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스러운 탐정들 1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우석균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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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5년 11월, 조실부모하고 삼촌 댁에서 커온 열일곱 살 대학 초년생 가르시아 마데로. 자기는 시를 쓰고 싶은데 어려서부터 조카 뒷바라지 해온 삼촌의 희망을 거스를 수 없어 법학을 전공하고 있는 이 책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 아, 책 이야기 들어가기 전에 먼저 흰소리 한 방.
 나 중학생 시절이었을 때, 숱한 놈팡이들의 마음의 고향, 미아리 텍사스 바로 옆, 유장하게 흐르는 세느 강가에 위치한, 북쪽으로 창을 내 가을부터 봄까지 시베리아 바람이 그치지 않았던 언덕박이 아르센 루팡 중학교의 국어교사 중에는 시인이 다른 학교에 비해서 유별나게 많았다. 소위 말하는 등단 시인. 당연히 시집을 몇 권씩 낸 분도 있었지만 그러면 뭐해, 그분들 이름도 기억 못하는 걸. 그중 참으로 인자하시어 학생들이 졸거나 말거나, 수업시간에 당대 청소년들에겐 참으로 교육적이었던 잡지 플레이보이를 돌려보거나 말거나 전혀 신경 안 쓰고 그냥 수업만 진행하던 시인께서 한 분 계셨는데, 소위 말하는 전위적인 시를 쓰셨다. 요새 우리가 흔히 읽을 수 있는' 과도한 감상과 추상적 단어, 암호화' 등은 당시 전위 시에 비하면 이도 나지 않은 상태라고 말할 수 있겠다. 시에다 그림도 그리고 줄도 죽죽 긋고, 시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기도 하고, 이제 대가리 커서 생각해보면 그게 1920년대 앙드레 브르통으로 대표하는 초현실주의에서 시작한 한 경향에 크게 영향을 받은 듯하다(난 초현실주의 문학작품을 지독하게 싫어하는 1인). 이상李箱이 노래하길, 십삼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고, 이랬다. 이 노래를 읽고 추상이나 반논리反論理라고 하지 초현실주의에 입각한 전위라고는 얘기하지 않는다. <오감도> 정도는 전위에 들어가지도 못한다는 말씀. 내가 아는 것이 짧아 전위시인이라고 일컫는 사람들의 시를 기억하는 것이 없어 샘플로 그런 시를 소개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근데 1975년 멕시코엔 이런 전위적인 시를 쓰고자 하는 시인들이 모여 한 그룹을 만들었으니, 이름하여, 내장內臟사실주의.
 982쪽에 이르는 장편소설 가운데 거의 맨 앞부분에 등장하는 내장사실주의자들. 많아봐야 스무 살을 갓 넘긴 젊은이들이 전위적인 시를 쓰기 위해 모여 동인잡지를 딱 한 번 만들고나서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지는 젊디젊은 시인들의 그룹, 이라 읽기에는 조금 무리. 그것보다는 ‘시인 지망생들’이 젊음의 치열한 통과과정을 거쳐 성인이 되고, (당연히 시인도 되고 계속 글을 쓰지만) 저 멀리 멕시코에서 1920년대부터 시작한 전위적 작가들을 포함한 (거의)모든 전위시인들은, 이 책 <야만스러운 탐정들>의 70% 이상을 바쳐 적나라하게 보여주듯이, 20세기 말까지도 결국 그(전위의) 뜻을 실어 펴지 못한다. 신시新詩 또는 新文學으로의 전위문학, 전위시를 허용하지 않고 결국은 시인들의 펜을 꺾게 만드는 당대의 시절을 볼라뇨는 ‘야만’이라고 칭했던 것. ‘탐정’은 뭐냐고? 그건 당신들이 찾아내시라.
 난 이 책을 읽으면서야 ‘내장사실주의’라는 것이 한 번 거론이 됐다는 걸 알 정도의 형광등이었다. 앞부분에 나오는 내장사실주의를 읽고, 책을 끝내자마자 재빨리 인터넷을 열고 우리나라에 한 때 열광적으로 거론이 되던 ‘후장사실주의’를 검색해봤다. 대한민국의 ‘후장사실주의’는 멕시코의 내장사실주의와는 달리 특정한 장르의 문학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시의 작법이 다른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을 일컬어 그냥 <청록파>라고 부르듯, 이제부턴 전적으로 내 생각일 따름인데, ‘후장사실주의’라는 이름으로 정지돈을 비롯한 몇몇 문인들이 뭉쳐서 우리 ‘후장사실주의’라고 부르자, 해서 생긴 모임으로 이해한다. 여기서 ‘후장’은 항문을 일컫는 말이라서, 볼라뇨가 2003년에 간부전으로 죽지만 않았다면 ‘내장사실주의’를 능가하는 ‘후장사실주의’를 생각하지 못한 자신의 한계를 통탄했으리라. 혹시 알아, 정말로 땅을 치고 엉엉 울었을지?
 여기까지 쓴 것을 한 번 쓱 읽어보니까, 그냥 그런 소설책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나 정말로 읽어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책을 이끌고 가는 중요한 인물은 1975년에 법학과 프레시맨이었던 가르시아 마데로와 칠레 출신 불법체류자 알베르토 벨라노, 역시 칠레 태생의 싸움 잘하는 내장사실주의자들의 대장격인 울리세스 리마, 그리고 (이것 또한 전적으로 내 생각인데) 1920년대 반골시라는 이름의 전위시인으로 이름이 높았던 노인 아마데오 살바티에라. 이들의 베아트리체, 젊은 1950년대 생 청춘들이 죽어라고 찾아다니는 원조 여류 전위시인 세사레아 티나헤로까지, 여섯 명의 등장인물이 벌이는 유랑과 사랑, 방황, 그리고 몰락의 과정을 다양한 인물의 시각으로 그려낸다.
 움베르토 에코는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에서 진짜 시인은 스물 살이 되면 펜을 던져버리고 아프리카로 무기를 팔러 떠난다고 했다. 근데 여기서 진짜로 그런 인간이 나온다. 스무 살 쯤에 조국 칠레도 싫고, 멕시코도 싫어 유럽으로의 밀항에 성공을 하고, 거기서도 실컷 방황을 한 다음, 누구는 또다시 텔아비브로, 누구는 콩고민주공화국을 거쳐 당시 내란의 최고조에 달했던 라이베리아로 떠난 인물. 누가 생각난다고? 맞습니다. 랭보. “진짜 시인은 스무 살이 되면 아프리카로 장사하러 떠난다”는 말이 참 심금을 울려 평생 읽지 않던 외국 번역시 <지옥에서 보낸 한 철>까지 읽었잖습니까? 이런 인간이 정말로 등장한다.
 오늘 좀 정신 사납게 독후감을 썼는데, 한 시절을 풍미했던 전위시인들의 모임, 내장사실주의자들이 어떻게 몰락해 가는지, 그걸 내장사실주의자를 바라보거나 같이 살거나, 아니면 하룻밤 같이 자 본 사람들의 시선으로, 아주 간혹 그 사람들의 입으로 직접 시인하는 과정을 그린 비극.
 근데 이거 비극 맞아? 비극인데 가끔 이렇게 웃겨도 괜찮은 거야?

