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 위의 여자 시공사 베른하르트 슐링크 작품선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배수아 옮김 / 시공사 / 201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이가 쓴 <귀향>을 읽고 나서 그의 이름이 머릿속에 콱 박혀버려 ‘베른하르트 슐링크’라는 작가의 이름이 뜨자마자 서슴없이 골라 읽은 책. <귀향>은 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소련군에 의한 포로로 잡혀 시베리아(우리가 생각하는 시베리아하곤 좀 다른 위치다. 우랄 산맥 서쪽이니까 중앙아시아 북방으로 생각하시면 될 듯)의 집단 농장에 끌려가 거기서 가죽과 뼈다귀가 서로 붙어버릴 정도까지 굶주리며 서쪽으로 걸어서, 걸어서 탈출하는 얘기였는데, <계단 위의 여자>는 통일 전후 독일과 오스트레일리아를 무대로 한 여자와 세 남자 사이에 신기하게 벌어지는 기묘한 이야기를 썼다. 즉,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책. 그래서 슐링크의 대표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책 읽어주는 남자>를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란 말씀.
 옮긴이 배수아에 따르면, 슐링크 자신이 법학교수이자 판사였다고 하는데, 그래 화자 ‘나’의 직업을 변호사로 설정해 ‘나’가 독일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모든 일을 지극히 자연스럽게 묘사할 수 있었으리라. 그리고 사실 변호사라는 직업만큼 남의 일에 당연한 듯이 참견할 수 있는 신분도 또 없기는 하다.
 40년 전, 당시 그냥 신예 화가에 불과한 큰 몸집의 카를 슈빈트가 큰 부자 군트라흐의 요청,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 이레네의 젊은 모습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그녀를 그림으로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아 황금빛 머리카락과 음모를 가진 이레네의 누드가 마지막 계단에서 내려오는 순간을 그린 것까지는 좋았는데, 하여간 신들의 장난이란, 슈빈트와 이레네가 그만 정분이 나서 그림을 그려주고 둘이 살림을 합쳐버린 거였다. 난 화가들의 자기 작품에 대한 집착을 잘 모르는데, 군트라흐는 그림 ‘계단 위의 여자’ 허벅지를 일부러 불 가까이 댄 것이 분명하게 유화 물감이 흘러내리는 모습으로 변질시켰고, 그걸 안 화가 슈빈트는 마치 자신의 허벅지가 불에 덴 것처럼 안달복달, 그림을 정상으로 수정하기 위해 난리를 부린다. 바로 여기서 주인공의 한 명이자 화자인 변호사 ‘나’가 사건의 열차에 합승할 수 있게 된다.
 그래 변호사 나의 개입으로 그림을 제대로 복원한 슈빈트. 그럼 됐지, 라고 생각한 나를 또 찾아왔다. 그림이 자빠져 여인의 유방이 뭉개졌다나. 좋다, 다시 고쳐줬다. 이번엔 군트라흐가 작은 주머니칼로 그림의 음부 부분을 그어버렸단다. 그러면서 변호사 ‘나’에게 은근히 한 계약서 작성을 주문하는데, 어떤 계약인지, 그건 내가 알려드릴 수 없음.
 근데 비록 사건을 위임한 의뢰인과 변호사는 완전히 일을 매개로 해야 하겠지만 의뢰인, 또는 의뢰인은 아니나 의뢰인과 거의 유사한 위치에 있는 여성이 매우, 매우 고혹적이라면 변호사는 아이고 하느님 왜 날 사내로 만들어놓으셨나요, 타령만 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더구나 새파랗게 젊은 변호사, 하루에도 스무 번씩 불끈 솟는 넘치는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는 20대 초중반 남성이 불행하게도 그녀를 보고 느낀 건 소위 말하는, 약 먹어도 낫지 못한다는 ‘첫사랑’임에야. 그리하여 변호사는 그녀를 위하여 모종의 범죄사건을 꾀하고, 그 행위가 자신의 독일 내에서 법조계 인생을 끝장내는 한이 있더라도 그걸 무릅쓰고 성공적으로 범죄를 완성시켜주는데 그게 뭐냐 하면, 안 알려드림.
 첫사랑은 무참하게 깨져버리고 그간 세월은 능률능률 흘러(최승자의 시에서 따왔는데 어떤 시인지는 생각나지 않음) 화가 슈빈트도, 군트라흐도, 변호사 ‘나’도 40년 동안 장가들고, 새끼 낳고, 새끼들이 또 새끼들을 낳고, 이렇게 여전히 화가로, 대단한 사업가로, 기업 흡수 합병의 귀재 변호사로 번창하고 있다가, 나의 오스트레일리아 출상 도중 시드니의 화랑에서 문제의 그림 <계단 위의 여자>를 발견하는 것으로 사건은 일대 전기를 마련하며, 스토리 소개는 여기서 마친다. 지금까지가 총 3부 가운데 1부의 줄거리란 것만 밝히면서.
 매우 거칠게 줄거리를 써 놓았으나,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이런 줄거리를 미리 아는 것이 책을 읽는 기쁨을 절대 훼손시키지 않을 것이다. 그건 스토리 속에 숨어있는 여러 가지 진실들. 남자가 여자를 보는 시각이나, 동쪽 독일에서의 삶의 효용성과 안분한 만족감, 60년대 말 70년대 초에 걸친 독일 내 사회운동, 가족 간 사랑에 관한 진지한 논의, 자본주의의 피할 수 없는 속물성 등 이런 것들이 매우 설득력 있게 토의되고 있어서, 사실 이 책은 스토리의 전개보다는 속에 숨어있는 자잘하거나 굵직한 진실에 대한 이야기에 대하여 생각하는 시간을 마련한다는 데 의의가 있지 않나 싶다.
 처음엔 그렇지 않은 거 같다가 진도가 나갈수록 문명 비판적, 자본주의 비판적이기도 하고, 좋은 책들이 언제나 그렇듯이 삶과 죽음에 관한 사색을 포함하며, 급기야 인생에서 뭐가 중헌디? 라는 근본적 의문을 던지면서 책을 끝마친다. 기대하지 마시라. 절대 안 알려드린다. 좋은 책이니 직접 읽어보시고 알아내시라.
 다만, 돈 많은 시공사답지 않게 자잘한 오자, 탈자가 약간 눈에 거슬리지만 책 읽는데 방해할 수준은 아니다. 비록 330 쪽에 달하지만 편집이 널럴해서(이 단어가 사전에 안 나온다. 신기하다. 근데 무슨 뜻인지는 아시겠지?) 반나절이면 다 읽는다. 그리하여 진짜 중요한 이야기를 하지 못하니 독후감이 재미없을 수밖에. 그만큼 독후감 쓰는 작자의 주둥이가 근질거렸다는 것만 이해 해주십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구원 민음사 모던 클래식 62
자크 스트라우스 지음, 서창렬 옮김 / 민음사 / 2013년 2월
평점 :
절판



