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여자 대산세계문학총서 91
아리시마 다케오 지음, 김옥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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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코’라고 하는 열아홉 살의 젊은 아가씨. 1년 전 조선 땅에서 청일 전쟁이 벌어지고 이 전쟁터에 맨몸으로 펜 하나만 든 채 투신해 날마다 특종을 보도한 반半 영웅적 이름을 떨친 젊은 기자가 있었으니 이름을 ‘기베 교코’라 했다. 1년이 흘러 기베가 도쿄로 귀환했을 때 당시 저명한 의사의 아내이자 요코의 어머니 오야사 여사는 도쿄 기독교부인동맹의 간부 회원으로 출중한 젊은이들을 자주 집에 초대해 밥을 먹이고는 했던 바, 당연히 ‘천재기자’라고 불린 기베 청년도 명단에 포함이 됐었다. 요코가 비록 스물 전이기는 했지만 이미 당돌하고, 교만하며 선민의식에 꽉 찼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젊음을 즐길 줄 아는 재능을 지녀서 이미 숱한 남성들과 교제를 경험했던 터였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볼 때 일단 애정을 허락하면 남자들이 어떻게 변하는지 거의 직감적으로 알고 있어서 수컷들이 잔뜩 독이 올랐을 즈음해서 야멸스럽게 상대를 걷어차며 묘한 흥분을 느끼고는 하는 매우 특별한 취미생활에 맛을 들였다.
  이런 경력을 지닌 요코 앞에 기베가 등장했는데, 이번엔 탁월한 청년이라고 알려진 기베와의 교제를 어머니가, 틀림없이 질투라고 단정할만한 이유로. 둘의 사이가 멀어지게 하기 위해 갖은 방해를 서슴지 않는 거였다. 요코는 이에 반발해서 곧바로 기베의 하숙방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리고 하야마(葉山)에 있는 작은 집에 신혼살림을 차린다. 청일전쟁이 1894년. 19세기 말의 동아시아에서 결혼한 상류층 남자들이 아내를 대하는 일반적인 관행을 염두에 두어야 하리라. 살림을 시작하자마자 사랑은 곧바로 냉각하기 시작했고, 기베는 지극히 평범하고 나약하고 박력 없는 천생 서생에 불과한 것이 극명하게 증명이 됐을 뿐더러, 생계마저 은근히 요코에게 떠넘기는 둔감한 도련님이어서, 본능적으로 물질적 욕망이 충일한 요코는 도무지 견디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고 만다. 결국 이들은 짧은 혼인관계를 서둘러 취소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몰린다.
  이혼을 한 후, 요코는 기베의 딸을 낳는데, 누구에게도 아이가 기베의 자식인 것을 알리지 않는다. 심지어 어머니 오야사 여사에게도. 하지만 외할머니는 친부가 누구인지 알았지만 책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혼 후 요코는 광란의 삶을 몇 년 구가한다. 숱한 남자들과 밤을 보내고 쉽게 헤어져, 몇 년 후 갑자기 불쑥 나타난 남자가 자신의 영혼을 담아 사랑한다고 울며 호소하는 경우가 생겨도 요코는 남자의 얼굴은 물론이고 언제 어디서 관계를 맺었는지도 도무지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 그러다가 ‘기무라’라는 젊은이가 나타나 어머니의 추문을 적극적으로 무마해주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다. 이민에 앞서 이제 죽음의 침상에 누운 어머니 오야사 여사 머리맡에 나타나 요코와 결혼하고 싶다고 하여 가족회의의 허락을 받아, 요코는 자기 의견과 아무 상관없이 요코하마에서 시애틀로 가는 여객선에 오른다. 때는 19세기 말. 이 점에 유의하시압.
  시점은 이제 1901년 늦여름과 초가을 사이. 이후 1년 동안 요코의 스토리가 책의 척추를 이룬다.
  20세기가 막 시작한 일본이라는 사회. 여성의 입장에서는 거의 모든 결정과 생활과, 수입과, 이동을 남자의 도움이나 결정에 따라 해야 했던 시기였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리라. 이런 시기에 요코라고 하는 팜 파탈이 등장한다. 요코는 미국에 있는 약혼자 기무라의 절친한 친구이며 아직 동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확실한 고토를 유혹하기도 하고, 여객선의 건장한 체격과 완력의 사무장 구라치 씨의 털이 숭숭 난 가슴 피부의 냄새를 맡고자 그의 내의에 얼굴을 파묻기도 하는 특이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요코는 당장 내일 어떤 불행이 닥칠지언정 눈앞의 환락과 쾌감과 단발마를 버리지 못하는 인물. 시애틀로 향하는 여객선 안에 특별히 속물적인 귀족 다가와 씨 내외가 영 불쾌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코는 바로 어제까지라면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계급인 사무장 구라치 산키치를 자신의 객실로 불러들여 무아지경의 환희에 빠져들고 만다.
  여태 경험하지 못한 환락을 경험한 요코는 곧바로 약혼자 기무라를 떠올린다. 기무라가 어쨌다는 거야? 돌봐야 하는 두 동생? 미국? 내 딸 사다코가 도대체 어쨌다는 건데? 내내 내게 엄습했던 불안이 뭐가 대수야. 도사리던 자존심이 도대체 뭔데? 그리하여 요코는 시애틀에 정박한 배에서 내리지 않고 그 배를 타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다. 단 하나, 털이 숭숭 난 큰 가슴을 지닌 거대한 체격의 구라치와 함께 빠질 수 있는 환락을 위하여. 구라치에게서 아내와 세 딸을 떨쳐버리게 하고 오직 자신이 그를 독점하기 위해서.
  스토리는 여기까지. 1부를 아주 대강 요약한 정도다.
  읽어보면 어디선가 본 듯한 구성과 장면과 에피소드들을 발견할 수 있다. 환락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따라 좌우를 둘러보지 않고 달리기만 하는 경주마처럼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모르고, 감안하지도 않고,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상대의 피부와, 냄새와, 존재와 궁극적으로 환락을 포함한 사랑을 향하는 질주. 그렇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풍미하던 자연주의적 전개가 독자에게 ‘읽는 재미’를 주기는 한다. 당연히 질주의 끝에는 비극이 있을 것임을 책을 읽는 초반부터 알게 되지만 결과를 미리 안다고 해서 재미가 줄어든다는 법도 없다.
  책이 이제 품절이라 헌책방에서 산 것인데, 생각보다 재미있고, 표지보다 매력적인 ‘뽕짝’, 트로트다. 은근히 끌리는 장르. 만일 이 책을 <실락원>의 와타나베 준이치가 대강 두 배의 분량으로 늘여 썼으면 어땠을까? 아마 도쿄 인근의 종이 값이 천정부지였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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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6-08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읽으셨군요! 저도 이 책 예전에 중고로 어렵게 구해놨어요. 아직까지 *구해놓기만*..... ㅎㅎㅎ
폴스타프 님 글 보니 예상처럼 재미있을 거 같습니다.

