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여행이 되다 : 작품이 내게 찾아올 때 소설, 여행이 되다
이시목 외 9인 지음 / 글누림 / 2017년 5월
평점 :
절판



 바로 전에 이어 "소설, 여행이 되다" 시리즈. 이번엔 '작품이 나를 찾아올 때'라는 소제목으로 주요 소설의 무대가 되는 장소로 떠나는 여행 이야기다.

 작가나 작품이 만들어졌던 장소를 향해 떠난 이야기, 저 먼 시절 내가 다니는 회사 사보에 소개한 책이 있다. 2001년 간행한 최내경의 여행기 <고흐의 집을 아시나요>. 거기서 최내경은 고흐가 고독 속에서 자신의 해골을 향해 권총을 발사한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다락방으로, 고흐의 붓에 의하여 불멸의 교회로 남겨진 오베르 교회로의 여행기를 소개했었다.

 그럼에도 글누림 출판사에 의한 이러한 기획은 사실 참으로 바람직하여 그냥 마음의 치유를 위해 길을 떠나는 것보다는 한 가지 목적을 갖고 옛 현장을 답사하는 일이야말로 참 괜찮은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말하고, 이 책에서도 어느 작가인지 모르겠지만 역시 말한다. 따뜻한 치유를 위한 여행. 참으로 행복한 상상이다. 여행을 통해 내면의 상처를 치유한다고? 그랬으면 좋겠다. 여행은, 환상을 깨서 미안하지만, 잠깐의 일탈이다. 여행을 다녀와도 상처는 여전한 상처고, 아픔도 여전히 아픔이고, 날 버린 그 새끼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고, 집을 나서기 전 소파 위에 휙 던져놓은 브래지어는 여태 그대로 널브러져 있고, 오히려 우체통엔 아파트 관리비 청구서와 공공요금 계산서 쪼가리만 보태져 있을 것이며, 이제 돌아와 피곤한 당신은 미리 짐작했던 바와 같이 심각한 변비로 얼굴만 노오래져 있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떠난다. 심지어 떠나고 싶어 몸부림을 친다. 먹고 사느라 훌훌 떠나지 못함을 기어이 아쉬워 한다. 아무렴.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그래도 기어이 떠날 당신, 이왕이면 길을 나서기 전에 이 책 한 번 읽고 길을 골라보라.

 솔직하게 말하겠다.

 책은 이게 기행문인지 독후감인지 헷갈린다. 열 명의 작가가 경향각지에 흩어져 있는 소위 '명작의 고향'을 찾아 갔는데, 아뿔싸, 문제는 바로 그 명작 이야기도 해야겠고, 명작을 태어나게 한 고장의 모습을 독자의 가슴이 짜르르하게 윤색도 해야겠고. 실제 가 보면 둘 중의 하나. 누추하고 빛 바랜 옛 기억의 한 장면이든지 아니면 야하게 화장한 노파의 얼굴같이 작품과 너무 어울리지 않게 현대화한 모습이던지. 그 둘 중의 한 모습을 독자의 가슴에 진하게 새겨놓기 위해 필수적으로 사용한 문명의 장비가 카메라. 렌즈를 통해 한 부분만 확 잡아놓았을 때, 진짜 시각으로 바라볼 경우의 시네마스코프 화면이 극미세한 한 장면으로 축약되어 온 세상이 아름답게 보일 수 있게 만드는 거. 그게 사진 또는 그림의 마술이다.

 나는 지금 이 책을 폄훼하기 위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결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얘기했듯이, 이왕 길을 나선다면 한 가지 테마에 집중하는 것이 아주 바람직하기 때문. 이 책의 효용은 그거 하나로도 충분하다.

 책에 수인선. 수원과 인천 사이를 달리던 협궤열차 이야기가 나온다. 오랜 추억. 수십년 전 추웠던 겨울. 어느날 트렌치 코트 속 주머니에 소주 한 병과 노가리 한 쾌를 넣고 동기, 후배아이들을 유혹했다. 협괘열차를 타보자고. 그리하여 멀고 먼, 멀고 멀고 먼 송도역에서 수원까지 유행가 가사처럼 비린내 가득한 열차에 몸을 싣고 수원에 도착. 그러나 할 짓이 없었다. 하지만 청춘은 무엇인가를 저지르게 만드는 놀라운 힘이 있어서, 나는 청년들을 이끌고 우리나라의 클래식 명화 <애마부인>을 단체관람했고, 안소영의 수박만한 젖가슴을 보고 낄낄거렸으며, 너무 재미가 없어서, 영화가 끝난 후에, 영화를 보자고 선동했던 나는, 하마터면 맞아 죽을 뻔했다. 당연히 송도역에 도착하기 전 우리는 전철로 인천역에 내려 어슬렁거리다가 중국식 음식점이 줄줄이 늘어선, 재수없으면 진흙탕 속에 가짜 나이키 운동화가 푹푹 빠져버리는 거리에 들어서서 이 동네가 오정희가 쓴 '중국인 거리', 거기가 바로 여기야. 어쩌고 저쩌고 잘난 척을 해가며 짜장면 한 그릇씩 받아놓고 어린 놈들이 무서운 줄도 모르고 독한 배갈 한 도꾸리 씩을 비워냈던 건 물론이다.

 책의 초판을 가지고 있느냐가 만일 자랑이라면 나도 초판 몇권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한강이 쓴 <여수의 사랑>. 하지만 더 깊숙한 여수의 추억. 180 센티미터의 키에 남진과 변웅전을 합한 모습의 미남 아버지는 왠일인지 아들 둘을 앞세우고 전국일주에 나섰다. 여수에 들러 당시 최고 좋은 여관에 짐을 풀자 주인 마담인 듯한 아주머니가 눈웃음을 살살 치며 반겨주었다. 오동도에 들러 난생 처음 주먹덩이 만한 소라(그렇게 큰 소라는 처음이란 뜻입네다)와 전복, 홍삼(붉은 해삼) 등을 초고추장 듬뿍 묻혀 실컷 먹고, 아, 과식의 심각한 절망이여, 밤새 심각한 설사와 탈수증에 시달렸으나, 분명히 내 옆에서 베개 위에 머리를 뉘셨던 아버지는, 방에 안 계셨다. 쾌속정을 타고 부산을 거쳐 며칠만에 집에 도착한 나와 형, 두 아들새끼들은, 꼴에 남자라고 하필 설사병으로 밤새 고생해마지않던 그날 밤 아버지가 방에 없었다는 걸 결코 정여사에게 얘기하지 않았다.

