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카렐 차페크 지음, 정찬형 옮김 / 모비딕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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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만 260쪽인데 무려 스물네 개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첫 번째 <늙은 죄수의 이야기>가 9쪽부터 시작하니까 사실 252쪽. 평균 하나의 이야기가 열 쪽 반의 분량으로 되어 있으니 이걸 뭐라 해야 하나. 단편이라고 하기에도 너무 짧다. 심지어 순 본문 252쪽 가운데도 12쪽은 삽화가 실려 있으니 소설이라기보다 말 그대로 이야기 묶음이라고 하는 편이 좋겠다. 말 만들기 좋아하는 우리나라 출판계에서 한때 손바닥 장掌 자를 써서 장편소설掌篇小說입네, 하고 책을 만든 기억이 새록하니 나는데, 정말로 손바닥 소설이란 장르가 있다면 딱 이런 작품들을 두고 하는 이야기이겠다.
 눈에 들어온 차페크의 작품에 독특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와 <왼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가 있다. 일단 두 권 다 사고, 어느 것부터 읽을까, 하다가 진짜 아무 생각 없이 <왼쪽……>부터 골라잡았다. 다 읽고 붉은 색으로 씌어있는 영어 제목을 보니까 <Tales from the Other Pocket>. 아, <오른쪽……>부터 읽었어야 했구나, 알았지만 그게 뭐 그리 큰 대수랴. 올해 초에 차페크가 쓴 동화책 <작은 새와 천사의 알 이야기>을 읽으면서 이이가 짧은 글도 많이 썼겠구나, 생각은 했지만 <왼쪽……>와 <오른쪽……> 둘 다 성인成人(왜 여기서 난데없이 성인聖人으로 읽힐 수 있을까를 걱정했지?)을 위한 짧은 이야기일 것이라고는 조금도 궁리하지 못했다. 책 읽기 전에 정보를 소홀히 한 탓이다.
 세상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짧은 이야기는? 맞다. <이솝 우화집>. 차페크의 <왼쪽……> 역시 우화적인 측면이 강한 이야기가 많이 실려 있다. 예를 들어볼까? 첫 번째 이야기에 ‘얀데라’라는 이름의 작가가 등장한다. 이이가 전에 작품을 한 편 썼는데 프린터로 출력해 읽어보니(1929년 출간한 책이니 프린터 출력이란 인쇄 초고 정도로 생각하면 될 듯하다) 어디선가 비슷한 내용을 본 것 같다는 아주 언짢은 생각이 드는 거다. 다시 읽어보면 오히려 더 그러해서 자기도 모르게 분명히 누군가의 작품을 표절했다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어 고민을 하다가, 오랜 친구를 만나 사정을 얘기하기에 이른다.
 “여봐, 이거 좀 읽어봐. 최근 작품인데 어째 남의 것을 베꼈다는 느낌이 든단 말이야.”
 그랬더니 친구 왈, “한 눈에 알아봤는데 뭐. 체호프 작품을 베낀 거구만.”
 작가 얀데라가 아주 깨끗한 사람이라 이런 지적을 받자 마음도 가벼워지고 기분도 상쾌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른 친구한테 또 비슷한 얘기를 하기에 이른다.
 “믿지 못하겠지만 때로 작가는 표절을 하면서도 그걸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있거든. 예를 들어 내가 쓴 최근 작품도 남의 것을 베꼈다는 걸 알아챘어.”
 이 말을 듣자마자 이 친구는 이렇게 대답을 하는 거였다.
 “알고 있어. 분명히 모파상에게서 훔친 거지.”
 어? 그리하여 얀데라는 자기하고 가까운 모든 친구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기에 이르고, 그래서 자기가 쓴 작품이 고트프리트 켈러, 찰스 디킨스, 가브리엘레 단눈치오, <천일야화>, 샤를르 루이 필립, 크누트 함순, 테오도르 슈토름, 토머스 하디, 레오니트 안드레예프, 마테오 반델로, 페터 로제거, 브와디스와프 레이몬트 등을 표절했다는 다양한 의견을 접한다. 그래서 (놀랍게도 작가 얀데라를 가장한 차페크가 스스로) 내린 결론은, “한 사람이 사악한 길로 얼마나 깊숙이 빠져들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글을 쓰는 일이라나? 뒷통수 한 방 쾅!
 이건 그냥 첫 번째 이야기 가운데서도 초반에 잠깐 소개하고 넘어가는 대목일 뿐이다. 짧은 이야기가 강한 인상을 주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독자로 하여금 생각할 거리를 주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읽기에 이 책에는 다양한 새옹지마 스토리가 들어 있다고 하고 싶다. 새옹지마는 새옹지마인데, 차페크 주변에 프라하에서 경찰관으로 근무하는 친구나 친척이 있었는지 아주 다양한 범죄자들과 경찰, 판사를 비롯한 사법기관 종사원, 배심원들이 등장하고, 흥미롭게도 스파이와 유사(흉내뿐인) 스파이, 암호해독 전문가 등, 1차와 2차 세계대전 사이의 국제적인 간첩활동도 다양하게 소재로 삼는다.
 19세기 적 신사 숙녀 이야기를 연속해서 읽다가 별 부담 없는 우화적 이야기책을 읽는 재미도 괜찮은데, 문제는 아직 읽지 않은 <오른쪽……>도 마저 읽어야 한다는 것. 재미있는 책도 연속해 읽기는 좀 부담스러울 수 있을 것 같아 조금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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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02-24 11: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오른쪽부터 읽고 연달아 읽기는 뭐해서 왼쪽은 말씀하신 첫 번째 작품까지만 읽고 아직 안 읽었어요. 연달아 읽지 않는 게 더 좋은 거 같아요... ㅎㅎ

