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씨 451 환상문학전집 12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박상준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화씨 451도면 섭씨로 몇도? 233도. 이 온도가 뭘 의미하는지, 누군가는 책을 불사를 때의 온도라고 하는 거 봤다. <화씨 451>을 읽어보면 그것도 말은 된다. 그러나 소설 안에서는 그저 책을 태워버리는 순간 등유가 콸콸 부어지는데, 등유가 어디서 부어지느냐 하면, 방화수放火手가 짊어지고 있는 통 안에서 나온다. 이때 통에 흰 페인트로 쓰인 숫자가 바로 451. 어, 그가 머리통을 보호하기 위해 뒤집어 쓴 헬멧에도, 불지를 때 입는 작업복의 소매에도 역시 451이라 씌어있다. 아하, 신기한 이름의 관청 방화서放火署의 고유번호가 451이구나! 그럼 방화서란 기관은? 처음 들어보시지? 몇 십 년 전엔 소방서라고 했었는데, 이제 모든 건물은 방화防火 처리가 완벽하게 된 상태에서 지어지기 때문에 소방대원이 필요 없어지고, 필요한 것은 국가시책에 따라 집안에 서재를 마련해서 책을 보관하고 있을 경우, 모든 책과 함께 (방화防火 설비를 파괴한 뒤) 집까지 통째로 태워버리는 사람, 즉 방화放火하는 공무원을 방화대원 또는 방화수라고 하는 것. 같은 방화라도 방화防火는 불나는 걸 막는 일, 방화放火은 불 지르는 일을 일컬으니 읽는데 주의가 필요함. 사실은 같은 방화가 아니다. ‘방’을 발음할 때 길고 짧음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글을 쓸 땐 표기방법이 없으니 이것 참. 하여튼 알아서 읽으시라. 원래 훈민정음엔 길고 짧음, 높고 낮음, 즉 사성에 관한 표기가 있었는데, 쩝. 글씨 옆에 점찍은 거 보신 적 있을 것이다. 그건 그거고.
 그런데 뭐를 태워? 맞다, 책. 잠깐 다른 얘기.
 이 책을 번역한 박상준(혹시 민음사 사장? 아니겠지)은 80년대쯤에 ‘불량만화’와 ‘불법비디오’를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불을 싸지르는 광경을 보면서, 위법성과 유해 여부와 관계없이 수많은 ‘이야기’가 없어지는 걸 안타까워하면서 중국의 분서갱유와 나치 독일에서 퇴폐문학에 대한 화형식을 떠올렸다는데 (옮긴이의 글, 6쪽), 왜 이 이야기가 재미있었을까? ‘불량만화’는 어떤 걸 얘기하는지 모르겠으나, ‘불법비디오’는 둘 가운데 하나다. 포르노 아니면 불법복제물. 포르노? 좋다, 번역 문학가가 포르노의 자유를 외치는 건 타당하다. 나도 왜 대한민국의 성인들이 떳떳하게 포르노를 볼 수 없는지 이해하지 못해하는 족속이니까. 문제는 불법복제물. 출판인 혹은 출판 산업의 일원이 그걸 분서갱유나 책 화형식하고 같은 선상에 올려놓으면 안 되지. 안 되는 정도가 아니고 큰 문제다. 아, 당장 자신의 입에 들어올 밥을 뺐기는 건데 말이야. 지금은 중국의 불법복제로 큰 피해를 입고 있지만 1980년대까진 대한민국도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불법복제국가였던 거, 기억나시지?
 역자가 이런 얘길 한 것은, 이 책 <화씨 451>이 디스토피아의 미래, 북아메리카에서 벌어지는 분서갱유를 주제로 삼기 때문이다. 북아메리카가 내분이 생겨 내란 중인지, 아니면 다른 대륙과의 피할 수 없는 전시상황을 맞아서인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한 전제사항이 1990년 이후 북미에서 두 차례의 핵전쟁이 있었고, 그 다음에 권력을 쥔 정부가 국민들을 정신 사납게 하는 것 말고는 아무런 이바지도 못하는 수백만 종의 책의 독서와 보관을 금지시켜버렸다. 그 다음부터 위에서 말한 소방대원의 후예를 방화수로 만들어 책을 보관하고 읽는 사람들을 적발하며 동시에 책들만 봤다하면 등유를 넉넉하게 끼얹고 확 불을 싸질러버려 왔던 것. 방화수들은, 물론 농담이겠지만, 월수금, 이렇게 일주 3일만 일을 하는지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아니, 슬로건이란다.
 “월요일에는 밀레이(미국의 시인, 역자 주)를, 수요일에는 휘트먼을, 금요일에는 포크너를 재가 될 때까지 불태우자. 그리고 그 재도 다시 태우자.” (22쪽)
 책이 없는 국가. 그 속에 살아야 하는 국민들은 어떤 상태가 될까? 스포츠! 당연하다. 스피드! 당연하다. 이제 굉음을 내며 시속 300킬로미터의 속력으로 질주하다 차에 치어 죽거나 차가 뒤집혀 죽는 건 그냥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원자폭탄 한 방에 수십만, 수백만 명이 죽는 꼴을 봤으니 그냥 한두 명 죽는 일은 사건도 아니다. 주부들의 제1차 목표는 거실의 네 벽에 몽땅 벽걸이 TV(그땐 LCD 뭐 이런 아이디어가 없어서, 놀랍게도 굉장히 얇은 브라운관 TV를 벽에 거는 수준이다)를 걸고 하루 종일 TV와 쌍방향 소통을 하며 지내는 것. 주부들은 모든 벽을 둘러싼 TV의 출연진들과 친척관계를 맺은 것처럼 생활하는 지경까지 이른다. 이웃 간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정원이나 테라스 같은 건 유행을 핑계로 사라지고, 늦게 핀 민들레꽃을 이야기하다가, “꽃을 턱에 문질러 노란 색이 물들면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는 뜻이래요.” 뭔가 어디서 읽은 듯하거나 사람의 정서, 심상을 흔들 수 있는 말을 하는 사람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음을 당하거나 사라져버리는 미래의 나라. 며칠 전에 쓴 독후감 자먀찐의 <우리들>에서도, <1984>나 <멋진 신세계>에서 이미 익숙해진 바로 그런 디스토피아의 재현.
 그런데 더 이상 <우리들>, <1984>, <멋진 신세계>는 별로 읽히지 않는 반면, 앞의 세 작품보다 나을 것 없는 <화씨 451>의 인기가 갑자기 확 불타올랐던 건 왜일까? 왜긴 왜야, 그라운드 제로, 뉴욕 무역센터 빌딩 테러에 대한 공포감이, 북미대륙에서의 핵전쟁을 전제로 한 소설이면서도, 새로운 핵전쟁이 다시 북미, 바로 내가 사는 곳에서 벌어진다는 이야기를 썼으니까 그렇지. 아하, 맞아, 이런 작품이 있었지, 새삼스레 깨달아 영화로도 만들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도 하고 그랬던 것이지.
 다시 얘기한다.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 가상의 디스토피아 소설. 연달아 디스토피아 작품을 읽으니 지루하지는 않지만,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나, 자괴감이 든다. 흐흐흐.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깐도리 2017-12-27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 들어봤던 책이네요

