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스 다비도비치의 무덤 - 일곱 장으로 구성된 한 편의 잔혹극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12
다닐로 키슈 지음, 조준래 옮김 / 책세상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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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이 좀 그렇다. “일곱 장으로 구성된 한 편의 잔혹극”이라니. 이렇게 해 놓으면 영락없이 장편소설. 그러나 정말 읽어보면 일곱 편의 단편소설 연작. 연작은 연작인데 작품간 연결고리가 매우 약하다. 그래 ‘일곱 장으로 구성된 한 편’이라기보다 ‘일곱 편의 단편소설 모음집’에 더 가깝다. 이 책을 쓰기 몇 년 전에 낸 <죽은 자들의 백과전서>에서도 죽음에 관한 아홉 편의 단편소설들이 서로 약한 연결고리로 묶여 있었던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이번엔 폭력에 의하여 잔혹하게 죽어간 영혼들을 위무하고자 하는, 아니면 적어도 그렇게 잔혹한 행위들을 고발하고자 하는 의도를 금방 눈치 챌 수 있다.
 첫 작품 <장미나무 손잡이가 달린 단검>에서는 ‘미크샤’라는 청년과 랍비 정도 되는 멘델 선생이 등장한다. 멘델 선생의 닭장에 간혹 스컹크란 놈이 들어와서 닭을 잡아먹는 바람에 멘델 선생이 밤새 보초를 서도 이 스컹크가 또 영물이라 잠깐 자리를 빈 새를 포착해 닭이면 닭, 달걀이면 달걀을 훔쳐가는 터라 스트레스가 보통이 아니었다. 이걸 본 미크샤. 선생님 제가 처리할 테니 걱정 붙들어 매세요. 하고는 뚝딱거리더니 덫을 하나 만드는 거였다. 원래 미크샤가 손이 발라 단추 하나 다는데 10초가 걸리지 않을 정도였는데 아니나 달라, 보기 좋은 덫을 만들어 미끼를 달더니 득달같이 스컹크를 잡아버렸다. 근데 하는 짓 좀 보자. 뚜껑을 조금 여니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스컹크란 놈이 주둥이를 내밀 거 아닌가. 그 순간 힘을 다해 뚜껑을 내리친다. 그럼 코를 포함한 주둥이는 어떻게 되겠어? 세게 찧는 거 아냐. 얼마나 아프겠나. 그건 다음 문제고, 그러더니 철사로 코를 꿰고 다리도 묶어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아 놓고, 아이고, 참 인정머리도 없지, 장미나무 손잡이가 달린 단검의 끝으로 스컹크의 목둘레에 심홍색 목걸이처럼 시원하게 원을 그린 다음 두 발목 위에도 칼자국은 낸다. 뭐하는 거냐 하면, 아직도 살아 있는 상태에서 가죽을 벗겨내는 거다. 자신이 시원하게 고민을 해결해주는 장면을 보고 있던 멘델 선생에게 자랑삼아 하는 말이, “멘델 선생님, 당신은 영원히 스컹크에게서 해방되었습니다.” 하지만, 마침내 멘델 선생이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는 마치 예언자의 목소리처럼 들릴 뿐이었다. “손과 얼굴에 묻은 피나 닦아내게. 미크사트 씨. 자넨 저주받을 걸세.” 여기서 이 단편이 끝나는 건 아니다. 불길한 예언은 언제나 들어맞는다? 맞습니다. 소설작법 2장 1절.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들어맞는지는 안 알려드림.
 다닐로 키슈는 유대인이며 헝가리에서 태어나, 그리스 정교로 개종했다. 그의 부모, 조보모도 개종했다. 헝가리에서 유대인 차별법에 의거하여 대대적인 탄압을 목전에 두고 부모는 키슈를, 조부모는 키슈의 부모를 살리기 위해 자신과 아들(내외)의 개종을 서둘렀던 것. 죽음의 위협 앞에서 개종하는 행위에 대한 고찰은 여섯 번째 단편 <개들, 그리고 책들>에서 다루고 있는데, 14세기 남 프랑스 툴루즈 시를 무대로 하고 있다. 천국과 지상 모두의 천국화를 위해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지 않는 모든 이교도의 씨를 말려버리는 폭력. 선함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벌어졌던 집단 살해와 린치와 개종의 협박이란 역사 사실을 토대로, 위해의 위협으로 인한 개종이 효력이 있는가, 없는가를 로마 가톨릭 주교와 교황에게 직접 질의를 하는 개종유대인. 당연히 효력 없음의 판정에 의하여 주인공은 다시 모세의 믿음으로 물러가긴 하는데, 모든 재산과 책과 동족은 깡그리 사라진 후.
