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은 어디로 갔나
서영은 지음 / 해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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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전 이이가 쓴 단편 <먼 그대>를 참 좋게 읽어서 늘 기억하고 있던 작가. 그러다 놀라운 뉴스를 읽게 되는데, 그게 1987년이란다. 첫 번째 아내와 이혼하고 두 번째 결혼을 해 부부가 된 작가 커플 김동리-손소희. 죽음이 이들을 갈라놓은 바로 그해, 아내를 따라 죽지 못한 김동리가 난데없이 서영은과 결혼을 했다는 소식이었다. 탈상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안방에 다른 여인을 들였다는 소식. 당시에 말도 많았다. 이 사건의 주인공 서영은이 사실상 과부가 된 1990년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장편소설을 한 권 썼으니 바로 <꽃들은 어디로 갔나>다. 김동리의 사망연도는 1995년. 그가 뇌졸중으로 고목처럼 쓰러진 해가 1990년이라는 뜻.
 그러나 독자들은 조심해야 하리라. 이 글은 엄연히 소설이고, 소설이란 픽션, 즉 거짓말을 다루는 장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작가 스스로도 화자의 이름을 강호순이라고 했고, 자신을 세 번째 아내로 선택하는 서른 살 연상의 남편을 ‘박선생’, 박선생의 전처를 ‘방선생’이라 칭하여 혹시 있을 수 있을 법한 시비거리를 피하고자 했으니, 독자도 이 책의 등장인물을 당시 작가의 직접적 주변인물이라고 구태여 특정할 필요가 없다는 뜻.
 책은, 재미없다.
 김동리라고 읽는 박선생과 서영은이라고 읽는 강호순의 사랑이 나하고 순영이의 사랑보다 더 고귀하고 감동적일 이유가 하나도 없으며, 더 깊고 애잔할 이유 역시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난히 지저분할 건더기도 없다. 사랑을 하는 모든 이는 늘 쓸쓸하고, 아프고, 기다려야 하고, 질투에 불타고, 울리지 않는 전화기를 부셔버리고 싶고, 아무 할 일이 없어도 옆에 있었으면 싶고, 피부와 피부를 조금이라도 가까이 대고 싶고, 게다가 돈도 들고 심지어 상대를 괴롭히기도 한다. 게다가 ‘노인’이라 칭하는 박선생과 강호순(하필 주인공 이름으로 2006년 부녀자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의 것을 딴 건 웬 심사였을까?)의 사이는 스무 해가 넘어 이어온 불륜의 관계이고 이들의 관계를 아내 ‘방선생’마저 용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전제가 깔리니, 다시 말하지만 나하고 순영이와의 사랑보다 고상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그런데 예술의 힘이란 이런 것조차 아름답게 채색을 하여 영롱한 빛깔을 내게 만들어, 영식이와 순영이의 사랑은 차마 따라갈 수조차 없는 유일한 사랑을 만드는 것인데,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 더 하면, 세상의 모든 사랑이라는 난장판이야말로 제각기 다른 사연을 가지고 있는 거 아냐? 마치 모든 불행한 가정의 모습이 제각각인 것처럼.
 이상한 커플이다. 나는 절대로 도덕가가 아니다. 서른 살 연상의 유부남과 벌이는 엽색행각. 엽색행각이라면 작가의 팬들은 기겁을 하겠지만, 나도 서영은을 좋아하는 독자일뿐더러, 엽색행각을 벌이는 당사자들의 마음에 오롯하게 담겨있는 사랑의 진실이 반대편 진영, 예컨대 박선생의 두 번째 아내인 방선생의 입장에서 보면 엽색행각이라고 할 수밖에 없잖은가. 오히려 남편의 불륜상대가 누군지도 아는데 첫 번째 아내였던 사람이 방선생한테 그랬다 하듯이 강호순이한테 냅다 달려가서 이마빡에 크림통을 던져 피를 철철 흐르게 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지. 이런 엽색행각을 벌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이니까. 살아가던 어느 날 아내보다, 남편보다 더 불같은 사랑의 대상을 만날 수도 있는 것이겠지. 물론 그런 상대는 평생 안 만나거나 못 만나느니 못하지만 말씀이다. 그런데 적어도 양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배우자에게 사실을 고백하고 응분의 보상을 한 후에 깨끗하고 신속하게 혼인의 종결을 도모해야지, 혼인은 혼인으로 지속시키고, 할 짓은 저쪽 집에 가서 다 하면 ‘Doing it’에서 소외된 배우자는 도대체 어쩌라는 말이냐고. 책의 주인공인 노인 박선생의 경우에 나는 작품을 읽으면서 혹시 이 노랑이 영감탱이가 이혼할 때 줘야 할 위자료가 아까워서 그냥 사는 거 아닌가, 매우 의심스러웠다.
