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기증.감정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3
W. G. 제발트 지음, 배수아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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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성의 고리>와 <아우스터리츠>에 이어 세 번째 읽은 제발트. 이이가 1944년생. 2001년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으니 불과 57세. 이 책까지 세 권을 읽고 이이의 생몰 연대를 보니 저절로 나오는 한숨. 나는 무슨 염치로 제발트 보다 더 오래 살고 있는가. 1944년에 태어나 1988년 영국의 이스트앵글리아 대학 독문과 교수로 재직하면서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으니 그때부터 유작이 되고 만 <아우스터리츠>까지 겨우 13년간 작가로 활동했을 뿐이다.
 <아우스터리츠>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말인데,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을 보나파르트가 작살을 낸 전쟁터가 아우스터리츠. 그러나 작품에서 ‘아우스터리츠’는 전쟁터가 아니라 2차 세계대전 직전에 영국으로 피신해온 1만 명의 유대인 어린이 가운데 한 명으로, 당시 네 살이었던 아우스터리츠가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장소를 찾아 떠나는 이야기였다. <토성의 고리>는 영국 남동부 지역을 주로 도보로, 가끔은 버스로 여행(이라기보다 순례)하며 문명과 문화, 인간과 역사 등에 관해 깊은 사색을 보여준다.
 이 책 <현기증, 감정들>은 위 두 권의 경향을 다 포함하고 있으며, 네 개의 부部가 긴밀하지는 않지만 서로 연결된 내용으로 된 독특한 구성을 가진 소설. 보나파르트의 3대 승전 가운데 세 번째 전투가 아우스터리츠. 첫 번째 큰 승리를 거둔 전투는 수만 명의 프랑스 병사들이 무거운 대포를 끌고 알프스를 넘어 피아몬테 부근에서 오스트리아 대군과 맞장을 떠 극적 역전승을 벌인 마렝고 전투. 이 전투에 직접 참전한 수만 명의 인물 가운데 유명한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우리가 아는 이가 한 명 있었다. 앙리 벨. 누군지 모르시겠지? 이 젊은이가 나중에 소설가가 되어 작품을 발표한 필명이 ‘스탕달’이다. 나도 처음 알았다. 당시까지는 절대 불가능할 것이라 여겼던 알프스를 넘었다는 것도 극적인 일일 텐데, 마렝고에서도 되치기 한 판으로 역전승을 거둔 경험을 겨우 열일곱 살 때 했다. 이 정도면 역사상 워털루 전투를 가장 실감나게 묘사한 작품으로 스탕달의 <파르마의 수도원>을 꼽는 것도 수긍이 간다. 스탕달의 본명이 ‘벨.’ 그리하여 이 책의 첫 장 제목으로 <벨, 또는 사랑의 기묘한 진실>을 붙이는 것. 첫 장에선 벨의 이탈리아에서의 연애사를 중심으로 평생을 괴롭힌 매독 후유증과 이로 인한 사망까지 적고 있다. 그러면서 절대 잊지 말아야 할 포인트로, 사람의 기억에 관해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기억하고 있는 영상과 사실은 다르다는 것. 나도 간혹 기행문을 쓰는데, 쓰면서 사진을 보며 진실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영상과 당시 감정을 위주로 쓴다. 그러다가 나중에 특정 지역이나 사찰의 사진을 우연히 볼 기회가 있으면, 기억과 실체로서의 사진이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지 놀라고는 한다. 페르난두 페소아의 소설 <불안의 책>을 보면, 여행에 관해 이야기 하는 바, 상상과 그 상상의 확장 안에서 특정 지역을 수도 없이 가서 보고 느끼고 거닐고 만끽한 것이 진짜 여행이지, 정말로 비행기 타고, 기차로 갈아타고 며칠을 달려 어느 무인역에 내린 다음 또다시 며칠 동안을 피곤하게 걸어 도착한 그곳에 어찌 진실이 있겠느냐는 취지로 말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페소아의 경우는 직접 특정 장소를 가 볼 필요 없이 방 안에서 사색을 통해 진정한 여행을 할 수 있다는 좀 과격한 주장을 하는 반면, 제발트는 여행을 먼저 하고 당시의 기억을 적기는 하지만 그것은 작가의 필터에 의하여 한 번 이상 걸러져 그 결과 다분히 변형된 상태로 타인에게 전해진다는 점이 차이가 난다. 물론 이건 벨, 즉 스탕달의 연애의 경험과 추억에도 적용되는 말일 것이다.
