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호랑이가 온다
피오나 맥팔레인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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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원작은 <The night guest: 밤손님>. 그런데 제목을 <밤, 호랑이가 온다>라고 하니 ‘호랑이’에 대하여, 여기서 ‘호랑이’가 무엇인지 설명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꽉 차오는데, 이놈의 ‘호랑이’의 정체를 밝히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스포일러를 만들어버리는 것이라 어금니 꽉 물고 참을 수밖에.
 일흔다섯 살 자신(잡수신, 드신 : 이것들 다 좋은 단어인데 언어의 인플레이션 때문에 홀대당하는 느낌이다. 한국인에겐 나이도 음식이다. 한 해에 한 살씩 먹는 거) 할머니 루스. 흠. 내 아내가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 자격증이란 게 있다는 뜻이지 그걸로 돈 벌어온다는 뜻은 절대, 절대 아니다. 어쨌든 그래서 아는데, 요즘엔 할아버지, 할머니, 이렇게 부르지 않고 무조건 “어르신”이라고 한단다. 어르신 좋아한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얼마나 좋은 단어냐는 말이지. 나도 좀 있어 완전 늙은이가 되어, 누가 ‘어르신’하고 부르면 별로 기분 좋을 거 같지 않다. 좋은 호칭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이를테면 “형”, “오빠”, 너무 남세스러우면 뭐 “아찌” 정도는 포용할 수 있겠지만 ‘어르신’이 뭐야 어르신이, 쪽팔리게.
 하여간 75세의 노파 루스가 밤에 잠을 자는데, 침실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거 같다. 복도 넘어 거실에서 커다란 짐승의 헐떡임과 숨소리가 들리고, 이게 몸집이 거대한 포유류의 소리 가운데서도 틀림없이 고양잇과 동물의 소리다. 자기가 기르는 세 마리의 고양이는 침실 안 자기 발치에서 고요하게 자고 있으니 이 짐승들이 내는 소리는 아니다. 거실에서 킁킁 거리는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려오자 루스는 분명히 이게 호랑이가 내는 소리라고 단정한다. 동물원에서 탈출을 했든 말레이 반도에서 이곳 오스트레일리아까지 헤엄쳐 왔든 하여간 분명한 호랑이임이 확실하다. 시계를 보니 새벽 네 시. 루스는 전화기를 들고 자동 입력되어 있는 다이얼을 눌러 뉴질랜드에서 살고 있는 첫아들 제프리의 새벽 단잠을 깨우고 만다.
 루스는 선교사이자 의사인 아버지와 훌륭한 간호사이기도 했던 어머니와 함께 열아홉 살이 될 때까지 가난한 섬나라 영국령 피지 왕국에서 살다가, 영국여왕이 피지를 방문했던 1952년의 (당연히 백인들만 초대받은)무도회에서 젊은 의사 리처드 포터(우연히 우리가 아는 해리 포터의 아빠와 이름이 같다)와 난생 처음으로 키스를 했고, 그와 같은 배를 타고 피지를 떠나 호주로 오던 배에서 리처드에게 약혼자가 있으며, 여태까지 사실을 숨긴 이유는 2차 대전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의 약혼녀가 일본인 과부라는 것을 밝히기 힘들었다는 고백을 듣는다. 그리하여 배에서 내리자마자 헤어진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삶을 살아 루스는 사무 변호사 해리 필드와 결혼해 아들만 내리 둘을 낳고 잘 살았다. 첫째가 앞에서 말한 제프리. 처가가 있는 뉴질랜드에서 만족스런 삶을 살고 있으며 아들 딸 쑥쑥 낳고 행복한 편이다. 둘째는 둘째답게 매사에 낙천적인 필립. 얜 홍콩에서 영어 강사하면서 역시 결혼해 아이들 낳고 즐겁게 잘 살고 있다. 이 정도면 자식농사 대빵이다. 다만 한 가지, 남편 해리. 평생 사무 변호사로 열심히 일만 하던 그는 애초부터 늙어 은퇴하면 바닷가에 집을 짓고 살겠다는 소박한 꿈을 꾸어온 인물. 그리하여 젊어서부터 지금 루스가 사는 집을 사놓고 주택구입 대출금을 갚느라고 죽을 똥을 쌌으며, 결과 한때는 심각한 변비에 시달리기도 했는데(구라다, 구라. 내가 지은 허튼 구라), 대출금을 다 갚고 난 다음부터 여름별장으로 사용하다가 은퇴를 하고는 정말로 거주지 자체를 바닷가 여름별장으로 옮기고 여태 살던 시드니 집을 팔아버렸다.
