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나의 도시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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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지하게 두껍고, 글자 빽빽해서 진도도 안 나가는 19세기 서양에서 쓴 번역 소설을 읽고 나서 곧바로 우리나라 말로 된 현대 소설책 읽을 때의 편안함이라니. 거기다가 출간 당시 나이 만 34세 젊은 작가의 엽기발랄한 말장난까지 난무하는 경쾌하고 자유스러운 작품을 읽는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다. 뭐라? <달콤한 나의 도시>가 경쾌하고 자유스러운 작품이라고? 그렇다. 근데 그건 책을 관통하는 작가의 어법이 그렇다는 것이지 그가 이야기하고 있는 주제가 가볍다는 얘긴 아니다.
 내가 정이현을 주목하게 된 건 그의 소설집 <오늘의 거짓말>을 재미있게 읽고 나서다. 거기서 그는 자기 세대가 남자건 여자건 나이에 따라서 사회적으로 정해진 이정표에 까지 걸어가면 이정표 옆에 ‘입학’과 ‘졸업’을 지나 ‘취업’에 이어 ‘결혼’, ‘출산’, ‘둘째 출산’이란 지시판대로 이미 결정된 (것처럼 보이는) 행로를 따라가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 마지막 세대쯤이라고 강조하는데, <달콤한 나의 도시>에서는 그런 일상적 단계로의 이행에 관한 딜레마를 (소설의 주인공들이 흔히 그렇듯이) 불행한 세 여성을 통해, 약간은 과격하다고 할 수 있는 수준으로 그려내고 있다. 두 책의 발간 시점이 <달콤한…>이 2006년, <오늘의…>가 2007년이지만, <오늘의…>는 단편집이라 각각의 단편을 발표한 시점이 <달콤한…>보다 늦다고는 할 수 없다. 뭐 그래서 두 작품(집)을 거의 동시에 발표했다고 가정해도 오늘 2017년엔 아무 문제도 없을 텐데, 정이현이 서른다섯 즈음해서는 이미 청춘도 가버렸고, 이제 살면서 한 번만 더 실패하면 인생 전체를 실패할 것 같은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듯한데, 뭐 그 나이에, 그리고 그로부터 10년 후에도, 20년 후에도 똑같은 강박관념이 계속된다는 건 당연히 알지 못하겠지만, 하여간 그리하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들, 직업과 직장과 결혼 같은 것들을 실수 없이 해치워야 한다는 집념이, 그중에서도 결혼이라고 하는 분명한 지옥 속으로 빠져야 한다는 데 대한 비극적 갈등과 한편으로는 기꺼이 바로 그 지옥 속으로 당당하게 들어가고 싶은 욕망이랄까, 자연스러움이랄까, 그것도 아니면 보험이랄까 할 것들에 대한 미련과 동시에 거부감까지를 집중 탐구하고 있다.
 몇 번의 연애 끝에 비뇨기과 전문의를 골라 결혼에 성공하는 재인이는 난리굿을 하듯 결혼한지 몇 달 되지도 않아서 결혼이란 것이 여자나 남자를 가리지 않고 양쪽모두에게 똑같은 지옥이라는 걸 확인한 후 정식 부부의 연을 끝내는 걸 기념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한 번 하고 이혼해버리고, 근 십년 전 용가리라는 별명의 사내한테 장렬하게 버림을 받은 후 시니컬한 능력자의 독신녀로 살다가 새삼 느낀 바가 있어 잘 나가는 직장(그것도 과장 자리를) 때려치운 유희는 난데없이 꿈을 찾아 뮤지컬 가수 지망생 노릇을 하는 와중에 그 우라질 용가리가 딸 하나 둔 이혼남으로 등장하는 바람에 다시 정분이 생겨버린다. 이 두 여성은 우리의 주인공 은수와 함께 어려서부터 대나무 말을 타고 논 옛 친구들로, 은수가 과거에 벌인 몇 번의 진한 연애와 실패의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을뿐더러 지금 현재 한 방에, 졸지에 생긴 세 명의 남자와의 관계까지 뚜르르 꿰고 있다. 세 명의 남자라는 건, ① 남의 술자리에서 우연히 만나 그날로 같이 자고 이후 만나기만 하면 술 마시고 섹스하는 습관을 들인 일곱 살 연하 ‘태오’란 이름의 매우 섬세하고 은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키스의 초절정 고수, ② 여태까지 10년이 넘게 그냥 친구 사이였던 부동산 부자의 상속자이자 유희의 사촌 ‘유준’으로 하루 24시간 오피스텔에 처박혀 꼼짝도 하지 않던 은둔형(외톨이는 아니고) 인간이었다가, 애인과 헤어진 후 은수하고 ‘그냥 친구’에서 ‘남자 친구’로 전환하기 위해 지금은 비록 은수가 두 명의 애인이 있으나 언젠가 그 사람들과 헤어지면 그때 결혼하자고 갑자기 중학교 학원선생으로 취직해버린 늦깎이 직장인, ③ 아주 기본적인 외모와 친절로 무장한 중소기업 사장 김영수란 작자로 은수와 맞선을 봐 연결이 됐으나 엄격한 선線을 넘지 않는다는 분명한 의식 아래 모든 일을 선 안에서 수행하려는 인간이지만 예상 외로 무지하게 자상한 측면을 보여주는 동시에 특정 환경에선 매우 불안한 모습을 노출하기도 하는 다섯 살 연상의 남자를 말한다.
 등장인물 소개를 빙자한 소설의 내용은 이쯤이면 됐다.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연애가 목적이 아니라 결혼, 인간이 만든 인간을 구속하고 급기야 지옥으로 만드는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처하는 젊은이들, 서른하나 부터 둘까지 젊은 여성 특유의 엽기발랄하고 재기 넘치는 입담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게 만든다. (앗, 큰일이다. 여기까지 쓰고 쐬주 한 병 마셨다. 술기운 퍼지기 전에 얼른 써야 한다.)


