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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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한 남자의 이야기.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사람의 진짜 아버지. 그가 필멸의 인간답게 어느날 지상에서 숨을 거두고 작가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아버지, 그의 일생에 관한 글을 써보려 작심한다. 그리하여 에르노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물질적 필요에 얽매였던 삶을 그리려고 할 때, 내겐 예술의 편을 들 권리도, 무언가 <굉장히 재미있다>거나 <감동적인> 것을 만들 권리도 없는 것"임을 자각하여 오직 "아버지의 말과 행동과 취향, 그의 생애의 주요 사건들, 나도 함께한 바 있는 그 삶의 모든 객관적 표정을 모아볼 것"이라고 글의 방향을 분명하게 이야기한다. 자신의 아버지의 삶을 객관적으로 한 발자국 가량 떨어져 바라보는 일,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쓰는 일은 에르노의 잇단 멋진 말마따나 "추억을 시적으로 꾸미는 일도, 내 행복에 들떠 그의 삶을 비웃는 일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며, "지금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을 단순하고도 꾸밈없는 글"을 그대로 원고지 위에 옮겨놓는 일이겠다. (인용은 전부 21쪽)

 그리고 작가는 자신이 했던 그대로 글을 썼다. 그래서 글이 건조하고 맛이 없겠거니 생각하면 천만의 오해. 여기서 눈부신 건조한 문장들이 기막히게 나열되는 환상을 보게된다. 건조한 문장들과 묘사가 절묘한 수열을 만들면 어떤 화려한 수식보다 사람의 가슴을 정곡으로 찔러대는 뜨거운 총알이 된다. 독자들은 그걸 느낄 수 있을 터. 편집을 아주 넉넉하게 했는데도 불구하고 100쪽을 겨우 넘는 짧은 소설을 읽으면서 책을 내려놓은 때 푸, 한숨을 내쉴 수 있는 공감을 당신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근데, 그런데 말씀이다.

 우리나라 소설 가운데도 이 정도 작품들은 많잖아? 게다가 부모에 관한 감성을 호소하는 것이야말로 문학이 발생한 이후 한 번도 쉬지않고 계속된 것이고 일천한 한국소설문학에서도 특히 많은데, 물론 에르노의 문장이나 소설 전체가 후지다는 얘긴 눈꼽만큼도 아니며 오히려 나도 그녀가 쓴 이 책에 큰 매력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에르노의 다른 작품 몇개와 함께 묶어 책을 내는 것이 독자를 위한 배려가 아니겠는가 하는 점이다. 이 책이 문학사를 바꿀 만큼 혹은 독자들로 하여금 눈알이 휘까닥 뒤집어질 만큼 명문이라면 얘긴 다르지만, 일반적인 주제에 (솔까!)일반적인 내용으로 오직 감성충만의 드라이한 문장의 소설을 딱 하나만 싣고 정가 10,800원을 때리면 너무 하지 않은가 말이다. 출판사 매출 올라가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인세가 달러로 나간다는 것도 생각좀 해주라. 그 인세를 한국의 가난한 작가가 받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말이지. 이런 책은, 물론 좋은 책이란 점엔 동의하지만, 문고판으로 나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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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2-08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에르노 작품을 한 권으로 묶어서 내야 한다는 말씀에 정말 공감합니다. 문학동네에서 나온 <단순한 열정>도 100페이지 조금 넘어가는데 가격이 만 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_- (말이 좋아 100쪽이지 사실 편집만 빽빽하게 하면 그 절반으로 줄지도;;)

Falstaff 2017-02-08 13:39   좋아요 0 | URL
그죠, 그죠! 이건 완전히 비양심이예요. 다음 주 화요일에 올릴 문학동네 책도 똑같은 이유로 해서 저한테 욕 오지게 먹을 예정입니다. ㅋㅋㅋ

잠자냥 2017-02-08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메이저 출판사들이 독자의 읽기 능력을 너무나도 무시하는지 ㅠㅠ 창비, 문학동네, 문학과지성사 가리지 않고 이런 비양심적인 책을 너무 많이 내고 있습니다. 문학동네가 특히 심한 듯한데... <너무 시끄러운 고독>, <인간이라는 직업> 이 두 책도 받아보고 황당했고, 창비의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도 황당했고, 문지의 로맹 가리 <내 삶의 의미>도 열받아 죽는 줄 알았습니다. 모두 온라인이 아닌 서점에서 봤다면 절대 그 가격 주고 사서 읽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_-

