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 바빌론에 오다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40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지음, 황혜인 옮김 / 책세상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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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천사가 있었다. 주로 하는 일은 안드로메다 성운을 중심으로 적색 별들을 집중적으로 조사하는 업무였는데, 하루는 주님께서 가운뎃손가락과 엄지손가락을 비비더니 손등에서 꼬물거리는 인간 여성 모습의 생명체를 하나 만들어 이름을 쿠루비라고 하며 천사에게 주면서, 인간 중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인간에게 건네라는 지시를 받들어 모시게 되었다. 그리하여 도착한 곳이 유프라테스 강변의 바빌론. 바빌론은 바빌론인데 누가 지배하고 있었는가 하면, 바로 얼마 전에 쿠데타에 성공해 정권을 장악하고 이제 사회주의 체제로 만들기로 결심을 한 국왕 네부카드네자르 치하 원년이다. 네부카드네자르는 자기가 아는 좁은 지식 안에서 말하자면, 전 세상을 통일한 유일한 국가의 왕이란 것. 이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면서 유일하게 노동하지 않고 밥을 먹는 거지라는 계급을 박멸하기 위해 바빌론의 모든 거지를 협박, 체포, 고문 등을 통해 다 노동자로 만들었는바,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 바빌론의 천재적인 거지 ‘아키’는 여태까지 전향을 거부하면서 자기가 동냥해온 돈으로 바빌론의 숱한 시인을 먹여 살리고 있는 거였다. 그러니 국왕 네부카드네자르가 신경질이 날 수밖에.
 국왕이 수상에게 묻는다. “고문은 했는가?”
 수상이 답하기를, “그의 몸 어느 한 구석도 뜨겁게 달군 쇠로 지지지 않은 곳이 없고, 어떤 뼈도 엄청난 무게에 짓눌리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네부카드네자르는 대국의 국왕답게 사형보다는 직접 만나 설득을 해서 내일부터 공무원 자리를 주어 일을 하게 만들겠다고 결심을 해, 유프라테스 강변에서 천재적인 거지 아키를 만나게 된다. 그런데 국왕 역시 누더기를 걸치고 붉은 가발을 쓴 채 나타나는 장소에, 하필이면 똑같이 누더기에 붉은 가발을 한 천사 역시 짙은 베일을 한 쿠루비를 대동하고 나타나는 바람에, 거지 아키, 국왕 네부카드네자르, 그리고 천사가 비슷한 모양을 하고 만나게 된다. 이렇게 1막은 시작한다.
 여기서 절묘한 반전이 일어난다. 이건 얘기해도 스포일러는 아닐 것이라 소개한다. 네부카드네자르는 아키를 설득하기 위해 거지대결을 벌이기로 한다. 누가 더 구걸을 잘 할 수 있는가를 내기하는 건데, 천하의 네부카드네자르, 일찍이 아라비아반도 전체를 통일하고 거대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완성했으며, 유대문명까지 몽땅 자기 노예로 만든 위대한 왕이라서 자신은 절대 지지 않는다는 착각 속에서만 살지 않았을까. 그래 겁도 없이 프로페셔널 거지 아키에게 구걸 도전을 했으니 그걸 이겨낼 수 있나. 거기다가 명색이 왕이라 주변에 숨어 있는 측근들의 훈수나 도움도 깨끗하게 거절을 해버리니 말이지. 여기서 구경꾼으로 관람석에 앉아 있던 천사와 쿠루비는 세상에서 딱 둘 남은 거지 가운데 구걸도 제대로 못하는 거지가 가장 비참한 인간이라고 결론을 내려 시합에 지는 거지에게 쿠루비를 넘겨주기로 결정을 했다. 네부카드네자르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 구걸을 한다 해도 선걸仙乞, 걸인의 신선 수준에 도달한 아키를 이길 수 없어 총점 99대 1로 패배하면서, 일은 우습게 꼬인다. 졸지에 거대왕국의 군주 네부카드네자르가 가장 비참한 인간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그래 천사는 더 이상 아무 생각 없이 어여쁜 정도를 넘어 모든 남자가 단 한 번의 눈길로 넋이 나갈 정도의 미모를 지닌 쿠루비를 만인지상의 자리에 있는 국왕의 손길로 넘겨주니, 국왕이 제일 비참한 인간인가, 천사도 실수를 하는가, 긴가민가해지고 만다. 어떠셔, 이 정도 가지고는 스포일러라고 하지 못하겠지? 그래서 맛보기로 여기까지만 써놓아도 되겠지?
 뒤렌마트는 하여튼 재미있는 극작가다. <노부인의 방문>도 그렇고, <물리학자>도 그렇더니, 여기서도 뭐 이것저것 막 떠오르는 대로 변주를 해버린다. 자세한 건 진짜 스포일러가 될까봐 더 이상은 얘기하지 못하겠는데, 비록 지금 신분은 국왕이지만 정신적으로는 가장 비참한 인간일 수도 있지 않을까? 정신적? 제일 우스운 것이 법의 그물에서 살짝 벗어난 잘못을 저질러놓고 “도의적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고 삽질하는 인간들. 그걸 다른 표현으로 하면 “절대 책임지지 않겠다”는 거하고 뭐가 달라? 아, 또 삼천포. 다시 네부카드네자르로 돌아와서, 국왕이란 자리보다 더 정치적인 위치는 없을 것이다. 그래 정치적으로 국왕 네부카드네자르는 어떠신데? 이런 물음을 던질 수도 있지 않을까? 