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을 수 없는 일이야 현대지성 클래식 16
싱클레어 루이스 지음, 서미석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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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이스 작품은 미국 중서부의 백인 중산층 부동산소개업자 배빗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들의 속물성을 풍자한 <배빗Babbit> 딱 한 권 읽었다. 작품이 나름대로 재미있고 생각이 발칙해 귀여운 작가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글쎄 이이가 미국문학에서 과대평가되어 있는 소설가라서 지금이라도 당장 평가절하를 해야 한다고, 미치너의 <소설>에서 평론가와 편집자가 진지하게 대화하는 장면을 읽었지 뭔가. 그래 다른 소설의 경우는 어떤가 싶어서 사 보게 되었다. 물론 이런 평을 알게 되기 훨씬 오래 전부터 책방 보관함에 꿍쳐두었던 소설책이지만 하여간 결정적으로 집어 들게 된 건 그런 이유다.
 미국의 역사를 보면 1776년 7월, 독립전쟁에 승리함으로서 독립선언을 하게 되는데, 이후 15년이지나 1789년에 미국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는 조지 워싱턴이 3대 대통령 추대 거절 이후 유일하게 3선을 하는 프랭클린 루스벨트(1945년 졸)를 빼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까지, 선한 관습법으로 또는 1947년에 개정한 미국 수정헌법 22조에 의거하여 누구도 2선을 초과하여 대통령의 직을 수행한 사람이 없다. 한정된 권력만을 사용하게 허락함으로써 미국은 어느 대통령도 독재 정치를 행할 기반을 제거해버렸다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미국식 민주주의의 미덕인데, 이 책은 수정헌법 22조를 공포하기 전인 1936년부터 1939년까지 3년 조금 미치지 못한 시기동안, 미국에서도 독일, 이탈리아, 일본, 터키, 소련과 유사하게 독재자가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라는 상상력을 보여준다. 책의 초간이 나온 시기가 1935년. 그러니 디스토피아에 입각한 미래소설, 또는 가상 역사소설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인터넷 책방에서만 읽을 수 있는 출판사 책 소개를 보면, 1980년대 중반에 장안의 화제가 됐던 미국 드라마 <V>가 이 소설을 바탕으로, 또는 이 작품이 모멘트가 되어 만들었다는데, 뭐 그렇게 생각하면 그럴 듯하고, 달리 생각하면 참 잘도 가져다 붙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1930년대 초중반에 미국에서도 독재자가 발호한다는 싱클레어 루이스의 생각은, 당시 키 작은 독일의 독재자나 검은 유니폼을 입은 이탈리아의 두체, 그리고 동토의 땅에 자리한 스탈린이라는 이름의 북극곰을 관찰해서, 각개의 악마적 특징을 미국 땅에서 그대로 적용시키면 소설로 작업하기가 그다지 힘들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참 독특한 아이디어이긴 했을 터이다. 1936년 겨울. 미합중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민주당 차기 대통령 지명대회에서 전 국민에게 연 5천 달러의 수입을 공약한 버질리어스 윈드립 상원의원에게 민주당 대통령 후보자리를 넘겨주고 만다. 윈드립은 기세를 몰아 대선에서도 공화당 후보를 단방에 넉 다운 시키고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는데, 오랜 세월 동안 다락방 구석에 처박혀 먼지만 켜켜이 쌓아왔던 단어 ‘각하’라는 호칭으로 자신을 불러주기를 바란다. 놀랄 만큼 명석한 참모 리 새러슨은 곧바로 대통령의 사병조직 미니트맨, 언제라도 대통령을 위한 출동을 대기하고 있어서 명령만 내리면 곧바로 행동한다는 의미로 Minute Man들을 전국적으로 구성해 단숨에 경찰력을 장악해서 조직을 급속히 거대화하고, 국가의 행정구역을 새로 재편해 각 단위의 우두머리로 전국적 양아치들을 수집해서 한 자리씩 주고는 이름을 ‘코르포스’ 즉 'Corporate'의 약칭이자 복수형인 'Corpos'라고 칭한다. 이어서 당연한 수순으로 야당과 공산당, 유대인, 학자, 언론인, 기타 체제에 반감을 가질 소지가 높은 지식인들을 중점으로 숙청을 하고 전국에 대형 수형소를 건설해 잔인한 고문과 총살형을 재판도 거치지 않고 집행해버린다.