 

 원래 제목이 <The Dubious Salvation of Jack V.> 우리말로 하면 <잭 필제의 의심스러운 구원> 정도 되는데 역자 서창렬은 그냥 <구원>으로 해버리고 말았다. Jack. V는 책의 주인공 잭 필제다. 잭은 V를 'ㅍ‘으로(또는 비슷하게) 발음하는 독일, 네덜란드, 하여간 유럽 대륙 북쪽 사람을 조상으로 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열 한 살짜리 꼬맹이. 꼬맹이는 꼬맹인데 아주 일찌감치 까진 아이다. 좋은 말로 하면 조숙했다고 해야 할까?
 남아프리카공화국(을 포함한 많은 아프리카 나라들)의 소설의 가장 큰 이슈 가운데 하나가 흑백 갈등(또 하나의 큰 이슈는 당연히 식민주의)이지만 이 책의 주인공 잭 필제와 필제 가족 구성원에겐 피부색에 따른 차별은 별로,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당연히 필제 씨 댁은 마당에 수영장까지 딸린 저택에 사는 법률가 집안의 백인이어서 흑인 하녀 ‘수지’를 두었지만, 수지를 말 그대로 가족처럼 대우한다. 수지 역시 필제 씨 댁의 세 남매를 마치 자신의 아들딸처럼 자상하게 돌봐주고, 훈육하고, 대화하고, 그래서 사실상 진짜 엄마보다 더 엄마같이 양육하며, 특히 둘째이자 유일한 사내아이인 발랑 까진 잭과 따뜻한 관계를 만들어간다. 백인 주인과 흑인 하녀의 관계는 자크 스트라우스의 시선엔, 그냥 돈 많은 집의 주인과 가난해서 하녀로 들어온 여인일 뿐이다. 아프리카 문학에서 이런 관계 설정은 이 책이 처음이다. 와우.
 내가 잭에 관해서 ‘일찌감치 까졌다’느니 ‘발랑 까졌다’느니, 그것도 만 열 한 살짜리 꼬맹이한테, 하는 건, 당연히 잭과 같은 시절을 아주 오래 전에 겪어본 노땅 입장에서 귀엽다고 하는 소리다. 잭이 1978년 생. 책의 시점은 1989년 여름부터 1990년까지. 열 한 살의 잭은, 놀랍게도 벌써 아홉 살 시절부터 자위를 하기 시작했는데, 몸은 아직 제대로 된 정액을 만들어내지도 못하는 상태다. 이러니 내가 ‘일찌감치 까졌다’는 얘길 안 하겠느냐고. 어느 날 하루는 집 욕실에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글쎄 샴푸 병에다 아아아아아아직 여물지도 않은 자기 고추를 집어넣기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곧바로 지구가 멸망하는 것만큼의 난처한 상황이 벌어졌으니, 줄에 묶인 병속의 사과를 움켜쥔 잔나비가 손을 빼지 못해 사람한테 잡히는 것처럼, 샴푸 병 안의 것이, 그것도 사내새끼라고, 조금씩 부풀어 오르더니 급기야 도무지 빠지지가 않는다. 얼마나 부풀었기에 미끌미끌한 샴푸 병에서 빠지질 않는 거냐고, 참나. 하이고, 어린 것이 하늘이 무너지는 난처한 상황을 견디다 못해, 이러다 피가 통하지 않아 썩어버려 싹둑 잘라내야 하는 건 아닌지, 평생 고추에다에 샴푸 병을 매달고 다녀야 하는 건 아닌지 도무지 자기 힘으로는 해결할 방법이 없어, 아무리 어려도 쪽팔린 건 아는 법이라, 화끈화끈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엄마한테 이게 어떻게 하면 빠지겠느냐고 열 살 인생 통틀어 가장 진지하게 여쭙는다. “그냥 놔두면 저절로 빠져.” 한 번 힐끗 보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엄마. 엄마도 열 살짜리 아들이 벌써 자위를 하는지 꿈에도 몰랐던 거다.
 이 소년의 열 한 살 시절, 잭을 둘러싼 부모, 누나, 누이, 삼촌, 고모, 교사(들), 친구, 친구의 부모와 형제, 그리고 친애해마지않는 가정부 수지와 그녀의 아들 퍼시, 모든 사람들과 참으로 다양하게 펼쳐지는 관계, 관계 그리고 또 관계. 대표적인 아프리카너 가족인 아버지 계열 사람들과 영국인 출신인 어머니 계열 사람들 사이에서 생길 수 있는 가벼운 마찰부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수도 요하네스버그와 엄마의 고향 더반(홍수환이 아널드 테일러를 판정승으로 물리치고 우리나라 두 번째로 프로권투 세계챔피언에 올라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를 외치던 곳)의 해변을 무대로 참 다양하게 당시의 남아프리카를 묘사하고 있다. 근데 저자 자크 스트라우스가 참 기특한 것이, 이런 다양한 관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를 잭과 수지로 그리고 있다는 점. 여기엔 피부색에 따른 배척과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어린 잭은 늙은 수지를, 아니, 다시 쓰면, 수지의 애정과 그녀로부터 받을 수 있는 배려를 독점하고자하는 소년의 욕심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잭의 수지에 대한 소유욕심은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는데, 혹시 스포일러가 될지도 모르지만 지금 그 배경을 쓰고자하는 건, 출판사가 책 뒤표지에 이 내용을 이미 써놨기 때문이다.