 이 책에서 키슈의 시각은 바로 위에 쓴 유대인 탄압과, 소비에트 연방 체제에 의하여 저질러진 폭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체제는 튼튼한 것 같은데도 쉼 없이 스파이, 고정간첩 사건이 벌어지고 당연하게도 무고한 과거의 혁명가, 지사志士들에게 이름 앞에 ‘배신자’라는 더러운 타이틀을 씌워진 채 죽어간다. 그냥 조용히 끌고 가 총살에 처하는 아량이라도 베풀어주면 고마울 것을 자신이 독일, 영국 등 서방국가의 스파이 짓을 했거나, 우두머리 스파이 누구를 위해 봉사했다는 허위 자술서에 서명시킬 요량으로 갖은 고문을 자행한다. 소비에트 최고의 고문 기술자 이근안, 아니, 페두킨에게는 하나의 공식, 원칙이 있다. ‘심지어 돌멩이도 그것의 이빨을 부러뜨려놓으면 입을 열게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의 보리스 다비도비치가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고문은 자기 앞에 무고한 새파란 젊은이를 세워놓고 페두킨이 젊은이에게 하는 말. “보리스 선생이 시인하지 않으면 너는 죽게 될 것이다.” 보리스가 시인하지 않자 소음기가 달린 권총이 발사되고 젊은이는 얼굴이 엉망이 된 채 그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고문은 왜 하는가. 페두킨도 그렇고, 아마 우리나라 최고의 고문 명인 이근안도 그랬을 것이다.
 “페두킨의 분노와 충직한 증오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바로 피의자들의 이런 감상적인 자기중심성, 자신의 ‘결백’과 자기만의 조그만 ‘진리’―단단한 두개골의 자오선에 둘러싸인 채, 소위 사실이라고 불리는 것들의 원을 따라 빙빙 돌아가는 신경 물질의 회전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는―를 입증하고 싶어 하는 그들의 병적인 욕구였다. 그를 분노케 한 것은 그들의 이런 맹목적인 진리가 보다 높은 유일 진리의 체계 속으로 편입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바로 이 때문에 ‘공공을 위하여’ 조서에 서명하는 것은 이성적인 행위일 뿐 아니라 윤리적인 행위이며, 따라서 존경받을 가치가 있는 행위라는 그런 지극히 단순하고 분명한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페두킨에게는 모두 철천지원수인 셈이었다.” (143쪽)
 그렇다. 고문조차도 행위를 함에 있어서 자신의 분명한 철학이 있어야 명인 Maestro가 될 수 있는 법. ‘보다 높은 유일 진리의 체계’인 사회주의나 ‘정당한 독재’를 위하여 희생하지 못하는 덜 된 인간을 단지 육체적으로 아프게 한 것뿐인데 뭐. 이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 책 속의 일곱 편의 단편소설은 이런 의미에서 잔혹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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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례기 - 창비장편소설
방영웅 지음 / 창비 / 199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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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말기가 되면 자궁이 팽창해 방광에 압박이 가해져 자주 오줌이 마렵다고 한다. 석서방댁도 이하동문이라 똥례를 낳을 무렵 변소에 자주 드나들었다. 그러다가 급기야 똥례를 변소 바닥에 낳아놓고 만다. 당시 시골에서는 똥, 인분人糞이 귀한 비료라 따로 모아놓기 위해 큰 독을 땅에 묻고 그 위에 널빤지 두 개를 올려놓아 널빤지 하나에 왼 발, 다른 하나에 오른 발을 딛은 상태에서, 시인 김태정의 말마따나 즐거움의 안간힘을 써가며 용변을 보았다. 어느 책인지 잊었는데 인색한 노름꾼을 그린 소설 속 장면, 노름판의 긴장 속에서도 용변을 보기 위해서는 꼭 자기 집 변소까지 뛰어갔다 오는 인물을 그린 작품도 있다. 석서방댁이 이 똥독 위에 쪼그려 앉아 안간힘을 쓰다 갑자기 뭔가가 쏟아지는 느낌이 들어 그냥 옆으로 픽 쓰러지며 딸 하나를 낳은 덕에 아기가 세상 구경을 하자마자 똥독 속에 빠져 즉사하는 대신 변소 바닥에 떨궈 놓기는 했지만, 그곳 역시 똥 위였단다. 동네 노인들이 극성을 부리기를, 변소에서 낳은 애는 꼭 ‘분(糞)자를 넣어 이름을 지어야 좋다고, 오래 살 수 있고 복도 많다고 해서 집에서는 똥례라고 하고, 민적(民籍:지금의 주민등록)에는 ’석분례(石糞禮)‘로 올렸다. (24쪽 요약)
 내가 오래전에 쓴 성석재의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독후감에서 말했듯이 황만근 씨의 열세 살 먹은 어머니가 똥을 누러 변소에 갔더니 나오라는 똥은 안 나오고 똥 대신 아들 하나가 쑥 빠져서 이름을 분근(糞根)이라 지었는데 나중에 주민등록을 새로 할 때 면서기가 설마 이름에 똥(糞)이 들어갔을까, 일만 만(萬)자를 잘못 쓴 거겠지, 라고 착각해서 ‘황분근’이가 ‘황만근’이 됐다는 기억을 혹시 하실지 모르겠다.