 뭐 이런 재미난 에피소드 없어? 없다.

 왜 이런 단어를 쓰는지 잘 모르겠지만 요새 '힐링'이란 말이 붐이다. 그러기 위해 웃음이 아닌 가슴이 쌉싸름해지는 가을 빛 정서를 듬뿍 담아내기 위해 온 힘을 들여 자판을 두드리는 열 명의 작가들이 눈에 선하다. 가슴이 저릿저릿한 아름다움. 선운사 앞을 흐르는 도솔천의 맑은 소리? 진하게 화장한 시에미처럼 변한 선운사 입구의 선운사 관광호텔에서 일박을 하고 아침에 눈 뜨자마자 절에 들면 입장료 받는 직원이 출근 전이라 돈 안 들이고 들어갈 수 있다는 팁은? 가을날 물 마른 도솔천보다는 선운사에 들자마자 눈에 확 들어오는 무슨 각이더라, 하여간 누각의 엉뚱한 기둥이 엉뚱하게 주장하는 미감은 또 얼마나 푸근한지, 왜 이런 건 안 보이지? 정말 다행인 건 일종의 관습이 된 선운사 동백, 목이 툭 꺾여 통째로 떨어지는 동백꽃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는 거. 동백꽃이 후지다는 말씀이 아니라 심하게 식상해서 누구나 다 아는 것이라 피하기 잘했다는 대목.

 여행을 준비하는 분들. 이 책을 읽고, 책에 나온 소설들을 먼저 읽으시라. 다행스럽게 단편소설을 훨 많이 배치해놓았다. 단편 하나를 읽기 위해 책을 사기 뭐하다면 좋은 방법이 있으니, 동네 도서관에 가시라. 에어컨 바람 시원한 곳에 가서 책 속의 소설을 하나씩 읽고 그곳으로 방향을 잡으면 이 여름, 어느 때보다 기특한 휴가를 즐기실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글이 제일 좋았느냐고? 정말 얘기해야 해? 에이, 관두겠어.

 근데 책 속의 식당 소개는, 아 참, 요새 큰 경향 가운데 하나지만, 흐흐흐, 웃고 만다.





++++++++++  부록  ++++++++++


2001년 밥 빌어먹던 회사 사보에 기고한 글


 



고흐의 집을 아시나요?

 

《고흐의 집을 아시나요?》 최내경, 2001. 오늘의 책, 1만원

 

 

 어느새 가을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당신은 외롭지 않습니까. 당신 가슴 속 깊숙한 고독의 빈자리로 문득 황황한 바람이 불어오지는 않습니까. 어려운 시절, 거친 생활을 살아내느라 무수한 사람들 사이에 부대끼고 함부로 관계들을 만들어가면서도 어느 순간 뒤돌아보면 아무도 없는 사막을 바라보지는 않나요. 부모와 배우자, 그리고 정겨운 살붙이들이 아주 가끔은 전혀 낯선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하겠군요.
 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가을에.
 가끔은 길을 떠나고 싶습니다. 지구라는 별자리에 오직 당신만이 혼자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때, 당신은 헤진 배낭을 메고 그저 길을 나서고싶어질 것입니다. 당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곳에서 지친 발걸음을 쉬고싶겠지요. 당신은 신발끈을 풀고 고단한 발바닥을 두드립니다. 그러다가 무거운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두리번거려봅니다. 저런, 그러고보니 외로운 당신을 품고있는 공기 속에서 위대했으나 고독했던 영혼들이 당신을 지켜보고 있군요.
 당신은 행복합니다. 위대한 예술품을 만들어낸 고독한 영혼들이 당신과 함께하니까요.
 그러나 정말로 자리를 박차고 길을 나설 수 있으면 대단한 용기를 가진 사람이거나 부모를 잘 만난 사람이겠지요. 보통의 당신은 길 떠날 생각조차 못할 확률이 많습니다. 시간이 없고, 돈이 없는.... 하지만 언젠가 길을 떠나리라, 마치 비밀스런 에로스의 약속인 양 마음 한 쪽엔 그런 갈증을 이 가을에도 당신은 품고 있겠지요. 그 희망, 사실은 조금은 덧없는 그런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뒤 돌아보지 않고 베낭을 멜 희망이 있는 당신은 지금 불행하고, 그럴 희망을 갖지 않은 당신은 언제나 불행합니다.

