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반란
피터 애크로이드 지음, 한기찬 옮김 / 자작나무(송학)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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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막 읽기를 마치고 책을 펴보니 2000년 7월 1일 초판 1쇄다. 어이가 없다. 출판사 이름이 ‘도서출판 자작’인데 그동안 창고에서 얼마나 오래 박혀 있었는지 새 책임에도 불구하고 앞표지를 열자마자 반양장 표지가 바짝 마른 자작나무처럼 제본한 본드에서 쩍, 갈라진다. 도서출판 자작에서 마지막 책이 나온 것이 2008년. 회사 망했다는 뜻이다. 쉬운 얘기로 이제 책 가게에서 품절되면 상당한 기간 동안 구입할 방법이 없으니 뜻 있는 분은 이 독후감 읽기를 여기서 잠깐 멈추고, 일단 쇼핑부터 하시라.
 이 책, 다 늙어 공부하느라 허리가 휜 동무의 박사학위 논문을 읽다가 ‘피터 애크로이드’란 이름이 눈에 띄어 얼른 사본 책. 핫따, 내 취향이다. 근데 제일 마지막에 달린 ‘옮긴이의 말’에 뭐라 씌어 있느냐 하면,


 “피터 애크로이드(Peter Ackroyd)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좀더 정확히 말해서 애크로이드는 애크로이드의 소설보다 더 난해한 인물이다. 애크로이드에 대한 평이 크게 엇갈리고 있는 것은, 그는 물론이고 그의 작품들이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지금이라도 인터넷의 amazon.com에 들어가보면 그에 대한 무지에 가까운 비판과 일방적인 찬사를 접할 수 있다.)”


 흠. 기분 별로다. 이걸 읽으니 일방적인 찬사를 보내려 했는데, 정말로 그렇게 한다면 기껏 내 돈 주고 사서 읽고 난 다음 내가 느낀 만큼 쓴 독후감을, 대한민국 어딘가에서 쳐다보며 옮긴이 한기찬이 아주 삐딱한 웃음을 머금을 거 같다. (난 도대체 ‘기찬’이란 이름이, 참 나, 기가 차서, 마음에 들지 않아!) 그래서 책 앞날개에 씌어 있는 역자 한기찬 소개를 보면, 얼마나 잘난 인간인가 좀 알고 싶어서 그런 건데, 흠. 명문 사립대학 (국문과)나온 시인이시군 그래. 뭐 별거 아니구먼. 하여간 옮긴이의 말 가운데 저 괄호 안 비아냥거린 것이 영 캥긴다. 좋다, 신경 안 쓴다. 그냥 간다. 


 인류의 역사를 어떻게 분류하느냐 하면,

 B.C 약 3,500년 ~ B.C 약 300년 : 오르페우스 시대
 B.C 약 300년 ~ A.D 약 1,500년 : 아포슬 시대
 A.D 약 1,500년 ~ A.D 약 2,300년 : 몰드위프 시대
 A.D 약 2,300년 ~ A.D 약 3,400년 : 의트스펠 시대
 A.D 약 3,400년 : 현재


 지금 우리는 몰드위프 시대에 살고 있다. 몰드 위프? 무슨 뜻인지 모른다. 책은 이런 경구로 시작한다.


 전인류적이고 즉각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한 이 새로운 시대에 나는 종종 우리 행성이 먼 훗날의 관찰자에게 어떻게 보일지 상상해보곤 한다. 우리 행성은 끊임없이 활동하는 하나의 국가처럼, 아니 오히려 허공에 뜬 둥근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일 게 틀림없다.

- 로날드 코르보, 『신지구론』, 2030년.