Falstaff 2020-06-08 09:42   좋아요 1 | URL
ㅎㅎㅎ 일제 자연주의 소설입니다!
재미있어요. 근데 좀 오래된 소설이라, 글쎄 짜릿한 묘사가 안 나오네요.
내 그것만 나왔어도 별 다섯 개 다 주는 건데 말입지요. ㅋㅋㅋㅋㅋ
 
거꾸로 대산세계문학총서 59
조리스-카를 위스망스 지음, 유진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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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리스-카를 위스망스. 처음엔 당대의 자연주의자 에밀 졸라와 뜻을 합쳐 서민들의 생활상을 소설로 풀어갔다고 한다. 그러다 졸라와 문학적으로 결별하고 위대한 벨 에포크 시대를 맞아 본격적으로 세기말 적 경향의 작품을 썼다는데, <거꾸로>를 읽어보면 이런 작가가 어떻게 졸라와 한 그룹을 이룰 수 있었는지 도무지 상상이 안 된다. 게다가 이 <거꾸로> 또는 <역로逆路 A rebours> (1884)를 기점으로 위스망스 특유의 데카당스 문학을 쓰기 시작했다면, 어떻게 단번에 이렇게 돌변할 수 있었는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문학, 특히 소설은, 만일 이렇게 말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크게 나누어 졸라 식 소설과 위스망스 식 소설로 구분한다. 졸라는 자연주의-사실주의-현대적 리얼리즘의 길을 가고 위스망스는 데카당스-초현실주의-모더니즘을 향한다. 물론 세기 말 프랑스의 두 거장을 예로 했을 뿐 전 세계의 문단에도 비슷한 대표선수들은 있었겠고, 위의 분류는 거칠게 나누었을 뿐 사실은 훨씬 더 많은 장르로 확장 번식했을 터이다.
  위스망스의 <거꾸로> 속에는 작가가 주장하고 있는 두 가지가 확실하게 눈에 보인다. 하나는 세기말적 퇴폐주의, 혼란, 폐허, 염세, 기타 등등과, 다른 하나는 프랑스 문학 특유의 댄디즘, 즉 자신이 얼마나 아는 것이 많은지 과시하고 싶은 충동, 여기서 나오는 무수한 상징, 은유, 상상의 체화 같은 것. 역자 유진현은 작품 해설 첫머리에서 “광범위한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지는 않지만 소수의 독자들에게서 애독되는 소설을 ‘컬트 소설’이라” 부르는 것이 가능하며 조리스-카를 위스망스의 <거꾸로>가 이 호칭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작품이라 설명하고 있다.
  이 작품은 1884년에 출판했고, 글을 쓴 약 20년 후에 위스망스가 직접 쓴 ‘출간 20년 후에 붙인 서문’ 스무 페이지가 앞에 달려 있다. 서문은 처음에 조금 읽다가 말았다. 잘 나가다가 종교적 논의가 내 이해를 넘어설 만큼 깊어지는 바람에. 서문 뒤에는 또 ‘일러두기’ 열 쪽이 붙어 있다. 대강 눈으로만 읽고 드디어 본문 제 1장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일러두기’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냥 ‘일러두기’가 아니라 주인공 장 데 제쎙트 공公과 가문의 내력이 망라되어 있었으니.
  프랑스 귀족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진짜 귀족하고 야매 귀족. 야매 귀족이라고 하는 건, 나폴레옹 1세 시절에 전투에서 한 번 공을 세우면 아무 특권도 없이 호칭만 남작, 두 번 세우면 자작, 뭐 이렇게 던져주던 것이고, 진짜 귀족이라면 대개의 경우 데 제쎙트 가문처럼 체격 좋은 군인이나 험상궂은 용병 출신으로 프랑스 땅에 들어와 큰 공을 세워 광활한 영지와 더불어 세금 등에 관한 무시무시한 특권과 함께 작위가 주어진 가문을 말한다. 데 제쎙트는 무려 앙리 3세 이전부터 봉토와 더불어 루릅스 성에서 기거하며 작위를 유지한 공작 가문이며 우리의 주인공 장 데 제쎙트는 이 가문의 마지막 남은 적장자다.
  그래 원래 덩치만 큰 군인이나 용병 출신이지만 누대를 걸쳐 최상의 교육과 예절, 호의호식으로 단련이 됐을 뿐만 아니라, 유럽의 여러 귀족 가문이 그렇게 했듯 무려 2백 년 동안 혈통의 순수함을 간직하기 위해 남매간 혼인을 유지해, 강건했던 체력의 마지막 남은 활력까지 모두 소진해버려 19세기 말에 접어들어 드디어 최고 귀족의 특징인 나약하고 선병질적이고 가느다란 골격을 갖고 만다. 이게 우리의 주인공 장 데 제쎙트.
  예수회 신부들의 학교에 입학해, 이제 남은 거라곤 괜찮은 지능 말고는 없는 데 제쎙트는 딱 하나 라틴어에 관한 한 아주 빠른 속도로 통달을 하고, 나머지 과목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럼에도 워낙 떠르르한 가문의 자제라 예수회 신부들은 고이 졸업을 시킨다. 열일곱 살에 아버지가 운명하고, 어머니는 깊은 병에 들어 루릅스 성의 어두운 방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이제 스무 살이 되어 재산을 마음대로 처분할 자격이 생기자 처음에는 최상위 귀족들의 사교계에 입문했다가 곧바로 환멸을 느낀다. 이어서 젊은 귀족 자제들과 어울려 오페레타, 경마, 도박에 심취한 일 년을 보낸 끝에 또 싫증을 느끼고 다시 문인, 자유사상가, 부르주아지 이론가, 자유주의자등과 교류하지만 이들의 본질이 열등하고 탐욕스럽고 후안무치한 청교도에 불과하다는 결론은 내린다.