 저 위에서 굳이 열 한 살짜리 꼬맹이가 아홉 살 때부터 여물지도 않은 연장을 가지고 자위를 했다는 얘길 쓴 이유는, 벌써 경력이 2년차라서, 이젠 완전히 취미생활로 여물지 않은 연장을 흔들어대기 시작했는데, 하필이면 마당의 수영장에서 그 짓을 하다가, 그만, 수지의 아들 퍼시에게 들켜버리는 일이 생긴다. 내가 아들만 둘 키운다. 얘네들 중학교 입학할 때마다 내가 해준 말이 있다. 자위할 때 들키지 말라는 거. 그거 하다가 들키는 놈들은 자위할 자격이 없는 놈들이라고. 근데 소설의 주인공은, 장하기도 하지, 그걸 햇빛이 훤한 수영장에서 하다가 걸려버린 거다. 그것도 클라이막스에 도달해 껌벅 넘어가고 있는 찰나, 퍼시가 저쪽에서 여태까지 눈 번하게 뜨고 바라보다가 으하하하하, 웃어젖히기 시작하니 그때서야 누가 자길 보고 있었다는 걸 알고 죽을 만큼 창피했다니, 아이고.
 그것, 자위하다가 퍼시한테 걸린 지상 최대의 수치가 수지의 귀에 들어가고, 기겁을 한 수지가 곧장 엄마한테 얘기하고, 엄마 역시 잽싸게 아빠한테 얘기하고, 아빠는 담임선생과 교장선생한테, 선생들은 학생들한테, 그리하여 요하네스버그 시민 모두가 수영장 앞에서 덜 여문 연장을 쥐고 흔들었다는 명백한 사실을 다 알게 되는 공포에 휩싸인 잭. 가뜩이나 수지의 애정을 양분하고 있는 경쟁자로서 밉기가 한이 없었는데, 이젠 반드시 없애버려야 할 적으로 바뀌어버린 거다. 퍼시에 대한 적의가 어떤 과정을 밟아, 정말로 친애하기 이를 데 없던 수지로 하여금 잭의 집을 떠나게 만들었을까.
 전형적인 성장소설. 성장소설이 언제나 그렇듯이 독자로 하여금 빙그레 웃게 만들고, 공감 속으로 초대하는 작품. 여기에 남아프리카공화국 특유의 문젯거리도 좀 등장하고. 권하지는 않겠다. 잘 쓴 성장소설은 우리나라에도 많이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구성과 문화에 대하여 궁금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굳이 외국어 번역서로 성장소설을 읽을 필요까진 없을 듯하여. 가장 최근에 읽은 잘 쓴 성장소설이라면, 이순원의 <19세>(이 책은 반드시 ‘세계사’에서 나온 중고 책을 골라야 함).
 왜 작가는 이 작품의 제목을 <잭의 의심스러운 구원>이라고 했을까? 여기에 대한 의견을 지금 말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기 위해선 책의 스토리와 결과를 써야 하는데, 난 독후감에다가 책의 ‘중요한’ 내용을 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낙타의 뿔
윤순례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아주 오래전 신께서 낙타에게 뿔을 주셨다. / 마음이 착해 상을 주신 것이다. / 어느 날 꾀보 사슴이 낙타에게 와 말했다. / “뿔 좀 빌려다오. 잘 차리고 서역 잔치에 가련다.” /낙타는 곧이 믿고 뿔을 빌려주었다. / 사슴은 돌아오지 않았다. / 그때부터 낙타는 늘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다. / 사슴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위는 7쪽에 나오는 서문 비슷한 글이다. 서문만 읽어봐도 이 작품은 ‘기다림’에 관한 서사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300쪽의 장편소설이라면(물론 편집을 최대한으로 늘려서 그렇지 250쪽 언저리로도 충분히 책을 꾸릴 수 있는 분량이다) ‘기다림’이 복합구조 속에서 발생하여야 할 것이라서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기다림이 될 수밖에 없다, 는 걸 요샌 모르겠고, 수십 년 전 고등학교 현대문 시간에 배워 안다(그땐 이과 반에서도 국어 교과서를 교사 두 명 이상이 각각 고문, 현대문을 따로 가르쳤다).
 주인공 효은. 스물 네 살의 아가씨가 화자 ‘나’이자 효은. 당연히 오늘의 주제 ‘기다림’은 나, 즉 효은의 기다림을 얘기하는 거라서 무엇보다 ‘나’를 알리는 것이 소설을 소개하는데 가장 기본적인 일이겠다. 나. 2년제 전문학교 출신. 일찍이 21세 때, 두 살 많고 잘 생긴데다가 오페라 노트 ‘섬머타임’을 숨넘어가게 잘 노래하는 수영선생 ‘규용’하고 정분이 나서 스물한 살 때 ‘황소개구리처럼’ 배가 불러왔다. 


