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양장)
쑤퉁 지음, 김은신 옮김 / 아고라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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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화가 1960년 쥐띠, 쑤퉁이 63년 토끼띠. 둘이 처음 만나니까 서로 비슷하게 느낀 것이, 어려서부터 같이 놀던 동네 친구 같았다나? 난 영화 <홍등>, 장이모우 감독에 공리가 주연을 한 이 영화를 참 재미있게 봤는데, 그게 쑤퉁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거란 걸 알고, 그래? 그럼 쑤퉁의 작품도 읽어봐야겠다, 싶어서 <쌀>을 고른 거다. 말인즉 <쌀>이 내가 처음 읽은 쑤퉁이란 말이다. 그리고 거의 틀림없이 마지막으로 읽은 쑤퉁의 작품이 아니겠느냐, 하는 점도 부인하기 힘들다. 참 다행인 것이 알라딘 헌책방에서 사서 그나마 좀 위안이 된다는 거. 조만간에 아파트 단지 도서실에 기증해야겠다.
 용 다섯 마리를 일컫는 이름의 우룽(五龍)이 주인공. 고향 펑양수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유래 없는 대 풍년이 도래할 찰나, 그만 늦장마가 피눈물 나는 폭우로 이어지는 바람에 끝없는 들판에 넘실대던 익은 벼들의 황금물결이 진짜 황토 물에 몽땅 잠겨, 이제 남은 것은 겨울바람 소슬하니 불어오기 전에 굶어죽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지자, 이렇게 앉아서 죽기를 기다릴 수 없다는 신념 하나로 도시로 향하는 화물열차에 몰래 올라 도시에 도착하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우룽은 사흘을 내리 굶다가 부두에서 쌀을 실은 수레를 무작정 따라 상가들이 모여 있는 일종의 시장거리 와장가(瓦匠街)의 싸전 대홍기(大泓記)에 도착해, 싸전 주인 펑사장에게 사정사정을 해 임금 없이 밥만 먹여주는 조건으로 취직을 하는데 성공한다. 물론 낯선 도시에 떨어져 싸전으로 오기 전까지 겪은 더럽고 수치스런 경험은 소개하지 않았다.
 싸전에 딸이 둘 있는데, 큰 것이 쯔윈(織云)이요 작은 것이 치윈(綺云). 쯔윈으로 말하자면 몸매 빵빵하고 얼굴도 동그라니 당시 중국인의 시각에 입각한 전형적인 미인에다가 살집도 적당하니 붙어 사내새끼라면 어떻게 한 번 껄떡거려볼만한 방년 열여덟의 젊디젊은 아가씨요, 작은 치윈으로 말하자면 모든 일을 차갑게 계산적으로 따져서 생각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이제 겨우 열다섯 살이지만 아버지 펑사장 이상으로 싸전의 경영을 거의 혼자 해나가고 있는 당찬 아가씨다. 쯔윈, 역시 예쁘고, 성격 발랄하고, 오픈되어 있는(까졌다는 얘기) 아가씨가 20세기 초반, 계산해보면 1910년대 중반쯤이라면 태생부터 문제를 갖고 태어난 것이라, 쯔윈 역시 예외가 아니라서 벌써 열다섯 살 때 자진volunteer해서 도시를 장악하고 있는 귀족계급이자 암흑가의 최고 보스인 뤼대감의 정부자리를 꿰찬다. 그리하여 얻는 것이라고는 와장가에서 단연 돋보이는 스캔들과 뤼대감으로부터 얻어내는 수많은 고급 옷들. 쯔윈은 스캔들 따윈 눈도 하나 깜박거리지 않는다. 눈 깜박? 천만의 말씀. 오히려 뤼대감이 자신을 조금 멀리 하는 듯 보이자마자 뤼대감의 암흑가를 대리해왔던 도시의 항구harbor 방면 총대장이자 주인공 우룽의 첫 번째 원수인 아바오를 밤마다 창문을 통해 자기 방에 들이는 놀라운 엽색행각도 서슴지 않는다. 불과 나이 열여덟에.
