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긋는 남자 블루 컬렉션
카롤린 봉그랑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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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7년생 카롤린 봉그랑이 1992년에 출간했으니, 이때 이이의 나이가 책의 주인공 콩스탕스와 같은 스물다섯이렸다.

 

카롤린 봉그랑의 트위터 사진.


  원 제목은 <Le Souligneur>, 우리말로 하면 ‘밑줄 긋는 남자’가 아니고 그냥 <밑줄> 영어로 'Underline‘이다. 원래부터 넉넉한 가정에서 자란 우리의 콩스탕스는 부모가 이혼을 하고, 프랑스 사람들이 보기엔 완전하게 성인의 나이가 됐음에도 가끔 아버지로부터 생활비 명목으로 현금지원을 받으면서 넘쳐흐르지는 않지만 부족하지도 않은 삶을 살고 있는 젊은 아가씨. 평소엔 그냥 백수로 지내다가 가끔 잡지에 글을 팔아 돈을 얻기도 한다. 물론 친구도 있고 친구의 아들도 있지만 가장 가까운 가족은 ’레옹‘이란 이름의 플러시 천으로 된 장난감 당나귀다. 최대 길이가 1.2 미터 정도 되고, 잘 때 안고 자거나 가랑이 사이에 끼고 자면 좋긴 하다. 강아지나 남자처럼 스스로 온기를 뿜어내지는 못해 조금 불만이긴 하지만. 잡지에 글을 팔긴 해도 문학 방면엔 영 흥미도 없고, 제대로 읽어본 적도 없이 그냥 가리, 아자르, 시니발디, 보가트 등의 이름으로 소설을 써서 프랑스에서 유일하게 두 번 공쿠르 상을 타먹은 소설가만 애정하는 수준. 가리가 쓴 책이 겨우 서른한 권밖에 되질 않아서 이제 스물다섯 살에 불과한 내가 벌써 여섯 권을 읽었기 때문에 앞으로는 1년에 딱 한 권의 가리 책을 읽을 예정이다. 나이 쉰 살이면 몇 십 년에 걸친 가리 프로젝트도 끝날 터. 여태까지 살아온 날만큼만 더 살면 말이지.
  1992년. 그때도 파리의 예쁜 아가씨가 애인이 없을 확률은 별로 없었는데, 이 지극히 낮은 확률 안에 우리의 콩스탕스가 포함이 된다. 만일 근사한 남자만 있었어도 이 소설을 쓰지 않았을 텐데, 애인도 없고, 가리도 앞으로는 1년에 딱 한 권만 읽기로 작정을 해서 그냥 다른 소설책이나 한 권 읽어볼까, 하는 심정으로 동네 도서관에 들르면서 일은 벌어진다. 도서관에 들어 맨 먼저 만난 사람이 키 작고 비쩍 마르고 그냥 그렇게 생긴 사서, 지젤. 어째 ‘지젤’이라면 좀 늘씬하고 다리가 길며 우아한 목선을 했으면서도 조금 불운한 이미지가 떠오른다. 아당의 발레 때문에? 하여간 지젤에게 회원등록을 하고 처음으로 세 권의 책을 고른 콩스탕스. 뒤라스, 르루, 그리고 폴리냐크. <밑줄....>은 빠른 이야기가 책의 특징이다. 콩스탕스는 앞의 두 작품은 읽다가 헷갈려 그냥 던져버리고 폴리냐크를 대충 훑어보는데, 76페이지 위쪽 여백에 “당신을 위해 더 좋은 것이 있습니다.”라고 연필로 적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갔다. 그러다 진짜로 일이 벌어진 건 책을 반납할 때 지젤이 낙서를 발견하고 콩스탕스에게 싫은 소리를 한 마디 했던 것. 책의 뒤편, 대출 카드를 꼽는 작은 봉투(아날로그 시대의 도서관을 이용해보신 분은 금방 이해하실 것) 옆에 “도스토옙스키의 <노름꾼>. 좋은 책입니다. 그걸 당신에게 권합니다.”라고 씌어있다.
  그래 불문곡직하고 <노름꾼>을 다시 대출해 처음엔 재미나게 읽다가, 책 속에 밑줄이 그어진 부분이 의미심장. 마치 밑줄 긋는 남자, 분명히 남자가 책 속의 문장으로 자신에게 모종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 같은 확신이 들기 시작한다. 그러니 정작 소설의 내용이 눈에 들어오기나 하겠어? 어느새 콩스탕스는 밑줄 친 부분만 집중하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밑줄 친 남자를 30대 후반 정도의 중후한 남성으로 추정을 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를 만나 함께 밤을 보내고 혹시 같이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면서 1.2미터 길이의 당나귀 레옹을 가랑이 사이에 끼고 지긋하게 누르면서 잠에 빠져든다. 어때? 발칙하고 경쾌하고 천진하다. 여유있는 집에서 곱게 자란 스물다섯 살의 파리 아가씨가 책에 밑줄을 쳐 자신에게 모종의 메시지를 보낸 남자와 사랑에 빠져 실제로 그의 정체를 알아내는 일종의 로드 무비? 뭔들 어떠랴. 로드 무비일 수도 있고 가벼운 사랑 이야기일 수도 있다. 아무려면 어쩌랴. 시간 죽이는데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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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인의 죽음
피터 애크로이드 지음, 한기찬 옮김 / 프레스21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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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으로 우리나라에서 번역한 애크로이드의 소설은 다 읽은 셈이다. 차례대로 <플라톤의 반란: The Plato Papers>, <혹스무어>, <디 박사의 집> 그리고 <어느 시인의 죽음: Chatterton>. 제목을 왜 <어느 시인의 죽음>으로 뽑았을까. 너무 뻔한 제목 아닌가 싶다. 그냥 원래대로 <채터턴>이라 해도 괜찮았을 거 같은데. <혹스무어>의 독후감에서도 쓴 적이 있고, 이 책을 통해서 늙은 작가 해리엇 스크로프의 입을 통해 한 번 더 이야기하지만 애크로이드는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가져와 그것의 변형을 통해 실제 역사의 사실에 관해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즉 역사적 “사실이란 건 상상력이 없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고.
  그래서 이번에 애크로이드가 만들어낸 인물은 18세기 영국 브리스틀에서 태어나 런던에서 죽은 빗나간 천재소년 토머스 채터턴(1752~70).