 

 여태 난 이 로베르토 볼라뇨하고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고 단언하며 살았다. 근데 이런 작품이 있을 줄이야. 이래서 함부로 가타부타 떠들고 다니는 거 아니다. 아, <2666>을 읽어봐? 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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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잘 모르겠어 문학과지성 시인선 499
심보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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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난한 시집. 난 어제도 잘 모르겠고 오늘도 잘 모르겠고, 내일 읽어도 이 시집 <오늘은 잘 모르겠어>는 잘 모를 거 같다. 에잇, 다짜고짜 시집의 표제 시 먼저 읽어보자.



 오늘은 잘 모르겠어



 당신의 눈동자
 내가 오래 바라보면 한 쌍의 신(神)이 됐었지
 
 당신의 무릎
 내가 그 아래 누우면 두 마리 새가 됐었지

 

 지지난밤에는 사랑을 나눴고
 지난밤에는 눈물을 흘렸던 것으로 볼 때
 어제까지 나는 인간이 확실했었으나


 오늘은 잘 모르겠어

 눈꺼풀은 지그시 닫히고
 무릎은 가만히 펴졌지

 

 거기까지는 알겠으나

 

 새는 다시 날아오나


 신은 언제 죽나


 그나저나 당신은…… (전문 28~29쪽)


 

 이게 뭐 좋다거나 시집의 핵심이 된다거나 해서 인용하는 게 아니라, 비교적 짧아 전문을 옮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품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지난밤에는 우리 둘이 서로 사랑을 해 몸을 섞었고, 지난밤에는 눈물을 흘려, 감정이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것도 다 사라져 내가 사람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고, 아 이 다음부터가 문젠데, “눈꺼풀은 지그시 닫히고 / 무릎은 가만히 펴”진 상태가 과연 어떤 자세인지 헷갈린다. 일반적으로 생각해서 눈꺼풀이 지그시 닫히면서 동시에 무릎을 가만히 편다면, 이거 어떻게 본격적으로 야한 자세를 취하기 전에 흔히 시작하는 포즈? 이 상태에서 가만히 가만히, 소토 보체, 펴진 무릎만 옆으로 세우면 완전히 자세 나오는 거 아냐? 좋다, 그렇게 감안하고 다시 읽으면, 시인도 거기까진 알겠단다. 근데 새는 다시 날아오기는 하나? 신은 언제 죽지? 여기서 말하는 신이 뭐지? 세상 온 종교에서 말하는 신, 즉 하느님을 말하는 것인지, 시의 첫 부분에서 얘기했듯이 내가 오래 바라보던 당신의 두 눈알을 말하는 것인지 흠, 잘 모르겠다. 여기서 한 발 더 뗀다. 그나저나 당신은, 언제 죽나? 즉, 최종적으로 알고 싶었던 것이, 당신이 언제 죽는지 하는 거야? 즉, 한때 서로 사랑을 나누던 우리가 해체되어 이제 언제 당신이 죽어버리는지 그걸 오늘은 잘 모르겠다는, 것. 설마 이건 아니겠지.


 그러나 내가 읽기에 시집의 전반은 주로 외로움이나 그리움, 각운을 맞춰 “움”으로 끝나지만 엄연히 “외로움”과 “그리움”은 다르다는 걸 강조하면서, 이 두 가지 주제가 번갈아가며 등장한다. 

 

 “형은 어쩌면 신부님이 됐을 거야. / 오늘 어느 신부님을 만났는데 형 생각이 났어. / 나이가 나보다 두 살 많았는데 / 나한테 자율성이랑 타율성 외에도 / 신율성이라는 게 있다고 가르쳐줬어. // 신의 계율에 따라 사는 거래. // 나는 시율성이라는 것도 있다고 말해줬어. / 시의 운율에 따라 사는 거라고. / 신부님이 내 말에 웃었어. / 웃는 모습이 꼭 형 같았어.” (후략. <형> 69쪽)

 무려 다섯 쪽에 달하는 긴 시의 말미에 가면, 시인의 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있지도 않은 형을 만들어 가상의 형에게 자신의 외로움과 시를 쓰는 일 등 자신의 마음을 쏟아낼 수 있는 인격에 대한 그리움, 또한 그래서 그리움의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데에 대한 외로움까지 참 기막히게 노래하기도 한다.

 

 (전략) “왜 형은 애초부터 없었던 거야? / 왜 형은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았던 거야? / 왜 나는 슬플 때마다 둘째가 되는 거야? // 형, // 응?” (같은 시. 73쪽) 

 마지막에 여기까지 읽게 되면 독자는 대책 없이 얻어터진 뒤통수를 감싸 안을 수밖에.


 물론 언짢은 것도 없지는 않다.


 “나는 멀어지는 시인의 뒷모습을 대고 속삭였죠. / 잘 아시겠지만 우리는 시인이랍니다. / 오늘 우리가 응시한 것들 중에 / 적어도 개와 아이는 움찔했겠지요. / 하지만 선량한 우리는 늘 말하죠. / 무서워하지 말아요. 우리는 시인이랍니다.” (중략. 94~95쪽)


 “나는 소원을 빌기 위해 얼굴이 빨개졌답니다. / 나는 문득 늙은 청소부에게 소리치고 싶었지요. / 어이, 아저씨, 금요일에 나는 인간이고 싶었어요! / 나는 화들짝 깨어난 그에게 말하겠지요. / 놀라지 말아요. 나는 시인이랍니다.” (후략. <나는 시인이랍니다> 부분 96쪽)


 시인에겐 자신이 시인이라는 것이 벼슬이다. 이 시 바로 다음에 나오는 작품이 <나는 이제 시인이 아니랍니다>인데 그것도 자신이 시인이 아님을 주장하여 진짜 시인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읽히는 건 어쩔 거야. 뭐 크게 틀린 일은 아니지만 시인은 아직도 자신이 시인이기 때문에 선하고, 엉뚱하고, 취한 듯 취하지 않은 듯한 것도 당연하다는 주장. 뭐 이딴 거, 다들 잘난 맛에 사는 거니까 마음이 넓은 독자들이 이해해주자. 물론 난 이미 까질 대로 까져서, 시인들의 이런 특권 주장을 들으면 저절로 가운데 손가락 하나만 위로 치켜지는 현상을 금할 수 없다. (불민한 내 경우에 국한해서 얘기하자면) 실생활에서 엮인 시인들은, 이놈이나 저년이나 어찌 그리 하나같이 못됐는지, 아휴!
 혹시 시인은 헤르마프로디토스라서 그들끼리만 서로 이해할 수 있다고, 그리하여 ‘우리 시인들은 그렇다’라고 말하는 거 아냐? 난 그렇게 읽히는데, 만일 옹졸한 내 생각이 맞다면 이렇게 말하리라. “가식 떨지 마!” (이 문단의 첫번째와 세번째 문장은 로베르토 볼라뇨, <야만스러운 탐정들>, 열린책들 2012. 262쪽에 나오는 걸 변형했다.)

