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불초한 서재를 방문하신 분의 글을 읽고, "오정희 컬렉션"이란 이름으로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한 그이의 책 다섯 권을 박스 세트로 발매한다는 걸 알았다.

 

 

 차례로 작품집 《불의 강》, 《유년의 뜰》, 《바람의 넋》, 《불꽃놀이》, 중편소설 <새>를 한 박스에 담았다.

  오정희. 이이의 작품을 처음 읽은 것이 아마 제2회 이상문학상 수상작 작품집에서 대상작인 <저녁의 게임>이었을 거다. 1979년? 하여간 70년대 후반이다. 오정희를 읽기 전까지 문학, 특히 소설이라고 하는 건 현대를 살아가는 건강한 시민이 그저 교양의 하나로 간혹가다가 읽어주는 예술의 한 형식 정도라고 인식하면서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이이의 첫 단편집 《불의 강》을 읽게 된다. 오정희를 기점으로 나는 문학과 소설이라는 재미의 중독에 빠져 본격적으로 책을 읽게 되지는 않았을까.

 책장을 뒤지면 그 시절에 산 오정희의 책이 다 있다. 취중에 책장을 조금 뒤져 불의 강》과 《바람의 넋》을 찾았다. 한 번 보자.

 

 

《불의 강》은 동네 서점에서 산 건데, 당시 책방 사장은 책을 꼭 비닐로 싸서 팔았다. 처음엔 좋았다. 하지만 오래 보관하면 보시듯이 책 전체가 우글쭈글해진다. 책은 나이를 먹어 조금씩 붓는 반면, 화학물질인 폴리에틸렌은 전혀 변하지 않으니 쭈그러질 수밖에. 196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함으로써 오정희의 데뷔작이 되는 <완구점 여인>이 제일 마지막에 실려 있다. 독특하게도 작품을 쓴 역순으로 만들었다. 1968년 신춘문예니까 작품은 1967년 11월 말에 신문사로 발송했을 것. 이때 이이의 나이 만 이십 세를 넘긴지 한 20일쯤 됐을 때다. 놀랍게도 여성간 동성애를 은유한 작품이면서, 섬뜩한 느낌이 난다.

  내 책장의《불의 강》은 1977년 초판본. 그래 본문은 이렇게 생겼다.

 

 

  세로쓰기. 작은 활자. <미명未明>이란 단편인데 이 작품이 좋아서가 아니라 가운데 쯤에 있어서 사진 찍기 편해 우연히 걸린 것. 책 주위의 갈변은 훨씬 심하다. 사진으로 찍으니 갈변 현상이 두드러지지 않는데 진짜로는 심각한 수준이다.

  그런데, 내가 정말로 오정희에게 빠져버린 건 유명한 <중국인 거리>가 실린 작품집 《유년의 뜰》을 읽고나서다. 괜히 이이의 작품이 이러니 저러니 따따부따할 이유를 나는 알지 못한다. 몇몇 이웃을 비롯해 나를 아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좋은 단편소설을 추천해달라면 당연히 《유년의 뜰》을 이야기한다. 읽어보고 마음에 들면 오정희의 모든 단편소설을 섭렵해보라고,

 내가 가지고 있는 오정희는 위의 "오정희 컬렉션" 다섯 권 모두하고, 도서출판 나남이던가에서 나온 《야회》를 비롯해 《옛 우물》, 《돼지꿈》, 동화책 <송이야 문을 열면 아침이란다> 등이다. 인정한다. 나는 '오정희 빠'다.

  1990년대 후반, 문창과 학생과 문학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벌써 오정희를 읽는 학생이 없다고 했다. 어떻게 단편소설을 쓰려하는 학생이 이이를 거치지 않을 수 있을까가 굉장히 궁금했다. 같은 단편소설이라도 나는 오정희가 다른 어떤 단편 작가들보다 더 좋다. 한 시절, 오정희 때문에 절망에 빠져 소설 써볼 꿈을 접은 젊은이가 한 두명이 아니었다. 그이가 전성기 시절에 쓴 작품들을 모아 컬렉션이 나왔다니 어찌 영업글을 쓰지 않을 수 있을까보냐.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꺼내 본 오정희, 그리고 《불의 강》. 이 책의 뒷면엔 오정희의 20대 모습이 담겨있다. 세월이 참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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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리 2020-04-29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지 <저녁의 게임>을 한글자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 고스톱을 배웠습니다. 물론 글로요.

Falstaff 2020-04-29 16:29   좋아요 0 | URL
진짜 화투로 고스톱을 쳐보셔도 재미있습니다. 빠지지만 않으면요. ^^
 

 

  이 책들이 참 좋았습니다. 근래 읽은 책들 가운데 마음에 든 책 열권을 꼽았습니다. 골라놓고 보니 정말 하나도 빼지 않고 참 괜찮은 책들만 골랐다는 생각이 듭니다. 단편집도 두 권, 시집이 한 권 들어 있는데, 외국사람이 쓴 단편집을 이번만큼 재미있게 읽은 적이 없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좋았습니다. 장편의 경우엔 약간의 책 읽은 세월을 가진 분이 읽기 좋은 작품이 한두 권 포함되어 있습니다만 아니더라도 별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다만 제가 읽기에 감동도 받고, 공감도 하고, 새롭게 느끼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역시 책 읽는 일은 읽는 본인과 작품이 어떤 화학적 반응을 일으키는지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그리 소양이 깊지 않은 제 추천이 믿을 만하지는 않다는 말씀입니다. 어쨌든 책을 선택하시는데 약간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순서는 제가 읽은 날짜순입니다.




1. 유도라 웰티, 《유도라 웰티》, <낙천주의자의 딸>

 

  대표 단편선과 장편소설 한 편. 둘 합쳐서 한 권으로 쳐주시라. 낯설지만 좋은 작품을 쓴 미국 남부 작가 웰티의 단편소설 서른두 편과 장편소설 한 권을 말 그대로 “우연히” 읽는 행운이라니. <낙천주의자의 딸>은 아쉽게 품절이지만 기회가 닿으면 선택하시기를. 《유도라 웰티》, 완고하다는 선입견을 주는 미국 남부에서 곱게 자란 부르주아의 딸 같지 않게 작품 속에서 마치 고딕소설에서 본 듯한 신체 결손자들이 많이 등장하지만 다른 미국의 남부 출신 작가들답게 삐딱하지 않다. 미국식 지방주의 작품 가운데 이만한 단편소설을 읽을 기회도 그리 많지 않을 듯.


