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을 품은 뱀 펭귄클래식 125
프랑수아 모리아크 지음, 최율리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세번째 읽은 모리아크. 대한민국이 유별나게 좋아하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작품. 근데, 이 책 정말 좋다. 완전 내 스타일이다. 아, 읽고나서 나, 맛 갔다. 초장에 말하노니 여기까지 읽고 덥석 미끼 물지 마시라. 당신 취향이 아닐 수도 있다.

 오직 자신밖에 모르는 남자 노인 이야기. 책을 넘겨 본문이 나오기 전에 처음 읽을 수 있는 문장을 옮겨본다.


 "가족이라는 이 원수, 증오와 탐욕에 갉아 먹힌 이 마음, 이 비천한 마음을 당신들은 불쌍히 여겨주기 바라오. 이 비참한 마음이 오히려 당신들의 온정을 끌어당기기를 원하는 거요. 지리멸렬한 인생 내내 그 슬픈 정열은 아주 가까이까지 다가온 빛을 쫓아버리곤 했었지. 어쩌면 그 빛이 이 마음을 어루만지고 불타오르게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사실 그 마음을 감시하며 양심의 가책을 느꼈던 이들은 실체 없는 범상한 기독교인들이었소. 우리는 얼마나 자주 죄인을 걸려 넘어지게 하고, 진리의 빛이 더 이상 밝아오지 못하도록 항해하는지!"


 위 인용문, 한글로 씌여진 이 글(좋은 문장은 아닐지언정 그건 번역한 사람의 책임이지 모리아크 잘못은 아니다)을 읽자마자 뻥, 대책없이 다가오는 당혹과 동의. 가족이라는 원수, 증오와 탐욕. 가족 내에서 구성원 간에 가할 수 있는 심리적 폭력. 전혀 소설의 내용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넘쳐나는 호기심이라니. 모리아크라면 잘난 척하는 남편에게 비소를 탄 음식을 먹여 독살을 기도할 수도 있을 것이며(떼레즈 데케루), 호텔방을 전전하면서 혼자 힘으로 자란 딸의 방문을 안 그런 척하며 애타게 기다릴 수도 있다(밤의 종말). 이 책에선 가족간의 갈등과 상처주기가 어떤 식으로 나타날까? 아, 이 궁금증을 어찌할꼬. 어찌하긴 뭘 어찌해 서둘러 페이지를 넘기기만 하면 될 것을.

 평민 출신의 무지하게 머리 좋은 나, 루이는 적어도 법원 안에선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는 신화를 일군 변호사. 프랑스 최고의 변호사 수가(酬價: 보수로 주는 대가)임에도 의뢰인들이 종로 5가 광장시장 부터 서대문 로터리까지 줄을 섰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인물이다. 스스로도 전력을 다 하여 의뢰인들을 승소를 위해 날밤 새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변호사 개업 30년 만에 무지막지한 돈을 벌어들였다. 무지막지해도 정말 무지막지하게 무지막지한 돈을. 명색이 변호사라 거침없이 돈세탁의 모든 기법을 휘황찬란하게 선보이면서 유럽 거의 모든 나라 은행의 비밀금고 안에 금괴와 현금의 형태로 고이 잠들어 있다.

 하지만 머리가 좋은 것, 즉 지능이 발달한 것과 현명한 것은 큰 차이가 있다. 누구나가 갈구하는 행복, 그걸 찾는 일에 결정적으로 실패한 루이 선생. 로스쿨 수석일지언정 결혼을 하자마자 급속하게 발생한 아내와의 갈등이 세상에서 자기 경우에 국한한 일이라고 속단한 루이, 급기야 첫 아이를 낳자마자 아내의 모든 총기가 아이에게로만 기울어지는 것을 보고 드디어 아내는 나를 사랑하기를 포기했다고 지레짐작해버린다. 그래서 루이의 모든 열정은 변호사로서의 성공과 집에서 만족시키지 못하는 성적 갈증을 밖에서 해소하는 일에 바쳐진다.

 근데, 여태 얘기한 것을 어떻게 알았느냐 하면, 이제 다 늙어 변호사업도 은퇴하고 심장병까지 도져 오늘 낼 하는 루이가 가족, 특히 아내에게 자신이 죽은 다음에 읽어보라고 쓰기 시작한 편지 속에 들어 있는 거다. 프랑스 어디에 붙어있는지는 모르지만 칼레즈(검색해도 안 나온다)의 거부(첫째가 장자요, 둘째가 거부고 셋째가 이인데 화수분이지요, 할 때 그 거부)가 이제 다 죽을 단계에 돌입해 집안엔 아들, 딸 내외, 손자 손녀 내외, 어린 증손녀까지 몽땅 다 모여, 우리 아빠, 우리 할아버지 언제 죽나, 이거에만 모든 관심을 맞추고 있다. 아, 또 하나. 나한텐 국물이 얼마나 떨어질까, 하는 거하고. 심지어 처자식들은 이 영감이 얼마나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 나중에 밝혀지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어마어마한 돈을 갖고 있는 노인네다.