 몰드위프 시대의 끝무렵에 로날드 코르보란 인류가 태어나 활동할 예정인가보다. 그는 하여간 이렇게 썼다. 그로부터 약 1,400년 이상이 지난 작 중 현재 시점. 몰드위프 시대의 인간보더 훨씬 큰 인류가 살고 있는데, 좀 이상하다. 성castle 안에 존재하는 인류는 어려서 자신의 역할을 결정하고, 역할대로 맡은 바 임무를 하며 생활을 한다. 성 안에는 기계도 없고,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타원을 운행하지 않으며, 심지어 자전운동도 하지 않지만 낮과 밤이 있다. 여기에 혜성같이 등장하는 키 작은, 그러나 1,400년 전의 인간과 비교하면 많이 큰 수컷 인간이 바로 플라톤. 이이는 연설가다. 과거의 역사에서 추출한 단편을 보고 그것으로 예전 조상들의 삶과 문명을 유추하는 일종의 인류학자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소설가 찰스 디킨스가 쓴 희극작품 하나를 발견한다. 책의 제목은 『자연도태에 의한 종의 기원』. 책의 어딘가에 ‘찰스 지음’이라고 씌어 있어서 일찍이 『위대한 위산』(정말로 ‘위산’이라고 씌어있다. 작가의 실수인지 역자의 실수인지, 아니면 의도적인 실수인지는 모르겠다), 『어려운 시절』 같은 책을 낸 소설가의 자취는 있는데 찰스 다윈이란 작자는 처음 듣는 것이라 그냥 디킨스겠지 싶어 그렇게 규정하는 인류학자적인 모습. 웃기지만 1만 년 전 구석기시대의 인류를 추리하는 21세기 초반의 인류학자와 그리 다르지 않은데, 심지어 35세기에는 과학과 기계도 없는 상황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이걸 당당하게 어린 백성에게 연설하는 플라톤.
 여기까지 읽으면서 흥미 있는 환상소설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논문에선 작가 애크로이드를 줄리언 반스와 더불어 20세기의 샛별처럼 빛나는 영미 작가 가운데 한 명으로 예를 들었다는 것이 번쩍 떠올랐다. 좀 더 읽어보자.
 그래, 주인공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 플라톤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땅 위에서 발바닥에 흙을 묻히고 산다면, 플라톤의 거처는 저 위에 있다는 이데아. 35세기에 인류는 이데아에 거처한다는 말인가? 안 알려드린다. 이데아가 어쨌든지 간에 성벽 밖이 너무 궁금하여 견딜 수 없는 젊은 플라톤, 금기의 선을 넘어 도시를 벗어났다가 다시 돌아와 도시의 젊은이를 타락시킨 죄로 기소 당한다. 체제를 근본적으로 뒤집어 놓을 수 있는 반역적인 가르침 또는 연설을 했으므로. 반역죄의 유일한 형벌은 뭐?
 여기까지. 얇은 책이다. 도저히 더 이상은 밝힐 수 없다.
 만일 당신이 이 책을 읽는다면, 내가 얼마나 거짓말쟁이인지 알 것이며, 내가 그랬듯 애크로이드, 이 재미난 이름을 가진 작가가 얼마나 기막힌 상상과 은유의 죄를 범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며, 그리하여 이 책을 상찬하는 걸 비꼬고 있는 역자의 오만이 얼마나 가당치 않은지 눈이 다 번쩍 뜨일 것이다.
 단, 작품이 나하고 맞고 안 맞고는 전적으로 당신 소관이다. 낚시질에 넘어가 후회를 한다 해도 내 탓은 추호도 하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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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와 준 펭귄클래식 57
아나이스 닌 지음, 홍성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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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태어나 가난하게 살던 작가 헨리 밀러가 우리 나이 마흔 정도 먹었을 때 머문 곳은 프랑스 파리였다. 밀러가 1891년생이니 마흔이면 1930년. 이때 그는 평생의 역작이자 당대 최고의 외설문학이자, 이젠 세상의 모든 사람이 죽기 전에 꼭 읽어봐야 할 책 1,001 권에 드는 <북회귀선>을 쓰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북회귀선>을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미국 출신의 한 룸펜 프롤레타리아 인텔리겐치아가 파리에서 글을 씁네, 하며 빌빌거리는 이야기로 미국에서 아내가 보내주는 용돈으로 밥과 술을 먹고 여자를 사는 모습을 밀러 특유의 문명, 문화에 대한 세계관에 입각한 길고 긴 에세이 비슷하게 만든 소설이다.
 이이가 실명으로 등장하는 소설. 헨리 밀러와 그의 처, 준. 밀러의 파리 시대에 스물아홉 살 먹은 스페인, 프랑스 혼혈인 여류작가 아나이스 닌이 밀러 부부와 가깝게, 몸과 마음이 동시에 가깝게 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아나이스가 11세 때부터 줄기차게 일기를 써 왔으며, 나름대로 작가라는 이름을 갖고 활약을 했다 한다. 무수하게 많은 일기를 썼는데, 특히 밀러 부부와 인연을 맺은 1930년대 초반에 가장 왕성하게 일기를 쓴 것까지는 좋았다. 개인 일이니까. 하지만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은, 자신이 쓴 문장들을 누구에겐가 보여주고 싶어 안달이 난다는 것. 아나이스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아나이스 닌 재단 담당자인) 루퍼트 폴이 쓴 이 책 <헨리와 준>의 서문에 의하면, 1966년에 남편의 이름과 애인, 즉 정부情夫 부분을 삭제하고 처음 출간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급기야 모든 사람의 실명 이름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게 언제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밀러의 <북회귀선>을 읽어보면 인체의 각 부분을 칭하는 단어를 숨김없이 사용한다. 같은 장면이라도, 지금 시선이라면 그렇지 않겠지만 외설이라 시비를 걸만한 문장도 많다. 이런 밀러, 그리고 당시 외설논란의 중심에 있던 D.H. 로렌스에게 영향을 깊숙이 받은 아나이스 닌의 일기, 더구나 내밀한 자신만의 글쓰기인 일기에서는 더욱 노골적인 묘사가 많이 들어 있는 것이 한편 당연하기도 하다.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밀러의 작품, 그것도 밀러가 조금 더 나이 들어 쓸 작품이 아닌, 초기 히트작 <북회귀선>의 초고에 당연히 충격을 받고 매우 신선하다고 느꼈으며 심지어 깊숙하게 영향까지 받은 아나이스는, 작중 인물과 헨리 밀러 자체를 혼동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필요 이상으로 (띠 동갑인) 헨리 밀러에게 얽히는, 즉 의도된 자유상태로 스스로를 몰고 간 것이 아닌지, 책을 읽는 내내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북회귀선>을 읽어보면 정말 매력적인 책인 걸 단박에 알게 되리라. 헨리 밀러는 오랜만에 입장권을 훔쳐서 음악회에 잠입해 몽롱한 음악을 들으며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드뷔시의 곡까지 진행되고 있을 무렵에는, 분위기가 아주 혼탁해지고 있다. 나는 자신이, 만일 내가 여자였다면 성교性交 중에 어떤 기분이 들까, 쾌감은 여자 쪽이 더 예민할까…… 라는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북회귀선》 문학세계사 1991 김진욱 옮김. 90쪽)


 야수파 마티스의 그림 속에서는 이런 것도 찾아본다.