 그날을 기다리나요? 그렇다면 당신이 기다리고 있는 일탈의 그날을 위해 이 책을 소개합니다. 《고흐의 집을 아시나요?》.
 프랑스.... 혹은 불란서를 소리내 발음해보십시오. 그것은 이미 당신에게 어떤 동경으로서의 보통명사입니다. 유럽의 중심, 세계 2위의 농산물 수출국이라는 지리부도적인 지식보다도 당신의 가슴 속에서 프랑스는 로제 마르탱 뒤 가르, 앙드레 말로 같은 작가, <암흑가의 두 사람>에서의 쟝 가뱅과 알랭 들롱의 우수 깊은 눈동자, 장-폴 고띠에, 크리스티앙 디오르 등의 패션 디자이너... 이런 소프트가 먼저 떠오를지도 모릅니다. 아니죠, 당신을 포함한 많은 우리 보통의 사람들은 의당 그러리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몽마르트 언덕의 노천 카페에 몰려앉아있는 혁명가 레닌과 바쿠닌 같은 망명 이방인의 모습을 상상할 수도 있겠군요.
 그런데 프랑스의 무수한 소프트 중에 프랑스를 프랑스답게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소프트는 무엇일까요. 루브르 박물관의 눈썹 없는 여인 <모나리자>를 위시한 미술품을 제일 윗자리에 놓지 않으면 많이 서운하리라 생각합니다.
 책《고흐의 집을 아시나요?》는 그러나 고흐의 작품에 대한 설명서나 입문서가 아닙니다. 《고흐의 집을 아시나요?》에서 고흐를 발견할 수 있는 페이지는 얼마 되지 않는군요. 그의 그림도 여섯 컷의 사진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 책의 정체가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앞에서 얘기했듯, 어느날 갑자기 단행할 당신의 일탈, 그 여행길에 당신의 헤진 베낭 속에 담아갈 안내서입니다. 당신은 이 책과 함께 지난 세기와 지지난 세기에 가장 고독했고 우울했던 영혼들의 흔적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즉, 고흐의 작품을 보러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고흐가 자신을 향해 권총을 발사했던 무서운 고독과 절망의 시절을 온전히 담아낸 다락방으로 당신의 발길을 옮길 수 있게하는 책이지요. 낡은 침대가 놓인 그 좁은 다락방에서 밤새도록 신음을 하던 고흐를 당신은 내려다볼 수 있습니다. 비뚤배뚤하게 원색으로 불안하게 그려놓은 오베르 교회, 위대한 그 그림을 볼 수 있게 안내하는 것이 아니고, 어느 천재에 의하여 불멸의 명화로 그려진 교회 건물을 당신은 볼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시간의 마모는 직접 고흐의 집을 찾아나선 나그네의 발길에 쓸쓸한 회한 만을 선사하기 십상입니다만, 고독했던 천재의 숨결마저 어느 한 구석에서 발견하기 기대난망이겠지만 굳이 그 집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당신의 외로운 영혼을 위해서일 것입니다.
 작가 최내경은 고흐가 최후를 보냈던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셋집을 비롯해서 베르디 오페라 <돈 카를로> 1막의 무대가 되는 퐁텐블로 숲 가의 밀레의 집과 아틀리에, 거장 다 빈치가 만년을 보낸 클로 뤼세, 프랑스 회화의 다른 큰 축을 이룬 남프랑스 지방, 그리고 파리를 대단원으로 해서 간결하게, 그렇습니다, 우리가 섣부른 기행문에서 흔히 읽을 수 있는 허접한 감상을 첨가하지 않고 담담히 그려내고 있습니다.

 최내경의 글은 이렇듯 조금은 건조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아까운 지면을 빌어 소개드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여백에 대한 매력이지요. 작가는 고흐의 집으로 가는 길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곳에 가면 어느어느 것이 있다고 말을 합니다.
 그 다음의 지면은 당신의 순서입니다. 최내경의 책을 헌 베낭에 넣고 남프랑스에서 다시 파리로 향하는 밤 열차를 탄 당신은 열차 객실에서 이방의 문자로 인쇄된 《고흐의 집을 아시나요?》를 꺼내 그 빈 여백에 당신의 감상을 적어놓을 수 있습니다. 최내경은 남부에까지 가서 왜 엑상 프로방스의 세잔의 집엔 들러보지 않았을까...를 빈 자리에 쓸 수도 있고, 끝없이 펼쳐지는 남 프랑스의 들녘을 밤기차에서는 볼 수 없었다고 써놓아도 좋을 것입니다. 그건 당신의 몫이니까요.
 당신 속의 외로운 영혼을 위하여, 어느날 문득 저질러질 일탈을 위하여 기쁘게 《고흐의 집을 아시나요?》를 소개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설, 여행이 되다 : 작가가 내게 말을 걸 때 소설, 여행이 되다
이시목 외 9인 지음 / 글누림 / 2017년 5월
평점 :
품절




 몰랐는데, '글누림'이란 출판사, 좀 독특한 느낌. 특히 눈에 확 와닿던 시리즈가 '비서구문학전집' 한국의 번역문학이 거의 유럽의 것들로 채워진 것에 불만을 느낀 모양이다. 그래서 시리즈 1번이 베트남 작가들의 단편선. 야, 이거봐라. 대단한 기획일 걸! 깜짝 한 번 놀라고, 2번이 아랍 소설가들의 단편선, 3번이 아랍 여성들의 단편선. 와, 정말 죽여준다. 근데 4번이 중국. 흠. 중국문학은 더이상 변방이 아닌데. 5번이 멕시코. 멕시코 문학이면 크게 봐서 스페인어 권역의 문학. 이거 좀. 그럼 라틴 아메리카 문학도 이 시리즈에 다 포함시킬 건가? 하는 의문. 아니나달라 6,7,8,9번은 다 일본 문학. 에잇, 이거 뭐야. 잘 나가다가. 게다가 대학 출판부를 제외한 거의 모든 출판사가 정가의 10%를 할인해서 판매하는데 반해 이 사람들은 5%다. 좋다. 안 깍아줘도 볼 놈들은 다 본다. 놀라운 마케팅.

 거기다가 유난히 눈에 띄는 건, 다른 업체와 비교할 때 기행문이 눈에 많이 띈다는 거. 이 책도 10 명의 글 좀 쓴다는 사람이 모여 경향각지를 싸돌아다닌 이야기책. 그냥 길 떠난 이야기, 라고 하면 이젠 좀 심심한 시대가 되서 '문학' 중에서도 특히 '소설'을 주제로 책 두 권을 냈는데 첫번째 이야기는 소설을 쓰는 작가들을 기행의 주제로 삼았다. 그리하여 먼저 소제목 '작가가 내게 말을 걸 때'를 앞에 놓고 큰 제목을 <소설, 여행이 되다>로 뒤에 배열했다. 글 쓴 이들이 조금 연배, 글쎄 아직 연배라고 하기엔 좀 그렇고 하여간 나이가 좀 있는 모양이다. 이들이 고른 작가들을 가지고 궁리해보자면 많으면 50대 중반, 적어도 40세 이상인 거 같다. 뭐, 아니면 말고(윽! 아니란다). 참으로 다행스럽게 내게 말을 건 작가들 거의 대부분과 나는 익숙했다.

 이 책을 기획할 당시로 뒤돌아가보자. 한두명도 아니고 작가가 무려 열명. 이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제일 먼저, 당연히 제일 쉽게 떠올린 생각은? "XX 문학관" "XXX 생가(터)" "XXX 기념관"에 가보자. 하는 거. 나 같아도 그랬을 거 같으니까. 거기다가 1980년대 말부터 시작한 거 같은데, 이 책에선 거명하지 않았으나 이문열 같은 이들이 경기도 이천에서 사숙을 열고 문학지망생들에게 공간을 제공해주고 소설쓰기에 힘을 쏟게 해주는 게 유행을 만들었는 바, 그런 장소도 셈에 꼽았을 거 같다. 책에 문순태의 사숙 비슷한 장소가 나오듯이.