 

2. 박재삼, 《박재삼 시집》

 

  가난한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나 평생 아련한 추억과 고독과 궁상스런 삶을 살았던 시인이 빚어내는 깔끔한 슬픔. 이런 것을 일컬어 우리는 “아름다움”이라고 한다. 넘치지 않는 미학, 피를 토함도 없고, 술기운에 기댄 울분도 없고, 스스로를 산산이 헤치는 자해도 없이 자신의 슬픔을 노래했던 시인.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 소리 죽은 가을 江을 처음 보겠네.” 젊음이 가질 수 있는 슬픔이라는 특권. 아, 저 먼 먼 곳에서, 잊고 살았던 당신의 슬픔이 문득 까마득한 바람소리로 당신의 허파를 지날지도 모른다. 한 시절에 시인들은 이런 시를 썼다.



3. 블라디미르 나부코프, <창백한 불꽃>

 

  더 이상 황당한 상상력도 없다. 말 그대로 인간 상상력의 끝을 보여주는 작품. 이 책을 읽다가, “이게 뭐지?” 의문을 한 번 이상 품어보지 않은 독자들 있으면 거수 바람. 겉으로는 영문학자 킨보트가 위대한 현대 미국 시인 존 셰이드가 쓴 <창백한 불꽃>을 출판할 수 있는 권리를 얻어 자신이 머리말과, 존 셰이드의 시, 그리고 무려 280여 쪽에 달하는 킨보트의 주석을 달아 만든 책이다. 그런데 문제는 머리말부터 시작해 독자들이 일반적으로 지루할 거라고 지레짐작하는 주석을 읽으면서 확 깬다. 그리하여 첫 페이지로 돌아가 다시 읽어야 할까, 독자를 진퇴양난으로 몰아가는, 나부코프는 진짜 장난꾸러기.



4. 헤르만 브로흐, <현혹>

 

  한 집단이 전체주의화하는 것을 경계하는 브로흐. 우상 한 명을 만들어 우상으로 하여금 한 커뮤니티를 훌륭하게 이끌고 갈 수 있다는 착각이 땅 위를 덮을 때, 어떤 지경이 벌어지는가 하는 경고. 단지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이웃에게 린치를 가할 수 있는, 과거 순수했던 사람들. 이들의 세계는 오직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로만 국한되어 있다. 한 무리의 생각할 수 있는 포유류에게 헛된 꿈을 주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브로흐는 섬세하게 포착하고 있다. 처음엔 꿈이 헛된 것인 줄 알다가 점차 꿈이 이루어질 것 같은 착각 속에 빠지는 무리들. 불행하게도 그 무리를 우리는 ‘인간’이라고 부른다.



5. 막스 프리슈, <슈틸러>

 

  ‘화이트’라는 이름의 독일계 미국인 ‘나’. 미국과 멕시코에서 살다가 이제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스위스 취리히로 가는 열차 속에서 몇 년 전 스위스에서 있었던 소련 스파이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행방불명 상태에 빠진 ‘슈틸러’라는 인물로 지목받아 스위스 경찰당국에 체포되고 만다. 그런데 문제는 슈틸러라는 인물을 아는 모든 사람, 친척, 친구, 애인들이 ‘나’가 슈틸러임이 분명하다고 증언하고 나선 것. 심지어 내 입장을 대변해야 하는 임무를 띤 국정변호사까지도. 나는 정말 나일까? 나가 한 공간에서만 나이고 다른 공간에서는 다른 이름을 가진 타인일 수도?



6.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약속>

 

  뒤렌마트의 범죄소설은 <판사와 형리>도 읽었으나 <약속>이 더 재미있었다. 왜 ‘더’라고 하는가를 이야기하면 책의 결말을 말해버려야 하기 때문에 그럴 수는 없고, 뒤렌마트, 프리슈와 더불어 20세기 중반 ‘독일어’ 문학계를 흔들었던 인물이 추리물을 썼으니, 우리가 여태 읽어왔던 일반 추리소설과는 아예 기초부터 다르다. 소녀를 대상으로 하는 연쇄살인 사건이 벌어지는데 사건이 당대의 천재로 불리고 박사학위를 소지하고 있는 늙은 형사 마태 박사에게 배당이 된다. 근데, 소설을 시작하자마자 뒤렌마트는 마태의 현재 직업이 취리히 변방 목 좋은 주유소의 주유기 앞에 쪼그리고 앉은 모습을 스케치해버린다. 이 주유원이 왜 이 모양이 됐을까, 하는 내력을 밝히는 건데 뒤렌마트답게 제대로 뒤틀어버렸다.



7. 앤절라 카터, <써커스의 밤>

 

 고딕소설의 끝판 왕. 맨발로 서서 188cm의 키에 넉넉한 몸매. 이런 체격이면 도무지 서커스의 공중그네와는 어울리지 않을 걸? 그러나 천만에.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는 헬렌 페버스에게는 진짜 날개가 달려 있어 날갯짓을 훨훨 몇 번 하면 서커스 천막 꼭대기까지 한 번에 훅 솟구칠 수 있는 것. 헬렌을 캐스팅할 수만 있으면 서커스 단장은 커다란 수익을 잡을 수 있어서 헬렌이 주로 머무는 장소는 호화호텔의 스위트룸이고 가능한 한 최고의 사치를 하지만 원래는 버려진 기아 출신으로 한 창녀가 데려다 키웠다. 이 놀라운 서커스의 여왕이 영국과 대륙, 시베리아까지 누비면서 자신의 것을 하나하나 상실하게 되는데 이게 무슨 뜻인지는 읽어봐야 아실 것.



8.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사탄탱고>

 

  크러스너호르커이의 필력을 유감없이 증명하는 명작. 가을비의 첫 방울이 쏟아지는 추운 새벽, 호흐마이스 벌판을 가르며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데, 근동에는 폐허가 된 성당밖에 없고 그나마 종탑이 무너져 종소리가 벌판을 가를 수는 없는 일. 음울한 종소리와 함께 이 망해가는 집단농장에 들려온 소식 하나. 모두가 이미 죽은 줄 알았던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나가 농장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는 것. 이리하여 집단농장은 다시 한 번 활기가 생기기 시작하고 일종의 착란 현상이 벌어진다. 이것은 누가 읽어도 카프카를 한 단계 확장한 작품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강력 추천.