 문제는 벌써 한 40여 년 전부터 처자식이 한 편을 먹고 노인 혼자 따돌림을 당했다는 거. 자신이 벌어온 돈으로 먹고, 자고, 싸고, 입고, 배우고, 시집 장가가고, 즐겼으면서 한 번도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명백한 증거만 해도 수백가지를 댈 수 있는 노인, 루이. 그에게 가족 구성원이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자신에게 온 힘을 다해 상처를 입히기만 하는 원수, 증오의 대상이자 결코 화해하고 싶지 않은 이물질들이다. 그리하여 '나' 루이는 이제 죽음을 바로 눈 앞에 두고 최선을 다해 아내와 아이들과 자손들에게 경멸과 조롱과 빈 손을 선사하느라, 진짜로 죽을 힘을 써서 편지를 써내려 간다. 길고 긴 편지.

 위 문단의 첫 문장을 다시 반복한다. 문제는 노인 혼자 따돌림을 당했다는 거. 이렇게 믿고 있다는 거. 가족간에 애정을 느낄 아무런 이유를 노인은 갖고 있지못해 자신의 모든 유동자산은 결코 이들에게, 처자식과 자손들에게 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럼 기부? 천만의 말씀. 기부를 하려면 고심해서 결행했던 온갖 방법의 돈세탁을 거꾸로 다 까발려야 하는데 명백한 범죄행위를 존경받는 변호사로 평생을 보낸 사람이 어떻게 중인환시리에 밝힐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그는 오늘 낼 하는 심장병 환자의 몸으로 일찌기 자신이 만들어낸 사생아를 찾아 파리로 여행을 떠나는데, 과연 그에게 어마어마하게 어마어마한 재산을 몽땅 다 줄 수 있을까? 힌트는, 명석한 사람도 언제나 명석한 후손을 생산하는 건 아니라는 진실.

 죽음을 눈 앞에 둔 노인. 평생 자신이 가족에게 가했던 비폭력적인 폭력은 스스로 알아채지 못하고, 자신에게 가해진 가족들의 비폭력적인 폭력에만 몰두하여 가족을 원수, 증오와 탐욕으로 자신을 갉아먹는 존재로 규정한 불쌍한 노인. 아, 이 부르주아 노인같이 자기만 아는 인간을 불쌍하다고 하면 이거 또 개박살나는 거 아닌지 몰라. 좋다, 글로 쓴 건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내가 쓴 건 내가 책임진다. 자기만 아는 부르주아 늙은이라도 불쌍한 건 불쌍한 거다.

 과연 아집과 악의로 단단하게 뭉쳐진 노인 루이는 세상과 화해를 하고 숨을 거두었을까? 노벨상 수상작가의 소설에서 말이지. 그랬다면 어떻게 그랬을까? 궁금하셔? 안 알려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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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8-02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의 사막> 읽고 완전 반해서 그 뒤로 펭귄에서 나온 이 사람 작품은 올클리어!! ㅎㅎ 좋은 작가임에 틀림없습니다.

Falstaff 2017-08-02 10:12   좋아요 0 | URL
앗, 저도 4분기엔 <사랑의 사막>을 읽어봐야겠습니닷! ㅋㅋ
 
7인의 미치광이 펭귄클래식 54
로베르토 아를트 지음, 엄지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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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로베르토 아를트, 이 사람이 1900년 아르헨티나 출생. 바야흐로 당시 아르헨티나는 세계의 신흥 강국으로 부상, 그에 대한 부작용을 겪느라 (아직까지 이어지는) 치안불안, 정치적 혼돈상태에 휩싸여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숱한 인민들은 현실의 불안에 적절하게 대처할 대상이나 행위 또는 장치가 없었다(고 한다). 사회가 안정되지 못할 땐 그저 적절하게 씹어줄 특정 대상이나 계급이 필요한데 마땅한 재료가 등장하지 않으니 몇몇 도라이들이 등장하여 다수에 대한 무작정 테러를 꿈꾸는 걸로 대체하고, 이 책이 바로 대량테러를 획책하는 몇 명의 도라이들을 그리고 있다. 물론 아르헨티나 역사에 관해선 전적으로 문외한이다. 다만 이 책을 읽고 추리하는 한도에서 말하자면 이들 대량살상을 통한 세계정복에 나선 아수라백작의 후예, 아니 할아버지뻘인가? 하여간 같은 종족들의, 책의 제목처럼 미치광이 같은 일탈을 그린다.

 시작하기 전에 먼저 알려드릴 것은, 7인의 미치광이가 등장하기는 하는데, 그들이 서로 모여 작당을 하고 일을 저질러 끝내 비극적으로 최후를 맞는 건 이 책의 후속작인 <화염 방사기>에서 나오는 모양이다. 나도 그 책은 읽지 않았고 앞으로도 읽지 않을 거 같아 정확하게는 말하지 못하지만, 하여간 읽는 사람에 따라 마지막이 중동무이되는 듯한 느낌을 갖을 수도 있다.