 솔직한 감상을 쓰자면, 먼저 내가 50대 후반의 남성이란 점을 먼저 밝히고(작중 주인공이 30대 서울 시민이란 점을 강조했듯이) 얘기하자면, 독후감을 처음 시작할 때 이야기한 것과 같이, 외국 소설의 길고 긴, 근데 재미는 별로 없는 번역물을 읽다가 현대 여성이 쓴 재기발랄한 우리 말 소설을 읽을 때의 환희와 재미의 감격이, 여기서 주목하시압, 넘쳐나서 소설의 주제가 주는 묵직함을 과하게 엽기적 깜찍한 언어로 하지 않았는가, 하는 조금의 아쉬움을 숨길 수 없다. 정이현, 참 좋은 작가다. 요새 작가(라고 해도 내 기준이며 젊은 독자에 따라선 벌써 맛 간 작가일 수도 있는데)치고 참 이야기를 재미나게 할 수 있는 사람이란 것이 마음에 든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 소설판에서 ‘읽는 재미’가 사라진 아쉬움의 ‘일부’를 정이현이 싹 씻어준다는 건 확실하다. 아직 이 작가를 전적으로 신뢰한다고는 얘기하지 않을 것이고, 솔직히 그렇지도 않지만, 주목할 만하다. 그리하여 가까운 시일 안에 한 권의 책을 더 읽어볼 것이다. 그때 ‘또 한 권 더’ 혹은 ‘앞으로 계속’ 아니면 ‘이걸로 끝’을 결정할 터.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중요한 여성 등장인물 은수는 직장을 때려치우고 김영수한테 청혼했으며(영수가 은수에게 청혼은커녕 신체접촉도 해오지 않아서), 재인이는 결혼과 동시에 직장 생활을 접어 이른바 전업주부의 길로 들어서고, 유희 역시 직장을 그만 둔 다음 자신의 꿈을 찾아 뮤지컬 배우 오디션에 도전하면서 이혼한 옛 애인 용가리와 다시 접촉한다. 또, 남자 윤유준은 은수에게 프로포즈를 하고서야 생애 처음으로 직장, 즉 돈벌이를 시작하는 거. 작가 정이현이 꼭 찍어서 말은 안 했지만, 글을 쓴 시점 2006년에는, 2006년 까지도, 여성은 사회생활 하다가 (물론 남성과 비교해 더 힘겹게 직장생활을 했다는 건 인정한다만) 그게 힘들고 괴로우면, 결혼이라는 도피처로 날아가 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여성에게 결혼이란 무엇인가를 집중 탐구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힘들고 역겹기까지 한 경제생활 또는 정글 속 생존을 남성에게 일임하기 위한 결혼의 측면도 역시 한 번 쯤 꼬집고 넘어가야 했던 건 아니었을까.
 또 하나, 수구 골통에다 돌이킬 수 없는 틀딱임에 틀림없는 은수의 아버지. 은퇴한 다음 이제 산악회에 가입해 등산 하나에 취미를 붙이고 나머지는 경제생활을 하던 때와 똑같이 집구석에서 위세잡고 독재하며 깽판부리는 역할로 등장한다. 은수 엄마는 이런 남편하고 살면서 원래는 밝았던 성격마저 우울해지는 증상을 겪은 피해자로 역할을 맡는데, 깨놓고 얘기해서, 은수 엄마는 김포 아줌마라고 하는 오랜 친구라도 있어서 같이 영화도 보고 외출도 하고 이러는 반면, 은수 아버지는 그 양반 나이로 미루어 짐작해, 정말 뼈 빠지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처자식 먹여 살리느라 허리가 휘고 그러다보니 생전 친구 하나 만들지도 못한 건 물론이고, 있던 친구들도 오랜 세월 만나지 않아 점점 멀어져 외톨이로 사느니 마음엔 들지 않지만 그나마 사회적 활동을 하지 않으면 외로워 죽을 거 같아서 산악회 가입했는지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다 애로사항이 있는 거다. 이놈이나 저년이나. 세상 사는데 그냥 칼같이 선 죽 긋고 착한 편은 내 편, 나쁜 놈은 네 편,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나. (이렇게 썼다가 인터넷 어디선가에서 또 등 뒤에 칼 맞는 거 아냐?) 특히 결혼생활하며, 당신의 결혼생활이 지옥이었듯이 (다행스럽게 정이현도 같은 말을 하기도 한다) 내 결혼생활도 끓는 기름 솥단지 속이었을 수도 있음을 이해해주었으면 좋겠다.