 아차, 쯔윈이 임신을 해버린다. 아바오가 쯔윈의 창문을 넘나든다는 걸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우룽이었는데, 어떻게 도시의 권력자 뤼대감도 연인의 배신을 알아내어, 어느 날 유장하게 황토색 강물이 흐르는 장강 속으로 아바오가 가라앉을 수 있었을까. 하여간 그랬다. 이제 배는 불러오지, 뤼대감으로부터 완전 소박을 맞았지,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쯔윈의 아버지 펑사장은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한 숟가락 가득 겨자를 퍼먹는 심정으로 촌놈 우룽과 쯔윈을 혼인시켜버린다. 난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정상적인 20세기 초반 중국 아니겠는가 싶었다. 근데 혼인 날, 뤼대감이 꼭 첫날밤에 열어보라고 칠기를 한 고급 목합을 선물하는 장면에서 첫 번째로 작가 쑤퉁에게 질려버렸다. 임신한 여자에게 장가든 촌놈 우룽이 자신을 우롱한 아바오와 쯔윈의 밀통을 몰래 뤼대감에게 알려줘 아바오를 죽게 만든 건 그렇다고 쳐도, 썩어가는 아바오의 생식기를 첫날밤에 열어보라고 목합에 담아 선물했다는 설정은, 오버다, 오버. 거기다가 바로 다음날, 먼 곳에 가서 배 두 척의 쌀을 사오라는 장인의 심부름을 가게 된 우룽. 심부름의 목적은 우룽을 죽여 쯔윈으로 하여금 과부 신분으로 만들려는 꼼수였던 것. 이쯤 되면 이후 우룽의 처가에 대한 악행은 일면 당위성을 갖기는 하지만, 엽기 스토리, 정말 해도 너무한다.
 몇 달 후 쯔윈이 아들을 낳음으로 해서 자손 없는 뤼대감의 여섯 번째 첩으로 들어가 거의 하녀 수준으로 살게 되고, 뇌졸중 후유증으로 펑사장이 죽어가며 마지막 남은 힘으로 더럽고, 길고, 노인 특유의 바짝 말라 두껍게 각질이 덮인 손톱으로 우룽의 왼쪽 눈알을 파 애꾸로 만들어 놓고 죽은 다음, 우룽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처제 치윈을 두 번째 아내로 맞아들인다. 이후 우룽이 죽을 때까지 싸전 대홍기와 대홍기를 둘러싼 와장가와 도시 속에서 우룽, 쯔윈 남매, 쯔윈 남매의 후손들이 펼치는 눈뜨고 못 볼 행각들의 나열. 중국인과 정서 차이인줄 모르겠지만 어떻게 이런 작품을 모옌, 위화, 심지어 다이 허우잉과 비견하는 위치로 올릴 수 있는지 정말 난감하다. 그러고 보니 <홍등>마저 내게 인상 깊게 남아있는 건 장이모우 감독의 영상미, 쉽게 얘기해서 필름의 색채감이었지(공리의 미모는 논외로 하자 뭐!), 결코 작품의 스토리 라인은 아니었던 거다.
 하여간 죽고 죽이고, 물고 물리고, 때리고 맞는 순환. 이것이 도시에서 사람이 사는, 또는 1910년대부터 30년대까지 중국에서 사는, 살아내는, 생존하는 방식이었다고 주장하는 거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는지, 난 도통 모르겠다. 당연히 문학이 구름 위의 궁전에서 천상의 노래만 하라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지상의 인간들이 오직 생각으로만 품을 수 있을 거 같은 악행으로만 점철하면서 그걸 보고 사실주의입네, 리얼리즘입네, 함부로 주장하라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이런 의미에서 <쌀>은 수준 이하의, 습작 정도의 작품이라고 결론 내는 것이며, 다시는 쑤퉁을 읽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이다.

 


 

 * 어, 이 책도 양장본, 반양장본이 있네. 난 반양장본을 읽었다. 새삼 그쪽으로 글을 옮기려고 하니 귀찮다. 그냥 내비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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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키핑
메릴린 로빈슨 지음, 유향란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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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릴린 로빈슨의 처녀작. 이이가 쓴 <길리아드>를 읽고 기독교적 세계관에 아주 학을 뗀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사실 <하우스 키핑>을 읽으려다가 마우스 클릭을 잘못해 <길리아드>를 샀던 거다. 그런데 <길리아드>를 너무 재미없게 읽어 정작 마음먹었던 <하우스 키핑>을 읽기 위해서 3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앞서 읽은 책이 얼마나 재미없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해지기 까지. 정확하게 기억하는데, 3년 전, 메릴린 로빈슨의 <하우스 키핑>이 타임지인가 어딘가에서 선정한 100대 문학작품에 포함됐다는 걸 알고 궁금증이 도졌었다는 거. 그런데도 <길리아드>에 관한 추억이 하도 험악해서 이거, <하우스 키핑>은 정가의 37% 가격인 5천 원 주고 헌 책 샀다. 지금, 후회막급. 이런 책은 새 것으로 사고, 3년 전에 산 새 책은 헌 것으로 사야했던 거다. 난 타임지 같은 기관의 100대 명작, 이딴 거 안 믿는다. 아니, 그런 평가가 내 취향하고 같지는 않다는 걸 이해한다. <앵무새 죽이기>와 <동물농장>을 어떻게 명작이라고 하는지, 난 도무지 이해 못하는 인종이다. 근데 <하우스 키핑>은 정말 대박.
