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이 사라졌다 알마 인코그니타
기욤 로랑 지음, 김도연 옮김 / 알마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기욤 로랑은 1961년 11월에 북 프랑스 앤 지방의 생캉탱에서 출생한 시나리오 작가, 배우, 소설가이다. 2003년에 프랑스 영화감독, 배우, 시나리오 작가인 상드린 보네르와 결혼해 딸 아델을 낳고 2015년에 이혼했다. 이게 로랑에 관해 알려진 사생활의 전부이다. 장 주네와 협력해 영화도 찍고, 2002년에 첫 소설 <세월의 창>, 2006년에 <내 몸이 사라졌다>를 출간했다. 다수의 시나리오를 썼고, <내 몸이 사라졌다>는 영어 제목 <Happy Hand>로 성인용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 대박은 아니더라도 칸 국제영화제 비평가주간 그랑프리 등 몇 개의 상을 받았다.

  원래 직업이 영화 관련이다. 상상력도 애초 문학으로 시작한 사람들과 방향을 달리한다. “내 몸이 사라졌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죽어 땅에 묻혔다? 그럼 사라지지는 않았다. 땅 속에 있기는 하니까. 화장을 하면 사라진 걸까? 매장의 경우보다 확실하게 많이 사라졌지만 뼛가루와 임플란트나 혹시 관절에 박혀 있을 지도 모르는 볼트 너트는 남을 거 아닌가? 그러면 어떤 경우에 내 몸이 사라졌다고 할 수 있을까? 그걸 탐구해보자.


  주인공 이름은 나우펠이다. 모로코의 수도 라바트에서 태어났다. 라바트 대학에서 고전 프랑스 문학을 가르치고 있는 교수 부모는, 나우펠이 열두 살이 될 때까지 프랑스어라는 바이러스에 감염시키려 최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머리가 나쁘지 않은 나우펠을 이런 환경에서 키우다보니, 열한 살 때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정국이 불안해지자 이민을 결정한 부모를 따라 졸래졸래 따라간 프랑스의, 새롭게 전학한 프랑스 학교 아이들 수준에서 라블레나 볼테르, 거기까지 아니라면 적어도 위스망스 수준이라, 이 아이가 단박에 학급에서, 차원을 넓혀 학교 전체에서 따돌림을 받게 되었다는 것도 이해할 수밖에 없는 거 아냐? 그래도 모로코에서는 부모가 다 대학 교수를 하고 있었으니 적어도 중산층 이상의 삶을 살고 있었을 터인데, 이민 온 지 2년 만에 나우펠의 부모가 사이좋게 드라이브를 즐기던 중 큰 자동차 사고의 한 가운데 끼어 금슬도 좋지 둘이 한꺼번에 별로 고통도 없이, 갔다. 졸지에 고아가 된 나우펠. 다행스럽게 어진 이웃이 있어서, 원래부터 나우펠더러 가지고 놀라고 1차 세계대전 중에 사용하던 전시 측량 키트를 선물했던 적이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학년을 마칠 때까지 함께 살면서 돌봐주기로 했었다. 그런데 아뿔싸, 나우펠의 성장이 부모가 갑자기 죽고 나서부터 갑자기 멈춰버렸다. 이후로 많은 사람이, 매번 그랬던 건 아니고 자주 나우펠더러 나프나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어른의 성숙함이 열두 살의 몸에 갇힌 난쟁이 나프나프.

  그러나 출신이 모로코. 고아가 된 친척 아이를 나 몰라라 남의 집에 맡기는 것을 수치로 아는 나라. 나우펠 앞에 가문에서 유일한 무신론자 사미르 외삼촌이 등장해 조카를 포르트드뱅센 근처 자기 집으로 데려간다. 옆집에 살던 선한 사마리아 아줌마는 어쨌냐고? 그걸로 무대에서 사라졌다. 단역의 설움이 다 그런 거지 뭐. 외삼촌의 집에 갔더니 사촌이 둘 있다. 사촌 형 압데라우프. 동네에선 그냥 라우프라고 부르는 골목의 왕초다. 특히 살아있는 생명체에 불을 붙여 불에 타 죽는 모습만 보면 흥분해 어쩔 줄 모른다. 모르긴 해도 그때마다 사정을 했을 거 같다. 이런 라우프를 우리 조상들이 이렇게 이야기했다. “될 성 부른 놈은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아니나 다를까, 라우프는 점점 자라 동네를 넘어 일대에서 가장 큰 조직의 가장 잔인하고 악랄한 두목이 된다. 그러니 열두 살의 몸을 지닌 헛똑똑이 나우펠이 마음에 들었겠어, 안 들었겠어?

  사촌동생 세에라자드는 또 이게, 나우펠이 보기에, 자기의 주관적 관점을 버리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평가를 해봐도, 세젤예 자체다. 아마 그래서 그랬을 터. 세에라자드가 나타날 때마다 말을 더듬더니 매사에 자신감마저 잃어가기 시작했다. 집안에서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는지에 관심이 없던 술고래 사미르 삼촌은 자기 마음이 내킬 때만 택시 운전을 해서 돈을 벌었는데, 술을 잔뜩 마시고 택시 영업을 하다가 크게 사고를 내는 바람에 교도소에 3개월 동안 들어갔다 나왔다. 출소 후에는 정신을 차렸는지 약물치료센터에 입소해 알코올 중독에서 정말로 벗어났고, 이후 은밀히 활동하는 시아파 회교 지도자 아야툴라가 됐다. 이후 외삼촌은 수염을 기른 극단주의자이자 극빈자 생활보호대상 수급자, 이맘의 수습생이 되어 이슬람 문화센터에 다니기 시작하더니, 자식들과 조카를 코란의 교훈에 따라 교육하기 위하여 나름대로 애를 쓰기 시작했다. 뭐 그랬다는 얘기다. 벌써 처녀 딱지를 떼버린 지 오래인 세에라자드는 더 이상 불의에 휩쓸리지 않게 만들기 위해 집콕 대상자로 점찍었으며 만일 외출을 할 경우엔 나우펠에게 샤프롱의 책임을 지우게 했다. 그래도 불안했는지 서둘러 목타르라는 이름의 합법적 납치자, 신랑으로 선정해 그에게 보내버렸다.


