 이것도 미사고라 칭한다. 또, 영화를 통해 누구나가 알고 있는 ‘자아의 신화적 변형’으로 “아바타” 역시 미사고의 하나. 세 가지 미사고의 예를 들었지만 내가 파악하지 못한 책 속의 다른 미사고가 등장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혹시 이 책을 읽을 요량이면 다른 미사고를 발견해내는 것도 재미있겠다.
 책의 숨은 주인공이자 가문의 아버지인 조지 헉슬리가 드디어 산장 바로 옆에서 시작하는 크지 않은 숲 안에 있는 미사고 지역으로 진입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 친구인 에드워드 윈-존스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재미있는 환상소설 <미사고의 숲>은 시작한다. 편지 속에 신화시대에나 있었던 듯한 부족 ‘샤미가’의 일원인 ‘생의 이야기꾼’을 통해 알게 된 쌍둥이 자매에 관한 이야기, 전설, 신화 등을 소개하며 ‘후르파스나’ 즉 ‘까마귀들이 키운 소녀’란 뜻의 아기, 앞으로 400쪽에 걸쳐 이게 어떤 의미인지 밝히게 될 기본적 과제를 던져주는 것이다. 이 이야기, 즉 ‘후르파스나’가 우리(그들)가 알고 있는 바, ‘귀네스’ 전설의 원형이라 굳게 믿는 조지 헉슬리. 여기까지 읽으면서 아직은 그리하여 ‘귀네스’란 이름의 미사고가 등장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그냥 자연스럽게 이 귀네스가 아서 왕의 비이자 란셀롯의 연인을 뜻할 지도 모르겠다고만 여겼을 뿐. 근데 진짜 귀네스가 나오는 거 아냐 글쎄!
 연구에 몰두하느라 자기한테 아들이 둘 있는지 어떤지, 세계대전이 일어나 아들들이 참전을 하는지 마는지 도통 관심이 없어 보이는 아버지한테 마음이 상한 둘째 아들 스티븐은 전쟁이 끝난 다음에도 그냥 프랑스에 눌러 있었다가 아버지의 부음을 받고 영국의 산장으로 온다. 아버지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형 크리스찬과는 계속적인 편지 왕래가 있어서 그가 귀네스란 아가씨와 결혼했다는 걸 알고 있는데 막상 산장에 도착하니 그녀는 없다. 그냥 가버렸단다. 그리고 아버지보다 더 광적으로 숲의 비밀을 찾는데 골몰하는 형. 그는 아버지의 (일부가 찢어진)일기 같은 자료를 미리 가지고 시작했기 때문에 더욱 수월하게 숲의 장막을 여는 일에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동생 혼자 집에 두고 숲으로 사라져버리는데, 아이고 이걸 어째, 귀네스가 동생 스티브 앞에 등장하고 만다. 이쯤 되면 정말로 아서 왕의 전설과 비슷하다. 왕의 비이지만 왕의 신하하고 바람피우는 여자. 저 훗날 리미니의 란체오토 말라테스타 공의 비妃 프란체스카가 시동생 파올로하고 불륜을 맺을 때(단테 알레기에리, <신곡: 지옥편> 참조) 매개가 되는 스토리로 등장하게 된, 귀네비어. 형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자신의 아내라고 한다. 만일 그 주장대로라면, 시동생하고 사랑하게 되는 귀네스. 이탈리아의 리미니에선 같은 경우에 형 란체오토가 동생 파올로를 뎅거덩, 잘라 죽여 연놈을 곧바로 지옥으로 보냈지만, 아서 왕은 그러지 않고 자신이 애벌론 섬으로 사라지는(죽음의 길을 가는) 결말을 택했다. 이 사건을 서기전 2000년쯤으로 여기는 작가 로버트 홀드스톡, 이이는 귀네스와 스티븐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미사고들이 사는 숲은 자신의 자기장 비슷한 것으로 나름대로 방어막을 쳐서 외부인의 침입을 막고 있지만, 방어막이란 건 언제나 뚫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 이곳을 지배하려는 이방인이 들어오고야 마는데, 그게 누구일까. 거의 평생을 바쳐 숲의 비밀, 신화나 전설(myth), 거거다가 이미지(imago)를 합친 미사고mythago, 이들이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파괴할 수 있는 이방인으로 규정하고 없애고자 한다. 그러나 방어막을 친 스스로의 힘으로 막아내지 못하는 위험인물은 언제나 있는 것이니 그게 누구?
