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크맨
애나 번스 지음, 홍한별 옮김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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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북아일랜드의 특정시점. 주인공 화자 ‘나’는 열여덟 살의 어린 숙녀. ‘어린 숙녀’라고 하는 건 2010년대의 시각이고 당시 북아일랜드에서는 소위 ‘노처녀’ 단계로 접어들기 바로 전, 즉 결혼적령기의 여성이었다. 보통 아이를 열 명 정도 출산하던 북아일랜드에서 열 명을 출산하기 위해서는 스무 살 전부터 끊임없이 임신, 출산, 수유의 사이클을 돌아야 했을 터. ‘나’의 엄마 역시 ‘나’에게 가능한 빠른 결혼과 출산을 독려하며 끊임없이 ‘아무개의 아들 아무개’를 좋은 남편으로 거론해 ‘나’를 귀찮게 한다.
  ‘나’는 길을 걸으며 20세기 이전에 쓰인 문학작품을 읽는 것하고 조깅이 아니라 러닝 수준의 달리기를 좋아하고, 주 3회 정도 관계를 갖지만 아직은 정식 애인이라고 하기엔 뭔가 좀 아쉬운 듯한 ‘어쩌면-남자친구’를 어쩌면-사랑하고 있다. 물론 북아일랜드에서 뿐만 이겠느냐만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영혼의 파트너와 맺어지지 않거나 못하면서 삶에 관해 ‘망했고’, 대신 허겁지겁 대용품 또는 대리 인간과 결혼해버리는 것으로 길고, 길고, 긴 판단착오 속에서 열 남매를 임신, 출산, 수유, 육아의 사이클에 파묻혔다. 오래 사귄 남자를 여전히 사랑하는 ‘나’의 큰언니가 딱 이 케이스인줄 알았는데 책의 진도를 더해 가면 ‘나’의 곳곳에서 이런 사람을 발굴해 낼 수 있다.
  여기에 1970년대 북아일랜드라는 정치문제가 개입한다. 1969년부터 1991년까지 북아일랜드에서는 약 2천 명의 시민을 포함해 경찰, 군인 2,911 명이 사망하는 국제적 테러리즘의 중심지로 떠오른다. 일찍이 민주주의를 발아시킨 영국령에서, 놀랍게도, 종교 때문에, 그것도 알고 보면 교회에서 면죄부를 팔아먹는 행위에 빡친 마르틴 루터가 등장하기 전인 16세기까지 같은 종교였던 두 분파의 싸움 때문에 테러를 해 구조물이 파괴되고, 사람이 다치고 죽는 일이 벌어진 것.
  가톨릭 쪽의 테러리스트 단체의 수뇌로, 해당지역에서 가히 대단한 위세를 떨쳤던 ‘밀크맨’이라 불린 마흔한 살 중년의 남자가 첫 페이지부터 등장해 이 책을 큰 범위에서 정치소설로 분류하게 만든다. 41세가 중년? 그렇다. 다시 말 하건데 시대가 1970년대다. 당시 벨파스트 지역은 거의 전쟁에 준하는 국제적 위험지역으로 꼽혔다. 전쟁 또는 전쟁에 준하는 테러리즘이 일상이 되면 남자들은 언제 어디서 생명을 차압당하게 될지 모르고, 여성들은 성폭력의 실제적 위협에 맞닥뜨리게 된다.
  책 <밀크맨>의 설정 자체가 책 속에서 자주 언급이 되는 상도常道 또는 상궤常軌에서 벗어난다. 여태까지 경험한 일반적 시각에서는 주로 피해자나 약자의 입장이, 비록 애초부터 정의와는 거리가 먼 테러리즘 조직이기는 하지만 조금이나마 정의와 비슷한 자리를 즐기는데, 로마 가톨릭 입장에서 물 건너 세력에 반대하는 대항군의 수뇌인 밀크맨이 열여덟 살 주인공 ‘나’에게 접근하는 것. 마흔한 살 유부남이 열여덟 살 아가씨한테, 그것도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독립군 대장이 말이지. 여기에 심지어 수하들을 완전히 사적인 목적으로 이용해 ‘나’를 스토킹하는 수준에 이르니 말 다했다.
  어차피 사람들에겐 비겁한 속성이 있으니까, 밀크맨의 위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전형적으로 완고한 주민들은 ‘나’의 상도에서 벗어난 행위, 길을 걸어가며 <아이반호>를 읽는 행위를 속으로는 용서하지 못하면서도 밀크맨 때문에 내놓고 비난하지 못한다. 전반적으로 사회를 내리 덮는 밀크맨의 보이지 않는 그늘. 그러다가 정부군 암살자가 쏜 총탄을 맞고 밀크맨이 죽어버리자마자, 바로 그날 밤, 동네에서 가장 좋은 술집의 여자 화장실에 불쑥 처 들어온 누군지 뻔히 아는 복면의 아무개의 아들이 권총의 총구로 ‘나’의 젖가슴을 푹 쑤시면서 성폭행을 시도하다가 저항하는 ‘나’의 눈 주변을 권총으로 후려갈기고, 개별 화장실에서 나온 여자들한테 죽도록 얻어터진다.
  모든, 아니면 적어도 ‘많은’ 상식적 배려의 기준이 한 가족 가운데 얼마나 많은 가족 구성원이 테러리즘에 희생당했는가 하는 것으로 정해지는 시대. 노년, 그러니까 50세 이상으로 접어든 여인들의 새 사랑을 결정하는 것도 어느 여자가 더 많은 가족을 희생시켰는지, 라는 집단적 기준으로 정해질 정도의 정치적 군사적, 혹은 공포시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삶이라니.
