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도시 아가씨의 아주 우아한 시골 생활 민음사 모던 클래식 19
레이철 커스크 지음, 김소연 옮김 / 민음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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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원래 제목은 <The Country Life>, 그냥 <시골 생활>이면 된다. 앞에서 ‘시골 생활’을 꾸며주는 ‘어느 도시 아가씨의 아주 우아한’이란 형용구는 말짱 필요 없다. 촌스러운 제목 <시골 생활>만 가지고도 1998년에 서머싯 몸 상을 받은 작품이다. 위키 백과를 읽어보면 이 책은 스텔라 기번스의 <춥지만 편안한 농장 Cold Comfort Farm>과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에 영향을 받아 쓴 작품이라고 한다. 책의 뒤표지에 보면 《뉴스데이》라는 매체가 “현대판 <제인 에어>. 더 이상 시골 생활은 우울하지 않다.”라고 평을 했다는데, 이 사람들 혹시 위키 백과 보고 쓴 거 아냐? 레이철 커스크가 이 책을 쓰고자 했을 때부터 코미디 작품을 염두에 두었음이 분명할 정도로 곳곳에 비록 폭소를 터뜨리게 하지는 않지만 재미있는 표현들을 묻어놓고 있다. 일인칭 관찰사 시점으로 주인공 ‘나’의 이름은 대담하게 자신이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20세기 소설가 스텔라 기번스를 그대로 가져다 써서 ‘스텔라 벤슨’으로 했다. 스물아홉 살의 똑똑하고 학위도 있고, 법무관이라는, 아니면 그와 유사한 직업과 직위에 재직하고 있었던 인물이다. 뛰어나게 빼어난 외모는 아니지만 어디 가서 빠진다는 소리 들어본 적 없는 외모를 가진 이이가 선택한 가장 불행한 행위는, 아마, 모르긴 몰라도 자신을 사랑하고 온순한 성격을 지녔으며 높은 공부도 한 에드워드와 결혼을 해버린 일인 거 같다. 잘 읽어보시라. 에드워드는 나를 사랑했지만, 내가 사랑했다는 얘기는 없다. 사랑한 것 같았다. 또는, 사랑했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수준. 뭐 새삼스런 것은 아니다. 세상의 많은 부부가 둘 다 서로 미칠 듯 사랑해 결혼하는 건 아니니까. 그냥 나는 저이를 사랑하고 있다, 라고 스스로를 최면상태에 빠뜨리고, 몽롱하게 취해서 결혼을 해버리고, 살다가, 차도 사고, 애(들)도 낳고, 조금 더 큰 전셋집으로 옮기다가 드디어 양쪽 허리에 한 주먹씩의 비계가 생길 때쯤 내 집 장만도 하면서 그냥 그렇게 한 인생 사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게 꼭 나쁜 것도 아니고. 다만 그러기 위해선 부부가 동시에 소위 ‘무난한’ 성격이어야 하겠지만.
  이 책의 주인공 스텔라 벤슨이 시청 호적계에서 결혼을 하고, 로마로 신혼여행을 갔을 때 일은 벌어졌다. 테라스가 있는 고층 호텔. 스위트룸인지 아닌지는 책에 나와 있지 않지만 테라스가 있다면 숙박비가 가볍지는 않았을 듯. 양가 부모와 친구들 가운데 스텔라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는 아무도 몰랐는데, 신혼여행 도중에 스텔라가 테라스에서 떨어졌다는 소식으로만 전해졌다. 그럼에도 살아 있다고? 그렇다. 떨어지기는 했지만 아스팔트와 충돌한 건 아니고 쇠로 만든 테라스 기둥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가 구조되었다는 얘기. 역시 아무도 모르는 이유이며, 책을 끝까지 다 읽어도 독자마저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 길로 스텔라는 짐을 꾸려 에드워드 혼자 로마에 남겨둔 채 혼자 런던 행 비행기에 올랐으며, 스텔라 부모의 명의로 된 집에 도착해 다음과 같은 글을 쓴다.
  “파콰슨 씨에게. 지금 이 순간부터 퇴사함을 알려드리기 위해 이 편지를 씁니다. 이로 인해 불거질 모든 불편한 일들에 심심한 사과를 표합니다. 스텔라 벤슨 드림.”
  직장을 때려치운 거다. 이어서 부모에게도 한 장.
  “아버지, 어머니께. (중략) 오랫동안 불행했어요. (중략) 어머니 아버지 탓도 많다고는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제는 만나지 않는 편이 서로에게 공평할 것이라고, 아니 제게 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 떠납니다. (후략)
  마지막으로 에드워드에게도 한 장.
