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득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4
제인 오스틴 지음, 원영선.전신화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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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특별히 제인 오스틴은, 진짜, 더 이상 읽지 않으려 했다. 오스틴을 많이 읽은 건 아니다. <오만과 편견>으로 오스틴한테 폭 빠졌다가 <노생거 수도원>에서 대폭 실망했는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에서 가장 두껍다는 <에마> 광고에 또 홀랑 넘어가 작품 속 젊은 아이의 대책 없는 오지랖에 질려 더 이상 제인 오스틴은 읽지 않겠다고 결심했었던 거다. 그러니까, 기껏해야 남녀 사이 혼인을 전제로 한 밀고 당기는 신경전이 나와 극적으로 맞지 않는 거다. 이건 완전 개인 취향의 문제일 뿐, 내가 오스틴의 명성도 모르면서 함부로 깎아내리는 것도 아니고, 당신 역시 오스틴을 읽지 말라고 권유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아무리 제인 오스틴이 범세계적인 찬사와 갈채와 감동의 후광을 뒤집어쓰고 있다고 하더라도 소비자인 내가 나하고 맞지 않는다, 라고 결론을 내면 그걸로 끝이라는 이야기. 그런데 또 오스틴을 읽었다. 유사 이래 영국에서 쓰인 가장 위대한 소설 스물다섯 편 가운데 오스틴의 마지막 작품 <설득>이 들어 있어서. 그래 오스틴에 대한 여태까지의 내 생각이 어땠는지는 다음으로 하고, 일단 ‘위대하다’니까 나 역시 <설득>을 읽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작심했다. 이제 진짜 오스틴은 더 안 읽겠다. 그러다 또 읽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읽으면 읽는 거지 뭐. 어차피 남아일언 풍선껌인 걸.
 이게 오스틴의 마지막 작품이란다. <설득>을 탈고하고 이듬해 마흔두 살의 아까운 나이로 천국의 기쁨을 맛보기 위해 세상을 떴다. 마지막 작품이니 이제까지 이이가 주특기로 사용했던 젠트리 계급의 연애 이야기에서는 단연 최고의 품질을 자랑할 수 있겠다. 19세기 초의 영국에도 결혼의 첫째 조건은 여자와 남자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었으리라. 그런데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있었으니 과연 상대가 나하고 맞는 짝이어야 한다는 거. 제인 오스틴 본인이 대표 젠트리 그룹의 일원인 교구 목사의 딸로 태어나긴 했으나 목사 아빠가 거느린 교구도 코딱지만 한데 8남매 가운데 일곱 번째로 태어나 집안의 부를 머리수로 나누면 거의 별 볼일 없어서 스무 살 때 연애도 거의 성사가 되는 듯싶다가 마지막 순간에 파투가 났고, 스물일곱 살 때, 당시 스물일곱이면 결혼을 하거나 당할 수 있는 거의 마지막 기회로 옥스퍼드 나온 못생긴 말더듬이 남자의 청혼을 받아들였지만 그것 역시 마지막에 깨져버렸던 바, 두 번 다 상대의 요구조건을 자기 집안이 충족시키지 못한 결과, 즉 서로 맞지 않는 짝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쓰라린 경험이 있는 제인 오스틴인지라, 내가 읽은 모두 네 편의 작품에서 공통적인 가장 중요한 터닝 포인트, 주인공 남녀가 고통을 당하고, 번민하고, 서로 밀고 당기는 이유 역시 속으로는 서로를 사랑하거나 상당한 호감을 갖고 있지만 상호 요구조건을 서로가 맞춰주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설득>에서는 열아홉 살 앤 엘리엇과 프레더릭 웬트워스 총각이 서로 눈이 맞아 프레더릭 총각이 청혼을 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난 엄마 대신에 앤 처녀가 의지하고 살던 레이디 러셀의 설득,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일개 해군 장교에게 어떻게 준남작 영양의 일생을 의탁할 수 있겠느냐는, 일견 그럴 듯하고 안정적 선택을 선호하는 연장자의 입장을 이기지 못해 청혼을 거절했으니, 첫 번째가 여자는 준남작의 영양인데 남자가 일개 교구 목사의 동생, 젠트리도 말단 젠트리 계급이란 거, 둘째가 그럼 남자가 돈이라도 왕창 있어야 하거늘 현재 사정으로 보면 가까운 시일 내에 전쟁이 터지고 거기서 큰 공훈을 세우기 전까지 그리 