아키를 설득하고, 설득하고 또 설득하지만 결코 노동자로 전향하지 않으면 가로등에 목을 매달 수밖에 없다는 신념. “동냥질은 반사회적”이라서. 그럼 쿠데타를 통해 집권하고 기어이 아라비아 반도에서부터 소아시아 지방까지 다 먹고 입 싹 닦은 자신은? 이래저래 연극은 복잡한 골목으로 접어 들어가고 이에 비례해 읽는 재미는 점점 더 고양되는데, 더 이상은 짧은 희곡을 너무 상세하게 이야기하는 거 같아 이쯤에서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으니 바로, 개봉박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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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신화전설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
위앤커 지음, 전인초.김선자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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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 이탈리아 사람이 아니더라도 유럽인들이 그리스, 로마 신화를 차용, 인용, 변용하는 것을 전혀 어색하지 않듯, 아시아 사람이 중국의 신화와 전설에 등장하는 일화, 인물, 신의 행적을 예를 들어서 말하고, 글을 쓰고, 읽어온 세월이 유구하다. 물론 이제 젊은 작가들이 쓰는 작품에선 이런 경향이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고, 몇 십 년이 더 흐르면 이나마도 거의 없어지리라 생각하지만, 종아리를 맞아가며 한문을 배운 장년세대로 살기 위해서는, 즉 제대로 된 꼰대로 남은 생을 마치기 위해서는 이 책을 미리 읽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된다.
 중국의 몇 천 년에 이르는 역사 가운데, 전한 시대 사마천은 삼황오제와 하, 은, 서주 시대까지를 진정한 역사기록으로 인정하지 않은 듯했지만, 우주의 탄생, 인간의 기원, 농사와 의약의 발전, 외침과 황하의 치수를 기록한 이 시대의 매력적인 이야기는 다시 읽어봐도 흥미진진하다. 기본적으로 중국 전설시대는 천제天帝들, 중앙과 동서남북, 다섯 천제 가운데 주로 중앙 천제인 황제黃帝(한문 안 배운 세대를 위해 부언하자면, ‘emperor’가 아니라 서양 신 가운데 ‘유피테르’ 같은 하늘의 주신主神)와 남방 상제인 염제炎帝(서양 신과 비교해 유피테르와 비슷한 힘을 가진 포세이돈이나 하데스 정도)와의 대립이 주를 이룬다. 싸움에서 염제와 염제의 후손, 염제의 부하 신이자 불의 신火神인 축융祝融(삼국지연의에서 남만의 왕 맹획의 처와 이름이 같다) 등이 수시로 ‘원수를 갚는다’는 대의로 황제에게 건건히 얻어터지기만 하지만. 이 염제가 누구냐 하면 신농神農이다. 농사짓는 법을 깨달아 인류에게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약초를 발견하기 위해 스스로 직접 먹어봄으로 해서 숱하게 죽을 고생을 해 의약 발전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 신. 염제의 후손 가운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 중 한 명이 싸움대장이자 안개를 피우는 법술로 당대에 대적할 상대가 없었던 치우蚩尤다. 우리나라 축구 국가대표 응원단의 이름이 ‘붉은 악마’. 그런데 남중국 출신의 치우천왕이 어떻게 하다 보니 북동 지역 대한민국의 축구대표팀 간판이 되어버린 것. 물론 전설, 신화는 비슷한 내용의 이본異本이 많아서, 지금 ‘내가 옳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중국의 신화 전설에 상당한 권위를 가지고 있는 신화학자 위앤커의 저작에 의하면 그렇다는 거다.
 나라를 멸망하게 만든 하나라 걸왕, 은나라 주왕, 서주시대를 끝내는 주 유왕에겐 공통점이 있으니, 경국지색의 처첩. 하나라 걸왕한테는 말희妺喜. 걸왕이 말희를 왕비의 자리에 앉힌 것까진 좋았는데, 도무지 어여쁜 말희가 웃지를 않는 거다. 그러다가 우연히 비단이 찢어지는 소리를 듣고 그 앵도櫻桃같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미소 짓는 모습을 본 걸왕의 마음이 하이고, 너무 기뻐 눈물이 앞을 가리는지라 비단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마구 찢어댄다. 이러니 고대국가에서 국고가 거덜이 나는 건 시간문제인데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치스런 별궁을 지어놓고 연못에 술을 채워 넣어 배를 띄운 것도 모자라 고기 덩이를 나무에 주렁주렁 달아놓아 아무나 먹을 수 있게 만든 주지육림酒池肉林의 고사까지 만들었으니 나라 하나 결딴나는 건 시간문제였을 터. 주지육림에 관해선 다른 해석을 하는 책도 있다. 연못을 술로 채워놓고 그 속에 숱한 동남동녀를 발가벗겨 놀게 했다는 내용. 이런 거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런가보다, 하자. 