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라이프 1
한야 야나기하라 지음, 권진아 옮김 / 시공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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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4년 일본계 종양 전문의 아버지와 한국계 어머니의 딸로 LA에서 출생한 한야 야나기하라는 소설가, 편집자, 여행작가의 명함을 가지고 다닌다. 본인은 자신을 일컬어 부업으로 소설을 쓰는 잡지 편집자라고 규정한다. 2015년 이후 뉴욕 타임스의 서브 잡지인 티 매거진 T:Magazine에서 일하다가 2017년에 편집장으로 승진했다는데 아직 다니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미국 출판계가 “패션 산업만큼 속물적인 로컬 공동체”라는 그의 말대로 설마 여태 같은 직장에 다닐 수 있겠어? 하여튼 그때 이후로 죽 뉴욕에 살고 있단다. 본업 저널리스트, 부업 소설가로.

  이 책 <리틀 라이프>는 2015년에 출간해서 그해 맨부커상과 전미 도서상 최종 리스트에 올랐고, 서평잡지 “커커스”에서 주는 커커스 상을 받아 세금 포함 5만 달러가 예금통장에 찍혔다. 2016년엔 영국에서 오직 여성 작가한테만 주는 여성소설상을 받았는데 상금이 얼마인지는 모르겠다. 두번째 작품으로 이만 하면 대박을 친 거다. 우리나라엔 출간 15개월 후인 2016년 6월에 시공사를 통해 선을 보여 독자들의 열광적인 찬사를 받았다. 물론 소수의 아싸들도 있었다. 나는? 중도에서 약간 아싸 쪽으로 기운다. 그래서 시작부터 과감하게 내 감상을 말하자면, <리틀 라이프>는 포르노다. “포르노” 운운하니까 어떠셔? 혹하지? 변태 같다고? 기다려보시라.


  네 명의 청년이 등장한다. 열일곱 살의 주드 세인트 프랜시스, 열여덟 살인 나머지 세 명. 윌럼 라그나르손, 맬컴 어바인, 그리고 장 밥티스트 마리온. 이들은 보스턴 외곽에 있는 대학, 어떤 대학인지 딱 감이 잡히지만 그냥 넘어가자, 신입생일 때 기숙사 룸메이트로 처음 만나 죽음이 이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우정을 간직한다. 그냥 보통의 우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소설 한 편의 핵심 줄거리가 될 만한 대단한 우정, 서로가 서로에게 진실한 천사일 수 있는 완벽한 우정, 물론 언제나 완벽하지는 않지만 결국 완벽에 수렴하고야 마는 우정을 나눈다.

  윌럼 라그나르손. 스웨덴 이민 농부의 아들. 지적 장애를 가진 형을 잃고 그를 돌보지 못했다는 자책을 안고 산다. 부모 모두 세상을 떴다. 당연히 전 재산을 상속받았지만 형이 죽을 때 지불해야 했던 어마어마한 병원비가 집이며 목장이며, 그나마 얼마 되지 않은 동산 일체까지 깨끗하게 말아먹어 보통의 미국 소설 등장인물과 달리 부모가 죽어도 땡전 한 푼 건지지 못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 (바로 그) 명문대를 졸업했음에도 불구하고 뉴욕의 유명하고 견실한 레스토랑인 “오톨란”에서 웨이터를 하는 배우 지망생이(었)다.

  장 밥티스트 마리온. 애칭 “제이비”로 불린다. 아버지가 아이티에서 뉴욕으로 날아와 아이티계 미국인인 어머니를 만나 결혼하고, 제이비를 낳았으나 세 살 때 먼저 눈을 감았다. 공립고등학교 교사를 하면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어머니는 후에 맨해튼의 마그넷스쿨 교장이자 브루클린 칼리지 객원교수를 역임하며 혁신적인 교수방법으로 뉴욕 타임스 기사에 실리기도 한 유명인사다. 집에 외할머니, 이모 등 여성들 틈바구니 속에서 살았으나 나름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미술학도.

  맬컴 어바인. 세상에 나올 때 입에 은수저를 물고 있어서 산과 의사가 기겁을 했다. 유명 로펌 회사 중역까지 지낸 아버지 덕택에 살아생전 한 번도 돈에 궁해 본 적이 없다. 자본주의 시대에 역시 돈이 최고라서 어려서부터 자유로운 영혼을 즐기며 살았지만 바로 이점 때문에 아버지는 맬컴보다 누나 플로라를 편애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맬컴은 (정체상태의) 일, (존재하지 않는) 연애생활, (정해지지 않은) 성정체성, (불확실한) 미래를 고민하다가 건축가로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된다.


  그리고 주인공, 주드 세인트 프랜시스. 이름 “주드Jude.”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명이지만, 은화 서른 냥에 예수를 팔아먹은 이스가리옷 사람 유다와 이름이 같아 2천여 년간 크게 손해를 본 성 유다 타데오는 “좌절하는 사람”, “절망스러운 상황에 놓인 사람”들의 수호성인이다. <리틀 라이프>의 주인공 주드는 내가 읽은 소설책 가운데 기억할 수 있는 모든 등장인물 중에서 가장 불운한 별을 타고 태어났다. 수호성인은커녕 좌절과 절망 자체이며, 저 먼 기억 속, 열여섯 살이 되기 전에 겪은 폭력의 지독한 후유증 속에 평생 지배당한다.

  어느 싸늘한 아침, 주드는 쓰레기 더미 위에서 발가벗은 유아의 모습으로 수도원 앞에 버려져 있다. 이를 발견한 수도사, 신부들은 아이를 입양시키려고 하지만 그렇게 되지 못해 수도원에서 키웠다.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도 아이는 자랐고, “주드”라는 이름을 받았으며, 수도사와 신부한테 수업도 받았다. 수도원의 잡일을 하며 사소한 잘못에도 가혹한 체벌을 당했다. 소년 주드는 하필이면 잘 생긴 모습으로 컸다. 하긴 어떻게 생겼어도 별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주드는 수도사와 신부 몇 명에게 지속적으로 강간과 폭행을 당해 심신이 망가진다. 십대 초기부터 주드는 돌 벽에 자신의 몸을 던져 자해를 하기 시작했다. 온실에서 식물을 키우면서 자신을 한 번도 구타한 적이 없는 친절한 말씨의 루크 신부는 소년 주드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였다. 역시 열두 제자 가운데 한 명이며, 예술가, 의사, 학생, 도축업자의 수호성인 루크.

