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손한 손 창비시선 297
고영민 지음 / 창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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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읽는 고영민. 이름은 많이 들어봤다. 이리저리 지나다니면서 얼핏 시 몇 수도 읽어본 거 같다. 1968년 서산, 오리지널 충청도 사람이다. 2002년에 이 양반이 시인으로 등단하는 바람에 축구 월드컵에서 4강에 올랐다는 농담도 들린다. 생긴 모습은 영낙없이 차도남이건만 시 읽어보면 완전히 논두렁이다. 시집이 나온 때가 2009년. 시인이 갓 사십대가 됐을 때. 그러니 그의 삼십대 후반의 생활과, 추억과, 그리움과, 회상, 그리고 노스탤지어로 꽉 차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런 시가 좋다. 읽으면 읽는 즉시 장면이 눈 앞에 확 그려지는 시. 주장하는 것이나 말하고 싶은 풍경이나, 아니면 운율감이나 하여간 시로 형상/비형상화 하고 싶은 것들이 과연 무엇일까 궁금해할 필요가 없는 편한 시. 애초에 이해불가인 문장과 단어를 읽으면서 오직 하나, 시나 시인의 유명세 때문에 좋다고 해야 할 것 같은 부담에서 자유로운 시. 저 오랜 시절의 그림과 생활과 사람들을 회상하는 남루한 그림이라면 더욱 좋다.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 낡아 누추하지만 뭔가 하나가 마음 속에서 부스러지지 않나? 나는 비록 도시 취향이지만 얼마든지 좋다.

  붉고 오종종한 작은 열매 앵두. 시인은 어느 날, 거리를 달리는 앵두를 발견하고 이렇게 노래한다.



  앵두



  그녀가 스쿠터를 타고 왔네

  빨간 화이바를 쓰고 왔네


  그녀의 스쿠터 소리는 부릉부릉 조르는 것 같고, 투정을 부리는 것 같고

  흙먼지를 일구는 저 길을 쒱, 하고 가로질러왔네

  가랑이를 오므리고

  발판에 단화를 신은 두 발을 가지런히 올려놓고

  허리를 곧추세우고,

  기린의 귀처럼 붙어 있는 백미러로

  지나는 풍경을 멀리 훔쳐보며

  간간, 브레끼를 밟으며


  그녀가 풀 많은 내 마당에 스쿠터를 타고 왔네

  둥글고 빨간 화이바를 쓰고 왔네   (전문)



  예전 말로 다방 레지. <너는 내 운명>에서 스쿠터 타고 커피 배달을 하던 전도연 생각하면 딱이다. 여기서 나는 조심해야 한다. 이 시 어디에 스쿠터를 타고 다니는 빨간 헬멧의 여성이 커피 배달을 하는 다방 아가씨라고 이야기를 했느냐, 라고 되물으면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시인한테 물어보면 이미 써서 발표한 것이라서 자기도 모른다고 시침을 뚝 뗄 것이다. 이미 품에서 떠난 ‘그녀’이니까. 하여간 독자인 나는 1연을 읽으면서 단박에 농촌 마을의 커피 배달하는 아가씨를 연상했고, 배달 아가씨의 결정판으로 전도연이 떠올랐으며, 유치장 철망을 흔들면서 오열하는 황정민이 참 기가 막혔지, 여기까지 진척시켰다. 그러니 일상적으로 곱지 않게 바라보는 커피 아가씨의 붉은 헬멧을 앵두도 딱 꼽을 수 있는 시선이 바로 시인의 눈길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다. 심지어 자신의 두 번째 시집 《공손한 손》에 처음 실리는 작품으로 이 시를 올려 놓았음에야.


  고영민 같은 서정시인을 읽다 보면, 이제 시어란 시어는 다 개발했기 때문에 시의 암호화와 메타포가 없이는 시를 쓸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 같은) 시인들의 주장은 아직 시기상조이며 그런 시절은 앞으로도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두 번째 실린 <싸이프러스 사이로 난 눈길을 따라>는 제법 긴 시인데, 전문을 읽지 않고 따로 뚝 떼어 산문처럼 읽는다면 별 감흥이 일지 않을 수 있으나 정말 평이한 단어와 문장만으로도 넉넉하게 그릴 수 있는 한 장면도 있다.


  눈이 왔다

  싸이프러스 사이로 난 눈길을 따라 너와 함께 걷는다

  목도리로 얼굴의 반을 가린 너는 한동안 나를 쳐다보았고

  말없이 다가와 팔짱을 끼워줬다

  나는 속으로 행복하다고 말했다

  (중략)

  싸이프러스 사이로 난 눈길은

  걸어도 걸어도 끝나지 않고

  새의 발자국 같은 흔적들이 그 위에 고스란히 남겨졌다   (부분)


  시집 《공손한 손》을 관통하는 정조는 위에서 말한 추억, 그리움, 회상, 그리고 노스탤지어다. 이상향은 아니더라도 마음 속에 깊게 담겨 있는 어릴 적 들판. 시집을 읽어보면 혹시 시인이 아직 농촌이나 농촌을 면한 소도시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파트가 아닌 개인주택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추측도 가능하지만, 천상병 문학상을 받은 2020년 현재 포철교육재단에 근무하고 있다니까 위도 높은 순으로 인천, 포항, 광양 가운데 한 곳에서 살고 있지 않은가 싶다. 그래도 여전히 마음 속에 이런 풍경을 담고 있는 거 하나만 가지고도 태생적 시의 재산으로 얼마냐는 말이지.



  허밍, 허밍



  해질녘 저 밭은 무엇인가

  해질녘 저 흐릿한 논길은

  해질녘 밭둑을 돌아 학교에서 돌아오는 거미 같은 저 애들은 무엇인가


  긴 수숫대

  매양 슬픈 뜸부기 울음


  해질녘 통통통 경운기 짐칸에 실려가는

  저 텅 빈 아낙들은 무언인가

  헛기침을 하며 걸어오는 저 굽은 불빛은 무엇인가


  해질녘 주섬주섬 젖은 수저를 놓는

  손

  수레국화 옆에서 흙 묻은 발목을 문지르는 저 고단함은

  해질녘 내 이름 석 자를 적어온

  이 느닷없는 통곡은 무엇인가


  해질녘, 해질녘엔

  세상 어떤 것도 대답이 없고

  죽은 사람은 모두 나의 남편이고 아내이고

  해질녘엔 그저 멀리 들려오는

  웃는 소리, 우는 소리


  허밍, 허밍    (전문: 3연 아낙들은 “무언”입니다. “무엇”의 오식 아닙니다.)



  시집 한 권 읽고 외우고 싶은 시 두 수를 발견하면 팔땡이고, 세 수 이상이면 대박이다. 이런 의미에서 《공손한 손》은 대박이다. 소설 속에서는 대개 아버지들이 가족의 괴물인데, 시 속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 시집에서도 아버지와 관련한 어여쁜 광경이 몇 군데 나온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 어느 순간, 무거운 세상을 저버린다. 어쩔 수 있나, 인생인 걸. 어려서 생선 가시가 목에 걸린 시인에게 아버지가 밥 한 술을 씹지 말고 꿀꺽 삼키라고 했듯이 이제 시인이 목에 가시가 걸린 딸 아이에게 밥 한 술을 꿀꺽 삼키라고 밥상머리에서 말하고 있는 시도 정겹다. 이런 것을 다 소개하고 싶지만 분량이 너무 많아져 애써 참아야 하는 것이 아쉽다. 다만 이런 시.