 일반적으로 ‘하우스 키핑’을 한국말로 하면, 아니, 인터넷 뒀다 뭐하나, 네이버 검색해보니까, “살림, 집안일, 집안 돌봄, 시설관리” 등으로 쓰는데, 이 책에서 ‘하우스 키핑’은 흠, 물론 그런 의미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각개 단어의 뜻, 그러니까 하우스를 키핑하는 일, 집안을 간수하고 보살피는 일, ‘집안일’ ‘살림’ 대신, “집‘House' 및 집을 구성하는 가족을 지키고, 유지하고, 심지어 사라진 가족을 기다리는 모든 행위”를 일컫는(거 같)다.
 콩가루 집안을 소개한다.
 미국 중서부 지역에 에드먼드 포스터 씨가 살았다. 광막한 평야지대에 바람이 한 번 불었다하면 거칠 것 없이 몰아치는 거센 바람의 발톱을 막아낼 방법이 없어 땅을 깊게 파고 집을 지어 창문이 지표면과 같게 만든, 이른바 반 지하 집에서 살았는데, 이 양반이 하도 평야지대에서만 살아서 그런지 평소에 산을 동경해 세상의 모든 유명한 산을 (사진이나 그림을 보며) 스케치하는 취미가 생겼을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해 꽃피는 봄이 오자 에드먼드 씨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열차 정거장으로 냅다 달려가 매표소에 돈을 한 움큼 내밀더니, 산이 있는 곳으로 가는 차표를 달라고 했단다. 그래 그 길로 열차를 타고 떠난 곳이 미국 북서부 워싱턴 주의 시애틀 부근이라고 짐작하는 가상 소도시의 가상 촌 동네이자 넓은 호수가 있는 완전한 산골마을 핑거본이었다. 여기사 에드먼드 씨는 어여쁜 아내 실비아와 결혼을 하고, 그녀와 함께 살기 위해 핑거본에서도 높은 지역에 터를 골라 벽돌로 튼튼한 집을 지어, 깨가 쏟아지지는 않지만 그냥 덤덤하고 성실한 철도원으로 살며 딸을 셋 두었다. 첫째가 몰리요, 둘째가 주인공이자 화자 ‘나’ 루스의 친엄마인 헬렌이고, 셋째가 또 다른 주인공 혹은 주연급 조연 실비였다. 첫째가 16세, 둘째가 15세, 막내가 13세, 즉 세 딸이 자랄 만큼 자랐을 때, 에드먼드 씨가 타고 근무하던 열차가 핑거본의 넓은 호수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웅혼하게 달리다 과감하게 호수 안으로 자유낙하를 시도하여 에드먼드 씨는 기어이 실비아를 과부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잠수부가 며칠을 찾았지만 단 한 구의 시신도 건지지 못해, 과부가 된 동네의 여인(들)은 시신 없는 장례를 치룰 수밖에 없었다. 세월이 조금 지나자 맏딸 몰리는 과감하게 개종을 하고나서 선교사들을 따라 태평양을 건너 중국 땅으로 건너가 경리직원 정도의 자리를 잡았고, 둘째 헬렌은 도시로 가 일단 결혼부터 한 다음 딸만 둘을 두니 첫 아이가 화자 ‘나’루스요, 작은 애가 루실이다. 막내 실비 역시 머리 굵어지고 곧바로 도시로 가더니 결혼은 분명히 했는데 아이도 없고, 남편도 없고 그냥 정처 없이 떠도는 여자가 돼버렸다. ‘나’의 엄마 헬렌의 남편(그러니까 ‘나’ 루스와 동생 루실의 친 아버님)은 벌써 가정에서 도망해 새장가 가버리고 이제 도무지 혼자 두 딸을 키우기 벅찬 지경에 몰리니, 친구의 차에 둘을 데리고 핑거본의 엄마(‘나’의 외할머니)한테 찾아와 엄마가 없는 사이에 두 딸을 집에 둔 채로, 전속력으로 차를 몰아 아버지의 영혼이 헤엄치고 있을 거 같은 호수로 돌진해버린다.
 스토리는 여기까지만 하자. 이건 책의 앞부분, 전체의 10분의 1 가량만 읽으면 다 알 수 있는 내용이니까 그냥 전제사항만 일러두었다고 여기시면 된다. 그래서 ‘나’ 루스와 루실은 할머니하고 살게 되고, 할머니가 죽은 다음엔 전 재산을 상속받은 상태에서 할머니의 두 시누이들, ‘나’의 대고모 두 분의 보살핌을 받다가, 자기 엄마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그냥 한 번 편지를 보낸 막내 이모 실비와 함께 살게 된다. 그런데, 잘 읽어보자.
