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보내다
오탁번 지음 / 문학수첩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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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 시절 문학의 천재를 자랑하던 청년이 이제 노인이 됐다. 재학 중 동화를 써서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로 중앙일보 신춘문예, 졸업한 다음 해에 대한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당선함으로써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당대 고려대 문과대학의 자랑이었다고 한다. 이이가 모교 국어교육과 교수를 할 때, 시험 바로 전 강의시간에, 시험문제에 (어느 시에 구절이 있다고 들었는데 잊었다.) 은사시나무 잎을 첨부하시오, 라는 것을 낼 테니 가로수로 천지에 널려있는 은사시나무 잎 한 장하고 셀로판테이프를 가지고 오라고 지시를 했단다. 그리고 정말로 시험문제로 냈단다. 딱 두 문제 가운데 하나. 나머지 하나는, 오늘 아침 등굣길의 한 장면을 세밀 묘사하시오, 라던가 아니던가. 문과대가 아니라 사범대 시험문제로. 이이가 1978년부터 장장 30년 동안 모교 교수를 해자시고 은퇴해 몽땅 빠져버린 이 대신에 달그락거리는 틀니를 낀 채로 고향인 충청북도 제천시 소재 천등산 박달재 인근 초등학교 폐교를 하나 사 이름을 ‘원서헌’이라 짓고 촌스럽게 오탁번 문학관 비슷하게 만들었단다. 이이의 수업을 듣기 위해 다른 과 학생들은 물론이고 다른 학교 학생들까지 청강생이 넘쳐흘렀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횡행하기도 했으며, 특히 여학생들한테 인기가 무지 좋았다. 이건 사실이다.
 젊었을 때 이이의 시를 읽어봤다. 무수하게 널린 시 가운데 그냥 한 무더기를 이룬 정도의 감흥. 역시 신춘문예 당선의 영광은 달에서 내려온 (사람크기의)거대한 몸집의 토끼 아홉 마리가 지하의 회의실에서, 토의를 거치는 대신 제비뽑기로 결정한다는 김희선의 선언(단편 <18인의 노인들>을 참조하시라)이 맞는 것도 같다, 는 정도의 감흥. 그 후로 이이의 시는 젖혀두고 소설, 주로 단편소설을 읽었는데 소설집 <새와 십자가>, <저녁연기>는 그의 시(물론 그가 쓴 시 가운데 극히 일부에 불과하겠지만)와 달리 간결하고 차분하며 정갈한 감정이 참 좋았다. 그 후 단편집 <겨울의 꿈을 날줄 모른다>를 읽었고 벌써 삼십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정말 세월 빠르다. 하여간 오탁번의 시집 《시집보내다》는 별로 기대하지 않고, 그저 옛 추억의 자국을 떠올리며 선택해 읽었다. 그리고 대박.
 나이를 들어 이제 “맘대로 해도 / 법을 안 어기는 / 뉘엿뉘엿 어스름”이 되면 그동안 시간의 마모 속에서 많은 노 시인들은 주변의 작은 것을 돌보며 젊은 시절엔 차마 알아채지 못한 자질구레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 같다. 오탁번도 마찬가지다. 시집의 처음을 여는 시로 <비백飛白>을 택해 그는,


 간밤에 잣눈 내리고
 아침 수은주가 영하 25도까지 내려갔다
 만년필 촉의 비유를 쓴
 젊은 날의 내가
 나 같지 않다


 맘대로 해도
 법을 안 어기는
 뉘엿뉘엿 어스름에
 지팡이 그림자만
 산 넘어간다


 이냥저냥
 희끗희끗
 비백체飛白体로 몸을 떠는 소나무가
 춥다     (부분)


 고 노래한다. 정확한 뜻을 모르고 읽어도 독자는 시인의 마음과 눈 내리는 날의 정경이 눈에 선하다. 그런데 “잣눈”이 뭐야? “한 자 깊이가 될 정도로 많이 쌓인 눈”이란 뜻으로 한자어로 척설尺雪이라고 한단다. 그럼 비백체는? 한문의 서체다. 서체라는 건 아는데, 어떤 글씨가 비백체인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네이버 이미지 검색을 해 글씨 하나를 건졌다. 소나무가 어떻게 몸을 떠는지 글씨를 보고 한 번 상상해보자.

 

 

 이런 시인의 작품들을 감상할 때,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즉시 사전을 찾아보는 것도 시를 읽는 자잘한 즐거움 가운데 하나다.

 이런 시도 재미있다.



 우탄치



 애련2리愛蓮2里의 본디이름은 한치다 봉양면 공전리로 넘어가는 큰 고개 자구니재, 대치大峙가 있는 동네이다 한치 윗동네는 윗 한치인데 다들 우탄치라고 한다 우탄치, 우탄치, 혀를 굴리다보면 아득한 몽골 초원으로 쑥 들어서는 것 같다


 자구니재로 넘어가던 옛길이 이젠 우탄치에서 끊겼다 따비밭 감자 농사는 아예 멧돼지 고라니가 반나마 먼저 잡수신다 산속 명당에서 주무시던 조상님들도 멧돼지 등쌀에 한길 쪽으로 나앉아 자손들 성묫길 기다린다


 겨울밤 화투를 치다가 동치미에 국수 말아먹고 바라보는 우탄치의 밤하늘은 캄캄한 몽골의 초원 같다 송아지 낳는 암소의 울음이 꼭 마두금 소리처럼 애처롭다 산 너머 들리는 기적 소리도 우탄치 우탄치 목이 쉰다