  해감


  민물에 담가놓은 모시조개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몇번을 소리쳐 부르자 당신은 간신히 한쪽 눈을 떠 보였다 눈꺼풀 사이 짠 물빛이 돌았다 마지막으로 당신은 나를 몸 속에 새겨넣겠다는 듯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그르렁, 그르렁 입가로 한움큼의 모래가 토해졌다 간조선을 지나 들어가는 당신의 흐린 물빛을 따라 축축한 한 생애가 패각 안쪽에 헐겁게 담겨 있었다 짠물을 걸러내며 당신은 물무늬 진 사구를 온몸으로 기고, 몸을 잊으려 한쪽 눈을 마저 닫자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울컥울컥, 검은 모래가 걷잡을 수 없이 토해졌다 나는 당신의 손을 움켜쥔 채 더 깊은 물밑까지 따라들어갔다 여윈 갈빗대에서 해조음이 들려왔다 어느 순간, 이제 오지 마라! 따라오지 말라고 이놈아! 당신의 불호령을 들었다 두꺼운 껍질 밖으로 나는 움찔, 한순간 떠밀려나왔다 패각을 움켜쥔 채 꼭 사나흘만 더 묵고 싶다던 당신의 늙은 아내가 밀려나왔다 마지막으로 당신은 몸 밖으로 검은 해변을 푸득푸득, 싸놓았다 지끄럽던 한 생애가 말갛게 비워지고 있었다   (전문)



  그렇게 가는 거지. 사람도 가고 세월도 가고. 이 시집 이후에도 고영민은 각종 문학상을 수집하며 계속 시집을 내고 있다. 또 읽어야겠다. 어째 요즘엔 충청남도 출생 시인들을 많이 읽는다. 대전 사람 고 윤택수, 홍성 출신 이정록, 이번엔 서산의 고영민까지. 출생이 어디면 어떠냐, 시인이 시만 좋으면 대빵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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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4-01-15 0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좋아하는 시인이랍니다.

Falstaff 2024-01-15 08:14   좋아요 0 | URL
앗, 그렇습니까? ㅎㅎ 반갑습니다.
 
정육점 주인들의 노래클럽
루이스 어드리크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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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의 경비원>을 재미나게 읽어서 이이의 새 책이 나왔다는 말을 듣고 얼른 읽었는데, 루이스 어드리크, 이이를 좋아하는 독자가 생각보다 많은가 보다. 도서관에 어드리크의 책이 거의 다 있는 걸 보니까. 어드리크는 독일인 아버지와 프랑스-원주민 혼혈 어머니 사이의 일곱 남매 가운데 맏딸로 태어났다. 루이스의 부모가 노스다코타 주의 가장 오른쪽, 가장 아래쪽에 있는 리치랜드 카운티의 와페턴 시의 인디언 기숙학교 교사로 있어서 작가도 인디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데, 따져보면 혈통의 1/4만 인디언 계이다. 그러나 핏줄보다 자란 환경과 어울린 사람들, 생각하는 방법이 그들과 더 유사하다면 스스로 본인이 인디언이라고 생각한다고 한들 조금도 문제될 건 없겠다. 겨우 책 두 권을 읽고 이렇게 말하면 안 되겠지만 루이스 어드리크는 윌라 캐더, 윌리엄 포크너, 셔우드 앤더슨, 카슨 매컬러스를 잇는 지방주의 작가처럼 노스다코타를 작중 무대로 삼는 건가 싶기도 하다. 실제로 작중에 주인공 델핀이 소설책 읽기에 맛을 들이는데, 집중해서 읽는 소설가 중에 포크너와 캐더가 들어 있기도 하다.

  <밤의 경비원>은 미국 정부와 인디언들이 “국가 대 국가”의 계약으로 인감도장 찍은 것을 지키려는 치페와 부족의 노력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정육점 주인들의 노래클럽>은 작가의 아버지처럼 독일계 이민 남성과 20세기 이전에 이민을 온 백인 가정의 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장소는 여전히 노스다코타인데 자리를 조금 올려서 리치랜드와 인접한 북쪽 카스 카운티의 아거스빌Argusville. 아거스빌은 작품에서 소개한대로 도시가 설 이유가 없었음에도 단지 철도가 놓이고 정거장이 들어서는 바람에 저절로 사람들이 모여 작은 마을을 만든 곳이다. 위키피디아에 나오기를 20세기 말까지는 인구가 150명이 되지 않았다니까 우리나라로 치면 면소재지보다도 작은 동네였다. 버스정류장이 있고 정류장 앞에 구멍가게 하나, 짜장면집 하나 있는 촌동네 생각하면 딱이다. 지금은 주택 건축 붐이 크게 불어 2020년 기준 인구가 무려 480명이다. 그러나 시대는 1922년부터 1954년까지.


  1차 세계대전에 독일군 저격수로 참전한 피델리스 발트포겔. 저격수의 본질은 원샷원킬이다. 다만 한 발의 발사를 위하여 그는 몇 시간이고 움직이지 않는 정물로 있어야 했으며, 드디어 목표가 시야에 들어온 순간 아무 머뭇거림과 선입견과 판단 없이, 숨을 들이마시고 약간 뱉은 상태에서 참고, 맹목적으로 방아쇠를 당겨야 했다. 원래는 어울리기 좋아하고 사교성도 있는 청년이었지만 전쟁, 특별히 저격수가 된 이후로 그는 자신의 생명보존을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해 무한히 기다리고, 무한히 인내하는 습관을 들여야 했으며, 이 습관 때문에 적에게는 물론이거니와 아군에게도 참으로 재수없는, 정이 안 가는, 보기만 해도 소름 돋는 인간으로 취급 받았다. 하는 일이 오직 생명 제거를 위한 일이라서. 가까이하면 어쩐지 죽음이 그만큼 빨리 올 듯한 느낌. 그에게는 하인리히라는 이름의 전우가 있었다. 그가 피델리스를 두 번 살려주었다. 한 번은 적의 총알이 피델리스의 턱을 관통하고 지나갔을 때, 또 한 번은 정신을 잃고 진흙탕에 엎어져 있을 때 장갑차가 그를 깔고 지나가려 했을 때. 모든 사람이 피델리스를 경원해도 하인리히는 절대 그러지 않았으며 그를 보면 늘 웃음을 지어주었다. 선한 하인리히는 가슴에 건 로켓 속에 든 애인 에바 칼프의 초상을 보여주면서 자신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면 에바와 결혼하라고 말하고는 했다. 그리고 그는 전쟁 말기에 퇴각하면서 포탄 파편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자신을 두 번이나 살려 주었음에도 피델리스는 그를 묻어주지도 못하고 걸음을 돌려야 했다. 일단 살아야 했으니까.

  1918년 11월 말. 전쟁이 끝나고 꼬박 열이틀을 걸어 프랑스 국경에 접한 집에 도착한 피델리스는 며칠 동안 잠에 빠져 있다가 몸을 깨끗이 하고 오일렌슈트라세 17번지에 있는 방치된 느낌의 집을 방문한다. 지금은 피델리스의 주머니에 든 하인리히의 로켓 속 여인 에바 칼프를 찾아. 사랑하는 하인리히가 아닌 그의 전우가 방문한 것으로 단박 불행한 일을 알아챈 만삭의 에바는 정신을 잃고, 피델리스는 며칠 후 하인리히와 약속한 대로 에바에게 청혼을 해 결혼한다. 그녀의 크고 둥근 배에서는 숲속 벌꿀의 달콤한 끝에 남는 쌉싸래한 맛이 났다.


  드디어 1922년이 왔다. 전후 보상금 문제로 자국 화폐를 무한정으로 발행해 불행의 마르크화 시대를 맞이한 도축장인Meisterbutcher 발트포겔 가문은 저격수 출신의 둘째 아들이 제대할 때 가져온 라이플 총을 메고 숲에 들어가 밀렵을 해 잡아온 멧돼지를 발트포겔 씨가 장인솜씨로 유럽에서 제일 맛있는 소시지로 만들어 팔아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그래도 괜찮게 지냈다. 에바의 아들 프란츠가 벌써 세 살이 되었을 때, 루트비히스루에 광장에서 난생 처음 미국의 흰빵을 구경할 수 있었다. 세상에나. 빵이 각이 질 수가 있다니. 독일인이 구운 빵은 언제나 모서리가 둥글다. 그러나 미국인이 만든 빵은 새하얀 색깔에 각이 또렷한 사각형. 미 모습을 감탄하며 바라보고 있는데 한 마디가 더 들렸다. 이 빵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기계를 통해 무한정 생산하는 것이라나. 아, 미국의 첨단 기계 기술에 넋이 나간 피델리스는 그 자리에서 미국으로의 이민을 결심한다.

