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라이터
리처드 포드 지음, 박영원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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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가 쓴 <독립기념일>을 재미있게 읽고 당장 검색해 찾아 읽은 작품. 만일 <독립기념일>을 읽지 않은 상태였다면 이 책에 깊이 빠질 수 있었을 것이지만, <독립기념일>의 여운이 아직도 잔뜩 남아있는 나는 아쉽게도 그렇게 되지 않았다.
 이제 다음 주에 서른아홉 살이 되는 ‘나’ 프랭크. 결혼해서 삼남매를 키우다가 첫째 랠프를 잃는 불행을 당한다. 프랭크는 랠프가 결국 숨을 거두자 그길로 할리데이비슨을 사서 무작정 서쪽으로 달리다가 대륙의 중간에도 못 간 상태에서 내가 지금 무슨 지랄인가 싶어 횡단을 포기하고 돌아온 적이 있는 그냥 평범한 중산층 남자. 미시간 대학을 졸업하고 소설을 써 약간의 인기를 누리기도 했지만 이제 더 이상은 소설을 쓰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스포츠 잡지사의 기자로 직업을 바꾸었다. 랠프가 죽고, 모터사이클을 타고 방랑을 할 뻔하다가 말고, 스포츠 기자가 되고, 잠깐 휴직을 한 상태에서 한 학기 동안 이웃도시에 가 대학 강사로 있으며 몇 번의 연애사건을 겪고, 그러다가 우연히 자기와 아무 연애 사실이 없는 여자의 두툼한 편지를, 암만해도 자신의 여성편력을 눈치 채고 있던 것 같은 아내가 발견하게 되면서 이혼을 당해, 아들 폴, 딸 클래리사의 양육권도 아내 앤에게 빼앗겼지만, 아직도 아내, 아니지, 이젠 ‘전처’라고 해야 하지, 전처와 좋은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 상황. 사실 부부가 결혼하기보다 더 힘든 게 이혼하는 거고, 이혼보다 더 힘든 게 이혼한 다음에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거라고 들었다. 다행스럽게 난 이혼의 경험이 없어 그냥 그런가보다 하지만, 주위에 이혼한 친구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래봤자 딱 한 명이다. 내 주위엔 이상할 정도로 이혼한 커플이 없다.) 사실인 모양이다. ‘나’ 프랭크 베스컴은 그 어렵다고 하는 걸 해내고 있다. 뭐라? 그게 자랑이라고? 하긴, 그리 말하신다면 할 말 없긴 하다.
 근데, 이혼한 다음이라도 전처 또는 전남편이 재혼하는 꼴을 눈 뜨고 못 보는 모양이다. 이혼에 관한 한 복잡하고 오랜 전통을 가진 미국사람들도. 우리나라 사람은 확실하게 그렇단다. 소설 속에서도 ‘나’와 전처가 가장 궁금해 하는 건, 상대가 혹시 재혼하려하지 않을까, 하는 것. ‘나’가 지금 비록 어여쁘고 몸매 좋은 젊은 이혼녀 비키와 결혼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면서도 비키가 요구만 한다면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결혼할 용의가 있는 상태이긴 하지만, 돈 많은 내과의사가 내 ‘전처’와 아이들을 부양하며 데리고 사는 꼴은 생각하기도 싫다. 특히 남성들의 경우가 더 심한 모양인데, 비슷한 이유 때문에, 또는 그렇기 때문에 이혼 후유증을 여성보다 훨씬 심하게 앓는 것 같다. 작품 속에도 프랭크 베스컴 역시, 겉으로 보기엔 그래도 혼자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이혼 후의 고독과 상실감을 견디기 위해 다섯 명의 이혼남들로 구성된 모임에 참가하고 있다.