 읽는 사람에 따라 (당연히!) 다르겠지만 내가 제일 재미나게 읽은 시는 무지하게 긴 시 두어 개 이후에 나오는 시집의 마지막 작품 <리던던시>. Redundancy, 사전 상 해석에 의하면 듣기만 해도 살벌한 ‘정리해고’는 아니겠고 ‘불필요한 중복’이란 뜻도 있는데 이건가? 아닌가? 제목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던 그건 별개로 하고 일단 읽어보시라.



 리던던시


 이 살픈 머을에 나 훈저 가하 모아 구름우에 망실히 사녀리메. 저 눞인 해롬우에 요살은 가루 눠고 묘살은 세루 눠요. 온 새랑이 서모 삮여 무릍 아훔 닐째 머하면 동념을 아지라지메. 뚜렁 서랑 꾸렁 마랑 옵고 만시나니 이 웊에 까막이 아이닐꼬나. 어뮈여, 우라 잠아에 꾸암만 옵고 만시나니 저 섶에 기럭이 아이닐꼬나. 고오면 가옵구 서오면 서롭다구 어모하모 거오룩지메. 아라리 던던시롬, 아라리 던던시랑, 저니어어는 보자하굼 저 너어어믄 자자하굼. 살픈 달옴 우방지에 다슴마듬 모초록안 오도록히 설펴가메, 이러부낭 저러부낭 삼은 삼답헤 삼다지요. 이러부낭 저러부낭 검은 겁답헤 검다지요. 길세 웊 언닥지난 걔 실을 기리기리 달퍼가메. 한아리에 무유쁜 살믄 꾸암에 누고누벼 모덤 잩게 다홈 모덤 잩게 눈가마메. 어뮈여, 어뮈여. 훈저 사라가겐 훈저 주거가메. 완옥히 주거 아라리 던던시 온눈에 나라가메.“   (전문)


 어떠셔? ‘리던던시’가 Redundancy 맞는 거 같은가? 난 잘 모르겠다. 마지막 문장에 ‘아라리 던던시’란 말이 나와 제목마저 헷갈리게 만든다. 그거 보면 제목 ‘리던던시’는 'Redundancy'라고 오해하라 지어 놓은 거 같다. 아니다. 하여간 이 노래는 어찌 보면 고려 가사 같고 어찌 보면 구강구조 또는 혀의 근육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뭔가를 얘기하는 거 같다. “아라리 던던시롬, 아라리 던던시랑”은 분명히 고려가사에 나오는 후렴구 비슷하지만 무슨 뜻인지는 시인만 알고 있을 듯하다. 우리나라 언어가 신기한 것이(외국어도 같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 시를 써놔도 시인이 노래하는 것이 적어도 어떤 분위기인지는 대강 잡힌단 건데, 이걸 보고 이심전심이라 해야 하나 아니면 언어의 공명共鳴이라 해야 하나. 이것도 잘 모르겠다.
 내가 굳이 구강구조나 혀 근육 이상으로 보는 것도, 이 시 앞의 앞에 나오는 장시長詩 <마치 혀가 없는 것처럼>에서 쇠구조물로 혀를 구강 아래에 가둬둔 채로 발음하는 시인의 실험적 언어 탐구를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시인은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마음은 여전히 혀의 통상적 사용법을 ‘상상적으로’ 작동시킨다. / 그때 마음의 조음 알고리즘에서 벗어난 혀의 소리는 / 격렬한 전투에서 칼과 방패가 부딪칠 때 나는 불꽃 튀는 마찰음이 아니라 / 저능아의 늘어진 혀, 돼지의 구겨진 혀, 광인의 날뛰는 혀가 내는 소리로 폄하된다. // 결국 시를 자음과 모음으로 분절하고 / 숫자와 집합으로 변형한 후 재조합하는 것은 / 억눌린 혀를 장애가 아니라 재료의 한계로 취급한다는 뜻이다. / 내 뜻이 통한다면 그러한 한계 안에서 시를 읽는 이는 / 장인적 주의력과 집중력을 발휘하여 소리들을 일일이 세공하듯 만들어낼 것이다.” (부분. 222쪽)

 

 