  뉴욕에 도착한 피델리스가 아는 영어라고는 기차, 기차역, 서쪽, 최고의 소시지, 정육점 주인, 일자리, 돈, 땅 밖에 없었고, 가방엔 약간의 내의와 아버지가 정성들여 만든 유럽 최고의 소시지, 기가 막히게 잘 드는 가업용 칼 여섯 자루와 칼갈이 봉, 표면의 거칠기가 각기 다른 여섯 개의 숫돌, 주머니 속 35센트가 전부였다. 이미 발전할 대로 다 발전한 동부보다 서부에 더 큰 기회가 있다는 말을 듣고 애초부터 시애틀로 갈 예정이었던 피델리스는 이제 뉴욕 역에서 가방을 펼쳐놓고 아버지의 소시지를 팔기 시작했다. 가방을 들고 전혀 움직이지 않은 채. 온몸에 위장막을 감고 엎드려 숨을 죽이고 하루 종일, 심하면 몇날 며칠을 꼼짝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에 숙달이 된 피델리스의 놀랄만한 인내심에 뉴욕시민은 놀라 자빠져 그의 소시지를 거의 대부분을 산다. 이때 생각하기를, 나머지는 열차 안에서 팔면 되겠다 싶어 돈이 되는 대로 차표를 끊어 서쪽으로 출발한 피델리스. 그는 얼마 가지 못한 뉴다코타주 아거스빌에서 하차한다. 일단 이곳 정육점에 취직을 해 돈을 벌어 다시 서쪽으로 갈 요량으로. 그러나 생각대로 되면 그게 인생인가? 그는 그곳을 영영 떠나지 못한다. 그것보다 돈을 벌어 시 외곽에 정육점을 차리고, 누나 마리아 테레사와 아내 에바와 (에바의)아들 프란츠를 데려오는 선에서 타협을 한다.


  피델리스가 이후에 마르쿠스와 쌍둥이 에리히와 에밀을 낳아 모두 네 명의 아들을 두는 사이에, 미시시피 상류의 작은 타운인 아거스빌에서 연극공연을 하다 만난 보잘것없는 농장 출신의 억센 폴란드 여자(라고 일단 알아두면 좋을) 델핀 바츠카와 1차대전에 참전하여 몸의 여러 곳에 흉터가 생긴 반 오지브웨족 인디언 시프리언 라자르 커플은 극단에서 독립해 둘이 한 팀으로 균형잡기 쇼를 하면서 생활한다. 커플 이상이 아닌 커플. 시프리언이 전쟁에 나가 이질에 걸려 사내 구실을 하지 못한다. 그렇게 주장했다. 생전 처음 듣는다. 이질은 한정없이 설사를 하는 병인데 그게 어떻게 생식기 혈관과 연결이 지어지나? 책을 1/5 정도 읽으면 이유가 나온다. 그는 사내 구실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였고, 남자와 동성애를 하는 장면을 하필이면 델핀 바로 앞에서 저질러 버린다. 함께 한 침대에서 자면서도 시프리언은 델핀을 누이처럼 좋아하고, 나중엔 사랑하게 돼 청혼까지 하지만, 델핀은 이를 거절한다. 자꾸 캐나다 매니토바 주의 고어필드에서 철물점 주인과 야밤에 공공장소의 벤치에서 벌인 일이 떠올라서. 그는 지브웨족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아 미국 시민권도, 투표권도 없는 상태였다.

  델핀은 어려서 어머니 마리가 일찍 죽어 얼굴도 기억하지 못한다. 아버지 로이는 돌이킬 수 없는 알코올 중독자라, 학교 공부에 뛰어나 전액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음에도 애당초 진학을 포기한 채 비참한 생활에서 탈출하고자 지역 극단에 들어간 거였다. 이것도 그렇게 알아두자. 1934년, 궁핍했던 시절. 미국의 서민들은 삶의 고단함을 눅여줄 웃음거리가 필요해 델핀과 시프리언은 돈을 제법 벌었다. 그래서 둘은 싸구려 보조 보석 반지를 두 개 사서 나누어 끼고 아거스빌로 귀향길에 오른다. 네군도 단풍나무에 둘러싸인 고립된 농가는 그나마 변두리라 사람의 눈에 띄지 않아 다행이었다. 집에 들어서기도 전에 슈납스에 취한 아버지는 뛰쳐 도망을 쳤고, 집에서는 상상을 하지 못할 정도로 역한 냄새가 풍겼으며, 진짜로 들어가보니 온갖 난장판에 토사물과 바싹 말라버린 사람들의 분뇨가 찌든 악취를 발산했다. 며칠을 청소해도 역한 악취는 사라지지 않아, 결국 냄새의 근원인 마루 밑 식료저장고를 열어보니 그 안엔 잊히지 않을 만큼 다양한 종류의 생명체들이 바글대는 세 구의 시체가 들어 있었다. 심한 알코올 중독 증세로 환상과 환청과 섬망을 겪는 아버지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주인공은 위에서 소개한 피델리스 발트포겔과 델핀 바츠카. 이들이 어떻게 엮이는지, 그건 이야기하지 않겠다. 제목 “정육점 주인들의 노래클럽”에 대하여. 피델리스는 전쟁 때 했던 저격수나 직업인 도살과 정육점 칼잡이 일과 대비되게 매우 고운 리릭 테너의 목소리를 지녔고, 성량도 괜찮아 노래하기를 즐겼다. 독일에서도 정육점 주인들과 도살업자들만으로 구성한 노래클럽이 있어서 미국에 정착한 피델리스는 자리를 잡자마자 정육점 주인들로만 구성한 노래클럽을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아거스빌에 정육업, 도살업을 하는 사람은 자신을 포함해 겨우 두 명. 도무지 한 팀을 꾸릴 수 없어서 모든 성인 남성을 대상으로 합창단을 조직했다. 그리하여 첫 모임은 발트포겔의 도살실에서 열었는데, 천장이 높은 도살실이 의외로 울림이 좋고 널찍하게 퍼져 아주 그만이었다. 참석한 인사들도 고을에서는 막강하게 대출전문 은행가 바리톤 줌브러게 씨와 그의 직원 포틀랜드 채버스, 아거스빌의 폴스타프라고도 불린 한 시절의 셰익스피어 전문 연극인이었던 팔세토(무진장 높은 고음) 음역의 보안관 호크, 고을에 한 명 밖에 없는 의사 하차 싸, 그리고 주인공 델핀 바츠카의 아버지인 술꾼이자 바리톤 로이 씨 등등이었다.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도 사람 사는 곳이라 사건도 난다. 사건들로 이 가운데에서도 비명에 가는 사람이 당연히 생긴다. 그 사이에 독일군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아버지와 달리 미군으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아들도 있고, 독일군으로 참전한 아들도 있고, 아들이 행여나 유대인을 학살하지 않았나 전전긍긍하는 어머니도 있다. 이렇게 1954년까지 두 가족이 사는 모습을 그린 작품.

  전형적인 미국 드라마지만 이런 미국식이면 좋다. 읽다가 울기도 했지 뭐야. 당신도 정말 읽을 생각이면 각오하시라. 눈물 한 방울 정도는 찔끔 할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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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1-12 05: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고영민, 《공손한 손》
화요일. 랜퍼드 윌슨, 《탤리 가의 빈집(외)》
수요일. 장웨이, 《어신魚神을 찾아서》
목요일. 오노레 드 발자크, <사기꾼>
금요일. 알랭 로브그리예, <진>

잠자냥 2024-01-12 07: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관심 책이라 보관함에 담아두기는 했는데 표지가 좀 ㅋㅋㅋㅋㅋ 이상해서 선뜻 손이 안 갔거든요. 폴스타프를 울리다니 읽어야겠습니다…..근데 그거 소주방울 튄 거 아닌가요? 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4-01-12 07:25   좋아요 1 | URL
열람실에 쐬주 못 가져 들어갑니다. ㅎㅎㅎ
표지 사진 보시면, 백인일 수도 있고, 선주민일 수도 있고... 막 그렇잖아요. 재미납니다.

