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노이즈
돈 드릴로 지음, 강미숙 옮김 / 창비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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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블랙스미스란 이름의 소도시가 미국에 있(었)다고 치고, 배비트와 잭 글래드니 부부가 거기서 살았고, 둘 다 초혼이 아니라서 (잭은 심지어 다섯 번째 결혼이기도 하다) 아주 복잡한 과정을 거쳐 태어난 네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는데 이게 다가 아니라, 소설책에 그냥 잠깐 얼굴만 비치는 딸이 하나 더, 이름만 등장하는 다 큰 딸도 하나 더 있어서 하여간 최소 여섯 명의 자녀들로 구성된 가족을 중심으로, 복잡한 소설을 만들어 놨다. 주로 등장하는 네 자식들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제일 나이 많이 먹은 아이가 하인리히(14). 이제 본격적으로 사춘기에 접어들었으나 여성의 몸에 대한 관심보다 생애 처음으로 부모가 하도 열등해서 하찮게 보이는 시점을 맞이하여, 이젠 부모의 말을 자신이 알고 있는 최신의 과학적, 기술적 필터를 거쳐 접수하는 바람에 사사건건 또박또박 말대답을 올려 부치는 머리 좋은 (잭의) 아들. 드니스(11)가 둘째로, 아주 집요한 성격으로 친엄마 배비트가 요새 건망증이 부쩍 심해진 것을 확인하고는 왜 갑작스런 건망증이 시작되었는지 탐색하다 의붓 아빠와 힘을 합쳐 급기야 원인을 밝혀내는데 성공한 딸. 셋째는 다시 잭의 딸로 원래 이름인 스테파니를 “얘, 스테파니야!”라고 부르면 오지게 열을 받는 관계로 ‘스태피’(9)라 칭하는데 요새 왜 자기 역시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유방이 나오지 않는지 잔뜩 불만에 차 있어, 하루에도 댓 번씩 젖멍울이 섰는지 아닌지 거울에 비쳐보는 걸 드니스가 발견했고 드니스는 그걸 엄마한테, 엄마는 다시 아빠한테 정보를 제공하는 바람에 가족 거의 전부가 알고 있다는 걸 스태피 혼자 모르고 있다. 막내둥이 와일더는 이제 서너 살 정도의 유아지만 겨우 스무 단어 정도로만 의사소통을 하는 귀염둥이로 친엄마 배비트의 삶에 가장 의지가 되는 꼬맹이. 그래도 무시하지 마시라, 세발자전거를 타고 고속도로를 횡단하는 호연지기를 품고 있는 미국의 희망이다.
 여기까지 얘기하면 소도시 미국의 평균가정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 아빠 또는 의붓 아빠 잭의 직업은 대학교수. 그것도 학과장이다. 무슨 학과냐 하면, 놀라지 마시라, “히틀러 학과.” 미국 대학과 학문의 틈새시장을 적절하고 기묘하게 파고들어 미국 최초로 “히틀러 학과”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하고 스스로 학과장 자리를 꿰찬 미국 판 김 선달. 잭에게도 세 가지의 고민이 있으니 첫째가 자신의 애독서이자 먹고 살기 위한 필독서인 <나의 투쟁>을 독일어 원본으로는 읽어보지 못했다는 거. 즉 독일어를 하나도 모른다는 것. 불과 몇 달 후 전 세계에서 몰려온 히틀러 전공자를 모아놓고 3일간 학회가 열릴 예정인데 미국 최고의 히틀러 전공 교수인 자신이 정작 독일 말을 하나도 모른다면 말이 돼? 그리하여 새로이 그리고 비밀리에 독일어를 배우고 있는 것. 둘째는 집에서 눈으로 보이는 거리의 고속도로 위에서 어느 날 산업 폐기물을 잔뜩 싣고 가던 트럭이 전복되는 바람에 살충제 폐기물인 극강의 유독물질 나이어딘 D를 기체 상태로 흡입할 수밖에 없었는데 대피소에서 컴퓨터로 조회해보니 앞으로 살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데이터가 나오는 바람에 죽음에 대한 극한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 마지막 세 번째는 아내 베비트 역시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다가 공포 방지의 묘약이자 신약으로 인체실험 중인 다일러를 구하기 위해 미스터 그레이와 몇 주에 걸쳐 시외 지저분한 모텔에서 대낮에 관계를 맺었다는 고백을 들은 일이다. 이 세 가지만 아니라면 미국 중소도시의 약간 상위 중산층의 전형으로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조건을 지녔겠지만 세상살이가 마음먹은 대로 되면 그건 삶도 아니고, 하다못해 소설도 아니다.
 위에서 말한 잭의 세 가지 고민은 전적으로 본인의 지극히 사적인 문제이긴 하지만, 작가 드릴로는 여기에서 국한하지 않고 거의 모든 현대인의 삶에 깊숙이 개입한 테크놀로지와 화학적 또는 과학적 삶의 분석(인간의 사고와 생각이란 건 대뇌피질 속의 뉴런 간 화학적 조합에 불과할 뿐이닷!), 개인성의 데이터 화(01001110010011110101010 같은 이진법의 세계정복), TV와 영화에 의한 인간의식의 획일화 및 감각적(포르노 적) 통일성, 넘쳐흐르는 상품과 상표의 홍수 속에 선택만 강요당하는 20세기 말의 군상, 최대의 행복을 위한 산업발전의 이면에 감춰진 환경오염 문제까지 정말로 거대한 담론을 잭의 세 가지 고민 속에 다 용해시켜 놓았다. 여기에 유년기를 벗어난 인간이라면 누구나 예외일 수 없는 ‘죽음에 대한 공포’ 문제까지 섞이면, 과연 드릴로, 이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구글 검색해봤더니 이렇게 생긴 양반이다. 