큰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는 ‘진실’, 계급과 돈이라는 두 가지 요구조건을 아무것도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청혼을 거절당하고 열 받은 프레데릭 총각은 2년 후 몇 천 파운드의 돈과 대위 계급장을 달고 앤 처녀가 사는 켈린치 부근에 들르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이 정도 가지고는 준남작과 그녀의 후원자의 요구엔 여전히 족탈불급이겠다, 라고 지레짐작해 다시 바다로 나가 전투하고, 승리하기를 몇 번, 다시 6년 이상이 더 흘러, 그러니까 모두 합해 8년여가 지나 이제 앤 처녀가 스물일곱 살의 늙은 처녀가 되었을 때 수만 파운드의 재력을 가진 웬트워스 대령이란 명함을 파고 다시 켈린치에 도착하면서 제인 오스틴의 마지막 작품이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거다.
 웬트워스 대령이 켈린치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필요한 것이 있었으니, 그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앤의 집, 켈린치 저택을 방문하게 만드는 일. 제인 오스틴에게 참 다행스럽게도 원래의 저택 주인인 1760년생으로 현재 54세의 만년을 즐기고 사는 준남작 월터 엘리엇 경은 아내가 죽고 무려 13년간 별로 탐탁치도 않은 레이디 러셀의 조언을 듣고 살면서 오직 하나, 용모와 지위에 대한 허영심만 붙들고 사는 바람에 근동에 월터 경보다 더 잘 차려입고, 잘 관리한 얼굴을 소지한 남자가 없을 정도의 사치를 부리느라 기둥뿌리 뽑히는지 모르는 처지였다. 그러다 경제적 위기가 닥쳐오자 영지와 저택을 크로프트 제독에게 임대하고 자신은 두 딸과 함께 온천 요양지 바스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근데 크로프트 제독의 아내 소피가 프레더릭 웬트워스 대령의 누님이었던 것이고, 앤은 때마침 시집 간 동생 메리가 아파 당분간 동생 간병차 사돈댁에 머물게 됐으니 어떻게 더 자연스러운 만남이 있을 수 있겠느냐는 말이지.
 태생이 젠트리인 제인 오스틴의 마지막 소설 <설득>에서 보면 준남작 이상의 귀족 구성원 중에서 주인공 앤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귀족은 말 그대로 허영과 사치와 불평과 욕구불만과 비교와 아첨 아니면 무시라는 형태로 드러나는 사교와 치레의 엉망진창으로 그려놓았다. 반면에 해군 제독과 대령들, 지주와 교구 목사 같은 젠트리들은 적어도 기본적인 인간미에 충만한 사람들, 비록 간혹 경박하긴 해도 곧바로 자신의 오류를 알아채 다시 방향을 잡는 인간들로 설정했다.
 제인 오스틴 소설은 결혼이란 최종 목표를 위해 서로 눈치보고 재고 밀고 당기는 소위 밀당의 경지를 보여준다고 했는데, 이 ‘밀당’이란 것이 말이 그렇지 사실 오스틴만큼 재미있고 다양하고 설득력 있게 그린 작가는 별로 없다. 대단한 실력이란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데, 왜 사람들이 제인 오스틴과 그의 작품에 열광하느냐 하면, 무엇보다 먼저 내가 아마추어 독자임을 다시 한 번 환기시키고 이야기하는 바,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심리소설’의 테두리 안에서 만들기 때문이다. 모든 훌륭한 작품이 다 심리소설은 아니지만, 잘 쓴 심리소설은 언제나 훌륭한 작품이란 평을 듣는 건 이유가 있다. 독자가 책 속에서 마치 자신의 내면을 그대로 발견한 것처럼 읽을 수 있으니까. 그러니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읽어가며, 마음 속 또는 혼잣말로 그래, 맞아, 맞아 라고 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등장인물의 심리상태에 푹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를 확률이 대단히 높다는 뜻.
 이 작품 <설득> 역시 마찬가지다. 훌륭한 소설임은 인정한다. 다만 내 취향이 아닐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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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1-07 19: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드로도 재밌게 본 기억이 나네요 :>

