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충 극장 열린책들 세계문학 204
카렐 차페크 지음, 김선형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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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롱뇽과의 전쟁>을 하도 재미나게 읽어서 바로 그날 보관함도 아니고 ‘바로구매’ 버튼을 클릭, 샀다. 세 편의 희곡이 담겨있는 선집. <곤충 극장>, <마크로풀로스의 비밀>, <하얀 역병>. 체코의 거장 가운데 한 명이라고 일컫는 카렐 차페크의 작품답게 20세기 전반기의 시대적 고민을 담고 있는 <곤충 극장>과 <하얀 역병>, 아시는 분은 아실 테지만 내가 워낙 좋아하는 작곡가 레오슈 야나체크의 걸작 오페라 <마크로풀로스 사건>의 원전을 읽는 기쁨은 실로 상당한 것이라 읽는 내내 매우 즐거웠다. 이제 드라마 이야기를 해보자.
 <곤충 극장>의 등장인물은 나그네 한 명과 나비 채집에 열을 올리는 교수 한 명을 빼고는 전부 곤충들이다. 프롤로그가 끝나고 1막이 올라가면 나비들의 세상. 첫 페이지부터 나는 야나체크의 또 다른 오페라 <작고 영리한 암 여우>, 찰스 맥케라스가 지휘하는 파리 샤틀르 극장 실황 DVD에 재미나게 등장하는 무수한 곤충들이 번쩍 떠올랐다. 딱 그 수준의 무대를 생각하면 될 듯. 문제는 영상물을 난 봤지만 당신들은 아마도……. 나비들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와중에 이들 속에서 시인도 있고, 떠들기 좋아하는 것들도 있어서 서로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2막에선 하루살이의 번데기와 쇠똥구리 부부, 귀뚜라미 부부, 유충을 키우는 맵시벌 아빠, 기생충 등이 서로 먹고 먹히는, 그냥 먹고 먹히면 될 것을 굳이 식량을 저장해놓음으로 해서 필요 없는 살상을 하는, 누가 읽어도 자본주의의 부르주아 비판임을 알 수 있는 촌극이 이어진다. 3막은 두 개미떼들 간의 전쟁. 아무 것도 아닌 것 가지고 서로 명분을 만들어 전쟁을 하고 숱한 살상행위를 벌이는 것에 대한 비난. 이건 마지막 작품 <하얀 역병>에서도 무거운 주제로 다시 읽을 수 있는데, 카렐 차페크는 자신이 이야기하는 대상이 무엇이든지간에, 나비가 됐건 쇠똥구리가 됐건, 아니면 하루살이나 개미떼들이 됐건 간에 그건 애초부터 사람의 실제 행위 혹은 당대 인간들이 벌일 수 있는 위험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밝힌 작가다. 1920년대부터 일정기간 차페크가 본 서구사회는 사랑과 성에 관한 속박이 만연했으며, 부르주아에 의한 착취가 극에 달했고, 독재자에 의한 군비확장으로 언제 전쟁이 발발할지 모르는 대단히 불안한 상태였다,는 걸 알 수 있다. 모두가 상징이나 은유가 아닌, 곤충 자체가 인간이니까. 그는 작품을 통해 동시대인에게 지금은 모든 인류가 엄정하게 눈을 뜨고 지켜볼 때라는 걸 호소하고 있던 건 아닐까. 하긴 한 작가 붓끝으로 어찌 황하의 물결을 막을까.
 실제로 <하얀 역병>에서는 ‘갈렌’이라는 이름의 의사 한 명이 강대국에 의하여 다른 강대국들을 상대로 벌어지는 큰 전쟁을 막아보려 애를 쓰는 스토리가 나온다. 거창한 구호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매우 애매하고 사소한 명분으로 국민들을 호도해 흥분하게 만들어 전쟁에 이르고야 마는 독재자와, 군수산업을 필두로 하는 거대기업들. 15세기 검은 역병이었던 흑사병과 유사하게 전 유럽을 휩쓰는 하얀 역병, 그 치료제를 무기로 국가 또는 호전적 체제에 대항하여 외롭게 투쟁하는 의사. 그의 치료제로 과연 거대전쟁을 막아낼 수 있을지는, 재미있는 책이니 직접 확인하시기 바란다.
 역시 내가 제일 관심을 가지고 읽었던 건 <마크로풀로스의 비밀>. (관심이 있었다는 뜻이지 제일 공감을 했다는 말은 아니다. 가장 공감을 한 것은 차페크의 반전주의였다.) 이 드라마는 연금술사 아버지를 두었던 17세기 그리스 아가씨 엘리나 마크로풀로스가 주인공인데, 지금 나이가 무려, 자, 박수 준비, 우리의 전통, 그러나 일제의 잔재일 것처럼 보이는 337 박수, 삼백서른일곱 살이다. 연금술사 아버지가 드디어 죽지 않고 젊음을 유지하는 명약을 만들어 엘리나에게 준 것. 엘리나는 명약의 레시피 또는 처방전을 양피지에 적어 품에 안고 크레타 섬을 탈출해서 터키인지 어딘지로 도망한다. 이후 수없이 이름을 바꾸고, 아이도 열 댓 낳고, 숱한 사내들과 연애를 해 이날까지 온 거다. 지금은 에밀리아 마르티란 이름의 소프라노 오페라 가수로 활약 중. 수많은 가짜 이름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건 알파벳 이니셜로 E.M을 지켜왔고, 3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필적도 변하지 않았다. 원래 그건 바뀌지 않는 거라며? 그러나 연금술사 아빠가 만든 명약도 약 300년이 지나면 약발이 떨어지는 것이 문제. 하지만 처방전 혹은 레시피가 적힌 양피지, 그것이 아무리 중요한 서류라고 해도 떠돌이 아가씨가 온전하게 보존을 할 수 있었겠는가. 대신 100여 년 전에 잠깐 동거하던 남자의 집(저택 혹은 성)의 서류함에 고이 보관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에밀리아. 사실은 몇 백 년 전에 자기가 그렇게 하도록 한 것이니 뭐 당연하지만. 마침 지금 문제의 집과 장원, 토지에 관해 소송중이며 곧 판결이 나올 것이란 걸 신문에서 보고 변호사 사무실로 방문하면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300년의 삶. 그건 너무 길고 길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아무런 환희나 행복이나 경이나 만족을 주지 못하는 세월. 깊은 심연에서 생명 없이 사는 것과 비슷한 삶의 이어짐일 뿐이다. 이런 양피지가 당신에게 주어지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음을 유지하면서 300년을 살 것인가, 아니면 모른 척하고 활활 타는 아궁이 속으로 던져버릴 것인가. 그리고 지금 내린 결정이, 확실한가. 불멸은 재앙이다. 내 생각으로는.
 야나체크의 오페라가 원래부터 소리치기shouting와 (레치타티보가 아닌) 대사 비슷한 읊조림이 계속 나열되어 듣기가 그리 쉽지 않지만 그건 많은 내용을 관객에게 전달해야 하는 작곡가의 애로사항이기도 했을 것이다. 물론 야나체크가 이 드라마를 매우 좋아해 오페라로 만들었겠지만, 아이고, 희곡으로도 대사가 무지하게 많은 편이다. 그걸 가지치기 별로 하지 않은 것처럼 각색하면서 다만 4막 작품을 3막의 짧은 오페라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걸 보고 들은 사람들도 원작인 이 희곡을 읽으면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적어도 이 드라마에 관해선, 나도 오페라작품을 좋아하지만, 희곡을 읽는 것이 갑이다.
 이왕 말 나온 김에 유튜브에서 오페라 <마크로풀로스 사건> 마지막 부분을 링크한다. 이 영상물에선 주연 에밀리아 마르티가 죽고(죽은 것처럼 보이고) 조연 크리스티나가 300년을 살 수 있는 처방전이 적힌 양피지를 탐욕스럽게 품에 쥐는 것으로 끝난다. 오페라 대본에선 크리스티나가 벽난로에 던져버리는 반면. 그러면 원래 드라마는 어떻게 끝날까? 힌트. 둘 다 아니다. 그럼 어떻게? 안 알려줌. (궁금하시지도 않겠지만)