은나라 주왕紂王에겐 <봉신연의>에서 백여우로 등장하는 달기가 있어 백성을 폭력으로 학대하고 높이 대臺를 쌓아 국고를 낭비한 것은 물론 당대 최고의 토호였던 희姬씨 집안의 서백(후에 문왕文王)을 유리(박상륭의 작품 <죽음의 한 연구> 첫 문장에서 등장하는 ‘유리’가 바로 여기다)에 유폐시켜놓고 맏아들을 죽여 시신으로 곰탕을 끓여 먹으라고 가져다주는 등(서백은 다 알면서도 그걸 꾸역꾸역 몽땅 먹어치운다) 스스로 경쟁세력에게 단합하여 대항할 빌미를 가져다주니 어찌 망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서주의 유왕에겐 몇 백 년 전에 용의 정액을 저장해둔 괘가 열려 배리배리한 냄새가 나는 도마뱀으로 변하더니 쪼르르 달려가 소녀의 몸속에 들어가서 생긴 ‘포사’란 경국지색이 태어난다. 포사 역시 앞의 말희처럼 전혀 웃음이 없어 유왕의 애간장을 태우기만 하는데, 어느 날 하루 봉화가 오작동을 해서 제후국의 공들이 군대를 이끌고 도읍으로 헛되이 모이는 걸 보고는 깔깔거리며 웃는 일이 벌어진다. 그게 얼마나 어여쁜지 유왕은 이후 몇 번이나 일부터 봉화 시스템에 오작동을 발생시켜 그때마다 수도로 군대를 몰고 온 제후들의 염장을 제대로 긁어버린다. 그리하여 봉화 장치가 '늑대가 나타났다!' 신세로 전락하는 것. 딱 이때를 맞추어 북쪽의 오랑캐가 쳐들어와 이번엔 정말 꼭 필요해 봉화를 올렸건만 지원하러 온 제후가 한 명도 없어 수도를 내주고 동쪽 낙읍으로 천도를 해야 했으니, 이때부터 주나라는 명목상 왕국의 이름만 갖추었을 뿐 전국이 진의 시황에 의해 통일이 될 때까지 빈껍데기에 불과하게 된다.
 책 표지에 나오는 물고기는 커다란 몸집에 닭의 다리가 달려 있는 생선으로 ‘초어’라고 한다. 이 생선 이름 ‘초’는 564,290 개의 한자가 들어 있는 네이버 한자사전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희귀 한자어로 고기어魚 변에 오른쪽에 깃들 소巢가 있는 글자다. 당연히 기억해봤자 사는 데 하나도 도움이 안 되니 그런가보다, 하시라. 이 초어는 그러나 항생제 성분이 있어 종양 치료에 탁월한 효능을 지녔다고 한다. 이 초어를 필두로 무수한, 보도 듣도 못한 괴 생명체가 등장해서 가히 중국판 영화 <신비한 동물 사전>을 보는 듯하다. 과하게 허풍이 심해 완전히 상상에 의한 생명체인 것이 뻔해 감동을 느끼게 되진 않지만.
 이런 신화나 전설은 서주 시대가 끝나고 본격적인 기록 역사 시대인 춘추전국시대로 접어들면서 급격하게 다양성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실 역사는 <사기>를 쓴 사마천 등 당대의 사가들의 저작이 이후 계속해서,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나, 신화와 전설 같은 주로 구비문학적 기록들 역시 누군가에 의하여 주기적으로 다시 해석하여 쓰여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 <중국신화전설>을 읽어보면 <사기 본기>와 <사기 세가>, <사기 열전> 등과 겹치는 것들도 발견할 수 있다. <열전>과 비교해도 ‘백이열전’, ‘오자서열전’, ‘중니제자열전’, ‘소진열전’, ‘장이열전’, ‘자객열전’ 등을 발견할 수 있고, <사기 세가>에선 <월 구천 세가>가 겹친다.
 나는 이런 종류의 책을 매우 좋아하는데, 이건 전적으로 개인적인 취향이다. 역사와 인류학 책들은 읽을 때마다 흥미진진하고 심지어 재미있기까지 하다. 사실 이번엔 백아와 종자기에 관해 들어본 적은 있으나 활자를 통해 직접 읽어본 경험이 없어 책의 목록에 ‘백아와 종자기’가 들어 있는 걸 보고 단박에 읽은 거였다. 나는 즐겁게 읽었지만 취향의 문제라서 추천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을 듯. 역사, 신화, 전설, 인류학 등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매우 재미있는 경험이 되리란 것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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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사나이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47
그레이엄 그린 지음, 안흥규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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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오래 전, KBS 명화극장을 통해 본 흑백영화 <제3의 사나이>. 캐롤 리드 감독이 만든 불멸의 엔딩 씬. 이것이 기억나서 내가 아직도 밥 먹고 사는 회사의 사보에 지난 세기인지 이번 세기 초인지에 기고를 했던 적이 있다. 이제 독후감을 쓰려다 이 생각이 나서 파일을 뒤져보니 아쉽게도 보관하고 있지 않다. 흔히 허니문 카로 불리는 대관람차를 타고 꼭대기에 올라 주인공 롤로 마틴스(영화에선 Holly Martins)와 자그마치 오손 웰스에게 배역을 맡긴 해리 라임Harry Lime의 대화가 인상 깊었었다. 저 높은 곳까지 올라간 관람차 안에서 악당 해리가 밑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검은 파리 떼처럼 오밀조밀하게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보게 하고 죽마고우 롤로에게 말한다.