  사촌의 패거리가 이웃의 토고 출신 열네 살 먹은 소녀를 윤간하려고 하는 걸 보고 나우펠이 곧장 경찰에 전화를 해 봉변을 피한 적이 있다. 가만히 있으면 패거리가 아니지. 그들은 나우펠을 붙잡고 물을 끓이더니 그걸 머리 꼭대기에서 쏟았다. 전신 2도 화상을 입어 3주 동안 입원했다가 나오니까 삼촌 사미르는 그를 그리스인 목수 필리파르가 주인으로 있는 7층 꼭대기의 작은 방으로 보내 버렸다. 며칠 살다가 월급에서 집세를 바로 공제하기로 하고 목수의 도제로 들어갔다. 어차피 집은 나우펠에게 우울한 장소일 뿐이고, 알고 보니 집주인 필리파르 씨가 사람이 괜찮아 목수일에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얼마 시간이 지난 후, 이웃 소녀 아미나타가 강간을 당한 후에 불에 탄 시신으로 발견되는 일이 벌어진다. 나우펠을 비롯한 거의 모든 사람은 이 사건이 누구에 의하여 저질러진 것인지 다 안다. 다만 가해질 폭력이 무서워 입을 떼지 못할 뿐이다. 사건 며칠 후, 경찰이 나우펠을 찾아왔다. 저번에 윤간당하려는 토고 소녀를 구해준 적이 있으니 당연히 참고인 조사차 온 거겠지. 왜소한 체격에 어울리지 않는 윤리의식을 가진 나우펠은 예전에 했던 행동을 그대로 반복한다. 결과는? 3개월 후에 법원으로부터 운명의 소환장이 도착하고, 증인으로 출석했으며, 경멸하는 표정으로 피고인 석에 앉은 사촌의 눈길을 받으며 오히려 반발심이 생겨 착실하게 빼놓지 않고,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털어놓는다. 결과는 압데라우프한테 12년 징역형을 선고한다. 다시 말해, 12년 동안 보복의 위험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게 알았다. 법정에서 용감하게 증언을 해준 나우펠에게 희생자 아미나타의 엄마는 상아로 된 행운의 손을 선물하고 토고로 돌아갔다. 그리고 상아로 만든 작은 행운의 손은 누군가가 훔쳐갔다.

  몇 달 후, 여전히 목수일을 배우고 있는 나우펠. 이젠 도제가 나우펠 하나였다. 하루는 나우펠 또래 혹은 한 두 살 많아 보이는 청소년이 와서 하루만 일을 시켜달라고 필리파르 사장한테 사정을 했다. 그래서 다른 일은 시키지 못하고, 예전에 사촌 라우프가 아주 가끔씩 나와 하던 청소일을 시켰다. 나우펠이 보기에 수상했다. 하필이면 왜 이 목공방에 와서 일을 하려고 할까? 혹시 라우프 일에 대해 보복을 하려는 건 아닐까? 며칠 전 비슷한 일을 겪기도 했다. 당하지는 않았지만. 신경이 날카로워진 나우프. 그래도 작업은 작업이니까 일을 계속하긴 하지만 속도도 나지 않고 작업하는 것도 자연스럽지 않다. 그러다 회전날에 나무를 자르는 일을 해야 할 시점이 왔고, 나우펠은 평소 같으면 단번에 능숙하게 처리했을 터인데 더욱 조심스럽게 멈칫, 멈칫거렸으며, 한 순간, 청소를 하던 아이가 나우펠을 슬쩍 민 것 같았는데, 순간, 그의 오른손이 회전하고 있는 날 아래로 쑥 들어갔고, 동시에 일각의 늦음도 없이 나우펠의 몸에서 다량의 아드레날린이 뿜어져 나와 아픈 것도 모르고, 멍하니 필리파르 사장을 바라보다가 한 마디 했다. “제 손이 잘라진 것 같은데요.”

  청소하던 소년은 자신이 구급차를 불러오겠다고 달려 나가 시간을 쓸데없이 소모했으며, 전화를 하고도 교통체증 때문에 구급차가 늦게 오는 바람에 잘린 손의 첨단 부분이 점점 괴사하기 시작해 나우펠은 남은 일생을 오른손을 잃은 상태로 살아야 할 운명을 만나게 된다. 나우펠의 경우에 그렇다는 말씀.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오른손 입장에서 생각해보시라. 이런 경우로 떨어지게 된 것이다.

  “어, 내 몸이 사라졌다!”

  내 몸을 잃어버린 오른손이 내 몸을 찾아 파리 구석구석을 뒤지는 이야기. 걱정하지 마시라. 이 책의 영어 제목이 <Happy Hand>이니.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옆 발자국 문학과지성 시인선 507
조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3년 전, 나는 조은의 시집 《따뜻한 흙》을 읽고 “주된 관심사는 탄생과 삶과 죽음의 사이클”이라고 쓰면서 시인의 “삶의 정체는 어떤 이유로 이렇게 우울과 죽음의 색조화장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증을 넘어 이제 의례 그러려니 할 정도가 됐다.”라고 했다. 가난과 비통과 각혈과 죽음과 괴멸. 이 모든 것들, 이제쯤 뒤돌아보니, 시인이 말했듯이, “정신적 경제적 남루함이 발목을 잡는 시간”이었을 듯하다. 아직도 물살이 만만치 않은 강에다 시인은 하나의 디딤돌을 놓듯이 새 시집 《옆 발자국》을 낸다고 했다. 그렇다. 그러고보니 전에 읽은 시집과 새 시집 사이에 15년이란 세월이 누워있다. 여전히 죽음과 이별과 어둠 속에 있어도 조은은 삶 속으로 간다. ‘가기.’ 그것의 흔적을 발자국이라 부른다. 시집의 제목에 들어 있듯, 이번에 발자국을 노래하는 시가 무척 많다. 첫번째 실은 시도 <발자국>이다.


  영혼을 외면했던

  오늘 내 발자국이

  불에 달군 쇠덩이처럼

  위험해 보인다   (p.7, 전문)


  오랜만이기는 하지만 이제 시인의 집에 소꿉친구가 와서 하룻밤을 자고 가기도 한다. 전편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사회생활이다. 물론 아무리 소꿉친구라 해도 살면서 같은 생각을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사람은 비슷하다. 외롭고 외로운 것은



  느끼든, 못 느끼든



  오랜만에 만난 소꿉친구가

  하룻밤 자고 갔다

  어디에 속하든 지능이 가장 높았던

  나의 열등감을 여러 번 자극했던

  친구는 내게 시집 한 권을 선물했다.


