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류 - 채만식 장편소설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42
채만식 지음, 우찬제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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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시지탄. 이제야 <탁류>를 읽었음이랴. 우리나라 근대 소설에도 이만한 작품이 있었다는 걸 이리도 늦게 알게 되다니. 일찍이 <태평천하>의 골계에 무릎을 친 바 있거늘 이만저만해서 이제야 <탁류>를 읽게 되어, 이 책이 그리 재미나다고 옛 교사들께서 침을 튀신 바 적지 않아 어려서부터 읽어보려고 과장 조금 보태 십 수 번 만에 드디어 끝장을 보았는데, 아이그, 그 시절 교사들의 말씀이 지극이 타당했다는 걸 무르팍 시고 어금니 빠진 세월에 이르러서야 알아채는 인종이 아니 한심할 수 있겠는가 말이지. 아, 정말 재미있는 한국식, 이게 1937년부터 38년에 걸쳐 신문연재를 했다니까, 조선식 자연주의 소설의 진수다.
  뭐 해설엔 리얼리즘 문학이라 했더라도 그까짓 사조가 뭔 대수랴. 1902년 유럽에서 에밀 졸라가 죽고 그 넋이 조선에서 윤회하여 채만식으로 나왔던가? 아니란다. 졸라가 9월에 죽고 채만식이 6월생이니까. 하여튼 그가 조선에서 다시 태어나면 영락없이 채만식처럼 소설을 쓰지 않았을까? 군산의 쌀 시장 통에서 벌어지는 격렬한 투기와 선물 미두장 이야기는 <쟁탈전>과 <돈>에서 보이는 공매도, 공매수와 여지없이 비슷하고, 남의 돈을 빌어 한 몫 잡으려는 은행 당좌계 직원 고태수의 사기행각 역시 사카르를 연상하게 한다. 빈민들은 딸을 싸구려 유곽에다 돈 이백 원에 팔아 건어물 장사를 시작하다가 일 년 만에 말아먹고, 얼굴 예쁘고 몸매 좋은 딸을 둔 영락한 선비는 비록 조금 미심쩍기는 하지만 돈이 많아 일가를 위해 장사 밑천 대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과부댁 외아들에게 선뜻 맏딸을 시집보낸다.
  이 영락한 선비 정주사는 작품 초장부터 새파란 애송이 푼돈 투기꾼인 소위 ‘하바꾼’으로부터 멱살을 잡혀 톡톡한 망신을 당하며 작품에 등장한다. 채만식은 이 정주사, 정영배를 ‘입만 가졌지 손발이 없는 사람이라 지적하며’ 사서삼경에 신학문을 겸한 나름 당대의 인재이나 집안 가솔들의 배를 곯게 하는 ‘인간 기념물’이라 칭한다. 천연 기념물, 자연 기념물, 하는 식으로 인간 기념물이라 칭한 건데, 아무리 자왈子曰 나위를 칭할지언정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는 법은 알고 있어서 슬하에 위로 딸 둘, 아래로 아들 둘에다가 내외지간까지 모두 여섯 호구를 책임져야 했던 것. 이 중에서 맏이가 초봉이, 둘째가 계봉이고, 초봉이는 명실상부한 주인공, 계봉이는 원래 조연들이 그런 경향이 있듯 똑 부러지는 성격의 정의의 용사다.
  초장에 정주사가 일방적으로 애송이 하바꾼에게 멱살을 잡혀 스타일을 완전히 구기고 있을 바로 그때, 시간 맞춰 등장해, 싸움이라기보다 일방적 행패를 말 한 마디로 뜯어 말리는 은행 당좌계 직원이 있었으니 이름을 고태수라고 했다. 고태수는 가난한 홀어머니가 키워 오랜 세월 은행 사환으로 있다가 성실 근면함이 눈에 띄어 정식 직원으로 승차하고, 아무래도 경성의 본사 행원들 사이에선 사환 출신이라 서먹할 것이라 선처를 베푼 상사에 의하여 군산지점으로 발령이 난 인물로, 키 크고 훤칠하게 잘 생기고, 귀태나는 외모의 미남자. 경성 본사에서 오랜 세월 성실, 근면하게 뼈 빠지게 일만 하다가 군산에 내려와 눈치 볼 것 없으니 이제 본색을 드러내 하고 한 날 술과 여자, 노는 본새가 흐벅져 돈 아까운지 몰라 이미 턱에까지 빚이 꽉 차있는 인간이다.
  여기서 끝내면 그나마 어떻게 변통을 하겠으나, 한 번 놀아보니 그 맛이 별미라, 지점장의 신임이 두터운데다가 맡은 일이 당좌계여서 군산의 큰 손인 백석이란 이름의 대금업자, 농산흥업회사, 군산의 큰 중매업자인 마루나, 이 세 계좌의 인감을 모조해 소액의 가짜 수표를 발행해 해 먹은 것이 물경 3천3백 원. 얼핏 직원 봉급으로 계산해 당시 1원이 지금의 10만 원 이상의 가치라 대강 3억 3천만 원 너머로 생각하면 되겠다. 물론 재화가 적을 때니 돈의 가치는 지금 3억 3천보다 훨씬 더 컸다고 봐야 하고. 고태수 이 인간도 머리가 빈 건 아니라서, 비어? 천만의 말씀, 보통학교만 나와 사환으로 있다가 정식직원이 된 전설의 인물이니 똑똑한 편에 들어,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소액의 위조수표, 당시 말로 하면 소절수 놀음이 이제 얼마 가지 않아 들통이 날 것이고, 그럼 감옥생활 몇 년을 하지 않을 수 없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이 고태수 좀 보라. 자기는 죽어도 감옥소에는 가지 않을 것이란다. 그러면서 오늘도 기생 행화, 살구꽃의 방에 자신이 수족처럼 부리는 추한 얼굴의 꼽추 장형보와 들어 꽃놀이 갈 생각만 하고 있다. 자신은 감옥에 가느니 소절수 놀음이 들통이 날 듯, 여차하면 깨끗하게 자살을 해버릴 것이라는 말을 아예 입에 달고 다닌다. 그러면서 보는 눈이 있어 군산에서 가장 어여쁜 정초봉이와 혼인을 해 초봉과 같은 날 같은 시에 사랑의 죽음에 이를 꿈을 꾸고 있는 거였다. 그리하여 어느 날, 정주사네가 줄창 외상 쌀을 먹는 싸전이자, 자신이 하숙을 하는 한참봉 내외에게 초봉이 중매를 부탁하며, 이왕 군산시내에 소문이 났듯이 혼인만 하면 천석을 짓는 자기네 집에서 처가에 돈 천 원이나 보태 군산에서 작은 가게라도 하나 장만해주겠다고 사기 제의하기에 이른다.
  초봉이는 초봉이대로 자기 집에서 방 하나를 얻어 자취를 하는 혈혈단신 건장한 체격의 듬직하고 우직하고 하여간 사내다운 의사 지망생이자 금호병원의 의원 조수 남승재를 마음에 두고 있는 상태. 이제 내년 가을에 있을 시험만 치루면 정식 의사가 되어 적어도 금전적으로는 남부럽지 않게 될 소위 첫사랑을 잊지 못하면서도, 부모의 성화와 혼인만 한다면 천 원이라는 생각도 할 수 없는 돈이 친정의 복지를 위하여 굴러들어온다는 한 마디에 그만 굴복해 사기꾼 고태수와의 결혼에 동의하고 만다. 근데 이 고태수란 작자를 보라. 결혼을 열흘 남기고 여태 다니던 병원 말고 새로이 금호병원을 찾아 남승재에게 자기 환부를 보여주는 바, 고름이 줄줄 흐르는 생식기. 임질이 만성이 되어 컨디션이 조금이라도 좋지 않으면 곧바로 통증과 염증이 동시 상영되는 지경이었다. 초봉과의 순진한 첫사랑의 추억을 나눈 남승재의 복장이 어떻겠는가. 초봉을 위해 태수의 임질을 정성껏 치료해주며 한 마디를 덧붙인다. 잘 조리만 하면 당장은 염증과 통증은 사라지겠지만 틀림없이 전염이 될 터이니 차후라도 꼭 두 분이 함께 치료를 잘 받으셔야 합니다. 조만간 자살을 꿈꾸는 고태수가 그까짓 것을 생각이라도 할까, 어딜.
  스토리는 이제 반의반도 오지 않았다. 더 이상은 안 알려드린다. 진짜 재미있으니 직접 읽어보시라. 이야기는 이렇게 자연주의적 난장판으로 질주하기 시작하지만, 역시 채만식의 진가는 해학의 문장에 있다.
  위에 써놓은 이야기를 보시라. 아예 처음부터 가난과 범죄와 질투와 비극을 품고 있지 않은가. 말 그대로 자연주의적, 졸라가 즐겨 다루던 그림하고 굉장히 비슷하다. 그러나 졸라보다 훨씬 재미있다. 채만식은 크레모어 또는 지뢰처럼 작품 곳곳에 해학과 익살과 골계를 숨겨놓았다. 당장 사람 하나가 죽어나갈 것 같아도 틈만 있으면 그걸 그대로 지나가지 않는다. 이제 책이 나오고 8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 언어 또한 격변의 세월을 겪어 젊은 독자들이 숨어 있는 골계를 찾지 못하는 일이 수다하겠지만 그리하여도 꼼꼼하게 사전도 찾아가면서 읽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탁류>는 길이 보전해야 하는 우리나라 근대 문학의 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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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6-16 09: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탁류> 정말 재미있죠.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국어/문학 교육의 폐해를 톡톡히 본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렇게 재미난 작품을 고등학교 때는 입시 위주로 접근하게 하니 사람들 머릿속에 <탁류>를 비롯해 채만식 작품들이 재미 없는 것으로 인식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저도 고등학교 때는 대충 문제집 지문으로만 접하고 나중에 사회에 나와 어쩌다 보니 국어 과외 선생질하면서 학생 가르치려면 읽어야지...하고 읽다가 오잉? 이렇게 재미난 작품이! 하면서 완전 빠져들어 읽었답니다.