Falstaff 2020-01-07 19:52   좋아요 0 | URL
아..... ‘영드‘요!
저는 ‘영드로‘가 뭔지 한참을 생각했지 뭡니까. ㅋㅎㅎㅎ

CREBBP 2020-01-08 14: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같은 과 맞네요. 제인 오스틴을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도 손이 언듯 가지 않는 이유가요. ㅋ

Falstaff 2020-01-08 15:26   좋아요 0 | URL
앗! 그러십니까. ㅎㅎㅎ 더욱 반갑습니다.
 
황폐한 집 동서문화사 월드북 231
찰스 디킨스 지음, 정태륭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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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찰스 디킨스 하면 꽤나 익숙한 느낌이 들지만 사실 그의 작품을 그리 많이 읽지는 않았다. <위대한 유산>, <두 도시 이야기>, <데이비드 코퍼필드> 이렇게 세 작품을 읽었고 마지막 디킨스로 <올리버 트위스트>를 선택해 이젠 디킨스 졸업장을 받으려 했는데, 엉뚱하게도 <황폐한 집>이 가장 위대한 영국소설 스물다섯 편 안에 포함된 걸 알고 이 책을 읽게 된 것. 이 책은 본문이 11쪽에서 시작해 985쪽에서 끝난다. 모두 975쪽. 한 페이지에 30줄, 한 줄에 40자로 쪽 당 200자 원고지 여섯 매, 그러니까 책 전체의 분량은 최대 원고지 5,850매 분량이다. 대략 우리나라 작가들이 요즘 발표하고 있는 장편소설 세 권 반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작품은 전지적 작가시점과 날개 없는 천사 에스더 서머슨 양의 수기가 교차로 편집되어 있다. 이런 작품은 목차 바로 앞이나 뒤에 주요 등장인물을 소개하고 나서 시작하면 좋을 텐데, 디킨스는 그런 친절을 베풀지 않았다. 애초에 눈치를 챈 나는 일찌감치 메모장과 볼펜을 준비하고 메모를 해가면서 읽기 시작했고, 잔글씨 메모가 꽉 찬 두 장에 이르렀다. 겨우 네 번째 읽는 디킨스라 그의 작품 성향이나 서술의 특징 같은 걸 운운할 수준은 되지 못한다. 곧바로 작품 속으로 들어가기로 하자.
 디킨스가 영국 법원에 유감이 좀 있었던 모양이다. 본문에 들어 겨우 한 장을 넘기자마자 “법정은 돈 많고 힘 있는 사람이 정의로운 사람의 기력을 완전히 빨아먹을 수 있도록 편의를 돕고 있다.”라고 선언을 해 놓고 무려 40년 동안 끝나지 않은 유산 상속에 관한 재판 “잔다이스 대 잔다이스 사건”을 이야기한다. 이 사건 자체가 진짜 영국에서 있었던 법정다툼을 염두에 두고 썼다는 얘기도 있는 바, 수십 년을 끈 재판으로 상속인은 재판비용으로 파산해버리고 정작 돈을 번 사람은 변호사뿐이었다는 눈물이 앞을 가리는 실제 상황이었다나. 하여간 그런데 소송 당사자 중 한 명인 잔다이스 씨로 말하자면 영국산 ‘부처님 가운데 토막’으로, 소송 당사자와 특별한 관계이면서 고아가 된 에이더 클레어 양과 이보다 한 살 많은 열아홉 살의 리처드 카스톤 군을 친절한 마음으로 후원하고 있는 사람이다. 출생이 귀족은 아니었지만 조상님 가운데 한 분이 갑자기 돈벼락을 맞는 바람에 부르주아의 반열에 올랐으나 변덕스런 증조부가 이상야릇한 유언장으로 인해 소송을 시작해 끝도 없는 혼란의 와중을 맞았으면서도 어려움 속에서 자신이 받은 재산을 지켜낸 인물이기도 하다. 이이가 또 한 명의 불쌍한 고아로 하여금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후원했는데 사촌 간인 에이더 양과 리처드 군을 자신의 집에서 직접 보육하기로 하면서 때마침 학교를 졸업한 고아소녀 에스더 서머슨 양을 이들의 말벗으로 채용해 돈독한 우정을 쌓게 만들고, 에스더 양으로 하여금 수기를 쓸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준다.
 한 자매를 소개해야겠다. 데들독 부인과 그의 언니 에스더 양.
 데들록 부인은 당시 잉글랜드와 웨일스, 스코틀랜드를 다 뒤져봐도 이이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는 단 한 명도 찾을 수 없었을 정도의 미녀였다. 근데 미인박명이라는 진실이 영국에서도 통하는 모양이다. 이 여인이 한 남자에 빠져 죽자사자 연애를 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하필이면 상대가 앞으로 20년 이상을 지속할 유산 상속에 관한 재판 “잔다이스 대 잔다이스” 소송의 당사자로 한 방 제대로 터지면 하늘에서 금화, 은화가 쏟아지겠지만 자신이 죽기 전엔 결코 결판이 나지 않을 송사에 미쳐버려 부인의 배 속에 여자 아이 하나만 만들어놓고 폐인이 되어 홀연히 사라져버리고, 20년 후에 법원 근처 알코올 중독자이자 고물상 사장인 크룩 씨의 허름한 하숙집에서 야매 대서인으로 푼돈을 받아 살다가 어느 날 약물과다복용으로 숨을 거두고 만다. 근처에 사는 젊은 의사 엘런 우드코트 씨조차 이 사건이 자살인지 사고사인지 판명을 하지 못하게 애매모호한 상태로. 19세기 초 당시는 어쨌든 배에 아이가 들어서면 좋든 싫든 낳는 방법 외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어엿한 법적 처녀의 신분으로 어여쁜 딸을 낳긴 했지만 아이가 숨을 쉬지 않는 거라. 그래 죽은 줄 알고 피 빨래가 쌓인 보퉁이에 올려다 놓고 부인은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신념하에 새로이 몸을 추슬러 결혼에 이르렀으니, 자신보다 스무 살 연상의 준남작이자 링컨셔 지역의 최고 부자인 데들록 경의 아내로 간택이 되어 이후 경의 무한한 존경과 숭배 속에서 나날이 거만의 극치를 부리는 팔자를 즐기게 된다. 맞다. 영국에서도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였다. 이 미모의 준남작 부인의 생애는 이 정도면 이해가 되시지?