 그리고, 열 명의 작가가 지금부터 해산! 이렇게 동시에 경향각지를 향해 고단한 발걸음을 한 것이 아니라, 그랬을 수도 있지만, 그리고 몇 군데는 그랬다고 짐작하지만, 열 아홉 군데 전부를 열 명이서 두군데 씩 간 것이 아니고 때로는 둘이 혹은 셋이 손잡고 가서 한 명은 이런 시각으로 다른 이는 저런 앵글로 피사체에 관한 사색을 한 결과물을, 편집과정에서 합해놓은 것도 분명이 있다, 여럿 있다, 라는 데 만원 건다(아니란다. 만원 잃었다!). 문장과 문단은 작가들의 지문과 비슷한 법.

 하여간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자식새끼들한텐 번듯한 스펙을 달게 해주기 위해 개풍에서 서울로 와 처음으로 엄마가 말뚝을 푹 박아버린 서대문구 현저동에서 시작해 중산간 지역 주민들을 줄 좍 세워놓고 거의 2/3를 때죽음으로 몰아놓은 제주도 4.3 사건의 현장까지 열명의 작가들은 '쎄가 빠지게' 돌아다녔다. 카메라 한 대 어깨에 메고. 요새 카메라엔 필름을 넣지 않지만 그래도 무게가 여간 아니라 쎄가 빠지게 카메라 메고 다니느라 어깨도 빠져버렸을 거 같다. 여기저기 사진 박으면서 길 떠난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서술, 이 책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은, 안 떠나거나 못 떠난 사람들이 마치 진짜 가서 보면 작가들이 써놓은 글 모양 가슴이 시리고 마음이 알싸한 쓸쓸한 회한 가득한 정경을 그리기에 여념이 없다. 그리고 상당한 부분, 성공했다.

 춘천을 예로 들어볼까? 춘천, 하면 떠오르는 작가가? 맞습니다. 김유정. 요샌 김유정을 기념하기 위해 김유정 생가터가 있는 지역의 기차역 이름을 '김유정 역'이라 해놓고, 춘천 시내 곳곳의 이정표에 '김유정 생가' 방향을 상세하게 알려주고 있다. 김유정은 현재 행정구역 상 춘천에 거주하면서 정말, 진짜 기가 막힌 토속적 향취의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그이의 고향이 춘천이라 춘천의 김유정 생가를 찾은 것이 아니라, 춘천을 무대로 소설작업을 했기 때문에, 그가 작품 속에 묘사한 춘천의 한 지역을 답사해 기행문을 썼다. 춘천이 고향인 사람이 한 둘인가. 이외수? 글쎄 난 그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별개로 하고,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최수철. 그러나 최수철의 태가 묻힌 곳이 비록 춘천이 맞지만 그의 문학적 고향은 차라리 고래뱃속? 그리하여 작가가 말을 거는 장소로서 춘천에 최수철은 없다. 여담을 한 마디 하자면, 김유정, 최수철, 두 명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춘천 태생 작가를 한 명 아는데 요새 책을 낸 김희선. 왜냐고? 최수철이 등단시켰고(이런 단정은 정말 바람직하지 않지만 하여간) 김유정을 만날 수만 있으면 그이가 걸렸던 병에 잘 듣는 약을 주고 싶어하는 작가니까. 근데 김희선도 태생이 춘천이지 문학적 고향은 춘천에서 구도로로 가면 한 시간 반, 고속도로로 가면 한 시간 쯤 걸리는 W시다.

 그외 지금 퍼뜩 생각나는 곳이 청송, 대구(사실 진영에 갔더라도 좋았을 뻔했다), 을숙도, 남원, 담양 그리고 특히 장흥. 장흥 기행은 무려 두 번에 걸쳐 나오는데 한승원과 이청준이 말을 걸어서. 장흥으로 향한 두 번의 발걸음에 동의한다. 충분히 그럴 만한 작가들이고 장소라서.

 책을 큰 아이에게 선물하려 한다. 그 아이가 딱 좋아할 스타일의 책이다. 걘 서울에서 병역을 할 때에도 서울지역에 관한 테마 여행기를 한 권 사서 꼼꼼하게 뒤지고 다녔던 적이 있다. 이젠 서울에서 벗어나 전국으로 확대할 시점이니 그러기 위해선 이 책이 더없이 훌륭한 반려가 될 것이다.


 * 불만 하나 얘기하자면, 문장과 문단으로 보건데 정말 열 명의 작가가 쓴 것임에도 불구하고 내용상 별 차이가 없다. 편집자나 기획자가 한 방향으로만 주문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좀 더 다양한 감상이 아쉽다. 예를 들어 처음부터 끝까지 글을 읽으며 늦가을 같은 심상만 자아낼 뿐 한 번도 웃게 만들지 못한다. 심지어 <봄봄>, <동백꽃>의 무대에 가서도 여전히 폐결핵과 결핵성 치루로 한참 젊은 나이에 죽었다는 얘기만 줄창 나온다.  점순이 키 커가는 거, 내가 장인짜리 불알 잡고 늘어지는 거하고 폐결핵, 그리고 결핵성 치루가 뭔 관계가 있다고, 참나. 웃고 살아도 괜찮은 세월이 좀 빨리 왔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워싱턴 스퀘어 을유세계문학전집 21
헨리 제임스 지음, 유명숙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연 이틀 헨리 제임스를 읽었다.

 무대는 19세기 전반기. 내용으로 짐작해서 1840년대 쯤. 이때 우리의 주인공인 의사 선생 슬로퍼 씨가 한 50세 정도. 온 뉴욕이 알아줄 만한 명의로 이름이 높아 사회적으로 거의 완벽한 명성과 지위를 누리고 있다. 저 옛적 히포크라테스도 자기 환자를 100% 다 살려낸 것은 아니듯 슬로퍼 선생도 무수하게 많은 인명을 구했으나 훌륭하게 키우기로 작정했던 맏아들과 연 1만 달러, 지금 시세로 100만 달러라는 주석이 붙어있는 돈을 지참금으로 가져온 절세 미녀 아내를 저 세상을 보내야 했던 슬픈 과거를 가진 인물. 잘 보시라. 연 1만 달러. 당시 초간된 많은 소설책을 보면 유럽과 아메리카 공히 4%의 이자율을 보인다. 이걸 감안하면 먼저 간 아내의 지참금(주식 등의 유가증권을 다 포함해서)을 현금의 현재가치로 계산하면 25만 달러. 지금 시세로 2,500만 달러, 대강 계산해서 270억 원을 가지고 시집 왔다는 얘기. 말이 270억 원이지 19세기 중반 현금의 구매력을 감안하면 지금 돈 500억 원은 간단하게 넘어설 거다.

