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제안들 31
에두아르 르베 지음, 한국화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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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워크룸 프레스의 “제안들” 시리즈를 주목하고 있다. <탐욕>, <저 아래>, <아이는 왜 플랜타 속에서 끓는가>, <이아생트> 같이 한 방에 훅 읽어 치우기 버거운 작품들을 속속 내놓고 있는데, 물론 아닌 건 아니겠지만 진도 나가기 막막하더라도 진중하게 날 잡아 정독할 만한 작품이 많다. 그렇다고 아무거나 확 사서 읽기엔 조심스럽다. 르베의 <자살>은 도서관 개가실에 꽂혀 있는 게 눈에 들어와 보는 즉시 대출해서 읽었다. 별점을 주면 네 개는 좀 박하고, 그렇다고 다섯 개는 많은 거 같고, 뭐 이런 수준. 나는 재미있게 읽었다.


  에두아르 르베는 1965년 1월 1일에 태어나, 나이 계산하기 쉬운 한 생애를 살았는데, 88년에 부모의 말씀을 잘 듣는 아들이라 고등경제상업학교에서 수학하다가 1991년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① “고등경제상업학교”는 경영대학원ESSEC이며, ②그림을 누구한테 배운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한 거다. 개인전도 하고 그러다가 1995년에 인도 여행을 한 다음부터 사진으로 진로를 바꾸어 사진과 작가로 활동하다가 2007년에 출판사 편집자에게 <자살> 원고를 송부한 며칠 후 진짜로 자살해버리고 만다. 이 책 <자살>이 바로 그 원고이며 2008년에 출간되었다. 겨우 마흔두 해를 살다 갔으면서도 참 바쁜 일생을 살았다. 그리고 어쩌면 이런 생각을 했을까? 죽기 전에 <자살>이란 원고를 보내고 곧바로 정말로 죽어버리면, 처음 이 글을 작가가 죽기 전에 읽어본 사람은 세상에서 딱 한 명, 출판사 편집자밖에 없다. 그는 얼마나 황당했을까? P.O.L 출판사인데 애초에 르베가 자신의 원고를 이 출판사에 맡긴 이유가 조르주 페렉의 작품을 출판한 곳이라서였다고 한다(이 이야기는 3월에 한 번 더 할 생각). 그러고 보니 르베의 글이 페렉하고 결이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만일 이 전설 같은 이야기가 진짜라면, 세상에서 가장 진한 농담 한 번 하고 간 작가가 이 에두아르 르베 아닌가? 이런 사람 있으면 그냥 아는 사람 수준을 유지해야지, 깊게 친교를 나누고 싶으면 진심을 다해 지지해줄 마음을 가져야 할 거 같다.


  일은 8월의 어느 토요일에 벌어진다. 2인칭 소설이라서 ‘너’는 하얀 테니스 복을 멋있게 차려 입고 아내와 함께 집을 나섰다. 집에서 조금만 걸으면 테니스 코트가 나온다. 동네에서 가장 큰 집에 달린 코트였으나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서, 또는 있기는 있는데 그리 중요한 관리항목이 아니어서 클레이 코트 표면이 울퉁불퉁, 작업이 제대로 되어 있지도 않고, 심지어 어떤 때는 풀이 이곳저곳에 나 있다. 평소엔 동네 아이들이 모여 땅따먹기도 하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도 하고 말타기도 하는 곳이다. 당연히 네트가 늘어져 가운데 부분이 아래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나 동네의 심심한 아마추어는 이거라도 감지덕지 무료로 즐길 수 있으니 이 정도면 그래도 괜찮은 편이다. 그렇게 알고 사는 게 만수무강에도 좋다. 정원을 지나다가 ‘너’는 아름다운 아내에게, “아참 라켓을 두고 왔네. 이런 정신하고는. 잠깐만 기다려. 내가 얼른 갖고 올게.” 말하고 몸을 홱 돌려서 집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누구든지 테니스 라켓은 현관 입구 수납장에 두는 것이 보통이라서 이 집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너’는 현관을 그대로 지나 지하실 방향으로 가더니 정말 지하 창고로 내려간다. 아내는 여름 오전의 기분좋은 더위를 즐기면서 아, 날씨가 좋기도 지랄이다, 최인훈의 <광장>에서 마로니에 교정 잔디밭에 자빠진 이명준 흉내를 잠깐 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렇게 크지 않게 총소리가 들렸다. 아내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다. 동시에 불길한 생각이 번쩍 들어 서둘러 집으로 달려들어가, 아이고 여보 어디 있소, ‘너’의 이름을 불렀지만 테니스 라켓을 두는 현관에도 없고, 침실에도 없고, 화장실에도 없고, 물이라도 마시러 갔나, 부엌에도 없어서 정신을 좀 차리고 두리번거렸더니 지하창고 가는 계단실 문이 열려 있는 거였다. 그 안에서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화약 냄새. 아내는 사실 그게 화약 냄새인지 몰랐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거였다.  아내가 바들바들 떨리는 걸음으로, 벌써 얼굴을 창백하게 변한 채로 한 발 한 발 내려가봤더니, 에그머니, ‘너’를 발견하고 말았다.

  탁자엔 만화책 한 권이 펼쳐져 있었다. 아마 ‘네’가 지상에서 전하는 마지막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는 만화이며, 해당 페이지겠지만, 세상의 어느 아내가 남편이 스스로 총을 쏴 피가 철철 흐르고 있는 와중에 탁자 위에 펼쳐진 만화책을 들여다볼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너는 권총을 쏴서 죽지 않았다. 사냥용 소총을 입에 넣고 이로 단단히 고정한 다음에 발가락으로 방아쇠를 당기는 헤밍웨이 식 자살을 감행해버렸다. 소총으로 자살을 할 때 섣불리 심장이나 관자놀이 같은 곳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가는 발사할 때의 충격 또는 진동에 의하여 빗맞아 자살에 실패할 확률이 높다는 걸 아는 너는 그런 실수를 방지하기 위하여 이로 단단히 물고 있었던 거였다. 사실 자살에 실패하는 것보다 얼굴의 한 쪽이 날아가거나 심장을 멀쩡한데 왼쪽 폐 한 쪽이 거덜이 나서 평생 쌕쌕거리고 숨을 쉬어야 하는 팔자가 될까봐 더 걱정스러웠는 지도 모른다. 총구를 턱에 대고 발사했다가 실패를 하면 턱과, 혀와, 코와, 시신경이 총알 한 방에 몽땅 날아가서 씹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고, 냄새도 못 맡고, 보지도 못한 채 평생 괴물의 모습을 하고 살아야 하는 걸 알아서 애초에 시도도 하지 않았다. 하여간 ‘너’는 자살 하나만큼은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그렇다고 축하한다는 말은 아니다.

