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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속의 새
사만타 슈웨블린 지음, 엄지영 옮김 / 창비 / 2023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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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편의 단편소설을 실은 작품집.
“입 속”, 하면 뭐가 생각나? 두 말 할 것 없이 그냥 “입 속의 검은 잎”. 기형도의 시 안에서 ‘입 속’에는 정말로 ‘검은 잎’이 든 건 아니잖아?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은 스무 살 청년 시인이 용기가 없어서인지, 차마 말로 하기에는 너무 참담해서인지, 마음은 있지만 내뱉기에는 제대로 아는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해선지, 하여간 입에서 나오지 못한 말, 주장, 이야기였지 정말로 잎맥과 그물맥을 채운 조직에서 햇빛과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광합성 작용을 하는 식물의 잎을 뜻하는 건 아니었는데, 슈웨블린의 “입속의 새”는 정말로 깃털과 부리와, 발톱과, 얇은 맨다리를 가지고 있는 작은 새다. 부리와 깃털을 단 새를 입에 물고 있다면 물고 있는 주체는 그럼 동물? 아니다. 사람이다.
왜? 날 것을 새 잡아먹는 사람 처음 봐? 흠. 한 고조, 유방의 작은 동서 번쾌가 유명한 홍문의 잔치에 등장해 산 닭을 자기 방패에 올려놓고 칼로 쑥덕쑥덕 자른 다음 날 것으로 삼켜 항우 측근 장수들의 암살 의지를 꺾어버렸다는 말도 있지만, 정말로 부리와 털과 똥 묻은 발톱을 달고 있는 살아 있는 닭을 털도 뽑지 않고 육회로 즐겨 자신 양반은 한 고조의 저 먼 후손, 증산정왕의 수백명에 달하는 유전자 보유자 가운데 한 명인 유비의 의동생 장비였다. 그들과 사만타 슈웨블린이 주인공으로 만든 소년의 차이는, 번쾌가 사람들 기를 죽이느라 용맹 또는 야만을 과시할 목적이었다면, <입속의 새>에 나오는 주인공 소년은 새 말고 아무것도 먹지 않는 버릇이 들었고, 자기도 새를 먹는 것이 가히 엽기적이고 기상천외하게 놀랄만한 야만적인 일이라는 걸 알아서 꼭 사람을 등지거나 자기 방에 들어가 혼자서 작은 새를 입에 넣고 오도독, 오도독 뼈째 씹어먹는다. 다 먹은 후에 만족한 얼굴로 뒤를 돌면 입 주위와 손가락에 새 피가 점점이 묻어 있기는 하지만.
책에 실린 작품 모두 <입속의 새>만큼 엽기적이지는 않다. 어떻게 읽으면 페미니즘 소설 같은 것도 있지만 굳이 페미니즘 작품으로 읽지 않아도 된다. 그저 문자가 드러내는 형태만 따라 읽으면 21세기의 잔혹 우화, 마치 그림 형제가 재림을 했으면 이런 작품을 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멈출 수 없다. 몇 번이나 그림 형제 생각을 했는 지 모른다.
제일 앞에 배열한 작품 <절망에 빠진 여자들>부터 그러하다.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펠리시다드. 결혼식을 하러 가는 중인지, 식이 끝나 이제 허니문의 여정이 시작했는지는 모르겠다. 웨딩드레스 자수에 밥풀 하나가 말라붙은 걸로 보아 결혼식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아르헨티나의 스텝지역. 끝도 없는 벌판. 남편인 것으로 짐작이 가는 그는 펠리시다드를 차에 태우고 스텝을 통과하는 중이었다. 사방 팔백리에 건물이라고는 쓰러져가는 주유소 겸 휴게소 하나. 오래 운전해 지친 그는 휴게소 앞에 차를 세우고, 기름을 채우고 그동안 펠리시다드는 화장실에 가서 오줌을 눈다. 눴다. 하지만 너무 오래 화장실에서 지체했다. 복잡한 드레스를 걷어 올리고 속옷을 내리고 오줌을 누고, 화장지 두 칸을 뜯어 뒤처리를 하고, 속옷을 올리고, 드레스를 내리고, 변기에서 일어나 세면대로 가서 가볍게 세수를 하고, 틀림없이 상당히 지워졌을 화장을 꼼꼼하게 고쳤을 것이다. 눈썹, 색조, 가벼운 파우더, 그리고 립스틱까지. 입술을 몇 번 뻑뻑 거린 다음 화장실에 나오니 그가 없다. 차도 없다. 이거 뭐야? 버림받은 거야? 그가 사라진 도로만 망연하게 바라본다.
“그들은 돌아오지 않아.”
어둠 속에 늙은 네네가 말한다. 그들? 잠시 후 밤의 적막이 내리자 길 건너에서 여자들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네네가 말한다. 하도 여러 번 하는 얘기라 최대한 간단하게.
“남자들은 기다리다 지쳐서 당신을 떠나는 거라고. 아무래도 기다림이 남자들을 지치게 만드는 모양이야. 그러면 여자들은 울면서 남자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정말로 도로 저편에서 여자들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들은 밤마다 한 순간도 쉬지 않고 계속 울고, 울고 또 운다고, 네네가 말한다. 이제 펠리시다드도 저 여자들 가운데 한 명이 되야 하는 거다. 둘이 침울한 기분으로 앉아 있는 동안 다시 차 한 대가 도착한다. 여자가 내려 화장실로 간다. 가솔린을 채운 남자. 잠시 기다리다 화장실을 몇 번 바라보더니 차에 오르고, 시동을 걸고, 그냥 가버린다. 이렇게 남은 여자들이 무척 많다. 이들은 서로의 사정을 이해하기는 해도 보살펴주지는 않는다. 시간이 감에 따라 오히려 더욱 서로를 미워하고 경원하는 거 같다. 욕설을 입에 달고 다니기도 한다.