  1970년대에서 바라본 북아일랜드의 앞날은 어떨까. 많은 문학적 컨텐츠에서 미래를 대변하는 것은 아이들. 소수의 남자 아이들과 대다수의 여자 아이들에게 선풍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것이 있다. 일찍이 ‘나’의 어쩌면-남자친구를 비롯해 여러 어린 자식들을 그냥 그대로 방치한 채, 큰 아이들아 아직 덜 자란 동생들은 너희들이 대신 키워주렴,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 부모. 이들은 평생 스팽글이 달린 화려한 의상을 입고 리우데자네이루로 날아가 세계적인 댄서가 된 부부. 아이들은 너도 나도 언니의 옷 가운데 가장 화려한 드레스를 훔쳐 입고, 턱없이 큰 하이힐을 신어 자꾸 넘어지면서도 다시 돌아온 이들을 흉내내 흥겹게 왈츠를 추러 거리로 나선다.
  1970년대의 어느 날, 공포는 사라진다. 밀크맨이 죽고 잘생긴 진짜 밀크맨, 우유 배달부가 몇 십 년 만에 다시 사랑을 시작하기로 결심하면서 북아일랜드의 흔하디 흔한 과부들이 사랑 전쟁에 참여함으로써. 애나 번스는 이렇게 선언한다. 결국 해결은 사랑, 특히 여성의 사랑이며, 아이들의 즐거움이라고. 여성의 사랑이 땅 속에서 세상 밖으로 고개를 디밀자 정치와 폭력이 사라지는 거였다. 그래, 결국은 권력이 문제고 사랑이 해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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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5-26 09: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거를 수 없는 ‘창피‘ 책이네요! ㅎㅎㅎㅎ

Falstaff 2020-05-26 09:40   좋아요 0 | URL
아 그렇다니까요. 그래 더 밉지요. ㅋㅋㅋ
 
묻히지 못한 자들의 노래
제스민 워드 지음, 황근하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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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작가인 모양인데 처음 읽었다. 1977년 캘리포니아 버클리에서 태어나 세 살 때 가족과 함께 미시시피 주 더리즐DeLisle로 이주해 공립학교 흑인 반에 다니다가 똑똑한 ‘흑인 여자’ 아이들이 대개 그렇다고 하는 것처럼 반에서 따돌림을 당해 사립학교를 거쳐 스탠포드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라고 Wikipedia에 씌어 있다. 워드의 부모가 미친 모양이다. 그나마 미국에서 흑백 갈등이 다른 곳보다는 덜 한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지랄맞은 주 가운데 하나인 미시시피로 이사해 가다니 말이지. 놀랍게도 이이가 사립학교로 전학할 수 있었던 건 백인들의 도움 덕분이라고 한다.

  그래도 워드의 정체성은 여지없이 흑인이라 이 책 <묻히지 못한 자들의 노래>에서 ‘그나마’ 정상적으로 보이는 백인은 늙은 여인 메기, 딱 한 명만 등장한다. 나머지는 주인공 조조의 생부이며 범죄자인 마이클, 태생적 인종차별주의자이자 전직 보안관인 빅조지프, 메기의 친구이지만 현재는 싸구려 술집 ‘콜드 드링크’의 여주인 글로리아, 콜드 드링크의 마약중독 상태인 여급 미스티, 미스티의 남자친구이며 지금은 악명 높은 미시시피의 파치먼 교도소에 마이클과 함께 복역 중인 비숍, 이들의 변호사이자 미스티와 사이좋게 마약을 복용하는 알, 사냥 실력이 자기보다 좋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열 받아 흑인 청년 기븐의 목과 가슴에 사냥총을 쏴 죽이는 마이클의 사촌 등등. 여기까지만 이야기해도 소설이 펼쳐지는 장소가 미시시피 주인 것과 함께 흑인 소설이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근데 제스민 워드가 쓴 이 소설책이 ‘전미도서상 National Book Award'를 받았으며, 무려 하버드를 나온 전 미국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2017에 자신이 읽은 가장 훌륭한 책으로 꼽았다고 한다. 그냥 전미도서상, 하니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미국의 작가-출판사 시스템이 만들어낸 숱한 책 가운데 딱 한 권을 골라 주는 상으로, 영화로 말하자면 아카데미상처럼 다분히 로컬적이기는 하나 꽤 권위가 있다. 요샌 미국 밖의 작품에도 상을 주는 모양이다. 적어도 이 상을 타려면 위에서 나열한 등장인물이 흑인 차별이란 주제를 향해 평면적으로 이야기를 만드는 것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 제스민 워드는 그리하여 미시시피 주에서 가끔 엮어졌던 커플인 백인 남자와 흑인 여자 부부를 등장시킨다.