9. 유디트 헤르만, 《단지 유령일 뿐》

 

  유디트 헤르만, 단번에 이 여자를 사랑하게 만든 소설집. 일곱 편의 단편소설을 실은 단편집. 무대는 독일의 뷔르츠부르크를 포함해 세계 각국. 이를테면 아이슬란드의 여름별장, 베네치아, 체코의 온천도시 카를로비바리와 몰다우가 내려다보이는 프라하, 미국 네바다의 사막, 노르웨이의 트롬쇠를 망라하는데, 각 지역의 자연풍광이 아니라 그곳에 있는 현지인과 독일인, 또는 그곳에 간 독일 사람들 사이의 의식의 흐름을 섬세하게 그리고 있다. 완전 내 스타일. 세상 어디에 있어도 사람들 사이에는 이해와 오해, 관심과 무관심, 신경전 같은 미묘한 의식의 떨림이 있게 마련. 이런 투명한 거미줄을 포착하는 작가의 예리한 눈매를, 나는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10. 알레산드로 바리코, <이런 이야기>

 

  사람의 꿈에 관한 이야기. 자기만의 ‘길’ 즉, 차가 다니는 도로를 만들겠다는 꿈을 꾼 한 사람의 일생을 그린 책. 일찍이 허약한 체질과 체격을 가지고 태어나 어려서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못 생긴 남자 울티모. 그러나 ‘금빛 그늘’을 지녀 어디서든지 돋보이고 다중 속에서도 누구나 쉽게 찾아낼 수 있는 분위기를 가진 사내. 20세기 초에 울티모는 자신의 아버지가 열광했던 차를 타보고, 관찰해본 바, 차와 차 비슷한 유동물체를 근본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길, 도로에 관심을 두면서, 자신만의 길을 만들기 위한 인생으로 접어든다. 삶의 모든 굴곡을 한 도로로 만드는 질료로 사용해버린 울티모. 책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아름다운 상상에 관한 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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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20-03-31 12: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약속>
.. 이거 끌리네요. 보관함 푱~

Falstaff 2020-03-31 12:30   좋아요 0 | URL
ㅎㅎ 예상치 못한 범죄 소설일 겁니다.
정의라고 언제나 이기지는 못한다더군요. ^^;;

잠자냥 2020-03-31 14:04   좋아요 0 | URL
저도 담았어요! 전자책 있으면 더 좋은데 이건 아직 없더라고요.

Falstaff 2020-03-31 14:32   좋아요 1 | URL
유령은 전자책 있던데요.
그것도 담으시지.... ^^

SeungUc 2021-04-21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감사합니다. 고전만 한참 읽고 있었는데, 추천해주신 책 천천히 다 읽어볼게요. 또 좋은 책 있으면 추천해주세요. ^^

Falstaff 2021-04-21 21:33   좋아요 0 | URL
이렇게 얘기해주시니 제가 더 고맙고 ㅎㅎㅎ 조금은 당황스럽습니다.
그래도 기분이 무척 좋습니다. 즐겁게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

SeungUc 2021-04-21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에요. 저 알라딘 책만 사고, 댓글 처음 다는데, 20년 전 센스네요. 보헤미안... 아 부끄럽다.. 폴스타프, 멋진 캐릭터죠. 정말 멋진.. 추천 감사드리구요. 좋은 밤 되시길! ^^

Falstaff 2021-04-21 21:48   좋아요 0 | URL
ㅎㅎㅎ 고맙습니다.
 

 

  마스크 사려고 줄 서보신 분? 나는 줄 안 섰다. 일단 난, 비록 내가 사는 아파트 같은

동, 바로 옆 래인lane에 확진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염자가 아니어서 굳이 KF-94인지 뭔지 하는 마스크를 쓸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날 아는 분께서는 의아하시겠지만 피부가 워낙 약해 마스크만 썼다 하면 주둥이 근처에 트러블이 생겨서 여간해선 마스크, 안 쓴다.

  코로나 생기기 전에 올 봄에도 황사 또는 미세먼지가 처들어올 거라고 아내가 30장 들이 두 박스, 50장 짜리 중국산 한 박스를 사두었고, 사태가 터지니까 아들 내외가 또 한 90매 가량 KF-94가 아닌 그냥 마스크를 가져와 우리 부부가 올 가을까지 쓸 건 다 챙겨놨다. 그래 코로나 터져서 이웃한테 물론 중국산으로 한 스무 장 기증하기도 했다.

  내가 요즘 학자로 드물게 존경하는, 통섭의 학문, 최재천 선생이 건강한 사람은 마스크 쓸 필요가 없다고 설파를 했으나, 불행하게도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출근 자체를 하지 못해, 감염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루 열 시간 이상은 마스크로 얼굴을 뒤덮고 하루 종일 근질근질, 숨쉬기도 기분나쁘고, 피부에 뭣도 나고 막 그렇다.

  지금 마스크는 일종의 에티켓. 나 같은 미 감염자도 마스크를 쓰는 이유는 내 주위의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불안하지 않게 해주는 효과 때문이다. 그러니 건강한 사람은 요일에 맞춰, 아니면 토요일에 약국 앞에 줄 설 이유가 없다. 그냥 아무거나 주둥이 근처를 덮어서 다른 사람한테, 나도 마스크 했다, 당신들한테 내 침 또는 비말, 또는 DNA를 살포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려주면 되는 일.

  근데 희한한 건, 거의 전 국민이 마스크를 쓰는 불쾌한 일을 하면서 거의 아무도 마스크 착용에 따른 불쾌함을 표시하지 않는다는 거. 이거? 시민의식? 좋아. 시민의식일 수 있다. 그래도 뭔가 좀 이상하다. 어째 한 명도 마스크 착용에 따른 갑갑함을 토로하지 않는지, 솔직히 이해하기 힘들다.

  내 마스크 한 번 보시라.

 

 

  이게 하루 쓴 거다. 난 얄짤 없이 하루 쓰면 버린다. 어찌 내 몸의 모든 미생물이 묻은 마스크를 다음날 또 쓰겠는가. 근데 왼쪽 위에 무슨 말 보이시지?