레삭매냐 2024-01-12 10: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앗, 어제 이 책 무너진 제 책탑
정리하다가 발견했어요.

미처 샀는 지도 모르는 그런 책
을 북플에서 만나게 되니 반갑...
물론 아직 읽지는 못했습니다.
<밤의 경비원>도 읽다 말...

Falstaff 2024-01-12 16:10   좋아요 0 | URL
아이고, 어서 읽으셔요. 이 여사님 작품이 재미있더라고요. 눈에 보이면 더 읽을 예정이랍니다.

coolcat329 2024-01-12 14: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밤의 경비원은 기억하는데 작가 이름은 이제서야 제 머리에 각인이 되었어요. <밤의 경비원> 부터 읽어봐야 겠습니다. 이번 글 읽으니 엄청 끌리네요~^^
작가 찾아봤는데 분위기있는 미인이십니다.

Falstaff 2024-01-12 16:11   좋아요 1 | URL
옙. 글을 진지하면서도 재미있겠 쓰더라고요. 딱 제 스타일. ㅋㅋㅋ

그레이스 2024-01-12 2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속도를 못따라가겠네요.^^

Falstaff 2024-01-13 15:32   좋아요 1 | URL
ㅎㅎㅎ 제가 좀 많이 올리나요? 좀 줄여야겠습니다. ^^
 
어느 날 거위가
전예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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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예진은 스물여덟 살 때인 2019년에 <어느 날 거위가>로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며칠 후면 5년차에 접어드는 작가.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눈썹을 휘날릴 시기렸다? 책에는 데뷔작부터 2021년까지 쓴 단편소설 여덟 편이 실렸다. 지금은 장편소설을 쓰고 있으며 올해 2023년 말이나 늦어도 24년 초까지는 완성하고 싶다고,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관하는 ARKO 문학나눔 관련 영상을 통해 말한다. 유튜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도 ARKO 문학나눔 책으로 동네 도서관 신간 서가에 꽂혀 있는 것을 발견해서, 솔직하게 말하면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신진작가의 책이라 읽었다. 문지에서 나온 신인들 책이 읽어볼 만하다. 이번에도 기대를 갖고 열람실로 올라갔다.


  제일 먼저 나오는 단편의 제목이 <팬티>다. 그래, 그래. 바지를 뜻하는 팬츠 말고, 소위 ‘빤쓰’라 불리기도 하는 그 ‘팬티’ 맞다. 2019년에 잡지 『Axt』에 실렸던 작품으로 데뷔작을 빼고는 가장 먼저 발표한 것처럼 보인다. 조금은 도발적인 제목의 작품이 제일 앞에 실렸기도 하고, 다중의 눈길을 끄는 제목인 것도 맞아서 그런지 이 책을 소개하는 여러 서평을 봐도 <팬티>를 먼저 거론하는 것들이 많다. 어떻게 됐느냐 하면, 나무에 팬티가 걸려 있는 설치미술과 관련한 이야기다. 여기에 이제 노령에 접어들려고 하는 강상미라는 이름의 여성이 끼어든다. 모 광고회사의 부장으로 일하다가 은퇴한 강상미는 적지 않은 수의 늙은이들이 그러하듯이 젊은이들과 원활한 소통을 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아파트 단지 안의 나뭇가지 가득 팬티가 걸려 있는 것은 마땅치 못하다. 프리랜서로 일하는 옆집 103호 30대 여성은 스트링과 망사팬티에만 불만이다. 이 두 팬티가 여성의 성 상품화와 깊게 관련이 되어 있다면서. 나중에 보면 정작 자발적으로 망사 팬티를 걸려고 하는 여성은 전혀 그런 뜻도 없지만.

  이렇듯 책에 실린 전예진의 작품 모두 메타포다. 전방 위수지역에서 닭을 튀겨 파는 치킨집 주인은 군부대로 배달을 나갔다가 성인 네 명이 삶아 먹어도 남을 큼지막한 거위로 변신metamorphosis한 장준태 병장과 이현우 상병을 데려왔다가, 거위가 닭튀김을 얼마나 잘 먹는지, 별 해괴한 일을 겪는 이야기(어느 날 거위가). 기획팀장으로 성격을 조금 까칠하다는 평가가 있으나 몇 년 일 하나만큼은 잘하고 있던 유귀동 차장은 경영진이 바뀌면서 줄줄이 자리에서 물러나는 그룹의 한 명으로 지금은 1층 로비의 그림 속 여인으로 역시 변신해 있다(점심 같이 먹을래요?). 오빠 김수민은 어려서부터 소아비만으로 진단을 받더니 이후 체형이 조금씩 바뀌어 드디어 고래로 변신해 바다로 떠나 연락이 없고(숨통), 우울한 미래의 어느 날엔 해수면이 치솟아 모든 아파트 건물은 방수처리를 했어도 아파트에 따라 5층, 7층까지는 물 속에 잠겨 있는데 고모는 불법으로 잠수 배달운송을 하기도 한다(우리 집에 놀러 와). 돈도 잘 버는 데다가 요리실력도 좋은 친구 집에 연어회를 사가지고 늦게 도착한 호진은 팔, 다리, 나중엔 목이 뎅거덩 부러지는 좀비로 변하고 만다(좋아질 거예요). 부모가 날이면 날마다 격렬한 부부싸움을 하다가 드디어 이혼을 실행하려 하는 찰나에 할머니가 손녀들 데리고 동해안 바닷가 콘도미니엄으로 바람을 쐬러 가는 이야기인 <파도를 보는 일> 정도만 자주 읽은 순소설의 형태를 하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해서 독자는 조금도 쫄 거 없다. 전예진은 그래도 순한 맛의 메타포를 사용했다. 독자는 작품을 읽으면서 지금 작가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고, 하고 있는지 즉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 면에서 (2022년 기준) 작가의 17년 지기라고 주장하는 경기도 포천의 한 책방 주인 말마따나 “리얼리즘 적”이라 생각하는 것도 어색하지 않다. 좀 어울리지 않지? 메타포와 리얼리즘이라니까? 그것도 선입견이다. 대부분의 문학 또는 예술 행위 자체가 메타포의 효과적인 활용일 수 있으니. (아쭈, 아마추어가 이렇게 막 말해도 괜찮은 거야?) 이왕 그러려면 전예진처럼 누구나 알 수 있는 편한 서술이면 더 좋은 거 아닌가 싶다. 나도 매운 맛은 좀 정도껏 매운 게 좋다.