  “휴가 잘 보냈나요? (중략) 행복하게 잘 살길 바랍니다. 스텔라가. 추신. 이 편지를 읽는 당신 얼굴이 눈에 선하군요.”
  그리하여 이 ‘어느 도시 아가씨’가 아니고 아직 이혼신고가 끝나지 않은 ‘어느 도시 유부녀’는 신문에 실린 짧은 광고 하나만 주머니에 넣고, 트렁크에 옷 몇 벌과 신발 두 켤레, 기타 자질구레한 것들만 챙겨 런던을 떠나 버클리 인근의 시골마을 힐탑으로 떠나면서 좌충우돌의 코미디를 시작한다. 이이의 새로운 직업은 매든 씨네 막내아들 마틴의 오-페어. 오-페어au pair는 원래대로 하면 외국가정에 입주하여 아이 돌보기 등과 집안 막일을 하면서 아주 약간의 보수를 받으며 언어를 배우는 (보통) 젊은 여자를 일컫는 말이다. 스텔라는 영국 여자니까 사실 오-페어라기보다 일종의 ‘보모’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그런데, 사실 이 내용은 모르고 읽어야 더 재미있지만, 스텔라가 하는 짓을 보면 뭔가 나사가 반쯤 풀려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면 대단히 충동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든지. 저렇게 직장 상사, 부모, 남편에게 세상이 끝난 것처럼 이별 편지를 쓰고 이제 비록 산간벽지는 아닐지언정 시골 촌구석으로 세상의 눈을 피해 평생을 고독하게 살려 하는 사람이 오-페어를 원하는 고용인이 원하는 조건마저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말이지. 고용인은 처음부터, 오-페어는 양쪽 다리를 다 쓰지 못하는 장애인 막내아들의 생활을 도와주어야 하며, 일환으로 일주일에 두세 번 가야하는 장애인 센터에 데리고 다녀야 하기 때문에 운전면허가 필수요건이었음에도 자신이 운전면허도 없고 자동차 운전을 해본 경험조차 없다는 걸 깜빡 잊어버린다. 물론 이것 때문에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두 장chapter 생기기는 하지만 그리 개운하지는 않다. 게다가 런던을 출발하기 전에 시골로 거처를 옮기면 돈은 하나도 필요하지 않을 거라 생각해 수표책을 그냥 두고 왔다는 것도 스물아홉, 우리나라 나이로 서른이나 먹은 사람이 할 짓이며, 그런 생각을 할 수준이냐고. 매든 저택에 머문 이후 며칠이 지나도 빨래를 어디서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아무 생각 없고, 연탄을 때지 않는 오랜 숙소에 사람의 피를 노리는 아주 작은 곤충들이 서식할 수 있다는 짐작도 못하며, 뜨거운 햇볕이 피부를 지글지글 구워버릴 때까지 뙤약볕 아래에서 낮잠을 잘 수 있겠어? 자, 여기에서 독자들은 양해를 하자. 이게 다 날 때부터 도시 사람으로 자란 주인공이 시골 또는 자연에 관해 완전히 무식했다고 여기도록 노력해야 하리라. 깨끗하게 내리 쬐는 태양 아래 한 쪽으로 걸어가다가 몸의 왼쪽만 2도 화상을 입어 분홍색으로 부풀어 오르게 된 런던 처자를 보고 그냥 웃어야 하지, 넌 그것도 몰랐냐고 타박을 하면 이 책을 읽는 재미는 반 아래로 떨어지고 마니까.
  시골 부르주아 집에 일종의 하인으로 취직한 도시 인텔리겐치아. 저택엔 완고해보이지만 순진한 구석도 있고 마음도 넉넉할 것 같기도 한 가장 매든 씨, 피어스. 매사 신경질적이고 깐깐하며 완고해 보이는 것은 물론 사사건건 은근히 ‘나’ 스텔라와 신경전을 벌이는 매든 부인, 파멜라. 이들의 두 자매와 두 형제. 그리고 가장 중요한 ‘나’가 삶의 매사를 도와주어야 하는, 약간 삐딱해 보이는 성격을 가진 마틴. 이들 시골 부자를 바라보는 동네사람들의 지극히 곱지 않은 눈길과 부자와 유력자 사이의 결코 끊이지 않는 어처구니없는 비방, 이것들이 다 웃음의 한 소재로 빠짐없이 등장한다. 그러나 처음에 말했듯이 포복절도나 박장대소하는 웃음이 아니라 유머 코드로 문득, 문득 드러나기 때문에 더욱 재미를 느낄 수 있으리. 물론 독자들의 필독서 까지는 멀고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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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치는 소년 민음 오늘의 시인 총서 8
김종삼 지음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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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을 열고 첫 번째 나오는 시 <물통>을 읽는 순간, 아, 40년 만에 이 시집을 다시 읽어보는구나, 라고 영탄한다.