Falstaff 2018-02-24 14:29   좋아요 0 | URL
연달아 읽어도 생각보다 괜찮더라고요. ㅎㅎ
 
페르미나 마르케스 세계문학의 숲 14
발레리 라르보 지음, 정혜용 옮김 / 시공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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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발레리 라르보가 누구인지 전혀 몰랐는데, 책 앞날개 보면 1958년에 당시 벨기에 박람회가 선정한 프랑스 대표작가 10명에 포함된 사람이라고 한다. 이 평가가 정당하다고 가정하면, 철학자이면서 작가이기도 한 빛나는 별들은 빼고라도, 라블레, 몰리에르, 라신, 볼테르, 위고, 뒤마, 발자크, 모파상, 플로베르, 졸라, 프루스트, 뒤 가르, 베를렌, 보들레르, 말라르메, 랭보, 기타 등등 가운데 누가 탈락의 고배를 마셨을까? 흠. 인정한다. 요새가 올림픽 시즌이라서 그런가, 꼭 등수 안에 들어야 환호하는 세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점. 어쨌든, 라르보가 10대 프랑스 작가의 범주 안에 들던 들지 않던 간에, 프랑스 내에서 상당히 중요한 작가라면 말씀이지, 어찌하여 아직 대한민국에서 그의 번역물이 <페르미나 마르케스> 하고, 번역에 관한 중요한 에세이라 칭하는 <성 히에로니무스의 가호 아래> 딱 두 권밖에 없느냐 하는 것도 문제다. 하긴 라르보의 생애가 작가뿐만 아니라 번역가로도 명성이 높아 번역을 통한 프랑스 문화에 기여한 공로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고 하니 저서가 그리 많지 않을 수 있는 개연성은 있을 수 있겠다. 사실 책 한 권 읽으면서 이런 거 아는 게 중요하지는 않다. 독자의 유일한 권리는 즐기는 것. 지금부터 즐겨보자.
 저기 라틴 아메리카에 누에바 그라나다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이름을 새로이 ‘콜롬비아’라고 고치고, ‘세계만방에 고하야 콜롬비아의 독립국임과 콜롬비아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한 바 있었다. 이 콜롬비아에서 지배층으로 사는 인간들은 대서양 건너 동쪽에 있는 스페인 출신 백인으로, 현지 원주민을 하도 잔혹하게 학살한 결과 원주민의 개체수가 엄청 줄어들어 도무지 요구 노동력을 확보할 수 없어지자 아프리카에서 새로이 흑인 노예까지 수입해가며 무진장한 부를 축적한 인간들이었다. 이 살인마들이 신세계에서 무한대로 금덩이의 홍수를 맞으면서도 꿀리는 것이 하나 있으니, 지옥(아니면 적어도 아수라) 같은 라틴 아메리카에서 자식들에게 도무지 좋은 교육을 시킬 수 없다고 판단해 아들의 경우 열 살이 넘자마자 유럽 대도시(근방)의 사립 기숙학교로 유학을 보내곤 했다 한다. 물론 저자 발레리 라르보가 어려서부터 여러 나라를 돌아다녀 각국의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스페인어를 쓰는 라틴 아메리카 출신들이 대다수이고 나머지는 페르시아, 인도말레이반도, 중국 등의 아시아 출신, 그리고 극소수의 프랑스 청소년들로 구성된 남학생용 사립 기숙학교 생토귀스탱 중등학교를 작품의 무대로 설정했다. 여기서 아시아 학생들은 하도 인간 같지 않아 정말로 단 한 번도 해당 지역 학생들은 언급조차 하지 않으며, 주로 라틴 아메리카 출신 학생(악당)들과 프랑스 현지 학생의 일화로 작품이 채워지는데, 멀리는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나 가까이 알랭 프루니에가 쓴 <대장 몬느>를 통해 읽어본 듯한, 아니면 비슷한 범주의 소설이라고 해도 크게 까탈은 잡히지 않겠다. (물론 완전 아마추어 독자인 내 생각이다.) 아, 역시 책 앞날개 보니, 이 작품이 나온 다음에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다룬 문학이 봇물을 이루”었다고 하며 그 속에 프루니에의 <대장 몬느> (책 속엔 <몬 대장>)을 언급한다. 뭐 그렇다는 얘기다. 책 한 권을 읽으며, 과거로 돌아가 다시 본고사 볼 것도 아닌데 이딴 거 일일이 신경 쓸 필요 없다.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10대 남자들, 열 살이 넘자마자 부터 19세 다 자란 청소년들이 모여 사는 기숙학교. 더구나 공동침실 형태의 기숙사. 바야흐로 사춘기에 접어든 숱한 어린 수컷들의 모임에 절대로 빠질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아마 여성들은 별로 감이 잡히지 않겠지만, 바로 폭력성이다. 수컷들의 폭력성은 내가 흔히 잘 쓰는 말로, 두 발로 걷기 이전부터 유구하게 수컷들의 혈관을 타고 흐르던 기질로, 우리처럼 유교적 장유유서의 질서가 전혀 없는 유럽에선 기숙학교 내 서열은 전적으로 힘과 덩치와 돈으로 결정이 됐다. 1번이 힘(과 깡다구), 2번이 덩치, 3번이 돈. 이것들 가운데 하나도 없는 아이들은 그냥 주면 먹고, 때리면 맞고, 비웃으면 한 번 씨익 쪼개고,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작은 정글을 생각하면 딱 맞는다. 딱 두 가지 예외가 있는데, 하나는 남들보다 월등하게 공부를 잘하는 우등생. (사례를 좀 쓰다가 얘기가 길어질 거 같아서 삭제했다.) 탁월하게 공부 잘하는 딱 한 명 정도는 정글의 법칙에서 제외된다. 다른 한 경우는 매우, 매우, 그리고 매우 아름다운 누나, 누이동생을 둔 경우.