Falstaff 2017-12-27 10:50   좋아요 0 | URL
이 양반 좋아하는 분들은 엄청 열광하더군요.
흥미 있으시면 읽어보셔도 좋을 듯합니다.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 어느 계단의 이야기 - 희곡 대산세계문학총서 9
안토니오 부에로 바예호 지음, 김보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두 편의 희곡이 담겨있다. 처음 읽는 스페인 희곡. 극작가 바예호는 글도 잘 쓰지만 원래 화가 지망생이었는데 스페인 내란 때 아버지와 형이 사형당하고 자신도 공화파에 가담하는 바람에 콩밥을 먹었던 전력이 있다. 이때 감옥에서 희곡에 관심을 두기 시작해, 출소를 하자마자 드라마 창작에 힘을 쏟아 제일 처음으로 쓴 작품이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이고 두 번째 작품이 <어느 계단의 이야기>이란다. 이 두 작품을 문학상, 스페인 판 신춘문예 비슷한 것에 공모를 해서 둘 다 최종심까지 가는 영광을 차지했고, 그 가운데 <어느 계단의 이야기>로 상을 받았단다. 이 정도면 한 마디로 재능을 갖고 태어난 인간이다.
 물론 반파시즘 운동으로의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정부 편이었겠지만, 스페인 내전에 관한 작품들을 잘 읽어보면 공화정부군은 거의 대부분이, 아니면 적어도 과반수이상이 사회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거 같다. 실제로 코민테른의 지원이 없었다면 히틀러 정권으로부터 막강한 무기와 전투기를 제공받았던 프랑코 군대에 그나마도 대항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왜 이런 얘기를 하느냐 하면, 바예호의 두 작품에 일정 정도의 사회주의적 성향이 들어 있다고 ‘옮긴이 해설’에 씌어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독자 입장에선 사회주의적인지 자본주의적인지 그런 걸 의식적으로 염두에 두고 읽을 필요는 하나도 없다. 그냥 인간살이를 상징하는 기호로 해석하기만 하면 된다.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의 배경은 현대적 시설을 한 맹학교다. 주목. ‘현대적 시설’을 겸비했다는 건 이 맹인 학교가 맹인 가운데서도 다분히 부르주아 성향을 갖춘 부잣집 자재만 다닐 수 있는 기숙 사립학교란 얘기. 학생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거의 최상급의 의상으로 꽉 짜진 드레스코드를 지키고 있으며, 이들이 비록 맹인들이지만 자신이 빛을 감지할 수 없는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는다. 거리에서 학교로 들어서는 순간 이들의 더듬이 역할을 했던 지팡이를 휙 내던지고 완벽하게 학습된 공간 안에서 거의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정상인과 다름없이 즐거운 학교생활을 누리고 있다. 거의 대부분이 선천성 맹인. 낳자마자 맹인인 상태라서 빛이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도대체 이해를 하지 못하는 청소년들이다. 그냥 그런 맹인들의 에피소드라면 당연히 드라마가 아닐 터. 이런 상황에서 역시 선천성 맹인 소년 이그나시오가 이 유쾌하고, 언제나 즐거움이 넘치는 행복한 학교에 들어오면서 사건은 벌어진다.