  내가 받아 든 시집은

  한 성직자의 베스트셀러

  그동안 쓴 수많은 시 때문에

  그분은 내게

  언제나 밋밋했다


  부르르 떨다 내리는 주먹

  불길한 월식과 일식

  비틀비틀 가는 발자국

  붉은 손자국이 있는 뺨


  그런 것들에 눈길이 가는 나는

  삶을 예찬하는 그분의

  시에 늘 시들했다


  외롭고 외롭다

  그걸 느끼는 내 삶도

  다르게 느끼는 친구의 삶도   (p.12 ~13. 전문)



  아하, 그렇군. 적어도 조은과 내가 같이 느끼는 건 하나 있군. 천주교 수녀가 쓴 시집을 귓등으로라도 쳐다보지 않는다는 거. 다른 성직자도 마찬가지다. 나는 목사, 사제, 중들이 쓴 시는 안 읽는다. 요즘 중이나 신부가 유튜브 같은 데 나와서 인생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꼴이 하여간 내 눈엔 우습다. 지들이 가정을 이루어 봤어? 발갛게 밤을 태워 보기라도 했어? 아이쿠, 삼천포. 하여간 어디를 가더라도 제일 지능이 높았던 시인한테 열등감을 자극하던 동무라니, 시인은 머리만 좋고 나머지는 부족했나보다. 슬픈 일이다. 머리라도 안 좋았으면 열등감이나마 덜 받았을 것을. 쉰을 한참 넘긴 시인이 이제 돌아보니, 201호나 202호나, 수녀가 쓴 시를 좋아하는 여자나, 그걸 시들하게 읽는 여자나, 사는 건 다 외롭단다.

  외롭지만 외롭지 않은 곳이 한 군데 있다. 201호에서 지하로 내려가면 세상만사 다 끝나는 곳. 노인요양병원. 시인의 어머니도 그곳에서 한 생을 마친 것 같다. <어떤 만남, 어떤 이별>에서 외롭지만 외롭지 않은 장면을 읽을 수 있다.


  내 어머니 빈소에도 / 본 적 없는 사람들이 왔다 / 들고 온 꽃바구니를 / 바닥에 놓기도 전에 구슬프게 울었다 / 양복 차림의 남자도 어깨를 들썩였다 // 그가 너무도 슬퍼 보여서 / 상가를 잘못 찾은 거라고 / 빨리 그들을 돌려보내야 한다고 / 우리는 눈길을 주고 받았다 // 죽은 자의 고독을 잘 알았던 / 그들은 어머니의 병원 친구였다 / 늘 푸르렀던 어머니의 잎 잎을 / 자식들이 하나하나 따냈다는 것을 / 그들은 알고 있는 듯했다  (p.16~17. 부분)


  자식들이 어머니의 잎 잎을 다 따낸 것을 그이들이 어떻게 알았을까? 당연하지. 그이들의 잎 잎도 그이들 자식들이 모두 따버렸거든. 그래서 시인도 앞에서 얘기했지 않는가. “외롭고 외롭다 / 그걸 느끼는 내 삶도 / 다르게 느끼는 친구의 삶도”라고.

  조은의 시가 마음에 들기 시작한다. 전에 “조은”이라면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길 건너 있는 “조은 약국”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이제 시인 조은의 이름도 기억하고 싶다. 시도 많이 쉬워졌다. 저번 시집을 읽고 하여튼 로또만큼이나 나한테 맞지 않는 시인이다 싶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그래, 나는 과한 분비, 죽음, 우울, 슬픔, 술주정 같은 거 싫거든. 그런 걸 노래해도 기어이 삶 또는 사는/살아야 하는 이유가 엿보이는 시가 좋거든.

  그 사이에 시인의 아버지도 죽었다.



  어머니의 장례가 끝난 뒤

  아버지가 말했다

  내가 먼저 죽어야 했는데

  너희들한테 미안하구나


  3년 뒤에도 말했다

  아내가 죽은 뒤 3년을 산 남자는

  오래 산다는데

  큰일 났구나


  어머니가 평생 하찮게 여겼던 것만을

  독차지했던 아버지는

  부축 한 번 받지 않고

  무덤까지 갔다    (<눈물> p. 18~19 부분)



  위 시의 앞부분을 보면, 아버지와 나누어 가져야 할 사랑을 어머니가 독점했다고 나온다. 즉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자사자 사랑했다는 것. 그래서 아버지는 어머니가 평생 하찮게 생각하는 것들만 가졌다는데, 그게 무엇인지, 어떤 종류의 것인지 알려줄 만큼 시인은 친절하지 않았다. 어쩌면 독자는 몰라도 좋은 것인지도. 그러니 우리 독자여, 아쉬워도 아니꼬워하지 말자.

  다시 발자국으로 와서, 모르긴 몰라도 종로구 철거중인 산동네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사 나간 반면, 이사 들어온 가구는 없는 동네에 날이 가면 갈수록 종족을 번성시키고 있는 건 당연히 버려진 개들과 고양이. 개는 버림을 받으면 곧바로 적자생존, 작은 개체들은 큰 개체들에게 잡아먹혀버려 중대형 수준으로 체구가 커진다. 사람한테도 상당히 위협적이다. 혹시 외딴 길을 가다 유랑견을 만나면 조심하시라. 절대로 조심해야 한다. 반면 고양이는 그렇지 않다. 자기들끼리 경쟁하고 구역싸움해도 사람한테 여간해 피해를 주지 않는다. 번식기에 야밤이나 새벽을 가리지 않고 애기 울음소리가 듣기 싫을 뿐. 조은은 고양이를 좋아할지언정 고양이 엄마 황인숙처럼 사료와 물을 주지는 않는 것 같다. 지금 한 이야기와 가장 비슷한 시가 이것.



  발자국 옆 발자국



  눈 내린 골목

  고양이 발자국들


  꽃잎 같은 발자국은

  차 밑으로 빈집 대문 아래로 공터로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선명한 발자국을 따라가자

  누가 막 놓고 간 물그릇에서

  털장갑 같은 김이 오른다

  작은 플라스틱 그릇엔

  하트 별 보름달 모양의 사료


  거기서 작은 발자국은

  맞은편에서 온 사람의 발자국과 만난다

  둘은 나란히 간다


  잃어버린 고양이를 찾아다니던

  저 사람을 여러 번 본 적 있다


  지난 혹한의 날씨에

  굶주린 어미가 새끼를 입에 물고

  목숨을 걸고

  그의 집으로 들어왔다고 했다   (p. 26~27. 전문)



  시집의 제목 <옆 발자국>은 이 시의 제목에서 왔다. 옆 발자국이 사람의 것이냐, 진짜 발자국이 사람의 것이냐? 4연에서 작은 고양이 발자국은 사람의 발자국과 만나서 나란히 간다. 자국이 나란하다고 걸음까지 나란한 건 아니다. 눈 내리고 추운 겨울 밤. 하여간 고양이와 사람은 같은 방향, 조금은 더 따뜻한 사람의 집 쪽으로 갔다. 내린 눈을 발로 찍어 만든 발자국. 이런 것도 있다.