 할머니 살아생전 호수의 영spirit이 소용돌이치며 열차를 빨아들였고, 몇 년 후 거의 같은 장소에서 둘째 딸이 또 호수 속으로 사라졌다고 하는데, 두 경우 다 시신을 발견하지 못했다. 시신은커녕 열차와 자동차도 건져낼 수 없었다. 그럼, 정말 죽은 건가? 호수의 밑바닥엔 아버지와 둘째 딸의 유해가 서로 빈 동공을 바라보며 가라앉아 있을까? 혹시 할머니는 숨이 다 하기 전까지 남편과 딸이 어디선가에서 낡은 옷에 뭍은 먼지를 툭툭 털며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을까, 하고 늘 창가의 소파에 앉아 들녘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던 건 아닐까? 중국으로 가버린 맏이 몰리는 이젠 거의 완전히 남이고, 어느 날 문득 집을 나가 도시의 남자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전한 것을 마지막으로 자신의 인식 망에서 사라져버린 막내 실비. 죽었다는 말은 없지만 정말 살아 있기는 한 것일까. 그리하여 할머니 실비아 포스터 여사께선 전 재산을, 직접 낳은 두 딸을 완전히 배격하고 둘째 딸이 낳은 두 손녀에게 유증해버린다. 직접 만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혈육이 둘 말고는 없었으니까.
 여기에서 독후감을, 누구나가 읽을 수 있는 공간에서 쓴다는 조건 때문에, 그만 둘 수밖에 없다. 몇 십 년 전 손으로 쓰던 독서일기라면 하고 싶은 얘기까지 다 하겠지만, 여기서 한 발만 더 나가도 이 책의 모든 것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인에 공개하는 서재에 독후감을 올리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아름다운 소설이다. 미국 북서부 지방의 자연 경관을 배경으로 여성 3대에 걸친 가족과 가족애에 관한 이야기. 외로움의 피를 이어가는 여인들의 고독과 방랑과 기다림의 안타깝고 애잔한 엘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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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얼마나 천국 같은가
존 치버 지음, 김승욱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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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존 치버라는 이름 자체가 영미 소설의 한 브랜드로 자리한 현대 영문학의 별. 이 정도면 <이 얼마나 천국 같은가>를 쓰고 몇 달 후 생을 마감한 치버에 대한 적절한 헌사가 되지 않을까싶다. 세월이란 참. 150쪽에도 미치지 못하는 짧은 장편소설이지만 스스로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임을 분명하게 알았을 치버는, 자신의 생을 바쳐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쓴다.
 “내가 맨 앞에서 말했듯이, 이것은 비 오는 밤 낡은 집에서 침대에 앉아 읽는 이야기일 뿐이다.” (143쪽)
 아직 거동이 불편하지는 않는 노인 레뮤얼 시어스, 어느 겨울의 일요일 아침, 대단히 실용적인 우호관계를 맺고 있고 심지어 여태 서로 사랑하기까지 하지만 신뢰하는 사이는 아닌 큰 딸에게 전화를 해, 딸의 집 벽장에 있는 스케이트를 들고 100년 만에 꽁꽁 언 비즐리 연못으로 향한다. 소설은 노인이 스케이트를 즐기는 비즐리 연못을, 도시의 쓰레기로 메워 그 위에 참전용사의 집을 건립할 계획인 도시의 시장과 폭력배 집단의 시도를 물리치고 이미 오염된 연못을 정상적인 습지로 보관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모습까지를 그리고 있다. 연못의 보존이란 굵은 줄기를 중심으로 자잘한 등장인물들의 에피소드도 몇 개 첨가되어 읽는 재미를 준다.
 삶을 많이, 그리고 비교적 성공적으로 살아내 이제 부유한 은퇴자의 생을 즐길 수 있는 노인에게, 아직도 여인과 여인의 살에 대한 동경이 넘쳐 아름다운 여인을 유혹하고, 즐기고, 버림받고, 그래서 흐르는 슬픔을 눈물에 담는 시어스. 그는 작가 치버 자신이거나 치버가 상상 속에 스스로 되고 싶었던, 스스로이고 싶었던 한 등장인물로 나는 읽었다. 여전히 삶과 이성을 사랑하고, 아름다운 연못이 급격하게 더러워지면서 연못 속의 생명체가 사라지는 것에 분노하여 자신의 돈을 써 권력과 싸우려하는 것. 치버가 생각하는 노년의 모습이 비단 이 둘 뿐이겠느냐만, 개인으로서의 희망사항으로 사랑을, 사회적 희망으로 환경보전을 꼽아 그의 말대로 “비 오는 밤 낡은 집에서 침대에 앉아 읽는 이야기”로 만들지 않았을까.