 작가 로베르토 아를트 자신이 어려서부터 무능력한 아버지한테 날이면 날마다 얻어 터지는 걸 낙으로 알고 자라다가 드디어 사춘기가 되고, 그러거나 말거나 아버지의 폭력이 도무지 줄지를 않자 열 여섯 먹은 어느 날을 잡아 에이 썅, 이 집구석 아니면 내가 어디 살 곳이 없을 줄 알아? 가출을 감행한 전력이 있다. 책의 주인공 에르도사인, 이 인간이 작가 아를트의 분신인 거 같은데, 그를 통해 작가가 소섯적에 겪어서 인생을 살아가는 오랜 세월 내내 스스로 자존감을 파괴하고 굴욕감과 증오심의 상승 게이지를 올려준 건, 대한민국에선 대체로 술취한 아버지가 그 역할을 하는 것에 비해, 아르헨티나의 아를트 씨는 맨정신에 자기 친아들, DNA의 절반이 자기와 같이 배열된 친아들을 상대로 거침없이 구사했던 가정 폭력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랬나? 작중 주인공 에르도사인, 직업이 수금원이다, 회사의 채무자로부터 큰 돈을 수금해 입금시키면, 받아온 돈에 비례해 급여를 받지만 객관적으로 쥐꼬리만한 봉급 밖엔 되지 않아, 어느날 부터 조금씩 조금씩 수금한 돈을 개인 용처에 써버리다가 누군가가 회사에 투서를 해서 당장 내일 오후 세시까지 갚지 못하면 손모가지에 은팔찌 둘러야하는 신세에 떨어진다. (가정교육은 중요한 겨.)

 에르도사인이 600 페소 7 센타보를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만난 인간들이 주술사를 둘러싼 희대의 도라이들. 러시아 혁명을 능가하는 세계혁명을 꿈꾸는 족속들. 그러니까 시대적 배경은 적어도 1920년대 이후라고 봐야겠다. 주술사 곁에 모여든 공금횡령 회사원, 창녀들의 기둥서방, 골드 러시에 청춘을 바친 황금 탐험가, 세상의 가장 큰 가치를 도박장의 룰렛 소리로 특정한 약사, 유부녀이며 사촌인 여인에 대한 미움으로 여자의 남편을 기꺼이 삶의 진흙탕으로 던져버린 돈 많은 룸펜 등등.

 에르도사인이 원래부터 파렴치한 횡령범이었겠는가. 다 돈이 원수지. 아니. 돈이 무슨 죄가 있나. 삶이 원수다. 날이면 날마다 아버지의 채찍에 엉덩이 살이 갈라지는 체력단련을 받고 자라서 대뇌의 뭔가가 이상작동을 했는지 생각 외로 에르도사인은 보통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기괴한 기계장치를 개발하는, 소위 발명에 관해 특출난 재주를 갖게 된다. 그가 7인 그룹의 리더인 주술사에게 제시한 대량 테러 방법은, 페스트나 콜레라, 염소와 독가스를 사용하여 대량 살상을 하자는 화생 폭탄의 개발. 그럼 공장이 필요하고, 세포 대원들을 훈련시킬 장소가 필요하고, 모든 사업을 가능하게 할 돈의 원천이 필요한 것. 어떻게 재원을 마련하느냐하면, 수 명의 몸 파는 여인들의 기둥서방으로 활약하고 있는 인간이 주도하여 대규모의 사창가를 운영하는 그림을 그렸다. 사창가는 뭐 맨입으로? 그리하여 종잣돈이 필요한데 이건 우리의 에르도사인의 처사촌, 돈은 많은데 인색하기 짝이 없는 한 인간을 유괴하여 수표를 발행하게 한 다음 깨끗하게 죽여버리기로 정한다.

 모든 것이 주술사를 둘러싼 기상천외의 인간들 머리 속에서 벌어지고 때론 정말로 납치, 수표발행, 현금인출 등이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절대로 실제적인 살인이나 세균 또는 화학적 독극물이 살포되는 장면은 나오지도 않는다. 심지어 정말로 그렇게 할 것인지 의문이 들기도 하다가 그냥 작품은 끝나버리고 만다.

 그렇다고 이 책이 재미 없을 거라 속단하지 마시라. 정말로 살인이 벌어지고 대규모 살상까지 이루어지면 난 읽다가 말았을지도 모른다. 거기다가 실감나라고, 칼에 찔렸다면 살해당한 사람의 자상자국이나 벌어진 살 틈새로 콸콸 쏟아지는 피 같은 거, 총에 맞았다면 총알이 피부를 뚫고 들어간 자리와 관통해 밖으로 나온 자리의 벌어진 자리, 그딴 거 읽을 때의, 으, 그 불편함이라니. 걱정하지 마시라. 단 한 컷도 나오지 않는다, 라고는 얘기하기 힘들지만 궁극적으로 그것도 사실은 죽음에 이르는 행위가 아니란 면에서, 그렇게(한 컷도 나오지 않는다고) 얘기할 수도 있다.

 잘 쓴 소설은 거의 전부 심리소설이다. 이 책 역시 무수한 미치광이들의 무수한 엽기적 상상과 행위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심리소설이다. 1차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적인 불황을 맞이한 부에노르 아이레스의 보통인간들이 어떻게라도 살아야 하는, 그러나 진짜로 살기엔 힘들고, 더럽고, 치사하고, 아니꼬운 현실에 대한 거대한 은유. 나는 이렇게 읽었다. 재미나게.

 그러나 당신한테는 권하지 않겠다. 읽던 말던 당신이 결정하고 책임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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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두 빚는 여자
은미희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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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지 보시라. 중간 아래 오른쪽에 뭐라 써있느냐 하면, "은미희 소설". 나, 장편소설인줄 알았다. 맞지? 그냥 '소설'이라고만 써 있으니까. 350쪽 가량의 장편소설. 근데 단편소설집이다. 좀 정확하게 써 놓으면 안 되나? 아, 단편도 재미있게 읽는다. 근데 장편인줄 알았다가 단편을 읽게되는 일은 피하고 싶다는 얘기다.