  지옥 속에서 차디찬 벽을 향해 몸을 던지던 주드에게 루크 신부는 자신과 수도원을 탈출하자고 제의한다. 유일한 피난처였던 루크 신부의 뜻을 좇아 고물 자동차를 타고 떠나는 주드. 루크 신부는 모텔에 머물며 차마 어쩔 수 없이, 어쩔 수 없어서 그런 것처럼 가장해 주드의 몸을 판다. 그러면서 틈이 날 때, 주드에게 라틴어를 비롯한 다양한 과목을 가르친다. 적어도 하나는 확실한 건, 학생의 수호성인의 이름을 딴 루크 신부, 에드거 윌못이 훌륭한 교사였다는 점. 윌못은 숱한 성인 남성에게 매춘을 하는 주드가 다시 모텔의 벽을 향해 몸을 던지기 시작하자, 자기 상품의 가치가 떨어질 것을 우려해 몸에 더러운 색깔의 흠집을 내는 것보다 훨씬 간단하게 자해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도록, 친절하게, 면도칼로 팔의 근육을 긋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이렇게 해서 주드는 평생동안 최소한 일주일에 세 번 이상 자신의 팔뚝을 면도날로 긋는 행위를 지속하게 된다. 가른 피부에 흰 줄 같은 새살이 돋고 돋아 촘촘하게 흰 선이 생겼어도 돋은 새 살의 아래를 한 번 더 가르고, 지혈을 하고, 붕대를 감으며 고통을 유지시켜야만 삶을 살 수 있는 주드.

  여전히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 루크 신부를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했던 주드는 고아원에 들어가서도 많은 카운슬러들에게 역시 같은 구타와 강간을 당한다. 견디지 못하고 고아원을 탈출헤서도 그를 기다리는 것은 또다른 강간과 폭력이었으며, 평생을 따라붙는 지독한 폭력이었는데, 그건 불시에 나타나 갑작스러운 경련처럼 나타나는 끔찍한 고통이었으니 역자는 이것을 “삽화”라고 번역했다. “장기적으로 지속되는 병을 앓는 중, 병의 증상이 위급하게 나타나 일정 시간 지속되는 한 차례의 사건을 의미하는 의학용어.”

  루크 신부가 함부로 말해본 것을 주드가 계시처럼 기억한 대로 열여섯 살이 가까워오는 시절 기적처럼 선한 사회복지사 애너를 만난다. 여태까지 주드가 만난 모든 인간이 악마였던 것과 달리 이제 주드 앞에 “케일럽”이라는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천사이거나 천사의 오른편에 앉은 이들만 나타난다. 괜찮은 위탁가정에서의 몇 달을 보낸 다음 보스턴 근교의 대학에 입학하고, 여전히 면도날로 자신의 팔뚝을 그으며, 진정한 우정 속에서 로스쿨을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순수수학 석사과정을 밞으며 뉴욕 지방 검찰청을 거쳐 최고의 로펌인 로젠 프리처드 앤드 클라인에 입사해 소송분과장으로 일한다. 드디어 사랑을 찾았고, 생각지도 못할 만큼 많은 돈을 벌었으나 여전히 마음 속 괴물의 검은 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한야 야나기하라


  충분하게 감동받을 만한 주인공과 주변인들. 그럼에도 나는 이 작품을 포르노라고 규정하니, 그건 등장인물의 행위를 묘사하는 한야 야나기하라 때문이다. 그는 확실히 “속물적인 로컬 공동체”에서 쓰는 문법으로 소설을 쓴다. 청년 주드가 잘 드는 면도날로 자신의 팔뚝을 섬세하게 긋는 장면. 하이퍼 레알리즘, 또는 포토 리얼리즘 적인 묘사가 연속적으로 창궐하면 이건 소음이며, 공해이며, 춘화이며 포르노다. 처음 팔뚝을 긋는 장면에서 독자는 경악을 하다가, 팔꿈치부터 손목까지의 하박에서 상박의 이두근으로 발전할 때는, 심하다 싶었는데, 이게 연속되면 나중엔 “지루하다”가 된다.

  사랑도 그렇다. “연속되는” 짙은 애무나 지루한 노골적 삽입을 포르노라고 하지, 요즘 시대에 촌편처럼 등장하는 베드씬을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사랑의 감정, 이 중에서 상실의 감정도 마찬가지. 작가는 어떻게 효과적으로, 간략하게 어필할 수 있을까를 궁리해야 마땅…한 거 아닌가? 작품 속에 ‘페르마의 정리’ 증명을 설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한 수학자가 증명을 하긴 했는데 여전히 많은 수학자가 다른 방식으로 증명하기 위해 뇌를 썩이고 있다고. 지금의 증명은 백장이 넘는 A4 용지가 필요해, 이를 대폭 간략한 방법으로 증명하기 위해서 그렇다고. 그런 것을 이해하는 작가가 왜 팔을 긋고, 나중엔 그것도 모자라 허벅지까지 긋는 행위, 사랑의 상실을 앓는 장면을 그리 연속적으로 크레센도, 크레센도, 점증시켜 기어이 포르노를 만들고 마는지 나는 무척 아쉬웠다. 자극적인 장면의 연속이 지긋지긋했다. 나는 밤에 자다가 진짜 꿈도 꾸었다. 젊은 남자가 면도날로 자기 팔뚝을 그어, 쩍 벌어진 붉은 근육 좀 보라고 내게 내미는. 이런 우라질.


  할 말이 여전히 많다. 주드를 둘러싼 사람들. 그저 선하기만 하고 단호하지 못한 인간들. 확실하게 금을 그어버린 선인과 악인의 경계. 이런 등장인물들이 넘치고 넘쳐서 유일하게 제이비, 장 밥티스트, 이이 하나만 그저 사람같이 보였다. 이 말만 보태고, 할 말이 아직도 넘치지만, 이쯤에서 그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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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4-06-05 10: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 본국에서는 울고불고 아주 난리났다고 유튜브에서 그러던데요. 근데 내키지도 않는 포르노문학을 봐야할지 모르겠습니다ㅋㅋ 짧으면 또 모를까 겁나 두껍네요...