  MERDE


  이거 보고도 아무도 뭐라하지 않는다. 무슨 뜻인지 묻지도 않는다. 영어 단어인줄 알고 괜히 그것도 모른다 고백할 필요가 없으니까. 내가 밥 먹고 사는 회사가 더군다나 다국적기업이니까.

  그러나 이건 불어다. 일찍이 워털루 전투에서 웰링턴 원수의 휘하 가운데 한 명이 프랑스 군에 항복을 권유하자 나폴레옹 아래 한 장군이, 애석하게 그이의 이름을 잊었다, 스탕달이 쓴 <파르마 수도원>에서 나온다, 크게 외치기를, "네 대답에는 다섯 철자면 충분하다, 하고 부르짖던 알파벳이 M.E.R.D.E. 프랑스 말로 "똥"이란 뜻이고, 당시 워털루 전투에서는 "엿 먹어라!" 정도로 해석하면 98점이다.


  난, 건강한 내가 쓸데없이 마스크를 쓰고 하루 온 종일 답답하게 호흡하고, 주둥이 근처가 끈적거리며, 피부 트러블까지 일으키는 것이 너무 싫다.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특히 하루 종일 마스크를 쓰고 일해야 하는 직장인일 경우에. 근데 왜 모두 조용하지?

  그리하여 조그만 목소리라도 난 세상에 외치기 시작했다. 마스크 쓰기 싫다고, 불편하다고.


  MERDE !


  부모자식 간에는 머뭇거림이 없다. 작은 아이가 마스크를 보더니, 아빠(새끼가 스물여덟 살인데 아직도 아빠라고 한다. 내가 다 쪽팔린다. 얌마, 아버지 또는 아버님이라고 불러!) 이게 뭔 뜻이야?

  그래서 일러주었다.

  이게 프랑스 말인데 원래 뜻은 "똥"이고, 지금 상황에서 제일 어울리는 번역은 이래.

  "씨발!"


 


* 이 글은 쐬주에 맥주 마시고 취중에 쓴 겁니다. 내일 아침에 정신차린 다음에 읽어보고 지울 수 있습니다. 없으시겠지만 댓글 달아주시는 분께선, 갑자기 본문이 지워져도 그런가보다,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흑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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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3-23 21: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귀가 아프더라고요. 답답하기도 하고.. 그래도 안 쓰면 회사 사람들 눈치 보이고, 전철에선 더 그렇고. ㅎㅎ 그래서 씁니다. 아마 다들 그렇겠지요. 암튼 어서 이 마스크를 벗을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이 댓글은 지워져도 상관 없습니다. ㅎㅎ

Falstaff 2020-03-23 21:57   좋아요 1 | URL
ㅋㅋㅋ 역시 잠자냥님!
근데 안 지워도 될 거 같아요. 이렇게 얘기하는 인간도 하나 쯤 있어야 좋을 거 같아서요. (흑흑... 제가 이래서 출세를 못했답니다. 왜 이런 이야기 하는 인간이 하필이면 나야!)

케이 2020-03-24 09: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 남편도 사방팔방에 아무도 없을 때도 마스크를 끼라고 해서 소소하게 싸우곤 하는데요. 분명 코로나19는 공기 전염이 아닌데 사람들이 공기 전염마냥 구는 게 너무 이상하고, 또... 사실 코로나19가 건강한 사람이 걸린다고 해서 무조건 죽는 병이 아닌데도 안 걸리려고 노력하는 걸 보며, 보통 사람들의 건강 의지(?) 가 이렇게 강하구나 싶어서 가끔 놀란답니다. 하여튼 귀도 아프고 넘 답답하고 싫어요 정말.

Falstaff 2020-03-24 09:52   좋아요 1 | URL
그럴 때 욕 한 번 콱 해버리세요. ㅋㅋㅋ
캔 주스 손잡이를 뒤통수 대고 거기다 마스크 끈을 걸면 편하다고 해 정말 해봤거든요. 진짜 조금 편하더라고요. 근데 그건 어째 좀 쑥쓰럽더라고요.
저도 사람들의 건강의지가 대단한 건지, 아니면 제가 삶의 의지가 별로 없는 건지 좀 헷갈리고 있습니다. ㅡ.ㅡ

qhrl4 2020-04-02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도를 타고 들어왔습니다.
일상의 이야기인것 같기도 하고 책 이야기 인것도 같고...
읽다보니 재미있어서 댓글 남깁니다.
좀 색다르다고 해야하나요? 보통과는 다른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새로운 지식을 알게되고 제가 몰라던 분야도 알게되고..쉽게 책을 설명해주셔서
몰랐던 것들도 자세하게 재미있게 읽게 되었어요...
읽는 내내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어요.....
이렇게 글 쓰시는 분은 처음이라서 여기저기 구경하게 되네요...
잘 보고 갑니다.^^

Falstaff 2020-04-02 19:04   좋아요 0 | URL
웃, 말씀 고맙습니다.
저야 뭐 완전 아마추어 독자인 걸요. ^^
 

 

 

  출판사 문학동네는 오늘까지 모두 186권의 세계문학전집을 냈습니다. 이 가운데 제가 읽은 책들, 다른 출판사를 통해 읽은 작품은 비단 아무리 좋은 명작이라도 포함시키지 않고, 오직 문학동네 시리즈로 읽은 책 중에서 감명 깊게, 감동하며, 또는 동감하면서 기쁘게 읽은 책들을 소개하려 합니다. 아마추어 독자가 개인적으로 느낀 감상을 기준으로 한 것입니다. 추천이라 생각하지 마시고 그냥 참고만 하시기 바랍니다. 순서는 시리즈 번호입니다.

 


5. J.M.G. 르 클레지오, <황금 물고기>

   

  본격적으로 르 클레지오의 팬이 되게 만든 작품. 작가의 시선은 프랑스와 영국, 부모의 조국 사이에 있지 않고 전 세계를 아우른다. 이 책에선 북아프리카로 추정되는 모처에서 유괴된 소녀 라일라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혹독한 세상 속을 유영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라일라는 유럽, 북아메리카를 거쳐 자신이 낳고, 유괴되고, 학대를 받으면서 자란 아프리카로 다시 회귀하는 한 마리의 물고기로 은유하며 비로소 자신을 찾아낸다. 르 클레지오의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는 수작. 저 사막 넘어 둥둥둥 북소리처럼 울리는 내면의 깊은 곳을 호소하는 정체성의 화음. 이제 먼 먼 곳에서 돌아와 자신의 땅을 밟는 한 인간을 감격적으로 그린다.