 그럼 부인의 언니, 한 많은 에스더 양을 보기로 하자. 에스더 양은 마음씨 하나는 선하지만 풍모나 기상이나 행위나 특별히 언어 구사에 있어서는 천하의 영웅인 로렌스 보이손 씨와 심각한 연애를 벌이고 있었다. 여기서 심각한 연애라고 함은 19세기 초 영국의 양식있는 계급의 남녀 수준에서 심각하다는 뜻이지 21세기 젊은이들의 연애라고 생각하면 수원 밑에 병점 찍고, 오산이다. 에스더 양은 하나밖에 없는 동생의 사생아 출산을 돕고, 숨이 끊어진 조카를 살펴보던 중에, 에그머니, 이 아이의 심장이 약하게나마 박동을 멈추지 않고 있는 거라 차마 멀쩡하게 살아있는 아이를 죽게 내버려둘 수도 없고, 벌써 출산의 자리를 박차고 돈 많고 나이 많은 남자를 향해 떠난 동생에게 엣다 네 딸 받아라, 하고 던져줄 수도 없어서 할 수 없이 자신이 직접 키우기로 작정을 해야 했던 터. 그러나 약혼자 보이손 씨에게마저 가문의 명예와 동생의 명예가 달려 있어 동생이 낳은 사생아를 키워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우지 못해 고백도 할 수 없는 처지여서, 말 그대로 피눈물을 흩뿌리며 보이손 씨에게 결별을 선언하고 진짜 처녀가 엄마를 대신해 사생아를 키워야 하는 팔자로 떨어진다. 동생이 준남작의 부인으로 자리를 잡고 온갖 거만을 떨며 사는 것이 너무도 미워 꼴 보기 싫어도 차마 얘기도 할 수 없었으니 얼마나 조카딸이 미웠을까. 사실 화통하고 건전하기 짝이 없는 보이손 씨 성격으로 보면 사실을 고백하기만 했다 하면 그까짓 것쯤 얼마든지 좋은 마음으로 덮은 채,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을 때까지 행복하게 20년 해로(에스더 양의 명이 그것밖에 안 됐다)를 할 수 있었건만, 화통한 보이손 씨의 입나팔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던 건가 어쨌던 건가 하여튼 온갖 저주를 퍼부으면서도 조카딸을 성년이 되도록 키워주고, 보이손 씨 역시 평생을 독신으로 살게 하니, 죄를 받아 남은 생으로 20년 밖에 허여 받지 못했던 것일까.
 그렇다고 이기적인 동생 데들록 양도 명이 긴 편은 못된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줄거리가 바로 이들 자매가 얽혀있는 실타래를 푸는 일. 그것까지는 독후감에서 줄거리입네, 설명할 수는 없으니 정 궁금하시면 영국에서 가장 위대한 소설작품 스물다섯 편 안에 든 <황폐한 집>을 직접 읽어보시면 될 터.
 그럼 제목이 어떻게 <황폐한 집 Bleak House>가 되었을까. 여기서 ‘황폐한’을 그저 형용사로 보면 바람직하지 못하다. ‘황폐한 집’을 통째로 고유명사로 보면 딱 맞는다. 작품 속에서 황폐한 집은 적어도 사촌 남매와 에스더 양이 도착한 후에는 언제나 친절하고 정의롭고 화기애애하고 영국식 습기와 안개와 애매모호가 없는 따뜻한 애정의 집이기 때문이다. 황폐한 집은 세인트 올번스 근처에 위치한 저택으로 앤 여왕 재위 이전부터 존재했다고 한다. 원래 저택의 이름은 “봉우리의 저택”이었으나 말썽꾼 톰 잔다이스 증조부가 소송을 시작해 가문에 큰 혼란을 맞으면서 저택의 이름도 ‘황폐한 집’으로 바뀌었단다. 원래 있던 세인트 올번스의 황폐한 집 말고 책의 끝머리에 또 한 채의 ‘황폐한 집’이 지어지는데 이 두 채의 황폐한 집의 공통점은 사랑과 자애와 친절과 우정과 삶의 소소한 즐거움이 넘쳐나 근본적으로 황폐한bleak이란 단어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미리 알려드려도 괜찮을 듯싶다.
 여태까지 쓴 독후감은 내가 책을 읽으며 메모장에 써놓은 것의 20 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한다. 욕심을 내 나머지 80 퍼센트를 다 이야기한다면, 지금이 이른 아침이지만 내일 새벽이 훤하게 밝아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책의 줄거리보다 디킨스가 당시 런던과 법정과 귀족계급을 묘사해놓은 문장이 훨씬 좋았다. 내가 읽은 어떤 영국 작가보다 런던의 유명한 ‘안개’에 대해 실감나게 표현해 놓았으며, 법원과 귀족에 대한 비아냥 또는 풍자의 문장 역시 대단히 매혹적이었다. 내용? 그건, 19세기 초에 쓴 책을 21세기 초의 독자가 읽으면서 그 정도는 한 눈에 훤히 보이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출생의 비밀과 독자를 현혹하기 위한 장치 같은 것 역시 지금 시각으로는 무지하게 구식이라 특별히 눈에 띄는 것도 없지만, 썩어도 준치, 그래도 찰스 디킨스다, 어떻게 그리도 뻔한 스토리로 사람을 ‘읽는 재미’의 골짜기로 빠뜨려버릴 수 있을까.
 근데 이 책에 등장하는 몇 몇 인물은, 평생 화장실 한 번 안 가고 천상의 넥타만 마시면서 사는 거 같다. 세상에 이런 사람들 있으면 한 명만 구경하고 나서 죽고 싶다고 조건을 걸면 아마 나는 불멸의 삶을 살 수 있을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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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20-01-06 11: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황폐한 집>에 대해 정말 맛깔나게 리뷰해 주셨군요. 저도 디킨스 최고의 작품은 <황폐한 집>이라고 생각하는 1인입니다. 그토록 많은 인물들을 어쩌면 그렇게도 꼭꼭 숨겨놓았다가 안개가 걷히듯이 차츰차츰 그 비밀들을 하나하나씩 풀어내고 드러내는지, 정말로 경이로울 지경이더군요.^^