 두 번째 장 <외국에서>는 1980년 자신이 살던 영국을 떠나 빈을 거쳐 이탈리아 베니스와 베로나 지역 등을 여행하며 검은 프록코트를 입은 건장한 젊은이 두 명에게 미행을 당하는 듯한 공포감으로 서둘러 영국으로 돌아가는 과정과, 첫 장에서 선보인 기억과 사실의 차이점 등에 관해 계속 언급을 한다. 이후 7년이 흘러 1987년 휴가철에 다시 이탈리아를 방문해 이곳저곳을 다니며 제발트 특유의 문명비판과 인간 행위 유형(이렇게 쓰니 복잡하게 보이겠지만 쉽게 얘기해 그냥 ‘역사’) 등에 관한 사색, 여행 중 해프닝 등에 관해 써놓았다. 마치 영국 남동부 지역을 순회한 작품 <토성의 고리> 한 장면을 읽는 것과 유사하지만, 영국과 이탈리아, 북해와 지중해의 차이 정도로 감수성이 다른 점이 재미있다.
 세 번째 장 <K 박사의 리바 온천 여행>은 “1913년 9월 6일, 프라하에 있는 노동자 상해보험회사의 부사무관인 K 박사는 응급처치와 위생에 관한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빈으로 향하고 있었다.”로 시작한다. 생각해보시라. 프라하 출신 1913년에 보험회사 다니던 유명인물 K. 누구? 그렇습니다. 카프카. 카프카라는 말이 아니라 카프카를 생각나게 한다. K 박사는 가르다 호수 남쪽에 있는 데센차노에 방문할 예정이었다. 작은 마을 데센차노에선 그를 영접하기 위해, 라기 보다 오랜만에 보는 외지인 높은 양반이 온다기에 사람들이 광장에 집결해 있었는데, K는 그만 병에 걸리고 만다. 그래 데센차노에 방문하는 대신 온천으로 유명한 ‘리바’라는 고을로 가서 ‘물 치료’를 받게 된다. 여기서 한 퇴역 장군을 만나 전투 얘기를 하던 중, “감각으로 잡히지 않는 사소한 요인들이 항상 (전투의)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법이라고, “세계사를 뒤바꾼 주요 전투들이 바로 그런 요인들의 작용을 받았던 것”이라며, 워털루 전투도 “전사한 오만 군사와 말들의 생명과 비견될 정도로 비중 있는 요인들, 생사를 결정짓는 것은 결국 사소하면서도 특별한 비중의 문제”이며 “그 점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던 사람은 어떤 유명한 장군도 아닌 바로 스탕달”이었다고 단언한다. 1부의 유령인줄 알았던 벨 선생이 다시 등장하기에 이른 것. 위에서 언급한 <파르마의 수도원>의 워털루 전쟁 묘사에 이 “생사를 결정짓는 사소하면서 특별한 비중의 문제”가 등장하니 관심 있으신 분은 일독을 권함.
 4장 <귀향>은 역자 배수아에 의하면, 드물게 자전적인 내용이 담겨 있어서 그의 고향인 남독일 알고이 지방 베르타흐를 방문한 일지를 적고 있단다. 책에선 딱 잘라 ‘베르타흐’라고 하지 않고 ‘W’라고만 표시하고 있다. 고향을 떠난 뒤 처음으로 다시 찾은 W, 작가는 자신이 태어난 집이 하숙 또는 여인숙으로 변한 것을 발견했고, 자기의 태가 묻힌 집에서 약 40일간을 머물며 자신의 유년의 기억에만 있는 추억을 반추한다. 여기서 독자가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하는 건, 저 앞에서 제발트가 스스로 이야기했듯 기억과 사실은 다르다는 점. 그리고 이 작품은 다큐멘터리가 아닌 픽션이라는 점. 독자 스스로 제발트가 쳐놓은 덫에 빠져 지금 작가가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당연히 아마추어인 내 생각이지만, 수원 밑에 병점 찍고, 오산이다. 제발트는 소설가이고, 소설가라는 직업은 프로페셔널하게 거짓말을 꾸며대는 인간이어서, 제발트 역시 거짓말 쓰는 대가로 인세를 받는다. 더구나 일찌감치 스스로 고백했으니, 유년의 기억이란 사실이 아니고 자체가 허구란 점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근데, 문제는 이게 중요한 게 아니란 거. 이 위에 쓴 네 개의 장에 대한 요약은 그냥 요약일 뿐, 이 책의 매력을 설명하는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제발트를 제발트로 읽는 것은 작품 안에 든 압축공기를 흡입하는 일이다. 절제되고 응축되어 수은처럼 똑 떨어지는 듯한 문장 속에 든 사색과, 글을 쓰기 위해 미리 치밀하게 준비한 내용물을 받아들이는 것. 문장과 내용,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모두, 현 시대에 이리 충만한 작품을 읽을 수 있어서, 제발트의 이른 죽음이 더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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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
