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 영역의 확장
미셸 우엘벡 지음, 용경식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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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미셸 우엘벡의 첫번째 장편소설. 이 책을 발간한 때가 그의 나이 36세. 소설가로 한창 무르익을 무렵. 그러나 그는 (내)예상과는 달리 시를 써서 문단에 데뷔를 하고 이미 두권의 시집을 상재한 다음이었다고, 작가 소개에 나와있다. 소설 데뷔작을 그의 작품으로는 네번째로 읽었다. <소립자>와 <지도와 영토>를 읽은 다음에, 글쎄, 그 다음이라면 어떤 우엘벡을 읽어도 만족하기가 쉽지 않을 거 같다.

 게다가 출판사 열린책들은 이 책을 품절상태로 내버려두고 있고, 중고책 가게에서도 그리 흔하게 구경하는 편은 아니다. 누가 먼저 읽어봤다면 틀림없이, 굳이 찾아가면서까지 읽을 필요가 있겠어? 하고 반문했을 듯. 그래서 그야말로 굳이 찾아 눈에 띄자마자 사 읽지는 않았을 듯.

 품절 상품이라니까 까놓고 얘기하는데, 여기서 우엘벡이 말하는 "투쟁영역"이 뭔가하면, 자연상태, 만인이 만인에 대한 이리(狼: Wolf)상태를 언급하는 거 같다. 먹이와 섹스를 놓고 유일한 강한 수컷만이 둘 다 취할 수 있는 와일들링 필드. 인간세계로 치면, 힘이 있거나 돈 많은 놈들이 다수의 여성을 취하는 반면, 학력도 후지고, 돈도 없고 생기기도 별 볼 일 없는 찌질한 수컷은 몇 년에 한 번 연애를 할까말까한 경우, 그걸 투쟁영역이라고 결론짓고, 보다 구체적으로 자본주의 경제와 자본주의 섹스를 투쟁영역이라고 분명한 단어로 말한다.

 집 밖, 내가 밥 빌어먹고 사는 직장의 정문 한 발자국 바깥부터 시작하는 정글 상태. 오직 경제논리에 의하여 재화와 섹스가 결정되는, 뭐 별로 새로울 거 없는 이야기. 그리하여 책은 두 명의 찌질한 인간이 등장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바, 둘 다 좋은 직장에 다니는 전문 엔지니어지만 하나는 애인과 헤어진 2년 전 이후 한 번의 연애도, 시시한 섹스도 하지 못했으며, 직장에선 자기보다 어린 상사로부터 은근한 해고 위협을 눈치채는 인간이고, 다는 하나는 유대인을 부모로 둔 건 이젠 아무 까탈이 아닌 세상을 만났으나 결정적으로 너어어무 못생긴 외모로 인해 전문 엔지니어임에도 불구하고 낼 모래 서른의 나이에 육박하는데 아직도 총각 딱지를 떼지 못한, 그러나 여태까지 살아온 생애가 억울해서 기어이 딱지를 떼보려 여기저기 쉼없이 껄떡대지만 그때마다 딱지를 맞는 한심한 인간이다.

 다시 말씀드리는데, 별 볼 일 없는 작품. 절판 상태가 해소되면 틀림없이 출판사 열린책들이 열라 광고를 해댈 것이다. 유혹에 넘어가건 아니건 그건 당신 마음. 그러나 내 의견을 보태자면, 세상엔 이거 말고도 읽을 거리가 넘쳐난다는 거. 그럼에야 굳이 나처럼 찾아서 읽을 필요는 더구나 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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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랑비 속의 외침 - 2판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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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번째 읽은 위화.