 

 

 

 “자네는 저 점들 중 어느 하나가 동작을 멈춘다면, 영원히 멈춘다면 진정으로 동정심을 느낄 셈인가? 동작을 멈추는 점 한 개당 2만 파운드씩을 벌 수 있다고 해도 자네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돈을 갖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니면 얼마나 많은 점들을 보유할 수 있을까 하고 계산해보겠는가? 소득세도 없는 돈일세, 이 친구야. 소득세도 없는 돈이라구.”
 이건 책 속에 쓰인 것을 옮긴 것이고 내가 기억하는 건, “저 많은 점 가운데 하나가 없어진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나?” 이 정도였다. 해리라고 하는 악당은 그토록 많은 점들 가운데 몇 백만의 점을 소멸시킨 나치에 승전을 거둔 영국인이다. 그가 다시, 이번에는 자본주의, 즉 돈을 위해 수많은 점들 가운데 불행하게 선택된 몇 개의 점을 삭제하는 대신 점 하나에 2만 파운드의 세금 안 내는 돈을 벌려고 한다. 젊은 시절, 이 영화가 그레이엄 그린의 원작 소설을 영화로 만든 건지 모른 채 그저 이 대사와 엔딩 씬에 매료되어버렸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몇 장 안 되는 영화 DVD 목록에 <제3의 사나이>가 들어있음은 물론이다.