 

토머스 채터튼의 초상


 역사적 사실로 말하자면, 열대여섯 살 때 수도승 ‘롤리’의 이름으로 속창을 짓는 등 정통 중세 문체를 만드는데 천재를 발휘했으며 성공을 위해 17세에 런던으로 옮겼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해 가난과 실패에 지쳐 1770년 8월 24일, 브룩가街 다락방에서 비소를 먹고 음독자살해 슈레인 구빈원 묘지에 매장되었다고 하는 실제인물이다. 애크로이드의 상상은 채터턴이 훌륭하고도 자유롭게 중세 문체를 사용하여 당대 시인들의 작풍을 그대로 모방해, 결과물을 어린 채터턴이 쓴 것이 아니고 수도승 롤리뿐만 아니라 유명 시인, 심지어 윌리엄 블레이크의 미발표 시라고 주장해도 전혀 손색이 없었을 수준이었으며, 그의 위조에 관한 일가견은 샘 조인슨이라는 출판업자를 만나 ‘존 채터턴’이란 인물을 위장 자살시킨 다음 본격화되어 이후 30년 이상 위장작가로 풍요롭게 살았을 수도 있다는 지경에까지 다다른다. 그리하여 사실 영국이 자랑하는 중세 시인들의 작품의 절반 정도는 당대의 시인이 아니라 존 채터턴이 쓴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 <혹스무어>, <디 박사의 집>에 이어 이번에도 한 역사적 사실을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은 허구의 수렁으로 함몰시켜버리고 말았다.
  영국의 화가 헨리 월리스는 지난 세기의 한 천재가 불운하게 죽은 것을 모티브로 해서 젊고 총기가 있으나 때를 만나지 못하여 자살을 시도하던 젊은 시인 조지 메레디스를 모델로 고용해 창문이 열린 다락방에서 자살에 이른 체터턴을 그린 <채터턴>을 1856년에 완성한다. 작품 속에서도 시인이자 주인공인 찰스 위치우드는 아들 에드워드와 함께 테이트 미술관을 방문해 이 작품을 감상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헨리 월리스, <채터튼> 1856