 불행의 근원은 거의 언제나 호기심. 이그나시오는 절대로 행복하지 않다. 아무 어려움 없이 학교 안을 보행할 수 있다는 것도 믿지 않아 지팡이를 버리려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그나시오는 불행하다. 본다는 것, 사물의 형태를 감각할 수 있다는 것이 어떤 현상인지는 모르지만 자기의 망막 앞에 펼쳐진 어둠과 거의 똑같다고 들은 밤하늘, 그 속에서 무수하게 반짝이는 별은 과연 어떻게 반짝인다는 것일까, 별이라는 건 얼마나 아름답기에 숱한 시인들의 찬미를 받아왔을까, 이 모든 것을 알 도리가 없어 이그나시오는 불행하다. 그의 불행과 우울은 천천히 그러나 급기야 나머지 학생들에게도 전염되어 그리도 즐겁던 학생들 사이에 빛을 보고 싶어 하는 학생들과, 여태까지의 즐거움을 계속 누리고 싶어 하는 학생들의 무리가 생기고, 자연스레 본다는 것의 궁금증과 못 본다는 것의 불행을 체감하는 학생들의 숫자가 많아진다. 못 보는 것에 대한 불안. 여태까지는 쾌적한 공간이었지만 새로 생긴 사소한 장애 하나만 있어도 보행에 방해를 받아야 한다는 불안. 언제나 ‘불안은 영혼을 잠식’1)하는 것이라 학교 내에서 이그나시오의 위상은 급기야 교장을 능가하고 많은 여학생들마저 그를 사랑하게 되거나, 남자친구가 이그나시오를 추종하느라 아름다운 자신을 멀리하는 것을 느끼고는 질투를 감추지 못한다. 그 정도다.
 작용이 있으면 뉴턴의 제3 법칙에 의하여 반작용이 있는 법. 누군가는 이그나시오에게 대단한 반감을 지닐 수밖에 없고, 여태껏 누렸던 지위를 여전히 누리고 싶어 하는 또 다른 누군가가 있으며, 이들이 행위 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처음엔 이그나시오 본인이 원했지만 자신들의 만류로 그리되지 않았던 것, 이그나시오 스스로의 발로 학교를 나가게 만드는 일. 근데 어떻게? 이미 맹인인 교장선생이 앞을 볼 수 있는 여자와 결혼한 이유가, 부인 도냐 페피타가 정상인과는 도저히 결혼할 수 없을 대단히 못생긴 여성이기 때문이리라는 걸 학생들에게 공포해버린 이그나시오. 어째 결말이 불안하시지? 그래, 당신 생각대로 된다. 하지만, 당신 생각대로 된 다음이 문제이자 진짜 중요한 결말. 그건 안 알려줌. 이래봬도 바예호가 20세기 스페인 드라마의 거장이라, 진짜 중요한 결말은 읽는 사람이 스스로 내려야한다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두 번째 작품은 <어느 계단의 이야기>. 제목이 ‘계단의 이야기’라고 해서 계단을 의인화, 첫째 계단이 둘째 계단에게 수다를 떨고, 둘째 계단은 거기다 살을 붙여서 셋째 계단에게 전하고 셋째는 넷째에, 넷째는 … n번째는 n+1번째에…, 이런 거 아니다. 스페인의 중하류층이 사는 아파트를 배경으로, 아파트 주민들이 만날 수 있는 소통의 장소, 계단에서 이들이 서로 만나 이야기를 하고, 어려운 것을 도와주고, 이해하고, 오해도 하고, 질투도 하고, 싸움도 하고, 연애도 하고, 애부터 일단 하나 만들기도 하고, 이리 사는 모습을 그린 것. 그렇다고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만 열라 떠올리시면 곤란하다. 이 작품이 앞에 소개한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를 누르고 1등상을 먹은 작품인데 그리 녹록하겠어?
 무대는 1막이 1919년, 2막이 1929년, 3막은 1949년의 같은 장소로 되어 있다. 그러면 1막에서 청소년기를 맞은 이들이라면 2막에선 찬란한 성인으로 삶의 전성기, 아니면 가장 비참하고 남루한 부적응을 겪고 있을 것이고, 3막에선 잘하면 할머니, 할아버지일지도 모른다. 스페인 언어를 쓰는 인류들이 애 하나는 얼른 얼른 낳는데 선수잖습니까? 이 정도면 대강 그림은 그려질 것이다. 그러면 이것으로 끝. 두 작품 다 스토리를 써놓으면 돈 주고 책 사 본 보람이 없어서.
 다만 하나. 두 작품을 발표한 시기가 1949년. 스페인에서 프랑코 파시즘이 가장 극렬했던 시기라서 바예호는 정부의 무지막지한 검열을 여러 가지 우회적인 방법으로 피해가야 했을 터. 그리하여 아시아 사람으로는 알아채기 힘든 코드가 숨어 있는 거 같다. 난 그런 묘사가 어디에 있는지 별로 감을 잡지 못했으나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를 읽으면서는 며칠 전에 독후감을 쓴 자먀찐의 <우리들>에서의 규격화된, 자유 없는 행복에 관한 이야기를 읽는 것과 비슷한 압박감을 느껴야 했음을,