 이미 시간은 23시 59분. 콩팥에 암이 생겨 전신에 퍼진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라고는 단 1분밖에 남지 않았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며, 신장부전으로 인한 죽음에선 정상적인 뇌 활동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는 존 치버. 그 역시 사람이기에, 이 책이 자신의 마지막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진정으로는 믿지 않았다고 해도, 커튼콜이 없는 인간으로의 삶이 눈썹만큼 밖에 남지 않은 상태에서 그는, 사람의 사랑과, 내일을 위한 지구환경을 남긴 것이다. 사랑과 환경이란 보편 주제에 대하여 마지막 작품으로 썼다고 해서 내가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그걸 그저 소박한 읽을거리, 이야기 감으로 조근거린 것이, 나로 하여금 기껏 다 읽고 마지막에 헛기침을 하게 만들었다.
 짧은 작품이라서 더 이상의 책 이야기는 바람직하지 않기도 하고, 이쯤에서 그의 ‘이야기’를 접는 것이 또한 그의 겸양에 대한 예의 같기도 하여 짧은 독후감으로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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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
레슬리 마몬 실코 지음, 강자모 옮김 / 동아시아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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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슬리 마몬 실코, 비록 완전한 아메리카 인디언이 아니라 백인의 피가 조금, 사실 그리 적지는 않게 흐르지만, 어려서부터 뉴멕시코의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살아온 작가로 데뷔작 <의식Ceremony>은 아메리카 인디언의 소외와 몰락의 과정을 소설을 통해 그린 작품이다.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원주민 아가씨가 백인의 꾐에 넘어가 아이를 낳으니 이 혼혈 아이는 혈족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아메리카 인디언에게 태생부터 종족의 수치로 받아들여졌다. 이를 알고 있는 어린 엄마는 1920년대, 인디언이라면 오히려 흑인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던 시기에 아이와 함께 살아내기가 너무 힘들었으며,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자신의 몸을 파는 것 말고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얼기설기 바람막이만 세워둔 움집에서 누더기에 갓 낳은 아이를 둘둘 말아 쓰레기장에 버리고 돌아와서는 혼혈 아이, 책의 주인공인 타요를 데리고 뉴멕시코 고향으로 돌아와 언니에게 양육을 부탁하고 떠난다. 엄마의 언니, 타요의 이모는, 이모의 건강하고 운동 잘하고 백인 식 학교공부도 빼어난 자랑스런 아들 록키와 함께 타요를 키우며 록키 대신 인디언 보호구역 내에서 소와 양을 키우는 목축 일을 시키려고 마음을 먹는다. 록키는 백인의 성공 공식과 같은 코스의 가도를 걷도록 배려하고. 근데 뜻대로 되면 그게 세상살이야? 어느 날 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록키와 타요, 그리고 동네의 젊은이란 젊은이들은 모두 군대에 입대해버린다. 록키는 모병관에게 동생 타요와 같은 부대에 배속되는 조건으로 입대하겠다고 타협을 해 그렇게 되는데, 그게 타요로 하여금 최악의 조건이 될 줄은 미처 몰랐겠지. 둘은 필리핀 근처에서 일본군과 싸우는 해병으로 배속되어 치열한 전투 끝에 적군을 한 명도 해치우지 못하고 포로로 잡혀버리고 만다. 그것도 록키가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 백 퍼센트 가까운 습도와 송곳처럼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록키가 누워있는 모포의 양끝을 포로병들이 들고 행군하는 밀림. 일본군의 개머리판이 관자놀이에 와 부딪는 것보다 비와 더위가 더 끔찍하고 지긋지긋한 행군 속에 문득 타요는 일본인의 얼굴 속에서 사랑하는 외삼촌 조사이어의 얼굴을 발견하는 순간 고통 속에서 기어이 록키는 절명해버리고. 전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타요를 비롯한 인디언 참전용사들. 인디언 부족 간엔 백인들의 전쟁에 나가 싸우고 온 것이 별로 자랑할 만하지 않지만 그래도 전쟁 중엔 캘리포니아에서 참전 군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백인 여자들과 하룻밤을 보낼 수 있었고, 백인들이 드나드는 바에서 마음껏 술도 마실 수 있었다. 하지만 거의 유일하게 얻은 것이라고는 극적인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어려서부터 타요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에모가 술에 잔뜩 취해 역시 만취한 타요의 엄마와 백인과의 관계를 모욕하자 인사불성의 상태에서 타요는 깨진 맥주병으로 에모의 배를 쑤시고 LA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백색의 사각형 안에서 서서히 황폐화되는 타요의 정신세계. 필리핀의 한 섬에서 그토록 내린 비를 저주했기 때문에 고향 뉴멕시코의 황량한 벌판에도 6년째 지독한 가뭄에 시달리고 있다는 자책까지. 그리고 왜 조사이어 외삼촌은 다시 보이지 않을까. 수시로 불쑥 나타나는 일본군과 고통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지르는 록키, 빗속에서 환영처럼 보이던 조사이어는 내리는 비처럼 술을 마셔야 다시 모습을 드러낼 뿐. 타요의 정신은 완전하게 황폐화되고, 별로 나아지지 않은 상태로 다시 고향, 길쭉한 메사가 있는 뉴멕시코로 돌아간다. 이게 책의 거의 절반 분량을 차지하는 1부.