 

독일 바이에리쉐 국립 오페라 실황

 

 

 

 

* <곤충 극장> 제2 막 ‘청소부와 약탈자’에서 이런 지문이 나온다.
 “듬성듬성 풀이 돋아 있는 모래 언덕. 풀잎이 나뭇등걸만큼이나 두껍다.”
 잘못 읽었나? 풀잎이 나뭇등걸만큼 두껍다니. 아니면 내가 잘못 알고 있었나? 나뭇등걸이 ‘그루터기’ 얘기하는 거 아냐? 수주대토守株待兎 할 때 주株. 사진으로 봬줘?

 

 

 나뭇등걸에 두꺼비 한 마리 올라가 있다. 이게 나뭇등걸 아냐? 어떻게 풀잎이 이만큼 두꺼울 수가 있냐고! 난 책 읽을 때, 이런 거 나오면 여간해서 다음 줄로 넘어가지 못하는 나쁜 습관이 있다. 끙끙 앓다가, 냉수 한 컵 벌컥벌컥 마시고 다시 읽다가, 도무지 안 되겠어서 신발 신고 나가 한 바퀴 돈 다음 다시 책상에 앉아 그건 그러려니, 하고 그냥 읽어 내려가는데 바로 다음 문장에 글쎄 이런 게 나오는 거다.
 “풀잎에 붙은 번데기 하나가 시체를 먹는 벌레 떼에 습격을 당하고 있다.”  (40쪽)
 에잇. 제목이 <곤충 극장>이면 곤충을 전부 사람이 연기해야 한다. 그러니 풀잎에 붙은 번데기도 사람이다. 사람이 어떻게 풀잎에 붙어 있을 수 있겠냐고. 그러기 위해선 아무리 풀잎이라도 적어도 저 사진 만큼 두꺼울 수밖에 없잖아. 아, 성질은 급해서 말이지 그걸 못 참고 똥을 싸요, 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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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12-20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을수록 감탄하게 되는 작가입니다! <호르두발>이나 <별똥별>도 틀림없이 좋아하시리라 믿습니다. 다만 지만지 책이라 좀 비싼 것이 흠;;