  이 그림에 영향을 받았을 것 같다. 애크로이드는 책 속에서 다른 초상화 한 점을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1802년 조지 스테드라는 화가의 그림으로 중년의 남자가 네 권의 책 위에 손을 올려놓고 기댄 모습이다. 주인공 찰스 위치우드는 집의 가장이기는 하지만 아내가 화랑의 비서 일을 하며 벌어오는 돈으로 생활을 꾸려가는 룸펜 인텔리겐치아다. 그러나 자신도 그렇고, 자신보다 아내가 더 그런데, 스스로 뮤즈의 찬란한 입김을 받은 시인으로 지금 장시를 쓰고 있으며 가까운 시일 내에 큰 영광이 쏟아질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 몽상가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자신이 참 가난하다는 걸 새삼스레 자각해 오래된 책 <소멸된 18세기 플루트 연주법>을 팔기 위해 리노 골동품 점에 갔다가, 너무 헐값을 부르는데다 저쪽에서 자신을 빤하게 바라보고 있던 중년남자와 시선을 마주치는 바람에 단박에 남자의 초상화와 자신의 책 두 권을 교환해 집에 가지고 오게 된다. 이 때 휠체어의 여자 주인이 리노 씨에게 한 말은 이랬다.
  “이 그림엔 죽음이 서려 있다고요!”
  불운을 예고하는 말은 언제나 들어맞는다는 소설작법 3장 1절에 의거하여, 그림을 집에 가지고 온 이후 찰스는 만성 어지럼증과 편두통에 시달려 마음씨 좋은 아내 비비안의 걱정은 갈수록 커지기만 한다. 이 와중에 찰스는 친구이자 자신은 모르지만 아내 비비안을 숭배하는 필립 슬랙과 함께 그림의 때를 살살 벗겨내니 네 권의 책은 각기 <국립식물원>, <복수>, <엘라>, <발라>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채터턴의 저서들이다. 이 책들의 제목에 의거하여 혹시 채터턴이 50세까지 살아 있어서 그의 초상화를 그린 것은 아닐까, 하고 상상을 하게 되고, 이의 확인을 위해 리노 골동품상에 그림을 판 조인슨 씨(저 위의 출판업자와 당연히 관련이 있는 후손)를 찾아 브리스틀로 향해 팻이라는 노인으로부터 관련 자료를 넘겨받는데, 저런, 자신의 짐작 또는 상상력이 맞아 떨어진 거였다. 18세를 석 달 남기고 죽은, 18세기는 물론이거니와 전 영국 역사상 가장 뛰어났던 가짜작품 창작의 달인이 알고 보니 50세가 넘어서까지 살아 있었음은, 앞에서 말한 대로 심지어 여태까지 토비아스 스몰렛, 윌리엄 블레이크 등의 시로 알고 있던 것들 가운데 숱한 작품들이 사실은 채터턴의 작품일 수도 있다는 놀라운 사실. 아아, 진정하시라. 그렇다는 뜻이 아니고 그랬을 수도 있다는 애크로이드 특유의 역사 담론 뒤틀기니까.
  여기에 조지 메레디스가 채터턴의 대역으로 그의 시체 모델로 그림을 그리게 된 이야기가 삽화처럼 그려진다. 1856년, 가난 때문에 아내는 도망가고 사는 것도 더 이상 의미가 없어 채터턴의 아버지가 합창단 지휘자를 했고, 채터턴 역시 각별한 애정이 있었으며 그의 생몰연대가 동판에 적혀 있는 브리스틀의 세인트 메리 레드클리프의 채터턴 유적에 앉아 수은과 비소가 든 독약 병을 입에 가져가는 순간 누군가가 그의 팔을 탁, 쳐서 병을 땅에 떨어뜨리고 사라지는데, 그것이 바로 채터턴의 영혼이라고 해석하기에 이른다.
  이외에 현대 영국의 문학, 미술계에서도 위작과 소설 내용의 복사 같은 일이 수시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까지 아울러 말 그대로 3세기에 이르는 담론을 새롭게 만들어낸다. 새롭게 만들어낸다는 뜻은? 기존의 역사적, 기득권을 갖는 해석을 때려 부순다는 의미. 이게 애크로이드 소설문학의 본령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작품 <어느 시인의 죽음>에 만점을 주지는 못한다. 처음부터 흥미진진했다가 마지막에 이르러 그의 초상화가 새롭게 변하는 중요한 장면이 조금은 황당했기 때문에. 이 책이 지금 절판 상태라 하더라도 언제 다시 복간될지 몰라 어떤 모습인지는 차마 밝혀두지 못하겠다. 그만큼 재미있는 작품이다.
  그의 작품들이 속속 번역 출간했으면 좋겠는데 어째 각 출판사에선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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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탱고 알마 인코그니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조원규 옮김 / 알마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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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에 이이가 쓴 <저항의 멜랑콜리>를 ‘대단히’ 흥미롭게 읽어서 애초부터 올해에 꼭 읽겠다고 꼽았던 책. 그러나 쉽게 읽히지 않을 것이라 지레짐작 했던 책. 