 생토귀스탱 중등학교에 콜롬비아에서 온 열두 살짜리 어린 마르케스가 있어 하고 한 날 아이들한테 모욕을 받고 얻어터지기를 일 분 동안 뛰는 맥박 수만큼 당하고는 했다. 근데 어린 마르케스에게 작은 누나와 특별하게 아름다운 큰 누나가 있었고, 이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이들은 나이 40줄에 든 고모하고 매일 같이 학교를 방문해 일정 시간 어린 동생하고 산책을 하는 시간을 갖도록 학교의 허락을 받았던 것이다. 당연히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어린 수컷들만 바글거리는 기숙학교 교정에 매끄러운 흰 피부와 고급 드레스, 잘 화장한 아름다운 미모의 잘 빠진 아가씨가 살랑살랑 산책을 하니 아이고, 청춘들, 그 모습만 보고도 죽어 자빠지는 공황상태에 빠져버렸다. 아가씨들이 어린 마르케스의 누이들임을 알고 아이티 포트로프랭스 출신의 건장한 흑인 학생이 과감하게 마르케스의 팔을 비틀어, 즉, 고문을 통해 누이의 이름을 밝혀내기에 이른다. 작은 누이가 필라르. 큰 누이가 바로 페르미나. 바로 그날부터 페르미나는 생토귀스탱의 모든 침대 시트를 새벽마다 뻣뻣하게 풀을 먹이게 하는 베누스의 대관을 쓰게 된다. 작품이 간행된 것이 1911년. 당연히 시트 풀 먹이는 장면은 나오지 않으며, 전적으로 내가 상상하기에 그렇다는 거니까 오해는 하지 마시라. 건전한 성장소설이다.
 꽃이 있으면 벌 나비가 꾀는 법. 책에서는 대표선수 세 명이 등장한다. 학급에서 공부도 제일 잘하고 생기기도 끝장을 내게 잘 생겼으며, 나중에 아버지가 멕시코의 장관 자리에까지 오르는 멋쟁이지만 몽마르트르 언덕의 숱한 유흥가에서 질탕하게 놀 줄도 아는 매력남 산토스. 그의 조연(또는 이른바 ‘꼬붕’)으로 앞에서 말한 바 있는 포트로프랭스 출신의 흑인 학생 드무아젤은 빼고 얘기하자. 언제나 최우등의 학업을 지속하며 자신이 비록 외모는 별 거 없지만 카이사르와 보나파르트를 꿈꾸는 시골부자의 외아들이자 프랑스 인이라기보다 로마 제국의 후예임을 주장하는, 사실상의 주인공 조아니. 마지막으로 학교 최고의 열등생으로 난폭한 급우들로부터 폭력과 멸시, 조롱으로 언제나 죽고 싶어 하다가 페르미나를 본 순간, 저 여자를 정복하면 순간에 자기 팔자가 역전이 될 거란 생각에 들뜬 열세 살짜리 꼬마 카미유.
 페르미나는 누구인가. 특정한 인물이라기보다 청소년기의 한 가지 환상. 결코 닿지 않는 무지개 같은 몽환적 숭배의 대상이라 할 수 있을까?
 세월은 흘러흘러, 화자가 충분히 나이 들고, 추억의 작은 정글 생토귀스탱 중등학교는 어느덧 폐교가 되고 이제 폐허인데, 그곳을 찾아 한 시절을 회상한다. 옛 시절의 소년들은 지금, 혹은 이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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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별 - 어떤 유토피아 Rediscovery 아고라 재발견총서 4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 지음, 김수연 옮김 / 아고라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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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과 혁명동지였다가 사상투쟁에 격렬히 부딪혀 당에서 제명까지 당했던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 이이가 완전히 제명당한 것이 1909년. 1905년의 제 1차 러시아 혁명이 화르르 불타기만 했던 다음, 사회(공산)주의는 완전한 붉은 혁명을 위해 모든 것을 태웠던 시기이며, 무엇보다 아직 레닌이 확고한 정권을 잡지 못한 상태라서 목숨은 건졌을 것이다. 레닌하고 한 바탕 붙어서 당에서 제명까지 당했으나 레닌보다 4년을 더 살다가 1928년 모스크바 수혈 연구소장을 지내면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는데, 이이의 죽음을 두고 온갖 (더러운)헛소문이 만발하였으나, 후세의 사가들은 암살로 추측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혁명가의 삶으로 이 정도면 장땡은 아니더라도 칠땡은 된다. 책의 앞날개엔 보그다노프와 레닌이 정식으로(심판까지 두고) 체스를 벌이는 사진이 실려 있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정적이 되는 것이 정치 아닌가.
 책은, 읽은 독자도 그렇고 책의 각주에도 씌어있듯이, 총 3부작으로 구성한 것 같다. 1부가 <붉은 별>, 두 번째가 책에 실려 있는 <엔지니어 메니>, 마지막으로 그저 구상 목적으로 시 한 수만 써놓은 <지구에 좌초된 화성인>. 읽어보면, 물론 전적으로 과학도였다가 혁명에 참가해서 학교에서 잘린 다음 다시 의과대학을 졸업한 의사가 쓴 ‘소설’작품을, 내가 문학에 대해 뭐 아는 건 없지만 하여간 백퍼 문학작품으로 간주해 읽자면, 1부 <붉은 별>은 어떻게 SF 소설이라 생각할 수 있겠으나, 2부 <엔지니어 메니>는, 실례하지만, 수준 이하로 평하겠다. 물론 지금 난 독후감을 쓰고 있지 결코 주제넘게 서평을 논하는 게 아니라서, ‘수준이하’ 역시 책을 읽고 난 다음의 ‘내’ 느낌, ‘내’가 동감한 수준을 말하는 거다.
 1부 <붉은 별>을 발표한 시기가 211쪽의 각주에 보면 1908년이라 한다. 제 1차 러시아 혁명이라고 일컫는 1905년의 사건. 거의 1년 내내 양대 수도(모스크바, 페테르부르크)와 지방도시, 심지어 전함 포템킨의 수병까지 합세해 벌인 파업과 내전 시도가 박살이 난 다음에, 모르긴 하지만 보그다노프 등의 인텔리겐치아들은 농민 노동자들의 교양사업, 의식화 교육을 모색해야 했을 것이고, 그 일환으로 가상의 세계, 이 책에선 ‘붉은 별’, 즉, 화성에서 화성인들이 건설한 모범적 사회주의 세상을 알기 쉽게 그려 보여주었지 않을까 싶다.