 그러니까 ‘나’ 프랭크 베스컴의 인간관계는, 전처와 아이들, 애인 비키와 비키의 가족, 스포츠 잡지사와 직원과 인터뷰이들, 이혼남성 모임 회원들, 뉴저지 조용한 마을로 몇 년 후 <독립기념일>에서 부동산 중개인으로 변신한 프랭크가 눈부시게 활약할 중산층 도시 ‘하담’ 마을의 이웃 정도다. 책은 ‘나’가 위에 열거한 사람들과 목요일부터 부활절인 일요일까지 나흘간 벌어지는 일을 순차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물론 순차적이라 해도 특정 사건, 행위마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그리고 당연하게 현재의 인물이 있기 위해 과거사가 존재할 터이라 몇 명 되지 않는 등장인물, 얼마 되지 않는 시간적 무대라 해도 너끈하게 500쪽을 넘기는 분량이 만들어진다. 이런 경우 독자는 흔히 작가를 향해, 거 참 말 많다, 라고 하곤 하는데, 나도 이 책을 읽으며 몇 번이나, 거 참 말 많다, 하면서 투덜거렸다. 왜냐하면 이 책의 후속편이라고도 할 수 있을 <독립기념일>을 읽고 불과 넉 달 반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넉 달 전엔 4XL 사이즈의 콘돔을 훔치다가 발각이 나 베트남 출신 여성 경비원과 몸싸움을 벌이다 경비원의 얼굴을 걷어차는 바람에 가볍지 않은 죄로 법정에 출두할 예정이었던 폴이 이 책에선 먼저 죽어버린 형 랠프의 영혼에게 안부를 물어달라고 비둘기를 날려 보내는 열 살도 되지 않은 꼬맹이로 등장하니, 같은 역자가 번역해 비슷한 한국어 문장을 읽으며 솔직히 뭐 새로운 것이 있었겠어? 이미 결론을 다 알고 있는 터에 말이지. 그래서, 리처드 포드의 경우에 국한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이런 연작 비슷한 순문학 작품은 시간적 순서대로 읽어야 더 좋을 거 같은 생각이 들었다. 책마다 새로운 사건이 펑펑 터지는 추리소설이라면 전적으로 스토리 위주로 읽어야 하니 순서에 의미를 둘 필요가 없지만(요새 맛들인 다니엘 페나크의 말로센 시리즈나, 전에 읽었던 스웨덴 작가 스티그 라르손의 세 연작 같은 것들),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철저하게 심리소설인 <스포츠 라이터>의 경우는 거꾸로 읽을 경우, 아니, 역순으로 읽었기 때문에 재미가 반감된 거 아닌가 싶다. 나는 이미 주인공 프랭크 베스컴이 어떤 심리를 가지고 사는 인간인줄 알며 아직까지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새로운 능력,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부동산을 구입하게 만드는 화술을 갖고 있다는 것도 알고, ‘전처’라고만 나오는 여자의 이름이 ‘앤’이란 것도, 결코 키만 큰 유부남 내과의사와 결혼하지도 않을 거란 것도 아는데, 뭐가 더 궁금한 게 있었겠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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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야의 아파트.질주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26
미하일 불가코프 지음, 김혜란 옮김 / 책세상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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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8년, 소비에트 연방에서 아흐마토바, 마야코프스키, 만델시탐, 불가코프 등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작가 동맹을 결성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포함하지 않은 작품들을 배격하기로 결정을 한다. 시절은 바야흐로 1918년 혁명 이후 긴 내전을 겪고 이제 전 국토에서 본격적으로 공산주의 정신에 입각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이루기 시작할 때였다. 그러나 어처구니없게도, 에이모 토울스가 쓴 <모스크바의 신사>에서 상세하게 나와 있듯이 아흐마토바는 극소량의 작품만 생산하게 되고, 불가코프의 모든 작품은 공연 및 출판 금지의 금줄에 묶이게 되며, 마야코프스키는 자신의 심장에 총알을 관통시키는데 성공한다. 1922년에 벌써 소비에트 서기장의 자리에 올라선 스탈린은 정치, 경제, 문화, 사회는 물론이고 예술적 가치도 자기 마음대로 재단해버리기 시작하고, 자신의 뜻에 조금이라도 반대하는 인물, 집단에 대하여는 가차 없는 고문과 처형으로 답례한다. 카자크 백군의 저항을 주제로 대하소설 <고요한 돈강>을 쓴 미하일 숄로호프에겐 영광을 주면서도, 비슷한 불가코프의 희곡 <질주>는 백군과 부르주아 출신들의 비겁하고 매국적인 행위를 비꼰 작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가코프 생전에 공연을 금지해버린다. 소비에트 연방이란 거대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는 그토록 넓은 대지를 자기 마음대로 통치했었다.