  희미한
  풍금 소리가
  툭 툭 끊어지고
  있었다

  그 동안 무엇을 하였느냐는 물음에 대해

  다름 아닌 인간을 찾아다니며 물 몇 통 길어다 준 일밖에 없다고

  머나먼 광야의 한복판 얕은
  하늘 밑으로
  영롱한 날빛으로
  하여금 따우에선   (전문)



  단박에 알아챘다. 제대로 된 문장은 처음 네 줄, “희미한 풍금소리가 툭 툭 끊어지고 있었다”뿐. 독자는 다음의 말을 기다리고 있다가 난데없이 “얕은 하늘 밑으로 영롱한 날빛으로 하여금 땅 위에서”, 다음에 뭐가 어떻게 됐는지 오리무중 속으로 유영해 들어가게 만들어버린다. 이런 낯선 표현을 나는 김종삼을 통해 처음 읽어봤으며, 이제 그리고 40년이 흘러도 당시에 느꼈던 낯섦을 단박에 알아차리는 것이다. 다름 아닌, 별다를 것 없는 인간들을 찾아다니면서 기껏해야 물 몇 통을 길어다 준 일밖에 없는 물통을 노래하며 시인은 어떻게 그리고 왜 희미한 풍금소리가 툭툭 끊어지는 청각자극을 느낄 수 있었을까. 그것뿐인가. 평생, 어딘가에 부딪혀 깨져 쓰지 못하게 될 때까지 우물가에서 마당이나 부엌까지 왕복운동만 했을 물통의 어디에서, 어떤 모습에서 머나먼 광야의 한복판 얕은 하늘 밑에 영롱한 날빛까지 확장시켜 연상할 수 있었을까. 그것도 그건데, 그래서 땅 위에서 어떻게 됐다고? 시를 이리 쪼개 감상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지만 그냥 읽어가면서, 결국엔 한 문장이 완성되지 못하는 여운을 그대로 체감해보는 것도 아주 멋진 일이 된다는 것, 그게 스무 살 구상유취의 청년에게는 놀랄만한 일이었나 보다.
  민음사의 “오늘의 시인 총서” 시리즈가 출발할 당시의 나는 수많은 가난한 학생 중의 한 명이었고, 그리하여 시집 한 권을 사려면 먼저 도서관에서 시집을 읽어보고 꼭 사서 생각날 때마다 읽어볼 시집만 구입해야 했던 시절. 당시 그런 절차에 입각해 산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와 황동규의 <三南에 내리는 눈>, 정호승의 <서울의 예수>, 황지우의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가 지금도 책꽂이에 꽂혀있....는줄 알았는데, 김수영은 나중에 전집을 사면서 누구한테 준 모양이다. 하여튼 당시에 김종삼의 시집은 내게 구입 대상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건 혹시 유신과 한국적민주주의 아래에서 허덕이던 스무 살 청년의 시각에서 볼 때 쓸데없이 여기저기서 돋는 서양취향, 예컨대 표제시 <북 치는 소년>에 쓰인 것처럼 “가난한 아희에게 온 / 서양 나라에서 온 /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 같은 것 때문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당시의 젊은이들은 김종삼 같은 순수 서정시를 향해 또렷한 논리를 대며, 지금 한가하게 음풍농월이나 하고 있을 때인가, 이런 장르에 종사하는 시인, 작가들을 째려보았을, 용감하지만 야만의 시절이었다.
  세월은 겁난다. 이제 “좀 가노라니까 / 낭떠러지 쪽으로 / 큰 유리로 만든 자그만 스카이라운지가 비탈지었다. / 언어에 지장을 일으키는 / 난쟁이 화가 로트렉 씨가 / 화를 내고 있었다.”는 시 <샹뼁>의 제목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를 한 없이 궁리하다가 불어 '샹파뉴Champagne'를 일본 사람들이 “シャンペン”이라 쓰는데 우리말 음가가 바로 ‘샹뼁’인 걸 알고는 그저 한 번 씩 웃을 뿐이니. 그러나 아직도 시 안에 유럽의 유명한 음악가, 화가, 소설가, 시인들이 무작정 등장하는 걸 읽으며, 그래서 뭐 어쩌라고, 라고 반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유럽인이 등장해서가 아니라 시에 관해 조예가 없는 내가 읽기로 전혀 어울리지 않아서 그런 거다. 이이는 시인으로 출발 자체가 포스트 모던이었던 것 같다. 해설을 쓴 황동규는 처음 발표한 시를 <園丁1>이라 했는데 연보를 보면 나이 서른넷에 《현대예술》에 <돌각담2>을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등단했다고 한다. 그래서 데뷔작인 <돌각담>을 읽어보자.


  광막한지대이다기울기
  시작했다잠시꺼밋했다
  십자형의칼이바로꽃혔
  다견고하고자그마했다
  흰옷포기가포겨놓였다
  돌담이무너졌다다시쌓
  았다쌓았다쌓았다돌각
  담이쌓이고바람이자고
  틈을타凍昏3이잦아들었
  다포겨놓이던세번째가
  비었다   (전문)


  문장과 문법과 구두점을 포기하고 한 줄에 열 개의 글자를 나열해 시를 썼다. 글자 하나하나가 다 돌담을 만든 돌로 기능하는 것 같은 시각 효과가 돋보인다. 아쉬운 건 마지막, 그러니까 제일 아래 돌이 겨우 세 개밖에 없어 전체적 균형이 잡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 차라리 처음 줄을 세 글자로 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그러나 김종삼의 초기 시들은 데뷔 시 <돌각담>과 달리 포스트모던 하고는 거리가 있다. 황동규가 해설에서 언급한 것처럼 어린 시절의 기억 같은 것을 많이 썼다고 하는데 난 그게 더 좋다. 예를 들어 <묵화> 같은 노래.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전문)


  얼마나 좋은가. 짧기도 하고. 김종삼의 시는 대개 간략한 편이다. 시인 전봉래는 1957년에 김광림과 함께 3인 공동시집을 낸 전봉건의 친형으로 남은 시는 딱 한 편밖에 없는 기인인데, 김종삼과 같이 이북에서 월남을 해 한국전쟁이 한창인 1951년에 부산 피난지에서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찬란한 이 세기에 이 세상을 떠나고 싶지는 않았소. 그러나 다만 정확하고 청백하게 살기 위하여 미소로서 죽음을 맞으리다. 바흐의 음악이 흐르고 있소.”라는 멋부린 유서를 남긴다. 이이를 위하여 부제를 ‘全鳳來 형에게’ 로 단 짧은 시 <G 마이나>를 썼다. 왜 시가 ‘사단조’가 아니라 ‘G 마이나’인지는 굳이 따지지 말자. 바흐를 틀어놓고 죽은 시인.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바흐 가운데 사단조 음악은 사실 없지만.4



  물
  닿은 곳


  神恙5
  구름 밑


  그늘이 앉고


  묘연한
  옛
  G 마이나  (전문)



  나는 이 시가 시인의 초기 수줍고 순수한 시보다 더 좋지 않다. 폼이 좀 난다는 측면에선 모르겠지만 이 시를 제대로 감상하자면 여간해 알기 힘든 전봉래 시인을 검색해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확인한 다음에 읽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어림도 없지 않은가.
  여러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이 시집을 읽는 동안 나는 자잘한 재미를 숨길 수 없었다. 같은 시집을 40년 만에 읽는 일. 그것도 예전에 읽었는지 까마득하게 몰랐다가 시집을 열어 첫 번째로 나오는 시로 단박에 먼먼 기억을 소환하는 일이 어찌 재미있지 않을까. 확실하게 안 것은, 김종삼 시인과 화해하기 위해 몇 십 년 세월이 필요했다는 점. 참으로 세상은 오래 살고 봐야할 일이다.


