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코퍼필드 동서문화사 월드북 138
찰스 디킨스 지음, 신상웅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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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킨스는 더 이상 안 읽으려 했다. 그러다가 다른 책 속에 하도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자주 인용해 말릴 수 없는 호기심을 발동시켰다. 검색해보니 동서문화사하고 동천사, 딱 두 출판사에서만 나오는데, 동천사는 총 네 권으로 만든데다 절판.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두 종은 공히 신상욱 번역. 그러니까 같은 책이란 뜻이고, 좀 오래 묵은 책은 본문만 1,010쪽, 해설까지 합해서 1,118쪽, 무게 1,008 그램, 10% 할인가격이 14,400원의 양장본. 요새 새로 팔기 시작한 책은 두 권으로 1권이 560쪽, 2권이 568쪽, 10% 할인한 두 권의 가격을 합하면 18,000원의 반양장본. 두 종류 공히 가로 158mm, 세로 230mm의 큰 판형에 절대 크지 않은 활자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당연히 조금 묵은 책을 사서, 출퇴근 시간을 이용해 손에 들고 읽었다가 손모가지 결딴나는 줄 알았다. 읽는데만 꼬박 5.5일. 당연히 오후 7시 넘어서까지 읽을 수 없었다. 밤에 책 읽을 시간이 어딨어, 술 마셔야지. 이 책 읽으실 분은 백퍼 경제적 이유로 내가 읽은 1,118쪽의 책을 고르시길 권한다.
 찰스 디킨스가 37세이던 1849년에 분책으로 간행하기 시작한 <데이비드 코퍼필드>. 이디스 워튼이 쓴 <순수의 시대>에 나오는 뉴욕의 부르주아 여성이 뭐라고 지껄이는가 하면, “찰스 디킨스 씨하고 마크 트웨인 씨의 소설 속에는 신사들이 등장하지 않아서 좋아할 수 없어요.”라고 똥을 싼다. 글쎄, 신사 계급이 어떤 인간인지는 내가 한 번도 신사였던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데이비드....>의 주인공 데이비드는 비록 대고모의 전폭적인 후원과 사랑이 없었다면 도시빈민 신분에서 도무지 헤어나오지 못했을 것이었지만, 하여간 돈 많은 대고모 미스 트롯우드를 만날 팔자를 타고 나서 신사 계급을 유지한다. 아울러 데이비드 주위에 몰려 있는 인간들은 따뜻한 심성을 가진 평민도 있고, 변호사와 그들의 딸 같은 신사 숙녀 계급도 있다. 분명히 두 계급이 다 우리의 주인공 데이비드를 몹시 사랑하는 것으로 설정이 되어 있으나, 아, 그렇구나, 당시 잉글랜드에도 엄연히 존재했던 귀족 계급은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물론 일찍이 산업혁명을 겪어 이제 거의 완벽한 자본주의 세계로 편입된 1840년대 영국에선 부르주아들이 귀족계급을 여러모로 능가했거나, 좀 우습게 알던 때이었겠지만, 천만에, 부르주아들이 귀족계급 앞에서 은근히 꿇리는 듯한 야릇한 열등감까지 없었을 거 같아? 그러니 이건 디킨스가 영국의 귀족계급하고는 거리가 좀 있었던 것이 중요한 이유이겠고, 그래서 난, 이젠 뭐 더 이상 디킨스를 읽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우라질 빅토리아 시대 작가 가운데 다중을 차지했던 빈민들을 그나마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곤 했던 이이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책, 전형적인 19세기 중반 이야기책. 제인 오스틴이 죽을 무렵 태어난 영국 작가들, 브론테 자매와 디킨스, 조지 엘리엇, 엘리자베스 개스켈. 아주 전형적인 작품이다. 다분히 교양 계몽적인 소설. 어려서 죽을 고생을 하다가 은인을 만나 제대로 교육받고, 유전으로 물려받은 총명하고 착한 마음씨 덕분에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신사 숙녀로 살아간다는 거. 독자들이 기억하게 되는 거의 모든 등장인물들은 권선징악의 확고한 규범에 맞게 책의 끝부분에서 자신들의 팔자대로 나머지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까지. 새로운 방식을 발견하리라는 기대는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하며, 당시엔 놀라웠겠지만 이젠 척, 하면 지금 작가가 이야기하고 있는 복선이 나중에 어떤 내용일지 번히 보이는 그딴 거. 물론 이런 것 때문에 후진 책이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다. 오스틴이나 디킨스, 그리고 여류작가들의 소설책들이 아직도 꾸준히 읽히며 고전의 반열에 오르는 것은 책이 나온 지 근 200년, 150년 가까이 됐음에도 독자로 하여금 공감을 갖게 만드는 놀라운 힘이 있기 때문이며, 그건 말 그대로 탁월한 ‘이야기 책’이라서 이다.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하자면, 나는 이 재미있는 이야기 책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아무에게도 권하지 않겠다. 서양 소설책을 읽다가 인용되는 부분의 각주에 ‘데이비드 코퍼필드’가 자주 있음을 발견하고 도대체 이게 어떤 책인가 호기심을 느끼는 인류가 또 있으면 읽어보시라.
 아울러 내가 권하지 않는 것뿐이지, 절대로, 절대로 이 책이 후지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점을 유념하시어, 굳이 내 의견으로 인해 재미난 책을 진짜로 안 읽는 분이 있어서, 이 분이 오랜 시간이 지나 읽어본 다음, 왜 아직까지 이 책을 읽지 않았었나를 따져보며, 나중에 나를 원망하는 건 듣고 싶지는 않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서 선택과 책임은 당신 몫이다. 근데 하여간 난 권하지 않겠다는 뜻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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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02-13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요즘엔 대중교통에서 책 읽는 사람을 만나면 화석을 보는 것처럼 신기한데, 더더군다나 저런 두꺼운 책을 ㅋㅋㅋ 들고 읽으셨다니 더 대단해 보입니다. ㅋㅋㅋㅋ

