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니가
찬쉐 지음, 김태성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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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여름, 오지게 덥기 바로 전인 7월 중순 지날 즈음해서 <마지막 연인>을 인상깊게 읽었다. 그러나 다른 찬쉐의 작품을 고르게 되지 않았으니, 아무래도 중국의 선봉파 기수라는 타이틀을 여전히 견지하는 몇 안 되는 작가라서 이이의 아방가르드 적인 포스트모던 스타일을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선뜻 자신이 없었던 거였다. 그리하여 당시엔 <마지막 연인> 말고는 딱 한 편 밖에 없는 찬쉐의 단행본 <오향거리>를 보관하기만 했었다. 이러다가 언젠가는 읽겠지 싶어서. 시간은 흐르고 찬쉐를 읽어야 하는데, 읽어야 하는데 망설이기를 벌써 반 년, 앗차, 도서관 개가실 신규 구입 도서 진열 선반에 이이의 데뷔작인 <황니거리> 즉 <황니가黃泥街>가 놓여있던 거였다. 그래 두꺼비가 파리 채듯 널름 주워들었다. 이게 읽은 내력이다. ‘주식회사 열린책들’이 오랜만에 선보이는 엽기적 책표지를 뒤로 한 채. <황니가> 이전에 단편소설 <더러운 물 위의 비누방울>을 발표했다고 책 앞날개에 쓰여 있기는 하지만 보통 <황니거리>를 데뷔작으로 치는 거 같다. 1987년 출간작품. 이후 (우리나라 출판사들의 헛갈리는 출판정보에 의하면) 다음 장편소설 <오향거리>를 읽기 위해서 독자는 30년을 기다려야 했다. 문학동네는 <오향거리>를 찬쉐가 쓴 최초의 장편소설이라고 광고하기도 하는데 독자 입장에선 그게 문제가 아니라, 30년? 그러면 2017년. <오향거리>를 읽는 편이 더 마음이 편했을 지도 모르겠다, 라고 짐작을 했어야 했는데. 아니, 그랬으면 좋을 뻔했다.

  찬쉐를 일컬어 중국의 카프카니, 중국의 보르헤스니 하는 건 과장된 수사는 아니다. 특히 카프카 분위기를 <황니가>에서 많이 느낄 수 있다. 황량한 디스토피아 지대. 세기는 끝나가고 도시 변두리 거리는 시간이 감에 따라 땅 속으로 무너져 내리는 쇠락을 넘어 멸실을 향해 그저 흘러가 버리는 광경. 콕 집어서 <성>을 둘러싼 마을, 물론 총동원과 문화혁명을 거친 20세기 중국이라서 <성>의 촌락보다 훨씬 살풍경한 도시 변두리 지역이지만 하여간 <성>과 그 일대를 떠올리게 되더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분위기는 <성>보다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스너의 두 작품, <저항의 멜랑콜리>와 <사탄 탱고>와 더 비슷하다. 두 작품에서 크러스너호르커이는 카프카를 확장하여 (카프카가 모색한)한 개인을 넘어 도시/마을 전체의 집단적 히스테리에 초점과 관심을 두었다. 첸쉬의 경우도 황니거리에 사는 주민들을 대상으로 이들 모두의 점진적 몰락과 쇠퇴, 멸절에 렌즈를 맞추어 나간다. 크러스너호르커이의 작품에서는 몇 년간 경험해보지 못한 강력한 추위가 도시를 급습하거나(저항의 멜랑콜리), 새벽의 보헤미아 벌판을 가로질러 이미 무너져내린 교회당에서 들릴 리 없는 종소리가 이 가을의 첫번째로 쏟아지는 비를 뚫고 들려온다(사탄 탱고). <황니가>는 거의 결말 부분에 접어들기 전까지 잿빛 속에 약간의 노란색을 띄는 하늘에서 검은 비가 쏟아진다. 한 때, 예전에 황니거리엔 검은 비가 쏟아지는 와중에 하늘에서 죽어버린 물고기가 쏟아진 적도 있고, 그것을 주워 소금을 뿌린 다음 말려 구워 먹다가 독창이 나 죽은 사람의 수가 부지기수이기도 했다. 그런 시절은 아직도 계속된다. 카프카는 다음으로 하고 크러스너호르커이를 연상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 떠오를 만큼 비슷한 분위기. 이 정도면 아실 듯.

  아마추어의 의견이지만 내 생각을 말하자면, 독자가 이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이든 작가는 전혀 모른 척할 것 같다. 찬쉐도 자신이 어떤 의도로 작품을 썼는지 굳이 독자가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작품은 완전히 메타포에 입각에 쓰였으며 마치 측량사가 그렇게 한 번의 면담을 바랐지만 결국 그러지 못하는 성주처럼, 독자는 <황니가>가 끝날 때까지 왕쯔광(王子光)이라 불리는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 한다. 존재, 이상으로 표현할 길이 없는 존재. 사람인지 아닌지 누구도 단언할 수 없는 물건(이라 해두자). 아주 오래 전에 왔었다고 하는 일종의 암시이자 광상(光狀: 빛을 내는 형상) 또는 한 덩이의 불. 다만 찬쉐가 카프카, 크러스너호르커이와 다른 점은 동구사람들이 말이 거의 없어서 대신 사변적이고 서술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반면, 단 한 번도 정막 속에 살아본 경험이 없는 최고 번식력을 자랑하는 국가의 작가답게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말이 많다. 말은 정말 많지만, 그들의 대화는 단절되어 있다. 한 주제를 이야기하는 대신 각자는 각자의 말을 할 뿐. 다변 속의 고립.


  황니黃泥. 누런진흙. 황니가라면 길거리가 진흙으로 된 변두리 마을이다. 도시보다 더 오래 되었지만 이제는 더 없이 쇠락한 지역. 거리가 시작하는 곳에 S기계공장이 하나 있어 거리의 랜드마크로 기능한다. 황니가의 독생자라고 할 정도로 사람들 마음 속에 유일하게 거리의 가치를 높여주는 쇠구슬 생산공장. 5~6백명에 달하는 직원의 대부분은 황니가 사람들이고 이들은 매일 아침 회사에서 내주는 소형 버스를 타고 출퇴근한다. 

