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델타
마르코 미시롤리 지음, 김희정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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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코 미시롤라는 1981년 이탈리아의 리미니에서 출생했다. 리미니?

  잠깐 단테의 <신곡> 가운데 “지옥편” 5곡으로 가보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단테를 인도하여 지옥 구경을 시켜주는데 제일 먼저 지옥의 유황불에 비명을 지르고 있는 프란체스카를 만난다. 프란체스카는 왜 지옥으로 떨어졌을까? 사랑 때문에. 

  인용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0, 단테 알레기에리, 《신곡 지옥편》 2007. 박상진 역.


  “사랑은 온화한 가슴에 이내 스며드니,

  지금은 내게서 없어진 아름다운 몸으로 이이를 

  사로잡았어요. 그 일은 아직도 나를 괴롭힙니다.


  사랑은 사랑받는 사람을 결코 놓아주지 않으니,

  이이에 대한 차오르는 기쁨으로 나를 사로잡았어요.

  보다시피, 이이는 내 곁을 아직도 떠나지 않고 있어요.” (p.55)


  그러니까 프란체스카는 사랑 때문에, 드런 사랑 때문에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해 지옥으로 떨여졌다. 책의 다음 페이지에는 아마도 지옥편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가 나온다.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당신의 선생님은 아시겠지만,

  비참할 때 행복했던 옛 시절을 떠올리는 일만큼

  괴로운 것은 없어요.’” (p.56)


  프란체스카는 리미니 공국의 공작이자 영주인 란체오토 말라테스타한테 시집온 아름다운 여성. 이이는 영주부인이 아니라 영주의 동생인 파올로의 짝이 될 줄 알았었다. 얼마나 좋았는지 모르지? 파올로는 젊고 무지하게 잘 생긴 미남자로 유명했거든. 근데 결혼식장에 입장해보니 신랑이 짐승 같은 천하장사, 무쇠로 만든 주먹을 가진 란체오토 영주님이었던 거다. 게다가 드럽게 못생기기까지 했다. 어때, 다른 작품 생각나는 거 하나 있다. 프리드리히 폰 실러의 <돈 카를로스>.

  근데 프란체스카는 <돈 카를로스>의 엘리자베스하고 좀 다른 캐릭터이다. 엘리자베스는 어쨌든 혼인의 순결을 끝내 지켰다. 반면 프란체스카는 아니다. 이를 눈치챈 영주님. 프란체스카와 동생 파올로 사이가 아무래도 수상해서, 영주님이 전쟁에 나가기로 결심했다. 라고 광고했다. 그리고 정말로 군대를 소집해 적국을 향해 행진하는 동안 프란체스카는 친절한 시동생 파올로를 불러 뭘 했느냐 하면,


  “어느 날 우리는 한가롭게

  렌슬롯의 사랑 얘기를 읽었어요.

  우리뿐이었어요. 거리낄 것이 없다고 생각했지요.” (p.57)


  렌슬롯의 사랑 이야기는 당시 기준으로 봐서 야설 수준은 아니더라도 되게 야한 책이었다. 그런 걸 파올로가 소리내서 읽다가 점점 손끝이 이게 영 이상한 동네로 이동하기 시작하는데, 뭐 다 그런 거지, 자동이거든. 그리하여 점점 달아오른 둘이 급기야 비단 모기장 드리운 기둥 침대 위로 홀라당 올라가 뜨거운 사이가 되었던 터, 딱 이 때 시간을 맞춰 갑자기 방문을 벌컥 열고 들이닥친 란체오토 말라테스타. 영주님은 관운장이 쓰던 청룡언월도를 휘둘러 훌렁 벗은 둘의 허리를 댕강, 잘라 죽여버리고, 두 연놈의 영혼은 사이좋게 손잡고 지옥으로 떨어졌던 것.

  이거 이 책에도 안 나오고, 민음사 《신곡 지옥편》에도 안 나온다. 《신곡 지옥편》을 감명 깊게 읽은 러시아의 극작가 모데스트 차이콥스키가 쓴 작품 <리미니의 프란체스카> 이야기이다. 모데스트는 우리가 아는 작곡가 표트르 차이콥스키의 친동생이기도 하다. 프란체스카 이야기 어디 가서 들어보기 쉽지 않을 걸? 잘난 척하느라 그냥 써본 거다. 나는 잘난 척하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 지 몰라!

  《신곡 지옥편》 5곡의 프란체스카와 파올로가 어디서 지옥으로 미끄러졌느냐 하면, 지금이야 이탈리아 땅이지만 당시엔 리미니 공국이었던 곳.

  그것 때문에 이렇게 길게 변죽을 울렸느냐? 설마. <페델타>의 지은이 마르코 미시롤리는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리미니에서 살다가 대학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인 볼로냐 대학에 진학했는데, 작품 속에서 고등학교 시절까지 리미니에 살다가 대학을 거쳐 대학원을 밀라노대학에 다니던 중 자기 지도교수와의 염문이 알려져 중도작파하고 다시 리미니로 돌아가 아버지가 하던 철물점을 물려받아 대를 이어 가업에 종사하는(윽, 스포일러군!) 여성, 소피아가 주요 등장인물 가운데 한 명이기 때문이다.


  작품의 제목 페델타. Fedelta 마지막 철자 a 위에 점 하나를 찍어야 하는데 찾기 귀찮으니 그냥 이렇게만 쓰자. 이탈리아 말로 정절. 충성심이란 뜻도 있지만 책에서는 ‘정절’ 또는 ‘혼인의 순결’로 이해하면 되겠다. 근데 작품의 주제는 정절과 정 반대말 ‘배신’이다. 즉 불륜, 혼외정사 같은. 그래서 <리미니의 프란체스카> 이야기를 열라 떠들었다.

  카를로 펜테코스테 교수. 부르주아 집안의 1남1녀 중에서 장남. 밀라노 대학에서 학업을 마치고 특별하게 뭘 한 게 아니라, 집이 좀 사니까 가능했겠지만, 이것저것 설렁설렁, 카피라이터도 해보고, 여행지 소개문도 써보다가, 아버지 뒷배로 밀라노대학 대학원에서 창작과목 전임교수 비슷하게 하는 중이었다. 자기 반에 작은 얼굴과 잘록한 허리에 어리게 보이는 스물두 살 먹은 소피아가 있었는데 은근히 눈길이 자꾸 소피아한테 가더란 것.