 자,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노부부가 정원을 가꾸며 남은 생을 여유롭게 지내던 언덕 위의 바닷가 집은, 사구砂丘 지역이 언제나 그렇듯이 끊임없이 불어오는 모래바람 때문에 하루라도 돌봄의 손길이 없으면 순식간에 황폐화되는 아주 취약한(그러나 아름답고 경치도 좋고, 심지어 계절이 바뀔 때마다 거실에서 거대한 향유고래의 울음소리와 이동하는 모습과 물을 뿜는 광경을 볼 수도 있는) 집이란 거. 게다가, 주택구입 대출금을 몽땅 갚은 상태에서 땅값 비싼 시드니의 집을 팔았으니 해리/루스 필드 부부의 저금통장엔 무지막지하게 많은 돈이 숨 막혀 하고 있다는 거. 그것도 현금으로. 이해가시지?
 이만하면 괜찮은 인생 산 루스. 근데, 어쨌든 남자 먼저 가는 게 거의 대부분이긴 하지만, 남은 인생 이제 바닷가 집에서 여유를 즐기려고 하는 찰라, 시아버지의 모범을 따라 매일 오전에 근처 시내까지 걸어가 신문을 사오던 남편 해리가, 어느 날 아침, 열라 걷던 도중에 그만 심근경색이 왔는지 길가에서 가슴을 부여안고 죽어버렸다. 남편한테는 안 된 이야기지만, 루스야말로 정말 하늘의 복을 타고난 여자. 누구 하나 도와줄 사람 없는 해안가 벽촌에서 남편 병수발 하루도 안 하고 순간에 보낼 수 있는 복이 아무한테나 오늘 줄 알아? 그래, 그래. 그래도 남편 죽은 것이 좋은 일은 아니지만 하여간 병구완 안 하게 해준 서방님이 얼마나 고마운가 말이다. 이런 ‘냉정한 행운’을 알려준 사람이 누군가하면, 일흔다섯 살 먹어 이젠 거동이 불편해진 루스를 하루에 한 시간씩 도와주라고 정부에서 보냈다고 주장하는 ‘프리다’라는 이름의 요양보호사. 프리다가 보기엔 루스의 상태가 절대로 좋은 수준이 아니고, 게다가 안 좋아지는 속도가 심각하게 빨리 진행되고 있어서 정부의 허가를 받아 네 시간으로 늘리기에 이른다. 프리다에게 오빠가 있어 개인택시를 운전하는데, 어머니가 물려준 집(건물)이 도시에 있어서 루스와 합의 하에, 도시에서 바닷가 집으로 왔다 갔다 하느니, 도시에 있는 자기 방은 세를 주고 루스의 집에 있는 빈 방에서 살기로 정해, 이젠 늘 두 여인이 함께 살게 된다.
 프리다의 헌신적인 봉사에 두 사람은 더할 나위 없이 가까워지고, 마치 친 자식 또는 조카 비슷한 정도 들어(아, 그놈의 염병할 정情. 일찍이 심수봉이 노래했다. 사랑보다 더 드런 것이 정이라고) 이젠 둘이 떨어져 사는 건 생각도 하기 힘든 지경에까지 이른다. 루스의 회상 속에 잘 생긴 한 남자가 밀려들어오니 바로 첫사랑 리처드 포터. 루스는 과감하게, 이젠 홀아비가 된 리처드를 해안가 집으로 초대를 하고, 리처드 역시 겸손하게 초대에 응해 둘은 무려 오십 년 만에 상봉하는데, 어떻게 되냐고? 리처드의 나이 벌써 여든 살. 여든 살의 남자 노인과 일흔다섯 살의 여자 노인이 가능한 수준에서 모든 걸 다 한다. 여기까지만 이야기하겠다. 궁금하시지?
 이 책의 스토리에 관해 더 이야기하면 정말로 책 사서 읽으실 분은 김이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기서 말면 진짜 중요한 이야기는 전혀 건드리지 못하고 글을 마치는 셈이다. 하지만 용기를 내서 독후감을 망치는 한이 있더라도 더 이상의 스포일러는 보여드리지 않겠다.
 그냥 늙은이들의 사는 모습이려니,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아니다. (아, 확 이야기해버리고 싶은 걸 억지로 참고 있다.) 일흔다섯 살의 노파의 눈으로 쓴 소설. 이런 작품도 별로 없었거니와, 있더라도 책의 주인공 ‘루스’ 같은 독특한, 그러나 너도 나도 가능하여 충분하게 개연성이 있는 주인공의 시각으로 쓴 책은 처음이다. 그리하여 내 경우엔 책을 열고 중간에 쉴 틈 없이 책에 몰입해갔다. 도무지 중간에 손에서 뗄 수가 없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궁금함.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지경에 대해 한 걸음쯤 물러서서 작가 시점으로 서술한 시선. 팔팔한 청춘이라서 자신의 젊음은 결코 떨어져나갈 것 같지 않은 독자에겐 흥미를 주지 않을 수도 있으나 삶을 살 만큼은 살아내, 이젠 인생의 석양을 생각할 정도면 심각한 호기심과 관심으로 흠뻑 몰입하여 정말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다만 힌트를 드리자면, 역자해설에서 이 책을 ‘심리 스릴러물’이라는 얘기도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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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아 2018-04-05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생의 석양‘에 이른자들에게 추천하시니 저도 일독해보겠습니다.