  다만, 작품 속 등장인물이 변신하고, 변신하고 또 변신하는 바람에 책 뒤편으로 가면 뭐 그런가보다, 하는 마음이 된다는 점. 장편을 쓰고 있다는데 이번엔 어떤 변신을 만들고 있으려나, 싶어지는 거. 설마 변신이 전예진의 패턴은 아니겠지? 좋다, 장편 하나를 더 읽어보고 이이의 독자가 될지 말지 따져보겠다. 건필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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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4-01-14 1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전예진 거위랑 팬티 소설 흥미롭게 읽고 다음 소설도 궁금했는데 소설집 나왔군요. (친구가 행사한다고 저 작가 찾길래 나온 학과 염탐해서 과사무실로 연결해보라고 알려주기도,..온라인 흥신소) 나중에 읽어봐야겠습니더. 나아아중에…

Falstaff 2024-01-14 19:19   좋아요 1 | URL
아오, 굉장해요! 요즘 작가 프로필에서는 여간해서 학교, 학과, 출생 연도, 고향... 이런 거 찾기가 무지 힘들잖아요. ㅎㅎㅎ 정말 온라인 흥신소 어울립니다. 연두 게이샤 맛있더라고요. 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4-01-14 22:15   좋아요 1 | URL
일단 가격이 착해서 가격 대비로 신선도가 좋죠 ㅋㅋㅋ 이 집요함을 어둠의 경로 말고 세상에 도움 되는 데 써야 하는데...글쎄 쓸데가 없는 것 같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해변의 카프카 (상)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춘미 옮김 / 문학사상사 / 200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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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한테 무라카미 하루키에 관한 환상을 심어준 인간은 잊지 않고 있다. 삼십여 년 전에 문학과지성사를 통해 시집을 출간하고 이후 잡문, 특히 장르를 불문한 음악과 오디오 이야기로 책을 팔다가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잡동사니 설레발꾼이 된 “방송인” 김갑수다. 이십오 년 전에 찍은 음악 단행본 <삶이 괴로워서 음악을 듣는다>를 읽어봤다. 최고급 종이에 천연색 사진이 많아 320쪽 분량이라도 원고의 양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도 명색이 전직 (현직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르지만) 시인이라고 독자로 하여금 마음을 후벼 파는 단어와 문장로 정말 기막히게 영색이 되어 있었다. 이 책에서 김갑수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자주 인용했다. 책은 오래전에 내다 버려서 정확한 인용이 아니지만 생각나는 대로 읊어보자면,

  “다시 무라카미 하루키. 나는 이 음악을 흘러나올 때마다 저 북국의 숲 속에서 먼 북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다시 무라카미 하루키”라고 했으니 적어도 <삶이 괴로워서…>에서 무라카미를 대여섯 반 써먹지 않았을까? 그래 나는 틀림없이 무라카미에게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는 줄 알았다. 나중에 무라카미의 기행 에세이 <먼 북소리>를 찾아 읽었고, 끝내 잘난 척을 견디지 못하고 읽다가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고 말았다. 무라카미는 나하고 전혀 맞지 않았던 거였다. 차라리 처음부터 <1973년의 핀볼>로 치고 나갈 것을 그랬다. <먼 북소리> 때문에 시간이 더 걸렸다. <노르웨이의 숲>을 읽을 때까지. 이후 무라카미는 내 독서목록에서 지워졌다. 물론 그렇다고 안 읽겠다는 건 아니니까, 김창석 번역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었다고 이야기하니, 모 작가가 내게 무라카미의 <1Q84>를 이야기했다. 아주 짧게. 그 책에서 <잃어버린…>은 교도소에나 가야 읽을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하더라고. 하도 곤혹스럽게 읽은 <잃어버린…>이며, 읽지는 않았지만 궁금해하던 무라카미 하루키라서, 혹시 모르잖아? 하는 마음으로 사 읽었다.

  평행우주. 달이 두 개인 지구. 레오슈 야나체크가 1926년에 작곡한 <신포니에타>, 이 작품이 나오기 2년 전에 숨을 거둔 체코의 유대인 작가 카프카. 그리고 잠자. 살인청부업자이자 여주인공 이오마메는 미니스커트를 입은 채로 도시고가도로의 비상탈출구를 빠져나감으로 차원을 달리하는 공간으로 이동을 하고, 초등학교를 같이 다닌 대필작가인 남주인공 덴고 역시 초월세상에서 이오마메를 만난다.

  여기에 이들을 추적하는 일단의 무리. 그리하여 이야기는 사건으로 흘러가고 작품을 읽어가면서 더욱 긴박한 상태에 치닫게 되는데, 한국인 출신 무적의 인간병기가 등장해 이오마메에게 친절하게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통을 쏘아 안전하게 자살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기도 하고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같은 건 교도소 독방에 갇혀야만 읽을 수 있을 거란 진리도 가르쳐준다. 어처구니없다. 그거 하나 확인하려고 책을 사서 두 권짜리 두꺼운 걸 다 뒤졌다니. 근데 솔직히 <1Q84>도 그렇고 <노르웨이의 숲>도 그렇고, 아주 적당하게 야해서 재미있지 않았어? 딱 선을 지키더라고. 나만 그렇게 생각한 거야?


  이제 <해변의 카프카>로 넘어가서, 헌책이라도 왜 내가 <해변의 카프카>를 샀느냐 하면, 잠시 미쳤던 거다. 내 음반장에 사놓고 안 들은 것이 별로 없다. 즉, 있기는 있는데 거의 없다는 말이다. 이 가운데 하나가 필립 글래스가 작곡한 <해변의 아인슈타인>. 뭔가가 비슷하잖아? 이 이유가 제일 중요했다. 그래서 덥석 문 것이 <해변의 카프카>였다. 읽어 보시면 카프카의 어떤 작품에서 힌트를 받아 작품을 쓰게 됐다고, 바득바득 우기지 않는 한, 내가 알고 있는 카프카와는 별로 연관이 없다. 무라카미가 카프카를 동경하고 영향을 받고, 비슷하게 쓰고자 했는지는 모르지만, 이 책에서도 평행우주와 차원을 여는 열쇠의 등장은 먼저 읽은 <1Q84>와 같다. 근데 어느 책이 먼저야? <해변의 카프카>가 2002년, <1Q84>가 2009년. 50대의 무라카미는 마음먹고 평행우주와 다른 세계와의 통로, 외계인 같은 것을 팔아먹기로 했던 것 같군 그래. 좋아, 좋아. 잘 팔리기만 하면 대빵이지 다음이 뭐 중요해.

  이 책에서도 외계 생물체가 등장한다고? 그렇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 지구에는 확실하게 없는 이상한 생물이 등장해 차원의 통로를 향해 어기적, 어기적 방바닥에 점액질을 묻히며 기어가는 장면이 등장한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무라카미 광팬들에게 돌 맞을 지 모르지만) 작가가 딱 그 자리에 어울리는 충격적인 장면을 만들긴 해야겠는데 맞춤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 말도 안 되는 어처구니없는 생명체가 등장한 것일 뿐, 인 것처럼 보인다. 뭐 글 쓰다 보면, 책 읽다 보면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다.

  외계 생명체까지는 아니어도 외계에서 온 것 같은 미확인비행물체, UFO가 작품 초반에 등장한다. 전쟁이 끝나고 1년이 지난 1946년 3월에서 4월 사이에 육군 정보부 제임스 P. 워런 소령의 지시로 로버트 오코넬 소위와 통역 해럴드 카타야마 상사가 야마나시현 OO시 현장에서 초등학교 여교사, 현지 내과 개업의, 현지 경찰관 두 명, 여섯 명의 초등학생을 인터뷰한 것으로 그동안 미 국방부의 극비문서로 분류되어 있다가 40년이 지나 일반 공개가 허용된 자료이다.