 

 * 1905년 혁명이 어땠을까 궁금하시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1번 사단조 작품의 표제가 <1905년>이다. 혁명의 막바지에 황제군과 일전을 벌이기 위한 경종Tocsin이 울리는 4악장의 마지막 장면이 압권이다. 한 번 들어보시라

 

 

다른 좋은 연주도 있으나 4악장만 가져올 수 있는 것, 4악장 가운데 마지막 부분의 경종을 잘 표현한 음원을 골랐다.



 정말로 화성인 과학자 메니(2부에 나오는 ‘엔지니어 메니’하고 다른 인물)이 지구를 방문해서 과학자이자 혁명가이며 화자話者인 ‘나’를 설득해 우주선 에테로네프를 타고 화성에 도착한다. 그곳이 바로 사회주의 유토피아이며, 지구보다 두 배 더 오래 존속해 (지구에 비하면) 지표면에 물이 별로 없고, 그래서 땅과 식물 등이 붉은 색을 띠는 별.
 지구는 화성에 비해 태양과 가깝기 때문에 더 다양하고 많은 생명체가 살고, 그래서 더욱 생존경쟁이 활발하며, 어쩔 수 없이 보다 더 전투적인 생명체인 인간이 살고 있다. 화성인들은 지구인과 비교해 투쟁적인 면이 덜해서 훨씬 가벼운 정도의 계급투쟁을 겪고 전 화성적인 사회주의 공동체를 이룬지 벌써 300년이 가깝다. 지구 세월로. 화성의 시간개념으로는 한 160년 정도. 화성이 아직 사회주의 건설에 다다르지 못했을 당시 또 한 명의 메니라는 공학자가 있어서 화성의 건조한 대륙을 관통하는 거대한 수로 또는 운하 또는 이명박 씨가 좋아했던 몇 대 강 공사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전 화성의 육지는 사람 살기 좋은 환경으로 바꾸어 놓았던 것인데, 이건 필연적으로 화성 인구의 폭발적 증가를 가져오고, 식량부족을 초래했고, 방사능을 이용해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해야 할 단계까지 도달했다. 첫째가 금성을 식민지로 만들어 금성에 무한정으로 쌓여있는 방사능 물질을 가져오는 일. 둘째가 방사능 무기를 이용해 지구의 인간을 깡그리 전멸시킨 다음 금성보다 훨씬 가까운 지구에서 방사능 물질을 채취하는 방법.
 1부 <붉은 별>은 여기까지만. 190x년대 러시아 혁명의 와중에서 무장 투쟁을 결의하려는 혁명가들이 생각했던 유토피아. 그건 어떤 모습일까. 당연히, 안 알려줌.
 2부 <엔지니어 메니>는 위에서 얘기했듯 전 화성의 대륙을 관통하는 운하를 뚫는 공사를 담당했던 과학영웅, 그러나 사회주의나 노동조합을 이해하기 전 세대의 천재 메니에 대한 전기라고 읽을 수 있다. 러시아 사람이 쓴 운하 이야기. 어딘가 벌써 읽어본 느낌. 그래,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예피판의 갑문>. 일찍이 2미터의 거한 표토르 대제의 명에 의하여 모스크바에서 흑해까지 닫는 운하를 파다가, 파다가 코피 나는 이야기가 <예피판의 갑문>이라서 혹시 러시아 작가들의 혈관 속에선 운하 파는 주제에 뭔가 혈전 같은 것이 맺힌 게 있는 거 아냐, 라는 질문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잠시 생각해봤다. 아주 잠깐. 화성 전체를 사통팔달한 운하를 뚫는 일을 총 지휘하는 메니. 일 잘하다가 부르주아와 욕심 많은 권력자들의 거미줄에 걸려 15년 형을 받고 수감 중, 메니를 감방에 보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노동자들의 각성에 의하여, 부르주아와 권력자들이 골로 가고 다시 메니가 복권해 공사를 거진 다 마친 다음에 보니, 메니 역시 구세대 틀딱에 불과하다는 엄정한 진보 역사의 판정 이야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2부 <엔지니어 메니>를 수준 이하의 문학작품이라고 보는 건, 이 소설이 아무리 1913년에 나왔다고 하더라도, 문학 작품이라기보다는 의식화 교재를 읽는 듯한 느낌이 훨씬 더 강해서다. 열아홉, 스무 살의 청년이라면 아하, 혁명의 수행과 인류의 진보는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구나,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겠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 지금 조금 후회하는 건, 1부 <붉은 별>을 읽고 난 다음, 굳이 2부를 읽을 필요가 있을까, 책을 덮고 싶은 아주 센 유혹을 참고 나머지도 읽은 시간이 좀 아까운 생각이 든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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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의 집 1 펭귄클래식 25
이디스 워튼 지음, 최인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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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말년 작 <순수의 시대>를 읽고 20세기 초반 미국 부르주아 계급의 속물성에 완전히 학을 떼서, 다신 읽나봐라, 했다가, 단 한 권의 책만으로 문학적 성가가 워낙 높다고 평가받는 이이의 작품을 다시 찾지 않겠다고 결심하기엔 조금 부족한 면이 있어서, 그러면 한 작품만 더 읽어보겠다, 마음 바꿔 먹고 읽은 책이다. 1862년생인 워튼이 <순수의 시대>를 쓴 것이 1920년, 우리 나이 59세. <기쁨의 집>은 15년 전 1905년에 발표한 작품. 44세, 일반적으로 봐, 전성기 때다.
 이디스 워튼 자신이 뉴욕의 유서 깊은 명가의 따님으로 태어나 4세부터 10세까지 유럽 각지에서 살며 완전히 개인교사로부터 교육을 받은, 뼈 속부터 진짜 부르주아. 그러니 44세 때도, 59세 때도 작품 속의 무대는 뉴욕 부르주아 집단, 정확하게 말해 최고급 사교계에 진입했거나 떨려난 사람들, 특히 여성을 주요 등장인물로 한 소설작품을 쓴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하겠다. 그간 독후감을 통해 여러 번 얘기했듯이, 미국의 부르주아로 말하자면 성격이 자신들의 출신지인 유럽에 비하여 오히려 더 반동, 수구, 보수적 집단이었으며, 유럽의 비슷한 계급인 귀족들에게 굳이 뭐라 칭할 필요 없는 열등감 또는 어딘가 좀 꿀리는 기분을 감출 수 없었고, 반면에 같은 미국인이라도 서부 출신 부르주아에게 동부 자본가들의 우월감 같은 걸 숨기지 않는 모습, 한 마디로 눈꼴시어서 봐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었다. 이런 걸 좀 유식하게 쓰자면, 목불인견이라고 하는데, 딱 두 편의 이디스 워튼의 작품을 통해 들여다 본 미국 동부 부르주아 집단으로 말씀드리자면, 비록 내 통장의 잔고가 20만 원밖에 없더라도, 남들 보는데서 없는 척할 수 없어, 송아지 스테이크를 해치운 다음 후식으로 '쿠프 자크'를 먹을 것인가, '페셰 아 라 멜바'로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속물 또는 잡것들이다. 쿠프 자크는 모르겠고, 나도 '페슈 멜바'는 안다. 이거 아이스크림 베이스에 복숭아(페셰)를 올린 디저트로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명가수 넬리 멜바의 이름을 딴 거다. 거 있잖아 왜, 화폐에 자기 초상 올린 성악가.

 페슈 알라 멜바, 한 번 보실려?

 

 