 소싯적엔 단편을 훨 좋아했다가 이젠 유장한 장편이 더 좋다. 단편은 짧은 분량 안에 작가가 한 방에 쇼부를 치고 싶어하는 (죄송합니다. 건전하지 못한 단어를 써서) 경향이 있어, 정말 제대로 쇼부를 치면 좋은데 그렇지 못한 경우엔 '조금 무리', 일본말을 첨가해 말하자면 '조또 무리'한 경우를 왕왕 보게된다는 말씀.


 1. 그리하여 등장인물들은 다분히 극단적으로 비정상적인 설정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 책의 첫번째 작품 <다시 나는 새>의 등장인물인 여자와 '이다'. 여자는 열살 연하의 애인과 헤어지고, 인근 고아원에서 이다라는 이름의 소녀를 만나 자기 집에 있는 피아노를 치게 허락하고, 이다는 여자가 지겨워하는 줄 분명히 아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더 긴밀한 관계를 갖자고 요구한다. 고아원에 주민등록 초본 상 주소를 둔 똑똑한 여자애 이다가 하는 말과 행동과 집요함 등은, 열살은커녕 한 서른 댓 먹은, 미저리 성향이 다분한 여자처럼 보인다. 물론 소설에서 열살 먹은 아이가 서른 다섯 먹은 미저리와 달라야하는 건 아니지만 이 경우, 왜 하필이면 고아원 소녀를 택해 이런 대사와 행동을 시켜야했는지 궁금하게 만든다. 물론 평론가들은 일반독자와는 달리 이런 것에 관하여 깔끔하게 정리해서 일목요연하게 설명해줄 수 있겠지만 그럼 독자는 책 한 권 읽는 거 가지고 모자라서 평론가들이 이 책을 해석한 책을 또 읽으라고? 만일 소녀 이다에 관한 깊은 철학이나 논점이, 있다면 이는 독자에게 과하게 어려운 작품일 것이고, 없다면 설정 자체가 위에서 말한 '조또 무리' 아니겠느냐, 하는 것. 이건 물론 완전 아마추어 독자의 얘기이니 크게 신경쓰지 마실 것.

 2. 두번째 작품이 책의 표제작 <만두 빚는 여자>인데, 앞 작품 <다시 나는 새>도 그렇고 이것도 그렇고, 남자가 여자에게 하는 짓이라고는 주인공의 체내에 사정을 하고 아무 책임없이 그냥 떠나가는 것뿐이다. 물론 이 두 작품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초지일관 찌질하고 무능력하고, 가끔가다간 사기꾼 기질만 충분한 세상의 모든 잡놈을 남성성의 대표적인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당신 주변에서 그래도 몇 명 볼 수 있는 긍정적 남성의 모습은 희한도 하지, 단 한 놈도 등장하지 않는다. 아버지란 건 일찌감치 바람나 처자식 다 모른 체 딴살림 차려 아예 따로 살고, 난 오글조글한 형제들과 함께 모진 고생을 하는 어머니의 무릎 아래서 고생고생하며 자라는 건전하고 바람직한 유년시대를 형제와 공유하는데, 아 썅노무 것, 딸인 나는 남자형제들에게 집중하는 어머니의 헌신에 속수무책이었을 뿐아니라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삶으로 받아들였고 지금도 그렇다. 언제나 그렇듯 그렇게 키운 아들새끼는 여전히 엄마한테 의존하기도 하고 안면 까고 불효를 저지르기도 한다. 이런 책 읽으면 이 땅에서 그냥 보통남자로 살기도 매우 팍팍해졌다는 걸 금방 알게 되는 교훈적 이야기들. 이런 얘기하는 것도 어째 좀 오싹한 건, 너도 예전에 그렇게 살았으니 이제부터라도 좀 당해봐야 하는 거 아니냐는 지탄이 무서워서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곳곳에서 여전히 발견하는 처녀막 증후군. 책의 100쪽 <새들은 어디로 갔을까>를 보면 이런 묘사가 나온다. "초겨울 녘, 섬진강은 어느 때보다도 유순했다. 강변을 따라 이어져 있는 산줄기의 아랫도리를 그대로 품은 채 완만한 곡선으로 흘러가는 섬진강은 어느 모로 보나 숫처녀를 닮았다. 모래톱마저 여자의 속살처럼 하얗고, 강 안쪽을 할퀴며 휘돌아 나가지 않는 성정 또한 숫처녀의 그것처럼 은근하고 깊었다."  정말 섬진강이 숫처녀를 닮아서 이런 묘사를 했을까? 산줄기의 (하필이면) 아랫도리를 그대로 품은 채 완만한 곡선으로 흘러가는 게 숫처녀의 어디와 닮은 것일까? 숫처녀의 허벅지가 누구의 아랫도리를 '그대로' 품은 채 완만하게 곡선을 만들었을까? 이런 표현은, 섬진강을 처음부터 숫처녀에 비유하기로 결심을 하고 글을 썼기 때문에 나왔다고 본다. '모래톱마저 여자 속살처럼 하얗고 강의 안쪽을 할퀴며 휘돌아 나가지 않는 성정'이라니. 이거 혹시 남자가 숫처녀에게 경도하여 왜곡된 묘사를 한 경우의 대표적 사례라고 말한다면 오히려 이해가 가겠는데, 나만 그런가? 왜 하필이면 숫처녀라고 딱 꼬집어 말했을까? 한 스무살 가량의 남성 독자가 읽었더라면 혹시 깊게 감명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 눈엔 역시 '조또 무리'.