  완고한 인종주의자 빅조지프는 아내 메기와의 사이에 마이클을 낳고, 흑인들이 많이 사는 실제 지명인 부아 소바주에서 필로멘과 리버 레드 부부는 리버가 쉰 살에 아들 기븐, 삼 년 후 딸 레오니를 낳는다. 리버에게는 스태그라는 이름의 형이 있는데 너무 잘생긴 흑인이라 하루는 술집에서 백인과 시비가 붙어 먼저 백인이 스태그의 두개골을 이용해 위스키 병을 깨부쉈고, 두개골과 두개골을 감싼 피부에 격한 통증을 느낀 스태그는 문제의 백인 옆구리를 칼로 찌르고 리버한테 도망치는 바람에, 스태그는 폭행죄로 길게, 당시 열다섯 살 먹은 리버는 범인은닉죄로 5년 형을 받아 파치먼에 입소한 전력이 있다. 그러나 리버는 동물의 말을 알아들어 탈주범 체포 목적으로 키우는 개를 사육하는 일을 하면서, 천성이 착해 절도죄로 3년형을 받고 살벌한 파치먼에 들어온 열두 살짜리 리치라는 소년범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 했으며, 세상이라는 것이 참, 몇 십 년이 흘러 소년이었던 리치가 우여곡절 끝에 리버를 찾아오기는 하지만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일이 생긴다.
  출소 후 결혼을 하고 무려 쉰 살에 아들을 낳았으니 얼마나 귀한 자식이었는지, 마치 신에게서 받은 듯하다고 이름마저 ‘기븐Given'이라고 지어준 잘 생기고, 몸 튼튼하고 특별히 미식축구를 잘해서 대학 스카우트들의 관심을 받는 청년은, 위에서 말한 사냥 사건 때 보안관 빅조지프의 조카에 의하여 총에 맞아 세상을 뜨는 불운을 당한다. 보안관은 단순 사고로 처리하여 법원은 범인을 파치먼 3년 형에 처하는데 단, 형의 집행을 2년간 유예하는 판결을 얻어내 이를 창피하게 생각하는 범인의 사촌 마이클이, 처음에는 우연히 나중엔 진짜로 사랑해서 레오니와 연애관계에 들어가고,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직 고등학교 졸업도 하지 않은 레오니로부터 아들 조조를 만든다. 그리고 한 십 년 후, 딸을 하나 더 보태 이름을 미카엘라라고 짓는다.
  그러나 온 몸에 문신투성이인 마이클과 레오니는 기본적으로 부성, 모성을 상실한 성격으로 태어났다. 이들이 꼭 나빠서가 아니라 생겨먹기를 사랑은 하지만 자신들의 욕구, 이기심이라고 하기엔 좀 야박스런 면이 있는 그런 성향으로 인해 새끼들을 외조부모에게 맡겨놓고 거의 나 몰라라 하고 살았다. 그래 조조와 ‘케일라’라고 부르는 미카엘라는 외조부모를 아빠, 엄마라고 부르고 친부모에게는 마이클, 레오니라 그냥 이름으로 부르니 족보 하나는 가히 바둑이 족보다. 친가는 한 술 더 떠서 철저한 인종주의자 빅조지프는 애를 둘이나 낳은 며느리가 자기 집 근처에 오는 걸 보고 엽총부터 챙겨서 득달같이 달려오는 모양이 너무 공포스러워 며느리로 하여금 꽁무니를 빼게 만들 정로라 더 할 말이 없다.
  자, 우리나라 사람들이 보기엔 더 없이 개차반이 두 가정을 보고 있다. 빅조지프가 이끄는 백인 가족과 리버의 흑인 가족. 이 가족들이 화합, 아니면 화해, 그것도 아니면 적어도 서로 이해는 하겠지? 그래야 소설이니까. 그러나 아니다. 이 책은 흑인과 백인의 상호 이해나 화해 또는 화합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혼혈의 배치부터 그렇다. 남부 골통 미국인들이 그나마 인정해주는 커플이 흑인여자-백인남자 부부. 반대일 경우를 미시시피 백인 촌놈들은 눈뜨고 그 꼴을 못 본다. 책의 주제가 인종 간 이해, 화해, 화합이라면 극단적으로 백인여자-흑인남자 커플을 등장시키고 갖은 고생 끝에 이웃, 지역사회의 인정을 얻어내는 해피엔드로 만들었기 십상이다. 워드는 책을 통해 과거에 행해졌던 흑인을 향한 가혹함이 현재에도 유효함을 설명함과 동시에 흑인들이 겪었던 슬픔과 겪고 있는 아픔의 해원을 위해 책을 썼다고 봐야 하겠다. 물론 어떤 식으로 해원의 한 판 굿을 벌였는지는 얘기하지 않겠다. 독자의 취향에 따라 매우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라 독후감은 이쯤에서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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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복의 성자
아룬다티 로이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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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룬다티 로이는 1997년에 첫 번째 장편소설 <작은 것들의 신>을 써서 단 한 번 만에 부커 상을 받는다. 10년 후인 2007년에 언론에 <지복의 성자>라는 제목의 소설을 쓰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고는 뜸만 들이다가 다시 10년이 지난 2017년에 드디어 두 번째 작품 <지복의 성자>를 출간해 두 번째로 맨-부커 상의 1차 심사(Long list)에까지 오르지만 이번에는 조지 선더스의 <바도의 링컨>에 자리를 양보한다. 아룬다티 로이는 인도의 북동부 인구 20만 가량의 작은 도시 실롱에서 태어나, 불과 두 살 때 부모가 이혼해 엄마와 남자형제와, 이렇게 셋이서 외할머니 댁에 함께 성장하는데, 남자형제를 뺀다면 이 책의 두 번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틸로’와 유사한 점이 있다. 작품의 등장인물에 자신을 투영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전작 <작은 것들의 신>에서 로이는 남부 인도 아예메넴의 피부가 검정에 가까운 힌두 귀족 집안이 격변기를 맞아 불행을 당하는 모습을 아름답게 그려낸 반면에, 20년의 세월을 보내고 나서 로이는 이제 시선을 북쪽으로 돌려 1950년대 델리에서 남자와 여자의 성징을 모두 갖고 태어난 양성자와, 저 카슈미르에서 발생한 인도-파키스탄 전쟁의 비극을 연계시키려 하고 있다.