  여기서 주목. 진짜로 문인, 화가, 자유사상가, 부르주아 등과 함께 어울려 소설가, 미술비평가 등으로 활약한 조리스-카를 위스망스가 정말 이 부류의 후안무치하고 탐욕스러운 본질을 느껴 그들과의 연대를 깨고 이 <거꾸로>를 썼을까? 그랬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위스망스는 <거꾸로>의 ‘일러두기’ 장章을 통해 적어도 문학적으로는 졸라 일당들과 완벽한 결별을 선언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여간 이들과의 교류를 끝으로 데 제쎙트는 인류에 대한 경멸의 단계로 접어들어 은둔지에 관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고, 때마침 여자라는 열정만이 이런 총체적 멸시에서 그를 구원할 수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상상 속에서 숱한 여성편력의 단계로 접어든다. 그래서 결국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결핵인지 매독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끝날 때까지 아리송한 질병과 기진맥진, 결국 껍데기만 남은 무성욕, 무기력의 상태. 때마침 자기 재산의 대차대조표를 작성해보니 그간 무분별한 사치와 지출과 방탕한 생활로 상속재산을 거의 탕진한 걸 알고 이제 마지막 남은 루릅스 성을 팔아 파리 근교 퐁트네 오 로즈 마을의 언덕 위에 있는 작은 저택으로 이주해 그곳에 칩거하기에 이른다. 여기까지가 ‘일러두기’다.
  본문이 시작하면, 이제 본격적으로 데카당스 적인 세기말적 묘사와 일찍이 위스망스 이전엔 별로 읽어보지 못한 노골적 댄디즘, 즉 잘난 척의 향연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1장에서는 저택의 데코레이션과 ‘일시적으로 죽어버린 정력을 기리는 부고만찬’에 관해서이며, 2장부터 끝날 때까지는 과학의 세기로 불리는 19세기 말 벨 에포크 시대답게 “인간은 나름대로 자신이 믿는 신 못지않게 잘 창조했다.”는 신념으로, 인공적으로 만든 모든 것들에 대한 찬사가 등장한다. 물론 다분히 엽기적이다.
  3장에서는 라틴어와 라틴어 문학에 관한 다양한 관심을 표명하는데, 만토바의 백조라고 불리는 베르길리우스를 고대 로마가 배출한 가장 끔찍한 현학자, 지독한 3류 문사라고 비난하는 반면에 페트로니우스를 예리한 관찰자, 섬세한 분석가, 대단한 묘사가이며 로마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뚝 떼어낸 사실주의자라고 상찬하기도 한다. 그의 라틴어 문학에 관한 조예는 로마 멸망 후 기독교에 의하여 라틴어가 변질, 왜곡되고 급기야 성경 말고는 아무데도 쓰이지 않을 때까지 설파를 하는데, 이 화려한 댄디즘이라니.
  많은 이들은 4장에서 나오는 거북이 등가죽의 세공하는 장면을 좋아하는 것 같다. 데 제쎙트는 거북이 등을 황금박피로 감싸고 그 위에다가 보통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갖은 보석으로 꽃 그림 모자이크로 만드는 장면이 나온다. 예를 들어 잎사귀는 진하고 선명한 녹색 보석으로 금록수 감람석, 녹색 감람석으로, 잎새는 검붉은 색의 철반 석류석, 우랄산 석류석, 다발 하부 원경의 꽃은 청회색 나는 구리성분 함유물이 침투한 서양옥, 중심부의 꽃은 실론 산 마노, 황록옥, 사피린 등등. 그런데 정말 육지 거북 한 마리를 사서 등껍질에 황금 바탕의 보석 모자이크를 만들었을까?
  내 생각은, 이 책은 전적으로 위스망스의 뇌 속의 화학적 반응의 결과로 나온 추출물이라서 표현된 내용을 전적으로 믿을 필요가 없다, 가장 화려한 댄디즘 적 표현인 라틴 문학에 관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육지 거북 등껍질의 모자이크도 당연히 퐁트네 저택에 자진 유배된 데 제쎙트의 상상 속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읽었다. 심지어 데 제쎙트가 디킨스를 읽은 다음에 런던에 가보기 위해 파리 역까지 가서 영국식 식당에 들러 마치 런던을 경험해본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배를 타러 가지 않고 다시 집으로 향한 것까지 모두 상상 속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한다.
  이것들, 거북이 등껍질, 모로의 회화작품, 고야의 엽기 무궁한 판화, 판지공장 정원에서 만난 미소년을 상대로 벌인 범죄 실험 등이 데 제쎙트의 상상이 아니라 실제라고 읽는 독자들은 이 작품 <거꾸로>를 가장 대표적인 컬트 소설로 규정할 수도 있을 것이며, 그들의 의견 역시 존중한다.
  하지만 굳이 작가가 작품 속에서 묘사한 모든 것이 정말로 일어났던 것을 써놓은 것이라 믿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작가는 주인공 데 제쎙트를 만들었을 뿐, 그가 정말로 라틴어 문학에 통달을 한 것인지, 거북이 등에다 거금을 들여 장난을 했는지, 귀스타브 모로의 살로메 작품 두 점을 정말 가지고 있는지, 고야의 판화 초본을 가지고 있는지, 이런 건 중요하지 않다. 때는 세기말. 거기다 벨 에포크 시대. 세상에 상상하지 못할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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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6-05 12: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으셨군요. 도전하기 쉽지 않아보여서 책장에서만 잠자고 있는데 ㅎㅎㅎ
줄거리 죽 읽어나가면서 음 이 정도면 재미나겠는데? 했는데 ‘-여기까지가 ‘일러두기’다.‘ ㅋㅋㅋㅋㅋㅋㅋ
졸라와 대척점에 있는 위스망스라니, 꼭 읽어보겠습니당. 심지어 별 다섯 개나 주셨네요!