재미를 끌어내는 글이세요. 잘보고 갑니다~

Falstaff 2018-04-05 12:39   좋아요 0 | URL
윽, 필리아figlia는 이태리 말로 ˝딸˝이란 뜻으로 알고 있는데, 인생의 석양이라시니 재미있고 놀랬습니다.
흥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책의 진짜 알맹이는 독후감엔 하나도 써놓지 않았습니다. 직접 읽으실 분을 위해서요. 즐겁게 책 읽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정크 청춘 3부작
김혜나 지음 / 민음사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흠. 김혜나의 데뷔작이자 ‘올해의 작가상’ 수상작인 <제리>를 나름대로 재미있게 읽어서 기대에 차 다음 작품 <정크>를 읽었다. 김혜나. 요즘 핫한 소위 82년생 개띠다. <정크>가 세상에 나온 해는 2012년. 작가의 나이 서른 살 때. 나름대로 세상 살면서 겪을 거 다 겪었다고 생각하기 쉬운 나이다.
 <제리>가 22세에서 24세 가량의, 인천 소재 2년제 야간대학에 재학하는 여학생들의 방황과 절망 등을 세미 포르노 수준의 성애장면을 통해 절절하게 호소했는데, 여학생들 가운데 하나가 나이 먹어 스물일곱 살이 되고, 성을 여성에서 남성으로 바꿔 <정크>의 주인공 ‘성재’가 된 느낌이다. 학생시절의 루저가 드디어 졸업을 하고 (물론 소설 <정크>의 성재는 조금 다른 길을 걷기는 했지만)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꿈을 꾸는 동성애자로 변신했다. <제리>에서 테마를 이끌고 가는 힘이 함부로 저질러버리는 섹스였다면, <정크>에선 남성 간 동성애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낮은 수준의)마약류라고 하겠는데, 이젠 아쉽게도 완벽한 성인으로 편입한 성재의 방황과 실패들과 절망과 태생에 관한 고뇌는, 짜증이 날 정도로 징징거리기만 한다. 간략하게 얘기해서 김혜나가 데뷔작에서 보여준 젊은이의 깊은 절망과 별로 차별점이 없다는 거. 왜 (김혜나의)젊음은 (징글징글하게)징징거리기만 할까.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그냥 쿨하게 사는 청춘들은 정말 없는 걸까. 찰스 부코스키의 작품 속에 나오는 행크 치나스키의 한국판은 언제나 볼 수 있을까.
 만일 순서를 거꾸로 읽었다면 <제리>에 대해 징징거린다는 감상을 적었을지 모르겠다. 아니다. 아닐 거 같다. <정크>를 먼저 읽었다면 아마도 <제리>를 읽을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하다. <제리>와 달리 작가가 인물의 행위와 사고에 너무 깊숙이 간섭하는 듯. 하지만 이건 전적으로 아마추어 독자인 내 생각일 뿐임을 밝힌다. 하여간 난 주인공 성재가 처음부터 끝까지 징징거리다가 난데없이 화해하는 (누구와? 절대 안 가르쳐드림) 장면에 질려버리고 말았다. 김혜나. 안녕. 나도 (김혜나가 자기 책에 제목 달 듯) 외래어로 하면, ‘아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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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식 전쟁술
알렉시 제니 지음, 유치정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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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책 좋아한다. 글씨가 빽빽하게 들어찬 두꺼운 장편소설. 이건 하드웨어 적인 선호랄 수 있고, 내용 면으로도 전쟁에 대한 반대선언과 집단주의와 파시즘에 날선 비판을 날리는 작품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무려 800쪽. 문학과지성사가 한 권으로 찍었다. 가격이 조금 비싸서 정가 23,000원. 10% 할인해도 2만원을 넘긴다. 페이지마다 글씨가 조밀하여 순수 독서시간이 대략 스물일곱 시간가량 걸렸음에도 단 한 페이지도 함부로 넘길 수 없는 진지한 전개가 마음에 들었다. 물론 한 문장, 또는 한 문단을 여러 번 읽어야 하는 경우도 다른 책에 비해 월등하게 많았다.