잠깐. 이왕 얘기 나왔으니 우리 거쉰의 <포기와 베스>에서 나오는 Summertime 한 번 듣고 지나가자.

 

 

https://youtu.be/kgZAhiAFYZU

먼저 오리지날 연주. 사이먼 래틀, 런던 필하모니. 클라라: 해롤린 블랙웰

둘 다 같은 판이고 이 링크의 음원이다.

난 어마어마한 가격의 왼쪽 그림의 판을 샀는데

세월이 지나니까 EMI 리마스터링 시리즈로 반값에 나왔다.

이럴 때, 심장병 도진다. 

 

https://youtu.be/i6SPi7w5E_g

마할리아 잭슨. 가스펠 가수라서 그런지 공명이 대단하다.

아마존에서 태평양 건너까지 힘줘 던져줬다. 포장 뜯어보니 껍데기 깨졌다.

당시 한국에선 잭슨의 판 구할 수 없어서 그냥 참았다.

 

 

 https://youtu.be/i4HhG6DyoBU?list=PLSubR5WV5GnUHSDN1EG0azZBAF6S2abCp

웃기게도 Summertime은 재니스 조플린으로 처음 들었다. 물론 10대 때 였다.

당연히 LP였고, 듣는 순간, 뻑 갔다.

 

 

 