  그러나 좁고 긴 거리. 지금은 너무 낡고 쇠락해서 지저분하고 더럽기 짝이 없다. 거리 사람들은 원래 모든 쓰레기를 강가에다 그냥 흘려 버렸으나, 언젠가 한 번은 동네 아낙이 집의 연탄재를 어느 음식점 앞에 쏟아버렸다. 며칠 후, 연탄재가 쌓인 것을 본 이웃 사람이 또 거기다 연탄재를 부었으며, 어느 새 연탄재는 자그마한 동산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제 동네 사람들은 집안의 모든 음식 쓰레기와 심지어 요강까지 그곳에 비우기 시작해 썩는 냄새와 이 냄새를 맡고 새카맣게 몰려든 곤충과 그것들이 낳은 알에서 부화한 애벌레, 즉 구더기들이 창궐하더니 거리엔 부스럼과 역병이 돌기 시작했고, 유난히 높은 암환자 비율로 사람들이 죽어가기 시작했다.

  때를 맞추어 하늘에선 항상 검은 먼지와 더러운 불순물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 거리 옆의 화장장은 늘 바쁘게 가동해야 했는데, 당시만 해도 제대로 된 공기 정화 시스템을 갖추지 않아 사람을 태운 그을음, 검댕이 굴뚝을 빠져나오자마자 기압골에 눌려 황니거리 상공을 포위해 밤새 진주했던 거였다. 미친개와 고양이, 미친개가 물어 죽인 닭과 돼지의 시체들 역시 광견병의 위협 때문에 먹지 못하고 쓰레기 산에다 내다 버리고, 이 와중에 밤새 몰래 낳은 영아도 거적대기에 둘둘 말려 던져버리는 게 결코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검은 비가 내리고 하늘은 항상 검은 그을음과 먼지, 그리고 더러운 불순물이 떨어져 내려, 작품 속에 일관되게 높고 높은 습도를 유지해 온갖 곳에 곰팡이가 피고, 대가리와 몸통이 초록색인 파리, 모기가 들끓었으며, 어이없이 크게 자라는 시궁쥐들이 고양이를 물어 죽이는 거리. 띠 풀과 나무로 올린 지붕도 습기와 곰팡이와 세월을 이기지 못해 한 블록 씩 쏟아져 내리고, 집 전체가 일정한 속도로 땅 속으로 가라앉는 곳에서 사람들은 햇빛 속에서 기이하고 왕성한 생기를 토해낼 왕쯔광을 기다리고 있었다. 왕쯔광, 빛의 형상 또는 한 덩이의 불이 그러나, 사람이 죽기 직전 잠시 정신이 맑아지는 한 순간임을 모른 채. 그리하여 거리 사람들은 종이에 표어를 써서 벽에 붙인다.

  “어둠은 지나갔다. 곧 빛이 왕림할 것이다!”

  거의 망해버린 집단농장에서 “보란 듯이 잘 살게 될 것이다. 마음껏 즐기며 살게 될 것이다!” 라고 주민들의 옆구리를 쿡쿡 지르는 <사탄 탱고>의 주인공들을 어떻게 연상하지 않겠는가 말이지.


  쉽지 않다. 황니거리. 검은 비가 내리는 진흙 거리. 아스팔트 포장을 생각할 수 없는 멸실의 거리가 징그럽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가능한 만큼 오염시키고, 감염되고, 배설하고, 썩어 문드러지는 광경.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짐승들의 헐벗고 병들고, 죽어 함부로 버려졌거나 부패해가는 시신의 상태. 하염없이 쏟아지는 검은 비 때문에 재래식 화장실에서 넘쳐 마당과 부엌과 거실과 거리로 함부로 흘러가는 모습.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엉덩이를 까고 앉아 일을 보는 중국의 재래식 화장실 전경.  감염된 사람의 몸 속에서 억지로 잡아 빼거나 스스로 몸 밖으로 나오는 생명체의 덩어리. 이런 모든 것을 감수해야 이 책을 읽을 수 있다.

  수도물에서 며칠동안 비린내가 난 이유가 물을 끌어오는 입수 펌프 앞에 사람의 시체가 둥둥 뜬 채 파이프를 막고 있었기 때문이며, 그 물을 먹어도 아무도 즉각적인 몸의 이상을 호소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나, 파리의 대가리와 날개를 떼고 요리해 먹는 것도 비위좋게 넘길 수 있어야 한다.

  다만 일부(또는 많은) 독자는 이런 장면을 질색하지만 전향적으로 생각하기만 하면 그다지 나쁘지는 않다. 중국 선봉파의 진짜 기수 찬쉐의 데뷔작품이다. 이이는 이런 허들을 데뷔작에 은닉해 놓았다. 여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을 더했다. 진짜 읽으실 분은 각오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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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나, 부르군드의 공주 / 결혼식 / 오페레타 제안들 8
비톨트 곰브로비치 지음, 정보라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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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톨트 곰브로비치가 1904년에 폴란드 작은 마을의 대단히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건 확실한데, 인터넷 두산백과와 네이버 지식백과에서는 이이를 유대계 폴란드 사람이라 하고, 정보라의 곰브로비치 연표에는 하급 귀족가문 4남매 가운데 막내라고 한다. 나도 전에 독후감 쓸 때, 부르노 슐츠, 스타니스와프 비트키예비치와 더불어 비톨트 곰브로비치를 폴란드 문학 3인방이라고 조금 과장한 적이 있으며, 이들 세 명이 모두 유대계라고 알았다. 19세기말, 20세기초에 폴란드에서는 유대인에게도 (하급)귀족 작위를 주었던 걸까? 아니면 곰브로비치 가문이 절묘하게 자신들의 유대 정체성을 숨겨온 걸까? 크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1939년에 우연히 폴란드에서 만든 여객선의 출항을 취재하기 위하여 탑승했다가 다시는 폴란드로 돌아오지 못한 속내 가운데 하나가, 만일 유대계라면 조국에 남아 있던 가족들이 나치와 폴란드 정부에 의하여 몰살을 당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라서. 그럼에도 곰브로비치는 폴란드에 대한 지극한 애정으로 평생 폴란드 언어로 글을 쓴 것이 참 대단한 것일 테고, 아니면 외국어로 작품을 쓸 수 없는 언어의 지옥이 끔찍했을까, 생각의 갈피가 왔다 갔다 한다. 곰브로비치의 히트작인 <페르디두르케>가 나치 치하에서 금서로 찍혀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에서 불태워진 것도 그러하고.