  아내는 네 몸 위로 쏟아져 큰 소리로 울었다. ‘너’는 들을 수 없었겠지만, ‘너’의 아내는 크게 울면서 ‘너’에게 몸을 던지고, 애정과 분노로 가득한 너의 가슴을 내려친다. 그렇다고 CPR은 아니었다. 피칠감을 한 ‘너’를 부둥켜안고 울다가, “어떻게 해, 어떻게 해” 또는 “개새끼야, 일어나” 부르짖다가 다시 울다가 네 위로 쓰러진다. 15분 동안 ‘너’의 아내는 똑 같은 일을 반복한다. 울다가, 부르짓다가. 15분이 지나 위층 거실에서 전화벨이 울린다. ‘너’의 부부와 함께 테니스를 치기로 약속했던 커플이다. 아내가 수화기를 들자마자 상대방은 말한다.

  “안녕하세요. 안 나오셔서요. 무슨 일이 있나요? 기다리고 있는데.”

  아내가 대답한다. “그가 죽었어요. 죽었다고요.”


  이렇게 화자는 사건을 먼저 보여준다. 이후 ‘너’의 열일곱 살 시절부터 죽을 때까지, 죽은 이후의 모습을 그려나간다. 애초에 ‘너’는 여든다섯 살에 죽기로 작정을 했다. 그리하여 미리 묘지를 조성할 계획을 세우고, 생몰연도를 새긴 비석도 구상을 해 놓았다. 여든다섯이 되는 해까지 서양의 공동묘지에 자주 등장하는 나그네는 ‘너’의 묘비명을 보고 어처구니없는 사망연도, 죽음예언을 내려다보고 웃을 수도 있고, 무슨 경거망동인가 하면서 인상을 찌푸릴 수도 있다. 그러다가 드디어 그 해가 오면 아제는 ‘너’의 묘비명을 보고, 네가 죽었건, 여전히 살아 있건 간에 이미 죽어버린 것으로 간주하고 아무도 놀라운 눈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죽음, 특히 자살에 이르는 가장 능숙한 인도자는 우울증이라는 것을.

  날로 심각해지는 ‘너’의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하여 ‘너’는 신경정신과 전문의의 처방을 받아 항우울제를 복용하기 시작했고, 안타깝게도 ‘너’는 항우울제의 부작용에 적응을 하지 못했다. 의사를 바꾸어 다시 처방을 받아도 마찬가지였고, 또다른 의사가 바꾸어준 처방약을 먹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너’는 견디지 못해서 진료와 처방약 복용을 끊어 버리기로 결심을 했고, 정말로 약을 끊었으며, 급기야 ‘너’의 목숨까지 끊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소설 속 이야기이다. 실생활에서 르베는 우울증과 관련없이 자신의 죽음을 퍼포먼스의 하나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냥 내 추측이다. 제일 큰 의심은 당연히 중증 우울증이겠지만 간혹 만날 수 있는 극단의 예술가들이 아주 간혹 저지르는 목숨을 담보로 하는 퍼포먼스도 있으니. 아쉬운 일이다. 죽음보다 아쉬운 일은 세상에 없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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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2-21 15: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왜 그랬을까요?!
이유야 말해줘야 알겠지만, 작품도 쉽게 다가가기가...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는 거였을까요
암튼 이 제안들 시리즈 눈여겨 보게되는 아우라가 있는듯요.

Falstaff 2024-02-21 18:28   좋아요 1 | URL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이 책 읽고 벌써 한 달 이상 지나서 딱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퍼포먼스도 있었겠지만 우울증 증세가 훨씬 더 심각해지는 걸로...
제안들 시리즈가, 다른 출판사 세계문학 시리즈보다 많이 어려운 건 사실이더라고요. 그러나 독파하면 그만큼 더 좋다는 생각이 드는.. 쉽지 않은 시리즈라고 생각합니다.

coolcat329 2024-02-22 11: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작가도 소설도 엄청나네요. 뭔가에 홀린듯이 읽었네요.
제안들 시리즈 몰랐는데 한 번 둘러봐야 겠습니다.

Falstaff 2024-02-22 17:23   좋아요 0 | URL
아무쪼록 도서관 이용하심이.... ^^;;;
 
예술과 거짓말
지넷 윈터슨 지음, 김선형 옮김 / 뮤진트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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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와 <프랭키스슈타인>을 재미있게 읽어서 짧은 소설 <무게> 속에서 펼친 묵직한 담론을 잊었다. 윈터슨이 무작정 재미있게 글을 쓰는 작가인 것으로 여겼다가 짱구됐다.


  기원전 3백년, 프톨레마이오스 왕은 알렉산드리아에 거대한 도서관을 짓고 40만 권의 영광스러운 책을 보관했다. 40만 권, 하니까 에게, 우리나라 작은 대학 도서관보다 많지도 않네, 하지 마시라. 40만 권 전부 양피지 필사본이다. 내구성이 짧은 새끼 양의 가죽에 쓴 글이어서 수 백명에 달하는 필경사들이 쉬지 않고 필사를 해야 했으며, 책의 여백엔 역시 수십 수백 명의 화백이 총천연색으로 놀랄만큼 아름다운 삽화를 그려 넣어, 사치의 극에 달한 화려한 책들이었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니, 작중 등장인물인 돌 스니어피스는 말한다.

  “어차피 나한테 책은 변기에서 일어나면서 뒤 닦을 때 쓰는 깔끔한 손수건 상자에 불과하니까.”

  돌 스니어피스, 이 이름은 한글로 백 번 쓰는 것 보다 영문으로 써야 좋다. Doll Sneerpiece. ‘돌’은 이름이면서 ‘인형’으로 각주엔 나오지 않았지만 다분히 허리하학적인 용도로 사용하기도 한다. Sneer비웃음, 경멸. piece조각, 비웃음, 경멸을 받을 만큼 작은, 큼큼, 뭔지 아시겠지? 이래서 돌 스니어피스의 직업은 말을 미리 해주지 않아도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이 된다.