 이번에 <분례기>를 읽어보니 그동안 내가 몇 번 이 책을 읽었는지 모르겠지만 이번이 적어도 삼독 이상 아닌가 싶었다. 가장 오래 전에 읽은 건 홍익출판사에서 나온 초판본.

 

70년대 중반 쯤에 읽지 않았나 싶다.

 두 번째는 두산출판사에서 나온 <우리문학대계>라는 전집 가운데서 읽지 않았었나 싶다. 홍익출판사 책은 아주 오래 전, 아마 60년대 말인 것으로 기억하는데, 술에 취해 있거나 누워 책을 읽고 있었던 이주사께서 하루는 희희낙락하시며 정여사에게 “아 글쎄 말이야, 구땡을 쥐고 전 재산을 걸었거든, 그래 패를 까보니까 한 놈이 그 자리에서 으악, 비명을 지르며 화투장을 던지면서 자빠지는 거야. 팔공산 두 장, 팔땡이었지. 그래 돈을 싹 긁으려는 찰라 한 놈이 화투 두 장을 휙 던지는 거거든. 그게 뭔 줄 알아? 단풍이 두 개, 장땡이야, 장땡.” 정확한 인용은 아니지만 이 대사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바로 이 장면이 우리나라 근대사(아, 아, 알아, 알아. 화투장 하나 가지고 지금 너무 거창하게 나가고 있다는 건)의 TV 드라마, 영화에서 몇 번이나 차용해 쓴 명장면 가운데 하나다. 지금 말하고 있는 건, 분명한 스포일러인데, 창작과비평사에서 벌써 절판시켜 이제는 찾아 읽기도 힘든 이 책에 관해 독후감을 쓰면서 굳이 숨길 이유가 없어 한 번 써본 것이고, 이 장면 역시 작품의 결말이 아니라 결말을 만들어가는 한 가지 중요한 소재에 불과하니 밝혀도 무난하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분례기>를 읽으며, 읽기 전에도 <분례기>를 생각하기만 하면 떠오르던 건 똥례가 용팔이 아저씨를 따라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용팔이 아저씨는 큰 키에 잘 생긴 얼굴, 놀라운 힘, 그러나 높은 음정의 고운 목소리 때문에 동네에서 고자로 소문이 났고, 벌써 마흔에 가까운 나이임에도 부부간에 아이가 없는 것이 소문의 거의 확실한 증거로 알려진 인물인데, 용팔이 아저씨한테 정말 생식기가 달려 있는지 궁금한 걸 참지 못해 아저씨 오줌 눌 때 몰래 숨어 분명히 엄지손가락보다 굵은 살덩이에서 오줌이 뿜어져 나오는 광경을 숨어 지켜보다가, 아저씨에게 발각이 나서 그길로 열 받은 용팔이 아저씨에게 ‘신세를 망치는’ 일을 당하는 장면, 그리고 전에 쓴 적이 있듯 지적장애가 있는 부부가 아이에게 젖을 주는 대신 남편에게 젖을 먹이는데 남편은 젖을 다 빨고 나서 꼭 “짐치, 짐치 주어.”하면서 김치로 젖비린내를 입가심하는 장면이었다. 이 두 장면은 책의 앞 쪽에 나오는 일화다.
 창비는 왜 이 작품을 절판을 시켰을까. 계간 <창작과비평>이 세상에 나오고 1년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과감하게 신인작가의 장편소설을 3회에 걸쳐 분재하는 무리수를 두어 얻은 당대의 문제작을. <창작과비평>에 실렸을 때, 이 소설 속에 사회, 역사의식이 두드러지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되게 우스운 이야기다. 한 집단, 책 속에서는 충남 예산군 일대, 지금의 예산군청 북서쪽 변두리 지역 촌 동네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그대로 복원함으로써 당시 일반 농민들의 사회, 역사의식, 즉 가난한 일상생활을 유지해나가기도 허겁지겁할 판인데 어찌 사회나 역사 따위에 특별한 의식을 가질 수 있느냐 하는 걸 충분히 보여주고 있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1940년대 후반, 아직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온갖 차별과 계급이 횡행하고, 성적 폭력과 가정폭력 속에서 여성에게 순결과 정조를 강요했던 시기. 못 배운 사람들의 욕망과 시기와 본능 같은 날것의 삶을 이 책보다 더 잘 보여주는 작품을 만나기 위해서는 몇 년의 세월이 지나 이문구가 등장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이문구? 왜 갑자기 이문구? 지방색 또는 지방 차별의 의미는 1도 없이 말하자면, 이문구와 방영웅이 같은 충남 출신이다. 방영웅은 예산, 이문구는 보령. 이들이 눙치는 충청도 사투리로 온갖 삶의 찌꺼기들로 만들어놓은 삶의 건강함이라는 역설을 읽으면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어서.