 어째 그리 하나같이 궁상맞은지. 위화가 1960년생. 그의 기억 속에 있는 중국이 딱 그럴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의 중국하고 비교하면 뽕나무 밭이 넓은 바다로 서너번은 바뀌었지만. 격심한 현대사의 파도를 뚫고온 세대의 끝부분에 위화와 같은 1960년 생들이 있을 것이다. 이건 위화와 그의 동시대 사람들이 다음 세대와 비교해 놀라울 만큼 풍부한 추억자산을 소유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현대의 젊은 세대들도 위화의 작품들을 읽으며 자신들의 부모가 이런 시대를 살아내 지금에 이르렀을까, 조금쯤 의심을 하기도 하고 또 많이는 놀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대한민국도 그렇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10년 안쪽에 태어난 이들을 베이비 부머라고 일컫는데, 이들은 워낙 대가리 수가 많아 세상에 나오자마자 전쟁 후의 극심한 빈곤 속에서 또래끼리 끔찍한 수준의 경쟁을 겪으며 성장하면서, 궁상스런 극빈부터 천민자본주의와 재벌들에 의한 정경유착 같은, 유럽의 백인들은 한 세기 이상 걸려 경험할 것을 한방에 다 겪으며 살아온 것하고 비슷하다. (이야기가 또 경상남도 삼천포 시로 빠졌다.) 하여간 위화가 (내가 읽은 네 편의 장편소설로만 판단하면) 초지일관 굳은 마음가짐으로 자신의 소년시절에 겪은 듯한 중국의 일반 농민 계급, 그것도 아주 날것의 솔직하기 짝이 없는 하이퍼 레알리즘 식 묘사가 현대 중국인들에게 대단히 신선하지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을 것 같다.

 <가랑비 속의 외침>은 작가가 처음 발표한 작품이란다. 읽어보면 첫작품이란 수식이 어울리기도 하지만, 처음부터 유명작가의 운명을 띠고 등장했다, 라는 표현이 어울릴 수도 있다. 물론 최용만의 번역이 유독 위화와 궁합이 맞아 한글로 읽는 이이의 작품으로 그렇게 생각할 지 모르겠으나 (책의 마지막에 '역자 한 마디'에서 최용만은 위화와의 친밀한 관계를 은근히 과시하기도 한다), 아주 쉬운 문장과 '촌철살인'이란 낱말의 사전 그대로의 뜻을 분명하게 시연하는 난데 없는 대사의 상쾌함과, 도무지 예상하지 못할 등장인물들의 행동 또는 행위,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아주 평범한 일상에서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던 바늘 끝을 휙, 나꿔채 눈부신 문장으로 만들어내는데엔 이이와 어깨를 견줄 이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우석대학 문창과 교수이자 시인인 안도현이 위화의 소설을 (이 책의 뒤표지에 나와있다) 이렇게 묘사한다. "위화의 소설은 끈적끈적하고, 거무튀튀하고, 때로는 붉다." 소설을 어떻게 읽었는가에 관해서 시인의 의견은 그리 참고할 만하지 않다. 역시 제일 중요한 건 독자 개인의 느낌이니. 난 차라리 이이의 작품 <가랑비....>는 '반투명한 안개 속을 유영하는 맑은 눈eye'이라고 하고 싶으니, 안도현과 완전히 반대의 느낌이다.

 화자 쑨광린은 삼형제 가운데 둘째 아들. 책은 화자가 이야기하는 석공 출신 증조할아버지와 비참한 최후를 맞는 증조할머니, 할아버지 쑨유위안과 부잣집 출신의 전족을 한 할머니, 개잡종처럼 보이는 아버지 쑨광차이와 어머니, 그리고 삼형제 쑨광핑, 쑨광린, 쑨광밍의 삶 가운데 중요한 것들을 기억해낸다. 읽으면 독자가 혹시 이거 작가 자신의 이야기 아냐, 라고 오해하기 딱 맞을 정도의 능청은 (이 책이 데뷔작이란 걸 기억하시라!) 벌써부터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이야기는 아니고, 자기 기억 속의 1960년대, 그니까 한 1965년 전후의 중국 농촌에 한 가정을 상정하여 당시 중국의 가난하고 불행한 농촌의 삶을, 한 집안에 집중포화를 퍼부어 만들어낸 소설이다. 그리하여 처음부터 '나' 쑨광린은 시내에 돈 좀 있고 슬슬 바람도 피우는 건장한 체격의 남자의 손에 이끌려 양자로 팔려가고, 5년만에 말도 없이 파양당해 다시 고향, '남문'으로 돌아와 소년시절을 끝마치고 또다시 '남문'을 떠날 때까지,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세월이란 게 무서운 것이, 일을 당할 때는 참 무섭고, 아프고, 슬프고, 지랄맞고, 억울하고 그래도 나중에 그때를 돌아보면, 아 추억이란 이름의 진통제, 그냥 담담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모양이다.