잠자냥 2024-06-05 10:46   좋아요 0 | URL
엥? 뉘신가 했습니다 ㅋㅋㅋㅋㅋ

Falstaff 2024-06-05 16:48   좋아요 1 | URL
이 책이... 미국은 물론이고 유럽, 동아시아를 새삼스럽게 강타하고 있습니다. 온갖 곳에서 베스트셀러로 등극하고 있는 중입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SNS 아닐까 싶기는 합니다만. ㅎㅎㅎ 이 작품은 포르노 맞습니다. ^^

잠자냥 2024-06-05 1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포르노라고 해서 어떤 의미인가 좀 궁금하긴 했어요. 저는 고통포르노, 불행포르노 이런 말씀을 하시려는 것인가 싶었거든요. 1권 읽는 내내 불행포르노라는 느낌이 들긴 했는데 저는 2권 가서 결국 이 또한 하나의 사랑이야기, 라는 점에서 별점을 높게 주었습니다! ㅎㅎㅎ

Falstaff 2024-06-05 16:51   좋아요 1 | URL
포르노 논의는 당연하고요. 거기에 하나 더 붙여서 작가가 인간을 관찰하는 이분법적 시각에 질렸습니다. 악마 그리고 천사. 정말 작가가 그렇게 믿는다면, ㅎㅎㅎ 우리끼리 이야기지만, 여태 헛 산 거 아닌가요?

stella.K 2024-06-05 15: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엇, 평점이 좋아서 언떤가 기대했는데 팔님 리뷰를 보니 그냥 가뿐하게 안 보는 쪽으로 넘겨도될 것 같네요. 커버에 머스마가 떡 버티고 있어 저자가 남잔가 했더니 후덕한 여사님이었네요. ㅋ

Falstaff 2024-06-05 16:52   좋아요 1 | URL
오, 저는 아싸, 소수 의견에 불과합니다. 많은 독자가 별5를 던지는 명작일 지도 모릅니다. 그냥 제가 읽기에 그렇더라... 하는 걸로 이해해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결론: 도서관 대출이 갑입니다!

젤소민아 2024-06-06 12: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이 역주행 중이더군요. 난리가 났던데요 ㅎㅎ 리뷰 잘 봤습니다~

Falstaff 2024-06-06 12:58   좋아요 0 | URL
이 책 읽고 틱톡에 눈물 흘리며 우는 사진 올리기가 세계적으로 유행이었나 봅니다. 그게 우리나라 트위터에 퍼져서... ㅎㅎㅎ
 
비빔, 잡탕, 혹은 샐러드 연극과인간 중국현대희곡총서 22
장휘 지음, 김우석.김유화 옮김 / 연극과인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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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연극과인간’의 중국현대희곡총서 시리즈 22번째 작품. 이 작품을 검색해보면 82년생 극작가 장휘(張慧)의 데뷔작이라 하기도 하는데 인터넷 정보가 늘 그렇듯 믿기는 힘들다. 장휘는 중국 연극판의 인재 풀pool이기도 한 중앙희극학원 연출학과를 졸업하고 공부를 계속해 박사학위를 취득하면서도 2007년 이후 지금까지 스무 편에 가까운 작품을 무대에 올렸단다. 우리나라에도 “희곡 우체통 낭독회”나 “서울 연극제 희곡집” 또는 “봄 작가, 겨울 무대” 같은 청년 극작가나 연출가의 창작물 지원 프로젝트가 있는 것처럼 중국에서도 비슷한 기획이 있어서 우리보다 훨씬 폭넓은 지원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이 가운데 한 단체가 굴로우서(鼓樓西) 극장이며, 이 극장의 프로젝트에 선정되어 2021년 9월에 초연해 대성공을 거둔다. 이어 제8회 우쩐 연극제 특별 초청작으로 참가했고, 역자는 이를 “파격적”이라고 했으니 상당한 규모의 축제인 듯하다. 이어서 “신경보新京報” 즉 “시나 뉴스”가 선정한 2021년 중국 10대 연극에도 이름을 올렸으니 굉장한 성공이라고 해도 좋겠다.

  시나 뉴스의 “2021년 중국 10대 연극” 심사위원 가운데 한 명인 듯한 중앙연극아카데미 연극문학과 학과장 펑타오는 “과거, 현재, 미래를 가리키는 세 개의 단절된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으며 “젊은 연극인들의 (전염병이 창궐하는) 현실에 대한 성찰이다.”라고 말한다. 작품의 제목에 세 가지 음식, 보통의 시민들이 흔히 먹을 수 있는 일상적인 먹거리인 비빔, 잡탕, 그리고 샐러드가 들어 있으니 Covid를 겪는 일반인들의 닫힌 상태를 세 가지 양식으로 그렸다는 것에는 동의하는데, 그렇다고 과거, 현재, 미래, 이렇게 세 부분으로 똑 잘라서 설명하려고 한 것에 관해서는, 완전한 반대는 아닐지언정 학과장님 하신 말씀이 맞다고 선뜻 동의하기는 쉽지 않다. 변죽만 울리지 말고 스토리를 이야기해보자.