  소피아 말고 다른 신입 여학생이 작품 초장에 하필이면 지저분하게 화장실에서 교수가 소피아 학생을 껴안고 목을 쓰다듬는 것과 비슷하다고 판단할 수준의 장면을 목격해 교실로 돌아와 입을 털었다. 이 일 이후에 펜테코스테 교수와 소피아가 의심스러운 성격의 접촉을 가졌다는 소문에 힘이 실렸다고 쓰여 있으니, 아마도 교수가 소피아를 편애했던 건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사실이고말고!) 이 뒷담화가 학장의 귀에까지 들어가 바야흐로 문제가 되었을 때, 펜테코스테 교수는 동료 교수 몇 명과 학장을 데리고 현장에 가 직접 상황을 재연해 주었다. 이렇게:

  남자 화장실에 들어가 소변을 보고, 공동구역으로 나와서 손과 얼굴을 씻은 후에 말리고 있을 때, 여자 화장실에서 ‘쿵’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침 문이 조금 열려 있어 (라기보다 덜 닫혀 있어) 들여다보니 자기 수업을 듣는 소피아 카사데이가 거의 정신을 잃고 넘어져 있는 거였다. 그래 문을 열어놓은 채 들어가 학생을 향해 몸을 기울인 상태에서 이름을 여러 번 불렀고, 앉았다 일어날 수 있게 도왔으며, 잠시 구석에 기대게 조치했다.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학생은 진정되어 얼굴을 씻을 수 있게 세면대로 데려갔는데, 상황이 긴박하지는 않았어도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신입생이 현장에 있었는지는 눈치도 채지 못했다.


  그럴 수 있겠다. 그럴 수 있겠다 싶다. 이 일 때문에 제일 기분이 언짢은 사람이 누구? 당연히 아내 마르게리타.

  오늘 아침 남편이 늘 복용하는 항히스타민제를 두고 와서 직접 가지고 학교까지 왔다. 구태여 문자나 전화로 알리지는 않았다. 마르게는 몰랐지. 한 10미터 정도 자기 앞을 걷던 여학생이 바로 소피아였던 것을. 소피아가 강의실에 들어가 카를로 펜테코스테 교수한테 작은 소리로 말했다.

  “당신 부인이 날 따라왔어요.”

  소설은 이 대사로 시작한다. 카를로가 창문 밖을 내다보니 아내가 담벼락에 걸터앉아 네미로프스키를 읽고 있다. 네미로프스키? 소설집 《무도회》를 쓴 작가? 맞다. 이 대목을 읽는 순간 곧바로 도서관에 상호대차 신청해서 네미롭스키의 다른 책 한 권 읽기로 했다.

  근데 이상하지? 마르게는 심지어 아직까지 (나중엔 알게 되지만) 소피아라는 이름만 들었지 얼굴도 한 번 본 적 없는데 어떻게 따라오겠어? 소피아도 속으로 교수와 모종의 썸이 있는 것이겠지. 하지만 이렇게 중인환시리에 일종의 염문이 살포된 상황에서 썸을 이어갈 수 없지. 당연하지. 여기서 한 발만 더 나가도 교수는 아예 이 바닥에서 매장될 터인데. 그래서 교수 스스로 현장검증을 신청하기 전에 극비리에 시내 모 카페로 소피아를 불러내 내가 이렇게 이야기할 테니 너는 저렇게 자세를 잡아라, 뭐 이 비슷한 시나리오를 짜고 그대로 진행한 거다. 똑부러지는 소피아는 몇 시간에 이르는 사전 미팅을 휴대폰에 전부 증거로 녹취했지만 그건 교수가 알 턱이 없다. 그래 잘 수습이 된 상태에서 교수가 다시 소피아를 만난다? 그건 곤란하고, 소피아도 마찬가지다. 소설가를 꿈꾸는 소피아는 소설도 잘 써지지 않아, 소설이고 뭐고 고향 리미니로 돌아가 아빠 하던 일을 이어서 하기로 결정해버렸다.

  근데 미련이 남잖아? 교수도, 소피아도. 소피아가 기차를 타는 날이 하필이면 교수의 친엄마 생일날이었는데, 핑계를 대고 소피아 집에 들러 마지막 짐을 역까지 배달해주는 서비스를 자진해서 해준다. 집에 가서? 그렇다. 그럼 짐만 옮겨주었을까? 에잇, 확 말해버리자. 그렇다 짐만. 시도는 했지만 소피아가 싹 거절해버린다.


  문제가 또 있으니 교수의 아내 마르게리타.

  밀라노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부동산 중개업자. 자기관리에 철저한 비즈니스 우먼. 아직 애도 없다. 몸도 빵빵하다. 몸매를 위해 헬스에 다니는데 석달 전에 트레드밀을 겁나게 열심히 한 뒤 치골에서 무릎으로 이어지는 통증이 점점 심해졌다. 그래서 물리치료를 받으러 다니는 중.

  물리치료를 받으면 꽉 막힌 좁은 치료실에 스물여섯 살 먹은 안드레아라는 건장하고 잘생긴 젊은 남자가, 물리치료를 받기 적절한 반바지와 속옷을 입은 마르게리타를 뉘어 놓고 치골 부근의 근육과 힘줄을 열 손가락 모두 사용하여 꾹꾹 눌러 근육의 결과 밀도, 그리고 탄력까지 모두 짚어본 후에 허벅지 안쪽 근육, 소위 햄스트링이란 곳까지 모두 꼼꼼하게 훑는다.

  30대 중반을 향해 돌진하는 여성의 농익은 몸은 안드레아의 손길이 금지된 곳에 더 가까이 접근하기를 속으로 바라지만 결코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몇 년 전, 외국 여성이 우리나라 TV에 나와 이해할 수 없는 우리 속담 가운데 하나가 “홧김에 서방질한다.”라고 했던 걸 기억한다. 서양에서는 그런 말이 없단다. 뭐 그런가 보지. 그러나 2년 전 여름에 읽은 모드 방튀라의 <내 남편>에서도 그랬듯이 <페델타>에서도 우리의 마르게리타도 홧김인지, 아니면 아슬아슬한 리비도의 유혹에 넘어간 것인지, 자신이 결국 안드레아를 안다리후리기로 자빠뜨리는 데 성공한다. 이게 마르게리타가 딱 한 번 저지르는 불륜. 대단한 것이 안드레아가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였음에도.


이렇게 마르게리타와 카를로 펜테코스테 부부의 불륜. 불륜에도 불구하고 지켜야 할 진짜 사랑은 둘 밖에 없다는 결론으로 마구 치고 나가는 그냥 그런 애정 소설. 잘 쓰기는 하지만 별거 없다. 조르조 바사니의 <금테 안경>을 읽을 때는 안 그랬던 거 같은데, 역자 김희정의 우리말 문장도 거칠게 서걱거려 재미를 조금 떨어뜨리…는 거 같다.