 심보선이 시 속에서 철사 등의 금속을 이용해 구강, 특히 혀의 움직임을 구속한 그림


 이 부분을 읽지 않았다면 모를까 읽은 바에 <리던던시>가 혀를 구속한 상태 아니면 구강구조의 변형으로 인해 소리들을 세공하듯 만들어낸 시가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물론 딱 읽어보면 고려가요 비슷한 형태로 시를 써서, 독자로 하여금 절대로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하게 하면서 미지의 단어가 주는 이미지만으로도 시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후렴구를 섞어 음감까지 줘가며 강조한 것으로 읽히지만. 혹시 이거 라틴 아메리카의 아몰랑 주의 작가 훌리오 코르타사르처럼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려는 수작질?
 하여간 색다른 시인이다. 앞으로 계속될지 아닐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이이의 다른 시집 몇 권 더 찾아보는 것도 흥미 있을 듯.
 근데 이 사람 시는 왜 이렇게 긴 거야? 아예 논문 비슷한 것도 있고 말씀이야. 아무래도 조만간 소설을 쓰지 않을까, 그래야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길 더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다 조바심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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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들, 자살하다 민음사 모던 클래식 48
제프리 유제니디스 지음, 이화연 옮김 / 민음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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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대 어느 날, 20년 전 미국 모처의 고만고만한 악동들이 다시 모여 당시를 회상한다. 악동이라 해봤자 대단한 악동도 아니고 그저 나무 위에 얼기설기 판자를 이용한 작은 아지트를 지어놓고 활기방약하게 뛰어놀던 보통의 소년들. 이들 역시 유년, 소년, 사춘기를 거쳐 청년이 되고 성인이 되고, 결혼을 하여 예전 자신들을 빼다 박은 듯한 아이들을 거느리는 인생의 사이클을 순환하는 중이었으며 당연히 개중엔 정수리가 훤히 비기 시작한 이도 있고, 셋 중의 둘은 복부 비만에 따른 고혈압에 주의를 기울이는 중이며 오직 딱 한 명만 전과 같은 체격과 조금밖에 퇴화되지 않은 운동능력을 보유했으나 아내로부터 이혼을 통보받은 보통의 중년들로 성장 혹은 늙어갔다.
 20년 전, 아무런 방비도 되어있지 않은 이들에게 습격해온 사춘기의 혼동과 정체모를 욕정과 갈증은 쉴 새 없이 눈알을 두리번거리며 실체 없는 여성들에 관한 호기심을 충동질 했으며, 이 와중에 하필이면 동네에서, 심지어 카운티에서 가장 예쁜 다섯 자매가 살고 있던 리즈번 가家로 온 눈길을 포함한 모든 더듬이를 곤두세우게 만든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1970년대. 미국의 주부들은 출산 후 아기에게 모유 대신 분유를 물에 타 먹였던 모양이다. 아니면 도대체 이런 일이 벌어질 수가 있을 수 없을 테니. 보시라, 아래부터 13세 서실리아, 14세 럭스, 15세 보니, 16세 메리, 17세 터리즈. 연년생으로 줄줄이 아이를 생산할 수 있던 계급은 중세 유럽의 귀족 혹은 부르주아 외엔 없었다. 낳자마자 초유부터 생략하고 고용한 유모로 하여금 아이의 수유를 담당하게 만든 여인들은 곧바로 임신이 가능했었고, 그렇지 못한 일반 계급의 여성은 수유를 포함한 육아기간 동안은 임신을 하지 못해 약 삼년 터울로 자녀를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것이 20세기 들어와 인간의 젖 대신 소젖으로 대신 영양분을 공급할 수 있게 되자 그냥 1년에 하나씩 생산할 수 있게 되었던 것. 그래도 그렇지 연년생으로 다섯은 좀 심했다. 더 심한 건, 다섯 자매들이 하나같이 빼어나게 예쁘다는 거. 물론 그 중에서 굳이 제일 예쁜 아가씨를 고르자면 네 번째 럭스를 꼽겠지만 비슷한 옷을 입혀놓으면 전부 다 비슷하게 예뻐서 사춘기에 접어든 사내아이들 눈에는 누가 누군지 무구 헷갈리는 지경에 이르렀다니 참 이정도면 만족스런 딸 농사라 할 수 있겠다.
 곤혹스런 사춘기 시절 소년 친구들 가운데 폴 발디노라고 있었다. 이태리 출신 고급 마피아를 아버지 및 친척으로 둔 아이라, 이 집 구성원 가운데 남성 어른들은 언제나 어디서나 적대적 타他 마피아 집단(이를테면 양은이파나 칠성파 같은)에 의한 살해 또는 공격의 위협을 감당하며 살아야하는 운명을 견디고 있었다. 드디어 어느 날, 집안에 거창한 비상 탈출구를 건설해 지하 관을 통해 운하로 빠지는 대피로를 완성시켰는데, 신작로 닦아 놓으면 원래 문둥이가 제일 먼저 걸어가는 법, 폴 발디노가 새로 취미를 붙였으니 지하 대피로 탐험. 이를 통해 폴은 자기가 원하는 동네 어떤 집이라도 하수도를 통해 침입할 수 있다는 걸 알았고 대가로 온몸에서 지독하지는 않지만 하여간 끊임없이 쿰쿰한 냄새를 풍기는 걸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수학교사를 하던 리즈번 씨를 도와준 걸 고맙게 생각해 식사초대를 받은 피터가 일찍이 다섯 자매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자매들 전용 화장실을 사용할 기회가 있어 무수한 여성용품과 그것들의 사용흔적을 발견했고, 여기다 소년들 특유의 과장까지 ‘위대한 경험담’에다 마구 섞는 바람에 자존심이 상한 우리의 폴 발디노는 소년들에게 자기는 자매들이 샤워하는 장면을 보고야 말겠다고, 그 광경을 빠짐없이 너희들에게 다 말해주겠다고 큰소리 뻥뻥 친 다음, 예의 하수구를 통해 리즈번 씨 집에 잠입했던 것이다. 가는 길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텅 빈 리즈번 씨네 집. 1층 탐색을 끝내고 2층에 오른 폴, 원래 출신이 마피아 대부네 가정인지라 보통 아이들 보다는 통이 훨씬 큰 그는 이제쯤 거침없이 방마다 벌컥벌컥 열어젖히기 시작했고, 소녀 또는 처녀들 방이 생각보다 단정하지 못해, 침대 위엔 뭔지 모르지만 하여간 색깔 든 오물이 조금 묻은 흰색 면 팬티가 널부러져 있었고, 십자고상엔 브래지어가 아무렇게나 걸려 있었다. 피터의 허풍이 생각나 목욕탕 문을 왈칵 열어젖힌 순간, 뿌옇게 김 서린 욕조 안엔 마치 스토아학파 철학자인 것처럼 완전한 알몸의 막내딸 서실리아가 뜨끈한 목욕물에 잠긴 채 양 팔의 혈관으로 붉은 피를 하염없이 흘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여기에 우리의 소년 영웅 폴, 어려서부터 가정교육을 잘 받아 피 또는 피를 흘리는 광경에 관한 한 별 부담을 느끼지 않는 마피아 혈통의 소년은 침착하게 상황을 판단해, 서실리아가 변기에 앉아 아빠 리즈번 씨의 면도칼을 이용해 정맥인지 동맥인지까지는 모르겠으나 양 팔의 혈관을 절단한 다음, 면도칼은 변기에 버리고 자신은 더운 물이 담긴 욕조에 들어앉은 상황인 것을 파악하고, 가문의 가르침에 따라 침착하게 911에 전화를 했던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첫 번째 처녀가 자살에 성공했냐고? 아니다. 구급차가 조용한 마을에 사이렌을 요란하게 불며 도착하더니 키 작고 똥똥한 구급대원 한 명과 기 크고 비쩍 마른 대원 한 명, 이렇게 두 명이 서실리아와 리즈번 여사를 태워 병원에 도착해 말 그대로 ‘구급’하는데 성공한다. 정신병리학자의 열성적인 노력과 분석에 따라 서실리아의 사회성 개발을 위해, 아이가 퇴원한 다음 소년들을 초대해 리즈번 가정 최초로 파티가 열린다. 