조금 후, 다시 차가 도착했다. 이번에도 여자와 남자. 그러나 남자의 용무가 급한지 운전석에서 내리자마자 바지 자크에 손을 올리고 화장실을 향해 급하게 간다. 이때 네네가 서둘러 차를 타라고 말한다. 펠리시다드와 네네와 다른 여자들 몇 명도 차에 올라, 남자가 아직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은 걸 확인하고 아무 방향으로나 도로를 따라 급하게 출발한다. 그렇게 이 광활하게 갇힌 스텝 지역에서 벗어난다. 이때 펠리시다드의 눈에 차량 여러 대가 급하게 이쪽 방향으로 오고 있는 것이 들어온다. 남은 여자들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곳에 혼자 남은 남자를 구하기 위해서라고 네네가 말한다.
페미니즘 소설로 읽히기도 하지만 현대의 엽기성을 그림 형제처럼 우화적으로 이야기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
마지막 작품은 분량이 제일 긴 <베나비데스의 무거운 여행가방>이다. 이것은 페미니즘 소설로 볼 수도 있지만 역시 현대인의 엽기를 그린 그림 식 우화로 읽어야 제맛이다.
베나비데스 씨한테는 바퀴 네 개가 달리고, 무릎 높이에 손잡이가 우아하게 솟아 있는, 겉을 갈색 가죽으로 덧댄 튼튼한 여행 가방이 하나 있다. 여행가방? 고유정의 여행가방에 들어간 건? 작은 토막으로 잘린 전남편.
베나비데스 씨는 꼭 그럴 목적은 아니었지만 하여간 아내를 칼로 찔렀다. 그는 칼로 찔러 죽인 것이 정당하다고 믿는 바이지만, 살인의 동기를 이해할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란 점도 충분히 잘 알고 있다. 그리하여 그가 다음으로 수행한 일련의 일들은 아래와 같다.
1. 시신을 쓰레기 봉투에 싸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막는다.
2. 침대 옆 여행가방을 열어놓고 결혼 29년 만에 죽은 아내를 바닥 쪽으로 밀어 넣는다. 가방 안에 완전히 들어갈 때까지 삐져나온 살을 마구 쑤셔 넣는다.
3.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한다기보다 깔끔한 뒷정리를 위해 피 묻은 침대 시트를 걷어 세탁기에 집어넣는다.
일을 다 마치고 다시 두어 시간을 기다려 어둠이 내린 거리로 나선 베나비데스 씨는 무거운 여행가방을 끌고 예술 애호가이자 자신의 의사인 코랄레스 박사의 집으로 향한다. 박사는 파티 중이다. 약속을 하지 않은 베나비데스가 쉽게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건 당연하다. 그래도 끈질기게 호출벨을 눌러 파티장에 진입하는 데 성공하고, 면회를 신청해 딱 5분간 허락을 받는다. 그래서 아내의 시신이 들어 있는 여행가방을 질질 끌고 2층에 있는 박사의 서재로 끌고 가 사실을 고백하지만 박사는 믿지 않는 눈치다. 그냥 약 두 알을 주고 먹으라 하기만. 베나비데스는 약을 먹고 세상 모르게 골아 떨어진다. 수면제였지 뭐. 초청하지 않은 객을 우아한 예술가들 사이에서 교양있게 내다 버리는 방법.
다음날 아침에 박사를 찾은 베나비데스. 그는 묻는다. 가방이 어디 있느냐고. 차고로 치웠단다. 사실 그 안에 정말로 아내의 시신이 있다는 베나비데스. 그와 박사가 차고로 가서, 베나비데스는 기어이 여행가방을 열어 아내의 시신을 바닥에 부려 놓아야 하는 순간, 경직이 일어난 시신과 이미 부패를 시작한 시신에서 풍기는 악취. 박사는 경악한다.
세상에나! 이런 놀라운 작품이 있나! 이렇게 완벽한 설치 미술을 어디서 또 볼 수 있을꼬? 그가 베나비데스에게 말한다.
“베나비데스… 이건 좀 심하네요. 그런데 정말… 정말… 훌륭하군요. 당신은 천재예요. 지금껏 너무 과소평가한 것 같군요. 생각 좀 해봅시다. 간단하지 않은 문제예요.”
코랄레스 박사가 전화한다. 미술관의 수석 큐레이터 도노리오 씨. 득달같이 도착한 도노리오는 가방에서 꺼낸 베나비데스 씨의 죽어 부패하기 시작한 아내와, 이미 죽었기 때문에 조금밖에 새나지 않은 검붉은 피, 거기다가 특히 시취, 냄새에 뻑 가버려 세상에 다시 볼 수 없는 예술작품이라고 선언한다. 도노리오는 코랄레스에게 당장 차고에 완벽한 냉장시설을 하라고 요구하고, 이 작품이 설치된 이곳, 차고도 중요한 예술적 가치가 있으니 작품을 미술관에 옮기지 말고 이곳에서 대중에게 공개하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 졸지에 천재 예술가로 등극한 베나비데스 씨.
이제 베나비데스는 만장한 신사숙녀 앞에서 연설을 해야 한다. 그래서 이렇게 짧은 연설을 했다.
“제가 그녀를 죽였습니다.”
열광하는 군중. 이렇게 베나비데스의 죽은 아내는 전설적인 작품 <폭력>으로 이름 짓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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