 당연히 성장소설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이런 류의 소설은 우리나라에서도 얼마든지 읽을 수 있는데, 그러나 <가랑비....> 만큼의 질량으로 사람을 웃기게하고, 울게도 하고, 간질이기도 하는, 간단하게 말해 딱 집어서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같은 문화권의 작품이라서 그럴까? 책의 스토리는 굳이 소개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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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의 대가 열린책들 세계문학 78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지음, 김수진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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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년 전 작가 아르투로 페레스 로베르테의 스릴러 소설 <플랑드르 거장의 그림>을 참 재미없게 읽었는 바, 장안의 숱한 독서가들의 평가와 내 생각이 많이 달라 언젠가 이이의 책을 딱 한 권만 더 읽고 다신 읽지 않던지 좀 더 읽던지 결정을 하겠다고, 즉 보류 작가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가 이번에 독파했다.

 글쎄, 이 정도면 로베르테를 스릴러 소설가라고, 장르문학의 범주에 가두어 두어도 괜찮을 거 같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주장하는데, 순문학하고 장르문학하고 굳이 분류하는 건 절대로 순문학이 우월해서가 아니라 특정 장르를 좋아하지 않는 독자들이 책을 선택할 때 미리 알아두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순문학이 우월해? 개똥 밟아 미끄러져 뇌진탕 걸릴 얘기.

 이 책, 재밌다. 비록 내가 스릴러 소설을 그리 즐기지 않지만 하여간 재미나게 읽었다. 19세기 중후반, 나를 포함한 거의 모든 세계인이 스페인 역사에 관심이 없던 시대. 뭔 말씀이냐 하면, 인류 역사상 드라마틱하게 사회, 군사, 사상, 문학 등이 변혁하고 있는 무대에 전시대적인 절대왕조가 아직도 숨통을 이어가 그 결과로 당대 유럽의 모든 방면에 너댓 발자국 뒤쳐졌던 시기. 당시 스페인은 무엇보다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기였던 모양이다. 이게 다 스페인의 부르봉 왕가가 가문의 번영에만 관심이 있고 세계의 흐름을 나 몰라라 하는 바람에 이미 전 유럽에선 지독하게 겪어서 이젠 슬슬 이력이 쌓이고 있는 중인 산업혁명의 부작용을 제대로 겪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으로 새롭게 대두된 건 부르주아 계급만이 아니라서 비록 스페인 부르봉 왕가를 21세기인 지금까지 무너뜨리진 못했지만 왕가와 귀족, 부르주아들에게 위협적으로 성장해버린 도시빈민 등의 프롤레타리아 계급. 그러나 다수가 항상 승리하는 건 아니다. 이들을 등에 업고 적어도 공화정이나 그것도 아니면 정권을 스스로 탈취할 수 있다고 믿는 장군들이 등장했으며, 왕가와 반역의 세력 사이에서 언제라도 승자의 편에 가담할 준비를 완전히 마친 그룹들은 왕가에도, 반역자에게도 금품을 비롯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물론 다 보험이지, 보험. 세상 다 그런 거다. 새삼스럽지도 않고 스페인스럽지도 않은 현상. 시저와 브루투스 사이에도 이런 작자들 없었을 거 같아? 장도영과 박정희 사이에, 장태완과 전두환 사이에서 간보기에 바빴던 장군들은 없었을 거 같아? 다 그런 거다.