 


12.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킴>

  

  키플링은 식민주의자다. 그러나 서정주가 부일 반민족 행위자임에도 그의 시를 읽지 않을 수 없듯이 키플링의 <킴>, 외로운 북서부 인도에서 히말라야까지 펼쳐지는, 한 현명한 라마승과 아일랜드 혼혈 소년의 모험 또는 순례이야기를 빼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 든다. 너무 오래전에 읽어 세세한 내용은 생각나지 않으나 황량하고 아름다운 카슈미르와 야크 떼가 무리지어 풀을 뜯는 히말라야의 장관 속에서 한 소년이 성장하는 광경이 지금도 머릿속에 가득하다.

 


49. 이노우에 야스시, <둔황>

 

  이 작품은 내 평생의 로망으로 남을 둔황 지역을 무대로 했기 때문에 흔히들 말하는 “나 홀로 명작”의 타이틀을 얻었다. 중국이 외세에 의하여 무력으로 개방되었던 19세기, 서양 열국과 제국주의 일본은 둔황지역을 거의 약탈하다시피 무수한 기록물과 예술품을 노략질했다. 작품은 중국이 가장 허약했던 송나라 시절, 과거 낙방생 조행덕이란 서생이 장안 서쪽 저 멀리 탕구르족이 세운 서하라는 나라에 한 번 가보겠다는 것으로 시작해, 사방천지를 둘러봐도 모래벌판 밖에 보이지 않는 사막에서 온갖 고생을 한 이야기다. 서하의 포로로 노예 신분으로 출발, 한족 출신의 용병으로 자리잡는 우여곡절을 쓴 광대한 파노라마. 다시 말하건대, 이 책은 “나만의 명작”이니 당신은 실망할 수도 있으리라.

 


51.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염소의 축제>

   

   우리도 장기 집권하다 암살 당한 독재자의 기록이 있다. 요사는 일본계 페루 사람인 후지모리와 대통령 선거에서 맞붙었다가 영광의 준우승을 한 이력도 있으니 이이가 정치소설을 쓴 건 지극히 당연하다. 그것도 라틴 아메리카를 한 나라, 한 나라씩 골라 아픈 곳을 콕콕 질러대는 놀라운 솜씨가 있다. 이번엔 야구 잘하는 나라 도미니카 공화국의 독재자 트루히요를 골라 도미니카의 국민들로부터 구세주요, 자애로운 국부國父로 알려져 있으나 천하의 엽색가이며 부정축재자에다가 변태의 죽음, 여기에 희생으로 바쳐진 한 여자의 상처가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빼어난 작품.

 


59. 하인리히 뵐,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

 

  기본적으로 하인리히 뵐은 소위 폐허문학으로 구분하고는 한다. 세계대전이 끝난 후 완전히 폐허가 된 독일 시내를 배회하는 우울하고 배고픈 사람들의 모습을 주로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독일어를 쓰는 지역을 묘사하는 걸 보면, 지독하게 규격화되어 있고, 정떨어질 만큼 질서가 잡혀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주인공 슈니어는 이런 질식적인 환경에 염증을 느끼고 질서와 율법에 저항을 하는데, 저항이란 것이 하는 사람에게는 그만큼 고통을 줄 수밖에 없는 일이라 갈수록 좌절이 깊어질 뿐. 뵐은 슈니어를 통해 전후 독일의 하늘을 덮고 있는 기득권과 권력과 질서에 침을 뱉고 있었다.

 


61. 존 치버, <팔코너>

 

  에제키엘 패러것 교수가 자신의 형을 죽인 혐의로 교도소, 팔코너에 입소하게 된다. 교도소. 정문에 들어서면 큰 돌 위에 “이곳에 들어서는 자, 희망을 버려라.”라고 쓰여 있는 곳. 페러것 교수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바로 옆에서 총알이 동료의 목을 관통했으나 얼른 죽지도 않고 극도의 고통을 받는 참경을 보며 다른 전우들과 마찬가지로 자신 스스로 미치지 않기 위하여 위급한 상황에 쓰라고 지급해준 모르핀을 자신의 허벅지에 찌르기 시작해 만성, 또는 습관성 약물중독에 빠진 인물이다. 자신이 형을 죽였는지, 형이 하필이면 자신의 앞에 있는 뾰족한 금속물체를 향해 쓰러졌는지 교수는 증명할 방법도 없고, 자세하게 알지도 못하면서, 재판장이라는 권력은 습관성 마약중독이기 때문에 살인을 했을 거라고 판정을 해버리는 상황. 나 같으면 최후 진술에 이렇게 말하겠다. 조국은 제발 한 번만이라도 나를 위해서 죽어줬으면 좋겠다고. 삼 일만에 부활을 하든지 말든지.

 


69. 애니타 브루크너, <호텔 뒤락>

  스위스의 여름 호텔, 뒤락. 본격적인 휴가철은 벌써 끝나 이젠 호텔에 남아있는 객들이라고는 거액 상속자인 늙은 모녀, 거식증과 불임이 겹쳐 소박을 맞아 스위스의 외진 호텔로 쫓겨난 여인, 고부갈등으로 여름내 호텔에 처박히는 형을 당하는 귀머거리 노파, 그리고 로맨스 소설을 쓰는 주인공이 있을 뿐. 그러나 소설 속에는 별 내용이 없다. 그저 이들이 서로가 관계를 맺으면서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특수성 속에 얽히고설키는 신경줄의 묘사. 이름하여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치닫고 있는데, 이 속에 남자가 한 명 보태지니 신경전은 더욱 미묘한 단계로 접어들게 되고, 결론은 이 속에서도 어떤 이에게는 나를 찾는 작업이 이루어진다는 것.