 

 

 

 이 해골 같이 생긴 아저씨에 대해 창비는 “1936년 이딸리아 이민 2세로 뉴욕 브롱크스에서 태어나고 (……) 토머스 핀천과 더불어 포스트모던 소설의 양대 축을 형성한다는 평가를 받고”있다고 한다. 전적으로 동의. 이 책 <화이트 노이즈> 역시 지극히 포스트모던한 작품으로 읽어야 하며, 내 경우에 국한해서 말하자면, 토머스 핀천의 작업보다 훨씬 친숙하게 읽을 수 있어서 (가장 최근에 읽은 토머스 핀천이 한 달 반 전 <바인랜드>였으나, 읽은 당시엔 감명까진 아니어도 재미있다고 했던 것 같지만 지금은 뭔 내용이었는지 거의 잊었다) 당장 이 해골 아저씨의 다른 책을 검색해서 일단 보관함에 넣어 놓았다. 진짜다. 한 번 읽어보시라. 재미난 책이다.
 오늘, 책의 극히 일부만 소개했을 뿐이다. 얼마나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있는지는 직접 보시라는 뜻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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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01-09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는 저도 돈 드릴로를 꼭 읽어봐야겠습니다. ㅎㅎ

Falstaff 2018-01-09 13:41   좋아요 0 | URL
문제가.... 독자평이 극과 극으로 갈린다는 점인데 말씀이죠.
하여간 전 재미있어서 다른 작품 찜해 놓았습니다. 올해 안에 읽을 거예요. ㅎㅎ

레삭매냐 2018-01-09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지 않아도 돈 드릴로의 책들을 하나둘씩
사모으고 있던 차에 <화이트 노이즈> 잘 감상
했습니다.

아니 다른 것도 아니고 히틀러 학과라니요...
역시 대단한 발상이 아닐 수 없네요.

돈 드릴로는 이 책부터 읽어야지 싶네요.
<바인랜드>는 사서 잘 모셔 두고 있습니다만.

Falstaff 2018-01-09 14:28   좋아요 0 | URL
소설 하나에 하도 많은 이야기를 해서 그 속에 빠지는 느낌이 들 정도더군요.
하여간 말빨 하나는 정말 죽여줍니다. ^^

AgalmA 2018-01-09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리리뷰 <작가란 무엇인가> 돈 드릴로 인터뷰 작품만큼이나 역시 좋았어요^^b

Falstaff 2018-01-10 09:24   좋아요 0 | URL
아, 그 책이요!
그렇군요. 기회가 닿으면 시도해봐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미친 사랑 세계문학의 숲 32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김석희 옮김 / 시공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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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다가, 음, 이거 번역한 자가 누구지? 책 표지를 다시 보니 김석희. 다시, 흠. 이 양반 책은 좀 읽어봤지. 외국문학을 읽기 위해 피해갈 수 없는 역자 가운데 한 명. 서울대 문리대 불문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 국문과를 다니다가 말았는데, 무려 4개 국가의 언어에 달통하니, 한국어, 불어, 영어, 그리고 일본어. 독후감을 쓰고 있는 2018년 1월 3일 현재 인터넷 책가게 알라딘 검색해보니 품절, 절판인 책 빼고, 성황리에 팔리고 있는 책이 168권. 품절, 절판된 책 포함하면 334권. 지금 만 나이로 65세. 워낙 머리가 좋아서 중학교 3학년 시절이었던 만 15세부터 번역 일을 하기 시작했다고 계산하면 334권 ÷ 50년 = 6.7권/연, 대학 신입생 시절엔 미팅도 하여간 좀 놀았을 테니 1년 빼고, 대학 2학년 만 20세부터 군대 면제받았다 치고 번역 책 냈으면 334권 ÷ 45년 = 7.4권/연. 어떻게 계산해도 적어도 1.6개월에 한 권, 즉, 석 달에 두 권씩은 책을 번역해냈다,가 아니라 번역한 책이 출판 돼 나왔다. 물론 이제는 더 이상 팔지 않아서 목록에 뜨지 않는 책은 한국의 출판사에 애초에 없었다고 가정해도 그렇다는 거. 석 달에 두 권.
 근데 내가 이 양반한테 정말로 경악하는 것은, 무려 세 달에 두 권씩을 팍팍 번역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독자가 번역한 한국의 언어를 읽어나가는데 전혀 무리가 없다는 거. 어떤 경우엔 모르긴 몰라도, 원문도 김석희 선생이 번역해 놓은 것보다는 매끄럽지 못할 걸? 하는 의심까지 들 정도로. 아, 이해한다. 전문 번역가라고 하면 번역만 해서 생계를 꾸려야 하는데, 석 달에 두 권 번역했다고 해도 번역료를 최대 권 당 1,000만원 잡으면 연 8천만 원. 그래, 만일 서울지역에서 산다면 이 수준으로 해야 그냥저냥 살림 꾸리는 수준일 것이다. (아무나 권 당 천만 원 받는 게 아니라는 거, 명심하시라.)
 우리가 번역가 김석희를 기준으로 생각해보야야 할 것. ① 적어도 석 달에 두 권씩 45년간 쉬지 않고 팍팍 번역할 수준 아니면 다른 길을 택하는 것이 경제적이다. ② 아무나 석 달에 두 권 번역하는 게 아니다. 원문을 능가할 정도라고 독자가 오해할 수준의 균일한 문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쉬지 않고 45년간. ③ 국내 최고 수준의 교정자에게 자신의 글을 교정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출판계에 끗발이 있어야 한다. 자신의 책을 끝까지 감수하며 퇴고 등등을 하기엔 석 달에 두 권은 너무 많으니까. 그러므로, 위의 네 가지 조건을 다 맞추기 힘드니, 결론이기도 한데, ④ 번역가의 길은 집구석에 돈 많은 사람이 심심풀이로 하는 것이 대빵이다. 하긴 어느 건 안 그래, 씨.
 근데 나는, 번역가 김석희의 문장이, 위에서 얘기했듯, 원문보다 더 매끄러운 것(처럼 읽히는 것)이 어째 마음에 들지 않아 같은 텍스트라면 이이를 피해가는 입장이었지만, 번역문학을 즐기는데 김석희를 피해간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도저히 피해갈 방법이 없다. 또 영어 번역판에 여사님 한 분, 흠. 그이의 이름은 밝히지 않겠다. 하여간 일 년에 일고여덟 권의 책을 번역하는 초인적 작업을 홀로 해나가는 외로운 슈퍼맨이 이번엔 일본 작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痴人の愛>를 번역했다. 이걸 <미친 사랑>이라고 한 것에 무지 불만이었다가, 책 뒤에 역자 해설을 보니 ‘미친 사랑’은 역자의 의도라기보다 책 많이 팔아먹기 위해 출판사 편집위원들의 권유를 그냥 수긍한 것이라고 한다. 이탈리아에서는 제목을 <어느 바보의 사랑>이라고 뽑았다는데, 나도 한 표. <미친 사랑>이 뭐야. 하여간 이 책, 이번엔 일본책도 김석희, 정말 얄밉게 매끄러운 문장들로 잘도 바꿔놓았다. 거기다가 책을 읽어나가다가 흐름을 자주 끊을 정도로 상세한, 읽은 다음 몇 초 정도밖에 기억하지 못하고, 중요하지도 않은 각주까지 제공하는 세심함까지. 이러면서 1년에 7.4권 씩 45년간을 꾸준하게. 아, 놀라워라. (슈퍼 파월?)