Falstaff 2017-02-08 16:23   좋아요 0 | URL
전 그래서 책의 페이지를 확인하는 편인데 가끔가다가 걍 사면 꼭 이런 일이 생기거든요. 기쁜 마음으로 택배온 거 뜯어보는 순간 기분 조지는 그 심정, 그 사람들 아마 알 겁니다. 그래도 돈 많이 남으니까 읽는 사람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막 찍어대는 거죠.
으.... 정말.....
 
1780 열하 1
임종욱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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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오래 전부터 읽고 싶었던 거다. 1780년이면 바야흐로 아메리카에서 미국 독립을 위한 전쟁이 극렬하게 벌어지고 있어 지구 상에 거의 처음으로 인권 및 평등, 그리고 자유 사상이 싹을 트기 시작하던 때로 5년 후면 미국이 독립을 하고 그후 4년 더 있으면 드디어 자유, 평등, 박애를 기치로 바스티유의 공고한 벽을 인민의 힘으로 무너뜨리게 되는 그런 시점을 눈 앞에 두고 있었다. 눈을 아시아로 돌려보면 명조 시절 정화의 원정 이후 굳게 문을 닫아버린 중국은 폐쇄정책으로 인하여 국가경쟁력을 스스로 묶어버렸으며 교류가 세계최정상의 문명과 문화를 누리고 있는 자신들에게 도움을 줄 것이 없다는 판단으로 오히려 공고한 만리장성을 굳건하게 보강하는데 힘을 쏟았다. 이런 모든 조치들이 자신들이 세계에서 최강이라는 오만에서 나온 것이지만 바로 그 이유로 급격하게 중국과 동아시아의 세계적 정력은 흐물흐물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야말로 역사적 아이러니. 중국으로부터 총기제작술을 받아들여 이를 획기적으로 개선해 이베리아 반도에서 아라비아 민족들을 먼저 쓸어버린 다음, 총과 대포기술과 더불어, 인류 발전 역사를 2차 함수 곡선으로 발전시킨 항해술의 발달을 기초로, 라틴 아메리카 인류의 대대적 학살과 희생을 바탕으로, 유럽이 그야말로 눈부시게 발전을 거듭, 세계사의 영광은 동아시아에서 한 순간에 유럽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후 3세기 가량이 흘러 유럽의 여러나라가 최종적으로 중국을 침탈할 목적으로 아시아에 접근을 시도하였지만 헛된 중화의식에 빠져버린 청조는 이를 유럽이 청조에 조공을 하기 위해 알아서 설설 기는 줄로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던 와중이었고, 하다못해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의 태평성대라고 곳곳에 함포고복의 격양가가 높았던 시절이다. 문명국 가운데선 가장 야만적인 수준에 머물렀던 조선엔 정조라고 불리울 젊은 왕이 등극해 나름대로 왕권을 강화하고 자신의 뜻을 세우기 위해 애를 썼으나 이 책의 내용과는 별개로 노론으로 대표하는 수구세력, 썩어자빠져 이미 멸망해 백골마저 흩어져버린 명나라를 잊지못해 대명의리론大明義理論에 입각해 청조를 치느니 마느니 헛소리로 날밤 까는지도 모르는 세력들을 견제하느라 자신의 친위대 양성에 힘을 쏟아 군권을 손에 쥐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던 와중이다.

 작가 임종욱이 딱 이 시기를 잡아, 그것도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귀에 딱지가 앉을 북학파의 거두 연암 박지원을 등장시켜 제목도 근사하고 책 껍데기 역시 근사하며 900쪽이 넘는 화려한 디자인의 <1780 열하>를 썼으니 어찌 관심이 없을 수 있었으랴. 그리하여 일찌감치 이 책을 한 번 읽어야겠다고 마음 먹고 있었다가, 작년 말에 기쁜 마음으로 책을 산 다음, 드디어 지난 주에 금요일에 책을 읽기 시작해 일요일 오전까지 바득바득 책을 다 읽어치웠으니 어찌 감상 한 마디가 없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공들여 쓴 작가 임종욱은 "습작"을 자신있게 책으로 만들어, 즉 아무리 책일지라도 독자의 기대와 감동과 감동까지는 아니라면 적어도 동감을 주는 대신 자신과 출판사는 돈를 받을 '상품'으로 만들어냈으니 여기서 임종욱의 기개를 높이 사지 않을 수 없다. 독자서평을 보니 나와 마찬가지로 습작이라고 표현한 독자가 한 명 있었고, 그에 대해 굳이 답글을 단 저자 임종욱은 '자신의 작업을 습작이라고 하니 민망하다'는 취지로 이야기 했다. 임종욱의 유감표현에는 동감을 한다. 나름대론 아니라고 여기겠지.