Falstaff 2020-01-06 12:43   좋아요 1 | URL
예. 진짜 이 작품은 메모하지 않고 그냥 읽었다가는 작가가 지금 하는 이야기가 어디서 연결이 되는지 깜깜했을 뻔했습니다.
등장인물 구성이 데이비드 코퍼필드하고 유사하다고 생각을 했는데, 어쨌거나 내용의 복잡 다양은 시대의 이야기꾼 디킨스 아니면 누가 만들 수 있겠습니까. ^^
 
2666 세트 - 전5권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송병선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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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 다섯 권, 5부, 본문 1,680쪽의 장편소설. 간 질환으로 세상을 뜬 후 볼라뇨의 유작으로 2003년에 발표했고, 2008년 영어 판이 나오자마자 미국, 영국의 권위 있는 거의 모든 매체가 2008년 최고의 작품으로 선정했다고 했단다. 작품은 본질적으로 인간에 의하여 발생하는 대량 살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솔직한 심정은 왜 이 책에 그리 찬란한 평가를 헌정하는지 이해하기 쉽지 않다. 작품은 두 번의 세계대전과 유대인 학살과 북부 멕시코 국경지역인 산타테레사에서 벌어진 200건의 연쇄 여성 살해사건을 연결시키고 있다. 볼라뇨는 양차 세계대전의 여파를 멕시코의 공업도시이자 불법 월경을 도모하는 사람들로 붐비는 멕시코-미국 국경도시로 끌고 오기 위하여 1차 세계대전에서 다리 하나를 잃은 할아버지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삼촌을 둔 독일계 미국인 클라우스 하스를 등장시킨다.
 1부 <비평가들에 관하여>로 시작하는데 제목대로 네 명의 비평가들, 프랑스인 장클로드 펠티에, 스페인 사람 마누엘 에스피노사, 이탈리아 사람으로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피에로 모리니, 이렇게 세 명은 남자고, 영국인 리즈 노턴 혼자 여자다. 남자 세 명과 여자 한 명. 이들의 공통점은 독일 작가(로 여겨지지만 과연 실체 인물인지, 살았는지 이미 죽었는지도 판명되지 않은 인물) 베노 폰 아르킴볼디를 높이 평가하여 세계 각지에서 열리는 독일문학 세미나에 거의 빠짐없이 참가한다는 것. 말 그대로 1부는 장편소설의 도입부로만 작용한다. 그런데도 세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비행기를 타고 런던과 파리, 마드리드, 간혹 베니스를 넘나들며 적극적인 삼각관계를 만들기도 하고, 아예 프랑스-스페인-영국이 삼국동맹을 맺어 셋이 한 침대에서 화끈한 밤을 보내기도 해서 딱 1부만 읽는다 해도 한 권의 완성된 작품을 읽은 듯하다. 볼라뇨니까. 적어도 상상력 하나는 지구 대표선수라서. 일찍이 볼라뇨의 상상력에 관해서 그의 전작 <아메리카의 나치문학>에서 혀를 내두른 적이 있다. 남북 아메리카 문단에서 친 나치, 적어도 친 파쇼적 문학행위를 한 백과사전적 나열이 전부 볼라뇨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허구라는 걸 알아차린 건 거의 반 분량을 읽은 후였다. 그래 이 책도 1부를 읽어가며, 결국 이 작품은 수수께끼의 인물 베노 폰 아르킴볼디를 찾는 여행이 될 것임을 짐작하면서 무대가 어디까지 펼쳐질까, 그의 태가 묻힌 라틴 아메리카는 적어도 한 번은 나올 것이 분명하지만 벌써 유럽 각지까지 펼쳐놓은 판에 책의 분량을 감안하면 실로 방대하리라, 가늠할 수 있었다.
 베노 폰 아르킴볼디. ‘베노 아르킴볼디’까지 하면 틀림없이 이탈리아 남자다. 근데 난데없이 독일, 프러시아 귀족 가문의 성姓 앞에 붙는 관사 ‘폰’은 또 뭔가. 유럽인은 이 이름을 보면 이탈리아 출신의 16세기 보헤미아 궁정화가였던 실존인물 주제페(또는 요세프, 요세푸스) 아르침볼도(또는 아르침볼디, 아르침볼두스)를 떠올릴 수 있단다.
 아주 오래 전, 한쪽 눈이 안 보이는 아가씨를 사랑하는 프러시아 청년이 있었다. 그러나 불운한 시대를 골라 태어나 청년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라는 황제의 명령을 받고 용감하게 싸웠는지 어땠는지는 잘 몰라도 다리 하나를 잃고 귀향을 했는데, 집에 오자마자 그길로 외눈 아가씨한테 청혼을 해 가정을 이루었으며 1920년에 아들 한스, 1930년에 딸 로테, 우애 깊은 남매를 낳았다. 아들 한스 역시 불운한 1920년 생. 키가 무척 크고 관심사라고는 바다 속 해초뿐인 소년은 일찌감치 학문에 뜻이 없어 열세 살 때 학교를 때려치워버렸다. 열세 살이면 1933년. 우연히 히틀러가 독일을 장악한 해가 된다. 집이 가난해 식구 전부가 근방에 있던 남작 집안의 별장을 관리하는 하인, 하녀 일을 해야 했고, 별장에 자주 머물렀던 남작의 좀도둑 조카 후고 할더와 친분을 쌓게 된다. 후고 할더의 아버지 콘라드 할더는 후고의 외삼촌인 남작으로부터 인연이 끊긴 프랑스 화가로 하필이면 죽은 여자만 그린다고 한다. 독자가 이 대목을 읽을 때는 이미 산타테레사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연쇄살인이 한창 진행 중일 때라 무엇이든지 사건하고 이어 붙일 생각에 골몰해 있을 것이지만, 아쉽게도 이 화가는 아무 상관없다. 전적으로 볼라뇨의 장난기일 뿐. 책 곳곳에 이렇듯 볼라뇨의 가벼운 트랩이 묻혀 있지만 읽는 사람이 발견할 수도 있고 눈치 채지 못할 수도 있을 터. 그러거나 말거나 책을 읽는데 아무 문제도 없으니 그냥 그런가보다 하면 되겠다. 하여간 한스가 점점 키 큰 거인으로 자라 어느 새 열아홉 살이 된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2차 세계대전이란 거창한 학살극을 시작한다.