  이 극작품집을 읽음으로 해서 나는 우리나라에 번역해 출간된 모든 곰브로비치를 다 읽었다. <페르디두르케>, <코스모스>, <포르노그라피아>는 소설이다. 이 세 편의 소설은 가슴에 손을 올려놓고 말하건대 읽기도 참 힘들게 읽었고, 헉헉거리며 끝내 한 글자도 빼지 않고 다 읽었음에도, 물론 읽고 8년에서 10년 정도 시간이 흘러서 그런 것도 있지만, 누가 줄거리를 이야기해주지 않으면 아주 짤막한 단편斷片, 조각 정도만 생각이 나며, 그것도 어느 작품에서 나오는 것인지는 도무지 기억할 수 없다. 세계적인 모더니즘의 기수로 고전의 반열에 올라있는 작가를 두고 이렇게 말하면 가방끈 짧은 걸 광고하는 거 밖에 되지 않겠지만, 같은 간전기(1920~30년대, 세계대전 사이의 시기)에 눈썹이 휘날리는 활약을 했던 동료들인 슐츠, 비트키예비치의 작품과 비교하면, 표현의 방법이나 작품 속의 폭발력이 아무래도 얌전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애초에 이 희곡집을 구입할 때부터 오늘 다 읽은 시점까지 내가 내 돈 내고 또다시 자발적인 “고난의 행군”을 하기로 했다는 점을 한 번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참으로 다행스럽다. 출판사 워크룸프레스의 “제안들” 시리즈에 유독 독자가 힘들어할 만한 텍스트를 소개하고 있어서 《이보나, 부르군드의 공주 / 결혼식 / 오페레타》 첫 페이지를 넘길 때도 각오를 단단히 했었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야기엘로인스키 대학의 예쥐 야젱브스키 교수가 쓴 서문이 실려 있다. 원래 이런 거 잘 안 읽는다. 근데 이번엔 다른 작가도 아니고 비톨트 곰브로비치. 세 번 읽었다가 세 번 코피 난 작가라서 처음부터 쫄아 있었던 건 고백해도 부끄럽지 않다. 그리하여, 후딱 읽어봤더니, 저 하늘 위에 먹구름이 조금 개기 시작해 활짝은 아닐지언정 구름 사이로 군데군데 햇살이 비치는 거였다. 그것도 모자라 본문을 건너뛰고 뒤로 가서 엽기토끼의 작가이자 이 책을 번역한 정보라의 해설을 읽은 후에 드디어 본문을 펼쳤더니, 아이고, 훨씬 수월하다. 다음은 서문의 요약이다.


  곰브로비치는 자신의 희곡작품을 공연하는 걸 “보는” 일에 그리 열정적이지 않았다. 그에게 희곡이란 근본적으로 공연을 위한 대본이 아니다. “연극성”이란 그의 심리적인 특성이었으며 내면에서는 줄곧 가면을 쓴 여러 버전의 고유한 “나”들이 있어 다수의 “나”들이 끝없이 다툰다. 그리하여 이이의 희곡은 공연이라기보다 낭만주의 이전의 오래된 레제드라마Lesedrama, 즉 읽는 희곡에 속하고, 읽기에도 적합하다.

  곰브로비치의 희곡들은 무엇보다 20세기 역사에 대한 해석이며, 작품의 주요 주제는 20세기의 인간과 현대의 사회와 체제들, 정권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대한 변화를 포착한다. 우선 옛 질서에 대한 투쟁을 시도하고, 시도의 패배와 관습적인 존재 방식으로 회귀하고, 질서를 의식적으로 파괴해, 존재의 자발성으로 돌아가든지, 형식을 파괴하든지, 이것저것 섞어찌개를 끓이든지 한다.


  위 두 문단의 요약을 미리 염두에 두고 곰브로비치의 부조리극을 읽으면 그나마 조금 수월하다. 아, 지금 “수월하다”라 했다고 일반적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의 의미로 수월하다고 여기면 곤란하다. 하여간 작품은 부조리극이다. 몇 년간 프랑스 희곡을 중심으로 일반독자 치고는 부조리극을 열심히 읽은 편이라 <이보나, 부르군드의 공주>를 그리 어렵지 않게 읽었으며, 어라, 아들이 부왕을 폐위시켜 지하 감옥에 가둔 후에 스스로 왕위에 오르는 건 알프레드 쟈리의 부조리극 <위비 왕>하고 유사한 걸? 뭐 이렇게 주접을 떨어가며 나름대로 즐길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결혼식>과 <오페레타>를 연이어 정독을 하려니 머리속에서는 냉장고 신선실에 두고 온 삼겹살과 삭힌 홍어회가 삼삼하고, 머리, 어깨, 무릎, 발이 욱신욱신 쑤시기도 했다. 그러니 권하옵기를 하루에 한 편 씩만 감상하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다. 대신, 집중, 집중 또 집중해서. 하, 젊어서 이렇게 공부를 했으면….

  이 책의 매력이 하나 더 있다. 부조리극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사무엘 베케트가 쓴 <고도를 기다리며>인데, 사실 고도를 찾는 게 내가 읽어본 부조리극 가운데 제일 재미있고 쉽다. 당연히 무슨 뜻이고, 뭘 주장하는지 딱 한 마디로 이야기할 재주는 없으나 하여간 고도 빼고 나머지 출연진이 자기 잘난 맛으로 신발도 벗었다가 다시 신고, 혓바닥에 제트엔진을 달고 속사포 쏘듯 별 거 아닌 거 가지고 떠들어 대는 재미라도 있다. 결코 돌아오지 않는 고도 씨, 물론 돌아오는 고도 씨도 있다, 나는 봤다, 이 고도를 부조리극의 평균이라고 여겼다가는 정말 코피난다. 쌍코피. 내가 읽은 프랑스 부조리극들도 역자나 출판사에서 희곡을 감상하는 포인트를 이 책만큼 설명을 해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부조리극은 곧잘 줄거리가 지금 어떻게 꼬여가는지 읽으면서 헤매는 경우가 숱하다. 엽기토끼 정보라는 친절하게도 희곡 세 편 들어가기 바로 앞에 각 막마다 줄거리를 요약해놓았다. 줄거리 요약을 스포일러라고 치부해서 읽지 않고 그냥 작품으로 직진하지 마시라. 드라마 장면이 어떤 과정이고 무슨 장면을 위한 예비인지 알 수 있게 해준다.


  요약. 내가 읽은 순서. 서문 – 역자 해설 – (각 희곡마다) 해설 및/또는 줄거리 – 본문.