 내가 <1780 열하> 1권에서만 습작이라고 결론 낸 것들을 조금 이야기해보겠다.

 1. 프롤로그를 시작하면서 정문탁이 송지명 교수의 강연을 찾아가는 데애 대하여 무지막지 우연을 강요하고 있는 거 (45쪽)

 2.강원도 사람이 충청도 사투리 쓰는 거. "아부지, 거 정말 오랜만에 듣는 영양가 있는 소리구먼유. 어서 가서 성사시키세유."  53쪽. 아, 세계를 정복한 충청도 사투리. 잉글랜드 촌놈 토마스 하디가 쓴 <테스>에서도 미모의 여주인공 테스는 거침없이 충청도 사투리를 구사한다.

 3. 강력계 형사가 한겨울에 난데없이 양복을 벗었다가 다시 입어서 지나가는 행인이 형사의 겨드랑이에 달려있는 권총을 보게해? (144쪽)

 4. "40, 불혹(不惑)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뜨신 아버지" 218쪽에 이렇게 나오는데, 바로 다음 페이지엔 "대학에 입학해 서울에서 자취를 시작하자 조형사는 어머니와 작별할 수밖에 없었다. 병들고 야윈 아버지 곁에서 남편의 몸을 보살펴야 하는...." 이란다. 그럼 아버지가 스무살이 안 돼 조형사를 낳았다는 얘기. 219쪽에선 굳이 왜 아버지 얘기가 나와야 했는지 혹시 감정팔이 아냐?

 꿈 꾼 이야기가 너무나 자주 뜬다는 것 등 얼마든지 더 쓸 수 있는데, 수첩 옆에 두고 위와 같이 메모하다가 책 한 권 읽으면서 내가 뭔 지랄인가 싶어서 관뒀다.

 그리고 임종욱의 생각과 내 생각이 너무나도 극적으로 다른 것이 있었다. 나는 나와 다른 의견을 갖고 있는 사람을 경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임종욱은 예외다. 내가 아무리 나와 다른 의견도 받아들이지만 히틀러 개새끼나 스페인의 프랑코 개자식의 의견은 결코 수용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임종욱은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정문탁의 입을 빌려 자신의 의견임에 분명한 다음 발언을 한다.

 "나는 그때(주: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있었던 원자탄 피폭) 좀 더 많은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두 발(주: 당시 일본에 투하한 원자폭탄 '리틀보이'와 '팻맨')로 정신을 차리기엔 일본인은 너무 교만하고 기억력이 좋지 않다. 저지른 짓은 다 잊고, 당한 일만 기억하는 아집은 뇌의 어느 한 부분에 문제가 있다는 반증이다." (376쪽)

 이 부분을 읽고 임종욱이 순혈 아리안 족으로 독일 땅에서 태어나 1935년에서 1945년 까지 젊은 시절을 보내지 않은 것에 진정으로 안도했고, 같은 이유로 1910년에서 1945년 까지 조선반도에서 조선인으로 태어나 일본 경찰에 복무하지 않았던 것이 우리로서는 천만 다행이었으며, 1975년부터 79년까지 캄보디아의 권력층 바로 아래 행동파 책임자로 활동하지 못했던 것을 천우신조라고 여겼다. 뭐 이딴 자가 다 있는가. 20만 명의 일본인, 굳이 일본인이 아니라도 인간의 목숨이 그렇게 우습게 보인다는 거야? 그러나 더 이상 열을 내진 않겠다. 아침이라서. 나, 사람 됐다.