 얘네들의 공통점은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는 거. 기꺼이 양편에서 얻은 정보를 또다른 편에게 전해주기도 하며 누가 더 센지 가늠하기에 눈알이 사팔뜨기가 될지언정 왕가와 반군의 공통적 지지자, 증거없는 지지자로 존재하기 바라지만, 간혹가다가 자신들의 이중첩자짓이 들통이 나거나, 누군가에게 발각됐지만 누군가가 입을 다물고 있거나, 입을 다무는 조건으로 상당한 보상을 요구할 수도 있겠다. 1860년대의 스페인. 아직도 가톨릭의 성전에서 자신의 죄의 보속과 영생과 천국의 유혹에 국민 절대다수가 함몰되어 있던 시기, 이사벨 여왕이던가, 하여간 철딱서니 없는 여왕 치세 때 공화정의 기치를 내건 장군이 등장해 결과적으론 여왕을 왕좌에서 내리는 데는 성공하지만 왕정을 종식시키진 못한다. 바로 이 앞 시기. 반역이 도처에서 왕권과의 전투에 승리하기 시작할 때가 책의 시대적 배경이다.

 여기에 멋있게 등장하는 검술의 대가 돈 하이메. 일찌기 프랑스 검술협회 정회원이자, 프랑스 내 가장 위대한 검사劍士를 사사한 검의 대가. 그러나 세월은 흘러흘러, 이젠 검술로 다져진 육체이지만 시간을 이기지 못해 은발을 휘날리는 신사. 낡은 프록코트와 넥타이를 깔끔하게 차려입은, 신사의 면모를 결코 잃지 않는 노 검객. 한때는 무수한 신공을 자랑했던 숱한 검사를 전부 무릎꿇렸든지 세상을 뜨게하고 중원을 평정했으나 이젠 생활의 방편으로 귀족이나 부르주아 자제들에게 검술을 가르치며 호구지책을 삼고 있다. 여기에 새로이 두 명의 젊은 제자를 받으면서 얽히고 설킨 스릴러 드라마는 시작한다. 무지막지한 재산을 물려받아 도박과 여자로 날새는지 모르지만 당대 그룹 가운데 최고의 검술을 자랑하는 백작 돈 루이스. 경천의 미모를 자랑하는데다가 입술 옆에 난 흉터가 마치 한때 열풍을 일으켰던 미인점처럼 결정적으로 미모의 액센트를 주는 돈나 아델라. 돈나 아델라 역시 기본이 아주 탄탄한 검술의 보유자이며 늙은 검사 돈 하이메로부터 필사의, 무적의 검법 하나를 배우기 위해 접근하는데, 이 문학작품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소설. 돈 하이메는 근 30년 이상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필연적으로 돈나 아델라를 사랑하게 되지만 세상에 그리 쉽게 사랑이 맺어지는 소설이란 없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돈나 아델라는 부자 백작 젊은이 돈 루이스와 진한 사랑을 나누는 사이로 발전해버리고 만다. 원래 그런 거다. 늙은이의 사랑은 슬픈 법.

 자, 여기까지.

 스릴러 소설의 줄거리를 몽땅 알려주는 건 무참하다. 시중에 이 재미난 소설의 결말까지 몽땅 다 소개한 글들이 있기 때문에 만일 이 책을 읽고자 마음 먹으신 분이 계시는데 지금 이 독후감을 먼저 읽었다면 내게 고마워하셔도 된다. 독자가 책을 읽어가면서 나름대로 추리해가며 그게 맞는지 아닌지를 따지는 재미, 그게 스릴러 소설을 읽는 진짜 재미니까.