 전형적인 룸펜 ‘나’. 세상에 중요한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 그냥 하루하루를 허비해가며 루저의 삶에 익숙해지고 있는 인간. 불성실하게 다니던 회사에서 ‘당연한 해고’를 당한 후, 아침마다 광고지가 가득 든 수레를 끌며 집집마다 딱 한 부씩 던져 넣어야 하는 일자리를 얻었다. 일과가 끝나는 늦은 오전에 동네 술집에 들러 화이트와인 한 잔을 마시는 걸 낙으로 사는 인생도 조금 따분하지만 못 살 정도는 아니다. 아무렴. 세상살이 마음만 바꾸면 그냥저냥 살 만한 거니까. 근데 비교적 손님이 많은 이 술집에 마른 몸집의 노인 한 명이 두터운 신문을 테이블 가득 펼쳐놓고 꼼꼼히 읽고 있는데 단골손님들은 오히려 이 노인 빅토리앵 살라뇽에게 일종의 경외를 느끼며 두 개의 테이블을 오랫동안 점령한 채 신문을 읽는 걸 당연하게, 또는 마땅하게 여긴다. 그가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전한 노병이란 사실 하나로.
 벼룩시장 비슷한 것이 열려 시간도 때울 겸 빈둥거리는 ‘나’. 평소에 그림 그리기에 관심이 있어 주로 그림을 팔려고 나온 아마추어 화가들의 작품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오전 술집의 바로 그 노인을 만나,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나’는 빅토리앵 살라뇽의 집에 초대받아 그의 아내, 아름다운 노파인 에우리디케 칼로아니스를 소개받고, 살라뇽이 자신의 회고록을 쓰려고 준비 중이지만 도무지 어떻게 써야 하는지 맥을 잡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가 쓴 초고를 ‘나’가 다시 쓴 것이 이 작품의 ‘소설’편이다. 살라뇽의 일대기, 그것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항독시민군 활동, 인도차이나 전쟁, 그리고 알제리 전쟁을 중심으로 서술해놓았다.
 현재의 ‘나’의 행적과, 노인 살라뇽, 그의 전쟁광 친구 마리아니 등 작품의 현재시점에 관한 것이 ‘주석’편. ‘주석’편으로 통해 ‘나’가 해고를 당하고, 어리석은 행동을 해 애인과 이별을 하고, 살라뇽(과 그의 친구들)을 만나고, 1991년 이라크 전쟁을 통해 거대국가가 제삼세계 국가의 체제와 국민들을 어떤 방식으로 학살을 자행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드골로 대표하는 영웅주의와 폭력주의에 반대한다. 책은 이렇게 주석-소설-주석-소설……주석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장 브륄레르’라는 프랑스 소설가가 있다. 그건 본명이고 소설은 필명 ‘베르코르’로 발표하며, 레지스탕스 문학의 대표주자로 손꼽힌다고 한다. 대표작이 열린책들에서 찍은 <바다의 침묵>이란 단편집. 몇 년 전에 이 책을 읽었다. 그걸 읽고 난 이렇게 독후감을 썼다.


“솔직하게 이야기할 시간이다.
 프랑스 사람들. 그들도 다른 민족한테 영토가 유린당하고 나서 수치스러워하고 비통해하고 저항하고자 하는구나. 난 전혀 몰랐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지.
 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식민지를 개척한 나라들 제일 앞자리에 프랑스가 있지 않는가. 자기들이 그들의 영토를 빼앗고 생산품과 자원을 약탈할 때, 식민지에서도 나치 치하의 파리 사람들처럼 그렇게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던 건 몰랐겠지 뭐. 그까짓 5년 동안 나치 치하에 있었으면서 무슨 죽는 소릴 그렇게 해댈까. 당신들이 문명인이고 아랍과 동남아시아가 미개인들의 집단이어서? 웃기지 마. 그들이 어떻게 살(았)던 간섭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어. 나치도 당신들하고 비슷하게 세계에 ‘질서’를 제대로 잡는다는 핑계로 전쟁을 일으켰잖아.“


 나는 아직도 위에 쓴 것과 똑같이 생각한다.
 나치 치하에서 프랑스 사람들은 그들의 주특기인 “복종” 또는 “순응”을 하며 시간을 버텨냈다. 알렉시 제니가 직접 이렇게 얘기했다. 다만 그 가운데 예외적인 인간들이 항독시민군 활동을 한 것이고, 사실 이렇게 권력과 절대적 무력을 갖춘 지배자에게 찍소리 못하고 설설 기는 건 세계 공통이다. 프랑스 사람만 유별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독립운동에 가담한 사람들의 숫자는 천명 가운데 하나나 될까 하는 수준 아니었는가. 그래서 공포정치는 일정 기간 동안 체제 유지를 위해 아주 훌륭한 방법일 수 있다. 다만 오래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지.
 압도적 무력을 갖고 있는 독일이 레지스탕스들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선량한 프랑스 사람들에게 악행을 했던 건 분명하다. 레지스탕스가 독일 병사를 살해하면 열 배에 달하는 프랑스 시민을 죽임으로 복수하는 동시에 항독군의 활동을 위축시킨 것도 일면 그럴 듯하다. 당연히 점령군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는 뜻.
 그러면 프랑스는 어땠을까. 그들의 점령지에서.