 게다가 신기한 건, 오래된 연인 혹은 오래 한 연인들의 경우 수십 번 이별을 상상하고, 실행해보기도 하는 게 인지상정이며, 이 책에서도 비련의 여주인공 강호순 역시 결혼 후가 아니라 불륜 시절에 박선생을 떠나볼까 싶어서 짐을 싸들고 속초, 강릉 등지로 한 삼박사일 정도 돌아다니다 돌아온 적이 있단다. 다시 서울에서 만난 나이든 유부남 박선생은 강양의 입을 통해 이별을 해볼까 해 잠깐의 여행을 떠났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주먹으로 무참하게 폭행을 가해 강호순의 코피가 터지고 눈이 붓고(안와골절?) 뭐 이런 행악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도 굳이 쏟아지는 폭행을, 성적인 측면이 아니라 심정적으로 “이이가 나를 사랑하는 모양이다” 하면서 받아들인 듯한 서술이 분명히 나오는 걸 보고, 아이고 하느님, 천주님, 예수님(작가가 가톨릭 신자라니까), 세상에 이런 우둔배기가 아직도 있었나이다, 싶었다. 책 뒤에 붙은 하성란의 감상평에선 한 술 더 떠, “코에서 코피가 흘렀다. 그런데 슬프지 않고 기뻤다. 사랑이 아니라 그것은 운명의 확인이었다.”라고 쓰고 있으니 아, 이를 어찌할꼬. 하성란, 얘는 왜 뜬금없이 등장해 이런 악수를 두는지, 참. 노인의 이 정도 행위는 편집증, 그것도 유부남의 비양심적인 편집증 혹은 소유욕과 유사한 신경정신과 증세일 뿐, 사랑은 무슨 사랑이며 운명이라면 개뿔 같은 운명이다. 그렇지 않나?
 이 책을 읽는 유일한 재미는 섬세한 감정을 지닌 작가의 우울한 신혼일기와 연애시절의 회상이 아니라 서른 살 연상의 남편과 젊은 아내가 만들어내는 자잘한 에로티시즘 말고는 없다. 저번에 읽은 오탁번의 시집 《시집보내다》에서 붓글씨로 귀거래사를 쓰고 있는 동리의 뒤에 가서 그의 허리를 얼싸 안으며 서방님, 콧소리를 내니까 동리가, 왜, 하고 싶나? 할까? 이리 물었다는 내용이 이 책에서 따온 거다.
 그냥 사는 일에다 너무 깊은 섬세함을 입혀도 그리 아름답지 않은 결과가 나오더라는 걸 알았다. 그러니 어쨌든 책을 읽으면 그 속에서 하나는 배운다. 이게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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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잠든 동안
커트 보니것 지음, 이원열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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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소설 16편이 든 소설집. <제5 도살장>, <고양이 요람>에 이어 세 번째 보니것으로 그의 단편집을 골랐다. 이 책을 읽으면서 든 느낌은, 원서로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영어를 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점. 진즉에 영어 공부 좀 더 하지, 라는 후회. 이런 비슷한 감정들. 아마 이해하실 수 있을 듯. 이번엔 번역서를 읽으면서도 재미나 유머를 감각하는 포인트를 제대로 따라가고 있는 것 같았는데 사실 특히 서양 소설을 번역한 단편소설의 경우는 이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 서울대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록 밴드의 싱어송 라이터로 활약하기도 하는 역자가 읽기 좋은 한국어 문장으로 다듬어서 더욱 그렇게 느꼈겠지만. 어쨌거나 오랜만에 영미 단편소설을 마치 우리나라 작가가 쓴 것처럼 즐기는 데 별 부담 없이 읽었다.