Falstaff 2020-06-06 14:10   좋아요 0 | URL
책장에 있는 거라면 읽어보셔야지요.
ㅋㅋㅋㅋ 진짜로, 취향에 맞는 소수들을 위한 만찬이라 하겠더라고요. 저한테는 아주 딱이었는데 다른 분께는 잘 모르겠습니다. 실제로도 그리 좋은 독자서평을 얻지는 못했더라고요.
다 복불복이지요 뭐. ^^;;
 
어려운 시절
찰스 디킨스 지음, 장남수 옮김 / 창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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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또다시 디킨스. 디킨스, 솔직히 웃긴 작가다.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읽고 이제 디킨스는 그만 읽자, 해놓고 <황폐한 집>을 읽었고, 이번엔 정말 디킨스 졸업장 받았다고 하고는 또 <어려운 시절>을 헌책도 아니고 새 책을 사서 읽는 건, 혹은 읽게 되는 건 왜 그럴까? 젠더의 문제일 수도 있는데, 많은 여성 독자들이 오스틴이 눈에 보이면 그냥 넘기지 못하고 ‘읽어치우는’ 현상하고 비슷할까? 난 한 번도 여성이었던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그럴 수도 있을 거 같다. 하여튼 재미있는 현상이다. 이런 것들이 오스틴이나 디킨스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자잘한 증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도 든다.
  디킨스는, 읽을 때마다 꼭 ‘청소년을 위한 명작도서’ 가운데 한 권을 읽는 듯한 느낌이 난다. 착하다는 뜻이다. 19세기 작품답게 책의 중간 정도에 이르면 이미 결론이 어떻게 날지 훤하게 보이는 거. 그리고 어김없이 예상 답변을 따라 스토리가 차근차근 진행되는 것 보면서 독자로 하여금, 거봐 내 생각대로 되잖아, 은근히 기분 좋게 만든다. 여기에 당시로는어쩔 수 없이 첨가되는 계몽적 시선이 보태지고. <어려운 시절>도 이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두 명의 부르주아가 등장한다. 한 명은 어려서 어머니가 자신을 잔혹한 할머니에게 떠맡기고 떠나버려 할머니한테 더 얻어터지다가는 죽을 거 같아 도망을 해 뜨내기, 심부름꾼, 방랑자, 노동자, 짐꾼, 등 당시 영국의 최하층 바닥을 박박 기다가 점원, 총지배인, 소규모 동업자를 거쳐 공업도시 코크타운의 상인, 공장주, 은행가 등의 대부호의 자리에 오른 ‘조싸이어 바운더비’라는 인물로 마흔 일고여덟 살의 미혼남자다. 장가를 들지 않아 집안일을 맡아 해줄 일종의 집사를 고용했는데, 나이 많은 과부로 친가, 시가 쪽으로 아직 위세가 떠르르한 가문의 일원인 스파짓 부인이다. 왜 이이를 고용했는가 하면, 남들에게 자신은 세상의 가장 천한 출신임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자기가 수하에 상류계급 명가 출신을 두고 있다는 것을 세상 만방에 고함으로써 극명하게 드러나는 보색대비를 즐기고 있는 거다. 이 두 명은 책에 등장하는 순간부터 덮을 때까지 전혀 개전의 정이 없는 악역을 담당한다.
  또 다른 부르주아는 ‘토머스 그래드그라인드’ 코크타운에서 철물도매업을 하다가 느낀 바가 있어 사업을 접고 학교를 세워 사회사업을 하는 현실적인 인간으로, 어떤 일이라도 감정을 배제하고 현실적인 인간, 원칙대로 사는 인간을 육성하고자 하는 열망에 싸여있다. 슬하에 순서대로 루이자, 토머스, 애덤스미스, 맬서스, 제인, 이렇게 다섯 명의 자녀가 있으며 상상력이 거의 없는 아내를 선택한 이유는 그녀에게 많은 지참금이 붙어 있는, 쉽게 말해 돈 많은 바보라서 이었다. 이이는 나중에 코크타운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대부분을 런던에서 보내는데 책의 실제적 주인공인 맏딸 루이자로 인해 감정 없는 사이보그에서 따뜻한 인간으로 개선되기는 하지만 대가로 자기 이름을 물려받은 큰 아들을 잃게 된다. 물론 어떤 방식으로 잃게 되는지는, 안 알려줌.
  어려서부터 아버지에 의하여 오직 이성의 힘만을 키우는 교육을 받아 세상을 비판 없이 수용하는데 익숙한 주인공 루이자가 점점 자라 열다섯 여섯의 나이가 되자 아래 동생 톰을 데리고 마침 동네에 들어온 곡마단 천막의 구멍을 통해 안을 구경하다가 아버지에게 들켜 혼이 나려는 순간, 감히 교장 선생님에게 이렇게 대꾸한다. “지쳤어요, 아버지.” 그래, 한창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에게 여전히 감정은 완전히 무시한 유일 이성의 교육만 내리 시켰으니 이제 속에서 봄을 생각하는 사춘思春의 감정하고 충돌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 아닌가. 그러나 속절없이 세월이 지나 사춘기도 끝나고 스무 살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저 위에서 등장했던 이제 오십 세의 부유한 남자 바운더비 씨가 자기 친구이자 루이자의 아버지를 통해 청혼을 해오자마자, 전혀 교육을 받지 못한 감정의 활동 없이 그냥 허락을 하고 삼십 년의 차이를 넘어, 전혀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결혼을 해버린다. 행복하겠지? 읽어보시면 안다.