 


 

  1. 정원사를 다른 말로 '원정'이라고 한답니다. 가축을 먹을 목적으로 도살하는 사람을 한때는 백정白丁이라 불렀듯이 뒤에 정丁자가 붙는 말은 해당 일을 하는 사람을 낮추어 부르는 것이라 더 이상은 쓰여지지 않을 단어 같습니다.
  2. ‘돌담’ 돌로 쌓은 담을 일컫는 이북 말입니다.
  3. 사전에 없는 말입니다. 시인이 만든 시어 같습니다. 얼 동, 저녁 혼. 한 겨울의 황혼무렵을 노래한 것 같습니다. 시어를 만드는데는 암만해도 표의문자인 한자가 표음문자인 우리말보다 훨씬 유리하지 않을까요?
  4. 역시 G-minor, 사단조 하면 바흐가 아니라 모차르트가 생각납니다. 교향곡 25번과 40번, 피아노 협주곡 20, 24번, 현악5중주 K.516 등등.
  5.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습니다. 사전에 없는 단어입니다. 신神은 귀신, 하느님을 뜻하고 양恙은 근심이나 병을 말하는데, 신의 근심인지, 아니면 다음 줄에 등장하는 구름을 신의 근심으로 비유한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습니다만... 시인 전봉래의 죽음이 하늘의 근심이라는 뉘앙스의 시어는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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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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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가 토카르추크. 2018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뉴스를 통해 처음 들은 작가. 당시 기사엔 시인이라고 소개했던 것 같다. 외국 시는 읽지 않는 습관이 있어 관심을 끊었는데 의외로 이이의 소설 몇 권이 시중의 종이 값을 올려놓아 찾아 읽게 됐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흥미로운 책이다. 책은 ‘태고의 시간’, ‘게노베파의 시간’ ‘미시아의 천사의 시간’ 같은 짤막한 에피소드들이 작은 스테인드글라스 같은 다양한 색채를 주면서 오밀조밀하게 모여 폴란드의 작은 마을이 1910년대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의 격랑을 여자들의 계보를 통해 그리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옮긴이의 말에서 본 것도 같은데) 마르케스 작품의 주요 무대가 되는 마콘도 마을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책을 읽는 중에 저절로 들게 된다. 비단 작품의 무대뿐만 아니라 신, 천사, 심지어 귀신과 이를테면 가구 같은 사물의 정령까지 동원하는 모습이 라틴 아메리카의 환상문학, 붐 문학적 요소를 많이 품고 있는 것까지 그렇다. 편집도 널럴하고 자그마하고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촘촘히 나열되고, 표현의 방식까지 재미있어 마음먹으면 휴일 하루에 책 다 읽고 독후감까지 쓸 수 있다.
  위에서 여자들의 계보를 언급했던 바, 제일 먼저 거론이 되는 이가 게노베파다. 서양의 옛 이야기 속에서 게노베파는 지금으로 보면 독일 땅의 영주 지크프리트의 아내로 남편이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면서 아내의 안위를 위해 남겨놓은 심복 골로의 위협과 계략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정절을 지킨 여인으로 이름이 높다. 이름을 러시아식으로 하면 미하우 유제포비치 니에비에스키인 게노베파의 남편이자 물방앗간 주인 역시 러시아 군대에 의하여 강제징집 당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는데, 토카르추크가 이야기하듯 신의 직업이 일종의 회계사 비슷한지라 한 사람을 인출해 가면 공백을 메우기 위해 다른 한 명을 채워 넣는데 게으름이 없어 게노베파가 임신을 한 상태였다. 그래서 다음 해에 태어나는 생명이 ‘미시아’. 미시아가 성장해 옆의 옆집에 사는 의욕적인 젊은이 파베우 보스키와 결혼해 딸 넷을 두고, 이중 맏이 아델카가 모든 태고 마을의 추억과 땅과 집을 두고 떠남으로 이야기를 마감하게 된다.