 나 참. 이런 얘기는 독후감으로 어울리지 않지만 굳이 평론가 흉내를 내자면, 서사는 좋은데 선택한 길이 좀 거시기. (용서하시라 이모티콘) ^^;



 어이, 기분 째져?
 아니, 아직 아냐.
 맥주 한 잔 더 해야지?
 아무렴. 지금 가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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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10-11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취중 독후감..ㅎㅎ 완전 제스타일 입니다.

Falstaff 2017-10-11 15:55   좋아요 0 | URL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ㅎㅎㅎ
 
개척자들 대산세계문학총서 141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 지음, 장은명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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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로가 <월든>을 쓴 것이 1854년. <월든>이 세상에 나오기 한 세대 전 1823년에 등장한 이 책 <개척자들>. 작가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가 쓴 이 책은 70대 모히칸 족 노인 존, 백인이지만 존과 같은 70대이며 인디언과 깊은 유대를 맺어 숲 속의 사냥꾼으로 곤고한 삶을 사는 수수께끼 늙은이로 레더스타킹(가죽으로 만든 긴 양말 또는 각반)이라는 별명의 내티 범포, 그리고 깍듯한 유럽식 예의와 수사를 사용하지만 인디언 또는 사냥꾼과 비슷한 생활방식을 가지고 있는 야릇한 젊은이 에드워드 올리버, 이렇게 세 명을 등장시켜 이들이 40여 년간 지켜오던 극도의 폐쇄적 경향, 특히 오두막에 다른 개척민들이 한 발자국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사연을 풀어내는 것이 주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과정에, 인디언들이 자신의 생명유지를 위한 최소의 것을 자연에서 얻으며 안분하게 살고 있는 반면, 백인들이 저지르는 생명체에 대한 과도한 살육과 낭비,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위대한 영’이 인간에게 허어한 자연, 동물과 식물, 암석 등을 황폐시키는 걸 날카롭게 비판한다. <월든>보다 한 세대 앞서. 또 악역에 의한 거친 말과 비하를 제외한다면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도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아주 예외적인 일.
 미국 역사를 잘 몰라서 오해인지는 모르겠지만, 미국 북부 (뉴욕 옆 지금의 올버리 부근에서 벌어지는 일이니까 북부라고 해도 많이 차이가 나지는 않겠다) 쿠퍼스타운의 1793년 크리스마스 이브. 뉴욕 시에서 교육을 다 받고 이제 정착하기 위해 집에 돌아오는 엘리자베스와 그의 아버지 마머듀크 템플이 맹추위를 뚫고 흑인 하인 아가멤논이 말을 모는 마차를 타고 귀가하면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초장에 미리 밝힌다. 이 책을 나중에라도 읽어보실 분은, 서문을 합해서 책의 본문만 724쪽의 길고 긴 장편소설인데, 처음 100쪽 까지 읽는 일이 사람에 따라(바로 나 같은 사람을 일컫는 것인데), 고난의 행군이 될 수도 있다. 전형적인 19세기 초반의 고전소설. 작가가 상상하는 화면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상세하게 다 묘사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말 콧구멍에서 흰 김이 어떻게 뿜어져 나왔으며, 엘리자베스 아가씨가 추위를 견디기 위해 어떠어떠어떠어떠어떠한 옷을 입었고, 아가씨의 친애하는 아빠 템플 판사께선 장갑 두 개를 겹쳐 꼈는데 첫째 장갑은 이런 모양이었고, 그걸 벗으니 속에 어떤 장갑이 나왔으며 때 마침 자기 앞 몇 로드 앞에 수사슴이 달려들어 어떤 방식으로 총을 집어 들어 어떻게 겨누었으며 총을 몇 발을 쏴서 결론적으로 사슴이 죽었느냐 말았느냐, 하이고, 숨넘어간다. 여기다가 번역한 장은명의 친절은 또 우리가 처음 보는 도량형 ‘로드’가 얼마나 긴 거리인지 가르쳐주기 위하여 20쪽에 고맙게도 각주를 달아 “길이의 단위. 1로드는 5.5 야드, 5.0292미터다.”라고 상세하게 일러주었으니 5.0292미터 = 5미터 2센티미터 9밀리미터 200 마이크로미터, 즉 마이크로미터 단위까지, 우리의 템플 판사가 사슴에게 총질을 해댄 거리를 이렇게 상세하게 이해시켜주는 반면에, 그에 앞서 12쪽에선 “옷세고 카운티는 뉴욕 식민지의 내륙지역 대부분과 함께 남북전쟁 전까지 올버니 카운티에 속해 있었다.”라는 본문의 ‘남북전쟁’에 각주를 달아 “남북전쟁  1861~1865”으로 역시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으나, 이걸 어째, 책의 출판 시점이 1823년. 소설가 쿠퍼 선생께선 앞으로 38년 후 벌어질 노예해방전쟁을 벌써 예견했다고 주장한다. 웬만하면 이런 말 안 하려 했는데, 미국에선 노예해방전쟁 이전에 ‘남북전쟁’이라고 일컫는 전쟁이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바, 그게 궁금하여 네이버 문학과지성사 포스트에 물어봐도 며칠이 지나도록 귀에 말뚝을 박았는지 입도 뻥긋하지 않는지라 심통이 나서 굳이 밝히는 바이다. 되게 웃겼지? 그냥 막 생각나는 대로 각주 달고 그래도 출판사의 명성엔 조금도 흠집 나는지 모르는 대한민국의 메이저 중 메이저 출판사. 근데 무슨 얘기하다가 여기까지 왔지?
 맞다. 100쪽 까지 읽기가 고난이었다고. 왜 그러냐 하면, 이 얘기하다가 극도로 세부적인 묘사까지 얘기했다. 여기에다가 19세기 전반기에 일단의 배운 사람, 아니면 돈 많은 종자들이 쓴 말버릇을 그대로 직역을 했기 때문이다. 예를 한 번 들어볼까?
 