 정말 재미있는 소설이다. 창비는 이 작품을 하루빨리 다시 찍어야 한다. 나만 읽기 아까워서 하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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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9-07-01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도 처음, 소설도 처음 들어봅니다만 정말 맛깔나고 구수한 소설이란 생각이 듭니다.
아~~ 창비가 하루라도 빨리 이 책을 다시 찍어주면 좋겠어요!!
우선 아쉬운 대로 동네 도서관에서 대여하려 했더니 도서관에도 없습니다. --;;


Falstaff 2019-07-01 09:46   좋아요 0 | URL
심지어 백낙청도 자신의 대표 평론집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에서 민족문학의 국가대표로 이 <분례기>를 예로 들었답니다. 그래서 이 책의 장기 품절이 더 의아하고 안타까운 것입지요. 저도 이 책 찾느라 발품 깨나 팔았습니다. --

coolcat329 2019-07-01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듣는 작가와 작품이지만 잊을 수 없을거 같네요. 꼭 다시 나오면 좋겠네요

Falstaff 2019-07-01 11:39   좋아요 0 | URL
다시 발매하면 꼭 읽어보셔요. 지금 기준으로 고전이라면 좀 과장일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hnine 2019-07-01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TV문학관에서 했었어요. 몇년도였는지 생각도 안나네요.
보면서 재미와 마음 불편함을 동시에 느꼈던 이유가 말씀하신 여성, 가난, 계급, 차별, 이런 문제들이 깔려있기 때문이었나봐요.

Falstaff 2019-07-01 12:44   좋아요 0 | URL
영화 버젼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초대 트로이카, 윤정희, 문희, 남정임이 서로 똥례 역을 하려고 치열한 섭외전을 벌였다가 윤정희로 낙점이 되었습지요.
저도 영화는 못보고 TV문학관은 봤습니다만, 이건 소설이 훨 재미있습니다. 영화는 모르겠는데, 지상파 TV라면 아무래도 표현의 한계라는 게 있잖겠어요.
 
리스본의 밤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45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지음, 홍경호 엮음 / 범우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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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부전선 이상 없다>, <사랑할 때와 죽을 때>, <개선문>. 이렇게 세 작품이면 레마르크는 졸업했다고 생각했다. 그리 틀린 발언은 아니지만, <리스본의 밤>을 레마르크 목록에 추가한 것 역시 참 잘한 선택이었다. <서부전선 이상 없다>와 <사랑할 때와 죽을 때>는 전쟁/전장을 무대로 한 반전소설이고, <개선문>에선 전쟁의 장면이 나오지는 않지만 나치 독일 치하에서 서방으로 탈출한 인물을 그리고 있다 해서 ‘망명문학’이라 한다는데 <개선문>에서 안나 제거스의 <통과비자>에 등장하는 (거의 대다수의)일반 망명객의 절망적인 기다림 같은 것은 발견하기 쉽지 않다. <리스본의 밤>은 첫 장면부터 바로 이 일반 망명객을 등장시켜 1942년의 리스본 타조 항에서 저 멀리 정박해 있는 미국행 여객선을 바라만 보고 있는 독일을 탈출한 ‘나’의 무력한 모습을 부각시키고 있다. 포르투갈 정부로부터 얻은 체재기간도 며칠 남지 않았고, 아직 미국 영사관으로부터 비자를 얻을 수 있다는 어떤 귀띔도 받지 못했으며, 비자를 받았다 하더라도 뱃삯이 300달러나 부족한 상태.
 (리스본에 도착한 망명객, 정확하게 말해서 망명 희망자들은 남프랑스 마르세유 항에서 스페인 비자, 포르투갈 비자, 프랑스 체재기간 만료 사이에서 극도로 절망적인 경험을 이미 한 번 이상 겪은 이들이기도 하다. 마르세유에서의 혼돈상황은 앞 문단에서 얘기한 안나 제거스의 <통과비자>에서 세밀하게 묘사를 하고 있다. 다만 <통과비자>를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그것에 앞서 이 <리스본의 밤>을 먼저 읽어 당시의 망명객들의 마르세유에서의 갈급을 이해하는 순서로 독서계획을 잡는 편이 좋을 듯하다.)