 “핏빛 정원”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군과 외인부대는 ‘호 아저씨’를 중심으로 하는 베트남 독립운동 세력을 저지하면서 세상 어느 나라 군대보다 전혀 못하지 않게 만행을 자행한다. 한 마을을 불사르고, 처형하고, 고문한다. 책에선 1대 10 정도라고 주장하지만 천만의 말씀. 내가 알기로 1대 100 이상. 당연히 알제리에서도 마찬가지다. 드디어 자유, 평등, 박애? 그건 그들만의 리그. 갈리아 인들에게 한정하고, 조금 더 넓게 생각하면 백인들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다. 제니의 소설 속 극우파 인물 마리아니가 그렇게 말한다. 유색인종이 불심검문을 당할 확률은 백인보다 4배 높고, 아랍인이 검문을 당할 확률은 유색인종보다 두 배가 높은 거. 이게 프랑스 식 자유, 평등, 박애다.
 내가 이렇게 얘기하면 나 특유의 반 유럽 정서 어쩌구 하겠지만, 이건 작가 알렉시 제니가 자기 책에서 주장한 걸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문화대국 프랑스가 제삼세계 국가들에서 선택한 그들만의 전쟁술.
 1991년 미국에 의하여 저질러진 “사막의 폭풍” 전쟁. 난 아직도 기억한다. 미국이 제작하고 운전하는 정밀기계에 의하여 벌어지고 있던 대량 살상극을 나는 출장지에서 TV를 통해 보고 있었다. 역사 이래 최초로 지구상의 많은 인간종들이 자신과 같은 종의 개체가 한꺼번에 학살당하고 있는 걸 인공위성과 TV 수상기를 통해 실시간으로 보고 있던 것이었다. 목표로 했던 한 건물에 초록 색깔의 화염이 잠깐 밝혀지던 순간, 건물 속에 있던 이라크 사람들은 순식간에 온몸이 화르륵 타버려 그들이 세상에 한 때는 존재했다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증발해버렸다. 말 그대로 증발. 바로 그 장면을 TV를 통해 보던 지구인들은 ‘기계’에 의하여 ‘인간’의 목숨이 사라진 비극을 비극으로 체험하지도 못하는 의식의 궤멸 상태에 빠졌던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책에 의하면 그에 반하여 미국 병사들 가운데서도 전사를 해 전쟁영웅의 칭호를 받은 소수가 있었다고 하며, 그들 대부분은 전투 중 사망자가 아닌 사고사를 당한 군인들이었으며 정확한 숫자와 이름을 밝힐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라크 군인과 민간인은 누가, 몇 명이나 죽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고, 관련한 사실에 대한 아무런 증빙도 없단다. 이게 현대의 전쟁이다. (강대국이 설계하고 만든)기계가 (제삼세계 군인을 포함한)사람을 차별 없이 사망에 이르게 하고, (오직 약소국만의)국토를 파괴하는 것.
 작가가 프랑스 사람이라 제목을 <프랑스식 전쟁술>이라고 했지만 프랑스 말고 다른 어느 국가의 이름을 대체해도 전혀 다르지 않다. 하다못해 대한민국을 그 자리에 올려놔도 마찬가지다. 베트남에서 베트남 민간인을 용감무쌍하게 학살한 우리의 삼촌들 이야기를 얼마나 숱하게 들었던가. 힘 센 인간이 다른 약한 인간 종을 대하는 야만적 방식은 어디나, 누구나 다 같다.


 작가 알렉시 제니는 리옹 출신으로 (책의 무대도 리옹이다.) 고등학교 생물교사였다가 처음 소설을 쓴 것이 바로 이 <프랑스식 전쟁술>인데, 데뷔작으로 2011년 콩쿠르 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이 책은 2018년에 읽은 기념할만한 작품으로 꼽을 정도로 대작이고, 적어도 걸작의 수준까지 띄워주고 싶다. 다양한 논점을 제기해 읽기 쉽지는 않지만 깊이 있는 독서를 하고 싶은 분들께 강력 추천할 수 있는 양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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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4-02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에 사서 읽기 시작했는데...
마무리를 못 지었네요.

대작이라고 하시니 올해 다시 도전을
해봐야겠습니다.

Falstaff 2018-04-02 12:56   좋아요 0 | URL
예.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재미도 웬만큼 있고, 하여간 오랜만에 읽는 클래식 급이더라고요.