Falstaff 2018-02-13 14:22   좋아요 0 | URL
요새 마누라가 빙판에 자빠져서 어깨뼈가 똑 부러지는 바람에 아주 설거지 당번이 됐는데요(작은 애는 밥 당번), 이놈의 <데이비드 코퍼필드> 들고 다니면서 읽어 그런가 저도 손모가지가 시큰거려서 아주 고전 중입니다. 흑흑흑.... 문제는 앞으로 6주나 더 남았다는 겁니다. ㅠㅠ
 

 

 

 아이 씨. 지금 네 권짜리 장편소설을 읽고 있는데, 어젯밤에 시 쓰는 최영미가 언제나 막강한 노털 문학상 후보로 알려진 En이 상습적 성희롱, 성추행자라고 자기 시 <괴물>에다 쓴 것이 밝혀져 또 한 번 매스컴을 탄 일이 자꾸 생각이 난다. 도무지 차분하게 책을 읽을 수가 없다. 그동안 글 좀 쓴다는 시인, 소설가들의 입버릇, 손버릇에 대한 일화가 널리 알려져 있어 새삼스런 일은 아니지만 이왕 이야기가 나온 것, 생각나는 대로 한 번 써보자.


 1. 최영미가 등단한 것이 1990년대 초반. 당시 En과 아주 친했던 그쪽 글쟁이들, 무지막지한 말빨로 인구에 회자되던 작가들. 예컨대 Sok, 또 글은 정말 찬란하게 잘 쓰는데 일찍 죽은 몇 명 같은 이들이 주둥이를 통해 정말 기상천외한 발상을, 원고지 위에다만 써놓았으면 좋을 것을, 술잔을 들고, 앞에 누가 있건 간에 마구 떠들어댔던 건 유명한 일. 솔직하게 얘기하자. 1990년대 초반까지는, 특히 술집이나 회식장소에서 성적인 농담을 해대는 것에 대하여 한국사회는 끝도 없는 관용을 베풀었으며, 더하여 성희롱이 분명한 농담, 이야기 등을 많이 알면 알수록 스스로가 더 인기 있는 인물이라는 착각 속에 살고는 했다. 물론 보통의 시민들보다 독서량이 많았던 나도 성적 농담을 무지하게 쏟아낸 인간이었음을 고백하고 또 반성하거니와, 가슴에 손을 얹고, 그것이 ‘성희롱’이란 범법행위로 규정된다는 것을 알고 난 후로 지금까지는 절대 여성들 앞에선 입을 봉하고 있음을 밝혀야겠다. 자리에 틀림없이 남자들만 있는 걸 확인하는 순간, 내 주둥이가 예전과 마찬가지로 찬란하게 돌아가는 걸 아직 말리지 못하겠다는 것도.
 인간은 다른 사람들의 행위마저 자신의 기준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나도 몇 년 전까지 En이나 Sok 같은 이들이 지난 세기에 여성 문인들이 있는 회식자리에서 거의 전부 입으로만 행해지던, 범법행위란 생각은 전혀 하지도 못했던 성희롱은 언어로만 저질러졌던 것인 줄 알았었다. 그러나 최영미 같은 이들의 얘기를 듣고, 그것이 언어는 물론이고, 손을 비롯한 신체기관을 통한 성추행이었으며, 그중 가히 대마왕의 왕좌에 앉아 좌우로 여류 문인들을 거느리던 작자가 바로 En이었음을 알고 참으로 기가 막혔던 적이 있다.


 2. 인터뷰를 보면, En과 문단권력자들에 의한 성추행, 유혹을 자연스럽지 못하거나 (당연히) 거칠게 거절하면 10년, 20년에 걸쳐 피해자에게 문학적 불이익을 주었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에 기본적으로는 동의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 주장이 서서히 시나 소설을 쓰는 힘이 줄어들기 시작하는 ‘문학적 쇠퇴’를 변호 또는 변명하는 기재로 쓰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작가도 운동선수들과 유사하게 계속 작품을 쓰다보면 어느 순간 작품을 만드는 공력이 떨어지는 것을 스스로 느끼게 되며, 이때가 진정한 은퇴시기라고, 은퇴하지 않으면 표절의 유혹을 받기도 한다고 조정래가 2015년에 인터뷰한 것이 기억이 난다. 물론 최영미의 경우는 아직 60살도 되지 않았으니까 문학적 쇠퇴에 대한 변명이 아니라 진심으로 이야기했을 것임을 믿어서 의심하지 않지만, 혹시라도 그렇게 주장하는 ‘전직 작가’가 없기를 바란다. 당연히 이런 사람들도 피해자임은 말할 필요도 없겠다.