암튼 채만식 작품은 정말 재미나고 해학과 풍자 철철... 많은 분들이 채만식 제대로 읽기 이런 거 도전하면 좋겠어요. ㅎㅎㅎ

Falstaff 2020-06-16 09:54   좋아요 1 | URL
옙. 저도 젊기 전 어려서 여러번 읽으려고 했다가 말았는데 암만해도 이유가요, 1) 우리나라 근대 문학을 우습게 아는 시건방짐, 2) 수업시간에 작가, 스토리 같은 거 다 시험 공부 목적으로 외워서 이미 읽어본 것 같은 착각, 아니었나 싶어요.
그나마 이제라도 읽어보고 재미를 아니 다행입니다.
맞아요, 채만식 다시 읽기, 좋은 프로젝트입니닷! ㅋㅋㅋ

2020-06-16 16: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6-16 17: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통자 2021-05-18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보고, 개화기, 일제 강점기 배경으로 한 시대물에 관심이 생겨 뒤지다가 아주 재밌는 리뷰를 발견했습니다.^^ 조선희의 <세 여자>에 이어 <탁류>, 염상섭의 <삼대>, 그리고 이민진의 <파친코>가 대기 중입니다.

채만식 다시 읽기, 근대문학 다시 읽기 모임 아주 재밌을 거 같습니다.