 여태 기껏 두 권의 책만 읽었지만 커트 보니것의 작품 속에는 참으로 기발한 착상이 들어 있어서, 글쎄 나 혼자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르지만, 작가의 착상을 독자가 쉽게 받아들이면 단박에 그의 팬이 되고, 작가와 코드가 맞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왜 보니것에 열광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행히 보니것의 아이디어가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와 앞서 두 권의 책을 무척 호감을 갖고, 간혹 경탄해가며 읽어 이번에도 그의 책을 선택했지만 누구나 다 나와 비슷할 수 없다는 점에도 동의한다. 엘베 강의 피렌체라 일컫는 드레스덴에 무차별 공습을 퍼붓던 때 피폭격의 중심지 드레스덴의 한 지하 피난처에서도 보니것은 트랄팔마도어 행성의 동물원에서 2년 동안 전시된 적이 있는 남자 배우를 캐스팅한 바 있고, 해병대 장군의 농담 비슷한 요구에 호기심이 동한 과학자의 어처구니없는 발명으로 인해 세상의 거의 모든 물체가 다 얼어버려 드디어 지구별의 멸망을 초래하는 디스토피아를 구현하기도 한다. 작가가 이런 아이디어를 채택에 글을 쓴 시절이 아마 1960년대까지일 걸? 물론 이전에도 이런 공상 과학적 소재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보니것은 여기에다 절묘한 유머 코드를 섞어 독특한 잡탕밥을 만들었다는 데 그만의 특징이 있지 않을까.
 첫 번째 실린 단편 <제니>의 타이틀 롤은 원격 조정하는 인공두뇌를 가졌으며 여성의 신체와 비슷한 모습을 한 냉장고 이름이다. 과학이나 산업기술 개발에 관해 가히 천재적 재능을 지닌 연구원이 엉뚱하게도 제니와 더불어 전 미국을 누비고 다니며 영업 또는 영업 촉진을 위한 쇼 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다가, 결혼 후 6개월 만에 이혼한 전처가 임종의 침상에서 그를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라도 봤으면 좋겠다는 소식을 전하는 이야기다. 60년대 초반에 비록 원격 조정이란 한계 안에 있지만 그래도 인공지능이란 개념을 사용해 완전한 사람과 완전한 기계가 아니라 불완전한 사람들 사이의 삶의 가치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장면. 보니것 자신이 기계공학을 전공한 적이 있어서 이런 분야에 관심이 많기도 했겠으나 단편에서는 분량의 속박 때문에 그런지 ‘불완전한 사람들’이나 ‘사랑’ 같은 노골적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
 물론 ‘불완전한 사람들’ 사이의 ‘사랑’이 중의적 표현에 의해 더욱 강조되기도 하는 건 당연하겠다. 생명보험회사에서 보험금 지급에 관한 규칙을, 가입 2년 후부터는 자살에 대하여도 지급을 하겠다는 약관을 내걸자 미국 전역에서는 아내와 자식 둘 이상을 거느린 가장들이 마치 유행병처럼 스스로 죽음의 선택을 한다는 두 번째 단편 <유행병> 같은 것이 그렇다. 미혼 남자는 결코 죽지 않고, 자식이 없는 가장 역시 죽을 생각이 없으며, 아내와 한 명의 자식이 있는 경우엔 거의 죽지 않지만, 아내와 두 명 이상의 자식을 거느린 남자 가장(시대가 1960년대이니까)은 별로 생각할 여유도 없이 스스로 목숨을 거둠으로 해서 가정에 봉사해야 한다는 강박에 싸인 리얼한 블랙 유머를 터뜨리는데, 읽는 독자는 이걸 보며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정답은 쓰게 웃어야 할 것.
 이런 방식으로 열여섯 편의 단편소설이 든 책이다. 굳이 이이의 단편이 갖는 특징을 말해보라면, 마치 콩트를 읽는 것처럼 최후의 촌철살인을 도모하고 쓴 단편 같다는 것. 글쎄. 솔직한 생각은 단편에 꼭 마지막을 장식하는 안짱다리후리기 한판이 필요한 건 아닐 듯한데,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그건 독자의 선택이 아니라 작가가 결정해야 하는 일이라는 점.