  ‘지복의 성자’는 누구일까. 한 마디로 말하자면 사랑의 화신이다. 하즈라트 사르마드 사히드. 17세기에 활동하던 아르메니아의 유대인 상인으로 ‘신드’에서 만난 ‘아브헤이 찬드’라는 힌두교인 소년을 사랑하게 되어 인도로 왔던 모양이다. 인도는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믿으니 사르마드는 일단 유대교를 버리고 이슬람으로 귀의했고, 다시 몇 년 동안 맨몸으로 거리를 방랑했다는 것으로 미루어 힌두교를 선택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려면 먼저 이슬람을 버려야 했을 것이고, 이 과정에서 알몸활보의 죄가 아니라 배교의 죄로 훗날 공개처형을 당하고 마는 인물이다. 1960년대 초의 어느 날, 자하나르 베굼은 자신의 네 번째 아들, 남자와 여자의 생식기를 모두 가진 아기를 출산했으나 언젠가 여자의 생식기가 저절로 메워지게, 또는 아물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남편에게까지 비밀로 한 채 아들로 기른 ‘아프다브’를 데리고 하즈라트 사르마드 사히드의 영묘에 와서 간절히 기도한다.
  “제게 이 아이를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소서.”
  이 시기 쯤 태어난 다른 한 명의 주인공 틸로는 훗날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하고 여가로 연극반 활동을 하면서 주로 세트와 조명 디자인을 담당한다. 연극 동아리 활동을 하며 남학생 세 명과 우정 이상의 관계를 맺는다. 같은 건축학부를 다니며 필생의 사랑이 되는 카슈미르 이슬람 해방전선의 지도자인 무사, 법적으로 유일한 남편의 자리를 갖게 될 유명 신문기자 나가, 진심으로 틸로를 사랑하지만 카스트 때문에 벌어질 가족의 반대에 애초에 순응해 그저 후원하는 선에 그치는 인도 정보국 카슈미르 부지부장 비플랍 다스굽타. 이들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앞으로 네 명의 갈등관계가 여러 모양으로 그려질 것인데, 그리 쉬운 그림이면 아룬다티 로이가 아니라는 점만 일러두고 상세 내용은 여기서 멈춘다.
  다시 아프다브. 아래로 다섯째 아이이자 진짜 남자애인 사키브가 생겼고, 다섯 살 때 우르두-힌디어 남학교에 입학해 불과 몇 달 만에 아랍어 쿠란의 대부분을 암송하는 총명한 재능을 뽐낸다. 여기에 부모는 머리보다 더 뛰어난 재주를 발견했으니 바로 음악. 그리하여 힌두스탄 고전음악의 걸출한 젊은 음악가 우스타드 하미드를 사사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이들이 그냥 내버려두지는 않아서 아홉 살쯤 되니까 “쟤는 여자야, 쟤는 남자나 여자가 아냐. 쟤는 남자고 여자야. 여자-남자, 남자-여자”라는 놀림을 받기 시작했으며, 남동생 사키브가 할례를 할 때가 되니 더는 숨기지 못하고 엄마 자하나라 베굼은 남편에게 아이의 특징을 고백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후 학교를 그만둔 아프다브는 하루 시장에 갔다가 여자가 아니니 차도르를 할 필요가 없는 우아한 여성-남성 봄베이실크를 발견하고 하도 아름다워 이이를 따라가, 결국 자신도 열다섯 살이 됐을 때 이들이 사는 집, 콰브가에 합류한다. 이런 부류의 인간들을 세속에서는 ‘하즈라’라고 부른다는 것도 배웠으며, 결혼식 등의 잔치에 불려가 노래와 춤을 팔기도 하고 더 자주는 남자 고객을 상대해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고 돈을 버는 생활을 꾸려간다.
  “신이 왜 하즈라를 만들었는지 알아? 일종의 실험이었어. 신은 행복할 수 없는 생물체를 만들어보기로 결심한 거야. 그래서 우리를 만들었지.”
  정식으로 콰브가의 일원이 된 후 집안의 어른인 ‘우스타드’ 쿨숨비는 아프다브에게 새로이 ‘안줌’이란 여성의 이름을 부여하고 이후 안줌과 안줌의 생모 자하나라 베굼은 오직 한 군데, 하즈라트 사르마드 샤히드의 영묘에서만 드물게 만난다. 사랑의 성인, 지복의 성인을 기념하는 곳에서만.
  안줌은 삼십 년이 넘게 콰브가에 살다가 마흔여섯 살이 되었을 때 자기가 길러온 딸 자이나브가 자기 대신 새로운 하즈라인 사이다와 더 가까이 지내고 싶어 하는 것을 알고 콰브가를 나와 국립병원과 시체 안치소에 면한 공동묘지에 터를 잡고 몇 년을 비탄에 잠겨 떠돌이 망령의 삶을 산다. 그러다가 천천히 상실에서 회복되어 공동묘지 터에 판잣집을 짓더니, 조금씩 확장해서 침대가 들어가는 오두막을 거쳐 작은 부엌이 달린 집의 순서로 여러 채의 건물을 짓고 빈털터리 여행객에게 방 두어 개를 세놓기 시작해, 또다시 몇 년이 흐르고는 ‘잔나트’ 게스트하우스를 완성시켜간다.