 한 마디로 이런 사람이 쓴 책은 읽을 필요가 없다. 비록 자신이 낸 책을 한 번 읽어보니 교정이 개판이라 백개의 단어에 육박하는 정오표를 따로 인터넷 책방에 깔아놓는 양심을 보여주긴 했지만 그것도 참 우스운 것이, 자기 책이 그렇게 소중했다면 책이 나오기 전에 교정 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를 했어야지, 다 나오고 이미 독자도 그걸 끝까지 읽었는데 그제서야 기껏 성의표시를 하고, 교정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 그러니까 작가 책임이 아니라 출판사 교정 담당자 책임이다 이거지? 그것도 이해해주겠다. 책 나온 것이 기쁘고 즐겁고 우쭐하기 한량없어 더 좋은 퀄리티의 책을 발간하기 위해 교정을 본들, 틀린 단어 같은 것이 눈에 들어오겠는가 말이다. 아주 전형적인 습작 작가의 행태.

 2권 100쪽 못미쳐 난 심각하게 고민했느니, 이걸 마저 다 읽어? 말어? 습작작가의 전형적인 모습, 기본이 안 된 증거들이 끊임없이 발견되는데다가  위에서 말한 원자폭탄 이야기가 거슬르기 한이 없었지만 역시 아까운 건 책값이었다. 그래, 책값은 비교적 저렴하다. 두 권에 2만원. 그것도 아까워 끝까지 다 읽었으나, 읽자마자 곧바로 '버릴 책들'로 구분해서 책꽂이에 꽂히지도 못하고 그냥 방 구석에 옆으로 쌓아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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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김남주 옮김 / 마음산책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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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밀 아자르, 하니깐 생각나는 것이 1978년 김만준이 노래한 가요 <모모>와 이 노래의 주인공 모모가 미카엘 엔데의 <모모>에서 남의 말 잘 들어주는 소년 모모가 아니라 바로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에 나온 모모라는 거. 연애하던 아가씨한테 '모모'란 별명을 지어주었더니 좋아하더란 기억. 평생 저지른 바보같은 일 가운데 하나가 약대 다니던 그 아가씨 놓친 일인데 물론 백퍼 경제적 이유로 바보같은 일이었다는 것이지만 하여간 그 아가씬 털이 많아 무릎 아래(무릎 위에 관해선 노 코멘트) 다리털이 피부에 밀착한 나일론 스타킹 때문에 옆으로 마구 누워 있는 건 물론이고 일부는 스타킹을 뚫고 비죽 나오기도 해서 털이 많다는 의미로 '모모' 즉 우리 말로 '털털'이라고 별명을 지었다는 걸 무슨 심사인지 하루는 그녀에게 알려주었고 하마터면 그날로 세상 하직하는 줄 알았다. 그날 이후로도 하필이면 약학과 재학중인 아가씨가 어느날 시침 뚝 떼고 극미량의 시안화칼륨을 내 소주잔 주둥이에 싸악, 발라놓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 간혹가다가 으드득 몸을 떨기도 했다. 아, 물론 조금 과장해서 그랬다는 거다.

 당시엔 에밀 아자르가 세계적으로 문제적인 작가 로맹 가리와 동일인인지 아무도 몰랐고, 나도 여태까지 몰랐다가 어제 <가면의 생>을 표지 앞날개에 나온 연표를 보고야, 아 그새끼가 이새끼였어? 이거 완전 사기꾼이네, 알았다. 전혀 몰랐던 쇼킹한 이야기를, 사실이 밝혀진 후 36년 반이 지나 알아채면서도 이렇게 험하게 욕한 이유는, 대한민국의 숱한 독자들이 <가면의 생>을 느므느므 좋은 작품이라고 평했음에도 불구하고 난 도무지 이 작품에 동의하지도 못하겠고 공감하지도 못하겠고 만일 문학적인 성과가 있다면 그 성과가 무언지도 도무지 모르겠어서이다. 이게 소설이야? 암, 소설은 소설인데 진짜 잘 쓴...., 하이고 내가 뭐라고 위대하다고 알려진 한 작가가 쓴 소설을 잘 썼네 아니네 까탈을 잡고 지랄이냐고 물으신다면 차마 어떻게 여쭈어야할지 몸 둘 바를 모르겠지만 이건 내가 쓰는 독후감이니만큼 전적으로 내 의견을 말씀드리면, 한 우울증 환자의 사색과 가명으로 작품을 발표하는 데에 대한 변명, 가명으로 작품을 발표하면서 살아가는 삶의 지적 애로사항 같은 걸 늘어놓은 넋두리를 소설의 형식을 빌어 써 갈겨놓은 거다.