 ‘나’는 미국행 비자는 다음으로 하고 일단 모자라는 300달러를 마련하기 위해 바보같이 카지노에 간다. 그래 자신의 전 재산 62달러 가운데 56달러를 잃고 만다. 숙소에는 아내가 기다리고 있으니 ‘나’의 발걸음이 가벼울 수는 없었을 것. 늦은 밤에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터덜터덜 걸어가는데, 누군가가 ‘나’의 뒤를 밟는다. 망명객이 다른 어떤 종족보다 뛰어난 직감 하나를 가지고 있다. 바로 쫓는 자를 발견하는 능력. 물론 오랜 시간 증명서 없이, 또는 가짜 증명서를 가지고 살며 해당 정부의 세관원, 경찰, 군인 등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발달시킨 여섯 번째 감각일 것이다. 누굴까. 경찰? ‘나’는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더 천천히 발길을 옮긴다. 드디어 ‘나’를 따라잡은 정체모를 인물이 묻는다.
 “독일 사람입니까?” “뉴욕으로 가고 싶습니까?”
 그러면서 품 안에서 뉴욕 행 배표. 바로 저 앞 바다에 떠 있는 여객선의 승선표 두 장을 꺼내 갖고 싶으면 가지라고 말한다. “난 이제 필요 없으니까.”
 대신 오늘 밤 자신이 가슴에 담고 있는 말을 들어달라고 한다. 여기쯤에서 직접 증명서 없는 방랑 망명객 생활을 경험한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는 말한다.
 “우리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가끔 미치는 것을 나는 많이 보아왔다. 그리고 그들이 혼자 있기 싫어한다는 것, 어디에고 소속될 곳이 없는 자들의 공포로 괴로워한다는 것, 그리고 비록 낯선 사이라도 하룻밤의 동지가 됨으로 해서 그를 자살로부터 구해 낼 수가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16쪽)
 ‘슈바르츠’라는 가명으로 살고 있는 이 정체모를 사람은 심지어 미국 비자 스탬프가 찍혀 있는 남녀 두 장의 여권도 배표와 함께 전해줄 용의가 있다. ‘나’에게 생각하지도 못한 은총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격이다. 기록자 ‘나’는 리스본에서의 마지막 밤을 완전하게 슈바르츠가 하는 말을 들어주는 일로 채우게 된다.
 기본적으로 사랑 이야기. 레마르크의 작품은 기본적으로 사랑,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다. 사랑이 시대의 격랑에 휩쓸려 온갖 역경을 거치게 될 뿐. 어떤 신난과 고난이 와도 사랑은 사랑이다. 끝내 유대인인지, 독일인이기는 하나 나치에 반대하는 민주주의자 또는 공산주의자인지 밝히지 않지만 슈바르츠는 게슈타포 처남에 의해 체포당해 수용소에서 고문을 비롯한 온갖 고통을 겪고 풀려나 5년 전에 프랑스로 망명한 인물. 4년 결혼생활과 5년의 망명 세월 동안 아내 안나를 향한 그리움은 비탈에서 굴린 눈덩이처럼 커져 기어이 다시 독일로 잠입해 아내의 모습이나마 한 번 더 보고 싶은 마음에 굴복하고 만다. 5년의 세월 동안 아내는 새로 결혼을 하지는 않았을까. 그러나 궁금하지 않다. 중요한 건 다른 남자의 품에 있건 아니건 간에 자신이 아직도 아내를 사랑한다는 것이고, 동시에 아내가 살아있다는 걸 확인하는 일로도 충분하니까. 그래 슈바르츠는 프랑스에서 스위스로, 스위스에서 오스트리아로, 다시 독일까지 거꾸로 잠입해 아내 안나를 만나는데 성공한다.
 왜 슈바르츠로 하여금 다시 위험하기 짝이 없는 독일로 가게 만들었을까. 그는 말한다. “나를 돌아오게 만든 것은 어쩌면 명명백백한 절망감”이었다고.
 “나의 여력 전부가 탈진해 버렸고 살아남겠다는 그 원초적인 의지는 고독이 주는 냉기를 더 이상 견뎌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삶을 다시 세워나갈 힘이 다한 것이지요. 나는 옛 생활을 버릴 수도, 극복할 수도 없었으며 거기서 붕괴가 시작되어 썩어가는 악취 속에서 완전히 썩어버리거나 뒤로 물러서거나 그걸 치료하거나 해야 할 선택의 갈림길에 섰던 것입니다.” (88쪽)
 그러나 아내를 만난 일은 슈바르츠의 긴 여정이 이제 새로이 시작했다는 걸 알리는 일일 뿐이다. 다시 그들에게 펼쳐지는 불안과 공포와 외로움과 가난과 애절한 사랑의 이야기가 펼쳐지니, 어떤 내용인지는 직접 읽어 확인하시라.