임레 케르테스 지음, 정진석 옮김 / 다른우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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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레 케르테스의 3부작 가운데 마지막 작품. <운명>과 <좌절>은 전에 독후감을 올렸다. <운명>에선 열네 살 소년 죄르지가 노동봉사대 일원으로 작업을 나갔다가 버스에서 단체 검문에 걸려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갔다가 10개월 만에 부다페스트로 귀환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열다섯 살 죄르지의 일인칭 시점의 눈을 빈 마흔다섯 살 케르테스. 근 삼십년의 세월이 지나, 당시 유대인으로 아우슈비츠와 부헨발트에서의 존재를 사색해보는 작품이라, 유대인 수용소를 다룬 소설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던 나치에 의한 잔혹한 장면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독자들은 <운명>을 읽으면서 아우슈비츠에서도 역시 사람은 다만 존재의 문제였다는 것을 조금 밋밋하게 읽었을 수 있다. 삶과 죽음이 머리털 한 가닥 차이로 결정되는 와중에 삶을 이어가기 위한 의지를 잃지 않는 것을 행운이라 말하기도 한다. 그곳에서의 생멸이 운명이라면, 운명이 삶을 지배할 때 그곳에선 자유가 없으며, 자유(즉 선택의 가능성)가 있는 곳엔 운명이란 없는 것임을 자각한다. 그러하여, <운명>은 독자가 책 속의 이런 메시지를 포착하지 못하더라도 열네 살의 죄르지가 아우슈비츠로 끌려가 다시 생환하는 스토리가 있어 색다른 체험기로 읽힐 수 있다.
 그러나 2부인 <좌절>을 읽으면 좀 복잡해진다. <좌절> 역시 일인칭 시점의 작품이다. 주인공 ‘노인’은 아우슈비츠 생환 후 30년이 지나, 당시의 체험을 책으로 쓰기 위해 끊임없이 시도를 하지만 출판사는 그의 작품을 출간하기를 꾸준히 거절하고 있는 상태. 자신의 경험을 타인에게 설득시킬 수 없는 불통의 상태를 견디다 못해 노인은 결국 현실과 타협해서 현대의 독자들이 읽을 수 있을 만한 소설을 쓰기에 이르고, 그렇게 나온 소설이 작품의 뒷부분이 된다. <좌절>은 앞의 작품 <운명>을 읽지 않으면 노인의 고민, 유대인에 대한 정의, 유대인 수용소에서의 생과 사를 가르는 운명, 운명의 당사자가 받을 수밖에 없는 스트레스 등을 이해하는데 조금 곤란을 겪을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앞의 작품보다 읽기가 수월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고.
 이번에 읽은 3부작의 마지막 작품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는, 읽으면서 이것이 소설인지 아니면 거대한 에세이인지 의심이 갈 정도로 사변적이라 전혀 쉽게 읽히지 않는다. 노년의 작가이자 번역자로 활동하고 있는 ‘나’는 유년시절 가부장적 절대 권위를 누리는 아버지로부터의 애정결핍, 부모의 이혼, 기숙학교의 권위주의적인 규율, 아우슈비츠 수용소 체험, 결혼과 이혼을 겪었다. 헝가리의 한 휴양소에서 험악하게 생긴 철학자 오블라트 교수를 만나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질문인 “혹시 당신의 아이가 있나요?”란 질문을 받고 즉각, 본능적인 반발력으로 “아니오.”라고 대답하면서 이 읽기 힘든 소설은 시작한다.