Falstaff 2017-12-20 10:13   좋아요 1 | URL
질문 있습니다!
ㅎㅎㅎ 그동안 지만지 책은 한 권도 사지 않았는데요, 그건 비싸서가 아니라, 정말 완역을 했을까가 궁금해서였습니다.
얘기하신 책들, 잠자냥님 읽어보시기에 완역 같았었나요? 그 출판사가 좋은 책들을 아주 많이 찍더라고요. 완역이기만 하면 진짜 고려해볼 만할 텐데요. ^^

잠자냥 2017-12-20 10:26   좋아요 1 | URL
네, 지만지 책이 완역이 아닌 것들이 있어서 좀 꺼려지지요. 그런데 <호르두발>이나<별똥별> 이번에 나온 것(하얀책표지)은 완역인 것 같습니다. 꼭 한 번 읽어보세요.

Falstaff 2017-12-20 11:26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얼른 가서 뒤져봐야겠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 대산세계문학총서 111
니콜라이 예브레이노프 지음, 안지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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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라더라? 애정? 예컨대 헤세를 좋아한다는 얘기를 소위 급식체로 쓰면 ‘헤세를 애정한다’고 하는 거 같은데, 그렇다면 난 다분히 러시아 작가와 작곡가를 애정한다. 문학과지성사에서 찍은 생소한 러시아 극작가라는 점이 이 책을 선택하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어제, 퇴근버스에서 읽다가, 너무 재미있어서 그냥 푹 빠졌고, 과하게 집중을 하는 바람에, 무려, 두 정류장이나 더 가서 내렸다. 집까지 걸어오는 동안 추워 죽는 줄 알았다. (지금 독후감 쓰는 날짜가 12월 14일. 오늘 최저온도 영하 14도, 어 춰!) 오다가 소주 두 병 사와서 다 마시고 잤다. 일어나 거울 보니까 저게 인간인지 한 마리 축생인지 막 헷갈린다. 그래도 마누라, 바가지 안 긁는다. 햐, 살다보니 이런 날도 온다. 물론 콩나물국 같은 건 기대도 하지 않는다. 이 책, 읽지 마시라. 밖이 내다보이는 버스 타고도 두 정류장을 더 가는데, 만일 지하철 2호선이라면 무한 순환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세 편의 희곡을 담고 있다. <즐거운 죽음>, <제4의 벽>, <가장 중요한 것>.
 다 매력이 있다. 첫 작품 <즐거운 죽음>부터 난 극작가 예브레이노프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등장인물 다섯 명에 불과한 소품. 아를레킨, 콜롬비나, 피에로, 의사, 죽음. 스토리는 죽음의 침상에 누운 아를레킨이 죽음여사와 포옹하기까지. 전형적인 궁정 희극의 등장인물이 나오니, 당연히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까지를 겸비해, 프롤로그에서는 피에로가 나와 지금 아를레킨이 죽어가고 있고, 자기는 아를레킨의 아내 콜롬비나와 내연의 관계에 있다는 얘기로 배경 설명을 해주고, 짧은 에필로그에서도 나름대로 극을 정리해주는데, 에필로그의 내용은 안 알려드림. 이 작품을 읽고 예브레이노프가 상당히 감각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일까, 아니면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작품을 썼을까, 조금 궁금했다.
 <제4의 벽>에서 ‘제4의 벽’이 무엇일까. 일반적인 연극무대를 상상해보시라. 관객은 무대를 향한 터진 공간 안에서 움직이고 대사하고 노래하는 배우들을 본다. 이 작품에선 구노의 오페라 <파우스트>를 공연하는데, 극장주가 괴테의 조수였던 에커만이 쓴 책 <괴테와의 대화>를 보니, 메피스토펠레는 또 다른 파우스트의 자아라고 했던 기억이 나서, 그러면 메피스토펠레는 극에 등장하면 안 될 것이라 생각하기에 이른다. 파우스트의 또 다른 자아라면, 파우스트가 메피스토펠레도 노래해야 한다는 주장. 그런데, 파우스트는 테너, 메피스토펠레는 베이스. 어떻게 같은 사람이 노래를 해야 하나. 그냥 오케스트라가 조를 바꿔 테너 음역에 맞추면 된다. 마르가리타는 16세기의 촌년. 그러므로 맨발에 때가 줄줄 흐르는 거친 옷을 입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아무리 러시아에서 공연을 한다고 해도 프랑스 작곡가 구노의 <파우스트>는 중세 독일어로 노래해야겠지? 당연하지! 문제는 파우스트가 메피스토펠레를 소환하는 장소. 그게 말씀이야, 아시다시피 파우스트 박사의 방이다. 연극 또는 오페라를 지극히 사실적으로 공연하려면 진짜 그 모습을 담아야 하거늘 어찌하여 파우스트의 방구석은 벽이 세 개밖에 없느냐는 것. 그리하여 제4의 벽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의견. 연극 또는 오페라 연출계의 이 놀라운 실험은 결국 이루어져 관객은 제4의 벽에 붙은 창문을 통해 파우스트를 볼 수 있을 뿐이다. 재미있겠지? 이런 생각, 아무나 못한다. 책 뒤에 붙은 ‘옮긴이 해설’을 보면 러시아에선 예브레이노프 보고 ‘연극이라는 마약에 중독된 아편쟁이’라고 한다던데, 이런 아이디어는 평생을 연극판에 있던 작자들이나 생각해낼 수 있는 거다.
 어제 나로 하여금 버스 정류장 두 개를 지나치게 했던 건 표제작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4막 구성의 장편. 1920년대 중반에 쓴 작품이라서 이미 현대적 실험 같은 것이 가미되어 있다. 한 인간이 여러 인격을 갖추어 다양한 인간을 위해 노력하는 이야기인데, 내가 이렇게 재미없게 말한다고 해서 단순한 작품이라고 생각하면 정말로 수원 밑에 병점 찍고 ‘오산’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머릿속에서 배우들이 연기하는 모습이 훤히 보이는 듯한, 재미난 희곡을 읽을 때 경험할 수 있는 희열을 느낄 수 있다. 책의 앞부분에 있는 두 편의 희곡이 다시 이 <가장 중요한 것>에서 재연하여 문학과지성이 이 세 드라마를 책 한 권으로 묶은 걸 납득하게 된다. 등장인물로 다시 아를레킨도 나오고 재미나게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도 나오니 절로 웃음이 픽 새는 건 어쩔 수 없다.
 이쯤 구라를 풀어놓았으면 구미도 좀 당기시려나? 하여튼 읽어보시라. 물론 당신의 재미를 내가 보장할 수는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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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12-19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4의벽>에 대한 썰에서는 왠지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덕구빌>에 연상되네요.

