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닌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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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상 최대의 장난꾸러기 소설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작품을 읽어보면, 아무리 각주, 미주, 벼라 별 주석 같은 역자 훈수를 보태더라도 이이가 쏟아 놓은 단어의 홍수 속에서 제대로 이해하는 농담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책을 읽었으면 그날 안으로 잽싸게 독후감을 써야 하는데, 이제 시간은 바야흐로 2023년 12월, 우리나라 중늙은이들이 본격적으로 해를 잊을, 즉 망년忘年을 핑계로 날마다 천국행을 도모하고 있는 이때, 물론 핑계지만 3일이 지나 감상문을 쓰려 하니 읽을 당시의 기막힌 촌철살인의 장면과 행위와 하다못해 사람의 이름까지 다 잊고 말았다. 오호라. 이 작품을 발표한 것이 1957년의 미국.  나보코프는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의 부르주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워낙 고급 교육을 받은 데다가, 애초부터 빼어난 자질까지 가져 누구보다도 많은 지식을 함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이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작품 속에서 숨기지 않고 슬쩍, 슬쩍 드러내는 잘난 척을 결코 멈추지 않았는데, 이게 얄밉거나 뵈기 싫지 않은(‘보기 싫지 않다’보다 좀 센 표현으로 이게 어울릴까?) 희한한 재주까지 가졌다. 이 책에서도 나보코프는 음악, 미술, 문학 그것도 유럽과 아메리카를 두루 섭렵하여 작품 속 주인공들의 이름을 적재적소에 특징지을 수 있는 등장인물한테 엣다, 너는 이 이름으로 해라, 넌 이렇게 행동해라, 하는 바람에 독자가 읽다가 어어, 하면서 싱긋 웃음짓게 만드는 컷도 여럿 있었다. 도서관 열람실에선 맘놓고 웃지도 못하는데, 세상에 이런 일이. 글쎄 어느 장면, 어느 등장인물을 가지고 지금 이리 침을 튀는지 3일 전이었다면 이 자리에 척척 가져다 붙이겠다만 3일이면 소 한 마리 잡아서 이미 푹 고아 다 먹었을 시간이라 나도 못내 아쉽다. 하여간 나보코프, 소설 정말 잘 쓴다. 돌려차고 감아차고 옆으로 차면서 독자의 옆구리를 사정 보지 않고 간지르다가 결국 망명 러시아 지식인의 우울한 고독에 함께 마음 아파하는 일을 어쩌면 이리 맛있게 썼는지.


  티모페이 프닌.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점잖고 상당히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파벨 프닌 박사는 안과의사로 평생의 명예로 삼는 일은 레프 톨스토이 백작의 결막염을 치료해준 일이라고. 엄마는 독일 귀족의 따님이었다 하니 의사라고 같은 의사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잘 지내다가 이 집에도 불행의 구름이 덮쳤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그냥 저냥 지나가겠는데 가만히 보니까 혁명 러시아는 이게 사회주의/공산주의 국가가 아니라 레닌화化 한 독재체제인지라 도무지 견디지 못하고 러시아를 탈출해 체코 프라하 대학에서 사회학, 정치경제학 박사 학위를 따고 이후 15년간 파리 16구에 살다가 신대륙으로 이주했다. 유럽에 살 때는 아무리 더운 날씨에도 프록코트는 아닐지언정 넥타이와 조끼를 받쳐입은 슈트 차림이었지만, 세월이 흘러 완전무결한 대머리와 그은 피부, 깨끗하게 면도한 얼굴에 뿔테 안경을 쓴 신대륙의 52세 프닌 박사는 일광욕을 즐기고 스포츠 셔츠에 슬랙스 차림에다가 여성 앞에서도 버젓이 맨살 정강이를 노출시키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이 양반의 지금 직업이 뉴욕 근방 도시에 있는 웬델 대학의 러시아어 교수다. 명문 웬델 대학에는 정식으로 러시아문학과가 없다. 프라하 대학에서 받은 사회학, 정치경제학 박사 학위는 20세기 중반이 되자 불용학위로 구별되어 이제는 그 타이틀로는 교편을 잡지도 못한다. 이를 어엿비 여긴 독문과 학과장 (알베리히의 아들)하겐 교수는 독문과에 러시아어 과목을 하나 배치하고 프닌을 교수로 초빙했다. 러시아어 중급반 수강인원 1명. 상급반도 1명인데 얜 출석부에 이름이 올랐다는 의미일 뿐이고 얼굴 한 번 본적 없다. 초급반 3명. 러시아어 실력으로 말할 것 같으면, 혁명 직후엔 파리, 이후엔 세계 주요 도시 각처에 뿌리를 내리고 살던 구 러시아 왕족, 귀족 나부랭이들의 커뮤니티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던 나이든 할머니 무리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지만 학생들에게는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실력있는 교사라기 보다는 혁명 후 혼돈기, 적백 내란기, 망명기에 자신이 겪었던 경험함을 재미있게 엮어서 드라마틱한 내용까지 보태 들려주기 때문이었다. 그럼. 실력 없으면 이런 거라도 해야지.


  자꾸 프닌 선생의 러시아어 실력을 이야기하게 되는 데, 어느 수준인지 보자. 프닌은 일단 강의 노트를 먼저 만든다. 러시아의 관용 속담과 민담, 신화 같은 것을 넘치게 인용하여 근사하게 작성을 하고 이것을 독문과 교원에게 영역을 부탁한다. 독문과 대학원생이 러시아 관용어를 제대로 번역할 수 있겠어? 그래도 한다. 번역해 영문으로 개발새발 쓴 것을 프닌이 아니라 밀러라는 조교가 수정을 하고 이번엔 하겐 박사의 비서 아이젠보르 양이 타이핑을 한다. 최종적으로 프닌 앞에 도착한 원고를 프닌 교수가 읽어보고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을 삭제만 한 후 수업에 들어간 교수는 눈을 원고에 박고 그냥 읽는 것으로 수업을 갈음하는 거다. 이 장면만 보면 모교 아르센 루팡 대학의 한모 교수가 생각난다. 김일성 대학 교수로 재직할 때부터 써먹던 강의노트를 시작과 동시에 그대로 칠판에 베껴 쓰던 학계의 전설적 인물. 나한테 F학점 줬다. 생존해 있느냐고? 어딜. 진짜로 김일성대학 교수 출신인데 벌써 갔지. 그땐 이런 교수들 몇몇 있었다. 선풍기에 시험지 날려서 가까이 떨어진 놈 A주던 시절. 헛갈리지 마시라. 멀리 간 시험지는 학점이 낮다. 가까이 떨어진 것이 멀리 간 것보다 무거울 것이고 그만큼 시험지에 답안을 많이 적은 것이 분명하니 A를 주어야 한다는 의견이 당시 국보의 채점법이었다.