 그런 의미에서 썅, 아마추어가 겁없이 주둥이를 한 번 열어보자면 이 소설은 전립선 비대증을 심각하게 앓고 있는 에밀 아자르가 이미 죽어버린 로맹 가리의 시체 위로 힘없는 오줌줄기를 졸졸졸졸졸졸 흘려놓은 자국이다. 방광은 터질 거 같이 부풀었는데 그만큼 비대해진 전립선 때문에 그치지도 않고 시원하지도 않게 그냥 질질 새서 흘러나오기만 하는 에밀 아자르의 가느다란 오줌줄기(漏尿)가 이미 죽어버린 스스로의 몸뚱이 위로 떨어지는 낙루를 댓 발자국 가량 떨어져 지켜보는 일, 이게 이 책을 읽는 일.

 적극적으로 비추! 이름 값에 속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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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2-06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모(毛毛) 푸하하하하하. ㅋㅋㅋㅋ 아침부터 터졌습니다. 로맹 가리(에밀 아자르) 마음산책 시리즈는 작품 편차가 크더라고요. 어떤 것은 좋은데, 어떤 것은 왜 읽었나 싶고. 암튼 전 로맹 가리 최고 작품은 아무래도 <자기 앞의 생>인 것 같습니다...

Falstaff 2017-02-06 10:43   좋아요 0 | URL
^^;;
제가 그렇게 살았습죠. 에휴.....
 
호랑이들이 제 세상인 나라 1
장마리 블라 드 로블레스 지음, 김병욱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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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후감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이야기할 것은, 알라딘 서재에서 다른 가게 얘기하는 게 좀 안됐지만, 인터넷 서점 가운데 Yes24 딱 한 군데만 2017년 2월 2일 현재 품절이 아니라는 거. 그리고 이 책이야말로 출판사 열린책들이 가끔 하는 기특한 일, 숨어있는 훌륭한 작품을 소개하는 작업 가운데에서도 앞줄에 서야한다는 거. 눈치채셨으면 얼른얼른 주문하시는 편이 좋을 듯. 거기도 재고 얼마 남지 않았을지 모르니. 

 우리나라 독자들이 이 책의 제목 <호랑이들이 제 세상인 나라>라고 하면 어딘지 모르게 촌스럽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흠, 그거 아시나? 오늘의 독후감을 쓰기 위해 난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일부분을 다시 읽어봤으며 흡족하지 않아 그걸 각색하여 오페라로 만든 베르디의 <막베트> 4막 대본을 들춰가며 기어이 문제의 이탈리아어 아리아 가사를 노트에 적어온 거. 4막의 테너 아리아, 맥더프, 오페라에선 막두프가 이렇게 노래한다.

 "Ah, fra gli artigli di quel tigre to lasciani la madre e i figli?"

 이걸 구글 번역기(이탈리아어 → 영어)를 돌리면 다음과 같이 된다.

 "Ah, between the claws of the tiger that I leave the mother and the children?"

 또 위 영어를 순화된 한국말로 해볼까?

 "아, 이 곤란한 처지를 맞아 내가 처자식을 버렸단 말인가?"

 흠. 나답지 않다. 너무 순화한 훈민정음이다. 좀 솔직한 정서로 바꿔보자.

 "아, 처자식을 맥베스 개같은 새끼의 발 아래 버려둬야 한단 말이냐?"

 내가 우리 말로 번역하면 어떤 경우에도 본문에서 나온 tigre 혹은 tiger 즉 호랑이 또는 범이 나오지 않는다. 직역해서 "아, 처자식을 범의 발톱 아래 두고...." 라 할 경우에 구닥다리 한국인들이 범을 생각할 때 떠오를지도 모를 은근한 경외 같은 게 앞설 수 있고, 하여간 복잡하다. 또 어려서부터 무수히 들어온 동화 때문이라도 이 책의 제목 "La Ou Les Tigres Sont Chez Eux"를 그대로 번역하면 적어도 대한민국의 독자들은 제목의 구태의연함 때문에 책을 읽고싶은 마음이 뚝 떨어질지도 모른다. 어떻게 됐든 간에 책의 제목을 역시 순화한 훈민정음으로 바꾸면 '폭력과 야만이 판치는 나라'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아, 여러말 할 거 없다, 어쨌든 우리말로 직역한 제목은 후지다.