 “그의 말을 듣는 두 사람의 시선이 무심결에 마주쳤다. 엘리자베스의 얼굴에 떠오른 홍조가 그녀의 눈에 나타난 차가운 표정과 모순되는 것이었다면 낯선 사람의 입 주위에 다시금 떠오른 모호한 미소 또한 그가 이 가족의 일원이 되는 데 동의할 가능성을 부인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이 자연은 마머듀크 템플보다 박애주의적 경향이 더 적은 사람의 마음조차 쉽사리 따뜻하게 해줄 만한 장면이었다.” (59쪽)

 위에서 얘기한 두 가지 이유, 극도로 세밀한 묘사와 낡은 수사들이 넘쳐나서 1793년, 1월에 루이 16세가 죽고 10월에 앙뜨와네뜨가 바통을 이은 그 해의 크리스마스 전날 오후부터 하여간 작가 쿠페가 주장하길 하루가 끝나는 시점까지가, 놀라지 마시라, 282쪽. 여기까지 읽었다면 첫째로 여태까지 읽은 게 아까워서, 둘째로는 이제야 비로소 사건의 진도가 팍팍 나가는 시점에 접어들어서 책장 넘기는 속도가 앞부분과 비교하면 광속이 된다.
 이 책, 암만해도 나이가 좀 든 다음에 읽어야 할 듯. 왜냐하면 초장의 지겨움을 21세기의 청춘들에게 견디라고 하면 그거 혹시 고문? 그러나 놀라지 마시라. 당신의 인내심이 400쪽을 넘길 수 있을 만큼만 굳세다면 이후로는 거 참, 책 재미나네, 라고 생각하실 수 있다. 18세기 말을 무대로 한 개척자들의 이야기라고 인디언이 말 타고 활 쏘고 총도 쏘고, 위스키나 럼도 마시고, 백인들이 무리지어 살갗 벌건 인디언 잡아 죽이느라 존 웨인을 대장으로 모신 청색 군복의 기병대가 나팔 불며 출동하는 전쟁 씬을 기대한다면 천만의 말씀. 대신 크리스마스 날 아침, 99 야드도 아니고 101 야드도 아니고 딱 100 야드 떨어진 곳에 잘 생긴 칠면조 한 마리 가져다 놓고 목만 내밀 수 있게 앞에다가는 돌덩이로 가린 다음, 총 쏴서 대가리를 맞히는 사람이 칠면조의 소유권을 갖되 총 한 방에 6 센트 씩 내야하는, 이걸 뭐라 해야 해? 민속놀이? 하여간 그런 거. 하늘을 완전히 까맣게 덮어버린 철새를 사냥하기 위해 산탄대포를 쏴서 가장 가난한 집안의 식탁에서 내일 모레 늦어도 글피 저녁상에선 거들떠도 보지 않을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남획하는 백인들의 욕심. 그물로 호수 속 물고기의 씨를 말리다시피하는 일종의 축제. 이런 것들이 인디언들의 소박한 삶과 삶에 대한 철학과 대비되고, 일찍이 저 멀리 <녹색평론선집>에서 볼 수 있었던 숙고해볼만한 삶의 방식 같은 것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잔잔하게 마음에 물결을 일으키는 책.
 19세기 초반에 나왔으니 시대적 한계는 있어서, 나중에 밝혀지는 태생의 비밀 같은 거에 많이는 실망하지 마시기 바람. 우와, 너무 심한 거 가르쳐드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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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 세계문학의 숲 3
토머스 드 퀸시 지음, 김석희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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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제목은 벌써 알고 있었고, 나름대로 명성을 떨치는 것은 물론이고 많은 다른 책에서 인용하는 독특한, 소설일 수도 있으며 읽기에 따라선 에세이라고 할 수도 있는 이 책을, 새삼스럽게 골라 읽은 건, 랭보의 시집을 골랐을 때와 마찬가지로 오직 하나, 움베르토 에코의 <로아나 왕비의 신비한 불꽃>에서 계속 인용하기 때문이었다.
 부록까지 포함해 185쪽에 불과하지만, 그리 읽기 녹록하지 않았다. 구성이 어렵다거나 복잡하고 난해하다는 뜻이 아니라, 놀랍게도, 19세기 초반에 쓴 글, 그걸 한국어로 번역해 놓은 문장들이 대단히 아름답다는 뜻이다. 글을 만드는 재료들이 정말 다양하고 그것들을 적절하고 교묘하게 버무려 독자로 하여금 글자들이 만들어내는 속뜻이 무엇일까 궁리하게 만들다가, 자신들의 마음 속 해석이 올바른 것인지 아닌지 관계없이 글에 공감하게 만드는 기묘한 아우라. 그리하여 갈피를 넘기는 속도가 빠를 수 없다.
 전적으로 기억에 의존해 쓴 글, 그것도 아편쟁이가 과거에 정말로 있었던 일들, 평소에는 바로 그 기억이 뇌의 주름 한 구석에 있었을 뿐,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가 아편의 자극에 의하여 끄집어낸 것인지, 아편이 뇌를 몽환으로 이끌어 정말 있었던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만들었는지, 독자로 하여금 끊임없이 의심하게 만드는, 동서를 가리지 않고 불쑥, 갑자기 솟아오른 불꽃처럼 돋아나는 생각들, 그것들의 묘사.