 단편소설을 읽으면서 내용을 노출하는 것보다 미련한 짓은 없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독후감을 여기서 끝내지 못한다면 더욱 미련한 짓일 것이다. 오랜만에 재미있는 단편집을 읽었다. 개인의 취향에 따라 호오가 구별될 수 있는 작가고 책이니 선택은 스스로 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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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연인
에이모 토울스 지음, 김승욱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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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 제목 "Rules of Civility"를 우리말로 직역하면 “정중함의 규칙” 정도. 1966년 10월 4일, 주인공 ‘나’ 케이티는 남편 밸과 함께 뉴욕 사람들의 표정에 초점을 맞춰 작업을 진행해온 60대 중반의 사진작가 워커 에반스의 전시회를 겸한 연회장을 둘러보던 중 사진 속에서 시어도어 그레이, 애칭으로 팅커 그레이의 모습을 두 번이나 발견하면서 1937년 12월에서 1938년 12월까지 약 1년에 걸친 과거의 기억으로 빠져들어, 그 시절 20대 부르주아 젊은이들의 초상을 회상한다. 그렇다. 부르주아 이야기. 토울스 자신이 20년 동안 투자 전문가라는 직업에 종사했으므로 자연스럽게 부르주아들과 가깝게 지냈으며, 만일 그가 성공적인 투자 전문가였다면 스스로도 정복 입은 수위가 정문을 지키는 펜트하우스에서 살았을 것이어서, 40대 후반에 발표한 데뷔작 <우아한 연인>의 무대가 주로 부르주아 계층이 된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럽다 할 것이고, 두 번째 작품 <모스크바의 신사> 역시 구시대 귀족이며 거대 부르주아의 후손인 것도 납득이 간다. 아, 부르주아라는 것이 얼마나 편리한가. 직업은 소일거리일 뿐 신탁재산만으로도 평생 충분한 사치와 사교와 연애와 취미를 즐길 수 있는 극히 소수의 존재라니. 나는 이들이 부럽다. 그러나 확실한 건, 그렇다고 그들이 나보다 더 행복한 건 아닐 거라는 점.
 원제 “정중함의 규칙”은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이 책에서는 미국의 국부 조지 워싱턴이 소년시절에 요약해 둔 행동규범으로 나중에 인쇄되어 출간한 제목으로는 <사교와 토론에서 갖추어야 할 예의 및 품위 있는 행동 규칙> 110가지 항목을 의미한다. 이 110가지 행동규범은 책의 부록에 고스란히 실려 있는 바, 처음 다섯 가지만 소개한다. 어떤 식인지 감만 잡으시라고.


 첫째. 다른 사람들과 함께 행동할 때는 항상 주위 사람들을 존중해야 한다.
 둘째.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보통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신체 부위에 손을 대면 안 된다.
 셋째. 친구가 겁을 먹을 만한 것을 보여주면 안 된다.
 넷째.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혼자 콧노래 같은 소음을 내면서 노래하도 안 되고, 손가락이나 발가락으로 드럼처럼 박자를 맞춰도 안 된다.
 다섯째. 기침, 재채기, 한숨, 하품 등을 할ㄹ 때는 소리를 내지 말고 은밀히 한다. 또한 하품을 하면서 말하지 말고, 손수건이나 손을 얼굴 앞에 댄 뒤 고개를 돌린다.


 그러니까 똑똑하고 조숙한 소년 워싱턴이 1700년대 중반의 미국 사교계를 둘러보고 하지 말아야 할 것들, 해야 할 것들을 아주 세세하게 관찰한 일종의 ‘에티켓’ 목록쯤으로 여기면 된다. 이것들이 책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기재로 등장하는데, 주인공 ‘나’ 케이티에게는 조금, 남자 주인공 시어도어 그레이에게는 무척 중요하게 작용한다.