 이 책의 주인공은 책이 시작할 때 60세로 출발하는 언론인 도리머스 재섭. 언론인이라고 해도 뉴욕이나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등지에 있는 굴지의 언론사 대표라는 말은 아니고, 지역 신문을 운영하면서 주필도 겸하고 있는 나이든 신사 정도로 생각하면 될 터. 지역사회에서 신망을 얻고 있고, 기본적으로 진보적 성향을 취하고 있는 지식인이지만 공산주의에, 정확하게 말해 모스크바에 터를 잡고 있는 독재자 집단에게는 묘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데, 싱클레어 루이스 자신이 공산주의와 어울리기엔 너무 고상하거나 속물적인 사람이었을 듯하다. 재섭 씨는 윈드립 정권이 하는 일마다 마음에 들지 않고, 해도 너무 한다고 숱하게 불평을 하지만 성향 자체가 내놓고 웅변하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그냥 그렇게 소나기를 피하는 심정으로 나날을 견디고 있는 상태. 자기 집 하인 비슷하던 덩치 크고 게으르기만 한 섀드 레듀가 하도 버릇이 없어 견디다 못해 해고하자마자, 레듀는 미니트맨에 들어가고 급기야 지역 군수 정도의 자리를 차지해서는 사사건건 재섭을 물 먹이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재섭의 머릿속에 벼락같이 떨어지던 자각. 이것이 책의 주제인데, 지금의 독재 상태에서 온 국민이 겁박을 당하며, 미국이 벌일 다음 전쟁으로 수많은 미국 청년을 죽음으로 행진하게 만드는 이 모든 일이 바로 자기, 도리머스 재섭과 같은 이들, 숱한 재섭들의 책임이라는 것. 생각 속에는 있지만 행동하지 않는 지식인들의 책임. 이를 통감한 도리머스 재섭은 곧바로 반정부 투쟁에 들어가 지하 신문과 유인물, 소책자들을 인쇄, 배포하기 시작한다. 내용은 이하 생략.
 싱클레어 루이스는 독재정권을 직접 경험한 적이 없다. 따라서 책 속에 등장하는 장면들의 전부가 자신의 뇌 속에서 재구성한 그림들일 것이며, 그것들은 1935년 이전에 독일, 이탈리아, 터키, 러시아 등에서 벌어진 일을 신문이나 책에서 읽고 자기가 살을 더 붙여 만든 것이리라. 책 속의 독재 체제에 신음하는 미국 사회를 읽어보면, 멀리 갈 것까지도 없이 1980년대 중반까지의 대한민국과 현재 시점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겪어본 사람은 단박에 공감을 할 것이다. 지독한 수준의 경찰국가. 그리고 우습게도 ‘아주 조금’은 2019년의 대한민국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나라가 아직도 완벽한 민주주의 국가는 아니라서 그런지 몰라도.
 이런 책이 하필 독재 체제를 경험하지 못한 미국에서 나와서 그랬을까. 한껏 디스토피아의 미래를 설명하고 있는데, 숱한 죽음과 고문 같은 고통에도 불구하고 어째 공감이 가지 않는다. 솔직히 말해서 수십 년 전에 읽은 <안네의 일기>에도 미치지 못한다. 왜 그럴까. 이유는 혹시 작가가 반독재 투쟁에 절실하지 않아서 그랬을까? 아니면 투쟁의 경험이 없어서 그랬을까? 정작 당대에 파시즘 또는 지독한 독재에 시달리던 독일, 이탈리아, 터키, 러시아에서는 이 비슷한 글은 쓸 엄두도 내지 못했으리라. 이건 언제나 벌어지고 있는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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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10-21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거 앞에만 읽다가 재미가 없어서 그냥 미뤄뒀는데, 이 글 보니까 더 영영 미뤄버릴 거 같네요. 하핳하하하하 ^^;;

Falstaff 2019-10-21 10:30   좋아요 1 | URL
그냥 한 번 훑어보세요. 읽지도 않고 중고책으로 팔기는 좀 그렇잖아요. ㅋㅋㅋㅋ
 
낙타 상자 중국전통희곡총서 5
라오서 지음, 오수경 옮김 / 연극과인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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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에 읽은 <생사장>처럼 원작인 소설을 희곡으로 만들어 공연한 작품이다. 라오서(老舍)의 원작 <낙타 샹즈>를 중원눙(鍾文農)이 희곡으로 각색을 해 1998년에 현대 경극으로 공연했다고 한다. 만주족인 라오서는 어려서 아버지가 전쟁에 나가 전사하는 바람에 좋은 머리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중도 작파할 수밖에 없었는데, 나중에 시험을 봐 북경사범을 마치고, 놀라지 마시라, 당년 19세에 소학교 교장, 23세에 기독교인으로 개종한 다음 중학교 교사 생활을 하다가, 25세부터 5년간 영국의 런던대학에서 강사로 체류하고 30세에 귀국해 대학에서 교수로 지내며 창작에 힘을 쏟는다. 그래 그의 작품 <마씨 부자>의 무대가 영국이구나, 이제야 알았네.
 그러나 중국 현대사는 라오서처럼 머리 좋은 인텔리겐치아 계급에게 마음이나마 편하게 지내며 창작에 몰두할 엄두를 주지 않아서 그간 중국 현대소설에서 숱하게 보아온 문화혁명 당시 거지같은 홍위병의 깡패 짓을 견뎌내지 못하고 1966년, 그의 나이 67세 때 북경 태평호에 빠져 스스로 늙은 생명을 거두게 된다. 다이허우잉의 일련의 작품에 등장하는 늙은 지식인의 모습과 겹쳐 떠오르는 건 나 한 명이 아닐 듯하다.