 책을 출간한 시점이 1925년. 1차 세계대전 용 군수산업의 발달로 시작해 농촌인구의 지속적인 도시 집중화가 진행되던 시기. 우쓰노미야 촌놈 전기기사, 숫총각인 주인공 조지가 일 끝나면 할 일 없어 늘 다니던 카페에 한 꼬맹이 아가씨 접대부에 호감을 느낀다. 정말이다. 15세. 우리나이로 16세. 중학교 3학년. 생긴 것도 괜찮고, 말도 별로 없고 좀 우울한 성격이긴 한데 조지 말도 잘 듣는다. 음. 어감이 이상해. 조지 말도 잘 들어? 무슨 얘길, 16세 꼬마 아이한테. 그래서 이 아이를 데려다 영어도 가르치고 음악도 가르치고, 하다가 사랑하게 되고, 결혼까지 하고, 미치도록 사랑하는 얘기. 이것이 다다. 하지만 이리 간단하게 얘기를 끝낼 수 없는 것이 328쪽에 이르는 작품을 많은 독자들로 하여금 하루에 읽어치우게 만드는 문학의 힘. 정말 우스운 사랑 이야기, 원 제목에서 보듯 한 바보 남자의 쪼다 같은 사랑 이야기에 독자를 빠뜨리는 힘을 (일단 잘난 척부터 좀 하자) 우리는 문학의 효용이며 쾌락이라고 한다. 작가 다니자키 준이치로를 얘기할 때, 여인의 몸에 대한 탐닉이니, 사도-마조히즘과 결합한 에로티시즘이니 하는 모양인데 1920년대엔 그랬다고 쳐도, 근 10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은, 그냥 탐미주의, 이렇게 간단하게 말하면 안 될까?
 여기에서 작가가 탐하는 대상이 한 여인 또는 여인의 몸― 읽어보시라 한 여인의 정신세계는 절대 아니다 ―에 대한 탐닉이어서, 탐닉의 대상, 빌어먹을 행실을 결국 개 못주는 젊은 여인을 사랑하거나 추구하는데 어떤 장애 또는 장해도 불사하는 경향을 포기하지 못하는 걸 쓴 작품이라고, 간단하게 얘기할 수 있는데, 이런, 책의 모든 것을 말해버리고 말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여인의 무릎 아래 머리를 조아리고 조공하는 남자, 이름이나 다른 걸로 하지, 조지가 바로 책의 원래 제목에서의 치인痴人(원래 한자는 癡人), 즉 ‘바보’다. 서양소설에서는 이런 종류의 바보들이 왕왕 등장했는데(보바리 여사한테 남편 샤를이 바보 아니었나?), 동양 소설 안에서는 처음 발견했다. 사실 독후감에 ‘사도-마조히즘’에 대해선 쓰지 않으려 했다. 당신이 책을 읽은 다음에 이 소설 <미친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저절로 그것과 아주 유사한 장면들 위주로 책을 떠올리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래, 여기까지 하자. 왜 이름만 들어도 왠지 불편해지는 사도-마조히즘을 생각하게 될지는 책을 직접 읽어볼 분들의 권리로 내버려두는 편이 좋겠다.
 한 가지 힌트를 드리자면, 읽는 내내 주인공 조지의 행동이 너무 바보 같고, 바보 같아서 안타깝고, 나중엔 조지가 진짜 안타깝기만 해서(책 속에 들어가 도와주거나 충고해줄 수도 없잖은가!) 욕 나오고 콱 때려주고 싶다. 탐미주의 소설이라는 거. 준이치로와 그의 분신인 조지가 미학을 느끼는 것은 어린 소녀 나오미의 몸이라는 거. 이만하면 다 알려준 셈이다. 나머지는 당신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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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01-08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김석희 선생 정말 대단하죠. 이 포스팅을 보니 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근데 저도 제목에는 좀 불만이 있었어요.... <치인(痴人)의 사랑>이라고 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싶은...