 3. 우리나라 문단에 참으로 비겁한 사람들이 많다. 만일 En이 염병할 노털상을 받았다고 가정하면 끔찍하다. 가문의 영광, 나아가 국가의 영광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전쟁하기를 좋아했던 처칠도 받고, 미치광이 히틀러도 수상 후보가 되기도 했던 조털 노털 문학상을 받아 범국가적으로 북치고 장고치고 한 판 잘 때려먹었는데 누군가가 늦게 Me, too. 해버렸다면 가히 해외토픽 감 아니었겠는가. 문단에 자정 능력이 전혀 없었다는 증거다. En이 술을 항문에 빨대 꽂아 흡수하시고 혀끝과 손끝으로 새까만 후배 여류 문인들을 주물렀다면, 그것도 수십 년에 걸쳐 쉬지 않고 지랄을 해댔다면 벌써 문제제기가 되고, 게임도 끝났어야 한다. 문제제기는 하기 싫고, 하고 싶은 마음도 없는 인간들. 문제제기? 그건 둘째 치고 En과 추종자들의 눈 밖에 나 자신의 문학인생(알고 보면 문학인생이란 게 어딨어. 다 그냥 ‘인생’이지. 굳이 일반 명사 앞에다가 ‘문학’이란 접두사 가져다 붙이는 거, 이거 진짜, 진짜 웃기는 그들만의 허영 덩어리다)에 스크래치 갈까봐 입도 벙긋 못하는 연놈들이, 한때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핵심 멤버였던 거 아닌가 말이다. 정권에 저항할지언정, 문단권력에는 찍소리 못하는 인간들. 좋다, 잘 먹고 잘 살아라.


 4. 최영미에 의하면 En들이 주로 결혼하지 않은 여류작가들을 타깃으로 했다는데, 내가 알기론 회식할 때마다 대마왕 En 가까이에 자리를 잡고, 그가 아무리 주물러도 까르륵대고 웃어넘기던 최영미 또래 미모의 인권작가, 여성주의 작가가 있어서, 아직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고 들었다. 이건 내가 직접 본 것이 아니라서 그 사람이 누구인지 힌트조차 드리지 못하겠는데, 만일 내가 들은 것이 진실이라면, 그 여자의 뇌구조가 어떻게 된 거야? 아니, 취소. 정말 취소. 행여 고소당하면 나만 골로 간다. 근데(그게 사실이라면), 늙은이들이, 최영미의 말에 의하면 30년 선배새끼들이 주물럭거려도 싫은 척, 빼는 척 하면서 진짜로 피할 생각은 하지 않는 걸로 귀염 받으며 소위 문학적 동지들의 총애 속에서 살고 싶을까? 잘난 척은 오지게 하면서 말이지. 난 이 언니 책 안 읽은지 30년까지는 아니고 20년은 넘었다. 심지어 이 작가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인권 또는 여성주의)영화도 전혀 안 봤다.


 5. 나는 남성으로, Me too는 수만 년 동안 이어지던 남성중심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 번 이상은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필수적 통과의례임을 인식한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우려하는 것은, 인류가 두 다리로 곧게 서서 다니기 전부터 있었던, 여자를 유혹할 남자들의 권리와의 조화 문제다. 당연히 이것도 시간이 더 지나면 적당한 사회적 관습에 의해 선이 그어질 것이 틀림없으나, 남성의 호의적이고 소프트한 접근조차 접근을 당하는 여성 입장에서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과하게 박해를 받을 소지가 있다는 우려다. 다행히 나는 넘어가지 않을 나무는 백 번을 찍어도 넘어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지만, 많은 젊은이들은 쓸데없는 공을 들이는데 (여전히)자신의 모든 힘을 쓰고는 할 것이다. 그거 어쩌나. 조금이라도 빨리 이에 대한 관습적 기준이 만들어지기 바란다. 여자를 유혹하는 권리야말로 천부의 것이 아닌가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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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02-07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n은 더 까여야 합니다. 작품도 졸라 구린 게.... 허구한날 노탈상 후보는 .... 제에기-
이제 후보에도 안 올랐으면 좋겠어요. 정말 쪽팔림.

Falstaff 2018-02-07 14:10   좋아요 0 | URL
En도 당연히 까여야 하고, 그 추종자들도 까여야 합니다.
그럼 슬프게도 장년 이상 작가들은 몇 명 남지 않을 듯하네요.

낭자 2018-02-07 14: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남류‘블로거 님께서는 ‘여류‘작가라는 말이 참 마음에 드시나 봅니만 그 많은 여성작가들을 ‘여자‘라는 성으로 하나로 묶는 것이 정말 타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벌써부터 ‘당하고도 침묵한 니들도 더럽다‘는 소리 하기가 즐거우신가요? 정말로 패턴 나오는군요. 어디 단체로 학원 수강이라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Falstaff 2018-02-07 16:30   좋아요 0 | URL
반성하겠습니다. 낭자님 말씀이 다 옳습니다.
전 En이 남자의 몸을 만졌다는 얘기를 듣지 못해서 그렇게(‘여류‘작가라고) 썼습니다만, 그리 읽으셨으면 그게 맞겠지요.

Falstaff 2018-02-08 08:43   좋아요 0 | URL
암만 생각해도 ‘당하고 침묵한 자‘들보고‘ 너희들도 더럽다‘, 라고는 한 마디도 안 한 거 같은데, 그렇게 읽힐 수 있다는 것이 겁나고, 그렇게 읽은 분들이 무섭기도 합니다.
‘알고도 모른 척한 모든 사람들‘을 좀 비아냥 거리긴 했습니다만.
이것도 그렇게 읽게 만든 제 잘못입니다. 역시 반성하겠습니다.
 