 나는 이 경극을 위한 희곡의 원작인 <낙타 샹즈>는 읽어보지 못했다. 그저 희곡을 읽으면서 원작도 중국 근대사의 비극을 참 절절하게 써 놓았겠거니 하고 짐작만 할 수 있었을 뿐. 다분히 자연주의적, 혹은 사실주의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데, 놀라운 건, 이런 현대적 서사도 경극, 베이징 오페라로 공연을 할 수 있고, 실제로도 했다는 사실이었다.
 만일 ‘경극京劇’을 영어로 번역한대로 ‘베이징 오페라’라고 그대로 믿는다면, 이 희곡은 한 현대 경극을 위한 대본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중원눙이 각색한 이 책 <낙타 상자>는 대본이라는 얘긴데, 그건 또 악보가 빠졌다는 의미다. 경극을 경험해보지 못한 나는 비록 이 대본이 1920~30년대 중국의 도시빈민을 실감나게 그렸을지언정 음악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전달력, 자연을 모방하지 않은 언어외적connotation인 정서의 전달을 어떻게 할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수밖에. 암만해도 조만간 경극을 한 번 봐야겠다. 진짜로 보면 정말 좋다고 하는데 여태 너무 게을렀다.
 ‘상자’라는 이름의 잘 생기고 건장하고 부지런한 사내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시기는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가 베이징을 함락하고 북경 대신 ‘북평北平’이란 이름을 붙인 시기니까 1920년대로 보아야겠다. 북평, 즉 베이펑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한 후 다시 베이징으로 이름이 바뀐다. 상자의 직업은 인력거꾼. 동료 인력거꾼으로 이강, 딸보(키 작은 뚱보), (빼빼마른)갈비 등이 있다. 이중에서 알코올 중독 증세가 심한 늙은 이강의 딸 복자와 서로 사랑하지만 이강이 술도 좀 더 퍼마시고, 새 인력거를 살 요량으로 나이 많은 백군의 소대장이자 밀정에게 그만 딸을 팔아버린다. 상자는 3년간 진짜 개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닌 끝에 새 인력거를 사게 되지만, 나중에 복자를 첩이자 하녀도 둘 예정인 백군 소대장 손가 놈에게 징발을 당하고 다시 적수공권으로 떨어진다. 이때 너덧 살 더 먹은 인력거 운송회사의 딸 호뉴가 상자에게 술을 잔뜩 먹여 덜컥 임신을 하게 되고, 둘은 신분차이 때문에 결사반대하는 호뉴의 아버지와 인연을 끊은 채 둘이서 호젓하고 나름대로 만족하며 살려고 했는데, 사는 게 마음대로 되면 그게 인생이야? 호뉴는 아들을 낳았지만 출산 후 곧바로 아들과 함께 죽고 만다. 때를 맞춰 백군 소대장 손가 놈은 북쪽으로 쫓겨 가면서 복자를 내쳐 둘은 다시 만나게 되는데, 더 이상은 안 알려줌.
 여기까지만 이야기해도 라오서의 소설도, 중원눙의 희곡도 재미있을 것이란 생각이 드실 듯하다.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중국판 자연주의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테고.
 그런데 이걸 경극으로 공연을 한다? 일반적으로 경극이라고 하면 화려한 분장과 기예, 창과 대사 등으로 되어 있는 바, 중국판 삼팔따라지들의 인생살이를 공연하면서 어떻게 화려한 분장을 하며 무술을 포함한 기예 같은 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책의 앞부분엔 공연장면을 몇 컷 소개하고 있는 바, 배우들의 화장 같은 건 볼 수 없다. 그럼 대체로 대사와 창으로, 서양식으로 하자면 징슈필 적인 공연이었을 거 같다. 지금 확실한 건, 내가 눈 감고 코끼리를 만지고 있다는 사실. 뭐 궁금해서 그런 거다, 궁금해서.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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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비안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42
에리히 케스트너 지음, 전혜린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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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2년에 출간한 작품이니 케스트너가 쓴 시기는 30년대 초반의 독일로 보면 무난하겠다. 당시 서서히 살아나고 있던 독일 경제는 1929년 검은 목요일이라 불리는 대공황으로 난데없이 불벼락을 맞아 무수한 기업들이 도산하고 실업률이 천정을 찌를 때였다. 소위 뮌헨 봉기를 기점으로 국가사회주의의 기틀을 확립하고 정권을 잡으려 했던 히틀러는 봉기의 실패로 6개월간의 옥중생활을 마감하고 권토중래를 꿈꾸어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대공황을 기회로 드디어 나치즘을 기치로 내걸고 생물학적으로 우월한 게르만 민족이 세계를 지배해야 한다는 극단의 전체주의를 웅변하던 시기였다.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은 하지 않았지만 나치즘의 이상과 괴리가 있는 예술형태, 초기엔 다다이즘을 위시한 미술에서 시작해 나중엔 문학과 음악에 이르기까지 번진 일련의 예술의 표현방식을 통틀어 퇴폐예술로 규정하고 엄정하게 타도해가기 바로 전에, 에리히 케스트너는 <파비안>을 쓰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히틀러가 본격적으로 수상과 대통령 자리를 독식하면서 독일의 전권을 틀어쥐게 되었을 때, 무수한 화가, 작곡가와 더불어 케스트너의 작품들 역시 ‘금서’의 목록에 오르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에서도 베를린의 한 행사장에서 무수한 책들을 불사르는 장면이 나오는 것을 기억하실 터. 이때 불타는 책들 속에 케스트너의 <파비안>도 섞여 있었던 것이 분명하리라.