  오늘 독후감, 분량이 많지만 리미니 이야기 빼면 그냥 늘 쓰던 대로다. 여기까지 읽어주시느라 고생 많으셨다. 쐬주만 안 마시면 소설도 한 편 쓸 기세라니까,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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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뢰침
헬렌 디윗 지음, 김지현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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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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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헬렌 디윗은 2000년에 장편소설 가운데 제일 먼저 발표한 <최후의 사무라이>가 제일 유명하다. 이 책이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21세기 최고의 책 100” 가운데 29번째 자리를 철퍼덕 깔고 앉았다. 헬렌 디윗이 비록 외교관의 딸로 유소년기에 멕시코, 브라질, 콜롬비아, 에콰도르 같은 라틴 아메리카를 누비며 성장해, 옥스포드 대학과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을지언정, 졸업 후 소설 <최후의 사무라이>를 쓰는 동안, 부모가 독립한 자식을 지원해주지 않았는지, 디윗 자신이 도움을 바라지 않았는지 하여튼, 1957년생이니까 PhD까지 빠르면 1985~7년 정도에 공부를 마쳤을 터이니, 소설을 완성한 1998년까지 사전에 실린 단어에 딱지 붙이기, 회사 복사 담당, 던킨도너츠 직원, 변호사 사무실 따가리, 세탁 잡부까지 안 해본 일이 없었단다. 위키피디아에 그렇게 써 있다. 던킨 도너츠 파는 박사님. 우리 같으면 생각도 하기 힘들 텐데, 이거 참 뭔가 부럽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하여간 좀 낭비인 건 확실한데 거 생각이 복잡하네. 하여간 끝이 좋았으니 됐지 뭐.

  여차하면 유명세를 타게 해준 <최후의 사무라이>에 이어 1999년에 두번째 장편소설 <피뢰침>을 완성하고 2003년에 출판 계약서에 엄지손가락에 인주 듬뿍 묻혀 지장을 꾹 누른다. 그런데 이게 책이 안 나오는 거라. 결국 좀 복잡한 법적 절차를 거쳐 2011년에야 다른 출판사 인쇄기를 통해 책이 나온다. 그리하여 비록 2011년에 나온 책이지만 지난 세기에 완성한 작품답게, 작의 무대는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이다. 작품 속에 테스크탑도 나오지만 1990년대니까 PC와 별도로 워드프로세서라는 문서 작성기도 등장하고, 1분에 몇 글자를 오타 없이 타자하느냐 하는 것이 특히 여직원의 능력 척도 가운데 하나인 장면도 나온다. 좀 후진 동네, 후진 직장이었던 듯하다. 80년대라면 이해가 가는데 말이지.


  우리나라는 아직 십년 정도의 세월이 더 필요했지만 이때 미국의 기업에서 상당한 이슈로 떠오른 것이 사업장 내 성희롱 문제였다. 앗, 조금 이따가 이야기하자. 주인공 먼저 등장시켜놓고 보자.

  주인공 조. 막이 올라가면 장소는 미국, 미주리 주의 유레카. 조는 32세, 외판원이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판다. 12권짜리와 15권짜리. 미주리에 유레카라는 도시가 정말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불쌍한 조는 6개월 동안 한 질은커녕 한 권도 팔지 못한다. 맨 농사 짓는 집만 있는데 누가 책을 보고, 책을 보는 사람이 있더라도 등장인물이나, 나오는 배경 같은 것이 궁금해 백과사전을 들춰보겠느냐고? 조가 생각해보니 이건 자기 잘못도 아니고, 상품이 후져서 그런 것도 아니다. 기본적으로 사전하고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만 모인 것이 첫째요, 그들이 배운 게 없는 것이 둘째요, 도무지 호기심이란 걸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문제다. 다 합해 미주리 유레카 인간들 한테는 안 되는 거다. 그러나 기백이 하늘을 찌르는 조. 그는 생각을 달리해 빛나는 전자제품을 판매하는 일렉트로눅스사의 전기청소기의 가까운 대리점을 찾는데 그게 하필이면 플로리다에 있다. 어쨌냐고? 거기까지 갔다. 가자마자 트레일러 한 대 임대해서 숙소로 삼고 과감하게 대리점으로 직진, 그날로 취직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얼마전에 플로리다에 허리케인 에드나가 휩쓸고 지나가 거의 모든 집이 홀라당 떠내려갔거나 완전한 침수피해를 입어 모든 가전제품을 싹 교체해야 하는 처지가 됐고, 모르긴 해도 중앙/지방정부에서 보조를 해주었겠지, 집을 수리하는 것과 동시에 전에 썼지만 이젠 못 쓰게 된 전기청소리를 신품 일렉트로눅스 청소기로 썩 개비 해버린 상태였다. 아뿔싸, 조가 한 발 늦었다. 플로리다 주민들은 조가 청소기를 들고 나타나면 일렉트로눅스 전기청소기가 얼마나 튼튼하고 성능도 좋은지 정말 잘 쓰고 있다고, 커피와 차, 호박 와플 같은 걸 대접해주어 호박 와플이라면 이젠 질려버릴 정도였다나? 그래서 청소기 딱 한 대 팔았다. 새로 플로리다로 이사온 집에.


  낙담한 조. 그저 트레일러에 히루종일 박혀 엉뚱한 공상만 한다. 누군지 허리케인 에드나가 물러가자마자 천재일우의 기회를 잡아 온갖 가전제품을 팔아먹은 전임, 몇 대 전임도 아니고 조 바로 앞에 플로리다를 휩쓸고 지나간 운 좋은 세일즈맨을 부러워하다가, 진짜로 엉뚱한 공상을 시작한다.

  (여기서 정중하고 진실하게 말씀드리는 바, 허리 아래 이야기 싫어하시는 분과 만 19세 미만이신 분은 나중에 다른 말씀하지 마시고 이쯤에서 읽기를 마치셨으면 좋겠습니다.)

  공상 시작.