 한스는 러시아 전선에 배치되고, 전쟁 중 특유의 우울한 분위기로 말미암아 죽음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스는 언제나 가장 앞에서 돌진하지만 그의 모습에서 적들도 공포를 느끼는지 결정적인 죽음을 선물하지 못하고 전쟁터라는 환경에선 중상이라 볼 수 없는 총상을 입어 러시아의 한 농가에 방치, 고립된다. 그곳에서 보낸 시절에 교묘하게 장치한 대피소를 발견하고, 대피소 안에서 농가의 주인집 아들로 보이는 1909년 생 보리스 아브라모비치 안스키라는 남자의 노트 몇 권을 주워 그의 일대기에 큰 관심을 쏟는다. 얼마나 큰 관심이냐 하면, 안스키가 쓴(것처럼 보이는) 소설 3부작 <진정한 새벽>, <진정한 황혼>, <황혼의 떨림>을 거의 외울 정도까지. 그러나 키 크고 힘 센 한스가 전쟁을 치루며 직접 죽인 사람은 딱 한 명이다. 그것도 러시아나 폴란드인이 아니라 독일인. 전쟁 막바지에 미군 포로가 된 한스는 수용소에서 유대인 500명 가운데 근 400명에 대한 사형을 집행하라고 명령한 짐머라는 이름의 관리자를 만나, 유대인 학살에 관한 고백을 듣고는 우악스런 힘으로 목을 졸라 죽여버리고 만 것.
 전쟁이 끝나고 수용소에서 도망친 한스는 옛 친구라고 생각하는 후고 할더의 아파트를 찾아 갔으나 후고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대신 그곳에서 정신과 몸이 건강하지 않은 아가씨 잉게보르크 바우어를 만나 사랑하게 되고, 소설 <뤼디케>를 완성한 후 ‘베노 폰 아르킴볼디’라는 이름으로 원고를 함부르크의 총명한 유대인 편집인에게 보냄으로써 작가의 반열에 오르는 것.
 그러나 작가가 로베르토 볼라뇨다. 이야기는 내가 여태 쓴 것처럼 직선으로 나가지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아르킴볼디의 가계를 멕시코의 변방으로까지 끌고 가야 직성이 풀리는 볼라뇨는 문제의 도시 산타테레사 대학의 철학교수 아말피타노 씨를 2부의 주인공으로 내세워 시인 디에스테가 쓴 기하학 책 <기하학 유언>을 집 뜰 빨랫줄에다 널어놓게 해야 했고, 3부에서 뉴욕의 할렘지역에서 발행하는 작은 잡지사 <검은 새벽>의 문화부 흑인 기자 페이트 씨를 엉뚱하게 산타테레사에서 벌어지는 라이트헤비급 권투시합을 취재해오라고 출장 보내야 했다. 페이트 씨가 잡지사 공금으로 산타테레사에 출장까지 와 원래 목적인 권투시합은 제쳐두고 현지에서 날이면 날마다 몇 년째 벌어지는 여성 연쇄살인에 흥미를 느껴 싱겁게 끝난 권투시합의 기사를 송고하는 대신 연쇄살인의 심층 취재를 요구하면서 드디어 4부 <범죄에 관하여>로 넘어가 1993년 1월에 열세 살 소녀 에스페란사 고메스 살다냐 양의 강간살인을 시작으로 수백 건의 연쇄살인을 무차별적으로 조명한다.
 4부를 읽으면서 독자에 따라 호오가 극명하게 갈릴 것으로 본다. 연쇄살인에 앞서 전통적으로 가톨릭 국가인 멕시코에서 성당의 성물 훼손 사건이 벌어진다. 남자 괴한이 침입해 처음엔 성당에 대량의 오줌을 누는 일이 벌어지고, 이를 막고자 하는 사제를 칼로 찌르기도 하고, 급기야 성당 내에서의 살인사건으로 번진다. 이어 조각해 세워놓은 성인과 성물을 파괴해 난장판을 벌이는데, 지역의 정신병원 원장인 엘비라 캄포스 박사는 이를 성물공포증 환자의 소행이라고, 도움을 요청한 형사 후안 데 디오스 마르티네스 씨에게 판정해주고, 자기보다 열일곱 살이 적은 그를 기꺼이 침대 파트너로 선정한다. 독자의 호오가 갈리는 건, 볼라뇨의 서술이 지극히 기사문 같은 형식을 띄지만, 아무리 건조한 서술이라고 해도 백 건이 넘는 훼손된 시체를 감상하면서 기분이 개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열두어 살부터 서른 살이 넘는 젊은 여성의, 다양한 방법과 행위로 강간당한 후에, 주로 목을 졸라 죽이기는 하지만 역시 다양한 방법과 기구를 써서 살해한 시신을, 검시 보고서 수준으로 무자비하게 써대는 작가의 요란한 필력이 어찌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2666>을 최고의 볼라뇨 소설이라고 한다고 들었는데, ‘유작’이라는 프리미엄 효과도 조금은 즐기고 있는 것 같다. 물론 나는 위에서 말한 4부의 다양하게 훼손된 시신에 관한 묘사를 좋아하지 않는 부류라서,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아마추어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 때문이겠지만 <2666>보다는 <야만스러운 탐정들>을 더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어쨌든 확실한 건 볼라뇨가 문제적 작가라는 사실. 4부에서 벌어지는 백 건이 넘는 살인사건의 현장을 읽어보시라.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살인 사건의 현장을 나열할 수 있는 상상력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앞서 말한 <…… 나치문학>에서 진짜 생존했던 실존인물들인 줄 알았던 착각을 이 책에서도 비슷하게 느낄 수 있다. 아, 진짜 경이롭다. 그리고 비위엔 맞지 않는다.
 그러나. 양차 세계대전과, 독일과 소비에트에 의하여 발생한 유대인 학살, 여기에 멕시코 북부 국경지역 공업지대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을 연계시키기만 했지, 대량 학살이 왜 발생했는지에 관한 원인규명엔 하나도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문제가 발생하면, 이 책에선 대량 학살이 문제일 텐데, 철학자들은 문제를 “해석”하려만 할 뿐이고 소설가들은 문제들의 연관관계를 “설명”하려 할 뿐이지 결코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왜 같은 문제가 멕시코의 연쇄살인에 이어서 파키스탄과 시리아와 미얀마의 로힝야 족과, 신장 위구르에서 여전히 발생하는지 세상의 모든 철학자들과 정치가, 부르주아들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지만,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임도 역시 알고 있다. 이미 고인이 된 천재적 작가 로베르토 볼라뇨도 이들과 같은 한계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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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12-30 09: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나오자마자 사서 읽기 시작했는데...
두 번째 권을 읽고 나서 세 번째 권의 어디
선가 그만 멈춰 서 버렸습니다.

