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지 동서문화사 월드북 39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 지음, 신상웅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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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금가지>. 프레이저 필생의 역작. 작업이 워낙 방대하여 작가 스스로 내용을 요약한 축약본. 축약본이라도 나로 하여금 닷새에 걸쳐 정독하게 만든 흥미진진하고 사색할 만하고, 즐거이 다른 분들께 일독을 권하게 하는 걸작. 이런 '책 읽는 즐거움'을 경험한 것이 생전에 몇 번이나 되었는가!

 그러나 주의하시라. 인류학 또는 신화학이 나하고 맞아서 이 책을 이리도 찬미하는 것. 만일 당신이 프레이저가 평생을 바친 이 학문과 맞지 않는다면, 비록 이 책이 유려한 문장과 번역으로 만들었을지라도 한 얘기 또 하고, 비슷한 얘기 보태고, 거기에다 한 번 더 반복하고, 반복한 것과 비슷한 얘기 다시 하는데 질릴 것이고, 책 페이지를 아무리 넘겨도 여전히 같은 부분을 읽고 있는 듯한, 두꺼운 책 읽을 때의 곤혹스러움을 아주 제대로 경험하실 수 있을 것이다. 자, 이 정도면 주의줄 것은 줬으니, 내 말을 믿고 책을 읽어볼 것인가 아닌가는 전적으로 당신 뜻에 달렸다. 아울러 읽고난 다음에 후회를 할 것인가, 뿌듯해 할 것인가도 역시 전적으로 당신 책임이다.


 독후감을 쓰기 위해 어떤 얘기를 먼저 해야 하는가. 이 점이 참 곤란했다. 제목 '황금가지'는 분명히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서 아이네이아스가 죽은 아버지 안키세스를 만나러 지하 명부를 방문할 때, 손전등 대신 쥐고 가던 황금가지를 얘기하는 것으로, 이 책은 그놈의 우라질 '황금가지'가 도대체 어떤 것이고 무슨 의미가 있느냐를 밝히는 긴 탐색에 다름 아니다. 또 하나는 아도니스 신화. 산돼지에 물려죽은 아도니스. 지하 명부로 떨어진 아도니스를 찾아 아프로디테가 명부로 내려가 페르세포네와 담판을 지어, 두 라이벌이 1년의 1/3씩(또는 1/2씩) 나눠 갖기로 한 것에 대한 의미. 책을 관통하는 순환고리, 죽음과 부활, 수확과 파종에 대한 인류학과 신화적 해석이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에, 난 어떤 얘기를 먼저할까를 궁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공평하게 결정하기를, "둘 다 얘기하지 말자". 왜냐하면 지금 쓰는 독후감의 목적은 다른 때와 다르게 이 독후감을 읽는 분께 <황금가지>의 일독을 권유하는 것이기 때문에 책을 읽으실 분이 정말 읽고난 다음엔 어차피 다 아시게 될 것이라서.

 글을 쓰는데는 언제나 어려움이 따른다. 위와 같은 결론을 내리니까 당장 눈앞에 떨어지는 문제가, 그럼 독후감으로 뭘 얘기할 건데? 하는 점. 제일 중요한 두가지를 다, 처음부터 인간살이에 있어본 적도 없는 '공평'이란 이유로 말하지 않기로 하고, 그렇다고 책의 내용을 써놓는 것도 아니라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면, 그럼 뭐가 중헌디?

 이 책은 인류학과 신화학에 관한 것이다. 신화학? 띄어쓰기 한 번 하면 '신 화학'. 새로운 화학? 그럼 주기율표에 뭔가 더 보태졌나? 그렇다. 당신은 모르겠고, 내 뇌에 각인되어 있던 인류사적 주기율표에 대단히 특이하고 강력한 합성원소 하나가 보태졌다. 인류사의 또 다른, 그동안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던 발전 단계. 주술-종교-과학에 이르는 흐름을 관장하는 새로운 원소를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거다. 문제의 새로운 원소는 아직도 여전히 주술-종교-과학 이후에 도래할(어쩌면 이미 우리 앞에 나타난) 다른 형태의 인류의 모습으로 변화하는 과정에 있다고 자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정도면 책 <황금가지> 영업은 할 만큼 한 것 같다. 그럼 책에 나오는 재미난 것 좀 더 얘기한다고 구박받지는 않겠지.