 다시 한 번 강조. 이 책을 진짜 읽어보실 요량이라면 다른 독후감이나 서평같은 거 읽지 않으시기 바람. (잘난 척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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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펭귄클래식 59
윌리엄 S. 버로스 지음, 조동섭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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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로스는 미국에서 케루악과 더불어 비트 세대의 대표선수로 인식되고 있는 작가라고 한다. 하는데, 하지만, 난 <길 위에서>는 정말 가슴에 팍 와 닿게 읽은 반면 버로스의 <정키>하고 <퀴어>엔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다. 지금 생각나서 <길 위에서>를 검색해보니까 종전 후에 잭 케루악이 앨런 긴즈버그, 윌리엄 버로스, 닐 케시디와 함께 미대륙을 횡단하고도 모자라 멕시코시티까지 휘저으며 온갖 골통짓을 한 걸 토대로 쓴 작품이라고 한다. 그 작품에선 젊은이들이 한바탕 난장판을 벌이는 것이 전후 세대의 절망과 무대책과 더 이상의 도덕률을 폐기해버리고자 하는 몸부림인 것처럼 받아들였는데 윌리엄 버로스는 그가 구사하는 언어와 주제가 케루악과 비교해 훨씬 과격해서 그런가 작품에 공감하기는커녕 좀 거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케루악은 알콜의존증과 무책임에 매우 근접한 프리섹스, 버로스는 마약과 동성애의 범벅. 둘 다 대책없는 청춘들이긴 하지만 버로스는 케루악보다 약간 더 나이든 미국인이 (버로스 스스로가 저지른 범죄, 실수로 권총을 발사해 아내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으로 여길 수 있는) 모종의 사건과 관계하여 귀국할 수 없는 처지에서, 어디에서 돈이 꾸준하게 생기는지는 몰라도 멕시코시티 내에서 특별한 돈벌이에 관한 언급 없이 끊임없이 마약성 약물과 동성애를 갈망한다. 분명 남의 이야기인데 왜 내가 불편할까?  더러운 마약을 이야기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남자가 남자에게 사랑이 아닌 욕정을 느껴 끊임없이 쫓아다니기 때문일까. 남자가 여자에게 욕정을 느껴 끊임없이 쫓아다니는 걸 읽으면서 난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가? 아니다 그것도 불편하다. 두 경우 다 매우 불편하다. 그럼 내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불편하다고 얘기하는 것에 관해 이의 없으리라. 글로 쓴 건 지워지지 않는다. 이 책을 읽는 일은 매우 불편했다. 당신이 이 책을 어떻게 평하는지에 관계없이 이 책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버로스를 읽지 않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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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8-22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마지막으로 버로스를 읽지 않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잭 캐루악이 버로스보다는 왜 좀더 비트제너레이션의 대표처럼 여겨지는 까닭도 알겠더군요;; ㅋㅋㅋㅋ

Falstaff 2017-08-22 10:29   좋아요 0 | URL
케루악도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
하여간 버로우스, 정말 맘에 들지 않아요. 책 서문에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면 멕시코시티에서 약과 남자들한테 빠져 있을 동안 돈은 미국에서 늙은 아버지가 정기적으로 부쳐주었다는군요. 에휴, 난 그런 아빠도 읎고 참 거시기.... ㅎㅎ

잠자냥 2017-08-22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는 케루악도 그닥; ㅋㅋ 근데 그래도 버로스 보다는 나은 듯;; ㅋㅋ 이 비트제너레이션을 다룬 영화 중에 <킬 유어 달링>이란 작품이 있는데요, 거기 보면 정말 버로스 뺀질이 부잣집 도련님... 으윽. 인간적으로도 아무런 정이 안가는 캐릭터입니다.