  역자 해설은 책의 순서에 입각해 다 읽은 후로 돌려도 좋겠지만 ‘서문’과 ‘작품해설 및/또는 줄거리’는 반드시 읽고 본문으로 진입하시기 권한다. 만일 정말 이 책을 읽으시겠다면 말이지만.

  이렇게 이야기하면 좀 얄밉겠지?

  정말로 읽으실 분들에게, 행운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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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치일기 1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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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1996년 작품. 1990년 8월부터 1991년 6월까지 지속된 콜롬비아 기자 열 명의 납치사건에 관한 기록이다.

  마루하 파촌은 삼촌이기도 했던 남편과의 사이에서 세 딸과 두 아들을 두었는데 세월이 갈수록 도무지 성격상 차이로 견딜 수 없어 가톨릭 대주교에게 요구해 친족간 혼인관계 불성립의 판정을 받아냈다. 원래 집안 대대로 신문기자인 인텔리 계급이라 자신도 신문기자로 다시 커리어를 이어가면서 크지 않은 잡지사를 창간하기도 했고 두 달 전부터는 국영단체인 영화진흥원 포시네의 원장으로 임명되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생활을 이어갔다. 마루하의 언니 글로리아 파촌은 루이스 카를로스 갈란의 아내였는데, 남편이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들에게 대폭적인 지지를 받아 거의 당선이 확정적이었지만 그만 테러리스트에게 표적이 되어 암살당하고 말았다. 루이스 갈란은 “범죄자의 국외 인도”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강경파였다.

  이 책이 끝날 때까지 계속해 문제가 되는 콜롬비아에서의 “범죄자 국외 인도”, 국외는 미국을 일컫는 말이다. 콜롬비아는 당시 전 세계 마약 공급의 80퍼센트 이상을 차지했으며, 마약왕이라고 불린 메데인 카르텔의 설립자 파블로 에밀리오 에스코바르 가비리아는 마약을 팔아 한때 세계 제7위의 현금보유자로 이름을 올릴 정도였다. 문제는 콜롬비아 마약의 대부분이 미국으로 흘러들어 마약 가격이 하락하는 바람에 마약 중독자가 순식간에 불어나 사회적으로 큰 문제로 부각되었다는 점이다. 미국 정부는 좌익 게릴라들과 정부군 사이의 내전에 깊숙이 관여했던 전력이 있어, 비공식(미확인)적으로 마약 단체에 직접적인 소탕작전에도 개입하면서, 콜롬비아 정부에 마약 생산과 판매에 관련된 범죄자를 미국 법정에 세우라고 집요하게 요구했다. 미국 입장에서 콜롬비아 내부에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마약 카르텔을 정부가 체포해봤자 부패한 정부에 막대한 뇌물을 주어 가벼운 형을 선고받거나, 폭력적인 방법으로 체포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교도소에 수감 중이라도 여전히 마약 제조와 판매에 깊숙이 관여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또한 사실이 그러했다. 파블로 에스코바르를 필두로 카르텔의 지도자들은 미국으로 신병을 인수할 경우 최하 150년 형을 피할 수 없으며 90년이 지나기 전까지 가석방 심의 대상조차 되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는 터에 도저히 “범죄자 국외 인도”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하여 현직 영화진흥원 원장이며, 강력한 대통령 후보자였던 사람의 친척인 마루하 파촌 데 비야미사르는 카르텔이 납치 대상으로 점찍을 완벽한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마루하가 아이 다섯을 데리고 새로 결혼한 현재 남편 알베르토 비야미사르 카르데나스 역시 정치인으로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대통령 세사르 가비리아의 집무실에 전화를 하거나 찾아갈 수 있는 정도의 인물이었으니, 정부와의 협상에 적당한 미끼로 쓸 수 있음에야.

  영화진흥원 앞 오후 7시 5분. 마루하는 시누이 베아트리스와 르노 21, 관용차를 타고 퇴근한다. 베아트리스의 남편은 침착하고 경험 많고 유능해 명예훈장을 받은 신경정신과 의사 페드로 게레로 박사지만 이날 이후 우울증에 시달릴 예정이다. 일상적으로 시누-올케는 함께 차를 타고, 러시 아워 시간 속의 보고타 시내를 관통해 먼저 올케 마루하의 집에 들렸다가 베아트리스의 집에서 퇴근한다. 그러나 이 날 진흥원을 출발하자마자 메르세데스와 택시 한 대가 르노21을 바싹 뒤쫓기 시작했지만 마루하의 운전기사는 눈치채지 못했다. 르노21이 82번가로 들어서서 집에서 2백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회전길에서 오른쪽으로 커브를 틀었을 때, 택시가 난폭하게 다가와 앞길을 막는가 했더니 메르세데스가 바짝 뒤에 붙어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렸다. 눈과 입 부위에 구멍 세 개가 뚫린 복면을 쓴 남자 몇 명이 내리더니 소음기가 부착된 소총을 발사해 불쌍한 운전기사의 머리통에 구멍을 내버렸고 차 밖으로 끌어내 다시 네 발을 더 쏘아버린다. 기사는 사건이 알려져 사람들이 모일 때까지 숨을 쉬고 있었지만 앰뷸런스에 실려 병원으로 향하던 중 절명해버리고 만다. 괴한들은 마루하를 메르세데스에, 베아트리스를 택시에 싣고 급하게 출발해 보고타 시내를 질주하는데, 붐비는 퇴근시간에 지들이 튀면 얼마나 튀겠는가. 이렇게 납치된 두 명의 여인이 모처의 좁은 방에서 다시 만난다. 군대훈련을 경험했고 예비역 대위 자격이 있는 베아트리스는 괴한들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여유가 있었다. 이들이 베아트리스는 원래 납치 명단에 포함되지 않아 돌려보내겠다고 하자, 올케를 바라본 베아트리스는 자진해서 남겠다고 말해 마루하는 감격해버리고 만다. 혹시 모르지. 곱게 보내줄 리가 없잖아. 그 결정 때문에 목숨을 건진 것인지 누가 알랴. 이 작품은 이때부터 다음해 1991년 6월 이들이 납치에서 풀려나고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자수하여 스스로 교도소에 입소하는 장면까지다.