 어느 날 문득 시골집의 부엌에 나타난 말레이 인. 터번과 더러운 흰색의 바지가 벽에 댄 거무스름한 판자를 배경으로 도드라져 보이는 풍경. 나는 이 말레이 인과 아무 관계도 없으며 심지어 말레이 인은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고 나는 말레이 어를 한 마디도 못하는데, 의사소통 없이 말레이 인은 그냥 부엌 바닥에 한 시간 가량을 누웠다 떠나고, 난 그에게 기념으로 아편 조각을 건네준다. 남아시아 인이라면 아편과 친하겠지 싶어서. 말레이 인은 손바닥 위에 놓인 아편 조각을 그냥 꿀꺽 삼키고, 그 정도의 분량이라면 용기병 세 명과 그들의 말까지 한 번에 죽일 수도 있는 치사량임에도 나는 어떻게 할 줄 몰라 그냥 내버려두었으나 다행히 남아시아 사람이 길을 가다 죽었다는 소식이 없는 것을 듣고 안도한다. 역시 아편에 익숙한 남아시아 인임을 확인하며.
 이 일화는 본문 세 쪽에 걸쳐 있는 내용을 요약한 건데, 내가 글재주가 없어서인 것은 당연하지만, 아무리 요약을 잘 해도 원문의 그로데스크, 기이하고 또 쓸쓸한, 이런 거 다 합한 것을 비슷하게라도 쓸 수 없음은 물론이고, 이 내용이 책의 저 뒷부분에 다시 한 번 갑자기 등장해 나의 꿈속에서 거대한 공포로 자리하는 연결고리가 된다. 우선 생각나는 대로 하나만 꼽아본 (19세기 초반에 쓴 글이란 점을 생각하면) 놀라운 방식의 글이다. 이런 것들을 다 합해서 난 토머스 드 퀸시의 글을 아름답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인 의미로 자주 쓰는 아름다움하고는 좀 다른 거. 이 책의 초간이 나온 것이 1822년. 나폴레옹이 모스크바에서 쌍코피 흘리고 불과 10년 후, 워털루 전투로 폭망 7년 후에 쓴 글이란 거 감안하면 더 진가를 알 수 있는데, 처음에 얘기했듯 움베르토 에코가 이 작품을 자신의 소설에 즐겨 거론한 건, 책의 2부 세 번째 장, “아편의 고통”, 즉 금단현상을 겪을 때, 특히 꿈속에서 동서양과 아프리카까지 큰 그림의 원시상태와 다양한 파노라마가 <로아나 왕비....>의 주인공 ‘얌보’에겐 아찔한 기억일 수도 있었겠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감상을 간단하게 말하자면, 나는 재미나게 읽었으나 다른 사람의 만족까진 담보하지 못하겠다는 거.
 (어제 술 좀 마셨더니 아, 오늘 아침 글 참 안 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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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서 보낸 한 철 민음사 세계시인선 3
랭보 지음, 김현 옮김 / 민음사 / 197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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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의 번역은 반역이란 변하지 않는 집념 속에 외국 시집은 여태까지 딱 한 번 사 읽었다. 발음하기 힘든 인간이 쓴 <마야꼬프스끼 선집>. 석영중 선생이 번역한 것. 왜 읽었느냐 하면, 단편소설선인줄 알고. 이왕 산 거 그냥 버리면 아까워서. 근데 굳이 랭보를 또 사서 읽은 건, 며칠 전 움베르토 에코의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을 읽었는데, 랭보를 진짜 시인이라고 은유하는 걸 봐서 그랬다. 진짜 시인은 스무 살까지 쓴 낙서를 찢어버리고 상아 장사를 하기 위해 아프리카를 떠난다나. 가짜 시인은 스무 살 넘어서도 계속 낙서를 하는 거고. 여기서 아프리카로 떠난 시인이 바로 랭보를 일컫는다. 그리하여, 당장 랭보를 검색했고, 이왕이면 (진짜 실력은 내가 아는 바 없으니 별개로 하고) 독자들한테 가장 유명짜한 불문학자, 유명짜하기 위한 필요조건인 ‘아깝게 죽기’에 성공한 전 서울대 불문과 교수 김현(1942~1990)이 번역한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골랐으며, 1974년에 초판이 나온 책을 굳이 껍데기만 달리한 요즘 책으로 살 필요를 느끼지 못해 중고책으로 결정해 택배로 받았는데, 세상에, 이게 중고야? 완전 새 책이다.
 감상을 한 마디로 하자면, 역시 소신은 함부로 꺾는 게 아냐. 책을 열면 왼쪽 짝수 페이지엔 한글 번역이, 오른쪽 홀수 페이지엔 원문이 원어로 써 있다.
 요새 내가 이렇게 쓰는 걸 맛 들였다. 번호 붙이는 거.
 ① 김현 선생의 직업이 학교 선생이라, 번역을 했는데 독자가 이걸 이해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과하다. 직업의식이 강하게 발동, 곳곳에 각주를 두었다. 문제는 그놈의 우라질 각주 읽느라 감상이 안 된다는 거. 책에 처음 나오는 시를 예로 들어보자(다행히 짧기도 하다).