Falstaff 2021-05-18 14:15   좋아요 0 | URL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천변풍경 - 박태원 장편소설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10
박태원 지음, 장수익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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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이상한 작가다. 오랜 세월 동안 금지된 이름의 작가가 쓴 금서 <천변풍경>을 읽어보니 더욱 그렇다. 어떻게 이런 글을 쓴 사람이 자진해서 남조선노동당에 들어가 월북을 했을까? 박태원. 광교쯤으로 보이는 청계천 상류에 사는 도시 소시민들을 섬세하고도 따뜻하게, 굳이 경향으로 치면 리얼리즘 작가가, 공산주의 독재 치하에서 정말 자기 뜻대로 작품을 만들 수 있을 줄 알았을까? 1950년이면 이미 소련에선 레닌을 거쳐 스탈린이 철권을 휘두르며 거의 모든 예술가들을 질식시키고 있었을 당시였던 것을. 다른 건 아직 안 읽어보고, 단지 <천변풍경> 하나만 두고 이야기하자면 박태원은 아무 생각 없이 옆에서 가자는 대로 그냥 가다보니 어, 어 하는 동안 자꾸 북쪽으로 가고 있었던 거 같다.
  더구나 박태원은 193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 노골적으로 친일 문학에 힘을 써, 내신일체 사상의 고양에 혁혁한 공훈을 세운 바 있거늘, 어찌 제 발로 북쪽을 선택했을 수 있었을지 못내 궁금하다. 무소의 뿔처럼? 이이의 외손자가 누군지 아시지? 제 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감독상을 탄 봉준호. 물론 봉준호는 외할아버지 얼굴도 모르니 그가 박태원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꿈에도 생각을 안 한다. 그냥 그렇다는 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태원의 창작 유전자 일부가 봉준호에게 조금은 이어졌다는 것이 생물학적 진실이긴 하다는 거.
  근데 어째 박태원에게 리얼리즘 작가라는 딱지를 붙이기가 좀 어색하다. 아직까지 읽어보지 않아 우리나라 옛 작가들에게 미안한바 작지 않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이 제목은 최인훈의 것으로 읽어서 상당히 오랜 동안 <소설가 구보....>는 그의 작품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몇 년 후 세월이 좋아져 <소설가 구보....>가 원래는 자진해서 월북한 박태원의 중편소설이고 최인훈이 나중에 박태원을 본받아, 요새 쓰는 말로 패러디한 것임을 알게 됐으나 그렇다고 새삼스레 다시 찾아지지는 않던 거였다(조만간에 꼭 읽어보리). 하여간 박태원의 구보는 읽어보지 않았음에도 그것이 우리나라 모더니즘 문학의 한 기념비라고 하도 많이 들어서, 모더니스트가 월북을 해? 보나마나 가자마자 숙청당했겠군, 했더랬다. 뭐 그런데 잠깐 고생을 하고 난 다음 죽을 때까지 장편 역사소설 <갑오농민전쟁>을 집필했다고 하니 소설가로 천수를 누렸던 모양이다.
  경성의 광교 부근. 북악에서 흐른 맑은 물이 청계천으로 흘러드는 곳엔 동네 아낙들이 빨래를 할 수 있게 샘터를 만들어놓고 샘터 주인이 한 번 빨래하는데 5전씩을 받아 호구를 한다. 샘터를 제외하고 유유히 흐르는 천에는 여지없이 생활하수 같은 것이 둥둥 떠다녀 발 한 짝이라도 집어넣으면 곧바로 썩어질 것 같다. 샘터에 동네 가겟집의 안집 살이, 드난살이 하는 아낙네 십 수 명이 입춘 지났다고 좀 덜 매운 개천 물에 빨래들을 척척 휘두르며 동네 사람들 사는 이야기를 주절이, 주절이 떠들어대는 것으로 이 재미있는 옴니버스 식 장편소설의 막을 연다.
  기생 취옥이는 원래 이름이 언년인데, 언년이 엄마가 딸을 권번에 보내 본격적으로 기생이 되니 이젠 딸 덕에 호사라, 같은 동네 최고로 어여쁜 이쁜이 엄마는 왜 그리 고운 이쁜이를 권번에 보내지 않는지 아무리 이야기를 해줘도 도통 씨알이 먹히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취옥이와 같은 권번에 있는 명월이는 이상하게 고운 외모에도 불구하고 한 달에 열 시간도 못 불려 다니지만 그래도 종로에 있는 은방 주인이 홀랑 반해서 해달라고 하는 건 웬만하면 다 해주니 기생팔자보다 더 좋은 게 세상에 몇이나 되느냐는 말이지.
  그러나 이쁜이 엄마 입장에서는 천만의 말씀. 열세 해 전에 남편 죽고 소녀과부가 되어 그거 하나 바라보고 키우는 재미로 살았는데 어딜 권번이 말이나 되는가. 이제 전매국 의주통 공장에 다니는 강석주라고, 키는 작지만 귀염성스럽게 잘 생긴 청년과 식을 올려준다. 신부화장을 한 이쁜이를 보고, 감히 이쁜이를 며느리로 삼기엔 자기 아들과 살림이 턱없이 척진다는 것을 아는 점룡이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옛적에 당명왕을 녹여낸 양귀비보다 못하지 않다.”
  했으니 독자들은 이쁜이의 어여쁨이 어떤 수준인지 짐작이나 하시라.
  그러나 그러면 뭐해. 쥐뿔도 없는 서방 아이는 옛적부터 조선의 고관대작은 일처양첩, 본처 하나에 첩을 둘은 두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1930년대 전매국의 공원 신분으로 캐시미어 외투에 양복을 쪽 빼입고 구리개니 종로니에 있는 술집, 카페, 그것도 모자라 새문교회 동생까지 반반한 아가씨 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는 반면, 취미생활로 광교 근동에 가장 고운 자태를 자랑했던 맘씨 좋은 어린 마누라 두드려 패기로 정해버린 것을. 여기다 시어머니 시집살이가 가히 막장 수준이라, 원래 성질머리도 더러운데다가 자기 남편, 그러니까 이쁜이의 시아버지가 며느리 쳐다보는 눈길이 또 묘하다고 근거 없는 질투까지 섞여 며느리한테 해대는 바람에 세상에 그리 매운 고초당초가 있을까 싶게 시집살이를 사는 것을.
  천변에 앉아 빨래 주물러대는 여인들을 고용해 사는, 소위 방귀 깨나 뀌는 인물들로는, 첫째가 한약국집을 들 수 있을 터. 일찍이 결혼해 남편에게 두드려 맞기를 밥 먹기보다 더 자주 당하다가 남편은 그것도 모자라 시앗을 보고, 하나 있는 아들도 일찌감치 지긋지긋한 삶을 접어 혼자가 된 후 그길로 내빼 이 집의 안집 살이, 즉 대표 하녀로 취직해 죽기까지 함께 하기로 작정을 한 귀돌어멈이 고단한 머리를 뉘는 곳이다. 약국집 주인 내외는 여간만 하지 않으면 그냥 그렇게 안고 지내는 성질이지만, 새로 살러 들어온 만돌이네는 도무지 참아주지 못했다. 만돌 어멈은 사람이 그리 넉넉하고 수더분하고 얌전하고 일 하나 맵시 있게 야물딱진데, 아 그만 만돌 어멈의 부탁으로 함께 살러 들어온 만돌 아범이 술만 마시면 곧바로 유전자 변이가 일어나 멍멍이가 되는 것은 봐주지를 못해 그만 내치고 말았다.