  미하우 니에비에스키 씨, 사실상 이야기의 주인공인 미시아의 아버지의 성姓 니에비에스키는 폴란드 말로 ‘하늘의’ 또는 ‘천국의’라는 뜻의 형용사라고 한다. 발음이 쉽지 않아 애먹었는데, 중간쯤부터 이 이름을 ‘니 애비 애 새끼’로 발음하니 쉽게 읽혔다. 그저 참고만 하시라. 하여간 니에비에스키 씨는 세계대전에 참전해 (태고 마을 사람들은 이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살아있기는 하지만 전쟁이 끝나도 돌아오질 않는 거다. 그 사이에 게노베파는 미시아를 낳고, 미시아가 벌써 유치원에 들어갈 나이가 됐는데도. 폴란드의 게노베파는 옛이야기 속 게노베파와 조금, 아주 조금 달라 물방앗간에 아르바이트로 임시 채용했던 잘 생기고 젊은 유대인 엘리와 서로 연정을 품게 된다.연정은 원래 파박! 하고 불꽃처럼 오는 법. 곧이어 본격적으로 후다닥 옷을 벗고 베드 씬을 벌이려는 순간 게노베파라는 이름값을 하기 위해 엘리에게 남편이 죽었다는 확실한 소식을 듣기 전에는 자신의 몸을 만지지 않을 것임을 유대 신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라고 요구하니, 다 된 줄 알았던 엘리의 몸과 마음이 어땠겠는가. 그런데 남편이 돌아왔다. 저 멀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 폴란드까지 걸어오느라 일 년이 걸렸단다. 나 참. 이 정도면 작가 토카르추크의 뻥치는 스케일도 보통을 넘는다. 하여간 집에 돌아온 미시아의 아빠 미하우. 게노베파가 남편에게 처음 한 말이, “미하우, 그 어떤 남자도 날 건드리지 않았어요.” 그래, 맞는 말이긴 하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흘러 1928년 11월에 게노베파가 아들 이지도르를 낳았을 때, 유대인 총각 엘리는 게노베파에게 자기 아이라고 주장을 했다나?
  게노베파가 새댁이었을 때, 한 겨울에 어느 맨발의 거지 소녀에게 코페이카 동전을 하나 준 적이 있어, 이 아이가 이름을 ‘크워스카’라고 했고, 책에서 상당히 중요한 배역을 맡는다. 점점 나이가 들어 10대 중반부터는 태고 마을의 거의 유일한 창녀로 이름을 드높이면서도 나와 당신이 서로 동등하니 내가 당신 밑에 누워야 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며 결코 누워서 행위 하지 않았다는 전설의 주인공이다. 그러다가 결국 임신을 해 만삭이 되었을 때, 태고 마을의 서쪽에 위치한 성castle의 여주인 포피엘스카야 부인이 자기가 주인인 보호소에서 아이를 낳으라고 권하며 이 지역의 모든 땅과 숲이 자기 소유라고 하자 코웃음을 탁 치며 “전부 당신 거라고요? 작고 말라빠진 가여운 암캐 같으니라고……” 대꾸해 쫓겨나 다 허물어져 지붕도 없는 폐가에서 나은 아들은 ‘조용한 탄생’ 영어로 still born, 다시 한자어로 하면 사산死産하고 만다. 이렇게 주인공 주변의 여인들이 아들을 낳으면 사산을 하거나 게노베파의 아들 이지도르처럼 뇌수종이라 조만간 죽을 팔자임을 판정을 받는 등 심각한 장애를 갖고 태어난다. 그래 태고 마을의 주인공 명맥은 저절로 여자들에 의하여 이어지는 것. 이후 크워스카는 앞날을 내다보는 신통력을 갖게 되고, 숲과 자연에서 이루어지는 신비와 섭리 같은 것에 달통하는데 또 한 명의 문제의 여인 ‘루타’라는 딸도 낳는다.
  이렇게 게노베파-크워스카 세대가 미시아-루타의 세대로 이어지며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과 유대인 학살, 잠깐의 황금기와 사회주의 폴란드의 경제적 궁핍에 이어 바웬사에 의한 자유노조 혁명과 민주화까지 태고라는 이름의 유럽 변두리 국가의 작은 마을의 흥망이 환상적 리얼리즘, 내 식대로 이야기하면 아몰랑주의적 기법으로 묘사되어 있다. 물론 독후감에서는 환상적 리얼리즘 식의 묘사에 관해서는 별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만일 이 요소를 뺀다면 토카르추크의 작품을 읽는 즐거움을 반쯤 잃어버릴 것은 분명하다. 사회주의 정부에 의하여 상속자 포피엘스키의 성과 토지와 숲이 국유화되는 과정에서도 결코 멈추지 않았던 ‘이그니스 파투스’라는, 팔면체 주사위로 하는 '한 명의 게이머를 위한 유익한 게임' 같은 것도 언급하지 않았다. 직접 읽어서 알아보십사 하는 의미로.
  다른 거 다 빼고,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라잖은가. 이름값만 갖고도 한 권 쯤은 읽을 만하다. 그 한 권을 읽고 나서 작가가 쓴 다른 책을 찾아볼까, 생각해보는 것은 당신의 선택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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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0-01-28 13: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몰랑주의‘의 작품은 읽어본적이 없어 이 작품은 자꾸 피하게 되지만 폴스타프님의 리뷰는 참 읽고 싶게 만드네요.

