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람보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김계선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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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번째 읽은 플로베르. 당연히 <보바리 부인>을 제일 먼저.  이어서 <성 앙투안느의 유혹>과 <감정교육>을 거쳐 <살람보>까지 오게 된다. 앞의 두 개는 참 재미있게 읽었는데 책 읽는 것도 컨디션이 중요한 것인지 어쨌는지 하여간 <감정교육>은 읽고 플로베르한테 감정 생겼다. 와 닿지 않았던 것. 새삼스레 다시 읽어볼 정성까진 없어서 다음 작품으로 작가의 최고 히트작 <보바리 부인> 바로 다음에 쓴 <살람보>를 선택했다. 서양 소설을 좀 읽어본 사람들한테 ‘살람보’라고 하면 좀 이국적이면서도 용맹스런 전사를 떠올릴 것 같고, 나도 사실은 그랬는데, 용감한 전사는커녕 동그란 원의 형태로 국경이 그어졌었다고 하는 나라, 카르타고의 최고 집정관 하밀카르 버르카스의 딸이다. 또한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영웅 한니발의 누나이기도 하다.
 귀스타브 플로베르 역시 19세기 예술인답게 동양에 관한 모호한 호기심과 동경을 가지고 있었으며, 외과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넉넉한 젊은 시절을 보낼 수 있어서 스물일곱 살 때 1년 반 동안 이집트를 위시한 북아프리카와 중동지역을 답사했던 적이 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이 시기에 플로베르는 알렉산드리아의 흑인 창녀로부터 그를 평생 괴롭힐 이집트 매독을 방문 기념품으로 얻어 가지고 왔다. 프랑스 땅에서 플로베르가 자신의 기념품인 이집트 매독을 널리 퍼뜨렸는지 아닌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이 병의 후유증으로 고생깨나 했다는 얘기를 어디서 들은 것도 같은데, 사실 19세기에 매독은 당시 예술가들 일부에겐 결핵과 더불어 은근한 선망이 되기도 했다니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습지도 않다.
 어쨌든 플로베르는 <보바리 부인>을 쓴 다음 곧바로 당시의 경험과 노트를 참고하여 차기 작품으로 <살람보>를 구상해 무려 5년에 걸쳐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다. 그의 말에 의하면 <보바리 부인>과 같은 서구의 “혐오스러운 현재”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한한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고대 동양을 선택했다고, 역자 김계선은 해설에서 밝히고 있다. 이 책을 읽어보면 인터넷도 없던 당시에 플로베르가 <살람보>를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정성을 바쳤는지 짐작을 할 수 있다. 파리의 도서관을 이 잡듯 싹 뒤졌을 거 같고, 현지답사도 한 번 쯤 더 하지 않았겠는가 싶을 정도다. 이런 인간이 시대가 바뀌어도 “전설적 인물”로 추앙받는 거다. 자신의 대단한 역량을 바탕으로 끈질긴 노력까지 바치는 사람. 천재는 역량과 노력, 둘 다를 요구한다.
 시대적 무대는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한테 코피가 나게 얻어터진 카르타고가 거액의 전쟁보상금과 시칠리아 섬의 지배권을 로마에게 양도해서, 그 결과 국고가 완전히 거덜이 난 상태다. 거기다가 로마하고 지중해의 패권을 두고 박 터지게 싸운 포에니 전쟁에서 영광의 준우승을 하기 위해 다수의 용병을 고용했지만, 거덜이 난 나라 살림으로 용병들에게 파이트머니조차 지불해주지 못하는 상태로 전락해버렸다. 전쟁이 끝나고 일단 카르타고에 총집결한 용병 부대들. 다양한 민족/인종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말 그대로 전 세계 싸움꾼이란 싸움꾼들, 강도, 도적떼 같은 인간들이 모두 모여 어쨌든 전쟁에 참가해 용감하게 싸운 대가를 요구하고 있다가, 어찌어찌해서 최고 집정관 하밀카르 버르카스의 집에서 패전국 수준에서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파티를 즐기고 있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술과 고기를 위장이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들이켜고 뜯어먹은 다음 천생 투사들인 용병들은 하밀카르 집정관이 아끼는 코끼리부대의 코끼리의 코를 싹둑 잘라버리기도 하고, 아무대서나 허리띠를 풀고 용변을 보는 건 물론이며 심지어 자기들끼리 심심풀이로 싸움을 벌이는 난장판을 만들고 있다. 이 때 테라스에서 모습을 보인 살람보. 그녀는 타니트 신을 섬기는데 이 신은 달의 신. 카르타고의 공식 신은 다신교 다알 신(들)으로 해의 신이다. 다알 신은 다들 아시지? 