  이 게스트하우스, 카스트라면 가장 아래쪽의 몇몇 계급들과 위에 있다고 해도 계급에 신경 쓰지 않는 몰락한 인사들을 비롯한 ‘작은 것들’이 옹기종기 모인 이곳에 대학을 졸업하고 건축 사무소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하기도 했던 틸로가 입주함으로서 세계에서 가장 살인적 매연의 도시 델리, 그곳에서도 가장 추레한 곳으로 인도의 모든 지역, 계급, 종교의 차이를 위한 아주 작으나마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벌어지려고 한다.
  전작을 발표하고 20년이 지나 나온 두 번째 소설. 20년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로이는 인도 남부의 한 가정에서 격변하는 시기에 발생하는 계급간 불통의 비극에서 시각을 넓혀 전 계층과 이질적 종교, 정치와 생활 속의 폭력과 다툼의 비참함, 부정과 부패 등 거의 모든 인도병印度病을 거시적으로 다룬다. 카슈미르 분쟁을 중요한 소재로 채택한 살만 루슈디의 <광대 살리마르>가 떠오르는데 그만큼의 스케일은 아닐지언정 인도와 카슈미르 내부에서 발생한 리얼리티는 독자가 카슈미르와 인도-파키스탄 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왕 카슈미르 이야기를 하려면, 카슈미르, 더 근본적으로 원래 한 국가였던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인도가 왜 세 나라로 분리가 되었는지 근원부터 깐깐하게 따졌으면 더 좋았을 뻔했다. 1947년 영국이 물러가면서 인도 독립을 위해 파견한 마지막 인도 총독 루이스 마운트베른 남작 새끼는(얼마나 후진 인간이면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판국에 작위爵位가 다 뭐냐, 작위가) 인도에 관한 문화나 전통, 종교, 이런 거에 관해서는 아무 이해도 관심도 없어서, 복잡한 종교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하다가 생각해낸 것이, 이슬람을 믿는 사람은 동, 서 파키스탄으로, 힌두교 및 기타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양 파키스탄 아래로 임의로 국경을 만들어버리고 거의 강제로 이주시키면서, 초장부터 두 종교 그룹 간에 지역 이동을 할 때 부터 종교적 싸움을 벌이게 만든다. 그러다 아름다운 카슈미르 지방이 애매한 형국에 떨어져 두고두고 동족간에 서로 죽이는 난리를 치게 하고. 이렇게 카슈미르의 분할과 투쟁의 근본부터 시작했으면 더 좋았을 뻔 했을 거 같다. 하긴 인도 사람이 기본적으로 인도인에게 읽히려 쓴 책이니 다 알고 있으리라 전제를 했겠지만 하여튼 그렇다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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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시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82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공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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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후감을 쓰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이 좋다고 장안에 소문이 나긴 했는데 몇몇 이유로 오츠가 쓴 다른 책을 먼저 사서 읽어본 적이 있다. <사토장이의 딸>. 뭐 그리 인상 깊지 않았다. 그래 이 책도 뭉개다가 늦게나마 손에 들었다. 호, 우리말 문장도 생각보다 잘 읽히고, 내용도 흥미진진하고, 2부에 들어서자마자 뒤통수 확 후려 맞고(내가 원래 순진한 독자거든), 하여간 재미있게 마지막 장을 덮었다. 그런데도 독후감을 쓰기가 쉽지 않다.
  캐롤 오츠는 데뷔한 후 56년 동안, 중편과 단편은 별개로 하고, 장편소설을 58편 출간한 다작의 여왕. 전에 읽은 <사토장이...>도 900쪽이 넘는 장편이었다. <카시지> 역시 660쪽에 달하는 긴 작품이다. 그러니 글 쓰는 거에 관해서는 가히 도가 튼 사람일 텐데 내가 감히 따따부따 할 내공이 되겠는가. 그냥 쓴 대로 읽고, 읽은 느낌을 솔직하게 얘기할 밖에.
  뉴욕 주 북부에 카시지라는 도시가 있다. 물론 가상의 도시고, 카시지Carthage는 보통 트로이의 명장 아이네이스가 여왕 디도의 구애를 뿌리치고 이탈리아를 찾아 정처 없는 항해를 떠난 ‘카르타고’를 이야기한다. 책의 내용 속에 카르타고가 안고 있는 역사적, 혹은 신화 문학적 함의가 들어 있는지는 각자가 따져봐야 할 것인데, 구태여 끼워 맞추려고 하면 세상 어느 것인들 그렇게 하지 못할 건 없을 터.
  주인공 이름이 크레시다 캐서린 메이필드. 1986년 4월 6일생. ‘크레시다’는 트로이 전쟁 당시의 최고 예언자 칼카스의 딸 크리세이드의 영어식 이름. 책 속에서 자주 인용하는 건 제논의 역설. 즉 실생활 속의, 화살은 절대로 과녁에 박히지 않는다는 엉터리 수학적 무한성. 크레시다의 아버지 이름이 제노. 뭔가 크게 한 바탕 전쟁과 학살이 등장할 것 같은 분위기의 이름인데, 정작 전쟁과 학살에 참여하는 인물은 크레시다의 언니 줄리엣의 약혼자 브렛 킨케이드 상병이다.