2018-01-08 1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08 1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17 1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22-09-13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리뷰 오늘에서야 읽고 ㅋㅋㅋㅋㅋㅋㅋㅋ 신나게 읽고, 석 달에 2권, 계산해 두신 거 보고 한참 웃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2022-09-13 13: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루시 골트 이야기
윌리엄 트레버, 정영목 / 한겨레출판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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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후감을 시작하기 쉽지 않다. 읽은 다음 느낌이 그냥 먹먹하면서도 해야 할 말이 무척 많을 것 같기도 하지만 지금, 무척 많은 말을 도무지 시작도 하지 못하고 화면만 바라보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좋다, 얘기해보자.
 초반에 책을 읽다가 참지 못하고 아일랜드 독립에 관한 짧은 내용을 검색해 읽었다. 1921년 12월, 아일랜드는 영국으로부터 자치권을 획득하지만 근본적으로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청교도 혁명을 완수한 잉글랜드의 신교도 정권은 거의 대부분 로마 가톨릭 신자들이었던 아일랜드인의 땅을 몰수해 신교를 믿는 잉글랜드 사람들에게 양도해버려, 아일랜드 인들은 거의 다 소작농의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는데, 1801년 정치적으로 완전하게 잉글랜드가 아일랜드를 병합하자 꾸준하게 현지 소작농들이 잉글랜드 출신 지주에 대한 항쟁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이를 꾸준하게 탄압하다가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21년 12월, 아일랜드에 자치권을 허여하였으나, 여전히 원주민들은 소작농으로 기아선상을 헤맬 수밖에 없었단다. 3일 굶어서 남의 담장 넘지 않는 사람 없다고 했음에, 무려 120년간을 유럽 최악의 빈곤상태로 지내던 아일랜드 인들은 자치권 획득에도 불구하고, 자치권 획득 앞뒤로, 먼 조상이 잉글랜드에서 넘어와 아직도 지주계급으로 장원과 저택을 소유하고 있는 집단에 노골적인 테러를 감행하곤 했나보다.
 이 책의 앞부분도 소작인들에 의한 지주계급의 저택과 농지에 대한 방화를 당했거나 위협을 견디지 못해 나름대로 누 백년 살아온 지주 가문이 차례로 아일랜드의 토지와 저택을 처분하고 잉글랜드나 아메리카로 떠나는 분위기에서 시작한다. 여기에 자그마한 과수원과 목장을 가진 골트 가에도 세 명의 아일랜드 소작인 계급의 젊은이들이 지주의 저택에 불을 지르기 위해 한 밤에 침입한다. 대위 출신 상이군인 골트 씨는, 굳이 이들을 쏴 죽이기 위해서라기보다 방화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방어적 위협사격의 의미로 그들을 향해 소총을 한 발 발사했지만, 한밤이라서 그랬는지 그 중 ‘호라한’이라는 청년(과 소년의 중간 가량)의 어깨를 맞추고 만다. 자신의 땅에 휘발유를 갖고 명백하게 방화를 위해 한밤중에 침입한 범죄자를 적법하게 총으로 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출신 지주를 향한 험악한 사회분위기 때문에 골트 씨는 총을 맞아 삼각건으로 팔을 고정시키고 다니는 아이의 집을 방문해서 자신의 과실을 인정하고 보상을 제의할 수밖에 없었으며, 총을 맞은 소년 호라한은 소영웅으로 읍내에서 칭송을 받을 정도의 사회 분위기. 골트 씨의 가문이 벌써 아일랜드로 넘어와 살기를 수백 년, 스스로도 잉글랜드가 아닌 아일랜드 사람으로 인식함에도 불구하고, 특히 아내 헬로이즈 골트 여사가 완전한 잉글랜드 여성이라는 것이 부각되어, 언제 가족이 불에 타 죽을지 모른다는 집단적 공포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가족 전부가 다 그렇지는 않아서 무남독녀 외동딸 루시는 결코 자기가 사랑하는 바닷가 라하단을 떠나고 싶지가 않았다. 가족의 안위를 책임지는 부모, 특히 가장인 에버라드 골트 씨는 루시가 집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른다. 자신도 가기 싫지만 그렇다고 사회적으로 다중의 힘을 과시하는 소작인을 향해 총까지 쏴서 하마터면 죽일 뻔했는데 그들의 복수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떠나지 않을 수도 없는 일. 더구나 아일랜드의 목장과 저택은 그냥 놔두고(원래 부동산 좋은 점이 그냥 내버려둬도 절대 없어지지도, 닳지도 않는 것이니까), 아내가 철도회사의 주식에 박아 놓은 재산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다른 곳, 거기가 세상 어디든 간에, 불편 없이 살 수 있을 정도임에야 굳이 불안하게 라하단을 고집할 수도 없었다.
 모든 복잡한 수속을 다 마치고 떠나기 며칠 전 저녁 즈음. 아홉 살 루시는 결심한다. 집을 나가기로. 그리하여 예전 이층 다락방에 살던 하녀의 말을 기억해내고 숲속으로, 숲속으로 샛길을 따라 도로가 나올 때까지 걷다가 그만 다리에 큰 부상을 입었지만(부상으로 인해 평생 동안 다리를 가볍게 절어야 했지만), 몇 주일 동안이나 숲 속의 쓰러져가는 오두막에서 홀로 생존하는 데 성공한다. 그 동안, 가족들은 바닷가에서 루시가 예전에 잃어버린 슬리퍼와 겉옷을 발견하고는, 루시가 썰물 때 멱을 감으러 나갔다가 난바다로 쓸려가 익사한 것으로 단정을 해버려, 며칠 동안 바닷가 벼랑 위에서 먼 바다를 내려다보기만 하던 골트 부부는 그동안 살았던 라하단에 정이 똑 떨어져, 남아 있는 어떤 사람도 이들을 찾을 수 없는 이탈리아와 스위스의 작은 도시에서 남은 삶을 소비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부부가 파리에서 잠깐 연락을 하고 곧바로 종적을 감추자마자, 딱 그 순간에, 저택의 관리인 헨리에 의해 루시가 숲 속 외딴 곳에서 발견되는데. 여기까지.
 루시는 어떨까. 집에서 도망했다는 죄의식. 처음엔 그랬다가 점점 부모가 자신을 찾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았다는 미움과 한 편으로의 그리움. 돌아오지 않는 부모에 대한 서운함. 감정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서 그러다가 애초에 부모와 자신을 이별하게 만든 근원인 방화미수범에 대한 분노와 끝내 돌아오지 않는 부모에 대한 고의적 무의식 적 미움. 기타 등등. 부모 입장에선, 첫 번째가 딸이 바다에 빠져죽게 내버려 두었다는 죄책감. 조금 지나면 상실감. 이어지는 우울증. 조금 더 거시적으로 생각하면, 아일랜드의 역사가 개인 가정에 끼친 영향. 작가 트레버는 전적으로 부르주아 출신인 골트 가족의 입장에서 작품을 만들어간다. 그러니 거시적으로는 생각하고 말고가 없다. 거시 역사적 배경은 그냥 1920년대 골트 가족의 이산의 불가피함을 설명하고 지금 독후감에선 밝히지 않을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또 한 번 사용하기 위한 기재로 작용할 목적일 뿐인 것처럼 보인다.
 루시와 골트 부부가 이산 이후 오랜 세월을 고요히 지내는 그림. 기껏해야 인간의 가슴에 상실감을 산 같은 부채로 담고 사는 세월을, 놀라울 정도로 차분하게 엮어가는 윌리엄 트레버. 20세기 중요한 단계를 옆으로 비껴가며 극도의 주변이었던 아일랜드의 라하단에서 칩거하는 루시와, 역시 급변의 현장을 피해 결코 눈에 띄지 않게 묻어 살 수밖에 없던 골트 부부의, 이런 단어가 어울린다면, 쓸쓸한 그림자. 그래, 이것도 이쯤에서 그만하자.