  마루하와 남편 알베르토 바야미사르가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만난 것은 1993년 10월. 납치에서 풀려나 2년 4개월 만이었다. 이 자리에서 부부는 마르케스에게 마루하와 시누이 베아트리스가 납치되고, 갇힌 장소에서 겪었던 경험, 두 명을 석방시키기 위한 각 계층 사람들의 노력과 납치한 쪽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 편의 소설로 만들어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의한다. 작품을 쓰는 데 필요한 모든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 시점이 가볍지 않다. 왜냐하면 콜롬비아 역사상 가장 악질적인 살인자인 에스코바르가 아직 처단되지 않은 상태였고, 국내 치안은 여전히 테러를 감행하고 있는 카르텔 쪽 단체 로스 엑스트라디타블레스의 기세 역시 주눅들기는커녕 에스코바르 자수 이전보다 더 맹렬하게 무차별 테러와 폭력을 행사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런데 이들의 납치를 소설로 쓴다고? 그랬다. 물론 구상 단계에서 에스코바르가 은신처 지붕 위에서 집중적인 기총소사를 받아 죽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게 얼마야, 안 그래?

  그런데 얼마 후, 작가는 마루하와 베아트리스 말고 여덟 명의 기자들이 이들보다 더 먼저 납치되었으며 결코 따로 떼어내서는 되지 않을 이야기인 것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차례로 이 시기에 납치됐던 사람들과 그 가족들을 인터뷰하는 한편, 이들이 남긴 메모나 기타 자료를 수집해 엉클어진 모든 것을 정리하며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내게는 굉장히 낯선 마르케스 표 르포 소설이 완성된다.

  1990년 8월 30일, 가장 먼저 납치된 사람은 디아나 트루바이. 크립톤 텔레비전 뉴스 책임자이며 잡지 『뉴스&뉴스』의 편집자를 겸해 일하고 있다. 특종을 잘 잡아내기로 유명하며 좌익반군과 내란시기에 반군 지도자와 단독 인터뷰를 따내 장안의 스타가 된 경험이 있는 막강 커리어의 히로인이다. 디아나에게 에스코바르와의 단독 인터뷰를 제안했으니 이걸 덥썩 물지 않으면 가짜 디아나라서, 그날이 되자마자 뉴스 논설위원 아수세나 리에바노, 편집자 후안 비타, 카메라맨 리처드 베세라와 오를란도 아세베토, 그리고 콜롬비아 주재 독일 특파원 헤로 부스까지 모두 여섯 명이 길을 나섰다가 몽땅 납치당하고 말았다.

  마리나 몬타야는 마루하보다 두 달 먼저 납치당했다. 환갑이 넘은 노년이지만 여전한 미모를 유지하고 있는 출렁이는 금발의 미인. 특히 손과 손톱이 돋보인다. 이 사람은 동생 헤르만 몬토야 때문에 납치당했다. 헤르만이 공화국 전임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내 막강한 스피커를 가지고 있다고 판단해 로스 엑스트라다타블레스가 데려왔지만, 납치행각을 벌인 뒤에 보니까 헤르만 몬토야는 이미 골방 신세로 떨어진 지 오래고 더구나 지금은 캐나다 대사로 나가 있어서 현 정부 정책에 감놔라 배놔라 할 처지가 되지 못한다. 납치가 있었고, 요구사항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당연히 인질에 대한 처형을 동반하는 것. 이때 납치범은 중요도가 떨어지는 순서로 사형을 집행한다. 그리하여 마리나 몬토야는 불행하게도 첫번째 처형 대상자로 이름을 올리고, 그렇게 된다.

  마리나가 납치되고 불과 네 시간 후에 당한 프랑시스코 산토스. 일명 파초 산토스. 이이는 신문 『엘 티엠포』의 편집부장이다. 15년 전에도 파초의 아버지 에르난도스 산체스에 대한 납치기도가 있어서 그런지 산초는 납치 기간 내내 무지하게 적응을 잘 하면서 오히려 감시하는 청년들을 감화감복 시키기에 이르는 유쾌한 사람이다. 자신이 어디에 갇혀 있는 지도 척 보고 알지만 함부로 도망하기엔 날아드는 총탄이 겁나 그냥 있기로 한다. 나중에 절호의 찬스를 맞아 창문을 열려고 하는 순간, 총 든 감시원이 “지금 뭐해!” 라는 외침에 “보면 몰라? 똥 누잖아.” 대꾸해서 자기 목숨 자기가 구한다.


  지금 두 권짜리 이 책은 절판이다. 이렇게 말하면 출판사한테 미안한데, 그렇다고 독자를 위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지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작품을 원하는 사람들은 선택하지 마시라. 이걸 소설이라 할 수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신동아나 월간조선에 5회에서 6회 분량으로 연재하면 딱 좋을 듯하다. 마르케스가 쓴 “르포소설”이라기 보다 그냥 “르포르타쥬”라고 하는 게 맞다. 웃기게도 책 뒤표지에 “<마술적> 리얼리즘에서 <사실적> 리얼리즘으로의 변신!>이라 써 놓았다. 아무리 거장이라도 다 마음에 들게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으, 이거 진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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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라기 / 광대가 공연예술신서 78
허규 지음 / 평민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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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4년 갑술생. 경기도 고양 사람으로 서울대 농대 시절에 연극부에 다니며 뜻을 세웠다. 연극하는 데 졸업장이 무슨 대수, 임학과 다니다 때려치웠다. 1956년 제작극회 창단멤버로 들어가 존 오스본 작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의 조연출로 시작했으니 처음부터 연기에는 뜻이 없었다고 본다. 1960년엔 실험극장 창단멤버로 참여해서 창립공연으로 이오네스코의 <수업>을 연출했는데, 본격적인 연출 데뷔작으로는 1961년 제작극회의 명동 국립극장 공연 차범석 작 <껍질이 째지는 아픔이 없이는>으로 친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엔 연극해서 밥 빌어먹고 살기 정말 팍팍해서 KBS, TBC, MBC를 차례로 돌아가며 연속극과 드라마 연출자로 활약해 “방송드라마의 차원을 높이고 건강한 방향을 제시”했다고 평가받는다. 1970년에 실험극장에서 오영진 작 <허생전>을 연출한 것을 계기로 우리나라 전통극에 몰입해 방송국을 때려치우고 “전통의 현대적 계승과 재창조”를 목표로 민예극장을 창단, 창단극으로 <고려인 떡쇠>를 올렸다. (인터넷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했음)