1)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의 무지 지루한 영화의 제목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를 인용.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디오가 계속 말썽이었다. 가장 좋았던 기계가 20여년 전에 당시 100만원 주고 산 인켈 제품이었는데, 10년 넘어가면서 특히 CDP에 문제가 가끔 발생하기 시작했다. 방음장치 할 수 없는 작은 아파트 살면서 그 정도 음질, 음량이면 나무랄 곳이 없었다. 결정적 실수는 좀 큰 아파트로 옮기면서 시작했다. 거실도 전과 비교해 넓직해 홈 씨어터도 개비를 하는 김에 인켈 시집보내고 소위 말해 돈 부족한 매니어 층을 위한다나 어쩐다나 특별히 저렴하게 공급한다는 전문 장비를 덜컥 들여놓고 시험삼아 바흐의 곡 비올라 다 감바와 쳄발로를 위한 소나타를 탁 올렸는데, 아, 마음에 안 드는 거다. 전문 장비가 인켈보다 훨씬 못했다. 거기까진 뭐, 그래도 들리니까. 더 큰 문제는 구입한지 5개월 만에 작동이 안 되는 거다. CDP와 앰프가 동시에 지랄이고 스피커는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고. AS를 받으려면 장비를 포장해서 택배로 보내라는데, 그것도 확실하게 고쳐준다는 보장이 없단다. 그냥 한 번 보내보라고. 그때부터 고난의 행군. 상상에 맡긴다. 벽 한 면을 꽉 채운 CD들은 나 좀 틀어달라고 아우성이고, 그 사이 CD장 하나를 더 짜서 이제 일렬로 도열해 있는 3천 장의 CD들 볼 면목도 없는데, 지난 토요일, 아 씨, 마누라가 50만원짜리 소리통을 이마트가서 사왔다. 나더러 선물이란다. 이렇게 생겼다.