 네티 크레인이란 자그마한 아가씨가 있었다. 영화수입사에서 타이프라이터로 일을 하다 같은 회사의 멀쩡하게 잘 생긴데다가 상류사회에 근접한 남자와 서로 연애를 한 거까지는 좋았다. 남자가 정성을 바쳐 심지어 어머니의 결혼반지까지 선물하면서 결혼하자고 꼬드겨 속 고쟁이 끈을 풀어줬는데, 남자가 날라버렸다. 아가씨의 연애 건은 졸지에 추문으로 번져 회사까지 그만 두어야 했으며 설상가상으로 실직 후 가난한 시절에 결핵에까지 걸려 심각한 상황에 처해지기 바로 전에 미국판 혜민국에 보내진다. 여기서 하느님이 도와 릴리 바트 양이란 천사 같은 은인이 나타나 요양원에 가서 병을 완치하고 고향에 돌아가 자신의 모든 과거를 알고 있는 동네 친구이자 현직 화물차 운전수인 조지 스트루더와 결혼해 딸 하나를 두고 잘 살게 되었다는 얘기.
 이렇게 써 놓으니까, 아하 이 책이 네티 아가씨의 파란 많은 젊은 시절을 그린 건가보다, 라고 생각하면 진짜 오해다. 다시 말하지만 작가 이디스 워튼 자신이 입에 은수저를 물고 나와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은수저를 입술 밖에 빼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서 불행한 네티 아가씨가 겪은 몇 년의 고난을 책으로 쓸 역량을 갖지는 못했을 것으로 본다. 근데 왜 이렇게 썼느냐고? 네티 크레인이었다가 네티 스트루더 아줌마가 된 젊은 엄마를 도와 결핵을 완치하게끔 요양원으로 보낸 릴리 바트 양이 이 책의 주인공이라서. 설마 그거 한 가지 이유 때문이겠어? 그건 아니고, 중요한 변곡점이 되기도 해서 미리 콕 집어주는 건데, 이런 경우, 지금 내가 베푸는 친절을 우리는 흔히 ‘선의’라고 일컫기도 한다. 즉, 선의의 힌트를 드리고 있다는 말씀.
 자, 그럼 우리의 주인공 릴리 바트 양에 관해서 잠깐 소개를 할 필요가 있다. 릴리의 행각을 모두 얘기하자면 차라리 책 두 권 600쪽을 그대로 베껴 쓰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니, 앞머리에 작가가 릴리의 성장환경을 묘사한 것을 배경으로 극히 짧게 요약하자면, ① 겁나게 예쁜 아가씨, ② 놀라운 체형과 반듯한 자세에 관한 적당한 한 마디는 ‘거만해 보인다’는 것으로 언제나 숙녀다운, 당황하지 않은 척하면서 즉흥적으로 위기를 넘기는 화술과 ③ 도대체 돈이 궁하다거나 경제적 위기 상황이라는 것에 대한 이해가 분명하지 않으며, 내일 어떻게 되더라도 당장 주머니에 현금이 있다면 자신도 모르게 펑펑 써버리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고, ④ 돈을 벌거나 생활을 꾸려나가는 아무런 재주도 없어서, ⑤ 자신의 미래와 복지를 위해 돈 많은 남자를 만나 결혼하기 위해 참으로 (헛되이) 애쓰는 캐릭터.
 물론 부르주아로 릴리 아가씨의 미덕이 없는 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상류 사교계의 총아로 어울릴만한 모든 자질과 품위가 넘쳐흐른다. 사람을 사랑할 줄 알며, 베풀 줄도 알고, 개인의 잘못 때문에 비록 자신이 불이익을 받을지언정 타인의 비행을 발설해 위기를 넘기려 하지도 않는다. 경제적 어려운 상태로 떨어져도 남에게 없어 보이거나 동정을 받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다 미덕. 그러나 참으로 덜 떨어지고 철없고, 한 번도 부르주아였던 적이 없던 내 눈엔 심지어 한심해보이기도 한다. 정말 정 떨어지고 마음에 들지 않는 주인공. 겉으로 보기에, 즉 불멸의 사교계 일원의 눈에는 환상적인 미덕을 갖춘 매력 넘치는 아가씨일지 모르지만, 생활력 젬병이고, 남의 시선엔 전혀(적어도 과하게) 무신경하고, 주제도 모르는 철딱서니 없는 아가씨. 일반 노동자가 한 푼도 쓰지 않고 30년을 벌어야 만질 수 있는 돈(9천 달러)을 불과 몇 개월 만에 펑펑 써놓고 미스터 트래너가 왜 나한테 많은 돈을 주었는지, 돈을 준 대가가 무엇이 될지 전혀 고민해보지 않는 인물.
 이 책을 읽기 바로 전에 읽은 책이 조지 엘리엇의 <다니엘 데론다>였다. 두 작가의 차이점이, 특히 유대인을 묘사하는 관점이 극적으로 달라서 매우 비교가 됐는데, 워튼의 시각으로, 이 책에 나오는 유일한 유대인이자 월가 5번지의 총아이며, 키 작고 인내심 강하며 무엇이든 원하는 건 취하고야 마는 계산적인 로즈데일 씨를 보면서 왜 난데없이 <해리포터> 시리즈의 도깨비들이 생각났을까? 지하 마법사 전용 은행을 총 관리하는 도깨비들. 작은 키에 뾰족한 코에다가 돈과 금에 관한 한 그것을 제공하는 누구한테나 관용스럽고, 가져가려는 누구한테도 잔인한 유사 고리대금업자. <기쁨의 집>의 경우만으로 워튼을 판정한다면 반유대주의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다. 이 책이 나온 시점도 20세기 초. 유럽 전 지역에서 반유대주의가 고개를 번쩍 들기 시작했을 무렵이기도 해서 누명을 쓴 것인지 모르지만 하여간 그렇게 보였다. 어쨌든 여러 가지로 나하고는 맞지 않는 작가. 그러나 스토리를 엮어가는 솜씨는 정말 감탄스럽기는 하다.
 내 서재에 더 이상의 이디스 워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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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3-05-05 09: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아까 골드문트님의 이선 프롬 리뷰 읽고 왔는데요 ㅋㅋㅋ 내 서재에 이디스 워튼은 없다!! 하셨지만 역시 인생은 알 수 없군요 ㅎㅎ

Falstaff 2023-05-05 10:56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맞습니다. 인생, 정말 몰라요. 이제는 저도 이디스 워튼을 진지하게 검색해보고 있답니다. ㅋㅋㅋㅋㅋ
 