 근데 책은 절대로 그러하지 않으니, 작가 로블레스가 이 책을 쓰기 위해 십수년 간을 자료도 모으고 궁리도 하고 세계 각지로 여행도 다니고 했다는데, 무엇보다도 그의 이 모든 준비와 준비기간이 그의 융숭한 지식적 밑받침 위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호랑이....> 같은 대단한 작품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지 않았겠는가,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1,000 쪽이 넘는 장편소설을 읽으면서 마치 움베르토 에코, 그래봤자 아직 그의 책은 <장미의 이름> 한 밖엔 읽어본 게 없지만 하여간 에코가 떠올랐는데 그건 이 책을 끌고가는 주요 에피소드, 17세기를 살았던 과학자, 천문학자, 언어학자, 철학자, 가톨릭 신부의 명함을 가지고 다니던 아나타시우스 키르허의 일생을 근간으로 하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20세기 말에도 여전히 호랑이들이 제 세상인 남아메리카의 브라질에서 바로 그 키르허를 연구하는 남자 엘레아자르 폰 보가우의 일가족, 즉 브라질 통신원 엘레아자르, 이혼소속 중에 있는 처 고생물학자이자 지질학자인 일라이니, 민속학을 공부하고 있지만 공부보단 프리섹스와 마약에 더 몰입하고 있는 철딱서니 없는 딸 모에마, 그리고 이 세 사람 주위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참여하는 등장인물들이 벌이는 20세기적 혼돈이 책의 주 내용이다.

 재미있거나 흥미를 돋을 만큼 훌륭한 책일수록 책의 내용을 소개하는데 야박한 나는, 이 책의 경우엔 아직도 책을 파는 가게가 있어서 더 스토리를 숨길 수밖에 없음을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다만 이 책을 읽는 재미 가운데 첫번째는 17세기의 현자 키르허 신부의 과학적 발견과 발명, 심지어 이집트 상형문자의 성공적 해석이 세월이 몇 백년이 지난 지금 시선으론 허황하기 짝이 없고, 게다가 그가 발견 또는 해석해낸 모든 진리가, 세상의 진리란 어느 하나 예외없이 기독교적 진리를 증명하고 있다는 아전인수로 귀결하는 거, 엉뚱하기 짝이 없는 당대의 진실이 얼마나 왜곡된 것인지 낄낄거릴 수 있는 독자의 권리를 누리는 일이다. 자신이 발견한 모든 헛된 진리를 죽을 때까지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굳게 믿으며, 죽음의 침상에서조차 자신의 영혼이 얼마나 나가는지 저울로 달아보라는 유언을 하는 위대한 신학자이자 과학자. 아, 그리고 책이 끝나는 거의 마지막에 나오는 기막힌 반전. 비록 시점을 현재로 돌려 키르허를 연구하는 엘레아자르 가족사가 하도 기가 막혀 그리 큰 충격은 주지 못하지만 17세기의 사건에 관심을 둔 독자라면 실로 어이없어 할 실소와 어처구니 없는 반전도, 사람을, 돌아가시게 한다. 그러나, 흐흐흐, 이젠 그게 뭐냐고 묻지도 못하시겠지? 절대 알려드리지 않을 테니까.

 20세기 말의 라틴 아메리카는 여전히 야만과 폭력이 창궐한 '호랑이들이 제 세상인 나라'들로 사방으로 진흙탕을 튀었고, 진흙탕 속에선 여전히 가진 자들은 더 많은 것을 가졌으며, 없는 자들은 가진 자들에게 그나마도 빼았기고 있었다. 그리고 '호랑이들이 제 세상인 나라'에 사는 인간들의 앞날엔 여전히 자욱한 안개만 뒤덮고 있었고.