  또 먼 친척의 부탁으로, 사람의 새끼는 낳아서 서울로 보내랬다고 동네에선 똑똑하다고 소문 나 경기도 가평에서 애꾸 아버지 손에 이끌려 한약국의 사환으로 취직한 창수는 서울살이 불과 몇 달 만에 아주 발랑 까진 도시내기가 되어버려 약국 주인 말씀 알기를 개떡으로 여겨 주인 영감 입에서 ‘당장 나가’라는 하명이 나오기 전에 자기 발로 때려치우고 잠깐 귀향했다가 다시 돌아와 종로의 당구장에 게임 보이로 활약한다. 그래도 약국의 노부부가 자식농사를 잘 짓고 마음도 넉넉하여 동경의 유명 사립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아들이 결혼하기도 전에 일 년 동안 이화 나온 지금의 며느리와 자유연애를 하는 것에도 아무런 까탈도 하지 않았으며, 아들도 부모를 닮아서 그런지 결혼하고 삼 년이 지난 지금까지 하루에 꼭 한 번씩 아내와 어깨를 나란히 천변을 산보하고는 하는 거였다.
  또 한 명의 문제적 인간이 ‘민주사’다. 돈푼깨나 있는 양반으로 아내와 아들아이 하나와 편안한 가정을 꾸렸음에도 관철동에 집을 하나 얻어 첩을 두었으니 그건 당시만 해도 이 정도는 해야 그래도 장안에서 행세한다고 믿었던 까닭이었다. 이 양반이 올해 천명을 아는 나이, 첩 안성댁은 딱 절반인 스물다섯. 그래 머리털에 희끗희끗, 흰 털이 자꾸 느는 것이 불만이긴 하나 세상에 어느 장사가 있어서 세월을 거스르나. 이 양반의 진짜 문제는, 국회의원이 아니고 당시 식민지 치하라서 경성부, 부회의원이 돼보고자 출마했다가 수천원만 쓰고 장렬하게 준우승을 해서가 아니라, 관철동 안성댁이 일편단심 늙은 자기만 보고 있지는 않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안성댁이 자기를 공깃돌 놀리듯 손 안에 쥐고 흔드는 걸 도무지 인식하지 못한다는데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대낮에 관철동 집에 대문을 열고, 중문까지 열고 쑥 들어가 보니, 안성댁과 대학의 교복을 입은 청년 하나가 마루에서 전축을 틀어놓은 채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옆으로 자빠져 있는 거였다. 비록 옷고름 하나, 단추 하나, 양말 한 짝 흐트러지지는 않았지만 남녀가 유별한데 훤한 대낮에 눈을 맞춘 상태에서 연놈이 자빠져 있다 함은 세상에서 둘 사이에 해볼 것은 이미 다 해봤다는 증거 아닌가 싶은데도, 안성댁이 동향사람으로 어려서부터 너나들이 했던 터라 서울에서 우연히 만나 초대했다고 방실방실 웃는 얼굴로 말하는 걸, 1930년대엔 너무나도 흔했던 방식으로 옆구리나 한 대 쥐어박지 못하고 아무소리도 못 한 채 그냥 발길을 돌려 집을 나선 순간, 청요리 배달 소년이 커다란 음식 상자를 들고 인사를 꾸벅 하고는 자신이 방금 나온 집으로 쏙 들어가는 것까지 목격하고도, 그냥 집으로 왔다는 거 아닌가. 이런 인간을 우리는 흔히들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라고 한다. 원래 이리 나사가 좀 빠진 사람이 행복할 확률이 더 높으니 뭐라 하기도 좀 그렇다.
  이외에도 무수한 사람들이 등장해 다 소개하려면 내일 아침 해가 뜰 때야 마칠 수 있을 터이니 이쯤에서 그만두고, 딱 한 명,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를 소개하고 독후감을 끝내겠다.
  청계천변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사건의 목격자는 이발소에서 사환으로 일하는 소년 재봉이의 눈을 통해 언급이 되는데, 이발소에서 천 너머로 카페가 있으니 옥호를 ‘평화’라고 했다. 평화 카페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급은 하나꼬. 얼굴도 예쁘고 나긋나긋하고, 알고 보면 마음씨도 옹골찬데다가 매운 마음도 있는 괜찮은 ‘젊은’과 ‘어린’ 사이의 아가씨. 그러나 소개하고자 하는 사람이 하나꼬가 아니라 무뚝뚝하고, 못생기고, 늙은 여급인 ‘기미꼬’다. 이런 여급이 아직도 평화 카페에 있을 수 있는 건, 다른 건 몰라도 술 하나 장하게 마셔 이이가 앉은 테이블에서는 남자들이 여럿 마신 술보다 기미코가 목구멍으로 부은 술의 양이 더 많아 매상 하나는 확실하게 보장해주니, 주인 입장에선 감히 기미코를 외모가 안 된다고 함부로 내칠 수 없는 일. 거기에다가 이를테면 웬만한 불량한 남자는 말도 못 붙일 만큼 협기俠氣도 대단한데다 천성이, 이거 정말인데, 천사다, 천사. 소설 속이니까 이런 사람을 볼 수 있지 실제의 삶에서는 도무지 찾을 도리가 없는 의리의 여걸.
  책의 주인공은 없다. 청계천변에 사는 무수한 소시민과 소자본가와 광교 다리 밑 깍쟁이들까지 눈에 띄는 모두가 주인공이다. 이들이 사는 모습을 구태여 힘주어 찬양하거나 비하하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조금쯤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는 박태원의 시선. 글쎄, 앞에서 말했듯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읽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박태원은 이 작품을 써서 모더니즘과 작별을 고하려 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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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0-06-15 14: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박찬순이라는 작가의 <암스테르담 완행열차>라는 소설모음집에 보면 ˝성북동 230번지˝라는 단편이 들어있는데 이곳이 예전에 박태원이 살던 곳 주소래요. 박찬순 소설가가 박태원에 대한 오마주로 쓰게 된 소설이라고 하더군요.
박태원이 다른 소설가의 오마주 대상이 되는 매력이 무엇일까요.
저도 그때 박태원의 소설을 찾아읽어보는 대신 작가의 이력만 훑어보다가 봉준호 감독과의 관계를 알게 되는데서 그쳤지요.
구보는 박태원의 호. 이번 기회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부터 읽어봐야겠어요.