  이 책을 잘 이해하려면 앞부분에 나오는 의미심장한 힌트를 염두에 두어야 하리라. 제노와 아를렛 메이필드 부부의 둘째 딸이자 막내인 크레시다는 초등학생일 때부터 ‘자폐증’일 가능성이 제기되었으며,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한 단계 위인 ‘아스퍼거증후군’일 가능성까지 제기되었지만 더 이상 확인해보지 않은 전력이 있다. 즉 경계성 인격 장애를 가지고 있을 확률이 대단히 높은 특성이 있는 인물.
  크레시다의 경계성 인격 장애를 염두에 두지 않으면 이 작품의 개연성은 단번에 무너질 수도 있다. 물론 작가가 수시로 독자에게 이런 기본 조건을 납득시키고 있으니 크게 신경을 쓸 필요는 없지만.
  아를렛과 제노 메이필드 부부의 두 딸 가운데 맏이는 예쁜 것으로, 막내는 똑똑한 것으로 캐시지 지역에 소문이 났다. 대개 예쁜 사람들이 마음씨도 착해(내가 반대 경우의 여자와 30년 넘게 같이 살고 있어 잘 아는데) 줄리는 독실한 기독교적 분위기 속에서 일찌감치 공부도 잘하고, 잘 생겼고, 거기다가 만능 운동선수인 브렛 킨케이드에게 청혼을 받아 약혼을 한 상태. 동생 크레시다는 똑똑은 하지만 인격 장애가 정말 있는지 감탄보다는 조롱에 익숙하고, 천성은 착하지만 남들이 행복해 하는 것을 보면 고통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 즉, 언제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르는 위험요소가 가득한 캐릭터란 뜻.
  또 한 명의 주인공 브렛 킨케이드는 1990~91년 걸프전에 참전한 그레이엄 킨케이드 중사와 애설 사이의 외아들. 아버지 그레이엄은 브렛이 여섯 살 때 돈을 벌어온다고 집을 나가 마지막으로 요세미티에서 그림엽서를 보낸 이후 소식을 끊어버린다. 어렴풋하게 기억나는 시절 속에서 아버지가 군인-형제, 군인이라는 공통점 하나로 형제 같은 관계가 된 이들과 무람없이 지낸 것이 추억 속의 음각화로 남아, 자신 역시 군인-형제가 있는 중사가 되면 좋겠다는 꿈을 꾸며 나이를 먹어갔다. 십여 년이 흘러 뉴욕주립대 플랫츠버그 캠퍼스에서 재무, 마케팅, 경영 수업을 듣다가 무역센터 빌딩이 무너지는 것을 보게 되자 충동적으로 친구들과 입대해버리고 만다. 그러나 브렛을 제외한 친구들 거의 모두는 입대취소를 결정한다. 2002년에 거의 모든 미국인들은 전쟁에 나갈 사람들은 흑인과 히스패닉 등으로 구성된 미국 하층민이란 걸 이미 알았고 국방부마저도 이를 파악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미국의 하층민으로 구성된 이라크 주둔지의 사병들의 세계에서 백인에다 대학까지 다니다가 군대에 지원한 브렛이 제대로 적응하기는 매우 곤란했던 모양이다. 킨케이드는 주둔지 키르쿠크에서 먹시, 브로카, 머핸, 라미레즈와 함께 조를 이루어 작전을 수행 했다. 주 업무는 전투이고 남는 시간, 사실 전쟁 중 가장 많은 시간은 전투가 아니라 ‘남는 시간’인데, 하여간 여유시간을 이용해 이들은 여자가 아니라 ‘여자애’들을 집단 윤간하고, 장면을 목격한 여자애의 가족들을 ‘처리’, 즉 몰살을 한다. 기념으로 살아 있는 소녀의 얼굴을 스위스 군용칼로 도려내고, 의료용 가위로 새끼손가락을 절단 후 살해하고, 브로카는 이를 휴대전화로 사진 촬영을 해 기념으로 보관했다. 이들 미군의 시각으로 볼 때 ‘미친’ 킨케이드는 이런 행위를 군 당국에 고발하지만 친구들, 소위 군인-형제들은 그에게 머저리 고자질쟁이이며 보복당할 거라고 경고를 하더니 진짜로 우군에 의해 고의로 터진 수류탄 파편에 치명상을 입어 병원으로 이송된 후 퍼플하트 훈장 하나를 받고 의병제대를 하고 만다.
  크게 말하자면 경계성 인격 장애를 가진 크레시다의 실종을 다룬 소설이라 말할 수 있다. 실종된 날, 크레시다는 언니 줄리와 파혼한 지 며칠 되지 않은, 자신이 오랜 세월 짝사랑했던 브렛을 만나기 위해 늦은 밤에 건달, 술꾼들이 모이는 울프스헤드 호숫가의 술집 로벅인으로 갔다가, 그와 맥주 한 병을 마시고 브렛이 모는 랭글러를 타고 호수 주변을 달리다, 신경정신 치료약과 알코올을 함께 복용한 브렛의 혼몽한 의식 속에서 작은 사고가 나고, 그녀는 사라져버린다. 어떻게 된 걸까. 조수석에서 크레시다와 같은 B형 혈액이 몇 방울 떨어져있고, 역시 크레시다와 같은 검정 머리카락 몇 올이 발견되었으나 며칠, 몇 주가 지나도 크레시다의 시신은 도무지 찾을 수 없다.