 “햇빛은 파열된 직장直腸처럼 출혈한다. 이 망가진 차륜의 바퀴통에 마티스가 있는 것이다” (같은 책 179쪽)


 당시가 1930년대 초반. 이런 놀라운 감각과 묘사력과 상상 속에서 배회하는 헨리 밀러를 아나이스 닌은 천재라고 규정해버리고 만다. 위에서 얘기했듯 이미 자신의 삶 자체를 ‘문학적’으로 연출하기로 작정한 아나이스는 충실한 남편 휴고가 있음에도 몇 명의 애인을 두었는데, 책에선, ① 예전부터 관계를 맺었으나 자주 발기부전 증상을 보이는 존, ② 사촌형제로 가끔 한 침대에 들지만 그때마다 근친상간에 관한 의혹을 받아 영 께름칙한 에두아르도, ③ 인터코스가 아니라면 유사성행위라도 꼭 해야 본전을 뽑는 기분이 드는 소설가 드레이크와 불륜으로 얽혀 있다. 이 와중에 1931년 12월, 드디어 헨리 밀러를 만난다. 원래부터 DH 로렌스를 즐겨 읽고 탐구해왔던 닌에게는 모르긴 해도 밀러의 특이한 문화, 문명비판과 성에 대한 의식 같은 건 아주 매혹적으로 다가왔으리라. 거기다가 책의 초반에 밝혀지듯이,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별로 받지 못하고 자라서 나이든 남자의 사랑에 관심을 두는 심리상태 또는 성향이 있다고 신경정신과 전문의가 숱하게 얘기하기도 하고, 심지어 나이든 그 의사의 키스를 받기도 하는데, 자신과 띠 동갑, 아나이스가 보기엔 듬직한 나이까지, 갖출 것은 다 갖춘 인물이 바로 헨리. 이들은 곧바로 몸의 잔치로 빠져든다. 아나이스가 비록 진심을 다해 남편을 사랑하지만 침대 위에선 오소독스한 섹스만을 고집하던 부부 사이도, 아나이스-헨리의 기법, 소위 침대 테크닉이 더해져 한층 윤택한 커플로 발전하게 됨은 물론이고, 헨리의 매혹적인 아내 준과 아나이스마저 동성애 바로 바로 전단계로 접어든다. 그러니까 아나이스는 밀러 부부 두 명과 동시에 연애를 하고 있거나 하고 싶어 한다는 말. 여기서 말하는 연애는 몸과 몸의 사랑을 일컫는 것일 뿐, 몸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 즉 정신적 유대관계는 부부 둘 다를 사랑하고 동시에 같은 이유로 질투한다는 뜻이다.
 그냥 이게 다다. 어찌하여 준이 헨리의 곁을 일정 기간 떠나게 되고 그때, 아이고 이런 천우신조가 있나 그래, 아나이스는 헨리와 헨리의 친구 프레드가 같이 쓰고 있는 아파트에 번질나게 드나들며 심지어는 프레드가 훤히 보고 있는 와중에 라이브 쇼도 구경시키기도 하고, 하여간 질퍽하게 놀아난다. 사랑타령이 이어지고, 독자(특히 남성 독자인 ‘나’의 경우)는 헨리의 사랑타령이 점점 수상하게 보이는데 그건 <북회귀선>에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헨리 밀러 자신이 얼마나 파렴치하고 이기적이며 난장판의 성격을 가진 인물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독자는 서서히 밀러가 아나이스를 ‘이용’하여 그녀의 재산과 몸과 열정을 착취하기 위해 사랑을 하는 것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하지만, 이건 전적으로 읽는 사람마다 다 다를 것이니 굳이 강조할 것은 없다. 몇 명과 동시에 사랑을 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빠져드는 딜레마가 바로 질투. 사랑과 질투와 문학을 빙자한 로맨스가 난교를 맺는 작품. 초판이 나온 1960년대 중반엔 모르겠지만 50년이 넘어 지난 지금 <헨리와 준>이 특별한지 그건 모르겠다. 만일 이 독후감을 읽는 당신이 아직 <북회귀선>과 <헨리와 준>을 다 경험해보지 않았다면 <북회귀선> 하나만 읽어도 충분할 것 같은 기분 (솔직해서 미안합니다).
 헨리 밀러가 사실은 나약하고 우유부단하고 심리적으로 불안했던 인간이란 걸 알고 읽으시면 한 유부녀의 ‘사랑’이 사람을 어떻게 왜곡시켜 볼 수 있게 만드는지, 놀라운 착시현상까지 보실 수 있을 터.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은

 

 

 이렇게 두가지 번역이 있다. 아니, 동서문화사에서 <북회귀선>과 <남회귀선>이 한 권에 든 두꺼운 책도 있는데 그 출판사에 대한 별로 좋지 않은 소문 때문에 권하지 않는 편. (소문이다, 소문. 진짜가 아니라. 오해 금지!)

 하여간 김진욱과 정영문 번역은 둘 다 문학세계사에서 나왔고, 아이고, 사이도 좋지, 나란히 절판이다. 난 김진욱 번역을 가지고 있다. 굳이 읽어보시려면 중고책을 선택하시든지, 아니면 그래도 번역 매끄럽고 동시에 <북회귀선>과 <남회귀선>을 다 읽을 수 있는 동서문화사를 선택하는 방법이 있다. <북회귀선>은 야하고 좋은데 <남회귀선>은 (전적으로 내 의견으론) 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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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01-31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정말 지루....하지요...? -_-;;; 그런 자극적(?)인 소재를 갖고 이렇게 지루하게 쓸 수도 있다는 걸 보여준 모범 사례라고나 할까요... 작가는 역시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Falstaff 2018-01-31 10:24   좋아요 0 | URL
자기 일기를 쓸 때부터 언젠가 대중에게 발표할 작정을 하고 썼다는 데 만원 겁니다. 그러니 자의식과 감정 같은 것이 과도하게 나타날 수밖에요. 길기만 하고 재미라고는 하나도 없다아아아아고 얘기하면 실례일지 모르겄습니다. ^^;

레삭매냐 2018-01-31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7년 전에 독서모임에서 읽은 책인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네요.

버거웠던 독서로 기억합니다만.

Falstaff 2018-01-31 13:12   좋아요 0 | URL
흑, 제 생각으로 말씀드리자면, 지금 다시 읽으셔도 버거우시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ㅠㅠ 이거 읽느라고 꼬박 이틀 걸렸는데, 고생 좀 했습니다.
 