  첫번째 장면의 제목은 쉬슈관(滸墅關). 우리 발음으로 ‘호서관’이다. 등장인물은 등장순으로 남자와 여자. 15년 전에 이혼한 왕년의 부부. 남편의 취미가 고고학 발굴 현장에 가서, 전문가가 아니라 딜레탕트 취미 생활자니까, 적극적으로 학자들과 함께 유물을 발굴하는 건 아니고 잔일을 도와주며, 발굴한 자료를 보고 과거 시대와 인물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을 내리면서 즐거워한 수준이다. 여자는 이런 남편을 이해하기 쉽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부부가 그러하듯 대화가 점점 사라졌다. 과거의 유적지인 쉬슈관으로 탐사여행을 떠난다기에 전처럼 그냥 넘어가지 않고, 정말로 쉬슈관에 가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뒤를 밟았는데, 기차역 큰 시계탑 아래에서 한 여자를 만나 함께 역으로 사라진 것을 보고나서, 남편이 돌아오자마자 이혼을 요구했던 거였다. 쉬슈관, 호서관은 (맹상군 열전) 식객이 닭 우는 소리를 내 맹상군이 무사하게 빠져나가게 할 수 있었던 함곡관이나 촉한의 수도인 성도를 지키던 면죽관 같은 장대하고 높은 군사용 관문이 아니다. 물품의 이동과 통과에 따라 일정 비율의 세금, 즉 관세를 걷는 상업적 용도의 관이라서 비교적 멀지 않은 과거에 설치되어 크게 고고학적으로 발굴할 것이 없어 보인다. 호서관은 19세기 청나라 때 탐관오리들이 하도 착복을 해 세수가 모자란 것이 국가적 문제가 된 곳이란다. 내가 중국사람도 아니니 믿지는 마시라. 하여간 그렇다는 거다.

  그런데 헤어진 부부가 어떤 일로 15년 만에 한 방, 아니면 적어도 한 공간에 머물게 되었으며 14일 동안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는 처지에 떨어졌을까? Covid19 시절의 14일 격리조치를 떠올리면 정확하다. 우리나라에서도 잠복기가 14일이라서 지금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 알려면 14일 동안 완전히 격리 생활을 해야 했던 것, 다 기억하시지? 그래도 뭔가 이상하다는 말이지. 나는 읽으면서 도무지 이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15년 전에 이혼하고 여태 따로 살아온 남녀가 아무리 Covid 상황이라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한 집에 딱 둘 만 있을 수 있을까? 예전에는 서로 말, 대화 없는 부부였지만 이제 옛 남편이 도망가려 해도 문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갈 수 없는 처지라 어쩔 수 없더라도 이야기를 해야 한다. 아내는 15년, 아니 150년이 더 흘러도 전남편을 생각할 때마다 지겹게도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고, 의심하고, 질투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쉬슈관엔 간 건가? 그 여자하고 함께 간 건가? 갔다면 거기서 뭘 했을까? 남편은 미치기 일보직전이 되어 당장 트렁크에 되는대로 옷가지를 쑤셔 넣고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만 결코 현관문을 열지 못한다. 이렇게 단절된 사람들. 하지만 알고 보면, 남편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던 거다. 격리생활을 하고 있는 여자가 이미 죽은 남자의 혼령을 불러냈든지, 자기 의식 속에서 여전히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는 남자를 스스로 만들어냈는지 그건 감상자 마음대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이 장면을 중앙연극아카데미 펑타오 학과장은 “과거”라고 말한 거 같은데, 여자의 생각만 과거이지 처한 상황, 펜데믹이 아니었더라면 여자가 남자를 호출할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 같아 현재성을 삭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의 의견에 전적으로는 공감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펑 교수에게 반박하기도 어렵기는 하지만.


  두번째 “잡탕” 장면의 소제목은 “아치阿齊”다. 진짜 이름은 치밍(齊明)이지만 편하게 아치라고 부른다. 아치 역시 갇혀 있다. 어디에? 교도소에. 아치로 말하자면 여태 살면서 돈 버는 일이라고는 너구리를 죽여 가죽을 벗기는 일 딱 하나였다. 갑자기 너구리 가죽 가격이 떨어지는 바람에 한 번에 수백 마리의 너구리 가죽을 벗겨야 하는 시기가 있어서 급하게 임시 일꾼을 구했을 때, 친구 따라 갔다가 눈치 없이 토란 찜닭을 아치 혼자 다 먹어 치우는 바람에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전 처음 짐승을 죽여야 하고 몸이 식기 전에 가죽을 벗겨야 하는 일을. 이것 말고 아치가 하는 건 도둑질이었다. 특히 전기 자전거를 좋아해 가히 전기자전거 전문 절도범이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치는 도둑질을 한 다음에 벌판의 풀밭에서 전기자동차를 베고 피로를 풀기 위해 한바탕 낮잠을 자는 습관이 있었다.

  독자가 이걸 어떻게 알게 되는가 하면, VR 안경을 쓴 기자가 교도소에 취재 왔다가 아치를 인터뷰한 것. 그러니까 기자와 감옥 안 접견실이라는 한 공간에 있으면서 비록 인터뷰 형식이지만 대화를 하고 있건만, 기자에게 이게 진짜 현실은 아니다. 그저 VR 스코프를 통해 바라보는 가상 현실일 뿐. 공부를 하고 학교를 졸업하고, 경쟁 시험을 통해 신문사 기자가 되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바람직한 삶을 사는 기자와, 본업이 절도이며 유일하게 해 본 일이 동물을 죽여 가죽을 벗기는 것이었던 청년은 동시대를 살고 있으되 서로의 사이에는 견고하고 높아서 완벽한 단절, 벽이 있을 뿐이다. 이 벽을 무너뜨리는 일은 서로 공감할 무엇인가를 나누는 일일 터. 교도소에 들어온 것을 일종의 휴식이라고 생각하는 아치는 여전히 수많은 너구리의 목에 줄을 걸고, 졸라 죽이고, 매달고, 한 쪽에 구멍 하나씩 내고, 거기에 손가락을 걸어 당기고, 찢어서 흠 없고 온전한 너구리 가죽 한 장을 손에 든 듯하지만 자신은 여전히 살고 있다는 그로테스크한 현실을 체감한다. 인터뷰를 진행한 기자도 점점 아치의 도살과 각피 과정에 동의하면서 견고했던 벽은 무너질 수 있었을 것이고, 드디어 관객 앞에서 VR 안경을 벗는다.