 글쎄. 이거 진실이야? 헨리 제임스가 썼으니 적어도 객관적으로 수긍할 수 있을 것이긴 하다. 근데 당시 유럽에선 의사라는 직업은 미국에서 만큼은 존경받지 못하는, 우리 조선시대 개념으로 하자면 그냥 중인계급 중에서 좀 윗길 정도. 근데 실리, 공리주의를 높이 받들었던 미국에서는 유럽과 달리 사회적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나보다. (이 장면에서 우리의 보바리 여사의 남편이자 멍청한 시골의사 샤를르가 생각났다) 슬로퍼 씨는 자존심 때문에도 그랬겠지만 아내의 돈을 한 푼도 축내지 않으면서 스스로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여 무려 연 3만 달러의 재산을 일궜던 것이다. 현금의 현재가치로 75만 달러. 지금 시세로 7,500만 달러. 우리 돈으로 850억 원가량. 구매력 감안하면 1,500억 원 수준. 이 양반, 강남에서 잘 나가는 성형외과 개업한 사람 아니다. 외과와 내과, 특히 내과 전문의로 생각하면 된다. 그러니 얼마나 명의로 이름이 났었겠는가.

 이렇게 똑 소리나게 머리좋은 의사가 30년 가량 의사를 했더니 자신도 모르게 사람 관상을 보는데 도가 터버렸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났겠는지 생각해보면 수긍이 간다. 기본적으로 지능지수가 높은 인간이니 당연할 수도 있겠다. 맏아들과 아내를 먼저 보낸 이이에게 딸 아이, 캐서린이 하나 남았는데, 슬로퍼 씨가 냉정하게 관찰을 해보니 똑똑한 것도 아니고 상냥한 것도 아니고 19세기 여인의 최고의 미덕인 어여쁜 외모를 가진 것도 아니고 화장과 의상 또는 예술품에 관한 미적 감각을 가진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 무지하게 건강한 체질을 타고 났다는 거. 19세기 소설에 앞에서 열거한 조건을 가진 여자가 소설의 주인공이 되는 흔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캐서린 점점 자라 19세 되매, 고종사촌의 약혼을 기념하기 위한 파티에 과부이자 작은 고모이며 동거인이기도 한데다 나중엔 일종의 어지럽기만 한 보호자 연하기까지 하는 페니먼 부인과 함께 참석을 하는데, 거기서 정말 아름답기 짝이 없는 미모의 젊은 남자 모리스를 만나 그만 찌리리릿, 전기가 통하는 걸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모리스, 정말 아름다운 남자라고 헨리 제임스가 책 속에서 숱하게 적어놓는 걸 보고, 아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이 책의 표지가 바로 모리스처럼 아름다운 남자의 그림을 하나 골라 올린 것이구나, 짐작을 할 수 있었다. 근데 어이없게 그림은 러시아의 유명화가 일리야 레핀의 자화상이다. 낄낄낄. 내가 왜 웃냐하면, 만일 표지 그림을 정말 모리스를 염두에 두고 사용한 거라면 레핀이 지하에서 통곡할 일이겠기에. 왜냐하면 모리스가 만일 나폴레옹 전쟁 시절의 모스크바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살았다면 니콜라이 로스토프 같은 인간이었기 십상이기 때문(<전쟁과 평화> 참조). 하긴 이 책의 또다른 주인공, 모리스는 총명하고 잘 생긴데다가 멀리 내다보고 계획을 세울 줄도 알고, 대화할 때 냉정하게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침착성까지 모두 갖춘 이기주의자 게으름뱅이이긴 하다. 자신이 상속받은 얼마 되지 않는 재산은 여행과 방랑과 기타등등으로 탕진하고 지금은 아이 다섯 달린 누나네 집에서 누나한테 용돈을 뜯어내 반짝반짝한 구두와 칼 같은 주름이 진 바지, 깔끔한 쟈켓으로 치장하고는, 자신의 행복한 생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여인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캐서린을 발견했고.

 주인공 세 명을 다 소개했다. 워낙 좋은 머리를 타고난 의사선생은 모리스를 척, 한 번 보자마자 상황을 깔끔하게 정리했고 그래서 이어지는 갈등구조. 19세기 중엽에 벌어지는 시대극이자 사회극. 간단하게 말해서 헨리 제임스의 전공과목. 순진녀와 그녀가 받을 수 있는 최고액의 재산을 겨냥한 이기주의자 게으름뱅이의 연합전선에 홀로 맞선 혜안의 아버지. 정말 통속적으로 흥미진진. 불타는 사랑과 이성적 방해의 한 판 승부, 기대하시라, 개봉 박두!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17-07-13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헨리 제임스 소설 가운데 전 이 작품이 가장 재미있었습니다. 여주인공 캐릭터도 나름 독특하고 ㅋㅋㅋㅋ 헨리 제임스가 3인칭 전지적작가 시점을 적절하게 잘 활용했다고나 할까요. ㅎㅎ

Falstaff 2017-07-13 10:58   좋아요 0 | URL
아, 그러셨어요? 전 <여인의 초상>이 재미있더라고요. 당분간 헨리 제임스는 안 읽을 거 같아요. 이 정도면 충분할 거 같아요.
 
데이지 밀러 펭귄클래식 27
헨리 제임스 지음, 최인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헨리 제임스를 몇 작품이나 읽었더라? <한 여인의 초상>과 <나사의 회전>이 (앞의 것은)재미있었고, (뒤 것은)엽기적이라 기억에 남는다. 이거? <데이지 밀러>? 중편 소설 분량. 헨리 제임스의 작품 가운데 제일 많이 팔렸다는 베스트 셀러. 베스트 셀러가 언제나 베스트 작품은 아니라는 진리를 확인할 수 있다.