  겨울 아침



  발등을 덮는 눈 아래

  얼어붙은 작은 발자국들

  수북한 눈 위에

  막 찍힌 발자국들


  인간도 짐승도 싫어하는 자의

  얼음 같은 눈빛도

  녹일

  발자국, 발자국 들


  잔돈을 세어

  수도 요금 전기 요금 가스 요금이 빠져나가는

  은행 잔고를 채우러 가는 아침

  혼자 눈길을 걸어간

  고양이의 길을 본다


  나도 늘 혼자이다

  누군가는 그것이 나의

  약점이라고 말한다


  약점은 때로 장점이어서

  슬픔이나 막막함을

  다른 이가

  같이 겪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기도 한다


  발목까지 빠지는 눈길을 되돌아가

  허기졌을 배가 눈 위로 끌린

  새끼고양이의 길을 발로 다져준다   (p.36~37 전문)



  그림 딱 그려진다. 시인이 고양이를 참 좋아한다. 나도 고양이를 좋아해 이 시에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세월이 흔적을 내 시인 조은이 발목을 잡는 남루함의 구덩이를 건너온 것을 직접 읽을 수 있어 공감했다. “늘 깨어 있으며 눈에 광채를 띄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 말고, 조금 뒤에서 시간에 닳아 이제 부드러워진 곳을 쓰다듬는 일도 시인에게 마땅하지 않을까?

  어쨌든, 나도 시인의 아버지처럼 죽고 싶다. <얼룩>에서 나오는 것처럼.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nine 2024-09-16 04: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시집 가지고 있어요.
조은 시인의 산문도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Falstaff 2024-09-16 09:10   좋아요 0 | URL
산문도 썼군요. 수필이겠지요. ㅎㅎㅎ 시만 쓰면 살기가 팍팍할 겁니다. ^^
 
조반니의 방 열린책들 세계문학 290
제임스 볼드윈 지음, 김지현(아밀)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독후감을 쓰려는데 제임스 볼드윈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잠깐 검색해보자 싶어 위키피디아를 열었더니, 아오, 이게 보통이 아니다. 분량만 가지고 과장을 좀 하자면 톨스토이 급이다. 내가 알고 있던 제임스 볼드윈은 1970년대에 튀르키예의 정치가 불안해지자(쿠데타였겠지 뭐) 파리로 건너간 쥴퓌 리바넬리가 그곳에서 인연을 맺어 수집한 문화계 명사들의 명함 가운데 한 장이 볼드윈의 것이었다는 거, 딱 하나였다. 아마 리바넬리의 책을 읽다가 (틀림없이 이이와 동명이인인) 제임스 볼드윈이 입에 익어 책을 검색했고, <조반니의 방>이란 제목의 책이 도서관에 있어서 관심도서로 보관했다가 읽은 것이리라. 전화기에 깔린 앱에 이 책을 읽은 즉시 매긴 별점은 세 개 반이었다. 지금은? 뭐 고칠 필요 있을까?

  1943년과 44년 사이, 컬럼비아 대학의 학부생 루시엔 카가 나이 많은 동성애자 데이비드 캐머러를 칼로 찔러 죽이는 사건이 벌어졌다. 허드슨 강을 걷다가 캐머러가 카에게 성적으로 접근했고, 이에 격분한 카가 캐머러를 찌른 다음 몸을 강에 버린 일이다. 죽인 후 시신을 버렸는지, 찔렀지만 아직 죽기 전에 버렸는지는 정확하게 쓰여 있지 않다.

  자신이 동성애자이며 이 사실을 주변 소수의 사람에게만 커밍아웃 한 채 상당한 기간동안 이성애자처럼 살아온 제임스 볼드윈은, 내 재주로는 1940년대의 살인사건 당시 살인자 루시엔 카도 동성애자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동성애자 사이에서 살인으로 달음박질하는 치정사건을 구상했던 건지 모른다.

  제임스 볼드윈의 어머니 에마 존스의 가족은 노예 해방 이후 남부의 인종분리와 차별을 피해 흑인들이 북쪽으로 이동한 “대이주” 시절 뉴욕으로 터전을 옮긴 무리의 일환이었다. 1922년, 열아홉 살에 뉴욕 할렘에 도착한 에마는 1924년 8월에 할렘 병원에서 제임스 아서 존스라는 이름의 사생아를 낳는다. 엄마가 아기한테 생물학적 아버지가 누구였는지 알려주었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하여간 제임스는 죽을 때까지 염색체의 반을 물려준 남성에 관해서는 침묵했다. 혼자 벌어 세 살까지 제임스를 키운 엄마는 1927년에 노동자이자 침례교 목사인 데이비드 볼드윈과 재혼해 제임스에게 볼드윈이라는 성을 사용하게 했다. 여전히 젊디젊은 엄마는 가을만 되면 무 뽑듯이 쑥쑥 아이들을 생산해 무려 아홉 명의 자녀를 더 만들어 기어이 두 자리, 열을 채운다.

  이 집의 가장 큰 문제는 아빠였다. 위키피디아에서도 볼드윈 목사의 나이를 정확하게 표기하지 못하고 그냥 “1863년 노예해방 이전에 태어났을 것이다.”라고만 추측한다. 그러면 아내 에마하고 최하 마흔 살 차이. 아무리 젊어도 예순 넷에 장가를 들어 아이 아홉을 더 낳았다고? 안 부럽다, 안 부러워.