Falstaff 2020-06-15 14:57   좋아요 1 | URL
아, 그렇군요.
저도 박찬순을 검색해봐야겠습니다.
후세 작가들은 주로 그의 초기작, 모더니즘을 지향하던 작품들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더라고요.
우리나라 근대 소설 가운데 괜찮은 작품이 생각보다 제법 있더라고요. 그간 건방지게 우리 근대 소설을 멀리 했던 것을 후회하고 있는 요즘입니다.
 
인간 문제 - 강경애 장편소설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27
강경애 지음, 최원식 책임 편집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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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창시절에 이름을 듣지 못했던 작가. 아마 들었어도 강O애, 이런 식이어서 기억도 나지 않고 아무리 외워봤자 시험문제로 나오지 않던 카프 작가여서 그랬던 거 같다. 그런데 저번에 읽은 이기영도 그렇고 강경애도 그렇고 꽤 괜찮은데 이들이 쓴 것을 몇 십 년 동안 학교에서 제목조차 가르치지 않았다니, 세상에 이런 손실이 있나 그래. <인간문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이라고 한다. 리얼리즘이면 리얼리즘이지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은 또 뭐야? 오스트로프스키나 고리키 같은 부류의 작품이라는 뜻인가? 굳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까탈을 잡지는 않겠다.
  강경애. 1906년 황해도 송화 태생. 평양숭의여고 입학, 2년 후 동맹휴학 건으로 퇴학. 이때가 1923년인데 개성 출생이지만 황해도 장연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나중에 스스로 ‘국보’, ‘한국의 3대 천재’라 칭하는 양주동과 연애사건을 벌이다 결국 찢어진다. 인생이 다 그렇지 뭐. 양복 주머니에 땅콩을 넣고 강의실에 들어가 땅콩을 까먹으며 강의하는 습관을 들였던 양주동이 세 살 위인데, 아시다시피 이이가 젊은 시절에 계급(프로)문학과 민족문학의 절충을 주장했던 적이 있다. 이점을 주목하시라.
  강경애는 일본 유학을 하지는 않았지만 평양 최고의 여성교육기관인 숭의여학교와 당시 식민지 치하 지사들의 따님들이 주로 다니던 동덕여고(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쳤으니 지역 유지의 따님이었을 것. 그럼에도 주로 간도를 무대로 공산주의 운동을 펼치고, 심지어 진위는 모르겠으나 김좌진 장군 암살의 배후에 있었다는 의혹도 있는 강경애가 스물아홉 살에 쓴 <인간문제>에 근본적으로 탈출구, 안전한 배후가 있는 지식인 출신 운동가의 전향문제를 아주 제대로 비틀어버린다. 아니겠지만, 혹시 프로와 민족의 절충을 주장함으로써 퇴로를 확보한 양주동을 그때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던 건 아닌지 궁금하다, 뭐 아니겠지만.