 

 


 

* 알라딘의 빅 데이터를 보면, 나는 2017년에 정영목 씨가 번역한 책을 가장 많이 읽었다고 한다. 연휴 잘 때려 놀고 난 다음에 피곤한 상태에서 읽어서 그런가, 어째 정영목의 번역문장과 단어들이 와 닿지가 않고 읽기가 매우 불편했다. 나만 그런지 그건 모르겠다. 당연히 다시 읽어볼 생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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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짐승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5
에밀 졸라 지음, 이철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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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파리의 샤펠 대로에서 푸아소니에르 시문市門 왼쪽에 위치한 다 찌그러진 3층짜리 봉쾨르 호텔의 2층, 대로를 면한 그나마 좀 나은 방에서 제르베즈와 랑티에 부부가 여덟 살 먹은 클로드, 네 살 박이 에티엔을 데리고 막 도시빈민의 삶을 시작할 때, 어라, 여덟 살과 네 살 아이들, 터울이 조금 심한데? 가운데 하나 더 있는 거 어려서 숟가락 놨나? 솔직히 여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아이들 사이에 자크 랑티에란 둘째 아들이 있어서 파리로 무작정 상경하면서 아이 셋을 다 데리고 가기 버거우니까, 자크를 아빠의 사촌 누나 파지 고모한테 맡겨 놓았었다. <목로주점>에 이 이야기가 나오는지 아닌지 기억나지 않는다. 만일 이야기를 했다면 처음부분이 아니라 제르베즈가 모진 고생을 하고 있을 때, 그러니까 책의 끝부분에 아이들이 돈을 벌어 조금씩 송금을 해주는 장면에 잠깐 거론을 했을까 싶다. 당연히 송금해준 아이가 자크인지 에티엔인지 아리송하다. 에티엔 아니었을까? 그래도 셋째 아이는 고생고생하며 키우긴 했으니 그놈의 우라질 정이란 게 좀 들었을 거 아냐.(미안하다, 독후감 쓰기 위해 <목로주점>을 다시 한 번 읽어볼 정성까지는 없다. 이거 써서 서재에 올리면 돈이 나오냐, 쌀이 나오냐!) 그럼 제르베즈 아주머니한테는 아들이 셋, 씨 다른 딸이 하나, 있는 거다. 한 세대가 흘러 제르베즈의 딸 이야기는 <나나>, 첫째 클로드는 <작품>, 셋째 에티엔은 <제르미날>, 그리고 둘째 아들 자크 이야기가 바로 <인간짐승>이 된다. 이로서 제르베즈 아줌마의 아들 딸 이야기를 다 읽은 셈이다.
 루공-마카르 총서 가운데 또 한 권의 눈부신 소설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 독후감에서 말했듯이 에밀 졸라의 가장 큰 특징은 “질주”다. 근데 이 <인간짐승>에선 정말로 질주하는 장면이, 그것도 독자로 하여금 읽는 도중에 ‘내가 지금 압도당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대단한 질주가 등장한다. 어디에? 작품의 클라이막스 부분에. 열여덟 칸 화물차에 술 취한 병사들을 잔뜩 실어 죽음의 전선으로 무한질주를 감행하는 열차. 어, 지금 내가 작품의 절정 부분을 얘기했네? 아, 이걸 어쩌나.
 졸라의 총서 자체가, 루공 가문과 마카르 가문에서 유전적으로 가지고 잠재해 있는 특이성, 즉 자연적 요인과, 가문의 후손들이 19세기의 삶을 살아가는 환경적 요인을 섞어 당대 프랑스의 거의 모든 계급을 묘사했다고 한다. 이 책은 그 중에서 가문의 저주스런 유전적 요인으로 인해 절망에 빠져 외톨이로 살아가는 자크 랑티에의 불운한 유전적 요인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과 생애를 그렸다.
 1970년대 여름엔 여고생들은 눈처럼 흰 교복을 빨아 행굴 때 물에 파란색(스카이 블루!) 파이로트 잉크를 반 방울 떨어뜨려 띌 듯 안 띌 듯 눈이 푸르게 부시도록 흰 상의를 입고 다녔다. 거의 대부분의 남학생들은 매끈한 여고생의 순백의 교복과 등 뒤의 도드라진 브래지어 자국을 보면 그냥 넋이 나가 멍하니 바라보는 정도에 그쳤으나 그렇지 않은 유별난 동무도 하나 있었다. 지금은 이민 가 다른 나라 국민으로 살아 연락도 안 되지만 참 친했던 동무인데, 그 친구는 더 없이 깨끗하고 순결해 보이는 여고생의 눈부신 뒷모습을 보면 자기 손을 진흙탕에 담그고, 진흙이 뚝뚝 떨어지는 손으로 희디 흰 교복을 엉망으로 더럽히고 싶은 충동이 인다고 했다. 뭐 그런 충동이 이는 것, 그걸 마음속에 가지고만 있지 정말로 붉은 진흙으로 흰 옷을 더럽히지만 않는다면 그럴 수도 있다고 용인해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 동무도 자신의 충동을 마음으로 다스리기만 했으며, 그리하여 끝까지 정상인의 범주에서 이탈하지 않았다.
 위에서 말한 유전적 요인. 책의 주인공 자크 랑티에의 경우를 보면, 여성에 대한 갈증으로 시달리다가 정작 여성의 신체, 알몸은커녕 목 주변이나 젖가슴 부분을 보기만 해도 갑작스런 발열에 시달리며 해당 여성을 잔인하게 죽이고 싶어 하는 증상. 성적 흥분으로 인한 교접의 욕망을 훨씬 능가하는 살인의 욕망이 온몸과 정신을 지배하게 된다. 분명한 도착증이고 정신 질환의 일종이다. 사이코패스의 전형적인 증상 아닐까? 이런 증상을 졸라는 이렇게 묘사해놓았다.