 289쪽에 말레이 반도의 어떤 부족이 행하는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주술적 처방'에 관해 써놓았다. 그게 대단히 아름다워서 소개한다.


"이제 막 떠오른 달이 동쪽 지평선에 붉게 떠올랐을 때, 바깥에 나가 달빛을 받으면서 왼쪽 엄지 발가락 위에 오른쪽 엄지 발가락을 포개고 오른손으로 나팔을 만들어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나는 화살을 쏜다. 내가 화살을 쏘면 달빛이 흐려지리라.

 나는 화살을 쏜다. 그러면 햇빛도 흐려지리라.

 나는 화살을 쏜다. 그러면 별빛도 흐려지리라.

 그러나 내가 쏜 것은 해도 달도 별도 아니다.

 마을의 그 아가씨, 그녀의 마음 한가운데이다.

 꼭! 꼭! 그대의 영혼이여, 이리와서 나와 함께 걷자.

 오라, 내 옆에 앉으세요.

 오라, 나의 베개를 같이 베고 잠 자리.


 이것을 세번 되풀이하여 부르고 그때마다 휘파람을 분다."


 왜 왼 엄지발가락을 오른 엄지발가락으로 누른 상태에서 이런 노래를 불러야 주술이 먹히는 걸까? 오른손으로 나팔을 만들어 달빛을 받으면서 아름다운 말들을 세번 외칠 때 왼손은 어디다 두고 있었을까? 왜 한국에선 아들 낳고 싶으면 애 만들 때 아빠가 오른 엄지발가락에 잔뜩 힘을 준 상태에서 사정을 하라고 농담할까? 혹시 말레이 반도의 주술이 한반도까지 이어지는 문화권에서 모종의 관계가 있는 건 아닐까? 어째서 난 이 아름다운 노래를 읽으면서도 이따위 말고는 생각나는 게 없을까?

 아, 나의 고뇌는 갈수록 깊어져만 간다.


 농경시대로 접어든 주술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주술은 강우(혹은 제우制雨)능력이다. 비는 주술사가 얘 비구름아, 이제 비를 좀 뿌려라, 해서 내리는 것이지 자연 현상으로 내릴 만해서 내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비를 충분히 내리게 하고, 과하면 더이상 내리지 않게 하는 게 주술사 또는 주술사가 진화해서 생긴 왕의 능력이었다. 주술사(또는 왕)가 나이먹어 힘이 좀 빠진 듯 보이면 종족들의 손에 의하여 무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 이들의 팔자였는데, 그걸 지금 얘기하자는 것이 아니라, 유난히 재미난 강우 주술 하나를, 읽다가 배꼽이 빠질 것 같았던 걸 소개한다. 비가 오는 거, 하늘에서 물이 떨어지는 현상. 인간의 몸에 합법적이고 가장 자주 물을 쏟아내는 것, 그중에 적출할 수 있는 것이 남성의 비뇨기. 근데 그걸 그냥 적출, 싹둑 잘라내는 거냐고? 에이, 천만에. 다음을 읽어보시라.