Falstaff 2017-08-22 11:11   좋아요 0 | URL
ㅎㅎㅎ 바로 오늘 아침에 어느분이 그 영화 소개해줬어요.
그거 보면 해리 포터로 유명한 다니엘 레드클리프한테 완전히 정 떨어질 수 있다고 하시던걸요. ㅋㅋㅋ 그래서 모르면 걍 지나겠지만 알게된 김에 한 번 볼까 궁리중입니다. ㅋㅋㅋㅋ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민음의 시 149
허연 지음 / 민음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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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표제는 나쁜 소년이 서 있다라고 표기하고, 각 시의 제목은 <간밤에 추하다는 말을 들었다> 이런 식으로 써야 마땅하나 그딴 거 구분하지 않고 다 <우짜구저짜구> 이렇게 쓰겠다. 특수문자 골라오기 귀찮아서.

 

  처음 들어보는 시인. 근데 많고 많은 이름 가운데 허연이 뭐야, 허연이. 그럼 미세스 허연의 이름은 하얀이야? 이건 뭐 그냥 지나가는 말. 하여간 책 뒤에 나오는 허연의 약력을 보니 1966년에 태어나서 1991년에 현대시세계신인상으로 등단했으며 이 시집은 2008년에 세상 밖으로 밀어냈다. 42세 때. 민음사 시집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 목차 바로 앞 페이지에 자서自序라고 스스로 시집을 시작하는 말씀이 적혀 있는 거. 허연은 자서를 어떻게 써놓았는가 하면,

 

 

 自序

 

 결국,

 범인(凡人)으로 늙어 간다.

 다행이다.

 

 200810

 허연

 

 

  기껏 마흔 두 해를 살아보니 젊어서 시인이라고 해봤자, 허연의 말대로 마흔 넘으니 결국 범인, 평범한 사람으로 나이 먹어간다는 고백. 근데 그게 다행이라는 천만다행의 자각. 주변에 시인으로 등단한 사람 몇 명 있다. 이들의 공통점? 가관. 시인이 가관이란 뜻이 아니라 시인의 주변에 있으면서 시인이 되고 싶어 하는 지망생들, 시인에 대한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환상을 갖고 시인을 바라보는 보통 인간들의 몰지각한 우상숭배가 꼴불견이란 말이다. 등단이란 것이 그렇게 무서운 법이다. 한 번은 내가 등단 시인을 우상숭배하는 시인 지망생에게, 너도 시인이다. 시를 쓰고 읽고 진짜로 좋아 몇 수를 외고 있으면 그이가 시인이지 꼭 등단을 해야 시인이냐, 했다가 만장하신 신사숙녀 앞에서 개망신 당한 적도 있다. 물론 그런 경험이 있었다고 뜻을 굽힐 내가 아니라서 아직도 난 그렇게 생각한다. 다만 등단하지 않아서(이것도 못해서가 아니다) 공인받지 못한 것일 뿐이라고. 근데 내가 개망신 당할 때, 문제의 그 시인새끼는, 숱한 인간들이 자신을 숭배하는데 그게 기분나쁠 이유가 없으니 그저 싱긋, 웃음 짓고만 있었다. 분명히 그랬다. ? 자신 스스로 조금은, 어느 정도는 그냥 보통 인간과 애초부터 다른 종자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리하여 젊은 시절을 보통 인간과 애초부터 다른 종자로 살기 위해 시를 쓰고 월月도 아니고 연年 5백만 원 안팎의 수입으로 늙으신 부모 등골을 휘게 하며 살다가 이제 나이 먹으면 대개 젊어서 숭배받으며 몸에 익었던 다른 종자 의식이 점점 희미해지다가 급기야 나도 그냥 보통인간임을 자각하는데, 그걸 다행으로 생각한다니 참으로 다행이다.

   허연의 두 번째 시집이라고 하는 이 책 <나쁜 소년이 서 있다>를 눈알이 뚫어지게 읽어보면 크게, 그동안 시인의 건강에 문제가 있었는데 혹시 귀를 비롯한 이비인후과 질환이 아니었는가 싶고, 분명 피라미드를 포함한 북아프리카 사막지대를 여행했으며, 그간 스스로의 상태를 빙하기로 표현하는 일종의 혹한기를 보냈다고 여기며, 시를 쓰는 것도 일종의 자연상태, 즉 생태의 시각으로 보기 시작한 거처럼, 네 가지 부류boundary로 나눌 수 있을 거 같은데 당연히 예외는 있는 법이라서 여기에 포함시키기 애매한 시도 물론 있다.