 그리하여 홀어머니에게 결혼을 승낙해달라고, 4천만 원만 있으면 중고 어선을 하나 사서 잘 살 수 있을 거 같으니 그거 하나 사달라고 얘기했다가, 눈치를 보아하니,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잘난 아들 공부 다 시켜 서울에서 어느 회사인줄은 모르겠지만 직장생활 잘 하고 있어, 그 밑으로 줄줄이 사탕처럼 줄 서서 기다리는 동생들 교육비, 용돈 뭐 이런 거에 지대한 도움을 줄 수 있으려니 희망에 부풀어 있다가 난데없이 뒤통수를 맞은 꼴이었던 거다. 이 와중에 나 효은은 스물 한 살의 어린 색시답게 지극히 간단한 소원, 그저 마당이 있는 작은 집, 내 집이면 좋지만 전세라도 상관없는 오붓한 집에서 모빌이 달랑거리는 아이를 뉘어놓고 햇빛에 환하게 빛나는 기저귀 빨래가 바람에 살랑거리는 꿈만 꾸고 있었던 것. 그걸 이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하고, 그 돈을 장만하는 것이 또 얼마나 힘겨운 것인지는 아무 생각도, 노력도 할 수 없는 철부지여서, 자신의 모든 정기와 힘과 새끼 품은 암컷의 독기로 규용에게 그딴 거 못할 바에 차라리 아이하고 나하고 죽어버리고 말겠어! 찬란한 지랄 한 바탕을 해댔으며, 도무지 중고 선박을 살 4천만 원도 타내지 못하고, 그래서 서울은 아니지만 작은 어촌에서나마 살림도 살지 못할 거 같은 난감함에 에라 모르겠다, 실컷 소주로 병나발을 분 다음 마침 해수욕 나온 여자와 우연히 함께 빠져버려, 여자는 파도와 바다에 부딪힌 참담한 시신으로 발견됐고, 비록 술엔 취했지만 수영장 수영선생 규용은 그길로 행방불명. 아울러 실신해버리고 만 나 효은은 충격이 너무 심해서였을까? 그길로 심한 하혈을 하며 유산을 해버리고 만다.
 행방불명. 죽은 거 같지만 죽었다는 증거가 없는 상태. 규용. 규虯는 새끼 용, 용龍은 다 큰 어른 용. 그러니 작가가 이름을 규용이라고 지었을 때부터 독자는 남자가 물에 빠져 죽었다고 확신하지 않는 상태, 즉 어디선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주장을 끝까지 유지하기를 바라는 거 같다. 그거 있잖아. 훈민정음訓民正音. “가난 엄쏘리니 군君짜 처엄 펴아나난 소리 가타니 갈바쓰면 뀨虯자 처엄 펴아나난 소리 가타니라.”(아래 아, 순경음 비읍 같은 예전 문자표기가 안 된다. 안타깝다) 규용. 갯가 것이 처음부터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기엔 이름이 너무 크다. 왕들이나 쓰는 글자로 이름 자를 썼으니 명이 길기를 바리긴 처음부터 힘들었을 듯. 여기까지 작가가 생각했다고 보긴 힘들지만 하여간 나를 포함한 독자가 규용이 익사했다고 생각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 어떤 수를 썼느냐 하면, 내가 사는 연립주택 궁전빌라로 그림엽서가 한 장 도착한다. 쌍봉낙타가 그려진 엽서에 이렇게 써있다.
 “사막에는 그리움이 모래알처럼 / 퍼져 있습니다. / (근 한 페이지 중략) / 아득히 먼 기억 너머로 사라진 / 야생의 뜨거운 발걸음 식히며 / 가시 돋친 붉은 꽃으로 피어나 / 당신 앞에 우뚝 서겠습니다.”
 하면서 서명 대신 규용이 늘 사용하던 이니셜, “g"가 필기체로 갈려져 있는 거다.
 그래서 규용이 죽었어, 살았어. 현대문학에서 이걸 밝힐 수는 없는 일. 다 읽으신 다음, 한 번 거수, 다수결로 해 볼까? 난 죽었다, 에 한 표.
 왜 이걸 미리 얘기하느냐. 이 책을 읽을 사람한테 너무 센 스포일러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냐, 라고 따질 수 있겠다. 그러나 이건 책을 읽을 때, 기본적으로 미리 깔아놓는 밑밥으로 기능하기 때문에, 책의 스포일러를 혐오하는 내 입장에서도 별로 께름칙하지 않다.
 하여간 나와 규용 사이의 기다림은 산 자와 죽은 자, 혹은 산 자와 실종자 사이의 기다림으로 일단 다차원적이고 관념적. 그 다음은 당연히 실제적인 기다림이 하나 더 등장해야 하는데, 바로 이걸 난 안 알려줌. 인간과 인간 사이의 그리움. 더런 삶의 지속을 위해 맺어야 하는, 형체가 분명한, 먹고, 싸고, 싸우고, 관심 없는 척하고, 사기치고, 배신하고, 훔치고, 울고, 웃는 육체를 가진 인격적 생체를 향한 그리움이 등장한다.