 이게 전문인데 잠깐 드는 의문은 도대체 2연은 왜 넣었을까, 하는 점. ‘윗 한치’가 ‘우탄치’가 되고, 다시 아득한 몽골 초원으로 확장이 되다가 2연으로 넘어가면 갑자기 멧돼지 고라니가 거덜을 낸 감자밭과 조상님 산소가 등장한다. 그건 옛길이 끊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 3연에 다시 옛 먼먼 시간을 되돌려 밤새 화투를 치고 동치미 국물에 국수를 말아먹더니 다시 마두금 소리가 애처로이 들리는 몽골 벌판의 목소리로 우탄치, 우탄치 기적 소리로 울고 있단다.
 시를 읽다가 눈물이 질금질금 나게 웃는 일은 정말 오랜만의 경험이다. 이정록의 시집 《정말》을 읽은 후 처음이다. 시집의 2부 첫 작품 <시인과 소설가>에 나오는 장면인데, 같이 한 번 읽어보자.



 어느 날 거나하게 취한 김동리가
 서정주를 찾아가서
 시를 한 편 썼다고 했다
 시인은 뱁새눈을 뜨고 쳐다봤다
 ― 어디 한번 보세나
 김동리는 적어오진 않았다면서
 한번 읊어보겠다고 했다
 시인은 턱을 괴고 눈을 감았다


 ― 꽃이 피면 벙어리도 우는 것을……
 다 읊기도 전에
 시인은 무릎을 탁 쳤다
 ― 기가 막힌다! 절창이네그랴!
   꽃이 피면 벙어리도 운단 말이제?
 소설가가 헛기침을 했다
 ― ‘꽃이 피면’이 아니라, ‘꼬집히면’이라네!
 시인은 마늘쫑처럼 꼬부장하니 웃었다
 ― 꼬집히면 벙어리도 운다고?
   예끼! 이 사람! 소설이나 쓰소
 대추알처럼 취한 소설가가
 상고머리를 갸우뚱했다
 ― 와? 시가 안 됐노?  (부분)



 오탁번이 김동리를 모셨던 바가 각별했던 모양이다. 시집엔 김동리에 관한 일화가 하나 더 있다. 김동리가 상처하고 소설가 서영은과 재혼을 했는데 이를 두고 시중잡배들 사이에 말이 많았다. 나이 차가 많이 나서. 신기하게 나도 이번에 서영은의 작품을 읽으려고 한 권 골라놓은 참이라 읽기 바로 전에 이런 시를 읊게 됐다. 이런 우연이라니. 김동리와 서영은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같이 읽어보자.



 할까?


 뜰에 활짝 핀 목백일홍이
 닭벼슬처럼 빛나는 오후
 낮달보다 더 하얀 화선지에
 귀거래사歸去來辭가 휘날렸다
 혼자서 큰 집 보는 아이처럼
 심심해진 서영은이
 동리의 허리를 안으며 속삭였다
 ― 서방님
 그는 벼루에 붓을 놓았다
 ― 하고 싶나? 할까?
 그 순간 서영은은
 이 세상 하나뿐인
 절세絶世의 시인이 되었다


 웃기지? 서른 살 차이나 나는 부부의 광경을 생각하면 김동리와 서영은이 만드는 귀여운 정경이 떠올라 내 입 꼬리도 잔잔하게 올라간다. 저절로.
 시인이 학교에 다니던 1960년대에 조지훈이 교수로 있었다. 이때 영문과에 다니던 오탁번도 국문과 교실에 들어가 조지훈 강의 깨나 들었던 모양이다. 그래 <지훈유감>이란 시에서 조지훈의 색다른 면모를 소개하기도 한다.


 한 학기에 잘해야
 예닐곱 번 강의실에 들어오는 지훈이
 어느 날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 내가 왜 조지훈인지 알아?
 학생들이 암말도 안 하면
 그는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 조지 훈훈해서 조지훈이야!  (부분)