여태껏 파티라고 하면 엄마 아빠가 1박 2일 또는 며칠을 기한으로 집을 비운 아이네 집으로 쳐들어가 가라 주민등록증을 제시하고 구해온 독한 술을 밤새 마시며 최대 음량 비슷하게 로큰롤을 틀어놓고 쉼없이 몸을 흔들고, 소파에서 트렘폴린을 하고, 어질어질한 머리통을 흔들면서 화장실까지 억지로 기어가 밤새도록 토한 다음 또 다시 술을 마시고, 이렇게 밤을 새는 거 말고는 전혀 지식이 없던 소년들이 이리하여 깔끔한 일요일 옷을 입은 채로 수학교사 리즈번 씨와, 수학교사보다 훨씬 더 엄정한 리즈번 부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리즈번 부인이 국자로 떠주는 펀치를 마시며 다섯 아가씨와 별로 재미있지 않은 얘기를 하게 된 것이다. 말 그대로 익숙하지 않은 파티 분위기에 서먹서먹한 시간이 지나가던 어느 순간, 자신을 위한 파티임에도 불구하고 막내딸이자 아직까지는 유일하게 문제아인 서실리아가 엄마한테 자기 먼저 올라가 자겠다고 눈에 힘을 주고 주장한다. 미국은 자유주의 국가니까 억지로 붙들어 매지 못한다는 걸, 원래대로라면 귀싸대기라도 때려 입 닫고 그냥 앉아 있으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동네 꼬마들이 다 모여있는 관계로 엄숙하기 그지없는 리즈번 부인이 정 그렇다면 그렇게 하라고 허락을 하여, 막내딸이자 사실상 오늘의 주인공 서실리아는 먼저 2층 침실로 올라가는데, 이제부터 집중하시라. 5분 쯤 후, 물리학적 법칙에 의하면 1초에 9.8미터가 떨어지는 건 진공상태에서 쇠공이나 사람의 몸이나 다 똑같다. 중력가속도 초당 9.8미터. 그리고 시간의 제곱에 비례한다. 1초에 9.8미터, 2초면 약 40미터. 이런 속도로 뭔가가 휙, 허공을 나는 소리가 들리진 않았다. 그러나 푹 떨어지는 소리. 땅바닥에 쿵,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누가 뭘 팽개치는 것도 아니고 약간 둔탁한 기분 안 좋은 느낌이 드는 진동이, 정식 파티 장소인 지하실에까지 도달했다. 제일 먼저 이걸 느끼고 뛰어 올라간 사람은 리즈번 씨. 나머지 사람들, 리즈번 여사와 어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지독하게 건전한 파티를 즐겨야 하는 사명을 띠고 자리를 지키던 동네 청소년들과 네 명의 자매들이 지상으로 올라가 현관문을 열고 덤불을 젖혀보니, 거기엔, 쇠로 만든 울타리의 창살모양 뾰족한 세로 골격에 가슴이 관통당해 꽂혀있는 서실리아와, 아이의 머리와 골반 부분을 두 팔로 안고 어떻게 해서라도 쇠울타리에서 서실리아를 빼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리즈번 선생, 마치 빼내기라도 하면 서실리아가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2층 방으로 총총거리며 뛰어올라갈 것 같기라도 하는 듯했다.
 이렇게 해서 리즈번 가의 첫 번째로 자살하는 처녀가 탄생하는 것.
 책은 이후 나머지 네 명의 처녀가 자살까지 이르게 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언제 어디서 이들이 자살을 시도하고 성공하는지는 당연히 가르쳐드릴 수 없다. 비록 이 책이 지금 품절 상태이지만 올해 노벨상 받은 가시오 오가피 이시구로의 책이 민음사 모던 클래식 시리즈로 판매하고 있는 덕분에 조만간에 다시 발매할지도 몰라 지금은 입 닫고 있는 것이 스포일러를 예방하는 일이겠다. 책의 거의 앞부분에 서실리아의 죽음과정이 나오며, 아예 처음부터 다섯 자매 몽땅 자살에 이른다는 걸 전제로 깔고, 20년 전 동네 소년들이 당시 관련 인물들을 만나 인터뷰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여기까지가 내가 먼저 책을 읽어본 입장에서 얘기할 수 있는 마지막 선이다. 아주 예외적으로 오늘 독후감은 거의 전부 스토리에 집중해서 썼는데, 내가 이런 종류의 자살은 많이 불편해하는 성격이라서 그랬다. 그나마 작가 유제니디스가 그리 무겁지 않은 필체로, 어떤 경우엔 웃음까지 픽, 흘릴 정도로 책을 썼기 망정이지 이런 종류의 책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처음부터 끝까지 우울, 절망, 감상 뭐 이런 모드로 썼다면 아마 백 쪽도 읽지 못하고 그냥 던져버렸을 것이다.
 다섯 영혼이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송신했던, 세 번은 짧게, 세 번은 길었던 모스 부호, 도와줘. 혹은 SOS. 그걸 발견하거나 수신하지 못했던 20년 전의 소년들. 또는 모든 어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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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인랜드 창비세계문학 49
토머스 핀천 지음, 박인찬 옮김 / 창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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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4쪽에 이르는 장편소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거 읽는데 꼬박 3일 걸렸다. ‘읽어내느라’ 고생이 자심했다. 토머스 핀천이 나하고 궁합이 좀 덜 맞는 거 같다. 지금 책방에서 팔고 있는 번역본은 다 읽었는데 한 편도 수월하게 읽히지가 않았다. 내가 미국인이 아닌 것이 제일 중요한 이유고, 그러고 보니 하필이면 핀천을 읽을 때마다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핀천의 책은 말 그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을 해야 문장과 문장이 엮이면서 만드는 교묘한 연결을 이해할 수 있(었)다. (혹시 내가 미국인이면 모를까.) 물론 그렇다고 다른 책 읽을 땐 집중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지만.
 <바인랜드>는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 주로 생각할 수 있는 한 카운티의 이름이다. 산과 깊은 골짜기가 있어 대마를 키우기 위한 미국 내 최고의 장소. 근데, 시점이 1960년대와 1980년대가 사정없이 왔다갔다, 무수한 알파벳 약자, 핀천의 특기인 없는 단어 새로 만들기, 재즈, 블루스, 컨츄리 등 대중음악부터 각 시대별 코미디 프로그램 및 영화제목, 배우 이름, TV 드라마와 등장인물, 연기자 이름 이런 것들이 각 시대별로 마구 쏟아져, 내 입장에선 TV를 보기 시작한 것이 1965년부터인데, 당시 주로 미국 드라마를 싸게 수입해 와 방송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뭐 거의 따라가지 못하는 수준이다. <타잔>, <말괄량이 루씨>, <내 아내는 요술쟁이> 이런 것들은 알아듣겠는데, 루씨와 요술쟁이를 연기하는 여배우들의 이름을 내가 어떻게 알겠으며, 하물며 루씨와 요술쟁이의 남편 이름과 배우 이름은? 찰리 파커와 마일스 데이비스부터 시작해서 비지스 사이의 시간/연도/시대별 히트작품과 가수들은 또 어떻고. 이렇다보니 613쪽에 나오는 마지막 각주의 번호가 393이다. 각주라는 것이, 책을 읽다가 내용 모르는 단어 또는 인명 또는 노래 제목 또는 노래가사 또는 드라마 이름 또는 배우 또는 역할 이런 게 나오면 그냥 대강 넘어가도 아무 문제없는 걸 번히 알면서도 그것들 위에 작은 번호가 쓰여 있으면 나도 모르게 각주를 한 번 읽어보지 않을 수 없는 거, 그 순간 책 읽는 리듬이 홀랑 잃어버려 같은 문장, 심하면 앞 문장, 더 심하면 문단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하는 악순환, 이해하시지? 대부분의 각주라는 건 사실 읽어봐야 오래 기억도 하지 못하고, 가끔은 정확하지도 않아 읽으나마나 하다는 게 내 주장이라서, 난 차라리 책 뒤에 따로 후추後註가 있어, 읽다가 정말 궁금해 돌아가시겠는 것들만 찾아볼 수 있는 편을 좋아한다. 처음엔 각주가 훨씬 좋았는데 책 좀 읽다보니 그것도 변하더라. 하여간 그리하여 토, 일요일 아침부터 현관문 밖에 한 발자국도 찍지 않고 하루 종일 책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겨우 200쪽 간신히 넘기기 바빴다. 물론 오후 7시 이후엔 책 안 읽었다. 내 좌우명, 다들 아시지? 진로眞露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게다가 요새 방어, 굴, 홍합, 꼬막 등등 맛난 게 지천이란 말씀이지. 어떻게 해 진 다음에도 책 따윌 읽을 수 있으리오.