 "디에리 족은 할례 때 젊은이에게서 잘라 낸 포피 또한 비를 부르는 힘을 가진 것으로 믿는다. 그러므로 '부족총회'에서는 가뭄을 대비해서 언제나 얼마 가량의 포피를 비축해둔다. 그것들을 늑대나 얼룩구렁이의 기름과 함께 싸서 조심스럽게 감추어둔다. 여자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 포장을 펴보아서는 안 된다. (강우)의식이 끝나면 포피는 효력이 없어졌기 때문에 땅에 묻는다." (제 5장 날씨의 주술적 조건. 110쪽. 괄호는 내가 쓴 주석)

 웃겨 죽는줄 알았다. 할례, 포경수술할 때 잘라낸 포피를 뚫고 물, 즉 오줌이 나왔으니까 그것도 강우주술의 재료로 썼다는 거다. 그걸 책에선 동종주술이라고 하는데(그게 뭔지 궁금하시면 책 읽어보시라), 수년간 뭔가를 싸고 있었던 포피를 잔뜩 모았다가 잘 써먹은 인간을 나도 한 명 안다. 이건 실화고, 이런 야만이 벌어질 수 있는 대한민국 집단은 군대밖에 없다. 내가 복무했던 주둔부대 바로 옆의 의무대에 고등학교 동창이 하나 있었다. 나보다 두달 가량 고참이었는데 군대가서 만났다. 걔네 군의관 한 새끼가 얼마나 내 친구를 괴롭히고 두드려 패고 했는지 얘가 이를 뽀도독 갈더니 사단 병력 가운데 지원자는 누구나 다, 빠짐없이 무료로 할례를 해주고 디에리 족의 주술사처럼 인간의 포피를 냉동실에다 차곡차곡 모아놓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하루 날을 잡아 냉동실 문을 연 친구가 그걸 들고 식당 조리실에 가서 참기름을 잔뜩 친 후라이팬에다가 들들 볶아 귀한 맛소금에다 후추가루 까지 살살 뿌려, 진로소주 한 병 곁들인 다음 문제의 군의관 새끼한테 소고기 맛난 특수부위라고 구라를 치고 상납을 했다. 젓가락으로 하나를 집어 꼭꼭 씹어보니, 씹는 맛이 기가 막힌지라,

 "이게 소고기 어디 부위냐?"

 "그게 제가 휴가나가서 집 앞에 정육점에다 얘기한 거거든요. 이름은 잊었는데 소 한 마리 잡아도 한 줌 나올까 말까하는 진짜 특수부위랍니다."

 "그래? 거 쫀득쫀득하니 맛이 괜찮구먼."

 하면서 내 친구한테 너도 한번 맛이나 봐라, 란 얘기 한 번 없이 혼자서 그 많은 흠흠흠... 조껍데기를 다 처먹더란 거다. 그 다음 부턴 제대할 때까지 한 대도 안 맞았다나? 그랴, 무료할례를 그렇게 많이 해주었으니 내 친구가 복 받은 거다. 나? 아니다. 난 직장생활 해서 번 내 돈 내고 떳떳하게.... 깠다.


 근데 성탄절이 왜 12월 25일, 동지 부근에 있는 줄 아셔? 1월 6일까지 성탄 트리를 달아놓는 이유는?

 다 책에 나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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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9-01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정말 명작이죠. 게다가 흥미진진하기까지. 이런 작품이 정말 고전입니다요. 프레이저 이 양반 정말 대단함. ㅎㅎ

Falstaff 2020-09-01 10:11   좋아요 0 | URL
옙. 말이 필요없는, 꼭 직접 구입을 해서 책장에 꽂아 놓아야 하는 책입니다. ㅋㅋㅋ
 