  이렇게 곁가지 다 치워버리고 크레시다의 실종에만 초점을 맞춰 읽으면 독자는 편하다.
  근데 나는 이라크 최대 유전지대 키르쿠크에서의 에피소드가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아서 책을 읽는 내내 문제였다. 마이클 치미노가 감독한 영화 <디어 헌터>를 자주 소환하게 된 것. 조이스 케럴 오츠의 관심은 절대적으로 이라크 전 참전 미국 군인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한 참전 군인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때문에 스스로 최고의 아내감인 줄리와 파혼을 하고, 알코올 중독자 비슷하게 삶을 포기한 상태에서 전 약혼녀의 여동생을 강간 살인한 것처럼 보이고, 자기가 진짜 그랬을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는 강간 살인을 오로지 죽기 위해, 사형당하기 위해 자백하고, 중죄인 남자 교도소에서 복역하는 일. 반면에 저 대서양과 지중해 너머 키르쿠크에서는 한 가족의 아무 죄도 없는 ‘여자애’가 거구의 미국인 네 명에게 집단 강간을 당하는 것을 부모와 오라비와 자매가 눈으로 보아야 했으며, 딸 혹은 누이의 왼쪽 귀 밑에서 턱 쪽으로 얼굴이 절개당할 때도 차마 눈을 뜨고 있어야 했으며, 그들의 기념품으로 자신들의 새끼손가락을 잘라준 후 죽음을 당해야 했던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오츠는 현장을 묘사만 했지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브렛이 이라크 여자 아이가 강간 살해당할 당시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원죄적 죄책감에 시달리기는 한다. 그러나 그의 시각 역시 완전히 가해자의 시선이라는데 문제가 있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가해자, 가해국의 작가가 이런 식으로 글을 쓰면 안 된다고. <카시지>보다 딱 한 발자국 더 나가서 근본적인 문제점을 들추어내, 적어도 공론화시키려 하는 것이 작가가 할 일이 아닐까. 그런 시도가 사회적으로 문제제기가 되건 아니건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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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리안 2020-05-21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린 나이에 본 <디어 헌터>의 러시안룰렛이 어찌나 강렬했던지, 중심인물들 외의 배경은 완전히 의식 밖으로 밀어냈던 것 같습니다. 이 글 읽으며 생각해보니 반전이라는 큰 메시지 하나로 퉁쳐버리기엔 베트콩에 대한 묘사도 찜찜하고 근본적인 모순은 모른 척한 영화였다는 생각이 드네요. 잘 읽었습니다~

Falstaff 2020-05-21 19:49   좋아요 0 | URL
별 거 없는 독후감을 잘 읽어주셨다니 고맙습니다.

케이 2020-05-22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진 않았지만, 디어헌터에 대해 쓰신 내용에 너무 공감합니다. 가해한 국가의 사람들은 불의를 보고 아무 것도 하지 못한 ˝나˝에 대한 연민과 동정 이상의 것을 도저히 알 수 없나봐요. 피해자에 대해 최소한의 양심은 있어야할 것 아닙니까. ㅜㅜ 아... 이 소설 저 읽어보려고 했는데 강간씬이 나온다는 걸 사전에 안 이상 읽지 않는 게 낫겠습니다. 리뷰 감사합니다.

Falstaff 2020-05-22 12:00   좋아요 0 | URL
아, 씬, 장면에 관한 세밀 묘사는 전혀 없습니다. 그냥 단어만 써서 설명을 할 뿐입니다. 근데.... 오츠가 좀 그로테스크한 면이 있기는 하고요.
<디어 헌터>야말로 진짜 미국적인 작품이라 생각해요. 이 책도 역시 미국 소설이고요. 공감하신다니 고맙고 반갑습니다. ^^
 
껍데기는 가라 시인생각 한국대표 명시선 100
신동엽 지음 / 시인생각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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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회가 새롭다. 이제 신동엽의 시 <껍데기는 가라>가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는 건 물론, 수능시험에 가장 자주 출제되는 문제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1975년에 창작과비평사에서 출간한 《신동엽 전집》은 나오자마자 박정희 정권에 의하여 금서 처분을 받고, 1979년에 창비시선 20호로 다시 찍은 시선집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역시 간행과 동시에 판매 금지에 걸려버렸었다. 하지만 내게는 부모가 사놓은 신구문화사의 《현대한국문학전집》의 마지막 18권 <52인 시집>이 있어 <껍데기는 가라>라는 제목과 신동엽이란 이름이 낯설지는 않았다. <52인 시집>이 나온 1965년 당시에는 많은 시가 당연히 4월 혁명에 관한 것이었으니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가 어린 눈에 그리 명편이라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았을 터이다. 오히려 학교에서 말랑말랑한 시만 배운 학생의 눈엔 좀 생경스런 시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얼마나 명품인가. 그걸 너무 늦게 깨닫고 만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전문



  당시엔 심지어 몇 달 후에 읽을 조태일의 《국토》마저 금서였으며, 그리하여 선배의 하숙방에서 동녘에 붉은 새벽놀이 질 때까지 밤 새 읽을 수밖에 없었던 기억이 있다. 참여시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던 정지용의 모든 작품도 마찬가지 굴레가 씌워졌던 시절. 이제 세대가 바뀌어 늦게나마 모든 작품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때가 왔으니 무릇 사람이라면 이런 진보에 환호작약은 아닐지언정 좋은 마음으로 흐뭇해야 마땅할 터, 그리하여 나는 흐뭇하게 생전 처음으로 신동엽 한 권을 내 소유로 사서 기쁘게 감상했다.