시대의 소음
줄리언 반스 지음, 송은주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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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플로베르의 앵무새>, <10 1/2장으로 쓴 세계역사>,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 이어 네 번째 읽은 줄리언 반스. 이번엔 난데없이 드미트리 드미트리예비치 쇼스타코비치의 생애를 변주하여 소설로 만들었다. 실제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쓰는 일. 더구나 이번엔 주인공이 소비에트 연방 뿐만 아니라 20세기 세계 음악사에 찬란하게 빛나는 인물이라면 결코 쉽지 않을 거 같다. 거기에 더해서, 반스의 어려운 결과물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 역시 다른 소설을 번역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울 것이다. 반스가 영국인으로 영어로 글을 썼으니 무엇보다 정확한 한국어로 번역해야 하며, 주인공이 대단한 작곡가이니만큼 음악에 관해서도 일정 수준 이상이어야겠으며, 쇼스타코비치가 소비에트 러시아 사람이니 또한 러시아 문학도 웬만한 조예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점. 독자의 100자 평을 보면 마치 이 책을 번역한 송은주 성토장 비슷한 모습인데, 이런 의미에서 독자들의 넓은 아량을 기대해야 할까? 천만의 말씀. 조건이 영어, (서양고전)음악, 소비에트 러시아의 정치와 문학에 대한 이해, 이렇게 세 가지를 겸비해서 번역하기 어려울 거 같으면, 역자가 알아서 해당 분야 전문가 또는 역자 주의의 잘 아는 아마추어에게라도 적극적인 개입을 의뢰했어야 한다. 그 과정이 빠져 독자가 읽기에 불편했다면 역자로서 도리 또는 직무를 게을리 한 것이다.
 나? 아주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번역문 자체에서 껄끄러움 같은 건 별로 느끼지 못했다. 내가 둔해서 그렇겠지. 한 번 더 얘기하자면, 오역 자체는 모르겠다. 오역 여부를 검토할 정도면 원서를 읽지 번역서를 선택했겠는가. 다만 음악과, 러시아 문화 같은 거 나오면 실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스탈린은 볼쇼이에서 <보리스 고두노프> 공연을 절대 놓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삿코>와 <이고르 왕자>에 열광하기까지 했다. 그러니 스탈린이 이 갈채를 받는 새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듣고 싶어 한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33쪽)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작품 <사드코>를 스탈린이 좋아했었나본데, <이고르 왕자>는 영어로 <Prince Igor> 즉 <이고르 공公> 일찍이 타타르의 침략을 온몸으로 막아낸 러시아의 (왕자가 아니라 러시아의 대 영지를 가진 호족으로 일반적으로 ‘대공’ 또는 ‘공’을 영어로 prince라고 하는 걸 오해했음이 분명하다)영웅을 그린,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아니라 알렉산드르 보로딘의 작품이다. 림스키-코르사코프도 혹시 같은 제목의 오페라를 작곡했는지 열라 검색해봤는데, 없다. 그러니 분명 보로딘의 작품을 림스키-코르사코프의 것으로 잘못 알거나, 잘못 쓴 거다. 이거 말고도 다른 음악적 작은 오류들을, 안타깝게도 역자가 열심히 퇴고를 했음에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줄리언 반스의 오류를 역자가 그대로 옮긴 것인지는 당연히 확인한 바 없다)
 또 책의 마지막 ‘옮긴이의 말’에서,

 

 “그(쇼스타코비치)의 많은 작품에서 드러나는 모호함과 난해함은 ‘유로디비’적 태도로 평가받기도 하는데, 유로디비란 러시아어로 마을의 바보나 궁중곡예사처럼 바보인 척하지만 실은 지적이고 아이러니를 즐겨 쓰던 사람을 의미한다.” (267~268쪽)

 

 러시아 언어는 발음할 때 구개음화가 발생하는 대표적인 언어로 ‘유로디비’는 ‘유로지비’ 혹은 ‘유로지뷔’, ‘유로지브이’ 등과 비슷하게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백치>의 주인공 미슈킨 공작이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세째 아들 알렉세이를 유로지비로 말하고는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덜' 유로지비 급이다. 이들보다 더 선량한, 심지어 성스러운 바보를 뜻하는 것으로 오히려 <죄와 벌>에서 전당포 노파의 동생 리자베타가 비슷한 듯. 무소륵스키의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백치'나 심지어 바그너의 <파르지팔>에서 파르지팔 등, 바보인 ‘척하는’ 사람이 아니고 진짜 바보에 가까우며, 그러나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칭한다. 지적이고 아이러니를 즐기는 사람이 바보나 궁중곡예사처럼 보인다고? 처음 듣는 말이다. 송은주가 ‘옮긴이의 말’을 쓰면서 좀 수상한 곳에서 정보를 가져온 모양이다. 러시아 문학 말고도 찰스 디킨스의 <데이비드 코퍼필드>에서 주인공 데이비드의 대고모 미스 트롯우드의 친구 딕 씨氏 같은 인물도 유로지비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을 듯하다.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이 책이 쇼스타코비치에 관한 소설인지, 책표지를 넘기고서야 알았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전적으로 줄리언 반스, 이름 하나 보고 고른 책이란 뜻. 쇼스타코비치 이야기였다면 훨씬 전에 읽었을지도 모른다. 쇼스타코비치 가운데 그의 빛나는 오페라 <므첸스크의 레이디 맥베스>를 기점으로 인생의 거대한 굴곡에 닥치는 이야기라면 더욱, 더욱 그러하다. <므첸스크....>가 어떤 작품인지 모르는 분들은 절대로 이런 흥분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20세기 러시아 오페라 가운데 (책 속에서도 중요하게 거론하는) 세르게이 세르게예비치 프로코피예프가 작곡한 <불의 천사>와 더불어 말 그대로 쇼킹 그 자체인 오페라. 인간본성의 필터 없는 분출이 적나라하게 묘사된 드라마다. “세료자, 키스해줘. 내 입술이 터져 피가 성모상까지 튈 정도로.”
 참 재미나게 읽었다. 책 속에 반짝반짝 빛나는 눈부신 문장들도 그리 많았는데 그것들을 어찌 다 옮기나. 몇 개 적었다가 그만 뒀다. 그래도 하나만 옮겨보자.