 

 

 책을 다 읽고 확 깨는 건, 엔딩이 소설의 결말과 다르다는 것. 어떻게 다른지는 당연히 가르쳐드리지 않겠다.
 고전 스릴러로 일독할 만하다. 근데 솔직히 말하자면, 난 영화를 더 재미있게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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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기 창비세계문학 41
하야시 후미코 지음, 이애숙 옮김 / 창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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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큐우슈우에 사꾸라지마라는 온천 지역이 있는 모양이다. 거기 여관집에 따님이 한 분 있었다. 그 동네 습관이 외지 사람하고는 혼인을 맺지 않는 거였는데, 이 따님이 하루는 고향이 시코쿠 ‘이요’인 광목 행상하고 눈이 맞아 덜컥 혼인을 해버렸다. 관습법에 입각한 여관집 주인 내외는 가차 없이 따님을 내쳐버려 이 외로운 신혼부부는 야마쿠치 현의 시모노세키에 터를 잡고 살게 된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남편은 광목 행상을 다니며 틈틈이 아이를 만들어 딸을 둘 두었다. 행상 다니느라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아이 만들 시간은 있는 법이라서. 없는 집에 이거면 됐을 터이지만, 남자는 포목장사로 돈을 제법 모으자마자 그만 기생첩을 하나 얻어 집으로 데려오고 말았다. 머리 꼭대기까지 열을 받은 여자는, 내가 집안에서 쫓겨나는 것까지 무릅쓰고 자기하고 혼인을 했으면 지랄을 하시더라도 적당히 해야지 말이야, 눈이 폴폴 날리는 음력 정월에 여덟 살 먹은 작은 딸 후미꼬의 손목을 잡고 드런 집구석을 뛰쳐나오기에 이른다. 이 때를 굳이 서기력으로 꼽는다면 1911년 아니면 1912년. 요새 같으면 정식으로 이혼 소송해서 재산의 절반 이상을 분할 받고, 자식들 양육권에다가 다달이 교육비도 청구할 수 있겠지만 그때야 못 견디겠으면 기생첩에 안방을 물려주고 맨입으로 뛰쳐나갈 수밖에 없었겠지. 게다가 아이 딸린 여자 혼자 험한 세상 살 수 있었겠나. 그래 오까야마 출신으로 행상에 잔뼈가 굵은 젊은 남자를 얻으니 이름은 뭐 중요하지 않고 그저 ‘후미꼬의 새아버지’라 하고 말자. 다른 소설에서 등장하는 새아버지는 흔히 엄마와 딸의 노동력과 몸을 동시에 착취하는 괴물로 그리고는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후미꼬의 새아버지는 원래 소심한 성격에다가, 고스톱, 도리짓고땡, 섰다 등등의 화투 게임을 즐기는 습관에 푹 절어 있으면서도 의붓딸한테 늘 잔정을 베풀었으나 언제 한 번 주머니가 두둑해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사주에 역마살이 끼어 아무리 살풀이굿을 해봤자 소용이 없는지라 한 곳에 느긋하게 주질러 앉아 살지를 못했다. 이리하여 후미꼬는 여덟 살에 방랑을 시작해 이십 대 중반에 이르러 소설이 끝날 때까지 일본 곳곳을 전전하며 세계적 불경기를 당한 1910년대 후반에서 1920년대 초에 스스로 돈을 벌어 사는 와중에 고독과 굶주림과 약간의 부적응 적 증상에 시달리면서도 시와 동화와 소설 작업을 멈추지 못한다.
 역마살 낀 부모와 함께 방방곡곡을 다니며 행상을 했는데 어떻게 시와 동화, 소설을 쓰느냐고? 열세 살이 되자 후미꼬는 여공생활을 시작한다. 이때 정기적으로 돈을 벌면서 고등여학교를 다녔다고 하는데, 책에서는 자신이 받은 교육과정에 관해서 자세하게 기술해놓지 않았다. 원래 이야기책 읽기를 좋아하던 후미꼬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문학책을 섭렵한 것 같다. 독서의 즐거움이란 것이 사실 중독 증상을 일으키는 것이라, 이후 (작가 말고 책의 주인공으로서의) 후미꼬가 지독하게 고단한 삶을 이어가는 도중에도 틈틈이 헌책방을 들락거리며 책을 사고팔기를 멈추지 않는다. 이때 읽은, 노르웨이의 국가대표 소설가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이며 십여 년이 지나면 ‘바이킹의 후예들이여, 나치 군대에 입대하여 성전에 목숨을 바치자!’ 