  아빠 볼드윈 목사는 또 아내 에마와 같은 나이의 딸, 감옥에서 죽은 아들, 제임스보다 여덟 살이 많은 또다른 아들이 있었다. 하여간 생식력 하나는 끝내주는 목사는 자식 가운데 유일하게 자신의 씨를 받지 않은 제임스와 좋지 않은 관계를 만들었는데, 대가리 커진 제임스와 맞짱 비슷한 광경 바로 앞까지 여러 차례 가기도 했단다. 목사는 제임스가 책을 읽는 것도 싫었고, 공부를 잘해도 싫었고, 백인 아이들과 친구를 먹어도 싫었으며, 영화를 좋아하는 것도 싫었다. 오직 하나, 검둥이답게 열심히 노동하고, 백인을 혐오해야 하며, 백인을 차별시켜야 한다는, 역으로 분리주의자, 인종차별주의자였다. 같은 사막종교이기는 하지만 그나마 기독교라서 좀 괜찮았지, 무슬림 원리주의 쪽이었으면 더 심각할 수도 있었지 않을까? 아니겠지?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차별이다.

  그리하여? 이 드런 집구석에서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이 들었겠느냐고. 글을 쓰고 싶은데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1950년대에 아프리칸 아메리칸이 쓴 소설이 몇 부나 팔리겠냐고.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답이 나오지 않아 제임스 볼드윈이 선택한 것은 구대륙으로 귀환하는 것. 인종차별이 없다고는 할 수 없어도 숱하게 다양한 유색인을 식민지배 해 봐서 미국과 비교하면 상당히 온순한 정도라고 생각했고, 사실이었다. 집에서 뛰쳐나가는 것이 합법이 될 나이가 되어, 스물네 살의 제임스 볼드윈은 1948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을 하며 모은 돈으로 드디어 프랑스행 여객선 삼등실에 몸을 누이게 된다.


  작품은 이렇게 시작한다.

  “내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아침을 앞둔 밤. 나는 어둠이 깔린 이곳 남프랑스의 대저택 창가에 서있다.”


  화자 ‘나’의 이름은 데이비드. 피부색은 드러나지 않는다. 흑인일 수 있지만 백인일 수도 있다. 작품 속에서 피부색은 한 번도 거론되지 않는 걸 보면 그냥 '사람'으로 여기는 편이 좋다. 아는 사람만 ‘나’가 동성애자라는 걸 안다. 다른 사람은 이성애자로 알고. 실제로 미국 여성 헬라와 오래 연애를 했다. 연애가 무르익어 청혼을 했고, 결혼은 연애와 아예 다른 이야기니, 스페인에 가서 좀 더 깊이 생각해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헬라가 가버렸다. 이별이란 뜻은 아니다. 말 그대로 시간을 갖고 결심을 하겠다는 것뿐. 그래서 ‘나’ 데이비드는 프랑스에서 돈 몇 푼 없는 백수 미국 청년 신세가 된다.

  ‘나’는 작가 제임스 볼드윈과 마찬가지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자질구레한 일을 열심히 한 덕에 적지 않은 돈을 모았다. 그러나 아버지 계좌에 입금되어 있으며, 아버지는 당연히 미국으로 돌아올 아들을 위해 황금과 반지를 품은 용 파프너처럼 아들의 돈을 지키고 있다. 유럽에 있는 돈의 주인 아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젊은 혈기가 넘쳐 자기 돈을 유럽의 환락을 위해 써버릴 지 누가 아느냐는 말이지.

  프랑스에 오고 두 해가 지났다. 이 사이에 헬라와 연애를 했고, 청혼을 했으며, 헬라는 결혼을 하느냐 마느냐를 결정하기 위하여 몇 달째 스페인에서 편지만 보낼 뿐 돌아오지 않는다. ‘나’도 처음엔 열심히 답장을 썼으나 이젠 점점 짧아지고, 터울도 점점 길어진다. 주머니가 거의 비어 드디어 여관방에서 쫓겨났을 정도로. ‘나’는 다행히 벨기에 태생이지만 미국인인 남자 자크를 알고 지낸다. 가끔 미국 청년들에게 돈을 빌려주기도 하고, 가끔은 냉정하게 거절하기도 하는 동성애자. 그러나 ‘나’에게 자크가 돈을 빌려주지 않을 확률은 별로 없다. 아직 자크의 방에 가본 적이 없어서. 나이든 게이 자크는 동성애자 사이에서 인기가 없다. 게이도 될 수 있으면 젊은 게이를 탐하는 모양이라 그들을 유혹하기 위하여 간혹 큰 돈을 쓰고, 몇 번 관계를 한 다음엔, 버린다. 이런 저런 늙은이한테 버림을 받은 젊은 가난뱅이 게이들은 자기들끼리 더러운 식당에 모여 남창 그룹을 이루기도 하는데 이건 전 세계적으로 공통 같다. 책을 보면 그렇다.

  이렇게 자크한테 1만 프랑을 빌리고 곧바로 자크의 단골 바 겸 식당으로 향한다. 그냥 ‘기욤의 바’라고 하는. 바의 주인 기욤 역시 늙은 게이. 수사가 화려하고 다분히 연극적 단어와 문장을 자유롭게 구사한다. 그의 바에 새로 이탈리아 출신의 게이가 바텐더로 와 있다. 이이의 이름이 조반니. ‘나’가 한 눈에 봐도 매력적이다. 여태 딱 한 번 동성간 성 경험이 있었다. 중학생 시절의 조이. 부모가 여행중일 때 우연히 함께 목욕을 하고,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다가 서툴게 벌이게 된 사건. 그 행위로 남성성을 잃어버릴 것 같은 고통 때문에 수치스러웠다. 침대에 묻은 흔적 자체가 추악한 행위의 증거가 됐던 일. 그럼에도 조반니한테는 한 눈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매력이 넘쳤으니.

  그러나 누군가 지나가면서 ‘나’에게 충고한다.

  “있잖아요, 그는 위험해요. 특히나 당신 같은 청년에게는 굉장히 위험하죠. 괴로워질 거예요. 당신은 무척 불행해질 거예요. 기억하세요. 나는 분명히 말했어요.”

  누굴까? 그와 연애를 경험한 중년? 천사? 아니면 악마?

  기욤과 자크, ‘나’와 조반니는 영업시간이 끝난, 해가 아직 뜨지 않은 새벽에 바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 예전에 조반니가 일했던 레알 시장 너머, 마담 클로틸트가 운영하는 값싸고 지저분한 식당에 가 화이트와인과 굴과 레드와인과 코냑을 먹는다. 자크가 ‘나’에게 말한다.

  “그를 사랑해줘.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으란 말이야. 세상에 그 외에 중요한 일이 뭐가 있겠나? 그리고 그게 길어야 얼마나 가겠어? 자네 둘 다 남자고 어디로든 마음대로 갈 수 있는데. 길어야 5분일 거야. 장담해. 겨우 5분.”