엘살바도르 엘 보르보욘 - 2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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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4일에 볶은 커피는요, 써요. 쓰기만 합니다. 고소하지도 않고 산미도 없고, 달지도 않고, 그렇다고 청국장 냄새도 없습니다. 그냥 써요. 맛을 못 느끼면 코로나라고요? 전 음성입니다. 너무 많이 볶았습니다. 물론 제 취향에 그렇다는 말입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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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사등 / 기항지 - 원본비평연구 민족문학사연구소 정본총서 3
김광균 지음, 배선애 엮음 / 소명출판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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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4년 개성 출생. 그런데 놀라지 마시라, 열세 살인 1926년에 중외일보에 <가신 누님>을 발표했고, 열일곱 살 땐 동아일보에 <야경차夜警車>를 발표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스물다섯 살, 1938년에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설야雪夜>가 당선하면서 정식 시인의 칭호를 얻었으니 시에 관해서는 무척 조숙했다. 이어 스물여섯에 첫 번째 시집 《와사등》을, 해방 후인 1947년에 《기항지》를 낸 후 1952년부터는 동생의 사업을 이어받으면서 거의 시단에서 떠나다시피 했다 한다. 이 두 시집의 대표작들을 ‘원본비평연구’한 시집이 오늘 읽은 《와사등/기항지》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예비고사, 본고사 시험문제로 현대문학에 관해서는 거의 나오지 않아 시 읽기를 소홀히 했을 거 같았지만, 국어 교사들께서는 그렇기 때문에 다음에 나올 확률이 많다고 학생들을 무지하게 때려잡으며 현대시 공부를 시켰는데, 김광균, 김광섭 비슷한 시인들의 작품은 예외였다. 그래서 그냥 이름만 알고, 소위 ‘이미지즘’이란 장르로 기억하고 훅, 넘어갔다. 이런 시인들 가운데 생각나는 사람들이 <논개>의 변영로,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김춘수, 또 누구누구가 있었지만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나 기억나지 않는다.
  일단 시를 읊어보자. 맨 처음에 나오는 시 <오후의 구도(構圖)> 2연.


  천정(天井)에 걸린 시계는 새로 두 시
  하―얀 기적 소리를 남기고
  고독한 나의 오후의 응시(凝視) 속에 잠기어 가는
  북양항로(北洋航路)의 깃발이
  지금 눈부신 호선(弧線)을 긋고 먼 해안 위에 아물거린다.



  이어서 두 번째 시 <해바라기의 감상(感傷)> 2연


  보랏빛 들길 위에 황혼이 굴러 내리면
  시냇가에 늘어선 갈대밭은
  머리를 흩트리고 느껴 울었다.



  천정에 걸린 시계가 새벽 두 시를 시보하고 있는데,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나는 무엇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일까. 새로 두 시가 새벽 두 시, 맞지? 맞을 거다. 댕, 댕, 괘종시계의 시보를 하―얀 기적 소리라고 치고, 그럼 고독한 나의 사색 또는 ‘오후의 응시’가 ‘북양항로의 깃발’, 먼 수평선에서 크게 원호를 이루는 저 먼 먼 선박으로 향한다는 말씀? 아니어도 좋다. 아니면 어떤가. 그냥 뜻 없는 시어들이 모이고 모여 ‘고독한 나’가 방에 누워 사색에 잠긴 이미지 하나만 독자가 읽어주면 시인으로서는 만족할지도 모른다.
  두 번째 시에서는 한없는 은유의 아름다움. 보랏빛 들길 위에 황혼이 글쎄 굴러 내린단다. 이 때를 맞추어 시냇가에선 갈대들인 또 머리를 흩뜨리고 느껴 운다니. 김광균이야 뭐 애초부터 은유와 직유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시인인 걸 새삼스럽게 이 정도로 감탄하기는 이르다.
  그런데 나는 소위 ‘이미지즘’이란 것이 시인의 심상의 모습 말고 사물을 마치 한 장의 사진처럼 딱 찍어 놓은 듯한 회화적 이미지로도 읽었다. 사실 김광균의 시집은 처음 읽는 것이고 이전엔 조카 교과서에서 하나 정도 ‘설핏’ 읽었을 뿐으로 다소 생소했으나 이 시집을 읽으면서 아, 내 스타일, 다리를 치기도 했으니,



  동화(童話)



  내려 퍼붓는 눈발 속에서
  나는 하나의 슬픈 그림자를 찾고 있었다.