 윤순례. 이 작가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많은 한국 소설가들이 특히 장편을 쓸 때, 아니다, 단편집의 경우엔 단편의 편수만 조절하면 가능하니 장편의 경우만, 원고의 분량에 무척 신경을 쓰는 거 같다. 물론 출판사와 협의 하에 결정을 하겠으나 대충 300쪽 위아래로 만들기 위해 작품을 쓰고, 쓴 다음 조절하고, 조절도 모자라면 그냥 잘라버리고, 잘라버려도 좀 뭐하면 막 툭툭 끊어버리지 않나 하는 의문. 좀 마음대로, 하고 싶은 얘기 몽땅 다 해버리면 좋을 것을. 굳이 이런 타박은 앞에서 얘기한 애 아빠가 될 뻔했던 규용과 나의 관계가 과하게 (전체 글의 분량과 비교하여)장황하고, 이어지는 이야기와 큰 상관관계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는 말씀. 물론 난 지극히, 처음부터 끝까지 아마추어의 시선으로 책을 읽었으니 이 독후감을 읽는 다른 독자들이나 혹시 작가가 읽어본다면 작가를 포함한 모든 전문가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기 바란다. 오히려 뒷부분, 즉, 인간이 살아있는 인간을 기다리게 되는 쪽이 더 많았으면 하는데, 다시 강조, 오직 내 생각일 뿐이다.
 위에선 내 생각을 얘기했고, 이젠 내 주장을 하나 소개.
 모든 문학작품, 그것도 걸작이라고 일컫는 대 문호의 소설에서 가장 지루하고 재미없고, 짜증나는 에필로그는? 톨스토이 백작이 쓴 <전쟁과 평화>. 그건 그렇고, 이 책 <낙타의 뿔>에서 제일 뒤에 붙은 에필로그는? 백퍼 사족. 왜 그딴 걸 썼을까? 윤순례가 오늘의 작가상에 빛나는 소설가이기는 하지만 잠깐 돌았었나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생은 짧고 욕망은 끝이 없다 민음사 모던 클래식 55
파트리크 라페르 지음, 이현희 옮김 / 민음사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전형적인 프랑스 소설. 무슨 뜻인지는 직접 읽어보시고 알아채시라.
 루이 블레리오. 이 자가 최초로 영불해협을 비행해 건넌 사람이라고 한다. 프랑스에 블레리오랭게라는 집안이 있었는데 집안을 이끄는 블레리오랭게 선생으로 말할 것 같으면, 엔지니어로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 등등을 누비며 선진 프랑스의 공학을 널리 전파한 인물로 일찍이 교사 출신 아내를 얻어 외아들 하나를 낳고 이름을 뭐로 할까 고민하다가 프랑스에선 전설적인 비행사, 루이 블레리오라고 널리 불리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이름을 루이라고 지었단다. 그래서 이 양반 뜻대로 이후엔 세상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루이 블레리오, 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까진 좋았지만, 교사출신 아내가 유전적 요인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신경질환, 지독한 우울증 증세를 가지고 있어 평생을 아내의 기분에 맞춰 사느라 자기 자신을 잊은 수준까지 이르렀던 거다. 이제 나이 일흔이 넘으니 그동안 뭐 하러 자신의 인생을 한 여자의 비위를 맞추는데 다 낭비를 했는지 스스로의 영혼이 고갈되는 느낌이 자꾸 드는 모양으로, 급기야 블레리오랭게 씨가 중증 우울증에 입문해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전형적인 이십세기 초반 태생의 부부. 이런 집안에서 낳고 자란 루이 블레리오. 성격상 조금의 문제가 있는지, 아니면 자연선택에 의하여 그렇게 됐는지, 이혼 경력이 있는 연상의 여자를 골라 혼인하고,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남자 애인, 여자 애인을 둔다. 여기서 잠깐. 루이가 양성애라서 자연선택이니 성격상 문제니 하는 거 아니라는 걸 밝혀두자. 온 라인에서 이런 거 미리 안 밝히고 그냥 넘어가면 나중에 뭔 소리를 들을 줄 모른다. 양성애라서가 아니라, 혼인 상태에서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관계를 두고 하는 말이다. 에이, 굳이 이렇게 설명을 해야 하니 자판 두드리는 맥이 딱 끊겨버리잖아. 이깟 독후감 하나 쓰기도 드럽게 어려운 드러운 세상.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모르겠다 걍 패스.
 루이의 남자애인은 간단하게 관계가 끊어지는데 ‘노라’라고 하는 영국 아가씨는 하이고, 정말로 사랑을 해버리는 단계까지 치솟는다. 노라. 노라? <인형의 집> 생각나시지? 노라한텐 또 애인이 한 명 더 있다. 잘 양육되고 잘 배운 미국인으로 영국에 와서 금융인으로 활약하고 있는 엘리트. 거구에 얼굴엔 천연두의 흔적이 약간 패 있는 건장한 남자. 그러니까 노라는 영국에 있을 땐 미국인 ‘머피’하고 사랑을 다져나가고 때에 따라 그에게 2~3천 달러 정도를 얻어 쓰며, 연극을 더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에 오면 유부남인줄 번히 알면서 루이와 진한 사랑을 만들어가며 역시 5천 달러 정도는 그냥 말없이 집어가기도 한다.