  어린 루이자가 트인 천막 사이로 구경하던 곡마단 속에 광대 주프가 있었는데, 세월이 흘러 늙는다는 건 매우 슬픈 일이어서 이제 늙은 광대를 보고 폭소는커녕 웃어주는 사람도 없고, 게다가 특히 뼈와 관절이 변형되어 능숙하게 하던 묘기까지 연달아 실책을 범하고 만다. 이날도 광대는 묘기를 부리다가 그만 나가떨어져 씨씨라고 불리는 딸 씨씰리아 주프에게 약으로 쓸 각기 다른 기름 아홉 병을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키고는 자신이 키우던 개 메리렉즈만 데리고 사라져버린다. 때마침 이 자리에 있던 그래드그라인드 씨가 씨씨를 후원하게 되어 함께 그의 집 스톤로지에 받아들여 교육을 시키지만 씨씨는 정이 많은 곡마단원들 사이에서 자라서 그런지 숫자 위주로 이성만을 강조하는 학업의 성취에는 문제가 있다. 하지만 씨씨를 통해 그래드그라인드 가족 구성원의 가슴 속에 따뜻한 감정이 조금씩 들어온다는 것을 사람들은 한참이나 지나야 눈치 채게 된다. 씨씨가 등장할 때의 디킨스의 눈길이 얼마나 따뜻한지 나는 씨씨가 주인공이 될 줄 알았다. 그 정도로 중요한 조연.
  다른 중요한 조연으로 마흔 살 쯤 되는 스티븐 블랙풀과 서른다섯 살 정도의 레이첼 커플. 스티븐에게는 부정하고 방탕한 아내가 있어 거의 혼자 살지만 어엿한 유부남이라 천성이 도덕적인 레이첼과 드라이한 사랑(박완서 선생이 쓴 단어 “건조한 사랑” 인용)으로만 맺어져 있다. 그러나 천상의 사랑. 스티븐과 레이첼의 성격 자체도 정의와 선의, 그리고 따뜻한 배려로 서로의 힘든 환경 속에서 맞는 역경을 꿋꿋하게 이겨내려 애쓰는 모습이 짠하다.
  여기에 딱 한 명의 악역 조연만 추가하자. 그래드그라인드 씨의 동료 국회의원의 동생인 제임스 하트하우스. 서른다섯 가량에 잘 생겼고, 외모, 치아, 목소리 두루 휼륭하며, 여기에 예절, 복장 등이 탁월하지만 빨리 싫증을 내는 성향에 특기가 하나 있으니 자신의 불성실을 솔직함으로 가장해 보여주는 일이다. 이이가 또 사는데 싫증을 느끼는 걸 보고 착한 그래드그라인드 씨가 소개장을 써서 사위이자 친구인 바운더비에게 보내는데, 바운더비한테는 젊다기보다 어리고 아름다운 아내가 있는 거다. 그럼 뻔하게 예측할 수 있으니 우리는 그걸 흔히 교통사고라고 부르는 바, 정말 교통사고가 일어날까? 이 책이 출간연도가 1854년. 무대가 19세기 프랑스였다면 교통사고가 나는 건 당연한데 빅토리아 여왕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던 잉글랜드에서도? 이것도 안 알려줌.
  그래도 디킨스가 당대의 다른 작가들하고 구별이 되는 건, 하층계급의 시민들에게 ‘기본적으로’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는 점. 그들의 생활이나 적어도 돈과 밥을 버는 방법과 환경의 개선을 수시로 주장한다는 점이다. 이 작품에 그런 경향이 많이 두드러져, 그러다보니 시시때때로 해학적 묘사가 눈에 많이 띄어 독자로 하여금 미소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현실적 숫자의 인간 토머스 그래드그라인드 씨가 국회의원으로 당선하자 이를 꼬집어 영국식 도량형인 ‘파운드 법 대표, 곱셈표의 대표, 귀머거리, 벙어리, 장님 국회의원’이라고 비아냥거린다. 씨씨가 지진아로 찍힌 이유가, 개당 14.5펜스 하는 모슬린 모자 247개의 값을 암산으로 즉각 말해보라는 교사 맥초우컴차일드 선생의 질문에 답변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린 때문이란다.
  재미있는 작품이다. 그리고 이렇게 또다시, 더 이상은 읽지 않겠다고 각오한 디킨스를 읽었다. 이제 정말 디킨스는 읽지 않을 것이지만 인생이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어디 하나라도 있어야 맹세를 하지, 원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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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0-06-04 19: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익숙한 (게다가 재미있는) 드라마 보는 마음으로 읽어요. 유치해, 라고 입으로 말하면서 신파에 울면서 읽고있더라고요;;;; 계속 두껍고 무거운 걸 사고 (읽고) 있습니다. 물론 제인 오스틴도 함께요.