 셰익스피어의 극작품에 보면 영국인들은 숲과 숲의 정령 속에 많은 전설과 신화를 담아놓은 듯하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셰익스피어의 <윈저가의 즐거운 아낙네들> 속 자정의 숲속 장면과 <템페스트>를 자주 떠올리곤 했다. 또 난데없이 일본 작가가 산속 깊숙한 곳에서 벌이는 으스스한 이야기들, 즉 이즈미 쿄카의 <고야산 스님>과 <초롱불 노래>와 엮여, 혹시 이게 섬나라 사람들의 공통점 아냐? 섬나라니까 당연히 안개도 많고 대체로 습하고, 거기다 산악지역이면 대체로 대륙의 산악지대에 비해 으스스한 느낌이 훨씬 강할 거 아닌가. 그래서 비슷하게 으슥한 분위기의 작품을 만들어내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재밌다. 도대체 사람의 상상력으로 안 되는 게 뭔지 모르겠다.

 


 * 예전에 어떤 분의 추천으로 읽게 되었는지 혹시 모르겠다. 열린책들의 표지, 루소가 그린 밀림 장면이 영락없이 남미나 아프리카인 것 같아 누가 추천하지도 않았는데 직접 고르지는 않은 거 같다. 사놓고 오래 뒀다 읽으면 이런 경우도 생긴다.


 * 중세 독일지역의 기사계급,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서울대학 출판부에서 나온 책 <니벨룽겐의 노래>에서 밤새 경계근무를 하는 군터와 하겐. 이름이 맞는지 안 맞는지는 확신하지 못하겠다. 책이 책꽂이 어딘가에 꽂혀 있는데 찾아 확인해볼 생각을 하니까 감당이 되지 않는다. 하여간 두 기사가 성루에 서서 장검을 발아래 콱 찍어놓고 밤을 꼴딱 새워 깜깜한 밤의 벌판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림이 먼저 그려진다. 왜 이 말을 하느냐 하면, 책의 3/4부분에 우리의 주인공 스티븐이 귀네스를 찾아 숲에 들어가 온갖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한 무리의 미사고가 나타난다. 5~7세기에 브리튼으로 넘어온 게르만들이다. 이들 가운데 남자 대장 하나가 스티븐과 동행인을 잠자게 하고 자기는 땅바닥에 장검을 콱 박아놓은 다음 벌떡 서서 밤새 뻗치기 보초를 하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이다. 귀네스도 그렇고, 게르만인의 뻗치기도 그렇고, 세상에 모방 아닌 창조가 어디 있어, 한 마디 하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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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긴 편지 열린책들 세계문학 170
마리아마 바 지음, 백선희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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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간체 소설이다. 모두 스물일곱 편의 편지글로 구성되어 있다.
 편지 보낸 사람 라마툴라이. 세네갈의 이슬람교도 여성. 자녀 열한 명의 어머니. 이 여인이 과부가 된 시점에 아이사투란 수신인에게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몇 년 후, 어려서부터 친구인 아이사투가 내일 세네갈에 도착하는 날까지 스물일곱 편의 편지를 쓰는 형식. 사실은 편지글이라도 라마툴라이가 계속 아이사투에게 보낸 진짜 편지들이 아니라, 세상 살면서 참 어렵고 힘들다고 여길 때마다 한 통씩 편지글을, 노트에 써놓았던 것이다.