  세번째 장면 역시 단절된 공간. 바로 무대다. 무대가 소통의 장소라고? 가끔 아닐 때가 있는데 이 작품의 샐러드 파트가 그렇다. 무엇보다, 언어가 박탈되었다. 세번째 씬의 소제목이 그래서 “무언극”이다. 영상을 통해 관객에게 나타나는 극장 밖의 남자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극장에 들어오고, 공연장에 입장하며, 역시 알 수 없는 힘에 의하여 무대에 오른다. 여기서 남자를 기다리고 있는 건 AI. 연극의 기본은 소통이니 AI와 남자 역시 소통을 해야 하리라. 이들에게 가능한 것은 자판을 매개로 한 화면. 제일 먼저 AI와 남자의 대화는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이 이곳에 있는지, 감염되지는 않았지만 발열이 나타나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되는지, 뭐 이런 것들이다. 그러면서 남자를 위시한 인간은 점점 AI에 예속되기 시작한다. 우리나라보다 훨씬 앞선 AI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중국이라서 그런지 예술가들의 AI에 대한 경계 또는 공포 역시 우리나라보다 더 큰 거 같다. 결국 거대한 오르골 위에서 남자와 여자, 즉 인류와 AI가 함께 끊임없는 원을 그리며 춤추는 인형으로 변하면서 지구엔 일식이 시작되며 막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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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알 환상하는 여자들 1
테스 건티 지음, 김지원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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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3년 인디애나주 사우스벤드에서 출생한 작가. 데뷔작인 <토끼장: Rabbit Hutch>으로 전미도서상 소설 부문National Book Award for Fiction을 수상했다. 이 <토끼장>을 우리말로 옮긴 책이 <우주의 알>이다. “우주의 알”이 뭐냐고? 책에 그냥 지나가는 말로 딱 한 번 나온다. 이걸 출판사 은행나무 편집자가 관심있게 읽었던 모양이다.

  테스 건티는 노트르담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나처럼 무식한 사람은 이 대목에서 잠깐 의아해한다. 영문학을 공부하려면 차라리 영국에서 하지 왜 하필이면 노트르담에서 했을까? 무식하면 용감한 법. 이러다가 말 길어지면 건티가 프랑스 유학했다고 우길 수 있다. 인디애나주 노트르담이란 커뮤니티에 사립 가톨릭 연구대학을 지어 University of Notre Dame du Lac이라고 했다. 건티는 졸업 후 뉴욕대학 대학원에서 문예창작 석사를 했다. 학교를 다니고 글을 쓴 것 말고 다른 커리어는 이력서에 적혀 있지 않으니 집에서 경제적 지원을 조금 받은 거 같다. 뭐 아니면 말고.

  지난 시절의 작가를 검색해보면 19xx년 밀라노 시장에서 배추장사를 하던 유대인 메뉴힌 씨와 바늘 공장의 유대계 생산직원 출신 마그다 메뉴힌 여사의 외동딸로 태어난 마리아 비토리니는, 뭐 이런 식으로 시작하는데, 위탁가정 출신의 10대 후반 젊은이들이 주인공인 작품 <우주의 알> 또는 <토끼장>에서도 작가의 세부 출생/출신 정보를 알 수 있으면 더 좋을 뻔했으니, 그럴 리 없지만, 테스 건티 역시 위탁가정 출신이었을까? 읽는 내내 조금은 궁금해했던 것도 일리가 있지? 물론 아니겠지. 어느 위탁가정이 뉴욕에서 대학원까지 보낼 수 있었겠냐고.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원제 <토끼장>은 정말 고기나 모피를 활용하려는 목적의 토끼 사육용 hutch 사육통을 일컫는 건 아니다. 사는 데 여유가 별로 없는 사람들이 입주한 작고 낡은 “라라피니에르 저가 아파트”를 위탁가정 출신 십대 후반 아이들이 그렇게 부른다.

  이들이 사는 도시. 바카베일.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로 오랜 세월의 호시절을 누렸지만 이제 존Zorn 자동차 회사의 운명과 함께 몰락해버린 곳이다. 사람들은 다시 바카베일 활성화 계획을 수립한다. 도시 인근의 채스터티밸리의 자연적 아름다움과 고급스러운 주택단지 건설을 통해 탈공업화 도시에서 스타트업 허브로 전환하려 하지만 그게 어디 쉽게 되는 일인가. 도시의 범죄율은 실업률과 손에 손잡고 급격한 우상향을 보이고 있으며 바로 몇 달 전에 5백분의 1 확률에 불과한 대규모 홍수 피해를 입었다. 결과, 뉴스위크는 연례적으로 발표하는 “죽어가는 미국 도시 톱 10” 가운데 영광의 1위 자리를 바카베일의 이마 위에 올려 놓았다. 그러니까 도시는 사회적 우울증의 중증 상태에 처해 있으며, 이런 도시에 살고 있는 시민 역시 삶의 활기를 찾기가 그리 쉽지 않은 건 물론이다. 그리하여 작품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우울 모드. 이 속의 쇠락해가는 토끼장, 아파트 입주민들 구경이나 해보자.


  C12호. 60대 벌목꾼이 산다. 직업적 유효기간은 끝났지만 은퇴하자니 경제적, 심리적으로 저축이 부족해 아직 일을 하고 있다. 6년 전에 아내를 잃었는데도 얼마나 아내한테 얻어 터지며 살았는지 여자들이 지구상의 어떤 사람보다도 더 큰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게 아니라는 증거가 나오면 도무지 분노를 멈출 수 없다. 휴대전화를 통해 “당신의 데이트를 평가하세요” 앱을 깔고 수요일 밤 9시인 지금도 그걸 들여다보고 있다. 자신의 프로필에는 “걍 괜찮음. 실제는 사진보다 뚱뚱함.”이라 썼다.

  C10호. 10대 소년이 혼자 산다. 분량이 별로 많지 않고 따라서 중요한 인물도 아니다.

  C8호. 호프Hope라는 이름의 웨이트리스 출신 스물다섯 살 산모가 4주 된 젖먹이 아들과 산다. 남편은 하루종일 건설 현장에서 일하다 밤이 깊어야 안전모를 쓴 채로 귀가한다. 호프는 산후 우울증이 좀 있는지 각성제를 투여한 여우가 된 기분이며, 임신, 출산, 산후회복이라는 직접 겪기 전에는 아무도 미리 보여주지 않는 공포영화의 3막을 몸으로 직접 겪는 한편, 아기가 바카베일과 전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안, 총격, 살인, 석유유출, 테러리즘, 산불, 납치, 폭격, 홍수, 이상기후 속에 살 수밖에 없는 것을 두려워한다. 다행스럽게 공사판에 나가는 남편이 우리 주변에서 흔하고 흔하게 볼 수 있는 개 막장 잡것이 아니어서 자기도 녹아 떨어지게 피곤할지언정 말로나마 호프를 위안하려 노력한다.