Falstaff 2020-06-04 20:14   좋아요 2 | URL
그죠, 그죠?
유치하고 뻔한 트로트인데 계속 손이 가잖습니까? ㅎㅎㅎ
 
오버스토리
리처드 파워스 지음, 김지원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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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어 overstory는 우리말로 “삼림의 덮개를 형성하는 엽군”을 이야기한다. 저 광활한 열대우림 또는 온대 밀림의 지상 60미터 이상의 스카이라인. 초록의 지평선을 만드는 거대 나무들의 이파리 파도. 그것을 ‘오버스토리’라고 한다. 이 책은 지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생명체들의 집합으로의 숲과, 숲을 구성하는 거대나무와 이들 속에 터를 잡고 사는 수억 종의 생명체들에 대한 한 인간의 찬사이며 송가이자 반성문이다. 지구 혹은 숲의 나이로 보면 순식간에 자신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들을 멸종시키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아주 가까운 시간 안에 자신들마저 죽음을 향해 질주하게 만드는 호모 사피엔스들의 비지구적, 비생명적 행위에 대한 질타이다.
  리처드 파워스는 이 책으로 2019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우리말 번역본이 나온 때가 2019년 2월이니까 이 책이 2018년 맨-부커 상의 최종 후보, Short list에 올랐을 때 판권 계약을 했을 터이니 출판사 은행나무는 매우 훌륭한 작품을 좋은 가격으로 확보했을 것 같다. <오버스토리>는 퓰리처상을 받을 자격이 넘치고도 넘친다. 모든 것을 자본화의 대상으로 삼아 우리가 사는 지구의 가장 건전한 하층구조, 숲과 잡목과 고목과 균류와 기타 미생물들을 무조건적으로 파괴하기를 멈추지 않는 지금 시대를 사는 모든 비문맹자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7백 페이지에 달하는 장편소설임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하며 꼼꼼하게 읽게 만드는 글의 힘. 책을 읽는 내내 추상적으로 짐작하고 있던 것에 대해 확실한 예를 들어가면서 우리가 지금 얼마나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지를 차근차근 가르쳐주는 등장인물 또는 교사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는 일, 정말 오랜만이다.
  대학에서 사람의 생명을 돈으로 환산하는 학문인 보험통계학을 전공하고 이제 학기말 시험만 끝나면 마지막만 학기를 남겨두게 되는 올리비아 벤더그리프. 70년대 한국어로 이런 학생들을 ‘졸업반’이라고 했다(천승세, <낙과를 줍는 기린> 참조). 올리비아의 취미는 마리화나, 코카인 흡입 등이며 부모의 완강한 반대를 무시하고 데이비와 결혼해버린 것을 후회해서 오늘 경제학과 선형분석 수업 사이의 빈 시간을 이용해 법정에서 데이비를 만나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고 왔다. 역시 마리화나에 취한 몽롱한 상태. 기숙사 꼭대기 방에 올라 샤워를 한 후 나체로 침대에 누워 전등을 끄기 위해 싸구려 소켓 근처를 더듬다가 움켜쥐었고, 하필이면 때 맞춰 소켓의 벗겨진 피복 사이로 아직 습기가 마르기도 전인 올리비아의 몸속으로 맹렬한 전기가 쏟아졌으며, 올리비아는 죽는다. 비명을 지르기는 했지만 아래층에서 TV를 즐기던 학생들은 의례 올리비아의 이상행동쯤으로 생각하고 피식 웃기만 했다.
  70초 후, 갑자기 과부하가 걸린 두꺼비집, 요새 언어로 브레이커가 작동해 스위치가 내려가 전기가 나가고, 놀랍게도 올리비아의 심장이 처음에는 작게 그러다가 점점 크게, 점점 크게 박동하기 시작했고, 오늘 이혼했지만 늘 그랬듯이 한 번 더 싸우고 화해의 잠자리를 하기 위해 기숙사에 들른 전남편 데이비에 의하여 발견되어 올리비아는 70초 동안 죽었다가 부활한다. 70초. 자신의 모든 인생 가운데 겨우 70초. 그러나 죽음을 발견한 올리비아는 마리화나와 기타 자기가 갖고 있던 모든 약물을 변기에 쏟고 물을 내려버린다. 크리스마스와 연말 휴가 동안 기숙사에 홀로 남아 길고 긴 사색에 잠긴 올리비아. 그리고는 며칠 후, 1990년 1월, 아버지에게 전화를 해 이제 학교를 휴학하겠다고, 열여덟 살이 된 이후 거의 처음으로 따뜻한 목소리로 뜻을 전하고 차를 몰아 서쪽으로 길을 나선다.
  할인매장 주차장에서 하루를 보내고 매장에 설치한 TV를 통해 캘리포니아 주 솔러스의 몇 천 년 된 나무를 베지 못하게 시위하는 장면을 발견한 올리비아, 나는 서쪽으로 가야해, 생명체의 40억년 동안 가장 경이로운 산물들이 지금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어, 라고 굳게 믿고 도착지를 정한다. 오하이오 평야지대를 지나가던 올리비아의 차창 밖으로 홀로 거대하게 서 있는 밤나무가 보인다. 거기 쓰인 간판. “공짜나무작품.” 그리하여 거대한 밤나무가 서 있는 집으로 가 이름 없는 예술가 니컬러스 호엘을 만나게 된다. 노르웨이에서 이민 온 고고조부가 브루클린 프로스펙트 힐에 무수하게 늘어선 밤을 따 구워먹으며 아일랜드에서 온 빨강머리 처녀 비 포위스에게 청혼, 결혼한 후 오하이오에 이주해 와 여섯 개의 밤알을 심어 유일하게 남은 나무. 미국 동부에서는 밤나무를 공격하는 바이러스가 발생해 모든 밤나무가 멸종되었으나 고고조부가 주머니에 넣어 가져와 땅에 심온 밤나무는 이곳에서 우람하게 커갔고, 고고조부, 고조부, 증조부, 조부, 아버지까지 76년 동안 같은 장소에서 매달 밤나무의 사진을 찍어 놀라울 정도의 슬로우 샷이 탄생하게 된다. 이 집안의 상속자. 그러나 집과 땅은 그 사이 악마나 악마의 졸개와 비슷한 거대 농장회사에 팔려 두 달 안에 집을 비워야 하는 이들은 거의 모든 것을 땅에 묻고 함께 솔러스를 향해 출발한다.
  1948년 마오의 군대가 들어오기 바로 전의 상하이, 후이족 무슬림 출신 중국인이자 예술학자, 훌륭한 서예가이며 무엇보다 큰 상인인 마 쇼잉은 아들 ‘마 시 수인’에게 집안의 보물인 옥반지 세 개와 루오한(羅漢 또는 阿羅漢)의 초상화 두 점을 건네주고 이제 아들이 살 곳, 먼 먼 동쪽에 있는 대륙, 미국으로 보낸다. 마 시 수인은 미국에서 시 수인 마가 되었다가 윈스턴 마로 최종 결정이 되고, 젊은 시절에 중국에 선교사로 갔었던 백인의 딸 샬럿과 결혼해 딸 셋을 두었으니 첫째가 ‘미미 마’다. 아이들이 다 성장해 집안의 보물인 옥반지와 두 점의 초상화를 미미에게 물려준 윈스턴 마는 어느 날 나무에 기댄 채 자신의 관자놀이에 권총을 쏘아 죽어버린다. 좋은 실력의 엔지니어이자 과장이 된 미미는 12층 사무실에서 내려다보는 포틀랜드의 숲을 보며 일상을 즐겼던 것인데 어느 날 한 순간 숲이 사라지고 만다. 그리하여 포틀랜드 시청 앞에서 격렬한 시위를 벌이던 중 검거돼 베트남 전 참전 상이군인이자 비행 사고로 낙하 중에 반얀나무에 걸려 목숨을 구한 더글러스 파블리첵을 알게 되고, 좋지 않은 일에 연루되어 회사의 이미지를 흐린 대가로 해고를 당한 후 더글러스와 함께 대륙을 횡단해 솔러스에 도착, 아름다운 올리비아를 만나게 된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애덤 어피치는 일찌감치 인류는 끔찍하게 지구에 유해해서 이 종은 오래가지 못할 것임을 알게 되고, 곧 세상은 건전한 지성이자 집단의 지성인 군락과 군집으로 돌아갈 것임을 자각한다. 그러나 그건 자라면서 크게 문제가 되지 못해 대학에 진학해서는 심리학을 전공해 연구논문을 쓰기 위해 행동가들에게 설문조사를 하려고 솔러스에 간다. 거기서 거대한 나무의 지상 30미터 높이에 있는 가지 위에 널빤지 두 장을 이어 붙이고 농성중인 올리비아와 니컬러스를 만나 숲과 나무의 보전을 위한 운동에 접어들게 된다.
  올리비아와 이이를 사랑하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남녀로서도 있겠고 동료로서도 있겠고, 아니면 자연 보존 운동을 하는 이이의 사고방식에 관해서도 있겠는데, 어쨌든 이이를 사랑하는 네 명이 젊은 시절에 벌였던 치열한 생명 운동. 그리고 여태 소개는 하지 않았지만 한 평생을 걸고 생명과 나무와 숲에 자기 인생과 생명을 걸고 연구를 하는 과학자, 살면서 저절로 나무와 생명에 관한 눈을 뜨게 되는 부부와 인도인 부모를 둔 한 불구의 천재 등이 등장한다. 말 하고 싶은 것이 많으나 욕심내지 않고 이쯤에서 그만 하겠다. 이야기하지 않고 남긴 무수한 아름다운 것, 고귀한 것, 장엄하고 겸손할 필요가 있는 것들은 책을 읽어보실 분들께서 직접 발견하는 것이 훨씬 좋을 것이니까. 인간 종種은, 인간 종은, 인간 종은 미안해하고, 불편한 것을 참고, 겸손해야 할 필요가 넘치고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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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0-06-01 12: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작년에 읽을까 말까 고민하다 왠지 손이 안가서 안 읽었는데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평소 제가 관심있게 보는 주제인데 왜 외면했는지 폴스타프님 덕분에 다행입니다. 😊