내용이 흥미롭기도 하구요, 항상 폴스태프님의
낚시질에 파닥거리는 일인이엇습니다.

아~ 저희 동네 도서관에는 없는 모양입니다
아쉽네요.

Falstaff 2017-12-19 12:26   좋아요 0 | URL
지금 없는 거겠지요 뭐. ^^;
근데 언제나 말씀드리는 거지만, 낚인 분들이 진짜로 읽은 다음은 절대 책임지지 않습니다. 음하하하....
 
바텍 열림원 이삭줍기 10
윌리엄 벡퍼드 지음, 정영목 옮김 / 열림원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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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된 책이다. 작가 백퍼드가 1760년 생. 19세기도 아니고, (발음조심!) 18세기 사람으로 그가 스물일곱 살 때 엉뚱하게도 프랑스어로 발표했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18세기나 21세기나 사기꾼은 틀림없이 있는 것이라서 새뮤얼 헨리Samuel Henry라는 작자가 백퍼드의 감독 아래 영어로 번역하며 자세한 주석까지 달았건만, 하이고 정작 1786년에 영국에서 영어번역본을 출판할 때는 저자의 허락 없이, 누구의 창작물이 아니라 아랍 책을 번역한 것처럼 사기를 쳤단다(책 뒤 <작품해설> 참조). 백퍼드는 (지금 시절이면 청소년 나이지만) 청년 시절에 페르시아에서 잠깐 산 적이 있어서 특히 아랍문화에 대한 호기심이 아주 많았다고 하는데, 18세기 초 영국에선 리차드 버튼Richard Burton(글쎄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두 번 결혼했던 영국 배우하고 이름이 같지 뭐야)이 <천일야화>를 번역 출판하고, 버튼보다 조금 이르게 프랑스에서도 역시 앙투안 갈랑이 같은 책을 번역 출판해서, 소위 오리엔탈 붐이 일어나고 있었다 한다.
 난 앙투안 갈랑의 <천일야화>를 읽어봤다. 열린책들에서 나온 다섯 권짜리. 어려서 대충 야화의 단편을 요약한 것들 또는 만화 또는 만화영화로 봤던 것인데 전편이 궁금해서 읽어봤더니(솔직히 말해버려? 좋다!), 괜히 읽었다. <천일야화>를 재미나게 읽기에는 이미 나이가 너무 들어 상상력이 무뎌졌거나, 이젠 셰헤라자데의 노가리 정도 가지고는 흥미를 자아낼 시대가 아니기 때문일 거다. 또 모르지. 리차드 버튼의 <천일야화>는 또 달랐을지. 하여간 그랬다. 그렇다고 버튼 버전으로 다시 읽어볼 정성 같은 건 없다.
 왜 얘기하다가 갑자기 <천일야화>를 들먹거리느냐하면, 이 책 <바텍>이 <천일야화>의 한 에피소드라고 해도 전혀 이상할 거 같지 않아서다. 선한 이슬람 사람이 배화교도의 유혹에 넘어가 갖은 고생하다가 지옥 불 앞에서 간신히 구조받는 이야기.
 오늘 독후감, 끝.
 왜냐하면, <천일야화>를 괜히 읽었다고 했고, <바텍>이 괜히 읽은 <천일야화>의 한 에피소드 같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했으니, 결론은? 맞습니다. <바텍>도 괜히 읽었습니다. 그냥 이야기책입니다. 우, 씨. 중고책도 아니고 2003년에 나온 구간을 정가 다 줘가며 샀는데!