 
여름의 끝
윌리엄 트레버 지음, 민은영 옮김 / 한겨레출판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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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초 트레버가 쓴 <루시 골트 이야기>를 참 좋게 읽고 그 길로 이이의 다른 책을 검색해서 골라 읽은 책. <루시 골트 ……>와 마찬가지로 잉글랜드 계 아일랜드 사람 이야기인 것처럼 시작하지만 <여름의 끝>에선 출신이나 인종 같은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오직 하나, 사랑. 그것도 불륜. 특히 유부녀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불륜만큼 사람을 확 끌어당기는 소재는 없다고, 이미 고인이 된 우리나라의 유장한 작가 박완서가 어느 수필에서 말했다. 그러나 불륜이라는 말초적, 감각적 소재보다는, 작품을 만들어가는 윌리엄 트레버, 이이가 <여름의 끝>을 쓴 시기가 무려 여든한 살 때인데, 그의 손끝에서 만들어가는 감정적 이끌림, 그리하여 (언제나 조금쯤은 지저분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불륜 사건에 대해서도)공감에까지 이르게 만드는 문장의 힘을 절절하게 느끼는 기회가 됐다. 책을 읽다가 중간 쯤 됐을 때,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이렇게 달관한 듯한 마음으로 인간의 마음을 쓸쓸하게 만들 수 있을까 싶어서 구글 검색을 해봤다.

 

 

<루시 골트 이야기>의 독후감을 다시 읽어보니까, 마지막에 이렇게 감상을 써놓았다.
 “쓸쓸한 그림자”
 <여름의 끝>을 읽고 PC를 연 다음 독후감을 쓰기 위해 화면을 띄웠는데, 막막해서, 도무지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써 나가야 할지 정말 막막해서, 전에 윌리엄 트레버는 어땠을까 뒤져봤더니, “쓸쓸한 그림자”라고 씌어있는 거였다. 이 책도 정말 쓸쓸하다. 이때 까지 이 작품이 트레버가 여든한 살에 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미 몸과 마음이 바싹 마른 건조한 노인의 가슴에 아직도 이런 아름답게 황량하고 누추하고, 낡은 듯한 쓸쓸함의 바람이 불 수 있다는 건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내가 그 나이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젊은이들에 관해서는 하나도 궁금하지 않다. 그들의 고뇌와 방황과 철학과 영혼의 흔들림 같은 거, 전혀 궁금하지 않고 그립지도 않다. 심지어 다시 젊은 시절로, 나는 죽어도 돌아가지 않겠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가끔 놀라게 되는 건 노인들의 심성 속에 있는 희로애락 속에, 온갖 추태를 포함해서, 특정한 노인들에게 발견할 수 있는 지혜와 추억과 되새김의 힘이다. 290쪽이면 길지도, 그렇다고 그리 짧지도 않은 평범한 장편소설인데, 트레버가 독자를 장악하는 힘은 상상을 초월하여 예닐곱 시간이면 앉은 자리에서 한 번에 끝장을 보게 만든다.
 아주 간단한 스토리. 어려서 수녀원 돌계단 위에 버려진 아이 엘리가 나이가 차서, 자신의 실수로 아내와 어린 아들을 트랙터로 치어 죽여 한없이 가슴 아파 하는 딜러핸 씨네 하녀로 들어갔다가 점점 자라 자연스럽게 둘이 결혼을 한다. 그리 멀지 않은 호숫가에 이미 쇠락할 대로 쇠락해버린 저택에서 살던 플로리언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부채와 소송을 청산하기 위해 집을 내놓은 상태인데 어찌저찌해서 엘리와 연인관계가 되고, 아일랜드에서는 더 이상 기댈 곳도, 믿을 곳도 없어 일찍이 스칸디나비아로 떠날 예정인 플로리언은 결국 여름이 끝날 때 이별을 하고 마는 내용이 다다(물론 다는 아니다. 근데 이렇게만 알고 계시라).
 뻔한 이야기를 독자로 하여금 안타깝고, 애가 끓는 절절한 동감으로 읽게 만드는 작가의 힘이라니. 읽는 내내 가슴이 보이지 않는 손톱에 의하여 할퀴어지는 것 같은 서늘한 안타까움. 참 좋은 책 읽었다.


 

 

 * 검색해보니 트레버의 진가는 장편보다 단편 작품에 있다고 한다. 나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그의 단편집 한 권을 선택했다. 올해 9월이나 10월쯤 읽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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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아송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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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보시라. 풍아송. 風雅頌. 아, 얼마나 아름다운 단어들인가. 난 제목 보고 이렇게 간판을 다는 작가가 쓴 책이라면 틀림없이 대박일 것이라고, 사람의 마음을 저리게 할 아름다운 스토리를 담은 숨겨진 명작일지도 모른다고 벌컥벌컥 김칫국을 들이켰다. 바람 풍風, 맑을 아雅, 칭송할 송頌.