카산드라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1
크리스타 볼프 지음, 한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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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기 위해서, 먼저 ‘앞선 독서’가 이루어져야 할 책이 네 권 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 베르길리우스가 쓴 <아이네이스>, 마지막으로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 감잡히시지? 옙. 트로이 전쟁과 트로이 멸망 후의 모습을 잘 알고 있어야 이 책을 그나마 쉽게 읽을 수 있다.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을 총 대장으로 하는 그리스 연합군이, 아가멤논의 친동생 메넬라오스의 처 헬레네를 트로이 왕 프리아모스의 잘 생긴 서자 파리스가 달싹 업어간 걸 다시 찾아오기 위해, 대군을 모아 수천 척의 무장 함대를 이끌고 출발하려 했는데, 아, 글쎄 바람이 불어야 말이지. 이때 트로이 출신의 배신자 칼카스란 이름의 예언자가 등장해 두 가지 예언을 하는 바, 첫째가 아킬레우스를 출전시키지 못하면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거, 둘째가 바람을 얻기 위해 아가멤논이 가장 사랑하는 큰 딸 이피게네이아를 희생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것. 아킬레우스는 영화 <트로이> 보신 분은 다 아시겠지만 하고 한 날 주지육림에 빠져 있던 걸, 친한 친구이자 원정 같이 귀찮은 일엔 절대로 빠지고 싶어 했으나 결국 참여하게 된 오디세우스를 보내 참전시키게 한다. 오디세우스 입장에서 가만 생각해보니 너나 나나 트로이까지 가서 쌈박질로 날 새우기 싫은 건 마찬가진데, 이제 자신은 빼도 박도 못하고 배를 타야하는 신세가 되니 아킬레우스 혼자 두고 가기가 진짜 심술이 났던 참이었다. 이거 내 말이 아니라, <카산드라>에서 작가 크리스타 볼프가 정말로 이렇게 써 놓은 거다. 근데 이해하시지? 오디세우스의 심정. 충분히 공감한다. 그래서 첫 번째 조건은 만족시켰고, 두 번째, 뜨거운 심장을 가진 사람으로서 얼굴 예쁘고 몸매 빵빵한 이피게네이아를 어떻게 죽여, 그 몸을 태움으로써 희생공물로 바치겠느냐고. 더구나 아가멤논이 이따위 미신을 정말로 믿었다고 믿으셔? 천만의 말씀. 문제는 다른 왕들이 전부 가기 싫어 뭉기적거리고 있으면서 그걸 핑계로 닻을 올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 그리하여 군대는 전부 불러놓았지, 그 많은 군대를 먹여 살리려면 아무래도 총대장인 아가멤논의 나라 미케네 살림이 날이 갈수록 거덜이 날 거 같으니 울며 겨자 먹는 셈치고, 어여쁘고 몸매 잘 빠진 이피게네이아를 정말로 죽여 불사르고 만다. 이제 출항을 막고 있던 건 다 사라지고 뿔 나팔을 길게 불면서 수 천 척의 무장 함대가 끝도 보이지 않게 줄을 이어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향해 진군하기에 이르는데, 미케네 언덕 위에서 장엄한 함정의 대열을 피눈물을 흘리며 바라보고 있던 여인이 있었으니, 아가멤논의 처이자 죽은 이피게네이아의 생모인 클리타임네스트라. 피도 눈물도 없는 아가멤논, 제발 살아서 돌아와라. 단칼에 네 머리통을 뽀개버리겠노라. 이를 뽀독뽀독 갈며 내려보고 있던 걸 아가멤논은 조금도 몰랐던 거디었다.
 트로이 전쟁 과정은 <일리아드> 참조하시라는 뜻에서 완전히 넘어가고,

 

 추천

 

 

 정작 나는 범우사에서 나온 책을 읽었는데, 그림은 아래와 같다.

 

 

 <오디세이아>는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인데 그래도 읽는 편이 좋아 꼽았던 걸 고백하면서, 그러나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는 반드시 읽어야 하는데 그건 <아이네이스>에 와서야 비로소 “카산드라”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아이네이스> 읽기 싫으시면 엑토르 베를리오즈가 작곡한 오페라 <트로이 사람들>을 감상하셔도 좋긴 하지만, <아이네이스>는 정말로 내가 애정하는 책이라 권하지 않을 수 없다.
 카산드라가 누구냐 하면, 트로이 왕 프리아모스와 정실부인 헤카베 사이의 딸이자 아폴론 신전의 신녀로 어느 날 자고 있는데 아폴론이 등장하더니 카산드라의 벌린 입에다 난데없고 버릇없이 침을 퉤, 뱉어버리는 거였다. 그 순간부터 카산드라는 미래를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게 됐지만, 원래 그리스 시대의 신들이 아랫도리에 문제가 있어서 이제 막 초경을 한 카산드라한테 한 번 자자고 했단다. 남녀가 같이 자는 게 뭔지도 제대로 모르는 카산드라가 기겁을 해서 싫다고 했더니 아폴론이란 신이 장난을 치기를, 예언은 기가 막히게 정확한 예언을 할지언정 아무도 카산드라의 예언을 믿지 않을 거라고 부정을 태웠단다. 해변에 커다란 목마 하나만 남겨놓은 채 그리스 배들이 싹 물러가자 카산드라는 절대로 목마를 성 안으로 들여서는 안 된다고, 그러면 트로이는 곧바로 멸망할 것이라 예언을 했건만 딱 한 명, 아니 한 식구, 아이네이스와 그의 현명한 아버지 안키세스만 예언을 믿어 배 한 척에다가 온갖 것을 싣고 지긋지긋한 트로이를 떠나기로 결심을 하니, 긴 항해 끝에 카르타고의 과부 여왕 디도를 사랑하는 척하다가 정신 차리고 이탈리아로 이주해서 로마를 건설했다는 얘기가 <아이네이스>다.