 요새 시인도 시는 이렇게 썼으면 좋겠다. 쉽고 그림이 그려지며, 간결하게. 간결하다는 건 짧다는 뜻이 아니라 시의 길이도 포함해 내용도 간결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물론 이제 시가 더 이상 아름다울 필요는 없다. 그래도 이제 아프고, 피를 토하고, 외롭고, 울고, 벽에 막히고, 자해하는 시들을 읽기에, 나는 피곤하다. 오탁번의 시들을 읽어보시라. 세상에는 여전히 작고, 예쁘고, 자붓자붓하고, 되똥거리는 무수한 것들이 숨어 있다는 걸 알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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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다 이야기 을유세계문학전집 66
스노리 스툴루손 지음, 이민용 옮김 / 을유문화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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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20년대에 아이슬란드의 시인이 쓴 북유럽 신화. 13세기, 지금부터 무려 800백 년 전이면 벌써 209대 교황이 다스리던 유럽이라서 이 <에다 이야기>의 프롤로그엔 엉뚱하게도 기독교, 이슬람교를 비롯한 서아시아 종교의 원형이 먼저 등장한다. 즉 전지전능한 신이 있어서 하늘과 땅, 기타 등등을 ‘창조’했고 맨 나중에 두 인간, 아담과 이브를 만들어 후손들이 세상에 퍼졌다고 서두를 깔아둔다. 이어 대홍수, 주정뱅이 노아가 만든 방주 등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 왜냐하면, 교황이 두 눈 부릅뜨고 있는 환경에서 아무리 유럽의 변두리 아이슬란드라 하더라도 함부로 새로운 천지창조 이야기를 거론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성경에 나오는 것이 진리이지만, 북쪽 저 미개한 종족들이 사는 곳엔 한 시절에 이런 이야기도 있었다, 라고 기름칠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봐야겠다.
 실제로 처음엔 ‘오딘’이란 인물을 트로이의 마지막 임금 프리아모스의 딸이 낳은 후손으로 트로이가 멸망한 다음에 세상 곳곳을 떠돌다가 저 세상의 끝, 지금의 스웨덴 지역에 터를 잡고 왕을 해먹은 작자이며, 심지어 ‘토르’의 후손으로 설정을 해놓았다. 이렇게 밑밥을 깔아놓은 다음에야 기독교 대륙 유럽에서 <에다 이야기>의 본문을 써내려갈 수 있었으니, 역시 인간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뭐라고? 그렇다. 이데올로기. 그중에서? 맞다. 종교 이데올로기. 수천만의 인간을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몰살할 수 있는 힘을 종교 이데올로기가 쥐고 있다. 기독교뿐만 아니다. 이슬람, 힌두, 불교(인도의 아소카 왕을 보시라), 수많은 사화士禍를 만들어낸 철학으로서의 유교까지 다 마찬가지다. 그러니 맞지? 종교는 명백하게 인류의 아편인 것이.
 본문은 스웨덴 지역을 다스리는 현명하고 마술에 능통한 귈피 왕이 ‘강글레리’라는 이름으로 여행을 다니다가 모종의 숙박지에서 지혜로운 세 명의 임금, 하르(높으신 분), 야픈하르(똑같이 높으신 분), 트리디(셋째 분)을 만나, 강글레리가 묻고, 세 명의 임금이 답을 하는 식으로 1부 “궐피의 홀림”을 구성했고, 2부는 궁정시인 또는 음유시인과 같은 말인 ‘스칼드’인, 역시 마법에 능통한 ‘에기르’가 여행을 떠나 ‘브라기’라는 남자를 만나 그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정리한 것으로 만들었다. 왜? 자기 이야기가 아니고 다른 사람(들)에게 들은 천지창조와 잡신들에 관한 전설임을 신정사회에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 내 생각. 천지창조 이야기는 세상 어디서나 비슷할 거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고, 공통점이 하나 있으니 허황하다는 거.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각각 맡은 일(선동자, 통치자, 많은 것을 아는 자, 색칠한 방패를 든 자, 상의 신 혹은 보호자, 날씨의 신, 거세한 말 등등)이 있었던 열두 신이 있었다고 한다. 세상이 본격적으로 생기기도 전에 니플헤임이란 도시가 생겼고 니플헤임, 이름이 ‘젖꼭지 도시’라서 그런지 도시의 가운데에 샘이 있어서 거기서 여러 강이 발원을 했다고 하는데 항상 불꽃이 너울거려 아무나 살 수 없었다고 하니 그냥 특별한 정령이 살고 있었다고 감안을 하자. 여기서 발원한 강에서 독을 품은 거품이 흐르고 불꽃 속에서 타르 찌꺼기 등이 엉겨 단단하게 굳었었는데, 날씨가 추운 북국이라 독성을 띤 이슬비가 내리더니 얼어 서리로 변해 세상을 하얗게 뒤덮어 버렸단다. 여기에 멀리서 불꽃과 불덩이가 날아왔다고 하니 화산폭발이라도 했는지 모르겠는데, 덕분에 뜨거운 바람이 불었고 서리가 이슬이 되고, 물방울이 되고, 물방울이 모인 거품 속에서 남자의 몸을 한 거대한 생명체가 하나 나와 거인의 이름을 ‘위미르’라고 했단다. 위미르의 왼쪽 팔에서 남녀가 하나씩 태어나고, 한쪽 발이 다른 쪽 발과 어울려 또 아들을 하나 낳았다는데, 발이 교차한 것으로 봐서 생식행위의 은유가 아닌가 싶다. 여기에 서리가 녹아 이슬이 되고 여기서 또 한 생명체가 탄생한 것이 태초의 암소 ‘아우둠라’이고, 아우둠라가 서리 낀 얼음덩어리를 핥아 먹고는 삼일 만에 ‘부리’라는 남자가 탄생해 ‘보르’라는 아들을 두었고, 보르는 거인족 베스틀라를 아내로 맞아 아들 셋을 낳아 첫째가 오딘, 둘째는 빌리, 셋째가 베였단다. 이렇게 신족은 거인족의 돌연변이로 태어난 것이란다. 저 위에 서두에서 말한 거하고 또 다르다. 이런 거 자꾸 따지면 신화는 못 읽는다. 그런가보다 하자.
 이 보르의 아들들이 최초의 거인 위미르를 죽였다. 세 아들들은 암소가 소금기 있는 얼음을 핥아 생긴 부리의 자손이니 자기의 직계 조상을 죽인 건 아니고, 하여튼 그렇게 됐는데, 이때 위미르가 흘린 피가 바다와 호수, 강이 됐고, 살은 대지, 뼈는 산맥을 만들었다. 이빨과 어금니 부서진 잡뼈들은 바위와 자갈로 되었다니 진짜 거인은 거인인가 보다. 볼테르가 쓴 <미크로메가스>에서 나오는 거인 아니었는지 몰라?
 이런 거 말고도 여러 전설, 신화, 주로 오딘(보탄)을 비롯한 신들, 착한 신뿐만 아니라 ‘로키’라는 이름의 중상모략, 음모, 모든 신과 인간의 치욕을 대표하는 신과 기어이 신들의 몰락을 가져오는 로키가 낳은 세 명의 괴물 이야기까지 재미있게 얘기하느라 고생은 하는데, 13세기 초, 지금부터 800년 전이면 넋을 잃고 읽었겠지만 세월이 흘러도 너무 흘러 흥미로웠다는 뻔한 거짓말은 도무지 하지 못하겠다. 