Falstaff 2020-01-28 13:56   좋아요 1 | URL
ㅎㅎㅎ 말씀만 들어도 황감합니다.
재미있는 책입니다. 근데 선뜻 권하지는 못할 거 같습니다. ^^;;
 
고양이 눈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15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차은정 옮김 / 민음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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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네 번째 읽은 애트우드. 이 가운데 가장 재미가 ‘덜’했다. 애트우드의 작품 출간 순으로 네 권을 나열하면 <시녀 이야기>1985, <고양이 눈>1988, <도둑 신부>1993, <눈 먼 암살자>2000. 마거릿 애트우드의 정체성은 페미니스트이다. 기본적으로 페미니즘, 그러나 전투적 여성주의 운동가들의 시선으로 보면 여전히 개선시키고 싶어 할 대상일 정도이며, 만일 자신을 여성주의 운동의 대표 역할로 내세운다면 차라리 죽고 말겠다고, 주인공인 화자 일레인의 입을 통해 고백하는 수준이다. 이 책이 비록 여성주의에 기초하여 씌었으며, 화자 ‘나’가 소설가가 아닌 화가임에도 독자는 책을 읽으면서 다분히 자기고백적인 작품으로 읽을 수 있다. ‘나’ 일레인은 2차 세계대전 중에 원조 캠핑카인 스터드베이커 차를 몰고 동북부 캐나다 지역을 유랑하는 곤충학자 슬하의 남매 가운데 동생이다. 전쟁이 끝난 후 아버지가 토론토에 있는 대학의 교수로 임용이 되자 그곳에 정착한다. 화자는 토론토의 유년시절 부터 다 자라 벤쿠버로 독립해 옮길 때까지를 추억하는 형식으로 이야기를 꾸려나간다. 애트우드 자신이 유년기에 주인공과 비슷하게 북부 캐나다를 유랑하다가 겨울이 되면 도시로 돌아오는 생활을 했었다고 한다.
  ‘나’ 일레인은 지금 태평양을 면한 브리티시컬럼비아에 살고 있는 노년, 또는 적어도 갱년기의 성공한 화가. 그래 자신의 젊은 시절을 보낸 토론토의 미술 기획자가 화가의 고향으로 알려진 토론토에서 회고전을 하고자 하니 일차 왕림해주시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여 토론토 방문을 결심해, 전남편 존의 작업실에서 프랑스 식 이불인 듀베로 몸을 둘둘 감고 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아, 전남편의 작업실이라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하실 거 없다. 한 때는 온갖 식기와 가전제품이 상대방의 얼굴과 몸통을 향해 비행한 적이 있었지만 아메리카 대륙의 극동과 극서지방이라는 거리와 그들 사이의 혈육으로 곧 의사자격증을 취득할 예정인 세라가 있어 서로의 증오는 이미 친구 관계 수준의 우정으로 순화되었으며, 예술가였던 존은 직업을 괴기영화 특수 분장으로 바꿔 촬영장으로 장기 출장 중이라 작업실이 비었기 때문이다. 물론 토론토의 엄청나게 비싼 호텔비도 한 몫을 했고. 그러나 일레인의 유년시절과 소녀시대, 청춘시대를 보낸 토론토에 다시 도착하고 보니 지난 시절의 기억이 ‘나’를 덮쳐 온갖 상념과 허상과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고양이 눈’이 무엇일까. 우리나라에서도 꼬마들이 겨울이면 가지고 놀던 유리구슬의 한 종류다. 투명한 유리 안에 빨강, 노랑, 초록, 파랑 꽃잎이 들어가 있는 구슬로 구슬을 들고 돌릴 때마다 안의 문양이 변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 1960년대까지는 상당히 드물었고 70년대 초엔 흔히 볼 수 있었는데 아마 그걸 ‘사방 구슬’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너무 오래된 이야기라 긴가민가하다.) ‘나’ 일레인이 자신의 작은 가방 속에 보물처럼 예쁜 문양의 고양이 눈을 하나 담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가, 나중에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 지하실을 정리하다가, 부모의 집을 떠나 수십 년이 지난 후 다시 발견하게 되는 유리구슬로 ‘나’ 또는 ‘나’라고 읽는 애트우드의 유년시절을 대표하는 단어 정도로 생각하면 될 듯하다.
  대개 유년시절을 그리는 작품을 보면 어렴풋한 추억 속의 아련한 파편들이 쏟아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애트우드는 그렇지 않다. 책 속에는 네 명의 어린 소녀가 등장한다. 나와 캐럴은 동갑내기이고, 코딜리어와 그레이스는 한 살 위다. 어린 시절의 한 살이란 매우 큰 차이가 날 수밖에 없어서 네 명의 우정과 권력은 가장 늦게 합류한 코딜리어의 정치권 안으로 수렴을 하게 되고, 권력을 쥐면 또 그것을 사용하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인지라 코딜리어는 이름과 달리1 ‘나’ 일레인을 왕따 시키기를 즐겨하는 습관이 생긴다. 인생의 황혼에 이르러 생각해보니 코딜리어의 언행은 거의 전부 어른을 흉내 낸 것에 불과했지만 당하는 일레인의 입장에서 따돌림과 불공정한 행위는 심각한 상처를 남길 수밖에 없었을 터였으며, 실제로도 그랬다.
  인생은 돌고 도는 것이라서 고등학교에 진학하니 코딜리어는 한 번 월반을 하고 북쪽에 있는 사립학교에 입학했음에도 다시 일레인이 다니는 학교의 같은 학년으로 전학을 오게 된다. 사립학교에서 학교의 표상인 박쥐 문양에다 남자의 생식기를 그려놓은 죄목으로 퇴학을 당했다고 주장한다. 알고 보니 와중에 유급까지 당해 그동안 공부 잘 해 월반을 한 일레인과 같은 학교, 같은 학년이 된 것. 이거 <도둑 신부>에서 본 거 같은 구도다. 예전에 자신을 괴롭히고 인생마저 왕창 망가뜨렸던 친구가 몇 년 후 다시 눈앞에 등장하는 거. <도둑 신부>와 많이는 아니고 조금쯤 유사하게 일레인은 역전에 성공하여 원래 마음이 약했던 코딜리어가 일레인에게 고개를 숙이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해가 감에 따라 거의 완전한 실패자의 길을 가게 된다.
  그 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식물에 수재가 있던 일레인이 학문을 포기하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해 그림을 공부하는 과정, 애정 행각을 벌이고, 존을 만나고, 딸을 낳고, 결혼을 하고 급기야 온갖 회한을 품은 채 토론토를 떠나기까지, 한 똑똑하고 성공한 여자의 일생을 그린 소설이다. 물론 토론토를 뜬 이후의 삶도 서술을 하지만 분량도 많지 않고 더 중요하지도 않다.
  살면서 주인공과 비슷한 회한이 하나 없는 사람 몇이나 되겠는가. 다 그게 그거지. 배우 엄앵란 씨 말마따나 201호나 202호나. 하지만 작가가 애트우드면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이이가 만든 등장인물은 회한이 있어도, 슬픔과 절망을 겪어도 심하게 앓는다. 그래 네 명의 초등학교 동창 가운데 끝까지 조명을 받는 두 친구, 일레인과 코딜리어로 하여금 기어이 손목까지 긋게 만든다. 내가 이상한 건가? 난 이런 오버 액션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살면서 그런 거 생각 한 번 안 해본 사람 있으면 손 들어보시라. 그리고 진짜로 면도칼로 팔목 그어보신 분, 천국행 직통 약물을 자셔본 분이 계시면 또 손 들어보시라. 거봐라. 대부분의 사람은 그저 생각만 한 번 해보는 정도이지 않은가. 왜 애트우드의 소설에서는 꼭 끝까지 가야 하는 건지.
 또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주인공의 전남편 존이 침실을 광택 나는 검은색으로 페인트  칠을 해놓고 “내가 이사하고 나서 저 벽 색을 바꾸려고 하면 페인트칠을 열다섯 번은 해야 할 걸.”이라고 말하는데, <도둑 신부>에서 팜-파탈, 러시아 백작부인의 딸이자 폴란드 계 유대인이자, 동유럽 출신 집시의 후예이자, 전부 다이기도 하고, 아무것도 아니기도 한 지니아의 초대로 주인공의 한 명인 토니가 참석했던 파티가 열린 아파트의 검은 페인트와, 파티를 주최한 아파트 주인의 대사가 똑같다. 아무리 자기 책이라도 이런 건 한 번만 써먹어야지 자꾸 반복하면 어디 되겠어? 부커 상 수상자에다가 늘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라고 하더라도 말이지.