  프닌 교수가 사실 나사가 좀 빠지기도 했다. 도대체 정신이 어디에 있는 사람인지 꼭 실수를 하고, 아니더라도 대개 이런 사람들한테 실수 또는 불운의 별이 빛을 모아서 쪼이는 법. 한 번은(작품이 시작하자마자) 크레모나 여성 클럽 부회장 주디스 클라이드 여사가 크레모나에서 열리는 금요 야간 강연회에 연사로 초빙을 해 가서 강연을 해주기로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강의록을 준비해 가방에 챙겨 두었다. 협회는 거마비와 함께 가장 효과적으로 도착하는 기차편을 소개했지만, 평소에 여러 팜플렛을 수집하는 프닌 박사는 그것보다 적어도 20분을 절약할 수 있는, 토요일만 특별 편성하는 열차를 알고 있어서 그 시간표에 입각해 열차에 탑승했다. 객석에 앉아 세상의 어두운 정보만 가지고 사는 사람들의 우둔함에 떠올리며 우쭐하고 있다가, 어머나, 지나가는 차장이 하시는 말씀이 이 열차는 크레모나에서 정차하지 않는단다. 그래서 열차 시간표를 디밀고 무슨 말씀이세요, 따지니까, 아이고, 승객님, 이건 5년 전 열차표 아닙니까요? 20분 벌려다가 졸지에 두 시간을 까먹게 생겼다. 프닌은 할 수 없이 위트처치 정거장에서 내려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네 시 버스를 타면 여섯 시에 도착한단다. 아직 시간이 있어 트렁크를 안내원에게 맡기고 배가 출출해진 프닌은 햄샌드위치를 하나 사 먹는다. 네시 5분전에 안내원에게 가서 가방을 달라며 손가락질을 하는데, 어 참, 손가락이 엉뚱한 가방을 가리켰다. 그리고 가방을 맡았던 안내원은 아내가 출산을 한다고 자리를 비운 상태. 이제 엉뚱한 가방을 지목한 프닌 교수에게 쉽게 가방을 바꿔줄 안내원이 있을 턱이 없지. 이때 네 시 버스가 승강장에 도착한다. 프닌 교수는 머리를 잽싸게 돌려본다. 저 버스를 타지 못하면 오늘 스케쥴은 끝이다. 다음 버스는 여덟 시에 있으니. 프닌은 가방 없이 맨몸으로 출발하고 짐은 돌아올 때 들러 가지고 가기로 결정하고 버스를 향해 헉헉 뜀박질을 한다.

  그렇게 도착한 크레모나 금요 야간 강연회. 앞줄 가운데 자리에 눈에 확 들어오는 관객이 한 명 있었다. 발트해 연안에 살던 친척 할머니 중 한 명. 자신의 옛 동창생. 부모 연배의 러시아어 전문가들. 이렇게 프닌의 인생은 꼬여만 간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도무지 거절을 하지 못한다는 거. 1925년 프랑스 파리 시절에 리자 보골레포브나 양, 검은색 실크 점퍼와 맞춤 스커트 차림의 막 20세가 된 의대생을 만나 연애를 한다. 이 당시 리자는 로제타 스톤(!) 여사가 운영하는 당시의 가장 파괴적인 뫼동 정신 요양소에서 근무하며 간혹 읽기 참혹한 수준의 시를 쓰기도 했는데, 그만 둘은 결혼을 해버리고 만다. 이게 프닌의 유일한 결혼이었고, 리자는 드디어 결혼식을 하기 시작한 거였다. 몇 년을, 그렇다고 오래는 아니고 잠깐 살다가, 신대륙으로 항해하는 여객선에 올랐을 때 리자의 배는 북통만 했었는데, 아이는 당연히, 라기보다 짐작하셨다시피 다른 남자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다른 남자’는 신대륙행 여객선 갑판에서 티모페이 프닌과 우정을 돈독하게 쌓아올린 에릭 빈트, 혹은 에릭 윈드, 또는 에리히 빈트,라는 이름의 아르헨티나 남자였고.

  혼인 전에 리자 보골레포브나였다가 리자 프닌이었다가 리자 빈트가 되었다가 후에 또다시 성이 바뀌는 이 여인은 티모페이 프닌이 나이가 더 들어 한 번 더 이혼을 결정하면서 득달같이 프닌을 찾아와 “당신의 아들이기도 한” 아이의 대학 학비와 생활비를 대달라고 요구하고, 마음 약한 프닌은 이걸 또 거절하지 못한다. 왜?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인간이라서.

  이 독후감을 읽으시는 분들은 여기까지만 알아두시라. 프닌이 이렇게 한심하고, 나사가 몇 개 풀려있고, 먹고 사는 분야의 실력도 엉망이고, 불운의 별이 그를 위하여 반짝이는 인간일 뿐이라고 여기시라. 사실이 그렇기도 하다. 그러나 이방의 땅에서 뿌리내리지 못하는 망명객을 향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변명도 언젠가는 한 번 준비되어 있을 것. 미국 땅에서 부유하는 루저의 삶 속에 마르지 않는 습기를 발견할 수 있을지 혹시 모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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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개
하인리히 뵐 지음, 안인길 옮김 / 미래의창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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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곱 권째 하인리히 뵐의 책을 읽었다. <카탈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부터 뵐을 읽어서 권력의 남용과 이에 따른 시민의 피해와 저항 같은 사회문제에 천착하는 작가인 줄 알았던 것이, 이제 생각하면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다. 나중에 <카탈리나…>가 예외적인 작품이란 걸 알았다. 이후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와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거치면서 이이의 관심사가 전쟁과 전쟁 후 폐허가 된 도시와 독일인들이란 것을 저절로 알게 됐다. 스스로 징집되어 2차 세계대전 당시에 포병으로 참전했다가 부상도 당하고 꾀병도 부리고 하다가 탈영해 미군 포로가 된 경험도 있어서, 전쟁의 참상과 전쟁 자체가 인간을 얼마나 하찮은 미물로 만들기도 하고, 겁쟁이로도 만들며, 얼마나 지독한 악마로 만들기도 하는지 지긋지긋하게 경험을 해 누구보다 진심으로 반전주의자가 되었을 터이다.