  세계 역사상 거의 최초로 등장하는 인간 여성이 기원전 6백년 경의 시인 사포다. 당대에 상당한 인정을 받았다고 하지만 지넷 윈터슨의 주장에 의하면 르네상스 시기에 한 심통맞은 부르주아가 여자가 무슨 시를 쓰냐 하면서 그때까지 남아 있던 사포의 저작을 싸그리 없애 버렸다고 한다. 이제 사포는 사피스트saphist, 레즈비언lesbian 등 이름과 지명에서 여성 동성애자를 지칭하는 단어로만 남았다. 자신의 시 모두가 무참하게 학살당한 시인. 사포는 지혜의 뮤즈인 소피아와 동성애에 빠졌다고 하는데, 사실 사포가 정말로 동성애자인지 아닌지 누구 확실한 증거나 기록을 아시는 분 있으면 손 한 번 들어보시기 바람. 아마 없을 걸? 확실한 것은 기원전 6백년경에 사포라는 여성 시인이 있었으나, 한 편의 시도 남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현재의 사포는 섹슈얼리스트로만 남았다. 빼도박도 못할 죄인 비슷한 처지의. 우울한 사포가 지금까지 살아 있어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남아있는 자신의 원고를 앞에 놓았다고 치자. 이제 몸이 거의 투명한 지경에 이른 사포가 조금도 표정이 바뀌지 않고, 자세를 흐트러뜨리지도 않고 자필 원고의 양피지를 넘기는 순간, 막 닿은 손가락에 그만 양피지는 바스슥 날아가버릴 것이다. <라셀라스>를 쓴 그 새뮤얼 존슨인지 모르겠으나, 하여간 새뮤얼 존슨 박사가 단언했다시피 “여자는 시인이 될 수 없다”니까 이제 인류에게 존재하는 사포는 기만자, 여자들을 유혹하는 악명 높은 유혹자, 독toxin, 열 번째 뮤즈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 독자가 감안해야 할 것은, 저자인 지넷 윈터슨이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에서 밝혔듯이 동성애자라는 것. <예술과 거짓말> 그리고 <프랭키스슈타인>을 읽어보면 이젠 동성애자에 가까운, 무성이나 팬섹슈얼 또는 굳이 젠더의 개념이 없는 그냥 ‘인간’의 삶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저 그리스 시대엔 에이섹슈얼이나 팬섹슈얼은 존재하지 않았으니, 존재하더라도 주장할 수 없었으니 사포와 소피아를 동성 커플로 정했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이 책엔 사포와 소피아는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돌 스니어피스를 내세워 사포와 없어진 그의 시를 상당한, 쉽게 따라가기 벅찬 메타포로 그림을 그려내는데, 아이고, 난 손 들었다. 글/주장을 이해하기는커녕 따라가기도 벅찼다. 사변이 확장되면서 어느 선을 넘어가면 이런 주제가 아니더라도 손을 들고 백기투항할 밖에.


  원래 이름은 프레데릭이지만 집안에서 가까이 지내는 늙어 꼬부라진 추기경이 프레데릭을 ‘헨델’이라 부르면서 이름이 ‘헨델’로 굳어진 남자. 어려서부터 금욕적인 취향과 사색적 천성으로 세상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신학교의 의학도 출신으로 현재는 암 전문병원에서 유방암 수술에 권위를 지닌 의사다. 요즘에는 암 수술도 하지만 암과 관계없이 유방절제술을 받기 원하는 여자들이 부쩍 많아졌다. 세월이 변해 결혼은 이제 원초적 미스터리 또는 유전적인 인식으로만 존재하는 것 같다.

  헨델은 사랑이나 육욕의 감정을 느끼고자 간절히 원하지만 애초에 감정을 모르는 인간이다. 동료들은 헨델이 냉정하게 거리를 둔다고 평할 뿐이다. 거의 매주 삶과 죽음이 자신의 손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 습관이 되어 진중하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고착된 것으로 짐작한다. 그는 의사이고, 가톨릭이며, 여성을 숭배하고, 음악을 사랑하는 동정남이자 사상가이며 바보다. 이제 도시를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작정이지만 쉽지는 않다. 가톨릭이라는 인생의 든든한 징검다리의 간격이 점점 더 멀어져 집게 하나로 수면에서 버티고 있던 헨델은 신앙이 삶의 안전벨트가 아님을 깨닫고 만다. 결국 집게를 놓고 미지의 조류 속으로, 낯선 바다로 떠나려 하는 헨델.

  그러면 역사 속의 큰 음악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은? 영화 <카스트라토> 속에서 우리가 본 헨델. 카스트라토의 목소리를 가장 좋아했지만 실생활에서 거세당한 카스트라토를 천시했던 인물이다. 그가 작곡한 마흔 개가 넘는 오페라 속에는 한 편도 빠짐없이 원래 카스트라토 배역이 등장한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극고음의 소프라노 음역대는 아니고, 여성 드라마틱보다 강한 음성, 표현하기 힘든데, 쇳소리처럼 날카롭다는 뜻이 아니라 목소리 속에 힘이 든 목소리를 좋아했다. 작품 속에 실제 녹음한 <장미의 기사> 마지막 삼중창을 예로 들어 원수부인을 카스트라토가 노래한다.

  일찍이 20세기 초반에 명성을 누려 극도로 부유하게 살던 카스트라토가, 당시 젊은 사제, 훗날의 추기경과 동성연애 관계에 있다. 세월이 흘러 젊은 사제는 다 늙어 기름이 빠진 추기경이 되었으나 젊은 남자를 찾는 취향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적인 만족보다는 젊은 시절에 감탄해 마지않던 카스트라토 목소리를 갈구하는 음악적 취향이 훨씬 더 강하다. 하지만 거세당한 어린 아이를 어디서 구하나? 유럽에서는 돼지를 놔서 키우는 일이 잦았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거세 남아의 생식기는 거의 돼지들이 뜯어먹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내시 집안에서는 거의 대부분 집에서 키우던 개들이 뜯어먹었다. 지난 세기에 잡지 “뿌리깊은 나무”에서 읽었다, 구라 아니다. 여기에 유럽과 우리나라 공통으로 가난한 부모가 아들만이라도 굶지 않고 살라고 고의로 거세를 하는 경우가 더 많아지지만. 유럽은 칼로 자른 모양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자기 머리카락으로 단단히 묶어 놓으면 몇 달 후에 같은 DNA를 가지고 있어서 부작용 없이 잘라졌다고 한다. 이건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 오늘의 교양. 문제는 고환이다. 음경의 존속 여부와 관계없이 고환이 없으면 갈증도 없다. 고환을 내버려두고 음경만 잘라버리면, 아이고 불쌍해서 어떻게 보나, 터질 것 같이 욕망은 넘쳐나는데 해소할 기재가 없게 된다.

  여기까지 달렸으니 헨델의 끝을 보고 싶다. 그러나 참겠다. 독자를 놀라게 할 장면은 안 알려드린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피카소는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여성이다. 피카소의 아버지 잭 경은 수년에 걸쳐 55점의 그림을 주문 제작한 미술애호가처럼 보인다. 하지만 55점 전부 자신의 초상화다. 경의 생각으로 하면, 그림 그리는 여자는 우는 남자하고 같다. 둘 다 제대로 하지 못 한다나? 그래서 딸의 미술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미술학교에 보내지 않겠다면서 18세 생일날 베이지색 고무장갑과 긴 에이프런을 선물하며 겨자 공장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라고 한다. 피카소는 정말로 겨자 공장에 들어가 노란 색으로 그림 연습을 하더니 숨어있던 재능과 그걸 응용하는 재주로 로열 아카데미에 들어가 과정을 끝마쳤다. 하지만 왕립 아카데미를 끝내고 본격적인 시작을 하기 위해서는 천재성이 필요한데 스스로 보기에 더 이상은 아쉬운 일이었다. 오직 순미술만 염두에 두는 피카소에게 앞날을 위한 선택은 딱 두 가지뿐이다. 화가가 되거나 아니거나. 아버지는 여전히 그림은 테스토스테론 과잉의 표시라서 딸은 균형잡힌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시체 또는 시체상태의 인간이 되라는 것.