 


79. 살만 루슈디, <한밤의 아이들>

 

  하필이면 이 책으로 살만 루슈디를 읽어, 단박에 그의 팬이 됐다. 말이 필요하지 않은 명작. 1947년 8월 15일, 인도가 독립하는 날의 자정에, 아무리 인구가 많은 나라라도 그렇지, 한 날 한 시에 무려 1,001명의 아이들이 태어난다. 그것도 모자라 천 명이 넘는 아이들이 전부 개별적으로 특별한 능력을 가졌으며 심지어 일종의 텔레파시로 서로 교감을 할 수 있다. 이거 <엑스 맨> 아니다. 그러나 루슈디의 입심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화자 ‘나’와 천 명의 아이들과 인도와 파키스탄의 현대사를 서로 연결시켜가며 쉼 없이 수다를 떨어댄다. 그리고 이야기는 실제와 환상을 넘고, 동양과 서양을 넘고, 힌두교와 이슬람을 넘는 거대 담론으로 진화해나가는데, 그런 거 다 빼고 이야기 읽는 것 하나만 가지고도 충분히 재미가 넘쳐 숙면의 기회를 박탈하는 수준이다.

 


87. 아달베르트 슈티프터, <늦여름>

 

  아름다운 책. 슈티프터만큼 자연을 멋있고, 아름답고, 경건하고, 친숙하고, 생동감 있고, 건강하고, 태생적으로 익숙하고, 사물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으로 묘사하는 작가를 본 적이 없다. 여기에 회화, 조각, 화훼, 나무, 숲, 곤충, 새, 짐승, 암석, 화석, 암괴 등에 대한 미학적 관점이 놀라울 정도로 진지하다. 19세기 독일 소설가가 그렇듯이 여차하면 지루해질 수도 있는 작가이고 작품이지만 고비만 넘긴다면 당신은 보헤미아가 배출한 최고의 작가가 쓴 대표작을 읽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아무리 묘사해도 부족한 슈티프터의 아름다운 문장과 고급진 의식과 시각이라니. <보헤미아의 숲>과 <숲 속의 오솔길>에 이어 자연을 찬미한 눈부신 작품.

 


98. 존 더스패서스, <맨해튼 트랜스퍼>

 

  590쪽에 이르는 소설책을 일박이일 동안 완독했을 정도로 재미있다. 1900년경부터 1920년까지 뉴욕을 중심으로 서민들의 사는 모습을 그렸다. 이들은 이민선을 타고 와서 살 곳도 없고 의지할 사람도 없고 당연히 돈도 없는 가족들이었으며,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 타지에서 도시로 유입된 도시빈민이기도 했는데, 단 한 끼의 해결을 위해 굴욕도 감수할 수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물론 스스로는 그것이 굴욕인지 모를 수도 있겠고. 이들이 몇 달 동안 이민선을 타고 온갖 고생을 해가며 왔으며, 비싼 교통비를 모으기 위해 농장의 막노동꾼 일을 해서 오긴 했지만, 이제는 뉴욕을 떠나기도 쉽지 않은 진퇴양난의 수렁에 빠져있는 것을 어느 날 문득 발견한다.

 


115. 에밀 졸라, <인간짐승>

 

  목로주점의 주인공 제르베즈 아줌마의 둘째 아들 자크 이야기. 졸라의 <목로주점>은 다른 출판사 책으로 읽었고, 졸라의 <제르미날>과 각축을 했으나 <인간짐승>을 꼽았다. 이유는 제르베즈 아줌마의 삼남 일녀의 일생이 전부 질주, 폭주를 하는데 이들 가운데 질주의 폭력성이 <인간짐승>의 주인공 자크가 제일 심하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기질 상 약간 광기가 있는 자크는 여성과 성적인 접촉을 하려고만 하면 그만 심한 살인욕구가 먼저 치미는 정신적 비정상 상태에 있는 인물이다. 그래 처음부터 비극을 내포하고 있는데 일단 에밀 졸라 특유의 사건의 자연주의적 묘사가 흥미진진하며 자크의 고모 등을 둘러싼 살인사건의 집요함, 특별히 마지막 씬의 대단한 질주가 넋이 나갈 정도로 충격적이다.

 


116. 토니 모리슨, <빌러비드>

 

  <빌러비드>로 처음 모리슨을 만났다. 이 책을 읽고 나서 곧바로 서점을 뒤져 이이의 다른 책들을 골라 제법 읽었다. 흑인 노예를 다룬 많은 책들이 있지만 노예로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딸을 살해함으로써 노예상태에서 해방시켰던 실화를 바탕으로 작품을 썼다고 한다. 흑인 여성이 이런 소재로 썼으니 당연히 관점은 여성 노예에 있는 것이 자연스럽다. 여기에 아프리카 성향의 마법적 요소까지 가미되어 책을 읽는 재미가 더해지는데 내가 읽기로는 문학적 가치 또한 대단해서 <빌러비드>를 시작으로 흑인문학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이 작품이야말로 흑인, 특히 흑인 여성에 바치는 한 판 굿이며 깊은 통곡이며, 새로이 제시하는 전망이다.

 


118. 필립 로스, <미국의 목가>

 

  유대계 미국인이 쓴 유대계 미국인 이야기. 물론 보통의 가정은 아니다.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반전운동의 핵심으로 활동하는 딸을 둔 엄친아 가족. 미국의 부르주아 계급을 형성하는 스위드 레보브는 거기다가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는 엄친아 himself. 그러나 운명의 1968년, 노먼 메일러가 <밤의 군대들>에서 묘사했듯이 미국의 젊은이들과 히피들이 반전을 기치로 펜타곤을 향해 행진할 때, 스위드의 딸 메리는 심지어 폭탄 테러를 일으키고 만다. 미국 내에서 미국에 대한 공격으로 인식한 정부를 충분히 이해하는 주인공 스위드 입장은 어땠을까. 이제 기업체를 운영하는 한편 목장식 저택을 지어놓고 본격적으로 목가적 삶을 즐기려고 하는 순간, 이 가정은 물론이고 온 미국이 거친 혼동 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123. W.G. 제발트, <현기증 · 감정들>

 

  제발트가 쓴 첫 번째 장편소설. 무대는 1800년의 마랭고 전투. 대포를 밀면서 알프스 산맥을 넘은 프랑스 군대가 객관적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극적 역전승을 벌인 나폴레옹의 기념비적인 승전. 이 무리들 속에 마리 앙리 벨이라는 이름의 소년병이 있었으니 그는 나중에 ‘스탕달’이라는 필명으로 19세기를 프랑스 소설의 세기로 만들기에 이른다. 제발트는 후에 나폴레옹의 큰 전투가 있었던 지명을 따서 <아우스터리츠>라는 장편을 쓰고, 이 책에서 독자로 하여금 깊은 사색에 이르게 하는 제발트 표 도보여행의 흔적은 <토성의 고리>로 연결된다. 제발트의 독특한 미적 탐색으로 그는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까지 자신의 발자국을 고스란히 책 속에 담았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당신은 제발트의 영역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131. 아모스 오즈,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