다니엘 데론다 1 한국문화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753
조지 엘리엇 지음, 정상준 옮김 / 한국문화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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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5 크기에다 태권도 유단자가 아니면 결코 격파할 수 없을 만큼 두꺼운 판자 수준의 양장제본. 그래서 약 350쪽의 책이 500그램 가까이 나간다. 이런 책 네 권으로 모아 19세기, 종이 귀하던 시절에 그랬듯 빡빡하게 써 놓은 1,410여 쪽을 읽어야 조지 엘리엇의 마지막 작품 <다니엘 데론다>를 끝마칠 수 있다. 메리 앤 에반스(Mary Anne Evans)가 왜 필명을 남자 이름 조지George라고 지었느냐 하면, 몇 가지 설이 있는 바, ① 조지 루이스라고 하는 유부남인지, 애 달린 홀아비인지는 모르겠으나 정식 결혼을 하지 않고, 아니 좀 묵은 표현으로, 정식으로 혼인을 하지 아니하고 동거생활에 들어갔는데 당시가 경제적으로나 군사력에 있어서나, 문화적으로나, 지금 기준으로는 고리타분하기 짝이 없지만 하여간 도덕적으로나 절대로 해가 지지 않을 것 같은 황금기의 빅토리아 시대여서, 1854년에 그들의 동거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극심해지자 이름을 ‘조지’라고 했다는 얘기와, ② 아무래도 이이가 활동했던 시기가 19세기였던 만큼 (저널리스트이기도 했던) 자신이 쓴 글을 독자가 보다 신중하게 읽어주기 바라는 입장에서 필명을 남자 이름으로 했다는 얘기가 (구글 검색해보니 나와)있는데, 흠, ②가 보다 사실에 가까운 거 아닐까 싶다.
 하여간 조지 엘리엇이 쓴 네 권, 8부의 소설이자, 그녀의 마지막 소설작품인 <다니엘 데론다>가 세상에 나왔을 때가 1876년, 조선이 개항을 했던 때이니 당시 영국과 유럽 문명과 문화의식을 감안해서 읽어야 함은 물론이다. 나는 엘리엇의 초기작품 <플로스 강의 물방앗간>을 읽고 단박에 이이에게 반해버렸다.

 

 

 


 건전하고 (긍정적 의미에서)완고한 영국의 시민계급의 생활과 불행의 극복을 건강하게 서술했던 것이 읽기에 좋았다. 조지 엘리엇의 다른 작품을 알아보니 그의 대표작으로 치는 건 <플로스 강...>이 아니라 <미들 마치>라는 작품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선 ‘지식을만드는지식’ 출판사에서 ‘천 줄 읽기’ 시리즈로 나와 있다.

 

 

 

 즉 완역본이 아니라 요약본이라는 뜻. 영어로 읽으려면 ‘로즈마리 에쉬톤’이 19세기 영어를 다시 쓴 펭귄 클래식의 페이퍼 북이 있으나, 내 평생에서 징글리쉬를 쓸 일은 이미 끝났으므로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즉, 조지 엘리엇의 대표작인 <미들 마치>는 아직까진 읽을 수 없다는 것.
 이 마당에 숨겨본들 뭐할까.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미들 마치> 대신, 그래도 명색이 조지 엘리엇을 좋아한다고 얘기하려면 적어도 이이의 작품은 두 개 이상을 읽어보고 그런 말을 해야 할 것 같아서 택한 책이 바로 <다니엘 데론다>였다. 표지가 하도 딱딱해서 옆으로 세워 들고 다니면 치한퇴치 용으로 아주 맞춤할 이 책의 그림은 이렇게 생겼다.

 

 

 

 

 각 권의 정가가 21,000원. 책 뒤표지에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는 우리 시대 기초학문의 부흥을 위해 한국연구재단과 한국문화사가 공동으로 펼치는 서양고전 번역간행사업입니다.”라고 씌어 있다. 마지막 단어 “번역간행사업입니다.”는 정말로 띄어쓰기를 하지 않고 인용한 그대로 썼다. 궁금해서 한국연구재단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흠, 진짜 세금 많이 쓰는 곳이다. 한국문화사는 주로 어문학 분야에 집중하는 출판사 이름. 세금 많이 쓰는 재단과 한국문화사라는 출판사가 공동으로 번역해 판매해서 그런지 할인율이 0%. 그래서 위 그림 네 권을 다 읽으려면 무려 84,000원을 들여야 한다. 좋다. 작품만 좋다면야.