 불행한 시대를 산 많은 작가들 가운데 불가코프가 있다고 해도 맞는 말일 것이다. 1928년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작가 동맹을 결성한 바로 다음 해인 1929년 봄부터 그의 작품은 절대로 무대에서 공연할 수 없었고, 출판할 수 없었다. 작가에게 자신의 결과물을 남들에게 보여줄 수 없다는 건 가수의 성대를 절단하는 것과 유사하다. 불가코프는 자신이 얼마나 절망하고 있는지 밝히면서 스탈린에게 망명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을 호소했지만 그런 청탁을 받아줄 스탈린이 아니었다. 그래 그는 절대로 출판되어 책으로 만들어질 수 없는 작품을 고독 속에서 끊임없이 써가며 조금씩 죽어갔다.
 <조야의 아파트>는 혁명과 내전의 과정에서 국토가 황폐해져 많은 수의 유민들이 대도시로 흘러들어와 도시마다 극도의 주택난이 벌어진 상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원래부터 불가코프는 희극 작품을 청탁받아 자신의 데뷔작 비슷한 <백위군>에서 내용을 떼 내 희곡 <조야의 아파트>를 썼다고 한다. 직접 읽어보시면 즉각 알겠지만 혁명 후 모스크바의 한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거짓과 부패와 향락과 새로운 계급의 발생에 관해 신랄한 풍자를 던지고 있다. 초연 당시에 반혁명, 반 프롤레타리아 적인 작품이라 비난을 받았다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스탈린 치하의 공인公人이었던 비평가들 또한 이것과 달리 어떻게 자신의 진짜 생각을 표현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인민들은 다르다. 통치자와 통치권에 든 자들과 비평가들과는 달리 인민들은 직접 공연을 보고 그것이 자신들이 처한 상황의 신랄한 풍자라는 걸 확인하고 재미있어 하고, 즐거워하다가 입소문을 만들어내 장안의 인기 작품으로 격상시킨다. 이 현상에 불안을 느낀, 또는 불만을 가진 통치자들은 곧바로 모든 불가코프를 금지하기로 결정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을 찾아낸다.
 <조야의 아파트>나 <질주>나 지금 읽어보면 그리 재미있지도 않고, 더구나 새롭지도 않고, 충격적이지도 않고, 특별한 메시지를 전하지도 않고, 몰랐던 것을 가르쳐주지도 않는다. 나는 불가코프가 쓴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진짜 재미있게 읽었다. <거장과 마르가리타> 다음부터 불가코프의 작품이 눈에 띄면 빠짐없이 읽어치우는데, 아쉽게도 읽을 때마다 기대가 너무 컸나, 하는 심정을 숨기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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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ldenSlumber 2019-07-16 0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임팩트가 너무 커서인지 다른 작품들은 기대에 못 미쳤습니다. 그래도 <젊은 의사의 수기>는 볼만 하더군요.

Falstaff 2019-07-16 08:49   좋아요 0 | URL
으.... 그 작품은 너무 끔찍하지 않나요? 전 읽으면서 고민 많이 했습니다. 돈주고 산 책 아니었으면 끝까지 안 읽었을 거 같았어요. SF 엽기 잔혹 호러 쇼.