  아버지 잭 경은 자수성가한 부자이다. 비록 아내가 거액의 지참금을 가지고 와서 그걸 부동산 투자에 쓰는 바람에 땅 짚고 헤엄친 것이긴 하지만 아내가 내 소유니까 아내의 돈 역시 내 것이라면 할 말이 없기는 하다. 자수성가한 사람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이상한 곳/것에 인색한 점이다. 피카소의 부모 역시 예외가 아니라 집도 넓고 방도 여러 개이건만 아이들 방을 배정하지 않고 피카소가 열다섯 살이 될 때까지 남매를 같은 방에서 같은 이불을 덮고 자게 했다. 아빠는 그렇다 치고, 엄마는? 간단하다. 이 집에서 아빠가 시체이듯이 엄마도 시체, 오빠도 시체였다. 그냥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뿐 뇌 속에서는 아무런 화학작용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직 요구하고 떼쓰고 뺵빽 우는 건 피카소 하나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열다섯 먹을 때까지 오빠하고 한 방에서? 그렇다. 부모가 미친 연놈이지 뭐. 오빠가 어렸을 때는 괜찮았는데 다리 사이에 칫솔처럼 털이 돋을 때부터 일상적인 폭행이 일어났다. 세월이 감에 따라 오빠는 체격도 건장해지고 완력도 대단해졌다. 오빠가 요구하면 피카소는 아무 소리 하지 않고 그냥 눈 감고 하는 대로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것을 배워나갔다. 턱뼈가 부러졌고, 팔목과 발목도 부러져봤으며 팔꿈치 뼈도 깨진 적이 있다. 엄마한테 말을 해보지 그랬느냐고? 어째 신부님하고 똑 같은 말을 하실까? 심지어 고백성사를 핑계로 해결을 바랐지만 고해신부도 집안 일이니 엄마한테 이야기하라고 했을 뿐이다. 엄마는 아냐고? 안다. 피카소가 예민해서 아무것도 아닌 일 가지고 떠든단다. 오빠가 그랬을 턱이 없단다. 진짜로 그렇게 믿는 게 아닌 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문제를 백일하에 드러내기는 더 싫다.

  그리하여 피카소 역시 집을 나와 열차에 올라, 이제 다시는 이 도시로 돌아오지 않을 각오를 한 헨델을 만나면서 모든 이야기가 한 곳으로 집중하게 된다. 나는 소양이 부족해 사포에 관련한 담론을 이해하지 못해 아쉬웠다. 어쩔 수 없지 뭐. 수양이 부족한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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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모사의 눈부심 - 문학세상 외국소설선 1
쥴퓨 리반엘리 지음, 이난아 옮김 / 문학세상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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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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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개한 쥴퓌 리바넬리의 소설이라고 해서 관심 폭발했다가 폭삭 망했다. 리바넬리는 <살모사의 눈부심>을 발표해 1997년에 발칸 문학상을 받았다고 한다. 이 발칸 문학상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그냥 튀르키예 국내에서 주는 게 아니고 문학상 본부는 불가리아 소피아에 있으며 발칸 반도 뿐 아니라 발칸 지역에 있는 모든 나라의 문학작품을 대상으로 하는 꽤 크고 중요한 문학상이라고 이 책을 번역한 이난아가 설명한다. 이난아는 튀르키예 유학 막바지에 읽고 “동화 같은 환상적인 분위기에 감싸인 문체”에 매료되었다고 적었다. 번역서를 읽는 독자들이 제일 아쉬운 점이 바로 이런 거다. 원어로 읽으면 해당 언어의 특유한 울림에 공감하면서 읽을 수 있는 반면, 번역서는 아무래도 스토리 위주로 감상하는 게 주 목적이 되니까. 그래서 미리 말하고 넘어간다. 오늘의 독후감은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문장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작품의 스토리에 중점을 두겠다는 것. 리바넬리의 작품으로 세 번째 읽는 것이지만 대단히 재미있게 읽은 <세레나데>도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문장의 공감 같은 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오스만 제국의 정치 관습 가운데 하나가 술탄에 새롭게 즉위한 황제는 자신의 동복, 이복 형제들을 싹 죽여 없애는 것이다. 물론 오스만 제국 만의 유일한 것은 아니다. 동로마제국에서도 덜 떨어진 황제가 즉위할 경우에 형제들을 몽땅 죽이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하여간 발칸 지역에서는 용납이 되던 관습이었던 모양이다. 오스만이라고 해서 모든 술탄이 자기 형제들을 몰살했던 건 아니다. <살모사의 눈부심>에 등장하는 술탄, 17세기에 어머니에 의한 쿠데타로 실각한 이브라힘 1세라고 읽지만 결코 실명으로 등장하지 않는 술탄 역시 맏아들이 아니었다. 생각해보시라. 젊은 술탄이 즉위해 동생을 몽땅 죽였다가 보름 후에 새 술탄이 밥 잘 먹고 무슨 탈이 났는지 밤새 토사곽란 하다가 새벽에 숟가락 놓으면, 왕조가 하루 아침에 무너져버리게? 선대 술탄인 아버지 역시 삼촌들을 몽땅 죽였을 테니까 조카들도 남아 나지 않아 완벽하게 대가 끊어져 버렸을 거 아닌가 말이다. 그러니 말이 그렇지 사실은 핀치 런너 한두 명은 내버려 두었다. 의심스러우면 이브라힘 1세를 검색해보시라. 술탄 했던 이복형, 동복형도 있고, 삼촌도 있고 하여간 있을 건 다 있었다.

  바로 전대 술탄이 친형인 무라드 4세. 당시엔 일상다반사였던 전쟁을 하러 나가야 하는데 암만해도 후방에서 쿠데타가 벌어지면 진퇴양난이라, 출정하기 전에 동생들을 싹 죽이려 들었다. 작품 중에는 워낙 사람 죽이는 걸 좋아하는 미친 왕 비슷한 인물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이 순에 입각해 동생들을 비단끈을 목에 묶어 매달았다. 두 명. 세번째로 나중에 이브라힘 1세가 될 동생의 목에 비단끈을 턱, 걸었을 때, 아이코, 베네치아 출신으로 하렘의 꽃이었다가 술탄의 눈에 들어 황후가 된 무라드 4세의 어머니인 황태후가 등장하더니 술탄을 꾸짖기 시작했다. 황제는 아예 씨를 말리려 하는 거요? 그러다 사직이 문을 닫으면 지하의 선조들을 어떻게 뵈려고 하시오. 우리나라 사극에서 나오는 인수대비가 연산군 꾸짖듯이 한 마디 하는 바람에 이브라힘 1세는 목숨을 건진다. 대신 하렘에서 유폐생활을 해야 했단다. 네이버 지식백과에 그렇게 쓰여 있다. 책에서는 목에 비단끈이 걸렸을 때의 공포 때문에, 지식백과에서는 하렘에서의 오랜 유폐생활 때문에 이브라힘 1세의 정신건강에 심한 스크래치가 갔다고 나왔다. 어느 걸 믿든지 그건 독자 마음이다.