  1944년 11월 7일. 근방 초등학교 여교사는 학생 열여섯 명을 인솔하여 밥공기 산에 올라 식용버섯 채취 작업을 하고 있었다. 산 위로 오르고 있던 오전 열 시 조금 지나서 먼 하늘 위에 은색으로 선명하게 반짝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확실히 금속에 반사되는 빛이었다. 두랄루민 같은 은색의 섬광이 형태가 보이지 않을 정도의 까마득한 높이에 떠올라 있었다. 남편이 전사한 여교사는 어제 밤에 평소 성적으로 보수적인 남편이 꿈에 나와 평소라면 생각지도 못한 온갖 자세와 각도를 달리하는 체위로 몇 번이나 사랑을 해서 까마득한 오르가슴 끝에 잠이 깨고 여운을 잊지 못해 자위도 한 번 하고 출근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아직 한참 남았을 월경이 심하게 터지고 말았다. 아이들이 버섯을 따고 있는 산 중턱에서. 선생은 손수건으로 비상조치를 일단 했다. 그러나 조금 후 전시 피난령으로 도쿄에서 살다가 내려온 나카타 소년이 선생에게 혈액이 잔뜩 묻은 손수건을 주워 가져왔고,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난 교사는 나카타의 귀싸대기를 연달아 후려갈겼는데 자신도 얼마나 그랬는지 모를 정도로 흥분해 있었다. 나카타가 드디어 죽은 듯이 쓰러지고 주위를 살펴보니 다른 모든 아이들도 쓰러져 누워 있었다. 교사는 큰일이다 싶어 그리 멀지는 않은 학교로 달려가 아이들을 구조해줄 교사, 수위, 경찰을 불러 아이들에게 갔고, 나카타를 제외한 아이들은 얼마 후 정신을 차렸는데 그동안의 일은 전혀 기억할 수 없었다. 나카타는 끝내 깨어나지 못해 큰 도시의 대학병원을 거쳐 육군 병원으로 후송되어 몇 달 후에 정신이 돌아왔다. 그러나 부모등 가족관계, 일본이라는 나라, 글자, 등등 완전한 백지 상태로 리셋이 되어 버렸으며 어떠한 인위적인 배움은 더 이상 받아들이지 못해 이후 오랜 세월 동안 정신지체자들에게 주는 보조금과, ‘고양이와 대화할 수 있는 능력’으로 잃어버린 고양이를 찾아주는 수수료로 먹고 살게 되었다. 속이 완전히 빈 남자. 즉, 특별한 능력이 있는 사람의 영혼이 대신 들어와 특별한 일을 하고 빠져나갈 수도 있는 차원의 교차로에 몸을 걸친 사람이다. 즉, 이이가 평행우주를 매개하는 일을 할 뿐이니 주인공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제 독후감을 마무리해야 할 분량임에도 난 아직 주인공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다. 왜? 마누라가 곰국도 안 끓여 놓고 나 혼자 두고 여행 갔거든. 집에 혼자 있어서 심심하거든. 그래서 좀 더 쓰고 싶거든. 지겨워도 좀 참으시라. 야한 것도 나올 지 모르니까.


  주인공 ‘나’는 홀수 장chapter의 화자로 나온다. 이름은 다무라 카프카. 당연히 성은 진짜, 이름이 가명이다. 열다섯 살. 큰 키에 건장한 몸, 정기적으로 무게 운동을 해 어깨가 떡 벌어졌고 같은 또래 사내 아이 중엔 완력도 만만치 않다. 그래 가끔 싸움을 해서 게임 값도 물어주고 그랬다. 이렇게 몸만 성숙한 게 아니다. 정서적으로는 더 성숙해서 피아노 음율만 듣고, 베토벤은 아니고 그렇다고 슈만도, 브람스도 아니니 슈베르트일 것이라고 짐작할 정도이며, 존 콜트레인의 소프라노 섹소폰으로 재즈 세계의 카덴차와 비브라토를 몽땅 즐길 수 있는 고수이며, <아라비안 나이트>를 읽고 이야기만이 아니라 이야기가 상징하는 세계, 그 무궁무진한 메타포의 물결을 따라 즐길 줄도 안다. 만일 <해변의 카프카>를 읽으면서 “나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터프한 열다섯 소년의 행적을 좇고 있다.”라고 생각한다면 애초에 책을 덮는 것이 낫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다무라 카프카의 나이를 열다섯 살이라고 한 것 역시 염병할 메타포일 것이다. 카프카는 세상의 모든 지식, 이라 말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모든 ‘문화’를 흡수하는데 천재적인 소양이 있는 외톨이다. 그가 알고 있는 지식의 양에다 습득할 수 있는 추가적 정보의 양은 정확하게 무라카미 하루키의 것과 같다. 그러니 이런 아이가 학교, 사회, 가정에 적응할 수 있겠느냐고.

  다무라 카프카는 열다섯 살이 되는 생일, 아버지 서재에서 훔쳐낸 40만엔, 오래되고 자그마한 순금 라이터, (의외로 한 번도 휘두르지 않을)날카로운 잭나이프, 성능이 뛰어난 손전등, 짙은 색 레보 선글래스, 해변에서 누나와 둘이 찍은 사진 한 장, 아버지의 휴대전화를 배낭에 걸머지고 집을 뛰쳐나간다. 소위 가출. 애초에 추운 북쪽으로는 갈 생각이 없었다. 이제 다신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니 따뜻한 남쪽나라로 가겠다고 마음먹은 카프카는 밤버스를 타고 다카마쓰 시로 향한다. 도중에 한 번 쉰 휴게소에서 만난 같은 버스 탑승자 사쿠라. 카프카는 사쿠라에게 친 누나 같은 감정을 느끼고, 미용사 사쿠라도 마찬가지여서 자신의 휴대전화 번호를 가르쳐준다. 혹시 급한 일이 생기면 연락하라면서.

  다카마쓰 시의 허름한 호텔에 여장을 푼 카프카는 다카마쓰 시의 전통있는 가문의 부자가 만든 사립 도서관을 방문하게 되고, 관장 사에키 씨, 관리인 오시마 상과 좋은 관계를 맺는다. 여태 거론한 이름의 등장인물들은 서로 만나자마자 마치 운명의 만남인 듯, 친밀한 관계를 쉽게 만들고 호의적이며 서로 최선의 방법으로 배려한다. 그러다가, 카프카는 잠깐 의식을 잃는다. 깨 보니 작은 산사의 뒤편 숲 속이었는데 온몸에 피칠갑을 하고 있었다. 자기 몸은 한 군데도 다친 곳이 없이. 수돗가에서 대충 몸을 닦은 카프카는 아버지의 휴대전화로 새벽 한시에 사쿠라에게 전화를 걸어 찾아가고 사쿠라의 방에서 신세를 진다. 열다섯 살의 사쿠라는 자기의 의지와 관계없이 하늘을 향해 불쑥 솟아오른 생식기 때문에 미칠 지경이다. 그걸 눈치 챈 사쿠라는 카프카와 선입견 없는 대화로 마치 동생에게 하듯 손으로 소위 ‘유사 성행위’를 해주고 편한 잠으로 이끈다.

  자, 이쯤에서 진짜 이야기. 다무라 카프카의 아버지 다무라 씨는 일본이 알아주는 조각가다. 그는 일찍이 카프카에게 예언을 했다.


  “너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관계를 맺을 것이며, 그것도 모자라 누나와도 관계를 할 것이다.”


  가출을 한 다무라 카프카의 뇌리 속에는 이 저주 같은 예언이 횡행한다. 그리하여 도서관 관장 사에키 씨가 내 어머니가 아닐까, 사쿠라는 내 누나가 아닐까, 하는 몽상을 아주 자주 한다. 그리고 실제로 쉰한 살의 사에키 씨와 열다섯 살의 카프카는 관계를 한다. 여러 번. 포르노만큼은 아니지만 매우 상세하게, 다양한 부위와 다양한 체위로. 열두 살의 롤리타를 범하는 서른일곱 살의 험버트와 열다섯 살의 카프카 위에 올라 만족을 향해 몸부림치는 쉰한 살의 사에키. 나보코프는 여러 차례인데 반해, 무라카미 하루키는 내가 알기로 이것 때문에 비난받는 걸 한 번도 못 봤다. 왜 그럴까? 소년 카프카가 아줌마한테 먼저 하자 그랬기 때문일까?

  무라카미는 물론 비난을 의식해서 그런 건 아니었겠지만, 작품 속에서 아마 3백 번은 메타포, 세상의 모든 현상이 다 메타포라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도쿄에 있는 아버지의 살해자가 다카마쓰 시를 떠난 적이 없는 다무라 카프카가 되며, 쉰한 살의 여인이 열다섯 살의 소년 위에 올라탄 것도 오이디푸스적 메타포가 될 수 있었으며, 카프카의 꿈 속에서 환상적인 삽입성교를 하는 사쿠라 역시 메타포에 입각한 누나가 될 수 있다. 가설에 의하면. 내 재주로는 도저히 풀 수 없었던 무라카미의 가설에서는 말이다. 그건 그렇고 무라카미 소설 몇 개 안 읽어봤지만, 이 양반이 여자들의 큰 젖가슴에 무슨 로망이 있는 거 같지 않으슈? 인터코스 말고 여자가 남자에게 해주는 “유사성행위”하고. 참 이런 방면으로 독특하단 말씀이지.