  C6호. 아이다와 레지. 둘 다 70대 커플이다. 아이들은 다 분가했고 맏딸 티나의 아들 프랭크는 강도짓을 하면 했지 하필이면 총을 들고 업장에 들어가는 바람에 이번에는 길게 감옥 생활을 해야 한다. 티나는 작품 속에 한 번 등장한다. 노숙인으로. 아무래도 위층에서 쥐덫에 걸린 쥐를 던져버린 거 같다. 아이다는 남편 레지널드한테 쥐덫과 죽은 쥐를 윗집 현관에 두고 오라고 바가지 벅벅 긁는다. 아무래도 옳은 일 같지 않지만 늙어서 마누라한테 얻어 터지는 것보다 서글픈 일이 없는 걸 아는 현명한 레지는 책이 거진 끝날 때쯤 해서 지긋지긋한 마누라의 말을 좇아 쥐꼬리를 들고 위층으로 올라간다.


  C4호. 3명의 십대 소년, 1명의 십대 소녀가 돈을 합해 입주했다. 소년들은 잭, 말라크, 로드이며 소녀는 블랜딘 왓킨스. 작품의 주인공이다. 이들은 각자 다른 위탁가정 출신으로 만 18세가 다가오자 독립을 위한 교육을 받으러 갔다가 거의 대장격인 말라크가 방 네 개짜리 저렴한 ‘라라피니에르 저가 아파트’에 빈 집이 나왔다는 걸 알고 룸메이트를 구하다 마지막 자리를 채울 수 없어 그냥 말로만 블랜딘에게 얘기해본 것인데 블랜딘이 흔쾌하게 그러자고 해 함께 살게 된 거다. 이들은 가장 넓고 깨끗한 방을 블랜딘이 쓰게 하는 데 동의했으며, 독자들이여 다른 맘 먹지 마시라, 룸 메이트 간의 어떠한 육체적 문제도 발생하지 않는다. 비록 남자 셋 가운데 둘은 여자애를 사랑하고 나머지 하나도 호감을 느끼고 있지만서도.

  그런데 문제의 날. 7월 17일 이른 밤. C4호의 바로 아래층인 C2호에 사는 마흔 살의 독신 여성 조앤 코월스키는 청각예민증을 앓고 있어서 멜라토닌 정제를 수도물로 삼키고 큰 소리로 TV 뉴스를 틀어 놓았다. 외로운 여자의 침실용 탁자 위에는 마라스키노 체리가 한 병, 그 옆에 작은 포크가 놓여 있으나 병을 열거나 포크를 쓴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멜라토닌을 먹었음에도 위층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커지더니 급기야 비명소리, 치는 소리, 북소리, 심지어 가능하지 않을 거 같은 발굽소리까지 들린다. 이틀 전에 세탁소에서 만난 탈색한 하얀 머리카락의 소녀가 떠오르면서 아이가 말했던 땀 대신 피 흘리기, 예수, 프러포즈, 손바닥과 가슴과 옆구리의 성흔stigmata 같은 것이 휙 지나간다. 그러다가 조앤은 결국 살면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여자의 비명소리를 들었고, 놀라서 TV를 껐으며, 그 여자 아이의 입/목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아주 높은 비명이 또다시 들려왔으나 조앤은 엄지손톱 주위의 피부를 깨물 뿐이었다. 조앤은 두렵다. 피가 얼어붙는다는 표현이 이렇게도 적절할 수가. 마침내 비명은 멈추었지만 조앤의 손이 닿는 거리 안에 휴대전화나 노트북이 놓여 있지 않다.

  사실 이때 C4호에서는 열여덟 살이 된 블랜딘 왓킨스가 육체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7월 17일 21시 43분. 고통은 신비주의자들이 책을 통해 약속한 듯 달콤했으며 영혼이 빛으로 찔리는 느낌이랄까 싶었다. 이것을 신비주의자들은 “심장의 황홀경”, “천사의 공격”이라 불렀지만 확실한 것은 그녀는 그저 무nothing의 반대라는 것.

  블랜딘의 눈엔 눈물이, 그의 손에는 칼. 아니, 제발 그만 둬. 아니, 하지 마. 소년 한 명은 휴대폰으로 촬영하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이건 엄청난 조회수를 달성할 거야.”라고 외치고 있었다.


  이 외에도 작품에는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이 추가되어 블랜딘이 육체에서 빠져나오는 일과 밀접하게 관련을 짓는데, 그건 독후감 분량 때문에 그냥 넘어가야겠다. 하여튼 젊은 작가가 쓴 독특한 문장과 문체로 쓴 엽기발랄한 이야기. 촘촘한 조판으로 해설 없이 470쪽 분량이지만 생각만큼 페이지가 넘어가지는 않을 듯하다. 거부감도 좀 드는 촌스러운 표지는 원서와 같은 모습이니 그런가 하고 넘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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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5-31 06:2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책의 별점. 별4는 좀 야박한데 그렇다고 별5까지는 아닌... 애매함? 난처함? ㅎㅎㅎ 정답은 ˝신경쓰는 사람 없음.˝

다음 주 삽질:
월요일. 장휘, <비빔, 잡탕, 혹은 샐러드>
수요일. 한야 야나기하라, <리틀 라이프>
금요일. 궈창성, <피아노 조율사>
 
내 남편
모드 방튀라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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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휴, 지금 무려 반나절을 써서 162 페이지까지 달렸습죠. 자간, 행간, 널럴하거든요. 알라딘 AI가 저를 위한 특별 추천이라 하는 바람에 읽었는데요, 결혼 15년차가, 사랑, 사랑, 사랑... 요즘 E 마트에서 사랑 한 근에 얼마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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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5-30 17: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800원입니다~!!

Falstaff 2024-05-31 06:41   좋아요 2 | URL
ㅎㅎㅎ 호연지기 함양을 위하여 프랑스 화폐단위 1유로, 1,500원으로 하심이...