 라마툴라이의 착한 맏딸 ‘다바’에겐 예쁘게 생기고 깜찍한 외모, 그러나 가난한 집의 딸 ‘비느투’란 친구가 있었는데, 그 아이한테 한 늙은이가 차에 태워 좋은 곳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엄청나게 비싼 기성복을 사 입혀 비까번쩍한 모습으로 등장한 적이 있노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시절을 계산하면1960년대 말 가량? 이때부터 다바는 엄마 라마툴라이에게 비누트한테 생긴 일들, 문제의 ‘주책스런 늙은이’가 거의 전적으로 돈의 힘으로 비누트와 비누트의 부모, 조부모에게 환심을 사려하는 걸 생방송 진행을 해주곤 했다. 좋은 집을 사주고, 회교도들의 평생소원인 성지순례도 당연히 보내주는 건 물론이며, 매달 넉넉한 생활비까지 보태준다고 약속했다나. 원조교제의 원조 격이니까 그랬겠지. 평소 여권신장에 관심이 높았던 라마툴라이도 불편하긴 하지만 그래도 곧잘 들어주고는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사원의 승려와, 시아주버니와, 편지의 수신인 아이사투의 전남편, 이렇게 세 명이 찾아와 말을 이리저리 빙빙 돌리더니, 오늘 아침에 당신 남편이 새장가를 갔다고, 두 번째 아내의 이름이 비누트라고 하더란다. 그때부터 비누트의 강짜가 시작되고, 남편은 한 번도 마라툴라이와 열한 명의 아이들을 보러오지도 않은 건 물론이고, 하다못해 생활비 한 푼 보태지 않기 시작한 거였다. 그 새 둘째 아내 비누트는 색깔 다른 두 대의 승용차에다 친정 엄마 아빠 모시고 다카 시내를 활개치고 돌아다니며 온갖 사치를 다 부려댔으니 속으로 얼마나 열불이 뻗쳤을까.
 왜 마라툴라이가 아이사투에게 이렇게 길고 긴 편지글을 썼느냐 하면, 아이사투는 마라툴라이와 다르게, 그리고 이 소설의 작가 마리아마 베와 같이, 사회적으로 용인이 되는 남편의 중혼을 참지 않고 이혼해버리면서 네 명의 아이들을 스스로 양육하는 편을 택했기 때문이다(작가 마리아마 베는 무려 아홉 명의 자녀를 데리고 세 번째 남편과 이혼해버렸다. 구글 검색). 아이사투는 귀금속세공업자의 딸로 하늘같은 신분인 왕족의 후예와의 결혼에 성공하여, 신분차이에 열 받은 시어머니가 애초부터 아들의 중혼을 염두에 두고 열린 사고방식과 세상을 대하는 옳은 방법 등을 가진 양순한 처녀를 두 번째 며느리로 점찍어 두었다가 결혼을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식 중혼을 참지 않고 이혼을 감행, 곧바로 학업을 이어나가 지금은 재미 세네갈 대사관에서 근무하는 엘리트이자 부유한 계급으로 지내고 있다.
 작가는 친한 두 친구의 환경을 이렇게 극단적으로 양분하여, 중혼을 인내하고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세네갈 내 이슬람 여성과, 이혼을 감행함으로서 보다 확실한 자아를 찾아낸 여성을 등장시켜 성적 자립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구도를 취했다. 아주 짧은 소설이기 때문에 더 이상의 스토리는 소개하지 않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해 여기서 멈추지만, 세상일이 거의 언제나 그렇듯이 어디에도 나름대로 길은 있다. 열한 명의 아이가 아직은 다 크지 않아, 마라툴라이의 어머니로서의 곤고함과 차별이 앞으로 어디까지 뻗칠지 전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마라툴라이의 입을 빌린 작가 마리아마 베는 이렇게 얘기한다.