 자, 위에서 난 미국문화를 전혀 모르는 아시아인이라서 읽기 힘든 거에 관해서 얘기했는데, 또 있다. 핀천의 글쓰기가 너무 자유로워, 심지어 생과 사를 가를 정도라는 것. “타나토이드”라고 처음 들어보시리라 짐작한다. 그게 뭐냐 하면, 굳이 우리말로 펼쳐 설명해서, 업보, 살면서 “선악과 행업으로 말미암음 과보果報”, 라고 네이버 사전에 나오거니와, 주로 악행 같은 것을 저지른 인간(그 인간이 살았건 죽었건 간에)한테 남아 있는 갚아야 하는 (에이 씨, 이담에 뭐라 해야 해!) 하여간 그거, 이해하시리라 믿고 넘어가거니와, 바로 그 업보를 정산해야 하는 살았거나 이미 죽은 집단을 말한다. ‘집단’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단어의 짧음에 대해서 미안하게 생각한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죽은 이들도 등장한다는 말씀. 쉬운 얘기로 유령까지 뻔뻔스럽게 마치 산 사람처럼 나와서 같이 술 마시고 이야기하고 할 짓 다 하는데, 물론 육체적 교접은 하지 못하지만, 산 사람도 포함해 죽은 이들까지 모두를 일컫는 타나토이드는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디엘DL’이란 백인 아가씨가 깡패 같은 아빠를 따라 일본에 살 때 무사武士가 아닌 자객刺客, 즉 닌자 수업을 제대로 받아 백인 여자 닌자가 되어 초절정 고수로부터 수업을 받는다. 이 닌자 수업을 통해 생과 사를 넘나들고, 바로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특정인으로부터만 사라지게 만들고, 신체의 어느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콕 찌르면 찔린 사람은 시름시름 앓다가 1년 후에나 죽게 되어 왜 죽었는지, 누가 죽였는지도 모르게 자연사인 것처럼 위장이 가능하며, 기타등등 기타등등. 아울러 21세기에나 <007> 시리즈에서 등장하는 기막힌 발명품도 나온다. 한 번 읽어보시라.
 “쌘타로자의 제로 프로파일 페인트 앤드 보디에서 일하는 마누엘과 그의 자동차 도금팀이 개발한, 굴절률을 변조할 수 있는 특허 미세 투명 래커 덕택에 그들이 탄 트랜스암은 설사 도로 감시가 있었다 하더라도 가장자리가 살짝 번뜩이는 것 빼고는 감쪽같이 눈에 안 보였을 정도였다.” (313 쪽)
 이거? 투명 자동차. 007 시리즈에서 얼음 쌓인 동네에 BMW가 투명인 채로 다니는 거 보셨잖아. 그게 벌써 여기서 나온다. 이거 뭥미? 이게 핀천의 상상력인지 아니면 장난기인지 그것도 아니면 두뇌에 약간의 이상작용에서 비롯한 것인지 헷갈리지 않을 수 없다. 이러니 어떻게 수월하게 읽을 수 있느냐고.
 책에 관해 말하자면, 핀천 본인이 1937년생. 소설의 한 부분을 담당하는 시간적 공간이 1967년가량. 말 힘들게 한다. “소설의 한 부분을 담당하는 시간적 공간”, 용서하시라. 달리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해서. 1967년이면 미국 역사상 가장 자유로웠던 시기. 비록 베트남 전쟁에 쓸데없이 끼어들어가 엉뚱하게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에 도움을 주기는 했지만, 반전운동과 동시에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 다 합해 좌파운동의 극점을 달리면서도 한편으로는 평화와 자유섹스, 마약, 해피스모크 등, 인류역사상 가장 놀기 좋았던 시기를 딱 그 당시에 접한 토머스 핀천. 당시 자유를 구가하던 세대가 20년이 흘러 닉슨을 지나 레이건 시대를 당하니, 이건, 책에서 핀천이 직접 이렇게 말했는데, 파시즘이 새로이 미국에서 구현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업종을 불문하고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하다못해 노동운동, 가운데서 가벼운 파업 같은 것마저도 사정없이 패 죽이는 달콤 살벌한 시기. 실제로 1980년대와 90년대 초기까지 레이거노믹스와 영국의 대처노믹스로 대표하는 신자유주의는 세계적으로 최고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해, 미국에서는 공항 및 관제탑 파업에 대해 대통령 레이건은 파업권보다 국민의 편의를 위한 공익성이 우선한다고 주장하면서 강제로 파업을 깨부수며 수천만 달러에 달하는 손해배상까지 청구하는 소송에서 이겨버렸고, 대서양 건너 영국에서는 전통적인 강성노조에 의한 탄광노조의 파업을 단칼에 쪼개버리고 만다.
 영화산업에 종사하면서 파업을 벌여 쌍코피가 줄줄 흐른 주인공 가족의 가장이자, 늙은 히피에다가 (정말 이런 것이 있는지 아니면 핀천의 농담인지 모르겠지만)정신이상자에게 주는 연금으로 노동하지 않고 평생 놀고먹는 대신 전처와 완전한 단절을 요구받은 대마초 애연가 조이드 휠러 씨와 이이를 둘러싼 많은 친구들, 히피 친구, 마약 중독자 친구, 영화계 친구, 밴드 친구들과, 20년이 지나 80년대가 되어 이제 성인이 된 딸 프레리와 이 아이의 젊은 친구들, 그리고 위에서 이야기한 DL을 비롯한 타나토이드들에 의하여 벌어지는 기상천외한 난장판에 대해서는 614쪽에 이르는 길고 긴 소설책을 진짜로 읽어보실 여러분들을 위해 온전하게 남겨놓겠다. 사실 벌써 책의 내용에 관해선 거의 다 지껄여놓고 이렇게 아닌 척하는 것도 먼저 읽은 사람의 권리요, 당연한 잘난 척이며, 즐길 수 있는 재미, 아니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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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는 돌 창비시선 331
송진권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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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송진권은 처녀시집을 내면서 이렇게 얘기했다.
 “뼛골에 박힌 선연함을 어떻게 다 풀어낼 수 있을 것인가 / 내 시들이 소를 몰고 어둑발 내리는 길을 걸어 / 느지감치 집에 돌아와 저녁상에 앉은 아이의 얼굴 같기를”
 시집 제일 뒤편 <시인의 말> 부분이다. 2011년 뻐꾸기 울음 분분한 초여름에 옥천에서 썼다고 밝히는데, 옥천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누구? 뭐? 육영수? 아이고 말을 말아야지.
 얇은 책 전체를 한 번 읽어보면, 시집을 상재한 21세기, 아직도 주변엔 이런 촌놈 시인이 있다는 것에 먼저 감격하고, 이미 생을 마친 이들에 대한 그리움의 시가 많다는 걸 발견하며, 세계를 제패한 그놈의 충청도 사투리, 오지게도 썼다고 학을 뗀다. 옥천 출신 시인. 자기도 알게 모르게 동향의 거인 정지용을 일종의 표식돌로 했을지도 모른다. 하여간 다른 고장 출신 시인들 평균보다는 더 많이 정지용을 읽고 외우고, 똑같이 써보고 뭐 그랬겠지. 이런 행위를 다 합쳐 우리는 그걸 ‘영향을 받다’라고 한다. 그래서 처녀시집에서 제일 처음 나오는 시의 제목이 <딸레>. 이 시는 정지용이 쓴 제목의 것을 읽어보지 않았으면 감상이 절반도 되지 않는다. 다행히 난 정지용 전집이 있어 시를 찾아 읽어……보는 대신(요새 세상에 누가 복잡한 책장 뒤져 저 깊숙한 곳 어딘가에 있을 걸 찾겠어!) 간편하게 인터넷 검색해서 먼저 봤다.