 자, 얘기를 루이에게 집중하자면, 루이는 돈 잘 벌어 자신을 사실상 사육하는 아내도 죽자고 사랑하고, 노라 역시 없으면 죽을 거 같이, 세상 살면서 자신보다 남을 더 사랑할 수 있다는 걸 알게 해줄 정도로 몸 바쳐 사랑하는데, 둘 가운데 한 명과의 사랑이 깨지면 다른 하나와도 관계가 망가질 거 같은 암시를 자꾸 받는다. 근데, 루이의 아내 입장에선? 이런 거 다 개소리, 멍멍. 그렇지? 그렇다.
 인생은 짧다. 평생 아내의 중증 우울증을 옆에서 보며 간혹 와장창 터지는 폭발을 완전히 감수하며 살아온 늙은 남편은 어느 날 인생이 너무 짧은데 이젠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는 걸 자각하지만, 어느새 남은 힘이 없다. 이루지 못하는 욕망을 좇다가 사랑은 내 인생과 그녀의 인생, 둘 다 사랑과 함께 사라지고, 아 도무지 더 이상 쓰면 분명 스포일러인 것을 알면서 계속 얘기할 수는 없고.
 대강 무슨 이야기인줄 아시겠지? 예, 맞았습니다. 당신 생각이 옳습니다. 근데 문장과 문체가 어디서 많이 본 듯. 어디긴 어디야, 20세기 프랑스 소설에서 좀 색다른 문장 나오면, 아는 척 하는 법, 지금 가르쳐드린다. 무조건,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게 틀림없다, 라고 얘기하시면 거의 맞으며, 폼 또한 무척 난다. 이딴 거, 내 독후감에서만 배울 수 있다. 진짜다. 흐흐흐. 잘난 척은 언제나 즐거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헛된 기다림 민음사 모던 클래식 63
나딤 아슬람 지음, 한정아 옮김 / 민음사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아, 어제 미친 짓 제대로 했다. 소주 각 3병 마시고 술김에, 이거 참 좋으니 한 번 읽어보라고 책을 동무에게 줘버렸다. 술 깨니깐 그게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다. 명절 전에 미리 부모님, 평안히 쉬시기를, 한테 다녀와도 아까운 건 마찬가지다. 왜 그리 미친 짓을 했을까. 안 하던 짓 하면 죽는다는데 혹시 잘 하면 이번에 지겨운 이승 떠날 수 있을까. 난 물고기자리라서 더 이상 윤회를 하지 않는다고 하니 이젠 드디어 이 지겨운 생로병사를 끝낼 수 있을 텐데.
 내 아무리 지겹고 고단한 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해도 어찌 20세기 후반부터 지금까지 모진 삶을 꾸리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사람들과 비교를 할 수 있나. 민족주의, 이거 무지하게 나쁜 건데 딱 하나의 경우에만 좋은 의미로도 쓰인다. 피식민지 등 수탈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민족들. 즉 힘없는 나라 혹은 민족의 경우에만 긍정적인 의미가 될 수 있고 이를 제외한 다른 거의 모든 경우엔 차별을 정당화시켜주는 방편으로 기능할 뿐이다. 대한민국의 경우 20세기 중후반 까지, 반半 식민적 예속 상태로부터의 탈출을 모색하기 위한 방편으로 민족주의를 사용할 수 있었으나, 지금 시점에서 대한민국의 민족주의는 소위 ‘다문화’에 대한 차별의 수단으로 기능하는 정도다. 따라서 아프가니스탄의 경우 소비에트 연방에 의한 침략 시점부터 무차별 테러가 빈발하는 요즘까지도 민족주의라는 단어가 여전히 순기능으로 작용할 수 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어떤 아프가니스탄 사람도 소비에트나 아메리카에게, 우리 땅에 와서 참견 좀 해달라고, 그러기 위해 무기를 가지고 와도 좋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없으면 없는 대로 서로 살펴가며 살고 있는 나라에 어느 날 문득 소비에트 연방의 군인들이 탱크를 몰고 쳐들어 왔고,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 미국과 영국 등에서부터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무기를 공급해주었으며, 그리하여 급기야 과격 이슬람 세력 탈레반에 의한 