무엇보다 먼저 크러스너호르커이의 문장에 대하여 이야기하자. <사탄탱고>의 문장은 <저항의 멜랑콜리>에 비하여 많이 짧다. 원래 이이의 글이 대단히 긴 편이라고 한다. 경애하는 서재 동무님께 들은 바, 헝가리어 자체가 쉼표 한 번만 찍으면 글을 무한히 길게 쓸 수 있단다. 그래 이 책도 원래는 길고 긴 문장을 역자의 의도에 의하여 몇 개의 우리말로 자른 것인지, 아니면 작가의 초기작이라 본격적으로 문장이 길어지기 전인지는 알 수 없지만, 크러스너호르커이의 문장을 감상하는 데는 그것의 길고 짧음이 그리 큰 문제인 것 같지가 않다. 아직 우리말 번역본이 나오지 않은 이이의 다른 책 <마지막 늑대>도 포함하여, 작가는 자기만의 독특한 주제를 꾸려나가기 위해 가장 적절한 문장을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일반적으로 독자가 접하는 것과 비교해, ‘미친 듯이’ 길고 긴 문장이라 하더라도 만연체 특유의 늘어지는 감정은커녕 읽으면 읽을수록 독자의 신상체腎上體, 즉 부신의 수질髓質에서 아드레날린을 급격하게 분비하게 만든다. 쉬운 말로하면, 이야기에 빠져버린다는 뜻. 그러나 내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야말로 공허하기 짝이 없는 수사에 불과하다. 크러스너호르커이의 문장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비록 우리말 번역을 통하기는 했지만, 직접 읽어봐야 맛을 제대로 알 수 있다.
  작년 연말, 2019년에 읽은 가장 좋은 책으로 <저항의 멜랑콜리>를 선정하면서 “카프카는 특정한 한 사람, 예를 들면 측량 기사나 K, 딱 한 명만 골라 후벼 파는 반면 크러스호르커이는 이 책에서 시골에 있는 수상한 소도시의 그나마 다양한 사람을(아니, 어쩌면 도시 전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만 다를 뿐”이라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방금 전 <사탄탱고>를 다 읽고 역자의 해설을 보니 이렇게 쓰여 있다. “크러스너호르커이의 초기 소설은 카프카 적이다. 그러나 카프카가 단독자單獨者를 그린다면, 크러스너호르커이는 군상群像을 등장시킨다.” 이런 해설을 읽으면 나 같은 아마추어, 기껏해야 딜레탕트들은 기분 좋다. 역자가 나처럼 카프카와 비교하는 것만 해도 그런데, 작가가 집중하는 대상까지 내가 생각했던 점과 같다고 하니 더욱 그렇지 않겠나. 우쭐대는 모양이 밥맛없더라도 좀 이해해주시라.
  구성도 <저항의....>와 비슷한 점이 있다. <저항의....>는 아주 추운 날, 세상에서 가장 큰 고래를 전시하겠다는 서커스가 들어옴으로 해서 일이 벌어지는 반면, <사탄탱고>는 이제 가을비의 첫 번째 방울이 떨어질 무렵 저 호흐마이스 벌판에서 종소리가 들리던 날 밤, 죽었다고 알려진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나가 다 망해가는 집단 농장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농장 구성원들이 흥분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렇게 써 놓으면 전혀 감흥을 느낄 수 없다. 가장 가까운 성당이 4km 떨어져 있지만 종도 없고 종탑마저 지난 전쟁 때 완전히 무너져버려 종이 있다고 해도 여기까지 들릴 리 없는 거리. 농장에서 가장 예쁜 슈미트 부인의 침상에서 새벽에 깨어 불길하게 창밖을 내다보는 절름발이 후터키의 불안과 한 순간에 환영처럼 (아직 새벽이 오지 않아) 검게 보이는 아카시아 가지 위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가는 듯한 혼돈의 감정을 독후감에서는 도무지 어떻게 설명할 수 없다. 거기다가 종소리가 끝난 다음의 완벽한 고요. 적막은 더 불안과 불운의 영감에 휩싸이게 하고. 슈미트 부인 역시 누군가 창문을 두드리고 문고리를 흔들고 있지만 정작 고함도 나오지 않는 고통스런 악몽을 꾼다. 그래 초장부터 소설은 제목처럼 뭔가 악마주의적인 분위기 속에 불길한 죽음의 기운이 넘실댄다.
  이같이 소설 첫 머리가 강렬해 독자는 책이 끝날 때까지 작품의 어느 곳, 어느 장면도 이와 조금이라도 연관이 되면 단박에 기억이 날 정도로 뚜렷하게 기억하게 되는데, 농장의 모든 일꾼들이 마을 북쪽의 농장으로 가 8개월 동안 죽을 고생을 하고 번 돈을 남편과 이웃 크라네르 둘이 몽땅 챙겨 갑자기 들이닥친다. 둘이 이 돈을 반씩 챙겨 마을을 떠날 결심을 했으나, 불륜의 밤을 지낸 후터키가 창밖으로 튀었다가 새벽 불빛을 보고 방문한다는 듯이 나타나 결국 셋이 나누기로 한다. 이때 역시 불빛을 보고 또 다른 이웃 헐리치 부인이 놀랄만한 소식을 가지고 방문하니, 이미 죽은 줄 알았던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너가 마을을 향해 오고 있다는 것. 