 신에 의하여 특별한 선택을 받은 이 민족에 내려진 축복 가운데 하나가 “생육하고 번성하라”인데 유대인으로, 유대인이기 때문에 경험해야 했던, 유대인 아버지의 가부장적 훈육, 나중에 아우슈비츠의 굴뚝으로 연기가 되어 날아가고 만 유대인 교장에 의한 엄격한 교육과정,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운명에 대한 복종 등은 자신의 복제품 생산에 강한 거부감을 갖게 한 건 아닐까. 한 모임에서 자신이 아우슈비츠 체험에 관해 색다른 이야기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던 아름다운 유대인 아가씨와 많은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맺어진 후에도, ‘나’를 압박하여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집착하고 있던 것. 제목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주인공 ‘나’가 스스로 만들기를 거절한, 그래서 아이를 낳고자 하는 젊은 아내와 결국 이혼할 수밖에 없었던 인공불임 또는 자의적 불임 때문에 태어날 수 없었던 미지의 자기 아이를 뜻한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해 기도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는 여기서 밝히지 않겠다. 내가 읽은 책은 출판사 ‘다른우리’에서 나왔지만 지금 절판. 그러나 올해 하반기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로 출간 예정이라니, 미리 결론을 가르쳐드리는 실례를 범하지는 않겠다.
 책은 참 읽히지 않는다. 200 페이지를 살짝 넘기는 얇은 장편소설임에도 한 문단을 여러 번 읽어도 이해가 될 듯, 말 듯 한 철학적, 수사적 표현들은 힘들었다. 예를 들어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이렇게 묘사하기도 한다.
 “나의 존재를 너의 존재의 가능성으로 간주한다면, 간주한다면, 너의 없음을 나의 현존재의 필연적이면서 근본적인 자기청산으로 간주한다면, 간주한다면.” (119쪽)
 즉 아이를 태어나지 않게 하는 일이 지금 나의 근본적인 자기청산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 이런 생각을 가진 주인공 ‘나’는, 이미 늙은 ‘나’는 피부과 의사인 전처를 정기적으로 만나 처방전을 건네받으며 의식의 변화를 받았을까, 안 받았을까. 책이 그렇게 친절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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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인귀의 행복을 위하여 말로센 시리즈 1
다니엘 페낙 지음, 김운비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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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에 이이가 쓴 <산문팔이 소녀>를 재미있게 읽었다. 소설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이야기 하나로 시간가는 줄 모르게 만든다는 것. 괜찮은 이야기꾼이 있어 자기 머리에서 마구 쏟아지는 거짓말을 주체하지 못하고 줄줄 흘려내는데, 그 이야기를 읽는(또는 듣는) 재미가 밤을 꼴딱 새우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 이런 소설책들을 두고 소위 ‘문학성’ 운운하는 건 염병을 하다가 갑자기 땀이 뚝 그칠 말이다(숨이 꼴딱 넘어갔다는 말씀). 현존하는 가장 오랜 소설책이 로마의 네로 시대에 페트로니우스가 썼단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소설책이 독자에게 줄 수 있었던 가장 큰 효용이 과연 ‘문학성’일까 아니면 ‘재미’일까. 나는 ‘재미’라는 쪽에 만원 건다.
 내가 전에 읽은 페낙의 <산문팔이 소녀>를 보면 앞부분에 거구의 우락부락한 남자가 출판사 사무실에 난입해 사무집기와 비품을 때려 부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면 자보 여왕이라 불리는 문학팀 팀장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사라지고, 우리의 뱅자맹 말로센 씨가 등장해, 출판사에 원고를 몇 편이나 보냈지만 아무런 답변도 듣지 못해 꼭대기까지 열이 뻗은 남자보다 더 난리굿을 쳐, 책꽂이의 책들을 쏟아내고 책상 위 서류, 집기들을 몽땅 훑어내다가 난데없이 자기 머리카락을 부여잡고 자신의 불운을 호소하는 방법으로 그를 가라앉게 만든다. 이것이, 이번에 <식인귀의 행복을 위하여>를 읽어보니까, 무대는 출판사가 아니라 프랑스 파리에 있는 대형 백화점이지만, 거의 비슷한 직업을 아주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이런 방법으로 화난 사람의 (물론 100%는 아니지만) 성질을 가라앉히는 특별한 재주가 있는 인물이다. 백화점 내 맡은 직무는 품질관리 담당. 백화점에서 팔리는 모든 제품에 관한 품질을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자리다. 그러나 사실, 알고 보면, 제품의 불량으로 피해를 입어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솟구쳐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고객 앞에서 객장 책임자가 (과하게)사납게 말로센 씨에게 불이익을 가함으로써 고객으로 하여금 말로센 씨를 불쌍하게 여겨 보상 규모를 대폭 축소시켜주게 만드는, 일종의 희생양 노릇이다.