 미국 사람들 참 웃겨. 몇 번 얘기한 거 같은 바, 앞뒤 따지지 말고 얘기하자면, 유럽에서 먹고 살기 팍팍해 배타고 건너온 사람들을 선조로 둔 아메리칸들. 대륙에 나라를 건설하자마자 최고의 가치는 인권과 평등. 물론 유럽 백인 출신들에 국한한 인권과 평등. 어쨌거나 그들의 최고 가치는 실용주의다. 대륙의 무한한 자원을 바탕으로 아메리카 달러의 위세가 세상을 흔들기 시작할 즈음, 미국 부르주아들은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낸다. 전체 인구의 1/50,000 , 얘네들이 뭐 했을 거 같은가. 유럽 귀족들의 풍속을 그대로 카피하기 시작한다. 원래부터 본데 없는 것들이라고 하면 너무 야박한 거고, 본토 즉 유럽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살기 때문에 언제나 동경해마지않던 유럽 귀족들보다 오히려 더 완고하고 보수적인 그들만의 리그에서 통용하는 규범을 만들어낸다. 당대 세계에서 가장 보수적인 가치관을 가진 인간종족이 바로 미국 동부에 서로 모여 살던 백인 부르주아들이다. 이런 부류가 제일 한심하게 바라보는 족속이 있으니 자신들 바로 아래에서 자기들 역시 부르주아 계층에 진입했노라고 소위 '척'하는 인간들. 가소로운 것이지 뭐. 이거 진짜다. 헨리 제임스의 소설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 19세기에서 20세기 1차 세계대전 전까지 나온 소설책에 무수하게 등장한다. 그리고 이들은 내가 제일 혐오하는 족속들이다. 들리는 얘기에 의하면 극소수 미국인들은 아직까지 이따위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건 모르겠고 관심도 없다 읎다.

 무척 아름다운 열 아홉살 아가씨, 데이지 밀러가 스위스 휴양지 브베의 한 호텔에서 주인공 프레드릭 윈터본의 눈에 띄면서 소설은 시작한다. 척보니 날마다 별만 올려다보고 사는 아름다운 스테파네트 아가씨처럼 순진무구하며 예쁘기 그지 없는데, 이미 세상물정에 관해선 좀 아는 윈터본의 눈에는 데이지가 발랄하고 거침없는 것이 여지없이 바람둥이 기질이 보이는 거다. 한 마디로 자유분방해 19세기 중반의 규범을 초월하는 행위와 언행을 서슴지 않는 것이 또 매력적이고. 대개 소설을 비롯한 드라마, 영화, 오페라 등의 남녀관계는 거의 한 번 딱 보고 숨넘어가게 사랑에 빠지는 것. 그러나 현명한 윈터본 씨는 데이지가 마음에는 들지만 홀딱 빠져 너죽고 나죽자의 참경에까진 도달하지 않는다.

 왜?

 윈터본은 미국 동부, 그것도 한때 미국의 수도였던 뉴욕에 기반을 둔 대 부르주아 가문이고, 데이지 밀러가 속한 밀러 가문은 뉴욕의 옆구리 스키넥터디에서 사업을 해 자신들도 부르주아 족속의 일원인줄 착각하고 있는 인간종이기 때문. 실제로 윈터본의 숙모 코스텔로 부인은 이렇게 단언한다.

 "그 사람들은 아주 천박해. 그런 부류의 미국인들은 절대,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우리의 의무란다." (78쪽)

 헨리 제임스가 제일 막강한 실력을 뽐내는 것이 바로 풍속소설. <아메리칸>에선 돈 많은 정의파 미국남자를 내세워 전 유럽의 귀족들을 물리쳤으며, <한 여인의 초상>에서도 역시 이모부 잘 만나 떼돈을 상속받은 여인의 자유분방하게 사는 모습을 그렸으니, 이 작품에서도 코스텔로 아주머니를 비롯한 일단의 미국 부르주아들의 엄혹한 견제를 모른 척하고 프레데릭 윈터본과 데이지 밀러가 세기의 사랑을 이루어내겠구나, 하고 김칫국 먼저 마셔두었다는 걸 고백한다.

 원래 동서남북을 막론하고 데이지처럼 세상의 모든 남자로하여금 발정나게 할 정도의 미모를 갖춘 여자들은 조금쯤 바람둥이 기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정상이다. 그이가 세상의 많은 남자들을 저울에 올려두고 자신에게 제일 풍족한 복지를 가져다줄 수 있는 젊은 미남을 고르겠다는데 그게 뭐 잘못된 거 있어? 세상의 모든 포유류 암컷이 하는대로 하겠다는데. 난 절대 반대 안 함. 자연스러운 현상이기 때문.

 하.지.만.

 명색이 헨리 제임스. 나 따위 변방의 독자가 생각하는대로 소설을 쓰면 일찍이 19세기를 떠르르하게 만든 헨리 제임스겠느냐, 하는 점. 내 생각은 여지없이 망가지고 소설은 아주 다른 방향으로 선회하다 어느덧 스위스 브베에서 이탈리아 로마로 장소를 옮긴다. 여기서도 아름다운 데이지 아가씨는 로마 최고의 미남자를 골라, 세상의 가장 똑똑한 미녀들이 하는 짓, 줄듯 말듯 하는 거. 뭘 줄듯 말듯 하냐고? 순정. 마음 말이다, 마음. 마음을 줄듯 말듯 온갖 남자들의 애간장을 태우고 있었던 건데, 소설이란 건 여지없이 최상의 우연을 만들어내는 것이 본질. 밀러 가문 최대의 적수, 코스텔로 아주머니 역시 겨울을 나기 위해 로마로 오고, 아주머니를 따라 윈터본, 원래 겨울에 나서 윈터본인줄 모르겠는데 하여간 원터본 씨도 겨울을 나기 위해 로마에 도착, 데이지 양과 재회하면서 소설은 급커브를 튼다.

 재밌겠지?