 스토리를 이끌고 가는 트로이카는 ‘나’ 케이티, 케이티의 하숙집 룸메이트 이브, 그리고 남자주인공 시어도어. 케이티와 시어도어(팅커)는 어떻게 뉴욕의 부르주아 집단으로 편입하게 되었을까. 이브는 일리노어 기준으로 경제적 최상부에 속한 가문의 외동딸이지만 어디까지나 농업에 터를 둔 시골부자 집안 출신이다. 케이티는 뉴욕 출신이긴 하나 기계공장에서 일하는 프롤레타리아의 딸이며, 팅커는 놀랍게도, 한때는 부르주아였으나 아버지 시절에 재산을 완벽하게 말아먹어 다니던 사립 고등학교에서 공립 고등학교로 전학을 해야 할 정도로 몰락한 집안의 둘째 아들이다. 좋다. 워싱턴의 항목 110가지가 왜 팅커에게 중요했는지 밝히겠다. 거덜이 난 집안 출신이지만 좋은 머리로 작가 에이모 토울스와 같은 직업인 투자전문가가 된 후에도, 잘 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던 팅커는 워싱턴의 ‘정중함의 규칙’ 110가지를 꼬박꼬박 지키며 최상류층에 접근해 매력적인 캐릭터, 나이 들고 현명한 뉴욕 최고의 부자 가운데 한 명인 앤 그렌딘을 고객으로 모실 수 있게 되며, 심지어 그이의 펜트하우스 한 군데를 임대료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관대한 대우를 받는다. 더구나 앤 그렌딘으로부터 거의 무한정인 후원을 받아 뉴욕 사교계의 총아 가운데 한 명으로 급부상하기에 이른다.
 케이트와 163cm의 적당한 키에다 금발까지, 놀라울만한 미인인 이브는 1937년 12월의 밤, 한 구석에서는 아직도 로마노프 왕조를 그리워하는 차르 지지자들이 틀어박혀 있고 맞은편엔 트로츠키 추종자들이 자본주의를 타도할 음모를 꾸미고 있는 재즈 바 체르노프에서 보드카를 마시고 있다가 이들 앞에 불쑥 나타난 팅커에 의하여 조금씩 뉴욕 사교계의 중심으로 진입한다. 놀라운 부, 정확하게 말하자면 앤 그랜딘의 무한정한 후원을 받는 총아 팅커에 의하여 프롤레타리아와 시골부자 출신인 두 아가씨들은 조금의 어색함도 없이 뉴욕 최상류 사교계에 진입하는데, 이브는 그래도 시골 부르주아 출신이니 그럴 수 있다고 쳐도, 가난한 주인공 ‘나’가 아무리 총명하고 재기발랄하고 행동력까지 겸비한 재원이라 할지라도 한 순간에, 다른 곳도 아닌 뉴욕의 사교계 사람들과, 그것도 1930년대에, 무람없이 지내며 관계를 만들고 좋은 평판 일색을 들을 수 있었을까는 아직도 조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케이트는 좋은 변호사 사무실에서 비서로 근무하고 있던 중이었는데(그래봤자 타이피스트지만) 승진발령을 받고나선 돌연 사직서를 던지고, 문학에도 관심이 있었던 바, 19세기 영미문학에 관한 한 최고의 평판을 누리고 있는 페리시 씨의 조수로 들어갔다가 몇 달 만에 메이슨 씨에게 발탁이 되어 잡지 <고담Gotham>을 출간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는 인물이다. 세상을 달통한 앤 그렌딘의 견해로 케이트가 자신과 비슷한 정도의 여자 100명 가운데 99명은 빨래 통에 손을 담그고 있어야 했을 환경에서 빠져나왔을 재능을 가졌으면 오로지 혼자 힘으로 뉴욕의 상류 사교계에 진출해야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일일 텐데, 그러려면 시간이 적어도 20년 이상이 걸렸을 것이기 때문에 작가는 손쉬운, 그리고 무엇보다 케이트-팅커-이브의 삼각관계를 만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케이트를 계급간 갈등이 없는 에스컬레이터, 즉 신데렐라로 불가불 만들어버려야 했을 것이다. 원래 팅커는 케이트와 더욱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으나 팅커가 운전하는 차에 탔다가 케이트는 가벼운 부상만 입었을 뿐이지만 이브가 얼굴에 상처가 나고 평생 다리를 절어야 하는 심각한 부상을 입어 도덕상 이브의 연인 비슷한 관계가 된 것도 케이트의 사교계 데뷔를 촉진시켰을 수도 있을 것. 어쨌거나 드라마의 축이 되는 사람들 셋 모두 부르주아 집안의 대물림이나 자력의 힘이 아니라 누군가의 호의와 후원의 덕을 입어 사교계의 일원, 총아가 되었다는 점은 적어도 내겐 특별했다. (특별하게 불만이었다고?)