추천

 

 

 그러니 그건 꼭 읽으셔야 한다. 하여튼 어리석은 트로이 군대는 어마어마하게 큰 목마를 성 안으로 들이기 위해 성벽을 무너뜨리고 들였는데, 아시는 것처럼 한밤중에 커크 더글러스, 아니, 오디세우스를 필두로 막강한 그리스 군대가 성 안에 침입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살육을 벌이는 순간, 카산드라는, 너희들 내 말 안 들었지? 거 봐라, 하고 속으로는 조금 기분이 좋았다고 진술한다. 누가? 크리스타 볼프가. 볼프도 대단한 여자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기네 나라가 망하고 엄마 아빠 다 학살을 당하며, 심지어 자기도 얼마 있다가 죽을 운명인 것을 아는 카산드라가 설마, 잠깐이라도, 기분 좋아서 웃기야 했으려고. 하긴 그렇게 쓰는 것도 작가의 권리다. 그런 의미에서 불만 없다. 아니, 정말 굉장한 작가적 발상이다.
 크리스타 볼프에 의하면, 이미 늙어서 발기부전 증세가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취미로 여자 노예를 수집하던 아가멤논은, 자신이 발기부전이라는 사실을 발설하는 여자 노예는 극형에 처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랬음이 분명하다. 아가멤논은 카산드라의 몸에 손끝 하나 대지 않고 멀고 먼, 그리고 험난한 바닷길을 뚫고 꿈에 그리던 고향 미케네에 도착한다. 이 순간을 볼프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소설의 첫 문단이다.


 “여기였다. 그녀는 저기 서 있었다. 지금은 머리가 떨어져나간 돌사자들이 그녀를 지켜보았다. 한때 난공불락이었으나 지금은 돌무더기가 된 이 요새가 그녀가 마지막으로 본 것이었다. 요새는 오랜 세월 망각 속에 파묻혀 있던 적敵과 긴 세월, 태양과 비바람에 무너졌다. 하늘은 변함없이 눈이 시리도록 파랗고 높고 넓다. 거대한 돌로 쌓은 근처의 키클롭스 성벽은 예나 지금이나 성문으로 가는 방향을 가르쳐준다. 그 성문 아래서는 이제 피가 솟구치지 않는다. 가야 한다.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살육의 집으로. 혼자서.
 이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죽으러 간다.”


 미래를 보는 능력이 있는 카산드라. 그녀는 미래도 과거형으로 말한다. 지금은 클리타임네스트라와 그녀의 정부 아이기스토스가 아가멤논에게 절절 매면서 아양 떨기에 여념이 없지만, 오늘 밤에 부부의 침상에서 클리타임네스트라가 휘두른 도끼에 정수리를 맞아 골이 튀기는 장면이 눈에 선하다. 그것으로 끝나면 좋은데, 큰딸 이피게네이아를 죽인 것에 잔뜩 열 받아 애초부터 아이기스토스와 힘을 합쳐 남편 아가멤논을 쪼개버릴 작정이었던 여인이, 우습게도 이미 죽은 남편에 대한 질투가 남아 있어서인지, 카산드라, 자신의 목도 뎅겅 잘라버릴 예정이란 것도 분명히 알고 있다. 카산드라는 강철의 날이 자기 목을 파고 들어오기 시작해 마지막 반대편 피부를 깨끗하게 도려낼 때까지 의식이 확실하게 있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안고 성문을 향해 오르기 시작한다.
 1990년 봄. 왕복 2차선 국도를 시속 약 120km로 질주하던 나는, 공사를 하느라고 아스팔트를 파 놓은 걸 발견하고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기 시작했지만 결국 차는 파 놓은 골을 밟았으며, 그 순간 완전히 전복, 거꾸로 뒤집혀진 상태로 약 60미터를 좌~악 미끄러진 경험이 있다. 흔히들 짧은 순간에 자기가 살아왔던 인생이 다 보인다고 하는데, 그거 다 구라다. 큰 사고를 치고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런 거 같기도 한 것이지 뭘 그리 허풍을 떨어. 카산드라, 마찬가지다. 위 인용문을 보시라. 돌무더기로 변한 성벽, 이게 미래의 상태인데, 지금은 태양과 비바람에 머리가 멀쩡한 채로 근사하게 돌사자가 서 있는 성문으로 올라가기까지의 짧은 순간에 전쟁의 시작부터 끝까지, 아이네이스가 아버지 안키세스를 업고 피난길에 오르고, 자신은 폭풍우를 뚫고 아가멤논과 더불어 미케네에 도착하기까지를 크리스타 볼프가 완전히 카산드라의 입장으로 본, 아무도 믿지 않는 정확한 예언을 해야 하는 운명의 여인이 겪은 드라마를 일인칭 시점으로 엮어 놓았다.
 그런데 <오레스테이아>는 왜 먼저 읽어야 하느냐고? 그거야,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운명도 아셔야 트로이 전쟁이란 거대한 서사를 ‘완전정복’할 수 있으니 그런 것이지.


추천

 

 

 

 * <카산드라>는 작년에 크리스타 볼프가 쓴 <나누어진 하늘>을 읽어보고 재미있어서 고른 책인데 <나누어진 하늘>하고는 완전히 다르다. 그러면서 또 재미있다. 만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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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01-30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 그래도 <카산드라> 는 말씀하신 저 책들을 읽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이겠구나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친절한 포스팅~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근데 또 크리스타 볼프의 <카산드라>는 맹점이 하나 있는 게 만일 <일리아스><오딧세이아><아이네이스>를 읽어서 카산드라가 어떤 인물인지 아는 독자에게는 제목만으로도 어쩐지 뻔한....(내용이 상상 가능한; -그러니까 뭐랄까 카산드라 입장에서 페미니즘적으로 재해석했을 것 같은) 책일 것 같기도 하고요... ㅎㅎ

Falstaff 2018-01-30 12:40   좋아요 1 | URL
재미난 것이요, 카산트라 캘릭터를 알더라도 크리스타 아줌마 입심이 을매나 좋던지 아예 <일리아스>를 다시 해석하고 있더라고요. 트로이 시내가 불타고 시민들이 작살이 나는 중에 한 구석에 박혀서, 것봐 내 말 맞잖아, 하면서 잠시 키득거리는 예언자라니 말입죠.
저는 ˝아무도 안 믿는 쪽집게 예언자˝를 동독, 서독의 통일환경에 빗대 쓴 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가 완전히 헉, 했답니다. ㅋㅋㅋㅋ
 