완전히 개인 취향입니다. ㅎㅎㅎ 제가 새가슴이라서요. ^^;;;

GoldenSlumber 2019-07-16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가코프가 의사였다보니 그런 광경도 무덤덤했겠지만 일반인은 보기 힘들죠^^;; 그래도 특유의 시니컬한 유머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환자가 x될 것 같은 상황에서 처음 든 생각이 ‘방에 가서 총으로 자살해야겠다’였다든지요ㅎ
 
아가멤논의 딸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우종길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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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달 전에 읽은 <누가 후계자를 죽였는가>와 시리즈를 이루는 작품으로, <아가멤논의 딸>의 여주인공 수잔나가 <누가 후계자를....>에서 후계자의 딸이다. 아가멤논의 딸은 순서대로 이피게네이아, 엘렉트라, 크리스토테미스, 유일한 아들은 오레스테스. 아가멤논은 그리스 신화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한 막장 족보를 가지고 있는 집안의 장자다. 그나마 제 명을 다 해 온전하게 죽는 이가 아가멤논의 동생이자 아내 헬레네 때문에 트로이 전쟁을 발발시킨 메넬라오스 딱 하나. 여기서 카다레가 말하는 ‘아가멤논의 딸’은 트로이 전쟁을 앞에 두고 폭풍우가 그치지 않아 트로이에서 온 예언자 칼카스의 조언에 따라 전쟁을 앞에 두고 희생당해 죽음을 맞은 큰딸 이피게네이아를 말한다. 아가멤논은 그리스 군의 최고 대장인 건 맞지만, 다 아시다시피 출발하기 전부터, 참전 중에도 사사건건 아킬레우스와 잦은 시비를 벌이는 등 절대 권력을 누리던 ‘제왕적’ 대장은 아니었다. 그래도 하여간 총사령관인 건 맞다. 근데 앞 장면부터 ‘나’의 원룸, 소파 위 반라의 모습으로 앉아 등장하는 수잔나는 알바니아 최고 권력자 후계자의 딸. 아직 지도자가 멀쩡히 살아 있는 상태에서 후계자란 건 항상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 하는 자리라는 뜻. 그런 작자의 딸이 혼전에 방송국에 종사하는 평민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마땅하지 않아 거의 타의에 의하여 이별을 해야 하는데, 이걸 자유주의 사상이 은연중에 배어있는 ‘나’가 보기엔 이피게네이아가 했던 희생쯤으로 보인다.
 당연히 이런 생각이 확장되어, 아가멤논이 왜 어여쁜 자기 큰 딸을 무참하게 살해했을까. 더 나아가, 스탈린 동지는 전쟁 중에 포로가 된 아들 야코프를 포로교환을 통해 귀환시키지 않고 적지에서 불귀의 객이 되게 만들었을까, 하는 것으로 폭을 넓혀가기 시작한다. 카다레의 생각은 트로이로 항해해야 하는 바다엔 견디지 못할 정도의 폭풍우는 아예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각 도시국가에서 온 작은 왕들 사이에 알력과 전쟁터로 가기 싫어하는 성향과, 두려움과 수컷들이 모이면 당연히 제일 먼저 발생하는 서열다툼이 폭풍보다 더 커져 있었을 것이라 가정한다. 그래 아가멤논은 이들의 다툼과 무질서를 정돈하고자 자기 딸을 무참하게 찔러 죽임으로 해서 자신의 피 묻은 도끼를 높이 들어 앞으로 있을 숱한 전사자들에게 인내하라고 강요했다는 주장이다. 스탈린 역시 전쟁 중에 장남이 독일 포로수용소에서 고압 전기 철조망을 향해 다가가 자살하게 함으로써(감전사 후 독일병사의 총에 두개골을 맞음) 온 소비에트 영토와 부속국가의 모든 인민에게 자유로이 사형을 선고할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하게 되는 건 아닌가.