  1931년에 영국 여자가 쓴 <파도>를 읽은 바로 뒤에 1934년에 한국 여자가 쓴 <인간문제>를 읽으니 속이 다 시원하다. 스토리와 표현과 주장하는 바를 쓴 글자들이 눈에 들어온 순간 즉각적으로 이해, 흡수, 소화까지 되어버리는데다 내용 자체가 펄떡펄떡 뛰는 날것이라 더 그렇게 느끼는 것 같다. 우리나라 프로 문학의 대표선수가 쓴 작품이어서 당연히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그리고 인텔리겐치아 쁘띠 부르주아가 등장한다. 그리고 프로 문학의 공식에 의하여 부르주아와 인텔리겐치아는 완전한 악인들이거나 결국엔 자신의 신념을 버리고 편안한 길을 찾아 간다. 그렇다고 러시아 운동권 작품처럼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공고한 신념, 죽음을 초월하는 불사의 운동성까지는 보여주지 않아 좀 더 리얼하다.
  <인간문제>는 1934년 동아일보에 약 다섯 달 동안 연재했던 작품이다. 그래 분량도 많지 않고, 시퍼렇게 눈을 도사리고 있는 일제의 검열도 피해야 했으니 완전한 사회주의 문학이 되기 전에 브레이크를 걸어야 했고, 저절로 작품 속 사건의 속도가 빠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독자들에게는 읽는 맛을 주기도 하지만 저자 입장에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앞뒤 짜임새 있는 구색을 맞춰 전개하기가 쉽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랬던 것처럼 읽힌다.
  황해도 모처에 있는 가상의 ‘용연동네’에서 작품은 시작한다. 먼저 원소(怨沼)라고 이름이 붙은 못에 관한 전설을 소개한다.
  예전에 원소가 생기기 전에 장자 첨지가 살았는데 곳간에 온갖 곡식과 고기와 술이 넘쳐났단다. 근동엔 몇 해에 걸친 흉년이 들어 온통 굶주림에 아이들 우는 소리만 희미했음에도 혹시나 없는 것들이 몰려올까 두려워 문을 꼭꼭 닫고 밥을 지어먹고 짐승을 잡아먹었단다. 배를 곯던 백성들은 어쩔 수 없어 패를 지어 장자 첨지 집을 습격해서 쌀과 살진 짐승들을 끌어냈단다. 그랬더니 첨지가 관가에 이를 발고하여 근방 농민들을 전부 잡아다가 혹은 죽이고 혹은 때려 불구를 만들고 나머지는 모두 멀리 쫓아냈단다. 그래 이제 남은 동네의 노인들과 어린 것들이 첨지네 마당에 몰려들어 울고, 울고 또 울어서, 눈물이 모여 못이 생기니 원한의 못이라 원소(怨沼)라 했단다.
  원소를 낀 용연동네에 전설 속의 장자 첨지를 빼닮은 정덕호라는 지주가 살고, 슬하에 오직 딸 하나를 두어 이름을 옥점이라 했다. 옥점이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다 고향으로 내려오는 길에 학교 교사의 아들로 몽금포로 해수욕을 겸한 요양을 떠난 신철을 우연히 만나 집에 데려온다. 시골에서 젊은 아가씨가 사내를 데려왔으니 당연히 서로 내약內約을 한 사이로 이해한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신철이 옥점을 보니 그저 하루 데리고 놀만은 하지만 평생을 두고 반려로 삼기엔 부잣집 외동딸이 그랬듯 세상에 아둔패기에다 천하 게으름뱅이라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 수밖에.
  동네엔 어여쁜 딸 ‘선비’와 함께 사는 과부댁이 있었는데 선비가 열다섯 살 때 같은 동네 소작도 떼인 빈농이자 행실 나쁘다고 소문난 또 다른 과부의 아들 ‘첫째’도 있었다. 서로 어려서 그랬는지 첫째는 바구니 가득 싱아를 따서 담고 가는 선비를 쫓아가 싱아 한 줌을 빼앗아 먹은 적이 있었다. 근데 둘은 몰랐을 걸? 이 추억이 그들의 남은 생애를 끈질기게 쫓아다니게 될지. 이때부터 삼 년이 흐른 뒤에 그만 선비의 천사 같은 어머니가 폐를 앓다 모진 목숨을 버리고 정덕호네 몸종으로 들어가 갖은 고생을 한다. 첫째 역시 삶은 언제나 힘든 것이라 힘도 좋고 농사도 잘 지음에도 불구하고 덕호로부터 소작을 떼이고, 깊은 겨울을 날 수 없어 동네 없는 사람의 부엌을 털어 쌀을 훔쳐내다가 도무지 안 되겠어서 도시로 도망치고 만다.
  그럼 그림이 그려지시지? 학대와 착취를 피할 수 없는 어여쁜 하녀와, 버릇없는 주인집 딸이 혼자만 사랑해마지않는 대학생, 어려서 추억을 간직한 시골 총각이 도시로 도망. 그러나 여기까지가 아니다. 잘 생긴 대학생은 사회주의 사상에 빠져 가출 후 소위 현장운동에 헌신하고, 와중에 서로 알아보지는 못하지만 첫째와 한 패를 이룬다. 여기에 아들을 낳아주기 위해 정덕호의 씨받이 겸 작은댁으로 들어갔던 간난이가 나중에 동네에서 도망한 선비와 역시 동패를 만들어 급속하게 사회주의 사상을 주입하기에 이르고, 이의 실천에까지 가담한다.
  이렇게 대강의 줄기를 그려보니 <인간문제>의 참맛을 느끼기에는 너무 부족하다. 이젠 더 이상 새롭지 않은 스토리보다 강경애가 그려놓은 강경한 참상의 실제 모습. 그것이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을 수도 있다. 모든 것은 가난과 배고픔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가난과 배고픔에서 시작하는 것이야말로 유일한 진실인 현실. 가난하면 몸이라도 팔아야 하고, 싸움과 도둑질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 1930년대였다. 그것을 적나라하게, 아무 거리낌 없이 그대로 그려내는 강경애의 철필 맛은, 직접 읽어봐야 알 수 있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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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 기획 29주년 기념 특별 한정판 버지니아 울프 전집 2
버지니아 울프 지음, 박희진 옮김 / 솔출판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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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수준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연설문 모음 <자기만의 방>을 제외한 버지니아 울프를 읽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봐야 <등대로>와 <델러웨이 부인>을 읽어봤을 뿐이지만. 울프가 작품 속에 작가의 십팔번인 ‘의식의 흐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들 하는데, 의식의 흐름은 글을 쓰는 한 방편, 방식, 형식, 기교일 뿐이라, ‘의식의 흐름’이 책 읽기에 더욱 재미를 줄지언정 글이 어려워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댈러웨이 부인>에서 눈에 띄는 것은 의식의 흐름이 아니라 딜레탕트 주제에 이렇게 얘기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다중 관찰자 시점’을 사용했던 건 아닌가 싶었다. 울프는 <댈러웨이 부인>을 출간하고 6년이 흐른 1931년에 이 작품 <파도>를 간행하는데, 6년의 세월동안 위에서 말한 ‘다중 관찰자 시점’이 ‘다중 화자 시점’으로 확 진화해버린다.
  책을 열고 모두 아홉 개의 섹션 가운데 첫 번째 섹션에 들어간 순간 나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전주prelude는 이렇게 시작한다.
  “태양은 아직 떠오르지 않았다.”
  다음에 태양이 바다 위에 여명을 비추기 시작하고 그래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드러나고 파도가 육지로 끊임없이 밀려와 소멸하는 것이 보인다. 이어서 본격적으로 첫 번째 섹션으로 접어드는데, 모두 여섯 명의 소년 소녀들이 뚜렷한 공통의 화제 없이 발언하기 시작한다.
  수잔, 로우다, 지니, 이렇게 소녀 세 명과, 버나드, 네빌, 루이스, 세 소년들.
  여섯 명의 아이들이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따옴표 안의 대사로만 이루어진 섹션을 읽고, 일단 두 손 들었다. 도무지 읽을 수 없다. 여간해서 쓰지 않는 최후의 수법, 책 뒤편에 실린 역자 해설을 먼저 조금 읽기로 했다. 서울대 영문과 명예교수인 역자 박희진은 <파도 Waves>가 버지니아 울프의 가장 현대적인 실험소설이며, 세계의 많은 울프 전문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울프의 작품으로 꼽는다는 것을 충분히 설명한 다음에, 책을 읽는 법을 알려준다. 분류 편의상 소설로 구분할 뿐, 작가 자신도 나중에는 “희곡-시”라 표현했다고 한다. 구성은 모두 아홉 개의 섹션으로 되어 있으며 섹션 사이의 간주interlude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산문시로 되어 있고 태양의 위치에 따라 유년기부터 노년기까지를 상징하고 있다고 한다.
  해설을 읽은 다음 책을 여니 이제는 오히려 재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모두 여섯 명의 화자가 등장해 오직 대사로만 자신과 자신의 다섯 친구들, 그리고 마지막 섹션까지 중요한 인물로 이야기하는 퍼서벌Percival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이야기한다. 물론 각 화자의 출신, 교육, 직업, 사랑 등도 간략하나마 소개되기도 하고. 역자 박희진에 의하면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퍼서벌이라고 한다. 퍼서벌, 이름만 가지고도 충분히 대단하다. <아서 왕의 전설>에서 가장 으뜸가는 기사이며 이름을 파르지팔Parsifal로 바꾸어 바그너의 오페라 주인공으로 등장해 성창과 성배를 찾아오는 인물이다. 작품 속에서도 남자들이 학교에 입학하는 두 번째 섹션에서 처음 등장해 대학을 졸업하고 입대해 인도로 가서 낙마사고가 생겨 스물다섯에 죽어버리는 캐릭터이지만 여섯 명의 친구들 모두에게 많은 면의 탁월성 때문에 숭배를 받는 인물이다. 그러나 솔직히 나는 왜 퍼시벌이 그토록 숭배를 받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문화 차이일 수도 있고, 여성 작가와의 젠더 차이일 수도 있을 터이고, 백 년 전 사람들과 세대 차이일 수도 있을 터이다. 아무래도 특별한 존재가 작품 속에서 필요해서 이에 타당한 이름을 가져다 붙인 거 같다. 에이, 아무려면 어떠랴.
  스토리? 특별한 거 없다. 굳이 몇 가지를 이야기한다면, 버나드가 가장 중요한 등장인물로 마지막 아홉 번째 가장 긴 섹션에서 온통 자신의 입장에서 등장인물 모두와 퍼서벌의 유년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고 급기야 죽음이 오기까지 한 시절을 정리하고, 마치 파도처럼 스러지지만 계속해서 같은 파동이 뒤를 이어 오는 존재의 연속성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 표지부터 본문까지가 312쪽에 불과한데 중요한 등장인물이 여섯 명이다. 그러니 아무리 간략하게 쓴다고 해도 여섯 명 모두의 인생을 개연성 있는 스토리로 만들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각자가 화자가 되어 대사로 자신을 설명함으로써 삶의 모든 스토리 가운데 친구들과 관련된 것만 이야기할 수 있었을 것이라 저 위에 ‘다중 화자 시점’이라 말도 안 되는 정의를 내렸다.
  어느 책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파도>가 소위 ‘위대한 책’이라 말하는 것을 보고 골라 있었다. 이 독후감을 읽는 분께서 혹시 이 책에 관심이 있으시면, 당신 역시 큰 <파도>에 휩싸일 수 있을 것임을 단단히 각오하시어, 혹시 모르니, 공기 호흡기 하나쯤 장만하시면 좋을 듯하다.