  이 작품집 《하얀 개》는 작가의 비교적 초기 작품 가운데 미발표작을 모아 1995년에 사후출판한 책으로 첫 작품 <불타는 가슴>만 1936년 (또는) 37년, 나머지는 1947년, 1949~1951년 작품이라고 역자 해설에 쓰여 있다. 나는 사후 출판일 경우엔 원고를 왜 살아생전 발표하지도 않고 책에 싣지도 않았을까, 하고 의심하는 인간이다. 윌리엄 트레버의 유고작품집 《마지막 이야기들》 독후감에서도 비슷한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다시피. 특히 《하얀 개》의 경우엔 초기작품 위주 미발표 작품의 모음이라서, 작가가 자신이 쓴 결과물을 잊었다는 건 별로 호소력이 없고, 어떤 연유가 됐든 간에 하여간 마음에 그리 차지 않아 나중에 손을 볼 의향으로 가지고 있거나, 다섯 편의 극도로 짧은 단편의 경우엔 일단 작품의 스케치나 메모를 한 것 정도로 가지고 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독자는 어쨌거나 읽기만 하면 된다. 그럼에도 굳이 의심을 숨기지 않는 이유는, 여섯 편의 ‘단편소설 같은 단편소설’의 경우에(다섯 편의 극도로 짧은 단편소설은 단편소설 같지 않지?) 뵐의 다른 단편집에 실린 작품과 비교해 별로 빠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숨을 거둘 때까지 책상서랍에 꿍쳐 놓았던 이유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열아홉, 스무 살에 쓴 <불타는 가슴>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폐허의 쾰른이 무대가 아닐까 싶기도 했었음에야. 하긴 좋은 작가는 보통 청소년 시절부터 애늙은이 경향이 심하긴 하지만.


  물론 내가 뵐의 작품에 관한 선입견이 있어서 <불타는 가슴>을 전후 폐허 독일일 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읽어보시라. 아마 내 짐작도 얼핏 타당하다고 여기실 것이다. 1936년이면 파시즘 국가 나치 독일의 거의 모든 국민들이 유대인 차별/탄압은 물론이고 “총통 각하가 명령하면 우리는 싸운다!” 연호하며 군비증강에 혈안이 된 시절이다. 어쨌거나 군수산업은 나라에 물자와 돈이 활발하게 돌게 만들어 독일인의 생활이 다른 서구 유럽과 동등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살인적 불경기에서는 벗어났을 때이다. 아무리 이랬던 시기의 12월이라도, 열여섯 살 먹은 하인리히 페르코닝 소년은 처음으로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으로 작품을 시작하니 뵐의 성향을 알고 있는 독자가 애초에 단편 <불타는 가슴>을 읽기 시작하자마자 무대가 대도시이긴 하지만, 그리고 단 한 번도 무너진 집이나 건물, 깨진 보도블록 같은 묘사가 나오지도 않지만 파괴된 거리의 즐비한 폐허를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어서 “한 노신사가 젊고 뻔뻔한 창녀를 따라 어느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라고 이어지며, 하인리히도 대략 열일곱 살 된 창녀차림의 예쁜 소녀, 결국 창녀로 밝혀지는 소녀 수잔네와 급속하게 친하게 되는데 말이지. 독자인 나는 당연히 전후 궁핍한 시절에 먹고 살기 위하여 어린 나이에도 몸을 팔 수밖에 없는 상황을 상상했다. 어쨌거나 제일 중요한 문제는 살아야 한다는 것이니까. 수잔네는 창녀이면서도 구원과 종교를 말하고, 하인리히의 가슴에 기댄 채 도스토옙스키가 괴테를 천재적으로 모방했다는 말에도 귀를 기울이며, 이름부터 심상치 않은 베네딕트와 막달레나 커플과 친해지는 등 사랑은 계급과 종교의 범주를 초월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제로 열아홉 또는 스무 살에 썼다는 얘기다.


  그래도 재미있는 건 역시 사랑 이야기다. <실락원>. <실락원>하면 하여튼 나한텐 와타나베 준이치가 쓴 무지무지하게 야한 유부녀와 유부남의 치정 이야기인데, 뵐의 <실락원>은 다른 의미에서 괜찮게 읽었다. 작가 본인도 그랬지만 작품의 남자 주인공 ‘그’도 전쟁터로 떠나 7년만에 귀향한다. 다른 곳에 비해 그나마 덜 파괴된 고향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꿈엔들 잊힐리야, 마리아 X를 찾아간다. 건물은 극도로 쇠락해있고, 어두운 복도 맨 마지막 쪽방이 마리아의 방. 지칠 대로 지친 그는 방문을 두드린다. 적막. 더 거세게 두드린다. 그래도 아무 응답이 없다. 그러다가 문에 종지쪽지가 붙어있는 것을 발견한다.

  “일곱 시에 돌아옴. 열쇠는 옆방에 있음. M.”

  ‘나’는. 시점이 자주 바뀐다. 뵐의 작품에서 종종 그랬듯이 ‘그’가 등장했다가 곳곳에서 ‘나’로 바뀐다. 여기서 ‘나’는 옆방문을 두드렸고 조금 있다가 문이 열려 얇은 목걸이를 단 여인이 고개만 내밀고 열쇠를 건네며, 틀림없이 벌거벗었을 이 여자는 이렇게 말한다.

  “아, 당신이 침대 위에 걸려 있는 분이시군요”

  “예, 아마도……”

  여인의 직업은 뭘까? 여인과 친하게 지내는 것 같은 마리아는 또 어떻게 돈을 벌어 생활했을까? 이게 속물인 독자가 궁금했던 거였다. 하여간 나는 마리아의 방을 열고 들어간다. 그리고 7년 전의 마리아에 관한 회상. 나의 가슴에 고개를 묻은 마리아. 정수리까지 곧고 깨끗하게 뻗은 가르마. 내 오른쪽 가슴에서 팔딱팔딱 뛰던 심장의 고동. 그리고 몸의 의식.

  그의 사색은 계속 깊어진다. 방에서 은근히 산포하는 부드러운 비누와 옷 냄새. 그리고 약간의 담배연기가 빚은 깨끗한 냄새. 전후 시절에 비누와 깨끗한 속옷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7시 20분 전. 그는 방을 나와 천천히 어두운 복도를 걸어 역시 어두운 계단을 내려간다. 과연 떠나야 하는가? 곰곰이 생각한 그는 갈 수밖에 없다고, 지금 가는 게 더 좋을 거라고 믿는다.