             감각



 여름 야청빛 저녁이면 들길을 가리라,
 밀잎에 찔리고, 잔풀을 밟으며.
 하여 몽상가1)의 발밑으로 그 신선함 느끼리.
 바람은 저절로 내 맨머리를 씻겨주겠지.

 말도 않고, 생각도 않으리.
 그러나2) 한없는 사랑은 내 넋속에 피어오르리니,
 나는 가리라, 멀리, 저 멀리, 보헤미안처럼,
 계집애 데려가듯 행복하게3), 자연 속으로. 


 

 1) 랭보의 현재 상태. 이 몽상의 상태는 저녁 들길의 신선한 감각과 대비된다.
 2) 사랑을 말과 생각에 대비시킨다.
 3) 이 직유로 판단컨대, <한없는 사랑>은 단지 사랑에 대한 막연하나 끈질긴 욕구일 것이다.




 이거 읽고 드는 기분은, 고등학교 시절 국어시간에 시 배우면서 이 시는 잃어버린 조국의 해방을 원하는 간절함이 주제고 소재는 우짜고저짜고 이런 느낌. 꼭 뭘 가르쳐주어야 마땅하다는 천생 선생의 번역이 아니냐고. 각주 1)은 굳이 설명할 필요 없는 거고, 2)도 마찬가지고, 3)은 더구나 천생 선생마저도 “일 것이다” 즉, 아닐 수도 있는 걸 굳이 각주로 달아야겠느냐고. 완전히 교과서 읽는 거 같다.


 ② 시를 내용으로만 읽나? 시집을 읽는 내내 오른쪽에 불어로 쓴 시를 읽는 프랑스 사람은 어떤 감각일까, 이게 무지 궁금했다. 모르긴 모르지만 내가 읽으면 뭐 별로 공감하는 것도 없고 공명할 수 있는 운율도 없고, 색다르긴 하지만 정서상 그리 맞는다고 할 수 없는데, 그래도 명색이 세계 시인선 가운데 1번을 <악의 꽃>이, 2번이 <말도로르의 노래>가 차지한다면 적어도 3번은 <지옥에서 보낸 한 철> 정도 아니겠느냐, 하는 거. 그 정도로 널리 알려진 시인이라면 뭔가가 있을 텐데 말씀이야, 그걸 모르겠다는 거다. 써놓고 생각해보니 수십 년 전에 로트레아몽의 <말도로르의 노래> 민음사 책을 사놓고 아직도 안 읽었다. 여전히 책꽂이 한 구석에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

 ③ 그리하여 주장하노니, 습관 함부로 바꾸지 마시라. 앞으로 나는, 역시, 번역한 시는 읽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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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9-29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마찬가지 이유로 번역한 시는 잘 읽지 않는데요, 이 시리즈에서 셰익스피어 소네트 사보고는 완전 격분했습니다.... 전 소네트 154편이 다 실린 건가 했는데 그것도 아니더라고요. 154편이 얼마나 한다고.