  예를 들어 담벼락이 있다고 치자. 담벼락 위로 어여쁜 여인네가 손을 살랑살랑 흔들고 있다. 더하여 눈웃음이라니. 보는 거 하나로 눈이 뱅뱅 돌아간다. 그림이 그려지지? 좋다. 그러나 담벼락 아래, 이 금발의 눈부신 아가씨의 블라우스 밑으로는 타이트한 미니 스커트에 손바닥 만한 팬티 한 장만 입고 있다. 때로는 아예 아무것도 안 입고 있을 수도 있다. 다 공상하는 놈 마음대로.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가씨 뒤에 털이 숭숭한 웬 쇠도둑놈 같은 사내가 한 명 서 있는데 벌써 아래도리를 훌렁 벗어 큼직한 것을 내놓고 있다가 그나마 미니 스커트를 위로 훅 올리고 앙증맞은 팬티를 아래로 쑥 내려버리거나, 처음부터 아예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은 맨궁둥이 사이에다, 흠, 그만하자. 어떤 광경인 줄 아시겠지? 32세의 조, 이런 공상을 하며 열심히 자위라도 하려 하는데 그것도 잘 안 되는 모양이다. 아무리 쥐고 흔들어도, 두드려 패도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하니 이걸 어째? 겨우 서른두 살인데.

  비슷하지만 다른 공상.

  TV 쇼. 흰 벽면에 구멍 세 개가 있고 구멍마다 어여쁜 아가씨가 목과 팔을 내밀어 손짓을 하며 방실방실 웃고 있다. 5미터 앞에는 대여섯 명의 패널이 앉아 아가씨들한테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하고 얼굴 표정을 유심히 관찰하기도 한다. 뭔가를 해보라고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손톱에 메니큐어를 칠해보라는 등. 근데 벽면 뒤에는 적어도 한 명, 어떤 때는 세 명 전부 다 앞에서 했던 공상 속의 쇠도둑놈 같은 털이 북슬북슬한 사내가 서 있어서 마찬가지로 궁둥이 사이로 흠흠. 패널들은 아가씨들의 미묘한 표정 변화나 몸짓의 비정상을 찾아내 어떤 아가씨가 지금 삽입 중인지 맞추는 게임이다. 한 명일 수도 있고, 두 명, 세 명 다일 수 있지만 한 명도 없을 때는 없다. 역시 이런 공상을 하며 자위라도 한 번 해보려는데 도대체 그게 제대로 서야 뭘 하든 할 거 아닌가비여?


  이제 간략하게 이야기하자.

  다시 플로리다 벌판에서 세일즈에 나선 조. 도중에 차를 세우고 오줌을 누다가 팍 떠오른 것이 요즘, 그러니까 1990년대 미국 기업에서 가장 골머리를 썩이는 이슈 가운데 하나인 성희롱, 성추행 문제. 일을 열심히 해서 성과가 좋은 남자 사원들일수록 스트레스가 쌓여 성희롱과 성추행을 하는 경향이 있을 수도 있다. 여직원들이 얼마나 모멸감을 느낄까, 안타깝다, 에서 시작해, 만일 특정 여직원, 대단히 높은 급여를 받는다면, 완벽한 익명성이 보장된다는 조건으로 누구인지 모를 남자직원에게 딱 거기, 뒤 궁둥이 사이 모종의 장소를 제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문제는 그런 여성을 찾는 일이다. 마치 화장실에 가거나, 코를 푸는 것을 당연하지만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듯이, 리비도가 넘쳐 폭발할 지경의 남자 직원을 한 번 사정하게 해주는 대신 월급을 왕창 받는 동시에 회사 업무도 훌륭하게 수행하는 직원. 이들을 번개를 예방하는 피뢰침이라고 칭한다.

  그래서 조는 인력 회사를 만들어 업무수행 능력이 뛰어나고 자신과 생각을 공유하는 여성들을 뽑아, 고객 회사에 취직을 시켜 업무 시간에 고과우수자들만 대상으로 익명의 피뢰침을 통해 성적 불만족을 해소시켜 궁극적으로 업무 향상을 꾀하는 프로젝트를 이끈다. 반드시 지켜야할 것은 익명성.

  프로그램을 짜서 특정한 고과우수자들 한테 내부 전산망을 통하여 알림이 도착한다. 오늘 피뢰침과의 만남이 있으니 시간을 통보하고 그 시간에 장애인 화장실로 가십시오. 회사에 장애인은 없다. 하지만 법령으로 장애인 화장실은 반드시 설치해야 한다. 그러니 밀실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남자 직원이 남자 장애인 화장실에 가서 조금 기다리면 창문 비슷한 크기의 문짝 비슷한 통로가 열리면서 여성의 엉덩이가 뒤로 쑥 밀고 나온다. 그러면 부름을 받고 입장한 남자 직원은 아랫도리를 훌렁 벗고 먼저 콘돔을 완벽하게 착용한 다음, 벽면에 두 손을 의지해 하낫둘, 하낫둘, 그거, 만날 하는/했던 거, 열나 하고 일이 끝나면 세면대에 뒤처리를 한 후 모른 척하고 그냥 나와 다시 열심히 일을 하면 되는 거다. 엉덩이만 내민 피뢰침은 뭐 했게? 대개 잡지를 보던지, 뜨개질을 하던지, 아주 똑똑한 한 명은 이 시간을 쪼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프랑스어로 읽는다. 이 여직원은 피뢰침이 받는 많은 봉급을 모아 훗날 하버드 로스쿨을 거쳐 미국 대법관이 된다. 놀랍지? 이이 말고 역시 하버드 로스쿨을 거쳐 소송전문변호사가 되어 연수입 백만달러가 넘는 피뢰침도 생기고.


  근데 이게 웃기지가 않다. 읽으면 읽을수록 기분이 나빠진다. 아무리 풍자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험한 방식으로 말이지. 화장실 벽에 구멍을 뚫고 성기만 노출해 섹스를 한다고? 기XX가 죽음을 맞은 파고다 극장의 화장실이 그렇게 생긴 건 다 아시지? 홀링허스트의 <스파숄트 어페어>든가 어디서 등장하는 동성애자 전용 화장실도 그렇게 생긴 것도. 헬렌 디윗도 133쪽에 이렇게 실토한다.

  “이성애자들이 게이들의 특정한 문화를 파악하고 그걸 베껴 가면서, 정작 그 문화의 가치 있는 요소들은 죄다 놓쳐 버리는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었다.”


  헬렌 디윗은 성희롱과 성추행을 해결하기 위한 회사/권력/남성들의 행동을 이런 식으로 비틀었다가 점점 의식을 확장해서 장애인과, 피부색에 따른 인종등에 가하는 모든 차별까지 포함시킨다. 더 웃긴 건 처음엔 피뢰침의 벽 창문 속 엉덩이와 성기 제공으로 배배 틀린 시각으로 시작해, 그런 (분명이 구분되기는 하지만 일종의 매춘) 행위를 통해 다수의 비 피뢰침 여직원들을 향한 성희롱과 성추행이 근절되었다는 주장을 또 뭐임? 그래서 결국은 누이좋고 매부좋은 미국식 결말로 향하는데, 그것 참. 왜 나는 이게 웃겼을까?