 나 어려서 책장에 4서가 있었다. 논어, 맹자, 주역, 대학. 그리고 3경도 있었다. 시경, 서경, 역경. 당연히 두 개 더 포함해 5경도 있었다. 예기, 춘추. 문제는 너무 어려서 그냥 그런 책이 있었다는 것이지 읽어볼 엄두도 내지 못했던 거다. 그러니 제목 보고 아무 생각 없이 아름다운 얘기니 뭐니 할 수 있었다. 풍, 아, 송이란 각각 시경을 구성하고 있는 편들인데, 풍은 남녀 간의 정과 이별에 관한 노래, 아는 공식 연회에서 쓰는 의식가儀式歌, 송은 종묘 제사에 쓰는 악시樂詩, 라고 두산 백과사전에 나와 있다. 물론 송이 악시를 얘기한다고 두음법칙이 적용된 즐거울 락樂을 감안해 ‘즐거운 시’라고 번역하면 큰 잘못임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듯.
 소설 <풍아송>은 중국의 고전문학을 전공하는 양커 부교수를 주인공으로, 이이가 바로 <시경>의 해석과 번역을 일생의 업으로 삼아 연구실에 틀어박혀 오랫동안 ‘맹렬정진’하여 <시경>에 관한 한 득도의 경지에 오른 권위자인데, 드디어 오랜 연구를 끝내고 벽돌 세 장 분량의 불세출의 저작 《풍아지송風雅之頌―<시경> 정신의 근원에 관한 연구》의 마지막 구두점을 찍고 그간의 노고에 대하여 아름다운 아내의 따뜻한 살이란 (힘들게 공부한 남편으로서 어쩌면 당연한) 어리광적 기대를 품고 냅다 교수 사옥으로 달려가 서슴지 않고 열쇠를 돌려 문을 열어 현관에 들어가 보니, 어라, 거실 소파 위를 한 무더기의 남자 옷과 여자 옷이 뒤섞여 어지럽게 점령하고 있었고, 아내 자오루핑의 눈부시게 희고 통통한 몸뚱이 위에 장작개비처럼 비쩍 마른데다 피부도 거무튀튀한 리광즈, 자기가 부교수로 근무하는 중국 최고 명문대학 칭옌淸燕대학 부총장이 포개져 있었던 거다. 이렇게 해서 600쪽에 달하는 긴 장편소설은 시작한다. 리광즈 부총장이 업무상 위계로 양커의 아름다운 아내 자오루핑을 성폭행 했다면 그나마 괜찮을 텐데, 남달리 야망에 불타는 자오루핑은, 남편은 아직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지만, 앞으로의 자기 경력과 꿈을 이루기 위해 리광즈의 권력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 그러니까 주고받은 거다. 하지만 막상 자기 아내가 나보다 돈도 많고 높은 지위를 향유하고 있지만, 못생기고, 늙었고, 침대 위 스테미너도 형편없을 것 같은 허접스런 작자와 바로 내 침대 위에서 숨이 넘어가는 콧소리를 내는 라이브 쇼를 직접 자기 눈으로 본 젊고 튼튼하고, 싸움도 잘하는 양커. 일단 뒤로 돈다. 그리고 고개를 약간 돌려 “먼저 옷 좀 입으시오.”라고 주문하고 문 밖으로 나가 잠시 시간을 준다. 옷을 다 입었을 즈음해서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간 양커. 그는 눈앞에서 자기 아내와 정을 통한 학교 최고의 권력자, 그러나 이젠 약점을 단단히 틀어쥐게 된 부총장 리광즈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식인으로서의 명예를 걸고 말하건대 첫째,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십시오. 둘째,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말아주십시오. 셋째, 무릎을 꿇고 간청하건대 제발 다음부터는 이런 짓을 하지 말아주십시오.”
 정말로 아주 힘차게, 마치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쓰러져 산 전체를 정복하려는 것처럼 무릎을 꿇고 리광즈 부총장의 얼굴을 올려다보면서.
 왜 책을 읽으면서 싱클레어 루이스가 쓴 재미있는 책 <배빗>이 생각났을까. 당연히 공통점이 있어서다. 배빗이나 양커, 둘 다 ‘속물’이기 때문. ‘속물’은 사실 좋게 표현하는 것이고 속물 아주 가까이, 손톱으로 그은 금 넘어 바로 저 편에 어떤 작자가 있느냐 하면 ‘잡놈’ 혹은 ‘잡년’이 있다. 작가 옌렌커가 ‘경성’ 또는 ‘황성’이라고 표시했으나 틀림없이 베이징일 도시에서 만나는 거의 모든 인간들은 빠짐없이 ‘속물’, 한 걸음 더 나가 ‘잡놈’과 ‘잡년’이며, 초장부터 양커의 아내 자오루핑과 리광즈를 잡놈과 잡년의 대표선수로 소개해마지않는다. 여기까지 양커는 그냥 속물 정도. 오직 하나, 자신이 중국 최고의 명문대학인 칭옌대학에 20년간 몸을 담았고 그 가운데 10년 동안은 부교수로 학부생과 석사, 박사 과정자들을 가르쳐왔으며, 희대의 저작이 될 《풍아지송風雅之頌―<시경> 정신의 근원에 관한 연구》를 탈고한 세계 최고의 <시경> 전문가인 지극한 지식인이란 허위의식에 완벽하게 몸과 마음이 절어 있는 인간으로 설정했다.