 알바니아는 심지어 중국보다 더 교조적인 공산주의 국가였다고 한다. 그래 소련보다 중국과 더 긴밀한 관계를 맺었으며, 심지어 바르샤바조약기구에서도 소련의 정책에 반대해 탈퇴를 감행했던 나라. 그러다가 덩샤오핑이 흑묘백묘 운운하며 문호를 개방하자 중국하고도 관계를 뚝 끊고 알바니아 식 주체사상의 기치를 높이 들어 “우리는 풀을 먹을지언정 마르크스-레닌주의 원칙은 결단코 포기하지 않는다.”라거나 “설사 알바니아가 지구 표면에서 지워져야 한다고 하더라도, 지도자 동지의 사상이 알바니아의 미래를 확신하는 한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고 외치던 지상천국의 나라.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이 무척 익숙한 나라였다. 이젠 이런 알바니아도 개방을 해 온갖 나라에서 자본을 유치하고 관광객들을 받아들이고 그랬지만 1990년대 초까지도 쉼 없이 숙청과 처형과 사열/행진과 표어와 현수막이 나부끼던 공포의 경찰국가였단다.
 여기서 더 나가지 말고, 하나만 보태고 독후감을 끝내자.
 제목 “아가멤논의 딸” 이피게네이아와 작중 이피게네이아의 모델 수잔나가 어떻게 오버랩 되는지 잘 모르겠다. 차라리 아가멤논-스탈린, 이피게네이아-스탈린의 아들 야코프가 훨씬 어울리는 조합 아닌가? 하여간 책의 결론은 당시 알바니아를 근본부터 혁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이 최초로 세상에 나오는 여성의 성기부터 혁명해야 한단다. 직접 읽어보시면 여성비하의 발언이 전혀 아니라,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란 걸 강조하기 위해 쓴 말임을 알 수 있다.

 후계자 시리즈는 <누가 후계자를 죽였는가> 한 권으로 충분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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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의 여인들 인문.외국학도서 23
아시아 제바르 지음, 김정숙 외 옮김 / 배재대학교출판부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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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아 제바르가 쓴 <프랑스어의 실종>을 읽고 단박에 검색해 구입한 책. 생각도 못했다. 제바르가 여성이란 건. 그것도 무슬림 여성이 정치색이 매우 짙은 <프랑스어의 실종> 같은 책을 썼단 것에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었겠나. 그래 검색해보니 1936년 알제리 태생으로 현재 뉴욕대 불문과 교수란다. 책에서 얼핏 나오는 것처럼 알제리 국비 유학생으로 프랑스에 유학해 불문과 박사를 한 모양이다. 그렇구나. 그래서 히잡을 벗고 프랑스어로 알제의 여인들의 과거와 현재에 관해 자유롭게 쓸 수 있었겠다.
 내가 읽기로는 <프랑스어의 실종>만큼 단편집 <알제의 여인>도 좋은 책 같다. 책은 크게 “오늘”과 “내일”이란 두 분류로 되어 있고, 1부는 두 편, 2부는 네 편, 그리고 “후기” 형식의 짧은 글 <금지된 시선, 끊어진 목소리>로 구성된다. 대표작은 당연히 “오늘”의 첫 번째 작품인 <처소에 있는 알제 여인들>.