 <다니엘 데론다>를 읽으면서, 19세기에 이런 책을 쓴 ‘여류’작가, 조지 엘리엇의 깡다구는 정말 알아줘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을 읽으면 당시 영국인들의 작품 속(예컨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에서 등장하는 상속제도, 즉 아들에게만 상속권이 주어지는 한사限嗣상속 문제의 불합리성이 부각되며,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위하여 전력을 다하는 여인에 대한 사회적 구속, 그리고 무엇보다 방랑하는 유대인, 즉 디아스포라의 정체성과 그들의 도덕, 철학적 우위에 관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주요 등장인물을 보자.
 궨덜린. 발음하기 참 까다롭다. 그래서 다시 써보면, 그웬덜린. 훨씬 수월하다. 여자 주인공. 놀랍도록 아름다운 결혼 적령기의 여자. 첫 장면이 도박장의 룰렛에서 돈을 엄청 따고 있는데 누군가가 불행의 눈길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걸 감지하면서 갑자기 도박의 자신감이 없어지기 시작하고 아니나 달라, 그간 딴 돈을 몽땅 다시 잃는다. 이어서 어머니로부터의 전보. 집안이(19세기 중반 영국의 일시적인 공황 때문에) 거덜이 났으니 즉각 집으로 돌아 오거라. 별로 돈이 되지는 않지만 자신의 목걸이를 전당포에 팔아 여비를 마련해 출발하려는데 누군가가 목걸이를 다시 사서, 그걸 돌려받는다. 물론 치명적인 자존심의 스크래치를 받고.
 다니엘. 이이의 정체는 직접 알아내시라. 4권, 7부에 이르러야 출생의 비밀이 드러나는 것을 어찌 아직 읽어보지 않은 분께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타이틀 롤을 맡은 주인공답게 전혀 돈에 구애받지 않는 부르주아에다가 학식 또한 뛰어나고, 남 안 되는 걸 눈 뜨고 보지 못해하는 인정 많은 젊은이. 백부이자 속으로는 자신의 친부일 것이라 짐작하는 준남작準男爵이 우리 나이로 세 살 때부터 키워 멀쩡한 신사로 만들어놓았다. 그러나 정작 준남작은 슬하에 딸만 셋을 두어 자신이 죽으면 한사상속으로 인해 모든 영지는 부도덕하고 심리적으로 거의 완벽하게, 사디즘 적, 비정상적으로 비정한 조카 그랜코트에게 넘어가게 예정되어 있는 인물.
 미라. 유대인 처녀. 일찍이 부부싸움 끝에 아버지 손에 위탁되어 어머니와 오빠를 여의고 미국, 헝가리, 체코, 독일 등지로 떠돌아다니며 연극, 노래 등을 익힌 어린 아가씨. 도박에 중독된 아빠가 자신을 팔아버리려 하자 돈 몇 푼 쥐고 독일에서 탈출, 엄마와 오빠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막연히 생각하는 런던으로 오긴 왔지만 완전히 괴멸. 이렇게 사느니 죽자, 싶어 치마를 머리 위로 뒤집어쓰고 템즈 강에 빠져 죽을 찰라 보트를 젓고 있던 다니엘에 의하여 짧은 목숨 버리지 못해 질긴 삶을 이어가는 아주아주 예쁜 아가씨. 소설에선, 특히 19세기 소설에선 예쁜 아가씨는 대부분 마음씨도 곱다는 건 다들 아시지? 물론 발음하기 힘든 궨덜린 아가씨는 너무나 높은 콧대와 쥐뿔도 아는 거 없으면서 잘난 척하는 게 몸에 밴 숙녀가 돼서 가히 재수 없는 수준이긴 하다.
 얼핏 보면 이들이 만들어가는 삼각관계라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그렇게 단순화시키기엔 조지 엘리엇의 필력이 너무 막강하다. 내 경우에 국한해 얘기하자면, 난 4권에 이르러야 비로소, 이래서 조지 엘리엇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꾸로 얘기하면? 앞부분이 읽기 쉽지 않았다. 특히 권 별로, 더욱 특별하게 제2 권에서, 조지 엘리엇이 또는 번역한 정상준 서울대 영문과 교수가 문장의 수준을 일정하게 유지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균일하지 않았는데, 이런 말은 예를 들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이유 없이 까탈을 잡는다고 꾸중을 들을 수 있겠다.
 먼저 여러 번 읽어야 했던 문장의 예를 든다.