 이 정도면 책의 성격을 이해하실 수 있을 듯하다. 시기는 대공황, 기업들의 도산, 최고의 실업률로 인해 박사학위 소지자가 신문사 광고부에서 일하다 해고당하고, 율사 출신의 미녀가 프로모터에게 몸을 바쳐 여배우로 변신해야 했던 시절. 여기서 박사학위 소지자가 책의 주인공 파비안이며, 율사 출신의 미녀는 파비안에게 100마르크를 빌고 곁을 떠나는 그의 애인이다. 우리나라도 비슷한 시절이 있었다. 아마 이 사진 기억하실 터. 한국전쟁이 끝난 부산의 1953년, 사진작가 임응식은 길가에 섰는 한 구직자의 모습을 담았다.

 

 

 

 책에서 묘사하는 독일은 아직까지 국가사회주의가 완전히 집권하지는 못했으나 나치와 히틀러가 권세를 가진 집단으로 등장해 있던 시기로, 서서히 유럽의 죽음이 예고되고 공황에서 시작한 불운의 그림자가 사회 전체를 무겁게 내리누르던 시기다. 마치 자본주의의 말로를 보는 것 같은 시대의 쇠퇴는 공산주의자들로 하여금 혁명의 시기를 저울질하게 만들고, 하필이면 지역이 베를린이라 그들은 필연적으로 사소한 일로도 건마다 나치당원들과 격렬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주인공 파비안과 그의 가장 친한 (부자)친구 슈테판 라부데는 정치에는 그리 큰 관심을 두고 있지 않는, 일종의 정치적 상식주의자로서 기본적으로 염세적 세계관을 가진 인물들이다.
 책의 앞부분에서는 우리나라 60년대 작가들이 사용하고는 하던 냉소적, 풍자적 대화와 행위가 눈에 띄면서 특유의 우울한 분위기로 시작하는데, 기본적으로 매우 도덕적인 이들의 이야기는 불행으로 끝낼 수밖에 없다. 패전 후 패배의식 속에 대공황까지 겹친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서 일반 시민들은 누구나 빠짐없이 자본주의적 급전직하에 당면할 수밖에 없었으며, 하루의 먹을거리를 위하여 절도를 하거나 구걸을 하거나 심지어 강도, 밀수행위까지 서슴지 않았으니 실상을 위해서는 명작, 되블린의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을 일독하시면 훨씬 이해가 빠르리라. 그러나 이 책의 작가 케스트너는 소설가 말고도 아름다운 동화작가로 세계적으로 이름이 난 인물이라고 하니 어찌 되블린과 분위기가 비슷할 수 있을까. 케스트너의 <파비안>은 참 쓸쓸하다. 회사에서 해고당하고, 애인은 힘 센 놈에게 몸을 팔러 가고, 이제 베를린이란 거대도시에 자신의 고개를 뉠 수 있는 곳은 한 군데도 발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그가 선택하는 것은, 이제 하나 남은 유일한 선택지는 고향. 더 이상의 스토리는 발설할 수 없다.
 참 괜찮은 소설이다.