 그저 그런 얘기 같지? 그러나 만일 내가 원서를 읽을 수 있는 수준이면 작가가 직접 쓴 그대로의 작품을 읽고 싶은 책. 우리가 간혹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했던 말, 그들의 사상 같은 것을 읽을 기회가 있으면, 그들의 자연과 동물과 한 포기 풀, 한 그루의 나무, 돌멩이, 돌멩이 위를 흐르는 냇물, 냇물소리 돌물돌 물돌물*, 이 모든 자연 정령과 인간의 합일된 모습에 감탄한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책의 작가 마몬 실코의 글도 이 비슷한 정조情調로 참으로 아름다운 문장들을 만들어낸다. 위 문단의 끝 부분에 ‘메사’라는 말이 나오는데 어떤 것을 말하는가 하면, 그로 설명하는 것보다 사진을 하나 보시는 것이 훨씬 좋을 것이다.

 

 

 2부에서 (일종의)주술사 베토니 노인에게 성공적인 치유 의식을 받은 타요가 3부에선 외삼촌이 남긴 소들을 다시 찾아와 메사의 솟은 언덕 사이에 뚫린 굴에 기거하며 키우는 장면이 나온다. 4부는 결론이니 여기서 설명하지 않겠다.
 저 넓은 거친 황야에서 생존할 수 있는 소는 백인들이 외국에서 품종 개량해 들여와 키우는 살집 좋고 다리 짧은 종이 아니라 사슴처럼 가는 다리에 구운 선인장과 나무껍질을 벗겨 먹어가며 생존할 수 있는 토종 소이듯이, 지금 완전하게 약탈당한 아메리카의 모든 비옥하고 깨끗한 물이 넘쳐흐르는 토지는 전적으로 원주민의 것이라는 건 슬프게도 사실이다. 희망이나 비전이 전혀 없는 원주민들, 그중에서도 젊은이들에게 오직 허가된 것이라고는 술과 매춘과 오직 그들 사이에서만 허용되는 끝없는 폭력. 보호지역 안에선 국가가 보호를 해줄 테니 안에서 서로 죽이든 살리든 알아서 하라는 FBI(로 대표하는 미국 정부). 그러나 백인들은 오직 한 군데, 도무지 생명이 살아갈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황무지만을 아메리카의 원래주인인 원주민에게 불하했으며, 모든 자연과 동식물의 생명과 인간성을 약탈당한 원주민들은 알콜과 약물과, 그걸로 다스릴 수 없는 절망과 빈곤 속에서 그나마 목숨을 이어가고 있(었)다.
 작가는 비록 참전 인디언들을 모델로 하긴 했으나 현재까지 유효하며, 모든 인디언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이 처한 소외와 절망과 몰락의 상태에 대한 치유의 의식ceremony이라고, 참으로 아름다운 글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 의성어/의태어 "돌물돌 물돌물"은 서정춘의 시에서 가져왔음. 어떤 시인지는 기억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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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쌀알
민퐁 호 지음, 최재경 옮김 / 달리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1951년 당시 버마 출신의 중국인 민퐁 호. 자라면서 태국과 싱가포르 생활을 했고, 이 책의 무대가 되는 1974년 언저리엔 태국의 특정 대학에서 공부하며 당대 태국 농민들의 생활상과 그들의 권리와 평등을 구현하기 위한 농촌운동에 투신한 적이 있다고, 지라난 쁘라셋쿨이 책의 서문을 통해 밝힌다. 작가가 화교 출신의 동남아시아 인이라는 얘기고, 그러면 보편적으로 국부의 90% 가량을 가진 부르주아 가정의 자제였다는 거다. 실제로 서문을 쓴 쁘라셋쿨과 호가 처음 만난 곳이 1973년~76년 사이에 대학생에 의하여 진행된 농촌활동이었으며, 두 번째 만나서 우의를 더욱 돈독하게 한 것이, 쁘라셋쿨이 1976년 10월 군부 쿠데타 이어 공산당 파르티잔 활동을 하다가 염증을 느껴 전향을 한 다음, 세상살이 다 잊고 미국의 코넬 대학에 공부하러 갔을 때였으니, 솔직히 말해서 책의 저자 민퐁 호나 서문을 쓴 쁘라셋쿨이나 부잣집 따님으로 완전 폭망해도 살아남기만 하면 남은 인생을 여유작작하게 보장해줄 수 있는 ‘유복한 가정’이 등 뒤에 있었던 종족들이다. 이렇게 구름 위의 신전 출신의 인간들이 젊은 한 시절에 농촌활동으로 농촌의 소작인들을 의식화 시킨 것까지는 바람직했지만, 아차, 소작인들은 자신들이 노동을 해서 소작료를 제하고 얻는 나머지 말고는 어디 의지가지가 없던 상태이고,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선 암만해도 깊게 생각하지 못하는 실수를 저질렀을 수 있다. 실제로 서문에서 고백하다시피 태국의 1973년 민주화 성공, 각 계층의 민주화 입법 및 빈민운동, 76년의 반동 쿠데타, 공산당 입당 및 저항운동, 전향, 여기까지는 청년 지식인들의 학생운동 및 사회운동에 대해선 이해할 수 있으나, 공산당 탈당 및 전향에 이어 이들은 다시 농촌으로 돌아가는 대신, 화려한 수사를 동원해 미국 유학을 통한 실력배양을 주장하는 바람에, 오히려 농촌과 지식인들의 간극을 더 벌려놓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한다).