 난 아무리 재밌어도 당신에게 이 책을 권하지 않을 것이다. 헨리 제임스가 <데이지 밀러>를 그리 아꼈다 하더라도 그건 19세기 일이고, 아직까지 이 책의 효용이 가슴팍에 팍!  와닿는 것도 아니며, 무엇보다 어찌하여 이리 황당한 끝맺음이 있겠느냐 하는 거. 어떻게 황당하냐를 말씀드리면, 내가 아무리 말려도 읽어보실 분은 책을 읽어보실 거라 미리 알면 재미 없고 재수도 없을 터라 언급할 수 없다.

 책의 3장에 벌써 로마에 가 있던 코스텔로 아주머니가 윈터본에게 편지를 써서 셰르뷜리에의 재미있는 소설 『폴 메레』를 좀 갖다 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이 103쪽에 나온다. 여기서 셰르뵐리에라는 스위스 소설가가 진짜 있었고 <폴 메레>라느 소설도 정말 있었다 한다. 책 뒤편의 후주를 보면 <폴 메레>의 대강의 줄거리가 나온다. 그거하고 <데이지 밀러>하고 어쩜 그리 비슷한지. 이 정도면 내 수준의 힌트는 다 드린 셈이다. 읽어보실 분은 읽어보시고 안 그러실 분은 맘대로 하시라.


 


댓글(4)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17-07-12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슷한 느낌의 소설이긴 한데 이디스 워튼의 <순수의 시대>가 훨씬 낫죠. ㅎㅎ 암튼 <데이지 밀러>는 짧아서 베스트 셀러가 아닐지 ㅋㅋㅋㅋ

Falstaff 2017-07-12 10:59   좋아요 0 | URL
윽! <순수의 시대>에선 영국인가 하여간 유럽에서 온 늙고 가난하고 조그마한데다가 비쩍 마른 남작한테 미국 부르주아들이 온갖 환대하는 묘사가, 으...
ㅎㅎㅎ 그 책도 진짜 WASP 들의 향연이라고 생각해요.
거기서 누가 그러더라, 하여간 이렇게 말하는 게 기억나네요.
˝찰스 디킨스와 마크 트웨인의 작품은 신사가 등장하지 않아서 싫어요.˝
ㅋㅋ 전 화장실엔 한 번도 가보지 않았을 거 같은 신사숙녀만 등장하는 <순수의 시대>가 별로던데요. 전 헨리 제임스도 <한 여인의 초상> 말고는 뭐 별로 마음에 들지 않더라고요. 워튼이나 제임스, 가까이 하기엔 시대 차이가 너무 나는 듯해요. ㅠㅠ

잠자냥 2017-07-12 1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그 속물스러움의 묘사를 지겨우리만치 참 잘도 했다는 점에서 ㅋㅋㅋ 높이 샀어요. 전 빅토리아 시대 때 이야기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미국의 저 시절 부르주아 이야기도 읽긴 읽되, 별 감흥이 없더라고요. 이디스 워튼은 <순수의 시대>를 대표작으로 많이 꼽던데 전 그 작품 보다는 <이선프롬>을 가장 좋아합니다. ㅎㅎ

Falstaff 2017-07-12 12:42   좋아요 0 | URL
맞아요, 워튼이 그 계급 사람들의 터무니 없는 허위를 사정없이 비튼 건 맘에 들더군요. ㅎㅎㅎ
<이선프롬>, 나중에 기억나면 한 번 시도해보겠습니다만, 워튼하고는 당분간 별거생활 중이라 언제가 될지는 잘..... ㅋㅋ
 
나의 아름다운 정원 - 제7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종로구 부암동으로 짐작할 수 있는 인왕산 언덕배기 산동네. 충청북도 괴산군 노루배미에서 고등학교 1학년 까지 마치고 상경해 외국계 무역회사에 다니는 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중학교 졸업 학력으로 십 년 동안 남편과 시어머니로부터 무식하다느니 배운데 없다거니 하는 타박만 좋이 얻어자시며 이 책의 주인공 '나'를 여덟살 먹을 때까지 키워주신, 목포 출신의 요리 명장이지만 정식 직업은 오르다가 가겟방 앞에서 한 번은 쉬어야만 도달할 수 있는 언덕배기 달동네 오두막집의 솥뚜껑 운전사, 엄마. 끔찍하게 깔끔을 떠는 엄마가 눈 오는 날 키보다 큰 싸리 빗자루로 쓱쓱 눈을 치우다가, 아이고 저걸 저걸, 이를 악물고 끙끙 앓는 소리로 시어머니에게 "어머니 애가 나오려나봐요. 너무 급해 차리고 병원에 못 갈 거 같아요. 동네 산파 좀 알아봐주실래요?" 한 마디 하고 그길로 1977년, 한국적 민주주의가 든든히 토대를 잡고있던 20세기 중반의 민족중흥 시대에, 흔한 산과 병원도 아니고, 손톱 밑에 때가 새까만 아줌마가 지물거리는 눈으로 엄마의 가랑이 사이를 째려보는 종로구 부암동의 찌그러진 조산원에서 드디어 터울 많이 나는 내 동생 영주가 태어나면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이제 육십이 넘어 목소리마저 메조 소프라노로 바뀐 할머니는 영주가 드디어 엄마의 태 속에서부터 탈출하기로 결심을 하기 바로 전까지, 영어로 말하자면 솔리테어solitaire, 우리말로 하자면 재수떼기를 하고 있다가 마지막 장을 뒤집기 바로 전에 급하게 옷보따리를 하나 만들어 나와 함께 판자처럼 생긴 지저분하고 좁은 조산원으로 뛰어왔는데, 연속극에서 본 거 처럼 아이를 낳고 있는 중인 엄마가 아이고 죽겠네, 으악, 으악, 소리소리 지르지 않고 그냥 음, 음 하는 신음만 들려오는 중에 우리의 칠성님께 간곡한 기도를 시작한다. "아이구, 칠성님. 이 늙은이가 둘째 손자 하나만 안아보게 해주십시오. 비나이다 비나이다. 그저 토란 같은 불알 달린 손자놈만 낳아라. 비나이다 비나이다." 그러다 내가 가슴에 안고 있는 보온병을 내려다보더니 내 뒤통수를 후려갈기며, "이 새끼야, 마호병은뭐 하러 들고 왔어?" 하는 거였다. TV 보니까 사람이 아이를 낳으려면 제일 먼저 사람들한테 물 끓이라고 소리치는 걸 보고 분명히 뜨거운 물이 필요할 거 같아서 부엌 연탄불 위에 끓고 있던 솥단지에서, 그 비상사태에도 불구하고, 보온병에 뜨거운 물을 담아 온 건데, 비록 일상이 돼버려 아무렇지도 않지만, 뒤통수만 한 방 얻어터지고 만 거였다.