 

 

다음과 같이 얘기하지 않으면 그나마 밥도 못 얻어 먹으니, 일단 고맙다고 하고, 첫곡으로 바흐의 <마태 수난곡> 세시간 반짜리를 올렸다. 흠. 값하고 비교하면 괜찮고, 무엇보다 책 읽고 음악듣는 조그마한 방, 3 x 3.5 미터 공간에선 충분히 즐길 만한 음량이다. 특별히, 이름가르트 제프리트의 목소리가 이렇구나, 젊은 카를 리히터가 뮌헨 바흐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판, 아 이제야 내가 제프리트의 진짜 노래를 듣는구나, 하는 소감. 비브라토가 거의 없는 맑은 목소리가 바흐에 그렇게 어울릴 수 없었다. 특히 수난곡임에야. 아하, 이렇게 쓰고보니 내일이 성탄절인데 지금 수난곡 얘기를 하고 있구나.

 하여간에 첫곡으로 바흐의 마태 수난곡, 카를 리히터 지휘하고 아름다운 테너 에른스트 헤플리거가 복음사가를 하는 판.

 

 

 

지금 보니까 카를 리히터가 1959년과 79년 녹음이 있다. 이건 59년 녹음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판은 왼쪽 거. 지금은 오른쪽 그림으로만 나오나보다.

 


 

다만 한 가지, 이 글을 읽고 덥석 <마태 수난곡>을 들으려 음반을 사시려 하는 분은 설마 읎겠지만, 에헤라, 혹시 계시다면 먼저 유튜브에 가서 과연 내가 수난곡을 끝까지 들을 수 있을까를 먼저 시험해보시라.
수난곡을 듣는 일 자체가 사람에 따라서는 대단한 수난이 될 수도 있고,
말 그대로 수난곡passion을 듣는 일이 열정이 될 수도 있다.
그건 당신이 옳고 그르고, 경건하고 아니고, 이 따위가 아니라 전적으로 당신과 이 곡이 안 맞고의 차이일 뿐인데, 그게 생각보다 오지게 중요하다. 그러니 꼭 확인 부터 먼저 하시라. 난 수난곡하고 친해지기 위해 근 20년 이상이 필요했다.

 

 

 

 

 두번째 들은 곡은 브람스의 현악 6중주 1번 바단조 작품 34. 내가 가장 좋아하는 브람스.

 

 

내가 가지고 있는 판은 왼쪽 그림인데 이젠 CD 장 수 늘려 오른쪽 그림으로 나온다. 장삿속이지만 뭐 그렇다는 얘기다.

 

 

 

 

 

또 올린 것이 모차르트의 현악오중주 사단조 K.516

  

 

 이것 역시 모차르트의 모든 기악곡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곡이다. 몇개 되지 않는 단조 작품 가운데 K.516 과 K.516 b. 두 현악오중주가 단조로 되어 있다. 낭만주의 음악은 이미 모차르트에서 찬란하게 만개해 있었던 것이다. 3악장 느리게 그러나 지나치지 않게.

 

 


 

이어서 하이든의 마지막 현악사중주 작품 77-1, 77-2

 


코다이 사중주단의 하이든 전곡은 낙소스 사의 기념비적 작품이다. 하이든 자체가, 모차르트로 하여금 현악사중주 작곡을 자제하게 만들 정도로 일정의 고전적 규범을 완성한 이. 하이든의 사중주가 내 가슴을 쌈박하게 송곳으로 찌르는 것은 그러나 저 아득하고 아득한 잠깐의 휴지기. 완전한 고요. 희한하지. 잠깐의 고요, 적요가 주는 날카로운 긴장은 또 뭐야!

흔히 음악 좀 들었다 하는 인간들이 하이든 알기를 우습게 알고 그러는데, 그거야말로 정말 웃긴 일이다. 당시에 어쩔 수 없이 대공의 그늘 아래에서 먹고 살았을 뿐, 후배 작곡가 누구와 비교해도 절대 뒷자리에 있을 사람이 아니다.


 오늘은 멘델스죤의 피아노 오중주를 들을 예정이다(사실은 이거 쓰면서 다 들었다). 비오시는 겨울의 휴일 아침. 책 읽고 음악 듣기 정말 좋은 날이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18-01-09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래도 사랑받는 남편이셨군요! ㅋㅋㅋㅋ 오디오도 떡하니 사오시고 ㅋㅋㅋㅋㅋ
좋은(?) 오디오 시스템도 갖췄는데 최근에 나온 이 앨범 한 번 들어보세요. (헐 근데 품절이네요..;;)

http://music.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22998349

Falstaff 2018-01-09 13:39   좋아요 1 | URL
헉, 페차의 <비창>인가요?
아, 클래식 음반, 그것도 CD가 인기를 끌 수 있군요!
처음 들어보는 연주단체인데 ㅎㅎㅎ 이런 거 소개하시면, 제가 음악에 관해선 지조가 없는 편이라 집구석 기둥뿌리 뽑힙니다.
옙, 기억하겠습니다.
근데 <비창>은 다 듣는 순간 갑자기 멍~하니 허탈, 허무, 허망해지지 않나요? ^^;

잠자냥 2018-01-09 14: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비창>에 대한 폴스타프 님 의견에 공감합니다.
이 앨범은 2월 중순쯤에 재입고 되는 것 같아요. ㅎㅎ 그토록 많은 <비창>이 나왔음에도 또 나오고, 왜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지 공감하실 음반이라고 생각됩니다. ㅎㅎㅎ

kyle 2018-03-28 0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분이 계셨다니 그저 반가워서 문자 남겨요

Falstaff 2018-03-28 08:22   좋아요 0 | URL
아이고... 감탄하실 수준은 아닙니다. ^^;
고맙습니다.
 