 

 “공산주의 밑에서 살지 않으면서 공산주의자가 되기란 얼마나 쉬운가! 피카소는 거지같은 그림을 그리고 소비에트 권력에 환호하며 평생을 보냈다. 그러나 신은 소비에트 권력 밑에서 고통받는 불쌍한 화가는 그 누구도 피카소처럼 그림을 그릴 수 없게 하셨다. 피카소는 자유로이 진실을 말할 수 있었다―그러니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말해주면 안 되는가? 하지만 그는 그러는 대신 파리와 남프랑스에 부유한 사람처럼 앉아서 역겨운 평화의 비둘기를 그리고 또 그렸다. 그(쇼스타코비치)는 그 피투성이 비둘기의 모습에 혐오감을 느꼈다. 그리고 육체적 노예제를 혐오하는 것 못지않게 생각의 노예제도 혐오했다.” (190~191쪽)

 

 공산주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건, 새로운 독재자가 나와 프롤레타리아를 지배한다는 뜻이라고 숱한 사람들이 증언했다. 그 속에서 예술가로 사는 일. 예술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인민의 것? 웃기는 소리. 예술은 예술을 경험하고는 그걸 좋다, 라고 느끼는 소수의 사람을 위한 것이다. 아름다움은 절대 아무한테 자신을 맡기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아름답게 느낄 준비가 된 사람에게만 다가온다. 음악, 미술, 문학 등 모든 예술행위는 그걸 창조해내고, 창조물을 즐길 수 있는 사람에게만 허여된 놀이이며 쾌락이다. 예술을 인민을 위한 기재로 사용하도록 강제하는 체제 속에서 예술가로 사는 일. 생을 그만둘 적당한 시기를 놓친 쇼스타코비치는, “바이올리니스트 표도르 드루지닌에게 15번 사중주의 첫 악장은 ‘파리들이 허공에서 죽어 떨어지고, 청중은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홀을 뜰 정도로’ 연주해야 한다고 일렀다.” (248쪽)
 15번 사중주의 첫 악장, 영어로 쓰면 Elegy(Adagio), 한국말로 ‘비가(천천히)’. 한 번 들어보자. 소비에트 체제에서 오래 사는 것만큼이나 지루하다는 걸 각오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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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2-06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카소의 거지 같은 그림,
왜 이렇게 공간이 가는지요.

집에 <개구리>가 없더라구요.
지금 사야 하나 빌려서 읽어야 하나
고민 중입니다.

Falstaff 2018-02-06 16:17   좋아요 0 | URL
전 피카소 그림 중에 정말로 낙서 같은 <블루 누드>는 좋더라고요. ㅎㅎㅎ 그림은 무조건 보는 사람 맘대롭니다.
<개구리> 빌려보실 수 있으면 그렇게 하시지요 뭐.
 