 * 근데 이거 왜 산 거야? 예전부터 구입 예정 목록의 상당히 앞자리에 있었던데. 잠깐 미쳤었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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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의 장례식날 생긴 일
모니카 마론 지음, 정인모 옮김 / 산지니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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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다른 작품 <슬픈 짐승>을 읽고 곧바로 보관함에 담아놨던 책을 드디어 읽었다. 마론은 동독 출신. 11세 때 서 베를린에서 의붓아버지 칼 마론을 따라 동 베를린으로 건너가 살다가, 1988년 함부르크로 옮겼고, 통일 이후 다시 베를린에서 살고 있단다. 작품이 나온 것이 2013년. 그러니 책을 쓰기 시작한 시점을 2012년 정도로 보고, 작품 속의 주인공 ‘나’ 루트의 그때 나이가 61세니까 실제 모니카 보다 한 열 살 젊은, 또는 덜 늙은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역자 해설을 보면 이이가 쓴 작품 가운데 한국말로 번역된 작품이 <침묵의 거리>라고 있다 해 검색해보니, 부산대학출판부에서 1995년에 찍었고, 지금은 품절이다. 뭐 그런가 보다.
 <슬픈 짐승>은 불륜 이야기. 여기다가 동서독일을 사이에 둔 연인들을 설정해서, 이게 당시 동쪽 독일 출신 작가들 사이에 유행했던 모티브 가운데 하나인가본데(이 말도 완전히는 믿지 마시라. 그동안 동독 출신이 쓴 소설들 좀 읽어보니 이런 유형이 유난히 많더라는 뜻일 뿐이다), 하여간 그런 연애 소설을 감각적으로 쓴 작품. 반면에 <올가의 장례식 날 생긴 일>에서 독일은 완전히 통일이 된 상태.
 물론 등장인물 대부분은 동독 출신으로 해놓았다. ‘올가’가 누구일까? 누구긴 누구야, 타티아나의 동생이지. 라고 대답하면 당신을 푸시킨의 열혈 팬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 죽은 올가는, 제목이 ‘올가의 장례식 날’이라고 했으니 당연히 올가는 이미 죽은 상태인데, 작품의 시대적 배경인 21세기, 손가락으로 스마트 폰의 앱을 눌러 사진을 찍는 시점에서 90세. 우리말로 소위 ‘호상’ 아니겠어? 그동안 건강하게 살다가 적당히 한 보름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으니 세상에나, 이렇게 부러운 죽음이 또 어디 있겠나. 근데 누구냐고? 주인공 루트의 전 시어머니.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시어머니 될 뻔 했던 노파. 무슨 말씀이냐 하면, 올가가 젊었던 시절에 (아주 당연하게 올가도 젊고 아름다웠던 시절이 있었다) 잘생긴 남자 헤르만과 가약을 맺어 외아들 베른하르트를 생산했는데, 이 아기가 점점 자라 건장한 청년이 되자 우리의 주인공 ‘나’ 루트의 남편이 된다. 둘 사이에서 딸 파니가 태어나 이제 혼인신고를 해볼까, 싶어 남편네 집에 인사하러 가보니까, 무지하게 가부장적인 마초 헤르만과 올가가 시부모짜리였던 것이다. 거기까지는 뭐, 어차피 결혼한 다음에 같이 살 거 아니니까 별 문젠 없는데, 글쎄 베른하르트가, 대입 자격시험을 치루고 나자마자 시인 지망생 웨이트리스 사이에서, 아들을 하나 뒀지 뭐야. 이름이 앤디였지 아마. 사랑하는 사이에 그 정도는 이해한다고 치자 이거다. 하지만 앤디는 어려서 자전거를 전속력으로 몰다가 트럭 돌출부에 이마 정면을 오지게 얻어맞아 평생을 비정상적인 상태로 누군가가 돌봐주지 않으면 생활이 곤란한 상태인 걸 알자마자, 루트의 머릿속은 극도로 혼란한 상태에 이르러, 딸 파니는 내가 알아서 키울 테니 양육비 같은 거 필요 없고 그냥 헤어져주기만 하면 된다, 선언하고 결혼을 물려버렸던 것이다. 그 후, 베른하르트도 결혼하고, 나, 루트도 결혼해 서로 잘 살고 있으며, 특히 올가하고는 이제 친구처럼 가끔 만나서 차도 한 잔씩 하고, 뭐 서양 사람들 잘 하는 거, 그런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올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루트. 