  1. 사실 이건 각주를 달기도 좀 뭐한 것이 다들 아시다시피 ‘코딜리어’는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에서 착하고 아버지께 진심으로 효도하는 딸. 그러나 그의 속내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프랑스 왕한테 시집 간 것까지는 좋았지만 결국 도마 위에서 큰 도끼로 목이 뎅거덩 잘리고 마는 셋째 딸의 이름입니다. 이 책의 코딜리어도 두 언니한테는 찍소리도 못하고, 아빠를 되게 무서워 해서 아빠만 떴다하면 요실금 현상이 생길까 말까 할 정도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집에서는 말 한 마디 못하다가 밖에만 나가면 불쌍한 일레인에게 못된 짓을 하는 꼬마 악동입니다.
    이 아이의 부모에게는 딸만 셋 있는데 이 양반들이 셰익스피어의 사생팬들이라서 셋의 이름을 차례로 <겨울 이야기>의 퍼디타, <폭풍>의 미란다. 그리고 <리어 왕>의 코딜리아로 지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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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열린책들 세계문학 244
E. M. 포스터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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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연애소설. 무릇 소설의 꽃은 연애소설이라는데 나는 이의가 없다.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이야기라도.
 책 소개 글에도 나왔듯이 작품은 1913년에 시작해 1914년에 끝을 맺었지만 작가의 말에서 보듯 원고는 포스터의 책상 서랍 안에서 오랜 세월 동안 바싹 말라가다가 “성인들 간의 합의된 동성애에 관해서는 처벌하지 말 것을 권고한” 1957년의 ‘울펜든 권고’가 법제화된 1967년 이후에, 비로소 세상에 나와도 될까? 이제는 이 작품을 발간해도 여태 쌓아온 E.M. 포스터, 에드워드 모건 포스터의 명성이 진흙탕에 쑤셔 박히는 불행한 일이 벌어지지는 않겠지? 간을 보다가 그가 죽고 일 년이 지난 1971년에 이르러서야 세상의 빛을 보게 되는 작품이다.
 작가는 1879년에 태어나 퍼블릭스쿨을 거쳐 케임브리지 킹스칼리지를 졸업한 영국의 상류계급, 노동하지 않거나 변호사나 금융업 등의 특정 직업에 종사하는 새로운 신사계급으로 당연히 집안에 하인과 하녀를 수다하게 거느린 환경에서 자랐을 것이다. 이건 특별한 일이 아니다. 19세기에 출생한 거의 모든 작가들은, 작가가 되기 위해 필수 요소인 다독, 많은 책을 읽을 수 있는 신분에서만 나왔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니까. 그런데, 포스터보다 불과 1년 늦게 태어났으며 심지어 포스터와 같은 킹스칼리지 출신의 또 한 명의 영국 작가 래드클리프 홀1이 있다. 이 사람도 <모리스>와 유사한 주제의 <고독의 우물>을 써서, <모리스>를 쓴 시기와 비교해 동성애를 바라보는 시각에는 거의 변화가 없는 1928년 런던의 하늘 아래 붉은 불온 삐라처럼 자신의 작품을 살포하고 동성애를 다루었다는 죄목으로 ‘당당하게’ 출판금지 처분을 접수했다. 같은 해, 포스터보다 6년 늦게 태어난 D.H. 로렌스는 동성애는 아니지만 러브씬이 대단히 끔찍하다고 외설이라는 판정을 받아 필생의 역작 <채털리 부인의 연인> 역시 출판 금지의 월계관을 쓴다. 포스터는 자신의 문제작(이 될 수도 있었던) <모리스>를 세상의 법에 의거한 ‘자유로운 출판’을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가 자유롭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자신이 천국의 즐거움이 어떤 맛인가를 확인 한 다음 해에야 세상에 나오게 한 반면, 홀과 로렌스는 기존의 율법은 개나 물어가라고 외치면서 속세의 콘크리트 바닥에 자신의 몸을 내던졌다.