 에이미 토울스는 이 책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려 했을까? 1930년대 당시 사교계? 부르주아들의 서슴지 않는 소비와 풍요와 마음 내키는 대로 행위 할 수 있게 하는 자본의 위력? 단지 헤어진 애인이 저쪽 강변에 산다는 것 때문에 매일 요란한 파티를 열어 내가 여기 산다는 걸 알리고, 그래서 자연스러운 방문을 하게 만들고 싶어 하는 부르주아의 맹목적 일탈? 뭐 그럴 수도 있고, 상류 계급으로 상승하려는 한 젊은이의 영혼 매각 같은 것일 수도 있고, 그냥 상류층 젊은이들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습의 투영일 수도 있겠다. 등장인물 가운데 아무도 악역을 맡은 사람이 없다. 1930년대 후반을 살아가는 뉴욕의 부르주아들 가슴 한 구석엔 아직도 Rules of Civility, 정중함의 규칙이라 할 수 있는 110가지 규범의 일부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일까? 확실한 건, 이 책이 모두 실화라고 해도 등장인물 가운데 아직 살아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지난 시절의 이야기라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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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9-12-17 17: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스크바의 신사를 너무 재밌게 읽었던지라 번역본 재출간하자마자 사재기해놨는데... 아마도 토울스는 뼈속까지 부르주아인 것 같군요. 가슴절절 재미만 있다면야 뭐 .. ㅋ

Falstaff 2019-12-17 17:10   좋아요 0 | URL
이 책 읽은 사람들 거의 <모스크바의 신사> 때문에 찾아 읽었을 겁니다. 저는 심지어 출판사에 접속해 빨리 이 책 찍으라고 지청구까지 했다는 거 아닙니까. ㅋㅋ
맞습니다.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뭐니뭐니 해도 재미 아니겠습니까!

다락방 2021-09-03 09:01   좋아요 0 | URL
아닙니다, 저는 이 책이 먼저고 모스크바의 신사가 그 다음이었단 말입니다!!!

Falstaff 2021-09-03 09:13   좋아요 0 | URL
ㅎㅎㅎ 저도 이 책을 스콧 핏제럴드가 썼다면 감탄했을 거 같은데요, 21세기에 대공황 시대로 돌아가 이런 식으로 쓴 것이 마땅하지 못했었나 봅니다.
또, 틀림없이 무지하게 재밌는 <모스크바의 신사>를 먼저 읽어서 생긴 과한 기대도 원인이 됐을 거예요. 다 인생이지요 뭐. ㅋㅋㅋ
 
내가 사랑하는 나의 새 인간 민음의 시 248
김복희 지음 / 민음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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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시인의 시를 읽으면 자주 낯선 느낌을 지울 수 없다. ① 시와 시 작법에도 특정한 방향의 흐름 또는 유행이 있을 것인데 내가 그것을 미처 따라가지 못했거나, ② 시의 개별성이 극대화되거나 암호화 또는 기호화 하는 정도가 이젠 내 수준의 독자들이 이해하고 즐기기엔 과하게 특성화하여 다른 예술장르, 예컨대 현대음악이나 현대 비구상미술, 현대무용같이 소수의 특별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 국한하여 즐길 수 있는 방향으로 나갔거나, 이 둘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만일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런 방향성에 관해서 조금도 불만을 품지 않는다. 희랍시대부터 예술이란 형식은 잘 교육받은 소수의 ‘탁월한 자’들만의 쾌락을 위해 존재한다고 정의해온 바와 별로 다르지 않으며, 다만 내가 그 육시할 “탁월한 소수”분자 자리 밖에 서 있을 뿐일 터. 펠루치오 부조니의 오페라 <투란도트>에서 냉혈의 중국 공주 투란도트가 자신의 처녀를 걸고 (독일어로) 세 번째 내는 수수께끼.

 “인류의 근본에서 뿌리를 내려 세대를 거치면서 가지를 풍성하게 하는 것. 어느 것보다 영광스러운 과실을 매다는 나무. 모든 사람에게 매력적이긴 하지만 소수만이 유지할 수 있으며 선택된 사람만이 비밀을 알 수 있는 것. 이것이 무엇인고?”

 저 멸망한 오랑캐 나라에서 온 칼라프 왕자가 이 수수께끼의 정답을 맞춰 그레이트 중화의 부마가 되니, 정답은 바로 “예술”이다. 그러니 ‘현대시’라는 저 아스라한 꼭대기에 달린 과실의 아름다운 비밀을 내가 모른다고 어찌 불평을 할 수 있을까.