  아주 묘하게 기분 나쁘게 끌고 가다가 또 한 번 묘하게 좋은 게 좋다고 끝맺는 거.


  1999년에 소설 쓰기를 마쳤으니 디윗의 나이 42세. 여전히 디윗은 남자의 섹스를 모른다. 그래서 이렇게 주장한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자기 성기를 누군가의 안에 집어넣는 것을 상대방을 지배하는 행위로 여기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중략) 문제는 그들의 머릿속에 일어나는 지배 욕구다.” (p.41~42)

  대부분의 남자가 아니라 대부분의 여자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 삽입을 통해 여성을 지배하는 기분을 느낀다고? 뭐 완벽하게 틀린 말은 아니다. 지배욕 충족을 아주 안 느끼지는 않지. 그러나 더 중요한 건, 즉 삽입과 사정을 끝낸 후에 내가 이 여자를 지배했다는 느낌보다 훨씬, 아주 훨씬 더 남자에게 위안과 보람을 주는 건 “내가 이 여자를 만족하게 했다.”는 기쁨이다. 여자를 만족시키지 못했다는 기분이 들면 그것 때문에 남자들도 속으로 열폭하는 거라고는 생각 안 해봤나? 몇 안 되는 자칭 전문가들의 말 또는 쓴 글만 읽고 그렇거니, 하지 마라. 언니도 만족하지 않았지만 오직 파트너가 상심할까봐 아이 좋아, 아이 좋아, 좋은 척해봤으면서 모른 척하고 있어. 하긴 글 목적 상 그렇게 썼겠지만.


  요새 독후감이 좀 길지? 조만간에 건강검진이 잡혀 있어 며칠 술 안 마셨거든. 술 안 마시면 이런 꼴이 난다. 독후감 길어지고, 책 읽는 양도 못 말리게 많아져서 어떻게 주체하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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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메랄드 시티
제니퍼 이건 지음, 최세희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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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어 제목은 모르겠고, 우리말 제목이 우리 정서에 맞지 않아 크게 밑진 장편소설이 한 편 있으니 제니퍼 이건의 2010년 작품 <깡패단의 방문>. 아직 안 읽어 보셨으면 얼른 쇼핑하시라. 470쪽짜리가 10퍼센트 깎아서 12,400원이다. 이건 여사가 스물일곱 살 때인 1989년에 쓴 소설집이 오늘 독후감을 쓰는 《에메랄드 시티》. 내 속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욕을 와장창 먹겠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그냥 확 말해버리자. 잘 쓰는, 이라기보다 잘 쓴다고 하는 우리 작가의 소설집을 읽고 곧바로 이 책을 읽은 건 진짜 고의가 아니었는데, 아니다, 됐다. 이제 배짱이 확 쫄아들어 말할 기력 달린다. 그냥 짧게 별점으로 말하자면 똑 같은 별 넷. 어제는 자라나는 새싹한테 별 셋 주기 미안해서, 오늘은 차마 다섯, 만점까지 올리기엔 아주 조금 거시기해서.


  열한 편의 단편소설을 모았다.

  <깡패단의 방문> 독후감에서 얘기했듯이, 제니퍼 이건이 젊었을 때 다른 인간도 아니고 스티브 잡스와 (얼마나 진했는 지는 몰라도) 연애를 한 것 같은데, 그래서 그런지 《에메랄드 시티》에는 부잣집 남자와 연애 또는 결혼한 여자 이야기가 제법 나온다. 모델을 꿈꾸며 미국 중서부 시골이나 북유럽에서 뉴욕으로 날아와 사진사, 아니지, 포토그래퍼 혹은 프로듀서한테 잘 보이려 안달이 난 쭉쭉빵빵하고 비쩍 마른 아가씨들도 나오고, 두 딸에게 최고의 교육을 시키는 동시에 사랑하는 아내한테 최고의 복지 상태를 유지시키기 위하여 횡령이나 사기를 친 남편/아빠 이야기도 나온다.

  작품의 무대는 미국을 비롯해서 아프리카, 아시아, 스페인, 리비아, 멕시코 등등 대륙을 불문하고, 백만장자부터 노숙인까지 빈부를 망라한다.

  영어 소설을 우리말로 번역했다고 해도 참 재미있게 잘 읽었다. 물론 미국 작품답게 하나같이 개운한 결말, 적어도 우울하지 않고 폭망도 아닌 상태로 끝을 맺는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릿한 맛을 은은하게 전하기도 하니, 제니퍼 이건, 거 참, 잘 쓰네.

  내가 지금 여기서 아무리 변죽을 울려도 확실히 직접 읽는 것에 비하지 못하니, 웬만하면 이 정도에서 독후감 접자. 오랜만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 권을 후르륵, 삼복에 냉콩국수 들이 마시듯 후르륵 읽어버렸다. 솔직히 말하면 독후감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쓰는 단어가 부족해서. 우리 작가들도 이렇게 좀 써 주었으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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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6-05-14 09: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제니퍼 이건 좋아해요😄 장편소설도들도 참 재밌답니다

Falstaff 2026-05-14 17:56   좋아요 1 | URL
다음에 읽을 이건은 <맨해튼 비치>로 골라놨습니다. 그것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공현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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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이나 86년생 작가. 중앙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은 어딘지 모르겠지만 김수영∙신동엽∙김종삼의 시 연구로 박사까지 마친 소설가. 202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녹>이 당선해 등단했다.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가 이이의 첫 소설집이라서 <녹>을 소설집의 첫번째 순서로 실었다. 이것 말고는 공개한 바이오그래피가 거의 없다.


  ‘녹’이 rust를 말하는 줄 알았지만(오래 전 양귀자씨가 이 녹을 제목으로 하는 <녹>을 써서….) 결혼 이주 여성의 이름이다. ‘녹綠green.’ 화자 ‘나’는 전공을 밝히지 않은 박사학위 소지자이며 몇 개 대학의 강사로 출강하는 워킹맘. 성이 ‘노’씨니까 ‘노 강사’라고 하겠다.

  워킹맘 노 강사가 이혼한 다음에 가장 두려웠던 시기가 방학 시즌이었단다. 방학 기간 동안엔 수입이 없어서 생활비 조달 및 가계 유지가 힘들었다. 사정을 안타깝게 생각한 선배 언니가 다문화가정지원센터의 강좌를 알선해주어 3개월 동안 출강했을 때 수강생이었다.