 물론 <모리스>가 대단히 아름다운 소설이라는 것에는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어느 연애소설이 그렇지 않을까 싶지만, 사실 연애소설의 초점은 외로움과 기다림과 고통을 어떻게 묘사하느냐는 것에 결판이 나고, 이 방면에 관해서 E.M. 포스터만큼 담백한 문장으로 절절하게, 말이 쉽지 어떻게 ‘담백한 문장으로 절절하게’ 만드느냐는 것인데, 그렇게 쓰는 작가는 별로 보지 못했다. 그것도 “잘 생겼고 건강하고 육체적 매력이 있고 정신적으로 둔하지만 사업능력이 있고 또 얼마간 속물”의 성향을 지닌 모리스 홀이 작품의 중후반까지 계속 유지하는 신사계급의 위선과 거만과 아집과 고정관념과 부의 약속을 물리치고 기꺼이 사랑을 좇아 하층 계급으로 스스로 편입한다는 점에서 포스터의 (상대적으로)진보적인 시각을 엿볼 수는 있지만 ― 그날 밤 내내 그의 몸은 알렉의 몸을 갈망했다. 그는 그 욕망에 <음탕함>이라는 간단한 이름을 붙이고, 자신의 직업, 가족, 친구들, 사회적 지위를 거기 맞세웠다. 이 목록에는 당연히 그의 의지도 포함시켜야 했다. 의지가 계급을 초월할 수 있다면 우리가 건설해 온 문명을 산산조각 날 것이기 때문이다 ― 사랑을 위해 계급과 문명마저 타파할 수 있다는 것은 단지 그의 작품 속에만 있는 바였으며, 작가는 작품의 출간을 포기, 또는 의도적으로 지연시킴으로 해서 자신의 진보적 운동성이 허구에 불과했음을 자인하게 된다. 이런 해석이 너무 가혹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비슷한 책을 발간하여 스스로의 정체성을 밝히고 작품 역시 영불해협을 건너, 대서양을 건너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영국 내 문화의 협소성을 극복하는데 기여한 다른 작가들과 대비가 되지 않을 수 없다. 포스터는 홀과 로렌스가 고통을 당하는 와중에 심정적으로는 당연히 그들을 지지했겠지만(포스터는 1949년 영국 왕실이 작위를 주고자 했으나 정중하게 사양한 이력이 있다) 나서서, 엄혹한 영국의 법정의 증언대에 서서 그들을 위해 자신의 소신을 밝힌 적이 있을까? 이건 내가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거다. 모르고, 또 의심이 들어.
 133쪽 부근에, 이미 모리스와의 사랑에 금이 가버린 클라이브 더럽, 모리스로 하여금 동성애의 즐거움으로 인도해놓고 자신은 다시 이성애의 벽 너머로 가버리면서 진정한 동성간의 사랑은 플라토닉 러브라는 개소리만 늘어놓는 개자식이 이미 마음속으로는 모리스를 떠났음에도 그걸 내색하지 못할 즈음, 그의 어머니 더럽 부인은 모리스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클라이브는 대신 여행을 해야 돼. 아메리카에 가야하고, 가능하다면 옛 대영 제국령에도 가야 해. 요즘에는 그게 필수코스처럼 굳어져 있으니.”
 “클라이브도 졸업 후에 여행을 가겠다고 해요. 저더러 같이 가자고 했어요.”
 E.M 포스터는 동성 간의 사랑을 위하여 계급과 문명 따위는 폭파해버릴 수 있어도 제국주의적 영토 확장, 식민지 수탈로 인한 서구 문명의 발전까지는 포기하지 못했다. 포스터는 이 작품을 써놓고 무려 46년이 지난 1960년, 서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영국과 프랑스 등 2차 대전 승전국의 식민지였던 나라들이 목숨을 걸고 독립투쟁을 벌이던 당시, 런던의 서재에 앉아 이 책에 관한 열 페이지 분량의 원고를 쓰면서도, 아직 출간되지 않은 자신의 작품에 결코 한 줄의 퇴고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이미 위에서 <모리스>가 좋은 연애소설이라는 것에는 동의했다. 그러나 책 속에서 드러나는 그의 식민주의적 세계관을 혐오하며, (다른 작가와 비교해)작가적 용기라고는 눈곱만큼도 발견할 수 없는 그의 행적을 비난할 수밖에 없다.



 


 

  1. <고독의 우물>을 쓴 용감한 래드클리프 홀은 여성입니다. 요즘 '여류작가'란 말을 썼다가 꾸짖는 댓글을 여러번 받아(왜요, 남류 독자님?) 젠더에 관계없이 그냥 '작가'라고 썼습니다. 독후감을 쓰고 다시 읽어보니까 1920년대에 동성애 소설을 쓴 (남자가 아닌)여자 작가라는 위상이 더욱 E.M. 포스터와 비교되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다. 그래 '여류'라고 다시 쓸까 말까, 하다가 그냥 내버려두었습니다. <고독의 우물>은 여성간의 동성애를 다룬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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