 그러나 현대시를 지어 책을 만드는 시인들이여, 너무 높이 천상의 과일을 매달아 놓은 것은 생각 안 하고, 그것을 즐기길 포기한 무지한 대중들 때문에 배고파졌다고 징징대지만 말아라. 너희들은 대신 천상의 과실을 유지하고 비밀을 공유하는 선택된 ‘탁월한’ 소수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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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장이의 딸 - 상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박현주 옮김 / 아고라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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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조이스 캐롤 오츠의 책이 번역 출간되어 성황리에 읽히고 있다. 읽어보려 책을 선택한 순간, 아쉽게도 나하고 궁합이 덜 맞는 역자의 이름이 표지에 박혀 있었다. 처음 대하는 작가의 작품을 선택할 때 어떻건 간에 마음에 들지 않는 역자의 문장으로 읽었다가 엉뚱하게 작가 본인을 경원하게 되는 일이 종종 있어서, 오츠의 다른 작품을 먼저 읽어보기로 했다. 그리하여 고른 책이 <사토장이의 딸>이다. 사토(莎土)장이는 “무덤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 원 제목도 ‘The Gravedigger's daughter’ 즉, 무덤 파는 사람의 딸이다. 모두 두 권 950여 쪽의 장편소설이다.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조이스 캐롤 오츠가 1938년생. 만81세. 1963년 등단했으니 작가생활 56년 동안 장편소설 58편을 발표했다. 외에도 드라마, 노벨라, 단편소설, 에세이 등 이이야말로 평생 쓰는 일에만 전념해온 사람이다. 그러니 한 스토리를 펼쳐가기 위해 설치한 구조나 구성 같은 것에 관해 감히 아마추어 독자가 섣불리 불만을 토로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는 말할 수 있겠지. 한 사건의 필연성을 완전하게 갖추려 타당한 원인을 제공하기 위한 집요한 설명이 독자를 지루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쯤은. 이런, 나중에 이야기해야 마땅한 것을 미리 밝혀버리고 말았다.
 먼저 사토장이 제이콥 스워트 씨를 소개한다. 스워트 씨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1920년대에 독일 유명대학을 졸업하고 상류계급의 자재들만 다닐 수 있던 남자 고등학교에서 다년간 수학교사를 역임하며 이후 과학서적 전문 출판사의 뛰어난 편집자로 활약하던 중 재수 없게 히틀러가 집권하는 바람에 아내 안나, 두 아들 허셀과 어거스트를 이끌고 전 재산을 써 미국행 배를 탄 인텔리 유대인이다. 몇 달에 걸친 항해 끝에 뉴욕에 도착해 모든 이민자들은 하선을 마쳤으나 창도 없는 더러운 공간에서 아들들이 다 보고 있는 와중에 안나 스워트 여사는 무려 열한 시간의 산통 끝에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속에서 다리부터 빠져나온 딸을 성공적으로 순산하여 이름을 레베카로 하고, 아이를 누더기에 싼 채로 약속의 땅에 첫 발을 내딛기에 이른다. 레베카는 그리하여 다른 가족과 달리 미국의 속지주의 정책에 의거해 낳자마자 미국인이라는 타이틀이 달리고, 부모와 형제들은 여전히 미국 비자를 갱신해야 하는 외국인의 처지에 머물게 된다.
 제이콥 스워트 씨가 유럽, 그것도 독일 땅에서 나치의 손아귀로부터 도망치는 와중에 그는 철저하게 약육강식이라는 정글의 법칙을 체험한다. 그리하여 길고 긴 장편소설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동물의 세계에서 약자들은 금방 죽음을 당한다.”
 제이콥 씨가 자식들에게 두고두고 강조하는 것은 그러니 ‘약점을 숨겨야’ 한다는 것. 선생의 경험에서 비롯한 철학 속에, 유대인이라는 것도, 평생 육체적인 일을 해본 적이 없다는 것도, 하다못해 풍부한 지식과 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삶의 정글에서는 약점으로 작용한다고 인식하고 있다. 그래 제이콥씨에게 뉴욕 변두리의 지방정부에서 묘지관리를 맡기자마자 정확한 선택을 하신 겁니다.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저는 부지런하며 몸으로 하는 일은 자신 있습니다. 라고 지방 공무원에게 말한다. 그리하여 묘지와 묘지 근처 습기찬 지역에서 돌로 만든 자그마한 오두막에 다섯 가족이 정착하게 되는 것.