 다만 하나 관심을 끄는 것은, 십 수 년 전에 읽었던 <니벨룽겐의 노래>가 지극히 인간들 중심으로 되어 있어서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와 비슷하지만 연결고리가 약한 것이 의아했었는데, 이 책의 2부 뒤편에 나오는 ‘금gold - 수달의 배상금, 안드바리의 보물’부터 전개되는 이야기가 <니벨룽겐의 반지>와 거의 유사하다는 것이 재미있었다. 오딘, 로키, 회니르가 세상 탐방을 가 강가에 이르렀을 때 수달 한 마리가 연어를 잡아 막 먹으려고 하는 것을 로키가 돌을 던져 수달을 죽이고 연어까지 몽땅 차지했던 것. 그것들을 들고 한 농가에 들러 구워 먹으려 했더니, 흑마법에 능통한 집주인이 말하기를 수달이 자기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래 수달 가죽 속을 완전히 금으로 메우고 겉가죽도 보이지 않게 금으로 싸 돌려주면 죄를 용서해주겠다고 한다. 그래서 오딘은 물 속 바위틈에 살던 난쟁이에게 가 마지막 남은 조그만 금반지 하나까지 몽땅 내놓으라고 명령을 했고, 딱 하나 남은 반지까지 빼앗긴 난쟁이는 반지를 소유하는 이는 반드시 죽게 될 거라고 저주를 퍼붓는다. 이렇게 시작해 저 뒤에 브륀힐트와 그룬힐트의 알력, 벨제와 지그문트, 지그프리트까지 이름만 조금 다르고 이하 거의 내용이 같으니 어찌 흥미롭지 않겠는가 말이지. 그러나 이야기가 아주 요약되어 있어 아무리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를 좋아한다 해도 추천은 하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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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열전 동서문화사 월드북 177
김영수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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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세다 대학 중문과를 수학하고 홍익대, 충남대 교수를 역임했다고 하는 김영수가 역해를 했다. 역해譯解. 번역하여 쉽게 풀이함. 독자는 이런 종류의 책을 읽으면 적어도 역자가 어떤 책을 번역했는지 원본 텍스트는 알아야 한다. 나는 김영수가 역해했다고 하고, 동서문화사가 저작권법 부칙 4조에 의하여 적법하게 자신들의 저작권을 주장하는 이 책을 읽었는데도 이게 김영수가 여러 책을 읽고 춘추전국시대의 영웅들에 관하여 정리를 한 것인지, 어느 한 텍스트를 말 그대로 번역해서 쉽게 풀이한 책인지, 모르겠다. 실제로 <죽서기년>, <사기열전>, <춘추좌씨전>에서 각 등장인물을 어떻게 묘사했는지 비교하며 이들의 차이점을 통해 출생이나 가문 등을 추리한 내용이 여러 번 나오기도 하는데, 이런 사서들의 비교를 자칫하면 역해자인 김영수가 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역해자를 폄훼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지만, 와세다 대학의 역사과가 아닌 중문과를, 졸업도 아니고 수료한 정도의 가방끈으로 미루어 생각하면, 일본어 실력이 출중한 역해자가 중국인이 쓴 중국어 책 대신, 일본인이 쓴 일본 책을 번역했을 수 있다고 오해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왜 원본을 밝히지 않았는지 안타깝다. (난 도대체 어떤 책을 읽은 거야?) 말 그대로 열전. 사마천에서 시작한 기전체 역사서의 열전. 열전의 공통점은 재미있다는 거. 춘추전국시대에 맹활약을 했던 마흔여섯 명의 영웅들이 자신의 천재를 발휘한 요약집summary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옛날 주나라에서는 하늘을 나는 용의 침을 궤에 넣어 보관해 (은나라도 아니고 하나라 시절부터 수백 년 간)전해오고 있었는데 어느 날 판도라의 상자처럼 궤가 열리더니 배리배리한 냄새가 나는 용의 침이 오물오물거리다가 용과 같은 종류의 파충류, 즉 검정 도마뱀 비슷한 조그마한 운동체로 변해 쪼르르 달려가서 한 열 살 먹었을까 하는 궁녀의 치마 속으로 쏙 들어가 버리는 거였다. 그때부터 아직 초경도 하지 않은 어린 소녀가 난데없이 임신의 기미가 보이기를 무려 사십 년. 그러다 기어이 어느 날 진통 끝에 경국지색, 한 번 보기만 해도 온몸이 뻣뻣해질 정도의 계집아이를 생산했다. 기원전 790년경에도 이미 하늘의 용으로부터 수태고지를 받고 동정녀의 몸을 통해 세상에 나온 인간이 있었다는 말씀. 하여간 이제 다 늙어 아이 엄마가 된 예전의 궁녀는 살기 힘들어 그랬는지, 다 늙은 여자가 아이를 낳았다는 게 쪽팔려 그랬는지 모르겠으나 이 아이를 내다 버렸고, 그걸 포褒나라 사람이 거두어 키우다가, 죽은 다음에 유왕幽王이라고 불릴 주나라 임금에게 갖다 바쳐 대가로 받은 돈으로 팔자를 고쳤다고 하는데, 그 돈으로 정말 팔자를 고쳤는지 자식들 간의 유산 싸움으로 다 거덜이 났는지는 확인된 바 없다.