 단 하나 아쉬운 것은 역자가 전혜린이라는 사실. 전혜린이 누군가. 40여 년 전, 그이의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얼마나 시린 가슴으로 읽었는지. 그이의 번역이 나쁘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전혜린이 세상을 접은 때가 1965년. 벌써 54년 하고도 아홉 달이 지났다. 번역은 1964년에 했다고 쳐도, 사후 7년, 번역 후 8년이 지난 시점에 초판본이 나오고 사후 34년이 지난 후에 중판을 낸다. 그리고 또 20년이 흘렀다. 그걸 아직도 읽고 있다. 그동안 맞춤법도 바뀌고 단어 자체도 바뀌고, 무엇보다 표현의 방식이 바뀌었는데, 아직도 막힘없이 읽히기는 한다. 이제는 더 이상 전혜린의 문장이 아니라 출판사 편집부의 문장이란 뜻. 그리하여 별점 하나 깠다. 지금쯤 새로운 역자가 새롭게 번역한 책이 책방의 서가에 꽂힐 때가 됐다. 그럴 만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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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 연애대위법 동서문화사 월드북 217
올더스 헉슬리 지음, 이경직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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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위법對位法이라고 하면 서양 고전음악의 작곡기법을 생각하기 쉬운데 그러지 마시라. 소설에서 대위법이라고 하면 ‘둘 이상의 서로 다른 주제가 나란히 전개되는 형식’을 말하기도 한다. 사실 작곡이나 소설작법에서 대위법이라는 의미가 서로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이 책의 영어 제목은 <Point Counter Point>. 이것을 우리말 제목으로 <연애 대위법>이라 했는데, 애매하긴 하지만 책의 내용을 보면 딱히 불량한 번역이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제목이 대위법이라고 하니 그럼 이 작품에는 서로 다른 주제가 병치倂置되는 형식을 사용한다는 건 알겠다. 여기에 올더스 헉슬리, 애초부터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 집안에서 태어나 다양한 방면으로 좋은 교육을 받아 (이튼을 거쳐 옥스퍼드까지) 학문 전반에 두루 깊은 지식을 보유한 지적인 작가가 당대 영국 상류사회를 냉소적으로 비튼 시각으로 풍자한 작품이다. 이때 헉슬리의 나이가 34세. 서른네 살의 젊은이가 쓴 소설이지만 분량도 만만하지 않고, 대위법을 쓴 작품답게 구성도 복잡한데다가 신학, 과학, 음악, 미술, 사상 등에 대한 논의 역시 무수하게 담겨 있어서 진도가 쉽게 나가지 않는다. <연애 대위법>의 성가에 걸맞지 않게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나온 책은 황해도에 있는 해주사범학교를 졸업한 이경직 선생이 번역한 동서문화사 본 한 권밖에 없어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놀랍게도, 햄릿이 5막에서 얘기했듯, 벌써 “천국의 행복을 멀리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이경직 선생의 번역문 속에 예스런 표현은 거의 볼 수 없다. 당시 사람들이 즐겨 표현했던 한자어 등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적어도 문장은 쉽게 읽힌다는 얘기다. 동서문화사가 어쨌든 책의 중판을 가독성 있게 찍는데 회사의 명운을 걸었다는 건 한 눈에 알 수 있겠다.
 그러나 이해하기 곤란한 한자어도 별로 없고, 표현조차 예스럽지 않으니 책 ‘전체’가 쉽게 읽히리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진도빼기가 쉽지 않다. 이만한 분량의 소설에서 이렇게 많은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을 또 본 적이 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주인공이 많다는 건 주인공 자체가 없다는 것과 거의 비슷한 말일 수도 있다. 물론 기본 골조는 나이를 그렇게 많이 먹었어도 치마 두르고 얼굴만 반지르르한 여인네만 보면 주책스럽게 침을 꿀꺽 삼키는 이름난 화가 존 비들레이크 가족 구성원들과 각 구성원의 친구나 주변인들이 어울리면서 벌이는, 주로 연애 사건이다. 하지만 기본 골조가 그렇다는 것이지 저울의 추가 비들레이크 가家로 기운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존 비들레이크의 절름발이 소설가 사위이며, 사교성 없고 고집불통에다가 부부사이마저 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필립 퀄스나, 이들의 서민 출신 똑똑한 친구로 화가와 소설가를 겸업해 성공중인 마크 램피언이 더 큰 출연분량을 차지하는데, 이는 헉슬리가 주로 이들의 입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 제일 먼저, 내 경우에는, 촌철살인의 냉소와 희화화, 그리고 풍자에 주목하게 됐다. 그러나 진도를 나가면서 점점, 조금씩 미궁에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첫 페이지로 다시 이동해 다시 읽기 시작하니, 이젠 어디선가 본 느낌이 드는 거다. 과장하지 않고 얘기해서 <율리시즈>를 읽을 때 직감하던 ‘낯선 난처함’. 그게 또다시 들이 닥쳤다. 디덜러스와 블룸의 난장판까지는 아니더라도 등장인물들 각각의 독특한 사상과 성격과 변설과 연애사건 등이 어딘지 모르게 씁쓸한 맛이 나는 희극처럼 그려진다. 딱 한 커플, 곱게 생긴 평민 출신 남편과 씩씩하게 생긴 부르주아 출신 아내로 이루어진 램피언 부부만 빼고. 이 부부만이 ‘품행이 방정하고 타의 모범이 되는’ 이상적 가정이고 다른 모든 가정은 적어도 하나씩 중대한 흠결이나 불행, 우환을 가지고 있다. 우리말 제목을 ‘연애’ 대위법이라고 한 건, 품행 방정한 램피언 가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부부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거나 준비하고 있어서일까.
 <연애 대위법>은 영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작품이라고 한다. 그러나 정말 읽어보실 분은 각오하시라. 원고지 기준으로 한 줄에 40자, 한 페이지에 30줄 편집을 고수하는 출판사라서 페이지 넘기는 속도가 늦는 것이 당연할지라도, 본문 540쪽 읽는데 닷새 걸렸다. 읽은 다음에도 지금 내가 책을 이해하고 독후감을 쓰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쓰는지 지금 헛갈리고 있다. 제법 읽다가 첫 페이지로 돌아가 다시 읽었는데도 그렇다. 마음 같으면 두었다가 한 20년 쯤 지나 다시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인데, 그땐 나도 천국의 행복을 멀리하지 못할 것 같기도 하고 뭐 그렇다. 인생이 다 그렇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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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9-10-16 1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볼라뇨의 야만스런 탐정들도 등장인물이 한 100명 정도는 나온다고 느꼈어요. 거기서는 그래도 개별적인 이야기들을 통해 연결돼서 그리 헷갈리지는 않는데, 이 책은 어쩔지 모르겠군요. 시도해봐야겠습니다.