폭력정권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탈레반에 의한 문명파괴, 인권말살은, 참으로 엉뚱하게, 미국 땅에서 발생한 911 사태로 인해 큰 전기를 마련한다. 911이 탈레반 정권과 긴밀한 관계에 있던 오사마 빈 라덴을 우두머리로 하는 집단에 의한 범죄이며, 그가 아프가니스탄의 산악지대에 숨어있다는 정보를 얻은 미국은 20여 년 전 소비에트와 아주 비슷하게 최신식 무기를 운용하는 정예부대를 이끌고 다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고, 이때 오사마 빈 라덴만 거덜을 낸 게 아니라 이참에 반미세력으로 변신한 옛 반공 동료 탈레반 정권까지 무너뜨려버린다. 그러니 오랜 세월 탈레반에 의해 잔인하게 짓밟히던 아프가니스탄의 선한 백성들은 21세기가 열리자마자 세계인들을 경악시킨 911 테러가 얼마나 반가웠을까. 이리 오랜 전쟁과 내전, 문명파괴, 인권말살 같은 야만, 그리고 다시 한 번 전쟁의 폭력. 왜 아프가니스탄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는가 말이다. 눈 크고 어두운 피부색을 갖고 있는 그 사람들이 죽이 되던 밥이 되던 그들끼리 살도록 애초에 간섭하지 않았다면 아프가니스탄, 유목과 검소한 농경의 나라가 어찌 지금과 같은 비극 속에서 살았겠는가.
 독후감 제일 앞에 얘기했듯이 내가 잠깐 미쳐서 책을 동무한테 줘버려 갈피를 좇아가며 쓸 수 없는 것이 참 아쉬운데, 이 소설은 호숫가에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시골 마을의 큰 집을 배경으로, 홀아비 집주인과 손님 세 명 사이에 벌어지는 기묘한 인연을 풀어내고untie 있다.
 홀아비는 영국인 의사 출신, 70세 이상의 고령 백인인데, 아프가니스탄 여성과 결혼하기 위해 이슬람교로 종교를 바꾼 사람이다. 아내 역시 의사.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이 차도르는커녕 히잡도 쓰지 않고 짧은 치마에 자동차를 운전하고 다니던 시절의 옛날 사람이라 남편과 함께 영국에서 의사 면허를 따고 다시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온 인물. 결혼 역시 예전 시절에 했기 때문에 주례를 여성에게 부탁했고, 세월이 더럽게 흘러 탈레반이 정권을 잡은 다음, 여자가 주례를 한 결혼이기 때문에 그건 결혼이 아니며 이방인에게 몸을 판 창녀에 불과하다는 판정을 받아 동족이 던진 돌팔매를 맞아 숨을 거둔다. 그러니 집주인 마커스 씨의 심정이 어떻겠는가. 근데 그의 모습도 좀 이상하다. 왼쪽 손이 없다. 탈레반에 의해 도둑질을 했다는 판결을 받아 손목이 잘린 것. 이들 사이에 딸이 하나 있었다. 점점 자라 이제 남녀 사이의 불장난을 알 시기가 되자 동네 미남 청년과 눈이 맞았다. 남자가 반소反蘇 운동을 했다는 죄명으로 남자는 총살에 처해졌고 딸은 소비에트 군대에 납치되어 강간당해 임신을 해서, 어찌어찌 파키스탄 국경을 넘어 피난민촌에 도착했으나 결국 지방군벌에 의해 사살 당한다.
 러시아에서 옛 소비에트 군인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서 행방불명된 동생의 행방을 수소문하려 입국해 이 집에 들를 라라, 라는 이름의 여성. 동생이 예전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되었을 때……, 아, 지금 내가 뭐하는 거임?
 보석원석 전문 딜러이자 CIA 출신의 중년 남자, 그리고 극단 이슬람 주의자답게 성전聖戰을 신봉하는 아프가니스탄 청년. 이들 사이에 얽히고설킨 수많은 매듭. 그걸 어떻게 풀까.
 난 분명히 말했다. 얽히고설켰다고. 유목민과 농민들이 평화로운 삶을 누려왔던 지역. 곱슬머리 상투를 한 수많은 석가모니 석불이 있었고, 그 연후에 이슬람의 평화로운 말씀이 대지를 덮었던 산악과 황야의 나라. 이들 사이에 당시엔 얼마든지 가능했었거나 가능하지 않았지만 공감할 수 있는 인연 또는 우연.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 울어주고, 이미 죽은 사람들을 애도하며. 아니, 비록 늦게나마 그들이 어떤 시절을 살았는지, 인간이 인간에게 행한 악행이 어느 정도까지 가능했는지 그걸 이해하는, 이해해야 하는 일. 긍정적인 의미로 아프가니스탄 국민의 민족주의를 인정해주는 일. 그것으로 나는 이 책을 읽었으며, 바보같이 술김에 동무에게 줘버렸지만, 그래서 세계인 가운데 한 명이 더 이 이야기를 알게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