 

  이 책 전에 아모스 오즈를 몇 권 읽었으나 도무지 나하고 코드가 맞지 않아 마지막으로 한 권만 더 읽어보겠다고 마음먹고 골랐다가 그만 빠져들고 말았다. 북유럽 출신의 부르주아 유대인을 조부모, 외조부모로 둔 아모스 오즈. 그가 자신들의 선조들이 유럽에서 어떤 고난을 겪었으며 이스라엘에 정착하게 되었는지, 그 후에도 아랍 연합과 투쟁하는 동안 피할 수 없던 사회적 결핍, 가족과 가정의 물질적 가난과 고통에 대해, 담담하게 적어놓았다. 물론 그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 이야기도 빠지지 않고. 열세 살 때 당연하게도 가장 깊은 유대를 지녔던 어머니가 자살해버린 상처까지. 단 하나, 스스로가 유대인이기 때문이겠지만 팔레스타인 점령을 당연한 듯 바탕에 깔아버린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135. 아룬다티 로이, <작은 것들의 신>

   
  아룬다티 로이의 데뷔작이자 발표한 해 부커상을 수상한 작품. 이후 로이는 소설을 쓰지 않았다가 20년 만에 신작 <지복의 성자>를 냈을 만큼 구두쇠다. 인도 남부의 아예메넴을 무대로 상류계급 가족 내의 친족간 결혼은 필연적으로 유전적 결함을 낳았고, 가끔은 지독하게 머리가 좋은 자손도 태어났으리라. 그리하여 영국 유학까지 다녀왔을 정도의 재원이 지역의 발전을 위해 불가촉천민을 위한 학교도 짓고 공장도 만들지만, 아직 과거 인도의 습성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것은 아니라서 불가촉천민을 무자비하게 두드려 패기도 하고, 역시 인도 유학을 다녀온 개화된 신여성 아내의 귀싸대기를 후려치기도 한다. 이런 구조적 어처구니없음과 난장판을 재미있게 써내려간 로이. 그의 신작이 새로 출간된 것을 알자마자 앞뒤 가리지 않고 사버린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서이다.

 


150. 커트 보니것, <제5 도살장>

 

  빌리 필그림은 선척적 약골로 태어났지만 2차 세계대전으로 강제징집당해 다른 곳도 아니고 거의 마지막으로 격전을 치룬 벌지 전투에 참전하게 된다. 그것이 진짜로 참전이라면. 벌지에 도착하였으나 군복도 안 주고, 철모도 안 주고, 기본적으로 소총도 지급받지 못한 빌리는 동료 세 명과 함께 독일군의 총알을 맞지 않기 위해 상대적으로 감시가 소홀한 독일의 후방지역으로 스스로 들어가 다 늙은 노인병과 소년병에게 고스란히 사로잡히고 만다. 그리하여 빌리를 기다리고 있던 건 엘베 강의 피렌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아름다운 고도 드레스덴 폭격. 시 외곽지역의 방공호에서 드레스덴에 불바다로 변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빌리는 급기야 트랄팔마도어 행성의 외계인에게 납치당해 2년 동안 동물원에 전시되는 참변을 겪는데, 당연히 어디까지나 은유다. 적군 섬멸이라는 미명으로 벌인 학살극, 이런 폭력을 어찌 생각해야 할까.

 


153. 이반 부닌, <아르세니예프의 인생>

 

  아름다운 소설. 러시아 대지주 귀족 출신 가정이 몰락해가는 과정. 이렇게 얘기하면 이미 충분히 읽어본 경험이 있을 듯한데, 몰락하면서도 예전의 소비성향과 사치는 조금도 줄지 않아 도박과 향락에 전념하는 바람에 완전히 파멸에 이르는 순간, 다행스럽게도 자손 없이 부자 고모가 죽는 바람에 거금을 손에 쥐게 되는 가정의 아들. 자신의 이야기를 쓴 듯한 내용임에도 작가가 시인 출신이라 그런지 문장이 사람의 가슴팍을 쥐어짠다. 그저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고 지나고 과거를 고백하는 작품일 뿐임에도 내가 부닌의 이 작품에 한없이 매료된 것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진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나는 독후감 말미에, “불행한 당신, 더욱 불행해지고 싶으면, 어제처럼 내일도 당신의 가족과 친척과 이웃들을 위해 살아라.”라고 썼다.

 


177.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창백한 불꽃>

 

  이 책을 읽는다면, 어느 순간 당신이 지금 극적으로 속아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다시 책의 앞부분으로 돌아와, 이게 진짜인지 거짓인지 머리를 한 번 푸르르 흔들고, 심지어 커피를 한 잔 마시든지, 담배 한 대 피우고 와서 재도전을 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나보코프, 이 문제적 인간이 대단한 구라를 풀었다. 킨보트라고 하는 영문학자가 위대한 현대시인 존 셰이드가 쓴 미완의 시 <창백한 불꽃>을 출간할 권리를 얻어 서문과 무려 280쪽에 이르는 주석을 단 시집을 만든 결과물이다. 아니, 적어도 그렇게 주장한다. 나보코프의 작품 가운데 상당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부르주아 귀족 계급이었다가 1917년 혁명으로 인해 망명할 수밖에 없었던 가족사가 어른거린다. 이 작품도 그런 부류의 소설로 나보코프의 혈액 내에 잔존하고 있는 불안감과 자신의 처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이의 작품이 거의 다 그렇듯이 독서력이 좀 있는 분들에게 권하고 싶다. 이거 명작이다.