 딸레

   정지용


 딸레와 쬐그만 아주머니,
 앵도 나무 밑에서
 우리는 늘 셋동무.


 딸레는 잘못하다
 눈이 멀어 나갔네.


 눈먼 딸레 찾으러 갔다 오니,
 쬐그만 아주머니 마자
 누가 다려 갔네.


 방을 혼자 흔들다
 나는 싫여 울었다.


 

 시는 구두점 하나도 중요한 장르. 인터넷에 떠도는 숱한 시들이 정확한지 믿을 수 없어, 결국 책꽂이에서 책 막 빼내고 기어이 저 뒤쪽에 숨은 <정지용 전집> 꺼내 확인했다. 역시 인터넷 자료들, 전적으로는 믿을 수 없다. 띄어쓰기하고 구두점에 오류. 다시 고쳐 썼다. 

 

 

 정지용의 <딸레>는 이렇다. 먼저 ‘딸레’라는 이름이 참. 이런 것도 공명이다. 앵도, 즉 앵두를 딸래, 라는 듯한 발음의 이름. 하여간 그런데 어찌어찌하여 눈이 멀어 나와 딸레와 쬐그만 아주머니, 세 명으로 이룬 동무 가운데 사라졌고, 딸레가 어디 갔나 싶어 내가 찾으러 갔다 오니 그 사이에 또 쬐그만 아주머니까지 없어져, 이제 혼자가 된 나는 그게 싫어 울었다는 시. 이 정지용의 <딸레>는 송진권에 의해 이렇게 변주된다.


 

 딸레 


 송진권


 앵두나무 아래서
 딸레를 데리고 가자
 쬐그만 아주머니는 두고 가자
 바구니에 담아둔 앵두는 뒤엎고
 물크러지기 시작한 앵두는 흔들어 떨구고
 앵두나무 그늘도 흩어버리자
 바늘로 딸레 눈을 찌르고
 딸레를 안고 어르며
 머리를 빗겨주고
 곱게 화장을 시켜 내 각시를 삼자
 방울을 흔들면
 딸레는 노래하고 춤을 추고
 딸레는 눈이 먼 채 밥을 짓고
 딸레는 눈이 먼 채 빨래를 하고
 그래그래 착하지
 딸레는 얼굴도 곱고
 딸레는 마음도 이쁘고
 딸레는 이제 집에도 못 가고 어떡하나 어떡하나 (후략)



 변주도 변주 나름이지, 지용의 간결한 시를 풀어 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말았다. 좀 섬뜩하다. 딸레를 내 각시를 삼기 위해 쬐그만 아주머니를 두고 가서, 혹시 나 싫어 도망갈까 바늘로 눈을 콕 찔러 눈을 멀게 한다니, 나 이런 참혹한 우화가 어딨어. 있다, 있어. 손자 하나하고 같이 저 산골 화전 가꾸며 살던 노파가, 이제 손자가 다 커서 암내 나는 아가씨한테 가려고 날 버릴까 두려워져 손자 눈을 후벼 앞을 못 보게 만든, 박상륭의 책 <열명길> 가운데 한 편. 그러나 송진권의 우화는 ‘내’뜻대로 되지 않아서

 “그래서 둘이는 아들 낳고 딸 낳고 행복하게 살았더래 / 하는 이야기의 끝처럼 살았으면 싶었지만 / 아무 날 아무 때 어딘가로 나갔다 돌아오니 / 딸레도 없고 아이들도 없고 / 옛날의 앵두나무 아래로 가니 / 앵두나무는 베어지고 / 쬐그만 아주머니도 누가 데려갔는지 없고 / 앵두나무 아래서 / 방물 혼자 흔들다 나는 울었다”가 돼버리고 만다.


 정지용의 깔끔하고 아름다운 시를 이렇게 만들었다. 결과가 좋든 싫든 간에 하여간. 이걸 만약 정지용의 시를 모르는 사람이 읽으면 감상이 되겠느냐 말이지. 그래서,
 “* 정지용 「딸레」 변용.”
 간단하게 각주를 달고 말 것이 아니라,
 “* 정지용 「딸레」를 먼저 보지 않고 시를 읽으면 독자는 오리무중일 걸?”
 이렇게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하는 말씀.
 자, 송진권의 <딸레>는 위, 아래 다 합쳐 전문을 다 옮긴 셈이니 무슨 말인지 모르시겠으면 정지용 먼저, 이어서 송진권의 <딸레>를 한 번 더 구경하시압. 근데 많은 시 가운데 하필 이 시 <딸레>를 제일 앞에다 소개했을까? 하긴 뭐, 시인 마음이긴 하지만.


 이 시집 가운데 불만 한 가지를 꼽으라면 다섯 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시 <산골 엽서> 중에서 두 번째 노래 ‘우렁이 핥고 가는 더운 논물에’를 들겠다. 읽어보자.