Falstaff 2020-06-01 12:25   좋아요 1 | URL
예.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오랜만에 아주 꼭꼭 씹어 소화시킨 책입니다. ^^
 
아, 입이 없는 것들 문학과지성 시인선 275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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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시단에 1952년 용띠 시인들이 없었더라면 얼마나 황량했을까. 특히 모더니즘 쪽에서. 전남 해남 출신 황지우, 충남 연기 출신 최승자, 그리고 경북 상주 출신 이성복.
  이성복. 이이의 시집을 읽어보면 참 감각적인 시어로 인해 책마다 감탄하고는 했다. 지금 전문을 외우지는 못하고 부분만 기억해 간혹 독후감 쓸 때도 써먹는 구절이 있다. 《그 여름의 끝》에 실린 <눈물>. “수만 광년 먼 먼 별에서 흐르는 눈물 수만 광년 먼 먼 별에서 이제 막 너의 눈에 닿는 눈물……” 이것뿐인가. 《호랑가시나무의 기억》에서도 아스라한 시구詩句가 얼마나 독자의 염통과 허파 사이에 있는 거, 마음을 후비는지. 그런데 이 시집을 내고는 그만 이성복의 새 시집에 관한 얘기가 없었다. 그 사이에 십 년의 세월이 흘렀고, 우리 시인들이 가끔 젊은 나이에 시를 접는 일이 잦아, 계명대 교수를 하는 이성복이 이제 시업을 접은 것으로 알고 여태까지 살았는데, 천만의 말씀을.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이후에 십 년의 세월을 던져 오늘 독후감을 쓰는 《아, 입이 없는 것들》을 냈으며, 이후에 한 권을 더 냈다고 해서, 그건 일단 알라딘 보관함에 넣어놓았다.
  이 시집은 모두 3부, 125편의 시로 구성되어 있으며, 시들 역시 제각각이라기보다 작은 단위의 ‘소집합’들로 엮어 있다. 이성복의 나이 51세에 출간한 시집으로 이제 시인은 더할 나위 없이 완숙한 경지에 이르러, 나이든 시인이 가끔 그렇듯 그저 자신이 본 것, 경험한 일 같은 걸 그냥 이야기하는 듯이 쓴 시도 보이고, 자신의 가정사인 것처럼 읽히는 주변의 일도 시의 소재로 삼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성복인데, 이게 말이 “여전히”이지 세월이 흐름에도 불구하고 울울창창했던 시절의 감상을 지니고 있기가 쉽지 않은 법. 첫 번째 실린 시 <1 여기가 어디냐고>를 읽어보자.