Falstaff 2019-10-16 11:50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그 책도 재미있게 읽었는데요. 내장주의에 관한 거였지요? ㅋㅋㅋ
<연애 대위법>은 말 그대로 문제작입니다. 문장도 좀 헷갈리지만 매력적이고요.
 
미국의 비극 - 상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35
디어도어 드라이저 지음, 김병철 옮김 / 범우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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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어도어 드라이저Theodore Dreiser. 작가 본인이 인디애나 주의 공업도시, 그것도 살벌한 공업도시라는 테레 호트에서 금슬 좋은 독일계 이민 1세 아버지와 체코에서 농사짓다 온 이민 1세 어머니 사이의 열세 아이 가운데 열두 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시어도어가 네 살 때 모직공장의 감독으로 있던 아버지가 독립을 해서 스스로 공장을 세워 드라이저 사장이란 직함을 달고 다니다가 2년 만에 공장이 홀랑 타버리고 와중에 아버지마저 심한 화상을 입어 거의 폐인이 되었다고 한다. 화재보험을 들지 않아 거렁뱅이가 된 드라이저 가문의 열세 명이나 되는 아이들 가운데 시어도어의 형과 누이들 다수가 자연스럽게 교도소의 단골손님이 되거나 창녀가 되었다고 역자가 쓴 작품론에 설명이 되어있다. 심지어 창녀가 된 누이 중 한 명이 나중에 프랭크 노리스가 작품의 선정성에 대한 위험부담을 온전히 감당해가며 출판해준 작가의 초기 대표작 <시스터 캐리>의 모델이 되었다고 하니, 드라이저야말로 진짜 미국식 자연주의 또는 사실주의 작가의 대표라고 할 수 있겠다. 미국문학 전체에서 이야기하자면 또 영국, 즉 모국어를 영어로 사용한 이민자가 아닌 첫 번째 유명 소설작가라는 의의도 있다고 하는데, 이딴 건 뭐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
 나는 <시스터 캐리>를 1982년에 학원사에서 나온 책으로 읽어 하도 오래 전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기는 한데, 그로부터 10년 후인 1992년, 직장생활 중에 우연히 만난 까마득한 영문과 선배가 졸업논문으로 <시스터 캐리>의 작품론을 썼다고 해서 책 이야기하며 술 한 잔 했던 기억이 있다. 자네가 어찌 <시스터 캐리>를 알아? 예, 그렇게 됐습니다. 재미있는 책이잖아요. 그래, (발음기호 [θ]를 유난히 강조하며) 씨어도어 드라이저의 사실주의 문학이.... 운운, 뭐 그랬다는 얘기다.
 <시스터 캐리>도 그렇고 <미국의 비극>도 그렇고, 이야기는 빈민 출신의 청춘 하나가 상류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 아득바득 비정상적으로 기어오르는 내용인데, 이제 <미국의 비극>을 읽어보니, 꼭 그렇다는 건 아니고, 이 책이 <시스터 캐리>보다 더 재미있을 거 같다. 그러나 문제는 2019년 9월 현재 독자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범우사에서 낸 김병철 번역 말고는 없으며, 1989년에 초판을 내고, 1999년에 맞춤법이 대규모로 바뀌는 바람에 중판을 찍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 과거 금속활자 본을 다시 컴퓨터 본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범우사의 다른 역서가 그렇듯이 대량으로 에러를 발생시켰다는 점이 하나요, 역자 김병철 선생이 1921년생으로 생존하신다면 올해 연치가 99세에 달해 과연 역자 본인이 중판 과정에 관여를 했겠는가 하는 점이다. 예를 들어 존댓말이 나올 때, “… 이었습니다.”로 써야할 부분에서 컴퓨터 조판을 했던 담당자가 피곤했는지 어땠는지 “… 이었읍니다.”로 여전히 예전 맞춤법을 따르고 있는 걸 발견할 수도 있다. 실제로 서울, 경기 일부지역에서는 20세기 후반까지 발음을 [이얻음니다]로 하는 나이 든 사람들이 있었지만 맞춤법이 개정된 이후로 싹 사라져버렸다는 건 여담이다. 문자가 그리 무서운 법이다. 문자는 언어를 지배한다. 진짜다.
 20세기 말의 범우사 세계문학 시리즈는 당시 비교할 전집이 별로 없을 만큼 대단한 성가를 누렸다. 옛시절 범우사의 책 구경을 한 번 해 볼까?

 

 

 <율리시즈>가 금속활자 시대의 독수리 발톱 범우사, 위에 가로로 얹힌 레마르크가 요새 범우사다.