구약성서 속에서 히브리족의 여호수아 신만 만나면 그냥 타도되어 버리는 역할만 하는 신. 신들은 어쨌거나 테라스에서 서성이는 그녀의 모습을 한 번 보고 그만 넋이 나간 사내가 하나 있으니 용병 대장 마토. 그래, 이래야 소설이 된다. 천상의 미모를 갖은 높은 신분의 여인과 용맹하기 짝이 없는 대장 마토. 눈에 불이 튀는 마토는 꼭 그래서만은 아니지만 살람보를 취할 수도 있겠다는 일타이피(一打二皮: 전문용어. 고스톱 칠 때 내 손의 화투장을 쳐서 피 껍데기 한 장 집어오고, 판에 깔린 거 뒤집어 때려서 또 한 장 집어오는 고급 스킬을 일컬음. 동의어, 일타쌍피)의 심정으로 용병들에게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라고 주장하면서 내전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스 노예 출신의 똑똑한 부하대장과 함께.
 이 정도면 내용은 충분하다. 살람보는 사실 책에서 그리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 않는다. 그럼 뭐가 분량을 채우는가 하면, 놀랍게도 플로베르의 상상력. 열 살 먹은 한니발을 제외하고는 모든 등장인물, 모든 사건은 다 플로베르의 두뇌에서 만들어졌다고 봐야 한다. 더구나 책의 70 퍼센트 가량이 전투, 전투원 묘사로 채워져 있어 숨 막히게 긴박한 장면이 처음부터 끝까지 숨 쉴 틈을 주지 않아 읽는 재미를 높여주기도 한다. 내가 왜 거의 전부가 작가의 상상이라고 단정하느냐 하면, 전쟁이란 것이 극적인 반전이 상당히 드물며, 사실 전쟁이 시작하면서부터 거의 대부분 승패를 점칠 수 있는 경우가 보통이지만 <살람보>에선 한쪽이 거의 멸망할 수준으로 떨어졌다가 하나의 계기가 주어져 극적 반전이 일어나고, 그런가 싶다 했는데 또다시 뒤집혀 기적적으로 전세가 재역전이 되는 상황이 자주 나와서 그리 짐작했다. 과연 카르타고에서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나고 용병들에 의한 내전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그걸 누가 알랴. 카르타고는 아시다시피 제3차 포에니 전쟁 막바지에 로마에 의하여 아예 민족 자체가 절멸당해 아직도 카르타고가 있었던 정확한 위치조차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바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480쪽에 이르는 장편소설을 꾸며낼 수 있었던 플로베르의 상상력은 도대체 어디까지 이르는 것일까. 등장하는 용병들,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싸움꾼들에게 각자 생김새와 옷차림과 행동양식과 종교 등의 특징을 부여하는데 조그마한 모자람도 없이 상세하고도 그럴 듯하게 묘사하는 플로베르. 참 대단하긴 대단하다. 이런 낭만주의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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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총사 1
알렉상드르 뒤마 지음, 이규현 옮김 / 민음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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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책 읽는 재미, 적어도 이 분야에 있어서만큼은 감히 누가 있어 알렉상드르 뒤마와 어깨를 견줄까. 아주 오랜 동안 읽고 싶었던 책인데 마음과는 달리 선뜻 책을 사게 되지 않아 자꾸 뒤로 미루기만 했던 소설. 당연히 소년시절부터 <삼총사>의 축약본, 만화책, 영화 같은 것들 숱하게 봐왔지만 정작 뒤마가 쓴 소설의 완역본은 처음 읽었다. 다 읽은 다음에, <삼총사>는 당연히 완역본을 읽지 않으면 진짜 제 맛을 알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일단 사건이 숨 쉴 수 없을 정도로 긴박하게, 연속적으로, 일관성 있게 일어난다. 그리고 이걸 축약하여 소년용, 영화 시나리오, (아동용)만화책으로 만들려면, 음모와 악마성과 기타 등등, 성인이 읽기엔 흥미진진할지언정 소년들에게는 선뜻 권하기 힘든 비도덕의 전형이 책을 힘차게 견인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화로 만들었거나 청소년용으로 다시 쓴 <삼총사>를 보면 거의 대부분 세 권으로 된 이 책의 첫째 에피소드로만 구성된 것이 보통이다. 그야말로 진짜 <삼총사>를 만들어가는 초입만 읽거나 보고 감히 <삼총사>를 읽고 봤네 하는 것이니, 마치 현덕, 운장, 익덕이 분홍빛 복숭아꽃이 만발한 과수원 뜰에서 염소 한 마리 잡아놓고 좋은 술 진탕 때려 마시면서 의형제를 맺는 소위 “도원결의”까지 읽고 나서, 내가 <삼국지연의>를 읽었네, 하는 것과 비슷하다. 아니면 자기 형 무대를 독살한 형수 반금련과, 혼인의 침상에서 분탕질을 친 푸줏간 주인이자 용맹하기 이를 데 없는 서문경이를, 무대의 아우 무송이 한 주먹에 때려죽여 복수하는 것까지 읽고, 내가 <수호전>을 읽었네, 하는 것과 같다. 못 믿겠지? <삼총사> 읽어보시라니까.