청록집 -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3인 시집
박목월.조지훈.박두진 지음 / 을유문화사 / 200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명불허전.
 지금시대, 21세기에 이처럼 시를 쓸 필요도 없고, 쓸 수도 없고, 써서도 안 되겠지만, 70여 년 전 (‘대한민국’이란 국호도 갖지 못한)신생국이자 신탁통치를 받는 후진국에 이런 서정시인들이 있었으며, 지금 그들의 시를 읽는다는 일이 이렇게 감격적일 수가 있을까. 고백하노니, 이들의 시라고는 교과서에 나오는 것 말고는 겨우 하나나 둘 정도만 읽고, 마치 다 아는 것처럼 허세를 부려왔다. 중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이 있는 사람치고 <청록집> 한 번 들어보지 못한 이는 없을 것. 그러나 진짜로 <청록집>을 읽어보기 위해서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40여년이 더 필요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창피한 것인지, 이 시집을 읽어보고 절감했다.
 ‘술 익는’을 어떻게 발음하는 것이 맞는지, 이때 일어나는 현상을 무엇이라 하는지 만을 배웠다. ‘술 익는’은 ‘술링는’으로 발음해야 하며 기억이 까마득하지만 억지로 끄집어내면 아마도, 자음 첨가, 연음법칙, 자음접변 상호동화 이런 거 같은데, 이 시어가 나오는 시 <나그네>가 지훈의 시 <완화삼>의 답시라는 건 몰랐다.



玩花衫

 ―木月에게―


 차운산 바위우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우름 운다.


 구름 흘러 가는
 물길은 七百里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이냥하여
 달빛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완화삼玩花衫이 무엇인지는 사전을 찾아보시라. 그리고 다시 시를 읽어보면 무릎을 탁, 치실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먼저 지훈이 목월에게 헌시를 바치자, 목월의 답시가 탄생하니,



 나그네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芝薰


 江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南道 三百里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이렇게 나오는 거였다. 내가 이들의 시를 배운지 아무리 오래됐다고 해도, 우리나라 사람들 앞에서 목월, 지훈, 혜산의 시의 특징 같은 것을 이 자리에다 써놓는 파렴치한 짓은 하지 못하겠다. 그리하여 책 이야기나 하겠다.
 책은 1946년 6월 6일, 초판이 을유문화사에서 나왔고, 놀랍게도 2006년, 60년이 지나야 중판이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다. 내 책은 2016년에 찍은 중판 11쇄. 초판은 예전 책이 다 그랬듯, 책갈피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넘기고, 문장도 종縱으로 썼다. 60년 동안 문법도 바뀌고, 단어 자체도 변하여, 이제 70년 전의 시를 읽기 위해서는 새 편집이 필요하다. 시에 나오는 한문을 한글로 바꾸고, 지금 표기법으로 편집한 중판의 뒤편에 놀랍게도 초판을 찍을 때의 원래 시가 전편 수록되어 있다. 여전히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갈피를 넘기며 종으로 쓰인 문장을 한 채. 아, 이러니 내가 을유문화사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나. 내 경우엔 옛 표기가 그리 낯설지 않아 책을 뒤집어놓고 갈피를 왼손으로 넘기면서 한 글자, 한 글자 차근차근 읽어나갔다. 정말 멋있는 광경이지 않나!
 혜산 박두진의 시를 한 번 읽어보자.



 墓地頌

 


 北邙 이래도 금잔디 기름진데 동그만 무덤들 외롭지 않어이.


 무덤속 어둠에 하이얀 髑髏가 빛나리. 향기로운 주검의ㅅ내도 풍기리.


 살아서 설던 주검 죽었으매 이내 안 서럽고, 언제 무덤속 화안히 비춰줄 그런 太陽만이 그리우리.


 금잔디 사이 할미꽃도 피었고 삐이 삐이 배, 뱃종! 뱃종! 메ㅅ새들도 우는데 봄볕 포군한 무덤에 주검들이 누었네.