불과 몇 주 전에 전화통화도 했고, 지금은 조금 몸이 안 좋으니 조만간에 좋아지면 한 번 들르라고 약속도 했는데 갑자기 죽어버렸다니, 조금 황당. 그러나 나이 아흔의 상태에서 몸이 ‘조금’ 좋지 않다는 것은 언제나 죽음을 전제로 할 수 있는 것이라 그리 많이 놀라지는 않았다. 장례식, 올가를 드디어 땅에 묻는 순간 만일 자신이 그 자리에 없으면 비록 부활이란 걸 전혀 믿지는 않지만 올가가 행복해하지 않을 거 같아서 일단 참석하기로 작정을 하는데, 속으로는, 만일 장례식에 참석한다면 꼴도 보고 싶지 않은 베른하르트도 봐야 하고, 밥맛 없는 그의 법적인 아내도 만나야 하고, 무엇보다 내 딸 파니가 베른하르트를 아버지입네 하고 팔짱을 꼭 끼고 다닐 수도 있는 꼴도 겪어야 하는, 전혀 바람직하지 않은 경우를 당할 수도 있다. 그래도 장례식에 가? 일단 가기로 결정을 하고 딸과 장례식장 입구에서 만나기로 한다. 몇 시에? 그런 거 없이 그냥 알아서 만나기로.
 그래서 루트가 장례식장에 정말 갔냐고?
 갔다.
 거기서 잘 지냈냐고?
 잘 지냈다. 장례식장엔 길을 헤맨 끝에 도착 못하고 대신 베를린 시의 모처에 있는 공원에 들어가서 개 한 마리와, 귀신 몇 명과, 악령 한 개와, 놀랍게도 지금 막 묻힌 올가를 만난다. 그리하여 이 책은 루트가 귀신(들)하고 나눈 삶과 인생과(그게 그건가? 하여간) 생각과, 무수한 결정들과 옳고 그름 같은 것들에 대한 대화, 당연히 완벽하게 주인공 루트의 머릿속에 잠복해있던 사유의 결과물이겠지만 그런 것들이 유령과의 대화를 통해 나열된다. 정말이다. 그게 다다.
 지극히 개인적인, 미니멀리즘으로의 사색만 있는 것이 아니라, 베른하르트와 결별 후 다시 결혼했다가 이혼한 전남편 서독 출신 헨드리크의 친구였던 알콜 중독자 브루노 귀신을 등장시켜 작가 마론이 체험했던 서독으로의 이주에 관한 단편斷片과 브루노와 헨드리크 사이에 있었던 지극히 바람직하지 않은 창작물의 전용轉用 같은 따끔한 장면도 이야기한다. 그러나 200쪽도 되지 않는 짧은 작품에 대해 이런 배경 말고, 공원에서 만난 유령들과의 자세한 대화 같은 건 더 이상 소개하지 않는 것이 예의일 것이다.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장 많은 면을 차지하는 2부가 공원에서 귀신 만나는 얘기, (1부는 도입이고) 3부는 결말이겠지, 싶었지만, 3부에 들어서도 귀신들은 마지막 페이지(또는 그 근처)에 이르러야 물러난다. 그러니 내가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어. 이것도 너무 많이 힌트를 준 거 같은데 말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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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일기
다니엘 페나크 지음, 조현실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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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넘겨 본문으로 접어들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출간에 부쳐”란 작가의 말이다. 흥, 작가는 처음부터 독자가 속아 넘어가기 바란다. 진짜로 이 작품이 자기 친구의 아버지가 평생에 걸쳐 쓴 일기인 것처럼 꾸미는데 여념이 없다. 뭐 정말일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구라일 걸? 그러나 이 서문 비슷한 작가의 말 역시 다니엘 페나크의 재미난 소설 <몸의 일기>의 일부라고 읽는 편이 훨씬, 바람직하지는 않고, 글쎄 좋은 일도 아니고, 그래, “나 책 좀 읽은 몸이야”라고 폼 잡을 데만 효과가 있겠다. 왜 이 이야기를 길게 하느냐면, 어느 날 작가의 ‘리종’이란 이름의 여자친구(애인 말고 그냥 친구 있잖아, 친구)가 눈을 벌겋게 하고 찾아와 며칠 전에 세상 뜬 평소 근엄하기 이를 데 없던 자기 아버지의 유물인 ‘몸에 관한 일기’를 좀 읽어보라고 했단다. 