  분명한 건 형이 (여자 말고 남자를 좋아하는 바람에)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어 버려서 이제 동생한테 술탄의 자리에 오르라고 하렘에서 나오라 하니까, 동생은 드디어 형이 내 목숨을 거두어 가려는구나, 엉엉 울면서 발버둥을 쳤다는 거다. 그래서 양 옆에 병사들이 붙어 겨드랑이를 끼고 끌고 나가 톱카프 왕궁의 마당에 놓인 술탄의 의자에 앉혔다. 그랬더니 다뉴브 강에서 나일강까지 점령하고 있는 오스만 군대의 정예병이 도열한 가운데 흰 수염의 대신들, 대율법사, 학자, 장군들이 차례로 경배하러 몰려들어 새로운 술탄의 발치에 이마를 대는 걸 보고, 그제서야 그의 웃음소리가 톱카프 왕궁의 복도에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그의 목에 비단끈이 둘리던 때 이후 줄곧 옥죄었던 독성이 강한 앙금이 휘발되어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걸 느끼면서, 좌중에 늘어선 만장한 사람들을 싸늘하게 바라보더니 술탄의 즉위 첫 말씀 한 마디를 이렇게 했다는 거다.

  “자, 누구부터 죽일까?”


  이 작품의 화자는 ‘나’.

  콘스탄티노플, 즉 이스탄불의 톱카프 왕궁의 하렘을 관리하는 책임자다. 궁의 하렘은 금박장식, 희귀한 도자기, 보석이 박힌 관모, 축면사 용포, 자개장식 가구, 에메랄드와 루비로 치장한 장식품, 검은 담비 털에 둘러싸인 호화로운 후궁들의 처소를 관장하고 있어서 만인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터키어와 라틴어, 히브리어, 이탈리아어, 아랍어, 페르시아어로 현학적이고 수사적인 대화를 능란하게 구사할 수 있으며 쿠란 일체를 암송하고 있다. 왕궁에서 받은 교육과정의 전 과목 1등급에 빛나는 일세의 수재라고 자임한다. 그리하여 지식의 창고이며 완벽한 경지에 이른 학자이며, 자비롭다가도 때론 매정하게 행동할 줄 아는 지도자이기도 하다. 검은 얼굴과 납작한 코, 터번에 짓눌린 듬성듬성해지기 시작한 곱슬머리에 검은 눈동자, 나이 먹을수록 정확한 비율을 자랑하는 근육이 우람한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남자, 당년 67세의 아비시니아 환관장 슐레이만이다. 물론 나중에 구라 또는 과장인 것이 밝혀지긴 하지만. 힘은 강하건만 견강부회하는 해바라기이기도 하다.

  슐레이만은 오직 한 사람, 완벽하게 창조된 유일한 주인인 오스만 제국의 황제 술탄 한 명을 위해 존재한다. 열두 살 때 아비시니아 사막에서 사냥꾼한테 잡혀 어딘지도 모르는 부둣가에 도착해 거세를 당한다. 매운 고춧가루 물을 가랑이에다 쏟아부어 대충 소독을 한 후에 마취도 없이 둥글게 휘어진 아라비아 단도로 단 번에 내용물을 휙 도려내 버렸다. 죽는 놈은 죽고 산 놈만 다시 배에 태워 이스탄불에 도착해 톱카프 왕궁의 노예로 팔려온 것. 이후 말했다시피 적절한 교육을 받아 하렘의 총 관리자까지 올랐다. 이젠 얼굴을 꼿꼿이 쳐든 아프리카인의 당당한 태도로 세상을 대하며 오직 한 사람에게만 머리를 조아린다. ‘나’에게는 그가 내리는 칭찬이 곧 영광이다. 그는 ‘나’에게 신과 같다.


  그러나 작품 속에서는 황제가 황태후를 우습게 보는 바람에 앙심을 먹고, 역사적 사실은 담비 털을 과하게 낭비하는 등 사치에 절어 있는 것에 대한 반동으로 (성장한 유럽 정복민 소년들의 군대인) 예니체리와 관료, 종교인들의 반발로 쿠데타가 발생한다. ‘나’ 슐레이만이 기둥 뒤에서 훔쳐보는지도 모르고 병사들이 술탄의 두 팔을 잡고 질질 끌어 타일로 장식된 작은 방, 좁은 화장실과 부엌만 달랑 달린 방에 집어넣고 벽돌과 회벽으로 창문까지 발라버렸다. ‘나’는 이런 징조를 알고 있었다. 온전한 몸을 가지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갈 수 없어서 내것 대신에 한 어린 아이에게서 자른 물건을 병에 넣어 목에 걸고 다녔으나 이스탄불에 큰 지진이 일어나는 바람에 땅에 떨어져 그것이 깨져버리고 말았던 것이 하나요, 저 시바스의 투르할 마을 처녀가 낳은 새끼 코끼리를 담은 상자를 궁에 가져온 것이 다음이었다.

  아, 이제부터는 스포일러가 확실하다. 엣다 모르겠다. 품절도 아니고 절판인 책이다. 그냥 간다.

  술탄을 폐위시키고 일곱 살 먹은 아들 마흐메드가 즉위한다. 여기서 고민끝에 역 쿠데타를 준비하는 환관장 ‘나’ 슐레이만. ‘나’는 유폐된 ‘나’의 유일한 황제에게 권유하기를, 황제의 모든 아들을 죽여버리면 술탄의 위를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차피 아들은 또 낳으시면 되는 겁니다. 그리하여 황위를 보존하옵소서.


  쥴퓌 리바넬리는, 설마 정말로 이렇게 제안하는 신하도 없었겠지만, 유폐된 술탄이 자기 자식들의 목숨을 구하고자 환관장의 제안을 깨끗하게 말 한 마디로 거절하고 죽음의 길을 선택한다는 이유로 그를 찬양한다. 물론 내가 튀르키예 역사를 아는 건 아니다. 하지만 작품 속에서 숱한 사람을, 심지어 그저 생긴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도 가볍게 목숨을 거두어간 폭군이 자기 자식들을 구하려는 거 하나 가지고 정당화 되느냐고. 죽어나간 왕족, 대신, 측근, 정적은 물론이고 군사, 백성들, 그리고 어처구니없는 법령을 정해놓고 어긴다는 이유로 군대를 풀어 습관적으로 시민을 죽이게 했던 책임은 어쩌고 말이지. 하렘의 풍경 같은 흥미로운 장면을 재미있게 읽다가, 결론에 와서 그만 빡치고 말았다. 술탄이 술탄 다우려면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절대왕정 시대의 임금의 책임과 자격을 먼저 봐야할 것 아닌가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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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2-19 08: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절판된 책이어서 더 재밌게 읽었습니다.
술탄, 하렘, 이스탄불...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네요.
가끔은 그런 술탄도 있지 않았을까요?^^

Falstaff 2024-02-19 08:31   좋아요 1 | URL
하렘을 총괄하는 환관장 이야기라서 흥미롭기도 하고,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오스만 제국의 재미난 이야기이기도 해서 그렇구나, 그렇구나, 하며 읽어나갔다가 결말에 가 푸르륵, 김이 새버리고 말았답니다. ㅎㅎㅎ 그 동네 역사에 무식해서 그랬겠지요.
그런 술탄도 있고 중국 황제도 있고 우리나라 왕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정을 하면 안 된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북조선이 심하게 걱정됩니다.
 