  이혼 후에 엑스가 당연히 양육비를 꼬박꼬박 보냈다. 물론 사소하지만 사람을 진짜 열 받게 만들면서. 매달 양육비를 2만원에서 5만원 적게 보내는 거다. 전화를 하면 자기 사정이 지금 워낙 좋지 않아 그랬다고, 다음에 한꺼번에 다 보내겠다고 핑계를 댄다. 이걸 이해하지 못하겠다. 술 한 번 안 마시면 될 것을. 담배만 끊어도. 하다못해 치킨 한 두 번만 배달 안 시켜도 충분하잖아. 노 강사가 전화통에다 대고 싫은 소리 하는 걸 녹이 들었다. 그래서 자기가 베이비시터를 하겠다고 졸랐다. 이주 여성의 시터 금액은 우리나라 사람의 반 정도란다. 이렇게 노 강사는 녹을 시터로 고용을 했다.

  시터 녹은 아이 돌보는 일은 만족하지 못할 수준이었지만, 청소나 음식 같은 건 정말 훌륭한 수준이었다. 시터가 그런 일까지 할 필요 없다고 해도 녹은 계속 청소도 하고, 밥도 짓고, 반찬도 만들고 했는데, 다만 노 강사 모르게 열살 먹은 자기 아들을 집에 데리고 오기 시작했다. 이게 불만이던 차, 강사의 어린 아들이 탁자 모서리에 부딪혀 눈 주위를 여섯 바늘 꿰맨 작은 사고가 생긴다. 노 강사는 열이 잔뜩 받아 뭐라 한 바탕 지랄을 했고, 이후 녹의 아들도 출입을 자진해서 금지했는데, 착하디 착한 열살배기 아들은 비 오는 날이면 엄마 비 맞을까봐 우산을 갖고 강사님 아파트 현관까지 마중을 왔다.

  그러다 어느 비 오는 어둔 저녁 시간에, 열살배기 아들이 교통사고가 나 죽었다.

  방학이 끝나고 노 강사가 다시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을 때, 세상 포기하고 싶은 마음인 녹이 스케치북에 항의 글을 써서 들고 일인시위를 시작했다. 이것이 소문이 나서 모교를 제외한 모든 학교에서 다음 학기부터 강사자리마저 떨려나게 된다.

  스케치북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노교수를 고발하는다

  저가 아이을 잃었습니다

  왜냐하면 노교수는 책임입니다”

  이 문구를 본 노 강사는 황당하고 화가 났지만 마음 속으로는 녹의 문구를 교정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직업병이었다고.

  “노교수를 고발하는다” → “노 강사를 고발합니다.”

  “저가 아이를 잃었습니다” → “저는 아이를 잃었습니다.”

  “왜냐하면 노교수는 책임입니다” → “노 강사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또는 “노 강사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흠. 그렇군. 이게 직업병이군.

  그런데 같은 작품 <녹>에서 공현진 박사님은 이런 표현을 쓰신다.

  “감사해요.” 13쪽. 어딘가 좀 어색하지 않나? 요즘 젊은 세대들은 아무 문제없이 흔하게 쓰는 표현이지만 내 세대가 듣기엔 영 이상하다. 대신 “감사합니다.”나 “고맙습니다.” 또는 “고마워요.”는 익숙하다.

  16쪽에는 이런 표현도 나온다.

  “교정 앞에 서 있는 녹의 머리 위로 나뭇가지와 잎 들이 요란하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조사 ‘로’는 (네이버 사전 참조)움직임의 방향, 경로, 결과를 나타내는 말이다. 위 문장에선 나뭇가지와 잎들의 “위치”니까 “녹의 머리 위로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가 아니라 “녹의 머리 위에서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로 써야 맞는 거 같은데?

  시비하는 거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것이지. 직업병 말이 나온 김에.

  단편소설집에서 특정 작품의 내용에 관해 이야기하는 게 좀 그래서 읽으며 흥미로웠던 것만 골라 이야기하다보니 쪼잔하게 이런 거 가지고 한 마디 하게 됐다.


  표제작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에는 채식주의자 남자 주인공 곽주호가 등장한다. 그가 전 애인하고 찢어지게 된 사연이 인상 깊은 것까지는 아니고 뭔가 좀 생각해볼 만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게 채식이야?

  주호는 된장찌개에서 얇게 저민 돼지고기를 골라내고 있었다. 전에 사귀던 여자친구가 주호에게 싸늘한 표정으로 물었다. 주호가 평소처럼 고기를 골라 담은 접시를 여자친구 쪽으로 밀었는데 그녀는 평소와 달리 팔짱을 끼고 접시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질린다, 진짜.

  갑자기 마음이 변할 수는 있다. 그런데 그녀는 왜 그렇게까지 말했을까. 너는 정상이 아니야. 그녀는 식당에 주호를 두고 나가버렸다. 나도 안다고. 주호는 혼자 앉아서 남은 음식을 꾸역꾸역 다 먹었다. (p.55)


  주호의 전 여자친구는 이 씬에서 딱 한 번 출연하고 사라지는 엑스트라다. 이 귀절만 읽어보면 전 여친이 참 나쁜 여자같다. 저 소갈딱지하고는…. 그지? 이게 앞뒤 다 잘라버려서 독자를 현혹시키는 기술이다. 주호 얘가 평소에 얼마나 찌질하게 전 여친을 대했으면 여태 잘 참다가 이제 와서 저 지랄을 하고 찢어지겠느냐고. 저 위 대목만 가지고 전 여친이 심했네, 너무했네, 판단하는 건 위험하지 않아? 마치 <녹>에서 노 강사 하는 얘기만 듣고 전 남편을 욕하게 되는 것처럼? 이 책 정말 읽어보신 분은, 흠, 흠, 웃지 마시라.

  이런 게 다 소설의 힘이다. 그래서 특히 소설을 읽을 때 눈에 힘을 빡, 주고 읽어야 한다.


  하나만 더 얘기해볼까? 여섯 번째 순서로 실린 <권능>.

  주인공은 화자 ‘나’. 등장인물은 교회목사의 아내인 듯한 엄마와 엄마보다 열 살 많은 이모. 이모 딸 솔.

  이모는 어려서 서울로 올라와 식모살이를 하며 동생들을 다 서울로 데려와 뒷바라지했다. 그래서 엄마는 이모를 마치 엄마 비슷하게 대우한다. 여태 말도 높힌다. 엄마가 ‘나’를 낳았을 때 이모는 결혼하고 10년이 훌쩍 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았었다. 목사의 아내 엄마가 나를 낳으니 이모가 선물로 ‘나’ 한테 은목걸이를 사주었다. 혹시 잃어버리면 누구네 집 딸인지 알 수 있게 이름하고 (늘 바쁜 엄마는 전화를 받지 못할 일이 많으니까) 이모 전화번호를 새긴 목걸이.