 레마르크의 다른 작품, <서부전선 이상 없다>, <사랑할 때와 죽을 때>, <개선문>과 비교해서 이 책 <리스본의 밤>이 더 좋다고는 말할 수 없다, 결코. 그러나 그렇다고 범작 수준도 아니다. 역시 레마르크다. 불안과 고독 속에서 20세기 중반의 한 시절을 고통스럽게 흘려보낸 수많은 영혼들의 흔적을 매력있게 그려내고 있다. 다만 슈바르츠 한 사람의 이야기라 예시한 작품들보다 규모가 작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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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와스 씨를 위한 집 1 대산세계문학총서 127
V. S. 나이폴 지음, 손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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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겔 스트리트>와 <도착의 수수께끼>에 이어 세 번째 읽은 나이폴. <미겔 스트리트>는, 아니, 먼저 나이폴의 정체성에 관해 이야기하자. 영국의 흑인노예 해방으로 인해 사탕수수 재배 인력을 위해 급하게 수입된 인도인 이민 3세로 영국령 트리니다드 토바고에서 태어나 식민 모국이었던 영국의 장학금을 받으며 영국에서 유학해 영국인으로 살고 있으나, 여섯 살부터 청소년기까지를 보낸 트리니다드 토바고, 그중에서도 수도 포트오브스페인을 사실상 고향으로 인식하는 인도 브라만 핏줄의 소설가. 대충 그림이 그려지실 것이다. 자신의 가난하고 지긋지긋했던 소년시절을 밝은 필체의 연작소설로 그린 것이 <미겔 스트리트>. 나중에 나이 먹어 이제 영국에 안착하여 스톤헨지 부근에 자그마한 돌집을 짓고 방랑하는 인도인이 드디어 한 곳에 정착하기 전까지 있었던 몇 번의 도착arrival이 의미하는 바를 쓴 <도착의 수수께끼>는 자신의 기억을 큰 줄기로 하되, 당연히 작가 스스로가 선별하고 자의적으로 왜곡시킨 경험을 서술했다고 할 수 있고, 이번에 읽은 <비스와스 씨를 위한 집>은 얼핏, 작가 나이폴의 아버지 시퍼사드 나이폴의 생애를 ‘집’을 얻기 위한 투쟁의 측면에서 관찰한 작품이라 주장할 수 있음직하다. 물론 내가 나이폴에 대해 잘 알아서 이렇게 얘기 하는 건 아니다. 책 뒤편 해설에 나이폴의 아버지 시퍼사트 나이폴 씨가 브라만 계급출신이고, 부유한 처가에 더부살이를 했으며, 이 책의 주인공 비스와스 씨와 비슷하게 처가와 애증의 관계에 있었다고 하니, 하는 말이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아직 트리니다드와 토바고가 각각의 식민지로 떨어져 있을 당시, 트리니다드의 한 농촌 도시에서, 힌두교 미신에 의하면 불길하기 짝이 없는 자정, 밤 열두 시에, 머리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두 발부터 세상 구경을 하면서, 손가락을 여섯 개 달고 한 아이가 태어나니 이이가 바로 오늘의 주인공 모헌 비스와스 씨다. 더 이상 불길할 수 없는 별자리를 타고 난 모헌을 내려다보며 일종의 주술사는 지금 태어난 이 집안의 셋째 아이가 어미 아비를 잡아먹을 팔자라고 단정을 해버리면서, 특별하게 물, 마시는 물이나, 물 비슷한 우유, 술 등을 일컫는 것이 아니고, 흐르는 물 가까이엔 절대로 못 가게 해야 한다고 아이의 부모 가슴에 힘차게 못질을 한다. 이런 예언은 아빠보다는 엄마 빕티의 가슴에 팍 새겨졌다. 그러나 불길한 예언은 언제나 들어맞는다는 소설작법 제2장 1절의 진리에 의거하여, 마치 탯줄이 저절로 떨어지듯 여섯 번째 손가락이 어느 날 신체에서 똑 떨어지고 몇 년 지나지 않아, 인생에서 딱 한 번 물에 빠졌을 뿐인데, 수영과 잠수를 동네에서 가장 잘하는 아빠가 모헌을 구하려 몇 번 잠수를 감행했다가 기어이 용왕님을 알현하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
 세상에서 자식 교육에 전력을 기울이는 인종 가운데 유대인과 한국인은 널리 알려져 있고, 인도인의 상류계급들도 그러한가 보다. 모헌의 엄마는 이제 가족/친척 가운데 가장 계급이 낮은 과부로 떨어졌음에도 어린 비스와스에게 일정한 수준의 교육을 받게 하는데 성공한다. 그래 부실한 체력으로 육체노동과 완력의 사용에 체질적 약점을 갖고 태어난 비스와스 씨가 처가에서 온갖 굴욕, 온갖 잡일을 하다가 비록 시작은 우연이었지만 버젓하게 신문사 기자에 이어 국가공무원이 될 수 있었으니, 교육의 힘이 대단하기는 대단하다.