 “서로 사랑하라! 서로가 상대에게 진정으로 다정할 수만 있다면! 상대 속에 융화되려고 애쓰기만 한다면! 상대의 성공과 실패를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상대의 결점을 세는 대신 장점들을 높이 산다면!” (1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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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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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톱을 너무 바짝 깎았다. 왼쪽 세 번째 손톱이라 자판 두드리기가 편치 않다. 세상이 그런 거다. 종합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그저 죽음을 기다리는 무수한 사람들의 목숨보다 당장 자판 두드리기 힘들게 손톱 바짝 깎은 손가락이 더 아픈 것.
 10년 전 여름이던가, 내가 좋아하는 공선옥의 추천사를 보고 <침이 고인다>를 읽은 것이 첫 번째 김애란. 지금 보니까 외모도 공선옥하고 비슷한 것 같고 뭐 그렇다. 읽은 지 하도 오래라 그때의 감상이 어땠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아주 인상 깊었던 작품이 없었다는 뜻? 그것도 좀 있지!) 약간 야하고 뭐 재미나고 그랬던 거 같은데, 두 번째 읽은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은 전혀 그렇지 않다(요샌 단편집 제목과 같은 단편이 단편집 안에 수록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이것도 이번에 알았다). 이 책에선 단 한 작품도 읽으며 내게 미소조차 짓지 않게 만들었다. 이 책에 수록된 일곱 편(겨우, 일곱 편)의 단편소설이 공통적으로 배경으로 깔고 있는 것이 핫따, 먼 훗날인줄 알았더니 겨우 코앞이었던, 죽음.
 첫 작품 <입동>은 두 번의 유산 끝에 인공수정으로 얻은 아이가 유치원(또는 어린이집) 통학버스에 깔려 죽고, 두 번째 <노찬성과 에반>에선 찬성의 아빠가 갓길을 따라 걷다가 화물차에 치어 죽은데다가 스포일러(특히 단편소설에서 스포일러란 용서할 수 없는 파렴치한 소치라서)가 염려되어 정확하게 적진 않겠지만 막바지에 동거인 중에 한 명이라 추정되는 또 다른 죽음까지 겹쳐지고, 네 번째 작품이자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침묵의 미래>는 수많은 소수 민족의 언어를 학살하고, 다섯 번째 작 <풍경의 쓸모> 역시 스포일러 관계상 상세하게 적을 수 없는 한 인물의 죽음이 달려있으며, 여섯 번째 작 <가리는 손>엔 건장한 중학생의 이단 옆차기에 맞아 죽고마는 폐지 줍는 노인이 등장하고, 마지막으로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는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는 열무김치를 담고 있는 시간에 날 버리고 먼저 가버린 남편님이 배경으로 깔린다. 딱 한 작품, 세 번째로 수록한 <건너편>이 유일하게 죽음과 거리를 둔 단편으로 이 책에 실린 일곱 단편 가운데서도 마음에 제일 들었다.
 10년 전에 읽은 <침이 고인다>도 글 가운데 야한 장면이 나오고 재치 있게 재미난 묘사가 인상 깊었다는 이야기지 결코 글의 내용이 밝은 경향은 아니었다고 기억하는데(역시 가물가물 오래전이라 믿지는 마시고), 이번 <바깥은 여름>은 좀 심했다.
 김애란의 글? 어이, 왜 이러셔. 대한민국에서 비까번쩍하기로 유명한 문학상이란 문학상은 거의 수집할 정도의 글발을 자랑하는 작가라는 건 나도 알고 있다. 이이가 글 속에 죽음을 등장시켜 살아남은 자가 우울하기도 하고, 좌절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기도 하고, 하여간 깊은 상실에 빠져 있는 상태를 대단히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데는 동의한다. 근데 좀 심한 거 아냐? 물론 출판사에서 죽음을 테마로 김애란에게 이와 유사한 소재를 다룬 단편만 골라 책을 엮어보자고 했을 수도 있지만, 한 권이 통째로 어두운 분위기로 일관하는 것이 좋은가 아닌가를 따져보는 것도 필요하겠다.