 알제리는 1962년에 독립한다. 7년의 독립전쟁과 무수한 인명의 살육과 다른 나라로의 피난을 희생물로 바쳐야 했다. 전쟁은 주로 남성들에 의해 수행된다. 제바르도 책에서 말한다. 전쟁지역에서 강간은 전쟁의 한 과정이라고. 절대무력이 최고 가치인 현장에서 성의 평등을 외치는 건 의미가 없다. 반대로 평화가 정착된 곳에서 한 성의 우위를 주장하는 것보다 바보 같은 짓도 없다. 그래서 모든 차별을 반대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반전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는 거다. 그런데 전쟁 중에, 알제리, 좁게는 알제리의 수도 알제에서는 여성 투사가 존재했단다. 그들은 자신의 몸에 폭탄을 두르고 남성 투사들은 접근하기 힘든 적진에 잠입해 자신의 몸과 함께 몸에 두른 폭탄을 터뜨려 적을 살상했다고 한다. 폭탄과 무기를 운반하는 일도 여성의 몫이었단다. 그러나 관습과 종교는 여전히 여성에게 작은 권리도 부여하지 않았고, 여성들은  집 안의 하렘 안에 유폐되지는 않았지만 곳곳에 투명한 벽을 막아 놓은 곳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
 이 매력적인 <알제의 여인들>은 배재대학 출판부에서 2006년에 냈다. 대학 출판부에서 나온 책은 일반적으로 무수한 각주 또는 후주가 달려있거나(아 지긋지긋했던 <켄터베리 이야기>여!), 흥미보다는 원작에 대한 학문 편향적(재미없이 읽은 <니벨룽겐의 노래>)이지만, 책 하나는 정말 잘 만든다, 라는 것이 여태까지 쌓아온 선입견이었다. 근데 이 책은, <프랑스어의 실종>을 읽어보셨으면 아시겠지만 제바르가 결코 어렵게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좀 어렵게 우리말로 옮겨놓은 건 아닌가,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 첫 번째 불만이고, 그 다음이 교정 교열이 대학 출판부에서 나온 것으로 보기는 좀 그런 수준이다. 그래서 별 하나 뺐다. 이 책에 배재대 출판부가 한 공헌은 우리나라 최초로 알제리 작가를 소개했다는 데 있다. 본문이 56쪽밖에 안 되는 <처소에 있는 알제 여인들>을 읽는데 한 나절이 걸리게 하면, 이건 출판사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시아 제바르의 진짜 모습을 알기 위해서라면 이 책의 일독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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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인을 기다리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4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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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존 맥스웰 쿳시. 몇 년 전 그가 쓴 <추락>을, 불편하게 읽기는 했지만 참 독특한 작가라고 생각했다. 쿳시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자행했던 인종차별 정책과 폭력에 대하여 반대 입장에 서서 작품 활동을 했다는 건 알겠는데 처음 읽은 그의 작품을 불편하게 받아들여 우리나라에서도 유명작가인 쿳시의 다른 작품엔 관심을 덜 두고 있었다. 예전 ‘들녘’에서 출간한 <야만인을 기다리며>가 올해 2월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로 옷을 갈아입고 나와 한 번 읽어볼까, 싶어 선택했다.
 역시 J.M. 쿳시는 불편하다.
 물론 그의 작품을 불편하게 느끼는 건 내 개인적인 성향 때문이다. 나는 스릴러 영화 안 본다. 마음이 아슬아슬하고 조마조마해지는 거, 그런 거 싫다. 폭력에 반대하는 주장에 완전하게 동의하지만, 폭력에 반대하기 위해 극악한 폭력을 상세하게 묘사하는 건 견디지 못한다. 물론 타란티노 식의 허풍의 옷을 입힌다면 가볍게 웃으며 받아들일 수 있지만(저수지의 개들, 자토이치, 뭐 이런 것들) 폭력과 잔인한 장면을 진지하게 묘사하는 걸 돈 주고 보거나 읽는 건 정말 싫다. 때문에 이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이나, 읽기를 확 때려치울까, 갈등했었다. 어떻게 하다보니 다닐로 키슈의 <보리스 다비도비치의 무덤>에 이어 이틀 연속 고문 장면을 묘사한 작품을 읽게 됐다. 이것도 팔자다. 그나마 키슈의 책에 나오는 소비에트 연방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고문은 쿳시에 비하면 매우 온건한 편이니 말씀이다.