 이 책을 읽어보면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비스와스 씨의 굴곡진 인생을 희극적 묘사로 일관하고 있지만, 사실 각 장면이 진짜 지긋지긋한 가난과 눈치와 처가식구들에 의한 멸시와 비난을 견뎌야 하는 와중의 모습을 이렇게 희화화해놓은 것이다. 이런 면에서 서술방식은 <미겔 스트리트>와 비슷하다 할 터인데, 자정에 거꾸로 태어난 육손이 비스와스 씨는 또한 사주에 해학과 신랄한 풍자의 팔자가 들어있는지라 대책도 없이 처가식구와 처가의 권력에 반항하고, 비아냥거리고, 비웃다가, 심각한 수준까지 얻어터지기도 하고, 내쫓기기도 하고, 소작쟁의가 일어날 것이 뻔한 사탕수수 농장의 관리인으로 보내지기도 한다. 작가 나이폴은 자기 아버지의 현신이라고도 할 수 있을 비스와스 씨를 어찌 이렇게 묘사해놓았을까. 주둥이만 살아 나불대며 하는 일마다 전부 실패로 마감하며 인생을 다 바치는 인물. 그러면서도 단 하나, 그래도 자기 살아생전 집 하나는 남겨놓는, 집 하나만 달랑 남겨놓는 인물로. 그건 책을 읽어보시면 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비스와스 씨가 나하고 매우 비슷한 면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 어떻게 하는 일마다 그리 꼬이는지. 그와 내가 제일 다른 건, 나는 열세 번의 이사 끝에 처음으로 내 집을 장만한 다음, 집과 여하튼 모든 부동산에 관한 전권을 아내에게 위임했다는 거. 살아보니 여자 말 들어서 나쁠 거 별로 없더라고.
 비스와스 씨는 딸, 딸, 아들, 딸을 둔다. 이 가운데 큰딸 사비는 장학금을 받고 영국이 아닌 다른 나라로 유학을 갔다가 다시 귀국을 하고, 아들 아난드 역시 장학금을 받고 영국으로 유학을 가 그곳에서 정착하는 걸로 봐서, 독자는 중요한 출연진인 아난드가 작가 V.S.나이폴이고, 비스와스 씨가 그의 아버지 시퍼사드 나이폴 씨라고 오해할 권리가 있는데, 뭐 굳이 그렇게 오해할 필요 없이, 그냥 읽어도 재미있는 작품이다. 1, 2권 합해서 870쪽에 달해 분량이 좀 부담스럽지만 읽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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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엄 그린 - 정원 아래서 외 5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24
그레이엄 그린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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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30쪽에 모두 53편의 단편 소설을 실었다. 나는 그린의 책과 상당히 늦게 만났다. 당연히 <권력과 영광>을 제일 먼저 읽었는데, 번역에 관해 논란이 많아 그렇게 됐다. 유명 소설가가 한 번역이었다. 난 소설가의 번역을 될 수 있으면 피하는 편이다. 우리말을 과하게 잘해 원문을 자기 마음대로 변형시키는 경향이 있을 수도 있고,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사전을 찾아보는 대신 문맥만 파악해 옮겨놓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것들 모두 소설가 특유의 반짝반짝 빛나는 윤문으로 무마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아니, 내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드디어 더는 미룰 수 없어 읽어봤더니 그렇게 재미날 수 없더라는 거. 그렇다고 <권력과 영광>을 추천하지는 않겠다. 오역 여부에 관한 논란이 여전하고, 중쇄를 찍었음에도 (확인한 바는 없지만) 개전의 정이 없다고 한다. 읽으실 분만 읽어보시라.
 하여간 그래서 그레이엄 그린을 알게 됐다가, 이제 지난 주 월, 화, 수요일, 삼일에 걸쳐 930쪽에 달하는 53편의 단편집을 읽었다. 네 권의 단편선집과 미발표 단편 네 편을 묶어 2005년 펭귄북스에서 발매한 <그레이엄 그린 단편 전집>을 번역했다고 한다. 지난달에 읽은 캐서린 앤 포터의 단편집은 여성 아니면 쓸 수 없는 아릿한 작품들로 구성됐다고 하면, 이 책은 남성만 쓸 수 있는 선 굵은 작품이 주를 이루고 있다. 1부 “21가지 이야기”는 1929년부터 54년까지 작품을 쓴 역순으로 꾸며져 있다. 글쎄,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할 수준은 아니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린 역시 첫 작품부터 빼어나지는 않았다. 아, 그러나 나는 지금부터 그레이엄 그린이 훌륭한 단편소설 작가라고 이야기 하려고 한다. 작품마다 명작을 뽑아내면 그게 어디 인간이겠는가. 소수의 범작, 졸작도 있는 게 정상이지.