전직 기술자인 후터키는 이리미아시가 이곳에 오기만 하면 생산과 농사가 놀라울 만큼 발전하는 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해 마음을 바꾼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리마시아는 위대한 마법사 비슷한 인물로 심지어 쇠똥으로도 성을 지을 수 있을만한 추진력과 지식과 연줄이 있는 영웅이기 때문에. 크라네르 부인도 등장해 아리미아시가 앞으로, 머지않은 장래에 뭔가를 이룰 것이라 첨언을 하자,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한 새벽 가을비를 맞으며 슈미트 부인이 정말로 그들이 농장으로 오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비옷과 두툼한 장화를 신고 밖으로 나가고, 후터키와 슈미트 역시 “짜증내지 말라고, 보란 듯이 잘 살 수 있게 될 테니까! 흥청망청 마음껏 즐기며 살 거야!” 희망가를 노래하며 메시아를 맞으려 빗속을 행진하는 것으로 1부의 첫 번째 장章이 끝난다.
  책은 모두 2부, 열두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1, 2, 3, 4, 5, 6장으로 되어 있는 반면, 2부는 6, 5, 4, 3, 2, 1장의 순서다. 그리하여 이 장들이 만들어내는 건 한 사이클cycle. 즉 원이다. 원의 특성은 멈추지 않고 계속 같은 거리를 유지하며 돌고 도는 것. 이게 어떤 뜻인지는 밝힐 수 없다. 진짜로 책을 읽을 분을 위하여. <저항의....>를 이야기하면서 나는 끈질기게 책을 읽을 수 있는 독서력이 조금 있는 분들에게 추천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 책은 그렇지 않다. 끈질길 정도는 아니고 그냥 앉아서 한 번에 30쪽 가량을 읽을 수 있는 모든 분께 권한다.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이이의 이름을 기억하시라. 출판사 알마는 <사탄탱고>, <저항의 멜랑콜리>에 이어 <저 아래 서왕모>를 작가의 대표작으로 꼽으며 그의 작품을 순차적으로 출간할 계획이라고 알라딘에 광고를 했다. 이제 <....서왕모>를 기다리고 있는데 굳이 그것 말고도, 그의 작품들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번역 출간해주었으면 좋겠다. <저항의 멜랑콜리>와 마찬가지로, 이것 역시 명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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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 시집 범우문고 16
김소월 지음 / 범우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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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소월 김정식(金廷湜). 1902년 9월(음력 8월)에 태어나 서른두 해를 살다 1934년 12월에 생을 접은 시인. 그의 죽음조차 뇌일혈로 인한 자연사인지, 독극물 자살인지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유년시절 일본인들에게 집단구타를 당해 미쳐버린 아버지, 할아버지 슬하에서 한문교육, 이른 결혼, 오산학교에서 김억金億을 사사, 교장 조만식 흠모, 일본 도쿄상과대학 진학, 관동지진으로 귀국, 사업 실패, 가장으로서의 자괴감 같은 모든 바이오그래피도 김억이 자비출판해준 시집 《진달래꽃》 한 권으로 지워진다. 아마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시인이 김소월일 것이다. 나도 물론이고. 그러나 교과서 말고 진짜 그의 시집을 읽어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너무나 많이, 너무도 자주 그의 이름과 시와, 시에 곡을 붙인 가곡과 가요 때문에 오히려 정작 이이의 시를 읽어볼 생각이 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하리라.
  굳이 그의 대표작 <진달래꽃>,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를 인용하지 않아도 좋을 듯하다. 이 절묘한 은유의 벼랑 끝. 이런 게 진짜 시 아닌가 싶다. 말로는 죽어도 안 울겠다고 하는 동시에 가슴으로는 피눈물을 흘리는 역설. 하긴 소월이 누군가. 국문학 전공하는 사람들 가운데 시를 공부해 박사를 딴 사람들이 가장 많이 연구주제로 삼은 이가 김소월이다. 소설? 이광수. 그러나 지금 시대에 소월처럼 시를 쓸 수도 없고, 쓸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앞으로도 몇 세기를 거쳐 애송될 것이다. 이게 바로 고전의 힘. <가는 길>이라는 시 한 번 읽어보자.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 번……