 잠시 후 조산원 아줌마의 '그렇지!'하는 말과 캑캑캑 하는 아이 울음 소리가 들리고 할머니와 난 득달같이 달려가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비린내가 가득한 방 공기가 확 들이 닥치고, 난 비린 냄새에 비위가 확 상해 토할 거 같아 고개를 돌렸으며, 바람들어온다는 조산원 아줌마의 지청구와 함께 다시 문이 쾅 닫혔다. "딸이에요, 딸." 그 말을 듣자마자 할머니는 땅을 쿵쿵 구르며 아이고 내 팔자야, 통곡에 통곡을 거듭했으며 집에 가자마자 머리에 질끈 끈 하나 동여매고 아침에 하다 만 재수떼기 화투의 뒷장을 기어이 넘겼는데, 딱 떨어지는 재수가 흑싸리 껍데기.

 "사흑싸리 껍데기! 육시랄허게 복도 없는 지집년이 나왔구나!"

 어느새 두달이 흘러 6년 터울이 나는 내 동생의 이름을 지어야 하는 때가 왔다. 할머니가 달력 찢은 종이에 뭐라 한 글자를 써 아버지한테 던져 주면서 하시는 말씀이, "옛다. 저년 부를 이름은 있어야지." 나는 안고있던 아이를 엄마한테 얼른 넘겨주고 종이쪽지를 주워 들여다 봤고 그 위엔 뭔가 꼬불꼬불한 글씨가 적혀 있었으나 도무지 읽을 수가 없었다.

 "한복자. 좋쟈? 저년 낳던 날 사흑싸리 껍데기가 떨어졌으니 저년 복이 오죽하겠냐. 그러니까 이름자에 복복 자를 넣어서 기를 올려줘야 우리 집안도 좋고 저년도 좋은겨."

 사실 바로 위에 이 책의 내용은 다 설명이 됐다. 정말이다. 일단 현재 시점까지 보면, 할머니가 가족 구성원 중에서 아버지를 뺀 나머지 인간들은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 것이고, 할머니가 적어준 달력 찢은 쪽지에 쓴 아이의 이름을 읽지 못하는 나는 아홉살이 되도록, 3학년에 이르도록 글자를 해독하지 못하는 중증 난독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자세히는 밝히지 않겠으나, 거의 모든 작품에서 비극에 관한 예언은 언제나 들어맞는다는 진리를 다시 새겨볼 필요가 있다,는 걸 천명해둔다.


 난 이 책이 2013년에 나와서 불과 4년 전 작품인줄 알았다. 근데 다 읽고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했다기에 검색을 해보니 우헤, 2002년 작품이다. 그러니까 중판. 심윤경. 서울대 분자생물학과와 동 대학원 같은 전공으로 졸업하고 직장생활 하다, 아 이거 아냐, 때려치고 소설 쓰는 아줌마. 햐, 근데 어찌 분자생물학적 접근은 전혀 찾지 못했을까? 이이의 다른 작품을 찾아보니 동화책이 여럿 있다. 전혀 놀라지 않았음. <나의 아름다운 정원> 역시 다분히 동화적인 시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른들이 읽는 동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꿈꾸고, 꿈마저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종이 위의 꼬물꼬물한 직선과 곡선에 불과했던 것이 문자로 바뀌고, 동생의 잘못을 아무도 모르게하기 위해 대신 기꺼이 엄마한테 두드려 맞고, 할머니와 아버지와 엄마 사이에 벌어지는 가정학대와 멸시와 조롱과 폭력과 기타등등을 가슴 속에 푹 절여두기만 하고, 그래서 난독증은 날로 심해져 가고, 글씨도 못 읽는 놈이란 딱지를 달고 다니며, 그러나 동생과 동네 삼촌과 담임 선생님과 몇몇 친구들과 쌓아가는 우정, 사랑, 믿음, 동감 비슷한 커다란 우산.

 날로 진지하고 심각하고 중대하게 확장되어 가는 엄마에 대한 할머니의 증오와 학대와 막말은 나, 한동구를 더욱 압박하고 숨도 못쉬게 하지만 나는 주변에서 나에게 많은 아름다운 영향을 끼치고, 끼졌던 사람들을 통해 할머니, 할머니가 바라는 진정한 것은 무엇일까를 탐색하는 결실을 맺는 과정. 그게 나의 아름다운 정원,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으로 짐작되는 그곳에서 벗어나는 일이며 이제 소년기의 나를 괴롭혀왔던 무수한 질곡을 극복하는 일, 그래서 소설 <나의 아름다운 정원>을 가슴 따뜻한 성장소설로 규정짓게 만드는 일이다.

 잘 쓴 성장소설이 제일 지랄맞은 것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곳곳에서 눈물을 짜게 만드는 거. 에잇! 하지만 당신도 예외는 아닐 것이니 진짜 조심해서 읽으시라.

 근데 나, 한동구의 아름다운 정원은 무엇일까? 종로구 부암동으로 짐작되는 인왕산 허리자락 부근을 통칭하는 걸까? 유독 달동네 한켠에 커다랗게 자리잡은 3층 저택의 아름다운 친 자연적 정원일까, 아니면 조심스레 몰래 3층집의 정원에 들어가 가슴이 붉은 곤줄박이(책 속에선 "곤줄백이")에게 빵조각을 건낼 때면 커다란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고 있던 사모님의 그윽한 눈동자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한동구의 소년시절을 겪게 했던 내 귀엽고 똑똑했고 작은 누이동생 한영주와, 크기가 산 만한 고시준비생 동네 삼촌과 천사보다 몇 백배 착하고 아름다운 3학년 시절의 담임 박은영 선생님들이 나를 위해 만들어준 모든 미덕을 다 합친 따뜻함, 다 합쳐 소년시절이 아름다운 정원이었을까.

 결론은, 당신 의견이 옳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