 



* 질문.


  "난세스"가 어떤 뜻인지 아시는 분 계시면 한 수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솔 출판사 포스트에 제가 질문을 하기를,


 "버지니아 울프 전집 2, <파도> 298쪽 첫 줄에 '시와 난세스를 한데 섞으면....', 이어서 6~7 줄에도 '운율과 허밍이, 난세스와 시가 멈춰버렸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저 앞쪽에도 한 번 '난세스'란 단어가 나오는데 그냥 '난센스'의 오타겠거니 하고 넘어갔었습니다만, 아닌 거 같더군요. 근데 사전에도, 검색을 해봐도 '난세스'가 무엇을 뜻하는지 나오지 않습니다.
첫줄의 '난세스'는 이 책의 키워드 가운데 하나인 '오너라, 오너라 죽음이여'와 긴밀한 연관이 되어 있어서 더욱 궁금합니다. '난세스'가 어떤 의미인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도움을 청합니다."


 아직 도움이 오지 않았습니다. 하긴, 궁금한 것마다 잽싸게 답변이 온다면 세상이 얼마나 지루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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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11 11: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6-11 1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6-11 1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6-11 1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황금모자 2020-06-11 11: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어 원문에 nonsense로 되어 있습니다. 오타 맞습니다.

Falstaff 2020-06-11 11:31   좋아요 0 | URL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알라딘은 신기한 곳이예요. 출판사에선 아직 한 마디 답변이 없는데, 알라딘은 거의 즉시 말씀을 해주시니 말입니다!

꼬마요정 2020-06-11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느낌일 것 같아요. 친구 서 너명이 앉아서 이야기 할 때요, 각자 다른 이야기 하는데 묘하게 다 연결되는...^^

마지막 줄 말씀... 탁 와 닿아요. 세상이 지루하지 않은 건 원하는 걸 얼른 얻지 못하기 때문이겠죠 ㅎㅎ

Falstaff 2020-06-11 15:47   좋아요 1 | URL
아, 이거 읽다고 뇌가 막 섞이는 느낌이 자주 들었습니다. 묘하게 연결될 거 같은데 각 섹션이 시간 차이가 크고 독백이 자기들 마음대로라 쉽지 않았던 겁니다. ㅜㅜ
ㅋㅋㅋ 다 인생이 그렇지요? 다행입니다. 저만 그런 것이 아니라서요. ^^
 
모란이 피기까지는 시인생각 한국대표 명시선 100
김영랑 지음 / 시인생각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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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랑 김윤식, 하면 떠오르는 시가 표제작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다. 사진으로 보면 참 강건해 보이고, 실제로 어려서 강진의 만세운동을 준비하다 검거되어 대구까지 이송돼 짧게나마 옥고를 치루기도 했으며, 일본 유학 후에 중앙에 진출하는 대신 강진에 칩거해 시를 쓰고 음악을 들을 뿐 이름자를 왜식으로 바꾸지도 않고 왜의 신사에도 참배 한 번 하지 않은 채 그 시절을 버텨냈으니 덩치 못지않게 마음도 참 옹골졌을 듯하다. 이런 이가 <모란이....> 속에서 사용한 시어를 보면 에둘러 말하지도 않고 곧바로 설움, 서운, 섭섭, 울음, 슬픔 등의 단어를 그대로 쓰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여차하면 유치나 신파로 빠져들 위험이 있는 이런 단어들이 비탄이나 통곡의 벽에 막히지 않고 다시 새로운 희망으로 향하고 있는 점이다. 읽어보자.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전문)