더 컬러 퍼플
앨리스 워커 지음, 안정효 옮김 / 한빛문화사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그레인지 코플랜드의 세 번째 인생>, <어머니의 정원>에 이어 세 번째 읽은 앨리스 워커. 흑인 여성작가는 몇 명이나 읽어봤나? 조라 닐 허스턴, 토니 모리슨, 앨리스 워커, 글로리아 네일러 정도. 아, 말을 좀 바꿔야겠다. 노예였던 조상을 둔 흑인여성작가라고 정확하게 얘기할 때 그렇다는 거. 조라 닐 허스턴은 그의 빼어난 작품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 하나만 읽어봤는데 굳이 무슨 문제나 의식을 염두에 뒀다고 말하긴 좀 그렇고, 나머지 세 명은 확실하게 흑백문제와 여성주의에 입각한 작품들이었다. 이들이 작품을 통해 주장하는 것이 정당한 이유는 작가들이 스스로의 삶을 통해 상당한 부분에서 피부색이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직접적인 차별을 당해본 경험이 있으며, 비록 많이 개선되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완전한 평등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그들이 생각하기 때문이다. 개인적 직업생활을 얘기하자면, 내가 만 30년이 넘게 다국적기업에서 일하고 있는데, 아주 다양한 인종과 다툼을 벌이게 된다. 이 와중에 다른 인종들은 몰라도 유럽 아이들하고 미국의 백인들, 얘네들하고 목을 내놓고 싸운다면 반드시 내가 이긴다. 다툼이 험하게 벌어지는 순간, 정색을 하고, 지금 너희들 내가 아시아인이라서 무시하고 그런 결정을 하려는 것이지? 하고 하기만 하면 깨갱. 순식간에 싸한 분위기가 화면을 감싸고 순간적인 완전한 정적이 화상회의에 올라온 세계의 모든 회의장을 덮어버린다. 물론 자주 쓰면 절대로 안 되는 방법이다. 마치 비상砒霜, 즉 극약처럼 아주 드물게, 한 회사에서 최대한 두 번 가량 쓸 수 있는 초절정 필살기다. 필살기를 여러 번 쓰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가 하면, 덩치 큰 백인들의 눈가에 “육갑하네!” 비슷한 조소가 번지는 걸 발견하게 될 지도 모른다. 페미니즘은 모르겠고 흑백문제를 다루는 흑인 작가들의 경우에 아시아인이 같이 느낄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말을 하기 위해 이런 예를 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다이하드 3>를 보신 분, 거수해보세요.
 거기서 정말 진상의 흑인이 하나 나온다. 새뮤얼 잭슨. 흑인 밀집 지역이자 우범지대에서 ‘난 깜둥이가 싫어’란 간판을 달고 어슬렁거리는 주인공 브루스 윌리스가 흑인 불량배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는 순간 득달같이 나타나 윌리스의 목숨을 구해주긴 하지만, 뭐 하나 할 때마다, 한 마디 말을 할 때마다, ‘내가 흑인이라서 그러는 거지?’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불만을 쏟아내는 캐릭터. 그래. 같은 얘기 자꾸 하면 싫증나는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렇게 주장하고 확인받고 싶어 하는 이유는, 여전히 자신이 불평등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 때문. 그래서 차별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알고 하던 모르고 하던 간에, 싫증이 나고 지긋지긋하더라도 불만을 들어주어야 하고, 개선을 위해 애써야 하는 것. 대한민국 영토 안에서 벌어지는 인종문제도 마찬가지다. 우리보다 소득이 낮은 국가에서 온 사람들 우습게 보는 거. 이거 웃기지도 않는 일. 미국 가봐라. 남부 조지아 사는 중산층 백인이 나더러 그러더라. 아직도 전쟁 하냐고. 거기선 흑인들도 아시아인을 진짜 미개한 야만인으로 안다.
 <컬러 퍼플>은 1982년에 스티븐 스필버그가 35만 달러에 영화제작권을 사 같은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 미국시민은 물론이고 전 세계인을 울린 바 있으나 안타깝게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은 메릴 스트립과 로버트 레드퍼드가 열연한 <아웃 오브 아프리카>가 차지하고 마는데, 이걸 두고 아카데미와 스필버그의 궁합이 안 맞는다고 매체에서 열라 떠들었던 기억이 난다. 영화만 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나도 몰랐다), 이 책은 언니 씰리가 하느님한테 쓰는 편지, 동생 네티가 씰리한테 보내는 편지, 언니가 동생한테 보내지만 배달 못하고 반송되는 편지들로 구성되어 있다. 전형적인 서간체 소설. 서간체 소설이 예상외로 재미없다는 건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유명한 작품 <위험한 관계>를 읽어본 사람들은 거의 동의하시겠지만, 이건 그렇지 않다. 재미도 있다. 물론 앨리스 워커의, 초장부터 독자를 확 긴장시켜야 성공한다는 작전상 이유였겠지만, 흠, 비위 상해도 놀라지 마시라. 중요한 거짓말을 하고 있는 중이다, 첫 부분부터 연이은 출산으로 지쳐 떨어진 엄마가 아빠와 부부생활을 거부하자, 욕정에 눈이 돌아간 미친 아빠가 큰 딸 씰리를 겁탈하는 장면. 그리하여 아버지의 아이를 둘씩이나 낳았고, 낳자마자 아빠가 아이를 시내 목사에게 줘버렸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렇게 근친상간부터 시작해 흑백갈등(과 백인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흑인에 대한 린치), 남성에 의하여 여성에게 저질러지는 야만과 폭행, 자신의 몸에 대한 무지, 동성애, 제3제국에 대한 유럽/아메리카의 수탈 등 1940년대까지 인류, 특히 영어권 국가가 품을 수 있는 문제점 가운데 많은 것에 대하여 찬찬히 이야기한다. 배운 것 없는 시골뜨기에다가 검둥이 여자 자매의 시선으로. 그래서 워커의 문장 역시 문학적 수사법 같은 것을 사용하지 못했을 것이며, 결과적으로 오히려 더욱 간결하고 분명한 표현이 가능했을 것이다.
 한 괜찮은 흑인 남자가 있어, 여어어어얼씨미 일을 해 상점을 내고, 상점이 놀랄 만큼 잘 돼 땅도 사고, 집도 큼지막하게 짓고, 농장도 생기니까, 어허 저 깜둥이 봐라, 백인들이 작당을 해서 이제 부자가 된 흑인 남자를 붙잡아 일차로 절단을 하고, 이차로 불에 태워버린다. 이게 책에서 중요한 모티프인데, 정말로 미국에서 있었던 일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한 건 남부에서는 비슷한 일이 숱하게 발생했었단다. 다 아시잖아, KKK라고. 왜 굳이 이 단체를 거론하느냐 하면, 미국문학의 한 변곡점을 이루는, 아니면 적어도 평론가 몇 명 정도는 변곡점이라고 주장하는 작품, 마거릿 미첼 여사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중요한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애슐리, 얘가 KKK 단원이고, 흑인에 대한 린치를 미첼 여사가 은근히 지지한다는 거. 그거 한 가지 이유로 난 <바람과……>를 참 재수 없는 작품으로, 미첼을 역겨운 인간으로 딱 결정해버리고 말았다. 앨리스 워커의 정 반대편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인간이 바로 마거릿 미첼이다.
 <더 컬러 퍼플>의 내용은 뭐, 다들 영화 보셨을 거라 짐작해 굳이 이곳에 쓸 이유를 찾지 못했다. 하나 확실한 건, 스티븐 스필버그가 아무리 영화를 잘 만들었어도, 이 작품은 책이 훨씬 낫더라는 거. 그러나 이제 읽어보시려면 중고 책방을 찾아야 한다는 점. 원래 ‘한빛문화사’가 찍다가 망했는지 어땠는지(확인해보니 정말로 망한 거 같다. 마지막으로 책 낸 것이 2004년이다.) 이젠 ‘청년정신’이란 출판사에서 나왔는데, 거기서도 그냥 절판시켜 버렸다. 그러니 읽어보시려면 도서관을 이용하시든가, 아니면 중고책방을 기웃거리셔야 할 듯. 나도 우리동네 알라딘 중고책방에서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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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8-01-29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생 되고 나서 혼자 용감하게 극장가서 본 영화인데, 나중에서야 이 영화가 스필버그 감독 이라는걸 알고 깜짝 놀라고, 더 나중에서야 여기 나온 배우가 그 오프라 윈프리라는걸 알고 또한번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어요 ^^
아직 전쟁하냐고 물은 남부 조지아 그분은, 중산층이라고 해주기에는 (그게 지적 수준과 아무 상관없다고 하더라고) 너무 무지하네요 ㅠㅠ