  조각난 달빛과 낡은 교회당이 걸려 있는
  작은 산 너머
  엷은 수포(水泡) 같은 저녁별이 스며 오르고
  흘러가는 달빛 속에선 슬픈 뱃노래가 들리는
  낙엽에 쌓인 옛 마을 옛 시절이
  가엾이 눈보라에 얼어붙은 오후.


  이 시는 두 편으로 구성된 <향수의 의장(意匠)>의 두 번째 편인데, 시인이 찾고 있던 슬픈 그림자를 낙엽이란 추억에 싸인 옛 시절의 얼어붙은 오후라는 회상 속 사진 또는 그림이라는 이미지에서 찾은 것은 아닐까 싶었다. 이런 그림 또는 사진 한 장은 <외인촌(外人村)>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1연만 인용해보자.


  하이한 모색(暮色) 속에 피어 있는
  산협촌(山峽村)의 고독한 그림 속으로
  파―란 역등(驛燈)을 달은 마차가 한 대 잠기어 가고
  바다를 향한 산마루 길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전신주 위엔
  지나가던 구름이 하나 새빨간 노을에 젖어 있었다.



  김광균의 시를 읽어보니 현대 시인이라면 그다지 즐기지 않을 단어인 ‘고독’, ‘슬픔’, ‘울음’ 같은 것들을 서슴지 않고 사용하고 있는데 그게 전혀 흉하지 않다. 아니다, 내가 읽기에 흉하지 않다. 전문가들의 시선을 모르겠고. 흉하기는커녕 한 컷의 사진, 한 장의 그림의 분위기를 이미 충분히 묘사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그런 분위기, 이미지로 애초에 단정하는 단어로 읽히기까지 한다. 시집 《와사등》이라면 대표시가 <와사등>이라 이 작품을 소개해주기 바라시겠지만, 대표시를 소개하면 출판사에게는 여지없이 큰 실례를 하는 것이라 안 되겠고, 이미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그래서 오히려 <와사등>을 젖히고 김광균의 대표 시로 알려져 있는 <추일서정(秋日抒情)> 전문을 읽어보자.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포화(砲火)에 이즈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케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러나무의 근골(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한 가닥 꾸부러진 철책(鐵柵)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우에 셀로판지(紙)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 저쪽에
  고독한 반원(半圓)을 긋고 잠기어 간다.



  세상에 이렇게 자유롭게 은유와 직유를, 심지어 거칠게 사용할 수 있다니. 뭐 요즘엔 이 시를 쪼개서 현미경을 통해 들여다보며 분석하고, 일률적으로 해석해가며 시험공부를 한다고 하니 학생들은 사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불쌍하다. 그냥 읽으면서 좋으면 좋다, 아니면 아니다, 라고 단순하게 즐길 수 있으면…… 그게 요순시대라고?
  이제 내가 제일 잘 읽었던 시, 가장 공감했던 시를 소개한다. 그리고 이 시가 어떻더라, 라는 말없이 독후감을 끝낸다.



  반가(反歌)


  물결은 어데로 흘러가기에
  아름다운 목숨 싣고 갔느냐.
  먼―훗날 물결은 다시 되돌아오리
  우리 어데서 만나 손목 잡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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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사등 / 기항지 - 원본비평연구 민족문학사연구소 정본총서 3
김광균 지음, 배선애 엮음 / 소명출판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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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단장短章˝ 2연 첫 행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달은 어째 빅톨 씨 같은 얼굴을 하고˝ 여기서 빅톨 씨를 각주 30번으로 하고 설명 하기를, ˝러시아 문학가 빅토르 위고˝ 이거 읽고 웃다가 웃다가 기함을 했습니다. 이 양반이 언제 러시아로 이민 간 거야! 하고요. 별점은 각주와 관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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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예찬 범우문고 235
민태원.이육사 지음 / 범우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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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점은 작품 <청춘예찬>이 아니라, 하드웨어로의 이 책 《청춘예찬》에 대한 평가입니다.