  나는 여기까지 읽으면서 속으로 말했다. “그래, 생각 잘했다. 한 번 보면 뭐해!”

  인생이 그렇지. <실락원>의 주인공, ‘그’였다가 갑자기 ‘나’로도 변하는 그가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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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1-05 0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프닌>
화요일. 발터 하젠클라버, <발터 하젠클라버의 아들>
수요일. 무라카미 하루키, <해변의 카프카>
목요일. 전예진, 《어느 날 거위가》
금요일. 루이스 어드리크, <정육점 주인들의 노래클럽>

stella.K 2024-01-05 11:24   좋아요 1 | URL
오, 드디어 다음 주 수요일 저도 읽은 책이 나오는군요. 작년인가 재작년에 읽고 리뷰는 안 썼던 것 같은데 팔님 어떻게 읽으셨을지 궁금하네요. 그럼 새해 첫 주말 잘 보내세요.^^

Falstaff 2024-01-05 15:42   좋아요 1 | URL
음... 무라카미 아니면 어드리크 둘 가운데 하나겠지요. 다른 세 권은 신간이거든요. ㅎㅎ

yamoo 2024-01-05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인과 군중...이거 읽다가 관뒀으묘~~ 완역도 아니고 끊임없는 등장인물때문에...
뵐은 카타리나로 종결 볼까 합니다. 카타리나가 너무 좋아 읽기 시작한 <여인과 군상>이었는데...완역되어도 읽기 힘들거 같아요. 뵐의 특유한 문체는 읽는 맛이 있긴 하지만...^^;;

Falstaff 2024-01-05 15:43   좋아요 0 | URL
윽. 완역도 아닙니까? 알고는 못 읽지요. ^^
 
어부와 아들
쥴퓌 리바넬리 지음, 오진혁 옮김 / 호밀밭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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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달 만에 리바넬리를 또 읽는다. 그만큼 <세레나데>가 좋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기대한 만큼 재미나게 읽지는 않았다. <세레나데>와 달리 튀르키예의 서민층을 등장시킨다. 튀르키예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관광도시 보드룸에 근접한 작은 어촌의 가난한 어민들. 산업화를 진행하는 과정에서의 필연적 부조리인 부정부패가 지역 사정은 거의 감안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건설, 설치, 개발 승인을 해주었다. 그 결과 어촌 마을은 맑은 하늘과 푸른 바다, 짙은 숲을 자랑했던 천혜의 휴양지이자 항구였으나, 하늘은 화력발전소에서 날아오는 연기로, 바다는 대규모 양식장의 침전물에 의한 부영양화로, 숲은 청산가리를 사용하는 금광 개발로, 동네는 대규모 관광호텔 건설로 날이 갈수록 심각하게 오염되고 있었다. 나라 밖에서는 아프리카,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에서 대규모의 난민들의 중간거점으로 조그만 고무보트에 수십명이 몸을 싣고 유럽으로 밀항하다가 풍랑을 만나 익사한 시신들이 바다에 둥실둥실 떠다니기 시작한 201X년. 삼십대 초반의 어부 무스타파와 그의 아내 메수데 커플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무스타파는 세계적인 장수촌인 어메 마을의 백세가 넘은 노인에게 배운 대로 매일 동트기 전에 일어나 공복에 유리 찻잔 가득 올리브유를 마시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느끼하지 않을까? 김치 쪼가리 한쪽 집어먹으면 좋겠다 싶다. 도무지 말이 없고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마른 체구의 키 큰 남자는 무심하고 다른 것에 별로 신경쓰지 않는 듯한 남성미를 드러내는 어부. 험한 일을 해 먹고 사는 이 답게 어쩌면 야성적이고 거칠어 보일 수 있는 분위기를 풍긴다. 한 마디로 괜찮은 외모지만 가까이하기엔 좀 재수없는 스타일이라고 하면 될 듯. 그의 아버지도 평생 줄담배를 입에 물고 사는 가난한 어부였다가, 담배 때문에 폐암으로 죽었다. 얼른 죽지도 못해 없는 살림에 병구완을 하느라 낡은 조각배마저 몽땅 팔아먹고 집 하나만 달랑 남겨두고 숟가락 놨다. 어머니는 공무원한테 시집가서 조금 내륙지방 시내에 살고 있는 여동생 필리즈의 집에서 살고 있다. 무스타파는 어린 시절부터 노장 타흐신 선장에게 바다 일을 배우다가 세월이 흘러 선장이 은퇴를 한 후 낡았지만 멋있고 모터가 달린 고깃배를 월부로 인수해 폭풍이 불지 않는 한 해가 뜨기 한참 전에 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고 돈을 얻었다.

  스무 살 때 열아홉 살의 메수데와 결혼해 아들 데니즈를 난산 끝에 낳았다. 병원에 가지 않고 동네에선 실력 있다고 알아주는 산파를 불러 출산을 했지만 굉장한 하혈을 동반한 난산으로 출산 후에 병원 진료를 받지 않을 수 없었고, 늙은 산과 여의사는(‘여’의사라 썼다고 시비 안 하셨으면 좋겠다. 이슬람 문화권 튀르키예에서는 이게 매우 중요한 문제다.) 자기라면 더 이상 임신 출산을 하지 않겠다고 해 데니즈를 외동아들로 알고 키웠다. 데니즈는 바다를 몹시 좋아해 어려서부터 아빠를 졸라 함께 배를 타고 조업에 나가고는 했다. 일곱 살 되던 해. 아빠와 아들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고, 갑작스럽게 폭풍이 불어 닥치는 바람에 배가 뒤집어졌으며, 이 와중에 데니즈가 사라져버렸다. 무스타파는 넋이 나가 이후 몇 주일이나 아들의 시신이나마 찾으려 바다와 바다 속까지 뒤졌지만 결국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다. 젊은 시절부터 잠수부로 이름을 날린 아버지는 이후 절대 잠수하지 않았다.

  엄마 역시 넋이 나갔다. 모든 것을 잃은 슬픔은 이들 부부 앞에서 데니즈 이야기는 물론, 아이들에 관한 어떠한 단어도 사용하지 않는 배려를 주민들은 알아서 베풀었다. 그토록 사이가 좋던 부부 사이엔 건조한 모래바람만 불고, 대화라는 것은 증발해버렸으며 어쩔 수 없는 성생활도 무미한 과정에 불과했다. 둘째 아이라도 낳았으면 하는 아내의 바람도 의사의 조언을 깊게 명심하고 있는 남편의 피임을 막을 수 없었다. 말없는 사람들. 말없는 부부.