 아무리 더러워도 직업을 그만둘 수 없는 건 바로 철없는 엄마 때문. 엄마의 취미는 아이 낳기. 열다섯 살도 되지 않아 첫사랑의 아이를 배에 집어넣은 것이 바로 우리의 뱅자맹 말로센. 뱅자맹은 겨우 걸음마를 시작하자마자 이웃에 있는 아랍인 음식점 주인 내외에게 맡겨지고 버릇처럼 엄마는 가출을 되풀이 한다. 가출이 끝나고 귀가할 즈음이면 어김없이 산만하게 배를 부풀리고 있어서, 이 책에선 다섯 명과 반half의 씨 다른 동생을 두었는데(엄마는 초장부터 가출 중이고 책이 끝날 때에야 역시 산만한 배를 부여잡고 귀가한다), 동생들을 끔찍하게 사랑해 자신이 기꺼이 다 부양하고, 보호하고, 가능한 한 최대의 복지상태를 누리게 해야 한다는 관념을 가진, 천사다, 천사. 심지어 여동생 클라라를 낳을 때, 산파는 술에 잔뜩 취해 떡이 되어 엄마 옆에서 자빠져 자기만 했고, 의사는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어, 뱅자맹이 직접 받아야 했을 정도다. 당신 같으면 이렇게 하겠어? 할 수 있겠어? 뱅자맹이 천사인 거 맞지?
 책에서는 모두 여섯 명이 사제 폭탄에 의하여 터져 죽는데, 기존의 추리소설에 익숙한 독자가 읽는다면 어째 좀 수상하게 죽는다, ‘가능하지 않는 살해법인걸?’ 비슷하게 불만을 표출할 수 있겠다. 이 책이 나중에 6편까지 나올 소위 ‘말로센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으로, 작가도 6편까지 쓸 수 있을 줄 몰랐을 테니까. 한 번 써봤더니 이게 대박을 쳤는데, 얼마만큼 대박이냐 하면 프랑스에서만 백만 권이 팔렸고, 미국 등 영어권을 합해, 다니엘 페낙을 돈방석, 수준을 넓혀, 돈 침대 위에 누워 1893년 남 프랑스 산 상파뉴를 홀짝거릴 수 있게 해주었다는 거 아닌가. 그러니 후속 작품을 쓰지 않을 수 있었겠어? 그래 시리즈가 시작되는 것이니, 이게 첫 번째 작품이라 아무래도 구성, 살인하는 방법 등등에서 좀 미숙했겠지. 그래 추리소설 전문독자께서는, 추리소설 전문독자 특유의 날카로운 분석과 결과예측 같은 걸 조금쯤 양해해주시는 편이 좋겠다. 엽기살해와 범죄의 구성 및 해결이 아니더라도, 이 책은 한 페이지에 적어도 한 번 씩 등장하는 유머가 사실 진짜배기니까.
 ‘식인귀’ 하면 딱 떠오르는 그림이 있다. 프란시스 고야가 그린 <자식을 삼키는 사투르누스>. (그림은 검색해 찾아보시라. 너무 괴기해 업로드 포기했다.) 뱅자맹의 막내아우 프티가 학교에서 크리스마스에 관한 그림을 그리라니까, 새빨간 옷을 입은 채 산 사람을 뜯어먹는 괴물을 그렸단다. 뱅자맹은 밤잠이 없는 아우들을 위해 아이들이 잠들 때까지 모두 모아놓고 자기 머릿속에서 넘쳐흐르는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 해주었던 터라 무수한 이야기 속에 고야의 그림처럼 엽기적인 내용도 당연히 있었을 것이고, 그걸 기억한 무구한 프티가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사람을 잡아먹는 새빨간 입을 가진 식인귀를 그렸을 수 있을 것. 근데 막내가 그린 그림 가지고 책의 제목을 정할 수 있지는 않겠지. 때는 194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유대인으로부터 거의 강제로 몰수하다시피 넘겨받은 백화점의 내부를 찍은 사진 한 장을 발견한다. 한 명의 독일인을 포함해 모두 여섯 명으로 이루어진 집단은 정말로 식인의 의식을 집전하는 종파를 결성했으니 “여섯 식인귀의 오붓한 동아리인 111 사제단.” (366쪽) 이 무식하기 짝이 없는 여섯 명은 모두 111명의 아이를 죽여 식인 의식을 행함으로써 유사 기독교에서 악마의 숫자로 불리는 666을 구현하게 된다. 이제 세월이 훌쩍 지나 낼 모레 염라대왕을 배알할 입장에 놓인 노인이 된 이들은 누군가에 의하여 한 명, 한 명이 차례로, 그들이 몇 십 년 전 식인의 의식을 행했던 백화점에서 펑, 펑, 폭탄에 의해 산산이 몸이 찢어진 채 죽는데, 누가 그랬게? 왜 하필이면 자본주의 최대의 전시장인 일류 백화점의 희생양인 뱅자맹 말로센 앞에서 폭발이 일어났게?