  허규의 첫 희곡은 1977년 제1회 대한민국연극제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물도리동>. 이후 1979년 대한민국연극제에서도 <다시라기>로 한 번 더 연출상을 받아 10월 25일에 무대에 올렸다. 1979년 10월 25일. 이날 딱 한 번 공연하고 막을 내렸다. 다음 날 새벽, 궁정동에서 김이 쏜 총알이 박의 뇌에 박히는 유고상황이 벌어져 게엄령이 떨어졌으며, 지금 생각하면 놀랄지 모르지만 전국적으로 애도 물결이 몰아치던 때라 어딜 감히 <다시라기> 같은 마당극을 올릴 수 있었을까. 공연을 준비하느라 쓴 돈은 하늘로 날아갔건만 절치부심, 허규는 다음해 5월에 국립극장 소극장을 빌어 재공연에 들어간다. 아뿔싸. 이제 또다시 한반도는 남쪽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황황하고 참담한 국면을 맞았으니 이번엔 관객이 한 명도 들지 않은 텅 빈 극장에서 공연을 해야 했다. 그리고는 2000년, 허규가 숨을 거둘 때까지 재공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책 머리말 참조). 극작가는 재공연도 못 봤지만 지금은 <다시라기>가 예술종합학교 입학 시험 실기 텍스트일 때도 있고, 다양하게 각색해 자주 공연하는 대표적 레퍼토리라고 한다.

  연출가, 극작가라기보다 이것들을 통틀어 연극인으로의 허규는 무엇보다 창극을 현대 무대에 새롭게 올려놓았다는 업적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전설적인 여성 명창인 박녹주, 김소희 등을 앞세운 여성국극으로 명을 이어가던 창극은 1970년대 들어 개봉관 공연은 전혀 없었고 재개봉관에선 간혹 있었으나, 거의 대부분 변두리 동네의 작은 재재개봉관 극장에서 “1부 쇼, 2부 영화”, 이런 수준으로 전락해버렸다.  당연히 공연 시간도 두 시간을 넘지 못해 우리나라 고유의 창극이 갈 길을 찾지 못하던 때, 허규는 다섯 시간 이상을 공연하는 대작 혹은 제대로 된 창극을 시도했으며 이 과정에서 잊혔던 <강릉매화전>을 복원했다고 한다. 이이가 없었더라면 1970년대 중후반부터, 기억하기로는 중구 정동 당시 문화방송 건물 강당에서 주로 공연했던 마당극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노인이 되었지만 당시 윤문식, 김종엽, 김성애 등이 시민들의 눈과 귀를 붙잡아 기어이 배꼽까지 빼고 말았던 여러 마당극은 그때의 인기를 유지하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다시래기”의 사전적 의미는 “전라남도 진도에서 전승되는 장례풍속. 출상 전날 밤에 상가에서 노래와 춤과 재담으로 상주를 위로하는 놀이이다. 국가 무형 문화재 정식 명칭은 “진도 다시래기”이다. 국가 무형 문화재 제81호.” (인터넷. 표준국어대사전)


  이것이 위키피디아로 넘어가면 “한국의 상여놀이의 일종”이며 “출상 전날 밤 빈 상여를 이용한 놀이로서 상을 당한 유족들의 슬픔을 누그러뜨리고 죽은 자의 극락왕생을 축원하기 위한 행사”이다. 진짜 상주 말고 가짜 상주, 즉 가상주가 등장해 상주 대신 손님도 맞고 곡도 하고 어른들 빈 술상 눈에 들어오면 어, 진숙이 어멈 윗돌 어른 새 상 가져다 드려, 술 한 주전자하고, 마당 간수도 제대로 한다. 물론 진도라니까 신랄한 전라도 사투리로 그랬을 거다. 그런데 아무 초상이나 이런 건 아닐 터. 어린 아이 아홉 두고 초년에 고기잡이 갔다가 파도에 실려 온 초상집에서 아무리 슬픔을 누그러뜨린다는 명목이라도 꽹과리, 장고, 북을 동원해 춤과 재담을 발휘할 수는 없을 테니. 그리하여 필요충분 조건이 반드시 호상일 것. 놀이패를 넉넉하게 먹이고 초상 끝나면 행자라도 쥐여줄 수 있는 방귀깨나 뀌는 집일 것.

  어느 시골에 초상이 나 갔더니 고인이 아흔이 넘어, 당시엔 무지무지무지하게 오래 사신 거였다, 편하게 잠자다 깨지 않았다는데, 편히 쉬시기를, 풍물은 부르지 못하고 대신 노래방 기계 가져다 밤새 노래하고 춤추고 놀았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이것도 일종의 다시래기로 볼 수 있다. 진도는 아니지만. 또 있나? 있다. 임권택 감독이 1996년에 연출한 <축제>. 밤새도록 조문객이 술 마시고 고스톱 치고 도리짓고땡 하고 주정부리고 하는 건 뭐 상가면 늘 하는 일이고, 초상 다 치룬 후에 기념사진 한 방이 무슨 일이래? 자, 모두 여기 보셔요. 하다가 상복 입고 딴 표정 지을 수 없어서 엄숙 모드로 있는데, 찍사가 하시는 말씀이, “얼굴이 왜 그래요? 어디 초상 났어요?” 하니 사람들이 와하하하…. 그것도 일종의 다시래기지 뭐겠는가. 우리나라 대부분의 호상은 전부 일종의 다시래기다.

  이 책에 나오는 <다시라기> 이야기는 다 끝났다. 여태 말한 ‘다시래기’를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다. 춤과 소리, 음악, 장단 같은 것을 문자로 이야기해봤자 책을 직접 읽은 나도 이해 못하고, 그걸 전해본들 당신도 이해 못하니 그냥 지나가자. 초상난 김에 한 판 잘 때려먹는 굿판이 벌어지는 거다, 이런 선에서. 책을 읽으면 보탤 수 있는 건 소리꾼이 하는 사설의 내용 뿐이다. 그거 한 자락 소개해보자.


  “진도 다시래기에 나오는 춤은, 사당과 중이 추는 허튼춤을 비롯하여 사당이 추는 곱사춤과 거사가 추는 봉사춤과 같은 이른바 소회적인 발림춤이 있다.” (위키피디아)

  라고 했고, 허규는 거사 대신에 정말 봉사를 등장시켜 (봉사 역을 하는 거사겠지만 하여간 대본에는) 봉사가 춤도 추고 소리도 한다. 봉사의 아내가 아이를 낳는 순간, 소리 한 자락 꽝!