개구리 민음사 모던 클래식 58
모옌 지음, 심규호.유소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공동 역자 심규호와 유소영이 2012년 6월에 제주에서 번역을 끝마치고 ‘옮긴이의 말’을 쓸 때까지 이들은 그해 말에 모옌이 노벨문학상을 받을지 몰랐던 거 같다. 물론 “현재 중국에서 노벨 문학상에 가장 근접한 소설가로 꼽힌다.”고 예언을 했지만, 아마 자신들도 예언이 그해에 당장 맞아 떨어지자 깜짝 놀랐을 것이다. 안 놀랬으면 그건 사람도 아니다.
 네 번째 읽은 모옌이다. <홍까오량 가족>, <열세 걸음>, <풀 먹는 가족>, 그리고 이번 <개구리>까지 나름대로 참 재미있게 읽은 작가.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모옌이 좋아하여 표본으로 삼은 작가로 로버트 그레이브스(이 양반을 포함했는지가 아리송하다. 모옌 아니면 라오서 둘 중 한 명인데), 윌리엄 포크너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꼽았던 것으로 안다. 내가 읽은 네 권으로 조금 과하게 단정을 하자면, 포크너와 마르케스의 결합 유전자가 모옌의 세포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 대단히 재미있고 중의적인 작품들을 썼음에도 모옌을 읽을 때면 거의 언제나 등장하는 라틴 아메리카 특유의 ‘아몰랑 사조思潮’같은 문학적인 환상요소가 다분히 들어있다. 물론 <개구리>에도 잔뜩 있고.
 ‘완신’이란 이름의 한 여성이 있다. 당연히 중국 여인이고, 모옌의 진짜 고향이며 그의 작품들의 지리적 무대인 산둥 성 가오미 현 둥베이 향 출신으로, 아버지는 일찍이 대일투쟁 당시 노먼 베순 박사를 사사한 외과의사로 팔로군 군의관을 역임하다가 의사로 높은 이름을 흠모한 나머지 그를 모시고자, 적군이자 스스로도 외과의사인 일본군 파견대장이 가족들을 인질로 잡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독한 배갈 세 근을 마신 다음 나귀를 타고 담판을 지으러 가다가 아군이 뿌린 지뢰를 밟아 폭사함으로써, 독립투사의 딸이란 높은 이름과 출신성분을 갖고 있기도 했다. 영웅의 딸답게 성격 호방하고, 정의와 사명감에 불타며, 그러면서도 진흙 속에 핀 연꽃 같은 외모로 숱한 젊은이의 심장과 생식기에 더할 수 없이 강한 충격파를 주었으나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 산부인과 의사 공부를 하는 바람에 아무도 ‘감히’ 이 여성에게 대시를 할 마음조차 먹지 못하게 만들고 말았다. 이이가 우리의 주인공 샤오파오의 오촌 고모인데 여기선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고모’, 샤오파오 뿐만 아니라 샤오파오 또래부터 그 아래 모든 세대의 젊은이들이 모두 ‘고모’라고 호칭하는 인물이다. 나도 그냥 ‘고모’라고 하겠다.
 당시 둥베이 향에서는 아이를 낳을 때 조금 어렵게 나오면, 늙고 더러운 산파들은 관습적으로 산모의 배 위로 올라가 압박을 가해 빨리 빠져나오라고 했던 모양이다. 스무 살도 되지 않은 고모가 처음 둥베이 향에서 머리가 아니라 팔부터 나오려고 하는 아이를 받으러 가보니 늙은 산파가 그 모양을 하고 있어서 건장한 팔로 확 밀어 나가떨어지게 한 것도 모자라 냅다 달려가서 늙은이의 턱주가리를 발로 힘차게 걷어차고는, 코가 큼지막하니 잘 생긴 남자 아이를 받아내는 쾌거를 올렸던 것이 1953년. 이 아이가 고모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받은 첫 번째 아이로 이름이 천비. 코가 잘 생겨, 성이 천千이요, 이름을 ‘코’ 비鼻로 했는데, 당시엔 이름으로 신체의 부분을 사용하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나중에 천비의 두 번째 딸도 고모가 받았고, 그 아이는 눈썹이 너무 고와서 이름이 천메이千眉. 둘 다 아주 중요한 등장인물이다. 왜 중요한, 그것도 아주 중요한 등장인물인지는 당연히 안 알려줌.
 하여간 고모가 처녀시절부터 은퇴할 때까지, 은퇴하고 나서도 가끔 받은 아이를 다 합하면 1만 번. 갓난아이의 몸무게가 3kg이라고 가정하면 무려 30톤의 아이를 받았다는 거다. 끔찍하지? 대한민국도 대한민국이지만 중국인들의 놀라운 번식력에 대해서는 참으로 할 말을 잊는다. 어떻게 한 사람이 30톤의 아이를 받을 수 있느냔 말이지. 그것도 거의 실수도 없이 말이야. 미모의 산부인과 의사에게도 봄은 찾아와 연애다운 연애, 인생 딱 한 번의 연애를 한다. 상대가 누구냐? 왕샤오티라는 이름의 전투기 조종사.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중국에서는 전투기 조종사라면 최고의 엘리트에다 최고의 출신성분으로 더 좋을 수 없는 신랑감이었단다. 그러나 좋은 일 속엔 언제나 마가 끼는 법. 더구나 한 소설의 주인공에게서는. 구름 한 점 없이 곱디고운 날, 왕샤오티는 자신의 비행기를 몰고, 타이완으로, 장제스의 품으로 귀순하고 만다. 그리하여 1960년대 대기근으로 중국 근대사 상 가장 어렵던 시절의 어느 날, 삶은 토끼고기를 냄비에 담아 고모에게 가져다 주던 샤오파오의 눈에 땅에 떨어진 삐라 한 장을 발견하고, 토끼고기보다 더 먼저 삐라를 고모에게 전해주었는데, 거기엔 타이완에 귀순한 왕샤오티가 잘 나가는 대만 가수와 살림을 차려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있었고, 고모에게 적대적인 부르주아 출신의 의사가 고모를 거짓 증거와 함께 고발했으니, 아차, 당시가 가열찬 문화혁명의 한가운데였던 것이다.
 재미있겠지?
 이게 다가 아니다. 이제 1970년대에 접어든 중국은 가장 절실하게 다가온 위기의식이 바로 인구가 너무 많다는 것. 실제로 당시 중국은 가족계획을 무지하게 잘 진행하고 있던 대한민국, 즉 남조선을 멀리서 벤치마킹하기에 이른다. 계획생육計劃生育이란 이름으로 진행한 중국의 가족계획은, 중국의 인구가 얼마야? 당연히 한국에 비해, 아니 비교도 하지 못할 만큼 혹독한 계획생육 작전에 접어들었는데, 누구보다 유능한 산부인과 의사로 30톤이 넘는 아이를 받는 중이었지만, 이젠 유사시에 접어들어, 그에 못하지 않는 낙태수술을 집도해야 하는 입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것만 있나, 쉽게 요약해서 까고 묶고 꿰매는 거, 즉 정관수술까지 그야말로 신기의 솜씨를 발휘하기에 이른다. 이젠 외동아이를 받는 동시에 그거 뭐라나, 그래, 루프 시술까지 자동으로 해버리는데, 중국의 남아선호 역시 한국에 댈 것이 아니어서, 피임에 대한 거부감과 아들이 나올 때까지 연이은 재출산에 대한 열망을 막아야 하는 영웅의 딸, 우리의 고모가 벌이는 눈부신 활약으로 인민들의 깊고 깊은 원한을 사고야 만다.
 그럼 다 나왔다. 미모의 산부인과 의사, 최고의 남편을 만날 뻔했다가 만고의 역적으로 문화혁명을 거치고, 이어서 계획생육으로 숱한 생명을 자신의 손으로 없애야 했던 기구한 운명의 여인과 그를 바라보는 관찰자 샤오파오. 시대가, 당시를 거친 사람으로 하여금 무지하게 많은 이야기 거리를 소유하게 만들었겠으나, 무수한 탄생과 죽음, 여기에 어떻게 됐건 간에 출산을 욕망하는 인간 본성까지 덧붙여 이제 정말로 신화적 탐색이 가능한 지경까지 도달한 것이다. 모옌은 이 마당에 서슴없이 마르케스와 포크너가 애용했던 모호한 환상이란 양념을 톡톡 털어 넣어 마지막으로 한 바탕 씻김굿을 만들었다. 작가 고유의 담백한 문장은 독자를 즐겁게 하며, 역시 곳곳에선 눈물의 지뢰를 묻어놓았으니 이 책을 읽는 당신은 가끔 주변에 누구 없나 눈치 보면서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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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2-05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에 노벨문학상 받았다고 해서 샀는데
아직도 안 읽고 있네요 그것 참...

