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바나의 우리 사람
그레이엄 그린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4월
평점 :
.
그레이엄 그린, 하면 암만해도 책은 <권력과 영광>이요, 영화는 <제3의 사나이>렸다. 독후감을 쓰는 자리이니 영화는 다음으로 하고, 책으로 말하자면 <권력과 영광>에 필적할 그린의 작품을 기대하면서 읽지만 읽을 때마다 혹시 하다가 역시, 하고 말아 조금은 허탈하다. 그럼에도 그린의 책이 눈에 보이면 일단 읽을 책, 읽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건 그레이엄 그린이 명실상부한 대중소설의 으뜸이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의 책, 영상과 비교하면 시시하기 그지없지만 그린 당대의 기준으로는 대단한 스릴과 서스펜스, 추리, 폭력 그리고 스파이 극이었다고. 근데 누가 슬그머니 다가와 옆구리 쿡쿡 찌르면서 <권력과 영광> 말고 어떤 책이 제일 재미있더냐고 나지막이 물으면 현대문학에서 나온 단편집 《그레이엄 그린》을, 귓속말로 속삭일 거 같다. 추리와 스파이극의 대가니까 나 역시 마치 비밀인 것처럼 귓속말로. 뭐라? 단편집? 지금 장편 독후감 초장에 다른 책을 들먹이니 이거 뭐 시작도 하기 전에 초 치고 있는 거냐고? 아이, 그럴 리가. 어떻게 하다 보니 그냥 경상남도 사천시, 삼천포로 빠졌을 뿐이다.
아바나Havana, 쿠바의 수도. 시대는 피델과 라울 카스트로 형제, 그리고 체 게바라가 주도하는 쿠바 혁명이 들불처럼 번져 웬만한 지방 도시를 혁명군이 장악했던 1950년대 중반 무렵으로 보인다. 쿠바의 현 대통령 정권이 위태롭게 삐걱거리며 종말을 향하고 있어서, 전통적인 쿠바의 수입원이던 관광객의 수도 현저하게 줄어들고, 아바나를 중심으로 제법 밀도 있게 모여 살던 유럽인과 미국인들도 슬슬 각자의 본국으로 빠져나가던 시기에, ‘워몰드’라고 하는 찌질한 40대 중년 남자가 있었으니 며칠 후에 열일곱 번째 생일을 맞는 어여쁜 딸 밀리의 아버지요, 미국 남자와 바람이 나 미국으로 야반도주한 아내를 잊지 못해 만날 우거지 죽상을 하고 다니는 전기청소기 아바나 대리점 주인이었다. 사실상 이혼 상태임에도 완고한 가톨릭을 ‘하느님 말씀처럼’ 믿는 어여쁜 딸 때문에 서류상 혼인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서 독자가 얼핏 생각하기에 혹시 나중에 다시 합치는 거 아냐? 오해하기 십상이지만 안심하시라 그럴 일 없다.
이제 워몰드 선생의 딱 하나 남은 소원이 있다. 근데 소원을 이룰 가망이 전혀 없어서 이제 소원은 꿈의 단계로 진입해야 했으니, 그 꿈이 뭔가 하면, 딸 밀리를 스위스에 있는 국제 학교에서 공부시키는 거였다. 스위스 국제학교는커녕 혁명으로 어수선한 쿠바를 떠나 조국인 영국에서 안정적으로 정착하는 것도 어려워 여태 아바나에서 뭉기적거리고 있을 뿐임에야.
워몰드한테 딱 한 명의 친구가 있다. 닥터 하셀바허. 이름만 봐도 독일 출신이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닥터 하셀바허는 1차 세계대전 당시에 창기병으로 참전해 빌헬름 2세의 격려도 들었던 인물로, 전쟁이 끝난 후에 새롭게 의학을 공부해 이름 앞에 닥터를 붙였다. 독일 가운데서도 베를린이 고향이라 확실한 독일인이고, 베를린은 베를린이되 그게 동쪽인지 서쪽인지 (스파이가 아닌 게 틀림없는)하셀바허와 그의 친구 워몰드를 제외한 1950년대 중반의 뜨거운 냉전의 시대에 미국의 문 앞에 자리잡은 쿠바 아바나에 집결한 모든 국가의 스파이들이 촉각을 세우고 있던 거였다. 온갖 추측과 유언비어, 거짓이 난무하던 냉전시대. 그땐 다 그랬(을 거)다.
우울하고 찌질한 워몰드 선생 앞에 두 남자가 나타난다.