 안 알려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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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 창비시선 371
유병록 지음 / 창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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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이 서른세 살 때 낸 시집.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는 책에 실린 시의 제목이 아니라 시 <흰 이야기>의 두 번째 연, 첫 행이다. 언젠가부터 시의 제목이 아니라 시어 가운데 하나를 따서 시집 문패로 붙이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터’인지는 모르겠다. 오랜 시간 동안 시집을 읽지 않아서. 제목이 조금 살 떨리지? 목숨이 두근거린단다. 염통이 두근거리는 건 알겠지만 어떻게 해야 목숨이 두근거릴까. 이 표현이 들어 있는 시 <흰 이야기>는 토끼가 자신이 낳은 새끼들을 죽이는 걸 보고 지은 시. 전에 수리부엉이가 토끼를 사냥하는 장면을 TV에서 본 적이 있다. 놀랍게도, 토끼도 비명을 지른다. 정말이다. 유병록도 토끼가 고함을 지르는 걸 본 모양이다. “고함이 이렇게 크다니 / 눈도 뜨지 않은 것들, 흰 털 속에 무수한 힘줄을 숨긴 것들 / 무럭무럭 자라 내 목을 조이겠지 나를 몰아내겠지 / 가만히 앉아 당할 순 없어 희생 따위는 / 한무더기 푸성귀만 못하지 / 토끼의 귀가 팽팽하게 일어선다 뭉뚝한 기억을 딛고 / 이빨이 뾰족해진다 / 차례차례 잠든 새끼들의 숨통을 끊는다” 고함을 지르는 것이 어미인지 새끼인지 드러나지 않는다. 나는 실제로는 고함을 지르지 않았다는 데 만원 건다. 토끼를 비롯한 설치류들은 자신이 출산한 새끼들의 숫자가 적다고 생각할 때, 생각을 정말 했겠어, 그냥 유전인자에 쓰여 있는 느낌대로 적다는 기분이 들면, 가차 없이 자신이 낳은 새끼들을 오도독오도독 씹어 먹는다. 수유기간을 줄여 얼른 다시 임신을 하고, 자신이 잡아먹은 새끼들은 새로 임신할 새끼들을 위한 영양분으로 만들기 위해. 자연에는 낭비란 없으니까. 이런 장면을 본 시인은 그리하여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 / 흰 토끼가 숨통을 물어 벽에 던진다 / 천둥의 밤이 고요해질 때까지 / 털 속의 불안이 다 지나갈 때까지”라고 흰 털의 죽은 토끼에게 자신을 이입한다.
 이것처럼 이 시집은 유난하게 죽음에 관심을 쏟는다. 예쁘장하게 생긴(남자다, 남자) 시인이, 그것도 삼십 초반에 왜 이렇게 죽음에 경도되었을까. 하긴 뭐. 시인 마음대로다. 따져보면 10대 중후반에 죽음을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않은 인간들이 몇이나 있을까. 인류의 극소수인 야훼의 장자들을 제외하면 말이지. 근데 유난히 섬뜩한 시가 있어 전문을 소개한다.



 사자(死者)의 서(書)



 거기에서는
 죽은 자의 피부를 벗겨 가까운 사람들이 나눠 가진다더군 아끼는 책을 장정하고 이름을 새긴다더군


 죽은 자는 책이 된다더군


 아이가 태어나 글을 익히면
 최근에 죽은 자의 피부로 감싼 책을 선물한다더군
 그를 대부로 삼는다더군


 거기에서는
 몇권의 책을 정정하며 성인이 된다더군
 결혼을 서약할 때는 책에 손을 얹고
 여기 장엄한 생을 두고 맹세합니다, 말한다더군


 때가 되면
 가까운 사람들의 이름을 유언으로 남겨야 한다더군


 거기에서
 죽은 자는 몇권의 책이 된다더군
 문자의 외투가 된다더군


 늙어서 죽은 자는 지혜의 책이, 젊어서 죽은 자는
 혁명의 책이 된다더군
 아이가 죽으면 예언서가 된다더군


 삶에 관한 의문이 드는 저녁에 쓰다듬는
 한권의 생이 된다더군


 시집의 해설을 쓴 평론가 양경언은 이 시에 대하여, “문자와 종이의 관계를 뼈와 몸으로 여기는 시인에게 한 권의 책은 곧 생의 축약이다. 해서 독서 행위를 생의 구제로 다가오게 하는 계기도 몸의 ‘만지는’ 행위를 통해서”라고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해놓았다. 그러나 내가 느끼는 가장 큰 섬뜩함은 정말 사람의 가죽을 벗겨 무두질을 해 장정한 책의 사진을 “보았다”는 점이다. 인간의 피부로 장정한 책이 정말 있냐고? 있다. 서울대학 도서관에도 있고, 하버드대학 도서관에도 있고, 노트르담대학 도서관에도 있다. 그림 첨부한다. 다만 서울대학 도서관의 인피 서적은 도서관 사서의 얼굴이 노출된 관계로 올리지 않겠다. 사람 껍데기 책이 아름다운 광경은 아니잖은가. 