  저 산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
  서산에는 해진다고
  지저귑니다.


  앞 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오라고 따라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전문)



  시집을 읽지 않았더라면 이런 설렘과 안타까움과 외로움이 세상에 있는지도 몰랐을 거다. 아무리 유명한 시인이라도 숨겨진 작품은 언제나 있는 법. 이 시 하나를 찾아낸 것으로도 시집을 사 읽는 본전은 뽑았다. 강물은 서로 따라가고 흘러도 연이어 흐르는데 어찌 사람은 그리워도 그립다 말 못하고, 그냥 갈까 망설이면서도 뒤 돌아보고 싶은 마음 못 다스린 채 서산에 해가 질 때까지.
  소월, 하면 대개 여성성, 그리고 슬픔에서 비롯하는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 사실로도 그런 취향의 시들이 소월을 국민시인으로 만들었지만 <초혼>같은 외침의 시도 있기는 하다. 평안북도의 망해가는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나 마지막 남은 가산으로 일본 유학을 떠났지만 바로 그 해에 관동대지진이 발생해 숱한 조선인을 살해한 장면이 기억에 남았을 소월. 곧바로 귀국해 이미 사양길에 접어든 할아버지의 광산 사업을 말아먹고, 동아일보 지국장을 하다가 역시 깨끗하게 말아먹은 소월에게 어찌 동 시대를 바라보는 시인의 눈이 없었으랴. 다만 조선인의 한과 설움에서 비롯하는 시들의 막강한 감동의 아우라에 빛을 잃었을 뿐이지. <마음의 눈물>이라는 시 일부.



  내 마음에서 눈물난다.
  뒷산에 푸르른 미류나무 잎들이 알지,
  내 마음에서, 마음에서 눈물나는 줄을,
  나 보고 싶은 사람, 나 한 번 보게 하여 주소,
  우리 작은놈 날 보고 싶어하지.


  건넛집 갓난이도 날 보고 싶을 테지,
  나도 보고 싶다, 너희들이 어떻게 자라는 것을.
  나 하고 싶은 노릇 나 하게 하여 주소.
  못 잊어 그리운 너의 품속이여!
  못 잊고, 못 잊어 그립길래 내가 괴로와하는 조선이여  (부분)


  솔직하게 얘기해서, 이 시가 비록 소월표 서정시가 가슴 속을 푹 질러주는 감동에는 미치지 못할지언정 작은 것들에서 시작하는 조선을 위한 영탄이 결코 가볍지 않다. 이것 역시 시집을 통해 얻은 수확임은 당연하다.
  그러나 소월 시의 본류는 슬픔의 아름다움. 예컨대 <접동새>의,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진두강 가람 가에 살던 누나는
  진구강 앞 마을에
  와서 웁니다


  (중략)


  누나라고 불러 보랴
  오오 불설워
  시새움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읍니다.