도덕적 혼란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차은정 옮김 / 민음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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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 하나.

  오나와 티그는 전형적인 중산층 부부였다. 당연히 지금은 아니다. 오나는 글을 쓰고 티그는 연구를 한다. 그런데 또한 “전형적인” 쇼 윈도우 부부이기도 하다. 두 아들을 낳고 키우지만 부부 사이는 언젠가부터 냉랭하기 그지없다. 집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이 가정도 가끔 다른 부부, 일 때문에 가까워진 사람들을 초대한다. 그럴 때마다 서양인들이 늘 그렇듯이 괜찮은 와인 한두 병을 들고 오는 부부에게 그럴 듯한 정찬을 대접한다. 손님들이 보기엔 더없이 화목해서 북아메리카 사람들이 이상처럼 생각하는 홈, 홈, 스위트홈의 정수를 자랑하기 위해 초대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 정도다. 오나와 티그 역시 행사가 있으면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 입고 부부동반으로 멋진 에스코트 자세를 유지해 행사장에 입장한다. 부부는 행사가 끝날 때까지 늘 그윽한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본다. 눈길은 그렇다는 말이다. 사실은 상대방이 어떤 사람과 무슨 말을 하는지 별로 상관도 안 하고 신경 쓰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오나는 함부로 이혼해주고 싶지 않다. 어쩌면 오나에 대한 지독한 오해인지 모르지만, 오나는 적당하고 안전한 여성 호구를 하나 준비해 티그와 함께 살게 만든 다음, 티그에게 뽑아낼 수 있는 최대한의 현금을 뽑아내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경우에 오나가 절대 포기하지 못하는 일은, 티그와 새로운 여성이 오나가 향유할 수 있는 최선의 주거와 복지를 유지시켜야 한다는 거다. 이래서 오나의 눈에 띈 젊은 여성이 넬. 넬도 인텔리다. 캐나다 각지를 돌아다니며 대학 강사나 작은 출판사 편집 일을 기간제 혹은 단기직으로 하다가 훌훌 털고 다른 도시로 떠나는 것이 체질에 맞다고 생각하는. 넬이 편집일을 할 때 오나를 만난다. 오나의 책을 출간하는데 하여튼 작품 속 내용을 그대로 믿는다면 오나의 책이라기보다 넬의 책이라고 해도 크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개입을 해서 오나가 흡족해한다. 자기 작품의 편집자로도 그렇고, 가능하다면 남편 티그의 불륜 상대로도. 불륜? 이것도 불륜이라면. 오나가 보기엔 젊고 똑똑한 여자. 솔직한 의견으론 어리고 어리버리한 년.

  결국 티그는 이혼도 하지 못한 채로 조금 떨어진 (“조금”이라고 해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땅이 넓은 나라인 캐나다에서 조금이니까 쉽게 생각하지 마시라) 농촌에서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 낡은 집을 얻어 나가는 대가로 자기 소득의 상당히 많은 부분을 아이들 양육비와 생활비로 송금해주기로 약속한다. 그리고 조금 지나서 넬이 티그와 합류한다. 넬은 시골에 정착함에 따라 먹을 야채도 직접 재배하고 처음엔 닭으로 시작해서 양, 소, 오리, 거위, 개, 말 같은 가축도 기르게 되고 일상적인 농촌 노동에 익숙해진다. 한편으로는 처음엔 주말에 간혹 방문하던 티그의 두 아들까지 합류해 독자가 읽기엔 나름대로 괜찮은 농촌생활을 꾸려간다. 티그와 두 아들까지 다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이 정도면 아버지의 새 애인으로도 꽤 만족스럽다. 세월이 조금 지나 낡은 농가를 떠나 좀 더 북쪽으로 가서 괜찮은 집으로 이사해 여전히 농촌 생활에 만족하는 것처럼 보인다. 정식 아내가 되고 아이도 출산한다. 출산을 망설이는 것 같던 나이 든 티그도 정작 아이가 생기니 좋아한다. 이만하면 꽤 괜찮아 보인다. 다만 한 가지. 넬은 남자, 남자의 두 아들, 그리고 매번 삶의 장애가 되는 오나를 바라지하느라 자신의 본업인 교육, 편집 또는 저작활동은 점점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처음엔 작업실이 있었지만 뒤로 가면 작업실이라는 말 자체가 사라져버리는 것으로 봐서 그렇다.

  티그의 아이들이 다 성장을 하고 넬의 아이들도 점점 커져 이들은 다시 도시로 돌아간다. 오나는 이제 가진 것이 거의 없고, 하던 연애도 번번이 실패해 별 볼일 없는 형편이지만 넬-티그 커플이 자기보다 더 넓고 밝은 집에서 사는 꼴을 보지 못한다. 그리하여 아이들을 통해 압력을 넣어 넬이 친정에서 상속받은 현금으로 집을 사게 하고 시세보다 말도 안 되게 적은 금액의 월세로 그 집에 들어가 살다가 그것도 내지 않으려 한다.


  두 번째 이야기.

  넬이 열한 살 때, 넬과 부모, 오빠는 아빠가 곤충 연구를 하는 섬의 오두막에서 살고 있다. 오빠는 여름이 되면 도끼와 망치를 써서 숲 속에 들어가 동료들과 생존하는 법을 배우는 스카우트 캠프로 떠날 것이고, 아버지는 일 때문에 멀리 가야 한다. 그런데 엄마의 배가 남산 만하다. 아니, 남산은 아니고 북통 정도다. 출산을 하기엔 많은 나이라서 나이 때문에 아이한테 무슨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약간 있기는 하다. 이건 복선이다. 이 아이, 즉 동생이 나중에 독립하고도 몇 년 지난 후에 밝혀지는 바, 정신적으로 분열증 증세가 있다고 돌팔이 신경정신과 전문의한테 진단을 받는다. 다시 다른 의사한테 재진을 받아 약을 바꾸지만 적어도 가볍지 않은 우울증은 확실한 거 같다. 끝까지 약을 끊으면 안 된다고 하고, 어쨌거나 약 덕분에 이후에 동생의 증세는 정상 수준에 도달한다.