 

 


 얼마나 재미있는지 세 권에 천 쪽이 넘는 걸 하루에 한 권씩, 그것도 밤마다 소주 한 병씩 마셔도, 사흘에 완파할 수 있을 정도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한 번 손에 들었다하면, 낮엔 소위 “뒤마 폐인” 또는 “삼총사 폐인”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명심하라는 거.
 내용이야 뭐 다들 아시는 거니까 여기다 또 주접스럽게 소개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도 완역본을 읽기 전까지 전혀 몰랐는데, 다르타냥과 세 명의 귀족 출신 총사들의 맞수가 처음엔 추기경과 떨거지들이었다가, 나중엔 상대역이 안느 드 브뢰유, 또는 라 페르 백작 부인, 또는 밀레디 드 윈터, 또는 샤를로트 바크송, 사실 네 명이 다 같은 여자인데, 이 신출귀몰하고 눈부신 금발에다가 글래머, 경국지색의 미인과 떨거지들로 바뀐다. 여기서 미인과 그 ‘떨거지’의 범위 속에 놀랍게도 붉은 모자의 추기경까지 포함된다는 사실. 당연히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까지 추기경은 추기경 나름대로 어깨에 힘을 팍팍 주고 있으나, 책의 후반으로 가면 틀림없이 그도 밀레디의 떨거지 가운데 한 명임이 분명하다. (책에서는 목적상 추기경이 국왕 루이 13세와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는 음흉하고 현명한 악당으로 나오지만, 역사상 리슐리외 추기경은 국왕을 도와 왕권의 강화와 확립에 혁혁한 공을 세운 훌륭한 “중세” 권력자였다)
 밀레디. 당연히 영어로 Milady를 일컫는 말일 텐데, 나는 왼쪽 어깨에 백합 문양의 낙인이 찍힌 이 여자만큼 팜 파탈을 본 적이 없다. 앞에서 말했듯 적당한 키에 맑고 흰 피부, 눈부신 금발에 당시 미인의 기준에 딱 맞을 포동포동한 살집과 한 번 봤다, 하면 숨이 넘어갈 때까지 결코 잊지 못할 빼어난 외모에다가 숨 막히는 말솜씨, 순간순간 능란하게 변신하는 순발력과 상대의 심리상태를 놀라우리만큼 정확하게 파악하는 안광의 소유자. 웬만한 인간이라면(남자는 당연하고 여자를 포함해도) 이 여자와 5분간의 대화만 했다하면 거의 틀림없이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는 초인간적인 설득력까지, 거의 신 또는 악마의 바로 옆에 그녀의 자리가 있을 것이다. 만일 이 여자가 남자였다면? 그리 잘 생긴 사람이 신 또는 악마, 가운데 거의 대부분 악마의 바로 옆에 있을 정도로 악역을 준 인물은 누구? 이거 퀴즈다. 어느 작가가 또 19세기에 있어서 굉장한 미남을 자기 작품마다에 등장시키는데 하나같이 악당으로 만든 소설가는? 궁금하셔? 바로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이 못생겨서, 잘 생긴 남자한테 자격지심이 있어서 그랬다고 치고, 뒤마는 왜 절세미인한테 이리 야박한 배역을 줬을까? 뭐라? 별 걸 다 가지고 고민한다고? 그렇다. 그냥 놔두자.
 19세기를 프랑스 문학의 역사로 만들기 시작한 알렉상드르 뒤마. 앞에서 말했듯 다른 건 몰라도 책 읽는 재미, 스토리 하나로 독자를 확 잡아당기는 힘에 관해서는 도무지 이이와 어깨를 견줄 작가가 별로 없다. 죽을 고생을 하다가 우연히 무지막지한 거액의 보물을 손에 넣고 복수를 실행에 옮기는 <몽테크리스토 백작>, 완벽한 검정색을 띈 튤립을 만들어낸 <검은 튤립>에서의 펄쩍펄쩍 뛰는 현장감에 이어,

 

 