  그러나 바다는 여전히 무스타파의 직장이고 삶이며 연인. 그는 끊임없이 고기를 잡고, 낚시 여행을 온 사람을 태우고 난바다에 나가 낚시를 던졌다. 이때 들은 헤밍웨이 이야기. 노인이 작은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황새치를 낚았는데 밤이 새도록 황새치와 싸우느라 기진맥진 나가 떨어져, 운운. 그걸 들은 무스타파는 그 노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며 시답지 않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황새치가 그렇게 굉장한 물고기고, 며칠 밤낮을 항복하지 않고 버텼으면, 어부도 줄을 끊고 ‘자, 용감한 녀석. 넌 살 자격이 있어. 바다로 들어가 잘 살아’라고 해야 맞지요. 나도 엄청 큰 물고기를 잡을 때가 있어서 배로 끌어올리다가 엄청난 녀석과 눈이 마주칠 때가 있는데요, 어찌나 슬프게 바라보는지,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그놈을 다시 바다로 돌려보냈답니다.”

  무스타파는 엄청난 물고기를 좋아하고 특히 돌고래를 더 좋아한다. 하지만 이 바다가 변했다. 할아버지 시대 때부터 알고 있던 물고기 말고 처음보는 이상한 물고기들이 번식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어종이 복어와 쏠배감펭. 쏠배감펭은 독이 든 가시만 조심해서 구워 먹으면 맛이 기막힌 흰살생선이지만 복어는 도무지 어찌할 도리가 없다. 다행히 정부는 복어 꼬리를 잘라오면 마리 당 5리라를 보상해주겠다고 한다. 대신 꼬리를 잘라 바다에 버리라닌 지시. 시체를 먹은 바다 속의 생명체는 죽거나 말거나.

  이래저래 날이 갈수록 팍팍해지기만 하는 어부 생활에 무스타파는 자신만 알고 있는 포인트가 있었다. 비밀의 암초지대. 


  때는 2010년대. 전세계는 내전과 정세불안으로 국민을 심각한 위험에 빠뜨리는 나라가 곳곳에 있었다. 아프리카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이 작품에서는 거론하지 않지만 베네수엘라를 필두로 하는 라틴아메리카.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걷거나 브로커의 운송수단을 이용해 이란에 도착하고, 이란에서 다시 걷거나 운송수단을 얻어 타며 튀르키예로 집결한다. 이렇게 모인 난민들은 튀르키예의 숨겨진 곳에서, 하나에 수 천 달러를 하는 고무보트에 적정인원을 훨씬 초과하는 인원을 태운 채 많고 많은 그리스의 아무 섬에나 떨구어 놓는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타 바다가 고요하더라도 언제든 빠질 수 있는데 하물며 심한 파도나 폭풍이 치면 그때는 몰살의 위험도 각오해야 한다.

  자신만 아는 어장에 도착해 그물을 올리려는 무스타파의 눈에 물에 뜬 자루 같은 것이 들어온다.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든 그는 작업을 멈추고 다가간다. 저런. 다갈색 피부에 얼굴에 멍이 든 이십대 여인의 익사체. 그리스의 섬으로 가다가 고무보트에서 떨어졌겠지. 힘들여 배 위로 끌어올려 서둘러 귀항하던 중에 또다른 시신을 발견한다. 이십대 남자 익사체. 배에 자리가 없어 낚시줄로 그를 묶어 배에 매달고 끌고 간다. 그러다가 만난 익숙한 돌고래. 가만히 보니까 붉은 구명환 비슷하게 생긴 작은 고무보트, 라기 보다 아동용 물놀이 보트 같은 장난감 비슷한 것을 주둥이로 무스타파를 향해 몰고 오는 거였다. 그가 배를 몰아 건져보니, 에그머니나, 겨우 숨을 쉬는, 아직 숨이 멎지 않은 갓 낳은 사내 아이가 들어 있는 거였다. 무스타파는 관광객이 놓고 간 초코릿을 햇볕에 달궈진 프라이팬에 녹여 아이 입에 문질러 주고 서둘러 항구로 돌아온다.

  그리고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품에 안고 집에 데려와 아내 메수데에게 건네주는데, 알라신이여, 위대한 알라신이여, 당신의 능력은 끝이 없습니다, 바다는 아들 데니즈를 데려가더니 이제 피부는 더 짙어 다갈색이지만 또다른 아들 데니즈를 돌려주는 거였다.

  이렇게 이야기는 시작한다. 리바넬리다운 여러가지 세계적 문제, 환경, 개발, 난민 이슈를 포함한 개인, 가족, 지역사회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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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1-04 1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미있을 거 같네요. 세상엔 왜 그리도 죽는 사람이 많은지. ㅠ 작가가 행동하는 양심이라고 추앙을 받고 있네요.

Falstaff 2024-01-04 16:31   좋아요 1 | URL
옙.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강추 수준까지는 아닙니다. ㅎㅎㅎ 이이의 <세레나데>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대박입니다.

그레이스 2024-01-04 17: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길게 쓰시고, 이렇게 이야기는 시작한다...;;;
ㅎㅎ
튀르키에는 파묵만 생각나는데...
리바넬리 입력합니다.^^

Falstaff 2024-01-04 21:25   좋아요 1 | URL
튀르키예 작가들 몇 명 있는데 그새 잊었습니다. ㅎㅎㅎ 이 양반이 쓴 <세레나데> 문지 세계문학에서 나오는 데요, 재미납니다. 소위 강추! ㅋㅋㅋ
 