  넬은 곧 있을 것이라는 엄마의 출산을 대비하기 위하여 어렸을 때 배운 손뜨개를 열심히 하고 있다. 동생의 배내옷 일습을 짜고 있는 것. 손싸개 두 개, 발목 양말 두 켤레, 레깅스 한 벌, 겉옷 한 벌, 그리고 모자. 만삭의 어머니는 오래 전 트렁크 속에 넣어둔 스목 드레스를 즐겨 입는다. 그걸 입으면 왜 그렇게 가난해 보이는지. 엄마의 배가 본격적으로 불러오기 시작하면서 점차 몸집이 거대해졌지만 평소엔 민첩하고 과단성 있게 산책을 하거나, 놀라운 속도로 스케이트를 타거나, 발차기를 힘차게 하면서 수영을 즐기거나, 열 받으면 벽에 던져 접시를 부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다 늙어 임신을 하면서 엄마는 망가지기 시작했다. 넬은 어머니가 왜 자기 자신을 이렇게 무기력하고 부푼 모습으로 만들었는지, 그래서 왜 나의 미래를 그늘지고 불확실하게 만들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머니가 일부러 그런 거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만해도 어머니 자신 역시 뜻밖에 당한 일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1, 2주 후에 아버지가 돌아오고, 단풍이 들기 시작하고, 철새들이 울어 10월이 되었다. 넬이 열두 살이 되기 몇 주 전에 여동생 리지가 태어나 ‘나’는 배내옷 모자에 분홍색 끈을 달아 일습으로 동생한테 입힐 수 있었다. 그러나 동생은 잠을 자지 않았다. 밤에도 어머니의 품에서 놓여나기만 하면 날이 새도록 빽빽 울어댔다. 어머니는 아기하고 통하는 무슨 특별 교류장치라도 있는지 리지가 울 때마다 몽유병자처럼 일어나 어르고, 젖이나 물을 먹이거나 하고, 다시 재운 다음에 침대로 돌아갔지만 불과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다시 빽빽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한테만. 넬은 밤새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아주 뚱뚱했던 어머니는 이제 너무 여윈 모습으로 변했다. 수면부족으로 수척해지고 눈 밑엔 짙게 검은 그늘이 젔으며 머리카락은 언제나 푸석푸석했다.

  그래도 넬한테는 어김없이 사춘기가 왔다. 하지만 넬의 십대 시절 대부분 엄마는 동생 때문에 늘 혼수상태였다. 엄마한테 넬까지 부담을 주기는 쉽지 않았다. 물론 어찌 한 번이라도 대들어보지 않았을까. 그러다가 귀싸대기 한 대를 난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맞아도 봤지만. 하여간 언제나 파김치 상태로 늘어져 있는 어머니 덕분에 넬의 사춘기 시절은 부모한테 더욱 비밀스러웠고, 부모 입장에서는 아주 무난한 십대 시절을 보낸 착한 딸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세월은 가고 또 간다. 넬과 리지 자매는 멀지 않은 곳에서 살며 자주 연락하고 만나고 이야기하고, 이제 나이 들어 누워 있으며, 앞이 보이지 않는 어머니한테 함께 들르기로 한다. 뭐 그렇게 사는 것이지.


  《도덕적 혼란》은 이 두 이야기를 주축으로 만들어가는 열한 편의 단편소설로 구성되어 있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책이다. 겉 표지에 “마거릿 애트우드 소설”이라고 쓰여 있을 뿐이다. 이런 표현은 대개 중단편집일 때 쓰는 걸로 알고 있다. 매우 애매하다.

  연작 장편으로 볼 수도 있다. 연작 장편이라면 위에 적은 두 이야기 사이에 모래밭이 놓여 있어 이야기를 연결하는데 서걱거린다. 어머니와 자매들 이야기의 경우엔 애트우드 특유의 페미니즘 적으로 괜찮은 작품도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오나와 티그가 끼어들면서 20세기 가정 이야기로 확 바뀌어 버린다. 이야기 자체도 애트우드의 다른 작품과 비교하면 거의 “평면적”이라고 해도 괜찮을 정도로 밋밋하다. 문장 역시 <도둑 신부>, <고양이 눈>, <눈먼 암살자> 같은 작품들과 비교하면 당연히 덜 발칙하다. 그렇다고 열한 편의 단편소설로 읽자니 이야기들이 딱 맺어지지 않는다. 물론 이 생각은 애초에 단편을 책 한 권에 실었고, 그걸 읽어서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알고 있어서 그렇게 “딱 맺어지지 않”는 것 같이 생각했겠지만. 그렇다고 애트우드의 자전적 이야기라고 할 수도 없다. 이 정도 작가의 경험 가지고 자전적 운운도 우스운 거 같고. 그래서 내가 읽은 결론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애트우드. 애트우드의 명성에 비해서 그렇다는 얘기다. 읽기 머뭇거릴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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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2-16 05:4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쥴퓨 리반엘리, <살모사의 눈부심>
화요일. 지넷 윈터슨, <예술과 거짓말>
수요일. 에두아르 르베, <자살>
목요일. 신동호, 《그림자를 가지러 가야 한다》
금요일. 마르그리트 뒤라스, <타키니아의 작은 말>
 
백제행 창비시선 12
이성부 지음 / 창비 / 1977년 7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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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골의 이성부. 청춘시절부터 이이를 좋아했다. 시인은 언제나 산을 좋아했다. 그의 시도 산악만큼 강건한 목소리를 지녔다. 시 어느 한 곳에서도 나약과 주저와 비겁의 몸짓을 발견할 수 없다. 나도 한 시절엔 이십대 초반이었고, 시절은 더 이상이 없을 만큼 암울했는데, 이때 불 같은 목소리의 시어들에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선배의 하숙방에 잠입해 동녘이 밝을 때까지 읽던 시인들이 신경림, 조태일, 황명걸, 김수영, 민영, 정희성, 황동규, 마종기, 정현종, 김명인, 이성복 같은 이들이었다. 금속활자 시대의 시집. 이들의 목소리는 각기 달랐으나 다행스럽게 서로 다름을 인정할 때였다.

  이들 가운데 한 명을 고르기 쉽지 않지만 이성부의 강건한 시어들은 언제나 정직해서 좋았다. 이 시집은 책꽂이 저 깊숙한 곳에 있다. 문제는 그걸 다시 끄집어 내기가 쉽지 않다는 거였다. 이성부를 다시 읽고는 싶지, 그렇다고 책꽂이를 다 뒤집는 이판사판공사판을 벌이고 싶지는 않지, 도서관 서가에도 없지, 그래서 선택한 것이 헌책방이었다.


  《백제행百濟行》에 실린 첫번째 작품은 <좋은 詩>. 시인이 쓴 시가 아니라 시인이 읽은 좋은 시를 노래한다.