 이리하여 유왕의 애첩이 된 포나라 여인 포사가 너무, 진짜로 너무 아름다운지라 바라만 보고 있어도 해 저무는지 몰랐던 유왕이 참으로 통탄할만했던 일은, 이 아이가 도대체 웃지를 않는다는 거. 궁정광대를 불러도, 음유시인을 초빙해 와도 결코 웃는 법이 없던 용의 딸이 어느 날 하루 유왕하고 같이 앉아 있었는데 심부름을 하던 한 궁녀가 지나가면서 자기의 비단 치마가 의자 모서리에 걸려 찍, 찢어졌고, 이 비단 찢는 소리를 들은 포사가 그만, 배시시, 웃었으며, 경국지색의 포사가 배시시 웃는 것을 보고 유왕은 너무 좋아 속옷에 찔끔, 미량의 전립선액을 사정해버렸다는 거 아닌가. 이때 나온 말이 “자지러지다.” 뭐 아니면 말고. 이때부터 유왕은 시도 때도 없이 비단을 대령시켜 포사가 보는 앞에서 찌직, 그 비싼 옷감을 찢어대고 이때마다 포사가 배시시 웃는 걸 보고, 그때마다 또 찌직, 미량의 사정을 해대는 바람에, 주나라 왕실의 비단이 나마나지를 않았는데, 당시엔 비단이 돈과 유사한 거래의 수단으로 포사의 배시시한 웃음 때문에 국고가 거덜이 나고 있던 거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북쪽의 오랑캐가 침략해온다는 봉화가 울려 각 제후국에서 군마를 이끌고 도성으로 몰려오는 일이 벌어졌다. 이들이 가득 몰려왔다가 봉화 지키는 병사들 몇이 라면 끓여먹다가 불이 옮겨 붙은 실화失火사건에 불과한 것을 알고는 김이 새서 한숨을 푹 쉬는 장면을 누각에서 내려다보던 포사가 이번엔 단순호치丹脣皓齒, 즉 붉은 입술과 진주같은 흰 이를 드러내며 크게 웃었으며, 어느 때보다 활짝 웃는 포사가 또 얼마나 어여쁜지 이번에 유왕은 그냥 철퍼덕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래 포사의 활짝 핀 웃음꽃을 위해 시시때때로 거짓 봉화를 올리기를 몇 차례. 이제 제후국에선 봉화가 아무리 올라도 그저 콧방귀만 픽, 뀌고는 말게 되고, 바로 이때를 도모해 진짜 북방 오랑캐가 쳐들어와 기원전 771년에 유왕을 붙잡아 몸에서 힘줄을 빼버리고 죽을 때까지 남문에 걸어두었으며(이 사형 문화가 서쪽으로 넘어가 십자가 형刑이 됐다지 아마?), 포사는 믿거나 말거나, 백여우로 변신해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여태까지 쓴 건 이 책에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구라도 아니고, <사기>를 포함한 여러 책에서 나온 걸 참고로 내가 각색한 어지간한 진실이다.) 이건 몇 백 년에 걸친 전설이다. 사실은 유왕이 왕세자를 폐하고 포사가 낳은 아들을 새로이 세자로 봉하려 하는데다가, 주위를 아첨에 능숙한 신하로 채우는 동시에 국정에 관심을 쏟지 않아 불만을 품은 제후국 몇몇이 떼로 몰려와 나라를 뒤엎어버렸다는 것이 <춘추전국열전>의 기반이다. 그리하여 나라가 멸망했으나 그대로 둘 수 없어 뜻있는 자들이 낙읍으로 수도를 옮겨 다시 주나라를 세워, 이 전 시대를 서주, 이때부터를 동주로 나누었으며, 동주시대부터는 말로만 봉건 주나라시절이지 진나라에 의하여 멸망할 때까지는 그저 대륙의 바지사장 구실에 그칠 뿐이었다. 주나라의 바지사장 시절. 이때를 사학자들은 춘추시대의 시작으로 본다. 춘추시대가 열림으로 해서 이제 대륙은 수십 개의 작은 나라로 분할이 된 상태. 이 가운데 가장 힘이 센 몇을 고르라면, 당연히 두 개의 진나라. 하나는 결국에 중국을 통일하는 진秦나라요, 다른 하나는 위魏, 조趙, 한韓, 이렇게 세 개의 작은 나라로 쪼개질 운명의 진晉나라, 장왕莊王 시절에 전국의 패권을 지배했던 초楚나라 정도이며, 진晉이 위, 초, 한. 세 개의 나라로 찢어져 물론 아주 작은 몇 개의 나라를 제외하고 연燕, 조趙, 제齊, 초楚, 위魏, 한韓, 진秦, 이렇게 일곱 나라가 합종과 연횡으로 이합집산을 하던 때를 전국시대로 구분한다.
 이 시절이 역설적으로 중국 문화가 탄생하고 가장 활발하게 발전한 시기였다는 건 다들 아는 상식이고, 그에 못지않게 재미있는 일화와 사자성어가 숱하게 쏟아지던 때라서 꼭 역사책을 읽는다는 생각이 아니더라도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책을 보는 기분으로 읽어도 참 괜찮은데, 여기에 더불어 진짜 실존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인지라 실감나는 교훈까지 얻을 수 있다. 다만 조금 더 재미있게 읽기 위해서는, 춘추시대는 그렇다 치고, 적어도 전국시대 일곱 나라 연燕, 조趙, 제齊, 초楚, 위魏, 한韓, 진秦이 당시에 어떤 지역에 있었는지는 알고 읽는 것이 좋다. 일곱 나라를 저런 순서로 쓴 건 전국의 합종연횡과 관련한 이유가 있어서이며, 나도 이 순서로 외우고 있다. 여기다 춘추시대 진晉나라가 조, 위, 한 이렇게 세 나라였다는 걸 알고 읽으면, 가장 잘 팔리는 사마천, 민음사에서 나온 김원중 역의 <사기 세가>의 오류까지 쉽게 발견할 수도 있으니 그냥 참고나 하시라는 뜻에서.
 나는 언제나 전국시대 조나라의 젊은 인상여와 노장 염파 사이의 알력과 화해에 이은 문경지교刎頸之交, 목숨을 걸고 지켜나가는 우정에 대단히 감동을 받는다. 국가에 충성? 나는 그건 모르겠고, 두 훌륭한 인격이 만드는 아름다운 그림 때문에. 어떤 영웅들인지는 직접 확인하시라. 근데 이 책을 읽느니, 사기열전이 더 낫지 않을까? 그건 적어도 누가 쓴 어떤 책을 번역했는지는 아니까 말이지. 그냥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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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9-11-12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사 이야기 참 오랜만입니다. 동주 열국지 제일 처음에 나오는 이야기가 바로 쑥대 전통과 뽕나무 화살 이야기로, 그 파란만장 백화만발 춘추전국 열국의 이야기의 시초가 바로 경국지색 포사아닙니까ㅎㅎㅎㅎ