 당시 회사의 문장이 독수리가 발톱을 내밀며 먹이를 나꿔채는 듯한 모양이고 지금은 좀 추상적인 도안으로 되어 있다. 하여간 위에서 말한 컴퓨터 조판 시대로 넘어가면서, 흠 이렇게 얘기했다가 고소당하는 거 아닌지 몰라, 망했다. 오래된 번역, 형편없는 교정, 교열. 이 책도 이런 평가에서 멀지 않다. 그러나 내 경우에 국한해 말하자면, 교정 교열을 참을 수만 있으면 오래된 번역이 나쁘지는 않다. 요새 역자들이 줄곧 사용하곤 하는 희한한 조어造語들과 비교해 예스럽고 ‘정확한 단어’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음사 책에 대해서는 이 정도면 됐고, 이제야 독후감의 본문으로 들어간다.
 책, 모두 두 권, 본문만 980여 쪽에다가 요새 책답지 않은 정음사 편집으로 글자가 빽빽하게 차 있어 다른 출판사가 책을 내면 적어도 세 권정도 분량으로, 하루 종일 읽는다 해도 엿새 정도 걸리는데, 첫 장을 넘기면 미주리 주 캔자스시티 도심을 걷는 빈곤층 가족이 등장한다. 뭐 하러? 버스킹. 정말이냐고? 그렇다. 가족들이 자리를 잡고 풍금을 선두로 악기를 배치한 다음, 당시가 1910년대니까 스피커 시설은 없지만 대중들을 앞에 놓고, 물론 이들의 예술을 감상하기 위해 가던 길을 멈추고 집중하는 행인들은 별로 없지만, 노래를 시작한다.
 “사랑의 주 하나님,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니
 말씀으로 우리에게 영원천국 알게 하소서“
 꼭 이 노래는 아니지만 하여간 개신교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가를 우렁차지, 않게, 노래한다. 가족을 이끄는 아버지는 애초 품성이 사람살이에 관해서 거의 관심이 없으며 매사에 무기력한 남자로 오직 불쌍한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복된 말씀을 전하는 데만 관심을 두어, 어느 정도냐 하면 아버지가 죽을 때 자기 재산을 첫째와 둘째 아들에게만 나누어주고 이이의 인생 자체에 실망해 셋째 아들이자 이 가족의 가장한테는 단 천 달러만 남겼을 정도였다. 버스킹을 해서 몇 푼 되지 않는 돈을 얻어 생활을 하는데, 주책없이 아이는 자꾸 생기지, 이거 뭐 생활이 되겠느냐는 말이지. 노래나 잘 하면 또 모를까. 그리하여 맏아들이자 작품의 주인공 크라이드 그리피스는 애초에 부모의 승인 없이, 그러나 아무런 지탄도 없이 열서너 살 때 학교를 때려치우고 미국식 잡화점인 드럭스토어의 점원으로 들어갔다가 용기를 내서, 그러나 벌벌 떨면서 캔자스시티의 가장 화려한 그린 데이비스 호텔의 보이에 지원해, 영광스럽게도 입사하게 된다. 동시에 집안에서 가장 많은 수입을 올리는 구성원으로 승격하고. 주급이 있고, 주급보다 훨씬 많은 팁으로 크라이드는 전엔 상상도 못했던 깔끔한 옷과 매력적인 친구들을 사귀게 되고, 친구들과 어울리다보니 열다섯 살도 안 돼 총각딱지도 돈 주고 떼고, 줄 듯 말 듯 하지만 결코 허락하지는 않는 육감적인 몸매를 가진 방탕한 호텐스 브리그스와 연애에 돌입할 수도 있게 된다. 이때 나이가 열다섯. 여태껏 내가 한 번도 여자였던 적이 없어서 여자는 모르겠고, 남자 나이 열다섯이면, 애다, 애. 그래 죽을 때까지 후회할 짓을 골라 하니, 자기가 번 돈을 가족을 위해서는 한 푼도 쓰고 싶어 하지 않아 비싼 옷과 맛난 음식을 사 입고 먹으면서도 크라이드의 호주머니에선 가족이 꼭 필요해 최소한으로 요구하는 금액의 돈은 나오지 않는다.
 사람이란 것이, 모르는 게 약일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크라이드 그리피스 역시 뱃가죽이 등가죽과 만나 서로 안녕, 하고 인사하던 시절엔 몰랐었는데 그린 데이비스 호텔의 검정 대리석으로 도배가 된 화려의 극치에 달하는 궁전 같은 곳에서 너무도 쉽게 돈이 생기게 되고, 무엇보다 상류사회의 편리함, 멋있음, 화려함에 눈을 떠, 자신도 언젠가는 저들처럼 금화를 태산같이 쌓아놓고 살리라는 헛된 희망을 품게 된다. <시스터 캐리>와 비슷한 구도지? 그렇다.