아무것도 아닌 일로
나탈리 사로트 지음, 이광호.최성연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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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탈리 사로트는 누보로망 계열의 소설가인줄 알았다가 검색 중에 희곡 작품이 눈에 들어와 얼른 읽어봤다. 뭐 그렇다고 사로트의 소설을 많이 읽어본 것도 아니다. 꼴랑 두 편 읽었다. <황금열매>와 <어린 시절>. 아마 사로트에 관심이 조금 있는 분들 가운데 이 독후감을 읽는 분 역시, 사로트의 희곡이라고? 약간의 의아심과 궁금증과 호기심이 솟는 것을 숨기기 힘들 듯하다. 사로트의 누보로망 작품은 읽기 어렵다. 내용이 난해해서도 아니고 현학적 철학의 철갑옷을 입고 있어서도 아니다. 한 장면을 미분하듯이 세밀하게 쪼개 그걸 낱개로 묘사하고 설명하기 때문이다. <시트르의 바닷가>를 쓴 쥘리앙 그라크가, 특별한 주장도 없으면서 한 물체나 형태를 과하게 세밀하게 묘사했기 때문에 누보로망이 쇠퇴하게 될 것이라고 했듯이, 아니 독자가 저절로 그라크가 한 이야기가 맞는 말이기를 바라게 되는 현상과 비슷한 방법으로, 읽기 어렵다. 하여간 나는 그랬다. 로브그리예보다 더 힘들었다. (며칠 후에 로브그리예를 읽게 될 지는 지금은 전혀 몰랐다. 그때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이 작품은 1985년 5월 말에 뉴욕 연극클럽에 의하여 세계 초연되었다. 사로트가 1900년생. 이때 나이 85세. 프랑스어 공연은 다음해인 1986년에 파리 롱푸앙 극장에서, 우리나라 초연은 2023년 제주도 세이레아트센터에서 극단 사자자리가 공연했다. 등장인물이 남자 1과 남자 2로 되어 있지만 우리나라 공연에선 여자 1과 여자2가 등장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활발한 창작생활을 하다가 1999년, 망백의 나이로 세상을 접기까지 이 러시아 유대인 출신 여성 극작가는 20세기의 온갖 전쟁과 사건과 문명의 발달과 인종의 교류와 사상의 전도를 겪으면서도 전 생애를 걸고 개인의 마음 속 움직임, 동향, 기울어짐, 지향 같은 것을 천착했다. 이이의 소설은 쉽지 않지만 직접 극을 지켜보는 관객들은 시청각을 통해서, 우리나라 공연에서는 부분적으로 관객의 극 참여를 통해 극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관객이 짐작한 것을 분명한 문장으로 설명하기는 곤란했을 수 있겠지만.


  이야기는 간단하다. 극도 단막극이다. 절친한 친구 사이인 남자1과 남자2. 남자1은 결혼해서 아이도 하나 낳고 사회적, 가정적으로 성공적이고 안정적으로 살고 있다. 남자2는 결혼 여부는 나오지 않지만 미혼인 것처럼 보이고 문학에 종사하거나 상당히 관심이 있으며 일반적 시선에 의하면 남자1보다 잘 나가지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남자2는 남자1을 예전처럼 가까이 지내려 하지 않는다. 언제나 남자1이 남자2에게 전화를 하고, 만나서 이야기하고, 술도 한 잔 하고, 서로의 고민을 털어놓기도 하고 계획을 상의하기도 했는데 남자1 입장에선 영문도 없이 남자2가 전화를 받아도 시큰둥하기 시작했던 거다. 남자2는 전화를 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 이런 사람 많잖은가. 그런 인간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남자1은 차츰 거리가 멀어지는 것을 감지하고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다. 혹시 남자2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 아니면 오해라도 하고 있는 거 아냐, 이거?

  그래서 남자1은 남자2를 만나 솔직하게 물어본다.

  “너는 내가 이런 얘기하게 될 거라는 거 알고 있었을 거야. 왜냐면 우린 요즘 예전 같지 않아. 아무래도 뭔가 있는 게 느껴져. 그게 뭔지 머리를 쥐어짜고 쥐어짜도 적어도 내 기억 속에는 없거든. 너는 뭔가 변했어. 저번에 전화했을 때 네가 나를 완전 생판 모르는 사람처럼 대해서 나 정말 상처받았어,”

  남자2도 대답한다.

  “나는 안 그랬을 거 같아? 난 여전히 너를 좋아하는데, 넌 내가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란 생각은 안 드니? 아냐, 아냐. 말하고 싶지 않아. 그렇게까지 나쁜 일은 아니야. 관둬.”

  남자1은 남자2가 자기를 이런 식으로 대하는 것에 상처를 받았다. 반면에 남자2는 자신보다 모든 면에서 성공하고 있는 남자1에게 상처받은 일이 있다고 확신한다. 그런데 자기가 받았다고 하는 상처를 드러내는 일이 그렇게 자랑스럽지도 않고 내세우고 싶지도 않고 심지어 굳이 말로 하기도 싫다. 하지만 이 극은 애초부터 무언극이 아닌 걸.


  “좋아… 음… 사실 전에… 네가 나한테 뭐라고 했는데 그게… 그러니까 내가 그때 약간 자랑을 했나, 아니… 그건 잘 모르겠고… 원가 소소하게 해낸 일이 있어서… 아, 물론 되게 웃기는 일이지만 암튼 그런 일이 있었을 때, 네가 이러더라구. ‘대~단하다…’”


  남자2가 비록 사회적 성공은 거두지 못했을지라도 자잘한 성공은 언제나 거둘 수 있어서 아마 자랑 비슷하게 했던 모양이다. 그러자 잘 나가는 남자1이 절친 남자2를 향해, “대단하다, 야!” 감탄을 터뜨려주지 않고 “대~~단하다.”라고 말해서 이걸 들은 남자2는 아무리 생각하고, 궁리하고, 고민하고, 술 석 잔을 마시면서 다시, 생각하고, 궁리하고, 고민해봐도 역시 칭찬이 아니라 비꼬는 것일 뿐이라고 결론을 냈던 거다. 남자1 입장에서 보면 자기가 이룬 작은 성공이야말로 비웃어도 마땅할 사소한 것이라고 아예 마음 속으로 확정했기 때문에.

  남자1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이 비슷하게 행동을 하거나 말한 기억도 없거니와, 스스로도 자신이 잘 나가는 걸 알고 있어서 평소에 쓸데없는 구설수에 휩쓸리기 싫어 이 비슷한 말도, 행동도 특별하게 주의하고 있어 그렇게 했을 리가 없다. 틀림없이 자신은 격려나 축하의 의미로 이야기한 것을 쪼잔한 남자2가 그렇게 들은 것이 분명하다. 물론 이렇게 직접 대놓고는 이야기하지 않지만 희곡을 읽거나 극을 관람하는 사람들은 다 그렇게 알아듣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자기 고집을 꺽지 않는 남자1과 남자2. 이들은 드디어 길거리에 서서 여보시오 지나가는 사람들아, 소리쳐 진짜로 지나가는 남자3과 여자1을 불러 세운다.