 4. 같은 작품, <새들은 어디로 갔을까>의 109쪽 보면, 대단한 여인의 능력이 나온다. "그러나 은숙은 그들을 사는 대신 싸구려 호프집에 들러 허리를 곧추세우고 앉아 오천 시시의 생맥주를 조갈 들린 듯 마셨다." 이거, 95 퍼센트의 확률을 갖고 말하는데, 구라다. 작가 은미희가 한 자리에 앉아서 조갈 들린 듯 오천 시시의 생맥주를 마셔보지 않아서 이런 묘사를 한 거다. 흔히들 얘기할 줄 모르겠다, 배불러서, 또는 오줌 마려워서 한 방에 오천 시시의 생맥주는 못마신다고. 웃기지마라. '조갈들린 듯' 마신다는 가정이면 오천 시시를 한 방에 다 마시고는 취해서 걸음도 걷지 못한다. 맥주 알기를 우습게 아는데 내가 계산해드리지. 맥주는 알콜 함량이 4%. 5,000 * 4% = 200 그램의 순수 알콜. 소주를 걍 20도라고 하면 한 병이 360 cc니까, 소주 한 병에 360 * 0.2 = 72 그램의 순수 알콜이 들어 있다. 그럼 200 그램은 약 세병의 소주와 같은데 그걸 "조갈 들린 듯", 그것도 상대적으로 몸무게가 안 나가고 간 내 알콜 분해효소가 남성보다 적은 여자가 벌컥벌컥 마셔? 그게 사람야? 경험해보지 않고 그냥 되는대로 생각나는대로 쓰는 거 역시 '조또 무리'.


 5. 173쪽 <편린, 그 무늬들>에선 참 대단한 첫 문장이 나온다. 단편 소설의 경우에 유독히 강렬한 묘사로 글을 시작하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는 거 같다. 이 작품에선 이렇다. "나선형의 홈이 파인 드릴로 양쪽 관자놀이 부근을 뚫는 듯한 통증에 성모는 눈을 떴다." 이 문장만 딱 읽는다고 가정하면 <편린...>의 편린은 앞으로 벌어질 엽기 공포, 잔혹극의 시작이어야 하리라. 어젯밤에 1차 끝나고 2차 노래방가서 끝없이 주는대로 퍼마셔 간 속에서 알콜을 전부 다 분해하지 못해 아세트 알데히드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두통에 시달리는 장면이다. 술꾼의 한 명으로 충분하게 이해되는 장면. 이럴 경우 아침에 눈을 뜨면 농담 아니라 정말로,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할 거 같은 기분, 이러다가 내가 진짜로 죽는 거지, 라는 생각이 저절로 드는 바로 그 장면이다. 암만해도 그렇지, 그렇다고 드릴로 관자놀이를 뚫어버릴 거 같다니 이거 '조또 무리' 아냐? 물론 나도 농담처럼 다음과 같이 말하고는 한다. "철조망 있지? 그걸 왼편 관자놀이로 넣어서 오른쪽으로 뽑는 거야. 그리고 나서 그걸 양끝을 두 손으로 잡고 돌리는 거 같아." "도무지 고개를 수그리지 못하겠어. 눈알 쏟아질 거 같아서." 근데 이건 다 농담 비슷하게 하는 '말'이잖아.


 6. 같은 작품 198쪽에 보면, 앞의 5에서 나한테 술을 그렇게 먹인 친구새끼들이 왜 모였느냐 하면, 여행사해서 돈 좀 번 친구가 위암에 걸려 위를 들어낸 수술을 하고나서, 아, 세상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 싶어 친구들도 만나고, 맛난 것도 먹고 하여간 인생을 즐기려 특별하게 친한 동무들을 불러 모은 것이었다. 문제는 "'자, 자 건배하자, 건배.' 여행사를 하는 녀석이 잔을 치켜들었다." 역시 은미희의 가까운 친지들 가운데 위암으로 수술한 병력이 있는 사람이 없거나 있어도 그리 친하진 않은 거 같다. 위를 들어낸 사람이 술을 마신다? 알콜은 100% 위에서 흡수되는 물질인데 문제는 위가 없다는 거. 위 한쪽을 잘라낸 사람은 죽을 때까지 한 번에 맥주 한 잔 이상을 초과해 마실 수 없다. 그것도 아주 느린 속도로. 죽기를 각오하지 않으면 말씀이다.


 더 써야 해? 에이. 사실은 이 정도에서 메모하는 걸 포기했다.