 한 소설가의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팜 파탈의 악마적 장악력을 구경하는 일 역시 매우 즐거울 것이다. 물론 현대적 시각에서 보면 등장인물들의 순진성 같은 것이 과장되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혹시 알아? 무대가 되는 1620년대의 프랑스에선 사람들이 정말 그리 순진했었는지. 베토벤의 교향곡 악보를 지금 보면 너무 단순해서 깜짝 놀라지만 아직도 감동을 하듯, 우린 알렉상드르 뒤마의 순진한 등장인물들을 보고 여전히 즐거워할 수 있을 것이다. (글쎄, 날 믿으시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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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안삼환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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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는 분은 아시는 바와 같이, 괴테가 21세기에 와서 저 동아시아 변방의 한 사내로부터 무지막지한 핍박을 받고 있다. 그렇다. 난 괴테가 징글징글하게 싫다. <파우스트>도 싫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도 싫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긴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를 읽었다. 나름대로 마지막 괴테일 것이라 짐작한 때문이기도 하고, 알라딘 중고서점에 들른 지난 1월의 몹시 추웠던 밤에 맞춤한 가격으로 서가에 꽂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오랫동안 토마의 참 아름다운 작품 <미뇽>의 원작이라 읽어보고 싶었으나 하필이면 괴테의 소설이라 차일피일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토마스 만이 쓴 <로테, 바이마르에 오다>를 읽어서. 괴테가 <젊은 베르테르...>를 쓰고 50년이 지나, 작품의 사실상 주인공 이자 젊은 괴테의 짝사랑 상대 로테가 고문역 장관을 지내고 있는 괴테를 만나러 바이마르에 들른 장면을 상정해서 토마스 만이 참 재미난 소설을 썼기 때문이었다. 새삼스레 괴테를 한 번 더 읽어보게 된 계기였다.
 읽은 다음에 생각해보니, 내가 싫어해왔던 것이 괴테라기보다 “질풍노도strum und drang"라고 하는 18세기 독일 문학의 장르였다. 노발리스의 <푸른 꽃>, 휠덜린의 <휘페리온> 같은 것들. 그러니 괴테가 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어찌 마음에 들 수 있었겠는가. <파우스트>는 별개로 하자. 그건 운문체로 되어 있고, 기독교의 비의가 잔뜩 들어있어 나로서는 애초부터 도무지 좋아할 수 없는 장르다. 그럼 <빌헬름....>은 재미있었느냐고? 그걸 한 번에 확 말해버리면 독후감 쓰는 재미가 없지.
 <빌헬름....>은 드디어 괴테가 질풍노도의 시기를 끝내고, 괴테 좋아하시는 분 들으면 기겁을 하겠지만, 즉 괴테의 문학적 사춘기가 끝나고 이제 거의 완전하게 독일 고전문학 시기로 접어든 걸 보여준다. 베르테르의 격정은 온대간대 없다. 대신 무엇이 책을 가득 채우는가 하면, 끝도 없는 장광설. 평생 귀족계급에 우호적인 태도를 굽힘없이 견지한 괴테답게 현학적이고 수사적인 문장이 끝없이 쏟아지지만 못 읽어줄 정도는 아니다. 솔직히 모르겠다. 그런 문장을 좀 예스럽지만 성실하고 친절하게 우리말로 번역한 안삼환 선생의 노고 덕분으로 글이 빛나기도 했을 것이다. 이 발언에서 주목. 안삼환의 번역을 나는 “예스럽다”고 썼다. 즉 내 경우엔 아주 좋게 읽을 수 있었지만, 번역문을 받아들이는 세대 간에 서로 생각이 다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럼 예를 들어 두 문단만 읽어보자.


 “주인은 평소에 하인을 단지 돈을 주고 부려먹는 노예쯤으로 생각할 권리가 있는 것이지만, 변치 않고 추종하는 충성심과 애정이 그 하인을 주인과 동등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덕성들은 단지 낮은 신분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낮은 신분의 사람은 이런 덕성들이 없어서는 안 되며, 이 덕성들이 그를 훌륭하게 장식해 주는 것이지요.” (4권 2장. 책 1, 324쪽)


 “로타르는 (이것이 그이의 그리운 이름이었습니다) 저에게 독일인을 이야기할 때면 언제나 그 용감한 면모부터 설명했으며, 올바른 지도자만 얻는다면 독일인은 이 세계에서 가장 용감한 국민이라는 사실을 저에게 가르쳐주곤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떤 국민의 첫 번째 특성 같은 것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자신을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4권 16장, 책 1, 404쪽)


 어떠셔. 난 위 두 문단을 재미나게 읽었다. 앞의 것은 복종과 충성심이 신분 낮은 사람의 덕성이라고 주장하는 것이고, 뒤의 것은 올바른 지도자만 만나면 독일인이라는 종족들은 무슨 짓이라도 서슴지 않고 저질러버릴 수 있다고 웅변하는 모습이다. 수백만의 유대인이라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학살할 수 있는 거. 그걸 수사로 가득한 문장으로 포장하고 있어서 독자들이 만일 얼핏 읽는다면, 특히 독일 독자들이라면 그대로 세뇌洗腦될 수 있는 개연성을 이런 꼭지들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어째 바그너의 후기 작품들하고 비슷한 면모가 보이지 않는가 말이지. 이러니 내가 괴테를 좋아할 수 있느냐 이거다.