라파엘 2024-05-31 09:14   좋아요 1 | URL
자냥님, 어느 동네세요? 우리 동네보다 싸네요~!! 😆

페넬로페 2024-05-30 18: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목 자체부터 좀 그런데요.
처음 보는 작가인데 프랑스 소설인거죠?
프랑스 사람들은 정말 사랑에 열정적인 것 같습니다.

Falstaff 2024-05-31 06:43   좋아요 1 | URL
옙. 프랑스 작가입니다 사랑에 열정적일 20대 시절에 쓴 작품 아닌가 싶어요. 그 시절에 열정적인 사랑을 못 해보는 것도 좀 그렇긴 합니다. ^^
 
태풍의 계절 암실문고
페르난다 멜초르 지음, 엄지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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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지영 씨와 동갑인 82년생 페르난다 멜초르. 멕시코에서 가장 유명하고 오래된 항구도시이지만 제일 위험한 곳으로도 꼽히는 베라크루스 시에서 출생해 베라크루스 대학을 졸업하고 저널리즘에 종사하면서 작가 생활을 하고 있다 한다. 현대 작가 답게 이이의 바이오그래피 같은 건 찾기가 쉽지 않다.

  베라크루스 시는 2010년에 카테고리 3급의 허리케인에 의해 크게 외상을 입어 외신에도 소개가 된 적이 있었지만 제목의 “태풍”하고는 거리가 있다. 문학하는 사람한테 태풍이 반드시 기상 현상이어야 한다는 법도 없다. 베라크루스에 사는 사람들의 무차별적인 열정, 증오, 사랑, 폭력 같은 것을 통틀어 그냥 태풍이라고 못할 이유도 없는 것처럼. 작가 페르난다 멜초르는 자신의 고향인 베라크루스에서 실제로 일어난 살인 사건, 마녀라고 불리던 여성이 살해당한 일에 집중하여 그것을 한 편의 장편소설로 엮었다. 게다가 베라크루스라고 하는 지역이 선주민, 아프리카 이주민, 스페인인들의 문화가 복합적으로 어지럽게 뒤섞인 곳이어서 ‘마녀’라고 하면 인중에 수염이 덥수룩하게 나고 적그리스도나 악마와 침상에 오르기를 즐기는 유럽형 마녀 뿐 아니라 아프리카에서 유래한 부두교 식으로 생 닭의 목을 쳐 뿜어져 나오는 피를 보고 운세를 점치는 마녀일 수도 있다.

  스토리를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거론하고 싶은 것은, 이 작품이 2020년 맨부커-인터내셔널 상의 최종심까지 올라 장렬하게 미역국을 먹었으며, 작품 속에 폭력과 혐오, 노골적인 성애 묘사로 ‘빈곤 포르노’라는 지적까지 받았을 정도로 노골적인 장면이 많다는 거다. 정말 그렇다. 내가 읽기에도 좀 난처한 장면이 자주 등장했지만 그렇다고 빈곤 포르노 운운하는 건 좀 오버 아닌가 싶다. 반드시 있어야 할 장면이라고 강조하고 싶은 마음은 없으나, 해당 씬에 전혀 불필요한 장치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씬이기에 그런지 궁금하시지? 알고 싶으면 읽어봐야 할 걸? 


  작품의 무대는 베라크루스 해안에서 멀지 않은 라 마토사 마을이다. 이곳에 무려 1백 헥타르, 즉 백만 제곱미터, 또는 30만2천5백 평의 경작지와 목초지를 가지고 있으나 나쁜 놈으로 악명을 떨치던 마놀로 콘데 씨가 살았는데 저 먼 몬티엘 소사에 본처와 이미 학업을 마친 장성한 두 아들을 거느렸으면서도 동부해안에서 홀로 거대 목장을 거느리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외지에서 매춘부 한 명을 데려와 함께 살았다. 분명히 백인은 아니고 그러면 인디오나 아프리카 계이겠지만 정확하게 밝히지 않은 이 여인은 생각지도 않게 들판과 언덕배기에서 자라는 온갖 약초에 관한 지식이 풍부해서 그것들을 자유자재로 혼합, 가공해 동네의 가난한 이웃들을 치료해주고 간혹 주술 행위도 해주어, 자연스럽게 마녀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마누엘 콘데가 죽었다. 사실은 급성 심근경색이었으나 동네 사람들은 마녀가 유적지의 풀에서 추출한 무색무취의 독으로 독살했다고 소문을 내고 스스로 그것을 믿었다. 장례식을 할 때 몬티엘 소사에서 내려온 두 아들이 장례의 선도 차량에 탑승했다가 묘지로 가는 길에 크게 교통사고를 만나 악마가 나타나 데려가는 바람에 이 믿음은 2 곱하기 2가 4인 것처럼 확실해졌고, 이후 마녀는 집에 틀어박혀 밖에 나오지 않고 지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동네 여인들이 마녀의 집에 드나들며 사고뭉치 아들이 교도소에 들어갈 것인지, 임신한 딸이 언제 도망갈 것인지, 남편의 바람기가 잠잠해지기는 할 것인지를 물으려 오면서 먹을 것을 가져다주어 연명했다.

  마녀는 콘데 씨와 살면서 당연히 소생 하나를 낳았다. 사람들이 “새끼 마녀”라고 부른 이 아이는 동네 여인들이 올 때마다 부엌의 식탁 아래에 숨어 마녀의 치마자락을 쥐고 있었으며 어릴 적부터 검은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병약해 보였다. 아무도 아이의 이름을 몰랐으니 금요일마다 그 집에 가던 단골들도 어미 마녀가 새끼 마녀를 너, 이 멍청아, 너 이 망할 년아, 이 악마의 딸년아, 라고 부르는 것 말고 다른 호칭을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 말 다 한 거다. 이 호칭도 내가 그대로 옮겨 쓴 것이 아니라 독후감을 순화할 목적으로 자체 검열한 표현이니 알아서 상상하시라.