 “그것은 다른 존재, 그동안 너무도 빈번히 그의 내부 깊숙한 곳에서 꿈틀거리며 준동해왔던 그 존재, 아주 먼 조상으로부터 대를 물려 그에게 유전된, 살인에 대한 갈망으로 불타는 존재였다. 그 존재는 옛날에도 사람을 죽였고 지금도 사람을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지금 자크 주변의 사물들은 꿈속에서처럼 둥둥 떠다닐 뿐이었는데, 그것들이 그의 고정관념을 통해 시야에 들어오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그의 일상적인 삶은 폐기 처분된 것처럼 보였다. 그는 과거에 대한 기억도, 미래에 대한 예견도 상실한 채 오로지 지금 강박적으로 자신을 따라붙는 욕구에 쫓겨 몽유병 환자처럼 걸어갔다. 그렇게 걸어가는 육신 안에 그의 인격은 실종된 상태였다.” (363쪽)

 

 그러나 소설 속에서 자크가 진짜로 시달리는 것은 살인욕망이기는 한데 여성에 대한, 자신을 성적으로 흥분시키려는 여성들만을 향한 살인에 대한 갈망이다. 실제로 그는 남성을 죽이려고 약속도 하고 맹세도 하지만 결코 실행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완력으로 자기보다 열등한 여성을 향한, 전형적인 ‘비겁한 사이코패스’인데 물론 <목로주점>의 제비 아빠 랑티에 씨를 닮아 잘 생긴 용모와 점잖고 신중한 언행을 겸비한 주인공을 그렇게까지 몰아가지는 않는다. 애초부터 시대의 양심이라 일컫는 졸라 선생은 이 소설을 범죄소설로 만들기로 작정을 한 거 같다. 루공-마카르 총서를 구성할 때 벌써 범죄자들에 의한 범죄소설도 구상을 하고 있었다고  하니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 작품에선 수없이 많은 인간들이 죽거나 죽기 위한 질주를 하는데, 자연사는 하나도 없다. 전부 살인에 의하여 죽음을 맞는 불행한 최후뿐이다.
 총 12장章으로 되어 있는데 1장부터 도저히 살인을 피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오랜만에 파리로 부부가 일을 보러와 루보 씨는 곤경에 처했던 사건을 말끔하게 처리하고, 아내 세브린은 백화점에서 행복한 쇼핑을 즐긴다. 부부는 동료가 하루 동안 쓰게 해준 아파트에서 파리 나들이의 즐거움을 이야기하다가 세브린이 말 한 마디 잘못하는 바람에, 자신을 어려서부터 후원해준 귀족출신의 법원장 그랑모랭의 집에 들어가 마치 수양딸처럼 자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늙은이 그랑모랭의 성노리개로 살았노라 고백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남편 루보한테 두드려 맞는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아니라 결혼 전 과거에, 타의로 있었던 일 때문에, 수양딸이라고 하지만 거의 하녀 수준의 성노예임에도 불구하고 지참금 1만 프랑까지 주며 결혼시켰으며, 유언장에 의하면 4만 프랑에 이르는 시골 영지와 저택을 유증하기로 한 전직 법원장에 대한 질투와 증오로 아내를 무지막지하게 두드려 패고 자신의 자존감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기어이 법원장을 살해하기로 결심하는 루보. 한 명 더. 아내가 아무도 모르게 숨겨놓은 1천 프랑 지폐를 차지하기 위해 아내이자, 주인공 자크의 대모이자 키워준 은인 파지 고모에게 쥐약을 섞은 소금을 먹이다가 의심을 받고는 방법을 바꿔 아내가 자주 사용하는 관장약에 쥐약을 넣어 끝내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그러나 결국 돈은 찾아내지 못하는 고모부 등등.
 소설 속의 인물로만 보자면 프랑스엔 전부 환자들만 사는 거 같다. 이외에도 도박중독자, 알콜 중독자, 질투에 눈이 멀어 불특정 다수의 죽음 같은 건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는 인간들, 무엇보다, 가장 큰 죽음, 대규모 살인을 위해 전쟁터로 무수한 젊은이들을 실어 나르는 전쟁의 결정자들까지. 죽음을 향한 정신 질환자들의 멈추지 않는, 또는 멈추지 못하는 질주의 장면들. 정의가 아닌 줄 번히 알면서 진실을 불살라버리는 정책 입안자, 이 책이 발간한 시점이 1890년. 책 속에서 졸라는 벌써, 정권에 의한 진실의 왜곡을 정확하게 집어내고 있다. 마치 4년 후 19세기 말 지식인들의 경종을 울린 드레퓌스 사건을 예감이라도 한 듯.
 격렬한 책. 졸라의 작품치고 격렬하지 않은 것이 별로 없지만 그 끝을 보여준다. 책에서 나오듯 제르베즈와(and/or) 첫 남편 랑티에 집안 남자들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열광과 광기의 흐름. 그것이 어떻게, 어떤 파멸로 끝을 볼 것인가는 직접 확인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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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02-09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마침 이 글로 당첨! 적립금 나오시겠는데요! ㅎㅎㅎ

Falstaff 2018-02-09 14:49   좋아요 1 | URL
크흑. 정말로 돈도 나오네요.
물론 잠자냥 님보단 벌이가 좋지는 않지만요. ㅋㅎㅎ (그래도 근무시간에 짱박혀 몰래 쓴 걸로 말하자면, 이게 얼마예요, 그죠?)
 