 그러나 양커로 말씀드리자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삼수 끝에 드디어 중원의 바러우산맥을 둘러싼 지역 모두에서 최초로 대학에 입학한, 그것도 최고 명문인 칭옌 대학에 입학한, 개천에서 난 용의 자격으로 드디어 황성으로 떠날 시기에, 이 양 부교수는 약혼상태였던 것이다. 약혼녀 링쩐의 가무잡잡한 얼굴은 전적으로 햇볕에 타서 검어진 것이란 건 들판에서 링쩐이 블라우스 단추를 풀고 옷자락을 양 손으로 활짝 벌려 커다랗고 붉은 브래지어로 감싼 토플리스를 연출했을 때 알았는데, 옷에 가려진 피부는 “아주 희고 섬세하며 비단처럼 발그레”한 정도를 넘어 “한백옥의 표면처럼 부드럽고 아름다운 광채가” 날 정도였던 거다. 둘 다 벽촌에서 살았다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을 양커가 칭옌대학의 학생으로 베이징에서 살게 된다는 건 일자무식의 약혼녀, 공중화장실에서 남男과 여女를 구분하지 못해 약혼자가 저기서 보고 있는데도 남자 화장실에 들어가 망신을 당하는 링쩐에겐 자신의 순정 위에 날벼락이 떨어졌을 것이었다. 실제로 경성으로 떠나는 전날 밤, 둘은 여인숙에 방 둘을 얻어, 당연히 양커가 약혼녀 링쩐의 방에 들게 되지만 링쩐은 한 마디 한 마디 우렁찬 구절로 또박또박하게 힘주어 다음과 같이 말했던 거였다.
 “양커 오빠, 솔직히 말해봐요. 나랑 결혼할 건가요? 결혼하고 나서 이혼할 수도 있잖아요. 날 아내로 맞아 변심하지 않고 평생 함께 살겠다는 한마디만 해주면 오늘밤 내 몸을 오빠에게 줄게요. 내가 가진 모든 걸 하나도 남김없이 다 줄게요.”
 양커는, 그냥 잤다.
 대학에서 모종의 사건에 연루되어 대학의 권력자들의 보신을 위해 대표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탈출에 성공해 고향으로 돌아간 양커는, 동네뿐만 아니라 현 단위에서 유일한 대학교수로의 위치를 향유하게 되는데, 여기서 자신도 모르게 속물의 경계를 넘어 잡놈의 세상으로 들어간다. 다른 사람의 감상은 모르겠고, 내 생각에 양커 역시 자신이 갑의 자리, 지역 최고의 지식인이라는 허위의식뿐이지만 그것도 권력이라고 갑의 위치에 놓이자마자 자신의 생각엔 정당하고 지식인다운 행위라 여길지 모르겠으나, 독자의 눈엔 기꺼이 잡놈의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어떤 행위를 보고 잡놈 운운하느냐 하면, 직접 읽어보시라 할밖에. 그의 온갖 기괴한 행위와 한 여인에 대한 철저한 갑질을.
 그런데 이 단계에서 묘한 건, 양커가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인물이란 거. 작가 옌렌커가 의도했는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어째 자꾸 독자로 하여금 주인공 양커의 정신이 맑지는 않지만 그래도 상당히 정상적인 수준으로 보아달라고 조르는 거 같은데, 나는 도무지 그렇게 읽히지 않는다. 역시 대뇌의 특정부분에 모종의 이상적異常的인 화학작용이 자주 발생하는 거 같다. 이거까지 말하면 정말 안 되는데, 어떻게 할까. 얘기를 할까 말까. 좋다. 이 독후감을 보시고 그래도 책에 관심이 있는 분은 독후감 읽은 다음에 한 석 달 열흘 지난 다음에 책을 읽으시라는 조언과 함께라면 그나마 좀 낫겠다,는 전제로 얘기한다.
 잘 나가다가, 삼천포는 아니고 유토피아, 또는 율도국을 발견한 양커. 거기서 족장 노릇을 좀 하다가 또 다른 유토피아를 향해 떠나는 마지막 장면. 소위 말하는 열린 결말을 독자에게 선물한 거까진 좋았지만 조금만 더 헷갈리게 해줬으면 더 좋았을 것을.
 하여간, 풍아송風雅頌. 이 멋진 제목만 가지고 섣불리 선택했다가는 불륜, 매매춘, 살인 등등을 구경할 것이니, 그렇게 생각하신 분은, 아직 독서 전이라면 이 독후감을 먼저 읽은 것이 조금은 다행일 수 있을 터. (이 맛에 독후감 쓰고, 그걸 서재에 올린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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