한 명은 쿠바 경찰권력의 거의 정점에 선 캡틴 세구라. 붉은 독수리라는 별호를 즐기는 그는 자타 공인 고문과 신체절단의 전문가이며 사람가죽으로 만든 담배 케이스를 들고 다니는 말한새뚝, 말 한 마디에 나는 새도 뚝 떨어뜨리는 공포의 존재. 워몰드보다 약간 나이를 덜 먹었다지만 1950년대에 30대 후반, 40 초반이면 중년 취급을 받았는데, 겁도 없이, 망쪼 든 나라의 경찰권력이면 겁도 없는 게 자랑이긴 하지만 하여튼 겁도 없이 워몰드의 열일곱 살 먹은 어여쁜 밀리와 결혼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가톨릭의 아들답게 결혼을 하고 싶어도 결혼은 아버지의 동의를 먼저 얻고, 이후에 상대에게 프로포즈 해 승낙을 받는 ‘절차’를 고집한다. 따라서 아주 자주 밀리를 학교까지 태워주고, 방과 후에 집까지 데려다 주건만 여태 손목은커녕 살갗 한 번 마주친 적 없는 순정파이기도 하다. 세구라의 인간 구분 방법은 고문 가능 계급과 고문 불가능 계급, 딱 두 가지. 유럽에서 온 백인과 미국인은 고문 불가능. 나머지는 대부분 가능.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 역시 고문 가능 계급. 으시시하지? 걱정하지 마실 사. 대부분 이런 사람들이 진짜 악당일 확률은 거의 없으니.
다른 한 명은 거의 백인 전용 술집 수준인 카페 슬리피 조에 나타난 영국인 호손. 그는 워몰드가 영국인이기는 한데 남프랑스 니스에서 출생했다는 것도 알고 있어서, 워몰드는 호손이 청소기 본부에서 나온 검사관으로 짐작했었다. 호손이 워몰드를 아무도 없는 화장실로 데려가, 수도꼭지에서 물을 콸콸 틀어놓고 어떤 도청장치도 대화를 엿들을 수 없게 만든 후 말을 하기를, 사실 자기는 비밀정보기관 소속이란다. 그리고 워몰드 주변에 숱하게 많이 스파이들이 깔려 있으며 지금 하셀바허를 주목하고 있는 중이라고. 워몰드에게 자신이 지금 세비야빌트모어 호텔 501호에 머물고 있으니 밤 열한 시에 꼭 들러 달라고 부탁하고 사라진다. 밤이 되어 정말 호텔로 찾아가는데 이날 따라 유난히 워몰드를 잡고 놓아주지 않으며 한 잔만 더, 한 잔만 더, 하고 기어이 세비야빌트모어 호텔까지 따라붙는 닥터 하셀바허. 그럼에도 우리의 워몰드는 하셀바허를 눈꼽만큼도 의심하지 않는다. 호손을 만나러 가는 엘리베이터까지 기어이 동승하는 하셀바허. 차마 5층을 말하지 못해 엘리베이터 보이에게 6층 간다고 하고, 6층 문이 열리자마자 그대로 내빼 501호, 호손을 만나니, 하는 말씀이, 이제 대 영제국의 비밀첩보기관 아바나 사무실을 꾸리라는 것. 앞으로 금고, 무전기, 훈련 받은 직원 등 모든 필요사항을 갖출 예정이란다. 당연히 머뭇거리는 워몰드. 그런데 런던에서 한 달에 세후 150달러를 급여로 주고, 경비로 따로 세후 150달러, 여기에 필요한 활동비 추가 청구, 놀라운 조건에 어쩌면 밀리의 스위스 국제학교가 꿈이 아닐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수락하고 만다. 스파이 훈련은커녕 도망간 아내와 찌질한 성격과 알코올 의존증에 가까운 술 등등 거의 루저 수준에 도달한 후줄근한 중년 남자가 말이지. 어떠셔, 딱 떠오르는 인물 하나 있지? 조지프 콘래드의 <비밀요원> 주인공이자 후줄근한 문방구 사장 벌록 씨. 그나마 벌록 씨는 배 나온 중년이긴 하지만 일 벌어지면 후다닥 몸을 던지기라도 하지.