Falstaff 2018-01-29 13:05   좋아요 0 | URL
나름대로 추억이 깃든 영화군요. ^^
참 재미있게 봤는데, 이제 하도 오래 전이라, 세상에나, 장가들기도 전이네요!, 이젠 영화의 내용도 가물가물해서 소설하고 어디가 다른지, 그것도 막 헷갈리더군요.
조지아 백인이 무지하다기보다, 아예 아시아 쪽으론 관심이 없는 거 같더라고요. 벌써 몇년 전 이야기이니 그 새 좀 나아졌다고 생각해야지요 뭐. ^^;
 
장벽을 뛰어넘는 사람 대산세계문학총서 97
페터 슈나이더 지음, 김연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두 번째 읽는 슈나이더. 재작년에 <에두아르트의 귀향>을 재미있게 읽고 이름을 기억해두었다가 한 권 더 읽은 것. <에두아르트의 귀향>이 1999년 작품이고, <장벽을 뛰어넘는 사람>이 1982년에 출간되었으니 두 작품 사이에서 베를린 장벽 붕괴라는 독일 현대사의 거대한 페이지가 넘어간다. 앞서 읽은 책엔 통일 후 생각지도 못하게 동 베를린 지역의 한 건물을 상속받아 상속건물을 방문한 에두아르트가 그동안 비어있던 건물의 소유권을 주장해야 하는 아주 복잡한 얘기를, 격변기에 곳곳에서 끊임없이 도시개발 중인 동쪽 베를린의 모습을 그렸던 반면, <장벽을 뛰어넘는 사람>에선 불과 7년 후인 1989년 말이면 무너진 장벽 위에서 레너드 번스타인이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연주하게 될지는 꿈에도 모른 상태에서, 마치 등산가들이 산이 있어 산을 오르듯이, 장벽이 있기 때문에 장벽을 넘는 사람들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런 작품의 한계는, 장벽이 유구하게 서 있다면 슈나이더가 주장하고 싶은 이야기가 언제라도 효용이 있겠으나, 이미 장벽이 무너진 것은 물론이고 동독과 서독이 통일까지 되어버린 현재 상태에서 장벽으로 나뉜 두 체제에서 살던 인물들 간 묘하게 발생해버린 사고방식의 차이점 같은 것이 이젠 아무 의미가, 아니, 조금 양보해서 말하자면, 별로 큰 의미를 부여하지 못 하겠더라는 것. 적절한 비유가 아니라는 건 알겠지만 굳이 비교를 해서, 대한민국의 1980년대 후반의 첨예했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참여시와 서정시의 논쟁에서 당대엔 당연히 리얼리즘과 참여시 앞에서 상대편에 선 문학은 잔뜩 주눅이 들었었지만, 그리하여 시대를 넘어 유행하는 시인 기형도마저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 나는 그의 얼굴을 한번 본 적이 있다 /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라고 부채감이 잔뜩 든 유명 시를 썼지만 그때부터 38년이 지난 지금 아직도 살아남아 (평론가들에게는 별개로 하고)독자들로 하여금 보다 더 즐겁게 읽게 하는 것은, 모더니즘과 서정시인 것과 비슷하다.
 이런 관점에서 이 책을 읽자면, 분단 독일과 양쪽 독일인의 사고방식이나 삶의 선택, 서로의 차이점 같은 것들보다는, 당시 유럽인들이 생각하기론 세상에서 가장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던 열전의 현장 베를린 장벽을 수시로 뛰어넘던 괴짜 인간들을 구경하는 것이 이 책을 보다 효율적으로 즐기기 위한 방법이 아닐까 싶다.
 베를린 장벽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좀 보자.