 

 

 왼편은 하버드 대학 도서관 소장 <On the Destiny of the Soul>, 오른편은 노트르담 대학 도서관 소장 인피 서적으로 무어족 족장의 가죽으로 만들었단다.


 이런 걸 봐서 알고 있는 상태에서 <사자의 서>를 읽어보시라. 위 책들이 평론가 양경언이 얘기했듯 “한 권의 책은 곧 생의 축약”이라고, “독서 행위를 생의 구제로 다가오게 하는 계기도 몸을 만지는 행위를 통해서”라고 이해가 되겠는지. 나는 그딴 거 다 모르겠고, 등줄기와 팔뚝에 오소소 소름만 돋았다. 게다가 몇 번 얘기했듯 일제 코흐가 부헨발트 수용소에서 유대인의 가죽을 벗겨 무두질을 해 전기스탠드 갓을 만들거나, 서진, 기타 예술품을 흉내 냈던 것도 본 적이 있어 시를 읽고 느낀 끔찍함이 더 했을 것이다.
 이 시 말고도 죽음과 시신에 대한 집착은 계속된다. “죽은 자의 폐에서 발견되는 다량의 흙은 / 산 채로 매장된 흔적 // 산 자의 기억과 죽은 자의 꿈이 뒤섞이는 자정의 세계에서 / 눈 감으면 / 검은 구덩이에 파묻히는 느낌 //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 검은 공기가 밀려들며 목구멍을 가로막는다”(<검은 꽃> 부분)는데, 시의 제목 ‘검은 꽃’은 “점점 폐활량이 줄고 / 기침의 순간을 지나 침묵에 다다를 때” 즉 죽음의 순간에 내가 직접 판 검은 구덩이, 혹은 죽은 내 폐에서 발견된 다량의 검은 흙을 말한다.
 좋다. 시인이 시를 쓴다는 데 뭐가 문제냐. 근데 나는 왜 시인이 자신이 직접 검은 구덩이를 파고 거기에 묻혔는지, 그걸 모르겠다. 검은 구덩이를 내가 팠다고 분명하게 얘기하긴 했는데, 구덩이 속에 누워 있으면서 흙을 스스로 덮지는 못했을 것. 그럼 누군가가 시인을 묻었을 터, 왜 묻혔을까? 이웃의 여자를 탐했을까? 과부 땡빚을 얻어 갚지 못했을까? 그것에 대한 힌트가 들어있지 않으니 안타까울 수밖에. 좋다, 좋아. 시인이 왜 괴로운지, 검은 땅 속에 어떤 이유로 묻히게 되었는지 알려주지 않겠다니 뭐 독자가 알아서 그런가보다, 해야지.
 결론.
 내겐 맞지 않는 시집. 다른 독자들은 모르겠다. 굳이 권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비추하는 것도 아니다. 나름대로 요즘 잘 나가는 시인인 모양이니 제위께선 읽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시라. (이렇게 얘기하니 다른 건 몰라도 내 속 하나는 편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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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아버지 펭귄클래식 114
도널드 바셀미 지음, 김선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책이 나온 것이 1975년. 바셀미는 벌써 누천년 이어오는 오이디푸스 적 친부살해의 신화를 부여잡고 이를 포스트모더니즘에 입각해 소설을 썼으니 바로 <죽은 아버지>. 우리나라에서도 작가 한승원이 살부계에 관한 작품 <아버지와 아들>을 쓴 적 있으나 바셀미처럼 순수하게 친부살해의 모티브를 주제로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두 작품에서 친부살해는 과거와의 단절, 그리하여 진정한 새 시대를 여는 장치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쓰는 건 사실 뻔한 이야기를 하면서 잘난 척도 하는 거뿐이다. 내가 주장하는 바는, 아들은(시대가 바뀌어 딸도 마찬가지로, 그래서 자식들은) 아버지를(역시 시대가 바뀌어 어머니를 포함한 부모를) 타도하고 진정한 자아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나는 아들만 둘 키웠다. 아이들이 머리통이 굵어져 이제 말을 알아들을 즈음해서 이렇게 얘기했다.