 캔자스시티에서 같은 호텔 보이들과 방탕하게 놀러 다니다 크게 사고를 치는 바람에 눈물을 머금고 맨몸으로 야반도주를 하게 되고(여기까지가 1부), 가명을 써가며 온갖 곳에서 갖은 고생을 하면서 거의 3년을 보내고 시카고에 도착하게 된 크라이드. 여기서 우연히 만난 그린 데이비스의 보이 출신 친구를 통해 그린 데이비스 호텔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격조 높은 유니언 클럽의 보이로 취직을 하는데, 때를 맞춰 뉴욕 주에서 양복에 다는 컬러 공장을 크게 하는 큰아버지 사뮤엘 그리피스 씨를 만나 자신이 씨의 조카임을 알려, 뉴욕 주 올버니와 유티카 중간쯤에 있다는 인구 2만 5천 가량의 작은 도시 리커거스로 옮긴다. 그런데 문제는 크라이드의 성姓. 시카고나 캔자스시티에서는 ‘그리피스’ 집안이 개뿔도 아니었지만 리커거스에서는 ‘그리피스’라는 이유로, 그것도 사뮤엘 그리피스 씨의 조카라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최상류층부터 최하층까지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게 된다. 게다가 원래 말끔하게 생긴 외모에다가, 배운 건 없지만 최고급 그린 데이비스 호텔과, 격조 높은 유니언 클럽에서 몸에 익힌 예절, 말씨, 몸가짐으로 누구에게도 호감을 주는데, 그가 리커거스에 도착했을 때 나이가 약관 스물. 불행하게도 테스토스테론이 극도로 많이 분비될 시점이다. 이때 그의 눈에 들어온 매력적인 아가씨, 자기보다 세 살 더 많은 로버타가 눈에 들어와 싫다고, 안 된다고 하는 걸 기어이 자빠뜨리는 데 성공한다. 그래 둘이 서로 죽기 살기로 사랑하는 상태로 접어들지만 이미 상류층의 단맛을 알아버린 크라이드는 일개 여공인 로버타와 결혼에까지 이를 생각은 애초에 해 본 적도 없다.
 딱 이때 크라이드 앞에 등장하는 최상류층, 리커거스 뿐만 아니라 뉴욕 주 전체를 통해서도 가장 아름다운 아가씨 손드라 핀츠레이. 처음엔 손드라의 친구 오빠이자 크라이드의 사촌 형인 길버트를 약 올리기 위해 크라이드와 친하게 지냈지만 시간에 가며 점점 더 사랑하게 된 손드라를, 크라이드는 점점 더 자신과 맺어질 수 있는 상대로 여기게 되면서 비극의 서막이 열리게 된다.
 어디서 본 거 같지? 그렇다. 몽고메리 크리프트와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각각 크라이드와 손드라로 분한 영화 <젊은이의 양지>. 여기서 ‘양지’라고 하는 건 우리나라 한우의 앞가슴에서 아랫배까지의 부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쨍하고 해 뜬 부분을 뜻하는 것인데 영화에서는 ‘크라이드’와 ‘손드라’ 대신 ‘조지’와 ‘안젤라’라는 이름으로 연출했다.
 그러니 더 이상의 스토리는 굳이 내가 이야기하지 않아도 무방할 듯.
 재미있다. 그러나 이 독일인의 후예 시어도어 드라이저는 다른 건 몰라도 구도 하나는 확실하게 잡고 있어서, 예를 들면, 이런 장면이 진짜 나온다는 얘기가 아니라, 크라이드가 워터스 씨 댁의 잘 생긴 그레이하운드를 잡아 고기는 토끼 고기라고 속여 코엔 씨네 푸줏간에 팔아먹고, 가죽은 외투를 만들어 입고 다니는 장면이 나온다면, 미리 특정한 사유를 만들어 놓고 그 때문에 개를 잡았다고 설득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치밀하게 이야기를 만드는지라, 이야기가 종종 장황하게 펼쳐져 엉덩이 근육이 발달하지 않은 독자는 나가떨어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읽는 행위를 소위 ‘취미’로 하고 있다고 자부하면 꼭 한 번은 읽어야 할 명작임은 분명하다.
 요즘 세계문학전집을 찍고 있는 출판사가 꽤 된다. 그 가운데 이 책을 다시 번역할 회사는 없을까. <시스터 캐리>를 낸 문학동네는 <미국의 비극>의 번역 계획이 없다고 하고, 민음사는 하도 답변이 없어서, 내가, 계획이 없는 것으로 알겠다, 라고 얘기했을 정도이며, 창비와 문학과지성사는 독자의 질문에 대답해 주기엔 너무 우아한 출판사라 거들떠듣지도 않는다. 어느 출판사가 됐든 이 책은 적어도 30년에 한 번씩은 다시 번역을 해야 하는 작품 군에 들어야 한다. 적어도 그렇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제목, An American Tragedy를 ‘미국의 비극’이라 번역하는 건 넌센스 아닐까 싶다. 관사 ‘An’은 왜 번역 안 하나. 그러면 ‘한 미국식 비극’ 정도로 할 수 있지 않을까? 차라리 그게 더 좋은 제목일 거 같은데, 왜 그런고 하니, 읽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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