  홀애비 죽어 원한귀야, 총각 죽어 몽달귀야 너도 먹고 물러가라, 선달 죽어 노망귀야, 과부 죽어 한 식귀야, 너도 먹고 물러가라, 신통, 방통, 해산통, 밥통, 똥통, 오줌통, 배통, 복통, 장구통, 북통, 요통, 옆구리통, 신통, 방통, 퉁 터져서,

  옥동자를 쑥 내주소,

  잠잘 때는 반듯 눕고

  사랑한 것 보지 않고

  고른 자리 찾아 앉고

  음한 소리 듣지 않고

  삼가하고 조심했으니

  아들이면 정승감

  딸이면은 정경부인

  그 아이 수이 낳아

  무럭무럭 자랄 적에

  너그럽고 부드럽게

  자상하고 지혜롭게

  잘 먹이고 잘 길러서

  눈망울은 수정같이

  마음은 하해같이

  기운은 철퇴같이

  재조는 조물주같이

  훌륭하게 길러 내어

  그른 일 바로잡고

  바른 길로 키우리다.

  두리둥, 두리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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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1-22 18: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도리동은 들어 본 것 같습니다. 와, 근데 이분 참 부침이 많으셨네요. 그런 속에서도 끝까지 해 내셨던 걸 보면 존경스럽고. 돌아가셨을 땐 어떠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암튼 이리뷰를 통해 또 한 번 배우네요. 잘 읽었습니다.^^

Falstaff 2024-01-22 16:36   좋아요 1 | URL
이건 중국이 부러운 겁니다. 걔네들은 경극, 북경에서 공연하는 전통극을 이어가기 위하여 무진장하게 애를 쓰고 있거든요. 저 천년 전 원나라 시대부터 이어지는 극의 전통을 이으려는 노력이 정말 부러울 정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허규의 작업이 비록 상업적이고 통속적이었다고 할지언정 존중받아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별 다섯? 넷? 헷갈리다가 결국 넷을 선택한 저도 밉습니다. ㅋㅋㅋㅋㅋ 이제 오후 다섯 시도 안 됐는데 벌써 취한 거 같네요.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7
알랭 로브그리예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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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랭 로브그리예의 작품으로는 대단히 의외다. 마치 허를 찔리는 듯한 느낌. 영화에도 관심을 가져 여러 시나리오 작품을 써서 황금사자상 같은 것도 받았으며 영화 연출도 몇 편 한 바와 같이 로브그리예 표 소설이라기 보다 영화를 위한 밑그림 같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정말 영화로 만들었다면 첫 장면, 남자인 듯도 하고 여자인 듯도 한 진Djinn이 등장하는 장면부터 관객을 팍 몰입시키는 효과를 기대할 만하겠다. 7장 마지막에 딱 한 번 나오는 베드 씬도 (영화라면) 적절한 분량에다가, 열린 결말이라서 엔딩 크레딧이 죽 올라갈 때까지 관객은 애매모호한 표정으로 차마 일어나지도 못하고, 이 영화를 좋다고 해야 하나, 후지다고 해야 하나, 재밌다고 해야 하나, 재미없다고 해야 하나, 고민하게 만드는 대단히 기분 좋은 심통도 부릴 수 있겠다. 물론 연출하는 감독에 따라서.

  로브그리예 작품을 많이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그의 작품으로는 낯설다. 책을 다 읽고 작가 연보를 보니 이렇게 쓰여 있다.


  “1980년부터 1987년까지 브뤼셀자유대학교의 문학사회학 연구센터 소장직을 맡을 것이다. 멕시코 순회강연을 다닌다.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 교수 이본 레너드의 요청으로 쓴 책 『면접Le Rendezvours』을 1981년에 출간한다. 프랑스어에 숙달하고자 하는 미국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교육 목적에서 집필한 소설인데, 이야기의 얼개가 문법의 활용과 정교하게 맞물려 전개되도록 고안한 텍스트다. 같은 해 미뉘 출판사에서 나온 『진Djinn』은 그 텍스트에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보강하여 새로 펴낸 소설이다.”


  역자 성귀수는 위 인용에서 첫 문장을 미래 시재를, 다음 문장부터 현재 시재를 사용한다. 미국 대학생의 불어 향상을 위한 한 학기용 교과서라서 1장부터 8장까지 장이 올라갈수록 난이도도 따라서 올라간다는데, 본문에서도 단순과거 시재니 복합과거 시재니 시재 이야기가 몇 번 나와서 혹시 역자가 미래 시재와 현재 시재를 혼용해 쓰는 장난을 쳤을까? 잠깐 생각했다가, 아니겠지, 타이포겠지, 이렇게 여기기로 했다. 아, 이거 시비 거는 거 아니다. 작품이 프랑스어 교재의 난이도에 따라 쓰여졌다니까 혹시 해서 나도 장난삼아 해본 말이다.

  미국인 학생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프랑스 소설 한 편 읽기도 쉽지 않은데, 그것도 다른 작가도 아니고 골치 아픈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한 알랭 로브그리예가 쓴 텍스트를 읽는 것만 가지고도 충분히 혈압 올라가는 일이건만 그가 보통 쓰는 식으로, 소위 누보-로망 작품으로 교과서를 만들었다면 그걸 제대로 읽고, 읽을 수 있다고 쳐도 감상할 수 있었을까. 이를 어엿비 여긴 작가는 나름대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게 썼을 지도 모른다. 근데 이이가 살아 있어야 물어보지? 거참.

  알랭 로브그리예의 작품은 대단히, 대.단.히. 건조하다. 사물이나 상태를 미분적으로 쪼개 지면에 옮기는 행위를 즐긴다. 이 작품 1장 두번째 문단은 이렇다.


  “내부는 온통 조용하다. 좀더 바짝 귀를 기울이자, 꽤 가까운 곳에서 맑은 소음 하나가 규칙적으로 탐지된다. 제대로 잠그지 않은 수도꼭지로 물이 새면서 통이나 대야 또는 바닥에 고인 웅덩이에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다.”


  내가 아는 알랭 로브그리예라면, 이렇게 썼을 지도 모른다.


  “가로 20미터 세로 50미터, 높이 7미터 60센티미터의 텅 빈 창고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청각에 보다 더 주위를 기울이자 두시 반 방향 약 5.3미터 정도 거리에 있는 지상 60센티미터 높이에 설치된, 반의 반은 흑갈색 녹이 슨 크롬 도금 수도꼭지의 물이 새면서 수도 앞에 놓인 가림막 때문에 창고 입구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통이나 대야 아니면 그냥 바닥에 고인 물 웅덩이에 분당 35회가량 빈도로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니면 식물에 물을 주는 물 조리개일 수도 있다.”