Falstaff 2019-11-12 20:15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전 동주열국지는 읽어보지 못했습니다만 그 책도 재미있겠네요.
 
사흘 그리고 한 인생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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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에 <오르부아르>로 공쿠르 상을 받은 르메트르의 장편. 세간에 ‘인상적인 스릴러’ 소설로 이름이 높은 작품으로 <오르부아르>와 마찬가지로 임호경이 번역을 맡았다. 임호경은 이번엔 ‘옮긴이의 말’에서 많이 팔리는 책을 번역해 돈을 많이 벌게 된 ‘개이득’같은 개발랄한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재미있는 스릴러라는데 동의한다.
 작품의 가장 기본적인 구조는 <오르부아르>와 같다. 처음에 한 순간 사건이 벌어지고, 이로 인해 관련된 사람들이 해당 사건에 매몰되어 한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 르메트르가 기본적으로 스릴러 작가라 일단 살인사건을 저지른 후에 사건을 차근차근 해결해나가는 ‘과학수사대’ 같은 수사/형사 드라마의 정형화된 플롯을 사용했다는 건 자연스럽게 봐야 하리라.
 1991년에 열두 살이니 1979년생. 프랑스 어느 곳인지는 모르겠는데, 셍틸레르 변두리에 ‘보발’이라는 소도시에 열두 살 먹은 주인공 앙투안 쿠르탱이 홀어머니 슬하에서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홀어머니라니까 아버지는 천국의 즐거움을 거부하지 못한 거 아니냐고 할지 모르나, 소위 진짜 생물학적, 디옥시리보 핵산을 전해준 아버지는 실내 교향악단으로 유명한 독일의 슈투트가르트에서 새장가 들어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중이란다. 앙투안이 직접 슈투트가르트로 가서 친아버지를 본 적도 딱 한 번 있는데, 둘은 너무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서로가 서로를 소 닭 보듯 했고, 이후로는 편지 한 장 없이, 달마다 혹은 분기마다 따박따박 교육비와 생활비를 보내주고, 서양 최대 명절인 크리스마스에는 빠짐없이 꼭 유행 지난 선물 꾸러미를 소포로 받는 한 해의 사이클을 돌리고 있었단다. 때는 드디어 프랑스 시골마을에도 플레이 스테이션 게임이 들어와 사내아이들을 운동장과 광활한 숲 속의 망아지 상태에서 집구석 소파 위의 도시광부로 만들기 시작할 때였음에, 우리의 앙투안은 어머니 쿠르탱 부인이 적극적으로 반대를 하는 바람에 동네 아이들과 함께 소파 위의 도시광부 그룹에 진입하지 못한 채 홀로 생퇴스타슈 숲에서 삼 미터 높이의 나뭇가지 사이에 아지트 비슷한 자신만의 집을 지으며, 즉 빌빌대며 놀 수밖에 없었다. 이때 바로 옆집 데스메트 씨 집의 막내아들 여덟 살 먹은 레미가 나무 위의 집으로 향하는 일종의 엘리베이터까지 만든 앙투안을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더니 언제나 졸랑졸랑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데스메트 씨의 집엔 오디세우스의 프랑스어 표기인 윌리스란 이름의 잡종 개를 키웠는데 이 개가 외톨이 주인공 앙투안의 소년시절에 가장 가까웠던 친구인 것을 정작 데스메트 씨는 몰랐었다. 그래 사달이 벌어진다.
 어느 날, 피아트 또는 시트로앵이 과속으로 달리다가 윌리스의 정면과 충돌했고, 윌리스는 불행하게도 현장에서 즉사하는 행운을 누리지 못하고 전신 골절을 입은 상태로 고통에 휩싸인 채 데스메트 씨 마당에 누워 신음하고 있었다. 이를 내려다보던 데스메트 씨는 집으로 들어가 엽총을 가지고 나와 윌리스의 복부에다 한 방을 발사해 나름대로 안락사를 시키고, 검정 비닐봉지에 담아 입구를 끈으로 막은 채, 그냥 쓰레기더미 옆에 던져버리고 말았다. 거친 성격의 데스메트 씨 입장에선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처리였지만 그때부터 어린 앙투안의 눈에는 쉬지 않고 눈물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으며, 심사가 극도로 비틀린 소년 앙투안은 숲으로 들어가 자기가 짓고 있던 나무 위의 아지트를 몽땅 부숴버리고 말았다. 이때 졸랑졸랑 우상 앙투안 앞으로 달려오던 레미. 앙투안은 엉뚱하게 레미에게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너희 아빠가 왜 그랬어? 엉, 도대체 왜 그런 거냐고?” 그리고는 분노에 휩싸여 벌떡 일어나 원시적인 엘리베이터를 지지하던 작대기를 집어 들고 새파랗게 질려버린 레미의 관자놀이를 향해, 전력을 다해 휘둘러버렸다. 딱 한 번. 작대기가 어린 레미의 관자놀이에 닿자마자 ‘빡!’하는 충돌음이 약 10 데시벨 정도로 발생했고, 레미는 눈을 뜬 채 그대로 넘어졌으며, 긴 말 하지 않고, 죽었다.
 이후 상당한 부분은, 글쎄 내가 읽기로는 작가의 관점에서 본 어린 앙투안의 고뇌가 오래 이어진다. 나름대로 레미의 시신을 성공적으로 숨긴 앙투안은 자신이 체포되어 적어도 20년 정도 감옥에 가야한다는 공포에 휩싸여 197쪽까지, 책의 거의 삼분의 이 분량을 고뇌해야 하는 단계로 접어든다. 두 번 생각할 필요 없이 떠오르는 작품이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라스콜리니코프가 저절로 떠오르는데, 포르피리가 없는 라스콜리니코프. 거기다가 이제 겨우 열두 살 먹은 살인범이라니.
 2부는 다시 12년이 흘러 앙투안이 스물네 살 먹은 인턴 과정의 마지막 해를 보내고 있는 시점. 어느 새 청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과거 자신의 순간적 잘못에 대한 죄의식에 싸여 우울한 젊은이로 성장하고, 연애도 하고 결혼도 가능하지만 결코 아이는 만들지 않겠다는 필생의 신념을 세운다는 건 독자라면 저절로 이해가 간다. 자신의 고향 보발 시에 다시는 걸음을 하지 않는 것을 필생의 목표로 삼았으나 아직도 어머니 쿠르탱 여사가 고향에 살고 있으니 일 년에 몇 번을 다녀가지 않을 수 없을 터. 12년 전에 자신을 살인범으로 만든 최초의 원인은 피아트 혹은 시트로앵에 의하여 저질러진 교통사고였듯이, 이제 세월이 흘러 외과의가 되기 바로 전 단계에 접어든 앙투안 앞에 또 한 번의 교통사고가 준비되어 있으니, 기대하시라, 개봉 박두.
 역시 잘 쓴 대중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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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11-11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떡밥의 유혹이란...