  1930년 부여에서 출생한 똑똑한 소년은 어릴 때부터 남다른 떡잎이었던지라 열세 살 때 조선팔도에 내로라하는 5백 명의 청소년에 뽑혀 ‘내지 성지 참배단’의 일원으로 보름 동안 일본을 다녀오기도 하고, 1945년 4월에 전주사범에 입학하기에 이른다. 이때 함께 전주사범에 다니던 동기생 가운데 한 명이 키가 커서 신동엽과 별로 교분이 없었던 소설가, <수난 이대>의 하근찬이다. 전주사범에 다니면서 주목해야 할 일이 벌어진다. 당시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일제에 부역하던 부르주아들의 기득권을 유지시키기 위해 토지개혁을 흐지부지 끝내버리고 일제 청산 대신 일제 청산을 주장하는 반민특위 지지자 무리들을 싹 쓸어버린다. 신동엽은 이에 항의하기 위한 동맹휴학에 참여함으로써 만 삼 년을 다니던 전주사범으로부터 퇴학처분을 받는다. 당시 나이 19세. 애초에 내성적이고 차분하고 작은 체구로 천생 서생 체질이지만 10대 후반까지 다분히 아나키즘 적인 사상을 일구고 있었다고 하는 걸 이해할 수 있을 것.
  1930년생이면, 우리나라 근대사의 어느 세대가 그렇지 않았겠느냐만, 청소년 시절은 일제 치하와 해방직후 극심한 이념투쟁을 겪자마자 곧이어 한국전쟁에서 가장 큰 희생을 당했으며, 살아남았다 해도 전쟁 후 공황시기를 맨 몸으로 견뎌가면서 한 가족을 일구고 다시 생을 이어가야 했던 세대다. 여기에 아나키즘 적 취향의 왜소한 시인을 대입해보면, 1950년대와 60년대까지를 살면서 감히 아나키즘 적인 발언은 하지 못하더라도 민중위주의 이데올로기적 중립 통일과 평화를 노래한 것이 당연했을 거 같다.
  한국전쟁이라는 한바탕 큰 폭풍은 신동엽의 생애도 거침없이 휩쓸어간다. 당시 단국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하던 신동엽은 전쟁이 터지자 인민군 치하의 고향에 돌아와 민청 선전부장을 지낸다. 아무리 신동엽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순진한 아나키즘 적 사회주의자 아니었겠나. 몇 달 후 인민군이 퇴각하면서 신동엽은 부산으로 내려가 전시 연합대학에 다니다가 12월에 소집되어 국민방위군에 편입된다. 전시 중에도 최대한의 착복과 부패로 악명 높던 국민방위군에서 헐벗으며 추위와 굶주림에 그 유명한 1950~51년의 겨울을 견뎌내긴 했으나 결국 방위대가 해체되기 전에 빠져나온 신동엽은 다시 고향까지 고된 길을 걸으며 그만 민물 게를 날 것으로 잡아먹어 겨우 아사를 면하는 처지에 떨어지고 만다. 그리고는 이 때문에 디스토마에 감염되어, 폐와 간을 손상, 후에 긴 세월에 걸쳐 폐결핵(의심증세)과 간암으로 조금씩 번져 결국 눈을 감기에 이르니 그의 나이 겨우 사십 세였다.
  일본어를 거의 모국어 수준으로 사용하다가, 순진한 아나키즘에 경도되고, 한국전쟁을 통해 전쟁의 비참함을 스스로 겪어냈으며, 동학농민전쟁 지역인 부여 농민 집안의 정체성, 여기다가 60년대 들어서자마자 터진 4월 혁명은 그를 전형적인 리얼리즘 시인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나는 신동엽을 읽을 때마다 김수영이 말한 “시여, 침을 뱉어라!”의 가장 가까운 쪽에 서서 이 말을 그대로 실천했던 시인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이이의 시에 비분강개만 있는 건 아니다. <사랑>이란 시 한 번 읽어보자. 신동엽도 사랑시를 썼으니.



  진하게
  진하게
  모란처럼 소복함 가득 담고 오너라


  참새스런 깡통한, 날매
  가슴차게 안겨오너라


  경憬이여


  장미처럼 매선 향기
  가시로 쏘아라


  화염華艶한 눈웃음은
  다음 장章으로  (전문)



 누가 신동엽 같은 시인에게 사랑을 받았을까? 위 시에서 사랑의 객체 경(憬)은 그의 아내 인병선이다. 북한의 농업경제학자 인정식의 따님으로 어머니와 단 둘이 월남해 갖은 고생을 하다 이화여고를 마치고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했으나 신동엽과의 결혼생활을 위해 학교를 때려치우고 부여까지 내려가 양품점을 하며 남편을 먹여 살리던 여인으로 지금은 명륜동에 있는 짚풀생활사박물관장으로 있다는데, 이이의 호가 추경秋憬이다. 신동엽이 비록 짧은 생을 살았지만 아내를 두고 저런 시 한 수 남길 수 있었으니 세상사 큰 아쉬움은 없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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