 

 

  교과서에 실린 글은 대부분 당대 최고의 명문일 경우가 많다. 학창 시절에 교과서를 통해 읽고 공부하고 시험문제에도 나와 풀어본 <청춘예찬>. 이 수필을 읽어보기로 결심을 하기까지 매우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머리가 채 커지기도 전에 주위에서 이런 저런 수필집을 권하고는 했다. 수필집의 제목을 밝히기도 송구할 정도의 높은 학문, 숭고한 종교적 성찰, 흉내 낼 수 없는 철학적 깊이로 이름이 높은 분들이 쓴 수필집을 몇 권 읽기는 했다. 그러나 도무지 적응을 할 수 없었던 거다. 이토록 높은 성가를 즐기며 서울 시내 종이 값이 하늘을 찌르게 만드는 베스트셀러 수필집이 어째 내 눈에는, 내가 읽기로, 이제 겨우 대가리에 쇠똥이 벗겨지기 시작한 내가 인식하기로, 한낱 신변잡기나 잡문 또는 낙서, 아니면 괴문서처럼 읽히는 거였다. 은근히 또는 노골적으로 자신의 지적 능력을 자랑하는 동시에, 사실은 잘난 척 말고는 별로 하는 일 없는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의 두뇌활동을 사색이라는 이름으로 윤색한 것에 불과한 책을 읽고 도대체 배울 것이 없는 잡문이라 결론을 지었다. 이후 수필은 안 읽겠다고 결심을 했으며, 수십 년 동안 결심한 바를 지켜왔다. 그러나 올해부터 수필을 조금씩 읽기 시작했다. 변영로의 <명정 사십 년>에 이어 이번에 민태원의 <청춘예찬>. 며칠 후 양주동의 <문주반생기>도 계획에 있다. 수필. 내 생각으로 가장 쓰기 어려운 산문이 수필 같다. 아무나 그저 붓 가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쓰는 것은 수필이라고? 천만의 말씀. 어떤 글이 수필이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을까, 나는 정의도 내리지 못하겠다. 우리는 위대한 수필의 나라에 살아왔지 않은가. 나라의 행정 업무를 담당할 높은 직위의 공무원을 뽑는 과거 시험에 무려 9백 년 동안 좋은 글씨로 쓴 멋있는 수필을 요구해왔던 해동수필국. 그러니 어떤 것이 수필이라고 내가 굳이 따로 설명할 이유가 없다.
  <청춘예찬>. 이런 것이 수필이다. 물론 낡았다.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 ‘오아시스도 없는 사막이다.’라는 표현이 신선한 은유였던 시절에 쓰인 수필이니. 그러나 청춘, 생명을 불어넣는 따뜻한 봄바람의 시절을 이렇게 강건한 문체로 화려하게 쓴 글을 읽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글쓴이 민태원. 갑오농민전쟁이 있었던 1894년생. 약관 20세에 매일신보에 입사해 사회부장까지 하고 기미독립만세운동 이듬해인 26세 때 동아일보로 옮기고 회사의 지원을 받아 와세다 대학에 유학한다. 서른 살에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지내다가 서른두 살에 중외일보 편집국장으로 다시 옮기는 매우 바쁜 사회활동을 한다. 서른여섯 살에 중외일보가 폐간됨에 따라 잠시 실직을 하다가 만주의 친일신문인 만몽일보 창간에 그만 발을 딛어 한동안 친일인사의 낙인이 찍히고 만다. 민태원이 친일신문의 창간에 참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구성원의 면면을 알고 난 후에 곧바로 발을 뺐으며, 이에 문학평론가 윤고종은 오히려 뼈저리게 느끼던 일제의 압박에 대해 음으로 양으로 항거에 몸을 바친 애국문인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는 서문에서 “민우보(민태원의 호 牛步)는 신문기자로서 일제의 거듭하는 탄압 속에서도 꿋꿋이 필봉을 굽히지 않았고……”라고 썼다. 그가 1935년에 폐결핵으로 사망을 했으니 친일행위를 하기에는 시간이 모자랐을 듯한데 그건 역사가의 해석에 맡기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의 초간이 1976년. 민태원의 작품으로 위고의 <레 미제라블>을 일어 중역한 <애사哀史>, 부아고베의 <철가면>을 역시 일어 중역한 <무쇠 탈>과 <죽음의 길>이라는 번역 소설 등이 있고, <어린 소녀>, <음악회>, <천야성> 같은 소설을 창작, 발표한 바 있으나 해방 후 격변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수필 세 작품을 제외한 나머지 자료는 모두 망실되었다고 한다. 그래 이 책에는 민태원의 세 편의 수필 <청춘예찬>과 <월남 선생의 일화> 그리고 잡지 “개벽”의 의뢰로 충남지방의 특징에 관해 쓴 글 <추억과 희망> 이렇게만 실려 있다. 다 합해봐야 30쪽도 되지 않으니 그래도 한 권이 책으로 만들기 위해 이육사의 수필 열세 편을 함께 실었는데, 아뿔싸, 육사의 수필은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이육사 시집》에 전편을 이미 실린 것들이다. 그러니 이 책은 온전히 민태원의 세 수필만 읽기 위한 것이 됐다.