  우리나라 공연에서는 남자3과 여자1 대신 관객 두 명을 진짜로 무작위로 뽑아 무대에 올려서 남자1, 남자2가 (제주도는 여자 많은 섬이라 젠더를 바꾸어 여자1, 여자2로 공연) 이들에게 누구 말이 맞는가 시비를 가려달라고 부탁하건만, 세상에서 남의 일에 끼어들기 가장 싫어하는 프랑스 사람들이라, 아 몰라, 몰라, 빈말로 넘겨버리고 자리를 뜬다.

  이후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남자1은 또 자기 나름대로 남자2에게 수틀렸던 점을 끄집어낸다. 다섯 명이 등산 갔는데 남자2가 풍경이 근사하다며 얼른 하산해서 뜨끈한 닭백숙에 쐬주 한 잔 걸치고 싶어하는 일행 네 명을 그렇게 추운 날씨에 한참이나 기다리게 했던 일이다. 등산이라고 해도 우리나라 등산을 생각하면 안 된다. 알프스 얼음 능선을 건너는 일이라 다섯 명이 전부 자일로 몸을 연결해 일렬 행진해야 하는 전문가 코스라서 한 명이라도 낙오를 하면 전원이 꼼짝하지 못한다.


  남자1과 남자2, 둘 다 쪼잔하다. 뭐 세상이 다 그런 것이란 주장, 쉬운 얘기로 사소한 것에 목숨 거는 게 사람 사는 일이란 걸 나탈리 사로트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모양인데, 아쉽게도 나는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사람마다 스타일이 달라 내 경우만 주장하고 싶지 않지만, 나 같으면 벌써, 너 좀 만나자, 해놓고 곧바로 물어볼 거 같다.

  “내 귀엔 ‘대~단하다’ 할 때 발음이 날 우습게 보는 것 같이 들렸는데 맞아? 천만의 말씀, 아니라고? 알았어. 하여간 그렇게 들렸으니까 그건 네 잘못이다. 그러니까 술 사라.”

  이렇게 끝냈을 거 같고, 알프스에서 네 명을 기다리게 만들면서 경치 구경을 하는 남자2한테는

  “염병하지 마시고 얼른 내려가자 4대 1, 다수결이다 새꺄.”

  했을 거 같은데, 참 그걸 여태 가슴 속에 넣고 끙끙 앓는 프랑스 사람들, 짠하다, 짠해.

  내가 읽기에 나탈리 사로트는 읽기가 곤혹스럽지만 그래도 소설이 좋았다…… 정말?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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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 블랑카의 회고록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24
테레사 데 라 파라 지음, 엄지영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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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레사 데 라 파라. 1889~1936. 독일 베를린 주재 베네수엘라 외교관의 딸로 파리에서 태어나 마흔 여섯 살까지 살다가 마드리드에서 죽은 베네수엘라의 대표적 소설가. 1924년 작 <이피게네이아>와 1929년 작 <마마 블랑카의 회고록>을 대표작으로 꼽는다고 한다. 20세기 말까지 세상에서 아름다운 여성이 가장 많이 사는 나라가 베네수엘라라고 했다. 당시에 베네수엘라 지사로 파견을 나간 대학 1년 선배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 이후로는 연락이 끊겨버렸지만. 당연히 지금은 지사도 다 철수해버렸다. 사실상 깡패들이 통치할 만큼 치안이 불안하고 석유 저장량 세계 1위임에도 정작 주요소에 휘발유 구경을 할 수 없는 나라에 지사를 유지할 수 없겠지. 이게 지금의 베네수엘라지만 한 시절엔 세상의 모든 돈이 다 그 나라로 쏠렸던 적이 있다. 미국에서 셰일 석유를 개발한 다음부터 곡소리가 나서 탈이지만.


  이 책은 머리말이 스무 페이지나 된다. 겉으로 주장하는 것은 작가 데 라 파라가 마마 블랑카를 어떻게 알게 됐으며, 그 할매가 어떤 성격이었고 자신과 얼마나 친한 사이였는지, 마마 블랑카가 쓴 회고록을 자신이 넘겨 받은 내력과 아무도 보여주지 말라고 했던 회고록을 출판하게 된 사연 등을 적은 내용이지만, 만원 내기해도 좋다, 이 머리말도 픽션의 일부이다.

  ‘마마 블랑카’의 원래 이름은 놀랍게도 블랑카 니에베스. 우리말로 ‘백설공주’라는 뜻이다. 반대말은 네그라 니에베스. 흑설공주. 아재 개그로 백설공주는 백만명이 설설 기는 공포의 주둥아리를 말한다. 마마 블랑카는 소녀 시절부터 백인임에도 가무잡잡한 피부에 까만 다리, 다리보다 훨씬 새까만 팔뚝을 가지고 있었는데 왜 그런고 하면, 햇빛이 작살인 피에드라 아술 농장에서 사방을 둘러봐도 지평선이 까마득한 벌판 한 가운데 자리한 천연의 자연 속에서 하도 뛰놀아 그렇게 됐었다. 원래 이름은 백설공주이건만 맏손자가 할머니를 마마 블랑카라고 부르는 바람에 그게 굳어져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마마 블랑카라고 하기 시작했다. 사람 자체가 이름처럼 흰 머리카락과 너그러운 마음을 가진 넉넉한 인품을 지녀서 아무 부담 없이 그렇게들 불렀을 터. 내가, 여기서 말하는 ‘나’는 작가 테레사 데 라 파라를 말하는데, 열두 살이 채 되기 전에 마마 블랑카를 처음 만났고 그때 할머니는 일흔 살이었다. 60년의 터울에다 1920년대 말, 증조할머니 뻘이었다. 만난 장소는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처럼 보인다.

  이때는 PC도 없고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라 아이들이란 아이들은 모두 밖에 나가서 놀았다. 물론 ‘모두’는 아니다 극히 소수의 아이들은 집에서 전래동화나 위인전기전집이나 이모가 보다 던진 선데이 서울을 읽었을 테니. 조금 있으면 열두 살이 될 테레사도 동네에서 놀다가 평소엔 눈에 그리 들어오지 않았던 낡고 조용한 집이 있어서 그냥 한 번 들러보고 싶은 마음에 대문을 살짝 밀어봤더니 스르르 열리는 바람에 고개를 빼쭉 들이밀었다. 분수가 약하게 뿜어져 나오는 마당을 지나 열린 창문을 통해 흰 가운을 입은 할머니가 있어서, 초콜릿이 찬 잔에 스펀지케이크를 들고 있는 것을 보아 점심식사를 하고 있던 것처럼 보였다.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기척을 느낀 할머니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발견했고 이어서 다정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이렇게.