 “온갖 논란을 벌이는 와중에, 그녀가 그랜코트를 서로에 대한 의무를 다하며 맺어질 사람으로가 아니라 결혼하기 편리한 남자로만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자신의 결혼을 변호할 수 없는 이유에 포함되지 않는가 하는 물음으로 고민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특징적인 점이었다.” (2권 224~225쪽).


 지금 다시 읽어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19세기 대단히 수사적인 작가들은 이런 문장을 많이 사용했을 수도 있겠지만(그렇게 이해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 대하여 귀하의 이해를 요구하는 무례를 용서해주시기 바라마지 않습니다, 이런 식), 인용한 문장은 읽기가 매우 힘들어서 그렇지 비문은 아니다. 하지만 좋은 문장은 더욱 아니다. 왜 이렇게 말하는가 하면, 3권과 4권도 같은 작가, 같은 역자가 썼을 것이 분명한데도 이런 모호한, 또는 난해한, 마치 n차 함수를 푸는 듯한 문장이 별로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게 다가 아니라, 무려 열 번 이상 읽어야 했던 것도 있다. 보시라.


 “이런 상태에서는 행동에 대한 요구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막연한 이미지 속으로 서서히 빠져든다. 또한 환영의 세계에서 충동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덧없는 충족조차 거부하며 끊어진다. 이런 상태는 머리털이 희끗희끗하게 세어갈 때 종종 찾아온다. 때로는 젊은 시절의 다양한 감수성이 벗겨져 나가면서 두드러지는 엄청난 이기심의 몸통처럼 맹렬한 완고함과 집요한 습성과 함께 찾아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랜코트는 숱이 많지는 않아도 밝고 가느다란 금발을 갖고 있고, 그의 기분이 순전히 기운이 빠져 쇠잔해진 탓이라고는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의 내면에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정신의 화학작용이 일어나고 있으므로, 나태하게 침체되거나 솜털처럼 부드럽고 연약한 상태라도 뭔지 모를 부식성 물질이나 폭발성 물질이 마련될 수 있다. 잠에서 깨어난 어떤 인부가 아무 원한도 없이 아직 자고 있는 동료의 생명을 짓뭉개려고 무거운 돌을 들어 올린다면, 그에게는 인간의 행동을 어지간히 예상할 수 있게 해주는 습득된 동기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심지어 신사도 간접적인 방법으로 스스로를 위험인물로 만들어 그가 다음에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일으키고, 그럼으로써 슬프게도 동료애를 깨뜨릴 수 있다.” (2권 198~199쪽)


 특히 2권에 수 없이 등장하는 추상명사들. 몹시 많이 배운 분들은 혹시 이렇게 주장할지 모르겠다. “은유를 이해해야 한다.”고. 기억해주시라. 넘쳐, 넘쳐흐르는 은유의 강물에 독자는 드디어 빠져 죽었던 거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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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04-02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제는 번역한 우리말 번역이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