 


178. 막스 프리슈, <슈틸러>

 

  쉽게 읽히지 않는 작가 프리슈가 쓴 소설이라 잔뜩 쫄았다가 대박친 책이다. 독일 출신 미국인으로 오랜 세월 멕시코에 살다가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스위스 행 기차를 탔는데, 맞은편에 앉은 사내의 신고로 스위스 경찰에 의하여 스파이 사건에 연루된 슈틸러라는 인물로 지목받은 화이트 씨. 그가 스위스 땅에 도착하자마자 규격, 정형화되고, 모든 것이 거의 완벽하게 정돈되었으며 하다못해 길거리에 장애인이나 거지 한 명 구경하지 못하는 스위스에 질식할 듯한 갑갑함을 느낀다. 검사는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변호를 맡은 국선변호사도 무조건 화이트 씨를 슈틸러로 인식을 하는 와중에 변호사의 권유로 자신이 살아온 일생을 노트 일곱 권에 빽빽하게 적어내려 간다. 동시에 원래 직업이 조각가인 슈틸러라는 인물이 스위스와 파리를 무대로 벌였던 여러 기이한 행각이 삽입되어 독자를 혼동과 미로의 틈바구니에서 즐겁게 해주는데, 적어도 지은이가 프리슈다. 즐겁기만 할 수는 없는 일. 이들 사이에 도대체 어떤 일이 얽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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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2-20 11: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키플링은 저질과 더불어 뼛속까지
제국주의자였죠. 공감합니다.

<염소의 축제>는 제가 모니터로
참여한 작품이라 더더욱 기억에
남네요 :>

하인리히 뵐의 책은 어디에 두었
는지 찾을 수가 없어서 못 읽고
있습니다.

<빌러비드>는 올해 읽었는데 가히
대단한 작품입니다. 블랙 아메리칸
에 대한 진혼곡이라고나 할까요.

커트 보네거트의 책은 아이필드
버전의 번역이 더 마음에 들더라구요.

로이 여사의 책은 어제부터 다시
읽고 있습니다.

Falstaff 2020-02-20 11:26   좋아요 0 | URL
매냐님의 라이브러리도 참 대단합니다.
저도 로이의 새 책에 기대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얼른 읽어야지요. ^^

coolcat329 2020-02-20 12: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중에 읽은 책이 딱 한 권이네요😅-작은 것들의 신. 저도 지복의 성자를 바로 샀답니다. 올해 꼭 읽을 작품으로 빌러비드, 황금물고기를 생각했었는데 또 추가해야겠습니다. 늘 좋은 책들 소개해 주시니 감사하고 잘 읽었습니다.

Falstaff 2020-02-20 12:42   좋아요 1 | URL
별 거 없는 독후감을 좋게 읽어주셔서 늘 고맙지요.

잠자냥 2020-02-20 13:00   좋아요 2 | URL
황금물고기는 정말 좋아요! 꼭 읽어보세요~!

방울딸기 2020-02-21 14: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감사합니다~
황금물고기 얼른 장바구니에 담았어요^^
지복의 성자는 읽고 있는데 너무 좋아요 ㅠㅠ
아직 독서력이 부족해서 읽을 책들이 너무 많네요!

Falstaff 2020-02-21 14:49   좋아요 0 | URL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황금물고기, 탁월한 선택입니다. 좋은 시간 보내실 겁니다. ^^

비로그인 2020-03-10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동네만을 고집하는 이유는?

Falstaff 2020-03-10 21:23   좋아요 0 | URL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페이퍼 보시면 민음사, 열린책들 시리즈도 있습니다.
쇤네가 주제에 뭘 그리 고집이 있겠습니까.

유부만두 2020-03-12 11: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살만 루슈디는 자서전 조차 재미있습니다!
<조지프 앤턴>이고요. ^^
곧 최근작 <2년 8개월 28일>도 나온다고 합니다. 이건 루슈디 책 중 제일 쉽고 귀엽게 재미있어요.

Falstaff 2020-03-12 11:20   좋아요 0 | URL
아, 그렇습니까. 그거 참 궁금하네요. 근데... 출간 전에 미리 읽어보셨군요! ^^

null 2020-03-12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빌러비드, 현기증.감정들, 미국의 목가, 제5도살장 엄청나게 좋아해서 여러번 읽고 원서까지 사서 훑었어요. 저는 영어권에만 치중해 읽는 편인데 다른 언어권의 책들도 많이 얻어갑니다. (장바구니에 줍줍)

Falstaff 2020-03-12 16:18   좋아요 0 | URL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위 사진이 내 방 책꽂이 중에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를 위해 허용한 최대의 공간이다. 몇 권인지 세보지 않아 모르겠고, 한 칸의 길이가 50cm 이니 6미터 분량을 가지고 있는데 기특하게도 서문이나 해설은 모르겠지만, 본문 만큼은 한 문장도 빼지 않고 다 읽었다.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큰 애가 가지고 가서는 그만이다. 며느리가 째째하다고 그럴까봐 돌려달라는 소리도 안 했다. 전부 다 한 권씩 구매해서 특별히 가격 할인 같은 것도 받지 못했다. 반면에 안 읽을 책을 구입하는 우를 범하지도 않았으니 그게 그거다. 이젠 민음사 세계문학 시리즈를 위해 내가 허용한 공간을 다 채웠다. 앞으로 민음사 책을 한 권 사서 읽으면, 한 권 버리면 된다. 나는 장서가가 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다. 나중에 아이들이나 손녀, 손자들이 보겠지, 라고 허튼 희망을 버린지 벌써 오래다.

  당장 다음에 읽을 책 한 권이 있다. 미셸 트루니에가 쓴 <마왕>. 이거 읽으면 위의 책 가운데 한 권을 버려야 하는데, 당연히 다시는 안 읽을 책, 나를 가장 고생시킨 책을 버릴 생각이다. 잉에보르크 바흐만의 <말리나>. 생각만 해도 속이 다 시원하다. (진짜? 라고 묻지는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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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0-02-15 00: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정 경이롭습니다. 그냥 꽂아두신 거 같지 않고 권권의 색채가 의도된거처럼 우아한 파노라마를 이루네요.

2020-02-16 19: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2-16 18: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2-16 1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oolcat329 2020-02-16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아름답습니다...

Falstaff 2020-02-16 20:59   좋아요 0 | URL
에휴.... 욕심인 거 같기도 하고, 뭐 그렇습니다. ^^;;

막시무스 2020-02-16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음사 세계문학이 주인을 잘 만나서 빛을 발하네요! 멋지십니다!ㅎ
저희집 민음사 세계문학에게 미안해 지네요!ㅠ

Falstaff 2020-02-17 10:28   좋아요 1 | URL
주인을 잘 만나긴요.
이제 쟤네들 가운데 몇은 아파트 도서관에 기증할 텐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