  “아, 아주 좋아. 잘했어! 허락도 받지 않고 방으로 불쑥 들어오는 고양이나 새처럼 남의 삶을 살펴보다니! 그렇다고 도망가지 말고 이름이 뭔지 말해줘. 예쁘고 호기심 많은 아가씨!”


  물론 정말로 이렇게 길게 말하지는 않았을 거 같다. 그저 웃으면서 이름을 묻고 집 안으로 들어오라고 권했을 정도 아니었겠나. 하지만 작품을 발표한 시기를 감안하면 이처럼 수식어를 많이 포함한 문장을 사용하는 것이 그리 어색하지 않을 수 있겠다. 아니면 테레사 데 라 파라의 문장이 그렇거나. 그럴 수 있다. 이런 문장이 책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니 데 라 파라의 독특한 문체라고 봐도 될 듯하다.

  이렇듯 마마 블랑카는 예상치 못한 일을 당해도 활달함을 잃지 않는 성격이어서 사소하면서도 즐거운 일을 좋아했다. 낡은 피아노를 치는 것도. 나중에 나는 할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우는데 할머니가 몰두해서 피아노를 연주할 때는 완전히 집중을 하기도 했다.

  한 번은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를 치고 있었다. 이때 시인이나 생쥐처럼 가난한 할머니에게 오래 갚지 못한 빚을 갚기 위해 채무자가 들른 적이 있다. 하녀가 들어와서 조그만 목소리로 사실을 알렸고 할머니는 째려보며 나 피아노 치면 누구를 막론하고 들여보내지 말라고 했지? 타박을 놨다. 보다 못한 하녀가 다시 한번 들어와 채무자가 돈을 갚으러 왔다고 조금 더 큰소리로 일렀고, 할머니는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오라고 해.”라고 단칼에 물리쳐버렸다. 채무자는 빚 갚는 걸 포기한 채 그길로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으며 할머니도 그걸 알고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나. 하여간 음악에 관한 거 말고는 세상에 좋은 사람이었다.

  집은 오래되어 낡고 초라했지만 청결한 느낌과 향긋한 냄새가 사방에 감돌았으며, 사탕수수 농장, 사탕수수 제분소, 커피 가공회사가 있는 곳에서 낳고 자라 야생 동식물에 관해 통달을 한 수준이었다. 나와의 우정을 향해 인용한 것도 바이올렛, 데이지, 아네모네 등의 현란한 꽃에 관한 수식이었다. 당연히 데 라 파라의 화려한 수식이 짧지 않게 첨부되어 있다.

  원래는 있는 집 따님으로 있는 집 아들과 결혼해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남편과 사별 후 증권투자를 했다가 완전히 가산을 탕진해서 속세를 떠난 사람처럼 혼자 가난하고 외롭게 살고 있다. 부자는 망해도 3년 간다고 그래도 하녀는 한 명 있다. 뭐 그런 것이지. 시인이나 생쥐처럼 가난해도 하녀는 한 명 있어야 하는 거. 하여튼 가산을 말아 자신 다음엔 복권을 사기 시작했고, 함께 살자는 아들들의 권유를 모두 거절했다. 아들들은 모른다. 잘 배운 부르주아 가문 출신의 며느리들이 별로 배운 것 없고 가진 것도 없는 시어머니를 내심 수치스럽게 여긴다는 것을. 그러나 마마 블랑카는 여전히 이웃에게 친절하고 활발하고 명랑하게, 화려한 말 솜씨를 구사하며 즐거운 남은 생을 소비하고 있었다.

  어느 날. 드디어 마마 블랑카의 부고가 도착했다. 나는 얼른 상가에 도착해 할머니가 직접 쓴 회고록을 손에 넣는다. 할머니가 자식, 손주들을 위해 쓴 자서전이라 그들에게 넘기려 했으나 암만 생각해도 자손들은 한 번 휙휙 넘겨보고는 그만일 거 같아서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고 내게 준 것이다. 원고는 자기 기억의 초상화라고, 자신의 기억과 함께 오래 간직해달라는 부탁과 더불어.

  그러나 데 라 파라는 할머니의 당부와 달리 마마 블랑카가 쓴 회고록을 자신의 수정과 문법적 보완을 거쳐 출간하려 한다. 그것이 인생이지. 죽은 자는 아무런 권한이 없는 거다. 아예 남기지 말았어야지, 마마 블랑카.


  이렇게 회고록은 시작한다. 광활한 벌판 위의 피에드라 아술 농장. 아버지와 어머니와 7개월부터 일곱 살까지 한 번도 농장의 울타리를 넘어가본 적이 없는 여섯 자매. 아이들의 화려한 이름들. 아우로라, 비올레타, 블랑카 니에베스, 에스트레야, 로살린다, 아우라 플로르. 트리니다드에서 자매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러 온 잉글랜드 계 물라토 여인 에벌린과 세 명의 보모. 식사시중 담당 하녀 알타그라시아와 아이들 잠자리를 맡은 하녀 헤수시타. 주방을 책임지는 요리사 칸델라리아.

  아버지는 끊임없이 아들을 갖기 원하고 아들이 태어나면 자신의 이름인 후안 마누엘라라는 이름을 주기로 했건만, 15~16개월에 한 번씩 세 달에 달하는 여행을 떠나 딸 하나를 품에 안고 돌아온 아내는 결코 아들을 생산하지 않은 가정. 이 야생의 벌판에서 야생으로 살던 여섯 자매들의 유소년 시절. 그리고 자매들의 교육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도시 카라카스로 옮긴 이야기까지. 일흔을 훨씬 넘긴 노인 마마 블랑카가 기억하는 저 어린 시절의 벌판과 자연과 농장과 짐승들과 사람들 이야기. 그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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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01-02 12: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
혹시 전생에 사람이 아닌
도서관과 책이라는 건물과 사물?
매번 감탄하며
힘에 벅차지만 열심히 따라 가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Falstaff 2024-01-02 16:14   좋아요 1 | URL
그냥 할 거는 책 읽는 거밖에 없는 백수라니까요. ㅎㅎㅎㅎ
페넬로페 님도 올해..... 아, 저는 추상명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복 대신에 말입죠, 그저 연초에 로또 한 방 콱, 맞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