그나마 옌롄커의 책들은 부지런히 읽었는데
말이죠.

위화의 <형제> 대단했습니다.

Falstaff 2018-02-05 15:00   좋아요 0 | URL
중국 작품들이 예상 외로 재미나더라고요.
같은 문화권인 것도 많이 영향을 주는 것 같고요.
저도 <형제>는 무척 재미나게 읽었습죠. 이젠 출판사 바꿔서 나오더라고요. 진즉에 그랬어야지, 그 재미난 책이 절판이 뭡니까. ^^

레삭매냐 2018-02-05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Falstaff 님의 리뷰를 보면 지금 읽고 있던 책들
죄다 집어 치우고 바로 읽어야 하나 그런 고민을
하게 됩니다.

어서 집에 가서 <개구리>부터 찾아야 하나 싶네요.

Falstaff 2018-02-05 16:31   좋아요 0 | URL
아이고.... 그냥 계획대로 읽으세요. 좀 부담됩니다. ^^;;
 
순수 박물관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27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취향에 꼭 맞는 것도 아니면서 눈에 띄면 읽게 되는 작가, 오르한 파묵. <순수 박물관>은 그의 작품 가운데 일곱 번째 읽은 책이다. 1998년 작품인 <내 이름은 빨강>을 제일 먼저 읽었고, 그 전 까지는 왠지 모르게 손이 가지 않는, 그러나 언젠가 읽어봐야 할 작가로만 생각했었다. 막상 직접 보니, 강렬한 제목을 단 <내 이름은 빨강>, 첫 장면부터 대단히 쇼킹한 것이 단박에 작품에 집중하게 만드는 놀라운 흡인력으로 그간 파묵을 읽지 않았다는 게 참 어리석은 일이었다고 반성하게 만들어, 비록 그의 작품을 검색해 특별히 챙기지는 않지만, 눈에 띄는 족족 사서 읽게 되더란 것. 그 후 다른 작품에서도 무수하게 재출연하는(파묵 읽어보신 분들은 뭔 얘긴지 아실 것이다)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 <새로운 인생>, <하얀 성>, <고요한 집>, <검은 책>을 연이어 찾았는데 좋은 것도 있었고 별로인 것도 있었고, 한국어 번역이 괜찮은 것도 있었던 반면, 교정 교열이 개떡인 책도 있었다. 일곱 작품의 공통점이라면, 번역을 한 이난아 선생의 노고는 정말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이의 한국어 문장이 별로 좋지 않다는 거. 물론 파묵, 나아가 터키 문학을 우리나라에 거의 처음으로 소개하는 ‘앞 선 이’의 애로사항 가운데 가장 중요한 거, 참고로 할 텍스트가 없다는 점은 이해한다. 이난아가 비문을 만들었다는 얘긴 아니다. 주어 술어 분명하고 확실한 문장을 사용하였지만 아쉬운 점을 두 개만 들자하면, ① 주어 술어가 확실하나, 확실한 주어와 술어를 구분하기 위해 같은 문장을 서너 번 읽어야 하는 경우가 자주(‘자주’라는 주관적 서술이 애매하다. ‘일반 번역서에 비해’도 마찬가지고. 흠, 어쩔 수 없다. ‘그러나 흔하지는 않게’ 정도라고 짐작하시라) 발견된다는 점. ② 우리나라 문장의 특수성 가운데 중요한 하나, ‘주어 생략’. 주격 대명사를 사용하지 않으면 더 잘 읽힐 경우임에도 원문에 (과도하게) 충실하여 주어 및/또는 주격대명사 ‘그’를 남발함으로 해서 오히려 독자로 하여금 더 혼란을 가져오기도 했다는 것. 이 두 가지 아쉬운 점을 비단 이난아 씨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는 건 아니라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다. 어떤 문장인지 꼭 집어서 얘기해야 하는지 좀 생각해봤는데, 그러지 않는 편이 좋을 듯해서 인용하지는 않겠다. 저·역자가 오탈자, 그러니까 교정, 교열에도 책임이 있느냐는 문제는, 내게는 좀 지루한 얘긴데, 당연하다. 책의 모든 책임은 저·역자와 출판사가 공동으로 져야 하는 법. 그러나 출판사는 개인이 아니라 법인이라서 한 객체에 대한 비난은 대개 저·역자에게로 돌아가기 십상이다. 하여, 내가 주장하는 바는 모든 저·역자가 무엇보다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 바로 ‘퇴고’. 내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오는 책인데, 세상에 나온 다음에 출판사 교정, 교열 책임자 탓을 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우리나라의 모든 저·역자들, 제발 퇴고 좀 목숨 걸고 했으면 좋겠다.
 서론이 길었다. 내가 읽은 파묵 중에서 거의 유일한 연애 소설. 베드 씬도 나오지만 불륜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게 파묵은 주장한다.