당장 달려 나가 사야 하나요.
궁금하네요 증맬루.

Falstaff 2019-11-11 14:06   좋아요 0 | URL
ㅎㅎㅎ
헌책방에 한 번 들러보시는 것도 좋은 선택일 듯합니다.
 
갈라진다 갈라진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417
김기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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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9년 <곱추>가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을 했다 한다. 몇 번을 변명했다시피 내게 80년대 말은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낮엔 열심히 일하고 밤엔 죽자고 술 퍼마시던 시기라 시 따위를 읽을 겨를 같은 건 애초에 없던 시기다. 그러니 시인의 이름이 낯설 수밖에. 근데 어떻게 이 시집을 사게 됐느냐고? 별 거 없다. 시집 뒤편에 달려 있는 <해설>을 오생근 씨가 썼다는 이유로 고민 없이 골랐다. 그러나 지금 독후감을 쓰기 위해, 천생 평론가인 오 씨의 시집 해설 읽기는 미루어 두었다. 그의 해설을 읽는다면 김기택의 시에 관한 온전한 감상은 (그것이 비록 남루할지언정) 절대 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평론가의 글은 자주 독자의 머릿속에 돌에 새겨놓은 관념으로 작용한다.
 시집을 열면 나오는 첫 번째 시가 <우주인 2>이다.