온 뷰티 1
제이디 스미스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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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그러나 벌써 작년에) 제이디 스미스가 쓰고 김은정이 옮긴 <하얀 이빨> 독후감을 쓰면서 이이의 다른 책을 읽어보겠다고 했고, 읽었다. 재미있는 작품.
 아, 먼저 책 자체에 대해서 얘기해보자. 민음사가 찍었다. 페이지 수로 1권이 556쪽, 2권이 608쪽. 본문만 따지면 1,100 쪽이 훌쩍 넘어간다. 그러나, 종이가 아깝다. 큰 글자체에 널럴한 편집. 흰 종이 위에 검정 글씨가 드문드문 박혀 있는 듯해서, 2권, 본문 585쪽을 나 참 말도 안 돼, 하루면 후딱 해치울 수 있다(당연히 아침 일찍부터 밤까지 붙들고 있어야하지만). 베드씬이 여기저기 박혀 있는 재미나는 소설이라 그럴 수도 있다고 하면 할 말이 없다. 그래도 그렇지 580쪽이 넘는 책을 하루에 해치울 수 있다는 건, 책에, 종이 위에 공간이 너무 많지 않고는 생길 수가 없는 일이다. 이게 애들 읽는 그림책도 아니고, 삽화가 듬뿍 들어있는 동화책도 아니고, 남녀상열지사가 듬뿍(까진 아니어도) 씌어있는 19세 이상, 아니면 적어도 고등학생 이상이나 즐기는 책이건만 어째 이렇게 찍었을까? 아, 돈도 좋지만 종이 알기를 이렇게 우습게 알면 보르네오 열대우림 작살난다. 세계평화와 인류의 영생, 후세의 안녕을 위해서라도 좀 양심적으로 책 만들었으면 좋겠다. 가뜩이나 책장도 좁아 죽겠는데 부피도 많이 차지하고 말이야.
 제이디 스미스는, 영국 백인 아빠가 자메이카 출신 엄마하고 결혼해서 만든 딸이다. 좀 미인이다. 사진은 <하얀 이빨> 얘기할 때 올렸으니 생략하고. 스미스한테는 자신의 출신이, 더군다나 삶의 거의 전부(그래봤자 아직 몇 년 되지 않는다)를 런던과 영국, 미국에서 지내야 했던 작가는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완전 백인, 완전 흑인들의 묘한 눈길을 절대로 모른 척할 수 없었으리라. 그래서 <하얀 이빨>도 그렇고 이 책 <온 뷰티>에서도 그렇고 혼혈 가족을 주인공으로 해서 이들 사이에 벌어지는 특별한 분위기를 재미나게 그려내고 있다. 우연하게도 지금 책을 멀리 두고 독후감을 쓰게 되어 <온 뷰티>를 먼저 클릭해서 출판사 책 소개를 읽어봤다. 작품의 주요 무대가 이번에는 영국이 아니라 미국, 보스턴 근교 웰링턴 대학이 있는 백인 부르주아 지역 웰링턴의 ‘인종적, 사상적 갈등을 겪는 두 가족에 대한 이야기’라고 딱 규정하면서도, 역자 정회성은 결국 “사랑이 가득한 소설”이며 “대립되는 것들이 마침내 사랑을 통해 회해로 발전한다는 점에서 따뜻하면서도 아름다운 소설”이라고 했다. 이건 전적으로 출판사가 한 책 소개이며, 소위 ‘옮긴이의 말’이다.
 그럼 책 소개와 옮긴이가 한 얘기가 맞느냐, 하는 문제. 맞다. 적어도 그렇게 읽을 수도 있다. 동시에 달리 읽을 수도 있다. 이렇게도 읽고 저렇게도 읽는 것, 이게 바로 독자의 권리. 어찌 이를 포기할 수 있을까.
 앞에서 얘기했듯, 보스턴 근교, 택시 타도 도심까지 한 시간 가량 걸린다 하니 분당이나 일산 정도로 생각하면 될 듯한 곳의 부르주아 집단 거주지에 웰링턴 대학의 종신교수직을 (호시탐탐) 노리는 하워드 벨시 교수가 먼저 살고 있었고, 이 양반하고는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을 정도의 학문적 맞수이자 지금은 좀 더 대중적인 지지를 받고 있으며 영국에서 초빙되어 온 몬터규 킵스 교수가 새로 이사 왔다. 벨시 교수는 영국의 프롤레타리아 출신으로 머리 하나 좋아 학문적으로 출세가도를 달리다 미국에서 (노예 출신 조상을 둔 친절한 간호사였다가 부유한 병자로부터 거액을 상속받은 무지 부유한 여성의 딸이기도 한, 그래서 피부색이 아주 까~만) 초절정 글래머 미녀 간호사에게 반해 결혼을 해, 몇 년을 떠돌다 웰링턴에 거처를 정하고 2남 1녀를 둔 사람이다. 반면에 킵스 교수는 본인이 자메이카의 까~만 흑인으로 역시 머리 하나 좋아 영국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다가 (무지하게) 돈 많은 백인 여성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고 영국에서 계속 교수직에 있으면서 사사건건 벨시 교수의 주장에 태클 거는데 엄청 재미를 느껴 급기야 그가 재직하고 있는 웰링턴 대학에 초빙교수로 와서 아예 여기서 터를 잡으려 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현상이 벌어진다.
 백인이 향유하던 기존의 특혜를 거부하고 흑인에게 보다 넓은 가능성을 부여하고자 노력하는 진보적 성향이 백인인 벨시 교수가 굽힘없이 흑인에 대한 사회적 배려를 주장하는 측면인 반면, 진정한 권리를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 ‘노오오오력’으로 제도권에서 인정하는 바로 그 권리를 얻어내야 하기 때문에 흑인이라고 해서 특별한 배려를 한다는 건 오히려 인종적 차별이라고 주장하는 보수적 입장을 흑인인 킵스 교수가 취하고 있다는 것. 재미나지? 여성 작가가 남성의 시각을 이렇게 그려나가고 있다. 흑인 여성과 결혼한 백인은 흑인을 위한 정책을, 백인과 결혼한 흑인은 백인을 위한, 아니면 적어도 현상 유지를 위한 정책을 주장하고 있는 거다. 나는 이런 설정 자체가 제이디 스미스가 펼치는 대단히 상징적이고 정치적인 장치라고 여겼는데, 아쉽지만 독자서평이나 출판사 책 소개, 역자 해설 등에서 나와 비슷한 논조는 보이지 않는다.
 하긴 내 의견보다 훨씬 더 재미난 스토리 라인이 마구 뒤섞인 작품을 읽노라면 그럴 수도 있다. 가족, 아니, 부부 간의 흑백 갈등. 130 킬로그램의 흑인 아내를 두고, 부부의 오랜 친구이자 가냘픈 체격의 백인 여교수와 바람피운 걸 들킨 벨시 교수는 변명에 변명을 거듭하다가 급기야 아내에게 결코 자신이 한 눈에 반할 때처럼 아름답지 않다고 말해버리며(물론 오히려 아담한 사이즈의 여교수가 벨시를 자빠뜨린 것이긴 하지만, 어쨌든 했잖아. 그럼 유혹을 당했건 어쨌건 일단 이유가 안 되는 걸!), 이것보다 더 불행한 사실은, 무지막지하게 뚱뚱한 검둥이 아내를 이젠 결코 아름답지 않을지라도 아직도 세상 누구보다 더 사랑하는 이 통곡할 만한 끔찍함이라니. 반면에, 또한 5천만 파운드를 호가할 그림을 보유할 정도로 막강한 재력을 자랑하는 흰둥이 아내를 둔 흑인으로, 자신의 사회적, 학문적, 대학 내 권위에다가 이스트를 팍팍 첨가해 마구 부풀려진, 다분히 허위적 부권父權을 가족에게도 과시해서 가족간, 부부간 거의 소통을 하지 않는 꼼꼼한 성격의 킵스 박사 역시 셜리라는 이름의 시적 재능이 있는 아가씨와 내연의 관계를 맺고 있다. 여기에 젊은이들끼리 얽히고설킨 사랑의 실타래. 정말 재미나겠지? 이거 말고 사랑, 아니면 하룻밤 치정 같은 것도 있는데 그건 읽어보시기 바람. 진짜 끝내줌.
 그런데.
 내가 진심으로 관심을 두었던 것은 칼, 이란 이름의 래퍼. 길거리, 버스스탑이란 음식점을 겸한 작은 무대에서 한 달에 한 번 공연을 하던 젊은이로 대변되는 빈곤한 흑인이 더 관심을 끌었다. 아니면 아직 철이 덜 든 힙합 보이, 작은 아들 레비와, 레비가 함께 어울려 다니는 아이티를 탈출해 미국으로 건너온 가난한 흑인들. 이들이 보기엔 킵스 박사가 자기 연구실에 걸어놓은 그림은 킵스(사실은 교수의 아내 칼린이 한 일이지만)가 아이티에서 너무 배가 고파 팔지 않을 수 없었던 화가로부터 겨우 3~5 달러를 주고 사왔으나 지금은 시가로 따져 작은 섬 하나 정도는 살 수 있는 그림은, 사실상 강탈이었기 때문에 아이티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 아이티의 잔인한 독재정권을 피해 미국으로 온 흑인들은 백인들과 비교하는 건 처음부터 아무 의미도 없고 심지어 같은 미국 내 흑인에 비해서도 훨씬 혹독한 급료를 받고 마치 150년 전 노예상태로 노동을 강요당하고 있다. 미국 내 흑인인 칼은 중산층에 대한 깊은 불신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시적 역량을 눈여겨 본 벨시 교수와 불륜 관계를 맺었던 클레어 교수의 눈에 들었고 이에 벨시의 딸 조라의 협력으로 웰링턴 대학에서 클레어 교수의 수업을 들으며 웰링턴 가의 흑인 아가씨들, 조라와 킵스 교수의 아름다운 딸 빅토리아와 모종의 연애관계에 접어들면서도, 급기야 부르주아 계급 내부에 어쩔 수 없이 가질 수밖에 없는 목불인견의 허위의식에 학을 질려 웰링턴을 떠나가는 장면.
 작가 제이디 스미스 본인이 영국과 미국에서 나름대로 성공한 흑백 혼혈인데 어째서 적어도 이 문제는 그저 가볍게 스치듯 지나가고 말았을까. 스스로 유럽과 아메리카의 웰링턴에 사는 것이 합당한 성공한 유색인이라서 그랬나? 나는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내가 진정으로 기대했던, 심지어 빅토리아 양에 의하여 벌어지는 시큰시큰한 베드씬보다 훨씬 더 기대했던 문제제기를 어떤 식으로 끌고 갈 것인지 알지 못하고 책읽기를 마친 것이 너무 아쉬웠다. 그러나 어쩌랴. 글 쓰는 건 전적으로 작가 마음인 것을.