  그렇지 않은가. 여차하면 유치찬란할 수 있는 시어들이 마지막 ‘기다림’의 출구를 통해 가볍게 신파에서 벗어나고 있다. 물론 지금 시대에 이런 시를 쓸 필요도 없고 쓸 수도 없지만, 아직도 이 시를 읽는 일은 너무도 충분하게 유효하다. 작은 아이에게 이 시를 읽어보라니까 어떻게 오월 어느 날이 무더울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거야 음력 오월이니까 그렇지. 대략 하지부터 한 달 사이에 모란이 툭 떨어져 꽃잎이 시들고 자취마저 없어졌단다. 그러자 이제 시인의 남은 한 해는 극성의 여름과 가을, 겨울 모두 사라지고 오직 다시 모란이 필 내년의 봄을 기다린다니, 영랑의 지사적 생활을 기억하는 이들은 ‘봄’을 조국의 해방으로 여겨도 나쁘지 않겠다. ‘찬란한 슬픔의 봄’을 나는 그냥 시인 개인의 ‘슬픔의 봄’으로 읽는 것을 양해해주기만 바랄 뿐이다. 세상에 슬픔이 없는 사람은 없다. 다만 그것을 슬픔이라 말하는 사람이 드물어 그 가운데 몇 명을 우리는 ‘시인’이라 부르는 것이 아닐까?
  물론 대표시가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라는데 의견이 없으나, 나는 아무래도 영랑의 시, 하면 그이 특유의 짧은 시편들, 제목도 없이 그저 번호만 죽 늘어놓은 시들이 최고라고 주장하는 쪽이다. 이 시집에서는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이라 제목을 두었으나 사실 이 시는 제목이 없거나 <2>라는 번호만 달려있는 시다. 옛 시를 읽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는 당시 언어로 낼 수 있는 낱말 특유의 향을 흠향해보는 것인데 출판사 시인생각의 한국대표명시선 100 시리즈는 약간 과하게 시를 현대어로 고쳐서 조금 불만이다. 모바일로 독후감을 읽으실 분은 감상하기 불편하겠지만 그래 원래 시와 대조해 비교해보겠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 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전문)



  2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가치

  풀 아래 우슴 짓는 샘물가치

  내 마음 고요히 고흔 봄 길 우에

  오날 하로 하날을 우러르고 십다


  새악시 볼에 떠 오는 붓그럼가치

  시의 가슴을 살프시 젓는 물결가치

  보드레한 에메랄드 얄게 흐르는

  실비단 하날을 바라보고 십다  (전문)



  읽기에 어떠신가. 나는 <2>가 더 낫다. 그러나 진리는 아니다. 우리가 쓰는 한글이 표음문자라서, 시간이 흐르며 매우 빠른 속도로 진화를 해 읽기는 읽어도 도통 모르는 단어를 만날 확률이 매우 높다.
  그것 아니더라도 영랑은 자신이 시어를 스스로 만들어내기도 하는데, “그대 내 홋진 노래를 들으실까 / 꽃은 가득 피고 벌떼 닝닝거리고 // 그대 내 그늘 없는 소리를 들으실까 / 안개 자욱이 푸른 골을 다 덮었네 (후략)(<내 홋진 노래> 또는 <13> 부분) 이 부분에 오면 할 말이 없어진다. “홋지다”가 무슨 뜻이지? 심지어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다. 이 단어는 우리나라의 모든 책 가운데 영랑의 시에서만 딱 한 번 등장한단다. 목포대학 허형만 교수가 분석하기를 하나를 뜻하는 단어 ‘홑’과 ‘기름지다’ 할 때의 ‘지다’를 합해 ‘홀로 남겨져 외롭고 쓸쓸한 기분이 들다’라고 했다. 그렇게 단어의 뜻을 알고, 적어도 이해는 하고 시를 읽는 일과, 전혀 모른 채 읽는 건 또 얼마나 다른지. 그리하여 “그대 내 홋진 노래를 들으실까”는 이 시대에 읽어도 쿨하게 다가온다. 독후감을 쓰고 있는 휴일 새벽의 이 홋진 시간에.
  세월이 흘러 1940년대에 이르면, 일제에 의한 내선일체 사업이 극성을 이루고,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조선의 시대상도 암울하게 변해버리고 만다. 독립이란 것이 몇 년 후 하늘에서 뚝 떨어질지는 꿈에도 모른 채 많은 지식인은 시대에 좌절해버리고 더 많은 지식인들은 일본에 기생하기 시작한다. 영랑은 여전히 강진, 40년대 기준으로 보면, 옛 시절의 귀양지에 불과한 촌구석에 틀어박혀 회의와 죽음의 골짜기를 탐색하기도 한다. 이 시절에 쓴 시 <거문고>를 읽어보자. 우리는 일본인들을 흔히 원숭이로 얕잡아보고, 원숭이의 다른 우리말이 잔나비인 것을 염두에 두자. <거문고>를 소개하며 독후감을 마감한다.


  검은 벽에 기대선 채로
  해가 스무 번 바뀌었는데
  내 기린麒麟은 영영 울지를 못한다


  그 가슴을 퉁 흔들고 간 노인의 손
  지금 어느 끝없는 향연에 높이 앉았으려니
  땅 위의 외론 기린이야 하마 잊어졌을라


  바깥은 거친 들 이리 떼만 몰려다니고
  사람인 양 꾸민 잔나비 떼들 쏘다니어
  내 기린은 맘 둘 곳 몸 둘 곳 없어지다


  문 아주 굳게 닫고 벽에 기대선 채
  해가 또 한 번 바뀌거늘
  이 밤도 내 기린은 맘 놓고 울들 못한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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