라고 침을 튀며 부역을 한 죄를 죽을 때까지 씻지 못할 크누트 함순이 쓴 <굶주림>을 읽고 많은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작중 수시로 등장하는 소설이 바로 <굶주림>. 근데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진실은, 사흘 굶어 담장 넘지 않는 인간 없고, 칼 안 빼는 인간 없다는 진리. 함순의 소설 <굶주림>에서, 계속되는 결식으로 영양실조가 극심해 머리카락이 뭉텅이로 빠지는 와중에도 우연히 들어온 현금을 자신보다 더 불쌍해 보이는 노파에게 줘버리는, 지극히 위선적인 장면이 등장한다. 나는 그 장면이 결코 고결하거나 우아하거나 명예스럽게 읽히지 않았다. 작가 자신으로 짐작되는 <방랑기>의 주인공 하야시 후미코는 크누트 함순의 <굶주림>의 주인공 ‘나’보다 훨씬, 훨씬 인간답다. 후미꼬는 물론 지극한 쪽팔림을 무릅쓰고, 조금의 안면만 있는 그냥 아는 사람에게 돈을 빌어 일단 뱃속에서 굶어죽을 판인 회충을 기아선상에서 구해주고, 단 한 번도 빈 돈을 갚았다는 걸 보지 못했다. 밥을 벌기 위하여 별의 별 직업을 전전하며 나중엔 카페 여급으로까지 전락하여 손님들이 사는 저질 위스키를 단번에 열 잔을 들이키는 쇼를 시전하기도 한다. 말 그대로 끝까지 가는 거다. 몸 파는 일만 빼놓고. (몸을 팔았을지도 모른다. 다만 기술해놓지 않았을 뿐.) 이게 정상 아냐?
 일기 형식의 소설. 그런데 고독과 굶주림에 관한 많은 소설 가운데 사실 별 스토리가 없는 이 책을 읽는 건, 어쩌면 특이한 문장들 때문일 수도 있다. 문장의 기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문장들이 뭉쳐 한 인격이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참으로 쓸쓸하게 표현하는 것. 작가가 소설가이기 전에 시인이라서 그런지 곳곳에 독자의 염통이 뚝 떨어지는 듯한 감성의 지뢰를 묻어 놓았다. 아름다운 책이지만, 시대가 변해서 그런지 독자에 따라 좀 궁상맞게 느낄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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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 위로 떨어지는 편지 창비시선 316
이기인 지음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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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집을 읽기 전에 이기인이란 시인의 이름을 들어본 적 없다. 그리하여 그가 1967년 인천 생이며, 서울예대 문창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 국문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는 책의 앞날개 소개말만 읽고, 어쨌든 박사과정을 수료했다니까, 먹고 살만 한 시인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이런 전제로 시집을 여니 첫 페이지에 “최하림 선생님의 영전에 바칩니다.”라고 헌사가 쓰여 있어, 서울예대 문창과에서 선생을 사사하고, 시집이 나온 2010년에 졸한 스승을 애도하는 시도 있겠다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첫 시를 읽어보자.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오랜만에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당신을 만났지요
 나는 당신의 등뼈를 본 첫번째 사랑이지요
 당신의 등뼈에 붙은 살이 얼마나 얇은지 알고 있는 사랑이지요
 그렇게 얇은 삶이 바람에 견딘 것을 알고
 손가락으로 당신의 등을 더듬어볼 수 있도록 허락하신 일과
 뒤돌아서서 날 깨우쳐주신 마른 가슴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요
 내가 처음부터 만질 수 없었던 당신의 몸은 바람이 부는 동안
 내가 사는 골목까지 날아와 기다렸지요
 당신은 그때 젖은 시집 속으로 부끄러워하는 몸으로 들어왔지요
 혼자서, 납작하게 살아온 당신의 이야기를 어떻게 들어줄까요
 불빛처럼 아름다운 당신의 이야기를 밤새 읽다가, (전문. 띄어쓰기가 어긋나지만 원문에 따랐음. 이하 인용시도 같음.)