리종의 눈을 보니까 밤을 패서 아빠의 일기를 읽은 듯해서 그러마고 하고 반듯한 글씨로 쓴 일기책을 열어보고는, 에그머니, 너무 재미있는 거라, 자기도 꼴딱 밤을 새워 읽고나선 책으로 내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도 읽어보게 했다는 거다. 이렇게 초를 쳐 놔야 책, 특히 프랑스의 1923년 10월 10일 생 교육 잘 받은 인텔리 남자의 일기가 작가의 의도대로 독자한테 먹혀들 수 있단 얘기지. 그런데, 굳이 잘난 척하느라 나처럼 이리저리 골 아프게 따질 필요는 없다. 작가가 말한 대로 그냥 그렇구나 하며 읽는 것, 즉 작가의 의도대로 따라 읽는 것이 오히려 더 좋은 독법일 것이긴 하다.
 아빠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서 독일군의 독가스를 흠뻑 자시는 바람에 허파에 큰 문제가 생긴 채 귀환한다. 어디서 본 거 같다고? 그려, <티보 가의 사람들>에서 티보 가의 맏아들 앙트와느 역시, 동생 자크가 그토록 반대했던 1차 세계대전에 의무장교로 참전해 독가스 중독으로 생을 마감한다(이 책은 꼭 읽어보셔야 혀!). 여기서 작가는 기가 막힌 꼼수를 부리는데, 그게 뭐냐 하면, 일기의 주인공 ‘나’의 아빠(처음부터 끝까지 작가는 부친을 “아빠”라고 호칭한다. 여든이 훨씬 넘어서도)가 원래부터 대단한 지식인으로 등장한다. 지긋지긋한 여자인 엄마가, 오랜만에 악당 여자로 등장해서, 아빠와 나를 들들 볶아내는 와중에도, 몸 전체에 죽음의 그림자를 덮은 아빠는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나의 지성과 감성을 놀라운 속도로 향상시키는 것이다. 아빠가 죽은 다음 입학한 학교에서 교사들이 '나'가 쓰는 단어와 똑 부러지는 문법, 문장에 기가 막혀 하는 수준. 어린이의 지성으로는 사실상 지독하게 예외적이고 그래서 비정상이지만, 왜 이렇게 설정을 했을까. 사실 이런 거 자꾸 따지면 재미나게 책 읽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지만, 한 말씀 올리자면, 그렇게 해 놓아야, 또래에 비해 놀라운 지성과 글 쓰는 실력과 습관이 있는 것이 타당하고, 어려서부터, 십대 초반부터 자기 몸을 탐구하는 목적,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사변적 일기가 아니라 오직 자신의 몸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적어나가는 일기를, 거의 지적인 어른의 솜씨로 써도 그리 어색하지 않게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나’가 12세가 되어 이제 보이스카우트 대원으로 캠핑을 가서 모의 전투를 하다 포로가 됐는데 적군은 나를 나무에 묶어 놓고 철수를 해버렸다. 숲 속에 인적은 없고, 정적 속에 바스락 거리는 소리는 들리고, 아니, 그것보다 묶인 내 두 발 일 미터 앞에 뚫려 있는 개미굴에서 개미들이, 바글바글 수백만 수천만의 개미들이 오글오글 모여 있어서, 어느 순간 그것들이 내게 접근하더니 내 몸의 모든 빈 곳에 침입해 나를 자디잘게 뜯어 먹을 수 있겠다는 공포가 엄습했고, 하필이면 순간 개미 두 마리가 발끝에서 시작해 다리 위로 기어오르는 거 아닌가. 보이스카우트 대원들이 배운대로 절대로 풀 수 없는 매듭으로 나를 나무에 묶어 놓았고, 대원들의 인기척은 아무 곳에서도 들리거나 보이지 않고, 개미의 침략과 포식에 대한 극한 공포는 얼마 살지 않았지만 여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크고 높은 비명을 지르게 했으며, 눈앞이 완전히 깜깜해지고 머리통은 빙글빙글 돌며 귀까지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는 지경에 처하자, 순간, 그만 바지 속에다 그대로 똥까지 싸놓았던 것이다. 아, 그 쪽팔림이라니! 차라리 숨을 멈춰 죽는 게 났겠다고 생각했으나 절대로 숨을 멈춰 죽음에는 이르지 못하는 나는,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완벽한 절망 속에서, 열두 살의 소년이 끔찍하게 비명을 지르면서도 결코 한 번도 엄마를, 나를 직접 낳아준 엄마를 외치지 않았다는 걸 알아챘고, 캠프장에서 날 데려온 엄마 역시 보름이 지나도 화를 풀지 않은 채 욕실의 거울 앞에서 내 어깨를 아프게 쥐고는 “거울을 봐, 네 모습을 보란 말이야”라고 날 흔들어댔으나, 내 눈꺼풀은 절대 열리지 않았다. 나무에 묶여 비명을 지르며 똥을 싸지른 다음 날부터 나는 내 몸, 오직 내 몸의 현상에 대한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죽을 때까지 75년 동안.