이제 워몰드는 난리가 난 거다. 처음엔 스파이고 뭐고 그냥 살던 대로 살았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니까 정말로 런던의 강철과 콘크리트로 만든 건물 지하에서 150달러짜리 수표를 한 장 보내는 거다. 국장과 주름 하나 없이 말끔하게 다림질한 회색 프란넬 정장 차림의 호손이, 워몰드가 정치, 경제 정보를 얻기에 최고의 장소인 컨트리클럽에 가입하기 위해 추가비용을 신청했다는 걸 알고, 워몰드야말로 천부적인, 뼈 속까지 스파이 체질이라고 치하했다는 것도 몰랐을 거다. 정말 워몰드가 정보 수집을 위해 저명한 백인과 쿠바 고위급만 회원으로 있는 컨트리클럽에 가입했을까? 여기에 아직 어려서 어리광이 심하고 눈치도 없고, 마음 내키는 대로 해야 성질이 풀리는 밀리, 그리고 밀리의 막강한 후원자인 캡틴 세구라가 개입한 사실은 런던의 누구도 모른다. 밀리가 아빠와는 상의도 하지 않은 채 덜컥 말을 한 마리 샀다. 말? 그것도 폼 나는 경주마. 쿠바라서 유럽에 비하면 헐값이긴 하지만 그래도 워몰드 입장에선 눈이 뒤집힐 정도. 거기에 세구라가 충동질해서 최고급 안장과 채찍 등 부속품 일습을 갖추고, 어느 부자의 마구간도 임대해버린 거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정작 말을 탈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컨트리클럽 밖에 없는 걸? 이때 호손이 기타 경비 어쩌고 저쩌고 해서 울고 싶은데 따귀 한 대 맞은 것처럼 얼른 컨트리클럽 가입 비용을 장난 혹은 절망 비슷한 심정으로 런던에 청구해 보았던 것.
근데 덜커덕, 클럽 가입 비용도 수표로 보내왔으니 이제 소심한 소시민 워몰드의 가슴이 오그라들기 시작했다. 돈을 받았으니 뭔가 스파이활동 보고를 해야 할 것. 마침 진공청소기 판매를 위한 연중 정기 행사로 쿠바의 지방을 순회하는 차에, 런던에다 산악지역에 반군들이 요새를 지었다고 거짓말을 했고, 내친 김에 요새를 스케치해서 보냈는데, 이 스케치가, 배운 게 청소기 판매밖에 없어서, 전기 청소기의 부품을 스케치한 거였다. 이 보고서를 철저하게 믿는 런던의 비밀정보기관의 국장과 고위급들. 그러나 첩보력이 영국만 막강한 것이 아니라, 강철과 콘크리트로 만든 단단한 건물의 지하실에도 이중첩자가 있는 게 틀림없어, 얼마 되지 않아 미국, 영국의 다른 첩보기관, 서구는 물론이고 눈치로 보니 소련 등 공산진영에서도 쿠바 산악지대에 요새가 있고, 그것을 제공한 스파이가 워몰드라는 얘기가 퍼져, 워몰드는 하루 아침에 말 그대로 세계적 스파이 스타로 등극해버린 것.
일이 너무 커졌지? 그린의 작품 속에는 대개 조금씩 유머 코드가 있는데, 이 정도면 유머를 넘어 진지하게 보이려 노력하는 코미디 수준이다. 그러나 그린의 스파이물이 하염없이 코미디로 흐를 수는 없는 법이란 걸, 그린 좀 읽은 독자들은 안다. <아바나의 우리 사람> 역시 같은 의미에서 조금씩 폭력과 살인과 복수로 번져갈 것임을.
탁월한 대중 작가 그레이엄 그린. 딱 그것만 기대하고 읽으시기 바람.
아참, 이것 인용한다 해놓고 그냥 지나쳤구나. 본인 자신이 스파이 경력이 있는 그린은 당연히 보수주의자 아닌가 싶다. 그런데 이런 생각까지 하다니 말이지, 아이고 깜짝이야. 워몰드의 직원으로 들어온 비어트리스가 후에 런던으로 소환되어 변론을 해야 하는 입장에 몰린다. 이때 비어트리스가 최고의 비밀정보기관과 육해공군 지휘관 앞에서 말한다.
“조국이라니, 그게 무슨 뜻인가요? 2백 년 전에 누군가 발명한 깃발을 말하는 건가요? 아니면 이혼에 대해 토론하던 주교단과, 의회에서 서로 맞은편에 대고 고함치던 하원 의원들을 말하는 건가요? 아니면 민노총과 영국국유철도와 협동조합을 말하는 건가요? (중략) 세상엔 누군가의 조국보다 더 중요한 뭔가가 있어요. 안 그래요? (중략) 당신들이 평화와 정의와 자유를 원한다는 말을 우리는 더는 믿지 않아요. 어떤 자유요? 당신은 그냥 출세를 원하는 거잖아요.”
우연인지는 몰라도 위 인용은 <율리시즈>에서 내가 기억하는 유일한 문장과 매우 흡사하다.
“나의 조국은 나를 위해 죽어달라.”
그런데 나는 위대한 제임스 조이스의 말을 조금 비틀어 이렇게 말하곤 하지.
“나의 조국은 한 번이나마 나를 위해 죽는 척이라도 해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