 화자 ‘나’는 제국의 변경 마을의 치안을 담당하는 치안판사. 뚱뚱하고 나이 먹은 노인이다. 벌써 은퇴해 작은 농장을 사서 유유자적한 노년을 즐기려 했으나, 세상일은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다 아직도 치안판사의 자리를 놓지 못해, 제국의 제3국(局), 저절로 나치의 게슈타포 정도를 떠올리게 되는 초법적 군사조직으로부터 갖은 험한 꼴을 당하는 인물이다. 근데 솔직히 말해 이 노인네, 변태다, 변태. 절대 이 영감처럼 늙지 않으리. 어느 날 문득 들이닥쳐, 야만인들이 힘을 합해 제국을 위협한다는 명목으로 야만인 몇 십 명을 잡아다, 짐승에게도 하면 안 될 잔인한 고문을 행하는 졸 대령. 이이가 한 여자 아이, (십대 중후반 정도의)소녀를 고문해 거의 실명 직전에 이르게 하고, 다리/발 뼈를 부러뜨려 정상적으로 걷지도 못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래 고문이 끝난 후 자기들 무리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정착촌에서 구걸을 하며 사는 걸 치안판사가 보더니 자기 거처로 데리고 와서, 발을 씻겨주고, 기름을 발라주고, 목욕을 시키고, 전신 마사지를 하고, 그리고, 아이의 허벅지를 베고, 그냥 잔다. 욕구는 자기 전용 창녀를 찾아가 해결하고. 그러다가 난데없이 이 소녀를 자기 종족에게 데려다 줘야겠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어 병사 약간을 데리고 한 겨울에, 소금기 많은 호숫가와 사막지역을 통과해 갖은 고생을 하며 데려다 주긴 하는데, 바로 이 뜬금없는 행위 때문에 제국의 적인 야만인과 내통을 한다는 혐의를 받아 갖은 역경을 치루게 된다.
 책을 읽는 사람은 얼마 읽지 않아 벌써, 문명세계가 야만인이라고 칭하는 종족과, 야만인이라면 절대로 행하지 않을 초超 야만적 행위를 서슴지 않고 저질러버리는 문명인 가운데 누가 더 야만인일까,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바로 이게 쿳시가 처음부터 의도한 방향이리라. 고문은 예부터 그들 나름대로 진실을 밝히기 위해 불가피하게 어쩔 수 없이 행했던 수단이었을 수도 있지만, 이게 날로 향상, 발전, 진화해, 어느 순간이 오면, 고문하는 자들이 스스로의 즐거움과 과시행위를 찾는 방법으로 정착할 수 있다. 왜 이런 참담한 지경으로 처하는가 하면, 우리가 불행하게도 인간이기 때문에. 재미로 같은 종을 사냥하고, 괴롭히고, 죽일 수 있는 유일한 개체가 인간 아냐?
 이 책이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는 알겠다. 그리고 그 주장에 동의한다. 제국주의 또는 파시즘, 독재 등의 모순과, 인간의 허위와, 폭력에 대한 비판 등등. 그러나 불편한 건 불편한 거다. 겨우 두 권을 읽었지만, 쿳시는 과하게 자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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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07-05 10: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쿳시 책.... 이 작품도 그렇고, 앞으로도 읽긴 읽을 것 같은데 이상하게 불편한 작가라고나 할까요. 읽고 나면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아요. 그리고 <야만인을 기다리며>의 그 영감탱이 진짜 변태 맞아요. 그쵸? 으으.........

Falstaff 2019-07-05 10:55   좋아요 0 | URL
그죠, 불편하지요? 저만 그런가 했습니다.
그 영감은 분명히 변태 맞습니다. ㅋㅋㅋ

coolcat329 2019-07-05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그렇군요.언젠가 읽어 볼 책이지만 알고 읽는게 고통이 덜 할거 같네요.

Falstaff 2019-07-05 12:35   좋아요 0 | URL
ㅎㅎㅎ 그렇겠어요. 미리 각오하고 읽다가 장면이 나오면 암만해도 영향을 덜 받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