  이제 다시 세월이 흘러 민태원의 작품을 읽어보려 하면 이 책이 아니라 당연히 ‘현대문학’에서 나온 《민태원 선집》을 읽어야 할 것이다. 《민태원 선집》은 범우사가 《청춘예찬》을 찍고 34년이 흐른 2010년에 출간한 것으로 수필은 물론이거니와 그동안 망실됐다고 생각해온 민태원의 창작 소설 세 편과 김옥균 평전 비슷해 보이는 <오호 고균거사嗚呼 古筠居士 - 김옥균 실기>까지 실려 있으니 굳이 내가 읽은 범우사의 옛 책을 선택할 필요는 없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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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0-06-26 10: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청춘예찬의 저자로만 알았지 정작 민태원이라는 분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는데, 덕분에 자세히 알고 갑니다. 소설까지 낸 바 있다는 것도요.
그러니까 저는 범우사의 <청춘예찬>이 아니라 현대문학에서 나온 < 민태원 선집>을 읽어야겠군요.
수필이란 그저 붓가는대로 쓴 글이 아니라는 말씀에 절대 공감합니다. 적어도 자기만의 통찰이 있어야 하고 그 통찰과 사유의 결과가 담겨 있어야 할 것 같아요. 남들이 이미 한대로, 쓴대로 말고 ‘자기만의‘ 무언가 담겨야 한다는 점에서 아무나, 아무때나 쓸 수 있는 글 같진 않아요.

Falstaff 2020-06-26 11:28   좋아요 0 | URL
이 분이 너무 일찍 가고, 남긴 저술이 몇 개 없었던 모양입니다. 소설 역시 당시 소설들이 그래야 했듯이 계몽적 요소가 많이 들어 크게 인정받지는 못했고요.
그래서....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 분의 책을 읽을 만할까, 조금 의심스럽습니다. <청춘예찬>이 명문이라 그것만 인터넷 검색을 통해 읽으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월남 선생의 일화> 같은 거는 국한문 혼용이지만 기미독립선언서보다 좀 쉬울 정도라 아예 사전을 열어놓고 읽어야 할 정도입니다.
수필을 쉽게 알고 막 써낸 수필집 때문에 오랜 동안 멀리 해왔습니다. 어떤 것이 잘 쓴 수필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말씀에는 공감하지만 어떻게 통찰과 사유의 결과를 알아서 읽어야 하는 것인지, 에휴.... 끝이 없습니다. 걍 소설이나 읽고 마는 게 제일 속 편합니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