 

 “서베를린을 에워싸고 있는 국경의 둘레는 총길이가 165킬로미터나 된다. 그중 106킬로미터는 장벽판의 꼭대기를 둥그런 모양의 도관으로 덮어 씌웠고, 55.1킬로미터는 금속 스탬핑을 해서 만든 창살 울타리로 둘렀다. 이 국경을 따라 260개의 감시탑이 서 있으며, 그 두 배나 되는 수의 국경감시병들이 밤낮으로 망을 본다. (중략) 동쪽에서 국경 분리선으로 가는 길은 부가적으로 내부 장벽에 막혀 있는데, 이 내부 장벽은 다양한 폭으로 간격을 유지하며 외부 장벽과 나람히 뻗어 있다. 내부 장벽의 발치에는 곳곳에 못을 친 나무판들이 놓여 있는데, 그 나무판에 박혀 있는 12센티미터의 철못들은 뛰어내리는 사람을 말 그대로 못박아버린다.” (56~57쪽)

 

 으시으시하시지? 근데 서베를린에 카베 씨라고 하는 40대 중반의 직업 없는 사내가 있었다. 이 양반이 장벽을 보니, 장벽 아래가 폐허지대인데 거기 폭스바겐 수송차, ‘수송차’니까 트럭일 것이고, 트럭이면 높이 또한 상당할 터, 눈이 번쩍 띄었던 거다. 그래서 볼 것 없이 냅다 달려 트럭 꼭대기에 발을 쿵, 딛어 도움닫기를 해서, 40대 중반인데 힘도 좋지, 장벽을 훌쩍 서쪽에서 동쪽으로, 뛰어 넘어갔던 거다. 서쪽 순찰대가 뒤늦게 탐조등을 비추고 난리를 부렸지만, 장벽은 꼭 동쪽에서 서쪽으로만 넘어가는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한 카베 씨를 잡을 수 없었고, 난데없이 말 그대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서독 국민을 바라본 동독 정부는 도대체 카베 씨가 장벽을 넘은 이유를 알지 못해서 틀림없이 스파이일 거라고 짐작해, 고문까지는 하지 못하고 신문을 했다고 한다. 근데, 담 넘은 이유가, 정치적 의도도 없고 오직 자신이 원해서 넘어온 건데 그렇다고 동쪽에서 살고 싶은 마음도 없단다. 즉, 아무 생각 없이 넘어온 거다. 이렇게 동쪽에서 3개월 동안 잘 대접받고 벤츠까지 태워줘 서쪽으로 다시 ‘반환’된 카베 씨를 서독에선 아무런 죄를 물을 수가 없었단다. 베를린 장벽은 국경이 아니어서. 그냥 자신에게 주어진 여행의 자유를 누린 것일 뿐. 카베 씨의 모험으로 밝혀진 것은, 장벽 뒤 모든 곳에 지뢰나 쇠못이 박혀있지는 않다는 것이 유일하달까. 어쨌거나 동쪽에서 잘 지낸 석 달 동안, 서쪽 은행 구좌에 그동안 한 푼도 안 쓴 사회연금이 꼬박 모여 있어, 그걸로 파리 여행까지 즐겼다는 거 아냐? 여기에 맛들인 카베 씨, 파리에서 돌아오자마자 다시 훌쩍 넘어간다. 이번엔 동쪽에서 역시 3개월 동안 정신병원행. 3개월 지나 서쪽으로 돌아와도 또다시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 그러나 역시 독일은 동서를 불문하고 민주주의 사회라서, 양심적인 정신과 전문의는 카베 씨한테, 지극히 정상이란 판정을 내린다. 이젠 카베 씨는 심심하면 도움닫기를 하는 단계까지 왔는데 몇 번이나 훌쩍 담을 넘었는가 하면, 무려 열다섯 번. 하도 열 받은 서독 정부(경찰 아니면 병원이겠지)가 카베 씨한테 도대체 왜 자꾸 담을 넘으려는지 물었다고 한다. 이에 카베 씨 왈,

 

 “집 안이 너무 조용하고, 밖은 너무 흐리고, 안개는 너무 짙고, 그리고 아무 일도 안 일어나면, 이런 생각을 하죠. 아, 다시 한 번 장벽을 뛰어넘어보자.” (38쪽)

 

 그냥 이유가 없는 거다. 위에서 얘기했듯, 에베레스트나 K2에는 죽자사자 왜 오르나. 거기 산이 있어서. 그래, 장벽이 거기 있어서 그냥 뛰어넘는 거다.
 이런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나보다.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반발해서 모스크바 올림픽을 보이콧했던 미국 등의 서방세계. 이런 시절에 그냥 밤 마실 가듯 아무렇지도 않게, 여차하면 자동화기에 벌집이 되든지, 12센티미터 대못으로 못 박혀 버리든지 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냥 거기 장벽이 있어서, 서베를린의 개봉관에 가서 마카로니 웨스턴 영화를 보기 위해서, 뛰어넘은 많은 사람들을 구경하는 일. 물론 다른 얘기도 좀 섞이긴 했지. 그 얘기는 하지 않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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