  정수리까지 술이 오른 이들을 남기고 ‘나’와 조반니는 파리 변두리 나시옹 근처 끔찍한 동네의 꼭대기 하녀가 살던 방, 이제는 조반니가 사는, 조반니의 방으로 든다.


  “그리고 조반니는 오늘 밤과 내일 아침 사이의 어느 시점에 기요틴 위에서 절명”할 것이다.


.


댓글(7)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alstaff 2024-09-13 05: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조은, 《옆 발자국》
화요일. 기욤 로랑, <내 몸이 사라졌다>
수요일. 페트로니우스, <사티리콘>
목요일. 김중혁, 《스마일》
금요일. 리처드 브라우티건,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

stella.K 2024-09-13 10:00   좋아요 1 | URL
톨스토이 급이라니 대단한 작가인가 봅니다. 저는 순간 영화배우 알렉 볼드윈을 생각했는데. ㅋㅋ
별이 반 개가 더 붙는 거랑 안 붙는 거랑 그것을 받아들이는 입장은 다른데 알라딘은 섬세하지가 못 해요. 그죠?

근데 다음 주는 거의 매일 리뷰 쓰시나요? 추석도 있는데 하루쯤 쉬시지 않구요. 저야 좋죠. ㅎㅎ 암튼 다음 주도 기대하겠습니다.
좋은 주말, 추석 맞이하십시오.^^

Falstaff 2024-09-14 07:27   좋아요 1 | URL
위키피디아가 미국제니까 미국작가 볼드윈에 대한 자료가 많겠지요. 어딜 감히 톨스토이한테 비비겠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ㅋㅋㅋ
옙. 다음 주에도 삽질은 계속합니다. 아이들은 내일 왔다 가니까 시간은 널널합니다. ^^

바람돌이 2024-09-13 09: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임스 볼드윈은 다큐영화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를 인상적으로 봤어요.
Falstaff님 리뷰를 읽다 보니까 뭐랄까 주인공이 게이란 걸 빼면 저기다 여성 팜므파탈 역으로 대체하면 너무 흔한 소설이 되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이 드는데요. 제임스 볼드윈 책을 좀 읽어볼까 했었는데 의욕이 피시식 사라지네요. ㅠ.ㅠ

Falstaff 2024-09-14 07:40   좋아요 1 | URL
이 책은 후기 낭만주의 비슷합니다. 벌어서 먹고 살 생각은 하지 않고 돈 떨어지면 어디서 누구한테 돈 좀 쌔벼올 수 있을까를 궁리하는 19세기 룸펜 인텔리겐치아 흉내를 열라 내는데, 파리의 이 게이들은 인텔리겐치아도, 부르주아도 아니면서 그런다는 말이지요. 파리, 런던, 타이페이, 도쿄에서 하는 일이 거의 다 비슷하더라고요.

hnine 2024-09-13 09: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james baldwin 미국 현대 문학에서 꽤 알려진 작가로 알고 있어요. 오래 전에 sonny’s blue, go tell to the mountain 두 작품 읽었는데 작가에 대한 것은 여기서 자세히 알고 갑니다 ^^

Falstaff 2024-09-14 07:31   좋아요 0 | URL
옙. 한 시절 미국의 유명 작가 가운데 흐지부지 사라진 사람들이 예상 외로 많더군요. 이건 제 생각이고요, 미국 내에선 아직 많이 읽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
 
잘못 걸려온 전화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 워낙 존재감이 커서 새로 출간하는 책마다 족족 찾아보게 만드는 작가다. 이번엔 제대로 잡았다. 《잘못 걸려온 전화》는 애초에 수상해서 크리스토프의 다른 책을 검색해봤더니 현대문학, 지혜정원을 거쳐 세번째 출판사인 까치로 와 제목을 다시 단 복제품이다. 다시 번역한 것도 아니다. 세 권 다 용경식이 번역했고, 모두 스물다섯 편의 장편소설, 길게 쓴 거 말고 손바닥만해서 손바닥 장掌자를 쓴 초단편, 장편掌篇소설을 실은 것까지 똑같다. 현대문학과 지혜정원에서 낸 책은 140쪽, 까치에서 나온 《잘못 걸려온 전화》는 150쪽으로 페이지 수만 다르다. 가격도 다르다. 현대문학 8천원, 지혜정원 만원, 《잘못 걸려온 전화》 14,500원. 당연히 《잘못 걸려온 전화》는 대단히 널널한 편집으로 아마존 열대우림 파괴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한 시절 좌파 선봉에서 사회과학 서적 출판에 열을 올리던 그 까치가 맞다. 근데 성이 “조”씨였나 보다.

  스물다섯 편의 장편소설에 총 페이지 수가 150. 그러면 한 편당 6쪽의 분량이다. 근데 문패가 한 페이지. 한 페이지에 열아홉 줄, 한 줄에 스물여덟 자. 좋다. 하드웨어가지고 시비하지 말자. 근데 별점은 세 개 반 이상은 못쳐주겠다. 이것 가지고도 시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헝가리에서 출생해,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을 목격한 후에 남편과 아이와 함께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고, 스위스로 들어가 살면서 시계공장에 다니며 목구멍이 풀칠을 했다. 5년이 더 흐른 후에 새삼스레 대학에 입학해 프랑스어를 전공하고, 프랑스어로 작품을 쓰기에 이른다. 헝가리 민주화운동이 있던 1956년부터 작가가 된 후에도 크리스토프는 아마도 틀림없이 시간이 날 때마다 어딘가에 끼적이기 시작했을 것이고, 언제부터인가 그것들을 한 노트에 집중하기 시작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나중에 한 작품이 되기 위해 숙성중인 짧은 이야기들을 초단편 모음집으로 내기를 희망했을 터이며, 그래서 책 한 권으로 내 가외수입을 올렸을 것이다.

  이 책 《잘못 걸려온 전화》를 읽으면서 그런 의미로 아쉬웠다. 여차하면 살을 조금 더 붙여 한 편의 작품으로 나올 수 있을 만한 것들이 그저 짧고도 짧은 이야기 하나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 하긴 이 짧은 이야기, 널널하게 만들어도 다섯 페이지 분량이 채 되지 않지만 작품으로 부족한 것이 무엇이냐고 항의할 수도 있다. 당연하지. 짧아도 개별적 작품이다. 독자인 내가 아쉬울 뿐이지.