 장마리 블라 드 로블레스, 이 이름을 기억해두었다. 비록 아직 번역해 나온 그의 책은 이것 말고는 없지만.... 눈에 띄었다만 봐라! 파리를 낚아채는 카멜레온처럼 낼름, 잽싸게 읽어치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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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1 밀레니엄 (뿔) 1
스티그 라르손 지음, 임호경 옮김 / 뿔(웅진) / 201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책 표지 근사하지? 근데 그림을 잘 못 그렸다. 책을 읽어보면 저렇게 등판대기에 용 문신을 한 20대 초반의 젊은 여성, 주인공이기도 한 리스베트 살란데르가 등장하지만 종이 위에 활자로 써 있기를, 오른쪽 견갑골에서 허리 쪽으로 용 문신을 새겼다고 했다. 저게 어디 오른쪽 견갑골이냔 말이지. 아 왼쪽 오른쪽 헷갈리면 옛날 어른들 말하듯 밥먹는 쪽, 아닌쪽 이렇게 구분하면 될 걸 말야. 조금 더 생각해보면, 이왕 문신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말이지만, 지금 살고 있는 곳이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의 아시아건 아메리카건 아니면 리스베트 살란데르가 살던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스웨덴이건 여염집 교육 잘 받은 아가씨가 자기 몸뚱이에 커다랗게 용 한 마리 새기고 다닐 수는 없는 걸로 미루어, 이 아가씨의 정체를 부랑집단 혹은 펑크족, 혹은 하드록 계열의 악마주의 광팬, 어쨌든지간에 사회 일반에 말 그대로 일반상식에 입각한 적응에는 계속적으로 실패해온 아가씨라고 짐작을 할 수 있고, 전적으로 그 의견은 맞는다. 리스베트의 유일한 취미는 개인용 컴퓨터를 이용해 할 수 있는 모든 정보처리 관련 놀이, 특기는 그리하여 습득할 수 있었던 세계 최고 수준의 해킹능력. 원래 진정한 천재는 어려서부터 두각을 나타내는 법이라 리스베트 역시 코흘리던 유년시절부터 자신의 주변에 완벽한 벽을 둘러치고 오직 그 속에서만 자아를 키워나가는데 그걸 우리는 사회부적응이라고 부르고 일종의 정신병 취급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스웨덴의 세계 최고 수준의 복지정책은 말한다. 그리하여 스웨덴의 선량한 정부는 이미 스무살이 넘어 완벽하게 성인이 된 리스베트에게 여전히 금치산 비슷한 명목을 붙여 그녀를 후견인의 관리하에 두는 친절을 베푸는데 리스베트가 운이 좋아 나같이 선량한 후견인을 만난다면 별 문제가 없을 뿐더러 그나마 사회에 적응하며 사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겠으나, 주변에 가끔 섞여 있지만 결코 눈에 드러나지 않는 개또라이 사이코 변태 사디스트 같은 작자한테 걸려버리면 그야말로 인생 조져버리는 첩경으로 접어들게 되는 거다. 논리적이고 사회복지적인 나라 스웨덴의 선량한 정부는 결코 금치산 사회부적응자, 쉬운 말로 하자면 미친년의 호소에 절대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 책은 사냥꾼 이야기다. 책 제목이 결코 즐겁지 아니하다.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이라니. 먼저 제목에 관해 왈가왈부를 해보자면, 여기서 말하는 남자들은 세상의 모든 남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여자를 증오하는 일부 남자들이고, 여자를 증오한다는 건 해당 여자가 해당 남자에게 이해하지 못할 사기를 쳤다든지 남자가 사는 집구석에 확 불을 싸질렀다든지 그것도 아니면 갑자기 자신의 블라우스를 순식간에 갈기갈기 찢어버리더니 냅다 파출소로 쳐들어가 저 새끼가 날 겁간하려 했어요, 새빨간 거짓말을 해서 남자로 하여금 황당하지만 빼도박도 못할 상황에 처하게 만들었다든지 해서 타당하게 여자를 증오하는 정상적인 남자를 일컫지 않는다. 그럼 왜 여자를 증오하느냐 하면, 그냥 증오하는 거다. 만일 내게 그들이 왜 여자를 증오하는지 굳이 얘기를 해보라면, 여자이기 때문에, 이 빌빌한 남자새끼들 보다 근육에서 발현하는 체력이 약해 이 빌빌한 남자새끼가 쉽게 제압할 수 있으며 제압의 과정에 이 빌빌한 남자새끼에게 야릇한 쾌감을 유발해 쾌감의 증폭을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성폭행을 할 수도 있으며, 그 후에도 완벽하게 굴복시키다가 이제 흥미가 떨어지면 기꺼이 목숨을 거두어 상대적으로 남자보다 체중이 가볍기 때문에 죽은 시신을 처리하기 쉽기 때문에, 그래서 여자를 골라 연쇄적으로 죽이는 행위를 눈꺼풀 하나 까닥하지 않고 행할 수 있는 일부 사이코 개또라이 빌빌한 새끼들이 희생의 제물인 여자를, 증오한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견해는 솔직히 말해서 내 견해가 아니라 책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빼빼마른 아가씨 리스베트 살란데르의 의견이다.