Falstaff님의 리뷰를 읽으니 기억이 새록새록
나네요.

경자년 프로젝트에 다시 한 번 올려야지 싶
네요.

<야만적인 탐정들>도 세 번째 도전인데 지
난 가을에 시작해서 지지부진하고요.
읽을 책들은 산더미 같고, 시간은 부족하니
참... 그렇네요.

Falstaff 2019-12-30 10:04   좋아요 1 | URL
ㅎㅎㅎ 늘 사는 것이 그렇지요 뭐.
이렇게 긴 작품들은 독한 마음 먹고 시작해야 하잖습니까.

2019-12-30 1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30 1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REBBP 2020-01-08 14: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야만스런 탐정들을 너무 잼있게 읽어서 기대를 크게 하고 현재 1권까지 읽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1권만으로도 중간에 끊겼다는 느낌은 안들어서 중단된 상태에서 좀 더 짧은 칠레의 밤을 읽었는데.. 여전히 야만스런... 이 제일 좋네요

Falstaff 2020-01-08 15:29   좋아요 0 | URL
저도 볼라뇨, 하면 무조건 <야만스런....>입니다. ^^
 
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 창비시선 385
문인수 지음 / 창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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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생 시인이 2015년에 낸 시집이니 이 한 권으로 칠순잔치 했다 치면 되겠네. 해가 갈수록 나이든 시인들이 좋아진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거염내기를 즐기는 사람들도 많으니 우리는 이런 노인들을 일컬어 노추老醜라고 한다. (왜 한글2010에 ‘거염’ 밑에 붉은 줄이 달리지? 부러워서 생기는 시기심이란 뜻의 순 우리말이다. 한글2010이 우리말에 약한 모양이다) 시인들? 그들이라고 다를까. 같은 사람인데. 그렇지만 이들은 평생 우리말을 다듬어 자기 생각을 펼치며 살아온 사람들이라 말, 특히 그걸 문자로 기록해놓는 일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충분히 알고 있어서 적어도 자신의 ‘시’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오면 사물이나 사람, 사건을 바라보는 눈길이 그렇게도 부드러워진다. 작은 일에 고마워하고, 감격하고, 옛일을 회상하고, 그 작은 일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는 즐거움으로 미소하는 모습을 자주 본다. 이런 시들은 아무리 읽어도 물리지 않는다. 시집을 냈을 때가 만 70세면 이제 문인수는 노인이다. 노인의 시. 진짜 시인은 스무 살 때까지 끼적인 낙서를 찢어버리고 상아 장사를 하기 위해 아프리카로 떠난다고? 진짜 시인은 상아 장사와 무기밀매를 하고 또 하고, 하다가 또 하다가 진절머리가 나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서” 마루 밑 섬돌 아래 핀 잡초를 보고 자붓하게 웃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시집의 표제, <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라는 건 무슨 뜻일까. 표제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오늘도 내뺀다.” 시인은 오랫동안 대구의 동부시외버스 정류장 부근에서 살았는데 딱히 갈 곳도 없는 채로 동네에서만 살았던 터라 동네라면 골목골목 모르는 곳이 없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는 문득 “눈에 집히는 대로 아무 행선지를 골라” 버스에 올라탄다. 왜? 쉽다. “아무 데나 가보려고.” 강릉까지 가려고 강릉 가는 차표를 끊고는 훨씬 못 미쳐 묵호에서 내리기도 하고, 근데 묵호가 어딘 줄 아셔? 요즘엔 동해시에 편입되어 묵호동이란 지명을 갖고 있을 뿐이지만 예전에 ‘묵호’라면 큰 항구였다, 울진 가려다가 변덕이 나서 울산 방어진 가는 버스를 타기도 하고 이리저리 막무가내로 돌아다녔던 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시집을 다 읽어보면 이이의 발품은 경상도 해변지역은 물론이고 전국각지, 전라남도 해변까지 국토 전반을 망라하는데, 그래서 표제이자 시의 제목인 ‘이곳’은 자신이 터를 잡고 사는 지역쯤으로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라는 말은 시인이 현재 이동 중, 혹은 다른 곳에 잠깐 발을 멈춘 상태 정도라고 해석이 된다. 그래 집을 나서 먼 타관에 홀로 있으면 나를 아는 사람 하나도 없는 낯선 일별, 선의의 일별들도 빽빽한 것이 단박에 눈이 들어오고 그래서, “나랑 무관해서 편하다.”
 얼마나 좋아. 언제부터 시가 고독과 고통과 죽음과 우울의 늪지대에서 허덕였기에 수많은 시인들이 농도 짙은 절망의 방사능을 가뜩이나 우울한 세상에다 방사하고 있었느냔 말이지. 그런 시들을 읽다가 이렇게 문득 길을 나서서 나하고는 관계없는 사람들 덕택에 편하다고 하는 시를 읽으면 괜히 내 마음까지 편해진다. 게다가 문인수의 시에서는 절대 경박하지 않은 웃음 코드까지 곳곳에 섞여 있어서 여차하면 지뢰 밟듯이 펑펑 터질 거 같지? 그 정도는 아니고 시를 읽다가 가볍게 픽, 웃게 만들어준다. 참 좋다. 뭐든지 과하지 않은 자잘한 즐거움을 주는 시. 비록 뇌리에, 아니면 가슴에 비수처럼 팍 꽂히는 시 한 수가 없다 해도 그게 대수인가. 시 말고도 지금 세상엔 팍팍 꽂히는 날카로움이 너무 많아 몸 사리느라 뼈마디가 녹작지근해마지 않는데 말이지. 예를 들어 <뻰찌>라는 시를 보면, 뻰찌라고 함은 시인의 고향친구 여중환 선생을 말하는 바, 일찍이 전기, 전자공을 다 합해 전공電工이라 일컫는데, 인생동안 뻰찌를 오른쪽으로 돌리고, 왼쪽으로 돌리길 수백만 차례라 손아귀 힘이 가히 장사였던 모양이다. 그러다 어느 날 사기꾼한테 뻰찌가 물려버려 탈탈 탈린 빈손이 돼버렸다지? 이 친구가 오래 전 시인의 어머니 혼자 사는 집에 한사코, 한사코, 진짜 한사코 무료로 전기공사를 해주어 시인이 “고맙다고 손을 내밀었을 때, 그가 덥석 마주 잡았을 때, 아팠다. 손가락이 몽땅 분필 동강 나듯 몹시 아팠다. 그것은 내 불효를 잡죈, 악문 것이었을까. 나는 그때 / '아프다! 씨발놈아 ―'" 했던 거 같단다. 그리고 곧바로 뭐라고 노래하느냐 하면, "뻰찌는 요새 뭘 잡아먹나."
 시인의 나이 70에 나온 시집이니, 시는 60대 후반에 썼겠다. 이 가운데 어떤 시가 있느냐 하면, 조묵단 여사가 시인의 어머니 존함인 모양이다.




 조묵단전(傳)
 나비를 업다



 나 혼자 산소엘 와 넙죽 엎드리는데
 잔디를 짚는 손등에 웬 보랏빛 알락나비 한 마리 날아와 살짝 붙는다. 금세
 날아간다. 어,

 어머니?

 ……

 다만 저 한잎 우화, 저리 사뿐 펴내느라 그렇듯
 한평생 나부대며 고단하게 사셨나.