 상인 마이스터 씨의 외아들 빌헬름이 하는 일이라고는 같은 동네에 사는 연극배우 마리아네와 연애하는 거 말고 없다. 평소에 연극에 무지 많은 관심을 쏟은 빌헬름. 스스로도 연극에 경도되어 희곡쓰기와 연기에 소질이 없는 게 아니어서 더욱 마리아네에게 사랑을 느꼈기도 했겠지만, 무엇보다 마리아네가 첫사랑이라는 거. 많은 남자한테 첫사랑이란 프리미엄은 실제보다 훨씬 더 강력한 환상을 들씌운다는 거. 근데 마리아네는 사실 더블데이트 중이다. 장교 한 명과 깊은 사이인데 느닷없이 나타난 빌헬름에게 마음이 쏠린 상태. 평소와 달리 빌헬름의 대시를 거부한 어느 날, 밤새 끙끙 앓으며 청혼의 편지를 쓰더니 아직 날도 밝지 않아 그녀의 집 앞으로 달려가 편지를 건네주려 하는 찰나, 한 건장한 남자가 마리아네의 집에서 나오는 걸 그만 목격을 해버리고 만 빌헬름. 기가 팍 꺾여 첫사랑의 꿈이 허공에 산산이 날아가는 걸 온몸으로 느끼면서 아버지의 사업을 도울 목적으로 긴 여행길을 떠난다.
 사실 고전주의 문학, 문학만? 당시 거의 모든 예술작품의 가장 중요한 소재/주제는 사랑이었다. 하긴 아직까지 그렇다. 먼 미래에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그리하여 길 떠난 빌헬름은 착실하게 아버지 사업의 스케줄에 의거하여 수금도 하고, 이자도 받고(유대인도 아닌데 고리대금업도 했나?), 대금 지불시기를 연기해주기도 하다가, 제 버릇 개 못주는 법이라 처음엔 한 떼의 유랑 서커스 집단과 어울린다. 어울리기만 하지 참가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만난 소년의 옷을 입은 소녀가 바로 미뇽. 암브루아즈 토마의 오페라 <미뇽> 1막에 나오는 절창의 메조소프라노 아리아 “Connais-tu le pays 그 나라를 아시나요?” 이 대목에서 한 번 듣고 가자. 

 

 

 