 그렇다고 은미희의 작품들이 후지다는 얘긴 절대 아니다. 오해는 하지 마시라. 다만 나하고 별로 맞지 않을 뿐이다. 이 책이 2006년에 '우수문학도서'로 선정됐다는 카피가 책 위에 붙어 있는 걸로 봐서 평단의 평가는 내 기호와 차이가 많은 거 같다. 그리고 난 평단의 평가를 내 의견보다 더 믿을 만하다는데 완전히 동의한다. 하지만 이건 내가 쓰는 내 독후감. 평단과 나 아닌 다른 독자의 책에 대한 평가보다 내 의견이 당연히 더욱 중요하다. 아주 전형적인 단편소설의 구조, 이런 걸 평론가들은 탄탄한 구성이라고들 하는 모양인데, 거의 완벽한 교과서적인 구성 위에서 난 그냥 전에 많이 본 듯한 작품들을 읽은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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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7-31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00cc도 아니고 5000cc를 조갈 들린 듯이 마신다구요? 저도 한 술 하기는 하지만 ㅋㅋ 500cc 원샷하는 거, 소싯적에도 힘들던데요. ㅎ 작가가 술을 마셔본 적이 없는가 봅니다.

Falstaff 2017-07-31 15:06   좋아요 1 | URL
예, 틀림없이 원 셧 해본 경험이... 의심스러워요.
지난 시절의 에피소드. 서른 한 살 때던가 그런데 1,000cc를 얼마나 빨리 마실 수 있는지 다섯명이 토론을 하다가 드디어 실험을 하기로 했습니다. 24초 안에 마실 수 있느냐 없느냐, 당시 돈 5만원에 상당하는 재화를 거는 겁니다. 내가 이기면 각자한테 하나 씩이니까 20만원 버는 거고, 못 마시면 20만원 버리는 겁니다. 작가의 말대로 조갈이 난 듯 들이켜고 1,000cc 조끼를 탁자에 딱 내리치는 순간 스톱워치가 멈췄는데, ㅎㅎㅎ 7초 8 이었습니다. 내기는 약속한대로 이루어졌고요. 아, 먼 먼 시절 얘깁니다.
 
아가씨와 철학자 펭귄클래식 12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박찬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전쟁,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대공황 사이의 미국. 드디어 세상은 바뀌기 시작한다. 미국땅에 거대한 설레발 꾼 두 명이 혜성같이 등장하니 이름하여 잃어버린 세대. 여태까지 아메리카를 휩쓸고 있던 지극히 보수적인 세계관은 이들로 인해 허위의 껍질을 벗기 시작했고, 기존 세대는 피어나는 젊은 세대로부터 비아냥과 경멸과 멸시를 받았다. 놀라운 일. 봉건시대 이후 최초로 젊은 세대가 구세대를 조롱하기 시작했던 거다. 물론 이후 젊은세대에 의한 기성세대의 조롱은 지금까지 계속되어 세월이 흘러 기성세대개 된 옛 젊은세대는 또다시 도래한 젊은 세대에 의하여 더욱 큰 조롱과 멸시와 비아냥을 감수할 수밖에 없게 되긴 하지만.

 부르주아 숙부와 숙모의 집에 얹혀사는 아디타 아가씨, 이제 다 커 말만해진 숙녀는 숙부가 위탁받아 키웠음에도 불구하고 숙부가 조언 겸 약간의 잔소리를 꺼내자마자 이렇게 대꾸한다. "그 입좀 닥쳐요." 물론 발랑까지고 버르장머리 없는 숙녀인 것은 맞지만 기존 부르주아 가문 숙녀의 입에서 이런 단어가 나온 것은 문학사상 처음이 아닐까. 여덟편의 단편을 수록한 이 책에 첫번째 소설로 실린 <바다로 간 해적>의 일화다. 숙녀는 숙녀이되 되바라지고 교양없어 보이기는 하지만, 이제 숙녀는 드디어 자신의 기분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단계 혹은 계급의 위치로 올라선 것이다. 기존 율법이 엄정한 눈알을 굴리고 있을 때 이런 숙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을 쓰기는, 글쎄, 쉽지 않았을 거 같다. 1차대전 와중에 야전병원에 입원한 주인공이 엄숙한 수녀 간호사에게 '그럼 내가 뒷발질을 해서 내 불알을 걷어찼을 거 같기라도 하다는 얘기예요?'라고 되물어 수녀의 입을 콱 틀어막은 바 있는 헤밍웨이(이 에피소드는 아마 <무기여 잘있거라>에서 나오는 걸로 기억하는데 정확하진 않다)와 거의 똑같으나 완전히 반대편에 있는 작품들을 이 책 <아가씨와 철학자>에 담았다.

 아가씨들은 해적들을 따라 기꺼이 외딴 섬으로 짱박혀 들어가고, 괜찮은 동네 청년들을 다 개무시하고 오직 하나 더 넓은 세상에서 더 돈 많은 남자의 보호를 받으며 살겠다는 생각으로 북부 도시로 시집가기로 결정하고, 천재 아니면 적어도 수재형 남자를 자기와 같은 계급으로 떨어뜨려 같이 살게하며 와중에 오히려 남자를 능가하는 권세를 누리기도 하고, 은근한 경쟁의식과 충동으로 삼단같은 머리카락을 단발로 자른 다음 그걸 복수하기 위해 은근한 경쟁을 부추긴 사촌의 갈래머리를 옛 인디언이 머리가죽을 벗기듯 댕가당 잘라버린다. 이 책의 제목 <아가씨와 철학자>에서 주장하는 아가씨의 현대적 모습이 이렇다. 행위와 사고의 필터를 제거해버린 직선적 여인들의 등장. 대단하지? 단편들의 내용은 사실 별거 없는데 작품을 20세기 초반에 발표했다는 건 대단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불과 십여년 만에 엄숙한 도덕주의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다신 아메리카 땅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된 것이다.