 미국 유학을 다녀와 제법 큰 회사의 사장 자리에 앉아있는 주인공 케말. 소르본 유학을 다녀온 약혼녀와 드라이브를 즐기다가 차가 멈춘 곳이 하필이면 유럽 소비재를 수입해서 판매하는 ‘샹젤리제 부티크’ 윈도우 앞이었다. 어여쁜 약혼녀 시벨이, 윈도우 안에 걸려있는 제니 콜롱 가방을 보더니, “아, 무슨 가방이 저렇게 예쁘지!”라고 감탄한 것이 1975년 4월 27일이었으며, 앞으로 30년 이상을 더 끌고나갈 사건도 딱 이 시점에서 시작하는 것이었다. 세상의 많은 일도, 그것이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시작은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데서부터 발생할 수 있다. 그걸 우린 ‘인생’이라고 부르지 않던가. 며칠 후 ‘샹젤리제 부티크’에 들른 케말은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가 여섯 달 동안 받은 봉급과 유사한 금액인 1,500리라를 주고, 부티크의 점원이자 케말의 먼 친척이자 며칠 있으면 케말의 애인이 될 퓌순으로부터 아, 무슨 가방이 저렇게 예쁘지! 라는 감탄을 받아 마땅한, 프랑스 수입산과 대단히 비슷한 터키 산 짝퉁 제니 콜롱을 구입해 약혼녀 시벨에게 선물로 주었으나, 시벨이 누군가, 프랑스 유학생이라 한 눈에 짝퉁임을 알아본다.
 됐지? 유럽의 변방 터키와, 짝퉁 명품과, 수입 유럽 소비재 부티크의 판매원과 16세 때 18세라 거짓말하고 미인대회에 나간 전력이 있는 퓌순. 반대편에 프랑스 유학생과 진품 여부를 한 눈에 알아채는 터키의 지배적 부르주아 계급의 딸인 시벨. 이 사이에 낀 우리의 케말. 이러면 본격적인 삼각관계가 형성됐다. 케말은 시간 날 때마다 사무실을 방문한 시벨과 가죽소파 위에서 사랑을 나누었는데, 터키에선 결혼 전에 여자가 순결을 상실하는 것이 가끔가다가는 살인의 직접적 계기가 되기도 하는 사회였다는 점에서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던 일이었다고 한다. 당연히 이런 의식은 프랑스 유학을 한 시벨에게는 많이 완화되었겠지만 그래도 인식 속에선 여전히 혼전 순결, 혼전 경험, 혼전 동거 같은 나름의 문화흔적에 민감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 물론 이런 의식에 있어서는 도시 서민으로 고등학교 졸업 학력, 판매원 출신의 퓌순에겐 더욱, 아니면 훨씬 중요한 일이었던 건 물론이겠지. 그런데 이 케말은 시벨의 처녀성을 결혼이란 얼핏 타당한 이유로 훼손한 것과 같이, 별 의식 없이 퓌순의 것도 훼손시키고 만다. 참나. 섹스라는 것이. 어떤 이들은 사랑을 해서 섹스를 하고, 어떤 이들은 섹스를 해서 사랑을 하는데, 정확한 비교는 아니지만 굳이 구분을 하면, 시벨과는 사랑을 해서 결혼을 약속한 다음 섹스를 했고, 퓌순과는 (당연히 마음은 끌렸지만) 일단 저지른 다음에 점점 사랑하는 마음이 강도를 높였다고 해야 할까. 이런 구분이 터무니없다면, 누구에게라도 운명적 만남 혹은 필연이 있어, 운명이 점찍은 사랑을 위해 평생을 걸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고 해야 할까. 어쨌거나 케말은 시벨과 퓌순 사이에서 44일 동안, 힘도 좋지, 양다리를 걸쳤고, 이스탄불의 힐튼 호텔에서 퓌순에게도 정식으로 초청장을 보내서 오라 해놓고 거창하게 시벨과 약혼식을 올린다. 행복한 모습을 연출하는 케말과 시벨을 바라보며 젊은이들과 춤을 추고는, 내일 오후 두시에, 그동안 하루도 안 빼고 만나 정을 나누던 아파트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 퓌순은 처음으로 약속을 어기고 다음날부터 홀연히 행방을 감춰버린다.
 퓌순이 행방을 감춘 다음에야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던 여자는 시벨이 아니라 퓌순이었다는 걸 온전히 알아버린 케말. 이제부터 진짜 이 이야기의 본론이 시작되니 더 이상의 스토리 소개는 안 될 소리다. 아, 이 말은 해야겠다. 진정한 사랑을 잃은 케말이 퓌순을 찾아 헤매며 그녀와의 추억이 깃든 모든 소품들, 예컨대 귀걸이 한 쪽, 담배꽁초, 석고로 만든 개 인형, 머리핀, 칫솔 등을 모아 박물관을 짓고 그 박물관에 보관을 한다는 것은 알려도 무방할 거 같다.
 진짜로 2012년 4월 27일, 소설책에서 운명적인 사랑을 시작한지 꼭 39년 되는 날 이스탄불 추쿠르주마 대로와 달그츠 가街가 만나는 곳에 오르한 파묵은 소설에서 나오는 소품들, 예를 들어 퓌순이 피운 담배꽁초 4,213개와 그녀의 귀고리 등을 진열해놓았다고 한다. 그래서 호사가들은 <순수 박물관>이 혹시 오르한 파묵의 경험담 아냐? 라고 하는 거 같은데, 내 의견을 굳이 말하자면, 그렇게 생각하는 당신들은 파묵한테 낚인 거다.

 

 진짜 순수박물관 건물과 전시된 담배꽁초들. 아~ 드러


 아, 그놈의 사랑. 이렇게 쓰니까 유행가 제목 같기도 하지만, 하여간 사랑 그놈, 참. 그걸 잃어버린 케말의 상실감이라니. 구구절절 어떻게 그리 옳은 얘기만 써놓았는지. 왕년에 사랑 한 번 안 해본, 혹은 실연 한 번 안 당해본 인간이 있을까만, 사랑을 잃은 한 남자의 그 쓸쓸함과 혼돈을 정말, 정말 실감나게 묘사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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