 미뇽을 만난 다음부터 빌헬름은 끝까지 미뇽과 함께 여행을 하게 되는데, 자신이 주도가 되어 다 찌그러진 배우들을 모아 연극단을 만들기도 하고, 도시의 큰 극단에 참가하다가 드디어 연극의 뜻을 접고 귀족들의 집단에 가담하면서 백작부인, 배우 필리네, 귀족 테레즈, 남작 가문의 나탈리에 등과 연애 또는 연애감정을 경험하게 되는 이야기다.
 이 와중에 역시 기독교와, 언더그라운드의 모임 프리메이슨으로 추정되는 단체와, 셰익스피어 가운데 특히 <햄릿>에 대한 한 편의 논문을 읽을 각오가 독자에게 필요하다. 책의 제목이 “수업시대”라는 것은 귀족, 성직자, 부르주아 등이 주축이 된 모종의 단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빌헬름의 난봉행각을 예의 주시하며 경험을 교육으로 승화시킨다는 (참으로 웃기고 자빠진) 논리를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를 우리나라의 서정주는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이라고 했다. 맞지? 하여간 이런 내용의, 1천 쪽 분량의 장편소설이다.
 근데 18세기라서 그런가? 의술과 위생에 소홀해서인지 정말 사람들 숱하게 죽어나간다. 하긴 그것이 정상인지도 모르겠다. 18세기 유럽의 평균수명이 얼마나 됐는지는 모르겠으나 마흔 살은 넘지 않았을 것이니 빌헬름 주위 사람들이 퍽퍽 죽어나가는 게 어쩌면 당연한지도. 그게 내게 어떤 효과를 주었느냐 하면, 죽음을 한 사건의 종결을 위한 편리한 도구로 사용한 것일 수도 있다는 의혹. 나처럼 토마의 <미뇽>의 원작임을 감안해 읽기로 마음먹은 독자들은 단단히 다잡은 상태에서 읽을 필요가 있다. 토마의 <미뇽>보다 4,285배 정도 더 비극이다.
 역시 친 귀족적인 괴테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는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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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술꾼의 전설
요제프 로트 지음, 김재혁 옮김, 파블로 아울라델 그림 / 책세상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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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요제프 로트.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다. 당연히 참으로 재미있는 장편소설 <라데츠키 행진곡>을 읽고 이름을 기억해두었다가 마침 헌책방에서 눈에 띄어 망설임 없이 즉각 집어 들었다. 판형이 크다. B5 정도. 파블로 아울라델, 이라는 화백이 삽화를 그려 (한 번 세볼까?) 스물네 쪽을 채웠다. 본문이 총 75쪽이니 삽화를 빼고 글씨만 들어 있는 건 불과 51쪽. 단편소설 한 편을 달랑 싣고 책 한 권을 만들었다.
 전형적인 단편. 알코올의존증이 분명한 폴란드 출신의 노숙자 안드레아스. 어느 날 그에게 연속적인 기적이 출현한다. 어느 신사가 200프랑을 주는 것. 명예를 존중하는 안드레아스는 자신이 돈을 갚을 방법이 없기 때문에 적선을 거부하지만 양심상 견딜 수 없으면 생트 마리 데 바티뇰 성당에 있는 테레즈 성상을 위해, 일요일에 미사를 막 끝낸 신부에게 갚으라는 말을 듣고, 반드시 그럴 것이라 다짐하며 돈을 받았다. 알콜의존증 환자가 주머니에 돈이 생겼으니,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도리가 없는 것처럼 득달같이 카페에 들어가 술을 퍼마시기 시작한다. 카페에서 만난 뚱뚱한 남자가 자기네 집 이사하는데 도와주면 또 200프랑을 준다고 해서 돈을 더 벌고, 잡화상에 가 지갑을 샀더니 지갑 안에 1,000프랑 지폐가 한 장 들어있고, 하여간 돈벼락이 쏟아지는 기적이 한꺼번에 들이닥친다. 1,000프랑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에밀 졸라의 <인간짐승>에서는 1천 프랑을 위해 살인도(그것도 자기 마누라를!) 서슴지 않을 돈이다. 그걸 또 여자와 술에 싹 말아먹고, 희한하게도 바티뇰 성당에 가서 부채를 갚으려고만 하면 그게 어긋나고, 뭐 그게 인생이긴 하지만.
 단편소설의 스토리를 더 이상 소개하면 미친 짓이다.
 작가 요제프 로트 자신이 심각하지는 않지만 하여간 술을 떼놓고 생각할 수 없는 애주가였던 모양이다. 거기다가 또 기독교인지 유대교인지 아무튼 그렇고. 그리하여 이 책의 제목에서 나오는 ‘전설’이라는 건 ‘읽을거리’, 그 개념 속에 종교적, 도덕적으로 뛰어난 성자들의 삶을 다룬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92쪽). 그러니까 작가 스스로 그의 말년의 작품 <거룩한 술꾼의 전설>은 한국인들이 거의 고정관념 속에서 생각하는 ‘전설’이 아니라 그냥 종교적 교훈이 조금 담겨 있는 읽을거리라고 여기면 딱이다. 직접 읽어보면 뭘 얘기하는지 아실 것. 작가 스스로도 이 작품은 소설이라기보다 소설의 하위개념인 ‘노벨레’, 일찍이 고트프리트 켈러의 <젤트빌라 사람들>에서 소개가 된 장르로 규정했다고 한다. 흠. 그럼 노벨레 한 편으로 책 한 권을 만들었다는 얘기지? 이런.
 평생 디아스포라의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 요제프 로트. 내가 그의 <라데츠키 행진곡>을 아무리 재미있게 읽었다해도, 이 책을 단칼로 잘라 얘기하면, 비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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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읽은 몇 권의 책 가운데 재미있게, 감명깊게 또는 시간 죽이기 마침하게 읽은 것들만 모아보았습니다. 순서는 읽은 날짜 순입니다.

 

 

1. 주느비에브 빠뜨, <사서 빠뜨>

 유년기 부터 초등학생 까지의 자녀를 둔 부모에게 권하고 싶은 책. 아동 도서관에서 60년이 넘게 사서 직업을 가졌던 전문가가 권하는 책들을 소개받을 수 있다. 특별히 명심해야 할 것은 한국에서는 아직까지도 부모가 가장 가까운 도서관이란 것.

 

 

2. 제이디 스미스, <온 뷰티>

흑인과 백인이 결합하여 가정을 꾸린 두 인텔리 가정의 재미난 야단법석. 한 쪽은 남자가 흑인이고 다른 쪽은 여자가 흑인인데 두 집안이 학문적 갈등으로 시작해 범 가족적으로 원수지간. 거기다가 적당한 베드씬까지 겹쳐 흥미로운 한 바탕의 난장판을 벌이는 게, 아주 끝내준다.