 이런 운동소설의 맹점은, 작년에 독후감을 쓴 <건너간다>의 이인휘, 박노해, 백무산 같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지식인, 아니 먹물들에 의하여 씌어 진다는 점(물론 이인휘, 백무산, 박노해 같은 작가가 지식인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그들이야말로 현장에서 스스로 의식화한 진정한 지식인 그룹이다). 따라서 젊은 지식인이건 이젠 나이 좀 먹어 젊었던 시절을 회상하는 지식인이건 하여간 먹물들의 시각으로 굴절된 작품일 수밖에 없어서, 실제로야 어떻든 간에 결국 인텔리겐치아와 프롤레타리아는 서로 이해 또는 협력의 약속을 하는 것으로 마감하는 작품들이 많다는 안타까운 사실. <아버지의 쌀알> 역시 마찬가지다. 소득의 절반을 지주에게 주고, 나머지 절반만 소작인이 갖는 구조. 이것이 무슨 계약이 아니라 그냥 관습적으로 이루어지기를 몇 백 년이라는데, 땅을 빌려주고 빌려준 대가로 소작료를 받는 일 자체를 두고 그게 착취니 수탈이니 할 수는 없다. 정식으로 계약하지 않고 과다한 소작료를 지불해야 하는 체계가 아쉬운 것이지. 태국의 입법부에서도 이를 직시하고 소작료를 일정 수준(약 33% 정도) 이상으로 정할 수 없다고 법안을 발의 또는 심의 중임에도 굳이 학생 운동가들이 각 지방을 순례하면서 지금까지 절반의 소작료를 내고 있는 것을, 당장 삼분의 일만 내라고 추동한 것이 옳은지 나는 모르겠다. 실제로 “정부가 소작료를 수확한 곡식의 삼분의 일로 줄이는 새로운 법을 통과시킬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150쪽) 농촌운동가이자 책의 남자주인공이자 진짜 주인공 아가씨 진다의 인텔리겐치아 애인 네드가 스스로 말하면서 말이다. 이건 정말 웃긴 일이다. 입법부가 소작료로 책정하고자 하는 것이 33%, 농촌활동에 나선 학생들이 소작인들에게 지주한테 곡식의 삼분의 일만 내라고 하는 거하고 도대체 뭐가 달라? 입법부에서 추진하는 결정 역시 농민들이 자기 손으로 뽑은 대표들이 하는 거 아닌가? 꼭 투쟁을 통해 얻어내야 하는 건가 말이지. 70년대 초중반 태국의 대학에서는 민주주의에 관한 교육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던 거다. 당시 대한민국은, 얘기도 말자.