 시는 은유의 잔치. 시인 이기인이 은사 최하림의 진짜 등뼈를 쓰다듬어본 적이 있을까, 없을까. 사우나 같이 가봤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선생의 시를 가슴으로 읽었다는 은유로 이해해도 전혀 무리가 없다. 은사의 시를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으니까. 매우 아름다운 시다.
 내가 시집을 고르는 방법은 언젠가 한 번 소개한 적이 있다. 요즘 인터넷 책방에서 미리보기 기능을 써 앞쪽에 있는 시 몇 수를 읽고 마음에 들어야 구매하는 것. 이 책 역시 첫 번째 시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가 마음에 들어 사게 됐다.
 그런데, 시집을 읽어가면서, 첫 번째 실린 시가 내 생각처럼 문창과 은사 최하림을 기억하는 헌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 정철의 <관동별곡>을 천하에 둘도 없는 연애 시로 읽은 거하고 비슷한 기분이다. 위의 시에서 말하는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만난 ‘당신’은 하필이면 시집을 낸 2010년에 죽은 은사 최하림일 수도 있지만, 이후 고르게 등장하는 시적 대상, 과일장수, 장발의 지저분한 거지, 청소부, 철거지역 주민, 건축노동자, 외국인 노동자, 공장 노동자, 나이 든 농부 등등 세상의 모든 약자들일 수도 있다. 뒤에 해설을 읽어보니 이기인의 처녀시집 『알쏭달쏭 소녀백과사전』에서 ‘ㅎ방직공장’ 여성 노동자를 소녀로 호칭했다가, 이제 처녀시집 속의 소녀들이 시인과 함께 나이를 먹어 각계각층의 약자가 되어 있어 그들을 노래한다는 의미로 씌어있다. 암만해도 해설이 타당하다.
 예를 들어 이런 시 한 번 읽어보자.



 소금꽃


 그날에
 당신의 생일을 축하하러 가지 못한 것은 공장에 피어 있는 꽃 생각 때문이네
 오직 나를 위해 피어난 꽃그늘이 있는데
 그 꽃들은 생일도 없이 한줄기 꽃으로 혼자서 피어 있네
 일하는 사람의 젖은 작업복을 보면서 한나절을 걱정한 적 있는데
 그의 등에 소금꽃이 하얗게 핀 걸 나중에 나중에야 보았네
 등에 핀 꽃을 보지 못하였던 이, 밥풀 냄새 나는 젖은 가슴만을 안고서
 그날에
 버석버석한 웃음 흘리며 한송이 꽃처럼 흔들, 흔들거렸네
 그날에 그의 생일을 축하해주러 온 이는
 공장에서부터 따라와 그의 등에 미안하게 앉아 있는 하얀 소금꽃이었네  (전문)



 아름다운 시다. 근데 좀 이상하다. 시인은 관찰자에 머문다. 현장에서 함께 노동하는 운동성을 시 속에서 발견할 수 없다. 왜 그럴까. 21세기라서? 땀이 말라붙어 등판에 남아있던 소금의 결정이 셔츠에 그대로 남아 있는 채 동료의 생일 축하 자리에 가는 일은, 공장에 샤워 시설이 없다는 뜻이다. 아직도 그런 현장이 남아 있을까? 만일 있다면, 그런 공장에서 기꺼이 노동을 하는 노동자 가운데 우리나라 국민들은 얼마나 될까. 이 시에서는 조금도 밝혀주지 않지만 나는 등짝에 소금꽃을 피운 채 생일 파티에 참석한 노동자가 외국인이라는 데 만원 건다. 그래서 시의 운동성이 없는 걸까? 시를 책상 위에서 쓴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만국의 노동자라는 건 그냥 구호에 그칠 뿐이기 때문이라서?
 내 생각으로는 아니다. 책 뒤에 실린 “시인의 말”을 보면, 그동안 시인의 아이가 심장수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곤궁과 고뇌를 겪으며 한줌 시를 소망’했을 것이다. 이런 처지에 어찌 운동성을 유지하는 시를 쓸 수 있었겠는가. 다른 이도 아닌 ‘자기 자식’의, 다른 수술도 아니고 ‘심장수술’을 견디는 스트레스 속에서 시적 운동성을 발휘할 수는 없었으리라. 그래 시인은 흔히 ‘용산참사’라고 불리는 용산 4구역 철거현장을 노래하면서도,