 남자들? 남자가 주인공인, 물론 상대적으로 여자 주인공보다 더 비중이 있는 주인공이란 뜻인데, 그런 작품도 등장한다. 1차 세계대전의 전쟁영웅으로 귀국한 델리림플. 열렬한 환영을 받다가 2박3일만에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무도 알아봐주지 않는 인간. 시장관사에서 한 달간 기생하다 사실상 쫓겨나온 후 점원으로 들어가 재고관리 일을 하며 박봉에 시달린다. 하지만 이 인간, 전쟁영웅으로 누릴 거 누려본 것이 오히려 큰 탈이라서 도무지 박봉을 받아 그걸로만 산다는 걸 용납할 수 없다. 그리하여 선택한 것이 사소하기 짝이 없는 강도, 절도. 몇 건을 성공시켜 세상 참 편하구나, 조금 더 벌어 라틴 아메리카로 뛸 생각을 하다가, 어떻게 될 거 같으셔? 언제나처럼 여기까지만 얘기함.

 또는 부르주아 출신의 한 남자가 인생을 살면서 일방적으로 아구통을 얻어맞는 사건을 네 번 당하는데 이 몸집 크고 건장해서 온갖 스포츠에 능한 남자 새뮤얼 매러디스는 인언이폐지하고 싸움을 했다하면 맞을 이유가 없는 인간이지만 하여간 일방적으로 네 번을 얻어 터지면서 인간이 해야할 도리에 눈을 떠가는 과정을 실었는데 과연 어떤 사건이었으며 그 후 인간 매러디스는 어떻게 변했을까 하는 이야기도 있다.

 재미난 책. 300쪽이지만 하루면 다 쫑낼 수 있을 정도로 휙휙 지나간다. 때마침 여름이 극을 달리고 있는 시점에 당신이 휴가지에 있어 하루종일 놀고 먹느라 이제 피곤한 오후를 맞았다면,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책 가운데 한 권이리라. 글쎄 믿어보시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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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17-07-27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대한 게츠비도 제대로 이해를 못했는데,
이 책은 좀 더 휙휙 넘어가나보네요^^

Falstaff 2017-07-27 14:02   좋아요 0 | URL
예. 사람 사는 이야기니까요.
휴가 가셔서 놀다가 지쳐서 책이나 좀 볼까, 할 때 아주 직빵일 겁니다. ^^

잠자냥 2017-07-27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츠제럴드 작품 가운데 전 여기 실린 단편들이 가장 좋더라고요. 위대한 개츠비는 여기 단편에 비하면 망작....

Falstaff 2017-07-27 14:23   좋아요 0 | URL
푸하핫! 잠자냥님이 이 책 좋아하시는 줄은 독후감 업로드 하면서 알았는데 이 정도인지는 몰랐습니다. ㅋㅋㅋ
근데 번역이 하도 개판이라서 그렇지 <밤은 부드러워>도 좋지 않으셨어요?

잠자냥 2017-07-27 15: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흐흑.... <밤은 부드러워>는 다른 번역본으로 나오면 다시 읽어보고 판단하려고요.. ㅠㅠ 암튼 <밤은 부드러워>도 <위대한 개츠비> 보다는 좋은 작품 같아요.
 
신들은 목마르다 뿌리와이파리 알알이 3
아나톨 프랑스 지음, 김지혜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11년 4월
평점 :
품절



 세계적 명성에 비해 우리나라에선 아나톨 프랑스에 굉장히 박하다. 그의 책이 궁금해서 검색해보니 이 책 <신들은 목마르다>를 빼고 이이의 단행본은 전부 품절이고, 소위 말하는 메이저 출판사에선 한 권도 책을 내지 않았다. 우리나라 출판사가 유난히 좋아하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인데도. 책 뒤에 아나톨 프랑스에 관해 약간 써놓은 걸 보면 다작의 작가였으며 에밀 졸라와 함께 드레퓌스 사건에 적극 참여한 경험을 계기로 그의 문학관이 사회참여적으로 획기적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드레퓌스 사건 무렵을 배경으로 한 소설책에선 아나톨 프랑스의 이름을 쉽게 발견할 수 있고, 나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으며 기회가 있으면 아나톨 프랑스의 작품을 겪어봐야겠다고 마음 먹었었던 거 같다. 지금 읽고 있는 스콧 핏제럴드의 단편집에서도 단편 <바다로 간 해적>의 여주인공 아디타가 읽고 있는 책이 아나톨 프랑스가 쓴 소설 <천사의 반란>이다(<천사의 반란>도 번역본이 없다). 서양소설을 유심히 살펴보면 작중 등장인물이 프랑스의 책을 생각보다 많이 읽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그들의 대화 중에 이름이 등장하던지. 오래 전에 얘기했듯이 난 책 중 등장인물이 거론하는 작품에 상당한 호기심을 갖고 있는 인종이라 애초부터 이이에 대한 궁금증이 많았는데, 도무지 책, 우리말 번역본을 구할 수 있어야지. 그러다가 드디어 한 풀었다.