 

 

3. 에밀 졸라, <인간짐승>

목로주점의 제르베즈 아줌마가 낳은 둘째 아들. 혈관 속에 끔찍한 범죄 유전자가 흘러 욕정을 일으키는 순간 상대 여성을 살해하고 싶은 갈증으로 부르르 떠는 인간, 자크. 졸라의 "루공 마카르 총서"가 늘 그렇듯이 막장을 향해 모든 등장인물들이 조금도 멈춤없이 질주하는 세기의 혼돈.

 

 

4. 윌리엄 트레버, <루시 골트 이야기>

독후감 쓰기 참 막막했던 소설. 읽고나면 가슴 속에 휑뎅그렁한 바람이 스며들만큼 인간이 가슴 속에 쌓아두는 죄책감과 허무한 그리움을 어떻게 이리 잘도 그려놓았는지. 혹시 당신은 손수건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5. 존 드릴로, <화이트 노이즈>

세상에 이런 아이디어가 있을 줄 내 몰랐다. 미국 중부의 한 소도시에 대학이 있는데 글쎄 "히틀러 학과"를 개설했단다. 심지어 독일어도 해독하지 못하는 한 인간이 히틀러 학과를 개설하고 학과장 자리에 앉았는데, 다섯번째 결혼으로 구성된 복잡한 가정의 가장이기도 해서 정말 바람 잘 날이 없다. 무조건 웃길 거 같지? 예상외로 문명비판적이기도 하고, 근사할 걸?

 

 

6. 발레리 라르보, <페르미나 마르케스>

세월이 흘러흘러, 저 먼 시절 청춘을 맞아 이제 여성을 향한 갈증이 돋을 무렵을 온전하게 보냈던 생토귀스탱 기숙학교의 기숙사. 라틴 아메리카에서 유학온 학생, 어린 수컷들이 시절을 보내는 풋풋한 일탈과 동경과 성장 이야기.

 

 

7. 카를 차페크, <오른쪽/왼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짧아서 단편이라기 보다 손바닥 장掌 자를 써서 장편소설이랄 수 있는 각 스물네 개의 이야기를 담은 책. 20세기 초반의 체코를 정말로 손바닥 내려다보듯 훤하게 다 써놓았는데, 범죄 이야기가 많음에도, 숱한 범죄자들의 악하지 않은 한쪽 면에 집중하는 독특한 시전.

 

 

8.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싱글 맨>

죽은 남자 애인을 잊지 못하고, 새로운 애인은 여간해 생기지 않는 동성애자 교수. 그의 하루를 따라가는 작가의 시선. 도시 이곳저곳에 사랑의 흔적은 남아있고, 풋풋한 젊고 아름다운 청춘들은 눈에 띄는데 이제 그들에게 접근하기는 또 좀 그렇고, 그래, 그것도 인생이지.

 

 

9. 오에 겐자부로, <만엔 원년의 풋볼>

끔찍한 모습으로 목 매달아 죽은 친구, 뇌 헤르메스를 안고 태어난 아들, 알콜 중독 증세에 빠져든 아내. 아 이렇게 죽을 수도 없고, 이렇게 살 수도 없어 학생운동 출신인 동생과 함께 저 옛날 만엔 원년에 민란을 일으켰던 고향으로 귀향해서, 천만에도 몰랐다, 조선인 거물 백승기와 흥미진진한 한 판 풋볼 게임을 크게 벌이게 될지.

 

 

10. 레슬리 마몬 실코, <의식>

모든 것을 잃고 부유하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삶. 그들은 여전히 자연의 한 개체로 존재하며, 주술과 의식에 의탁하기도 한다. 한때 백인처럼 군인이었던 시절엔 그들처럼 찬란했으나 전쟁이 끝나고 다시 인디언으로 돌아온 이들은 다시 거대 자연의 부분으로 의식을 치루어야 했으니

 

 

11. 존 치버, <이 얼마나 천국 같은가>

존 치버의 마지막 작품. 비오는 밤, 낡은 집에서 침대에 앉아 읽는 이야기일 뿐이라는 작가의 겸사에도 불구하고, 존 치버는 그의 마지막 발언으로 사랑과 환경문제를 선택한다. 앞으로 남은 삶은 눈썹 만한 순간. 그가 생의 끝에서 뒤돌아 본 화면은 무엇이었을까.