  영생하면 사람이 아니니까 마녀도 죽었다. 1978년 멕시코만을 휩쓸었던 허리케인이 라 마토사 마을에도 큰 영향을 미쳐 산사태가 일어나 유적지가 완전히 붕괴될 때 마녀 역시 이에 휩쓸려 짧고 드런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얼핏 생각하면 유적지 붕괴와 더불어 마녀의 집까지 파괴되었을 것 같은데, 집은 멀쩡한 걸 보니 그렇게 비바람이 몰아치는데도 밖에 나갔다가 휩쓸린 거 같다. 허리케인의 위력이 태평양의 태풍과 비교해 네 배 정도 더 크다고 하니,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게 틀림없었다. 검색해보니까 1978년에는 기록적인 허리케인이 발생하지 않은 해인데도 그랬다. 다 팔자지 뭐.

  아무리 마녀라도 죽었으니까 장사를 지냈다. 그리고 몇 주 후, 큰 마녀가 죽고 이제 새끼 마녀가 정식 마녀로 등극해야 하는 순간이 왔고, 드디어 라 마토사를 품은 도시 비야 가르보사에 등장한 새끼 마녀는 검은 스타킹, 긴 소매 검정 블라우스, 검정 치마, 검은 색 하이힐, 검은 베일 차림이었다. 병색이 완연했던 새끼 마녀는 책 읽기가 가능했고, 헝클어진 곱슬머리를 했으며 커다란 발의 사나운 모습을 그렇게 감추면서 라 마토사의 유일한 마녀로 등극한다.

  마녀가 죽으면 미신을 만든다. 여인네들이 자신의 기구한 운명, 육신의 고통과 불면증, 꿈에 나타난 죽은 식구나 친척, 산 사람들과 티격태격한 일, 아니면, 이게 대부분이지만 돈 문제나 남편과 도로변의 매춘부와의 관계 때문에 마녀 앞에서 눈물을 질질 짠 대가로 돈 몇 푼이나 먹을 거리 조금을 건넸을 뿐이면서도 악마와의 거래를 지속한 마녀가 한 번도 공개하지 않은 2층에 막대한 돈과 보석 그리고 금이 쌓여 있을 거란 믿음을 거두지 않았다. 새로운 마녀는 게으르기가 한정이 없어서 이게 집구석인지 야채시장 장바닥인지 헛갈릴 정도에다가 밤이면 밤마다 반지하 식당에서 동네 젊은 건달, 날나리들이 모여 마리화나, 가벼운 마약을 겸한 노래잔치가 벌어지는 일종의 해방구로 기능하는 동시에 주로 공개 동성애 장소로도 알음알음 널리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다.

  마녀에 관해서는 여기까지 하자.


  작품을 시작하는 광경을 소개한다.

  5월 초, 다섯 명의 남자들이 일전도 불사하겠다는 각오로 새총을 단단히 쥔 채 농수로에 도착한다. 빨간 수영복을 입은 이가 이들의 우두머리였으며 나머지는 반바지 차림으로 그를 따랐다. 강에서 고른 돌멩이를 양동이에 한 가득 채운 이들은 언제든 온몸을 바칠 각오를 한 것처럼 잔뜩 사나운 표정을 지었다. 이때 “등 뒤의 나무에 척후병처럼 숨어 있는 작은 새의 울음소리도, 갑자기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그이 얼굴 앞으로 공기를 가르며 휙 하고 날아가는 돌멩이 소리도, 하연 하늘에 콘도르들이 새까맣게 날아다니는 가운데 얼굴에 모래를 한 주먹 맞은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냄새, 그러니까 곧바로 뱃속으로 들어와서는 발걸음을 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구역질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지독한 악취를 풍기는 후덥지근한 바람”을 참아가며 농수로를 따라 살금살금 가다가, 그들의 눈에 뜨인 것이 있었다. 갈대와 길에서 바람에 날려 온 비닐봉지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죽은 이의 부패한 얼굴. 한 무더기 검은 뱀들 속에서 거무죽죽한 빛깔의 가면처럼 꿈틀거리는 그 얼굴은, 웃고 있었다.

  어때? 살벌하지, 처음부터. 이미 새들의 공격으로 인해 눈알이 빠져버린 시신의 얼굴이 웃고 있었는데, 당연히 소설은 죽음 또는 살해의 전모를 밝히려 할 것이고 또 그렇다. 이런 작품을 소개하면서 등장인물을 많이 거론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럼 마녀 이야기는 왜 했느냐고?

  멕시코. <백년의 고독>, <콜레라 시대의 사랑>, <썩은 잎>, <족장의 가을>을 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죽은 곳이다. 이 작품을 쓴 페르난다 멜초르도 마르케스 혹은 붐문학, 마술적 사실주의에 한 발을 걸치고 있다. 350 페이지에 모두 여덟 챕터로 되어 있으며, 각 챕터는 딱 하나의 문단이다. 즉 여덟 문단으로 쓴 장편소설. 얼핏 보면 읽기 지겨울 거 같은데, 절대 그렇지 않으니, 문장 읽는 맛이 대단하다. 당연히 마르케스처럼 타의 추종을 허락하지 않는 만연체도 아니면서 저절로 라틴 아메리카 작품을 읽을 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재미를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위에서 마녀를 소개했다고 “환상”이라는 측면으로 기대하면 오산이다. 작가는 실제로 있었던 마녀 살해 사건을 쓰기 위하여 사실에 개입할 수 있는 주관적 시각을 배제하려 노력한다. 이 작품을 어떻게 읽을까, 하는 것은 전적으로 독자 마음이다. 처음에 말했듯 포르노 혹은 빈곤 포르노로 규정하는 독자도 있을 수 있고, 나처럼 문장을 읽는 맛과 작품의 독특한 구성을 즐기는 독자도 있다. 독자-작가의 합에 따라 호오가 극명하겠지만 분명한 건 호기심을 대단히 자극하는 작가이며 작품이란 거다. 당신과도 맞는 작품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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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5-29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샀는지 안샀는지 확인해보고 사야겠어요. 와 엄청 재미있을 것 같아요!!

잠자냥 2024-05-29 12:17   좋아요 0 | URL
난 진작 샀는데....ㅋ

다락방 2024-05-29 12:32   좋아요 0 | URL
나 안산 것 같아서 사려고요 ㅋㅋㅋㅋㅋ

Falstaff 2024-05-29 17:51   좋아요 0 | URL
다락방 님도 호오가 맞아 즐기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