  다른 우주에서 다시 만난 카프카와 가설에 의한 어머니일 수도 있는 사에키. 카프카는 오에 겐자부로의 할아버지가 조성했을 지도 모르는 시코쿠 숲 속에 있는 평행우주로 건너간다. 그곳에서 기껏 다시 만난 가설 상의 어머니 사에키는 카프카가 바라는 것과 반대로 다시 저쪽, 카프카가 온 우주, 이승으로 돌아갈 것을 당부한다. 저쪽 우주에서 가설의 아들 카프카가 할 일은:


  “내가 다무라 군에게 원하는 건 단 한 가지뿐이야. 나를 기억해주는 것. 다무라 군만 나를 기억해준다면, 다른 모든 사람이 다 나를 잊어도 괜찮아.”


  카프카도 사에키 자신처럼 남은 생을 이미 죽어버린 사람, 나를 그리워하는 고독 속에서 살란다. 이게 결론인데, 읽는 순간, 왜 그렇게도 웃기든지. 두 우주를 이해하며, 오직 한 남자를 그리워하느라 온 생을 고독하고 고통스럽게 지내 색깔마저 흐린 반토막의 그림자만 지닌 사에키 본인이 “나를 기억해줘.”라니, 웃기지 않아? 무라카미 상, 나를 웃겼어!

  나를 기억해줘……. 난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이런 개 같은 유언은 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이런:


  “나를 네 기억에서 놔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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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4-01-10 06: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Falstaff님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제가 평소 생각하는 유언이 ˝나를 기억하지 마˝ 라서 순간 반가웠네요(반가워할 일인지^^;)

Falstaff 2024-01-10 07:11   좋아요 2 | URL
ㅎㅎㅎ 잘 읽어주신 것이지요 뭘...
반가워하실 일 맞습니다! 뭘 기억해달라고, 무슨 미련이 남아서 말입니다. 저도 반가운 걸요. ^^

coolcat329 2024-01-10 10: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이 <1Q84>랑 비슷한 설정이군요. <노르웨이의 숲>같은 그런 소설인 줄 알았어요. 저는 하루키가 좋지도 싫지도 아무 감정이 없는데 하루키 팬들이 열광하는 거 보면서 뭔가가 있긴 있구나 싶었어요.
<1Q84> 를 저도 읽었는데 황당한 설정인데도 단숨에 읽을 정도로 재미가 있었는데 이상하게 끌리진 않더라구요.
오히려 단편집이랑 달리기 에세이가 더 여운이 남았어요.

나를 기억해 줘 ㅋㅋㅋㅋㅋ 아휴 코미디맞네요. ㅋㅋㅋㅋㅋ

Falstaff 2024-01-10 16:57   좋아요 0 | URL
아휴, 이제야 댓글을 답니다. 일정이 끝나서 오랜만에 삼겹살, 홍어, 무채, 김치, 쐬주 하다보니까.... ㅎㅎㅎ
괜히 무라카미한테 감정 가질 필요 없습지요. 그렇다고 괜한 팬심도 우습고요. 사는 게 다 그렇지요 뭐.

stella.K 2024-01-10 10: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지금까지 팔님 읽은 리뷰중 쵝오십니다. 웃겨서 죽는 줄. ㅎㅎㅎ 일단 별 두개신 것부터 보고 이거 뭔가 심상치 않겠구나 했습니다. 근데 역시나. ㅋㅋ 저도 이거 많이 줘야 세개 밖에 못 주겠던데 하루키 팬이 워낙 많으니 차라리 리뷰를 포기했습죠. 갈수록 뭔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근데 정말 하루키는 갈수록 잘 모르겠더만요. 이번에 나온 소설도 왠지 이 작품이 생각 나는 것 같아 포기했습니다.
정말 문학도 권력인가 싶기도 하더군요. 그런 비정상적인 성행위를 하면서 다른 작가가 이렇게 썼으면 변퉤라고 할텐데 하루키가 하니까 예술이 되잖아요. ㅋ
근데 김갑수는 왜요? 전 그 사람 잘 모르겠지만 말 하나는 청산유수더군요. 요즘 뭐하며 사는지 모르겠어요.
암튼 덕분에 웃으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아, 그래도 하루키 단편하고 에세이는 재밌긴 해요.

Falstaff 2024-01-10 16:59   좋아요 1 | URL
앗, 그렇습니까! ㅎㅎㅎㅎ
저도 두 별 주는 게 쉽지는 않았습니다. 세상에 무라카미 상 팬들이 오죽 많아야지요. 근데 솔직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게 아니라 알고 싶지 않은 거... 아닙니까?
무라카미 상이 그래도 문장이 좋아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저한테 훨씬 더 까였을 겁니다. 21세기 초엽의 세계문학 미스테리 가운데 하나가 이 양반이 언제나 노벨문학상 후보 1순위라는 거. ㅎㅎㅎ 노벨 문학상을 요즘 알아주긴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Falstaff 2024-01-10 17:07   좋아요 0 | URL
아, 김갑수요?
ㅎㅎㅎ 웃겨서요. 그냥 그렇습니다.

잠자냥 2024-01-10 13: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오 하루키 상 진짜 에로적 상상력은 빈곤한 거 같아요. 늘 그 변주에 변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같은 건 교도소 독방에 갇혀야만 읽을 수 있을 거란 진리도 가르쳐준다. 어처구니없다. 그거 하나 확인하려고 책을 사서 두 권짜리 두꺼운 걸 다 뒤졌다니.˝
˝마누라가 곰국도 안 끓여 놓고 나 혼자 두고 여행 갔거든. 집에 혼자 있어서 심심하거든. 그래서 좀 더 쓰고 싶거든. 지겨워도 좀 참으시라. 야한 것도 나올 지 모르니까.˝

하루키 소설보다 재밌는 리뷰입니다. ㅎㅎ

Falstaff 2024-01-10 17:02   좋아요 0 | URL
저한테는 길고 길고 험한 무라카미 하루키 찾는 항해였습니다. 결국 조난 당한 거 같습니다만. ㅋㅋㅋㅋ
인생이 다 그렇지요 뭐. 재미있으셨다니 즐겁네요! ㅋㅋ

망고 2024-01-10 15: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하루키 소설이 취향이 아닌 1인으로서 리뷰 정말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ㅎㅎㅎ

Falstaff 2024-01-10 17:03   좋아요 1 | URL
아요, 고맙습니다. 워낙 이 양반 팬이 많아서 정말 몇 번을 다시 쓰고, 고쳐 쓰고, 돌아보자 불조심, 조마조마 했던 거였는데 의외로 저하고 비슷하신 분이 많아서 다행이었답니다. ^^
 
발터 하젠클레버의 아들
발터 하젠클레버 지음, 장순란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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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는 <아들>. 읽으면서 파우스트는 아니더라도 메피스토펠레는 생각이 많이 났다. 제목이 짧아서 그런가, 아니면 자전적 작품이라서 그랬나, 원제 앞에 작가의 이름을 가져다 붙였다.

  발터 하우젠클레버(1890~1940)는 라인강 서쪽 지역, 아헨 지방 부르주아 시민 계급 유대인 의사 카를 게오르그 하젠클레버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젠클레버의 젊은 시절까지가 중요한 이유는 이이의 청소년기 자체가 바로 <아들>의 줄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발터의 어머니 마틸데 안나는 조현병, 정신질환으로 발터를 임신한 상태에서 오래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었고, 당연히 정상적인 어머니의 역할을 할 수 없었으며, 발터의 기억에 별로 남아 있지 않은 상태로 생을 마감한다. 가뜩이나 어머니의 정을 알지 못하고 자라는 발터에게 아버지는 너무나 가혹하고 엄격한, 수구적, 유대적 가치관을 가진 인물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위하여, 반드시 성공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주기 위해서 그랬을 것이지만 아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못했다. 아주 잡도리를 했는데 이게 유대인답게 학교 공부 측면에서는 훨씬 심했다. 소위 말하는 유대식 교육법. 역자 해설에 장순란을 이런 장면을 인용했다.