 <건너편>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는 건 비단 죽음을 소재로 하지 않은 유일한 작품이기 때문이 아니라 단 한 편, 실패나 소외나 죽음이나 상실에 빠진 삶과의 화해를 시도하는 유일한 것이서다. 물론 일곱 편을 따로 떼어 무게를 단다면 내 감상이 턱도 없이 잘못된 것이겠지만, 한 자리에 앉아 근 여섯 시간을 바쳐 한 방에 일곱 편의 단편소설을 다 읽고 나면 이런 생각도 동의하는 분들도 적지 않으리라 믿는다.
 죽음. 누구나가 죽고 궁극적으로 죽음이 문학의 대상물이 아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약간의 우울증 증세가 있는 난 누군가가 죽음을 노골적으로 콕 집어서 만지작거리면 읽어내기가 좀 난감하고 불편하다.

 여전히 내 왼손 가운데 손톱이 더 신경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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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을유세계문학전집 89
유리 트리포노프 지음, 서선정 옮김 / 을유문화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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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리포노프의 작품은 이 <노인> 말고 예전에 경희대학 출판부에서 찍은 <교환>이란 얇은 책 말고는 없는데 그것도 아쉽게 절판이다. 트리포노프는 <노인>을 1978년에 발표를 하고 3년 후인 1981년에 세상을 떠나 이 작품이 그의 유작이 된다고 하는데, 1925년생이니 만 53세에 완성한 소설이다. 겨우 만 53세에 두 남녀 노인(들)의 신체적 노쇠와 남자 노인의 상태를 이리 잘 묘사했단 뜻이다. 거참. 정작 본인은 56세밖에 살지 못해 노인이란 세월을 겪어보지도 않을 운명이었음을, 이땐 몰랐을 거다. 인생이 다 그렇지 뭐.
 책의 주인공 파벨 예브그라포비치(‘창비’나 ‘열린책들’에서 찍었으면 모르긴 몰라도 “빠벨 옙끄라뽀비치”라고 썼기 십상이다), 인생의 황혼을 만나 나이 50이 훌쩍 넘어도 아직까지 철딱서니 없는 아들과 아들놈의 전처와 지금 처, 딸과 사위, 이렇게 좁은 집에서 살고 있는데 식솔들한테 새로운 넓은 집으로 이사할 수 있게 당의 주택보급위원회에 신청도 좀 하고 힘도 쓰라고 날이면 날마다 독촉을 받으면서, 틈틈이 미하일 숄로호프가 일찍이 대작으로 완성한 <고요한 돈강> 시절의 위대한 카자흐 영웅 세르게이 키릴로비치 미굴린이 1919년에 독자적으로 백군 데니킨을 토벌하기 위하여 군대를 이끌고 간 사건을 심각하게 조사 연구하고 있던 노인이다. 파벨이 한 잡지에 미굴린에 대한 글 또는 논문을 발표한 것을 5년이나 지나서 발견한 옛 친구이자 파벨의 첫사랑이자 영웅 미굴린의 두 번째 아내였던 아샤, 즉 안나 콘스탄티노브나 네스테렌코가 읽고 그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1970년대의 파벨은, 그리고 많은 노년세대들은 그들의 자식세대와 거의 완전한 불통 상태로 접어들게 되는데, 그리하여 옆집에 사는 사별한 아내 바냐의 절친한 친구 폴리나는 말로는 영웅의 집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공립양로원에 불과한 기관으로 들어가기로 작정하는 걸 보고, 그래도 자식들하고 같이 살거나 살아주는 것이 노인들의 의무 또는 즐거움, 그것도 아니면 관례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그냥 보통 노인이다. 