 달의 검은 눈물이 흘러내리는 밤


 검어진 용산을 지나가는 버스가 멈춘다 불이 난 망루에서 함께 내려오지 못한 이의 외투와 신발이 한쪽으로 치워졌다 그들의 불안이 치워졌다 그들의 불면이 깨끗하게 치워졌다 버스에서 내린 검은 얼굴들이 한주먹 파편처럼 길바닥으로 쏟아져나왔다 검게 그을린 뒷모습이 어두운 골목으로 사라져버렸다 뜨거운 망루에서 뛰어내린 달빛이 이봐요 저기요 마스크를 벗어던졌다 타버린 집의 허공에서 살아남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당신의 이야기는 저 높은 곳에 살았잖아요 당신의 이야기는 옛집에 지금도 살아요 불면의 잠옷을 차려입은 아이들이 긴 밤을 돌아다니며 달의 쪽방으로 기어들어가 호오 입김을 분다 뜨거운 계단에 주저앉은 아빠들의 이야기는 숯처럼 검은 눈물을 흘린다  (전문)



 아직도 식지 않은 계단에서 검은 눈물을 흘리고 있을 뿐, 내일의 새로운 싸움을 약속하지 않는다. 나는 이런 시를 전형적인 ‘먹물시’라고 칭한다. 지식인 또는 그와 비슷한 계급의 사람들이 약자나 일반적으로 약자로 인식하고 있는 계급의 주장에 동의하고, 지지하는 성격을 지녔지만 그들의 싸움엔 반 발짝 거리를 두는 시.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시인이라고 별 수가 있는 게 아니니까. 시를 써서 먹고 살려면 월간 수입도 아니고 연간 5백만 원 벌이로 버틸 수 있는 깡다구가 있거나 배우자를 잘 만나야 한단다. 어쩔 수 없이 시인 역시 소시민이니까. 게다가 노조 가입도 못해 누구한테 구조요청을 할 수도 없는 백척간두에서 물구나무를 선채로 사는 인간들을 우리는 시인이라 일컫는다.



 쌀자루



 마루 위에서 뒹구는
 쌀자루 흰 평구리를 부축하던 아내는 허리가 아파서 누워버렸다
 동전을 모으는 아이는 빈 맥주병을 들고 나가 30원을 받아들고 왔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낮인데도 형광등을 켜야 신문을 읽을 수 있다니
 나는 슈퍼로 달려가서 맥주병은 50원인데 왜 30원이냐고 따졌다
 아이는 슈퍼 주인처럼 옆에 서서 이 동네에서는 모두가 그래요 한다
 30원을 먹은 돼지저금통의 내장은 그렇게 슬픔으로 가득 찼다


 그날 나는 돈으로 환산이 불가능한 미발표 시의 제목을 바꾼다
 ‘나는 미쳤다’라는 시의 제목을 ‘처음에 나는 미치지 않은 아버지였다’
 가난하지만 시가 변명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은행에 가져갈 고지서를 모으고 계산기를 두드렸다
 한때는 계산이 미숙한 것까지를 좋아했던 아내는 슬슬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호기심 많은 아이는 돼지저금통을 찰랑찰랑 흔들다 잠에 빠지고
 아이가 갖고 싶은 지구용사 썬가드 로봇은 꿈속에서 변신을 시도할 것이다


 아내가 겨우 방문을 열고 나와 쪼그려앉았다
 자루에서 끌려나온 쌀은 오늘 저녁에도 끓어넘친다
 나는 꺼진 촛불처럼 있다가 밥상으로 달려가 정다운 수저 네 벌을 차례대로 눕힌다
 아이들 것은 그렇다 치고 저 잘난 나의 수저는 왜 이토록 입이 큰가


 온 가족을 모아놓고 첫술을 떠야 하는데 첫술을 떠야 하는데
 어떻게 밥을 먹어야 하는지 씹어야 하는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전문)



 시인 자신이 사회적 약자다. 미발표 시들이나 써 모아놓는 가난한 가장이 어떻게 다른 약자들을 위해 시 속에 운동성을 삽입할 수 있나. 나폴레옹이 했던 말이 진리다. 승리는 위stomach에서 나온다는 거. 운동도, 혁명도, 진보도, 문학도 밥 먹은 후에나 가능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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