  아홉이나 남아 되던 오랩동생을
  죽어서도 못 잊어 차마 못 잊어
  야삼경 남 다 자는 밤이 깊으면
  이산 저산 옮아 가며 슬피 웁니다   (부분)



  같이 시인의 숙모 계희영으로부터 들은 우리의 옛 이야기 속 정서를 품고 있다거나, 제대로 대가리가 굵어지기 전인 중학생 때 썼지만 그리움에 관한 절절한 역설로 만든 절창 <먼 훗날> 같은 것이 더 좋다. 이 시 전문을 읽으면서 너무도 유명한 시인의 시들이라서 잘 써봐야 본전인 독후감을 마친다.



  먼 후일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후일 그때에 ‘잊었노라’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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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혹은 한 남자의 자살 노트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25
마틴 에이미스 지음, 김현우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작가 마틴 에이미스는, 여태까지 영어로 출간된 소설 75선에 포함된 <럭키 짐>을 쓴 킹슬리 에이미스의 친아들로 출판사 열린책들을 통해 <런던 필즈>라는 재미있는 책을 국내에서도 선보인 적이 있다. 내가 읽어본 바로는 마틴 에이미스는 아버지 킹슬리의 작풍作風을 따라 코믹한 분위기의 촌철살인 작품을 썼으며, 외국의 언어로 쓰인 유머라는 측면에서 작품의 생산연도가 현재와 더 근접한 아들 에이미스의 작품이 ‘훨씬’ 더 독자에게 다가왔다. <런던 필즈>에서 마틴은 개차반 성향의 남자 키쓰 탤런트를 등장시켜 팜 파탈 형 미모의 여인을 무참하게 살해‘하려는’ 장면을 통해 특유의 해학으로 사람이 사는 모습을 블랙 유머 형식으로 표현했다.
  <런던 필즈>보다 5년 먼저 출간한 <돈, 혹은 한 남자의 자살노트 : 이후 “돈”으로 표기>는 1981년부터 1982년의 런던과 뉴욕을 무대로 뉴욕의 필딩 구드니가 영국의 CF 감독 존 셀프에게 미국 유명 배우들을 캐스팅해서 장편 상업영화를 한 편 제작하자고 꼬드겨 사기를 치는 이야기다. 이런 큰 줄기는 1권 중후반에 접어들면 어떤 독자라도 눈치를 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미리 언질을 주어도 별 까탈이 없으리라 믿는다. 필딩은 스물다섯 살에 탄탄한 몸매와 건강한 체력까지는 확실하고, 거기다가 눈부신 재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물이며, 책 제목처럼 기어이 자살 노트를 쓰는 주인공 존 셀프는 영국의 CF계에선 나름대로 성공을 했으나 세상에 둘도 없는 속물이면서도 기본적인 심성은 나쁘지 않은 인물로 설정했다. 존 셀프는 책을 출간할 당시의 마틴의 나이인 서른다섯 살. 출연진 가운데 끝까지 눈에 띄는 등장인물은 ‘마틴 에이미스’라고 하는 체스 잘 두는 영국 소설가. 정말이다. 마틴은 마치 미국의 영화감독 히치콕처럼 자신이 쓴 책의 한 귀퉁이에 슬쩍 등장해 참견까지 한다.
  아아, 이 말 먼저 하자. 마틴 에이미스의 <돈>은 당시 언론이 뽑은 세계 100대 소설책에 포함되는 영광을 안았다고 한다. 그러니 아버지 에이미스는 영문소설 75선, 아들은 세계 100대 소설. 가문의 영광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덥석 미끼를 물었다가는 독자의 취향에 따라 기겁을 하고 책 읽기를 포기할 수도 있다. 그건 주인공 존 셀프의 행적과 입담 때문이다. 