그렇게 이제 별로 남아 있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던 파벨에게 첫사랑이자 자신이 직접 만나보기도 하고 재판과정에 참여하기도 한 미굴린이란 한 영웅의 두 번째 아내이기도 한 아샤의 편지를 받고, 그것도 대단한 흥미와 관심을 표명하며 동시에 옛 시절의 소년다운 사랑을 듬뿍 담은 정다운 글을 받고는 다시, 당시 1919년 10월에 있었던 미굴린의 이상 상황에 대한 길고 긴 상념에 빠진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카자흐 지방의 반혁명과 동러시아에서 옛 귀족을 중심으로 한 백군 저항세력에 오랜 고통을 겪은 소비에트 내 작가들은, 이 시기가 아주 중요한 작품의 소재였을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카자흐 지방의 내란은 역시 앞에서 얘기한 미하일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 강>이 압도적이고 총체적으로 잘 그려내고 있고, 동러시아 백군의 반혁명투쟁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로 대표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에서는 <고요한 돈 강>의 일부인 한 명의 영웅의 행위를 따라가면서 동시에 노인들의 기억에 완전 의존하는 왜곡된 역사를 추적하고 있다. 즉, 아샤의 기억은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것만 남아 있어서 여러 가지 객관적 사실은 아예 관심이 없거나 기억 자체가 삭제된 상태로 파벨에게 전달을 할 수 있는 반면, 파벨은 그간 숱한 자료를 다 갖고 있어 아샤가 하는 말의 특정 부분만 골라 다시 사건을 구성할 수 있게 된다.
 자, 벌써 얘기 다 한 거 같다. ① 파벨 또래 1970년대 모스크바 노인들은 젊은 세대들과 거의 불가능한 의사소통의 벽 안쪽에서 마치 게토처럼 폐쇄되어 있는 상태였고, ② 아샤로 인해 5년 만에 다시 파벨의 관심과 자료의 재정리에 착수한 그의 작업에, 노인들 특유의 기억하고 싶어 하는 사실만 추려서 기억하는 능력이 더해진 새로운 아샤의 증언을 확보하였으나 전에는 많고 넘쳤던 시간이 이젠 지극히 한정된 길이만 남겨두고 있는 상태. 따라서 ①과 ②의 해소가 소설의 결말이 되겠다고 지금 힌트를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①번 문제가 어떤 수순에 의하여 해소되는지는 절대로 이야기해주지 않을 것이고, ②번 문제는 과연 딱 그 하나의 것만 가지고 있을지, 아니면 또 누군가의 한 부분의 기억이 머릿속에서는 완전 소거된 불완전한 기억일 수도 있을지, 만일 그렇다면 그게 무엇인지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로 가르쳐주지 않겠다.
 이렇게 써 놓으니까, 일반적으로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 한 사건을 전개하는 형식의 소설이라고 말 하는 것 같은데, 내가 읽기론 그랬다. 마치 대학에 입학해 학교 도서관에 가니까 한국전쟁이 없었다면 우리나라에서 소설 쓰는 사람은 뭘 먹고 살 수 있었을까 의심스러워했다가, 제대하여 복학해 다시 도서관에 가니까 이젠 광주항쟁 없었으면 또 소설가들은 어떻게 재료를 구할 수 있었을까 신기해한 거처럼. 그래서 특별하게 이 책을 읽어보시라 권하기는 그렇고, 카자흐 기병의 용맹한 전투를 필두로 하는 고요한 돈 강 유역에서 펼쳐지는 로망을 꼭 한 번쯤 경험해보시면 좋을 텐데 그러기 위해선 역시 <고요한 돈 강>을 읽어보시리라, 이거 한 편이면 너무 충분히 만족하시리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도 시간이 부족하고 정성이 모자라고 또는 그놈의 귀차니즘이 몰려온다면 비록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다르지만 고골이 쓴 <타라스 불바>로 대신하시는 것도 뭐 무난하겠지.
 물론 이 책 <노인>도 수작이다. 이 점을 말하지 않고 독후감을 마감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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