  원래 문장을 왜 로브그리예가 허용하지 못하느냐 하면, 수도꼭지에서 물이 어디로 떨어지는 지 모를 수 없다. 그냥 한 번 휙 쳐다보면 될 것을. 아마 저 장면 자체가 나오지 않았을 거 같다. 안 봤으니까. 근데 저렇게 썼으니 어찌 예외적인 작품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이이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기가 질리는 건, 내가 다시 쓴 문장보다 백 배는 세밀한 걸 잠깐도 아니고 무려 2백 페이지에 육박하거나 그걸 넘어가는 분량 내내 읽고 있다고 가정해보시라. 아주 기가 넘어간다. 아니라고? 그럼 당신은 누보-로망하고 연분이 무지하게 잘 맞거나 안 읽어본 거다. 나는 특히 로브그리예와 사로트를 읽을 때마다 그렇게 돼지머리고기에 소주 한 병이 생각난다. 맨정신이 힘들어서.

  내가 처음 읽은 누보 로망 작품이 나탈리 사로트가 쓴 <황금열매>였는데, 그냥 읽었다는 말이지 무슨 감명이나 감동, 감화 이딴 의미 아니다. 말 그대로 문자, 글씨 모음을 읽었을 뿐. 이어서 두 번째가 로브그리예. 세번째 나이 든 마르그리트 뒤라스와 미셸 뷔토르 등등.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소감은 대동소이하게 “문자를 읽었음”에서 그리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다. 실제로 로브그리예와 비슷한 시기를 살다 간 쥘리앙 그리크는 특히 로브그리예를 예로 들면서 누보-로망의 과도한 미분적 세계관과 묘사방법을 크게 비판했는데, 아이고, 그걸 읽고 얼마나 기분이 좋든지.

  그러면 <진>은 로브그리예의 이색적 작품이며 누보-로망과 조금의 거리가 있으니 더 즐겼느냐고? 즐긴 건 맞지만 암만해도 아쉽다. 로브그리예를 읽을 때는 아주 엷은 지옥의 맛을 보는 재미로 이이를 선택해 돈 내고 일부러 고역을 견디는 소프트 코어 식 피학적 재미인 것을, 그걸 쏙 빼앗긴 느낌이다. 누보-로망이 웃기는 것이, 읽을 때 어렵고 읽고 나서도 머릿속에 남은 거 없어서, 나한테 돈 빌려가서 안 갚은 놈 있으면 재미있으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데, 위에서 내가 <진>의 한 단락을 다시 써 본 것처럼, 내 주위에 글 좀 쓴다, 하는 동무들은 한 명도 빼지 않고 다들 한 번씩 누보-로망 식 미분적 문장해체를 시도해본다는 말이지.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매력”이지. 이거 말고 어울리는 말이 또 뭐가 있겠어? 아, 몰라, 몰라, 몰라. 요즘 문청들한테도 누보-로망이 연구 대상인지는.


  <진>은 프롤로그로 시작한다. 화자 ‘나’부터 골이 좀 아프다. ‘나’는 시몽 르쾨르라는 이름의 남자의 수수한 아파트 방을 열고 진입한다. 책상 위에는 더블 스페이스로 타자한 99쪽 분량의 소설을 발견한다. 소설을 읽어가면서 든 생각은 프랑스어를 가르치기 위한 교과서 가운데 하나를 읽는 기분이다. 미국 대학의 학기당 8주에 대충 들어맞게끔 여덟 장chapter으로 구성한 작품.

  ‘나’는 저자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다. 키이우 출신의 전기기술자 보리스 쾨리스멘이라는 프랑스 여권이 나왔지만 틀림없이 외국에서 만든 조악한 위조 여권이다. 게다가 이름이 우크라이나 사람으로 볼 수도 없다. 몇 달 전부터 파시가street에서 프랑스 현대문학을 가르쳤는데 이땐 또 로빈 쾨르시모스, 일명 시몽 르쾨르라고 되어 있다. 이 오리무중의 사내가 귀신처럼 사라지면서 남겨둔 유일한 것. 그게 99쪽의 소설 한 편이다. <진>의 본문 1장부터 8장까지로 구성한.

  내용? 프롤로그, 에필로그 빼면 겨우 백쪽 분량인데 내용까지 다 일러드리면 정작 진짜 책 읽을 땐 뭘 읽으시려고. 그냥 시간의 다차원 공간 이야기라고 해두자. 충분히 즐길 만한. 전혀 어렵지 않은 로브그리예. 그의 누보-로망에 질리신 분들도 가볍게 도전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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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1-19 06: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허규, 《다시라기/광대가》
화요일.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납치일기>
수요일. 비톨트 곰브로비치, 《이보나, 부르군드의 공주 / 결혼식 / 오페레타》
목요일. 찬쉐, <황니가黃泥街>
금요일. 존 스타인벡, <통조림공장 골목>

잠자냥 2024-01-19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그 양반이 글케 해맑게 웃었나봅니다?! ㅋㅋㅋㅋㅋ

Falstaff 2024-01-19 10:29   좋아요 1 | URL
영화계에서도 돈 좀 벌었잖아요. 그 동네가 기본 얼굴은 있어야 하는데 제법 어울립니다. 거의 모든 책에 같은 사진을 올렸더라고요. 잘 생겼습니다. 그래도 제 영원한 라이벌은 알랑 들롱입니다. ㅎㅎ

stella.K 2024-01-19 2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그러고 보니 오래 전 멋모르고 이 양반의 질투에 도전했다 질린적이 있네요. 누보 로망을 미분적이라고 하시니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도 이 책은 읽을만한가 봅니다. 영화같다니.
근데 미분적으로 글을 쓰시는 팔님의 동무가 계시다니 누군지 궁금하네요. ㅋ

Falstaff 2024-01-19 20:35   좋아요 1 | URL
하여간 누보 로망 책은 읽기가 여간 어려워야지요.
ㅎㅎㅎ 동무들이 걍 한 번 써본 건데요 뭐. 최수철을 필두로 당시 설대 불문과 출신 작가들이 누보 로망 식으로 많이 썼잖습니까. 폼은 나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