  ‘나’가 조금 나이가 들어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했을 때 다른 아이 엄마들이 먼저 발견했다. 은목걸이에 작디작게 부적을 새겨 놓은 것을. 거기다 이모 전화번호를 박은 건, ‘나’ 덕에 자기도 아이 하나 회임해보려고. 난리가 났겠지? 목사 집에 웬 샤머니즘?

  어쨌거나 ‘나’가 다섯 살 때 이모가 임신을 하고 이듬해 딸을 낳았으니 그 애가 바로 솔.

  이모는 솔을 낳고 또 무꾸리 집에 가서 사주를 봤더니 명이 짧고, 남자 때문에 그렇고, 물 조심하란다. 그리하여 이 귀한 딸을 지키기 위해 별의 별 통제를 하고 ‘나’를 솔의 경비병 비슷하게 했던 모양이지. 솔은 아이가 착해, 혹은 물러서 엄마가 시키는 대로 그저 어리숙하게 자라 대학에 들어간다. 진짜 바보스러울 정도로 엄마 말에 꼼짝도 못하는 솔. 하지만 2학년이 되자 봄 엠티에 가서 한밤중에 바닷물에 단체로 뛰어들었다가 솔만 빠져 죽고 만다.

  솔이 대학 다닐 때, 살고 있는 빌라 옥상에서 대여섯 살 많은 ‘나’에게 솔이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나’의 생각으로는 하찮기 그지없는 고민만 죽자고 하고 있는 솔이 어처구니없어서 ‘나’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한다.

  “너는 그런 거 말고 다른 걸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수동적이고, 자발적인 의지가 없어 보이는 솔이가 한심했다. 나조차 이모의 간섭이 견디기 힘들고,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애쓰는데 그 모든 간섭에 항의하지 않는 솔이는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게 고민이야?” (p.202)

  문제는, <권능> 속에서 주인공 화자 ‘나’ 역시 독자가 읽기에 솔보다 하나도 나은 거 없이 수동적이고 자발적인 의지가 없어 보인다는 점. <권능>의 ‘나’만 그럴까? 아니, 아니. 우리 소설의 많고 많은 주인공들이 이런 성향을 흔하게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자발적인 의지 없이 수동적이기만 하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는 별로 없이 그저 아프고 우울하다는 주장만 하는 인물들이 상대적으로 많은 거 같아 독자인 나도 슬프다. 슬퍼 죽겠다. 딱 죽지 않을 만큼만 슬퍼 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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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이는 모두 날아오른다
요아힘 마이어호프 지음, 박종대 옮김 / 사계절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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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다. 책 읽고 저자를 위키피디아 검색해봤더니 전부 책에서 읽은 내용이다. 먼저 이야기해둘 것은 자기 살아온 것을 소설로 쓴 작품은 내가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 왜 그런가 하면 이 요하임 마이어호프가 딱 이 경우인데, 집안 대대로 의사, 장군, 기업가 등을 지낸 빵빵한 집안에서 아버지 역시 의사, 의사라도 그냥 의사가 아니라 독일 역사상 최연소 주립병원 원장을 지낸 헤르만 마이어호프 박사/교수로, 가족 모두 함부르크와 덴마크 사이에 있는 독일 북부 슐레스비히홀스타인 주에서 가장 큰 헤스터베르크 어린이청소년정신병원 구내의 원장 관사에 살며 하여간 남들 눈에 모자란 것 없이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살면서 자기가 겪은 지난 삶에는 나름대로 다 회한이 있는 법이라 쓸쓸하게 그려낸다는 점이다. 암만. 자신이 살아온 내력의 쓸쓸함, 애잔함을 내가 무시하는 건 전혀 아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겪은 것이 가장 절실한 법이니까.

  소설 속에서도 주인공이자 화자 ‘나’이며 작가이기도 한 요하임, 애칭 요세 마이어호프의 아빠 헤르만 마이어호프 박사가 병원장으로 취임할 당시 이 어린이청소년정신병원에는 환자 수가 무려 1천5백 명이 넘었는데, 입원 환자 전부 정신병, 즉 조현병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물론 많은 수가 조현병 환자였지만 적지 않은 지독한 수준의 기형, 정신지체 같은 사유로 사실상 버려진 환자들도 또한 있었다고 한다. 즉 요하임 마이어호프보다 더 험한 세월을 사는 최소한 1천5백 편의 장편소설이 병원에 있었다는 얘기. 이 가운데 어느 하나 요하임보다 절절한 내력을 가지고 있지 않겠느냐 하는 걸 생각하면 좀 그렇다는 거다. 입원 환자 가운데 누가 이 작품을 읽었으면 아마도 이렇게 한탄하지 않았을까?

  “나 같으면 앓느니 죽겠다!”

  이런 의미에서 노골적으로 자전적인 작품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의미지 뭐 특별한 건 아니다.


  요하임 마이어호프는 1967년에 중서/남서부에 있는 홈부르크에서 아들 삼형제 가운데 막내로 태어나 1972년부터 아버지따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 헤스터베르크 정신병원의 원장 사택에서 자랐다. 자라도 오래 자랐다. 다 커서 훗날 연극배우가 될 때까지. 형제간 나이 차이는 각 3년. 당연히 다양한 놀이에 두 형들이 한 편을 먹고 어린 요하임은 다분히 따돌렸겠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으면 형들이 위로해주고, 달래주고, 뭐 그랬겠지.

  이대로 계속 쓰다가는 작품의 스토리를 다 실토할 거 같다. 시기를 훌쩍 넘어가자.

  고등학생 시절 미국 와이오밍 주에 교환학생으로 1년 동안 가 있었다. 이 시기에 세 형제 가운데 제일 공부 잘하는 작은 형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다. 다시 귀국해 학교를 마친 다음에 요하임은 연극계에 투신해 지금은 독일에서 가장 바쁜 배우, 연출가, 영화 감독 등으로 활동하고 있단다. 

  연극에서 가장 눈부신 활약은 2011년에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6부작 연극으로 만든 <죽은 이는 모두 날아오른다>를 공연한 일로, 여기저기서 다양한 상도 받았다. 이후 6부작 가운데 (본문 이전의 “일러두기”에 따르면) 2부 <언제쯤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때로 돌아갈 수 있을까>를 우리말로 번역해 사계절에서 출간했다. 위키피디아에 6부까지 모두 소개한 걸 보면 이 책 말고도 다섯 권이 더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이것 한 권이면 충분할 듯하다.