 절을 다 마치고 한참 동안 앉아 사방 기웃기웃 둘러보는데, 없다. 산을 내려오는데
 참, 너무 가벼워서 무겁다. 등에,
 나비 자국이 싹 트며 아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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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소설
양선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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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 개의 단편소설을 실은 단편선. 2014년부터 2017년에 걸쳐 각종 잡지에 실린 작품들을 뽑은 책인데, 작가가 1990년생이니 만 24세부터 27세까지, 가장 혈기왕성하고 의욕적이며 반면에 일생 중 가장 미친 듯하면서도 아직 설익은 상태일 때 썼을 것이다. ‘설익다’는 것은 욕이 아니다. 그만큼 더 성장할 수 있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고, 사실 또 남자들이 철이 늦게 드는 편이니.
 양선형. 이 작가의 이름은 기억해두어야겠다. 왜 젊고 젊은 시절에 이런 소설방식을 택해 글을 쓰게 됐을까. 열 편의 작품이 모두 뇌 안에서의 화학작용에 의존하여 쓴 것처럼 보인다. 그래 하나도 빠짐없이, 작품을 이해하고 말고는 다음으로 하고, 읽어가기가 쉽지 않다. 첫 번째 실린 <해변생활자>는 이이의 데뷔작으로 2014년 『문장웹진』에 실렸다고 한다. 그의 나이 24세 때. 주인공은 해변에서 금속탐지기를 백사장에 꽂아 동전이나 시계, 귀금속 등을 찾아 챙기는 회사의 직원이며, 두 번째 작품 <스나크 사냥>은 ‘시설’의 내부에 살고 있는 날짐승과 길짐승을 총칭해 부르는 ‘스나크’들을 사냥해 와 햄버거 등의 패치로 팔아넘기는 것처럼 보이는 스나크 사냥꾼이다. 그런데 진짜로 읽어보면 이들이 정말 동전을 찾고 있거나 스나크를 사냥하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그저 작가의 허황한 상상 속의 일인지 독자의 뇌가 마구 헝클어져버리고 마는 것을 느낄 수 있으리라. 이런 낯선 글쓰기를 읽는 행위는 첫 작품에서 경보가 울리고, 두 번째 작품에서는 경종소리가 만발한 가운데, 젊은 작가 특유의 아직 세공되지 않은 거칠고 비위생적인 표현이 적나라해서 더 이상은 읽어주지를 못하겠다 싶은 위기상황을 맞다가, 세 번째 단편 <생활과 L의 유령>에 오면 그런 건 작가의 작품에서만 읽을 수 있는 특징으로 인정하면서 이젠 어느 정도 익숙해지는 단계로 접어든다.
 다시 고개를 드는 의문. 왜 이런 방식으로 소설을 쓰게 됐을까. 지방 대도시 출신의 1990년생이면, 적어도 열 살부터 이들, 특히 남자 아이들의 삶은 컴퓨터/인터넷 게임이란 큰 틀 안에서 이전 세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정형화, 디지털 화한 드라이한 성장과정을 거쳤을 것이고, 자연보다는 인공, 직접 체험보다는 허구적이고 폭력적인 상상 체험을 경험했으리라. 그리하여 이들에게는 “비밀은 언제나 사실을 압도”하고, “서술敍述은 자신의 내면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며, “확신이란 늘 현상보다 늦게 찾아오는 법”이 된다. 책 전반에 걸쳐 특히 ‘서술’에 관해 작가의 초점이 맞춰지는 일이 많다. 위에 인용한 “서술은 자신의 내면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는 것을 읽으며 나는 상당히 정확한 포착이라고 생각했다. 이건 이제까지의 거의 모든 작가가 주장해왔던 것(서술이 자신의 내면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다면 서술을 하는 작가의 실력을 의심해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문장일 수도 있으나, 예를 들어 표정이 없는 명함판 사진을 보고 해당인물에 대하여 아무리 현미경적 서술을 시도해봤자 인물이 사진을 찍으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낼 수는 없을 것이기에 나는 양선형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누구나의 머릿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어이없는 환상이나 허무맹랑한 상상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들을 작품의 소재로 쓰지 말라는 법도 없다. 오직 상상, 공상, 망상 속에서만 잔혹한 방법으로 죽임을 당해 까마귀가 눈알까지 파먹은 다음인데도 다시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몸으로 등장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그걸 진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뭐 물론 당연히 엽기이긴 하다. 게다가 양선형의 작품 몇 개는 묘사가 위생적으로 말해 더럽거나, 잔혹한 화면이 떠올라 팍 책을 덮을 생각까지 하게 만들기까지 하니 엽기는 엽기고, 아시는 분은 다 아시는 것처럼 마음 약한 나는 이런 거 싫어해서 읽기가 퍽 곤란했다.
 작품들을 읽어나가면서 조금 걱정이 들었다. 자신이 경험해보지 않았거나, 경험은 했으되 그것을 확대 변주하며 오직 뇌 안에서 새로이 담론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도대체 언제까지,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작품 속에 생활이 들어있지 않은 상태로 작가로서의 생명은 얼마나 이어갈 수 있을까가 그랬다. 그러나 쓸데없는 걱정. 2017년 작품 둘, <감상 소설>과 <현상 소설>에 접어들면 당연히 정상적 삶을 노래하지는 않지만 작품의 틀은 상당히 보통의 삶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감상 소설>에서는 보위부에 의하여 B급 내란 음모 혐의로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퇴락한 교도소에서 출감한 정치범, <현상 소설>에서는 퇴락한 바닷가 펜션에 놀러와 하룻밤 만족스러운 사랑을 나눈 젊은 여자와 남자. 물론 마지막까지도 양선형은 사람, 등장인물들이 진짜로 행위한 내용이 아니라 등장인물 또는 작가의 머릿속에서 만발하게 피어난 상상/환상/환각 속 행위가 주된 내용이긴 하지만. 이렇게 작가는 조금씩 변해가리라. 그리하여 언젠가는 지금보다 훨씬 세련된 한 장르를 만들어내 이이를 추종하는 한 무리의 후배들이 생겨날지 누가 알리. 언젠가는. 어쩌면.
 작가의 나이 이제 서른. 앞으로 무궁한 가능성을 가졌다는 거 하나로도 정말 질투할 시절을 보내고 있다는 걸 작가 본인은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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