 책에서 ‘나’는 1920년대 초반 태생으로 요즘 부모처럼 잠옷 차림으로 아침밥으로 시리얼을 먹을 수 없는 세대. 반드시 세수와 면도를 하고 넥타이를 매고 나서야 아침 식탁에 앉을 수 있으며, 구스타프 말러를 좋아하는 척하지 않으면 지식인 그룹에 포함될 수 없었던 첫 세대는 가히 초기석기시대의 인류였으며, 2차 세계대전 때에는 비록 의도하지 않았지만 레지스탕스 조직에 들어가 왼팔을 거의 잃을 뻔한 부상도 당했으나 ‘팡슈’라는 활달한 여자 레지스탕의 도움으로 정상을 되찾았고 영광스럽게도 드골 장군으로부터 레지스탕스 활동의 보답으로 훈장까지 받았다. 이후 학술연구를 계속하다 대기업의 그룹 전체 인사담당 사장 정도의 자리에 있다가 은퇴하고 늙어죽는 인물. 한 마디로 평생 잘 닦인 곧은길을 곧바로 걸어간 복 받은 인간. 대강 그림이 그려지시지?
 그러나, 이런 호강에 겨운 인물도 허약한 몸을 근육으로 만들기 위해 하루도 쉬지 않고 팔굽혀펴기와 윗몸일으키기를 규칙적으로 했으며(쉬울 거 같지? 한 번 해보셔. 하루도 빼지 않고 말씀이야), 어느 날 어려서부터 날 직접 키운 거나 마찬가지인 비올레트 아줌마의 말에 의하면 분수 가에 풀이 돋고(생식기 주위에 털이 났다는 뜻), 조르주 삼촌의 설명에 의하자면 이제 본격적인 남성으로 자격이 생긴 기념할 만하게, 아침에 일어나니 내복과 담요에 빳빳하게 풀이 먹여져 있었으며, 그때부터 여인을 향해 날마다 숨 막히는 갈증에 시달리고는 했다가, 한 명의 레지스탕으로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갈증을 참아가던 어느 날, 드디어 해방을 맞이하고,  전시엔 야매 의사였던 팡슈가 준 그간의 노고에 대한 선물로 건네 , 아름답고 포동포동한 육체를 가진 퀘벡 출신의 용사 쉬잔에 의하여, 드디어 딱지를 뗀다.
 일기는 이후 자잘한 종용의 발견과 제거, 이러저러한 과정을 걸친 결혼과 출산, 노화, 노화의 심화, 백내장과 수술 후의 개안, 또다시 노화, 계속되는 노화에 따른 몸의 변화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한 남자의 몸. 그 세계. 그래서 오히려 나는 이 책을 여성들이 좀 읽어보는 것이 어떨까 싶기도 했는데 그건 뭐 전적으로 독자들 마음이니 굳이 권하지는 않겠다. 그동안 숱하게 읽은 일기체 소설들. 그것들의 공통점은 거의 감성적인 일기다. 감성적인 일기가 아닌 몸에 대한 객관적인 고찰. 그러나 일기라는 형식이 어쩔 수 없이 포함하는 사적인 감정이 일부 들어간 소설. 이렇게 얘기하니까 별로 재미없을 것이라 생각하실 수 있지만, 천만의 말씀. 무지 재밌다. 하루에 완독은 백수가 아닌 현대인으로는 불가능에 가깝겠으나 길게 잡아 하루 반이면 485쪽 거뜬하게 독파할 수 있게 곳곳에 지뢰를 묻어 놨다. 전시에 ‘나’의 별명이 지뢰. 지뢰가 터져 왼팔이 거의 날아갈 뻔해서 팡슈가 ‘지뢰’라는 별명을 붙였다나.
 여기서 나오는 재미난 장면 하나 소개한다. 이게 제일 재미나서가 아니라 짧아서 옮기는 것일 뿐이다.


 “사모님도 스트링을 입고 있지 않나요?
 뭐라고요?
 스트링 말이에요, 끈으로 된 팬티요. 클로델이라면 ‘정오의 분할’이라고 불렀을 만한 옷이죠. 브라질 사람들은 또 ‘치실’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하고.“  (414쪽. 클로델은 프랑스의 극작가)


 더 재미난 에피소드도 많이 나온다. 남자들 소변보는 얘기 마누라한테 해줬더니 껌벅 넘어가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작가 페나크의 솜씨가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수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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