Falstaff 2017-09-29 10:33   좋아요 0 | URL
셰익스피어는 전예원에서 예전에 나온 연두색 표지의 책이 몇 권 있는데, 그거 괜찮았던 기억입니다. 소네트, ㅎㅎㅎ 할 말 없네요. 그 책도 원문하고 같이 실려있었나봐요. 그래서 토막낸 거 아니라면 정말 양심불량이고요.
지금 읽고 있는 문지 책은 작가 연표까지 738쪽. 예전에 책들이 다 이랬는데 언제부턴가 출판사가 돈만 밝히기 시작했어요. ㅠㅠ
 
건너간다
이인휘 지음 / 창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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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소설. 그리고 자전소설?
 무녀의 막내아들로 태어났고, 어릴 때부터 흥이 많았으나,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할 정도의 쓰라린 가난으로 이후 주욱 우울 모드를 유지하게 됨. 상급학교 대신 동대문 부근의 실 공장에 들어가 고생하다가 월남 갔다 온 셋째 형이 야간학교에 넣어줘 대학까지 다닌 나, 박해운.
 대학 다닐 때 1980년 서울의 봄 겪음. 광주항쟁을 계기로 인간성의 환멸을 느끼고 입대. 제대 후 복학하지 않고 공장생활 시작. 절대 노동운동을 위한 공장생활 아님. 쥐꼬리만 한 월급을 받아서는 기초적인 의식주 생활 말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자각. 이후 노동 강도가 어마어마한 타이어 공장(어디긴 어디야, 한국타이어 영등포 공장이지)에 들어가고, 여기서 노동의식 일깨움. 이후 노동운동 투신. 주로 노동문화운동에 전념하며 틈틈이 글을 씀. 그게 어여뻐서인지 주인공 박해운의 동의도 얻지 않고 잡지에 소설을 실어 등단함. 첫사랑은 실패로 돌아가고 교사 직업의 두 번째 여인과 결혼. 생활비는 아내가 벌어오고 자신은 노동문화운동에 헌신. 가끔 소설도 씀. 당연히 나이 들고 이에 따라 아내가 7년간 아픔. 아내의 건강을 되찾기 위해 전력을 다함(돈 벌이 빼고. 아니 그건 생략했는지도 모름). 아내가 건강을 찾고, 남한강 중상류지역으로 이주하며, 2년 동안 식품회사 제조공장에 들어가 주로 호떡 뒤집음. 노동문화운동을 한 이력으로 여러 소설가, 시인, 가수(싱어송 라이터)들과 교제.
 자. 이게 책의 내용이다.
 1980년대 전국적으로 노동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물론 그 다음에도 획기적인 발전을 없었지만) 공장 노동자들의 급여는 정말 열악했다. 나도 그때 직장생활 해서 안다. 작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말한다. 집세내고 먹을 거 사면 끝이라고. 인정한다. 근데 한 가지 도무지 마음에 차지 않는 건, 주인공의 20대 시절. 그니깐 아직 의식화가 되기 전, 그는 만날 라면만 끓여먹으며 지하 쪽방에서 구겨진 인생을 살더라도, 늘(물론 책 내용과 달리 ‘언제나’는 아니었겠지만) 여급이 서빙하는 술집에서 맥주를 마시며 아가씨의 가슴을 주물럭거렸으며(20대 중반의 청년이), 단골 창부에게 생활의 곤고함을 해소하고는 했다. 의식화된 후에도 그의 생활방식이 근본적으로는 고쳐지지 않는다. 주인공이 원래 선해서 결혼을 한 다음엔 결코 그런 일이 없었던 건 물론 백퍼 사실이겠지만, 결혼 전의 그런 생활방식이라면 아무리 급여가 많아도 비용을 다 충당할 수는 없다. 또, 대학 다니면서도, 서울의 최고 사립 고등학교를 나왔으니(그땐 서울에 5대 공립, 5대 사립이라고 고등학교도 다 서열이 있었다) 일단 괜찮은 대학에 다녔다고 가정하고, 거기다 그리 항문이 째질 정도로 가난한 집에서 대학에 보낼 정도라면 서열 낮은 학교가 아니라고 짐작할 수 있는데, 그러면서 당시에 그렇게 흔한 아르바이트, 입주 과외 한 번 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인물이다. 아니면 그렇게 쉽게 돈을 벌었다는 걸 굳이 밝히고 싶지 않았든지. 그러니 박해운(하필이면 내가 빌어먹고 사는 회사의 아주 성실한 젊은 정비공과 이름이 같다)의 기본 정서는 허무와 무기력.
 전두환의 서슬 퍼런 공포정치가 스모그처럼 하늘을 뒤덮은 1980년대 중반의 영등포와 구로공단에서 벌어진 노동운동을 통해 의식화된 박해운. 의식화는 행동 또는 운동, 싸움을 통해 공고화 한다. 전태일 평전을 읽고, 박일해(박노해의 변형이겠지)가 쓴 시집 <노동의 아침>(역시 <노동의 새벽>일 거다)을 읽으며 노동문화가 가능하다는 걸 알아낸 ‘나’는 점점 가열차게 노동운동에 참여하지만, 역시 노동을 통해 얻는 밥이 사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라 직업을 버리고 운동에만 몰두할 수 없다. 여기에 찬란하게 등장한 여인. 교사출신의 아내. 아내는 돈을 벌고, 남편은 하고 싶은 노동문화운동에 본격적으로 투신하는 계기가 마련되는 것. 아, 생각 복잡해진다. 2017년에 쓴 노동운동 관련 소설을 2017년에 읽는 일. 거기다가 작가가 나와 거의 비슷한 시절을 산 사람임에야.