 책을 펼치면 54년에 최초 출간한 책 “21가지 이야기”의 첫 작품 ‘파괴자들’이 나오는데 처음 두 문장이 이렇다.
 “가장 최근에 입단한 신참이 ‘윔즐리코먼 갱단’의 우두머리가 된 것을 8월 공휴일 전날 밤이었다. 마이크 말고는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이 문장 뒤에 같은 문단이지만 딱 맞춰 줄이 바뀌며 이어지는 문장이,
 “그러나 아홉 살인 마이크는 무슨 일에나 놀랐다.”
 흠. 그레이엄 그린이 누군가. 영화 <제3의 사나이>로 칸 영화제 그랑프리를 먹고, <오리엔트 특급>의 원작도 쓴 장르문학의 큰 별이다. 위의 처음 두 문장으로 비슷한 추리, 첩보, 범죄 등을 기대했다가 아이고, 아홉 살? 동네 악동들이 만든 갱단이 작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조금 속은 기분. 정말? 정말. 그러다가 페이지를 넘기면서 조금씩 독자의 감정을 고양시킨다. 열 살 내외의 악동들 속에 감추어져 있는 집단 폭력성과 파괴성. 그러면서 늙어 거의 완벽하게 무력한 피해자에게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하는 말이 이렇다.
 “죄송해요. 웃음이 터져 나오는걸 참을 수 없어요, 토머스 씨. 개인적인 감정은 없어요. 하지만 이건 우스운 일이라는 걸 인정하셔야 해요.”
 몇 명의 소년들이 완전히 ‘재미삼아’ 약자인 동네 노인에게 폭력을 저지르고 이렇게 이야기하게 함으로써 그린은 인간 본성 속에 들어 있는 범죄성향을 신랄하게 그려낸다. 이것으로 소년들에 의한 폭력을 다룬 단편 <파괴자들>은 5년 전에 쓴 <제3의 사나이>의 주인공 해리 라임이 관람차 위에 올라 까마득한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 무수한 점 가운데 하나가 없어진다고 도대체 뭐가 달라지겠나.”라는 대사와 연결이 되는 거 아닐까. 약한 것을 보면 괴롭히는 장난. 다들 어릴 때 해보셨을 거다. 파리를 잡아 날개를 떼고 놔주는 행위. 이게 사람의 본성이고, 그걸 문자를 통해 다른 식으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작가란 사람의 직업이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은 심리소설이다. 유럽인 부부가 더운 태국으로 여행을 떠났다. 뭔가 새로운 자극을 찾는 이들. 어떻게 하다 보니 포르노 영화를 틀어주는 조그만 집에 들어가게 됐다. 1950년대 중반이니 외설영화도 구경하기 쉽지는 않았을 터. 영화가 시작하고 여자가 남자의 옷을 벗기는데 어깨의 특별한 점을 발견한 남편. 그는 아내에게 그만 자리를 뜨자고 재촉하고, 여태까지 지루하다고 불평하던 아내는 남편이 그럴수록 오히려 더 보자고 고집을 피우다, 포르노의 주인공 남자가 바로 옆에 앉은 남편의 젊은 시절 모습이라는 걸 알고 경악한다.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가르쳐드리지 않겠다. 이런 의미에서 작품의 거의 대부분은 심리소설이다. 심리는 심리인데 남자의 시각에서 본 인간의 심리. 그래서 혹시 여성이 읽으면 남성에 의하여 왜곡된 여성을 발견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한꺼번에 쉰 세 편의 단편소설을 읽어 제목과 내용이 막 섞여 떠오른다. 그럼에도 좋았던 작품 세 개만 대보라면, <정원 아래서>, <남편 좀 빌려도 돼요?>와 <8월에는 저렴하다>를 꼽겠다. <정원 아래서>는 문예출판사에서 찍은 『제3의 사나이』의 두 번째 작품인데, 이 책에도 있다는 걸 알고 당시엔 읽지 않았었다. 단편소설들이라 내용을 소개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무려 쉰 세 편에서 고른 딱 세 작품에 관해서라면.
 내가 책 읽는 방법이 나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쩌랴, 난 한 번 잡으면 끝까지 읽어치워야 속이 개운해지는 스타일인 걸. 그럼에도, 역시 단편집은, 특별히 현대문학에서 내고 있는 ‘세계문학 단편선’ 같은 두꺼운 단편집은 넉넉하게 날짜를 잡고 한 번에 한두 편씩 꼭꼭 씹어가며 읽는 편이 훨씬 재미있게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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