 

PS. 민음사도 엉터리 주석에선 자유롭지 못하다.


 “나흘 전, 키키는 엘리스 워커*를 모티브로 한 반즈앤노블의 토드백 바닥에서 다시금 카드를 발견했다.” (1권 432쪽)
 이렇게 써놓고, ‘엘리스 워커’에 각주를 달아 설명하기를,

 

 “* 1994 ~. 토니 모리슨과 함께 미국 흑인 문학을 대표하는 여성 작가”

 

 웃기다. 이 책의 초판이 2005년에 나왔다. 2005년에 소설도 다 썼다고 가정하자. 그럼 당시 엘리스 워커의 나이 만 11세. 몇 달 전 네이버의 민음사 카페에 오탈자 신고 게시판 달자고 순진한 회원이 제안한 적 있다. 눈만 뜨면 세상에 코미디는 넘친다.
 참고로 세상 사는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지만 말씀드리면, 엘리스 워커는 1944년 생. 내가 좋아하는 여성주의 흑인 작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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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03 17: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03 19: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24-06-16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제 다른 책 읽다가 이 책 알게 되어서 한 번 읽어볼까 하고 검색했는데 폴스타프 님 서평이 이렇게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무엇보다 치정...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흠흠.‘

그나저나 앨리스 워커가 1994년 생이라뇨 ㅎㅎ

Falstaff 2024-06-17 06:02   좋아요 0 | URL
이 책 재미있습니다. 특히 다락방님은 재미있게 읽으실 것 같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