  작품들은 대개 그로테스크하고 의사 불통의 상태이다. 이미 죽어 있거나, 유령이거나, 죽어가는 상태일 수도 있으며, 커뮤니케이션 도중 혼선으로 인한 각자 오해의 과정에 있을 수도 있다. 애초부터 세상에 선한 것이라고는 없었으며, 있다 해도 다 제각각 바라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내 돈이 됐건, 내 바라지였건, 내 몸이 됐건 간에. 그래서 참 알뜰하게 아고타 크리스토프 닮았다.


.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유행열반인 2024-09-12 09: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거 이미 작가의 웅장한 진득한 장편 본 사람들한테야(그리고 벽돌 격파 전문가 팔백작님한테도) 뭐여 입가심거리도 안 되네 하겠지만 아직 이 작가 안 읽어 본 사람들한테는 샘플러 역할은 톡톡히 했다 아닙니까...(이거 사고서 결국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중고로 삼 ㅋㅋㅋ5500원에 횡재...엄마가 먼저 보시는 중? 이미 보심? 하여간 빌려볼래다 사게 됨요 ㅋㅋㅋ)그러고보니 이 책도 저는 알라딘 우주점에서 9900원에 비교적 헐하게 들여와서 평이 덜 나빴을 수도 있네요. 팔백작님 빌려만 보셔요!!!! 새 책 사보면 별점 하나씩 깎임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4-09-12 09: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근데 조까치 괜찮으세요? ㅋㅋㅋㅋ이제 까치에서 백작님한테 전화온다...거 떼까치 물까치 다 있는데 왜 남의 성 바꿔 이러고 ㅋㅋㅋ갑자기 궁금해져서 까치 검색하고 판매량 순 정렬해보니 비문학 빼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 밥벌이 일등 공신이네요...일위는 .... 소유냐 존재냐 입니다 ㅋㅋㅋ저도 이 출판사 거로 가지고 있는 거 같은데 진짜 개정판 개역판 잘 안 내긴 함 ㅋㅋㅋ사골국 우림 ㅋㅋㅋ그래도 로마제국 쇠망사 같은 벽돌도 우람하게 내줘서 팔백작님이나 저나 신세 많이진 사골국 맛집이니까 조는 빼고 그낭 깢치 라고 합시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4-09-12 09: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니 근데 왠지 기번 책 민음사나 동서거로 읽으셨다 그러면 할 말 없고 ㅋㅋㅋ공부하기 싫어서 댓글 폭탄하고 갑니다...제몫까지 신나게 읽어주셔유...

Falstaff 2024-09-12 18:41   좋아요 1 | URL
넹.... 민음사, 제일 비싸고 화려하지만 교정, 교열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후진 출판사 책으로 읽었습니다. ㅋㅋㅋ
하여간 크리스토프는 세가지 존재를 꼭 읽어야 합니다. 수험생이니까 셤 끝나면 읽어보셔요. ㅋㅋㅋㅋ
 
기억의 기억들
마리야 스테파노바 지음, 박은정 옮김 / 복복서가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마리야 스테파노바는 따로 바이오그라피를 찾아볼 필요가 없을 듯하다. <기억의 기억들> 자체가 자기 가족 이야기다. 스테파노바는 1972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대학을 졸업하고 성인이 된 후, 1990년대 러시아에서 쿠데타가 일어나자 부모는 독일로 이민을 떠났고, 스테파노바는 모스크바에 남았다. 여기까지 다 책 속에 나온다. 이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벌어지자, 스테파노바는 이에 항의하는 뜻에서 자신도 독일로 이사한다. 울리츠카야도 이때 떠났다. 두 작가가 다 유대인-러시아인이다.

  마리야 스테파노바의 본령은 시인이다. 소설은 아직까지 <기억의 기억들> 하나밖에 없다. 당연히 앞으로 소설도 쓰겠지. 그러나 시인이 쓴 소설임을 감안하시라. 2017년 출간한 작품이며 이 책이 2017~18년도 러시아 최고의 산문에 수여하는 빅-북 상을 받아 2백만 루블(당시 약 3천3백만 원)의 상금을 받았다고 해도 쉽게 읽히지 않는다. 작품은 좋지만 너무 사적인다. 스테파노바 개인의 가계를 그린 듯한데 이름은 전부 애칭, 약칭으로 표기했다. 화자는 당연히 ‘나’ 마샤. 마리야의 애칭/약칭이다. 가계를 기억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는 사진.

  작품 초반부터 당신은 당황할 것이다. 나는 당황했다. 당신도 마찬가지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하여간 조심하는 편이 좋다. 보시라.

  “료냐 할아버지는 기술자여서 후방에서 복무했다. 붉은 별 훈장을 받은 또다른 할아버지 콜랴는 전쟁 중 극동에서 복무했다. 전선에서 전투에 참가한 할아버지는 없다.”

  생각하기를, 기술자 료냐 할아버지가 원래 할아버지고, 이 양반이 불귀의 객이 되어 과부가 된 할머니가 새로 시집을 가 콜랴라는 이름의 남편을 두었구나. 어때? 그럴 듯하지? 근데 이게 오산이었다.

  료냐 할아버지는 엄마 나타샤의 아빠인 외할아버지. 콜랴 할아버지는 아빠 미샤의 아빠인 친할아버지다. 우리나라 족보로 생각해보자. 엄마의 엄마인 외할머니는 룔랴. 여기까지, 외할머니 이름까지는 웬만하면 다 알지? 좋다. 그럼 외할머니의 엄마 이름을 아시는 분, 혹시라도 있으면 거수바람. 좋아, 좋아. 모르는 게 당연하지. 이건 아시나? 외할머니의 엄마를 칭하는 호칭은? 모른다. 검색해보면 외증조모라고 나오는데 웃기는 말씀. 그건 외할아버지의 엄마. 내가 바라는 건 외증조모의 안사돈을 어떻게 부르는지 아느냐는 거. 외할머니의 외가를 외진진外陳陳외가라고 한다면 외진진증조할머니가 정답일 듯. 이게 맞다면 마리야, 마샤의 외진진증조할머니가 사라. 20세기 초에 프랑스로 유학을 가서 의학 공부를 한 의사로 그냥 프랑스에서 시집가지 않고 귀국해 혁명 소비에트에서 의사로 일한 신여성이었다. 사라의 부모는 아브람 긴즈부르크와 로쟈 긴즈부르키나. 20세기 초반에 러시아 땅에서 유대인에 대한 대량 학살이 있었던 건 다들 아시지? 당시에 ‘사라 아브라므예브나’라는 이름으로 살아야 했으니 얼마나 팍팍했을꼬?