  안타깝게 2017년에 뇌졸중이 발병해 그의 경력사항을 봐도 2017년 이후의 활동은 상 받은 거 하나 말고는 없다. 그때 겨우 쉰 살이었을 텐데 안타깝지만 어떻게 하나. 사는 게 다 그런 걸.


  나는 이 책이 자전적 이야기인줄 모르고 읽었다. 알라딘이 내게 말하기를 AI가 나더러 이 책 읽으면 좋다고 권하다 해서 딱 희망도서 신청했다가 거절당해 다른 동네 도서관에 상호대차 서비스 신청해서 읽었다. 제목 “죽은 이는 모두 날아오른다”라니까 삶과 죽음에 관한 좀 심각한 이야기인줄 알았다. 뭐 사실 삶과 죽음에 관한 내용이라는 건 맞는 말이다. 그래도 첫 문장을 이렇게 써 놓으면 자전적 삶과 죽음, 둘째 형과 키우던 개와 아버지의 죽음은 아닌줄 안 게 당연할 수도 있지 않나?

  “내가 처음으로 마주한 죽은 이는 연금 수급자였다.”

  사실 이 문장을 과하게 강렬하게 읽는 바람에 다음 문장을 놓친 내 잘못이기는 하다.

  “사랑하는 가족이 사고와 질병, 노환으로 떠나기 오래전의 일이었다. 형과 너무 젊은 아버지, 조부모, 심지어 어린 시절 키우던 개까지 결국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임을 받아들이기 오래전…”

  요하임 마이어호프가 말하고 싶어하는 또는 공연하고 싶은 죽음은 가족의 죽음인데, 초장에 저 연금수급자의 죽음을 과하게 진지하게 얘기한다. 일부러 그랬을까? 나 같은 독자 헛갈리라고? 게다가 아직까지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일곱 살 먹은 주인공 ‘나’가 정신병원에 살고 있단다. ‘나’가 작가 자신이며, 진짜로 정신병원 구내에 있는 원장 관사에서 살고 있으며, 거의 매일 밤마다 커다란 정신병원에서 환자들이 크고 높은 목소리로 울부짖는 비명을 들으면서 잠에 든다는 걸 전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어린 화자 ‘나’가 정신병원에 살고 있다는 얘기만 들었으니 이거 뭔가 중요한 사연이 있는 거 아니겠느냐는 것이지.

  아니, 이 색다른 구성은 뭐야. 이거 흥미진진한데…

  ‘나’는 엄마가 딱 정해준 큰 길로 등교를 하는 대신 일곱살 생일 일주일 후에 정신병원 시설 담장 밖의 주말농장 쪽에 혹시 다른 길이 있을까 싶어 그쪽으로 들어섰다가 길을 잃고 만다. 조금 헤맨 다음에 드디어 길을 찾았지만 주말농장 철문을 넘어야 한다. 그래서 넘었다. 넘고 보니 늙은 남자를 발견했다. 말쑥하게 차려 입은 모습이다. 모두 베이지색 옷. 퍽 고상해 보인다. 발과 종아리는 풀밭 위에 놓였고 나머지는 꽃 속에 파묻혔다. 괜히 주말농장 속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지각이다. 생일선물로 받은 손목시계를 보니 그렇다. (또 잠깐 헛갈림. 정신병원에 사는 아이가 험한 곳에서 생일선물로 손목시계를 받았다는 말이지?) ‘나’는 학교 정문을 통과해 교실까지 달려가 선생님과 아이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내가 죽은 사람을 발견했다!”

  그래서 담임선생, 교장선생까지 한 바탕 난리가 났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어떻게 알아? 하고 물으니까 ‘나’가 대답하기를 “우리 아빠가 의사예요.”

  아직도 이게 실명 자전 소설이라는 걸 모르는 독자는 거 참, 복잡하게 됐다. 다시 생각해봐야겠군.


  이후부터 아버지 헤르만 마이어호프 박사/교수, 어머니 마리아, 큰형 헤르만, 작은형 마르틴, 키우는 대형견 한 마리의 지지고 볶는, 지겹게 지지고 볶는 게 아니라 재미있고 귀엽게 지지고 볶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예를 들어 식탁에서 가족들이 모여 퀴즈 시합을 하거나, TV를 보면서 어린 요하임(요세)는 9시에 올라가 자라고 해서 주둥이가 댓발 나온다거나, 형들이 병원의 입원환자들한테 바보, 미치광이, 병신, 천치, 백치, 멍청이, 머저리, 사이코, 도라이 등등 마음대로 별명을 붙여 부른다거나, 아빠의 마흔번째 생일 선물로 감자요리 마흔개를 하려다가 엄마의 과잉친절에 기분이 상해 다 없애버렸다거나 뭐 이렇게 그냥 좀 있는 집 사는 이야기. 501호나 502호나 비슷한 이야기를 주절주절.

  뭐 색다른 것이 있다면 아무래도 장소가 정신병원이니까 환자들과의 교류, 신병동에 주지사가 직접 방문해서 생긴 요절복통, 정말로 열람실에서 키득키득 비져나오는 웃음을 참기 힘든 슬랩스틱 코미디 같은 것이 본문 483쪽 가운데 300쪽 가까이 차지한다. 이중에서 유별나게 특징적인 것은 주인공 요세, 요하임 마이어호프가 전반성불안장애가 있다는 거. 즉 한 번 열을 독하게 받으면 거의 경련 수준으로 난리를 치는 증세가 있다. 발악 수준의 비명과 난장판, 그리고 경련, 실신까지. 이 장면이 몇 번 나온다. 작가 요하임 마이어호프가 쉰 살의 나이에 뇌졸중이 발병한 것도 이런 사유 때문이 아닐까, 라고 위키피디아를 보면서 조금 생각해봤다.

  그러다가 제일 앞 장chapter에 나오는 대로 “형과 너무 젊은 아버지, 조부모, 심지어 어린 시절 키우던 개” 가운데 조부모 빼고 등장인물의 죽음을 차례로 경험하면서 일곱 살짜리 요세는 스물다섯 살 연극배우 요하임 마이어호프가 된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결말을 맺기가 좀 그러니까 죽음이라는 것이 어떻고 저떻고 하는 것이지, 한 소년의 성장기라고 하면 딱이다.

  청소년 문학작품 출간에 전력을 다하는 사계절이 찍었다는 것 때문에 혹시, 했다가 역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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