 “내가 제일 듣기 싫은 말은, 너희들이 나를 존경한다는 거다. 세상에서 가장 찌질한 아이들이나 부모를 존경한다. 아버지는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극복 혹은 타도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랬더니, 내 아이들은 아버지를 존경한다고 지나가는 말로도 하지 않는다. 생각해보시라. 우리나라에서도 존경할만한 인물들이 얼마나 많은가. 나? 난 신채호 선생을 존경한다. 정치가 가운데는 전봉준. 작가 중에선 황순원. 군인은 안중근. 등등. 이런 이들을 놔두고 예를 들어 학교 교사가 아이에게 ‘너는 누구를 제일 존경하니?’라고 물을 때, 우리 주위에서 자주 보듯 ‘아버지요’, ‘어머니요’ 이러고 있는 꼴을 나는 도무지 못 봐 주겠더라는 말씀. 근데 아이들이 정작 누구를 존경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혹시 존경할만한 사람들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는 거 아냐?
 <죽은 아버지>를 열면 처음 세 페이지에 걸쳐 이미 죽어 누워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한글 고딕체로 적어놓았다. 아버지는 키가 3,200 큐빗. 1큐빗이 45.72cm이니까, 미터법에 의하면 죽은 아버지의 키가 무려 1,463 미터에 이른다. 놀랍지? 대단히 크다. 이런 거인인줄 모르고 첫 페이지에 나오는 문장 “곱게 빚어진 섬세한 콧구멍이 달린 코끝에서 땅까지, 5미터 반이, 삼각측량법으로 얻은 숫자”라는 걸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니 바셀미가 이야기하고 있는 아버지, 그 중에서도 ‘죽은 아버지’가 무엇을 대신하는지 짐작이 가실 터. 더구나 이미 죽었지만 자신이 죽었음을 거부하고 시시때때로 벌떡 일어나 허리춤에 찬 긴 칼을 번쩍 빼들고 무수한 생명들을 도륙하는 걸 취미로 삼으니, 더더욱 이 ‘죽은 아버지’의 의미를 눈치 채실 수 있을 터. 의미가 상실된 옛 규범일 수도 있고, 종교이기도 하고, 용도 폐기되었지만 권력층의 골방에서 아주 가끔 전가의 보도로 광휘를 휘날렸던 “전통”이란 이름의 똥 덩어리일 수도 있다.
 책은 몇 명의 남녀가 수많은 인원으로 편성된 연대를 이끌고 죽은 아버지를 땅에 묻기 위해 행진하는 장면으로 만들어졌다. 유일한 구성이 죽은 아버지를 무덤까지 끌고 가서 가는 도중에 몇 명을 만나고, 통행을 거부당하기도 하고, 그러니까 모종의 난관을 거쳐 기어이 땅을 파고, 그 속에 죽은 아버지, 그러나 자신이 죽었음을 거부한 채 여전히 날뛰고 싶어 하는 아버지를 뉘인 다음, 그 위에 흙을 덮기 위해 불도저가 죽은 아버지의 눈에 보이는 것뿐이다. 이런 단순 구성과, 포스트모던 특유의 앞뒤를 종잡을 수 없는 문장들로 이루어진 대화나 묘사 등으로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하지만, 독자는 독자의 권한으로, 작가가 의도적으로 해독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하고 싶은 이야기는 위에서 내가 적어놓은 것들이라고 한정해서 읽는다면 결코 오리무중의 혼란은 벌어지지 않을 듯싶다.
 이런 단순구성 속에 바셀미는 절묘하게 한 편의 에세이를 삽입했다. <아들들을 위한 사용 설명서>. 이게 무엇인가 하면, 아직 죽지 않은 아버지, 옛 권위, 타도해버려야 할 대상을 어떻게 써먹어야 하는지를 설명해놓은, 지극히 이해하기 쉬운 일상의 (재미있는)발견이다.
 아버지는 죽여야 한다. 다만 직접 죽이지는 말라. 조금 기다리면 세월이 저절로 죽여줄 테니까. 그러고 나면 다음은 당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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