 우주인 2


 몸무게 없는 몸으로 그는 검푸른 창공에 홀로 떠있습니다. 깊디깊은 허공에 익사하여 온통 부력만 남은 무중력 하늘에 둥둥 떠다니고 있습니다. 벌어진 입과 귓구멍 콧구멍에 무한을 가득 채운 채 끝없이 투명한 공기에 매장되어 있습니다. 막힘없이 펼쳐진 하늘에게 목 졸리고 숨구멍 막히고 팔다리 결박되어 우주 쓰레기들과 함께 떠돌고 있습니다. 놀란 입을 벌리고 눈을 허옇게 뒤집고 있는 공포는 아직도 우주선에서 조난당하고 있는 중입니다. 영혼과 천연 방부제가 배합된 우주 공기는 오래 묵은 미라를 칭칭 감아 하늘 높이 별처럼 띄워놓고 있습니다.



 시집을 발간한 시점이 2012년. 난 이 시를 읽으며 송구하면서도 섬뜩하게도 김민정의 시집 《아름답고 쓸모없기를》에 든 시 <곡우>, 이날 비가 오면 풍년이 든다는 24절기 중 여섯 번째 절기인 곡우穀雨와, 2014년 곡우를 즈음해 사고가 난 세월호 사건을 애도하기 위한 哭의 비, 곡우哭雨를 중의한 시 <곡우>가 떠올랐으며, 다시 강조하건데 송구하면서도 섬뜩하게도 세월호 안에 갇힌 채 익사한 넋들을 떠올리고 말았다. 제목이 <외계인>이고 외계인이 익사한 공간이 검푸른 창공, 그것도 “투명한 공기에 매장된 창공”일 뿐, 사실 우주의 투명한 공간들과 물속, ‘매장된 곳’과 ‘세월호 내부’는 적어도 비슷하거나 같은 개념이니 이 시를 읽고 이리 생각한 독자는 분명히 나 한 명은 아닐 듯하다. 그렇다. 시가 섬뜩하다. 시를 읽으면서 왜 이런 자유로운 연상 작용이 가능한가 하면, 시인이 익사체 또는 익사체로 보이는 대상을 상당히 객관화 하여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읽어온 시들 가운데 죽음을 주제, 적어도 소재로 한 것들이 어디 한두 편이었나. 그것들 가운데 이 시만큼 노골적인 죽음의 상태를 내놓고 묘사한 것을 나는 기억할 수 없다. 물론 시를 읽어온 내력이 일천하기는 하지만.
 두 장을 더 넘기면 <넥타이>란 제목의 시가 또 하나 나온다.



 넥타이



 목이 힘껏
 천장에 매달아 놓은 넥타이를 잡아당긴다
 공중에 들린 발바닥이 날개처럼 세차게 파닥거린다


 목뼈가 으스러지도록 넥타이가 목을 껴안는다
 목이 제 안에 깊숙이 넥타이를 잡아당인다
 넥타이에 괄약근이 생긴다


 발버둥치는 몸무게가 넥타이로 그네를 탄다
 다리가 차낸 허공이 빙빙 돈다


 몸무게가 발버둥을 남김없이 삼키는 동안
 막힌 숨을 구역질하는 입에서 긴 혀가 빠져나온다


 벌어진 입이 붉은 넥타이를 게운다
 수십 년 동안 목에 맸던 모든 넥타이를 꾸역꾸역 게운다
 게워도 게워도 넥타이는 그치지 않는다


 바닥과 발끝 사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줄어들지 않는 한 뼘의 허공이
 사람을 맨 넥타이를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다



 실감나시지? 넥타이로 목을 매단 사람이 죽어가는 몇 분을 그대로 그려놓았다. 시는 정말 마음에 들지 않지만, 진심으로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상당히 잘 쓴 시 아닌가 싶다. 마지막 연, “바닥과 발끝 사이 / 아무리 발버둥쳐도 줄어들지 않는 한 뼘의 허공”, 이 절망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생과 사의 간극을 어떻게 더 절묘하고 극명하게 묘사할 수 있겠는가. 지금 시집의 앞날개를 보니까, “시인은 다양한 죽음의 사건을 인간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감정이 개입되지 않은 시각으로 바라본다.”라고 써놓았다. 이 독후감을 쓴 다음 곧바로 읽을 오생근 씨의 해설에 나온 문장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적확한 설명이다. 조금도 애도나 안타까움이나 동정의 묘사도 포함하지 않은 죽음 날 것의 상태에 관한 묘사. 그런데 어쩔 수 없다. 읽기가 힘들다. 이런 시들은 위에서 얘기했듯이, 절묘한 묘사를 든 시라 할지라도 독자를 불편하게 한다.
 물론 모든 시가 다 이렇지는 않다. 예를 들어, “우산들은 어떻게 공기 속에서 비 냄새를 찾아내 / 첫 빗방울이 떨어지자마자 활짝 펴지는 것일까. / 눈물은 어떻게 슬픔이 지나가는 복잡한 길을 다 읽어두었다가 / 슬픔이 터지는 순간 정확하게 흘러내리는 것일까. / 저 많은 꽃들은 어디에 숨어 있다가 / 봄과 나뭇가지에 마련된 자리에 찾아와 한꺼번에 터지는 것일까. / 비가 그치면 저 많은 우산들은 / 어떻게 제 이름이 새겨져 있는 자리를 찾아 일시에 증발해버리는 것일까.”(<우산을 잃어버리다> 부분)라고 삶과 자연의 연관을 잃어버린 우산을 통해 노래하기도 한다. 그래도 내 경우엔 죽음의 임팩트가 과했다. 좋은 시집이기는 하지만 내게 맞지 않는 것을 남에게 추천할 수는 없는 것. 아쉽지만 이 시집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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