 

 

12. 메릴린 로빈슨, <하우스 키핑>

집과 집을 구성하는 가족을 지켜내는 일. 하우스 키핑. 그러면서 사라진 가족 구성원을, 꼭 그런다는 의식도 없이, 언제까지나 기다리고 있는 일. 한 고아 소녀 루스와 그의 이모 루실이 만들어가는 가족. 그리고 기다림. 미국 북서부 지역의 황량하게 아름다운 산과 호수가 배경으로 깔려 있고 책을 읽으며 그걸 머리 속으로 그려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

 

 

13. 토니 모리슨, <재즈>

이런 책을 흔히 필독서라고 부른다. 하지만 읽기가 쉬운 수준은 아니다. 재즈의 진정한 맛은 즉흥 연주라고 하는데, 그걸 본따 토니 모리슨이 그냥 즉흥적으로 글을 썼다고 주장한다. 당연히 흑인 문학이며, 첫 장면부터 쉰 살이 넘은 조 트레이스 씨가 열일곱 살의 아가씨 도카스와 바람을 피우다가 질투에 못이겨 총으로 쏴 죽였으며, 그의 아내도 역시 질투에 못이겨 이미 죽은 도카스 양의 시신을 훼손하려 했던 충격적인 장면을 아예 내놓고 시작한다. 어때 혹 하시지?

 

 

14.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리고베르토 씨의 비밀 노트>

 

아직 읽어보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새엄마 찬양> 후속편이라고도 한다. 마누라 죽고 장가든 리고베르토 씨가 새마누라 쫓아내고 독수공방을 지키며 비밀노트에 온갖 성적 판타지를 적기 시작했고, 동시에 열 살 먹은 아들놈은 새엄마를 찾아가 화가 에곤 실레를 핑계로 이제 갓 돋기 시작한 은밀한 에로티시즘을 톡,톡 건드리기 시작하는데 하여간 바르가스 요사, 요사스럽기는 하다.

 

 

15.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바람의 그림자>

 

시간 죽이는데 장땡이다. 오랜만에 읽은 스릴러. 도시의 외딴 골목 한 구석에 비밀의 문이 있어서 허락받은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데, 그곳은 이른바 책의 무덤. 책의 무덤이 있다는 건 극한의 비밀. 그곳에서 발견한 책 한 권 때문에 벌어지는 사달이 이렇게까지 크게 번질 줄은 꿈에도 몰랐지? 시대는 프랑코 개자식의 엄혹한 독재시대. 이리 꼬이고 저리 꼬이는 나날과 사건들.

 

 

16. 프랑크 틸리에, <뫼비우스의 띠>

역시 스릴러. 이건 스릴러인지 모르고 선택했던 책. 놀랍게도 과거와 미래가 소통을 한다. 그리하여 미래는 과거를 조정해서 한때 미래였던 현재를 바꾸려 하는데, 과거와 미래가 무한 순환하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왔다 갔다 하기를 몇 차례였을까. 노약자와 임산부는 책을 읽지 마시라. 살인 장면이 끔찍 itself이며, 정신 건강에 좋지 않을 수 있다.

 

 

17. 윌리엄 트레버, <여름의 끝>

아 어쩜 좋아. 어쩌자고 이리 쓸쓸하고 사람 마음을 텅 비워버리는 진공의 상태로 몰아갈 수 있을까. 트레버가 여든한 살에 쓴 책. 그리 노년임에도 이런 감성이 충만했을 수 있었다니 놀라움 자체다. 읽는 내내 독자로 하여금 안타까움과 동감의 감정으로 절절매게 만드는 대단한 문장들. 그러나 (언제나 매력적인)불륜 이야기.

 

 

18. 알렉시 제니, <프랑스 식 전쟁술>

해설까지 800쪽이 넘는 길고 긴 장편소설. 인도 차이나 전쟁과 알제리 전쟁, 거기다가 항독 레지스탕스 전력까지 있는 노인의 회고록을 써주는 '나'. 강한 인간이 약한 동족에게 벌이는 잔혹한 학살. 인간 이외의 어떤 동물도 저지르지 않는 무차별적 공포와 살육. 기계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인간에 대한 죽임. 이 모든 것을 알렉시 제니는 한때 많은 식민지를 보유했던 자국민들에게 또박또박 짚어간다.

 

 

19. 피오나 맥팔레인, <밤, 호랑이가 온다>

재미있는 책. 읽기 시작하면 손을 뗄 수가 없다. 호랑이가 뭔지 결코 미리 알려줄 수 없다. 정체를 밝히는 것이 책을 끝까지 읽는 일이기 때문에. 혼자 사는 할머니과 노인복지사. 그리고 저 먼 먼 첫사랑. 사구지역 언덕받이의 집에선 향유고래의 울음소리와 물을 뿜는 모습도 거실의 통창문을 통해 보이는데, 일흔다섯 살의 노파한테는 하필 밤마다 호랑이가 오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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