  좋은 詩



  그대가 깊은 밤 渾身의 힘으로써 간추린

  이 한마디 말씀을,

  멈춘 시간의, 캄캄한 속을 빠지고 빠지다가

  진흙투성이가 되어 가까스로 다시 하늘 만나 숨쉬는

  이 한마디 말씀을,

  그 혼자만 무릎쳤던 기맥힌 기쁨을,

  내 또한 깊은 밤에 이렇게 엿듣고 있나니.


  이렇게 이렇게 가슴 뛰나니.

  그대 기쁨 세상에 들키고 말았나니. (1977. 전문)



  밤 깊도록 시를 읽다가 어느 시를 만나 갑자기 무릎을 칠만큼 기쁨을 발견하는 시인의 모습이 눈에 훤하다. 누가 있어 혼신의 힘을 써 한 줄의 노래를 만들었고 그것을 또한 알아보는 시인을 만났으니 원래의 시를 쓴 또다른 시인이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모든 시인의 소망이 누군가 자신의 시를 읽으며 애써 숨겨놓은 기쁨을 세상에 들키는 일이겠건만.

  《백제행》은 시인이 1974년에서 77년까지 쓴 작품을 위주로 실었다. 3부는 행사에 축하하는 시와 기념일 시를, 4부는 문청시절 또는 데뷔 초기에 쓴 작품 가운데 앞선 시집에 싣지 않은 시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3부와 4부는 굳이 새겨 읽을 필요는 없다.

  74년부터 77년이면 유신정권이 엄한 눈으로 국민들을 감시하던 시기. 그리고 경제적으로 거의 다 여유가 없는 팍팍한 살림을 살던 시기다. 어느 쪽으로 눈길을 돌려도 강퍅한 생활은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며, 그럼에도 극소수 재벌 집단은 세상의 자본주의가 다 그랬듯이 고용인의 저임금을 담보로 차근차근 이익을 모아 투자, 다시 투자, 그리고 재투자를 해 나가던 시기였다. 당연히 일종의 필요악이었던 부패가 도처에서 발견되기도 하고 과도한 노동시간은 노동자의 건강을 잠식했으며 이런 불평등은 다만 조금의 차이가 있을 망정 거의 대부분의 국민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소외였다.

  딱 이럴 때 기념비적인 비극이 1970년에 터진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를 외치면서 분사한 전태일. 이 사건은 그간 허무와 잠식과 순응에 길들여진 인텔리겐치아들의 참여의식을 높이는 결정적 계기가 되어 본격적인 리얼리즘의 시대가 열린다. 그러나 엄혹한 금지와 검열의 시기. 함부로 글을 썼다가는 백지로 출간되는 경우도 있었다. 끈질긴 금지의 시대. 당시의 시는 어떤 시가 되어야 했을까? 이성부는 대답한다.



  우리들 詩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슬픔,

  피흘리는 슬픔,

  등 돌리고 울음 감추는 슬픔,

  연탄가스에도 중독되지 않는

  가장 예리한 칼날로는 베히지 않는

  슬픔의 肉體,

  나자빠진 主題.

  우리들 한복판에서

  늘 우리들 모습을 새로 만드는

  슬픔,

  우리가 그대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

  깨진 무르팍 호호 불고

  흙먼지 털털 털고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가게 만들어야 한다.  (1977. 전문)



  이 시절에 나는 청소년기를 보냈다. 혈관 속에 피와 함께 농축 니트로글리세린이 포함되는 몇 년의 시간. 그러나 이 시기에 니트로글리세린을 폭발시키지 않고 얌전하게 하라는 공부만 하던 아이들은 절반 이상 좋은 학교에 진학하고 좋은 직장에 취직해서 어여쁜 아내 만나 아이 낳고 잘 살다가 이혼당하기도 했다. 학교에서는 목총을 들고 사격과 총검술과 분열, 열병식을 검열했던 북괴 남침위협의 시기. 세상의 모든 미덕은 시키는 것만, 하라는 것만 하는 일에서 시작했다. 공장에서 프레스로 찍어내듯 비슷한 국민들을 양산하고 싶었지만 세상에 그런 건 애초부터 불가능했던 것. 사람들은 겉으로 표를 내지 않아서 그렇지, 니트로글리세린은 아닐지언정 누구나 가벼운 기폭제 하나쯤은 가슴 속에 장만해두고 살았다. 그랬었던 거 같다.



  奴



  문 열고 소리치면

  긴 대답으로 서 있는 얼굴

  언제나 그렇게

  나에게서 나를 빼버리고 남는 얼굴.


  갈수록 나는

  몇 겹 부끄러움 몸에 둘러쓰고

  비틀거리거나

  자빠지기 일쑤로다.


  지나는 바람 불러 세워

  세상의 뜻을 맡기고

  그 살갗에

  내 볼을 비비며 껴안아도

  나는 끝내 빈껍데기일 뿐

  타는 입술일 뿐…….


  몇 살 먹은 絶望아.

  너는 요란한 소리로 나를 다스리는

  나의 원수로다,

  나의 마지막 남은 칼이로다.  (1974. 전문)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 다만 한 가지 북괴의 적화통일 야욕을 멈추지 않는 위기상황을 늘 겪어야 하는 특수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채택한 가장 효율적인 “한국적 민주주의”인 유신체제를 이어가야 하는 나라의 신문기자. 불온하다는 판단이 들면 그 판단을 누가 하는지는 몰라도 가볍게 자신이 쓴 기사 자리가 하얗게 빈 채 인쇄되어 나가야 하는 나라에서, 기자이기도 한 시인은 “낙원 속의 노예” 상태인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나 이성부는 저 아프리카 잔지바르 섬 출신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낙원 속 노예상태인 유수프가 아무 전망도 내놓지 못한 반면에, 한국적 민주주의의 낙원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절망을 원수를 갚을 수 있는 칼로 소유하기를 바라고 있다. 노예의 절망이 한 자루의 칼이라는 희망으로 뒤집히는 역전극의 시도. 이성부는 이런 시인이었다.

  시인이여, 편히 쉬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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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lgial 2024-02-15 06: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슴이 뜨거워지는군요. 선친이 시인의 고등학교 후배인데 마주친 적이라도 있는지 여쭤볼 길이 없습니다.
제 청소년기에는 이 분은 없었고, 김남주•김승희•고정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의성’은 오타입니다^^

Falstaff 2024-02-15 15:59   좋아요 1 | URL
멀리서나마 인연이 있는 시인이군요. ㅎㅎㅎ 멀지 않은 미래에 제가 시인을 먼저 만나서 물어보겠습니다. 오타 지적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수정했습니다. ^^

그레이스 2024-02-19 08: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몇 살 먹은 절망아!˝
이 부분 소름돋았습니다.

Falstaff 2024-02-19 12:19   좋아요 1 | URL
ㅎㅎㅎ 시집은 읽으면서 이런 시 한두 개 건지면 본전 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