  ①는 전적으로 개인적인 일상이라 그걸 시로 써놓았을 경우에 독자가 시인과 더불어 같이 백년 된 병원에서 귀여운 환자가 되어 베토벤도 있는데 이 정도야, 할 수도 없고(<박수소리> 40), 같은 모래 언덕에 서서 저 멀리 지평선에서 푸른 하늘이 1차 하늘, 2차 하늘, 3차 하늘, n차 하늘이 다 모여 마치 바다 같아서 그 위를 지나는 위그르 족(위그르 족이라면 이거 고비사막일 텐데 끙) 처녀는 틀림없이 바다 위, 물 위를 걷는 것(<바다 위를 걷는 것들> 34)처럼 보이길 바라지는 않는다.

  내가 주목한 것은 슬픈 빙하기 시리즈다. 이제 시인이 자서에서 밝힌 것처럼 어느덧 범인, 평범한 보통사람이 됐다. 평범한 보통사람? 시인이 보는 보통의 인간은 이런 종류다.

 

 

 

  슬픈 빙하시대 2

 

 

  자리를 털고 일어나던 날 그 병과 헤어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한번 앓았던 병은 집요한 이념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병의 한가운데 있을 때 차라리 행복했다. 말 한마디가 힘겹고, 돌아놉는 것이 힘겨울 때 그때 난 파란색이었다.

 

  혼자 술을 먹는 사람들을 이해할 나이가 됐다. 그들의 식도를 타고 내려갈 비굴함과 설움이, 유행가 한 자락이 우주에서도 다 통할 것같이 보인다. 만인의 평등과 만인의 행복이 베란다 홈통에서 쏟아지는 물소리만큼이나 출처불명이라는 것까지 안다.

 

  내 나이에 이젠 모든 죄가 다 어울린다는 것도 안다. 업무상 배임, 공금횡령, 변호사법 위반. 뭘 갖다 붙여도 다 어울린다. 때 묻은 나이다. 죄와 어울리는 나이. 나와 내 친구들은 이제 죄와 잘 어울린다.

 

  안된 일이지만 청춘은 갔다.

 

 

  시는 읽는 사람 마음대로 해석할 수 있으며 그런 자의적 해석은 언제나 정당하다는 인식 아래서 이 시에 관해 말하면, 이 시야말로 지랄 염병을 하는 시다. ‘한 번 앓았던 병은 집요한 이념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병의 한가운데 있을 때 차라리 행복했다는 진짜 시인이 병을 앓았던 시기와 경험을 뜻할 수도 있고 본격적으로 시를 썼던 한 시절을 은유할 수도 있으며, 이 두 경우를 적절하게 합해서 하나로 은유하고 있는 줄도 모른다. 나는 세 번째, 진짜 병을 은유하여 한 때 목숨걸고 시를 썼던 시절을 얘기하는 걸로 이해하겠다. 그러니 그때가 행복했겠지. 한데 그 시절이 정말 행복했었던 것도 세월이 지나 당시를 뒤돌아보니 그렇다는 말씀이다. 이제 시인은 혼자 술을 마시는 것을 자유스러움과 편함이 아니라 비굴과 설움으로 느끼며, ‘만인의 평등과 만인의 행복즉 술 마시는 일이, 홈통에서 쏟아지는 물소리, 즉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술 한 잔의 짜릿함 대신 출처불명의 난데없는 일이 돼버리고 만다. 여기까진 넓은 아량으로 봐줄 수 있는데(시인이 암만해도 열등감에 절어 있는 모양이다. 혼술의 아름다움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지경이니), 문제는 다음 연이다. 이제 40대가 되어 모든 죄가 다 어울리는 나이로 접어들었다고 선언하는 건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업무상 배임, 공금횡령, 변호사법 위반이 어울리는 나이란 세상에, 없다. 그럼 20대는 폭력과 살인, 강간이 어울리는 나이? 물론 시인은 나와 내 친구가 이런 모든 죄와 어울리는 나이라고 했으니, 시를 쓰지 않으면, 이라는 가정을 달아 그런 범죄가 어울린다고 어리광을 부리고 있는 줄도 모르겠으나(암만해도 어리광이 맞는 거 같음. 이런 오만이 어딨어!) 몇 번을 읽어보고 또 읽어봐도 기분 나쁘기 짝이 없다. 더구나 짧은 마지막 연, 청춘이 갔기 때문에 죄가 어울린다니. 이런 시를 읽으면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건, 창백한 시인의 허약한 고백. 청춘이 백번을 떠나가도 모든 죄가 어울리는 나이란 세상에 없다. 사랑하지 않는 죄 말고는. 시인들이 흔히 범하는 죄. 그냥 읽으면서는 참 맛있는 문장들을 나열하면서 속으론 나약하고 썩는 냄새가 나는 말을 교묘하게 숨기는 일. 그게 시적 범죄다.