 박두진의 시 가운데 <묘지송>이 가장 좋아 여기 쓴 것이 아니라 제일 짧은 시라서 옮겼다. 세 사람의 사진을 보면 박두진과 조지훈이 힘 좀 쓰게 생겼고 (지훈은 반도가 알아주는 술꾼이기도 했으며), 박두진은 피골이 서로 붙어 좀 빌빌할 거 같은데, 사람은 생긴 것만 가지고는 아무것도 알 수 없어서, 박두진이 제일 오래 살고, 지훈이 가장 짧은 생을 살았다. 참, 인생이란.
 서재 친구분들이시어, 지나가는 과객님이시어, 진정 말씀드리니 미욱한 나처럼 후회하지 마시고 하루라도 서둘러 <청록집>을 즐겨보시라. 크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들 열린책들 세계문학 37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찐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먀찐. 이름은 족히 들어보았으나 어째 손이 가지 않던 작가. 보관함에 오랜 세월 들어 있다가 이제야 겨우 일독을 했다. 이번에도 많이 망설이다가 석영중의 번역을 믿고 그냥 한 번 읽어본 건데, 이럴 경우 흔히들 이렇게 얘기한다. 대박.
 진짜 자먀찐이 대단한 건, 이 소설을 1920년, 소비에트 연방에서 발표했다는 것. 작가가 18세에 이미 볼셰비키 당에 입당을 하고 일찌감치 유배생활도 경험한 소위 혁명가의 반열에 올랐던 인물이다. 1920년, 러시아혁명을 마치고 남쪽에선 카자흐 반란군과, 동쪽에선 백계 러시아 반혁명군과 내전에 여념이 없어서 전 인민이 기아와 추위에 내몰리고 있던 시절이다. 러시아 문학판에선 <어머니>를 쓴 막심 고리끼를 필두로 우리도 잘 아는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의 니콜라이 오스트로프스키 등이 사회주의적 명작을 쏟아내던 시기였다. 문학도 당연히 혁명에 이바지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 했던 것이다.
 이 빛나는 새로운 세상에 자먀찐이 등장해 <우리들>을 써서, 쓴 걸 그냥 보관한 것이 아니라, 비록 소련 밖의 영토일망정 러시아어로 발표해버렸던 거다. 이렇게 얘기하니까 소설 <우리들>이 어떤 이야기인지 궁금하시려나?
 ‘미래 소설’이다. 한 30세기쯤의 지구. 전 지구인구의 80%를 희생시킨 2백년 전쟁을 끝내고 세계는 단일국가로 통일됐다. 위대한 영도자 ‘은혜로운 분’의 치하에서 초록색 벽을 높게 둘러친 거대국가는 벽 안에서 오직 국민의 행복을 위하여 모든 자유를 포기했다. 전 국민은 이름 대신 번호가 주어져 주인공 D-503, 그가 사랑하는 여인 I-330처럼 불리며, 작가는 이들을 ‘인간’ 혹은 ‘국민’으로 칭하지 않고 (20세기 사람의 시각에선) 냉정하게 ‘번호’라고 말한다. 국가의 모든 번호들은 같은 시간에 울리는 경종으로 침상에서 일어나 석유추출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같은 시간에 산책을 하며 주어진 노동을 일정시간 해야 한다. 갑이 을과 섹스를 하고 싶으면 적절한 서류를 제출하여 승인을 얻어 정해진 시간에 주어진 몇 분 동안 관계를 맺는데 임신은 절대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걸리면 사형이여!). 수없이 많은 대형 강당에 매일 몇 시간씩 모여 위대한 영도자의 말씀과 번호들의 진정한 행복과 이성과 과학에 대한 강연을 들어야하며,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모든 번호들은 같은, 적어도 상당히 비슷한 사고를 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번호의 행복을 위한 이런 조치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일부 지각없는 것들은 진공 튜브 안에서 일종의 (고통 없는) 고문 또는 취조를 거친 다음 수만 볼트의 전압을 흘리는 은혜로운 분의 손끝에서 최후를 맞는다. 이것이 ‘인간’이 수행한 소위 ‘마지막 혁명’의 결과이다.
 ‘마지막 혁명’이라는 건 한 마디로 더 이상의 혁명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 애초부터 변증법의 무한 고리에서 벗어나는 허위이지만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못한다. 실험실에서 태어나자마자 번호를 부여받은 인류는 초기부터 번호의 행복을 위한 인간의 기계화에 너무나도 익숙하기 때문에.
 그러나 국가를 둘러싸고 있는 초록색 벽의 밖에는? 얼굴의 일부를 제외하고 온몸에 털이 숭숭 난 (그렇게 진화한) 또 다른 인류가 벌거벗은 채 살고 있다. 이들은 폐허로 변한 광막한 벌판에서 추위와 기아에 노출되고 있으나 거의 무한정의 자유를 향유한다. 당연히 서로 눈이 맞으면 자유로운 ‘액체교환방식’에 의하여 임신하고 출산하고 수유하고 양육한다. 아울러 벽 안의 신인류, 즉 모든 번호들 속에서도, ‘비이성적이고 불안정하고 불쾌하고 위험스러운’ 자연의 흔적을 지워내지 못한 번호가 있기 마련이어서 지금 주어진 행복과 감시와 통제 아래의 것들이 진정한 행복이 아님을 일찌감치 알아챈 번호들이 있어, 마지막 혁명 이후에도 또 다른 혁명이 존재함을 입증하려 한다. 자유롭게 사는 벽 밖의 인류와 함께.