 다시 분석. (나 이런 거 되게 싫어한다)
 ① 주인공, ‘나’ 박해운이 여태까지 살아 온 인생살이
 ② 식품공장에서 호떡 뒤집으며 아직도 노동운동이 유효하다는 주장
 ③ 노래를 잃어버린 하태산(정태춘인 건 얘기 안 해도 다 앎)이 노래를 되찾는 광경
 이렇게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인데, 문제가 그리 쉽지 않다. 맞다 쉽지 않다. 지금까지 열라 써내려갔던 걸 한 방에 싹 지워버렸다. 내가 시대를 정의할 수준도 되지 못하고,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건, 책을 읽은 감상을 쓰는 독후감이지 비평이나 논문이 아니지 않는가 말이다.
 한 가지 작은 오류를 지적하자면, 책에서 주인공 박해운이 호떡 뒤집는 일을 하는 식품 공장의 작은 불만을 토로하면서, 2천 여 만원의 돈이 거론되는데, 그걸 작가는, 사장 입장에선 하룻밤 접대비 정도의 돈, 이라고 하는 장면. 시점이 2016년. 하이고, 손도 크네. 20대 중반부터 아가씨 젖가슴을 주물럭거리며 술을 마셔왔으니 그 방면에서 나보다 훨씬 통달할 수준이겠지만. 중견기업이 우리나라 최고의 회사라고 일컫는 대기업 구매 담당자들에게 하룻밤에 700만원 접대했다고 접대비 올리는 건 봤다. 회사 뒤집어졌다. 접대자인 영업사원이 그중 많은 돈을 삥친 거다. 소위 말하는 카드깡을 통해서. 노동운동 오래 하신 분이 어떻게 2천만 원을 그리 우습게 아는지, 참. 악덕 사장새끼도 자기 돈 아까운지는 안다. 그래서 직원들 달달 긁어가며 사탄의 아들 노릇을 하는 것이지.
 하여간 난 주인공 박해운이 드럽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학 다니며 자기가 돈을 벌어봤다는 얘긴 전혀 없고(그러면 역시 째지게 가난한 무당 엄마가 등록금을 내줬단 얘긴데 하는 짓이라곤 술 마시고 인생 허무하다는 얘기 뿐), 공장 다니면서는 본격적으로 맥주에 아가씨 젖가슴, 단골 창녀에 빠졌으며, 결혼한 후엔 아내의 수입에 의존해 자기 하고 싶은 일 다 해가는 거.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질투난다. 내 마누라가 날 벌어먹였다면, 나도 하고 싶은 일, 다는 아니더라도 조금은 하면서 살 수 있었을 텐데.
 우여곡절 끝에 작은 중소기업에 들어가 호떡 열라 뒤집으며 이젠 한국타이어가 아니라 뭔 식품의 악덕 사장에게 칼끝을 겨누는 작가. 이 악덕기업을 깨부수기 위해선 회사의 대차대조표나 손익계산서 정도는 인용했어야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누가 알아? 진짜 회사 사정이 어려웠는지. 이렇게 얘기하는 건, 작가의 시각 및 방법이 아직도 1980년대나 적어도 1990년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결코 이인휘에게 나쁜 감정, 없다. 어? 내 시각이 변한 건가? 그럴 수도 있겠다. 이제 나는 보이는 것만 믿기 때문에 노동운동가 박해운에게 재무제표를 요구하는 것인지도.
 자, 결론.
 이 책? 한 마디로 말해서, 촛불 찬가. 2016년부터 2017년까지 광화문부터 시작해 숭례문까지 이어지던 촛불의 군집. 그 속에서 싱어송 라이터 하태산은 다시 노래를 되찾았고, 그건 시민의 승리를 이야기한다.
 이번엔 진짜 이해 못할 것 하나.
 작가는 주장한다. "민의가 헌법에 우선한다"고.
 이거 정말, 진심으로 쓴 거야?

 

 "민의가 헌법에 우선한다"는 건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할 수 없는 말. 헌법이 민의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헌법을 고치기 위하여 투쟁을 해야한다. 헌법을 수정하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고 민의가 최고의 가치를 가졌다고 이야기하는 건, 2017년 현재, 아웅산 수치나 김정은 또는 진심으로 시대에서 멀어졌다고 생각하는 아나키스트 아니라면 이야기 할 수 없는 비민주적 발상이다. 더구나 우리의 현대사에선 투쟁하여 헌법을 바꾼 적이 두번이나 있지 않은가. 4.19와 6.29. 혹시 포퓰리즘이 최고의 선이라 웅변하는 것인지 (내가 백퍼 민주주의자라고 주장하는 건 아니지만) 갑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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