  외진진증조할머니 사라 아브라므예브나가 젊었을 때, 어렸을 때 찍은 사진이 있다. 파리 소르본 대학 의학 실습실에서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남학생 사이에서 흰 가운을 입고 찍은 여학생 시절도 있고, 더 어린 사라도 있다. 사라의 시아버지이자 니즈니노브고로드의 의사였던 다비드 프리드만이 찍은 1906년 사진도 있는데 이건 좋은 품종의 주황색 점박이 무늬 사냥개 세터였다. 여기서 조금 놀랐다는 말이지. 1906년에 모스크바에서 동쪽으로 4백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컬러 사진”을 찍었다고? 아마 채색사진일 듯하다. 당시에 컬러 사진술이 없던 건 아니지만 그게 시장에 나오려면 한참 더 기다려야 했을 터. 1905년에 (화자 미샤가 “또다른 고조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아브람 오시포비치는 열네 자녀를 두었는데 이 가운데 사라 증조할머니의 사진이 있었고, 사진 속에 어린 사라는 손이 얼어서 빨갛게 보였다고 한다. 유명한 1905년 12월 혁명 시절이었다. 이 사진도 컬러는 아니고 채색 사진이었을 것이다. 세월이 오래 흐르면서, 화자 미샤는 엄마 나타샤, 외할머니 룔랴를 비롯한 무수한 여인들과 함께 앨범을 꺼내 많고 많고 또 많은 사진을 보며 사진 속 할머니, 아주머니, 고모, 이모들에 관해 보고, 듣고, 경험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이게 훗날 미샤가 자신의 가계에 대한 책 <기억의 기억들>의 자료가 될 줄은 열 살이었을 때부터 자기 가족에 관한 소설을 쓰기로 작정했던 미샤 말고는 아무도 몰랐으리.


  근데 왜 이 책이 읽기 쉽지 않느냐고?

  작가는 사진을 보고 있다. 그것을 문장으로 설명한다. 시각을 문자로 옮기는 일. 이건 작가가 원했든 아니든 간에 한 번 더 큰 왜곡이 기다리고 있다. 문장을 독자가 뇌 속으로 옮겨 이를 형상화하는데, 이것이 얼마만큼 작가가 직접 보고 있는 사진과 일치할 것인지, 그건 아무도 모른다. 작가도 모른다. 하지만 작가는 오히려 이 불일치를 의도했을 수도 있다. 의도했다는 건 아니지만. 책의 뒷부분으로 가면 작가는 사진의 현장에 가려 하거나 최소한 가장 가까운 곳까지 접근해 사진의 분위기를 확인 또는 공감하고 싶어한다. 누구 닮았지? W.G. 제발트. 스테파노바도 책 중에서 백 번은 넘게 제발트를 이야기한다. 제발트를 읽은 독자는 누구라도, 작가가 제발트 이야기를 하지 않았더라도, 제발트를 연상하게 된다. 그러나 어법이 다르다. 제발트는 자신이 묘사하고 있는 인물이나 풍경을 독자와 공유한다. 그러면서 넓은 벌판을 독자와 함께 걷거나, 외진 도로를 따라 낡은 승용차를 운전하거나, 언덕에 올라 경치를 조망한다.

  스테파노바는 사진에 등장하는 자신의 가계 구성원을 기억하면서 유대인-러시아인이 20세기를 관통/극복하는 스토리를 부각하기도 하고, 그들이 살던 집, 묻힌 무덤을 답사하기도 한다. 작가는 책을 통해 단 한 장의 사진도 독자와 나누어 감정을 공유하기를 거부한다. 한 세기 내내 학살과 공포, 피해의식 속에 살았던 유대인 집단의 트라우마에 독자는 공감할 수 없다고 단정하는 것 같기도 하다. 적어도 그렇게 오해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근데 이게 맞을까? 제발트는 유대인이 아니다. 2차 세계대전 말기에 태어났다. 학교에서 보여준 홀로코스트 사진에 충격을 받아 전쟁과 박해는 그가 평생에 걸쳐 탐구해야 했던 과제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사라진 사람들의 사진을 독자와 공유한 반면, 당사자의 가족일 수도 있으며 적어도 동족의 한 명인 스테파노바는 굳이 그런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걸까? 단정하지 말자. 그랬으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떤가.

  많고 많은 등장인물과 복잡한 가계도 속에서 미로를 헤매는 것과 비슷하게, 스테파노바의 익숙하지 않은 문장에 길들기도 쉽지 않다. 숱한 독자는 이런 문장을 좋아하여 ‘시적詩的 운율’과 비슷한 말로 이를 칭찬한다. 다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 산문은 산문이고 운문은 운문이다. 물론 운문 비슷한 산문이라는 것도 있으며 그걸 좋아하는 독자의 취향을 존중하긴 하지만, 나는 아니다.

  시적 문장이라고 해서 “시적”이 의미하는 것이 감정이 충만하게 밴, 이런 뜻이 아니다. 오히려 문장은 지극히 건조하다. 작가가 영향받은 것이 틀림없는 프루스트, 제발트 풍이다. 작가가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는 만델스탐 같은 러시아/소비에트 작가/시인과의 유사점은 내가 읽어보지 않아 모르겠다. 이 정도면 대충 어떤 분위기인지 감이 잡히실 듯.


  작품 자체의 서사로 읽으려면, 그러지 마시라. 애초 시작할 때부터 특별히 말재주가 있는 작가와 더불어 앉아 말로만 설명해주는 사진을 연상하면서, 사진 속 사람과 배경이 어떨 것인지 마리야 스테파노바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각오”로 첫 페이지를 넘기시기 바란다.

  근데, 만일 W.G 제발트가 <아우스터리츠>를, <토성의 고리>를, <이민자>를 한 권으로 묶어서 6백 페이지 분량으로 출간했으면 어땠을까? 단언하는데, 다른 건 모르겠고, 읽으면서 간혹 사진을 볼 수 있어서 스테파노바보다 훨씬 읽기 편할 것 같다. 달리 이야기해서, 여차하면 스테파노바의 <기억의 기억들>을 지루한 책이라고 여기기 쉽다는 뜻도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는 거.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