  다른 시 하나 더 읽어볼까?

 

 

  살은 굳었고 나는 상스럽다

 

 

  굳은 채 남겨진 살이 있다. 상스러웠다는 흔적. 살기 위해 모양을 포기한 곳. 유독 몸의 몇 군데 지나치게 상스러운 부분이 있다. 먹고살려고 상스러워졌던 곳. 포기도 못했고 가꾸지도 못한 곳이 있다. 몸의 몇 군데

 

  흉터라면 차라리 지나간 일이지만. 끝나지도 않은 진행형의 상스러움이 있다. 치열했으나 보여 주기 싫은 곳. 밥벌이와 동선이 그대로 남은 곳. 절색의 여인도 상스러움 앞에선 운다. 사투리로 운다. 살은 굳었고 나는 상스럽다.

 

  사랑했었다. 상스럽게.

 

 

  살은 굳었다는 표현은 물론 굳은살을 의미하겠다. 발뒤꿈치! 또 직업에 따라 몇 군데가 있겠지. 주로 손바닥이거나 손가락 부분에 많이 있는 듯. 그건 좋은데, ‘상스럽다는 건 뭘 의미할까? ‘상스럽다의 사전적 뜻은, ‘말이나 행동이 보기에 천하고 교양이 없다. 먹고 살기 위해서 말이나 행동이 보기에 천하고 교양이 없었을까? 차라리 상처라면 지나간 일인데 굳은살은 아직도 진행중이니까 그야말로 상스럽지 않을 방법이 없게 상스러운가? 시인이 쓰는 말을 사전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나도 그건 안다. 시인에게 상스러운 일은? 시를 쓰는 일 자체. 혹은 시 작업의 결과물로서의 시. 그게 상스러웠을까? 물론 반어 혹은 은유로 상스럽다는 거겠지만. 시 작업을 염두에 두고 굳은살, 즉 시를 쓰기 위한 고뇌와 안간힘을 상스럽다고 했을 거라고 믿겠다. 절색의 여인마저 시인의 굳은살을 보고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을 테니.

  이 시와 앞의 <슬픈 빙하시대2>를 함께 보면, 시를 쓰느라 시인의 뇌 곳곳에 굳은살이 박일 고통의 시기가 그래도 행복했던 것이고, 시를 쓰지 못하는 단계, 그리하여 시인의 자서처럼 범인凡人으로만 늙어가 드디어 모든 죄가 어울리게 됐을 때 시를 썼던 청춘이 간 것이 불행했을 것이다. 다만 시를 쓰는 너만 독야청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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