  “숙제를 못하면 승마용 채찍으로 자주 얻어맞았다. (…) 내가 학교에 지각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알면서도 아버지는 30분이 걸리는 등굣길을 등교 시간 10분 전까지 공부하다가 가도록 강요했다. 정신없이 급히 학교로 달려가다가 거의 매일 아침 먹은 것을 토해야 했다.”


  발터 하젠클레버가 이 정도면 그래도 착한 아들이다. 조금만 격렬한 사춘기를 겪었다 해도 벌써 아버지 금고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얼마를 훔쳐내 드런 집구석에서 도망했다가 돈 떨어진 다음에 기어 들어와 의사 아버지한테 맞아 죽었을 것이다. 나는 희곡을 읽는 내내 아들의 험한 청춘이 불쌍했던 것처럼 철없는 아버지도 불쌍했다. 어찌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자신은 분명히 아들을 위한 최선의 훈육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들에겐 지울 수 없는 흉터를 남겨버리고 여차하면 인생도 거덜이 날 수 있다.


  “나를 때리기 전에, 제발 내 말을 끝까지 들어주세요. (…) 잠옷을 입고 잠들기 전, 내 몸은 회초리에 맞아서 줄자국이 나 있었죠! (…) 선생님조차 동정했고 내게 더 이상 벌을 내리지 않았어요. 아버지! 저는 모든 수모와 곤경을 다 치렀어요.”


  정말 이런 부모들 있다. 나도 몇 명 봤다. 아이를 들들 볶는 부모. 이런 부모한테 말 잘 듣는 체질로 태어난 아이들은 속으로 점점 찌그러지는지는 몰라도 부모가 소원하는 대로 좋은 대학 가고 좋은 나라로 유학도 가고, 그래서 마지막까지 부모 등골 빼먹는데, 부모는 그것도 모자라, 특수대학원에 진학하라고 더 닦달을 하니 그만 최고 대학의 기숙사에서, 이제 공부는 지긋지긋해서 못 하겠다고, 목매달아 버리는 것도 봤다. 이 작품에서 아들은 몰랐을 것이다. 주인공 아들이 아들 노릇을 처음 해보는 것처럼, 아버지도 주인공 아들의 경우엔 언제나 초보 아버지였다는 것을. 반면에 아버지는 자신이 초보 아버지여서 미숙하고 몰랐다는 점은 용서가 되지 않는다. 힘이 있고 돈이 있고 권세가 있어서 늘 아들에게 상처를 주었으니. 인생 뭐 있니. 그냥 내버려 두지. 부르주아 의사가 자식이라고 딱 한 명 있는데, 하고 싶은 거 좀 하라고 하지. 꼭 의학이나 법학을 시키려다 인생 쫑난다. 하긴 그게 말이 쉽지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지만.

  작품 속에서 주인공 ‘아들’은 대학입학고사 아비투어에서 장렬하게 미역국을 먹는 것으로 시작한다. 문제를 몰라서 못 푼 것이 아니라 1800년경에 있었던 아스페른 전투에 관한 서술이었는데, 갑자기 대공국 제후비들과 함께 끝없이 뻗어가는 가로수 길이 아스라하게 떠오르면서 역사고 수학이고 다 망쳐버렸다는 거였다. 속내를 남자 가정교사에게 털어놓았고, 남자 가정교사는 아들을 이해했으며, 결과를 아버지에게 전보로 알려줄 수밖에 없었는데, 아들의 아비투어 낙방은 한 가정의 가장이기도 한 가정교사의 해고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의 하젠클레버는 열여덟 살에 영국의 옥스포드에 입학해 법학을 공부하다가 스위스 로잔 대학으로 옮겼다. 이후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1914년까지 공부했는데 문학과 철학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문학과 철학 전공이었는지, 여전히 법학을 공부했고 관심만 두었는지는 위키피디아에 나오지 않는다.


  <아들>에서 아들이 대학입학자격고사에 낙방한 때가 스무 살.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3수 실패 정도 된다. 가정교사도 남자, 여자 각 한 명씩 두고 학업에 전념시켰음에도 좋은 꼴을 보지 못한 아버지는 잔뜩 열이 받아 있다. 아버지는 스무 살 아들이 아직 미성년이기 때문에 전적인 지배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여전히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언사를 퍼붓는다. 머리통 다 큰 아들 역시 이젠 더 이상 고분고분하지 않을뿐더러 이렇게 사느니 자유롭게 죽어버리고 말겠다는 생각까지 한다. 대학입학에 떨어졌으며 자신이 바라는 문학이나 연극을 할 수 있는 길도 사라져버렸다고. 그러나 이제 메피스토펠레를 닮았지만 결코 메피처럼 근본적인 악마는 아닌 친구의 도움으로 집을 나가버린다.

  친구는 아들을 자유로운 젊은이들의 모임인 “환희의 유지를 위하여” 클럽의 비밀모임으로 안내한다. 이 모임에 연미복을 입고 등장한 아들은 아버지의 구속에서 탈피하자는 내용의 극렬한 웅변을 쏟아내고 한 방에 젊은이들의 영웅으로 등극한다. 청년들은 아들을 어깨에 올린 채로 가두행진을 하며 모든 아버지에 대한 투쟁에 박차를 가하자고 외친다.

  스타덤에 오른 아들. 그에게 제공된 매춘부 아드리엔을 보내자 호텔방에 찾아온 친구. 그는 아들에게 권총을 한 정 건넨다. 체홉이 그랬던가? 권총이 등장하면 최소 한 번은 발사를 해야 하는 법이라고? 친구는 아들에게 진지하게 친부살해를 언급한다. 물론 작품 속에 등장하는 친부살해는, 비록 정말로 친부 살해의 씬이 나오더라도 오이디푸스 적인 친부살해를 포함해서 거의 대부분 메타포이다. 하여간 아들은 친구가 준 권총을 주머니에 넣은 채 아버지가 보낸 형사들에게 체포당해 수갑이 채우진 상태로 아버지 집에 도착한다.

  드디어 부자상봉. 아들에게 우호적인 형사는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아들의 수갑을 풀어주고 퇴장해서 단 둘이 남은 아버지와 아들. 아버지는 늘 가지고 다니는 말채찍을 들었다가 놓고 다시 들었다 놓았으며, 그럴 때마다 아들은 호주머니에서 권총을 슬쩍 뽑았다 넣고 다시 뽑았다가 놓는다. 그렇게 마지막 절정을 향해 치닫는 부자의 갈등. 체홉의 의견이 옳았을까?


  짠하고 아쉬운 아버지와 아들. 젊은 시절에 읽었다면 당연히 아들의 입장에만 서 있었을 텐데, 이제 양육까지 모든 의무를 다 마친 나는 둘 다 안타까웠다. 부르주아 댁의 귀한 아들이 어리광부린다고 여기지 말기. 있는 사람이건 없는 사람이건 사는 건 다 힘들고, 대개 불행하며, 세상의 어떤 부모도 하여간 한 가지 이상의 방법으로 자식들을 절망시키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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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4-01-09 21: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마지막 어떻게 되었을까 설마 ㅠㅠ
저는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가 생각이 나네요. 아버지도 아들도 다 불쌍해요.
사망한 해가 1940년이라 설마 하고 찾아봤더니 역시나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네요.ㅠㅠ
폴스타프님 글 읽으며 마음이 아팠는데 더 아프네요.

Falstaff 2024-01-10 05:39   좋아요 1 | URL
연극의 대본이라서 대개 파국으로 끝나기는 합니다. 그렇다고 가르쳐드릴 수는 없지요. ㅎㅎㅎ
유대인에게 특히 1930~40년대에 걸친 10년은 생각하기도 싫은 시기일 겁니다. 이후 계속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한테 생각하기 싫은 시대를 만들어주고 있기는 합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