 고된 일과와 사토장이에 대한 지역주민의 멸시, 독일 이민자로 2차 세계대전 전 미국인들의 불쾌감, 여기에 또 (더러운)유대인이란 정체성에다 그동안 겪었던 온갖 수난 속의 생존에서 자신들도 모르게 발아시킨 비정상적 두뇌활동. 이것들이 과학서적 출판사 편집자 출신의 제이콥 씨뿐만 아니라 한때는 아르투르 슈나벨 만큼은 아니지만 베토벤의 열정 소나타를 칠 줄 알았던 부르주아 출신의 안나, 그들 사이의 유복한 유년기를 지낸 두 아들의 뇌 속에서도 발아하기 시작한다. 낳자마자 미국인이었으며 한 번도 여유롭게 살아본 경험이 없는 주인공 레베카는 자신을 사랑해주던 아버지가 차츰차츰 변하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역시 사토장이의 딸에게 쏟아지는 멸시를 거친 싸움을 통해 이겨가며 소녀로 성장해간다. 대강 그림이 그려지실 것.
 그러던 어느 날, 매장을 위해 공동묘지에 온 한 신사가 제이콥 씨에게 평상시 같으면 자연스러웠을 무람없는 말을 했고, 이를 들은 제이콥 씨는 아무 대답도 없이 돌오두막집으로 가더니 천에 싸인 뭔가를 외발 수레에 싣고 와 ‘나리’들을 향해 갑자기 “나치 살인자들! 더 이상은 가만 안 둬!”라고 외치면서 거대한 엽총을 쏴 가슴과 그 위에 놓였던 손을 통째로 날려버린다. 눈이 홱 돌아간 제이콥 씨는 엽총을 들고 집에 들어오더니 아내 안나의 머리를 향해 또 한 방을 쏴버리고, 이어서 레베카의 가슴에다 총구를 댄 채 잠깐 생각에 잠긴다. “너. 너는 여기에서 태어났어. 저 사람들이 너는 건드리지 않을 거야.”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총구를 레베카의 가슴에서 자기 머리통으로 돌리고는 발사해버리고 만다. 어마어마한 큰 총소리 뒤에 피와 뼈의 파편과 뇌의 잔해가 레베카의 머리카락에 엉겨 붙으면서, 이미 두 오빠가 이미 집을 떠나버린 레베카는 완전히 천애고아가 돼버리고 만다.
 하지만 아직 레베카의 불운한 초년운세는 끝나지 않는다. 1936년에 태어나 1999년에 죽을 운명인 레베카. 동시에 피투성이가 되어 부모가 죽어버리는 것과 견주어 더하다고는 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혹독한 젊은 시절의 고통이 또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20대 중반부터 도래한 두 번째 시절을 맞아 몇 백만 분의 일의 확률에 당첨이 되어 험한 초년운세가 끝나고, 살면서 누구나가 겪는 애환을 제외하면 한 마디로 정의해, ‘아메리칸 드림’을 완성하는 신데렐라의 관을 쓰는 이야기.
 흠. 이런 스토리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불행한 소녀가 로또 복권에 당첨이 되어 하늘에서 우수수 행운의 별이 줄지어 쏟아진다는 결말이라니. 난 신데렐라가 싫단 말이다. 이런 결말이 작가 조이스 캐롤 오츠의 애초 구상이었을까, 아니면 출판사 편집자의 권유에 의해, 책을 많이 팔기 위한 의도였을까는 좀 더 생각해봐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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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obe00 2019-12-13 13: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많이 읽지는 못했지만 이 분 책들 좀 편차가 심한 것 같아요. 가장 최근에 읽은 위험한 시간 여행도 딱히 좋지는 않았는데 워낙 다작하셔서 그런가..;;

Falstaff 2019-12-13 13:54   좋아요 0 | URL
전 이이의 작품들 제목을 보면서 혹시 장르문학 작가 아닌가 싶어 읽기를 머뭇거렸습니다. 근데 워낙 많이 쓰긴 썼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