 다시 한 번 강조하는데, 자먀찐이 이 소설을 발표한 것이 1920년. 소비에트에서 이제 막 발생한 공산주의 체제를 경험한지 불과 3년차. 작품을 쓴 기간이 1년이라고 치면, 공산 혁명 2년차에 자먀찐은 이미 공산주의 또는 볼셰비키 또는 레닌 치하의 정치체계를 보고 앞으로 레닌에 이은 스탈린 등의 권력구조와 또 다른 획일화의 미래를 예상한 것이다. 이런 경우를 일컬어, ‘죽고 싶어 환장을 하다’라고들 하는데, 이런 생각을 소설로 쓸 수밖에 없는 것이 또한 작가의 숙명이다. 완벽한 통제와 세뇌. 자유의 박탈. 주장하는 바는 국민들의 행복을 보장하고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지만, 어느 경우나 국민, 소설의 경우 ‘번호’들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은 딱 한 가지, 즉 독재자의 영구 집권을 위해서이다.
 이 훌륭한 소설을 읽으면서 난 도스토옙스키의 몇 작품을 떠올렸다. 주인공 ‘나’ 즉 D-503이 번호들에게도 영혼이 있을 수 있고, 영혼이 틈입한 번호는 그야말로 비정상적인 병균에 감염된 상태인데, 자유라는 것 혹은 자유의지가 생기자마자 D-503은 일종의 섬망 상태로 빠져든다. 그런데 놀랍게도(사실은 나로 하여금 우쭐하게 만들게도) 석영중의 ‘역자해설’에서도 도스토옙스키를 언급하고 있다. 그녀는 2X2=4의 반복적인 사용과 『대심문관의 전설』에서의 행복과 자유의 관계, 대심문관과 ‘은혜로운 분’의 유사점 등을 예로 들었지만 일반 독자에 불과한 나는 대심문관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주인공의 심리상태가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 또는 드미트리 표도르비치 카라마조프와 유사하다는 생각만 했을 뿐. 석영중에 의하면 자먀찐의 <우리들>이 뒤에 나올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오웰의 <1984>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그럴 만하다. (둘 다 읽어봤지만 신기하게도 <1984>는 스토리조차 완벽하게 잊었다. 아마 오웰을 혐오해서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제 세상이 바뀌어서, 오직 이 이유 하나만 가지고, 아직도 이 책이 독자에게 큰 효용을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지극히 불행하게 아직도 유효하다. 지금 역시 <우리들>에서 나오는 ‘단일제국’은 전 지구적으로 존재한다. 다만 정치형태가 아니라 기업이라는 형태를 갖춰서. 물론 제3세계 일부에서는 아직도 절대권력을 향유하는 독재자가 있겠지만 세계적으로는 거의 또는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하는 대신, 거대기업 내부에서는 이 책에서 볼 수 있는 체제가, “능률”이라는 이름으로, “성과의 배분”이란 행복을 보상으로, 행해지고 있다. 다만 다른 것은 이 체제, 즉 거대기업의 조직적 능률과 행복 대신 자유롭고자 하면 언제든지 ‘체제에서 벗어날 자유’가 개인 또는 ‘번호’에게 주어진다는 것. ‘체제로부터 벗어날 자유’를 선택하는 ‘번호’들에겐 죽음 대신, 벽의 바깥, 황량한 정글 아니면 사막으로 던져진다는 차이가 있을 뿐. 자유를 원해 벽의 바깥으로 나왔건, 아니면 ‘은혜로운 회장님’의 사형집행으로 처리가 됐건, 이런 ‘번호’들을 우리(또래)는 대충 ‘닭 튀기는 인간’으로 부르기도 하고 뭐 그런데…….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yo 2017-12-21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03이요..... 누군가 503이라는 숫자로 연상되는 관념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바람에 ˝주인공 D-503과 그가 사랑하는 여인 I-330˝이라는 대목에서 어떤 사람 두 명을 떠올리고 말았네요.

옛날에 읽었는데 <1984>와 <멋진 신세계>, <우리들> 중에서 전 이 작품이 제일 좋았던 기억입니다.

언제나 그렇듯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Falstaff 2017-12-21 10:23   좋아요 0 | URL
책을 읽으면서 누군가를 떠올리게 되는 것. 그림은 그려지는데 사람들이 누구냐에 따라 좋은 그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 ^^; 부디 좋은 그림이었으면....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왕자 2022-02-09 0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대폰으로 검색해서 리뷰를 보고 있는데 긴 리뷰를 이렇게 집중해서 읽기는 처음이네요.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Falstaff 2022-02-09 06:06   좋아요 0 | URL
좋은 마음으로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