 책 표지를 보면 세로무늬 긴 바지(상퀼로트)에 조끼와 블라우스(카르마뇰), 붉은 모자를 썼던 거 같은 머리의 발목 잘린 인민의 조각상이 왼팔에 삼색기를 들고 있다. 그럼 당연히 1789년 시작한 프랑스 혁명 시기가 소설의 배경이란 것쯤은 누구나 알 수 있을 터. 원래 조각상은 오른 팔엔 착검한 소총을 들었지만 상의 손목이 부러져나가 땅바닥에 그냥 널브러져 있다. 서준환이 쓴 <로베스피에르의 죽음>에 앞서 이 책을 읽었더라면 더 재미있었겠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었는데 그건 두 작품이 거의 동시대고, 등장인물도 많이 비슷해서이기 때문이다. 아나톨 프랑스의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서준환이 이 책을 참고했을까? 아닐까? 좀 궁금했다. 많이는 아니고. 이 책이 '뿌리와이파리' 출판사에서 나온 시점이 2011년, 서준환이 <로베스피에르의 죽음>을 낸 것이 2013년. 그러면 적극적을 참고하기엔 시간이 좀 부족했을 거 같고, 그렇다고 읽어보지 않았다고 말하기는 힘들고, 그런 수준. 확실한 건, <로베스피에르...>의 클라이막스, 파리 코뮌의 명령을 받고 파리 시청에 모인 국민공회 위원, 그리하여 기꺼이 생쥐스트, 로베스피에르와 더불어 단두대에 오르게 되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이 바로 <신들은 목마르다>의 주인공 가믈랭이다.

 신들은 목이 말랐다. 때는 1794년. 이미 많은 인류들은 아직도 신은 목이 마르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뭐에? 신들은 아직도 피에 목이 마르다. 원제 Les Dieux ont Soif. 확실히 신을 복수로 표기한다. 따라서 '신들'인데 복수형인 것을 보면 기독교나 이슬람, 그리고 유대교의 유일신은 아니다. 18세기 유럽인들이 생각할 수 있는 다신多神이 설마 힌두나 도교의 다신이겠는가. 이교도라고 칭하던 그리스의 다신이겠지. 그것도 아니면? 혁명으로 신권이 벌써 인간에게 허여된 것인가? 에잇, 그건 모르겠고, 하여간 신들, 혹은 신처럼 전능한 인간들은 혁명이 진전될수록 더 많은 피를 요구하게 된다는 걸 의미한다. 일찌기 마오가 그랬잖여?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거꾸로도 마찬가지다. 총구는 권력에서 나온다. 무슨 뜻인가 하면, 권력을 갖고 있는 자가 혁명의 순결함을 지키고 위대한 공화국을 만들기 위하여 무차별로 총구를 사용하게 된다는 말씀. 백퍼 내 말이니 어디가서 쓰지 마시라. 개망신 당해도 책임 안 진다. 이런 인간형의 특징은,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학살과 변론없는 사형판결과 집행 같은 것은 혁명 혹은 혁명이라고 자신이 믿는 행위의 순결함과 지고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불가피하게 벌어져야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는 것.

 이상주의자 화가 가믈랭이 우연한 기회에 혁명공회의 배심원으로 임명되어 졸지에 코뮌의 핵심멤버, 진짜 핵심은 아니지만 적어도 재판에 회부된 피고의 목숨을 좌우할 수 있을 정도의 핵심멤버로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수직이동시킨다. 가뜩이나 이상주의자 적인 성향의 가믈랭은 날이 갈수록 더욱 이상적인 혁명과 인민의 나라, 순결한 공화국의 완성을 위해 공화국의 적들을 단두대 아래로 밀어넣기 위해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 이젠 좌우로 아는 사람도 없고 절친도 없고, 친척, 애인, 심지어 부모형제도 없는 인간, 즉 괴물이 되버리고 마는 과정. 이게 이 책의 모든 것이다.

 지미럴 변증법. 정반합? 혁명의 피로가 과중하게 인민들을 끝까지 밀어부친 순간, 날을 숨긴 온건주의자들이 반혁명적이라고 볼 수 있을 반동을 저지르고, 그리하여 등장하는 이가 프랑스혁명을 종식시켰다고도 볼 수 있는 키 작은 사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아닌가. 이게 역사고 인생이다. 죽 쒀서 개주는 일. 아냐? 아님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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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7-26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예전에 아나톨 프랑스의 <타이스>를 아주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무희 타이스를 구원하고 말겠다는 당찬(!) 포부로 악전고투하는 수도원장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이 작품은 근데 우리나라 출판사에서 누가 다시 안 내주나 모르겠습니다. 워낙 아나톨 프랑스 작품이 번역되어 나온 게 없어서 좀 팔릴 거 같은데.. 흠.

Falstaff 2017-07-26 11:13   좋아요 0 | URL
진짜 미스테리예요. 아나톨 프랑스가 유독 대한민국에서 이리 박대를 당하는 것이.
저도 어제 읽었는데, 아나톨 프랑스가 에밀 졸라 장례식에서 한 연설, 정말 기가 막힌 명문장이더라고요.
프랑스 정부가 졸라의 레지옹 도뇌르 서훈자격을 박탈하자 이미 훈장을 받은 아나톨이 다른 훈장도 아닌 최고급 레지옹 도뇌르를 반납해버리는 장면도 압권이고요.
이런 전력을 보면 창비나 실천문학사, 한길사 같은데선 기꺼이 내줄 만한데 참.
우리나라에서 아나톨 프랑스를 전공했거나 연구한 사람이 적어서 그렇지 않을까 하는 게 제 생각입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