 문제는 ① 위에서 말했듯이 지금 정부(입법부겠지 행정부가 무슨 근거로 소작료율을 정하는가)가 법안 심의 중이고, 시국이 거의 완전히 민주정치 단계인데 법안이 통과되기까지 고작해야 1년을 기다리지 못해 농촌을 들쑤셔서 기어이 소작료 투쟁을 벌였어야 했으며, ② 소작료 투쟁이 벌어진 숱한 농촌에서 소작료 인하를 주장한 소작인들 다수가 체포에 의한 또는 체포 중 도주과정에서 생명을 잃었다는 것까지 다 아는 상태에서 시도를 해야겠는가 하는 것과, ③ 진짜 소작료 인하를 주장해 실행한 주인공의 아버지는 결국 잡혀가 옥사를 하는데 이제 남은 집안 건사는 남은 딸이 할머니, 동생, 언니, 언니가 갓 낳을 조카까지 전적으로 부담해야 하는 반면 ④ 어느 날 도시에서 무턱대고 찾아와 농촌활동을 시행한 학생들은, 남자 주인공 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별다른 추가적 고통 없이 무난히 학업을 계속한다는 거. 이것들 뭐야? 책에서 민퐁 호는 남자 주인공 네드를 농촌 출신 고아에다가 머리만 무척 똑똑해서 기관 출신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장학금으로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니는 특출난 인물로 설정함으로써 태국 북동부 지역의 소작인의 건강하고 아름다운 딸 진다와 계속적인 정신적(오직 정신적으로만) 유대를 맺게 하는 결말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만일 네드를 진짜 이 책의 작가 민퐁 호와 비슷한 캐릭터로 만들었다면, 운동이 괴멸한 후 결코 두 연인은 다시 만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코넬 대학으로 유학 가는 형식을 취해 집안에서 안전하게 추방해버렸을 테니까. 이 책이 2018년 현재 절판이니 결말 부분도 막 말해버린다. 이렇게 가리지 않고 얘기해버리니 속이 다 시원하다.
 책의 절정을 어디로 볼 것인가는 좀 논의가 필요한데, 그걸 위해서 이 책을 읽어보시라 권할 수는 없고, 그냥 말씀을 드리자면, 1976년 10월의 쿠데타 장면이 나오는데, 책의 헌사 “1976년 10월 6일. 태국 탐마샤트 대학에서 죽음을 당한 사람들에게,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이 책을 바칩니다.”에서 보듯이 어느 나라든 당시 군인들은 무식하기 짝이 없어 탐마샤트 대학에 소작료 투쟁을 위해 모인 전국의 소작인 대표들과 학생들과 학교 근처 소년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해버린 장면일 수도 있고, 한 생명의 죽음과 거의 연달아 찾아온 또 한 생명의 탄생, 푸른 벼 이삭이 누런 벼로 늙어 가면서 쌀알을 만들어내는 생명력의 발현으로 볼 수도 있을 텐데, 1976년 쿠데타 장면이라면 그까짓 것, 1979년의 부마항쟁에 이은 이듬해 광주에서 너무 충분히 익숙한 대한민국 국민한테도 동의를 얻을 수 있겠지만, 나는 역시 생명력의 발현 장면이 책의 절정이라고 봐야 한다는데 한 표를 던진다. 이 장면에서 오해하지 말기. 한 생명이 죽고 이어서 다른 한 생명이 탄생하는 것 모두 다 소작인들이다. 단 한 명의 도시 인텔리겐치아나 부르주아도 개입하지 않는 순수한 소작인들. 심지어 마르크스, 레닌, 모택동의 사진을 벽에 걸어둔 가난한 먹물이자 남자 주인공 네드도 여기에 끼어들 여지가 없다. 오히려 굳이 넣자면 소작인들의 고혈을 빨아먹었던 지주계급의 하수인이자 마름이자 이제 태어날 새로운 소작인의 유전적 아버지인 두싯. 그래, 농촌은 농촌 안에서 알아서 풀어야 하는 거다. 거기서 의도했건 아니건 간에 계급이 섞이기도 하고 역전도 생기고, 서로 싸워 코가 깨지기도 하고 지지고 볶다가 어느 날 자연스럽게 풀려야 하는 것이지 다른 동네 사람들이 엄하게 끼어들어와 감 놔라 대추 놔라, 따따부따해서 잘 되는 꼴을 보지 못했다. 시간차가 좀 날 뿐이지 큰 줄기가 민주화되기만 하면 다른 분야도 비슷한 수준으로 갈 수밖에 없는 거다.
 절판. 구태여 찾아 읽고 나처럼 이거 뭐야, 할 필요 없는 책. 한국인들한테는 전혀 새롭지 않다.
 도대체가 이 책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아버지의 쌀알, 농촌에서 높은 소작료에 쪼들려 생존권을 위협받는 농민, 소작인들을 위한 책인 것처럼 가면을 쓰면서, 정작 책은 “1976년 10월 6일. 태국 탐마샤트 대학에서 죽임을 당한 사람들에게,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바치는 거. 물론 현장에 농민도 있었겠지만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먹물들을 위한 책이기 때문이다. 너무 빼어나 차라리 아름답기까지 한 황석영의 <객지>, 마지막으로 남은 동혁이 다이너마이트를 입에 무는 거하고 비하면 정말 수준 차 난다. 제 삼 세계 국가의 소설이라 특별한 관심으로 읽었다가 염병, 시간만 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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