 아, 너무 나갔다. 이 이야기는 하지 말고 단지 스웨덴의 거대 그룹사를 이끄는 방예르 가문에서 40년 전에 있었던 한 여자아이의 실종 사건만 얘기하고 위에서 써 놓은 사건은 시침 뚝, 그냥 넘어갔어야 하는 건데. 지금 막 그러려고 했지만 하이고 위에 써 놓은 것이 너무 길어서 걍 놔두기로 했다. 어차피 이 책은 웅진[뿔>에서 절판을 만들었고 다신 찍을 생각이 없어보이니 진짜로 읽어보실 수 있는 분이 그리 많지 않아 좀 덜 캥기기는 한다.

 이 책은 스티그 라르손이 '밀레니엄 시리즈'로 장편소설 한 열편 가량을 구상해서 쓴 최초의 작품인데, 여기서 말한 밀레니엄이 100년 마다 한 번 씩 출현하는 그 밀레니엄인지, 아니면 이 책의 주인공 미카엘 블롬크비스트가 근무하는 잡지 출판사 밀레니엄을 가리키는지, 이 책에선 분명하지 않다. 내용으로 보면 두번째 경우인 거 같긴 하다. 근데 스티그 라르손, 이 재미난 이야기꾼이 밀레니엄 시리즈를 마구 써내려 가다가 세번째 작품을 완료하고는 어느 날 갑자기, 그때가 2004년인데 밤에 잠을 자다가 그만 심장마비로 죽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밀레니엄 시리즈는 세개의 장편소설로만 남게 되었고, 난 반드시 이 세 밀레니엄 시리즈를 다 읽고 말 것이다. 왜? 왜긴 왜겠어, 재미나니까 그렇지.

 다시 방예르 가문의 40년 전 실종사건으로 돌아오면, 물론 내 경우이지만 2권에 들어서면 40년 전에 실종된 하리예트 방예르가 적어도 어떤 상태인지는 알아챌 수 있는 것이 흔히 말하는 '옥의 티'지만 삼사백년에 걸친 방예르 가문의 온갖 오욕에 전 가족사 속의 흉물스런 흔적들을 보는 재미, 예컨데 메이드 인 스웨덴의 파시즘, 스웨덴 내에서의 나치 추종자들, 그들이 가족 내에서 행했던 정치색 등도 굉장히 흥미로울뿐더러 그거 말고도 여러가지 재미난 에피소드가 그야말로 널.려.있.다.

 아, 처음에 했던 사냥꾼들에 관한 이야기라는 거. 주로 여자들을 골라 잡아다가 갖은 변태적 방법으로 성폭행을 하고 기어이 죽여버린 다음에 시신을 유기하는 개또라이 사이코들도 사냥꾼이랄 수 있고, 또 그걸 잡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도 사냥꾼을 사냥하는 또다른 사냥(이걸 '역사냥'이라고 하자)꾼일 수 있어서 한 얘기다. 이야기가 이러니 묘사 중에는 아주 간혹 잔혹스러운 장면도 등장하는데 견디기 힘든 수준은 아니고 숱한 사냥과 역사냥을 건너면서 근본적으로 울컥, 화딱지가 나기도 하며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한다. 독자로 하여금 여러가지 감정에 빠지게 하는 작품. 우린 이런 작품을 가지고 재미나다, 라고 말한다.

 힌트 하나 더 드릴까? 위에서 말한 역사냥꾼이 누구게? 흐흐, 얼핏보면 열 두살 가량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키 작고 빼빼마른 아가씨 리스베트 살란데르를 두고 한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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