사기꾼 필딩으로부터 제의가 오기 전까지 완전한 영국 잡놈인 존의 일상은 말 그대로 ‘무위의 하루’로 책의 초반에 쓰인 것을 그대로 인용하면, 아침부터 술 마시고, 밥 먹고, 면도하고, 자위하고, 술 마시고, 밥 먹고, 자위하고(이거 많이 하면 피난다는데 걱정이 될 정도로), 잇몸이 퉁퉁 부은 채 TV보고, 술 마시고, “작고 나긋나긋하고 잘 튕기고 몸이 유연하고 침대에서 영리하지만 남자들의 공격과 성추행, 강간을 두려워”하는 영국 소설에서 일찍이 보지 못한 국가대표 걸레인 애인 셀리나 스트리트와 액체교환 방식으로 사랑을 하는 일이다. 사기꾼의 낚시에 걸린지도 모르고 뉴욕에 가도 관심의 초점은 영화보다 술과 패스트푸드와 포르노와 여자에 집중되어 있는 말종이다. 그러니 존이 자신의 행적을 묘사하기 위해 점잖은 분들이 읽기엔 과하게 지저분하게 보일 수도 있는 장면과 단어가 자주 출몰하니 미리 주의를 기울이시라는 말씀. 내 경우엔 뭐 이왕 알 거 다 아는 처지라서 그런지 그냥 읽는 재미가 넘쳐흘렀다.
  그래도 CF 감독이고, 알렉 루엘린이라는 케임브리지를 졸업한 절친에게 돈도 활수하게 꾸어주고 그의 아내와 계단에서 관계도 맺는 ‘영국’ 인간이, 나이 서른다섯에 이를 때까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도 한 번 읽어보지 않았으며, <오셀로>에서 데스데모나가 카시오와 정말로 밀통을 해서 오셀로에게 죽임을 당한 줄 안다. 물론 알렉 루엘린이라는 작자도 역시 존의 애인인 셀리나와 여러번 관계를 맺는 등, 에필로그를 제외하고 책의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괜찮은 사람 같아 보이는 건 남편이 하필이면 영국의 국가대표 걸레 셀리나와 바람을 피운 미국여자 마티나 트웨인과 위에서 얘기한 마틴 에이미스, 그리고 존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스트립 바 “세익스피어”에서 잡역부이자 경비원 일을 하는 늙은 뚱보 빈스 정도. 나머지는 전부, 한 명도 빼지 않고 다 속물들 themselves다.
  마틴 에이미스의 의도는 현대를 지배하는 20세기 배금주의 문명을 될 수 있는 대로 비트는 데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당연히 이런 흐름 속에서도 피해를 입는 속물에게 독자는 가여움을 느끼고, 피해의 당사자인 존 역시 간혹 “이제 그만 젊어야겠다. 왜냐고? 죽을 거 같으니까. 젊었다는 사실 때문에 죽을 것만 같다.”고 철학적인 문장을 떠올리기도 한다. 사실 그렇다. 아직도 돈이 없이 사는 삶이란 상당히 괴롭다. 물론 돈이 많다고 없는 사람들보다 ‘훨씬 덜’ 괴로운 건 아니지만. 현대인의 거의 대부분이 자본주의의 흐름 속에서 돈을 좇아, 돈을 위해, 돈에 의해 몸을 맡기고 있다. 그리하여 역설적이게도 돈 속에서 방향을 잃고 미로가 되는 인간은 어떤 모습일까. 새로 얻은 크고 튼튼한 애인,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지만 내게 많은 돈이 생기면 분명 그녀의 곁을 떠나버리고 말, 그러나 지금은 내게 오직 한 명인 그녀를 신도림 트랜스퍼 계단에 앉아 모자를 벗은 채 기다리는데 한 곱게 생긴 중년여인이 모자 속에 천 원짜리 지폐를 떨어뜨려 넣어주며 상큼한 미소를 보낸다면 과연 어떤 기분이 들까? 궁금해 하지 말고 한 번 해볼까? 근데 내가 생긴 게 도무지 없어 보이지 않아서 성공할 거 같지는 않네.



  * 이 책의 주인공 존 셀프를 읽는 내내 존 케네디 툴의 명품 희극 <바보들의 결탁>의 주인공 이그네이셔스 라일리를 떠올렸다. 이그네이셔스한테 돈이 많다면 딱 존 셀프의 모습일 거 같아서. 어쨌든 이그네이셔스도, 존도 슬픈 희극의 주인공들이다. 아니면 희극의 슬픈 주인공이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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