 우렁이 핥고 가는 더운 논물에


 종일 들일하고 들어온 늙은이 둘
 하나는 밥을 안치고
 하나는 쇠죽을 끓인다
 찬장엔 사기대접
 파리똥 앉은 백열등
 켜켜 그을음 묻은 서까래
 밤송이 막아놓은 쥐구멍
 이 정지에서 일곱이나 되는 것들이
 밥을 먹고 몸을 키워 대처로 나갔다고
 김나는 더운 쇠죽 구유에 부어주며
 욕봤다 욕봤다
 짐승 먼저 먹이고
 사람이 먹어야 한다고
 상추쌈 싸 공손히 입으로 가져가는 두 늙은이
 우렁이 핥고 가는 더운 논물에
 노는 쌀방개 등허리에
 반짝 모이는 달빛 별빛


 짧은 노래의 제목 ‘우렁이 핥고 가는 더운 논물에’는 박목월 「사행시(四行詩) 한 수(首)」에서 따왔다고 각주가 달려있다. 일단 시인이 남의 시에서 제목이 됐건 부분이 됐건 이리 자주 따온 것도 마음에 들지 않고, 무엇보다 노래를 다시 읽어보시라. 종일 들일 하고 집에 들어와 밥 짓고 쇠죽 끓여 짐승들 먹인 다음 크게 상추쌈 싸 먹는, 복도 많지, 이(齒牙) 좋은 두 늙은이, 이 늙은이들하고 ‘우렁이 핥고 가는 더운 논물’하고 도대체 무슨 연관이 있지? 나는 모르겠다. 두 늙은이가 쌀방개 등허리에서 반짝이는, 할매는 달빛, 할배는 별빛, 이런 거야? 안다, 알아. 늦도록 들에 나갔다가 돌아와 밥짓고 쇠죽 끓여 소 먹인 다음에 상추쌈으로 저녁 먹은 할매 할배들, 그리하여 이제 밤이 된 풍경을 그렸다는 거. 여기서 쌀방개가 뭔지 아셔? 그냥 ‘방개’를 가리키는 말이다. 더 친절하게 얘기하면 예전 논에서 흔하게 보던 물방개. 검은 연미복을 쪽 빼입은 ‘통통한’ 검은 신사 같은 곤충, 기억나시지? 짙은 연미복처럼 반짝반짝 빛을 반사하는 등허리, 위의 달빛 별빛이 두 이 좋은 늙은이라서 우렁이 핥고 가는 더운 논물 안에서 노는 쌀방개 운운했나 싶기도 하다. 그러나, 시인이 목월의 시집을 읽다보니 “우렁이 핥고 가는 더운 논물”이란 기막힌 구절이 머리에 팍, 박혀서 자기 시 어딘가에 써먹고 싶은 마음이 과했다, 라는 생각은 왜 드는지 모르겠다. 정말 절창이잖은가. ‘우렁이가 핥고 가는 더운 논물’이라니. 그래서 박목월이지, 박목월. 맞아, 다음번엔 목월 한 번 읽어야겠다!


 여태 까탈을 잡기만 했는데, 사실 지금 시절에 이처럼 시골스럽게 시를 쓰는 사람이 있다는 것 하나만 가지고도 송진권을 발견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동시에, 조만간 이이의 뒤를 이어 (교과서 시 해석할 때 자주 쓰는 표현을 빈다면) 토속적 이미지를 이야기로 만들면서 뛰어난 시적 이미지를 상상할 수 있게 쓰는 시인이 또 언제 등장해 맥을 잇겠는지 답답한 생각도 들었다. 지금 시는 너무 현대화, 도시화, 삭막한 비통과 감상의 과잉분비 또는 배설, 또는 추상 이미지, 기호학적 해석 유발 등으로 내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이러다가 느닷없이 읽어본 송진권이 반갑지 않았겠는가. 그의 데뷔 시 전문을 옮기면서 독후감을 끝낸다.



 절골
 못골 5



 고종내미 갸가 큰딸 여우살이 시길 때 엇송아지 쇠전에 넘기구 정자옥서 술국에 탁배기꺼정 한잔 걸치고 나올 때는 벌써 하늘이 잔뜩 으등그러졌더랴 바람도 없는디 싸래기눈이 풀풀 날리기 시작혔는디 구장터 지나면서부터는 날비지 거튼 함박눈이 눈도 못 뜨게 퍼붓드라는구만


 금매 쇠물재 밑이까지 와서는 눈이 무릎꺼정 차고 술도 얼근히 오르고 날도 어두워져오는디 희한하게 몸이 뭉근히 달아오르는디 기분이 참 쵸하드라네 술도 얼근허겄다 노래 한자락 사래질까지 해가며 갔다네 눈발은 점점 그치고 못독 얼음 갈라지는 소리만 떠르르하니 똑 귀신 우는 거거치 들리드라는구만


 그래 갔다네 시상이 왼통 허연디 가도 가도 거기여 아무리 용을 쓰고 가두 똑 지나온 자리만 밟고 뺑뺑이를 도는겨 이런단 죽겄다 싶어 기를 쓰며 가는디두 똑 그 자리란 말여 설상가상으로 또 눈이 오는디 자꾸만 졸리드라네 한 걸음 띠다 꾸벅 또 한 걸을 띠다 꾸벅 이러면 안된다 안된다 하믄서두 졸았는디


 근디 말여 저수지 한가운디서 누가 자꾸 불러 보니께 웬 여자가 음석을 진수성찬으로 차려놓고 자꾸 불른단 말여 너비아니 육포에 갖은 실과며 듣도 보도 못한 술냄새꺼정 그래 한 걸음씩 들어갔다네 눈은 퍼붓는디 거기만 눈이 안 오구 훤하드랴 시상에 그런 여자가 웂겄다 싶이 이쁘게 생긴 여자가 사래질하며 불른께 허발대신 갔다네


 똑 꿈속거치 둥둥 뜬 거거치 싸목싸목 가는디 그 여자 있는디 다 왔다 싶은디 뒤에서 벼락 거튼 소리가 들리거든 종내마 이눔아 거가 워디라고 가냐 돌아본께 죽은 할아버지가 호랭이 거튼 눈을 부릅뜨고 지팽이를 휘두르며 부르는겨 무춤하고 있응께 지팽이루다가 등짝을 후려치며 냉큼 못 나가겄냐 뒈질 줄 모르구 워딜 가는겨


 얼마나 잤으까 등짝을 뭐가 후려쳐 일어서본께 둥구나무에 쌓인 눈을 못 이겨 가지가 부러지며 등짝을 친겨 등에 눈이 얼마나 쌓였는지 시상이 왼통 훤헌디 눈은 그치고 달이 떴는디 집이 가는 길이 화안하게 열렸거든 울컥 무서운 생각이 들어 똑 주먹강생이거치 집으루 내달렸는다는디 종내미 갸가 요새두 둥구나무 저치 가믄서는 절해가매 아이구 할아버지 할아버지 헌다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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