  붉은 해가 산꼭대기에 찔려
  피 흘려 하늘 적시고,
  톱날 같은 암석 능선에
  뱃바닥을 그으며 꿰맬 생각도 않고
  여기가 어디냐고?
  맨날 와서 피 흘려도 좋으냐고?  (전문)



  척 봐도 저녁노을이다. 붉게 물든 하늘을 본 시인은 그걸 해가 산꼭대기에 찔려 흘린 피라고 노래를 하니 참, 이성복이 여전히 이성복인 게 맞지 않은가. 또 10년 전의 시집 《호랑가시나무의 기억》을 기억하는 독자한테 조금은 뻔뻔하게 자신은 호랑가시나무를 본 적이 없다고 고백을 하면서도 당시와 마찬가지로 아직도 꽃을, 꽃 속에 숨은 가시를 노래한다. <56 푸른 치마 벗어 깔고>.



  이제 곧 창검처럼 솟은 가시들
  사이로 사뿐사뿐 흰 꽃들
  술래잡기하다가
  지쳐 다리 뻗고 쉬려고 할 거야
  잎새들 그 밑에다
  푸른 치마 벗어 깔고
  꽃들이 떨어질까 애태울 거야
  하지만 쉽게 당하지만
  않을 거야, 너무 가벼워
  가시에 찔리지 않을 흰 꽃들  (전문)



  그리고는 곧바로 이어지는 <57 날마다 상여도 없이>에서 “나는 죽는 꼴 보기 싫어 / 개도 금붕어도 안 키우는데, / 나는 활짝 핀 저 꽃들 싫어 / 저 꽃들 지는 꼴 정말 못 보겠네 / 날마다 부고도 없이 떠나는 꽃들, / 날마다 상여도 없이 떠나가는 꽃들”이라 노래하면서 앞의 시를 이어가고 있다. 그래서 시들이 개별적이지 않고 소집합을 이룬다고 한 것.
  이런 단정은 26번째부터 시작하는 일련의 시들에 이르러 모더니즘적 절정을 만들어낸다. 좀 길더라도 인용해보자. <26 어떻게 꽃은 잎과 섞여>



  어떻게 꽃은 잎과 섞여
  잎을 핏물 들게 하는가
  마라, 생각해보라
  비린내 나는 네 살과
  단내 나는 네 숨결 속에서
  내숭 떠는 초록의 눈길을
  어떻게 받아내야 할지
  초록 잎새들이
  배반하는 황톳길에서
  생각해보라, 마라, 어떻게
  네 붉은 댕기가 처음 나타났는지
  그냥 침 한번 삼키듯이
  헛기침 한번 하듯이 네겐
  쉬운 일이었던가 마라,
  내게 어렵지 않은 시절은 없었다
  배반 아닌 사랑은 없었다
  솟구치는 것은 토하는 것이었다
  마라, 나를 사랑하지 마라  (전문)



  처음 이 시를 읽을 때, 3행 “마라, 생각해보라”에서 콱 막혔다. ‘마라’가 뭘까? 시인이 프랑스 언어를 전공했다고 설마 프랑스 혁명 당시 목욕하다가 칼 맞아 죽은 장 폴 마라를 가져다 쓰지는 않았겠지만 혹시 또 몰라. 이런 생각까지 했다. 일단 모르는 것으로 하고 시를 다 읽으니 마지막에 가서야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챘다. 마라, 말아라. 금지의 명령어였다. 이성복은 이 금지의 명령을 “생각해보라, 마라”로 두 번, “쉬운 일이었던가 마라,”로 한 번 쓰고 나서 “마라, 나를 사랑하지 마라”고 마무리한다. 근데 이게 이 시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다음 시 <27 네가 왜 여기에, 어떻게>에서 시인은 훨씬 더 문제적 “마라”를 다시 등장시킨다.



  마라, 네가 왜 여기에, 어떻게
  가로등 불빛에 떠는 희부연 길 위에,
  기우는 수평선, 기우뚱거리는 하늘 위에
  마라, 네가 어떻게, 왜 여기에,
  대낮처럼 환한 갈치잡이 배 불빛, 불빛에
  아, 내게 남은 사랑이 있다면
  한밤에 네게로 몰려드는 갈치떼,
  갈치떼 은빛 지느러미,
  마라, 네가 왜, 어떻게 여기에  (전문)



  이후 <28 내 몸 전체가 독이라면>에서 다시 “마라, 네 눈 속에 내가 뛴다 / 내 다리를 묶어다오 / … (중략)… / 넌 믿겠니, 나를 믿지 마라”라고 하며 다시 <29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은>에서도 “(전략) / 마라, 나는 너의 허리를 감는다 / … (중략)… / 지상에서 가장 / 낮은 하늘 네 눈동자 속으로 / 빨려드는 것이다 마라, (후략)”를 거쳐 30, 31번째 시까지 등장한다. “마라”가 내가 이 시집을 읽으면서 가장 주목했던 것. 시집을 다 읽으면 마지막으로 시인 강정의 해설이 나온다. 근데 해설의 제목 자체가 “오, ‘마라’가 없었으면 없었을……”이다. 해설을 읽지 않아서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문가의 해설의 제목이 이렇게 뜨니까 속으로 은근히 기분이 좋다. 근데 뭐 ‘마라’ 하면 ‘말아라’ 라고 하는 뜻이며, 무엇을 (하지) 말라는 것인지는 시마다 조금씩 다르다, 이렇게 좀 쉽게 쓰면 안 될까? 안될 턱이 없다. 시를 읽는 것도, 해석하는 것도 다 독자 마음이니까.
  이성복. 이제 이이도 어느덧 일흔 살을 눈앞에 두었구나. 이젠 어떤 노래를 할까, 궁금하다. 언제나처럼 참 세월이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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